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총 166 건 검색)
- 불확실성에 몸 사리는 대기업들…임원 승진자 작년보다 10% 줄어
- 2024. 12. 24 07:45경제
- 30대 그룹 중 임원 인사 낸 21곳 조사 사장단 이상 고위직 승진 규모 ‘반토막’ 픽사베이 국내 30대 그룹 임원 승진자가 지난해보다 10% 가까이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고위직인 사장단 인사는 절반이나...
- 몸 사리는 대기업, 올해 M&A 40% 뚝…1조원 이상은 1건뿐
- 2024. 12. 18 20:49경제
- 총 50건에 8조5808억원 투자…2022년 150건 대비 3분의 1 토막 올해 국내 대기업의 인수·합병(M&A) 투자 규모가 지난해보다 약 40%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글로벌 시장 불안과 내수 침체 등이 영향을...
- M&A대기업대한항공인수합병아시아나
- “정부, 김건희 여사 띄워주기 위해 사리구 환수 입장 바꿔”, 이기헌 의원 국감서 지적
- 2024. 10. 10 13:12정치
- ... 현재 협약 수정본에 대한 내부 검토를 진행 중이다. 이 의원은 “지난 2월 국가유산청이 사리 반환에 합의했을 당시 문화재계 안팎에선 사리구를 떼어놓고 사리만 환수하는 건 ‘사리·사리구의 일괄...
- 보스턴미술관사리구김건희사리반환협상고려시대나옹선사라마탑형사리구
- 청문회 이어 국감…몰아치는 야, 몸 사리는 정부기관
- 2024. 09. 01 09:00정치
- 청문회 국회 끝나기도 전에 국감철로 접어들어 피감기관들 긴장 제3차 방송장악 청문회가 열린 지난 8월 21일 국회 과방위 전체회의에서 여당 의원 전원이 퇴장한 가운데 회의가 진행되고 있다. 박민규...
스포츠경향(총 124 건 검색)
- 메사리 보고서 “루트스탁, 3분기 활성 이용자 수 급증” 주목
- 2024. 12. 18 16:11 생활
- 탑티어 비트코인(BTC) 사이드체인 루트스탁의 이용자 수가 최근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3분기 활성 이용자 추이를 확인할 수 있는 지표들이 급증했으며, 이는 프로젝트의 생태계 성장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글로벌 암호화폐 데이터 분석업체 메사리(Messari)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3분기 루트스탁의 평균 일간 활성 계정 수 총합이 2분기 대비 약 61%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평균 일간 활성 계정 수는 하루에 1회 이상 트랜잭션을 발생시킨 계정 수의 평균을 나타내는 지표다. 메사리보고서 활성 계정 수 증가와 더불어 트랜잭션 활동량의 증가세도 눈에 띈다. 루트스탁의 트랜잭션은 지난 8월 5일 1만3000건을 넘어서며 최고 기록을 기록했으며, 이는 지난 분기 대비 18.5% 증가한 수치다. 신규 계정 수도 지난 분기 대비 111.9% 증가했다. 이번 루트스탁의 이용자 수 급증은 주요 티어1 프로토콜과의 통합에 따른 생태계 확장이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분석된다. 루트스탁은 3분기에 크로스체인 유동성 집계 프로토콜 심바이오시스(Symbiosis), 브릿지 프로토콜 라이파이(Li.Fi)와 통합됐으며, 지난 2분기에는 멀티체인 탈중앙화 거래소 스시스왑(Sushi Swap)에도 합류한 바 있다. 아울러 3분기 말 루트스탁 네트워크의 총예치규모(TVL)도 약 1억 7240만 달러를 기록했다. 이는 지난 8월 5일 대비 27.53% 급증한 수치다. TVL은 해당 프로젝트에 예치된 자산의 총 가치를 나타내는 지표로, 해당 프로젝트의 신뢰도, 유동성, 그리고 보안성을 나타내는 지표로 평가된다. 보고서는 네트워크 내에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 USDT의 비중이 커진 것도 주목했다. 여타 블록체인 이용자들이 루트스탁 네트워크로도 진입하려는 시도가 많아졌다는 것으로 보인다. 3분기 USDT의 점유율은 지난 분기 대비 8% 증가한 44.6%를 기록했다. 한편, 루트스탁은 비트코인 네트워크의 보안성과 탈중앙성은 유지하면서 스마트 컨트랙트 기능을 첨가한 비트코인의 1호 사이드체인이다. 지난 2016년 세계 최대 비트코인 채굴사 비트메인 테크놀로지와 글로벌 투자사 DCG로부터 투자를 받은 이후, 지속적인 성장세를 나타내고 있다. 최근 비트코인 네트워크 상 최초로 영지식 프로토콜인 지케이스나크(ZK-SNARK) 기술을 검증해 화제된 바 있다.
- 메사리 보고서 “알레오, 보안 컨설팅사 감사로 투명성 확보”
- 2024. 12. 05 09:00 생활
- 레이어1 블록체인 알레오가 외부 보안 컨설팅사의 감사를 거쳐 투명성을 확보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출처|메사리보고서 글로벌 암호화폐 데이터 분석업체 메사리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알레오는 지난 9월 메인넷을 런칭하기 이전 시스템의 보안성과 무결성을 검증하기 위해 세 곳의 독립적인 보안 컨설팅사와 협력해 철저한 감사를 완료했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이번 감사 과정을 통해 알레오 블록체인이 악의적인 공격이나 잘못된 데이터가 발생했을 시에도 시스템의 견고함이 입증됐다고 분석했다. 알레오의 감사를 진행한 컨설팅사는 트레일오브비츠, NCC 그룹, zk시큐리티다. 구체적으로 이들은 영지식증명을 활용한 블록체인용 운영 체제 스나크OS와 블록체인 상의 가상 머신 스나크VM에 대한 보안 감사를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감사 과정에서 발견된 이슈들은 알레오 팀의 즉각적인 대응으로 수정됐으며, 해당 활동은 개발코드 저장소 및 협업 플랫폼인 깃허브(GitHub)에 투명하게 공개돼 블록체인의 신뢰성이 높아졌다는 설명이다. 아울러 보고서는 알레오의 높은 규제 수준을 준수하는 디앱(dApp)개발 환경에도 주목했다. 또 온체인 거래가 이루어지기 전, 데이터 사용자의 조건을 검증하고 승인 여부를 결정하는 기능이 거래의 안정성을 높이는 특징이라고 짚었다. 일례로 금융, 의료, 공급망 등 다양한 산업에서 데이터 프라이버시가 보호되면서도 규제 요구사항이 충족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구체적인 활용 예시는 ▲ 자금세탁방지(AML), 신원인증(KYC)이 가능한 금융 서비스 ▲ 의료진, 보험사 등 필요한 이용자만 접근할 수 있는 환자 데이터 보호 ▲ 제품 이동 경로를 추적하면서도 필요 시 특정 데이터를 공개할 수 있는 공급망 관리 ▲ 기관이나 사용자가 규정된 조건에 맞을 때만 데이터를 열람할 수 있는 정부 및 공공 서비스 분야다. 한편, 알레오는 지난 2019년 미국 네바다주에서 탄생했으며, ZK 기술을 필두로 블록체인 시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는 프로젝트다. 저명한 암호학자와 엔지니어를 포함, 교수와 글로벌 기업, 재단들이 참여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 ‘일본 아이돌계 레전드’ 콘도 마사히코, ‘한일톱텐쇼’ 전격 출연! 데뷔 45년 만에 첫 한국 방문해 역주행 열풍 ‘긴기라기니 사리게나쿠’ 가창
- 2024. 10. 28 23:31 연예
- 크레아 스튜디 ‘일본 아이돌계의 레전드’ 콘도 마사히코가 MBN ‘한일톱텐쇼’를 통해 데뷔 45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에서의 무대를 선보인다. MBN ‘한일톱텐쇼’는 한일 국가대표 현역 가수들이 출격해 트로트는 물론 K-팝, J-팝까지 한일 양국의 숨겨진 명곡을 선곡, 치열한 명곡 대결을 벌이는 ‘음악 예능 쇼’다. 콘도 마사히코는 ‘우리들이 사랑한 그 시절 명곡’ 특집에 전격 출연, ‘한일톱텐쇼’ 멤버들과 함께 무대를 꾸민다. 콘도 마사히코는 1979년 데뷔와 동시에 오리콘 차트 1위를 석권한 일본의 전설적인 아이돌 스타로, 데뷔 앨범이 무려 100만 장이 판매되면서 밀리언셀러에 등극한 80년대를 대표하는 레전드 오브 레전드 아이돌이다. 일본 최고 스타들이 출연하는 ‘홍백가합전’에 무려 10회나 출전하는 등 일본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린다. 콘도 마사히코가 부른 ‘긴기라기니 사리게나쿠’는 80년대 대한민국 청년들 사이를 휩쓰는 대히트를 쳤으며, ‘한일가왕전’ 경연곡으로 채택돼 불리면서 다시보기만 천만 건을 돌파할 정도로 폭발적인 역주행 열풍을 일으켰다. 콘도 마사히코는 지난 24일 진행된 ‘한일톱텐쇼’ 녹화에 참여, 대성, 강남을 비롯해 전유진, 마이진, 김다현, 린, 별사랑, 손태진, 신성 등과 첫 만남을 가졌다. 또한 ‘한일톱텐쇼’ 멤버들과 ‘긴기라기니 사리게나쿠’ 무대를 함께 꾸미는가 하면, 또 다른 히트곡 ‘책임지세요’도 단독으로 선보이는 등 변함없는 열정으로 감동을 일으켰다. 콘도 마사히코는 “‘한일가왕전’에서 ‘긴기라기니 사리게나쿠’가 불리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이렇게 한국에서 많은 분들이 제 노래를 좋아해 주시는 것이 놀랍고도 감사하다”라며 “‘한일톱텐쇼’처럼 한일 문화를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예능이 있다니 인상적이다. 꼭 한번 나오고 싶었다”라고 특별한 소감을 전했다. ‘크레아 스튜디오’ 측은 “‘한일톱텐쇼’의 인기가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뜨거워지면서 일본에서 이름만 들어도 깜짝 놀랄 스타들의 출연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라며 “2025년 일본 후지TV에서 방송될 ‘한일가왕전 일본 라운드’를 통해 한일 문화 교류의 폭이 더욱 확대될 것으로 기대한다”라고 자신했다. ‘한일톱텐쇼’는 매주 화요일 오후 10시 방송된다.
- 일본 여자배구 간판 코가 사리나, 파리올림픽 끝으로 은퇴
- 2024. 07. 09 15:46 스포츠종합
- 일본 여자배구대표팀 간판 스타 코가 사리나. Getty Images코리아 일본 여자 배구 간판 스타 코가 사리나(28· NEC)가 2024 파리올림픽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한다. 코가 사리나는 9일 자신의 소셜미디어 인스타그램에 자필로 “파리 올림픽을 치르고 현역에서 은퇴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초등학교 2학년 배구를 시작해 이번 올림픽을 끝으로 은퇴를 결정한 그는 “모든 경험과 만남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 주었다. 정말로 감사하고 있다”고 전했다. 2022년부터 일본 여자 배구대표팀 주장으로 활약하고 있는 그는 “파리올림픽에 배구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싸울 것이다. 끝까지 응원을 부탁드린다”고 밝혔다. 아직 20대인 코가의 갑작스러운 은퇴 선언에 일본 배구팬들은 적잖게 놀라움을 나타냈다. 20201년 도쿄올림픽 한국전에서 서브를 넣고 있는 코가 사리나. Getty Images코리아 2024 파리올림픽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 코가 사리나. 인스타그램 캡처 신장 180㎝인 아웃사이드히터인 그는 정확하고 빠른 스파이크로 높은 성공률을 자랑한다. 2021년 도쿄올림픽 한국전에서 맹활약을 펼쳐 한국 배구팬에게도 낯이 익다. 코가는 미모와 실력을 겸비해 일본은 물론 국내에도 많은 팬을 보유했다. 2022년에는 일본 남자 배구 대표팀 니시다 아라시와 결혼해 큰 화제를 모았다.
주간경향(총 8 건 검색)
- [정태겸의 풍경](56)전남 화순 야사리 느티나무 - 400년 된 나무의 가을(2023. 10. 27 11:20)
- 2023. 10. 27 11:20 문화/과학
- 전남 화순은 무등산을 사이에 두고 광주광역시와 이웃해 있다. 무등산은 단풍으로도 이름이 높은 곳. 화순의 국도를 따라 무등산의 북쪽을 향해 차를 몰고 있었다. 멀리 학교 운동장 안쪽에 커다란 나무가 보였다. 그냥 지나치면 아쉬울 것 같았다. 아무리 바빠도 잠시 들러서 구경하자 마음먹었다. 그 결정은 이번 여행에서 가장 잘한 일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어쩐지, 기념물 제235호. 이름은 ‘화순 야사리 느티나무’. 야사리라는 작고 아름다운 마을의 자랑거리였다. 몸체가 하나인 줄 알았더니 2그루란다. 높이만 25m, 둘레가 최대 5.3m에 달한다. 수령은 약 370~400년. 세간의 풍파를 오래 견디고 살아남은 이의 풍채가 당당하다. 나무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그윽하고 아름답다. 머리 위로 곱게 단풍이 들어서 더 멋스럽다. 물론 새순이 막 돋아나는 계절에는 다른 느낌으로 존재감을 뽐낼 테지. 이 마을의 마스코트와도 같은 이 나무는 계절을 온전하게 온몸으로 보여준다. 시선을 확 잡아 끌기에 충분했다. 원래는 마을의 당제를 지내는 당산나무였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신성시하며 아껴준 덕분에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생명이란 무릇 그렇다. 관심을 받고 씨줄과 날줄처럼 서로를 의지하며 거센 고난을 이겨내는 것. 그렇게 올해를 보낸 결실이 이 마을의 가을 풍경으로 완성된 듯하다.
- 정태겸의 풍경
- [이기환의 Hi-story](34)백제 왕흥사 사리는 어디로 갔을까(2022. 05. 13 14:17)
- 2022. 05. 13 14:17 문화/과학
- 2007년 10월 10일이었습니다. 충남 부여 왕흥사 목탑터를 조사 중이던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사단원들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습니다. 목탑터 초석의 사리구멍을 막은 돌뚜껑(25㎝×15㎝×7㎝)이 보였던 건데요. 떨리는 손으로 뚜껑을 열자 흙탕물 속에 사리기가 잡혔고요. 대나무칼로 조심스레 흙을 제거하자 글자가 한자 한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2007년 10월 10일 부여 왕흥사지의 목탑터에서 확인된 사리기 일체 /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정(丁), 유(酉), 년(年), 2월(二月), 15일(十五日)’. 목탑의 조성 시기를 알려주는 글자였습니다. 그다음 명문에서 조사원들의 숨이 탁 막혔습니다. ‘백(百), 제(濟), 왕(王), 창(昌)’…. ‘백제왕 창’이라면…. <삼국사기> ‘백제본기·위덕왕조’는 “(27대) 위덕왕의 이름이 창(昌)이고, 성왕의 맏아들”이라 했습니다. 명문을 이어보니 “정유년(577) 2월 15일, 창왕(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웠고, 본래는 2매를 묻은 사리가 신의 조화로 3매로 변했다(丁酉年 二月 十五日 百濟 王昌 爲亡王子立刹本舍利 二枚葬時神化爲三)”고 했습니다. <삼국사기>는 틀렸나 연구자들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왜냐하면 왕흥사의 조성 시기(577)가 역사기록(<삼국사기> ‘백제본기’)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삼국사기>는 “600년(법왕 2) 봄 정월에 왕흥사를 창건했고, 634년(무왕 35) 봄 2월 준공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삼국사기>는 후대(고려시대)의 기록이 아닙니까. 아무래도 당대(577)에 쓰인 사리기 명문이 더 정확하겠죠. 그렇다면 왕흥사는 역사기록(600)보다 23년 빠른 577년부터 조성되기 시작했다는 게 맞겠죠. 그래도 그렇지 <삼국사기>가 1~2년도 아니고 23년이나 틀렸다면 신뢰성에 큰 상처가 생기는 게 아닐까요. 틀리지 않았다는 견해도 있답니다. 연구자들은 왕흥사 명문 가운데 ‘찰(刹)’이라는 글자에 주목합니다. ‘찰’은 ‘절(寺)’일 수도 있지만, ‘장대와 기둥’을 의미하는 ‘탑(塔)’일 수도 있답니다. 왕흥사 명문에 나온 ‘입찰(立刹)’ 연대는 탑을 세운 577년을 뜻한다는 겁니다. 왕흥사는 23년 후인 600년 창건됐지만, 건물 전체가 634년에 완공된 것이고요. 그럼 ‘사찰(寺刹)’, 즉 ‘탑(刹)’과 ‘절(寺)’을 완성할 때까지 총 57년이 걸렸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또 “위덕왕이 죽은 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절을 세웠다(百濟王昌爲亡王子立刹)”라고 했는데요. 위덕왕(재위 554~598)의 아들이라고 역사서에 기록된 이는 아좌(阿佐)태자 한사람뿐입니다. “597년 백제왕(위덕왕)이 왕좌 아좌를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일본서기>)는 내용이 있죠. 아좌태자는 일본 쇼토쿠(聖德·574~622)태자의 스승이 됐고요. 왕흥사 명문을 보면 위덕왕에게는 577년 무렵에 죽은 아들이 또 있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 죽은(亡) 아들을 위해 세운 절이라는 겁니다. 위덕왕이 서거했을 때(598) 일본에 체류 중이던 아좌태자 대신에 위덕왕의 동생(혜왕)에게 왕위가 돌아갔다는 얘기네요. 왜 아들 대신 동생이었는지 그 이유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왕위에 오른 혜왕(재위 598 ~599)은 2년 만에 서거하고, 그 아들인 법왕(재위 599~600)이 뒤를 이었는데요. 그분 역시 짧은 재위(2년)에 그쳤는데, 그때(600) 일단 왕흥사의 창건을 선언한 것이 되죠. 사리기 속에 순은제(99%)와 순금제(98%) 사리함이 들어 있었다. /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8000여점이나 쏟아진 국보급 유물 사리기 명문도 그랬지만, 제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사리기와 그 주변에서 쏟아져 나온 유물들이었습니다. 사리함 안에는 은제사리병이 있었고, 다시 그 안에 금제사리병이 들어 있었는데요. 둘 다 순금(98%)과 순은(99%)이었습니다. 사리공 주변에서 확인된 8150여점의 공양품은 또 어떻습니까. 하나하나가 국보·보물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유물이 출토된 곳에서 불과 5㎝ 옆에 근래에 묻은 PVC 파이프가 있었는데요. PVC 매설공사 중에 훼손될 뻔했는데, 천만다행으로 아슬아슬 피했습니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금목걸이와 금귀고리는 솜씨가 일품이었습니다. 굽은옥의 머리를 씌운 모자형 장식과 작은 고리를 연접해 만든 공모양 장식, 탄화된 나무를 장기알처럼 깎고 가장자리에 금판을 덧씌운 장식 등이 정교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특히 ‘공모양 장식’의 경우 중간중간 연결된 접점에 1㎜ 정도에 불과한 금속 알갱이들을 붙였습니다. 가락지와 구슬, 허리띠 장식 등 각종 은제품과 젓가락, 팔찌, 동전 등 동제품도 정교한 솜씨를 자랑했는데요. 그중 중국에서 통용된 상평오수전 2점과 오수전 1점 등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백제가 중국 남북조와 동시에 활발한 교역을 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공양품 중 쌀알보다 훨씬 작은 구슬에 샤프심보다 약간 작은 구멍을 뚫은 초절정 정밀 극세공을 자랑하는 것도 있습니다. 백운모판도 눈길을 끌었습니다. 연잎 사이에 마름모꼴 금박을 넣어 장식했는데요. 운모판의 두께는 0.008㎝에 불과합니다. 도교에서 불로장생의 약재로 알려진 연꽃 모양의 운모판은 무덤 주인공의 관모에 장식했던 게 분명합니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에 따르면 왕흥사 사리용기 및 유물과 무령왕릉 출토품 사이에 강한 친연관계가 있답니다. 무령왕릉(525~529)과 왕흥사 탑(577) 사이에는 50년의 시간차가 있잖습니까. 그런데 왕흥사 탑의 모자형 장식과 탄화된 나무를 깎아 금판을 두른 장식 등은 무령왕릉 출토 금속공예품과 쌍둥이라 할 만큼 유사합니다. 또 왕흥사 사리용기의 꼭지도 무령왕릉 동탁은잔과 연속선상에서 해석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무령왕릉 공예품이나 왕흥사 공예품은 모두 왕실물품을 제작하던 공방 장인의 솜씨가 발휘된 것이 아닐까요. 에 따르면 사리기 명문에 등장하는 ‘백제왕 창’은 다름아닌 백제 27대 위덕왕의 본명인 창(昌)이었다. /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사라진 사리의 행방은? 한가지 여담이 있는데요. 사리기 명문은 “…원래 사리 2매를 봉안했는데, 나중에 신의 조화(신령스럽게)로 3매로 변했다(舍利二枚葬時神化爲三)”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금제 사리병 안에 사리 3매가 있어야 하잖아요. 그러나 병 안에는 2매나 3매는커녕 단 1매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누가 빼간 흔적도 없었습니다. 대신 물만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천년수’도 아닌 ‘천사백년수’라 해서 관심도 끌었는데요. 국립문화재연구소가 혹시 사리가 녹았을 수도 있는 이 사리병 속 물을 분석해봤습니다. 그랬더니 그냥 결로현상 때문에 생긴 물(H2O)이었습니다. 그럼 처음부터 사리를 넣지 않았다는 얘기가 아닙니까. 그래놓고 ‘신의 조화로 둘에서 셋으로 변했다’는 등의 신이(神異)를 강조한 정치적 이벤트를 벌인 걸까요. 물론 모든 것을 과학과 논리로 판단할 수는 없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일본에서 발견된 <관세음응험기>(10세기 편찬설)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요. “백제 무왕 때(639) 불에 탄 제석사지 탑 아래 초석에서 수정병이 확인됐는데, 사리가 안에 들어 있지 않았다”는 겁니다. 임금이 불공을 드리고 참회한 뒤 병을 열자 영롱한 사리 6과가 들어 있었다는 겁니다. 또 442년 중국 송나라 서춘이라는 인물이 항아리에 넣은 사리 2과가 20과로 늘었는데요. 훗날 그가 타락하자 사리는 온데간데없어졌답니다. 사리를 공경하는 이는 얻지만, 업신여기는 이는 잃는다는 겁니다. 왕흥사 사리기에 3과가 남아 있어야 할 사리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요. 서춘처럼 타락한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 왕흥사 목탑터에서 확인된 공양구들. 백제예술의 정수를 보여준다. /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다 나 때문에 아버지가…” 또 다른 궁금증이 있죠. 위덕왕은 왕흥사뿐 아니라 왕들의 무덤을 조성한 능산리에 또 하나의 절을 세웠는데요. 1995년 능산리 절터에서 확인된 사리감에는 “백제 창왕 13년(567) 왕의 누이동생(성왕의 딸)이 사리를 공양한다(百濟昌王十三年太歲在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는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학계에서는 창왕이 죽은 아버지(성왕)를 기리기 위해 절을 세운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런 위덕왕이 10년 뒤(577)에는 죽은 아들을 위해 또 다른 절인 왕흥사를 건립했다는 겁니다. 창왕은 왜 그 같은 불사를 잇달아 감행했을까요. 여기에는 창왕과 아버지 성왕(재위 523~554) 그리고 한성백제 이후 기운 국세를 만회하려다 실패한 백제의 아픈 역사가 녹아 있습니다. 3국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구가하던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재위 413~491)의 침략으로 한성이 함락되자(475) 웅진(공주)으로 천도하죠. 그러다 다시 보다 넓은 평야지대를 확보하고 바다를 통한 해외 진출 등을 모색하기 위해 사비(부여)로 수도를 옮겨 중흥을 꾀합니다(538). 재위 중 사비시대를 연 중흥군주가 성왕(재위 523~554)입니다. 성왕은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과 손잡고 북벌을 단행했고, 한강 하류의 6개군을 점령하죠. 그러나 553년 신라 진흥왕의 배신으로 고토 수복의 꿈이 산산조각 나고 맙니다. 이때 성왕의 아들인 창(위덕왕)이 복수의 칼을 가는데요. 부득이 <일본서기>를 인용하자면 “태자인 여창이 원로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라정벌을 고집했다”고 합니다. 급기야 554년 12월 태자(창)가 대가야 연합군까지 동원, 관산성(충북 옥천)을 공격했는데요. 신라는 한강 하류인 신주(新州) 주둔 군대까지 빼돌려 관산성 포위에 나섭니다. 이때 아버지(성왕)는 아들을 격려하기 위해 전선으로 나섰다가 신라 매복군의 습격을 받아 전사하고 맙니다. <삼국사기>는 “554년 성왕이 관산성을 공격하다가 신라군에 의해 전사했다. 좌평(장관) 4명과 연합군 2만9600명이 죽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다시 <일본서기>에 따르면 천신만고 끝에 탈출한 태자 창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분이 위덕왕(창왕)이었습니다. 패전을 자책하던 위덕왕은 555년 8월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출가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왕흥사는 백마강을 사이에 두고 낙화암과 마주보고 있다. 는 “완공된 절이 (백마)강가에 있는데, 채색과 장식이 장엄하고 화려했다. 왕(무왕)이 매번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가 행향(行香·향로를 들고 불교법회가 열리는 주위를 도는 불교의식)을 펼쳤다”고 했다. / 백제왕도핵심유적보존관리사업추진단 제공 신하들은 “진정으로 잘못을 뉘우치려면 종묘·사직을 지켜야 한다”면서 “대신 불법의 덕을 쌓으라”고 권유했답니다. 그렇다면 이해가 됩니다. ‘불덕을 쌓아 잘못을 뉘우치라’는 신하들의 권유에 따라 능산리 절과 왕흥사를 잇달아 세운 것이겠죠.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한 불사이기도 했고요. 사비백제의 랜드마크여야 할 왕흥사 며칠 전 사비백제 왕과 왕족의 무덤인 부여 왕릉원(능산리고분군)의 동고분군에서 새로운 무덤이 확인됐습니다. 중앙과 동·서로 나뉜 부여 왕릉원에는 적어도 20여기의 왕과 왕족의 무덤이 존재하고 있답니다. 이번에 확인된 고분을 포함한 동·서고분군은 왕은 아니고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된답니다. 이미 복원 정비된 중앙고분군 7기의 무덤이 사비백제 시대의 왕릉으로 보입니다. 사비 천도(538) 이후 백제를 다스린 임금은 여섯 분입니다. 성왕, 위덕왕, 혜왕, 법왕과 무왕(재위 600~641), 의자왕(재위 641~660) 등이 있죠. 익산 쌍릉에 부부묘를 조성한 무왕과 멸망 후 당나라로 끌려간 의자왕을 빼면 4명의 임금이 이 7기 중 4기에 묻힌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중 ‘중하총’이 심상치 않은데요. 무령왕릉의 무덤 형식인 아치형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 고분의 주인공을 무령왕(재위 501~523)의 아들인 성왕으로 꼽는 견해가 있습니다. 왕흥사를 조성하기 시작한 위덕왕은 ‘동하총’이나 ‘동삼총’의 주인공으로 추정된답니다. 위덕왕과 비슷한 시기에 죽은 혜왕과 법왕은 ‘서하총’, ‘서상총’, ‘중상총’ 등 중 두곳에 묻혔을 거고요. 물론 모두 추정일 뿐입니다. <삼국사기>가 묘사한 7세기 전반의 왕흥사는 대단했습니다. “절은 (백마)강가에 있는데, 채색과 장식이 장엄하고 화려했다. 왕(무왕)이 매번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가 행향(行香·향로를 들고 법회가 열리는 주위를 도는 불교의식)을 펼쳤다”고 했습니다. 무왕 역시 성왕, 위덕왕처럼 불교의 힘을 빌려 나라의 중흥을 빌며 백마강을 건넜을 겁니다. 백마강 하면 우리는 낙화암과 함께 삼천궁녀를 떠올리죠. 백제의 찬란한 678년 역사를 삼천궁녀의 안타까운 설화로 마무리 짓는다는 건 어쩐지 서글픈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는 왕흥사의 화려했던 리즈 시절을 떠올려보면 어떨까요.
- 이기환의 Hi-story
- [박상미의 공감 스토리텔링]“젊은이여, ‘찌릉소’가 되지 말고 ‘뿔로사리’가 되어라!”(2015. 03. 02 17:12)
- 2015. 03. 02 17:12 사회
- “너도 일하고 나도 일을 하고 그래서 너도 잘살고 나도 잘살되, 착하고 어질고 깨끗하고 올바르게 잘 사는 세상, ‘노나메기 벗나래’ 세상을 만들자!” 대학 신입생 때 선배들 틈에 끼여 백기완 선생님의 민중사상 특강을 듣던 날, 이 문장이 나에게 왔다. 그 자리를 찾아간 건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부산 서면 시내에서 열린 대통령 후보 백기완의 연설을 들으러 갔을 때의 기억 때문이었다. 그때 이미 내 눈엔 백발 할아버지였던 백기완 선생님은 아름다운 고유어를 모든 문장에 맛깔나게 배치해서, 우화 같은 이야기와 정신이 번쩍 나는 불호령 같은 이야기를 쩌렁쩌렁 큰 목소리로 외치고 계셨다. 어린 마음에도 ‘히야, 저 할아버지 정말 연설 잘하신다. 사람을 설득하려면 저렇게 말해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새해를 맞아도 마음이 허한 요즘, 스승을 만나 길을 여쭙고 싶었다. 새해 덕담도 좋고 꾸중이라도 들어야 계속 살아갈 기운이 날 것 같았다. 나의 지도교수인 이도흠 선생님(한양대)과 함께 백기완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러 명륜동 통일문제연구소를 찾았다. 백기완 선생. 백기완 선생은 통일문제에 앞장선 시민사회운동가로서 현재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 박상미 선생님, 새해가 밝았습니다. 2015년을 사는 젊은이들에게 새해 덕담 좀 해주세요. 요즘 같은 시절에는 스승을 만나서 꾸중을 좀 듣고 싶습니다. “요새 젊은이들한테 늙은이가 얘기할 건 없지만은 야단칠 게 있어. 젊은이들이 젊음만 잊어버린 게 아니잖아? 뭘 좀 잊어버린 것 같아. 요즘은 젊은이들과 만날 기회가 없어.” 제가 대학 다니던 90년대 후반까지는 종종 대학에 강연을 오셨지요. 역사 속에 횃불 같은 사람이 되리라는 희망도 가슴에 새길 수 있는 기회였어요. 그 시절엔 한양대학교 겸임교수로 초빙되기도 하셨었지요.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는 학교에 강연을 거의 안 간 것 같아. 참 이상하지. 이제 할아버지 잔소리는 필요 없다는 이야기겠지만 말이야.” 아직 저희는 듣고 싶은 얘기가 많습니다. 기회가 없으면 기회를 만들겠습니다. “젊은이, ‘질라라비’라는 말 알아? 2만년 전에 사람이 잡아서 기르기 전에, 닭의 이름이 ‘질라라비’였어. 그런데 닭은 사람하고 살면서 세 가지 자기의 본성을 잊어버렸어. 날짐승이 날아다니는 것을 잊어버렸어. 자기를 완전히 저버린 거지. 두 번째는 자기가 자기 집 짓는 것을 잊어버렸어. 세 번째는 자기 먹이를 얻는 방법을 잊어버린 거야. 사람이 주는 먹이만 먹었지. 그래도 해가 떠오를 때가 되면 ‘꼬꼬댁 꼬꼬? 하면서 새벽이 왔음을 알리는 노래는 안 잊어버렸어. 그리고 죽지 않은 목숨이니까 알은 낳았지. 그 두 가지는 안 잊어버렸어. 그런데 알은 누가 먹어? 사람이 먹지. 아침에 울면 그게 누구한테 도움이 돼? 늦잠 자는 사람한테 도움이 되잖아. 이렇게 사람을 도와주는데도 닭의 마지막은 어떻게 돼? 사람에게 잡혀서 죽잖아. 장닭이 한 마리 있었어. 이놈이 아주 일찍 일어나서 늦잠 자는 주인을 깨워 주고 그랬는데, 사돈의 팔촌이 오니까 닭을 고아 먹으려고 모가지를 비틀고 털을 다 뽑아 놓았어. 죽어가던 닭이 가만히 생각을 해 보았지. ‘사람 곁에 와서 나는 다 잊어버렸어. 그런데 이제 내 목숨까지 뺏으려고 해? 이럴 바에는 도망을 쳐 보자!’” 본성을 이미 잃었는데, 과연 도망을 칠 수 있을까요. “부러진 목을 겨우 들고 날갯짓을 해 보니까 날갯짓이 된단 말이야! 펄떡 뛰니까 한 자도 못 뛰어올라. ‘에이, 어차피 죽을 바에는 이 울타리라도 넘어보자.’ 펄쩍 날아오르니까 넘어지는 거야. 기를 쓰고 숲으로 들어갔어. 거기서 살다 보니까 나는 것, 집 짓는 것, 먹이를 얻는 것도 회복이 됐어.” 드디어 자기 본성을 찾은 것이로군요. “그게 ‘된깔’(본질)이야. 자기 원래 된깔을 찾으니 몸의 크기도 달라졌어. 요만하던 닭이 애소리(송아지)만하게 됐다고. 울음소리도 달라졌어. 그래서 자기의 이름도 찾았는데, 그걸 ‘질라라비’라고 해. 옛날에는 시집 장가 간 다음에 예식이 끝나면 암탉·수탉을 묶어놨다가 날려 보내. 그렇게 날리면서 ‘질라라비, 훨훨!’ 그래. 이게 뭐인고 하니, ‘너는 오늘만큼은 닭이 아니라 질라라비 너 자신이다’ 이 말이야. 우리 아들·딸도 머슴의 아들·딸이지만, 시집 장가가는 오늘만큼은 해방된다는 이야기야. 요즘 젊은이들, 닭이 사람 때문에 자기 된깔을 잊어버렸듯이 젊은이의 된깔을 다 빼앗기고 있어. 그저 이거 하나만 기억해. 닭도 자기 된깔을 자기 힘으로 찾듯이, 너희들도 너희들의 된깔, 너희들의 본질을 찾아라! 이런 것이 누구의 이야기냐, 성현대덕? 아니야, 무지랭이들,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무지랭이들의 상상의 세계, 삶의 세계, 해방의 정서야. 젊은이들이여, 할아버지가 해준 ‘질라라비, 훨훨!’ 이야기를 꼭 기억해.” 우리가 보통 생각이 많이 부족한 사람을 ‘닭’에 비유하는데, 닭은 스스로 해방되었으니 저보다 지혜롭네요. 모가지가 부러지고 털이 다 뽑히기 전에, 이 이야기를 알려주면 좋겠어요. 어린이들에게 동화로 들려주고 싶어요. “서양 신화는 영웅호걸들의 얘기야. 동양의 신화도 영웅들이 나오는 것을 신화라고 하잖아? 그건 지배계층의 관념의 세계야. 지배를 받는 민중의 세계는 ‘질라라비, 훨훨!’이라고 외치듯이 해방의 세계야. 지금 젊은이들한테 필요한 것은 ‘해방될 자신을 찾는 것’이야. 곽노현 교육감이 당선되었을 때, 질라라비 이야기를 해 줬지. 곽노현 교육감이 그걸 받아 적더니 학생들, 선생님들 만날 적마다 질라라비 이야기를 했대. ‘우리 교육은 된깔, 본성을 찾아주는 거다. 그게 질라라비다.’ 곽 교육감 얘기가 끝난 후 학생들, 선생들 보고‘질라라비!’라고 외치면 다들 ‘훨훨’이라고 답을 외쳤대.” ‘질라라비, 훨훨!’을 외치는 학생들을 떠올리기만 해도 선생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해지시네요. 선생님, 요즘 대학생들은 정규직이 되는 게 꿈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꿈이 거의 없지 않나 싶어요. 자신이 잃어버린 게 무엇인지 모르니까 해방되어야겠다는 생각도 못하는 것 같습니다. “꿈이라는 것은 ‘바랄’일 때만이 꿈이야, 요새 젊은이들은 꿈은 없고 욕구, 욕망만 있는 거 같아. 욕구와 욕망은 꿈이 아니야. 꿈은 일구지 않으면 그 꿈을 꾸는 놈이 죽어. 그래서 반드시 일구어야 될 역사적 사명이랄지, 인류적인 사명이랄지, 아니면 생명체의 사명이랄지 이런 것을 진짜 꿈이라고 하는데 그게 ‘바랄’이야. 젊은이들은 ‘욕심의 포로’가 되어 있어. 그걸 누구보고 탓하면 안 돼. 취직! 취직! 먹고 사는 것! 이러지 말라고 그래. 그게 무슨 젊은이야? 노예지. 취직이라는 것이 뭐야? 자본주의 구조에 요만한 못 하나의 역할로 자기를 축소시키겠다는 거 아니야? 밥만 먹겠다는 거 아니야? 그게 무슨 고민이야? 정신이 나간 사람을 우리말로 ‘나간이’라고 해.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벽돌 한 장이 되겠다고 목숨 걸고 노력하는 것은 바로 나간이야. 자본주의가 잘못된 게 있으면 바로잡을 생각을 해야지. 좋은 것을 만들 생각을 하지 않고서 못 하나, 벽돌이나 되겠다고 하는 것은 주체성을 빼앗긴 꼭두각시 나간이가 되겠다는 꼴이야. 우리나라 젊은이들, 전 세계의 젊은이들을 나간이로 개조하려는 이 썩은 문명을 뒤집어엎어야 된다는 말이야.” 백기완 선생과 이도흠 한양대 교수. 이 교수는 백기완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 | 박상미 대학은 취업학원이 되었고, 인문학은 대학에서 급속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대학이 학생들에게 ‘바랄’보다 ‘나간이’가 되도록 가르치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을까요. “젊은이여, ‘찌릉소’가 되지 말고 ‘뿔로사리’가 되어라! 할아버지가 소 이야기를 해줄게. 소가 한 마리 있었어. 주인이 때리면 맞고 논밭 갈라면 논밭을 갈았지. 근데 하루는 봄이 와서 풀이 돋았는데 정말 풀이 너무 먹고 싶어. 고개를 돌리니까 코뚜레 때문에 돌려지지가 않아. 내가 이 풀 먹고 사는 짐승인데 풀을 못 먹게 하면 돼? 그래서 코뚜레를 끊었단 말이야. 그랬더니 주인이 와서 ‘네 이놈 코뚜레를 끊어?’ 그러면서 때리며 코뚜레를 다시 끼우는 거야. 이에 소가 생각을 했어. ‘이 사람이라고 하는 짐승은 나보다 못하구나. 너도 걸어 다니고, 나도 걸어 다니고, 너도 물 먹고, 나도 물 먹고…. 그런데 왜 네가 코뚜레를 뚫어서 나를 부려먹느냐 이 말이야. 더군다나 내가 먹고 싶은 것도 못 먹게 하고, 가고 싶은 곳으로도 못 가게 하냐 이 말이야.’ 다시 코뚜레를 끊고 나왔더니 주인이 ‘이놈!’ 하고 때리거든. 그래서 주인을 들이받았어. 어떻게 되었겠어?” 나간이가 질라라비가 되는 순간인가요. “주인이 그 뿔에 꼈어! 빙글빙글 돌다가 탁 치니까 하늘에 붕 떴다가 바닥에 내팽개쳐졌어. 죽게 됐잖아. 그래서 소가 ‘에이, 사람 사는 데는 못살겠다’ 하고 한없이 달리기 시작했어. 달려가다 보니까 넓고 푸른 풀밭이 나오더라 이 말이야. ‘아, 이게 풀의 천지, 내 옛살라비에 왔구나!’ 고향을 우리말로 ‘옛살라비’, ‘옛날에 살던 라비’라고 해. 옛날에 살던 땅이라는 말이야. 거기서 실컷 풀을 먹고 사는데, 웬 놈이 오더니 풀밭을 또 갈아엎어. 자기 땅이라고 갈아엎어. 이에 그놈을 들이받아 버리고, 그 쟁기 쇳덩어리를 다 먹어 버렸어. 근데 한참 후에 다른 놈이 오더니 이번엔 풀밭에 불을 질러. 소가 어떻게 했겠어? 불을 먹어 버렸어! 쇠도 먹고 불을 먹으니까 얼마나 힘이 세졌겠어? 그래서 영원히 죽지 않는 목숨이 됐어. 그게 바로 ‘뿔로사리’야. 노여움으로 살게 됐다는 말이야. 그러니까 참 목숨이란 노여움이란 말이지. 짜증내면서 아무나 들이받는 소는 ‘찌릉소’이고, 노여움을 품고 잘못된 것을 들이받는 소가 ‘뿔로사리’인 거야. 나에게 도움이 안 된다고 해서 화를 내는 건 노여움이 아니야, 그건 짜증이지. 짜증하고 노여움하고 혼동하면 안 돼.” 이제 알겠어요. 나간이, 찌릉소가 아닌 뿔로사리가 되어서 ‘질라라비, 훨훨!’을 외쳐야 하는 거군요. “젊은이여, 현실을 바꿔야 해. 역사는 끊임없이 있는 놈들이 우리한테 코뚜레를 뚫어서 끌고 가려고 해. 나는 이 이야기를 수백 번을 했어. 이 이야기를 듣고 자란 사람이 이제 50대, 60대야. 그런데 그들이 기껏 못 하나가 되고, 벽돌 하나가 돼서 이 썩은 자본주의 문명 속에 낑겨들었다 이 말이야. 거기서 쫓겨날까 봐 아주 꼼짝 못하고 자기가 자기 코뚜레를 뚫어서 매여 살고 있단 말이야….” 선생님, 왜 눈물을 흘리세요. “그만하자…. 할아버지는 한이 없다. 나는 일생을 이런 이야기를 하다가 늙었어. 그래서 할아버지가 너무 기가 막히고 약이 오르니까 내가 쏟을 건 다 쏟았거든. 마지막 남은 건 눈물밖에 없어. 그래서 내가 자꾸 너희들을 보면 눈물이 나오는 거야.” 눈물로 저희들을 걱정해주시는 어른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싶은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작년에 들었던 민중문화특강도 참 좋았어요. 제 수업을 듣는 대학생들을 데리고 함께 가서 들었었지요. 질라라비 이야기, 뿔로사리 이야기도 더 많은 젊은이들에게 들려주시고, 한겨울 얼어붙은 길바닥에 엎드려 우는 노동자들, 민중들도 지금처럼 안아주고 일으켜 주셔야 해요. “‘멍석말이 춤’이라고 들어 봤는가? 며칠 전에 한·미 자유무역협정 반대한 거 하고, 쌍용차 노동자 도와준 것 때문에 벌금형이 나왔어. 작년에 45만원 나오고, 올해 70만원 또 나왔어. 너무나 약이 올라. 나를 차라리 감옥에 넣어라. 그러면 감옥 안에서 ‘멍석말이 춤’을 내가 예술적으로 완결을 해서 나오려고 해. 오늘 하나만 들려줄게. 널판때기 위에다가 사람의 발을 갖다놓고 못을 박아. 얼마나 아프겠어? 발을 까딱할 수도 없이 아파. 도망도 못 가. 너희들이 나를 벌금 얼마로 내 발등에다 대못을 박고 있다. 몸서리가 쳐지다가 진절머리가 난다. 하지만, 바로 그 진절머리를 지렛대로 해서 일어나는 몸짓, 고통의 몸짓, 그것의 예술적 완결을 멍석말이 춤이라고 그래. 내가 감옥에 가면 거기서 없어져 가는 이 멍석말이 춤을 완결해서 나오려고 해. 그러니 차라리 나를 감옥에 넣으라고 말하고 싶어.” 얼음길에 엎드려 우는 노동자들을 안아주기만 해도 발등에 대못을 박는 시대… 하지만 우리는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우리의 일’이라고 공감하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자본주의는 능력이 딱 하나밖에 없어. 뭔고 하니, 사람을 갖다가 파편을 만드는 능력이야. 빈 병을 저 담벼락에다가 한 번 쳐 봐. 쨩하고 깨지지? 다시는 병이 안 돼. 그 조각을 주워다가 뜨거운 화롯불에 녹여서 다시 병을 만들기 전에는 못 써먹어. 자본주의는 사람을 갖다가 벽에 쳐서 파편을 만든다니까. 말하자면 주체적인 존재로 있지 못하게 만들어. 주체성을 뺏는 것, 그것은 곧 공감능력을 뺏는 거야. 우리가 지금 주체적인 인간으로 사는 게 아니라 파편으로 살고 있다니까. 그러니까 젊은이들이여, 깨진 파편처럼 살지 말고 주체적으로 일어서라 이거야. 그게 공감능력의 회복이야,” 선생님, 남은 소원이 있다면요. “나는 서울역에 땅 세 평만 사고 싶어. 내 일생의 좌우명을 준 가대기 형을 기억하기 위해서야. 서울역전에서 짐을 져서 먹고 사는, 성도 없는 가대기 형이라고 있었어. 형이 21살, 내가 13살 때 만났지. 가대기는 지게도 없어. 기술도 없어. 힘밖에 없어서 힘으로 쌀가마니를 지거든. 무거운 짐 져주고, 10원 주면 그걸로 군고구마나 사 먹고 그런 사람이야. 내가 작은 난민수용소에서 지낼 때였어. 거기서 잠을 자면 보름 안에 몸에 이가 생겨. 나하고 친한 살구라는 놈이 자기 엄마하고 둘이 수용소에서 살았는데, 이만 나오면 내 거라는 거야. 고놈은 뭐 서울에서 살아 봤는지 말씨도 서울말을 쓰고 싸움도 할 줄 알아요. 싸우면 내가 맨날 맞았거든. 하루는 싸우다가 내가 이겼어. 그래서 가대기 형에게 자랑을 했지. ‘형, 내가 오늘은 이겼지?’ 하니까, 날 보고 진지한 표정으로 ‘싸움은 있는 놈, 나쁜 놈 하고 하는 거지. 없는 놈끼리 붙어봐야 코피만 터져. 이긴 놈도 없고 진 놈도 없다’ 그러더라고. 난 그때 깨달았어. 내가 사람답게 살아 보려고 애쓰는 좌우명 1호야.” 성도 없고, 글도 모르는 21살 가대기 형은 참 지혜로운 민중이었네요. 그래서 큰 인물이 되었을 것 같아요. “가대기 형은 나중에 빨갱이로 몰려서 어디로 끌려가더니 매 맞아 죽었어…. 서울역에 땅 세 평만 꼭 사고 싶어. ‘싸움은 있는 놈, 나쁜 놈 하고 해야지 없는 놈끼리 붙어 봐야 코피만 터진다.’ 그 글을 써서 가대기 형을 기리는 돌을 세우고 싶어. 내 소원이야.” 백기완 선생님의 장편시 에서 일부를 가져와 다듬은 노래 ‘임을 행한 행진곡’이 떠올랐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를 지키며 살아온 강직한 어른 백기완 선생님. 민중들의 아름다운 신화를 오래도록 들려주십시오. 선생님이 감옥에서 멍석말이 춤을 추지 않아도 되는 그날까지 강건하시기를.
- 박상미의 공감 스토리텔링
- [길에서 만난 사람]이 땅의 원형적 풍경, 하동 평사리(2012. 06. 13 10:17)
- 2012. 06. 13 10:17 문화/과학
- 평사리는 어느 곳보다 너른 들녘을 품고 있었다. 또 들녘 곁으로 흐르는 섬진강과 둘레의 지리산 남부 능선 역시 든든한 배경으로 손색이 없는 터였다. 그렇게 악양면 평사리가 의 무대로 정해진 것이다. ‘만석꾼’이 나옴직한 너른 들은 대개가 전라도에 있었고, 경상도에서는 그만큼 광활한 토지를 발견하기 어려웠다. 악양 들판. 악양의 너른 들판을 가득 채우는 것은 늙은 부부송과 황금물결 치는 들녘, 그리고 그 들녘에서 부지런히 일하는 농부의 모습이다. 박경리 선생의 소설 의 배경이 된 평사리 최참판댁. 악양의 들판에 금실이 좋은 부부마냥 오래된 소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어느 가을 새벽. 한 노모가 이 황금들녘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있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마을 토박이들에게 별로 쓸모없는 땅이라 여겨져 무딤이들이라 천대를 받던 악양의 들녘을 지나 평사리 최참판댁을 찾아 서붓서붓 오른다. 어느 가을날 커다란 감나무 그해 가을 어른 주먹보다도 커다란 대봉이 실하게 매달린 감나무는 온 동리의 담장을 감홍빛으로 물들였다. 악양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넓은 들녘과 가을이면 온 동리를 붉게 물들이는 감나무들이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만나게 되는 감나무들은 어지간한 동네에서 보아온 허우대만 멀쩡한 다른 동리의 여느 감나무들과는 그 생김에 차이가 있었다. 대략 수령이 수십년이 된 감나무들은 고목에 가까운 형태로 허리를 살짝 구부리거나 비틀어진 모습인데, 그 모습이 마치 꼬장꼬장한 양반마을의 상어른 풍모를 지닌 듯도 하여 잠시 주춤거리게 하는 품이 있었다. 그래 그 감나무에서 열린 감들은 가볍게 노란 빛이 고이거나 잘 여물지 못해 드는 녹색의 기운이 없이 깨끗하며 말끔한 담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또 꼭 작은 아이의 얼굴만한 그 감의 모양 역시 사뭇 달랐다. 머리를 곱게 빗어넘겨 쪽을 곱게 진 낯빛 좋은 반가 아낙의 모습을 닮아 있는 듯도 하고, 대봉이란 이름자처럼 커다란 산봉우리를 닮은 듯 참 듬직한 것이었다. 그래 윤기가 반지르르한 짙은 홍빛을 머금은 감 두어 개를 작은 소쿠리에 담아 대청마루 한편이거나 장독대 위에 얹어놓기만 하여도, 누추하고 낡은 오래된 시골집을 참 점잖고 고상하게 하는 품격이 있었다. 작은 정물이 고상하고 훌륭한 품격을 세우는 것으로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이 땅의 근본에 가까운 원형적 삶터 박경리 선생이 찾았던 악양의 평사리는 바로 그런 곳이었다. 악양의 너른 들판을 가득 채우는 것은 늙은 부부송과 황금물결 치는 들녘, 그리고 그 들녘에서 부지런히 일하는 농부의 모습이다. 평사리는 전형적 한국 농촌의 모습으로 우리 민족의 원형적인 풍경을 그대로 보여주는 곳이다. 최참판댁의 명예 참판인 백산 백종웅옹은 최참판댁을 찾은 관광객과 어린 학생에게 선조의 정신문화를 알려준다. 근년에 작고한 소설가 박경리 선생이 토지의 배경으로 이곳 평사리를 낙점한 것 역시 그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전남 완도의 청산도가 임권택 감독이 낙점한 원형적 한국 풍경이었던 것처럼, 이곳 평사리 역시 박경리 선생이 발길을 멈추고 찾아내어 우리 민족의 삶과 역사를 그려낸 가장 원형적인 삶의 터인 것이었다. 선생은 를 구상한 후 마땅한 무대를 찾던 중 여행길에 올랐다가 우연히 이곳 평사리를 만나 소설의 첫 무대로 삼게 된다. “내가 경상도 안에서 작품의 무대를 찾으려 한 이유는 언어 때문이다.” 통영에서 태어나 자라고 진주에서 공부를 했던 선생은 익숙한 터를 찾아 경상도에서 작품의 무대를 찾아야만 했다. 소설 속 인물들의 말투, 즉 언어와 풍습 등 태도에 대한 자연스러움을 염두에 둔 선택이었다. 그러나 ‘만석꾼’이 나옴직한 너른 들은 대개가 전라도에 있었고, 경상도에서는 그만큼 광활한 토지를 발견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평사리는 어느 곳보다 너른 들녘을 품고 있었다. 또 들녘 곁으로 흐르는 섬진강과 둘레의 지리산 남부 능선 역시 든든한 배경으로 손색이 없는 터였다. 그렇게 악양면 평사리가 의 무대로 정해진 것이다. 하동의 서부에 자리한 악양면은 북쪽으로 지리산에서 뻗어나온 봉우리를 등지고, 동서쪽 지맥이 악양면을 좌우로 에워싸고 있다. 가운데에 토질이 비옥한 분지와 악양 들판이 펼쳐져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 들판을 쓸모없는 땅이라고 여겨 ‘무딤이들’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평사리는 평사낙안(平沙落雁)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평사리는 악양면 서남쪽 끝에 자리하고 있는데 산기슭에는 상평마을이, 섬진강변에는 외둔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산 아래의 들녘을 한참 내려보다 마을 들머리로 올라선다. 낮은 담장 너머로 어린 서희(소설 의 주인공)의 글 읽는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낭랑한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가 멈추면 그 사이 사이 어르신의 호통이 이어진다. “악양면은 본디 신라 경덕왕 때에는 소다사현(小多沙縣)이라고들 혔제. 우리말로 어린아이를 ‘아가’라 허고, 한자로 악아(岳兒)로 쓰는데, 그래서 악양의 ‘악(岳)’자는 ‘작다’란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이제. 또 볕을 뜻하는 양(陽)은 ‘따사롭다’라는 뜻이 숨어 있는 것이여.” 하동의 섬진강변.(위) 평사리 최참판댁 주변으로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물건을 팔고 있는 아주머니들을 만날 수 있다.(아래) 평사리 최참판댁 사랑채에 점잖은 어르신이 두어 남짓 아이들에게 말씀을 이르고 있다. 아이들에게 훈육을 하고 있는 이는 최참판댁의 명예 참판인 백산 백종웅옹(하동군 고전면 전도리). 최참판댁을 찾은 가족 단위의 관광객과 어린 학생들에게 양반가의 풍습, 한학 등 동양철학을 기초로 선조들의 정신문화를 알리고 바른 마음가짐을 일깨운다. “유학자 가문의 후손으로 자란 터이니, 몸에 밴 양반가의 생활을 아이들에 들려주는 것이여. 햇수로 5년째인데, 요즘 아이들이 똑똑하고 오히려 예의도 바른 편이니 걱정할 것이 안 됩니다. 어른이 먼저 덕으로 서로를 배려하고 공경하면 아이들 역시 그대로 배우는 것이지요. 그게 나라의 근본을 세우고,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선조들의 지혜였으니까.” 아이들은 바른 말씀을 일러줄 것만 같은 선생을 뵈러 허물없이 사랑채에 들어선다. 무서울 것만 같은 어른 앞에 몇몇 아이들이 무릎앉음으로 선생의 말씀을 듣는다. “어데를 가건 넓은 들과 그 들녘을 닮은 사람의 덕은 사람을 끌어모으기 십상이다. 이곳 평사리의 들녘이 바로 그러한 곳이다.” 느림의 미학, 슬로 시티 하동으로 박경리 선생이 평사리를 소설의 공간으로 택한 이유는 ‘만석꾼’이 나옴직한 악양의 너른 들판 때문이다. 마을에서 제일 높이 자리한 최참판댁 담장 아래로 지리산 골 아랫녘에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다. 현재 소설 속의 최참판댁은 한옥 14동으로 지어져 조선 후기의 전통가옥과 생활모습을 재현해놓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인 최치수와 최서희 일가를 중심으로 한 최참판댁을 실제로 재현하여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마치 소설 속에 직접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도록 하고 있다. 또 다도체험과 풍물체험, 민속놀이 등 각종 문화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평사리는 실재와 허구가 맞물려 생활과 역사가 어우러지는 문화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인근의 평사리문학관과 한옥체험관도 관광객들의 발길이 오래도록 머무는 곳들이다. 또 악양면 전체는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로 2009년 이탈리아 슬로시티 국제조정이사회에서 슬로시티로 인증되면서 느림의 미학으로 우리 전통마을의 면모를 새롭게 알리고 있다. 지리산을 따라 섬진강이 유유히 흐르고, 남해바다를 굽어볼 수 있는 천혜의 절경이 ‘느림의 미학과 향기를 지닌 마을’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실제 악양벌 너른 들판에는 비닐하우스가 일절 없다. 마을주민들은 자연 그대로의 대지에 들이치는 햇살과 선선한 바람으로 농토를 일구고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 물길을 젖줄로 알곡을 키워가고 있다. 이에 따라 악양면뿐 아니라 하동군 역시 웰빙도시로 거듭나면서 외지인의 방문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평사리를 둘러본 관광객들은 이웃 마을인 화개면 탑리의 ‘화개장터’와 봄이면 십리 벚꽃길로 유명한 지리산 쌍계사와 숲과 계곡을 찾아간다. 숲길과 물길과 꽃길이 어우러진 천혜의 자연경관과 문화역사가 살아 숨쉬는 고장, 그리고 여유로움으로 하동에는 늘 사람의 발길이 이어진다. 글·사진|이강 leeghang@tistory.com
- 길에서 만난 사람
레이디경향(총 1 건 검색)
- 막걸리 ‘별빛 신사리’, 별빛 막걸리 위크 개최
- 2023. 09. 08 07:37 요리
- 막걸리 ‘마크홀리 별빛 신사리 7.0’이 오는 10일까지 서울 시내 전통주 보틀숍에서 별빛 막걸리 위크를 개최한다. 전통주 전용 보틀숍 6곳에 진행되는 이번 행사에서는 시음회 및 10% 할인 판매를 실시한다. 참여매장은 주류사회, 애주금호, 이유있는우리술 바틀샵 수서점, 키오스크이피앤 켈러 은평점, 한국술보틀숍, 술마켓 군자점 등이다. 마크홀리 별빛 신사리 7.0은 도수 7%의 탁주로 김포 참드림쌀을 사용해 쌀의 깊은 단맛이 나며 맥주 효모를 사용해 깔끔한 맛을 내는 것이 특징이다. 이 제품은 서울 관악구와 서울신용보증재단이 신림역 일대 별빛신사리 상권 르네상스 사업의 일환으로 기획, 판매하는 것으로, 제품 개발은 홀리워터가 맡았으며 판매 수익은 지역사회에 환원되도록 하고 있다. 별빛신사리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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