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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총 3,607 건 검색)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희생자 2명 세종 고교 재학…교육청, 비상대책반 운영
2024. 12. 30 11:26지역
... 지원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30일 밝혔다. 이번에 희생된 학생 2명은 전국 단위 모집을 하는 세종지역 공립 특성화고에 재학 중이었으며, 주민등록상 주소지는 다른 지역인 것으로 전해졌다....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동물병원 진찰료, 세종시가 가장 저렴
2024. 12. 26 20:28경제
... 1명 이상인 동물병원 4159곳으로 확대됐다. 항목별로 보면 초진 진찰비 평균 비용은 1만291원이다. 세종이 8733원으로 가장 낮고 대전이 세종의 1.4배 수준인 1만1878원으로 가장 높았다. 재진 진찰비...
동물병원반려견
동물병원 평균 진찰비 얼마?···제주가 세종의 두 배
2024. 12. 26 14:01경제
.... 항목별로 보면 초진 진찰비 평균 비용은 1만291원이다. 세종이 8733원으로 가장 낮고 대전이 세종의 1.4배 수준인 1만1878원으로 가장 높았다. 재진 진찰비 평균은 8246원이다. 세종이 6700원으로 지역...
동물병원반려견
세종 반다비 빙상장’ 오는 23일 정식 개장
2024. 12. 18 10:16사회
... 4000원·어린이 3500원 세종 시민들이 반다비 빙상장에서 스케이팅을 즐기고 있다. 세종시 제공 세종시는 오는 23일 반다비 빙상장 개장식을 열고 정식 운영을 시작한다고 18일 밝혔다. 이날...
반다비세종정식개장

스포츠경향(총 599 건 검색)

“발목 관절이 강해야 모든 관절이 건강하다” 발목 관절 전문의 김진수 세종스포츠정형외과 원장 ‘발목 보호론’
2024. 12. 05 14:05 스포츠종합
김진수 세종스포츠정형외과 원장 “괜찮다고? 괜찮지 않은 경우가 적잖다. 소홀히 다루면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발목 관절 전문의 세종스포츠정형외과 김진수 원장이 발목 부상에 대해 경고하면서 한 말이다. 김 원장은 최근 세종스포츠정형외과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발목은 잘 낫는 관절이지만 ‘괜찮다’고 자꾸 넘어가면서 치료를 소홀히하면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김 원장은 “발목은 사람이 지면과 가장 먼저, 가장 직접적으로 닿는 부위”라며 “온몸 하중을 고스란히 받는 관절이라 꾸준히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원장은 대한스포츠의학회 총무이사, 대한민국농구협회 의무위원장, 대한축구협회 의무위원, 아시아스포츠의학회(AFSM) 평의원. 아시아농구협회(ABA) 의무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프로농구 서울 SK 나이츠, 프로축구 서울 이랜드 FC 팀 주치의인 김 원장은 메이저리그를 경험한 야구 선수, 해외리그에서 뛴 남녀 축구 선수를 비롯해 국내 농구·배구 톱 스타들,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의 발목을 수술했거나 치료하고 있다. -발목 관절은 어떻게 구성돼 있나. “비유한다면 절구와 비슷하다고 할까. 위쪽 뼈가 아래 뼈에 ㄷ자 모양 격자로 들어가 있다. 뼛속에 박힌 형태라 좌우로 밀리지 않게 잡아준다. 무릎, 어깨 등 다른 관절에 비하면 상당히 안정적이다.” -가장 흔한 부상은. “한발로 착지하거나, 뭔가를 밟으면 삐는 것, 겹질리는 것이다. 뼈가 ㄷ자 형태 격자에서 순간적으로 빠져나가서 인대가 늘어난다고 보면 이해하기 쉽다. 주로 밖으로 삐면서 바깥 인대를 다친다. 안으로 겹질리는 것은 15%에 불과하다. 발목이 돌아가면서 깔고 앉으면 부상이 커진다. ㄷ자 격자 구조 뼈가 깨지면서 인대가 찢어지는 게 심각한 부상이다.” -거의 모든 종목에서 가장 많이 다치는 게 발목일 것 같다. “발목은 신체 맨 아래 관절이다. 몸과 지면이 직접적으로 닿는 분위다. 몸 전체 부상 중 가장 많은 게 발목이다. 많이 다치지만, 병원에 가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은 게 문제다.” -가볍게 겹질리면 병원에 잘 안 간다. “10분 후 통증이 없어지고 어느 정도 걸을 수 있으며 다음날 괜찮으면 낮은 강도로 다친 것이다. 7일에서 10일 정도 발목을 잘 보호해주고 한 달 정도 보강 운동을 꾸준히 하면 회복된다.” -얼마나 잘 낫나. “심각한 부상은 논외로 하자. 일반적으로 발목 외측 인대는 잘 낫는다. 70~80%는 수술을 안하고도 치료만 잘 받으면 된다. 발목 인대는 흉터가 있는 상태로도 주위 것과 함께 작용해 강하게 붙는 성질이 있다.” -어떤 경우 무조건 병원에 가야 하나. “2시간 정도 지나도 아파서 잘 못걷는 경우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붓고 거의 디디지 못할 정도면 무조건 병원에 가야한다. 다친 뒤 일정 기간이 지나서 아프지 않지만 소리가 계속 나면 병원에 가보는 게 좋다. 치료가 필요한 부상인데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똑같은 부위가 반복적으로 다칠 수 있다.” -발목 부상을 최소화하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 “점프 후 착지할 때 한발 착지는 위험하다. 아주 작은 걸 밟아도 크게 다칠 수 있다. 착지는 무조건 두발로 해야한다. 그래도 물론 다칠 수 있지만 한발로 착지하다가 다치는 것보다는 훨씬 덜하다. 발은 위로 제치는 동작을 하는 게 중요하다. 발목 가동범위를 넓혀야 한다.” -테이핑도 도움이 되나. “다친 적이 없으면 큰 의미는 없다. 테이핑도 30분 정도 지나면 강도가 줄어든다. 보조기를 쓰는 게 고정 효과가 더 크다. 다친 병력이 있으면 테이핑하는 것을 권한다. 헐렁하게 테이핑해도 나름대로 역할을 한다.” -평소 걸음거리와 발목 부상과 관계가 있나. “평소 잘 지내면 큰 문제는 없다. 그러나 만일 다친 뒤 축의 변화가 생기는 등 이전과 뭐가가 달라졌다면 치료해야 한다.” -나이가 들면서 발목이 한쪽으로 무너지는 경우가 있다. “상대적으로 안쪽으로 주저앉는 경우가 많다. 발에도 코어 근육이 있다. 그게 튼튼해야 아치도 잘 유지된다. 늙으면 아치가 무너지면서 평발화하기 쉽다. 운동을 안 하면 아치는 더 빨리, 더 많이 무너진다.” -발바닥 코어 근육 강화법을 소개해달라. “코어 근육을 강화하면 발바닥 부상은 많이 회복된다. 발을 자주 오무렸다, 펴는 동작을 반복하라. 걸을 때 발바닥으로 걷지 말고 15~20분이라도 엄지발가락으로 땅을 누르면서 걸어라. 재미없고 지루하지만 효과는 좋다.” -처음에는 약간 아픈데 걷다가 보면 통증이 사라지는 경우도 있나. “발목을 잡아 당겼을 때 덜걱거리면 인대가 늘어난 것이다. 겹질렸는데 치료를 하지 않아 불안정성이 증가한 경우다. 고무 밴드를 발목에 걸고 밖과 안으로 미는 동작을 하는 등 인대 주위 근육을 강화해야 한다. 발목은 비틀어지는 게 가장 나쁘다. 골프, 배드민턴, 탁구 등 순간적으로 발목을 비트는 동작이 많은 종목을 할 때 조심해야 한다.” -족저근막염으로 고생하는 사람도 많다. “운동을 많이 해서 생기는 경우가 흔하다. 통증을 느끼면 치료를 받아야 한다. 아치가 주저앉으면서 평발로 변해가면 아킬레스건이 타이트해진다. 아킬레스건을 스트레칭으로 늘려주면 족저근막염이 많이 좋아진다. 이게 가장 좋은 비수술적 요법이다. 약물보다 더 중요하고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아킬레스건 스트레칭임을 기억하라.” -한국인 중 소위 ‘평발’이 많은가. “한국인 중 절반 안팎이 평발 경향이 있다. 정상인 사람은 30%밖에 안 된다. 외견상 평발이어도 통증이 없고 관리만 잘하면 큰 문제는 없다. 인솔, 보조 신발도 도움이 된다. 증상이 없으면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본격적으로 운동하기 전에 발목 관절, 발바닥 부상 가능성을 낮추는 방법은 없나. “워밍업을 한 뒤 가벼운 러닝부터 운동을 시작하라. 족저근막염이 있으면 아킬레스건을 스트레칭하라. 뾰족한 곳을 밟지 않도록 주의하라. 발목이 밀리면 테이핑을 해라. 발목을 덜 쓰면 다른 관절이 더 움직이게 돼 있다. 발목이 안 좋은 사람이 햄스트링을 자주 다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거꾸로 말하면, 발목 관절이 튼튼하면 다른 관절 안정성도 높아진다. 발레 선수, 댄서 등은 발목이 강해 다른 관절도 무척 건강하다.” -평소 발 관리법이 있다면. “발도 피로를 풀어줘야한다. 40도 정도 따뜻한 물에 15분 정도 족욕을 권한다. 발가락을 당겨주고 발 주위 근육을 풀어주면 도움이 된다.” -발목 관절 전문의로서 발목 관절을 어떻게 정의하나. “인간이 움직일 때 바닥과 가장 먼저 닿는 부위인 발목 관절은 인간의 모든 관절을 안정화하는데 시발점이다. 발목 연골은 얇지만 무척 강하다. 몸의 하중을 그대로 받으면서도 통증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강하다. 괜찮다고 생각해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부상이 커질 수 있다. 괜찮다고 생각하지 말라. 괜찮지 않을 수 있는 게 발목 관절이다.”
‘민수 연말 콘서트: What a 29!’ 12월26일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개최
2024. 11. 27 17:00 연예
프라이빗커브 ㈜프라이빗커브가 주최하는 ‘아름다운 싱어송라이터 시리즈 2024’의 라인업으로 싱어송라이터 민수의 ‘민수 연말 콘서트: What a 29!’가 공개됐다. ‘아름다운 싱어송라이터 시리즈’는 세대를 아우르는 싱어송라이터 라인업으로 다채로운 장르의 음악을 선보이기 위한 프라이빗커브의 연말 시리즈 공연이다. 민수는 정식 데뷔 전 2016년 ‘제27회 유재하 음악 경연 대회’에서 ‘위로연’이라는 곡으로 동상을 수상하며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2018년 싱글 앨범 ‘생일 노래’, ‘섬’, ‘괜히’ 등을 발매하며 인디 팬들에게 이름을 알렸다. 특히, 2019년 발매한 ‘민수는 혼란스럽다’는 민수의 대표곡으로 꼽힐 만큼 많은 인기를 얻었으며, 애플 아이패드 광고 음원으로 삽입되기도 하였다. 올해 9월에는 무려 14곡이 수록된 첫 번째 정규 앨범 [미, 스트레인저(Me, Stranger)]를 발매해 그의 앨범을 기다린 팬들에게 보답하였다. 이번 콘서트는 정규 앨범 발매 이후 첫 단독 공연인 만큼, 해당 앨범의 곡들로 새로운 무대를 선사할 것으로 기대된다. 민수는 음반 작업 외에도 삼성 비스포크 서머 무비 OST ‘비 위드 미(BE with me), 이니스프리와의 협업 음원 ‘아이 라이크 미(I Like Me)’ 등 브랜드와의 작업을 통해 그의 음악성을 대중에게 선보였다. 이 밖에도 네이버 웹툰 인기 작품 <집이 없어> 프로모션 비디오의 OST ‘홈메이트(Homemate)’, JTBC 드라마 <열여덟의 순간> OST ‘플로럴 피치(Floral Peach)’ 등 다양한 콘텐츠의 OST를 작업하며 작품 속 감정을 폭넓게 표현하였다. 장난꾸러기 같은 매력으로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민수는 팬들 사이에서 ‘댄스 가수 민수’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다. 중독성 있는 음악과 통통 튀는 목소리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춤을 추게 만든다는 뜻이다. 민수의 음악은 주로 사랑이라는 소재를 담고 있지만, 곡마다 표현하는 사랑의 형태가 다양하다. 이번 민수의 연말 단독 콘서트는 그가 말하는 사랑을 더욱 따뜻하게 보여줄 것이다. 민수가 선물하는 마지막 20대의 밤, ‘민수 연말 콘서트: What a 29!’의 티켓은 12월 4일 오후 2시부터 멜론티켓과 세종문화티켓에서 예매할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프라이빗커브 공식 홈페이지와 SNS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노영심 첼로가 좋아서, 홍진호 피아노가 좋아서’, 12월 31일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개최
2024. 11. 21 19:54 연예
프라이빗커브 ㈜프라이빗커브가 주최하는 ‘아름다운 싱어송라이터 시리즈 2024’의 라인업으로 싱어송라이터이자 음악감독인 노영심과 첼리스트 홍진호의 콘서트 ‘노영심 첼로가 좋아서, 홍진호 피아노가 좋아서’가 공개됐다. ‘아름다운 싱어송라이터 시리즈’는 세대를 아우르는 싱어송라이터 라인업으로 다채로운 장르의 음악을 선보이기 위한 프라이빗커브의 연말 시리즈 공연이다. 노영심은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 재학 중 1989년 가수 변진섭의 곡 ‘희망사항’을 작사, 작곡하며 데뷔했다. 이후 그는 이상우의 ‘그녀를 만나는 곳 100m 전’, 박정현의 ‘편지할게요’, 스윗소로우의 ‘아무리 생각해도 난 너를’ 등 국내 많은 유명 가수의 히트곡을 작사, 작곡하며 활발한 음악 활동을 펼쳤다. 이 밖에 이진의 ‘그리움만 쌓이네’를 리메이크해 부르며 원곡만큼이나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등 가수로서의 입지도 다져왔다. 최근에는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음악감독으로 화제가 되었으며, 2024년에는 세계적인 음악가 고 류이치 사카모토를 향한 헌정곡 ‘향음 Reverbration no. 16’을 공개해 노영심의 잔잔하면서도 큰 울림을 주는 피아노 연주를 선보였다. 첼리스트 홍진호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을 졸업한 후 독일 뷔르츠부르크 국립음대에서 석사 및 최고 연주자 과정을 수석 졸업하였다. 이후 여러 국제 콩쿠르에서 입상 및 수상한 뒤 국내외 다수의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그의 명성을 널리 알렸다. 2019년에는 JTBC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밴드’의 초대 우승팀 ‘호피폴라’의 멤버로 활동하며 밴드음악 등 클래식 외 장르까지 저변을 넓혔다. ‘슈퍼밴드’ 우승 이후에도 JTBC ‘비긴어게인’, KBS ‘열린음악회’ 등 다수의 방송이나 ‘서울재즈페스티벌’, ‘어썸뮤직페스티벌’ 등 다양한 장르의 페스티벌에 출연하며 홍진호만의 다채로운 레퍼토리를 선보이고 있다. 올해에는 그의 자작곡으로 구성된 앨범 ‘디어 포레스트(Dear forest)’를 발매하며 더욱 깊어진 음악 세계를 보여주었다. 노영심과 홍진호의 만남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노영심은 지난 2022년 발매된 홍진호의 첫 번째 스튜디오 레코딩 앨범 ‘Modern Cello(모던 첼로)’ 내 수록곡 ‘Hymn Forest (휴식을 위한 송가)’를 작곡하기도 했으며, 지난 9월에는 춘천에서 열린 ‘홍진호의 음악적 하루’에서 협연을 선보이기도 했다. 노영심과 홍진호의 콘서트 ‘아름다운 싱어송라이터 시리즈 2024 - 노영심 첼로가 좋아서, 홍진호 피아노가 좋아서’의 티켓은 오는 28일 오후 2시부터 멜론티켓과 세종문화티켓에서 예매할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프라이빗커브 공식 홈페이지와 SNS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The GeoVista’ 美 도널드 트럼프 당선, 한국에 미칠 영향?···김현욱 세종연구소장 “동맹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어”
2024. 11. 12 18:10 연예
아리랑TV 12일 오후 7시 아리랑TV ‘The GeoVista’는 김진아 한국외국어대학교 LD 학부 교수 진행으로 김현욱 세종연구소장을 초대해 미국에서 대통령 재임에 성공한 도널드 트럼프의 정책이 한국에 미칠 영향에 대해 알아본다. 2024년 미국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하며 권력을 향한 강한 집념을 보여준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은 부동산 사업가로서의 성공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의 활동으로 인지도를 높였고, 이후 정치 무대에 발을 들였다. 그의 정치 행보는 기존의 정치적 틀을 벗어난 파격적인 행보로 행동 하나하나가 전 세계 이목을 집중시켰다. ‘The GeoVista’에서는 미국 47대 대통령 당선인 트럼프를 집중 분석 해 본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외교·안보 싱크탱크의 수장인 세종연구소의 김현욱 소장을 초청해 트럼프 재선이 한반도에 가져올 변화와 한국에 미칠 영향을 심도 있게 분석한다. 또 한국의 외교적 선택과 대응 방안에 대한 통찰도 함께 나눠본다. 김현욱 세종연구소장은 트럼프 당선인과 북한 김정은 위원장의 만남 가능성에 대해 “트럼프 당선인은 군사 분쟁을 원하지 않으며, 김 위원장의 도발을 진정시키고자 한다”며 “대화 가능성이 높고, 중요한 것은 대화를 통해 어떤 결과가 나올지이다”라고 전망했다. 아리랑TV 또 “북한은 심각한 경제 상황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으며, 이런 상황의 연장선으로 우크라이나에 군인을 파견하고 있고, 120만명의 북한 군인 중 30%만이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상황이라 군사적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라고 평가했다. 비핵화와 군비 통제에 대해 김현욱 소장은 “트럼프 전 대통령은 2018년 6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미·북 정상 회담 이후 한미연합 군사훈련 중단을 일방적으로 선언한 바 있다”며 “이러한 결정이 동맹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으며, 미국은 동맹국을 활용해 중국을 압박할 가능성도 있다”라고 분석했다. 김 소장은 이어 “트럼프 당선인은 다른 분야보다 중국에 더 집중할 것이며, 한국이 더 큰 비용을 부담하기를 원할 가능성이 있다”며 “한국은 미국 전투함에 유지보수를 제공하며, 이는 인도 태평양 전략과 미국 동맹에 대한 중요한 기여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보수, 수리, 정비 분야(MRO)는 한국이 미국에 기여할 수 있는 주요 분야이며, 한국은 중국 관계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한미 동맹에 자유롭게 기여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아리랑TV 자세한 내용은 11월 12일 오후 7시 ‘The GeoVista’ 6회에서 확인할 수 있다. ‘The GeoVista’는 아리랑TV를 통해 매주 화요일 저녁 7시에 방송되며, 전문가와의 대담 콘텐츠는 아리랑TV 유튜브 채널에서 방송 전날인 월요일 오전에 미리 만나볼 수 있다.

주간경향(총 68 건 검색)

[정태겸의 풍경](74) 경북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왕자 탯줄 묻어…태교 명소로 각광(2024. 10. 16 06:00)
2024. 10. 16 06:00 문화/과학
성주라는 동네는 참 낯설다. 참외 말고는 알려진 게 별로 없다. 그나마 ‘언택트 성지’라는 수식어로, 찾는 이가 많지 않아 도리어 좋은 여행지로 포장돼 알려진 편이다. 처음 경북 성주를 찾았을 때 내 느낌은 그랬다. ‘이런 곳을 왜 몰랐을까.’ 세종대왕이 자손의 탯줄을 모아서 태실을 만들었다는 것도 몰랐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조선 왕조가 왕가의 탯줄을 어떻게 관리했는지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으며, 구태여 스스로 찾아보는 이도 없다. 세종대왕자 태실을 찾은 후 알게 된 것이 일제의 또 다른 만행이다. 조선의 왕가는 전국의 길지 중 길지를 골라 54기의 태실을 만들었는데, 이걸 일제가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에 한데 모아 버렸다는 것. 이제는 태봉산이니 태봉리 같은 이름으로만 남아 있다. 세종대왕자 태실이 고스란히 지금에 이르고 있다는 게 반가운 건 그래서다. 선석사라는 사찰 곁, 태봉의 정상부에 태실은 자리하고 있다. 주차하고 조금만 걸으면 금방이다. 온종일 햇살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고, 여기에 19개의 태실이 조성돼 있다. 어느 곳을 봐도 주변이 훤히 내다보이는 위치다. 모르는 사람이 봐도 명당인 그곳. 따스한 볕이 목덜미를 어루만져 주기에 기분이 좋은 가을의 어느 날이었다.
정태겸의 풍경
[이기환의 Hi-story](110)흠결을 찾을 수 없는 ‘고려판 세종’ 아세요?(2023. 11. 28 07:00)
2023. 11. 28 07:00 문화/과학
서울 종로 구기동 고려시대 건물터에서 확인된 ‘장의사’ 명기와. 이 건물터에서는 12~13세기 기와와 청자편 등이 출토됐다. 수도문물연구원 제공 ‘고려판 세종대왕’, ‘도무지 비판할 거리가 1도 없는 군주’…. 아니 고려 역사에 이런 임금이 있었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고려사>에 나오는 표현이고요. 고려의 뒤를 이은 조선조에서도 “국난에 빠진 고려를 중흥시킨 영명한 군주”라며 롤모델로 삼은 분입니다. 바로 고려 현종(재위 1009~1031)입니다. 마침 KBS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이 바로 이 고려 현종 시대를 다루고 있죠. ■12세기 이전 ‘장의사’ 명문기와의 의미 실제로 현종의 자취와 유산이 개성(개경)도 아닌 서울 한복판에서 고고학 발굴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올해 3월의 일입니다. 서울 종로 신영동(실제 구기동) 도시형 생활주택 부지에서 고려시대 건물터(1382㎡)가 확인됐는데요. 건물터의 입지를 보니 개경의 만월대를 빼닮았고요. 출토 유물 또한 격이 엄청 높습니다. 연대를 판단할 수 있는 명문 기와(‘승안 3년’·1198)가 나왔어요. 지난 8월 또 하나 특기할 만한 유구와 유물이 확인됐어요. 기왕(3월)에 조사된 서울 신영동(구기동) 유적에서 10m 떨어진 곳에서 난방시설을 갖춘 건물터 1기가 노출됐는데요. 명문기와(‘장의사’명)와 함께 12~13세기 청자·도기 조각도 나왔습니다. ‘장의사’는 이 두 건물터에서 남쪽으로 350m 떨어진 현 세검정초교 자리에 있었던 사찰입니다. 어쨌든 두 건물터의 발굴성과는 ‘고려 현종’과 직·간접적으로 연결 지을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됩니다. 우선 삼각산(북한산) 승가사 뒤편 석굴에 조성된 등신좌상(승가대가상)을 봅시다. 좌상의 광배에 ‘태평 4년’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요. ‘태평’은 요(거란) 성종의 연호(1021~1031)이니 ‘태평 4년’은 1024년(현종 15)에 해당합니다. 현종이 승가굴에 조성된 승가대사상에 광배를 붙였다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지난 3월 서울 신영동(구기동( 도시형 생활주택 부지에서 확인된 고려시대 건물터(1382㎡). 확인된 건물지 가운데는 잔존 면적(길이 20.1×너비 5.5m)만 33.44평에 이르는 것도 있다.|수도문물연구원 제공 ■고려 국왕들의 삼각산 행차 이번에 발굴된 두 건물터(12~13세기)는 장의사터(세검정초교)와 삼각산(북한산) 승가사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고려사> 등은 ‘장의사-삼각산 승가사’와 관련된 매우 흥미로운 기사를 전하고 있어요. 고려 국왕이 개경을 떠나 승가사(굴)와 장의사에 행차하는 기사가 속출한다는 겁니다. 즉 “1090년(선종 7) 10월 19일 왕(선종)이 승가굴과 장의사에 행차했다”는 기록이 그렇고요. 9년 뒤인 1099년 숙종(1095~1105)의 삼각산 행차도 눈길을 끌죠. “왕이 왕비 및 원자, 대각국사 의천(문종의 동생·1055~1101)과 함께 삼각산 승가굴에 행차해 재를 올린 뒤 갖가지 선물을 하사했다”는 겁니다. 1104년(숙종 9) 8월 5일에는 숙종이 승가굴에 들러 기우제를 지냅니다. 이후 예종(재위 1105~1122)이 3차례에 걸쳐 승가굴과 장의사를 방문했고요. 1167년에는 의종(재위 1146~1170)이 승가사와 장의사에 들렀습니다. 그렇다면 장의사와 승가사 사이에 조성된 ‘두 건물터’는 국왕이나 왕실, 귀족들이 머무는 숙소가 아니었을까요. ■왕이 된 사생아 개경의 고려 국왕들이 왜 멀리 떨어진 삼각산 승가사까지 지체 높은 몸을 이끌고 올라가 재를 올렸을까요. 여기서 현종이 ‘짜잔~’ 하고 나타납니다. 사실 고려 현종에게는 숨기고 싶은 출생의 비밀이 있죠. 우선 고려 왕실에서는 근친혼이 성행했다는 것을 염두에 둡시다. 현종의 아버지 왕욱(王郁·추존왕 안종·?~996)은 태조 왕건(재위 918~943)의 여덟 번째 아들입니다. 어머니는 헌정왕후(?~992)인데요. 헌정왕후는 친언니인 헌애왕후(964~1029·목종의 어머니·천추태후)와 함께 태조의 7번째 아들인 왕욱(王旭·추존왕 대종)의 딸이었습니다. 두 자매(헌애왕후·헌정왕후)는 경종(태조의 넷째 아들인 광종의 맏아들)의 3번째와 4번째 부인이 됐습니다. 두 자매가 사촌 오빠(경종)와 혼인한 겁니다. 그렇다면 현종의 부모인 왕욱(안종·추존왕)과 헌정왕후는 삼촌-조카 사이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삼촌-조카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어섭니다. “남편(경종)이 죽고 사가에서 살던 헌정왕후가 꿈에서 눈 오줌이 온 나라에 흘러 은빛 바다를 이루었다. 점쟁이가 ‘아들을 낳으면 왕이 될 것’이라 풀이했다. 헌정왕후는 ‘과부가 어찌 아들을 낳겠느냐’고 쓴웃음을 지었다.”(<고려사> ‘후비열전’) 그러나 점쟁이의 말이 맞았습니다. 왕욱이 남편(경종)이 승하한 뒤 사가(私家)에 나가 있던 헌정왕후와 사통해 아들(현종)을 낳은 겁니다. 이와 같은 불륜 행각이 들통 나면서 왕욱(안종)은 유배를 떠났고요. 충격을 받은 헌정왕후는 갑자기 태동(胎動)을 느껴 아이를 낳다가 승하했는데요. 사생아로 태어난 아이는 ‘대량원군’이란 칭호를 받았습니다. 잇달아 확인된 고려건물터. 수도문물연구원 제공 ■비정한 이모의 암살 기도 그런데 경종의 맏아들인 목종(재위 997~1009)이 성종의 뒤를 이어 등극하자 상황이 급변합니다. 대량원군(현종)의 이모지만 목종의 친어머니인 헌애왕후가 ‘견제’에 들어간 겁니다. ‘천추전’에서 아들(목종)을 대신해 섭정한 헌애왕후는 ‘천추태후’로 일컬어지며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데요. 그러나 아들인 목종의 성적 취향(동성애) 때문에 후사를 기대할 수 없게 되면서 딴마음을 품게 됩니다. 천추태후가 내연관계인 김치양(?~1009)과 낳은 아들을 후계자로 민 겁니다. 그러자 조카인 대량원군은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천추태후는 조카를 강제 출가시켜 삼각산(신혈사)으로 쫓아내는데요. 권력에 눈이 먼 이모는 조카를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고려사>는 “삼각산에 (천추)태후가 자주 사람을 보내 해치려 했다. 신혈사의 노승이 방에 땅굴을 파서 그를 숨기고, 그 위에 침상을 설치했다”(‘세가·현종 총서’)고 했어요. ■‘꼬끼요와 어근당’ 그 와중에 대량원군이 지었다는 시 두 편을 볼까요. “백운봉에서 흘러나온… 물이… 머지않아 용궁(龍宮)에 도달하리라(…不多時日到龍宮)”와 “…꽈리 튼 새끼뱀… 하루아침에 용이 되는 것 어렵지 않으리라(一旦成龍也不難)…”는 내용을 보면 심상치 않죠. “곧 왕위에 오를 것”이라고 선언했어요. 그런 대량원군이 꿈에 닭 우는 소리와 다듬이 소리를 들었답니다. 술사의 꿈풀이가 기막혔습니다. “닭 우는 소리는 ‘꼬끼오(고귀위·高貴位·높고 귀한 자리)’이고, 다듬이 소리는 ‘어근당(御近當·임금 자리가 가깝다)’이니 이는 왕위에 오를 징조”라 했다는 겁니다. 결국 강조(?~1010)의 정변(1009)이 일어나 김치양 부자가 죽임을 당하고요. 대량원군, 즉 현종에게도 우호적이었던 목종도 결국 시해당하고 마는데요. 올해 발굴된 고려건물터는 장의사와 승가사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수도문물연구원 제공 ■만장일치로 왕위에 오르다 흥미로운 대목이 또 있어요. 천추태후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대량원군’을 차기대권 0순위로 꼽았습니다. 천추태후의 아들인 목종조차 “이제 태조의 후손은 오직 대량원군만이 남아 있다”(<고려사> ‘열전 채충순’)고 단언했는데요. 목종과 후사를 논의한 최항(?~1024) 같은 신하도 “왕위를 계승할 분은 오직 대량원군”이라고 했고요. ‘강조의 변’의 장본인인 강조도 목종을 폐위시킨 뒤 대량원군을 모셔 왕위에 올렸습니다. 그만큼 “다른 성씨(김치양의 아들)에게 사직이 돌아가면 큰일난다”(<고려사> ‘열전·채충순’)는 위기의식이 컸던 거고요. 그때 ‘낭중지추’였던 대량원군이 유일한 대안으로 꼽혔던 겁니다. ■조롱당한 임금 그렇게 만장일치로 등극한 현종에게 큰 위기가 닥쳤습니다. 거란의 성종(야율융서·재위 982~1031)이 ‘강조의 정변’을 문책한다면서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죠(1010년 11월). 현종은 강감찬(948~1031)의 권유로 전라도 나주로 몽진(피란)을 떠납니다. 피란길에 현종은 여러 차례 곤욕을 치릅니다. 어떤 지방에서는 하급 관리들이 “왕께서는 나의 이름과 얼굴을 아느냐”며 조롱했고요. 숙소로 쳐들어온 무리 때문에 가까스로 몸을 피한 적도 있습니다. 전주에서는 반란에 가까운 무력시위가 벌어졌습니다. 건국 초 아직 민심이 고려조정에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결국 거란과의 전쟁은 현종이 거란에 입조하는 조건으로 강화를 맺고 끝났습니다(1011년 1월 11일).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현종의 후손인 선종, 숙종, 예종, 인종 등이 승가사와 장의사를 여러 차례 방문했다고 기록했다. 문화재청 제공 ■흥화진대첩, 귀주대첩 그러나 현종은 그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습니다. 또 거란이 요구한 강동 6성도 내주지 않았습니다. 그사이 성과 보루를 꾸준히 쌓아 또다시 벌어질 전쟁에 대비했습니다. 강감찬 같은 인물을 서북면행영도통사의 책임을 맡겨 대비하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 청사에 길이 빛날 귀주대첩을 이룹니다(1018~1019). 10만 거란군 중 살아 돌아간 자가 수천 명뿐이라죠. 이후 다시는 고려를 넘보지 못했죠.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사치스러운 의식과 제도를 폐지하고 승려들의 횡포도 엄금하는 한편 굶주린 백성들의 구제에 힘씁니다. 성종 때 폐지된 연등회·팔관회를 부활시키고요. 설총(655~?)·최치원(857~?) 등을 추봉하고 문묘(공자묘)에 그들의 신주를 모셨습니다. 거란군의 침략을 불심으로 물리치려고 초조대장경의 제작에 착수, 6000권의 대부분을 완성했습니다. 1018년(현종 9) 5도양계체제라는 군현제의 골격을 구축합니다. 중앙집권제로 민심을 다잡고자 한 겁니다. ■세종대왕(현종)께서… 그후 고려는 현종의 후손이 왕계를 이어가는데요. 덕종(재위 1031~1034), 정종(재위 1034~1046), 문종(재위 1046~1083), 선종(재위 1083~1094), 숙종(재위 1095~1105), 예종(재위 1105~1122), 인종(재위 1122~1146) 등으로 이어집니다. 현종~인종의 130여 년간을 ‘고려의 전성기’라 합니다. ‘현종=세종대왕’이란 표현은 <고려사> ‘세가·고종’에 나와 있어요. 즉 1254년 10월 19일 고종(1213~1259)이 역대 왕들의 신위를 모신 태묘에 나가 “국난(몽골 침입)을 극복하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는데요. 이때 ‘현종=세종대왕’으로 지칭합니다. “세종대왕(현종)께서… 큰 난리를 평정해 중흥과 반정(反正)의 공을 세워….” 본래 ‘세종’은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거나 중흥시킨 군주에게 올리는 묘호(왕의 사후에 붙이는 호칭)입니다. 물론 고려 현종이 정식으로 ‘세종’의 묘호를 받지는 않았는데요. 그러나 고려시대 내내 위기에 빠진 나라의 기틀을 잡은 ‘세종대왕’으로 예우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무결점 국왕’ 보통 어떤 인물, 심지어 임금을 평가하는 사관들의 잣대는 ‘칼’ 같죠. 장점도 나열하지만, 단점 또한 그냥 지나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현종은 어떨까요. 완전히 ‘무결점 성군’으로 추앙됩니다. 당대의 사관인 최충(984~1068)과 이제현의 평가를 볼까요. “현종은… 오랑캐와 화호를 맺고, 전쟁을 멈추고 문덕을 닦으며, 세금과 요역을 가볍게 하며, 준수한 인재를 등용하고 정사를 공평하게 해서… 전국이 평안하고 농업과 잠업이 풍년이 들었다. 나라를 중흥시킨 왕(中興之主)이다.” 이 정도도 무결점 평론인데요. 이제현의 ‘한 줄 정리’가 눈길을 끕니다. “현종을 두고는 ‘나는 비판할 거리가 없다(如顯宗 吾無間然者乎)’는 것이다.”(<고려사절요> ‘현종 1031년 5월 25일’) 올해 발굴조사로 확인된 고려시대 건물터는 승가사와 장의사를 방문한 고려 국왕들의 숙소나 쉼터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수도문물연구원 제공 ■조선조에서도 칭찬 릴레이 조선조 들어서도 고려 현종과 관련된 평가가 ‘극찬’으로 일관됩니다. 양성지(1415~1482)는 “전 왕조의 현종은 영명한 군주”(<세조실록> 1457년 3월 15일)라고 극찬하고요. 유성룡(1542~1607)과 윤두수(1533~1601)는 “고려 현종은 거란의 침입 때문에 나주로 피란했지만 결국 고려의 중흥을 이뤘다”고 강조합니다.(<선조실록> 1593년 윤11월 29일, 1594년 9월 19일 등) 어떻습니까. 우리가 잘 몰라봬서 그렇지 고려 현종, ‘찐’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군주가 아닙니까. 너무 일찍(40세) 승하한 게 안타깝기는 합니다. 어쨌든 그런 분의 흔적, 자취가 요즘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잇달아 등장하고 있죠. 후대의 임금들은 ‘성지순례 코스’로 현종의 박해 장소인 삼각산을 찾은 게 분명합니다. 3차 고려-거란 전쟁(1018~1019)에서 두 차례 대첩이 있었다. 첫 번째는 소가죽으로 강둑을 막아 터뜨린 흥화진(의주)대첩이다. 두 번째는 철수하는 거란군을 귀주성 인근 구릉에서 격멸한 귀주대첩이 있었다. 10만 거란군 중 살아 돌아간 자가 수천 명뿐이었다. 이후엔 다시는 고려를 넘보지 못했다. 전쟁기념관 소장 기록화
이기환의 Hi-story
[이기환의 Hi-story](89)당뇨에 걸린 세종은 ‘대리청정’을 택했다(2023. 06. 23 11:17)
2023. 06. 23 11:17 문화/과학
‘세자(문종)는 반드시 나 같은 임금이 돼야 한다.’ 세자를 당신 같은 성군으로 키우려 했던 세종의 노심초사가 서려 있는 경복궁 전각이 있습니다. 오는 8월 31일 마무리를 목표로 복원공사 중인 ‘계조당’입니다. ‘계조(繼照)’라는 명칭은 ‘사방에 비치는 광명을 계승해 비춰준다(以繼明照于四方)’는 <주역> ‘이괘·삼전’의 구절에서 따왔습니다. 따라서 ‘계조’는 왕위계승을 뜻합니다. ‘계조당’의 복원은 고종 연간에 재건(1886)하고, 5년 뒤 보수(1891)된 전각을 모델로 삼고 있습니다. 오는 8월 31일 완공을 목표로 복원 중인 경복궁 계조당. 공사가 거의 마무리됐다. 성군의 정치를 이어가려던 세종의 심모원려가 담겨 있는 전각이다.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제공 1891년 계조당을 보수하면서 고종(재위 1863~1907)이 했다는 말이 의미심장합니다. “1443년 계조당을 세웠고, 세자(문종)가 대리청정했다. 세종 시대에 모든 제도와 문물, 법식을 다 갖췄고 가장 융성했다”(<고종실록> 1891년 2월 8일)고 했습니다. 고종은 “내가 세종의 업적을 계승한다고 할 수 없지만, 동궁(순종)은 나(고종)의 가르침을 준수해주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고종은 ‘세종처럼 나(고종)도 세자(순종)에게 대리청정시키겠다’는 뜻을 언급한 겁니다. 아니 이게 무슨 막말입니까. 고종이 감히 ‘세종 코스프레’를 한 건가요. 하지만 이해는 갑니다. 성군의 정치를 펼쳐 보이고 싶은 마음이야 고종인들 없었겠습니까. 어느 날 갑자기 세자-임금 계조당이 처음 건립된 것은 1443년(세종 25) 5월 12일이었습니다. <세종실록>은 “왕세자(문종)가 신하들의 조회를 받을 전각을 짓고, 이름을 계조당’이라 했다”고 했습니다. 즉 왕세자(문종)가 국왕(세종)을 대신해 국정을 이끌 ‘정당(正堂·집무실)’으로 건립된 겁니다. 좀 의아하죠.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눌 수 없다고 하잖습니까. 게다가 성군의 정치를 펼치고 있던 세종이 왜 굳이 세자에게 그 막중한 국정을 맡겼을까요. 왕조시대엔 태자 혹은 세자를 두고 ‘국본(國本·나라의 근본)’이라 일컬었습니다. 보통 3세 때부터 시작되는 후계자의 양성교육은 ‘국본’을 튼튼히 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세종은 그러나 어떠했습니까. 맏형(양녕대군·1394~1462)이 세자였고, 더구나 셋째 왕자였죠. 왕권하고는 거리가 멀었죠. 맏형이 폐위(1418년 6월 3일)되고 ‘졸지에’ 세자위를 물려받은 지 불과 두 달여 만에 왕위에 올랐습니다(8월 11일). 그 스트레스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세종은 당신의 아들(세자)에게는 그런 전철을 밟게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준비된 후계자를 키우는 것, 그것이 바로 ‘대리청정’이었습니다. 도적이 들끓었던 세종 시대 1437년(세종 19) 세종이 대리청정의 의지를 공식 언급한 다른 이유도 있었는데요. “왕위에 오른 지 20년이 지나는데 조금도 다스린 효과가 없구나. 해마다 수재를 만나 기근이 끊이지 않고, 도적 떼가 날로 창궐해… 이제 세자에게 정무를 맡기고….”(3월 27일) <세종실록>은 “임금(세종)이 전 해(1436) 가을부터 대리청정의 뜻을 밝혔다가 반대에 부딪혀 결심을 접었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런데 “20년간 다스린 효과가 없다”는 세종의 말씀은 지나친 겸손이 아닌가요.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돌이켜보면 세종의 시대는 나라의 기틀이 마련되지 않은 건국 초였습니다. 인심이 흉흉했고, 범죄가 들끓었습니다. 예컨대 1439년 12월 15일 세종은 “복역 중인 사형수가 190명에 달하니 감형 좀 하면 어떠하겠느냐”고 운을 뗐습니다. 세종은 “근래 기근이 겹쳐 도적이 흥행하고… 사형수가 예전의 배가 되니 부끄럽게 여긴다”고 반성했습니다. 이건 약과입니다. “(왕실재산을 관리하는) 내탕고의 황금 술잔과 (제사를 관장하는) 봉상시의 은찬(銀瓚·제기)까지도 털렸다”는 기사(<세종실록> 1436년 윤6월 14일)도 등장합니다. 그랬으니 세종이 “별다른 업적을 이루지 못했다”고 자책하고 대리청정을 모색했던 겁니다. 계조당의 설계 조감도. 세종은 세자(문종)의 대리청정을 명하면서 세자가 신하들의 조회를 받을 전각인 계조당을 세웠다.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제공 “주상은 몸이 뚱뚱하고 고기만 먹어서…” 건강악화도 세종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세종은 타고난 ‘공부벌레’이자 ‘일벌레’였습니다. 건강을 챙길 시간이 없었겠죠. 오죽하면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재위 1400~1418)이 세종에게 “주상은 몸이 뚱뚱한데 때때로 나와 놀면서 살 좀 빼야 한다”(<세종실록> 1418년 10월 9일)고 권했을까요. 태종은 “주상(세종)이 고기가 아니면 밥을 먹지 못한다”고 걱정하는 유언까지 남겼답니다(<세종실록> 1420년 8월 28일·1422년 11월 1일). 그러나 이때만 해도 “내가 본디 병이 없고 늙지도 어리지도 않았는데, 어찌 뒷날을 걱정하겠느냐”고 자신만만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젊은 날의 자신감이었습니다. 공부와 정사에 매달릴수록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습니다. 결국 왕위에 오른 지 20년이 가까워지는 1436년 말과 1437년 초 사이에 대리청정을 공식 거론한 겁니다. 세종은 “나이 40을 넘겼지만 ‘예지(銳志)’가 흐려져 90세 늙은이나 다름없다”면서 “게다가 병까지 생겨서 정사를 보기가 견디기 어렵다”고 호소했습니다. 그러면서 세종은 “세자의 나이가 스무 살을 넘겼고 학문도 깊고 지기(志氣)가 왕성해 능력이 있을 만한 때가 아니냐”면서 대리청정을 주장했습니다. 물론 다 넘긴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인사권과 병권, 형벌권, 외교사절 접견 등 국가의 대사는 과인이 맡을 것”(1437년 3월 27일)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죽어야 속이 시원하냐’ 임금이 대리청정을 원한다고 순순히 들어주는 신하들이 어디 있습니까. 바닥에 이마를 짓찧으면서 “아니 되옵니다!”를 외쳐야지 머뭇댔다가는 대역죄를 뒤집어쓸 수 있었습니다. 영의정 황희(1363~1452)를 비롯한 대소신료들이 극력 반대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세종은 집요했습니다. 무엇보다 건강이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하루에 한 동이 이상 물을 마시는 병(당뇨병)이 있고, 또 등 위에 부종(浮腫)을 앓고 있는데… 이제 또 임질(淋疾·성병이 아니라 요로결석으로 추정)이 걸렸다. 그러니….”(<세종실록> 1438년 4월 28일) 세종은 “(당뇨 때문에) 시력이 급격하게 떨어져 눈앞의 사람마저 구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호소했습니다. 1910년 무렵의 계조당 모습. 근정전 동쪽인 동궁 권역에 조성돼 있다. 계조당의 복원은 경복궁 중건 때 재건되고 보수된 건물을 모델로 삼고 있다.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제공 이후 ‘대리청정하겠다’는 세종과 ‘아니 되옵니다’라고 버티는 신하들과의 다툼이 1442년까지 지루하게 이어집니다. 신료들은 ‘세자는 그저 부왕만 잘 섬기면 되는 자리’라고 누누이 강조했습니다. 정사가 한 곳(임금)에서 나와야지 두 곳(임금과 세자)에서 나오면 혼란이 생긴다는 거죠. “지금의 전하(세종)와 세자(문종)라면 좋겠지만 후세에 부자지간에 틈이라도 생기면 어쩔 거냐”는 것이죠. 흔히들 세종을 두고 ‘소통의 지도자’라 평하죠. 마냥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세종은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정책을 두고는 결코 당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세종은 1442년(세종 24) 6월 16일 “이제 그대들과 토론하자는 게 아니라 그저 내 명을 전하는 것일 뿐”이라고 세자의 대리청정을 밀어붙였습니다. 신료들에게는 “너희는 임금의 병이 깊어져 손 쓸 수 없을 정도가 돼야 대리청정을 맡기겠느냐”고 윽박질렀습니다. 당대의 인물인 성현의 는 “지금도 궁궐 안에 가득 찬 앵두나무는 문종이 세자 시절 심은 것”이라고 전했다. /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세종은 밀당의 귀재 기어코 대리청정을 성공시킨 세종은 1443년 4월 17일 세자가 신료들의 조회를 받으며 정사를 펼칠 정당(집무실)을 세웠습니다. 그것이 계조당입니다. 세종은 원래 계조당을 남쪽을 향해 지었습니다. “세자가 남면(南面·남쪽을 향함)해서 정사를 펼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대소신료들이 벌떼처럼 일어났습니다. 태양을 향해 앉는 ‘남면’은 오로지 군주만의 방향이라는 겁니다. 신료들은 “하늘에 두 태양이 뜰 수 없다”며 일제히 반대했습니다. 그러자 세종은 여기서는 ‘그까짓 것’ 하며 양보합니다. ‘대리청정’을 받아냈으니 ‘남면’ 카드는 슬쩍 버린 겁니다. 결국 세자는 계조당 안에서 서쪽을 향하는 ‘서면’으로 대신들을 맞는 것으로 결정됐습니다. 세종은 ‘밀당’의 귀재였습니다. 세종을 쏙 빼닮은 세자 세자(문종)는 29세 때인 1442년(세종 24)부터 사실상 대리청정을 시작합니다. 사실 세종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세자가 당신(세종)을 닮아 성군의 자질을 타고났다는 겁니다. 예컨대 아버지를 닮아 학문을 좋아했던 세자(문종)는 한밤에 인적이 뜸해지면 책 한 권을 들고 집현전 학사가 숙직하는 거처까지 걸어와 밤새도록 토론했습니다. 그래서 집현전 숙직자들은 감히 관복의 허리띠를 풀지 못했답니다. 어느 날 숙직자였던 성삼문(1418~ 1456)이 밤이 늦어 세자가 행차하지 않을 것으로 여겨 옷을 벗고 누우려 했답니다. 문종의 효성은 지극했다. 아버지(세종)가 앵두를 즐기자 세자는 후원에 손수 앵두나무를 심어 앵두가 익으면 따다가 바쳤다. 세종이 그 앵두를 맛보고는 “외부에서 바친 앵두가 어찌 세자의 손수 심은 것과 같겠느냐”고 좋아했다.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제공 그때 갑자기 문밖에 신 끄는 소리가 들리면서 “근보(성삼문의 자), 근보”했답니다. 이에 성삼문은 매우 놀라 허겁지겁 나가 절했답니다. 선비와 학문을 좋아하는 세자(문종)의 면모를 보여주는 사례(<용천담적기>입니다. 효성 또한 대단했습니다. 아버지(세종)가 앵두를 즐기자 세자는 후원에 손수 앵두나무를 심었답니다. 세종은 세자가 따주는 앵두를 맛보고는 “외부에서 바친 앵두가 어찌 세자의 손수 심은 것과 같겠냐”며 좋아했답니다. 당대의 인물인 성현(1439~1504)은 “지금도 궁궐 안에 온통 앵두나무만 자란다”(<용재총화>)고 전했습니다. 측우기의 발명자는 문종 문종은 정식으로 왕위에 오른 지(1450년 2월) 불과 2년 3개월 만(1452년 5월)에 승하합니다. 39세의 창창한 나이였습니다. 원체 병약했던 데다 어머니(소헌왕후·1395~1446)와 아버지(세종·1397~1450, 재위 1418~1450)의 삼년상을 잇달아 치르는 바람에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된 겁니다. 재위 기간으로만 보면 너무 짧았습니다. 하지만 대리청정까지 합한다면 문종의 치세는 사실상 10년 정도는 됩니다. 그사이 세종은 웬만한 정사를 아들에게 넘기고 훈민정음 창제(1443) 및 반포(1446)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문종의 업적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1441년 4월 29일자 <세종실록>은 의미심장한 내용을 전합니다. “세자(문종)가 가뭄을 근심해 비 올 때마다 땅을 파서 젖어 들어간 깊이를 쟀다. 구리로 만든 원통형 기구를 궁중에 설치하고, 여기에 고인 빗물의 푼수를 조사했다.” 세종 시대의 업적 중 하나인 측우기의 발명가가 다름 아닌 세자(문종)였던 겁니다. <연려실기술>은 “문종이 천문을 잘 관측하고 후기(候氣)에 정교해 우레가 어느 때, 어느 방위에서 친다고 예언하면 반드시 적중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세종은 1436년 말에서 1437년 초에 대리청정을 공식 거론한다. “나이 40을 넘겼지만 ‘예지(銳志)’가 흐려져 90세 늙은이나 다름없다”면서 “게다가 병까지 생겨 정사를 보기가 견디기 어렵다”고 대리청정 할 뜻을 표명했다. ( 1437년 3월 27일)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제공 문종의 치세가 오래됐다면… 1450년 절세의 성군(세종)이 승하했지만, 권력의 공백은 없었습니다. 모두 대리청정의 덕분이었죠. 문종은 특히 6품 이상까지 윤대(輪對·문무 관원이 교대로 궁중에 참석해 임금의 질문에 응대하던 일)를 허락했습니다. <연려실기술>은 “문종이 지위가 낮은 신하라도 온화한 안색과 부드러운 말씨로 응대해 언로를 활짝 열었다”고 전했습니다. 또 이민족과의 전쟁·전란사인 <동국병감>을 펴냈고, 역사서인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편찬했습니다. 만만찮은 업적은 성군 아버지(세종)의 후계자 이양 방안, 즉 ‘8년여 대리청정’의 덕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종이 너무 일찍 승하하는 바람에 세자(단종·재위 1452~1455)가 열두 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를 잇는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만약 문종이 오래 왕위에 있었다면 계유정난(1453)과 같은 불행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겠죠. 문종은 세종의 치세를 계승했을 겁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제 어린 왕의 등극으로 쓸모가 없어진 계조당은 단종 즉위년(1452) 이후 9년 만에 헐리고 맙니다. 그래도 대리청정은 후대 왕세자의 후계자 양성 프로그램의 모델로 활용됐습니다. 바로 경종(재위 1720~1724)과 영조(재위 1724~1776), 장조(사도세자·1735~1762), 정조(재위 1776~1800, 익종(효명세자·1809~1830) 등의 대리청정이죠. 지금 복원 막바지에 경복궁 계조당에는 ‘성군의 정치’를 잇고자 했던 세종대왕의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이기환의 Hi-story
[이기환의 Hi-story] 고려의 전설적인 ‘일타강사‘, 세종대왕도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2023. 01. 25 15:38)
2023. 01. 25 15:38 문화/과학
사진은 <평생도 8곡병> 중 과거 급제 장면. ‘전설의 고려 일타강사’는 고려 충렬왕 때 제자 10명을 한꺼번에 급제시킨 강경룡이라는 인물이었다. 130여년이 지난 조선조 세종 연간에서도 그의 전설적인 이야기가 조정에서 공론화된다.|국립중앙박무관 소장“(개성 용산동)…모퉁이에 한가로운 이 집을 지었는데…모든 선비들 물고기떼처럼 모여들어 공부에 뜻을 갖고….” 고려의 천재 문인이자 문장가인 이규보(1168~1241)가 지은 시(‘진수재·晉秀才)의 별장에 붙이다’)입니다. 시의 제목에는 ‘진수재가 관동(冠童·어른과 아이)을 모아 가르쳤다’는 부제가 뒤따릅니다. 한마디로 ‘진수재’라는 인물이 개성 용산에 학원을 차리니 학생들이 물고기떼처럼 모여들었다는 얘기입니다. 아마 진씨 성을 갖고 있는 진사 혹은 생원급 ‘일타강사’였던 것 같습니다. ‘진수재’ 같은 고려시대 ‘일타강사’ 이야기가 심심치않게 보입니다. ‘진수재’를 소개한 이규보 역시 학창시절 당대의 ‘일타강사’에게 배운 적이 있습니다. 다양한 조선시대 과거시험 답안지. 고려시대부터 ‘과거만이 출세의 외길’로 여겼기에 사생결단으로 ‘사교육 시장’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과거급제를 위해 당대 최고의 ‘일타강사’를 찾는 일도 비일비재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대를 이어 고액과외 받은 이규보 부자 이규보는 당대 최고 명문이었던 개성의 문헌공도에서도 줄곧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던 영재였습니다. 그런 이규보는 1183년(명종 13) 실시된 국자감시(생원·진사시)를 코 앞에 두고 족집게 고액과외를 받았습니다. “공(이 이부)은 집에서 매양 관동(冠童·어른 아이)들을 모아놓고 글을 가르쳤는데, 나(이규보)도 지난 묘년(1183·계묘년)에 참여했습니다. 그 때 선생의 지위로 모셨고….”(<동국이상국집> ‘이 이부라는 이에게 드린다’) 무슨 얘기냐면 이규보는 그 해(1183년) 5월로 예정된 국자감시를 앞두고 있었는데요. 이때 아버지(이윤수·1130~1191)가 수주(수원) 수령으로 발령받아 임지로 떠나면서 이규보에게 ‘족집게 고액과외 선생’을 붙여주었습니다. 이규보의 시에 “묘(卯)년에 이 이부라는 분한테 배운 적이 있다”고 했는데, 1183년이 바로 계묘년이었거든요. ‘1183년 이규보의 과외선생=이 이부’였다는 예기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규보 가문의 ‘사교육’이 이규보의 셋째아들(이징)에게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이규보의 시(‘신 대장에게 내 아들 징을 가르치는 데 사례함’)에 나타나있는데요. “내 자식 우둔함을 혐의치 않고, 갈고 다듬어 옥 만들기를 기약하는데 그대의 후의를 무엇으로 갚을까.” 이규보는 이 시를 쓰면서 “신 대장(大丈)은 나이 80여 살인데 항상 학생들을 모아 가르쳤다”는 각주를 달았습니다. “셋째 아들 징이 썩은 나무 같아 새길 수 없다”면서 신 아무개라는 과외선생에게 아들을 맡긴 겁니다. “신대장은 동몽(어린 학생들)이 배우기를 청하면 거절하지 않으니 학생들이 모여 글방(서숙·書塾)을 이뤘네.” 여기서 ‘대장(大丈)’이라는 직책이 흥미로운데요.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대장은 고려시대 죄인의 처벌을 실질적으로 담당하는 잡류직’이라 설명했습니다. 그러니까 ‘신 대장’의 신분은 일종의 구실아치(관청에 딸린 하급관리)였던 겁니다. 얼마나 유명한 ‘일타강사’였으면 그렇게 낮은 신분에도 천하의 이규보가 가장 아낀 아들을 가르쳤을까요. 이규보의 시를 보면 신 대장은 여든살이 넘도록 글방을 차려놓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전문학원 강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단원 김홍도의 ‘공원춘효도’. 조선 후기 과거제도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고발·풍자하는 풍속화이다. 과거 급제를 위해 온갖 부정행위가 자행되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안산시 소장■고려~조선을 들썩이게 한 레전드 강사 그런데 고려시대 대표적인 ‘일타강사’는 따로 있습니다. 그 명성이 후대의 조선조까지 알려진 ‘전설의 강사’였는데요. 이름이 <고려사>와 <세종실록>에까지 등장하니까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고려사>를 우선 볼까요. “이 노인은 비록 벼슬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을 가르치는데 게을리하지 않아 제자들을 성공으로 이끌었구나. 어찌 공이 적다 하겠는가. 곡식을 내려주어라.”(<고려사> ‘세가·충렬왕’조) 때는 바야흐로 1305년(충렬왕 31)의 일입니다. 충렬왕(재위 1274~1308)이 유생 강경룡을 치하하고 곡식을 하사했다는 기사가 <고려사>에 실렸는데요. 대체 벼슬에 오르지도 못한 유생(강경룡)이 무슨 공을 세웠다는 걸까요. <고려사>와 이제현(1287~1367)의 <역옹패설>은 물론 조선의 정사인 <세종실록> 등에도 이유가 나오는데요. “강경룡이 집에서 제자를 양성했다. 1305년 실시된 국자감시(생원·진사시)에서 강경룡의 제자 10명이 모두 합격했다. 스승(강경룡)의 집에 합격한 제자들이 몰려가 스승을 뵈었다. 그 떠들썩한 소리가 밤새도록 끊이지 않았다. 마침 강경룡의 동네에 익양후 왕분(종친·고려 신종의 아들)이 살고 있었는데….” 시쳇말로 ‘강경룡 학원’의 소속학생 10명이 한꺼번에 과거(국자감시)에 합격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합격생들이 스승(강경룡)의 집에 찾아와 하루종일 마을이 떠나가도록 잔치를 벌였다는 겁니다. 마침 그 마을에 살던 종친(익양후 왕분·생몰년 미상)이 왁자지껄한 소리에 자초지종을 파악한 뒤에 이를 임금(충렬왕)에게 고했다는 겁니다. 이에 익양후의 보고를 들은 충렬왕이 강경룡을 크게 치하하면서 곡식을 내려주었다는 겁니다. 고려시대엔 공교육을 맡은 국자감 말고도 개인이 개경에 세운 12공도, 즉 12개 사학이 유명했다. 그중 최고 명문은 해동공자 최충(984~1068)이 설립한 ‘문헌공도’였다. 천재문인 이규보도 그 학교에 입학했다.■조선조 세종까지도 칭찬한 고려 ‘일타강사’ 그런데 130여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조선왕조가 들어섰는데도 ‘강경룡 사례’가 ‘워너비’로 칭송 받았습니다. <세종실록>을 보죠. 당시 지성균판사 허조(1369~1439)가 세종대왕 앞에서 갑자기 ‘강경룡’이라는 인물을 소환합니다. “고려 충렬왕이~강경룡을 포창한 일이 있사옵니다. 지금은 유생 유사덕과 박호생이라는 사람이 자기 집에 서재를 차려놓고 수십명의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들을 법(<육전>)에 따라 특별포상 하신다면….”(1436년 10월8일) 이 무슨 말일까요. 허조는 “고려시대부터 한량·유생들이 서재(서당)을 차려놓고 학생들을 가르친 사람에게 상을 주는 것이 법전에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조선시대 들어서도 서울엔 국학(성균관 및 4부학당), 지방엔 향교를 각각 두었지만 개인이 서당을 시행하지 못했다”고 아쉬워했습니다. 허조는 교육의 혜택이 고루 전해지지 못하고 있는 개국초임을 강조했습니다. 허조는 조정의 힘이 닿지 못하는 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립학교 혹은 사설학원의 설립을 장려하자는 취지로 상소문을 올린 겁니다. 세종은 허조의 상소에 따라 유사덕과 박호생 등이 세운 ‘모범 사학(혹은 학원)’을 표창했습니다. 고려 최고의 천재 문인인 이규보도 1183년 과거(국자감시)를 앞에 두고 이이부라는 족집게 과외선생에게 배운 적이 있었다.■고려 12대 명문사학 이러한 사교육 열풍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멀리 갈 것도 없이 ‘고려시대부터’ 예를 들어보죠. 교과서에 배웠듯이 고려의 대표적인 국립학교가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992년(성종 11) 창설된 국자감이었죠. 국자감은 1123년(인종 1) 국자학·태학·사문학·율학·서학·산학 등 경학(京師·6학)으로 정비됐구요. 그런데 국자감 교육에는 신분의 한계가 뚜렷했습니다. 국자학은 3품 이상, 태학은 5품 이상, 사문학은 7품 이상의 관리 자제들에게만 입학이 허용됐거든요. 그렇기에 지위는 좀 낮지만 머리가 좋은 가문의 자제들은 다른 문을 두들겨야 했습니다. 그것이 문벌귀족이 아니라 지방 향리 가문 출신인 이규보가 ‘사학(문헌공도)’를 택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중 고려 전통의 명문사학은 개경에 설립된 ‘십이공도(十二公徒)’입니다. 명문 사학 12개 학교는 ‘최충의 문헌공도, 정배걸의 홍문공도, 노단의 광헌공도, 김상빈의 남산공도, 김무체의 서원도, 은정의 문충공도, 김의진의 양신공도, 황영의 정경공도, 유감의 충평공도, 문정의 정헌공도, 서석의 서시랑도, 실명씨(失名氏)의 귀산도….’(<고려사> ‘선거지·사학’)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최고 명문은 해동공자 최충(984~1068)이 설립한 ‘문헌공도’였습니다. 이규보가 입학한 바로 그 학교죠. “1155년(문종 9) 설립한 문헌공도에 양반의 자제들이 문전성시를 이뤄 반을 9재로 나눴다. 낙성(樂聖)·대중(大中)·성명(誠明)·경업(敬業)·조덕(造道)·솔성(率性)·진덕(進德)·대화(大和)·대빙(待聘) 등이다. 무릇 과거에 응시하려는 자는 반드시 이 공도에 속해 공부했다.”(<고려사> ‘선거지·사학’) 얼마나 줄을 섰으면 9반으로 분반까지 했을까요. <고려사>의 구절이 가슴에 와 닿죠. “과거를 보려는 학생은 반드시 최충의 학교에 입학해야 했다”는 겁니다. 요즘으로 치면 가고싶은 대학, 가고싶은 직장에 가려면 명문 ‘문헌공도’에 입학해야 했다는 얘기니까요. 예나 지금이나 못말리는 ‘일류병’은 어찌 그렇게 똑같을까요. 1481년(성종 12) 5월27일 성균관 진사 이적(생몰년 미상)의 한마디가 고금을 초월한 ‘일류병’을 상징적으로 일러줍니다. “지금 인재선발은 오로지 과거에만 의존합니다. 과거로 출세하지 아니하면 ‘재주가 없다(비재·非才)’고 낙인찍고 으레 ‘별볼일 없는 관리(속리·俗吏)로 대우합니다.”(<성종실록>) 이규보(1168~1241)의 <동국이상국집>에는 ‘진수재(晉秀才)’라는 시쳇말로 당대 사설학원의 강사를 주제로 한 시가 눈길을 끈다. 시의 제목에는 ‘진수재가 관동(冠童·어른과 아이)을 모아 가르쳤다’는 부제가 붙어있다. ‘진수재’라는 인물이 개성 용산에 학원을 차리니 학생들이 물고기떼처럼 모여들었다는 내용이다.■문헌공도의 여름철 ‘모의고사’ 각설하고 ‘과거 지상주의’가 판치는 세상이니 과거급제를 위한 교육이 극성을 떨었죠. 특히 최고의 명문이라는 ‘문헌공도’의 교육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습니다. 정식 학기철은 물론이고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여름에는 인근 사찰(귀법사 등)을 빌려 50일간 이른바 ‘하과(夏課·여름철 특별과외)’를 열었습니다. 문헌공도 출신 선배들이 특별강사로 초빙되었구요. ‘하과’의 특별시험 중에는 ‘각촉부시(刻燭賦詩)’라 해서 촛불에 금을 그어 시간을 정하고 시를 짓게 하여 글의 등급에 따라 등수를 정했는데요. 이런 시험을 불시에 치른다고 해서 ‘급작(急作)’이라고 했죠. 지금으로 치면 ‘수능대비 족집게 모의고사’였구요. 갓 급제한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출제경향과 예상문제, 그리고 답안지 작성요령을 전수해준 겁니다. 문헌공도에서 시작된 ‘하과’는 다른 사학에까지 요원의 불길처럼 퍼졌답니다. “12공도의 관동들이 해마다 여름철이면 산림에 모여 학업을 입히다가 가을이 되면 파했다. 용흥사와 귀법사 두 절에 많이 머물렀다”(<보한집>)는 등의 기사가 보입니다. 문헌공도와 같은 사립학교에서 이렇게 극성을 떠니 국립학교는 가만 있었겠습니까. 공교육의 장인 국립학교에도 ‘하과’가 퍼졌는데요. 대표적인 예로 고려말 대학자인 목은 이색(1328~1396)은 16~17살 때 국자감이 실시한 두 번의 구재도회(九齋都會)에서 무려 24~25회의 장원을 차지했답니다.(<목은집>) 그래도 생각해보면 ‘하과’는 사학이든 관학이든 학교의 테두리 안에서 실시한 공식 과외수업이라 할 수 있겠죠, 이것에 만족할 교육열이 아니었습니다. 이규보의 예에서 보듯이 ‘과거만이 출세의 외길’로 여겼던 이들은 사생결단으로 ‘사교육 시장’에게로 눈길을 돌렸고, 당대 최고의 ‘일타강사’를 찾았으니까요. 이규보는 셋째아들(이징)의 개인교습을 ‘신 대장’이라는 과외선생에게 맡긴 적이 있다는 사실을 시로 표현했다. 이규보는 “내 자식 우둔함을 혐의치 않고, 갈고 다듬어 옥 만들기를 기약하는데 그대의 후의를 무엇으로 갚겠냐”고 사례했다.■실패로 돌아간 일타강사의 과외 그렇다면 ‘사교육 열풍’은 과거를 위해, 출세를 위해 언제나 옳았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당장 어릴 적부터 천재 소리를 들었고, 최고 명문인 문헌공도에서도 줄곧 1등을 차지한 이규보의 예를 들어볼까요. 앞서 1183년 5월로 예정된 국자감시를 코 앞에 두고 아버지가 족집게 고액과외 선생(이 이부)를 붙여주었다고 했잖습니까. 그러나 이규보는 그렇게 특별 과외를 받고도 그 해 시험에서 낙방을 했습니다. 이규보는 그 후에도 두 번이나 더 낙방을 거듭한 끝에 4번째 도전에서 겨우 급제했습니다. 이규보 같은 천재라도 ‘일타강사’의 족집게 과외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는 뜻입니다. 마침 고려를 풍미한 사교육 열풍을 곱지않은 시선으로 평가한 분도 있네요. 조선중기의 문신 황준량(1517~1563)의 <금계집>은 최충의 문헌공도를 ‘디스’하고 있는데요. “최충이 문헌공도를 설치하고 후학들을 가르쳐 세상에서 ‘해동부자(海東夫子)’라 일컬었다. 그러나 세상에 적용하여 도(道)를 밝힌 효험이 없었고 자신에 돌이켜 궁구(속속 파고들어 깊에 연구)한 실질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문하의 영향을 받은 자들이 모두 문장이나 수식하는 경박한 선비들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근본을 힘쓰고 사특한 것을 억누르는 의리에 대하여는 듣지 못하여, 담론하는 것이라곤 단지 성현 말씀의 찌꺼기뿐이었습니다.” 황준량은 과거시험준비에만 몰두하느라 세상에 도움이 되는 참교육을 행하지 못한 고려의 사학을 개탄했던 겁니다.
이기환의 Hi-story이기환

레이디경향(총 3 건 검색)

만원으로 즐겨요…청소년 위한 티켓 패키지 ‘세종 올패스’
2023. 06. 21 11:42 문화/생활
8세부터 25세까지 청소년만 구매가능한 전용 티켓 패키지가 판매된다. 뮤지컬, 오페라, 합창, 국악 등 다양한 예술 장르를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다. 세종문화회관은 청소년에게 저렴한 공연 관람의 기회를 주기 위해 특별한 티켓패키지 ‘2023 세종 올패스’를 시행한다고 밝혔다. 세종문화회관이 제작하는 총 4개 공연을 4만원에 판매하는 패키지다. 총 정가 16만원을 75% 할인된 가격으로 구입, 각 공연을 1만원에 관람하는 셈이다. ‘2023 세종 올패스’에 포함된 작품은 <알로하나의 엄마들>(7월 15일~8월 19일·국립극장 해오름극장), <여름가족음악회>(8월 31일·세종대극장), 서울시국악관현악단 <2023 믹스드오케스트라Ⅰ>(9월 15일·세종대극장), 서울시오페라단 <투란도트>(10월26~29ㅇ일·세종대극장) 등이다. 뮤지컬 <알로하 나의 엄마들>은 지난해에 이은 재연으로 우주소녀, 헬로비너스 등 아이돌 출신의 배우들이 출연, 대중성을 더했다. 오페라 <투란도트>는 푸치니의 걸작으로 꾸준히 사랑받고 있으며 온 가족이 함께할 수 있는 합창 <여름 가족 음악회>, 국악에 새로운 파격을 가미한 <2023 믹스드 오케스트라 Ⅰ>도 기대작이다. 티켓은 21일 오후 2시부터 세종문화회관홈페이지에서 구매할 수 있다. 단, 300매 한정이다. 구입을 위해서는 먼저 청소년 본인이 세종문화회관 홈페이지 회원에 가입해야 한다. 1인 2매까지 구매 가능하며, 동반 관람(1인)에 대해서는 별도 제한 없이 공연 관람이 가능하다. 구매를 마친 후에는 반드시 공연별 관람 날짜와 좌석을 지정해야 하며 공연 당일 티켓 수령을 위해 구매자 본인이 청소년임을 증빙할 수 있는 증빙서류(학생증, 신분증 등)가 필요하다.
세종대왕, 이순신을 꼭 읽혀야 하나요?
2014. 10. 07 19:53 육아/교육
ㆍ엄마가 알아야 할 요즘 위인전 우리가 어렸을 때는 집집마다 한 질 정도는 가지고 있었던 위인전. 요즘 엄마들 사이에선 종종 아이에게 위인전을 읽혀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두고 많은 의견이 오간다. 그럼에도 위인전의 효용에 대해서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사실. 아이에게 위인전을 건네주기 전, 엄마가 알아야 할 점을 살펴봤다.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위인 선호도 불과 10~20년 전만 해도 미취학 아동부터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에게 위인전은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이었다. 안 읽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듯 부모들은 앞다퉈 고가의 전집을 구입해 아이의 책꽂이에 꽂아주었다. 하지만 글만 빽빽하고 재미없는 위인전 위로는 결국 뽀얀 먼지가 쌓였고, 전집은 장식품으로 전락하곤 했다. 어린 시절에 이런 ‘위인전 악몽’을 겪어본 엄마들은 아이의 위인전 독서에 대해 망설이게 된다. 굳이 이렇게 재미없는 책을 읽혀야 하는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여전히 위인전을 필독 도서로 꼽는다. 위인전에 관한 재밌는 사실이 있다. 우리나라 위인전의 최고 전성기였던 1960~80년대는 공교롭게도 군사정권 시기와 겹친다. 그래서 이때의 위인전은 유독 나라를 지킨 구국 영웅이나 새로 나라를 세운 왕조 영웅들이 주요 인물들로 다뤄졌다. 아이들은 광개토대왕, 왕건, 세종대왕, 이성계, 을지문덕, 연개소문, 장보고, 강감찬, 이순신 등 왕과 무인들의 위대한 업적을 읽게 됐다. 주로 애국심이나 충성심을 고취시키는 문장과 단어를 썼으며, 위인은 어린 시절부터 비범한 면모를 드러내고 어른에 대해 예의를 갖출 줄 아는 인물로 묘사됐다. 아이들의 위인전집 구성에도 시대 상황이 짙게 반영된 것이다. 영원할 것 같았던 1980년대의 영광도 1990년대에 들어서는 시들해졌다.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정치계는 물론 출판계에도 새바람이 불어왔다. 어린이 책 시장이 단행본 위주로 급격하게 성장하면서 전집이 주도권을 내주게 된 것이다. 그에 따라 위인전에도 눈에 띄는 변화가 이뤄졌는데, 가장 큰 특징은 구국 영웅들이 대거 사라지고 새로운 영웅들로 교체됐다는 점이다. 단행본의 경우 이미 전집에서 충분히 다룬 인물들을 소개하는 것으로는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지 못했다. 따라서 새로운 인물을 찾는 작업이 활발하게 이어졌다. 광복 이전까지의 인물을 다뤘던 것에서 좀 더 넓게 광복 이후의 인물들도 단행본으로 하나둘 출간되기 시작했다. 민주운동가 장준하 선생, 인권변호사 조영래, 노동운동가 전태일 등 불과 한 세대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인물들이 소개되는 계기가 됐다. 2014년 어린이 위인전의 변화 그리고 위기 여전히 어린이 위인전 시장은 전집과 단행본으로 나뉜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예전보다 훨씬 다양해진 구성과 인물 소개가 눈에 띈다. 가장 큰 특징은 살아 있는 동시대 인물을 다루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 UN사무총장 반기문,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물론 올림픽 피겨스케이팅 금메달리스트 김연아,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 이희아 등 나이, 인종, 직업을 뛰어넘는 다양한 인물이 책 속에 담겼다. 아이들은 몇백 년 전의 영웅보다는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인물들의 이야기에 빠르게 공감하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두드러지는 점은 솔직해진 묘사 방식이다. 최근 영화 ‘명량’의 인기에 힘입어 이순신 장군에 대한 위인전이 새롭게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순신 장군은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위인전 목록에 꾸준히 이름을 올린 몇 안 되는 ‘영웅’이다. 오랜 시간 사랑을 받은 위인이지만 과거와 현재의 위인전 묘사 방식은 현저하게 다르다. 과거에는 ‘민족의 횃불’, ‘세계적인 영웅’ 등이란 단어를 사용하며 신격화에 가깝게 표현했지만 요즘에는 그런 단어를 지양한다. 대신 인물의 성격이 드러나는 일화나 어려움을 겪었던 사연 등을 솔직담백하게 담는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마냥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시중의 많은 위인전들이 전체적으로 분량이 짧아졌으며 문장 호흡 또한 짧아졌다. 독서를 통해 긴 글에 익숙해지는 연습을 하게 마련인데 위인전만으로는 그런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어진 것이다. 게다가 중요한 사건을 단 몇 줄로 설명해야 하니 직설적인 문장이 많다. 아이가 상상을 하기도 전에 먼저 해답을 알려주는 모양새다. 그러니 문장과 문장 사이에 숨어 있는 행간을 읽는 연습 또한 이뤄지지 못한다. 최근 갈수록 심해지는 출판계 불황 때문에 아이들이 선호하는 분야에만 편향된 출간 상황도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나마 미취학 아동이나 초등학교 저학년을 위한 위인전은 비교적 많지만 고학년이 읽을 수 있는 위인전집은 드물다. 이따금 명맥을 이어가던 고학년용 위인전도 결국 불황을 견디지 못하고 내용을 좀 더 쉽게 수정하는 길로 들어서고 있다. 차근차근 단계를 밟으며 위인전을 읽던 아이들은 고학년 때 적합한 수준의 책을 찾지 못해 독서 공백이 생기게 된다. 중·고등학생을 위한 위인전은 인물의 다각적인 면모를 다루며 보다 심도 있게 인물을 그려내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다 보니 초등 고학년 아이들이 무턱대고 중학생의 위인전으로 넘어가기엔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 이 나이대 아이들은 교육 과정에 한국사가 포함돼 있어 누구보다 위인전을 읽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아이 수준에 맞는 고학년용 위인전이 많지 않아 선택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는 점이 아쉽다. 그럼에도 읽어야 하는 이유 「태백산맥」에 이어 「정글만리」로 다시 한번 한국 문학계에 큰 획을 그은 조정래 작가는 뜻깊은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손자에게 손수 쓴 책을 읽히고 싶은 마음으로 안중근, 김구, 세종대왕, 이순신 등 총 7명의 위인을 직접 선정해 손자와 손자 세대에게 바치는 위인전을 집필한 것이다. 몇 년 전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조사한 적이 있다. 1위는 방송인 유재석, 2위는 피겨 퀸 김연아 선수, 3위는 반기문 UN사무총장, 4위는 부모님, 5위는 세종대왕이 올랐다. 부모님을 제외하고 무려 3명이나 동시대 인물이다. 늘 순위에 이름을 올렸던 이순신 장군은 순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시대가 변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수박 겉핥기식 역사교육, 위인전을 멀리하는 분위기가 아이들의 존경하는 인물 순위를 바꿔놓은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컸다. 위인전은 한 사람이 생애에 걸쳐 일군 업적과 그것을 이루기 위해 겪은 어려움과 극복 과정 등을 담고 있다. 위인전을 읽으면서 아이들은 그 인물 역시 어릴 적에는 자기와 다를 것 없는 보통의 아이였음을 알게 된다. 즉 훌륭한 사람은 시작부터 ‘신’처럼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 꿈과 목표를 갖고 노력으로 일군 성과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로 인한 자신감과 자긍심 고취, 목표 의식 확립에 도움이 된다. 이 같은 효과를 생각한다면 조정래 작가가 굳이 위인전을 집필한 속뜻을 이해하게 된다. 위인전은 고루한 책이 아니다. 한 사람의 일생과 그 시대를 담은 좋은 학습서이자 재미있는 책이다. 다만 우리는 위인전을 받아들이고 활용하는 법을 몰랐던 것뿐이다. 위인전을 읽는다는 것은 그 인물이 평생 동안 체득한 모든 지혜를 배울 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일 것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만족도가 높은 책들만 모았다! 엄마와 아이가 모두 좋아하는 초등 위인전 10 고학년으로 올라가기 전 한국사 기본기 다지기에 좋은 초등학생을 위한 인물 한국사 (길벗스쿨) 초등학교 고학년이 돼 한국사 통사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전, 인물을 통해 역사 전체 흐름을 읽을 수 있다. 한꺼번에 많은 역사를 다지기 힘든 아이들에게 옛 사람들이 살아온 이야기에 집중해 저절로 역사 공부가 되도록 구성했다. 단군에서 김구까지 총 58명의 인물을 다루며 총 5권으로 한국사의 전반을 담았다. 해당 인물의 주관적인 평가는 최대한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다루려 노력한 점이 엿보인다. 특히 비판은 물론 시대가 변함에 따라 달라지는 인물 평가까지 실어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어린이 책 분야에서 처음 시도된 평전 한겨레 인물 탐구 시리즈 (한겨레아이들) 위인전 하면 보통 남다른 어린 시절로 시작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어린이 책으로는 처음으로 인물과 시대를 다각도에서 바라보는 평전으로 기획된 새로운 스타일의 인물 서적이다. 위인의 뛰어난 일대기 대신 모순된 현실, 방황과 실패, 박약한 내면을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한 인물의 성장 과정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사진이나 문서, 역사적 기록 등 풍부한 시각 자료는 물론 주인공이 남긴 말과 글, 동시대 인물의 회고 등 다양한 자료를 실은 것이 특징이다. 김구, 윤동주, 전태일, 간디, 제인 구달,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찰스 다윈, 체 게바라 등을 깊이 있게 조명했다. 어린 시절 삶의 지표가 되는 롤모델 찾기 Why? People 시리즈 (예림당) 아이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학습만화 와이 시리즈에서 나오는 인물 만화다. 아이들이 닮고 싶어 하는 롤모델을 제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책으로 인물의 실패와 성공에 얽힌 삶의 자세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최대한 객관적으로 담기 위해 공과를 가감 없이 다루되 그 판단은 아이들이 직접 할 수 있도록 남겨뒀다. 정치 리더, 경제 경영, 문화 예술, 과학기술, 환경 인권으로 나눠 각 분야 국내외 주요 인물을 고르게 선정한 것이 특징. 만화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인물의 연관성, 돌발 인터뷰 등 학습 정보와 배경지식까지 담고 있다. 인물의 숨겨진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세상을 바꾼 큰 걸음-만화 인물 평전 시리즈 (돌베개) 인물 이야기를 다루면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부터 시작한다. 그들은 당대에 어떤 인물이었으며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에 대해 다각도로 조명한 것이다. 전형적인 위인전이나 직업 진로 선택에 도움이 되는 인물전도 아니다. 인물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새롭게 해석을 내리는 인물 평전으로, 잘못 알려진 부분이나 부풀려진 면모를 가감 없이 벗겨내고 참모습을 다루기 위해 노력한 시리즈다. 예를 들면 링컨이 노예 해방론자와 노예 찬성론자 양쪽으로부터 동시에 공격을 받았다는 사실 등을 흥미롭게 담고 있다. 국내는 물론 세계시장에 돌풍을 일으킨 초베스트셀러 한국 위인전 Who? (다산어린이) 세계 위인전 Who? 1백 권에 이어 한국 위인전 Who? 50권까지 발간한 시리즈. 특히 한국 위인전은 먼 과거가 아닌 근현대 인물들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기업인 김택진이나 김연아 선수 등 이름만 들어도 바로 알 만한 인물을 발 빠르게 담아내 아이들로부터 반응이 좋다. 이미 세계 위인전 Who?는 3백만 부 이상 판매고를 올리며 국내 위인전 시장에 새로운 돌풍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출판 사상 최초로 미국 초등학교 부교재로 채택되는 성과까지 이뤄냈다. 재미는 물론 내용의 차별화까지 이뤄 엄마들의 신뢰를 얻고 있는 학습만화 시리즈로 평가받고 있다. 단행본 못지않은 다양한 구성 지인지기 인물이야기 (그레이트 북스) 총 80권으로 이뤄진 방대한 양에도 불구하고 마치 단행본처럼 다양성을 갖춘 점이 눈에 띈다. 아빠가 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 미술관을 탐방하는 방식, 아이가 숙제로 준비한 리포트 방식 등 각 권마다 아이들이 인물에 친숙하게 접근할 수 있는 컨셉트로 다양하게 구성됐다. 인물의 면면을 완벽하게 그려내기보단 부지런한 마리 퀴리, 지기 싫어했던 피카소, 수집광 다윈처럼 취미나 성격이 사람을 변화시킨 사연을 담고 있어 인물 캐릭터가 보다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이 장점. 아이들의 공감도가 높아서 위인전 입문서로 활용하는 것은 물론 역사의 기본기를 다지기에도 좋다. 엄마들 사이에서 입소문으로 유명해진 솔루토이 인물 (교원) 미취학 아동부터 초등학교 저학년 자녀를 둔 엄마들 사이에서 가장 화제가 되는 시리즈다. 처음 책을 보면 감각적이며 완성도 높은 일러스트에 감탄할 정도로 작은 부분까지 많은 공을 들인 티가 난다. 크게 인성과 진로로 구성을 나눴으며, 다양한 스토리텔링 기법을 통해 몰입도를 높이고 주제를 확실하게 드러낸다. 사고력을 높여주는 교과 통합 활동을 통해 심화된 배경지식을 쌓을 수 있게 한 점도 특징. 본문에 소개한 직업 분야 중 또 다른 직업을 가진 인물의 삶을 다룬 별책을 통해 아이들이 자신의 꿈을 구체화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했다. 교과서 속 인물 정보를 충실하게 담아낸 바투바투 인물이야기 (웅진씽크빅) 위인전은 딱딱하고 지루한 책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나기 위해 업적 나열이 아닌 아이들이 인물을 친숙하게 느낄 수 있을 만한 포인트를 군데군데 배치한 점이 인상적이다. 가야금의 멋을 세계적으로 알린 황병기, 영혼의 자유를 꿈꾼 이사도라 던컨, 사람을 사랑한 혁명가 체 게바라 등 기존 전집에서 다루지 않은 새로운 인물이 다수 포함됐다. 인물 앨범, 인물 수업 등의 코너를 통해 다양한 사진과 부가 정보를 충실히 실어 학습 효과를 높였다. 교과과정에 나오는 주요 인물들에 대한 정보를 따로 구성해놓은 점도 엄마들의 높은 점수를 살 듯. 인물을 통한 멘토링과 역사 공부까지 가능한 눈으로 보는 한국 인물 (교원) 본책 40권과 별책 5권에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위인들을 과학자, 애국자 등 5개 영역으로 나눠 다뤘다. 허준, 장영실, 정약용, 이휘소, 김순권, 김수근 등 눈에 띄는 업적을 쌓은 인물을 시대에 구애받지 않고 담은 것이 특징. 인물을 객관적으로 서술한 것은 물론 당시 시대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실적인 일러스트가 인상적이다. 글의 양이 제법 되는 편이라 초등학교 저학년보다는 고학년에게 도움이 되는 전집이다. 특히 앱 형태로 인물의 일생과 역사 흐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꾸며 역사 공부하기에 좋다. 멕시코와 브라질에 그림책 한류 바람을 일으킨 탄탄 피플인피플 (여원미디어) 4년 연속 브라질과 멕시코 초등학교 부교재로 채택돼 남미에 뜨거운 한류 바람을 일으킨 주인공이다. 특히 인권운동가 넬슨 만델라의 일대기를 다룬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죄수’는 전 세계 출판 관계자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지난 10년간 국제 그림책 도서전에서 다수의 상을 받은 그림책 출판사답게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차별화된 일러스트도 책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한몫한다. 주요 정보가 한눈에 들어오는 세련된 디자인과 입체적인 스토리텔링 기법이 여느 위인전과 차별화를 이룬다. Mini Interview “위인전을 통해 역사를 통합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고력을 형성할 수 있어요” 한대규(시흥 도창초등학교 교사·「스토리텔링 초등한국사 교과서」저자·초등역사교사모임회원) 현장에 있는 교사로서 요즘 아이들의 위인전 읽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안 그래도 도서관 사서 선생님께 여쭤봤는데 초등학교 저학년보다는 중·고등학생들은 제법 읽는 편인데 초등학교 아이들은 거의 위인전을 읽지 않는다고 해요.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위인전집 위주로 열심히 읽는 분위기였는데 요즘은 정말 달라졌어요. 학교 현장에서도 아이들에게 위인전을 읽으라고 강요하지 않고요. 다만 교육 과정과 관련해 필요한 사항이 있을 때는 따로 숙제로 내는 경우가 있는데, 요즘 아이들은 숙제를 하기 위해 위인전을 읽는 대신 인터넷에 검색하면 손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으니 더욱 멀리하는 것 같아요. 위인전을 많이 읽으면 정말로 역사 공부에 도움이 될까요? 물론이죠. 사실은 요즘 제가 위인전을 집필 중인데, 아이들도 사건이 아니라 위인을 중심으로 역사를 공부하면 참 효과적일 거라는 생각했어요. 동시대에 살았던 위인들은 서로 밀접하게 영향을 주기도 하는데, 가령 백제에는 의자왕, 계백, 윤충, 고구려에는 보장왕, 연개소문, 양만춘 그리고 신라에는 태종 무열왕(김춘추), 김유신, 관창 등이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형성하며 역사를 만들어요. 위인의 행동을 따라가다 보면 역사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인과관계를 파악하게 되요. 이렇게 인물과 인물을 엮어서 보면 삼국시대의 역사가 한눈에 들어오고, 역사가 어려운 암기과목이 아니라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느낄 수 있어요. 위인전을 선택할 때 눈여겨봐야 할 점이 있다면요? 인물이 중심이되 비교적 객관적으로 풀어주는 내용의 책을 선택하는 게 좋아요. 개인적으로는 한 인물을 치우침 없이 여러 시각에서 바라보는 평전을 추천하고요. 읽고 난 뒤 위인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도록 활동 거리를 담고 있는 책이 아이들에게 도움이 돼요. 예를 들어 「광개토대왕」을 읽고 난 뒤 ‘고구려는 중국 연호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광개토대왕은 왜 연호를 만들었을까?’라는 질문을 통해 다시 한번 책 내용을 되새겨보는 거죠. 또 책을 읽다 보면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용어나 지명 등이 나오는데 그 옆에 부연 설명이 있는 책으로 고르세요. 지도나 연표, 도표 등이 함께 있으면 다시 한번 눈으로 확인하기 때문에 학습적 효과를 높여줘요. 요즘엔 히틀러나 스탈린 등 역사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사람들의 책도 있던데요. 세상의 모든 일에는 양면의 칼날이 있게 마련이죠. 아무리 부정적인 인물이라고 해도 배울 점은 있어요. 그를 통해서 역설적으로 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든지 시사하는 바가 분명히 있다고 봐요. 위인전이 그 사람을 본받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단 비판적인 시각을 통해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아요. 다만 아직 역사적인 평가가 끝나지 않은 인물의 책을 읽을 때는 주의해야 해요. 예를 들어 안철수 의원은 기업인으로서의 평가와 정치인으로서의 평가가 아직 엇갈리는 상황이에요. 이렇듯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진로 교육적인 측면에서 읽기를 추천해요. 초등학생은 위인전을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요? 먼저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인물 위주로 읽으면서 아이들의 흥미를 이끌어내는 게 좋아요. 그렇게 하나둘 읽으면서 배경지식을 쌓는 거죠. 유관순, 이순신, 세종대왕 등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위인들이 적합해요. 반면 초등학교 고학년은 교육과정에 나온 인물들 위주로 보는 게 좋아요. 교과서에 어떤 책을 참고했는지 목록이 나오는데 그걸 토대로 위인전 목록을 꾸리면 도움이 될 듯해요. 저학년 때 유명한 위인들을 다 읽었다면 고학년 이상부터는 근현대사에서 비중 있게 다뤄지는 인물 위주로 읽는 것을 권해요. 혹은 인물에 대한 접근을 바꿔 다르게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죠. 예를 들어 꿈을 주는 위인, 위기를 극복한 위인, 리더의 본보기가 되는 위인 등 주제별로 나눠 인물을 다루는 책들을 읽는 방법도 있어요. <■글 / 이선희(프리랜서) ■사진 / 김성구, 안지영 ■도움말 / 한대규(시흥 도창초등학교 교사·초등역사교사모임 회원)>
드라마 ‘대왕 세종’으로 돌아온 배우 정흥채
2008. 02. 13 연예
2008년 1월, 공중파 드라마 중 최고의 화제작은 KBS-1TV ‘대왕 세종’이었다. 첫 회가 방송되기 전부터 화제더니 방송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채 안 된 요즘, 30회를 연장할 것이라는 소리가 나돈다. 드라마 속 강상인 역으로 출연 중인 정흥채를 만났다.드라마 ‘대왕 세종’의 촬영 스케줄 덕분(?)에 어렵게 정흥채(44)를 만날 수 있었다. 그의 눈은 빨갛게 충혈돼 있었다. “촬영 스케줄이 빠듯해 힘들겠다”고 하자 “그렇죠 뭐”라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긴다. “지금까지 일 년 동안 잠을 거의 못 잤어요. 대선도 있었고, 드라마 촬영도 있고요. 그 두 가지 일을 완벽하게 해야 하기 때문에 잠을 줄일 수밖에 없었어요. 완벽하게 하지 못하면 변명의 여지가 없잖아요. 그래서 몸이 더 힘들었던 것 같아요.” 정흥채는 지난 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 당선인의 지원 유세를 펼쳤다. 그의 정치 소신에 대해 궁금해하자 “이 당선인을 지원한 이유는 지금 이 시점에서 그만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연기 인생 20년, 식지 않는 열정 정흥채는 지난 1월부터 ‘대왕 세종’에 출연하고 있다. 그는 궁궐 경호를 맡은 내금위장 강상인 역으로 등장한다. 강상인은 왕자의 난 때부터 태종을 도와 반대 세력을 제거하는 데 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 공을 인정받은 강상인은 세종 1년, 병조참판(지금의 차관급)까지 오르게 된다. 하지만 그는 병권을 잡고 있는 상왕(자리를 물려주고 들어앉은 임금) 태종에게 병무에 관련된 사안을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강상인의 옥사’에 연루돼 결국 죽게 된다. ‘대왕 세종’ 촬영은 수원 KBS 드라마 센터를 비롯해 문경, 부안, 전주 등 우리나라 방방곡곡을 다니며 하고 있다. “아직은 제가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에 주연 배우에게 맞춰주는 역할을 해야 해요. 그런 점에서 어느 정도는 힘든 부분이 있어요. 데뷔 초반에는 주연 배우 위주로 돌아가는 상황에 부딪치면 자존심이 상하고 그랬어요. 하지만 연극하면서 그런 부분은 많이 다져졌어요.” 그는 더 이상 배역의 비중에 연연하지 않는다. 지금은 주연인지, 조연인지, 단역인지를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배우는 그저 자신이 맡은 역할을 따라가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제가 연극 무대에서 활동한 것까지 포함하면 20년 넘게 배우로 살고 있어요. 사람이 어떻게 늘 자신이 하고 싶은 역할만 하면서 살 수 있겠어요. 그저 연기에 대한 열정으로 그 모든 걸 승화시키는 거죠.” 사실, 2004년 방영된 MBC-TV 드라마 ‘영웅시대’의 차지철 역만 해도 그렇다. 당시 한 가정의 가장, 두 아이의 아버지였던 그는 ‘악역’ 차지철을 하기엔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안 하겠다’는 말을 하려고 갔는데, PD가 ‘정말 악역처럼 보인다’고 하는 바람에 하게 된 거라고. “세상의 어떤 일이든 힘든 건 마찬가지예요. ‘나 힘들어’라고 이야기하는 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요. 힘든 가운데서도 배우로서 성취감을 찾고, 자신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면 되는 거예요.”고맙고 또 고마운 아내, 보고픈 아들딸 정흥채는 현재 가족과 떨어져 산다. 무용가이자 청운대 방송연기학과 교수인 아내 배혜령씨와 아이들은 청운대가 있는 충남 홍성에 있고, 그는 서울 여의도의 한 오피스텔에서 지낸다. 결혼을 좀 늦게 했기에 그의 아이들은 이제 초등학생이다. 아들 찬학이는 열 살, 딸 예진이는 아홉 살이다. “원래는 서울에서 같이 살았어요. 그런데 아내가 강의 후에 학생들 연습하는 걸 봐주고 서울에 오면 너무 늦는 거예요. 아이들이 엄마를 많이 그리워하고 힘들어해서 이사를 갔죠. 그렇게 지낸 지 4, 5년 정도 됐어요. 정말 힘들고 외롭다고 느낄 때면 언제라도, 가족들을 보러 집으로 내려갑니다.” 아내와 두 아이들 이야기를 하는 정흥채의 얼굴에는 미소가 끊이질 않는다. 휴대폰 사진과 아이들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를 보여주던 그는 “어떤 때는 아이들이 보낸 문자를 읽다가 눈물을 글썽거릴 때도 있다”고 털어놓는다. 영락없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정흥채는 무뚝뚝한 편이다. 성격을 고치려고도 해봤지만 그게 마음먹은 만큼 쉽지는 않았다. 편하게 이야기하는 데 서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무척 엄하셔서 아버지와 편하게 이야기 나눈 적이 별로 없어요. 그 영향을 받아서인지 아버지와 대화를 하는 게 좀 서툴러요. 저만 그런 줄 알았는데, 제 또래 되는 사람들은 거의 비슷하더라고요. 제가 아들과 좀 더 편안하게 대화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우리 아들 세대는 나아질 것 같아요. 마음은 정말 따뜻한데 그걸 밖으로 표현하지 못하니 안타깝죠. 감정을 표현하는 일을 하는 저도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어떻겠어요.” ‘무뚝뚝한’ 정흥채를 위해 지면으로나마 아내와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진지한 말을 풀어놓았다. “아내에게는 항상 고맙고, 또 고맙고,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못난 나를 믿고 살아줘서 정말 고맙다고요. 찬학이는 요즘 자기 일을 스스로 알아서 잘하고 있어요. 앞으로는 지금보다 조금 더 많이 엄마, 아빠에게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고 상의를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예진이는 오빠하고 싸우는 걸 줄였으면 해요. 새해에는 찬학이와 예진이가 좀 더 서로를 감싸주는 남매가 되길 바라요.” 아이들에게는 친구 같은 아빠 정흥채는 살갑지는 않지만 자상한 아빠다. 시간 나는 대로 집에 내려가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는 것. 아들하고는 오목, 바둑을 두거나 검도를 한다. 한자 시합도 한다. 그는 “요즘 아이들에게는 천자문이 놀이기구가 돼버려서 가끔은 아들에게 실력이 달릴 때도 있다”며 웃는다. 그의 딸에게 정흥채는 ‘놀이기구’나 다름없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아빠, 팔 들어!”라고 한 뒤 매달리는 게 딸의 특기다. “아이들이 연년생이다 보니, 둘 다 아빠의 정을 충분히 못 받은 것 같아요. 큰아이는 부모의 사랑을 더 받아야 하는데, 동생이 태어나서 그걸 빼앗긴 거잖아요. 작은아이 역시 제가 같이 있어주는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부족함을 느낄 테고요. 아이들에게 미안할 뿐이에요.” 정흥채는 아이를 키우다 보니 자연스레 교육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게다가 자신이 일하는 분야가 문화예술 쪽이다 보니, 예술 교육에는 더 큰 관심이 간다고. ‘예술 교육’에 관련된 사업도 준비하고 있다. “예술 교육이라는 게 거창한 건 아니에요. 연극을 한번 예로 들어볼게요. 요즘 아이들은 공부하느라 남을 생각할 시간이 없어요. 늘 담을 쌓고 그 안에서만 살죠. 하지만 연극을 하게 되면 아이들은 배역을 통해 상대를 이해하게 돼요. 자기 표현력도 늘고, 상대방을 배려하게 되고, 팀워크가 무엇인지도 알게 되는 거죠. 국가적으로 예술 교육을 위한 뿌리가 마련되면 좋겠어요.”사람 냄새 나는 연기자 되고 싶어 20년이라는 세월 동안 연기를 해왔으니 웬만한 배역은 전부 해봤을 터였다. 그래도 특별히 해보고 싶은 배역 한두 개쯤은 있을 듯해 질문을 했다. “보통 어떤 작품에 들어갈 때 해보고 싶은 배역은 많이 있어요. 그 가운데서 승부수를 던지죠. 어떤 배역이든 간에 제 모든 걸 바쳐서 할 수 있을지를 판단해보는 겁니다. 궁극적으로는 사람 냄새 나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좋아하는 액션도 하고 싶고요. 한때는 제일 쉬운 게 멜로라고 생각했는데, 이 넓은 등 때문에 멜로가 안 되네요(웃음). 살 좀 빼서 멜로 연기도 하고 싶어요.” 정흥채의 가장 큰 꿈은 ‘좋은 가정을 이루는 것’이다. 그는 가족 모두가 자기 일을 하면서 편안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란다. 정흥채 역시, 그의 평범한 꿈이 그 무엇보다 이루기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미리 포기할 마음은 없다. 시도하지 않으면 얻는 것도 없다는 진리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 글 / 김민정 기자 ■사진 / 원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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