검색 옵션
닫기
범위
전체
제목
본문
기자명
연재명
이슈명
태그
기간
전체
최근 1일
최근 1주
최근 1개월
최근 1년
직접입력
~
정렬
정확도순
최신순
오래된순

경향신문(총 488 건 검색)

[포토뉴스] 백제 사비 왕궁 건물터·도로 유구 발견
[포토뉴스] 백제 사비 왕궁 건물터·도로 유구 발견
2024. 12. 11 20:35문화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가 11일 백제 사비(부여) 왕궁 관련 건물터와 도로로 추정되는 유구를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사진은 충남 부여 관북리 유적 발굴 현장.
백제의 향, 신라 향로, 고려 향완…유물로 만나는 1500년 향(香)문화사
백제의 향, 신라 향로, 고려 향완…유물로 만나는 1500년 향(香)문화사
2024. 12. 11 11:14문화
... 관련된 삼국시대 유물들은 많이 남아 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에서 지난 2009년 출토된 백제시대의 ‘청동합’(7세기, 국보, 왼쪽)과 청동합 속에 담겨 있던 향으로 추정되는 녹색의 유기물질....
호림박물관특별전종묘
올가을 백제의 밤 밝힌다…백제문화단지서 야간 문화공연 열린다
올가을 백제의 밤 밝힌다…백제문화단지서 야간 문화공연 열린다
2024. 10. 11 10:55사회
... 백제문화단지는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야간 관광 명소다. 12일 열리는 첫 가을 야간 공연은 백제문화단지 사비궁 천정전 앞에서 진행된다. 여행지 숙소와 콘서트를 결합 행사로 국내 여행업체인...
백제야간공연규현로이킴
백제 미륵사지·왕궁리 유적 한눈에…‘익산 세계유산센터’ 개관
백제 미륵사지·왕궁리 유적 한눈에…‘익산 세계유산센터’ 개관
2024. 09. 30 11:45문화
... 유적’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백제역사유적지구’의 하나다. 국가유산청과 익산시는 “백제 고도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 도시인 익산의 방문객들에게 백제왕도 핵심유적의 역사와 문화 정보를...
익산세계유산센터한눈애미륵사지왕궁리유적세계유산익산시

스포츠경향(총 30 건 검색)

케이팝모터스, 여산 전기차 전시장 예정지에 백제마을 ‘조성’
케이팝모터스, 여산 전기차 전시장 예정지에 백제마을 ‘조성’
2024. 05. 17 18:46 생활
케이팝모터스가 지난 16일 시그니엘 서울호텔에서 백제가 일본문화에 영향을 준 부분을 구체적으로 조명했다고 밝혔다. 한ㆍ일관계 문화교류 뿌리를 찾아 내년 오사카 엑스포를 맞아 일본에 제1전시장 진출을 모색하던 중 백제 옛 수도였던 익산시 제1전시장인 여산 전기차 전시장 예정지로 약 1만5600평 규모를 매입했다. 일본 교토에 위치한 백제마을의 건축양식을 모방해 여산 전시장 부지에 이를 건축한 뒤 전기차 판매와 동시에 백제와 일본의 문화교류 유산을 통해 문화적 연결고리를 견인하게 하겠다는 계획이다. 케이팝모터스 황요섭 회장은 “이를 위해 자신의 고향인 익산시 여산전시판매장에 백제문화제의 전문가인 전 백제문화재재단 김성철 총감독을 영입해 전기차 전시판매장 설치와 동시에 전라북도특별자치도에 최대 규모의 백제마을을 조성,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독특한 문화체험 기회를 제공하겠다”고 말했다. 특히 백제마을은 연중 다양한 문화축제의 장으로도 계속 활용될 것이며, 케이팝모터스는 익산시와 전북도와 연계해 백제시대를 주제로 한 다양한 축제 및 행사를 계획하고 있다. 또한 전통공연, 음식축제, 공예워크숍 등을 운영할 것이라고 회사 측은 전했다.
빌리 ‘2023 대백제전’ 홍보대사
빌리 ‘2023 대백제전’ 홍보대사
2023. 06. 01 15:13 연예
빌리. 미스틱스토리 ‘4세대 대세 걸그룹’으로 꼽히는 빌리(Billlie)가 ‘2023 대백제전’ 홍보대사로 위촉됐다. 1일 오후 충남도청에서 ‘2023 대백제전’ 홍보대사 위촉식이 진행되는 가운데, 빌리(시윤, 션, 츠키, 문수아, 하람, 수현, 하루나)가 임명장을 받는다. 빌리는 ‘2023 대백제전’의 글로벌 인지도 제고를 위한 다양한 콘텐츠를 촬영하며 백제 문화를 전 세계에 널리 알리는 데 앞장설 예정이다. 빌리는 “‘2023 대백제전’ 홍보대사로 임명되어 영광이다. ‘2023 대백제전’이 많은 시민 여러분이 즐겁게 참여할 수 있고, 전 세계적인 축제로 거듭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라고 소감을 전했다. ‘2023 대백제전’은 오는 9월 23일부터 10월 9일까지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열리는 가운데, 글로벌 축제로 발돋음하고자 수상 멀티 미디어쇼, 멀티 미디어 아트 전시관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 중이며, 빌리는 홍보대사로서 ‘2023 대백제전’에 참여해 축하 무대를 선보일 예정이다. 한편, 지난 4월 미니 4집 ‘the Billage of perception: chapter three’(더 빌리지 오브 퍼셉션: 챕터 쓰리)를 발매한 빌리는 탄탄한 기획성을 바탕으로 K팝 범주를 확장하며 ‘글로벌 대세’의 입지를 굳혔다. 이들의 신보는 데뷔 앨범 대비 8배 이상의 초동 판매량을 기록했고, 타이틀곡 ‘EUNOIA’(유노이아)로 데뷔 후 처음으로 음악방송 1위 트로피를 들어올리며 ‘4세대 대세 걸그룹’으로 자리매김했다.
[스경포토] [인제군 1박2일 야구] 라바야구단 백제상의 호쾌한 스윙
[스경포토] [인제군 1박2일 야구] 라바야구단 백제상의 호쾌한 스윙
2022. 06. 18 16:03 야구
라바야구단 백제상이 18일 인제군야구장에서 열린 경향신문과 함께하는 2022 인제군 1박2일 야구대회 베이거스와 경기에서 힘차게 스윙하고 있다.
‘백반기행’ 정시아, 백제의 도시 공주 맛 여행 떠난다
‘백반기행’ 정시아, 백제의 도시 공주 맛 여행 떠난다
2022. 04. 29 08:44 연예
TV CHOSUN 제공배우 정시아가 식객 허영만과 식도락 여행을 떠난다. 오늘(29일) 밤 8시 방송되는 TV CHOSUN ‘식객 허영만의 백반기행’에서는 엉뚱 발랄하고 사랑스러운 매력의 배우 정시아와 함께 백제의 찬란한 문화를 품은 도시, 충남 공주의 다채로운 먹거리를 찾아 떠난다. 정시아는 패션잡지 ‘에꼴’의 모델로 데뷔해 드라마 ‘학교2’를 거쳐 2006년 드라마 ‘두근두근 체인지’ 속 샴푸의 요정으로 활약하면서 배우로서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 데뷔 이후 오랜 무명 시절을 견뎌내야 했던 그녀는 “당시 연기자의 길을 계속 가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고 고백한다. 그런가 하면 정시아는 이후 예능 프로그램 ‘무한걸스’에서 뛰어난 존재감을 자랑하고 영화 출연 제의까지 받으며 승승장구했던 시절을 설명해 시선을 집중시켰다. 무엇보다 그녀는 “예능 활동에 대한 욕심이 있었고, 상대 배우 백도빈도 이상형과 정반대였기에 영화 출연을 거절하려 했다”고 밝혀 눈길을 끌었다. 이어 “그러나 전 매니저가 손 편지까지 써서 설득해 영화 촬영을 했다”라며 매니저 덕분에 백도빈과 이듬해 결혼까지 할 수 있었던 운명 같은 이야기를 전해 감탄을 자아냈다. 한편, 오늘 방송에서 정시아와 식객 허영만은 전국 각지로 약초를 캐러 다니는 심마니 주인장이 직접 차린 더덕구이정식부터 하루에 20그릇만 판매하는 곰탕, 공주 금강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장어구이 등을 맛본다. 특히 어머니가 장어집을 운영한다는 정시아는 주인장이 특급 노하우로 구워낸 장어구이를 맛보고는 반한 모습을 보여 웃음을 일으켰다. 사랑스러운 매력의 배우 정시아와 함께한 충남 공주의 다채로운 먹거리는 오늘(29일) 밤 8시 TV CHOSUN ‘식객 허영만의 백반기행’에서 만나볼 수 있다.

주간경향(총 23 건 검색)

[이기환의 Hi-story](107)백제 마지막 왕은 의자왕이 아니다(2023. 11. 03 11:12)
2023. 11. 03 11:12 문화/과학
충남 부여 가림성에서 느티나무를 찍어 합성한 사진. 반하트 모양의 느티나무 가지를 찍어 합성하는 ‘하트놀이’가 유행이다. / 백제역사문화연구원·부여군청 제공 ‘660년? 663년?’ 백제는 언제 멸망했을까요. 무슨 뜬금없는 질문이냐고요? 660년이라고 귀에 못이 박이도록 배우지 않았냐고요. 하지만 과연 660년이 맞을까요. 663년설도 제법 설득력이 있거든요. 또 하나 착안점이 있습니다. 백제의 독립투쟁이 672년까지 이어진다는 겁니다. 마침 올해(2023)가 백제금동대향로의 발굴 30주년입니다. 게다가 며칠 전에 부여 가림성에서 백제~통일신라시대의 유구가 확인됐다는 조사결과가 발표됐습니다. 또 10월 20일 세종시 운주산 기슭에서 의미심장한 행사가 벌어졌는데요. 660년 이후 3년간 벌어진 ‘백제부흥운동’에 참전했다가 목숨을 바친 백제부흥군·왜 연합군의 넋을 기리는 백제고산대제가 열렸습니다. 백제군의 최후 보루였던 주류성 함락일에 맞춰 봉행돼 왔는데요. 올해로 꼭 30년이 됐답니다. 금동대향로에 읽힌 멸망사 백제 멸망과 금동대향로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아볼까요. 금동대향로는 1993년 12월 12일 밤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극적으로 발굴된 것으로 유명한데요. 이 금동대향로는 사찰의 공방에 필요한 물을 저장하던 구유형 목제 수조가 놓여 있던 곳에서 출토됐습니다. 이상한 일이죠. 왜 향로가 나무물통 안에 숨겨져 있었을까요. 여기서 상상의 나래를 펴봅시다. 즉 660년(의자왕 20) 나당연합군의 공세에 사비(부여)가 함락됩니다. 승려들은 백제가 멸망하리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향로를 공방터 물통 속에 감춰두고 도망쳤습니다. 며칠이면 다시 돌아올 수 있으리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오판이었습니다. 백제는 그 길로 속절없이 멸망합니다. 나당연합군은 나라 제사를 지내던 이 절을 불에 태웠고요. 공방터 지붕도 폭삭 무너졌습니다. 금동대향로도 이후 1300년 이상 묻혀버린 겁니다. 허언이 아닙니다. 2년 뒤 이 사찰터의 목탑지 중심기둥이 도끼와 같은 흉기로 처참하게 잘린 채 확인됐어요. 명문 사리감도 비스듬히 넘어져 있었고요. 절을 유린한 나당연합군의 소행으로 보입니다. 백제의 멸망은 그야말로 창졸지간이었습니다. 가림성 사랑나무. 키 22m, 가슴둘레 5m40㎝에 달하는 느티나무다. 원뿔 모양의 몸집에 판 모양으로 돌출된 거대한 뿌리 등이 늠름한 자태를 풍긴다. 수령이 440년 정도라 한다. 2021년 8월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 백제역사문화연구원 제공 소정방(592~667)이 이끄는 13만 당나라군이 덕물도(덕적도)에 도착한 게 6월 21일이고요. 이후 황산벌 전투 및 나당연합군 본격 합류(7월 9일)-연합군 사비 진격(12일)-의자왕의 사비 탈출 후 웅진(공주) 피신(13일)-의자왕 항복(18일)까지…. 황산벌 전투부터 따지면 단 9일 만에 항복했습니다. 이로써 백제 678년의 역사는 공식적으로 종막을 고하게 됐고요. 9월 3일 소정방은 의자왕과 왕족·신료 93명, 그리고 백성 1만2000명을 당나라로 끌고 갔습니다. 왕조의 기둥을 뿌리째 뽑아간 형국이었죠. 백제는 그러나 그리 호락호락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가열찬 부흥운동 이때부터 가열찬 부흥투쟁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당나라군이 철수하기도 전인 8월부터 항거의 움직임이 일더니 전(前) 좌평 정무가 두시원악(청양)을 근거로 나당연합군을 습격합니다. 부흥운동의 중심인물은 무왕(재위 600~641)의 조카인 원로왕족 복신(?~663)이었습니다. 복신은 660년 9월 초 승려 도침(?~661)과 함께 주류성을 근거지로 본격적인 부흥운동에 나섭니다. 당나라 장수 유인원(생몰년 미상)의 공적을 기리려고 충남 부여에 세운 <당유인원기공비>(보물)도 “도침과 복신이 벌처럼 모이고 고슴도치처럼 일어나 산과 골짜기에 가득 찼다”고 했습니다. 거병 초기 독자적으로 활동했던 부흥군이 복신의 휘하로 결집하고 있었습니다. “흑치상지(630?~689)가 별부장 사타상여(생몰년 미상)와 함께 복신에 호응했다”(<삼국사기> ‘백제본기·의자왕조’)는 기록이 이를 증명합니다. 부흥군이 임존성(충남 예산)을 확보하자 10일도 되지 않아 3만명이 모였습니다. 곧 주변의 200여개 성도 호응했답니다. 사비성에 주둔하던 나당연합군은 부흥군에 의해 고립되는 등 큰 곤욕을 치렀습니다. ‘빨리 당으로 돌아가라’는 부흥군의 조롱  그사이 변수도 생깁니다. 당나라가 주적인 고구려 침략전쟁에 전념하는데요. 신라에는 평양까지 군량미 수송의 임무를 맡겼거든요. 그러자 백제부흥군의 운신이 자유로워집니다. 그런데 661년 6월~662년 2월 당나라군이 고구려와의 혈투에서 패했습니다. 당나라는 진퇴양난에 빠졌습니다. 그러자 당나라 고종(재위 649~683)은 백제 고토에서 부흥군에게 포위당해 있던 웅진도독 유인궤(602~685)에게 칙서를 내립니다. “형편이 어려우니 신라땅으로 가거나, 혹은 귀국해도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구당서>는 “백제땅에 주둔하던 당나라군의 장수와 병사들은 모두 귀국하기를 원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유인궤는 그러나 “웅진의 군대마저 뽑아버리면 백제가 다시 일어설 것인데, 고구려는 언제 멸망시키겠느냐”고 백제 주둔을 고집했습니다. 이 무렵 백제부흥군의 위세가 대단했습니다. 부흥군 지도자인 도침은 유인궤가 보낸 사신에게 ‘신분이 낮아 만나 줄 수 없다’고 홀대했고요. 복신은 당군 사령관 유인원에게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라. 우리가 전송해주겠노라”고 조롱했답니다(<삼국사기>). 실제로 662년 7월 당시 당나라군이 장악한 백제의 고토라고 해봐야 웅진성 정도였습니다.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집수시설에서 확인된 ‘성(城)’ 자 명문도기 /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백제 32대 ‘풍왕’ 등극 드디어 백제부흥군은 새로운 왕국의 면모를 갖췄습니다(661년 9월). 복신 등은 일본에 머물고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풍장)을 백제의 새 임금으로 옹립했어요. 백제가 의자왕의 항복 이후 1년여 만에 새로운 임금(풍왕)을 내세워 부활한 겁니다. 풍왕의 등장과 함께 부흥백제국의 정통성이 확립된 셈이죠. 그래서 백제의 마지막 왕이 의자왕(재위 641~660)이 아니라 풍왕(재위 661~663)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실제로 순암 안정복(1712~1791)은 <동사강목>에서 ‘백제의 32대 왕=풍왕’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이때부터 내부 분열의 씨앗이 자랐습니다. 부흥운동을 이끈 동지(복신과 도침)가 이제 풍왕의 신하로서 경쟁하는 사이가 된 거죠. 결국 복신은 도침을 죽인 뒤(661) 풍왕까지 제거할 계획을 세웁니다(663년 6월). 하지만 복신의 반란 음모를 알아차린 풍왕이 선제공격에 나서 복신을 급습해 죽입니다. 내부 분열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일본서기>는 “663년 8월 백제가 복신을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신라가 곧장 백제를 공격해 주류성(부흥군의 최후 거점)을 취하고자 했다”(‘천지기’)고 했습니다. 병선 170척으로 무장한 당나라군도 합류했습니다. “주류성이 함락됐다. 백제의 이름이 끊겼다” 위기에 빠진 풍왕은 왜에 구원병을 요청했고요. 마침내 왜군 1만여명이 수송선 1000여 척에 나눠타고 백제로 달려옵니다. 663년 8월 마침내 한반도 남부 서해안의 백강구(백촌강·백강)에서 대규모 해전이 벌어집니다. 백제-왜가 한편이 되고, 신라-당나라가 한편이 돼 치른 동북아시아 국제전의 막이 오른 겁니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 <자치통감> 등은 저마다 이 처절한 해전을 생생한 필치로 전합니다. “왜·백제 연합군이 백촌강에 진을 친 당나라군과 잇달아 접전을 벌였지만 실패했다. 당나라군의 포위 공격에 물속에 떨어져 죽은 자가 많았으며, 뱃머리를 돌릴 틈도 없었다.”(<일본서기>) “…당나라 수군이 백강에서 왜병을 만나 4번이나 싸워 모두 이겼고, 왜선 400척을 모두 불태워 연기와 불꽃이 하늘로 치솟았으며 바닷물이 붉게 물들었다.”(<자치통감>) 충남 부여 가림성은 백제 멸망과 그 이후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일러주는 유적이다. 501년(동성왕 23) 축조된 가림성은 백제의 요충지였다. 이른바 백강구 전투(663)에도 나당연합군이 우회할 정도였고, 그후에도 9년 이상 백제독립군의 근거지로 존재했다는 기록이 있다. /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당나라가 수전을 펼치자 신라군은 당나라군의 선봉이 되어 육지(주류성)에서 백제의 정예기병을 깨뜨렸다.”(<삼국사기>) 전투는 백제·왜 연합군의 궤멸로 끝났습니다. 부흥군을 이끌던 풍왕은 몇몇 측근과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로 망명했습니다. 마지막 보루였던 주류성은 9월 7일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이로써 3년여에 걸친 백제의 부흥운동이 막을 내립니다. <일본서기>는 “주류성이 함락되자 백제인들이 서로 부여잡고 피눈물을 흘렸다”고 했습니다. “주류성이 항복했구나. 돌이킬 수 없구나. 이제 백제의 이름이 끊기니 (조상의) 무덤을 어찌 가볼 수 있을 것인가(州柔降矣 事無奈何 百濟之名 絶于今日 丘墓之所 豈能復往)”(<일본서기> ‘천지기’). 백제의 독립투쟁  이후에도 백제 유민들의 무장독립투쟁이 이어집니다. 664년 3월 백제 독립군이 사비산성(부소산성)을 점령했다가 당나라의 웅진도독부에 의해 진압되기도 했습니다(<삼국사기> ‘문무왕’조). 최근 백제-통일신라 유구·유물이 확인된 ‘가림성’은 672년까지 백제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삼국사기>는 “671년(문무왕 11) 6월 신라가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가림성의 벼를 밟도록 했다”고 했습니다. 백제 독립군의 군량미 확보를 사전에 막으려고 한 고육책이었죠. 그럼에도 가림성은 신라의 수중에 들어오지 않았답니다. <삼국사기>는 이듬해인 672년(문무왕 12) 2월 “백제 가림성을 쳤지만 이기지 못했다”고 기록했습니다. 백제의 독립운동은 끝내 결실을 보지 못했습니다. 고립무원이었던 백제인들의 독립투쟁은 외로운 싸움이었던 겁니다. 사찰의 공방에 물을 공급하던 구유형 물통에서 확인된 금동대향로(왼쪽)와 절터 목탑터에서 도끼 같은 흉기로 잘린 탑 중심기둥, 비스듬히 누워 있었던 명문 석조사리감이 수습됐다. 아수라장이었던 백제 멸망 순간을 짐작케 한다. /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부흥백제국의 도읍, 주류성은 어디인가  다시 한 번 질문해봅시다. 660년 7월 의자왕의 항복 때일까요. 아니면 663년 9월 주류성 함락 때일까요. 어떤 연구자는 전한·후한, 서진·동진처럼 백제(기원전 18~기원후 660년)와 부흥백제국(661~663)으로 구별하기도 합니다. 이후 9년간은 독립운동기였고요. 또 하나 궁금증이 남죠. 주류성이 이른바 ‘부흥백제국’이라 이름 붙일 경우 주류성은 그 ‘부흥백제국’의 도읍이었겠네요. 주류성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 알쏭달쏭합니다. <삼국사기> ‘지리지’는 “주류성은 ‘이름은 있지만, 위치 불명 지역(三國有名未詳地分條)”으로 분류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정확한 위치를 두고 설왕설래하고 있습니다. 30년 동안 고산대제를 지내고 있는 세종 운주산성도 그중 한 후보지로 꼽히고 있고요. 충남 홍성 학성산성, 한산 건지산성, 연기 당산성, 전북 정읍 두승산성, 부안 우금산성(위금암산성)도 거론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거다!’ 하고 단정할 만한 증거자료는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올해로 30년째 세종특별시 운주산 기슭에서 벌어지고 있는 백제고산대제. 660년 이후 3년간 벌어진 ‘백제부흥운동’에 참전했다가 목숨을 바친 백제부흥군·왜 연합군의 넋을 기리는 제사다. / 주류성출판사 제공 가림성 사랑나무의 깜찍한 스토리 요즘 백제 부흥군과 독립군의 최후 근거지 중 한 곳이 요즘 MZ세대의 핫플레이스로 떠오르고 있는데요. 바로 ‘가림성 사랑나무’입니다. 저도 MZ세대 흉내를 내보려고 ‘가림성 사랑나무’를 찾아갔는데요. 해발 260m의 가림성 남문 터에 올라보니 우뚝 솟아 있는 나무와 함께 가슴이 확 트이는 ‘뷰’가 펼쳐지더군요. 부여 시내는 물론이고 논산, 강경, 서천, 익산까지 한눈에 조망할 수 있더라고요. 그곳에 서 있는 나무에 왜 ‘사랑’ 자가 붙었을까요. 사랑나무는 키 22m, 가슴둘레 5m40㎝에 달하는 느티나무인데요. 원뿔 모양의 몸집에 판 모양으로 돌출된 거대한 뿌리 등이 늠름한 자태를 풍깁니다. 수령이 440년 정도라 하고요. 천연기념물로 지정됐습니다(2021년 8월).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왜 나무에 ‘사랑’ 자가 붙었는지 모르겠더라고요. 옆으로 퍼진 나무줄기를 보면 뭔가 하트 모양 같기도 하지만 완전치 못했거든요. 이상했는데요. 다시 포털 사이트를 검색해보고 깨달았습니다. 본래가 반쪽짜리 하트 문양 나뭇가지였는데요. 이것을 합성해 온전한 하트 문양을 만든다는 겁니다. 감탄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이런 센스쟁이들이 있나!’ 하기야 요즘 누가 몇백 년 몇천 년 된 고리타분한 유적·유물을 보러오나요. 사진찍기에 좋은 ‘뷰’를 찾고, 분위기 좋은 카페 찾고, 볼거리 많은 거리나 길을 찾죠. 경주 황리단길과 벚꽃길을 한번 보십시오. 부여 역시도 왕릉원이나 박물관보다는 ‘가림성 사랑나무’가 ‘인생샷’을 찍는 핫스팟으로 각광받는 거겠죠. 그래도 저는 옛날 사람인 모양입니다. 사랑나무를 보면서도 백제 멸망이 어떻고, 부흥군이 어떻고, 독립군이 어떻고 하는 고리타분한 이야기나 하고 있으니까요.
이기환의 Hi-story
[이기환의 Hi-story](104)백제금동대향로 다섯 악사는 여성 전문 악단(2023. 10. 13 11:06)
2023. 10. 13 11:06 문화/과학
백제금동대향로 / 국립부여박물관 제공 위대한 발견은 어느 날 불쑥 예고 없이 찾아온 손님 같습니다. 하지만 곱씹어보면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국보 중의 국보’로 꼽히는 백제금동대향로의 발굴 이야기입니다. 199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백제 왕들의 무덤이 모여 있는 ‘부여 능산리고분군’(현 백제왕릉원)엔 관람객들이 증가 추세에 있었습니다. ‘찜찜해서 파보자고 했더니…’ 그러나 주차시설이 턱없이 비좁았습니다. 부여군은 고분군의 서쪽 능선에 주차장을 마련할 계획을 세웠고요. 사전시굴조사가 진행됐고요. 건물터와 재를 비롯한 불탄 흔적, 그리고 금속유물 편들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공사를 중단시킬 결정적인 유구·유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런 경우 보통은 공사를 강행합니다. 발굴 때문에 비용과 시간을 낭비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심상치 않은 징후가 보이는데 고고학도로서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겠죠. 관계 연구자들이 문화재관리국으로 달려가 “찜찜하니 딱 한 번만 파보자”고 건의했답니다. 그렇지만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웬일일까요. 당시 노태섭 문화재관리국 기념물과장이 선선히 “그러자” 수용했답니다. 그러면서 국비(3000만원)를 선뜻 책정해주었습니다. 만약 “나온 것도 없는데 뭘 파보겠다는 거냐”고 일축했다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금동대향로는 공사 강행과 함께 중장비의 삽날에 찍혀 흔적도 없이 사라졌겠죠. 강추위 속에 판 물구덩이 이듬해(1993년) 10월부터 본격 발굴에 돌입했답니다. 계곡부에 자리 잡고 있던 현장 상황은 최악이었습니다. 12월 들어 강추위까지 들이닥쳤고요. 조사단은 꽁꽁 언 손으로 산골짜기에서 흘러드는 물을 빼내느라 악전고투했습니다. 발굴은 기다림의 미학이자 인내의 결정체라 했던가요. 그때가 12월 12일, 일요일 오후 4시 30분이었습니다. 발굴 구덩이에서 한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은 물체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흥분에 젖은 발굴단은 전등을 밝혀 놓고 본격 수습 작업에 돌입했습니다. 밤 8시 30분쯤 ‘국보 중의 국보’가 물구덩이 속에서 빼어난 자태를 드러냈습니다. 백제금동대향로였습니다. 나중에 보니 수상했습니다. 향로가 출토된 타원형 구덩이는 사찰의 공방에 필요한 물을 저장하던 구유형 목제 수조가 놓여 있던 곳이었습니다. 왜 향로가 나무 물통 안에 숨겨져 있었을까요. ‘잠깐 숨겨놓으면 될 줄 알았는데….’ 그럴듯한 해석이 동원됐습니다. 660년(의자왕 20) 나당연합군의 공세에 사비(부여)가 함락됩니다. 백제 왕릉을 지키던 사찰의 승려들은 이 대향로를 공방터 물통 속에 감춰둡니다. 그저 며칠만 숨겨 두면 괜찮을 거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건 오판이었습니다. 백제는 속절없이 멸망하고 말죠. 나당연합군은 나라 제사를 지내던 이 절을 불에 태웠고요. 공방터 지붕도 폭삭 무너졌습니다. 금동대향로도 이후 1300년 이상 그 자리에 묻혀버린 거고요. 허황된 스토리일까요. 지난 1993년 12월 12일 밤 백제 사비시대 임금들의 무덤이 모인 능산리고분군 서쪽 계곡부 주차장 예정부지에서 출토된 백제금동대향로. 구유형 물통 속에 숨겨져 있었다. / 국립부여박물관 제공 1995년 절터의 목탑지 밑에서 깜짝 놀랄 만한 유물이 발견됩니다. ‘백제 창왕(위덕왕·재위 554~598) 13년인 정해년(567년) (창왕의 누이인) 공주가 사리를 공양한다’는 글자가 새겨진 ‘석조사리감’이었습니다. 그런데 출토양상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탑의 중심기둥이 도끼 같은 흉기로 처참하게 잘려져 있었습니다. 명문 사리감도 비스듬히 넘어져 있었습니다. 나당연합군이 목탑의 사리장치를 수습하려고 파헤친 것이 아닐까요. 금동대향로 19명 인물열전 2023년은 금동대향로를 발굴한 지 딱 30주년 되는 해인데요. 며칠 전 백제문화제재단 등의 주최로 열린 발굴 30주년 ‘학술대회’에서 상당수 논문이 발표됐더라고요. 그중 ‘향로에 표현된 19명의 인물상’과 관련된 발표문(‘백제금동대향로의 동아시아 미술사적 의의’)이 눈길을 끌었습니다(소현숙 원광대 교수). 그래서 기왕에 발표된 논문(박경은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관의 ‘백제금동대향로 도상과 상징성 연구’, 홍익대 박사논문, 2018)과 비교해보았죠. 재미있더라고요. 금동대향로는 받침과 몸체, 뚜껑, 꼭지 등 4부분으로 구성돼 있는데요. 인물은 뚜껑에 악사 5명을 포함한 17명, 몸체(연꽃)에 선인 2명 등 모두 19명이 보입니다. 새삼 이 19명을 뜯어보았는데요. 어쩌면 그렇게 사실적으로, 디테일하게 표현했는지 감탄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우선 뚜껑을 볼까요. 거문고(금)와 완함(비파), 북, 종적(피리), 배소(퉁소)를 연주하는 다섯 악사가 표현돼 있습니다. 이 다섯 악사의 표정을 보시죠.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은은합니다. 동시대 백제 불상의 온화한 표정을 연상하게 됩니다. 다섯 악사의 독특한 헤어스타일 여기서 소현숙 교수가 ‘주목!’을 외치네요. 다섯 악사의 헤어스타일을 자세히 보라고 합니다. 얼핏 보면 정수리까지 삭발하고 뒷머리를 길게 땋아서 오른쪽으로 틀어 올린 것 같은데요. 그러나 아니라는 겁니다. 머리카락을 표현하지 않았을 뿐, 머리를 가지런히 빗어 오른쪽으로 틀어 올린 것으로 봐야 한다는 거죠. 이런 헤어스타일이 중국 동진시대(317~419) 유물에서 보인다는데요. 즉 중국 난징(南京)에서 출토된 4~5세기 동진시대 여성 도용(무덤에 껴묻이한 인물·동물상)의 헤어스타일이 연상된다는 연구가 있답니다. 동진시대에 전해진 머리 모양이 백제 악단의 공식 헤어스타일로 자리 잡게 된 것이 아닐까요. 여성 전문 악단의 포스 무엇보다 이 다섯 악사가 ‘모두 여성 선인’일 가능성이 짙답니다. 이 대목에서 착안점이 하나 있다는데요. 중국 향로에서는 남녀 선인이 함께 즐겁게 놀거나 짝으로 표현된답니다. 즉 남녀의 결합 등이 득도(得道)의 중요 통로로 인식됐거든요. 그런데 중국에서 여성 선인은 신선이 되기 위한 일종의 보조자 역할이었답니다. 반면 백제금동대향로의 다섯 악사를 보십시오. 이들은 남성 선인의 짝이나 선인을 이루기 위한 보조자가 아니라는 거죠. 산 정상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독립된 지위를 갖고 있는 주악(연주) 선인의 신분을 과시했다는 겁니다. 예컨대 거문고나 피리 등의 연주는 하늘신을 부르는 초혼과 같은 기능을 한 것으로 전해지는데요. 그렇다면 금동대향로 속 여성 선인은 신을 부르거나 제례의 악을 담당하는 기능을 부여받았을 가능성이 짙습니다. 다섯 악사의 헤어스타일이 같다. 머리를 가지런히 빗어 오른쪽으로 틀어 올렸다. 백제 악단의 공식 헤어스타일 같다. 산 정상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여성 전문 악단은 독립된 지위를 갖고 있는 주악(연주) 선인의 신분을 과시했다는 견해가 있다. 소현숙 원광대 교수의 견해를 토대로 구성했다. 파르티안 샷 선보이는 인물 여성 다섯 악사 외에 뚜껑에 표현된 12명은 어떤 인물일까요. 이중 3명은 동물을 탄 모습인데요. 1명은 봇짐을 지고 코끼리 등에 편안하게 올라탔습니다. 코끼리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동남아시아인이 아닐까요(박경은 학예연구관). 또 한 인물은 말갖춤새를 완비한 말을 타고 산언덕을 오르고 있네요. 제3의 인물은 말을 탄 채 등을 돌려 활을 쏘고 있는데요. 이 ‘돌려쏘기’ 신공은 무용총이나 덕흥리 고분 같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보이는 ‘파르티안 샷’이라고 하죠. 고대 파르티아 왕조(기원전 3세기~기원후 3세기)의 궁기병이 로마군과의 전투에서 구사한 기술입니다. 그럼 남은 9명은 누구일까요. 거울인가 낚시도구인가 뚜껑의 제1단에는 3명의 인물이 출현합니다. 편의상 인물 ①~⑨로 표현해보죠. ‘인물 ①’은 어깨에 옷이 빗물에 젖지 않도록 도롱이(비옷)를 걸친 채 걷고 있네요. ‘인물 ②’는 계곡의 암반 위에 앉아 있습니다. 손에 끝이 구부러진 지팡이와 둥근 무엇을 쥐고 있는데요. 여기서 관찰자들의 견해가 갈립니다. 이 ‘둥근 무엇’을 거울로 본 연구자가 있어요(박경은 연구관). 인물 ②가 앞에 걸어가는 호랑이를 향해 거울을 비추고 있다는 겁니다. 도교 경전인 <포박자> ‘내편·등섭’은 “옛날 도사들은 직경 9촌의 거울로… 새나 짐승이 사람으로 둔갑했다면 그 본래의 모습이 거울에 비친다”고 했답니다. 백제금동대향로 발굴 30주년 기념 특별전. 향을 주제로 한 특별전이다. 2024년 2월 12일까지 열린다. / 국립부여박물관 제공 그렇다면 ‘인물 ②’ 역시 호랑이를 물리치거나 판별하려고 거울을 비추고 있는 걸까요. 다른 연구자는 물 위의 암반에서 갈고리처럼 생긴 물건을 들었다는 것에 주목했는데요. 또한 선인들의 전기인 <열선전>에서 낚시와 관련된 선인들이 다수 언급된답니다. 따라서 ‘인물 ②’는 ‘낚시하는 선인’으로 보는 게 맞다고 추정합니다. ‘인물 ③’은 어떨까요. 지팡이에 의지해서 구부정하게 걷고 있는 노인으로 보기도 하고요(박경은 학예연구관). 하지만 중국 양나라 시대 도인이었던 도홍경(456~536)은 “쉽게 굴복하는 세태가 싫어 지팡이를 짚고 산을 찾는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꼭 ‘지팡이=노인’의 등식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견해도 있습니다(소현숙 교수). 풀어헤친 머리를 감는 사람은 제2단에도 3명의 선인이 있네요. ‘인물 ④’는 약초를 향해 몸을 굽히고 있습니다. 풀의 줄기가 휘청대네요. ‘인물 ④’가 손으로 확 휘어잡아 뜯었음을 알 수 있죠. 디테일한 묘사가 일품입니다. ‘인물 ⑤’는 ‘인물 ③’과 비슷하게 지팡이를 집고 산에서 내려오고 있네요. 인물 ⑥의 자세가 아주 특이합니다. 계곡 사이로 몸을 반쯤 내밀고 폭포 아래에서 긴 머리를 물에 담근 채 감고 있어요. 이것을 입산수도와 단약 제조를 위해 목욕재계하는 과정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요(박경은). 또 앞서 인용한 도홍경은 “입산 후 머리 풀고 옷끈을 풀어헤친 채 산 위를 돌아다닌다”고 했거든요. 당대 중국에서 선인의 이미지는 머리를 길게 풀어헤치거나, 옷끈을 풀어버린 자유로운 모습이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소현숙). 다섯 악사와 다른 선인들은 소매가 넓고 길이가 긴 복장의 안쪽에도 깃이 곧게 내려가는 속옷을 입었다. 그러나 ‘인물 ⑨’ 옷 꾸밈새(복식)는 속옷이 대각선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를 두고 전형적인 불상과 승려의 옷차림이라는 견해가 나왔다. 광석 캐는 도인, 명상하는 승려 뚜껑의 제3단에도 3명의 인물이 있는데요. ‘인물 ⑦’은 손에 날카로운 공구로 암반을 깎아내고 있고요. 도교의 연단술(불로장생을 위해 단약을 조제·복용하는 신선도술)이 있거든요. ‘인물 ⑦’이 바로 이 단약 제조를 위해 광석을 채취하는 것 같아요. ‘인물 ⑧’은 자기 키보다 큰 약초를 캐고 있고요. 인물 ⑨는 좀 다른 모습이죠. 명상을 통해 신선이 되고자 하는 수련자의 모습이라 보기도 하고요(박경은 학예연구관). 이 ‘인물 ⑨’는 ①~⑧과는 성격이 다른 인물, 즉 도인이 아니라 승려로 판단하기도 합니다(소현숙 교수). 이 ‘인물 ⑨’의 옷 꾸밈새(복식)가 다른 16명과 다르다는 겁니다. 다섯 악사와 다른 선인들은 소매가 넓고 길이가 긴 복장의 안쪽에도 깃이 곧게 내려가는 속옷을 입었는데요. ‘인물 ⑨’의 속옷만 대각선으로 표현되고 있네요. 이것은 전형적인 불상과 승려의 옷차림이라는 겁니다. 중국 사서인 <주서>나 <북서> 등은 “백제에서는 불교는 성했지만, 도사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했거든요. 또한 이 백제금동대향로가 쓰인 곳이 어디입니까. 백제 왕릉 옆에서 선왕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사찰이었죠. 그렇다면 당시 백제금동대향로 앞에서 의례를 담당했던 인물은 승려가 됐을 겁니다. 백제금동대향로 속에 나타난 유일한 승려가 바로 도교와 불교가 결합한 당대의 백제 사상계를 잘 반영했다는 겁니다(소현숙 교수). 택견이 아니라 공중을 나는 선인 인물은 몸체의 연꽃 안에도 2명이 있는데요. 1명은 새를 타고 하늘을 날고 있어요. 혼자 공중을 나는 선인도 있는데요. 이를 두고 전통무술인 택견 자세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고구려 무용총의 천장에서도 비슷한 그림이 보이죠. <삼국유사> ‘기이·남부여(백제)’조는 “백제의 전성기에는 신인(神人)이 삼산(三山)에 살았는데 공중으로 날아 서로 왕래했다”고 했습니다. 금동대향로가 홀연히 나타난 것이 벌써 30년 됐는데요. 말로만 ‘국보 중의 국보’라고 할 게 아니라 찬찬히 이모저모 뜯어보면서 이야깃거리를 차곡차곡 쌓아두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마침 국립부여박물관이 내년 2월 12일까지 <백제금동대향로 3.0-향을 사르다> 특별전을 열고 있습니다. ‘향’을 주제로 3D로 구현해낸 향연(香煙)과 백제금동대향로 속 세상을 휘감아 도는 카메라 워킹을 선보인다고 하는데요. 새로운 세대에 맞는 감각적인 전시회네요. 짙어가는 가을철에 한번 들러보시기 바랍니다.
이기환의 Hi-story
[이기환의 Hi-story]남근형·구구단·신세한탄·가요·망부가…백제 목간 '빅5'를 아십니까영상
[이기환의 Hi-story]남근형·구구단·신세한탄·가요·망부가…백제 목간 '빅5'를 아십니까(2023. 10. 05 16:18)
2023. 10. 05 16:18
종이가 발명(혹은 개량 또는 완성)된 것은 기원후 105년 무렵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종이는 오랫동안 폭넓게 쓰이지는 못했습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볼 수 있듯 나무(혹은 대나무)를 활용한 목간(혹은 죽간)이 보편적인 서사자료였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책(冊)’이라는 한자는 목(죽)간을 매단 모습의 상형문자에서 비롯됐죠. ‘전(典)’자는 책을 들고 있는 모습이죠. 사실 경제성과 내구성 측면에서 목(죽)간은 종이에 견줘 몇 수는 위였습니다. 왜냐. 목간은 주로 습기가 많은 우물이나 연못, 저수지, 배수지 같은 곳에서 집중 출토됩니다. 나무는 산소가 차단된 물 속에서 좀처럼 부식하지 않기 때문에 수백 수천년 동안 보존될 수 있거든요. 1400년전 백제인의 ‘삶의 애환’을 전해주는 ‘빅5’ 목간. 구구단 목간, 남근형 목간, 백제가요 ‘숙세가’ 목간, ‘신세한탄’ 목간이 보인다. 2022년 부여 동남리 출토된 목간을 두고는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좌평 4인을 기리기 위한 사경 제작에 쓰일 금을 납부한 과정’을 기록했다는 견해가 나왔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사진제공 ■‘구구단·남근형’ 목간의 정체 해방 이후 지금까지 확인된 삼국~조선시대 명문 목간은 730여점 되는데요. 그중 오늘의 주인공인 백제영역에서 출토된 명문 목간은 100여점에 이릅니다. 그 가운데 ‘빅4’ 목간이 있습니다. ‘구구단 목간’과 ‘남근형 목간’, 백제가요 ‘숙세가 목간’, ‘신세한탄 목간’입니다. 2011년 부여 쌍북리에서 확인된 구구단 목간은 ‘九〃八一 八九七□□ 七九六十三(9981 897□ 7963)…’이 쓰여있습니다. 국내에서 처음 출토된 ‘구구단’ 자료였죠. 단순히 적거나 외우려고 기록한 구구단 목간은 아닌 것 같고요. 관청에서 물품을 출납하면서 썼던 ‘실용 구구단 목간’일 가능성이 큽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진 기자의 모습. 목간에 글을 쓰고 있다. 기원후 105년 무렵 종이가 발명(혹은 개량)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대)나무 에 글을 쓰는 목(죽)간이 보편적인 서사자료로 쓰였다. |고구려유적유물도감편찬위, <고구려 유적유물도감(5·6)-고구려편3·4>, 1990능산리에서 출토된 ‘남근형 목간’(22㎝)도 시선을 잡아 끌었죠. 목간에 새겨진 명문 중 ‘道□立立立’이라는 글자가 특히 남우세스러웠습니다. 가뜩이나 남근 형태의 목간인데, 또 굳이 ‘길에 서라(立)! 서라(立)! 서라(立)!’고 세번이나 강조한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연구자들이 머리를 싸매 그럴듯한 결론을 얻었습니다. 즉 남근형 목간은 사비성으로 들어오는 나성의 대문 및 중심도로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찾아냈는데요. 그렇다면 백제인들이 지금의 서울 세종로 격인 사비(부여) 중심도로에서 ‘길의 신’에게 제사를 드린 것일 수도 있다고 판단한겁니다. 예부터 남근은 나라의 안녕과 악신 및 질병의 추·예방을 위해 숭배되고 신성시됐거든요. “이제 남근이 섰다! 섰다! 섰다! 그러니 사악한 귀신과 도깨비들은 썩 물렀거라!” 2022년 충남 부여 동남리 아파트 공사장에서 출토된 목간. 5점 중 3점은 단순한 물품꼬리표였고, 2점은 지금의 조달청 관리가 물품을 출납하면서 기록한 문서 혹은 장부로 파악했다.|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울산문화재연구원 제공■‘백제 가요’에 ‘신세한탄 인사청탁’ 목간까지 또 하나는 역시 능산리에서 확인된 ‘좀 있어 보이는’ 목간인데요. “숙세결업(宿世結業) 동생일처(同生一處) 시비상문(是非相問) 상배백래(上拜白來)”라는 명문이 돋보였어요. 공식적으로는 ‘숙세(전세)에 업을 맺었기에 (현세에) 함께 같은 곳에 태어났습니다. 잘잘못을 서로 물어(논하여) 우러러 절 올리며 사뢰옵니다’라고 해석되었는데요. 그러나 국문학자(김영욱 서울시립대 교수)은 색다르게 해석했습니다. “부처님이 맺어준 인연으로 우리 함께 한평생 살아가는데 세속의 시비 쯤이야 가려서 무엇하겠소.” 국문학자다운 맛깔스러운 해석이죠. 이렇게 되니 백제인 특유의 여유를 담은 소박한 가요로 읽힙니다.최근 6~7세기 유행한 중국 남북조의 필법과 동남리 목간의 서체를 비교·분석해서 글자를 판독한 논문이 발표됐다. 특히 이 목간의 내용과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4좌평의 상관관계를 논증했다.(출처:손환일, ‘부여 동남리 목간의 서체와 내용’, <백제연구> 78호, 충남대백제학연구소, 2023년8월)영락없는 충청도 사람의 가요라는 겁니다. 이 ‘숙세가’ 목간은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백제 시가’라 할 수 있어요. 또 2010년 부여 구아리에서는 신세한탄과 함께 인사를 청탁하는 편지 목간이 확인됐는데요. 편지는 “이 몸이 빈궁하여 하나도 가진 게 없으며 벼슬도 얻지 못하고 있나이다(於此貧薄 一无所有)”라고 신세한탄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곧 인사청탁으로 이어져요. “좋고 나쁨에 대해서 화는 내지 말아달라(不得仕也 莫瞋好邪)”는 당부와 함께 “음덕을 입은 후 영원히 잊지 않겠다(荷陰之後 永日不忘)”하는 읍소로 마무리합니다. 문맥을 보면 편지만 보낸 것이 아니라 선물(혹은 뇌물)까지 함께 보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구당서> ‘동이전·백제’조는 “관리가 뇌물을 받으면…종신토록 금고형에 처한다”고 했거든요. 만약 백제의 사법당국에 이 목간이 적발되었다면 해당관리는 평생 금고형을 받았겠네요. 재미로 따지면 이 ‘신세한탄’ 목간은 백제의 ‘빅4’에 충분히 포함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최근 동남리 출토 ‘목간1’에 등장하는 간지는 ‘갑술’(554년)로 읽어야 한다는 견해가 나왔다. 초서로 쓴 성(成)자도 보인다고 했다. 이 경우 ‘성련금’, 즉 ‘잘 정련된 금’으로 읽을 수 있다. ‘보도자료’ 발표 당시 ‘인경(因涇)’으로 해석된 구절은 ‘국경(國經·국가가 주도한 불교사경 제작)’으로 고쳐보았다. |손환일 서화문화연구소장 논문을 토대로 정리 ■난수표 같은 목간의 출현 지난 2022년 3~4월 부여 동남리 아파트 건설공사장에서 명문 목간 5점이 확인되었습니다. 3점은 물품에 붙이는 꼬리표였고요. 다른 2점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문서용으로 보이는 이 2점에는 마치 난수표처럼 무언가가 기록되어 있었는데요. 4번에 걸친 전문가 자문회의와 판독회를 거쳐 겨우 단서를 찾았답니다. 당시 보도자료를 볼까요. ‘목간1’에서는 ‘날짜(12월10일)’와 ‘금(金)’자, 중량 단위를 뜻하는 ‘주(主)’자가 파악됐습니다. ‘주(主)’와 관련해서는 1971년 무령왕릉 출토 은제팔찌에서도 ‘230주(主)’라는 중량 표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또한 ‘출납’을 의미하는 ‘내(內)’와, ‘물품의 이동’을 뜻하는 ‘보낼 송(送)’ 혹은 ‘맞이할 역(逆)’자가 보였습니다. ‘재고 없음’을 지칭할 수 있는 ‘망(亡)’자도 파악됐습니다. 손환일 소장은 동남리 ‘목간1’에서 ‘망(亡)’과 ‘부(夫)’를 붙여 ‘망부(亡夫)’로, ‘역(逆)’과 ‘금(金)’을 붙여 ‘역금’으로 읽었다. 그러면 ‘목간1’은 “갑술년 11~12월 사이, 망부(죽은 남편) 1·2·3·4, 즉 4명을 위한 ‘사경 제작’에 쓰일 ‘정련되지 않은 금’(역금)을 궁궐에 바쳤다”는 뜻이 된다는 것이다. |손환일 소장 논문을 토대로 정리‘목간2’는 곡물의 일종인 ‘피(稗·고대 작물의 일종)’와 함께 ‘이동(送 혹은 逆)’, ‘연령 등급(丁)’, ‘사람 이름’, ‘용량 단위(斗)’ 등의 글자가 확인되었습니다. 당시 보도자료는 지금의 조달청 관리가 물품을 출납하면서 기록한 문서 혹은 장부로 파악했습니다. 또한 백제의 도량형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했습니다. 이 명문 목간에는 대중의 시선을 끌 ‘아이템’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보도자료는 “세로로 쓴 문서 행간의 빈 공간에 이음표(′)를 표시한 뒤 그 다음 줄에는 글자를 180도 돌려 거꾸로 써내려갔다”고 설명했습니다. 말하자면 현장 관리가 문서를 써내려가다가 공간이 없으면 빈쪽을 찾아 거꾸로 써서 이어나갔다는 뜻이죠. 이용현 전 경북대 인문학술원 교수는 ‘목간1’은 금의 출납과, 출납된 금으로 제작된 완성품(금공품)의 납입 과정이 최소 6차례(11월8~12월20일)에 걸쳐 적혀있는 현장 관리의 개인 업무일지(메모장)으로 파악했다. ‘목간2’는 ‘기와 제작에 동원된 실무인력 8명에게 각각 피(곡물) 5두씩을 임금으로 지급했다’는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해석했다. |이용현 교수의 논문을 토대로 정리■“금 줄테니 금제품 만들라”는 의미? 동남리 목간은 학계에서 주목을 끌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속속 발표되는 연구자들의 발표논문을 소개하지 못했습니다. 명문이 잘 보이지 않는데다 워낙 소략한 일종의 메모 형식이었거든요. 연구자 나름대로 글자를 판독하고, 해석했지만 볼수록 미궁에 빠지더라고요. 그것을 대중의 눈높이에 맞게 전달할 깜냥이 저한테는 없었습니다. 이용현 전 경북대 인문학술원 교수의 논문(‘백제 왕도 출납 문서의 일례’, <백제학보>43호, 백제학회, 2023)에서 그나마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 보였는데요. 동남리 목간은 발표 당시 부터 목간 전체를 빽빽하게 활용했고, 돌려서 거꾸로 쓴 부분도 보여서 화제를 뿌렸다. 백제인들의 알뜰함을 볼 수 있기도 하고, 바쁜 업무현장의 단면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울산문화재연구원·국립부여문화재연구원 제공먼저 ‘목간2’에는 ‘피역(稗逆)’이라는 제목 아래 ‘와진(瓦進)+인명(人名)+정(丁·성인남성)+5두(五斗)’의 서식으로 모두 8명(앞·뒷면 각 4명씩)이 기록되어 있답니다. ‘와진(瓦進)’은 기와를 제작하는 실무 일꾼을 뜻하고요. 따라서 ‘목간2’는 ‘기와 제작에 동원된 실무인력 8명에게 각각 피(곡물) 5두씩 지급했다’는 사실을 기록한 메모장이라는 거죠. 그럼 ‘목간1’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금공품 담당 관리가 금(金)의 출납과 사용처를 기록한 문서라 해석합니다. 앞면은 ‘날짜(월일)과 망(亡·금이 출납되어 없어짐)+부역(夫逆·기술자인 부가 수령해감)+금(金)+양주(兩主·금의 수량 단위)’ 형식과, ‘날짜(월일)+내납(內納·금이 납입됨)’ 형식으로 되어 있고요.돌려쓰기도 허투루 하지 않았다. 돌려 쓸 때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알아보기 쉽게 55도(金)~80도(日) 정도로 각도를 틀어 방향을 표시했다. ‘목간1’의 앞 뒷면 맨 아랫 부분의 글자(日과 金)를 보면 옆으로 뉘어져 있다. 나중에 헷갈리지 않게 ‘거꾸로 돌려쓴 내용이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걸 표시해둔 것이다.|이용현 교수 논문에서뒷면은 ‘물품명+작용(作用·만드는데 소요된)+금(金)’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어떤 물품을 만드는데 쓴 금이 얼마’라는 내용인데요. ‘금으로 만든 제품’이니 ‘어떤 물품=금공품’이 된다는 겁니다. 이 ‘목간1’에는 금의 출납과, 제작 완성품의 납입 과정이 최소 6차례(11월8~12월20일)에 걸쳐 적혀있습니다. 그때마다 ‘릴레이식’으로 기록했고, 쓸 공간이 모자라면 옆의 빈자리를 찾아 ‘돌려쓰기’ 했다는 겁니다. 이용현 교수는 “각 행의 기록마다 서체와 붓의 농담(짙고 옅음)이 약간씩 다르다”면서 “이것이 한번에 쓴 것이 아니라 여러번에 걸쳐 나눠 썼음을 의미한다”고 밝혔습니다. 동남리 목간에서는 금의 중량단위를 나타내는 주(主)자가 보인다. 무령왕릉 출토 무령왕비 은팔찌에서도 230주를 들여 팔찌를 만들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주(主)가 백제 시대 중량을 표시하는 단위였음을 알 수 있다.|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돌려쓰기 신공’ 발휘 이용현 교수의 설명 중에 웃음보가 터진 포인트가 있었습니다. 돌려 쓸 때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알아보기 쉽게 55도(金)~80도(日) 정도로 각도를 틀어 방향을 표시했다는 겁니다. 정말 ‘목간1’의 앞 뒷면 맨 아랫 부분의 글자(日과 金)를 보면 옆으로 뉘어져 있습니다. 나중에 볼 때 헷갈리지 않게 ‘내가 거꾸로 돌려쓴 내용이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걸 표시해둔 겁니다. 1400년전 백제인의 ‘깨알 센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나마 이용현 교수의 논문에서 대중성의 일단을 보았습니다. 관산성전투를 기록한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조. 이 전투에서 성왕을 비롯해 백제 좌평(장관급) 4명과 3만명에 달하는 군사가 전사했다. ■급히 소환된 ‘관산성 전투’ 얼마전 서체연구자인 손환일 한국서화문화연구소장의 논문이 학술지(‘부여 동남리 목간의 서체와 내용’, <백제연구> 78호, 충남대백제학연구소, 2023년8월)에 실렸는데요. 논문의 부제(‘관산성 전투와 백제급료 지급 기록’)가 제 눈길을 잡아 끌더군요. 먼저 관산성 전투를 살펴볼까요. 워낙 유명하죠. 신라에게는 영광을, 백제에게는 악몽을 안겨준 전투였죠.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413~491)의 침략으로 한성이 함락되면서(475) 웅진(공주)으로 천도하죠. 그러다 다시 보다 넓은 평야지대를 찾아 사비(부여)로 옮겨 중흥을 꾀합니다.(538) 성왕(523~554)은 신라 진흥왕(540~576)과 손잡고 북벌을 단행했고, 한강하류 6개군을 점령하죠. 그러나 553년 진흥왕의 배신으로 천신만고 끝에 이룬 고토수복의 꿈은 산산조각나죠. 특히 동남리 목간에 등장하는 망부 4인이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4좌평일 가능성을 개진됐다.|손환일의 논문에서 정리이때 성왕의 아들인 창(위덕왕)이 복수의 칼을 가는데요. 부득이 <일본서기>를 인용하자면 “태자인 여창이 원로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라정벌을 고집했다”고 했답니다. 이때 원로대신들이 “아직 때가 아니다”라고 만류했지만 여창은 “늙었구려. 어찌 겁을 내시오”라 하면서 출전을 고집했답니다. 급기야 554년 7월 태자가 가야 연합군까지 동원하여 관산성(충북 옥천)을 공격하는데요. 그러나 신라는 한강 유역을 지키던 신주 주둔의 군대까지 빼돌려 관산성 포위에 나섰습니다. 전황이 심각해지자 아버지(성왕)는 아들을 격려하기 위해 전선으로 나서는데요. 하지만 성왕은 관산성 근처에서 신라 매복군의 습격을 받아 전사하고 맙니다. <삼국사기>는 “554년 7월 성왕이 관산성을 공격하다가 신라군에 의해 전사했다. 좌평(장관) 4명과 연합군 2만9600명이 죽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이때 천신만고 끝에 사지를 빠져나온 태자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 이가 창왕(위덕왕·554~598)이었습니다.1995년 부여 능산리절터의 탑지에서 출토된 사리감에서 ‘창왕(위덕왕) 13년(567), 왕의 누이동생이 사리를 공양한다’는 명문이 나왔다. 관산성 전투의 패배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은 창왕(위덕왕)은 즉위 후 죽은 이의 혼을 달래며 정국을 안정시키려고 애쓴다. 사찰 창건도 그러한 작업의 일환이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망’, ‘부’보다 ‘망부(죽은 남편)’ 대체 이 동남리 명문 목간과 관산성 전투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는 건가요. 손환일 소장은 6~7세기 유행한 중국 남북조의 필법과 동남리 목간의 서체를 비교·분석해서 글자를 판독해나갔는데요. 출토된 목간 5점 가운데 가장 핵심인 ‘목간1’을 중심으로 볼까요. 판독결과 연대를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간지, 즉 ‘갑술(甲戌)’을 읽었답니다. 확실하게 보이는 ‘갑(甲)’ 자 다음의 글자는 초서체로 쓴 ‘술(戌)’자가 확실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목간의 제작연대는 ‘갑술년’이라는 얘기죠. 역시 초서로 쓴 ‘성(成)’자도 보이고요. 그에 따라 ‘성련금(成鍊金·금을 정련했다)’는 의미로 고쳐 읽을 수 있는 부분이 보입니다. 보도자료에 ‘인경(因涇)’으로 해석된 구절은 ‘국경(國經·국가가 주도한 불교사경 제작)’으로 고쳐보았습니다. 사실 한문은 어디서 끊어 읽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천양지차가 됩니다. 동남리 목간의 경우 그동안 ‘망(亡)’과 ‘부(夫)’자를 떼어놓고 ‘망’은 ‘재고없음’, ‘부’는 ‘기술자’로 따로따로 해석했고요. ‘역(逆)’자 역시 ‘송(送)’자로도 읽혀 물품의 출납을 의미하는 ‘돌려받다(逆)’와 ‘보내다(送)’ 등으로 해독되었는데요. 그런데 손환일 소장은 ‘망부(亡夫)’를 문자 그대로 ‘죽은 남편’으로 해석했고요. ‘역(逆)’은 ‘금(金)’자와 붙여 ‘역금(逆金·정련되지 않은 금)’으로 판단했습니다. 창왕(위덕왕)은 45년간 즉위하면서 능사를 세우고, 국찰인 왕흥사를 창건하는 등 갖가지 불사를 일으켰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망부=관산성 전사 좌평 4명?’ 그래놓고 ‘목간1’을 해독하면 대강의 내용이 파악됩니다. “갑술년 11~12월 사이, 망부(죽은 남편) 1·2·3·4, 즉 4명을 위한 ‘사경 제작’에 쓰일 ‘정련되지 않은 금’(역금)을 궁궐에 바쳤다. ‘사경 제작은 국가주도로 이뤄졌다’(국경)”는 겁니다. 목간에는 부인 4명이 두 달 사이에 죽은 남편을 위해 바친 금의 양이 일자별로 기록되어 있는데요. 적게는 2냥(26g)에서 많게는 5냥(65.25g)까지 차이가 납니다. 모두 합하면 12냥13주(166g)에 이르죠. 사비 백제(538~660)의 도읍인 충남 부여 동남리에서 출토된 목간 5점. 6~7세기 문화층에서 출토되었다.|울산문화재연구원 제공궁금하죠. 왜 이 부인 4명은 죽은 남편 4명을 위해 이만한 금을 국가에 바친 걸까요. 이 대목에서 554년, 바로 ‘갑술년’에 일어난 ‘관산성 전투’가 소환됩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성왕’조는 “554년 성왕이 관산성을 공격하다가 신라군에 의해 전사했다. 좌평(장관) 4명과 연합군 2만9600명이 죽었다”고 했죠. 이 대목입니다. 좌평 4명…. 동남리 목간의 ‘망부’ 4명이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좌평 4명’일 가능성을 제기한 겁니다. 물론 100% 맞냐고 하면 할 말은 없습니다. 어느 사료에도 정답이 나와있지 않으니까요. 출토된 5점 명문목간 중 3점은 물품에 붙이는 꼬리표의 성격이었다.|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난수표 목간’이 ‘빅4 목간’으로? 그러나 성왕의 뒤를 이은 창왕(위덕왕)이라면 그랬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앞서 밝혔듯이 창왕은 관산성 전투의 책임을 오롯이 져야 할 분입니다. <일본서기>는 “왕위에 오른 뒤 패전을 자책하던 창왕은 555년 8월 신하들에게 ‘출가하고 싶다”는 의지를 밝힙니다. 그러나 신하들은 “잘못을 뉘우쳤으면 됐다”면서 “대신 백성 100명을 출가시키고, 왕은 갖가지 공덕을 이루라”고 달래죠. 출가를 단념한 창왕은 잇달아 사찰을 창건하고 죽은 이의 혼을 달래며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정국을 안정시키려고 애씁니다. 1995년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그 증거가 나왔죠. 출토된 사리감에서 ‘창왕 13년(567), 왕의 누이(성왕의 딸)가 사리를 공양한다(百濟昌王十三年太歲在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출토된 삼국~조선시대 목간은 730여점에 이른다. 주로 저습지에서 출토되거나 물 속에서 인양됐다. 그중 백제 목간은 100여점에 달한다.|‘경북대 인문학술원의 <한국목간총람>, 주류성, 2022’ 자료를 토대로 정리이 절은 창왕(위덕왕)이 죽은 아버지(성왕)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해석됩니다. 10년 뒤(577)에는 죽은 아들을 위해 왕흥사를 건립합니다. 동남리 명문 목간 역시 창왕의 불사와 연결지을 수 있답니다. 창왕이 관산성 전투(554년 7월)에서 순국한 원혼을 달래려고 ‘국가 주도의 사경 불사’(국경·國經)를 위해 금을 모았고요. 그때 전사한 4좌평의 부인이 거액의 금을 희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런 스토리라면 동남리 출토 목간은 백제의 ‘빅4’ 목간에 꼽힐 수도 있겠네요. 뭐 어떤 분은 그러실 지 모르겠네요. 난수표 같은 글자 몇 자로 지나친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냐고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출토유물을 단서로 그럴 듯한 스토리텔링을 만드는 것 또한 연구자나 기자의 몫이죠. 시쳇말로 얘기가 되는 논문이나 거리가 되는 주장 및 견해가 있다면 저는 냉큼 받아 소개해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이 기사를 위해 이용현 전 경북대 인문학술원 교수와 손환일 한국서화문화연구소장, 고상혁 동국대WISE캠퍼스 겸임교수, 황창한 울산문화재연구원장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참고자료> 손환일, ‘부여 동남리 출토 목간의 서체와 내용’, <백제연구> 78호, 충남대백제학연구소, 2023 이용현, ‘백제 왕도 출납 문서의 일례-부여 동남리49-2 유적 목간1, 2의 분석시론’, <백제학보>43호, 백제학회, 2023 고상혁, ‘부여 동남리 49-2번지 신출토 목간 소개’, <신출토 문자자료의 향연>(한국목간학회 38회 정기발표회), 2023 울산문화재연구원, <부여 동남리(49-2번지) 공공주택 신축부지 내 유적 문화재 시굴·정밀발굴조사 약식보고서> 2022 윤선태, <목간이 들려주는 백제 이야기>, 주류성, 2007 정훈진, ‘사비도성에서 발견된 구구단 백제 구구표 목간’, <한국의 고고학> 통권 32호, 2016년 6월 김영욱, ‘백제 이두에 대하여’, <구결연구> 제11집, 태학사, 2003 국립부여박물관, <백제목간>, 소장품조사자료집, 국립부여박물관, 2008
이기환의 Hi-story이기환 목간 동남리 구구단 남근형 신세한탄
[이기환의 Hi-story](78)1400년 전 ‘백제 냉장고’ 서동왕자가 사용했을까(2023. 04. 07 11:45)
2023. 04. 07 11:45 문화/과학
얼마 전 전북 익산 서동 생가터에서 공개된 6~7세기 ‘백제판 냉장고’를 현장에서 직접 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옵니다. 우선 규모가 비슷한 2기가 아주 정연하게 나란히 조성된 것도 흥미롭고요. 규모 또한 상상 이상입니다. 두 기 모두 길이가 4.9m(1호)~5.3m(2호), 너비가 2.4m(1호)~2.5m(2호)나 되는데요. 무엇보다 엄청 깊습니다. 깊이가 2.3m(1호)~2.4m(2호)나 됩니다. 사다리를 타야 겨우 오르내릴 수 있습니다. 각 냉장고의 벽면을 정연하면서 조밀하게 쌓아놓은 것도 인상적입니다. 전북 익산 서동생가터의 백제판 냉장고에 설치된 통기구는 찬 공기가 깔리고 더운 공기가 위로 올라가는 대류현상의 원리를 이용했다. / 전북문화재연구원 제공 더운 바람을 내보내는 통기구 두 유구의 성격이 ‘백제판 냉장고’였음을 알리는 장치가 백미죠. 각 유구의 동쪽 벽 위쪽에 설치된 3개씩의 통기구인데요. 통기구는 50㎝ 간격을 두고 경사진 돌출 구조로 조성했습니다. 이 통기구는 더운 공기를 밖으로 배출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찬 공기가 바닥에 깔리고 더운 공기가 상승하는 대류의 원리를 이용한 거죠. 바닥은 습기를 차단하도록 잡석과 모래성분이 섞인 점토를 섞어 다졌습니다. 그렇다면 냉장고가 아니라 석빙고(냉동고)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석빙고에서는 얼음 녹는 물을 빼내는 배수구가 예외 없이 보이는데요. 이번에 확인된 두 유구에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두 유구의 바닥에서 참외와 들깨, 밀, 조, 팥 같은 재배작물과 딸기와 다래, 포도속, 산뽕나무 같은 채집 식물류의 흔적이 보였는데요. 그래서 백제판 저장고, 즉 냉장고로 특정할 수 있었던 겁니다. 아직 풀지 못한 수수께끼가 있습니다. 윗부분에 두 냉장고를 연결하면서 ‘ㄱ’ 자로 연장되는 좁은 통로가 있습니다. 이 통로가 무엇인지 알쏭달쏭합니다. 또 하나는 두 냉장고를 덮은 장치가 있었을 텐데요. 보통의 석빙고는 아치형으로 덮었는데, 이 두 냉장고의 지붕 구조는 아직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이밖에 1·2호 냉장고에서 각각 확인된 토기 뚜껑과 굽 달린 접시를 맞춰보니 한 벌이었고요. 또 각각의 냉장고에서 수습된 토기편을 붙여보니 꼭 맞았습니다. 두 냉장고를 동시대에 사용했음이 명백해졌습니다. 두 냉장고와 인접한 곳에서 지상 건물터와 구상유구(도랑처럼 두른 유구)가 확인됐는데요. 25평(길이 9.47m×너비 8.57m) 규모의 건물터에서는 기와편이 확인됐고, 취사시설인 부뚜막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거주시설은 아니었던 겁니다. 이번처럼 통기구 달린 냉장고는 아니지만 공주 공산성과 부여 관북리 등 궁궐 유적에서도 이와 같은 저장고가 보였는데요. 따라서 이번에 확인된 냉장고는 백제 왕실과 관련된 시설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전북 익산 서동 생가터에서 확인된 각 4평 규모의 냉장고. 깊이가 2.3~2.4m 정도 된다. 사다리를 타고 오르내려야 하는 깊이다. 백제판 자연냉장고에는 더운 공기를 밖으로 빼는 통기구가 3개씩 설치돼 있다. / 전북문화재연구원 제공 서동 생가터에 웬 냉장고? ‘익산의 백제 왕실’이라면 일단 서동왕자, 즉 무왕과 선화공주를 떠올리게 되죠. 백제 냉장고가 확인된 곳이 다름 아닌 서동왕자의 생가터라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이번 발굴도 익산시가 서동 생가터를 정비하고 이 일대를 역사공원으로 조성하는 과정에서 이뤄진 것인데요. 이 대목에서 <삼국유사> ‘기이 무왕’조를 볼까요. “서동의 어머니는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못의 용과 관계를 맺어 아들을 낳았다. 아이의 이름이 서동(맛동)이다. 늘 마를 캐어 팔아 생업으로 삼았으므로 서동(薯童)이라 했다.” 익산으로 천도했다는 무왕 시대의 서울이라면 익산이겠죠. 그렇다면 서울 남쪽의 못가가 어디일까요.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조선의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 ‘전라도·익산’조를 살펴볼까요. “마룡지(현 연동제 연못)는 오금사 남쪽 100보 자리에 있다. 서동대왕의 어머니가 축실(築室·집을 지은)했던 곳이라 한다.” ‘용(龍·임금)이 된 맛동(서동)이 태어난 연못’이라 해서 ‘마룡지’라는 이름이 붙었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이곳 주변에는 서동의 설화가 담긴 지명이 많습니다. 생가터 뒤쪽에는 오금산(해발 125m)이 있는데요. 산 정상부에는 백제 때 축성한 토성이 있고요. 남쪽 기슭에는 서동이 어머니를 위해 지었다는 오금사가 있었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서동이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섬겼고, 마를 판 땅에서 다섯 개의 금덩어리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서동은 선화공주의 환심을 사려고 “나는 어릴 때부터 마를 캐던 곳에 황금을 흙처럼 많이 쌓아 두었다”(<삼국유사>)고 자랑했습니다. 생가터에서 500m 정도 떨어진 곳에는 물이 고이는 용샘이 있는데요. 이 마을을 용골이라 합니다. 설화와 역사 사이 이런 이야기들은 설화나 야사의 모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 등 정사에 기록되지 않았거든요. 그러니 서동 생가터에서 확인된 백제 냉장고는 ‘서동과는 전혀 관계 없는 생뚱맞은 유구’일 수 있을까요. 뭐 따지고 보면 서동왕자, 즉 백제 무왕(재위 600~641)의 익산 천도 기록 자체도 <삼국사기>에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왕의 익산 천도와 서동왕자-선화공주의 애틋한 사랑과 혼인 이야기 및 미륵사 창건 설화 등도 ‘가짜’ 혹은 ‘과장’ 뉴스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동안 백제를 한성백제(기원전 18~기원후 475)와 웅진백제(475~538), 사비백제(538~660) 등으로 구분했는데요. 이제는 ‘익산백제’도 당당히 포함됐거든요. 다른 예를 들 것도 없습니다.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백제역사유적지구’ 목록에 공주(2곳), 부여(4곳)와 함께 익산(2곳·왕궁리 유적과 미륵사터)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중 왕궁리 유적을 볼까요. 우선 지명이 심상치 않은 왕궁리(王宮里)인 만큼 갖가지 억측이 나왔죠. 개중에는 고조선의 준왕이 해로를 따라 이곳에 와서 나라를 세웠다는 설, 후백제 견훤 도읍설, 삼국통일 후 고구려 유민을 위해 세운 보덕국의 수도라는 설 등 다양한 견해가 나왔습니다. 물론 백제 무왕의 별도(別都)나 천도설이 가장 유력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문헌에서도 무왕의 익산 천도 및 행정수도설이 나오지 않았던 게 약점이었죠. 냉장고와 인접한 곳에서 지상 건물터와 구상유구가 확인됐다. 그중 25평 규모의 건물터가 확인됐는데, 취사시설인 부뚜막은 보이지 않았다. 거주시설은 아니었다. 냉장고와 관련된 시설로 보인다. / 전북문화재연구원 제공 <관세음응험기>의 비밀 1970년 마키타 다이료(牧田諦亮·1912~2011) 일본 교토대(京都大) 교수가 10세기쯤 편찬된 <관세음응험기>를 찾아냈는데요. 여기에 무왕의 익산 천도 기사가 보입니다. 즉 “백제 무광왕(무왕)이 지모밀지(금마·익산)로 천도해 사찰을 경영했다(정관 13년·639).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내리쳐 새로 지은 제석정사가 재해를 입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관세음응험기>는 제석정사의 피해를 언급하면서 “탑 아래 초석 속에 넣어두었던 귀중품 가운데 불사리병과 금강반야경만이 기적적으로 무사했다”고 기록했습니다. 1965년 왕궁리 석탑 해체 수리 때 사리보(舍利寶)는 물론, 금판 금강반야바라밀경 19매가 발견됐습니다. <관세음응험기> 기록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죠. 이후 왕궁리에서는 공주 공산성이나 부여 부소산성 등 백제 도성에서나 볼 수 있는 상급의 유물이 계속 나왔고요. 한반도에서는 한 번도 확인되지 않은 최고급 중국제 청자 조각 등도 출토됐습니다. 또 ‘5부명’ 인장와와 ‘수부(首府·일국의 군주 거소 및 중앙정부가 있는 도회·수도) 명문인장와’는 이곳이 도성이었음을 암시하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삼국사기> ‘잡지’는 “옛날에 오부(五部)를 두어 37군, 76만 호로 나누어 통치했다”고 했고요. 또 <주서> ‘이역전·백제조’는 “수도에 1만 가가 있어 이를 상부·전부·중부·하부·후부 등 5부로 나누었다”고 했는데요. 왕궁리에서는 <주서>에 등장하는 5부 중 후부(後部)를 제외한 4부의 명칭이 모두 발견됐습니다. 서동왕자는 가짜뉴스 퍼뜨린 스토커 그렇다면 ‘서동왕자와 선화공주의 사랑’과 ‘미륵사 창건 설화’는 어떨까요. 두 분의 사랑 이야기는 워낙 유명하죠. 그러나 요즘 같으면 서동왕자는 가짜뉴스를 퍼뜨리면서 좋아하는 여인(선화공주)을 스토킹해 결국 차지해버린 ‘나쁜 남자’로 낙인찍힐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남의 나라(신라)에 가서 아이들에게 ‘선화공주가 밤에 서동을 몰래 안고 간다’는 내용의 ‘서동요’를 퍼뜨렸고요. 가짜뉴스의 피해자가 되어 궁에서 쫓겨난 공주를 찾아가 감언이설로 꾀어 관계를 맺고 부인으로 맞이했잖습니까. 그런데 백제로 돌아와 왕위에 오른 서동, 즉 무왕과 선화공주, 즉 왕후가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 밑 못가에 이르렀을 때 미륵삼존이 나타났다죠. 이때 부인(선화공주)이 “이곳에 큰 절을 세워달라”고 간청했고요. 무왕의 명을 받은 지명법사가 하룻밤 사이에 3탑3금당을 갖춘 절을 세웠다고 하죠. 그것이 미륵사입니다. 이를 뒷받침하듯 훗날의 고고학 발굴에서 미륵사가 ‘중앙탑+강당’, ‘서탑+강당’, ‘동탑+강당’ 등 3탑3강당으로 조성된 것이 입증됐고요. 연못과 같은 습지에 조성돼 있다는 것도 확인됐습니다. 절터의 주춧돌이 다른 절과 달리 높게 세워진 모습인데요. 늪지라는 특수성 때문에 주춧돌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는 거죠. “산을 헐고 연못을 메워 절을 조성했다”는 <삼국유사> 기록과 일치합니다. 미륵사 / 국립익산박물관 제공 쌍릉의 주인공 2009년 ‘서동왕자와 선화공주’ 설화가 거짓일 수도 있다는 식의 발굴결과가 나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죠. 당시 미륵사지 서탑에서 ‘탑을 세운 이는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 왕후인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명문금판이 나왔거든요. 한바탕 난리를 피웠죠. 만약 무왕의 부인이 1명이 아니라면 어떨까요. 미륵사가 ‘3탑3금당’으로 조성됐다고 했죠. ‘서탑=사택적덕의 딸’이라면, ‘중앙탑=선화공주’, 그리고 ‘동탑=또 다른 무왕의 부인’일 수도 있잖습니까. 굳이 ‘서동왕자와 선화공주’ 설화를 버릴 필요가 없다는 얘깁니다. 익산 쌍릉의 주인공을 두고도 논란이 벌어졌죠. 최근 재발굴 결과 대왕릉의 주인공은 사실상 ‘무왕’으로 확정됐습니다. 대왕묘에서 확인된 102개의 인골 분석결과가 그것을 말해주는데요. 인골의 키가 161~170㎝, 나이는 50대 이상의 남성 노년층, 연대는 620~659년으로 추정됐거든요. 그 시대에 이만한 크기의 무덤을 조성한 인물이라면 무왕이 틀림없다는 견해가 정설이 된 겁니다. 물론 소왕릉의 주인공은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는데요. 그 주인공이 선화공주일 가능성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무왕 부부의 음식 보관한 냉장고? 다시 백제판 냉장고가 확인된 서동 생가터로 돌아가 볼까요. 냉장고 확인지점에서 오른쪽으로 약 20m 떨어진 곳에서 1980년대부터 기와 및 토기편이 계속 출토됐습니다. 건물을 세운 흔적인 초석까지 확인됐는데요. 2011년에는 왕궁리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와 같은 종류의 토기편(뚜껑)이 연못(마룡지) 둑에서 수습됐습니다. 그래서 서동의 어머니가 ‘집을 세웠다’는 이른바 ‘축실(築室)’의 방증 자료로 삼았는데요. 그 인접 지역에서 새롭게 냉장고 시설이 확인된 겁니다. 서동 생가와 냉장고 사이에 어떤 연관성을 찾을 수 있는지 궁금하네요. 확인된 유기물을 대상으로 한 연대측정 결과 6~7세기 정도로 추정됐는데요. 어느 정도 무왕의 생존 연대(재위 600~641)와 일치합니다. 앞으로 서동의 어머니가 집을 지었다는 바로 그곳(냉장고 확인지점에서 20m 떨어진 지점)을 조사한다는데요. 어떤 유구와 유물이 나올지 궁금합니다. 서동은 어릴 적부터 마를 캐 지극정성으로 어머니를 공양했다고 했죠. 그 모습에 하늘도 감복했는지 마를 캐던 뒷산에서 금덩이를 발견했고요. 서동은 어머니를 위한 절인 오금사를 짓고, 후에 임금이 된 거고요. 그렇다면 이번에 확인된 냉장고 역시 서동, 즉 무왕과 그 부인(선화공주)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요. 두 분이 드신 곡물과 과일, 채소, 음료를 보관한 왕실의 냉장고일 수 있잖아요. 1400년 동안 서동, 즉 무왕과 관련된 갖가지 설화가 전해졌는데요. 이번에 또 하나의 이야깃거리가 추가됐네요. 고고학적 상상력까지 가미된 스토리텔링입니다.
이기환의 Hi-story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