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총 1,261 건 검색)
- 윤 대통령, 탄핵 가결 전 채명성 법률비서관 임명…박근혜 탄핵 심판 대리인단 출신
- 2024. 12. 17 17:22정치
- ... 활동했다. 탄핵안 가결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던 시점에 단행한 인사인 만큼 윤 대통령이 채 비서관을 통해 탄핵 심판에 대비하려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한정화 법률비서관은 12·3 비상계엄...
- 윤석열 탄핵 정국
- 행안장관 “관저 공사 무자격 업체, 고발조치”···야 “김오진 전 비서관은 영전”
- 2024. 10. 25 19:01사회
- ... 언급한 이는 대통령 관저 이전 공사를 총괄 관리한 김오진 전 대통령실 관리비서관이다. 김 전 비서관은 감사원의 대통령 집무실·관저 이전 감사에서 김건희 여사가 운영한 코바나컨텐츠를 후원한 업체...
- [사설] ‘21그램 특혜’ 관저 비서관, 감사원 징계 요구도 비켜가나
- 2024. 10. 22 19:57정치
- ... 국가공무원법을 위배했다”는 인사자료 통보를 하지 않고 있다. 감사원은 지난 8월29일 김 전 비서관이 김 여사의 코바나컨텐츠 전시회 후원 업체인 ‘21그램’이 수의계약으로 관저 공사를 총괄하면서...
- 검찰, 백원우 전 비서관 압수수색···문다혜 해외 이주 지원 의혹 관련
- 2024. 10. 15 18:29사회
- ... 청와대 민정비서관의 주거지를 압수수색 했다. 전주지검 형사3부(한연규 부장검사)는 15일 백 전 비서관의 주거지에 수사관을 보내 압수수색 영장을 집행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문 전 대통령의 딸 다혜씨가...
- 타이이스타젯전주지검청와대
스포츠경향(총 70 건 검색)
- ‘트롤리’ 정순원, 박희순 비서관으로 등장
- 2022. 12. 20 09:12 연예
- SBS 새 월화 드라마 ‘트롤리’ 배우 정순원이 SBS 새 월화 드라마 ‘트롤리’에 첫 등장했다. ‘트롤리’(연출 김문교, 극본 류보리, 제작 스튜디오S)는 과거를 숨긴 채 살던 국회의원 아내의 비밀이 세상에 밝혀지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미스터리 딜레마 멜로다. 극 중 정순원이 맡은 ‘고민석’은 현재 남중도(박희순 분)의 보좌진으로 5급 비서관이다. NGO에서 일하다가 6급 비서관으로 처음 여의도 생활을 시작했지만 다시 NGO로 돌아갔다. 중도에게 발탁된 후 총선 캠프에서 함께 뛰었고, 그의 당선과 함께 여의도로 복귀했다. 19일 방송된 ‘트롤리’ 1화에서 정순원은 첫 등장부터 확실한 캐릭터를 제시했다. 고민석은 NGO 출신답게 강직하지만 꽤나 직설적인 성격으로 중도의 아내 ‘김혜주(김현주 분)’에 대해서도 객관적인 태도를 취했다. 동료들이 다른 정치인들과 달리 중도에게 친인척 비리가 없고, 아내인 혜주도 대외활동에 나서지 않는 점을 긍정적으로 언급하자 민석은 “조용히 산다고 다 좋은 건가?”라며 속마음을 드러냈다. 이어 “남편이 비례대표로 시작해 그 어렵다는 선출직에 출마했는데, 선거운동 하는 동안, 아니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얼굴 내민 적 없다는 게 말이 되냐”며 정곡을 찔렀다. 극 말미 실종된 줄 알았던 혜주의 딸 ‘남윤서(최명빈 분)’를 찾아 수색하던 중 그들의 아들인 ‘남지훈(정택현 분)’의 시신이 발견된다. 갑작스러운 아들의 죽음으로 충격에 빠진 중도와 혜주는 지훈의 옷 주머니에서 나온 필로폰과 아들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주장하는 김수빈(정수빈 분)의 등장으로 더 큰 위기와 맞닥뜨리게 됐다. 중도가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위해 발탁할 만큼 뛰어난 실력을 지닌 민석이 그의 정치 생명에 위협이 될 현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갈지에 대한 시청자들의 기대가 모이고 있다. 한편 ‘트롤리’는 매주 월, 화요일 오후 10시에 방송된다.
- [종합] 강성태, 박성민 靑 비서관 두고 “9급 준비 10시간씩 공부하는데…” 작심 비판
- 2021. 06. 24 10:22 연예
- ‘공부의 신’ 강성태가 박성민 청와대 비서관 인사를 두고 비판 발언을 내놓았다. 유튜브 방송 화면 캡처‘100만 유튜버’이자 ‘공부의 신’으로 알려진 강성태가 박성민 청와대 비서관 인사를 두고 쓴소리를 내뱉었다. 강성태는 23일 자신의 유튜브 채널 ‘공부의신 강성태’에 ‘25살 대학생이 청와대 1급 공무원에 합격하는 법’이라는 제목의 영상을 올리고 “매년 ‘공신닷컴’에서 전국 수석 초대하고 온갖 시험 최단기간 합격자들, 세계 1위 기업이나 공기관 합격하신 분들 등 대한민국에서 ‘공신’(공부의 신)이란 이들은 죄다 초대해 합격 비결을 들어왔지만 이분이 탑인 것 같다”고 비판했다. 강성태는 “내가 하루에 10시간씩 공부할 것 아니라면 ‘공시’를 때려치우라고 했다”며 “그래서 수강생분들이 9급 공무원이 되려고 하루에 10시간씩 공부한다”고 했다. 이어 “그런데 9급도 아닌 1급을 25살에 된 분이 탄생했다. 그간 행정고시 합격한 공신도 몇 번 초대해서 촬영했다. 그 무시무시한 시험을 합격하면 5급”이라며 “25년 정도 일해서 운 좋으면 1급되는 건데 무려 25살에 1급이 됐다. 이게 경기도지사나 군단장과 같은 급”이라고 설명했다. 강성태는 20살 청년들이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하루 10시간씩 공부하는 것과 박성민 비서관이 1급으로 발탁된 것을 비교했다. 유튜브 방송 화면 캡처그러면서 “어떻게 통과했는지 면접은 어떻게 치르셨는지, 무슨 루트로 경쟁은 또 얼마나 치열했는지, 슬럼프는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방법만 알 수 있다면 하루에 10시간이 아니라 정말 18시간씩이라도 공부하겠다고 꼭 좀 모셔봤으면 좋겠다”며 “아마 일 자체가 청년들을 위해서 하시는 거니까 그런 노하우 정도는 공유해주시지 않을까”라고 했다. 앞서 청와대는 21일 신임 청년비서관에 박성민 전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을 임명했다. 박성민 비서관은 1996년생 대학생으로 최연소 민주당 지도부에 이어 최연소 청와대 비서관이란 타이틀도 따내며 화제에 올랐다. 이를 두고 갑론을박이 펼쳐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번 인사를 두고 ‘파격 인사’가 아닌 ‘파괴 인사’라고 비꼬았다. 20·30 청년들이 상대적 박탈감에 휩싸인 것에 대한 반발 작용이다. 강성태는 2019년 8월 자신의 유튜브 방송에서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딸 조민을 언급했다 사과한 전례가 있다. 당시 강성태는 “고2가 논문 제2저자가 가능하냐고 많은 분들이 물어봤는데 논문을 직접 썼는지 알 방법이 없다”며 “9살 때 미적분 마스터한 폰노이만도 있다. 폰 노이만은 천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천재”라고 했다. 또한 “만약 부모님이 계획적으로 쓰지도 않은 논문에 이름을 올리게 한 거라면 학계에서도 정말 큰 잘못”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강성태가 최서원(최순실)씨의 딸 정유라씨의 부정 입학 당시 강도 높은 비판을 했던 것과 비교해 조민을 옹호한 발언이 아니냐는 논란에 직면했다. 강성태는 해당 영상에 ‘조민과 관련된 비판임을 명백히 말씀드린다. 영상 제작 과정에서 과격해 보일 수 있는 표현은 일부 덜어낸 부분이 있다’는 자막으로 해명했다. 강성태는 이후 유튜브 방송에서 “정치적으로 보일 수 있었던 발언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면서 과거 국회의원 제안을 받았다는 깜짝 고백을 이어가기도 했다. 그는 “처음으로 말씀드리지만 2012년도에 당선을 100% 보장해준다며 국회의원 출마 제의를 받았다”며 “2013년도에는 반대 정당에서 최고위원 자리를 제안했다”고 했다.
- 신예 김정진, ‘경이로운 소문’ 비서관 장혜경 역 캐스팅
- 2020. 09. 01 21:04 연예
- 배우 김정진. 이끌엔터테인먼트 제공.신예 김정진이 2020년 하반기 기대작 ‘경이로운 소문’에 캐스팅이 됐다. 김정진 소속사 이끌엔터테인먼트는 1일 “김정진이 OCN 새 토일 오리지널 ‘경이로운 소문’에서 비서관 장혜경 역에 캐스팅됐다”고 밝혔다. 동명의 인기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OCN 새 토일 오리지널 ‘경이로운 소문’은 악귀 사냥꾼 카운터들이 국숫집 직원으로 위장해 지상의 악귀들을 물리치는 히어로물이다. 김정진은 극 중 신명휘(최광일 분) 시장의 수행비서 ‘장혜경’ 역을 연기한다. 아름다운 미모에 뛰어난 업무 능력까지 갖춘 프로페셔널한 비서 캐릭터로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예정이다. 김정진은 ‘본 대로 말하라’에서 광수대 막내 형사 역을, ‘검사내전’에서는 피해자 배수민 역으로 출연해 시청자들에게 눈도장을 찍은 바 있다. 청초함과 도시적인 세련미를 겸비한 이미지로 예능, 광고 등 다양한 분야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묵직한 작품들에서 알찬 배역으로 차근차근 필모그래피를 쌓고 있는 김정진이 ‘경이로운 소문’에서는 또 어떤 성장을 이뤄낼지, 신선한 에너지를 불어넣을 뉴페이스의 활약에 기대가 모인다. 조병규, 유준상, 김세정, 염혜란, 안석환 그리고 손여은의 특별출연 소식까지, 탄탄한 출연진 라인업으로 뜨거운 관심을 불러 모으고 있는 ‘경이로운 소문’은 OCN 드라마틱 시네마 ‘써치’ 후속으로 2020년 하반기 중 방송된다.
- 김정진
- 청와대 디지털혁신비서관 신설 등 조직개편
- 2020. 01. 06 21:47 생활
- 스포츠경향 자료이미지.문재인 대통령이 총선을 100일 앞둔 6일 비서실 조직개편 및 인적교체를 했다 조직개편에는 문 대통령 집권 4년차 국정운영 전략이 반영됐다는 관측이 나온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번 개편에서 기존의 3실장·12수석·49비서관 체제를 그대로 유지했으나 일부 비서관실을 폐지·신설 혹은 업무조정을 했다. 경제 분야에 무게를 실은 것이 특징이다. 디지털혁신 비서관을 신설해 4차 산업혁명에 능동적으로 대비하기로 한 점 등도 주목된다. 청와대 측은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디지털정부로 업그레이드하는 의미도 있다”고 살명했다. 소재·부품·장비 산업담당관을 새로 만들어 일본의 대 한국 수출규제 극복에 힘을 싣기로 했다. 정책조정 기능을 이준협 일자리기획비서관이 맡게 되면서 명칭을 일자리기획·조정비서관으로 바꿨다. 각 분야 정책 조정 과정에서 일자리 문제가 고려될 여지가 넓어졌다. 청와대 측은 “일자리 기획 비서관실의 경우 정책실장실 산하 선임으로 역할을 해 왔다”며 “그래서 총괄적으로 정책을 들여다봐야 하는 ‘정책조정’ 업무를 맡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경제보좌관 산하에 있던 박진규 통상비서관 직책을 신남방·신북방 비서관으로 재편한 것도 문재인 정부가 집중하고 있는 신남방·신북방 정책 추진 의지를 보여준다. 문 대통령이 각별히 신경 쓰고 있는 교통·산재·자살·어린이 사고 등에서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국민생활안전 담당관’을 새로 두기로 했고, 방위산업 육성을 위한 담당관도 신설했다. 연설기획비서관을 기획비서관으로 재편하며 국정기조 수립·기획, 메시지 기획을 전담케 했다. 기획 전담 비서관을 둔다는 것은 임기후반 국정 아젠다 기획에 한층 힘을 싣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인사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문 대통령 측근으로 꼽히는 윤건영 국정기획상황실장이 청와대를 떠났다는 점이다. 윤 실장의 사표는 현재 수리 절차를 밟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윤 실장은 4월 총선에서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지역구인 서울 구로을 출마가 유력하게 점쳐진다. 윤 실장이 맡았던 기획·상황 업무의 경우 두 파트로 분리됐다. 오종식 연설기획비서관이 ‘기획비서관’으로 새로 임명되며 기획 업무를 전담하고, 국정상황실장으로는 이진석 정책조정비서관이 맡게 됐다. 윤 실장 외에도 총선 출마가 점쳐지는 참모들이 있어 조만간 추가 인사가 단행될 전망이다.
주간경향(총 12 건 검색)
- 청와대 안봉근 비서관 ‘사칭’ 김흥기 ‘댓글기지’ 구축 시도 확인(2016. 07. 11 17:59)
- 2016. 07. 11 17:59 사회
- ㆍ지난달 9일 국회서 보수우파 사이버청원 운동 제안 ‘역사교과서 전쟁’ 강조 ‘댓글부대’ 논란과 관련하여 과 숨바꼭질을 해온 국정원 출신 김흥기씨의 ‘진면모’가 드러났다. 2012년 새누리당 대선캠프에서 활동했던 그가 내년 대선을 1년 6개월 정도 앞두고 보수우파 세력들의 목소리를 동원해 정치권을 압박하는 작업에 나선 것이다. 청와대 안봉근 비서관 이름을 팔고 다닌 그를 민정수석실에서 아무런 제재를 하지 않는다면 ‘어버이연합’의 관제데모 의혹과 마찬가지로 김씨의 배후에도 청와대가 있다는 의심을 지우기 어렵게 됐다. 더구나 미래부가 엉터리 정책보고서를 제출한 그에게 1억원의 예산을 지원했는데도 감사원이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면죄부를 부여한 바 있어 그를 둘러싼 의혹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은 지난달 9일 국회 의원회관 대강당에서 김씨가 보수시민단체 회원들이 모인 가운데 댓글부대를 연상시키는 사이버 집단청원 운동을 제안하는 장면이 담긴 동영상을 확보했다. 김씨의 동영상은 300여명의 학부모와 전국 74개 교육단체들이 모여서 만든 ‘전국학부모교육시민단체연합’(전학연) 출범식에서 촬영된 것이다. 당시 행사는 평소 진보 교육감과 전교조에 반대해온 보수성향의 학부모와 교육단체들이 제대로 된 역사교과서 만들기와 무너진 공교육을 바로 세우겠다는 취지하에 전학연이라는 새로운 단체를 출범하기 위해 열렸다. 새누리당 박인숙 의원의 개회사에 이어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 이경자 ‘공교육 살리기 학부모연합’ 상임대표 등에 이어 김씨는 전학연 대외협력위원장 자격으로 맨 마지막 연사로 등장했다. ‘교육개혁을 위한 청원플랫폼’이라는 제목으로 새로운 형태의 사이버 집단청원 방식을 소개한 김씨의 프리젠테이션은 이날 행사의 하이라이트였다. ‘전학연’ 출범 행사에 연사로 등장 김씨는 “오늘 제안은 전학연의 활동을 어떻게 하면 좀 더 파워풀하게 만들 것인가 하는 고민을 담은 것”이라며 강연을 시작했다.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는 당연히 자유민주주의인데, 하필 인민민주주의를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와 함께 살고 있다”며 초반부터 색깔론 공세를 폈다. 15분간 이어진 그의 강연은 여소야대가 된 국회에서 어떻게 하면 보수우파 세력들의 요구와 지지를 하나로 끌어모아 입법활동에 반영시킬 것인가에 집중됐다. 그는 “우파의 각 단체들과 협회들을 보면 전부 다 제각각 할동을 한다”며 “우리의 활동방향은 각개약진하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가 강연 중간에 보수세력들의 나아갈 길로 이승만 대통령의 이름을 거론하자 청중들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를 외치며 호응을 보냈다. 4·13 총선에서 새누리당의 참패로 절치부심한 보수우파 세력들이 내년 대선을 앞두고 새로운 형태의 동원전략을 구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국정원 출신의 김흥기씨(점선 안)가 6월 9일 국회 의원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전국학부모교육시민단체연합(전학연) 출범식에서 보수우파 세력의 사이버청원 운동을 제안한 후 참석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전학연 홈페이지 김씨가 여소야대가 된 국회를 압박하기 위한 방법으로 제안한 것은 주요한 이슈별로 상시적으로 보수우파 세력들의 의견을 모아 국회에 전달하기 위한 온라인 청원 사이트 구축이었다. 그는 보급기능을 사단별로 따로 운영한 나폴레옹 군단을 비효율적인 사례로 제시하며 여러 보수단체를 하나로 연결시키고 대국회 활동에 전념하는 플랫폼 조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누군가 어떤 내용으로 청원할지를 사이트에 올리면 ‘애국보수단체’ 회원들이 10만명, 20만명씩 바로바로 서명을 달아 국회에 청원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그는 슬라이드 화면을 통해 자신이 ‘애국닷컴’ 사이트에 구축한 청원게시판의 구체적인 운영방향을 설명했다. 청원 사이트에는 목표 서명 수와 현재 서명 수를 보여주면서 참여를 독려하고 서명 전파를 위해 각종 SNS 사이트에 연결되는 ‘바로가기’ 기능을 달아놓았다. 또한 청원과 관련하여 댓글을 통해 한 토론 및 피드백을 유도하고 목표 서명 수가 달성되면 서명인 리스트를 출력하는 기능까지 구축했다. 청원 사이트, 상당한 조직·인원 확보 암시 그는 “여기(청원 사이트)에서 서명을 하면 서명하는 개수가 바로 바로 10만, 20만 올라가고 그걸 출력하면 바로 그것을 가지고 국회에 청원할 수 있다”고 했다. 김씨의 제안은 흡사 지난해 11월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위한 행정예고 마지막 날 동일한 양식의 찬성의견 서명지들이 무더기로 교육부에 배달됐던 ‘차떼기 서명’을 연상시켰다. 차이점이 있다면 차떼기 서명이 오프라인 인쇄소에서 이뤄진 반면 김씨의 집단청원을 위한 서명은 온라인에서 이뤄진다는 것이다. 특히 서명 전파를 위해 청원 사이트를 각종 SNS 사이트와 연결시키고 댓글을 통해 토론을 활성화시키겠다는 것은 말이 청원조직이지 ‘댓글부대’ 조직이나 다름이 없어 보였다. 실제로 김씨는 청원 사이트를 움직이기 위한 청원 오프라인 조직도 구축돼 있다고 했다. 그는 “이 조직 구성원은 이미 많이 차 있다”며 “하지만 오늘 굳이 공개하지 않겠다”고 했다. 청원 사이트가 단순한 아이디어가 아니라 이미 상당한 정도의 조직과 인원을 확보하고 있음을 시시한 것이다. 실제로 전학연의 이희범 사무총장은 “2월이나 3월쯤 김씨가 찾아와 집행부들이 있는 가운데 사이버 청원운동을 제안했고, 다들 대단히 만족스러워 했다”고 소개했다. 그렇다면 김씨가 전학연에 제안한 청원 오프라인 조직은 어떻게 운영될까. 김씨는 슬라이드 화면을 통해 구체적인 조직 구성도까지 보여주면서 “청원 오프라인 조직은 운영위원회, 기획위원회, 자문위원회로 구성된다”고 소개했다. 그는 위원회별 기능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청원서 작성·사이트 운영·대국회 활동은 기획위원회가, 지지세력 결집은 운영위원회에서, 교수와 연구진들로 구성된 자문위원회는 의제별 자문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문)위원회는 국회 18개 상임위원회와 1대 1 함수관계로 만들어 놓았다”며 청원 조직이 단지 교육뿐 아니라 모든 이슈를 염두에 두고 활동할 것임을 예고했다. 실제로 그는 “운영위원회는 대한민국의 건국이념, 헌법적 가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질서, 법치주의를 존중하는 사람과 함께 힘을 모아서 투표로 힘을 모아주면 된다”고 했다. 174개 보수단체가 링크된 애국닷컴 홈페이지 청원게시판에 올라와 있는 청원서. 청원에 서명하고 전체보기 기능을 누르면 전체 서명자가 엑셀파일로 전환되고 출력도 가능하게 돼 있다. /애국닷컴 홈페이지 물론 김씨가 제안한 보수우파의 사이버 청원조직이 실제로 얼마나 파괴력을 갖고 움직일지는 아직 알 수가 없다. 다만 그가 2012년 대선에서 새누리당 캠프에서 활동을 했고, 2013년 이후 지금까지 걸어온 이력을 보면 허왕된 계획으로 보기 어렵다. 실제로 그는 2013년 중국과학원 빅데이터 센터와 모종의 계약을 맺고 2014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강원미래발전포럼 상임의장을 맡아 선거운동에 참여한 전력이 있다. 김씨가 중국과학원 빅데이터센터와 계약을 체결한 시기는 김씨가 스스로를 경영 책임자로 소개한 그린미디어가 한국산업기술시험원(KTL) 내에 짐스(GIMS)라고 불리는 시스템 구축을 시도한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당시 이들이 1년간의 비밀작업 끝에 2015년 1월 제출한 용역보고서에는 공식적으로는 수출정보 제공을 목적으로 하고 있지만 사이버 여론조작에 악용될 수 있는 ‘K룸 설치’ 계획이 제시돼 있다. 용역보고서를 보면 K룸은 광범위한 정보를 수집·분석하고 배포하는 일종의 ‘빅브라더’ 역할을 담당하고, 100평 규모에 20명의 운영위원이 상주하는 계획으로 돼 있다. 김씨가 국회에서 제안한 청원 오프라인 조직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김씨는 의 ‘댓글부대 의혹’ 제기로 K룸 설치가 무산된 후 지난해 9월 청와대 안봉근 비서관 이름을 팔아 국정홍보 월간지 ㄷ화보 회장 취임을 시도할 때도 20여명 규모의 연구소 설치를 제안한 바 있다. 당시 서울 강남 연구실에서 2시간가량 김씨를 만났던 ㄷ화보 사장 김모씨가 지난해 9월 19일 작성한 다음과 같은 메모에도 이와 관련된 흔적이 보인다. ‘요구, 지지, 정책, 예산, 법률, 각계 협회, 단체, 학회, 세력 과시하면서 요구사항 주장, YES 찬성자만 수용. NO는 처음부터 불가 정치집단 바꿔야’. 김씨가 지난해 9월 ㄷ화보 김 사장을 상대로 안 비서관 이름을 팔며 제안했던 사업 구상이 올 6월 그가 국회에서 보수우파 세력들을 상데로 제안한 사이버 청원운동 조직 구상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청와대 정연국 대변인은 그동안 “안 비서관은 김씨와 일면식도 없다”며 “대꾸할 가치조차 없다”고 했지만 이제 상황은 달라졌다. 청와대의 침묵은 김씨가 안 비서관 이름을 빌려 시작한 활동을 최소한 암묵적으로 승인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김흥기씨가 6월 9일 국회 의원회관 대강당에서 애국세력들을 위한 청원 사이트 구축을 제안하면서 역사교과서 전쟁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GMW연합 블로그 김씨는 지난 2월에는 박 대통령이 의욕적으로 추진한 ‘노동개혁’에 힘을 보태기 위해 청년희망재단이 후원하고 우익청년단체가 개최한 행사에 새누리당 전희경 의원과 함께 공동연사로 등장하기도 했다. 김씨가 6월 전학연 출범식에서 새로운 교육청원 플랫폼을 제안하면서 강조했던 것은 역사교과서 문제였다. 김씨의 강연이 이뤄진 행사장에는 보수우익단체 내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 운동의 ‘잔다르크’로 불리는 새누리당 전희경 의원도 초청됐다. 공교롭게 그가 등장하는 무대에는 어김없이 박 대통령이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이슈와 함께 전희경 의원 이름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전 의원실은 “행사장에 초청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같은 시각 국회부의장 후보 경선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다. 전 의원은 김씨를 모르고 이름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청와대가 안 비서관과 김씨와 관계를 해명할 때와 동일한 어법이다. 김씨는 전학연 출범식에서 ‘대한민국 교육 현장은 전쟁 중’이라는 슬라이드 화면을 보여주면서 “교과서를 보면 우리나라 건국대통령이 누구인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는 한 자도 적혀 있지 않다”고 울분을 토로했다. 그는 “우리 단체는 함께 세를 몰아줄 때는 다같이 세를 모아줘야 하고, 같이 서명도 해주고 같이 항의시위도 해주고, 1000원이든 5000천원이든 성금도 보내줘야 한다”고 했다. 사실상 그가 내년 대선을 앞두고 서명, 시위, 모금까지 망라한 보수우익 세력의 통합 사이버 기지 구축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내비친 것이다. 애국연합 홈페이지 ‘애국닷컴’에 샘플 실제로 김씨가 제안한 청원 게시판은 ‘대한민국애국시민연합’(애국연합) 홈페이지인 ‘애국닷컴’에 샘플이 올려져 있었다. 애국연합은 스스로를 “2013년 8월 재향군인회, 한국자유총연맹, 재향경우회, 바르게살기중앙협의회 등 애국시민단체와 종교단체, 오피니언 리더, 애국시민이 연합하여 결성된 비영리단체”라고 소개하고 있다. 애국연합 사이트에는 현재 174개 단체가 링크돼 있다. 전국에 16개 지부를 두고 진보진영을 상대로 고발을 전문으로 하는 법률전문가, SNS 사이버감시단, 1인시위 활동가 조직을 갖추고 있다. 김흥기씨가 ‘댓글부대’ 논란과 관련해 지난 5월 을 고소할 당시 고소대리인이었던 한상대 전 검찰총장도 이 단체의 고문을 맡고 있다. 특히 ‘미완성 샘플. 확산 금지’라며 애국닷컴 청원게시판에 올려저 있는 사이버 청원서를 보면 앞으로 이들의 활동방향이 대략적으로 보인다. 샘플용 청원서에는 ‘박근혜 대통령님, 이재명 성남시장에게 손해배상 책임을 물어주세요(10만명 청원)’라는 제목 아래 이 시장을 공격하는 온갖 비난글이 제시돼 있다. 해당 비난글 밑에 서명과 함께 댓글을 다는 코너가 마련돼 있다. 김씨가 제안한 사이버청원 조직이 겉으로는 입법청원을 내세우고 있지만 실제로는 박 대통령의 ‘호위무사’로서 진보진영을 공격하는 ‘댓글부대’ 기지를 목표로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은 청와대 정연국 대변인에게 “이래도 안봉근 비서관 이름을 팔고 다닌 김씨의 활동에 대해 계속해서 침묵할 것인가”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냈지만 아무런 답변이 오지 않았다. 엉터리 정책보고서로 김씨에게 1억원을 지원한 미래부도, 말도 안 되는 예산집행을 ‘적정하다’고 판단한 감사원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권력기관과 법 위에 군림하며 거의 대놓고 우파세력의 ‘댓글기지’를 만들려는 김씨의 거침없는 행보 앞에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법질서는 무너져가고 있다.
- KTL ‘댓글부대’ 김흥기, “안봉근 비서관 만나러 청와대 간다”(2015. 12. 15 10:45)
- 2015. 12. 15 10:45 사회
- ㆍ지난 9월 국정홍보 월간지 사장에 회장직 달라며 ‘문고리 3인방’과 친분 과시 중국과학원 가짜 수료증 장사에 전·현직 장·차관을 동원한 국정원 출신의 김흥기 전 카이스트 겸직교수(52)와 ‘댓글부대’로 의심받는 용역업체 그린미디어가 어떤 식으로 인연을 맺었는지는 아직 ‘베일’에 가려져 있다. 다만 창간한 지 2년도 안 된 그린미디어가 급부상한 시점은 김 전 교수의 등장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 김 전 교수가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취임식을 열고 공식적으로 회장이 된 것은 지난해 12월이다. 하지만 내부직원들은 이미 1년 전인 2013년 말부터 그를 실질적인 회장으로 알고 있었다. 김 전 교수를 잘 아는 한 인사는 “그린미디어는 2013년 말까지만 해도 서울 신대방동 4층 건물의 허름한 사무실에서 어렵게 신문을 발행했고 기자 수도 4~5명에 불과했는데, 김 전 교수가 들어오면서 모든 게 달라지기 시작했다”고 증언했다. “내가 회장 되면 크게 도움이 될 것” 그는 특히 그린미디어가 네이버와 뉴스검색 제휴 계약을 맺은 배경을 주목해 볼 것을 주문했다. 실제로 포털뉴스 운영 시스템을 잘 아는 한 인사는 “기자 수가 10명이 안 되고 창간한 지 2년도 안 됐다면 네이버와 뉴스검색 제휴를 맺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라며 “이런 경우 이명박 정부 때는 청와대에서 민원이 들어오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지난 9월 김흥기씨가 국정홍보지 ㄷ월간지에 회장직을 제안한 후 청와대와 친분을 과시하기 위해 보낸 카톡 문자. 카톡 안 사진은 김씨가 주도하는 단체에서 이병기 비서실장 앞으로 보낸 공문. 이 점에서 2013년 말까지 기자가 4~5명에 불과한 그린미디어가 네이버와 검색 제휴 가계약을 맺은 과정은 의혹을 사기에 충분하다. 그린미디어가 지난해 초 한국산업기술시험원(KTL)으로부터 15원억의 수출정보 용역을 수주하는 과정에서 뭘 믿고 전 세계에 1500여명의 정보원을 보유하고 있다고 프리젠테이션 자료를 만들었는지도 의문이다. 전 세계 1500여명의 정보원은 국정원이나 재외공관 조직을 상정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은 얘기다. 당시 용역팀에는 그린미디어 박형준 사장, 용역 발주자인 KTL 정완수 본부장, 그린미디어 해외정보사업팀을 이끌던 민진규 국가정보전략연구소 소장이 있었다. 하지만 그린미디어를 움직인 실질적인 힘은 김 전 교수에게서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 김 전 교수는 2013년 박근혜 정부 출범 직후 민주평통자문위원, 미래창조과학부 글로벌창업정책포럼 상임의장을 지내며 정·관·재계에 화려한 인맥을 맺고 있었다. 물론 김 전 교수는 자신은 글로벌이코노믹에서 단순 무보수 명예회장에 불과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과연 그는 단순 명예회장직에 만족했을까. 취재 결과 김 전 교수는 글로벌이코노믹 회장을 그만둔 후 지난 9월 국정홍보 소식을 주로 다루는 ㄷ월간지 사장, 편집국장을 만나 회장직 요구를 하면서 청와대와 친분을 과시한 사실이 드러났다. 김 전 교수가 글로벌이코노믹 회장을 사퇴한 배경은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그가 ㄷ월간지에 관심을 보인 시기는 국정감사를 앞두고 의 잇단 ‘댓글부대’ 의혹 제기로 KTL이 그린미디어에 용역계약을 해지통보한 직후였다. 김 전 교수는 ㄷ월간지와 접촉과정에서 ‘내가 회장이 되면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며 소위 ‘문고리 3인방’으로 일컬어지는 청와대 실세 비서관들과의 사적인 친분을 과시했다. ㄷ월간지 ㄱ 사장은 “김 전 교수가 여러 차례 청와대 비서관 4명을 안다고 했고, 특히 안봉근 홍보비서관(사진)은 실명으로 얘기했다”며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는 “우리가 내년 4월 1만2000여개 학교의 학생들을 상대로 ‘효문화 실천 365일’ 행사 대장정에 돌입하는 일정을 계획 중이라고 했더니 (청와대에) 영향력을 발휘해서 도와주겠다고 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ㄱ 사장이 뭔가 미심쩍어하는 듯한 눈치를 보이자 자신이 주도하는 단체에서 청와대 이병기 비서실장 앞으로 보낸 공문을 카톡으로 보내오기도 했다. 그래도 ㄱ 사장이 회의적 반응을 보이자 김 전 교수는 10월 1일 “안봉근 홍보비서관을 만나러 가고 있다”고 전화를 걸어 왔다. ㄱ 사장은 업무일지에 적힌 통화시각을 확인해가며 정확하게 당시 통화내용을 설명했다. “당시 통화시각은 오전 11시20분이었다. 김 전 교수가 ‘10분 후에 청와대에서 안 비서관을 만날 예정인데 지금 서울역을 지나고 있다’고 했다. 청와대에 다녀온 뒤 연락을 주겠다고 했는데, 별다른 연락은 없었다.” ㄱ 사장 얘기만 들으면 김 전 교수가 안 비서관을 단지 사칭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별도로 김 전 교수와 여러 차례 접촉했던 ㅂ 편집국장은 “내가 받은 문자, 카톡을 지우지 않고 갖고 있는데, 단지 사칭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그는 “김 전 교수가 이름은 정확히 얘기 안 했지만 청와대 홍보수석실에 왔다갔다한 건 맞다”며 “(청와대 가기 하루 전인) 9월 30일 문자를 보낸 게 있고 그보다 더 결정적인 문자도 있다”고 했다. 은 두 사람의 주장에 대해 지난 10일 청와대 공식채널을 통해 반응을 물어봤고, 하루가 지난 후 연락이 왔다. 공식창구 역할을 한 청와대 관계자는 “오늘 아침에 안 비서관한테 물어봤는데, 김흥기란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른다고 했다”고 말했다. 김 전 교수가 10월 1일 청와대를 방문해 안 비서관을 만났다는 주장은 논의할 가치조차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청와대의 해명을 어느 정도까지 신뢰해야 할지는 의문이다. 이 접촉한 인사들 대부분이 처음에는 ‘김흥기를 모른다’는 반응을 보여 왔기 때문이다. 안 비서관 “김흥기 누구인지 모른다” 또 안 비서관을 빼고는 김 전 교수가 ㄷ월간지 상대로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꺼낸 얘기는 대부분 사실과 부합했다. 그는 특히 자신의 저서 의 표지사진(사진)이 대선 때 박근혜 대통령의 전속사진사로 활동하던 박병혁 작가가 찍어준 것이라고 자랑했고 사실로 확인됐다. 박 작가는 2012년 대선 유세 도중 불의의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아픔을 딛고 재기에 성공, 지난 9월 인천의 한 박람회 행사장에서 박 대통령과 재회하면서 화제가 된 인물이다. 박씨는 과의 통화에서 “(김 전 교수는) 아는 분을 통해서 여러 사람 있는 가운데 소개를 받았는데, (그 후) 사무실에 찾아와서 사진을 찍어달라고 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대선과정에서 전혀 알지도 못했고 그냥 별뜻 없이 사진 한 장 찍어준 건데, 그걸 그런(과시)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느냐”며 당혹스러워 했다. 김 전 교수는 또 ㄷ월간지에 거창한 회장 취임식도 주문했다.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서상목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회장으로 있는 데일리경제와 공동으로 창조경제인대상 시상식과 함께 진행한다는 시나리오였다. 정운찬 혹은 한덕수 전 총리 중 한 명을 대회조직위원장으로 초빙하려고도 했다. 김 전 교수는 공동주관사로 지목한 데일리경제와도 단단한 끈을 맺고 있었다. 데일리경제는 지난 8월 황우여 교육부 장관, 현오석 전 경제부총리 등이 참석한 창간 13주년 기념행사에서 김 전 교수를 진념 전 총리, 김중위 전 환경부 장관, 박병원 경총 회장과 함께 주요 내빈으로 소개한 바 있다. 서 전 장관은 전·현직 각료들과 함께 김 전 교수를 주요 내빈으로 초청한 경위에 대해 “발행인하고는 친한 것 같은데, 나하고는 서로 알고 지낸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 뭐라 코멘트할 입장은 아니다”라고 했다. 깊은 관계는 아니지만 최소한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인 점은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김 전 교수의 치밀한 계획에도 불구하고 회장 취임식은 결국 무위로 그쳤다. 그가 중국과학원 가짜수료증 장사를 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ㄷ월간지 관계자들과 신뢰관계가 무너져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ㄷ월간지 사태는 그가 보유하고 있는 막강한 인맥에 청와대 인사도 끼어 있을 가능성과 함께 KTL이 뭘 믿고 창간 2년도 안 된 매체에 15억원짜리 용역사업을 맡겼는지, 숨겨진 비밀을 푸는 데 있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 [유인경이 만난 사람]윤태영 전 청와대비서관 “대통령 자리란 모든 일의 출발점이자 최종 보고 지점”(2014. 05. 20 16:28)
- 2014. 05. 20 16:28 정치
- 세월호 참사 피해자들을 애도하는 노란 리본이 전국의 거리에 휘날린다. 5년 전 이 무렵, 노무현 대통령 서거 때 노란 리본의 물결이 전국을 뒤덮었던 기억이 떠오르는데, 마침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청와대 대변인과 부속실장 등을 맡으며 노무현 대통령의 복심, 노 대통령의 그림자라고 불렸던 ‘윤태영 비서관이 전하는 노무현 대통령 이야기’란 부제의 (책담 출판사)이란 책이다. 윤 비서관이 1988년 노무현 대통령을 처음 만나 5년 전인 2009년 5월 23일 서거하기까지 그가 목격하고, 대화하고, 받아적은 기록들을 담은 책이다. 노 대통령 서거 후 충격으로 오랫동안 마음의 병을 앓았고 사람들과의 만남조차 끊고 은거했던 그가 과 최초로 인터뷰를 했다. 청와대 비서관 시절에는 신분 때문에, 그 후에는 아픔 때문에 인터뷰를 전혀 하지 않았던 그는 진솔한 목소리로 노무현 대통령과 청와대, 권력과 소통에 관한 이야기를 전했다. 이 책은 노 대통령 5주기 기념으로 출간했나요. “아닙니다. 책을 낼 생각은 없었습니다. 2003년부터 청와대 대변인을 하다가 사의를 표한 후에 제1부속실장을 맡은 후에도 대통령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대통령은 저를 관찰자이자 기록자로 명하며 ‘체력과 집중력이 허락한다면 내가 참석하는 모든 회의나 행사에 자유롭게 배석하도록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분이 갑작스럽게 서거하기까지 수백권이 넘는 휴대용 포켓수첩, 100권에 달하는 업무수첩, 1400여개의 한글파일이 생산되었죠. 그걸 정리해서 노무현재단의 홈페이지 ‘사람 사는 세상’에 정치인 노무현의 캐릭터와 성향을 엿볼 수 있는 글을 연재했다가 이번에 책으로 펴냈는데 마침 5주기 무렵에 나온 겁니다.” 6년간 거의 매일 대통령을 관찰하고, 대화 및 회의를 기록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텐데요.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에 따르면 대통령보다 참모들의 피로도와 스트레스가 더 높답니다. 24시간 그분의 스케줄에 따라 움직여야 하고, 대통령이 워낙 말씀을 많이 하는 분이라 마무리 발언 때문에 국무회의가 12시를 넘긴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죠. 정말 어떻게 그 많은 생각이 꼬리를 물고 계속 나올 수 있을까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부속실장이 된 후에도 대통령 개인 일정에도 배석해서 기록하는 일을 겸했는데, 처음 1년은 수첩에 펜으로 적었는데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에 생긴 펜혹이 사마귀처럼 커져 통증이 심했습니다. 결국 1년 후엔 노트북을 활용하기 시작했는데 손가락 통증이 없어진 대신에 두 어깨가 아파오더군요. 육체적 고통보다는 항상 정확하게 기록해야 한다는 심적 부담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대통령과의 인연은 언제부터인가요. “1988년 무렵입니다. 제가 연세대 경제학과 79학번인데 81년에 쓴 유인물이 발각돼 1년간 옥고를 치렀어요. 출소 후 공장생활을 하다 84년 복교했고, 88년 국회의원 비서관으로 정치권에 막 입문했을 때였죠. 당시 그분은 인권변호사에서 13대 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한 청문회 스타였죠. 워낙 소탈해서 저 같은 국회의원 보좌관들에게도 인기가 높았습니다. 그러다 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그분의 자서전 를 펴낼 때 집필작업에 직접 참여했고요. 이후 노무현 캠프의 외곽에서 방송원고나 홍보물 제작을 지원하는 일을 했지요.” 5주기가 다가옵니다만, 노 대통령은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더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것 같습니다. “그건 그분의 인간미, 사람 향기가 나는 사람이라는 것이 이제야 알려져서가 아닐까요. 대통령 후보 시절에도 항상 ‘낮은 사람’을 강조했고, 퇴임 후 봉하마을로 내려가서도 주민들이 ‘나와주세요’라고 부르면 진짜 나와서 그들이 내민 손을 잡아주고 이야기를 들어준 전직 대통령이었으니까요. 재임 시절에야 정책으로 호불호가 갈리지만 퇴임 후에는 인간적 측면으로 더 기억에 남아 사람들이 소박하고 따스한 성품을 그리워하는 것 같습니다.” 가장 지근에서 지켜본 대통령이란 자리는 어떤 자리입니까. “끊임없이 고뇌하고 괴로워하는 자리입니다. 대통령은 모든 일의 출발 지점이고 모든 일의 최종 보고 지점입니다. 국민에게는 무조건적으로 무한봉사를 해야 하는 신하입니다.” 다른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권위, 권력을 내려놓은 것이 아닐까요. 그분은 제왕적 대통령이 되기를 거부했습니다. 평소 ‘왕이 가진 권력이 서민에게 내려오는 것이 진보’라며 초법적으로 모든 권력을 내려놓으려 했습니다. 다들 ‘검찰만은 장악해라’ ‘국정원을 개혁해라’ ‘언론과 사이좋게 지내라’ 등등의 충고를 해줬지만, 각 기관을 독립시켜야 서로 견제하면서 깨끗해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특히 언론도 권력이니 견제하면서 책잡힐 일을 하지 말라고 했고, 당도 장악하지 않아 공천권도 갖지 않았습니다. 세력의 정치를 하지 않아 대통령 후보 시절에도 캠프에 현역 의원이 별로 없었죠. 세력이 없다 보니 겉에서 보기엔 힘이 빠져 보였고, 기득권들은 혹여 자신의 권력을 빼앗길까 더욱 목소리를 높여 그분을 비판했죠. 그러나 때로는 누릴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 권력인데, 남들은 쉽게 누리는 권력을 그는 너무 무거워하고 벗어나고 싶어했습니다. 그래도 본인은 5년 임기 동안 자신의 업적을 기득권과의 싸움이라고 자평했습니다. 그분은 항상 가장 중요한 것이 공존의 사회라고 강조했습니다. 서로 공존하려면 각자의 의견을 나누고 이해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면서 계속 대화하고 토론하기를 즐겼지요. 정말 소탈해서 버스를 타고 이동할 때도 비서관에게 할 말이 있으면 당신이 직접 비서관 자리로 와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차나 음식을 먼저 드려도 쑥스러워할 정도였죠. 곁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것이 장점이고 감동적이었지만 권위적인 기득권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였을 겁니다.” 노 대통령은 ‘언어의 달인’이란 평가도 받지만 유난히 말실수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공식석상에서 ‘대통령 못해먹겠습니다’라고 한다거나…. 물론 재임 시절 보수언론과 계속 사이가 나빠서 노 대통령이 ‘나는 짜장면이 좋다’라고 하면 곧바로 언론에 ‘노 대통령 짜장면만 편애, 짬뽕 폄하’란 기사가 실린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을 정도였죠. “무엇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는 정치인 노무현의 치열한 고민이었습니다. 그는 절대 아무렇게나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대중연설을 앞두고는 며칠 전부터 구상을 하죠. 변호사 시절이나 인권운동을 하면서는 의뢰인의 절박함을 더 절실하게 묘사하기 위해 고심했고, 6월 항쟁의 거리에서나 노동자들 파업현장에서는 그들을 대변해 거리의 언어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단련되고 체화된 화법이 대통령이 된 후에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그가 비주류라는 편견 때문에, 특히 보수언론에 의해 활자화되는 과정에서 그의 화법은 의도적 왜곡에 취약한 면모를 드러내게 되더군요. ‘언론에 100통의 편지를 보내도 한 번도 답장을 못 받았다’고 할 만큼 서운함이 컸습니다. 결국 그런 오해들이 탄핵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지요.” 노 대통령을 비판하는 이들도 그가 철학을 가진 정치인이라는 데는 공감합니다. “항상 고민하고 생각하고 공부해서 나온 결과가 철학일 겁니다. 어떤 일을 결정할 때 가장 중요한 판단기준은 철학과 세계관입니다. 그가 영화 ‘변호인’에서 보여지듯 인권변호사로 변하는 과정에서 철학과 세계관이 넓고 깊어진 것 같아요. 약자, 덜 배운 사람, 덜 가진 사람들 편에서 그들과 같이 끌고가는 세상에 대한 기대가 컸습니다. 그걸 위해 정말 많은 공부를 했죠. 비서관과 대변인, 부속실장을 하며 지켜본 노무현 대통령은 모든 물음에 답을 주었습니다. 언제나 자신의 입장이 있었습니다. 중요한 국정기조에서부터 사소한 일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과 지침을 주었습니다. 대통령이 애매한 입장을 취해 참모들이 당혹스럽거나 곤욕을 치러야 할 일은 없었습니다. 그는 답을 주는 정치인이었고 모든 책임은 대통령이 진다는 소신이 확고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노 대통령의 정치철학만이 아니라 소탈한 면모, 눈물을 흘리거나 파안대소하는 모습 등 공감력에 호감을 보입니다. “공감력이 참 큰 분이었죠. 특히 대통령 재임 시절에는 특별한 만찬 일정이 없는 한 9시 뉴스를 빠짐없이 모니터링을 했는데 ‘나는 모든 기사와 보도들이 아프다’라고 했습니다. 자신과 참여정부를 비판한 언론의 날선 비판도 물론 아팠지만, 정책의 문제점이나 사각지대를 지적하는 보도를 접할 때도 마음 아파했습니다. 미처 챙기지 못했거나 잘못 책정된 정책은 없는지 늘 노심초사했습니다. 어느날 거리로 내몰린 피해자가 어려움을 호소하는 장면을 보고 대책을 마련하겠다며 즉시 아침 비상회의를 소집한 적도 있었죠. 이웃의 힘겨움을 함께 아파하는 따뜻한 마음, 인간에 대한 예의가 바로 공감력이 아닐까요.” 노 대통령에게 정치란 무슨 의미였을까요. “국민, 특히 권력이 없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그는 국회의원이 되고서도 스스로 정치인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국회에 들어온 것도 재야운동가로서 국회란 제도 안에서 노동계를 변호할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죠. 3당 합당 과정에서 정치인으로서의 자각이 생긴 것 같아요. 호남을 고립시킨 이 구도를 깨야 한다, 국민통합을 해야 한다는 정치적 확신이 생기면서 진정한 정치인으로 거듭났습니다. 정치인은 금방 낡은 정치인이 되지만 욕을 먹어도 정치는 정치인이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끝없이 금기를 깨고 계속 실패하고 또 도전했던 이유가 자신과 비슷한 이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였지요. 그게 진정한 정치라고 믿었습니다.” 이제 개인적인 질문을 하죠. 청와대에서 차지한 비중과 위상을 감안할 때 청와대 수석을 지냈어야 했지만 극구 사양해 청와대를 나갈 때까지 비서관에 머물렀습니다. 왜 그랬나요. “저도 권력의지가 없었습니다. 자기정치를 하겠다는 욕심도 없었구요. 수석이 권력이라면, 권력은 올라가는 만큼 또 내려와야 하는데 대통령을 가까이 모신 것만으로도 참 행복했습니다.” 앞으로 계획은 뭔가요. “이번 책 은 노무현 대통령의 인간적 측면을 보여준 것이고, 참여정부 시절의 정책과정이 어떻게 이뤄졌는지와 각 사건의 과정을 기록한 책을 낼 것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퇴임 후 정책과정에 대한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하나의 정책이 입안되고 그것이 토론과 논의와 평가를 거친 끝에 정책으로 완성되어 시행되기까지의 과정을 실제 사례를 통해 연구 분석하면서 그걸 책으로 만들고 싶어했습니다. 제가 그 책을 쓰면 노무현 대통령이 주신 숙제로부터 해방될 것 같습니다.” 조선시대 사초를 받아적은 사관처럼 윤태영 비서관은 노무현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 정치철학부터 일상의 면모까지 담담하게 기록했다. 기록이 역사라고 하지만 불과 5~10년 전 일들이 너무 아득하고 머나먼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 유인경이 만난 사람
- [인터뷰]「대통령의 글쓰기」 펴낸 강원국 전 청와대 연설비서관 “노 대통령 글쓰기 수준에 눈앞이 캄캄했다”(2014. 03. 18 10:49)
- 2014. 03. 18 10:49 정치
- “앞으로 자네와 연설문 작업을 해야 한다 이거지? 당신 고생 좀 하겠네. 연설문에 관한 한 내가 눈이 좀 높거든.” 2003년 3월, 강원국 청와대 연설비서관을 만난 노무현 대통령의 첫마디다. 이후 두 시간 동안 노 대통령의 ‘글쓰기 특강’은 이어진다. “짧고 간결하게 쓰게. 군더더기야말로 최대 적이네.” “평소에 사용하는 말을 쓰는 것이 좋네. 영토보다는 땅, 식사보다는 밥, 치하보다는 칭찬이 낫지 않을까?” “단 한 줄로 표현할 수 있는 주제가 생각나지 않으면, 그 글은 써서는 안 되는 글이네.” 강 전 비서관은 이날 대통령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렇게 글쓰기에 대한 수준이 높은 분을 어떻게 모시나’라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했다고 회고한다.‘글쓰기 특강’은 임기 5년 내내 이어졌다. 연설비서관실에서 대통령 앞으로 올려 보낸 연설문이 한 번에 통과된 적은 없었다. 노 대통령은 매번 코멘트를 덧붙여 글을 돌려보냈다. 강 비서관에게 노 대통령은 까다롭고 엄한 ‘글쓰기 선생’이었던 셈이다. 강 전 비서관은 이때 노무현 대통령에게 배운 ‘글쓰기 비법’을 책으로 담아냈다. 지난 2월 출간한 가 그 결과물이다. 참여정부 5년 내내 청와대 연설비서관으로 일했다. 대통령 연설비서관은 어떤 자리인가. “빛은 안 나는 자리다. 사람을 만날 이유도 없고, 골방에 혼자 앉아서 계속 연설문을 쓰고 고치는 일이라 사실 청와대에 있다는 의미는 하나도 없다. 그러나 대통령과 대화하는 시간은 많으면서 가장 직접적으로 대통령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자리다. 대통령은 말과 글로 통치행위를 해야 하는데, 하루에 두세 개 연설문의 초안을 직접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면에서 보람은 큰 자리다.” 대통령 연설문을 쓰려면 기본적으로 대통령의 생각에 대해 철저히 알고 있어야 할 텐데. “대통령 생각은 물론이고 대통령의 어투, 자주 쓰는 표현, 단어, 이런 것들까지 모두 알고 있어야 한다. 책상에 항상 붙여놓고 같은 의미이면 대통령이 자주 쓰는 단어로 썼다. 거기에 더해 평소 말하는 억양에 맞출 수 있게 연설문을 작성했다. 연설비서관실에서 연설문을 쓰면 항상 부산 출신 행정관이 소리내서 읽었다. 대통령 흉내를 내며 읽었는데, 듣다가 어색한 부분이 있으면 다시 고치곤 했다. 그래야 대통령이 읽을 때 입에 딱 붙는 연설이 되는 거니까. 이를 매일 하다 보니까 일상생활에서도 대통령 말투로 이야기를 하게 되더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글에 대한 기준이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책을 쓰기 훨씬 전의 일인데 을 쓴 김두식 교수와 글쓰기에 대한 대화를 나눴던 적이 있다. 김두식 교수가 글을 잘 쓰니까 청와대에 있으면서 노무현 대통령에게 들었던 연설문 지시사항이나 코멘트들을 들려주었다. 그랬더니 김 교수가 거기에 글쓰기의 정수가 다 담겨 있다고 하더라. 노무현 대통령은 글쓰기나 말하기로 평생을 고민해온 사람이다. 정치인 치고 노무현 대통령만큼 글쓰기를 고민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말과 글에 대한 기준이 상당히 높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말 때문에 가장 공격을 받은 대통령이다. “그 부분에 대해선 한편으로 억울해 하신 부분도 있다. 백 가지 말이 있는데 그 중 한두 가지 쓰레기 같은 말만 담아내는 언론은 쓰레기통이 아니냐고도 했고, (국민들에게) 편지를 썼는데 우체부가 배달을 잘 안 해준다고도 했다. 하지만 스스로 ‘말에 관해서는 대통령 연습을 하지 못했다’며 반성한 부분도 있다. 본인이 살아온 과정이 우아하게 말하고 일하는 환경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자신이 대학을 안 나오고, 살아온 환경이 주류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류 언어를 익숙하게 쓰는 준비가 안 됐다는 뜻이었다. 그 말이 더 마음이 아프더라.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잘 각인해서 전달할 수 있으면 그게 최고의 말인데, 대통령의 말이 어디 따로 있는 것처럼 프레임을 짜놓고 거기에 안 들어온다고 공격을 하니까. 그래서 대통령이 주류언어 속으로 들어가보려고 노력도 했다.” 어떻게 노력을 했나. “청와대에서는 일종의 글 검토회의라고 할 수 있는 ‘독회’를 한다. 노 대통령은 독회할 때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주로 쓰는 단어를 말하다가도 ‘이런 말을 대통령이 쓰면 안 되지. 이 말은 빼고’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 예를 들어 연설문 중 ‘나는 지금 양극화와 씨름하고 있습니다’라는 말에서 ‘씨름하고 있다’는 말이 좀 격조가 없지 않느냐, 다른 말로 어떻게 해야 하느냐 등을 가지고 고민을 했다. 노력은 계속 하셨지만, 불쑥불쑥 본인의 스타일이 나온다고, 이건 어쩔 수 없다고 하시더라.” 노무현 대통령은 마지막 남긴 유서에서도 말과 글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유서에는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고 쓰여 있다. 나는 노 전 대통령이 그 생각이 든 순간에 돌아가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는 최소한의 여건만 됐어도 돌아가시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그 유서도 머릿속에서 계속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 하셨을 것이다. 노 대통령의 글 쓰는 스타일을 보면 연설하기 직전까지 고친다. 연설 당일 아침에도 고치고. 그러나 유서는 어디다 써놓고 고치지를 못하니 아마 머릿속으로 썼다 지웠다 하셨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마음이 아프다.” 다른 대통령들의 연설문은 어떻게 보나. “권위주의 정권은 말·글보다는 행동·결과로 보여준다. 박정희 정권, 전두환 정권에서는 지도자가 말이 많으면 안 되고 행동으로 보여줘야 국민들이 무서워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노태우 대통령 때부터 ‘이 사람 믿어주세요’ 하면서 말이 좀 많아졌다. 그래도 김영삼 대통령 때까지도 권위주의적 면모가 강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청년 시절에는 굉장히 연설을 잘했는데, 대통령 때는 연설문이 오히려 건조한 편이었다. 그래도 정치감각은 대단했던 게 연설문을 올려 보내면 딱 한 줄을 덧붙였다고 한다. 그러면 어김없이 다음날 그 부분이 신문 제목으로 뽑혀 나왔다더라. 기자들에게 이 부분이 대통령이 쓴 부분이라고 알려준 적도 없는데.” 대통령의 통치스타일은 대통령의 연설문에서도 드러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기본적으로 국민과 소통하려는 대통령은 국민과 과정을 공유하려는 자세가 연설문에 스며 있다. 결과뿐만 아니라 결과가 나온 과정을 설명하는 식이다. 그러나 권위주의적 통치스타일은 결과를 설명해주는 데 초점을 맞춘다. 알게 모르게 ‘내가 가는 길이 맞고 따라오기만 하면 잘 살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려는 태도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 이 방식이 효율적이기는 하다. 하지만 결과를 설명하는 쪽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면 국민들은 불통의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다. 국민들이 정확히 말로는 그 느낌을 설명하지 못하지만, 절대로 그것을 모르지는 않는다.”
- 인터뷰
레이디경향(총 2 건 검색)
- 여성 최초 청와대 행사기획비서실 김은경 비서관
- 2007. 08. 13 화제
- 대통령 내외가 머무는 청와대 내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일반 사람들 상식으로는 쉽게 감이 오지 않는 게 사실. 청와대 여성 최초 행사기획비서실 김은경 비서관이 말하는 청와대의 ‘여성’ 파워. 약간의 두려움은 오히려 즐길 줄 알아야 흔히 청와대를 떠올릴 때면 여성보다 남성이 먼저 떠오른다. 그만큼 청와대 내에는 남성들이 선점하고 있다는 증거다. 사실 그렇다. 과거 5공화국 때는 행정관 이상 여성 공무원이 1명, 6공화국 2명, 문민정부 4명, 국민의 정부 24명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 참여정부에서는 여성 인력의 기용을 대폭 확대하면서 여성의 비율이 전체의 28%(1백38명)나 될 정도로 늘어났다. 여성도 남성과 똑같은 위치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인식의 변화가 가져온 결과다. 그리고 남성과 같은 위치에서 그들보다 더 ‘부드러운 힘’을 발휘해온 덕분이다. 김은경 행사기획 비서관은 이런 변화의 선두에 서 있는 여성이다. ‘행사기획’은 ‘반 깡패가 되어야 한다’는 속설이 나돌 만큼 힘들기로 유명하다. 그런 자리에 여성이 발탁된 것은 청와대 역사상 최초다. “행사기획은 많은 부서와 연계가 돼요.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깐깐하다고 욕을 먹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데 욕을 얻어먹더라도 강력하게 밀어 부쳐야 해요. 대통령의 행사이기 때문이죠. 작은 실수도 절대 용납이 안 돼요.” 지난 3월, 여성 최초 행사기획 비서관으로 발령을 받은 김 비서관. 주위에서는 ‘일이 힘들 것’이라고 걱정 어린 눈빛을 보냈지만, 그녀는 오히려 ‘약간의 두려움’을 즐겼다고 말한다.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겁이 없었어요. 처음 발령을 받았을 때 속으로는 분명히 두려움이 있었겠지만, 오히려 약간의 두려움은 일을 할 때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두려움을 넘어서 그 일을 해냈을 때 기쁨은 정말 굉장하죠. 그리고 ‘자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녀가 하는 일은 간단하게 말하자면, 대통령의 공식적인 행사를 ‘연출’하는 것이다. 보통 지방 각 부처의 공식적인 행사, 3·1절, 4·19 기념식 등이 그것. 그리고 이 모든 진행은 관련 부처와 행사 의전팀의 협력 아래 이루어진다. “대통령의 동선, 무대 위치, 행정 관련 부처에 있는 사람들이 마치 한 사람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해요. 보통 행사하기 한 달 전, 두 달 전부터 기획을 하고, 경호 쪽에서도 같이 움직이죠.” 기억에 남을 만한 3가지 에피소드 이렇게 대통령 내외의 행사를 바로 옆에서 보좌하다 보면 잊지 못할 황당한 일들을 경험할 때가 많다. 에피소드 1 - 폭우 속 탱크 시범식 우리나라 차기 전차 출고식 날. 대통령 내외를 모시고, 넓은 대지에서 달리는 전차의 실험을 하는 날이었다. 보통 이렇게 야외 일정이 있는 날은 ‘언제 바람이 얼마나 부는지’ ‘비는 언제 얼마나 오는지’까지 일일이 다 체크한다. 밤새도록 준비한 행사. 하지만 행사 당일 아침부터 비가 엄청 쏟아졌다. 먹구름이 잔뜩 끼어 햇살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상황이 이쯤 되면 행사를 준비하는 직원들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가게 된다. 행사 시작 1시간 전. 급기야는 5백여 명의 우비를 긴급 공수해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안 된다는 이유는 통하지 않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1시간 안에 모든 준비를 완료해야 했다. 행사 준비 요원들은 거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빗속에서 진행될 모든 상황을 준비해놓았다. 그런데 대통령 내외가 도착하기 5분 전. 빗발이 가늘어지기 시작하더니 서서히 비가 그치더라는 것. 특히 대통령을 태운 헬기가 도착할 때 쯤에는 기적처럼 하늘이 맑게 개였다고 한다. 무사히 탱크 시범을 끝내고 나니, 아까의 정신없는 사투(?)가 마치 꿈속의 일 같더란다. 그래도 무사히 행사를 마쳤다는 뿌듯함에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고 한다. 에피소드 2 - 잊을 수 없는 헬기의 공포 FTA 반대 축산 농가를 방문하기 위해 평창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대통령이 한우 농가를 방문해서 토의를 하기 위해 평창을 가게 됐다. 김 비서관은 헬기를 타고 평창에 간다는 생각에 부푼 기대를 안고 있었다. 하지만 헬기를 타면 냉난방이 안 되고, 공기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한 게 화근이었다. 헬기 타고 가는 동안 갑자기 얼굴이 노래지면서 속이 울렁거리고, 손에서는 진땀이 나기 시작했던 것. 돌아갈 때는 ‘버스’나 ‘기차’를 타고 가리라 마음먹으며, 아침에 먹은 것을 다 토해내기 직전이 돼서야 겨우 헬기에서 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땅에 내리는 즉시, 모든 비서관들은 대통령의 뒤에 바짝 따라붙어야 하기 때문에 잠시 호흡을 돌릴 시간도 없다. 헬기에서 내리자마자 대통령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정신이 몽롱하면서, 속이 울렁거렸고, 몸을 비틀거렸지만 주춤할 시간이 없었다. 간신히 한우 농가에 도착한 뒤에 김은경 비서관은 한 여기자를 만난 후 ‘헬기 공포증’이 싹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어제 헬기를 처음 탄다며, 무척 좋아하던 여기자가 있었어요. 그 여기자를 농가에서 만났는데, 노랗게 뜬 얼굴을 하고 ‘저 죽을 뻔했어요’라고 말하더군요. 어제 방방 뛰며 좋아하던 모습이 생각나면서 왜 그렇게 웃기던지…. 호호호.”에피소드 3 - 중동 순방 그리고 카타르 왕비 3월 말에 대통령 내외를 모시고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카타르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중동은 여성 경시 문화 때문에 외국에서 영부인이 와도 궁에 입장시키지 않는다. 현지에서 영부인을 따라다니게 된 김 비서관은 카타르의 왕비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입궁하기 전 카타르 왕비가 11명의 아이를 낳았다고 들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몸집이 있는 아줌마 왕비를 예상했다. 하지만 왕비를 직접 만난 그녀는 충격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180cm의 큰 키에, 호리호리한 항아리 몸매,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의상을 입은 미모의 여성이 그들을 맞이했던 것. 김 비서관은 ‘왕비가 저렇게 예쁠 리가 없잖아’라면서‘왕비를 옆에서 모시고 있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가 바로 카타르 왕비였던 것. 그렇게 고상하고 멋있는 카타르 왕비는 직접 내궁을 안내하면서 내궁 디자인을 직접 했다고 설명을 하더란다. 또 우리나라 교육 문화에 관심이 많아서 권양숙 여사와 한국의 교육 문화에 대해 깊이 있는 토론을 하기도 하더라는 것. 이에 9월에는 한국을 방문하기로 약속을 했다고. 김 비서관은 아직도 대단한 열정을 지닌 미모의 왕비를 생각하면, 저절로 웃음이 퍼진다고 한다. “여성 후배들에게 힘이 되고 싶어요” 어릴 적 그녀의 꿈은 연극배우가 되는 것이었다. 어린이 프로그램의 아역탤런트를 해봤는데, 무척 재미가 있더라는 것. 하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아나운서로 꿈을 돌리게 됐다. 김 비서관은 1985년 MBC에서 처음 아나운서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결혼과 출산 등을 겪으면서도 항상 손에서 일을 놓지 않았던 그녀. 연극을 할때는 연극에 푹 빠져 살았고, 방송을 할때는 또 방송의 매력에 푹 빠져서 행복하게 일을 했다. 이후 대학 강의를 나가면서는 어린이 재단, 여성의 전화, 부산 비엔날레 홍보위원 등으로 활동해왔다. 하지만 일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좀 더 큰물에서 뜻을 펼쳐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란다. 권양숙여사의 지시로 만들어진 수유실과 여성휴게실 전경.“일을 하다 보니 이게 올바른 일인데도 내 힘이 너무 모자라서 뜻을 못 이루는 경우가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가진 뜻을 좀 더 큰 틀에서 펼쳐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때마침 지난해 5.31 지방선거 당시 오거돈 전 해양수상부 장관 캠프에 대변인으로 들어갈 기회가 생겼어요. 새로운 물로 뛰어들 기회가 생긴 거죠.” 그렇게 정치 쪽과 인연을 맺은 그녀는 지난해 7월 청와대 국내 언론비서관실 국장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가 늘 그래왔듯이 청와대에서의 일은 무척 재미있고 행복했다. 그녀가 행사기획으로 발령받아 오면서 생각한 점은 ‘밝게 웃으면서 일하자’는 것이었다. “대통령의 행사이기 때문에 딱딱하고 무거울 수 있잖아요. 저는 그걸 탈피하려고 많이 노력해요. 주위에서 ‘비서관님이 오시고 나서 분위기가 많이 좋아졌다’는 말을 듣는 게 정말 좋아요.” 청와대에서 여성의 입지가 어떤지, 그리고 청와대 내에서 여성들에 대한 배려는 어떤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눈에 뛰는 점은 참여정부 들어서 여성들을 뽑는 인원이 늘어났다는 거죠. 또한 여사님의 지시로 여성휴게실과 수유실을 두 군데나 만들었어요. 여사님은 여성의 사회 진출이 많아야 된다고 늘 말씀하세요. 여성의 발언이 많아져야지 앞으로 우리사회가 더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죠.” 청와대에서 지난 1년 동안의 생활은 김은경 비서관의 인생에서 대단히 중요한 시기였다. 전체를 볼 수 있는 눈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은경 비서관의 꿈은 청와대에 들어와서 보고, 듣고, 느끼고, 배웠던 것을 지역사회 내려가서 활용하는 것이다. “이곳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배웠던 것을 지역사회 내려가서 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우리나라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갈 수 있는데, 한 몫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좀더 욕심이 있다면 많은 여성 후배들에게 힘이 되는 선배가 되고 싶어요.(웃음)” ■글 / 김민주 기자 ■사진 / 이성원
- 청와대 비서관 사칭 사기 사건 겪은 백일섭
- 2006. 06. 01 연예
- MBC-TV ‘사랑은 아무도 못말려’에서 엄하고 고지식한 아버지 역으로 든든한 무게 중심을 잡아주고 있는 탤런트 백일섭. 오랫동안 좋아하던 초로의 배우를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마주하게 되는 건 정말 못할 짓이다. 그나마 위안이 된 것은 그는 선의의 피해자라는 사실이었다. “워낙 사연이 드라마틱해서 의심 한번 하지 않고 완벽하게 속을 수밖에 없었다” 4월 말 청와대 비서관과 국정원 기조실장을 사칭해 돈을 가로챈 50대 남자가 사기 혐의로 구속됐다. 번듯한 외모와 세련된 매너로 주로 부유한 미망인들을 상대로 사기 행각을 벌여온 그는 강남의 한 골프 모임에서 만난 미망인 이모씨를 상대로 3억원을 뜯어낸 혐의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수사 과정에서 그가 한 중견 탤런트에게 5억원을 받아낸 사실이 추가로 확인됐다. 이 사건의 피해자는 바로 탤런트 백일섭이었다. 완벽한 사기 행각에 의심 한번 없이 돈 건네 호인(好人) 소리를 듣는 이들이 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쉽게 사기꾼의 표적이 된다는 게 현실이다. 백일섭은 술 좋아하고 사람 밝히고, 남에게 싫은 소리 하느니 그냥 내가 손해보고 마는 사람이다. 천성은 쉽게 버리지 못하는 법. 인터뷰가 있기 전날 밤 그는 경찰에 최씨의 기소를 원치 않는다는 최후의 진술을 전했다. 백일섭이 최씨를 처음 만난 건 2001년 경기도의 한 골프장에서였다. 우연히 함께 라운딩을 하게 된 인연으로 얼굴을 익힌 두 사람은 집이 같은 분당인데다가 취미가 골프라는 공통점으로 인해 인근 골프 연습장에서 간간이 만남을 이어갔다. “1967년도쯤인가, 내가 청와대 초청을 받았는데 그때는 초청객들의 신원 조회를 했거든요. 그런데 자기가 당시 내 신원조회 작업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당시 청와대에서 검사로 재직하고 있었다면서요.” 최씨의 연배로 미루어봤을 때 당시에 그 일을 했을 거 같지 않다고 하자, 그는 “남들보다 일찍 법조계에 입문했기 때문”이라고 말해 백일섭은 의심의 시선을 쉽게 거뒀다. 그러나 이번 사건으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67년 당시 최씨의 나이는 고작 열여섯 살이었다. 경찰서에서 이를 전해들은 백일섭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최씨는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고시를 최우수 성적으로 합격한 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청와대 경제비서관으로 근무했다고 피해자들을 속여왔다. 그는 국정원 고위 간부의 이름을 가명으로 사용했는데, 공교롭게도 실제 고위 간부와 최씨는 외모마저 흡사한 것으로 알려져 그의 사기 행각은 그야말로 날개를 단 듯했다. “국정원에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으니까, 믿을 수밖에 없었어요. 한때는 수감 생활을 하고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며 아내까지 잃고 혼자 살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얘기하는데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듭디다. 얘기가 굉장히 드라마틱하잖아요? 일일이 사실 여부를 따질 필요가 없겠다 싶었습니다.” 그러나 최씨에게는 멀쩡히 아내가 있었고, 부산지검 검사라던 아들, 모 회사 창업주라는 할아버지는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의 과거에 대해서 아직도 정확하게 확인한 바가 없다는 백일섭은 “그는 마치 지금껏 거짓말을 참말 하듯 하고 살아온 사람 같았다”고 했다. 사법고시를 패스하고 법조계에 몸담고 있다는 주장에 걸맞게 법에 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고. 사건의 발단은 현재 유명 법무법인의 고문 변호사라고 소속을 밝힌 최씨가 “인천 검단 지구 상가와 경기 용인 아파트에 투자하면 두 배의 이익을 남길 수 있다”고 유도해 백일섭으로부터 2억원 두 번, 1억원 한번, 합이 5억원의 자금을 갈취한 것. “사업 투자를 제의하기에 ‘어디 한번 해봅시다’ 하고 돈을 건넸지요. 저희 같은 사람들(연예인)은 사회 경험이 많지 않은데다가 변호사는 사회 공인으로서 믿을 만한 사람이니까 사기를 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2년의 세월 동안 골프 연습장도 함께 다니고, 술자리가 있을 때는 부담 없이 불러내기도 하면서 친분을 쌓아온 사이라 백일섭은 돈을 내줄 때도 그 흔한 차용증 하나 받지 않았다. 설마는커녕 추호의 의심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받아간 돈 5억원을 최씨는 개인 용도로 사용했다. 배신감은 크지만 손해 본 거 없다치고 잊으려 4월 말 이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올랐을 때 백일섭은 그때까지도 최씨로부터 사기당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그는 사실과 다르다며 반박했다. 3억원을 날린 이씨의 고소로 조사를 시작한 경찰이 백일섭에게 연락을 취했을 때는 이미 최씨로부터 변제를 받은 상태였다고 한다. 때문에 그는 참고인 자격으로 진술을 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주변에서 들리는 얘기가 그 사람이 ‘가짜’라고 하기에, 확인을 해봤더니 돈을 받아가서 투자한 흔적이 어디에도 없었어요. 그래서 현금 5억원 대신 그에 상응하는 가치의 부동산을 변제받는 것으로 일단 마무리를 지었어요. 향후 부동산 시세만 괜찮으면 난 손해 보는 거 없어요. 그냥 부업한 셈 쳐야지요.” 이번 사건에 대한 얘기를 꺼냈을 때, 백일섭은 “별일 아니고, 이미 해결되었으니 기사 쓸 필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자신이 사기를 당했으면 이 참에 화풀이라도 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서 말이다. “그의 거짓말에 속은 건 분하고 배신감을 느끼지만 그건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인 거고. 나한테만 그런 게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 다 철저하게 거짓말을 한 거잖아요. 어쩜 그렇게 완벽하게 꾸며낼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인간적으로 불쌍하더만요. 어쨌든 난 내가 준 것 이상으로 변제를 받았고, 그 사람이 나에게 해코지한 것은 없으니까 하루빨리 털어내야죠.” 차용증을 받아두지 않았기 때문에 최씨가 돈을 받은 적이 없다고 발뺌했으면 일이 곤란하게 되었을 텐데, 그나마 5억원을 받아간 것을 순순히 인정했다는 점에서 백일섭은 다행이라 여기는 듯했다. 40년 연기 베테랑이 속을 만큼 최씨의 연기가 완벽했느냐고 묻자, 그는 “애초부터 의심을 하지 않았으니까”라고 답했다. “참고인 진술차 경찰서 갔다가 그 사람을 만났는데 미안하다고 하더군요. 포승줄에 묶인걸 보니 참 안됐습디다. 어차피 (이씨 고소 건으로) 죄값은 치르겠기에, 나로 인한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비 오는 날이면 혼자 분위기 있는 음악을 들으며 운전을 하고, 지방 촬영이 있으면 일찌감치 출발해 생각할 여유를 갖는 것이 좋아서 지금도 매니저 없이 활동하고 있다는 백일섭. 그는 ‘사랑은 아무도 못말려’의 대본 리딩이 있던 날에도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해 대본을 펼쳐들었다. 어쩌다 보니 매일같이 술을 마시게 되어 아내로부터 꽤나 염려 섞인 잔소리를 들은 모양이지만 그는 “즐겁게 술 마시고 운동도 잘하고 일도 열심히 하면서 낙천적으로 살다 보니 건강이 따라오더라”고 했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전문배우 시리즈 중 그가 ‘깜짝 놀라는 아버지 전문배우’로 꼽혔다는 얘기를 들려주자 “허허허”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글 / 장회정 기자 사진 / 이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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