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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총 98 건 검색)

‘차별 딛고 일어서라’…변희수재단 준비위, 트랜스젠더 청년에 생활비 지원
‘차별 딛고 일어서라’…변희수재단 준비위, 트랜스젠더 청년에 생활비 지원
2024. 08. 19 21:05사회
... 청년 긴급 생활비 지원사업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subinhann@kyunghyang.com 변희수재단 준비위원회가 트랜스젠더 청년에 대한 긴급 생활비 지원을 위한 구체적인 사업계획을 19일...
트랜스젠더변희수재단
넘어져도 일어설 수 있게···‘변희수재단 준비위’, 트랜스젠더 청년 지원 시작
넘어져도 일어설 수 있게···‘변희수재단 준비위’, 트랜스젠더 청년 지원 시작
2024. 08. 19 14:14사회
... 띵동 이사장이 앉아있다. 한수빈 기자 변희수재단 준비위원회(준비위)가 트랜스젠더 청년에 대한 긴급 생활비 지원을 위한 구체적인 사업계획을 19일...
트랜스젠더변희수재단
[NGO 발언대]변희수 하사가 대전현충원으로 가던 날
[NGO 발언대]변희수 하사가 대전현충원으로 가던 날
2024. 07. 07 20:30오피니언
... 6월24일 고 변희수 하사가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순직 결정이 되기만을 간절히 기다렸는데, 막상 그 순간을 마주하게 되니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감정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NGO 발언대정민석
변희수 하사, 숨진 지 3년 만에 현충원에 눕다
변희수 하사, 숨진 지 3년 만에 현충원에 눕다
2024. 06. 24 20:52사회
... 24일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리고 있다. 문재원 기자 mjw@kyunghyang.com “고 변희수 하사는 수년간 갖가지 혐오적 발언과 차별적인, 모욕적인 언사를 견뎌내고 긴 시간을 돌아 현충원에...
하사변희수안장현충원군인발언안장식국립대전현충원

스포츠경향(총 5 건 검색)

홍석천, 故 변희수 전 하사 추모 “많이 미안”
홍석천, 故 변희수 전 하사 추모 “많이 미안”
2021. 03. 11 16:47 연예
유튜브 채널 ‘홍석천T방송인 홍석천이 故 변희수 전 육군 하사를 추모했다. 홍석천은 10일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마음속 이야기(위로)’라는 제목의 영상을 게재했다. 홍석천은 “제가 어쩔 수 없이 우리나라 성 소수자들의 대표 얼굴이기도 하고 제가 커밍아웃한 지 21년이 됐다”며 말문을 열었다. 홍석천은 “제가 커밍아웃한 후에도 공개적으로 커밍아웃하신 분들이 계신데 그 중 한 분이 어제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소식을 뉴스를 통해 들었다”며 故 변희수 전 하사를 언급했다. 그는 “지난해 고인의 소식을 뉴스로 접하고 나보다 더 힘든 길을 가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군대라는 정말 특수한 조직에서 저렇게 용기를 낸다는 것은 정말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홍석천은 “그의 선택에 응원을 보냈습니다만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을 해보면서 굉장히 미안하기도 하다”며 “제가 먼저 ‘봅시다’라고 했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그런가 하면 홍석천은 커밍아웃 당시를 회상하기도 했다. 그는 “제가 2000년도 가을 커밍아웃할 때에도 사실은 죽기를 각오했다”며 “몇번 쯤은 너무 힘들고 외로운 시간이 많으니까 정말 죽고 싶을 때도 있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런 소식을 더 이상 안 듣는 세상이 왔으면 하는 바람”이라며 “행복해지고 싶어하는 멋지고 당당하고 용감한 고 변희수 전 하사의 명복을 빈다”고 애도의 뜻을 전했다. 한편 故 변희수 전 하사는 2019년 휴가 중 성전환 수술을 받고 복귀했지만, 군은 성전환 수술을 한 변 전 하사에 대해 심신장애 전역 대상자로 판단해 지난해 1월22일 강제전역 처분을 내렸다. 이후 故 변희수 전 하사는 지난해 8월 대전지법에 전역처분 취소 행정소송을 제기했지만, 3일 오후 충북 청주시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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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리수, 故 변희수 전 하사 추모
하리수, 故 변희수 전 하사 추모
2021. 03. 04 13:00 연예
하리수 인스타그램가수 겸 방송인 하리수가 변희수 전 하사의 사망 소식에 추모 글을 남겼다. 하리수는 4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故 변희수 전 하사의 사진과 함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글을 남겼다. 변희수 전 하사는 3일 오후 5시 49분쯤 충북 청주 상당구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앞서 고인은 2019년 휴가 중 외국서 성전환 수술을 받고 귀국한 뒤 군 복무 의사를 밝혔으나 군에서 심신장애 3급 판정을 받고 1월 강제 전역조치를 받았다. 이후 고인은 지난 2월 육군본부에 재심사 인사 요청을 제기했으나 육군은 규정된 기준과 절차에 따라 적법하게 이뤄졌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변희수 전 하사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김웅 국민의힘 의원 등 정계 인사들도 고인에 대한 애도를 표했다. 한편 하리수는 2001년 CF 모델로 데뷔해‘대한민국 1호 트랜스젠더 연예인’으로 이름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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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환' 변희수 전 하사, 자택서 숨진 채 발견
'성전환' 변희수 전 하사, 자택서 숨진 채 발견
2021. 03. 03 20:59 생활
성전환 수술을 받은 뒤 강제 전역 판정을 받은 변희수 전 육군 하사.연합뉴스성 전환수술(성확정수술) 후 전역 조치된 변희수 전 하사가 3일 청주시 상당구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에 따르면 변 전 하사가 이날 오후 5시 49분쯤 자택에서 숨져 있는 것을 출동한 소방대가 발견했다. 상당구 정신건강센터는 상담자로 등록된 변 전 하사가 지난달 28일 이후 연락이 안 돼 극단적 선택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 소방서에 신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으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경우, 자살 예방 핫라인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등에 전화하면 24시간 상담을 받을 수 있다.
20대 女 합정역 2호선 승강장서 나체 상태로 난동 “변희수에 자유를…”
20대 女 합정역 2호선 승강장서 나체 상태로 난동 “변희수에 자유를…”
2020. 10. 13 12:33 생활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계 없음. 게티이미지뱅크서울 마포구 지하철 합정역 2호선 승강장에서 20대 여성 A씨가 나체인 상태로 난동을 피우다 경찰에 체포됐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A씨는 지난 10일 오후 1시쯤 합정역 승강장에서 상의와 하의, 속옷까지 모두 벗은 상태로 “변희수 하사의 자유를 보장하라”고 외치며 10여분간 소동을 피운 것으로 알려졌다. 승강장에 있던 시민의 신고로 역무원이 와 A씨를 제지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경찰이 출동해 A씨를 현행범으로 체포했다. 경찰에 잡힐 때 A씨는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변 전 하사는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 수술(성확정 수술)을 한 뒤 지난 1월 육군으로부터 강제 전역을 당한 인물이다. 변 전 하사는 여군으로 복무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육군 본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경찰 관계자는 중앙일보에 “경찰 조사에서는 A씨가 변희수 하사나 성 소수자 관련 언급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경찰은 A씨를 공연음란 혐의로 조사한 뒤 추가 범행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 당일 석방했다.
나체

주간경향(총 3 건 검색)

[오늘을 생각한다]변희수는 언제까지 오해받을까
[오늘을 생각한다]변희수는 언제까지 오해받을까(2022. 12. 16 11:29)
2022. 12. 16 11:29 오피니언
지난 12월 1일, 육군은 변희수 하사에 대한 전공사상심사를 진행하고 ‘순직 비해당’ 결정을 했다. 보도가 쏟아지는 걸 보고 직감했다. ‘또 무성한 오해가 많겠구나.’ 아니나 다를까, 기사 댓글 창마다 잔인한 오해가 가득했다. 승인도 받지 않고 해외에 나가서 성전환 수술을 했는데 왜 순직 결정을 해줘야 하냐는 오해, 성전환하고 여군으로 입대했다면 문제없었을 거란 오해, 변희수가 계속 복무했으면 여군들이 불편했을 거란 오해, 자살했는데 어떻게 순직(殉職)이냐는 오해. 하나하나 설명하라면 못할 것도 없지만 털썩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변희수가 군에서 쫓겨난 때로부터 어언 3년이 지났다. 그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3년을 꼬박 똑같은 오해를 마주하고 있다. 서로 다른 내용을 다루는 기사도 ‘변희수’ 세 글자만 나오면 똑같은 댓글이 달린다. 넘쳐나는 오해가 모여 변희수를 안타까운 결심으로 내몬 뒤에도 그를 따라다니는 말들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설명과 반박의 영역을 벗어난 것일까? 변희수는 이다지도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인 걸까? 그런 생각에 마음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잘 모르고 함부로 말하는 이들을 원망하지는 않는다. 야속하지만 그곳에 화를 쏟아도 달라지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진짜 문제는 국방부와 육군이 그런 오해를 관조하며 즐기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 세상이 오해로 가득해 든든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재판으로, 권고로 번번이 깨지면서도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억지를 쓰는 자신감도 여기에서 나온다. 공무원이 국가의 위법한 처분으로 비관 끝에 극단적 선택을 했는데 순직이 아니라는 건 전례 없는 억지다. 트랜스젠더 여성에게 남성의 성기가 없다며 장애 판정을 하고 군대에서 쫓아낸 억지, 사망일은 숨이 멎은 날이 아니라 시신으로 발견된 날로 봐야 한다며 변희수가 군인 신분으로 사망하지 않았다고 우기던 억지 역시 황당하기는 매한가지다. 미안한 마음으로 오해를 바로잡고 고인의 명예를 회복해야 할 주체가 도리어 오해의 뒤편에 숨어 모든 책임을 회피한다. 교수신문이 전국 대학교수 935명을 대상으로 올해의 사자성어를 물었더니 ‘과이불개(過而不改)’를 꼽은 사람이 제일 많았다고 한다. 잘못하고도 고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 군에 딱 들어맞는 이야기다. 법원이 변 하사의 강제 전역이 위법하다며 이를 취소한 뒤로 변희수와 유가족은 군으로부터 사과 한마디 받질 못했다. 유가족이 받아든 건 변희수의 죽음에 군은 책임이 없다는 순직 비해당 결정 통지서뿐이다. 위법 처분으로 사람을 죽여놓곤 법원의 판단도, 대통령 소속 기구의 권고도 ‘나 몰라라’다. 군이 잘못했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 한, 변희수를 둘러싼 오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변희수에게 쏟아지는 무성한 혐오와 오해는 군이 만들고 있다.
오늘을 생각한다
[박주연의 메타뷰](4)“또 다른 변희수의 죽음만은 막아야죠”(2022. 02. 25 15:01)
2022. 02. 25 15:01 사회
ㆍ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 대표 정민석씨 2월 27일은 변희수 하사 1주기다. 육군 제5기갑여단에서 복무하던 중에 성전환 수술을 한 변 하사에 대해 육군은 심신장애 판정을 내리고 2020년 1월 강제전역 결정을 내렸다. 여군으로 살고 싶었던 변 하사는 기자회견을 열고 “기회를 달라”고 호소하고 전역처분 취소소송을 내 는 등 투지를 불태웠다. 하지만 첫 재판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월 27일 변희수 하사 1주기를 며칠 앞둔 지난 22일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 대표인 정민석씨가 서울 종로구 돈의문박물관마을 입구에서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트랜스젠더 군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린 희수는 꿈을 이루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그의 죽음은 우리 사회에 무거운 숙제를 남겼다”고 말했다. / 김영민 기자 그의 죽음은 묻는다.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성소수자들은 우리 사회에서 공존할 수 없냐고. 엄연히 존재하는 사회구성원으로서 차별받지 않고 꿈을 이룰 수 있는 권리에서 끝내 배제되는 거냐고. 답을 찾는 것은 남겨진 자들의 몫이다.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의 대표이자 인권재단 사람의 사무처장인 정민석씨(44)도 해법을 구하려, 변화를 일구려 고군분투 중이다. 동성애자로, 이미 인생에서 수많은 어두운 터널을 지나온 그는 동성애자인권연대 창립 초기부터 지금까지 25년째 인권활동을 하며 오늘도 또 다른 변희수들을 만나고 있다. 게이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종로의 기적>(2010)의 주인공이자 에세이 <브라보 게이 라이프>(2011)의 저자이기도 하다. 지난 2월 22일 경향신문 사옥에서 정씨를 만났다. -변희수 하사 1주기를 맞는 소회가 어떻습니까. “벌써 1년이 지났구나, 지난 1년간 나는 무엇을 했나, 생각해요. 희수는 참 좋은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마지막에는 깊은 상처와 슬픔, 원망과 분노 같은 감정을 품고 떠났을 거예요. 저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껴요. 그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으려면, 희수가 생전에 말한 대로 단지 성 정체성을 이유로 불이익을 받는 사회가 되지 않도록 더 많은 사람이 목소리를 내야 해요.” -고인과 개인적 인연이 있었나요. “희수가 부사관 양성 특성화고(삼계고교) 3학년일 때 띵동이 매달 한 번씩 열었던 거리이동 상담소인 ‘띵동 포차’에 찾아왔어요. 희수는 질문은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군인 이야기만 했어요. 큰 자부심이 느껴졌어요. 스스로 닉네임도 ‘명예’라고 지었어요. 포카리 분말 같은 군 상품들도 사와서 나눠줬고요. 그런 희수가 신기했어요. 저를 비롯한 대다수 성소수자들에게 군 생활은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거든요.” -고 변 하사는 고교시절에 이미 자신의 성 정체성을 알았던 거군요. “희수는 당시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깊이 고민하던 때였어요. 저는 희수가 트렌스젠더라고 확신했지만 말하지 않았어요. 결국 스스로 찾아야 하니까요. 희수는 그렇게 여러 번 띵동 포차에 찾아왔어요. 군에 복무하고부터는 띵동에 후원금을 내며 가끔 안부전화만 걸어왔고요. 그러다 어느 날 TV에서 희수가 기자회견하는 장면을 본 거예요. 이후 ‘변희수 하사의 복직과 명예회복을 위한 공동대책위’가 꾸려졌을 때 띵동도 함께했어요.” 고 변희수 하사는 2020년 1월 22일 자신의 얼굴과 실명을 공개하며 기자회견 카메라 앞에 섰다. 육군본부가 그에게 ‘강제전역’을 결정한 날이었다. 그가 세상을 등진 뒤인 2021년 10월 7일 1심 법원은 고인이 생전에 제기한 전역처분 취소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법무부가 육군에 항소 포기 지휘를 함에 따라 같은해 10월 26일 고 변 하사의 승소가 최종 확정됐다. -그는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요. “제가 희수가 아니니 말하는 게 조심스럽지만, 저는 2월 27일로 추정(변 하사는 3월 3일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되는 사망 시점에 주목해요. 전역 만기일(2021년 2월 28일)을 딱 하루 앞둔 날이거든요. 또 희수는 경제적으로 몹시 힘들었어요. 아르바이트라도 해보려 했지만 이미 얼굴과 이름이 알려진 터라 번번이 실패했어요. 선택의 폭도 좁았고요. 희수가 군을 상대로 싸우는 동안 버틸 수 있도록 모금활동을 벌이지 않은 게 지금은 많이 후회돼요.” 성전환 수술을 받은 후 강제전역 판정을 받은 변희수 하사가 2020년 1월 22일 서울 마포구 군인권센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입장 표명 후 눈물을 흘리며 경례하고 있다. / 연합뉴스 -그의 죽음은 우리 사회에 무엇을 남겼다고 생각하나요. “그는 트랜스젠더 군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렸어요. 사람들은 2년 만에 갑자기 여군이 되면 군대는 받아줘야 하느냐부터 시작해 각자의 입장을 갖고 희수에게 악플을 달았죠. 하지만 그런 혼란이 희수가 우리 사회에 준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그 과정이 없었다면 얼마나 다양한 존재가 공존하고 있는지 상상하지 못할 테니까요. 하지만 군을 비롯해 희수를 애써 지우려는 이들이 있어요. 성소수자들의 존재와 그에 따른 당연한 권리를 요구해야죠. 특히 취업문이 좁은 트랜스젠더에게도 정당한 노동의 기회가 주어져야 하고요.” -그러고 보면 트랜스젠더가 취업할 수 있는 곳이 상당히 제한돼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2020년 국가인권위원회의 ‘트랜스젠더 혐오차별 실태조사’ 결과를 봐도 구직 경험이 있는 트랜스젠더 중 절반이 넘는 57.1%가 성 정체성을 이유로 구직을 포기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고요. “아르헨티나는 작년 7월에 트랜스젠더의 정규직 취업 장려법을 공포했어요. 행정, 사법, 입법 등 3개 권력기관은 채용 인력의 1%를 트랜스젠더에 의무 배정하고, 트랜스젠더를 고용하는 민간 기업에는 1년간, 중소기업에는 최장 3년간 감세 등 특혜를 줘요. 성전환 수술을 하고 법률적으로 성을 정정한 경우는 물론이고, 성전환 수술을 안 받았으나 생물학적 성과 자신이 느끼는 성이 다른 경우도 트랜스젠더로 인정하고 있어요. 우리도 그런 날이 오면 좋겠어요.” 2020년 국가인권위원회 실태조사는 국내에 거주하는 만 19세 이상 트랜스젠더 591명을 대상으로 실시됐다. 조사결과 트랜스젠더의 65.3%는 지난 1년간 성 정체성을 이유로 차별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법적으로 성별을 정정한 응답자는 8%에 그쳤다. 86%는 의료비용, 법적 절차, 건강 부담 등의 이유로 성전환 수술이 전제된 법적 성별 정정을 시도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구직 경험이 있는 트랜스젠더들은 채용과정에서 외모가 남자 또는 여자답지 못하고(48.2%), 주민등록번호에 제시된 성별과 성별 표현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37.0%)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응답자의 57.1%는 우울증, 24.4%는 공황장애로 치료받은 적이 있다고 답했다. 22.3%는 가족 등으로부터 성적 지향을 강제로 바꾸도록 유도하는 전환치료를 권유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변 하사의 사망과 법원의 전역 처분 취소 판결 후 우리 군에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국방부가 트랜스젠더 군 복무 관련 연구 용역을 국방연구원에 발주했다는 보도를 봤지만 실제로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현재까지 트랜스젠더 관련 정책은 전무해요. 반면 지난해 1월 기준으로 총 21개 국가에서는 트랜스젠더임을 밝히고 군 복무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있어요. 이들을 위한 별도의 규정과 지침을 마련한 나라도 있고요. 미국의 몇몇 주와 영국에서는 이들에 대한 의료지원도 제공하고 있어요.” -트랜스젠더 군인 관리지침은 없지만 동성애자 군인 관리지침은 있지요. 특히 군형법 제92조 6의 ‘항문성교나 그 밖의 추행을 한 사람은 2년 이하 징역에 처한다’는 규정에 대해 오랫동안 인권침해 논란이 있었어요. 폭행이나 협박 없이 합의된 동성 간 성관계도 처벌 대상인데, 동성애자 병사의 경우 민간인 애인과 휴가 때 영외에서 잠자리를 가져도 처벌되나요. 정민석씨는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군 복무 시절 정신병원에 반강제적으로 수용됐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일본으로 떠날 계획이었지만, 육우당의 죽음 후 청소년 인권문제에 집중했다. / 김영민 기자 “같은 군인 신분이 아니더라도, 적발될 경우 이 조항을 들어 처벌이 가능해요. 어느 집단에 동성애자가 있으면 성적으로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는 전제가 깔린, 그래서 솎아내야 한다는 의중이 담긴 동성애 혐오적 조항이에요. 이 법의 폐지를 위해 십수년간 싸워왔지만 번번이 좌절했어요. 헌법재판소는 세차례나 합헌 결정을 내렸고요.” -정민석씨도 아주 힘겨운 군 복무 시절을 겪은 것으로 알아요. “만 스물한 살 때 군에 입대하고 2~3개월 후, 사귀던 동성 친구로부터 온 편지를 부대원들이 장난으로 공개했어요. 놀림이 이어지면서 아우팅(성소수자의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에 대해 본인의 동의 없이 밝히는 행위)에 대한 공포를 극심하게 느꼈죠. 탈영을 감행했다가 겁이 나 하루 만에 돌아갔어요. 군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저를 2개월 동안 정신병동에 반강제적으로 입원시켰어요. 매시간 신경안정제를 먹어야 했고, 밤에는 독방에서 자야 했어요. 수치스러운 생활의 연속이었지만 부모님을 생각하며 견뎠는데, 군의관이 부모님께 저의 성 정체성을 알렸어요.” -부모님이 많이 놀라셨겠군요. “한걸음에 달려오셨어요. 충격을 받은 부모님은 제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았어요. 제가 바뀌기만 바라셨죠. 하소연하거나 다그치며 설득하려 하셨어요. 부모님 생각을 하면 늘 마음이 아파요.” -몇년 전 이름을 정욜에서 정민석으로 바꾼 이유도 친척들이 언론보도로 알아볼 것을 걱정하는 부모님 때문이었나요. “50%는 그래요. 저도 욜(YOL은 터키어로 길을 뜻함)은 이름이 특별하니까 흔한 이름을 갖고 싶었어요.” -지금은 부모님과의 관계가 어떤가요. “제 성 정체성과 관련한 이야기는 아예 서로 꺼내지 않아요. 서로에게 큰 상처니까요. 부모님은 제 마음이 아플까봐 늘 걱정하세요. 저는 그런 부모님 앞에서 제가 얼마나 행복한지를 많은 말로 과장되게 설명해요. 하지만 저를 포함한 성소수자들이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 행복하면 좋겠어요.”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 / 경향신문 자료사진 -군 제대는 정상적으로 했습니까. “군의관은 제가 너무 멀쩡해 바로 전역할 수 없다고 판단했어요. 자대로 복귀할 것인지, 다른 부대로 갈 것인지 묻길래 자대로 복귀하겠다고 했어요. 이후 병장으로 제대할 때까지 다른 병사들이 피해 보지 않도록 스스로 스킨십을 멀리하면서 방어막을 쳤던 것 같아요.” -언제 자신의 성 정체성을 깨달았나요. “고등학생 때예요. 워낙 조용해 여자애 같다는 놀림을 받기도 했지만 처음에는 사춘기가 늦게 오나 보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차츰 제가 다른 친구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평생 가져가야 할 비밀이라고 생각했죠. 당시 TV 시사 프로그램에서 트랜스젠더를 다뤘는데, 화장하는 그들을 보며 저는 그들과도 또 다른 부류임을 알았어요. 1997년 세종대 일어과에 입학했는데, 교내 게시판에 ‘대학동성애자인권연합’이 붙인 대자보를 봤어요. 몇 번을 망설이다 용기를 내 찾아갔죠.” -비슷한 고민을 하는 또래들을 처음으로 만나게 된 거군요. “제 인생의 첫 번째 전환점이었어요. 모임 장소가 서울시립대 후문에 있는 반지하 자취방이었는데, 퀴퀴한 냄새 속에서도 모두가 환한 얼굴이었어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용기를 얻었어요. 이후 저도 인적이 드문 새벽시간에 대학들을 돌아다니며 대자보를 붙였어요. 저와 같은 고민을 할 누군가에게 우리가 있음을 알리고 싶었거든요. 대학동성애자인권연합은 이후 동성애자인권연대(동인련)로, 지금은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행성인)로 바뀌었어요.” -원래 꿈은 뭐였나요. “제빵사요. 대학 졸업 후 빵을 배우러 일본으로 유학을 떠날 생각이었어요. 성소수자 차별이 심한 한국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도 컸고요. 하지만 2003년 4월, 만 열여덟 살 육우당(본명·윤현석)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후 포기했어요. 그의 죽음을 수습해야 했고, 책임감을 느꼈으니까요. 청소년 성소수자 인권문제에 적극 발언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자살로 삶을 마감하는 청소년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학교에서 커밍아웃(성소수자가 자신의 성적 지향이나 정체성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일)했다가 따돌림을 당한 후 자퇴한 육우당은 2002년 처음 동인련을 찾아왔다. 2003년 4월 국가인권위원회는 청소년보호법에 있는 동성애자 차별조항을 삭제하라고 권고했다. 그러자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소돔과 고모라를 언급하는 성명을 발표하며 노골적인 동성애 혐오를 드러냈다. 시인을 꿈꿨던 육우당은 그해 4월 26일 동인련 사무실 문고리에 목을 매 숨졌다. 그의 죽음 후 수많은 동성애자가 집단 커밍아웃하며 거리로 나섰다. 소수자 인권을 지지하는 시민들의 마음도 움직였다. 청소년보호법의 동성애차별 조항은 삭제됐다. -그동안 동인련에서 ‘무지개 놀토반’을 운영하는 등 청소년 성소수자들을 위한 참여형 프로그램을 꾸준히 기획했지요. 그러다 2014년 띵동을 공식 출범시켰고요. 현재 사무실에 상주하며 상담 등을 하는 활동가가 6명인 것으로 아는데, 누적 상담 청소년은 얼마나 됩니까. “3000건이 넘어요.” 트랜스젠더를 상징하는 3색 중 하나인 하늘색 꽃을 든 정민석씨 / 김영민 기자 -주로 어떤 고민을 토로하나요. “저희가 상담유형을 38가지로 구분하는데, 가장 많은 유형이 정신건강이에요. 힘든 마음을 토로하는 건데, 자살의 전조일 수 있어요. 그다음은 가족과의 갈등과 트랜스젠더에게 나타나는 젠더 디스포리아(성별불일치)가 많아요. 상담자 10명 중 5명이 희수와 같은 트랜스젠더 정체성을 가진 아이들이에요.” -이유는요. “게이나 레즈비언은 어쨌든 성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고 학교생활을 할 수 있어요. 하지만 트랜스젠더의 경우는 더 힘들어요. 2차 성징이 나타날 때 젠더 디스포리아로 인해 몹시 고통스러워하거든요. 자기 몸에 대한 혐오로 인해 자해 확률도 아주 높아요. 그것이 학교와 가정, 교우관계에 영향을 줘서 가출, 자퇴율도 높고요. 그렇다 보니 평균 학력이 낮고 취업문은 더욱 협소해지죠.” -위기에 빠진 청소년 성소수자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뭘까요. “청소년 성소수자들은 남녀로 구분된 쉼터에 가는 것을 힘들어해요. 그래서 띵동은 이들이 위기의 순간에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잠시라도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주거공간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어요. 여성가족부에도 촉구하고 있고요. 기존 청소년기관들이 이 아이들을 잘 상담하고 지원하는 것도 필요해요. 아이들이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는 중요한 시기에 적어도 그들의 고민을 함께 들어주는 성인과 기관이 오롯이 있다면, 이들이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테니까요.” 그가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을 보였다. 그는 “우리가 벼랑 끝에 선 성소수자들의 손을 마지막으로 들어주는 단체는 돼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다양한 방식의 노력을 기울여왔다”며 “하지만 지난해 성소수자들의 잇따른 죽음을 마주하며 왜 노력해도 늘 제자리걸음처럼 성소수자들의 죽음이 반복되는지 암담함을 느꼈다”고 말했다. 지난해 변희수 하사의 죽음에 앞서 트랜스젠더 작가 고 이은용씨, 고 김기홍 전 제주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장도 목숨을 끊었다. -차별금지법(평등법)이 국회에서 표류 중이에요. 어떤 생각이 드나요. “차별금지법이 지닌 메시지는 매우 중요해요. 내가 지금 경험하는 것이 차별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힘, 그리고 용기 내 말할 수 있는 힘을 주니까요. 많은 성소수자들이 수많은 차별을 겪으면서도 그런 대우를 받아도 되는 존재로 스스로를 비하하며 살아요. 이 법이 제정됨으로써 내가 겪는 차별이 참아야 하는 게 아니라 잘못된 것임을 모두가 깨닫게 되면 좋겠어요. 그러면 삶도 달라질 테니까요.” -3월 대선을 앞두고 거대 양당의 대선 후보들은 ‘국회에서 논의할 사안’이라거나 ‘국민적 합의가 전제돼야 한다’며 차별금지법 제정에 소극적 태도를 보이고 있어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요. “심상정 정의당 후보만 적극적으로 차별금지법 제정을 주장하고 있는데, 다른 후보들도 용기를 내달라고 말하고 싶어요. 차별금지법은 비단 성소수자뿐만 아니라 당신들이 국민이라고 이야기하는 많은 약자를 위한 법이고, 그들이 차별을 인지했을 때 삶은 좀더 나아질 수 있다고요.” 그의 말처럼 그가, 그리고 또 다른 변희수들이 우리 사회에서 진짜로 ‘행복’을 말할 수 있게 되기를. 고 변희수 하사의 추모문화제는 2월 27일 오후 3시 서울 서대문구 신촌 유플렉스 광장에서 열린다.
박주연의 메타뷰
“사법·입법·행정부 모두 변희수를 외면했다”(2021. 03. 19 14:05)
2021. 03. 19 14:05 사회
변희수 전 하사의 강제전역 과정 지켜본 김형남 군인권센터 사무국장 지난해 3월, 그러니까 꼭 1년 전이다. 고 변희수 전 육군 하사(23)는 서울 도심에서 길고양이를 발견했다. 어미를 잃은 새끼 고양이였다. 안쓰러운 마음에 고양이를 집에 데리고 왔다. 털빛이 새하얀 고양이의 이름은 씨엘이라고 지었다. 프랑스어로 ‘하늘’이라는 뜻이다. 그는 주변 지인들에게 ‘너무 예쁘지 않냐’며 씨엘의 사진과 영상을 종종 보냈다. 변희수 전 하사(왼쪽)와 변희수 전 하사가 키우던 고양이 ‘씨엘’(오른쪽) / 연합뉴스 / 군인권센터 제공 시민단체 군인권센터가 변희수 전 하사와 지난 2월 중순 마지막 연락에서 주고받은 주제도 씨엘의 예방접종이었다. 센터에 반려동물을 키워본 경험이 있는 활동가가 그에게 예방접종 일정을 알렸다. 그는 “알려주신 날은 일정이 있어서 그다음 날 가겠다”고 했다. 변희수 전 하사가 지난 3월 3일 자신의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그는 한국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이 트랜스젠더임을 밝힌 첫 군인이었다. 2월 27일까지 지인들과 연락을 했는데, 일상적인 대화를 했다고 한다. 올해 2월 28일이 예정대로라면 전역 예정일이었다. 육군은 2020년 1월 22일 심신장애 3급을 이유로 들어 변희수 전 하사의 강제전역을 결정했다. 심신장애의 이유는 고환·음경 결손이었다. 궁색한 사유였다. 군에 남겠다는 군인을 군에서 전역을 시켜버린 극히 드문 사례였다. 강제전역 조치는 바로 다음 날 이뤄졌다. 군은 새로 집을 구하고 다른 일을 알아볼 시간적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김형남 군인권센터 사무국장은 “군부대에 발붙이지 말라는 식의 조치였다. 기업으로 치면 부당해고에 가까웠다”고 했다. 변희수 전 하사의 강제전역 과정을 지켜본 김형남 사무국장을 지난 3월 16일 서울 서대문구 군인권센터 사무실에서 만났다. 끝까지 군을 미워하지 않았다 2019년 6월, 군인권센터에 전화 상담이 들어왔다. 자신을 트랜스젠더라고 밝혔다. 군에 남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조언을 구했다. 김형남 사무국장은 “그전까진 군에 가기 힘든 상황을 호소하는 트랜스젠더 분들의 상담만 받아왔다. 군복무를 더 하고 싶다는 상담은 저희도 처음이라 조금 당황했다”고 말했다. 변희수 전 하사는 모두가 알아주는 ‘밀덕(밀리터리 덕후의 줄임말)’이었다. 군 특성화고를 나와 졸업과 함께 2017년 3월 군복무를 시작했다. 군생활이 곧 ‘덕업일치’였다. 강제전역을 당한 뒤에는 총기등록을 하고 공기총을 샀다. 과녁도 사 집에 챙겨놨다. 김형남 사무국장은 “처음엔 의아했는데, 그냥 군대, 무기 이런 게 좋았던 거였다. 주변에 군생활과 무기를 설명해주는 것을 즐겼다”고 했다. 변희수 전 하사는 국군수도병원에서 젠더 디스포리아(성별 불쾌감)가 심하다는 진단과 함께 성별 재지정 수술(성전환 수술)을 권유받았다. 중대장, 대대장에게 보고하겠다고 군인권센터에 알렸다. 김형남 사무국장은 “군에서 현역부적합심의에 올릴까봐 오히려 저희가 걱정했다. 어떤 면에선 용감하고 어떻게 볼 땐 무모해 보이기도 했다”고 했다. 2019년 7월 여단장에게도 보고가 됐다. 여단장은 “네 군생활을 위해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고 물었다. 군단장까지 승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9년 12월 23일, 군의 승인하에 해외에서 수술을 받은 뒤 국군수도병원에 입원했다. 국내에는 아직 성별 재지정 수술이 가능한 의료기관이 없다. 김형남 군인권센터 사무국장 / 우철훈 기자 군의 기류가 급격히 바뀐 건 2020년 1월이었다. 2020년 1월 10일 육군은 변희수 전 하사에게 전역심사위원회 개최를 통보했다. 전역심사위는 대개 질병 등을 이유로 군부대 전역을 희망하는 군인들을 대상으로 심사한다. 국가인권위원회가 같은 달 21일 전역심사 3개월 연기를 군에 권고했지만 군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소속부대 주임원사는 강제전역이 결정된 2020년 1월 22일 밤 9시쯤 울면서 전화했다. 주임원사는 “내가 못 지켜줘 미안하다”고 했다. 강제전역 이후에는 선임중사가 기사에 달린 악플을 보고 벌컥 화를 내며 연락해왔다. 김형남 사무국장은 “변희수 전 하사가 군이 밉다거나 군이 증오스럽다는 이야기를 한 번도 한 적 없다. 군이 본인이 돌아가야 할 조직이고, 군도 언젠가 바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변희수 전 하사의 죽음 이후에야 군에서는 작은 변화가 감지된다. 서욱 국방부 장관은 지난 3월 16일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트랜스젠더의 군 복무 연구가) 아직은 없는데 이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사법부와 국회도 뒷짐 “저 납치됐어요!” 2020년 8월 18일, 변희수 전 하사가 메시지를 보냈다. 길에서 우연히 ‘평등버스’를 만났다고 했다. 당시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13일간 평등버스로 전국 25개 도시를 돌며 차별금지법 제정의 필요성을 알렸다. 이날 충북 청주의 낮 최고기온은 33도였다. 그는 이날 주변 사람들에게 밝은 표정으로 “이맘때는 군에 있으면 더위 때문에 엄청 힘들었다”고 말했다. 군부대의 무더위도 웃으며 말할 정도로 군생활에 애착이 컸다. 그는 평등버스에 타 대전까지 함께 이동했다. 김형남 사무국장은 “평소 차별금지법 제정에도 관심이 많았다. 이날도 발언하고 싶어했는데 제목만 자극적으로 달린 기사가 나올까봐 주변에서 오히려 말렸다”고 말했다. 2020년 12월, 변희수 전 하사가 또 한 번 메시지를 보냈다. “칠레로 이민갈까요”라고 했다. 트랜스젠더 군인이 칠레에서 공식적으로 군복무를 하게 됐다는 뉴스를 본 뒤였다. 방송에서 성소수자 혐오범죄 제보를 받는다는 소식에도 관심을 보였다. 지난 1월에는 신촌에서 만나 “소송이 빨리 좀 진행됐으면 한다”고 했다. 변희수 전 하사는 ‘트렌스젠더 군인 변희수의 복직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도움을 받아 2020년 8월 11일 대전지법에 전역처분 취소소송을 제기했다. 이맘때 유엔은 변희수 전 하사의 강제 전역이 국제인권법 위반이라며 한국 정부에 서한을 보냈다. 법원은 움직이지 않았다. 2020년 11월 소송을 빠르게 진행해달라고 서면을 제출했다. 지난 2월에야 첫 기일이 오는 4월 15일로 잡혔다. 소장이 접수되고 무려 6개월 지난 뒤였다. 변희수 전 하사가 제기한 행정소송은 유족이 이어간다. 김형남 사무국장은 “사법부가 원망스러울 때가 많았다. 법원이 늑장을 부리는 바람에 변희수 하사는 법정에 한 번 서보지도 못했다”며 “군(행정부)이 변희수 전 하사를 외면할 때 법원(사법부)과 차별금지법 제정에 관심 없는 국회 모두 뒷짐 지며 침묵에 동참했던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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