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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총 47 건 검색)

국민의힘 박수영, 윤 대통령 “순교자” 비유…“제2의 6·25” 발언도
국민의힘 박수영, 윤 대통령 “순교자” 비유…“제2의 6·25” 발언도
2025. 02. 03 11:48정치
.... 박 의원이 현 상황을 “제2의 6·25”로 규정하고,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구속기소된 윤 대통령을 순교자에 비유한 것을 두고 부적절하다는 비판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당에서는 “개별 의원 차원”의...
윤석열 탄핵 정국
[손호철 칼럼] 철인왕 윤석열의 위험한 순교자주의
[손호철 칼럼] 철인왕 윤석열의 위험한 순교자주의
2023. 03. 28 03:00오피니언
..., 이번 회담이 걱정스러운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첫째, 그가 굴욕적 양보를 여론에 반하면서 순교자 자세로 조국과 민족을 위해 내린 ‘구국의 결단’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윤...
한·일 정상회담한·일관계윤석열 대통령강제징용 문제
황운하 “처럼회, 정치·검찰개혁 순교자될 각오 돼있는 분들”
황운하 “처럼회, 정치·검찰개혁 순교자될 각오 돼있는 분들”
2022. 06. 14 10:13정치
... 의원 모임인 ‘처럼회’에 대해 “시대적 과제라 볼 수 있는 정치개혁이나 검찰개혁 과정에 기꺼이 순교자가 될 수 있다는 헌신의 각오가 돼있는 분들”이라고 말했다. 황 의원은 이날 CBS 라디오 ...
황운하처럼회민주당
한국 최초 천주교 순교자 유골 발견지 바우배기 학술발굴조사 시작
한국 최초 천주교 순교자 유골 발견지 바우배기 학술발굴조사 시작
2022. 03. 15 10:29문화
... 윤지충 등의 유골 발견지역에 대한 추가 확장조사다. 바우배기 일원에 대한 추가 매장자 확인과 순교자들의 최초 매장지 추적을 위한 토양 표본 확보가 목적”이라고 했다. 천주교 전주교구는 지난해...
한국최초순교자윤지충바우배기

스포츠경향(총 4 건 검색)

작전명 ‘순교자 솔레이마니’…이란, 미국에 보복공격 개시
작전명 ‘순교자 솔레이마니’…이란, 미국에 보복공격 개시
2020. 01. 08 10:30 생활
7일(현지시간) 오전 이란 테헤란 시내에 걸린 가셈 솔레이마니 이란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의 추모 포스터 앞으로 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솔레이마니 사령관은 3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미군의 폭격에 숨졌다. 연합뉴스이란이 8일(현지시간) 오전 미군이 주둔한 이라크 아인 아사드 공군기지에 지대지 미사일 수십발을 발사했다고 AP통신이 이란 국영 TV를 인용해 보도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이란 국영 TV는 이날 오전 일찍 이뤄진 이날 공격이 가셈 솔레이마니 이란 쿠드스군(이란혁명수비대 정예군) 사령관을 숨지게 한 미국을 향한 보복 작전이라고 설명했다고 AP가 전했다. AP에 따르면 이란 정규군 혁명수비대 산하 미사일 부대가 이번 공격을 개시했으며, 이번 작전의 이름은 솔레이마니 사령관의 이름을 따 “순교자 솔레이마니”로 명명했다. 아인 아사드 공군기지는 이라크 서부 안바르주(州)에 자리 잡고 있다. 미군은 2003년 이라크 침공으로 사담 후세인 정권을 축출했을 때부터 이곳에 주둔해왔으며, 최근에는 이곳을 기반으로 이슬람국가(IS) 격퇴전을 펼쳐왔다. 로이터통신은 익명을 요구한 미국 당국자를 인용해 이날 오전 이라크 주둔 미군 기지에 로켓 공격이 있었으며, 즉각적인 피해나 사상자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란은 지난 3일 이라크 바그다드 공항에서 미군의 무인기 폭격으로 이란군 실세인 솔레이마니 사령관이 목숨을 잃자 미국에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며 보복을 예고해왔다.
“잔 다르크·순교자…” 김평우 변호사, 박 전대통령 치켜세우기 왜?
“잔 다르크·순교자…” 김평우 변호사, 박 전대통령 치켜세우기 왜?
2017. 03. 17 18:52 생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헌법재판소 탄핵심판 대리인이었던 김평우(72·사법시험 8회) 변호사가 박 전 대통령을 ‘순교자’, ‘잔 다르크’로 치켜세웠다고 연합뉴스가 보도했다. 김평우 변호사는 15일 한국경제신문 정규재 주필이 운영하는 <정규재TV>에 나와 전날 박 전 대통령을 자택에서 만나 탄핵심판 결과에 대해 사죄했다며 이같이 밝혔다. 그는 “제가 처음에 미국에서 와서 2월 중에 뵀을 때보다 훨씬 더 건강하시고, 아주 얼굴이 웃는 얼굴이시고, 오히려 저를 위로하십디다”라며 “너무 감명을 받았고 어려움을 많이 이겨내신 분이구나(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 박근혜 전 대통령 자택으로 차량들이 수시로 드나들고있다. 이준헌 기자 또 “순교자 박근혜, 이런 타이틀을 (글에서) 쓴 적이 있는데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박 전 대통령의 모습에서 과거 봤던 ‘잔 다르크’란 프랑스 영화가 연상되기까지 했다고 전했다. 김 변호사는 14일 오전 8시께 박 전 대통령 자택을 찾았지만, 사전 방문 약속이 잡혀 있지 않아 10분 만에 발길을 돌리는 모습이 취재진에 포착됐다. 그러나 그는 “연락에 착오가 있었다”며 “만나 뵙지 못하고 돌아갔더니 바로 뉴스가 전달됐는지 연락이 와 보내준 차를 타고 (자택에) 들어갔기에 기자들은 뒷이야기를 모르는 거 같다. 차가 선탠이 돼 있었다”고 주장했다.
뮤지컬 ‘서울 할망 정난주’, 순교자 124위 시복식 기념...신앙의 힘으로 37년간 노비 생활을 견딘 정난주 마리아 일대기
뮤지컬 ‘서울 할망 정난주’, 순교자 124위 시복식 기념...신앙의 힘으로 37년간 노비 생활을 견딘 정난주 마리아 일대기
2014. 09. 12 23:28 생활
한국 순교자 124위 시복식을 기념하는 뮤지컬 <서울 할망 정난주>(연출 홍인표, 작곡 오래미)가 막을 올린다. <서울 할망 정난주>는 남편 황사영의 순교, 아들은 추자도 노비로, 자신은 제주도 노비로 전락한 정난주 마리아의 일대기를 그린 뮤지컬이다. 주인공 정난주 외에도 1801년 신유박해의 사회적 배경과 당시 사람들의 처절했던 삶을 그렸다 또한, 한국에 입국한 최초의 신부로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전교에 힘을 쏟다 순교한 주문모 야고보 신부, 주문모 신부의 입국을 도운 죄로 순교한 윤유일 바오로 등 한국 순교자 124위 시복식에서 복자로 추대된 인물들의 스토리가 중심을 이룬다. 풍부한 교양과 학식으로 ‘서울 할망’으로 불리며 존경받았던 정난주가 자신의 가혹한 현실을 ‘어지신 천주님의 어지신 뜻’으로 받아들이며 숨을 거두기까지 이야기가 눈을 뗄 수 없는 가쁜 호흡으로 이어진다. 9월 순교자 성월을 맞아 피 흘려 순교하지 않았지만, 순교자로 공경 받을 수 있는 신앙의 삶을 살았던 백색 순교자 정난주 마리아의 인생을 만날 수 있다. <서울 할망 정난주>는 2013년 상연된 뮤지컬 <가시세비낭>의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철저한 고증과 전문가의 감수를 거친 제주방언 대사가 극의 몰입도를 높인다. 19일부터 29일까지 서울 가톨릭청년회관 CY씨어터에서 열린다.
[깨소금] ‘안현배의 그림으로 보는 인류학’ ‘젊은 순교자’…희생된 생명을 기억할 때
[깨소금] ‘안현배의 그림으로 보는 인류학’ ‘젊은 순교자’…희생된 생명을 기억할 때
2014. 09. 01 16:40 생활
[안현배의 그림으로 보는 인류학]‘젊은 순교자’…희생된 생명을 기억할 때 La Jeune Martyre(젊은 순교자) 171x148㎝ 1855 Paul Delaroche(폴 들라로슈) 1797~1856루브르 박물관이 자랑하는 컬렉션 중에 특히 중요한 것은 모나리자 못지않게 프랑스 고전·낭만파 시절의 대형 회화 작품들입니다. 다비드, 앵그르, 들르크루아, 제리코 등이 그 방을 차지하고 있죠. 그런데 그 방의 한쪽 가장 구석진 자리에 있으면서도 사람들의 눈을 끄는 그림이 하나 있습니다. ‘젊은 순교자’라는 이름의 이 그림은 그림의 소재는 예전 이야기지만, 그림의 표현은 왠지 시대를 앞서 있는 듯 보입니다. “이 그림은 신고전주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자주 유럽인들의 역사 속에 있는 테마를 끄집어 내는 화가 폴 들라로슈는 주인공의 죽음에서 젊음의 희생이라는 알레고리를 엄격하고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가끔 잠이 오지 않습니다. 모니터 위에 이 그림을 펴 놓고 한참 들여다보고 앉아 있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림이 그림으로 보이지 않고, 다른 것들을 생각나게 합니다. 가족들이 다 사라지고 혼자만 남은 여섯 살 여자 아이의 눈이 기억나고, 머리로 벽을 받으며 우는 아버지가 기억나고, 도움도 안 되는 사람을 붙들고 살려 달라고 비는 어머니를 보노라니 머리가 멍해지던 일이 기억납니다. 자기들도 할 말이 없는 줄은 아는지 똑같은 뉴스는 반복되고, 반복되는 것을 아는데도 떠나지 못합니다. 우리 모두가 결론도 없이, 떠나 보내지 못한 듯이 떠나 보낸 이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위로이건, 격려이건, 슬픔의 나눔이건, 그리고 새출발을 향한 용기건, 뭐든 어이없는 사고와 어떻게 수습할지 엄두가 안 나는 절망 때문에, 뭔가 결정이 없으니 치유도 따르지 않습니다. “들라로슈는 여기서, 이 어린 순교자의 죽음이 주는 상실감을 표현하고 있다. 로마인들에게 잡혀 강물에 던져진 이 여성의 머리 위로 빛의 후광을 그려넣어 그녀의 죽음을 위로하는 듯하다(이 그림은 ‘젊은 크리스트교도 순교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그림의 역사적 배경이 되는 종교 문제애 대한 살해와 희생·박해라고 부르는 그 일은 크리스트교의 박해 당시 로마제국에서 자주 벌어지던 일이었습니다. 손이 묶인 채 강물에 던져진 아가씨는 크리스트교 신자였던 것이죠. 하지만 이 죽음의 모습은 종교를 넘어서 말 그대로 젊음과 생명의 희생을 떠올리게 합니다. “죽은 여성의 위로 어둠 속에는 사람의 형상이 보인다. 이곳을 쳐다보는 남자는 누구일까? 그가 이 젊은 아가씨를 강물에 던진 사람이 아닌 게 분명한 것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그에게 기댄 여자의 그림자가 하나 더 나타나고, 그 형상에서 무너지는 듯한 슬픔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가씨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내려다보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루브르는 이 어둠 속에 두 사람을 부모가 아닌가 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루브르에서 ‘무슨 마음으로 물에 빠져 죽은 여자를 이렇게 환상적으로 아름답게 그렸을까’라고 생각하며 한참 들여다보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그런 슬픔을 기억해 주려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짐작해 봅니다. 다시 그림을 봅니다. 미술사학자 안현배는 누구? 서양역사를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가 예술사로 전공을 돌린 안현배씨는 파리 1대학에서 예술사학 석사 과정을 밟으며, 예술품 자체보다는 그것들을 태어나게 만든 이야기와 그들을 만든 작가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됐습니다. 그리고 지금, 나라와 언어의 다양성과 역사의 복잡함 때문에 외면해 오던 그 이야기를 일반 대중에게 쉽고 재미있게 전하고 있습니다.
깨소금안현배의 그림으로 보는 인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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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년 역사르포](15) 전태일 분신 평화시장… 한국 노동운동의 순교자 ‘노동의 가치’를 일깨우다
[광복 70년 역사르포](15) 전태일 분신 평화시장… 한국 노동운동의 순교자 ‘노동의 가치’를 일깨우다(2015. 06. 02 13:55)
2015. 06. 02 13:55 사회
역사에서 기원전과 기원후를 구분을 하는 A.D.와 B.C.는 ‘예수 탄생 이전과 이후’를 의미한다. 예수 탄생을 기점으로 세계 역사가 크게 달라졌다는 의미이다. 요즘 안전과 관련해 새로운 패러다임의 표현으로 ‘세월호 이전과 이후’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도 있다. 그만큼 시대를 구분하는 데 있어서 사건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 노동운동사에서 시대구분을 할 만한 사건을 꼽으라면 단연 ‘전태일 분신사건 이전과 이후’라고 할 수 있다. 1970년 평화시장 ‘삼동친목회’ 회원들은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노동청과 청와대 등에 제출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삼동회 회원들은 다시 평화시장 사업주 대표들과 노동시간, 노동환경 개선과 노동조합 결성을 요청했지만 거부됐다. 삼동회 회원들은 11월 13일 있으나 마나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이날 평화시장 주변에는 사업주들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많은 노동자들이 모여들었다. 경찰은 시위대가 외부로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평화시장을 에워쌌다. 시위대는 몇 번 구호를 외쳤지만 이내 플래카드를 경찰에 빼앗겼다. 결국 시위는 흐지부지 끝나는가 싶었다. 점심식사를 마친 오후 1시30분 젊은 재단사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왔다. 휘발유를 뿌린 그의 몸에 라이터가 켜지더니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전태일은 불타는 몸으로 몇 걸음 뛰어나가다 그 자리에 쓰러졌다. 이때 누군가가 근로기준법 책자를 불타는 전태일의 몸을 향해 던졌다. 근로기준법 화형식은 그렇게 이뤄졌다. 전태일은 그날 오후 10시 병원 응급실에서 사망했다. 2005년 국민성금으로 세워진 전태일 동상은 일어서려는 모습으로 동쪽을 응시하고 있다. 전태일과 함께 불타버린 근로기준법 전태일 분신사건은 내외에 큰 충격을 줬다. 서울대 법대생은 전태일 유해를 인수해 학생장을 거행하겠다고 나섰고, 상대 학생 400여명은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전국 대학가에서는 전태일 추도식이 열렸고,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서울대는 무기한 휴업령을 내렸다. 이 전태일 분신사건으로 11월 27일 청계피복노동조합이 탄생했고, 이후 1970년대에만 2500개의 노동조합이 결성됐다. 전태일 분신은 한국 노동운동사의 새로운 전기를 연 계기가 됐다. 전태일 사건은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지 10년째, 무리한 경제개발 과정에서 축적된 여러 모순들이 폭발한 것이었다. 정부 주도 경제개발 과정에서 소외되고 희생된 노동자들을 인식하게 되는 계기를 만든 것이다. “전태일 분신사건은 전태일 개인의 사건이기에 앞서, 당시 한국 사회의 모순이 응집되어 폭발한 하나의 민중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노동자와 농민, 도시빈민들의 생존권을 위한 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안병무-시대와 민중의 증언자) 전태일 장례식장에서 영정을 들고 오열하는 모친 이소선 여사. 이 사진은 우리나라 노동운동사의 상징처럼 인식되고 있다. 전태일은 1948년 대구에서 봉제업자 전상수와 이소선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사업에 망하자 가족은 일거리를 찾아 서울로 올라왔다. 전태일은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종로 파고다공원 인근에서 구두닦이, 신문팔이, 동대문시장에서 리어카 뒤밀이를 하며 생활했다. 당시 짐을 잔뜩 실은 리어카를 서울역에서 동대문시장까지 뒤에서 밀어주면 30원을 받았다. 전태일은 1964년 봉제공장 미싱 보조로 평화시장에 발을 들인다. 평화시장 봉제공장은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혹사당했지만 월급은 형편 없었다. 당시 이들의 근로조건은 다음과 같이 경향신문에 폭로됐다.(1970년 10월 7일) “천장의 높이가 겨우 1.6m 정도밖에 안 돼 허리를 펼 수도 없을 정도… 밝은 조명을 해 이들 대부분은 밝은 햇빛 아래서는 눈을 똑바로 뜰 수 없고… 이런 환경에서 하루 13~16시간의 고된 근무를 하고 있으며… 휴일에도 작업장에 나와 일을 하고 여성들이 받을 수 있는 생리휴가 등 특별휴가는 생각조차 못할 형편… 옷감에서 나온 먼지가 가득한 방안에서 하루 종일 일해 폐결핵, 신경성 위장병까지 앓고… 노동청에서는 건강진단을 나왔으나 공장 측은 1개 공장종업원 2~3명만 진단받게 한 후모두가 받은 것처럼 했다.” 5월 29일 전태일 분신 45주년 기념 심포지엄을 알리는 포스터. 청계천 버들다리 가운데 기념동상 공장 친목회 모임은 노조 결성을 위한 결의체로 바뀌면서 전태일은 문제의 근본을 따져봤다. 그 결과 근로기준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는 노동청과 청와대 등에 근로기준법을 지켜달라고 수없이 진정하고 요청했지만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육신을 태우기로 결심했다. 전태일이 분신하기 직전 친구에게 보낸 편지가 공개됐는데 사실상 유서였다. 이 편지는 “사랑하는 친우(親友)여, 받아 읽어주게”라고 시작해 “뇌성 번개가 이 작은 육신을 태우고 꺾어버린다고 해도…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을 걸세…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쉬러 간다네… 내 생애 다 못 굴린 덩이를,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라고 적었다. 전태일 분신을 기리는 사업은 꾸준히 이어졌다. 1970년대에는 기독교 청년들이 중심이 돼 전태일 추도식이 열렸다. 1980년대 전태일은 ‘노동운동가’로 재평가되고 1984년 전태일기념사업회가 만들어졌다. 1985년에는 전태일기념관, 전태일재단이 만들어져 ‘전태일문학상’과 ‘전태일노동상’을 제정하고, 그가 분신한 매년 11월 전국 노동자대회가 열리고 있다. 2000년 전태일 분신 30주기를 맞아 평화시장 앞 보행로에 표석이 설치됐다. 2002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전태일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했다. 분신 현장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선정 2005년 청계천 복원공사가 끝난 후 청계천 버들다리 가운데에 전태일 기념동상을 세웠다. 국민 모금으로만 4억원가량이 모였다. 동상 앞 보도에는 성금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과 글귀를 새긴 동판 4000여장이 설치됐다. 동판은 노무현·김대중 전 대통령의 것도 있다. 노 대통령은 ‘사람 사는 세상’, 김 대통령은 ‘행동하는 양심 전태일! 영원한 우리들의 영웅 전태일’이라고 썼다. 상반신 동상은 동쪽을 보며 땅을 짚고 하늘을 향하는 모습이다.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은 “죽은 지 100년이 지나지 않은 인물의 기념상을 세운 사례가 없다”며 동상 건립에 반대했다. 하지만 노동계와 시민단체는 이를 밀어붙였다. 전태일의 여동생 전순옥은 2014년 3월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됐다. 그렇게 죽은 지 35년 만에 전태일은 재평가됐고, 또 새롭게 태어났다. 많은 민주화운동 관련자, 그 어떤 민주화 열사보다 단연 앞선 것이다. 그만큼 전태일의 분신이 이 사회에 미친 영향이 지대했기 때문이리라. 전태일 분신 45년이 지난 평화시장 그 자리는 여전히 번화하다. 서울 중구 청계천로 274번지 평화시장 A·B동 사이가 바로 분신의 현장이다. 평화시장은 도매시장으로 주로 야간에 성시를 이루지만, 주변은 낮에도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인다. 전태일이 리어카를 밀며 30원을 벌었던 이곳은 지금도 물건을 운반하는 노무자들로 붐빈다. 단지 운반수단이 리어카에서 오토바이로 바뀌었을 뿐이다. 전태일이 분신한 평화시장 A동과 B동 사이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어린 여공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미싱기를 돌리던 봉제공장은 모두 사라졌다. 봉제공장은 동남아로 떠나고 일부는 종로구 창신동 등으로 옮겨갔다. 남평화시장 김용민 관리사무소장은 “현재 이곳 남평화시장에만 도매상 700여개가 있고 과거 봉제공장은 한 곳도 없다”고 설명했다. 바로 옆에 있는 동평화시장 도매상가는 이곳보다 규모가 크다고 한다. 요즘 이 일대는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패션과 디자인의 거리로 변모했다. 특히 동대문 일대는 한국을 찾는 유커(遊客·중국인 관광객)로 넘쳐난다. 하지만 도매시장으로 밤에 주로 영업하는 평화시장과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동대문시장은 매출에서 온도 차이가 크다. 상인들은 평화시장 경기가 예전 같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김용민 관리소장은 “중국인 관광객 대부분은 동대문시장의 밀레오레나 두타 등에서 쇼핑하지 이곳 평화시장을 이용하지 않는다”면서 “국내 경기가 워낙 불황이어서 폐업까지는 아니지만 이점(점포를 옮기는 것)과 공점포(빈 점포)가 발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상인들은 내수침체와 온라인 쇼핑몰로 인해 예전처럼 평화시장이 활기차지 않다고 한다. 서울시는 지난해 연말 전태일 분신 현장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선정했다. 미래유산이란 100년 후 미래세대에게 전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유·무형의 ‘보물’을 말한다. 여기에는 중요한 인물이나 사건을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는 물건이나 장소, 음악도 포함된다. 서울시는 이곳을 미래유산으로 선정한 이유로 “산업화 과정에서 희생당하던 노동자의 삶이 사회문제로 크게 부각되는 계기를 마련하는 등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신호탄이 된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한 장소이므로 보존가치가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전태일 분신 이후에도 노동자들의 좌절은 이어지고 있다. 노동운동의 양적 발전은 이뤄졌지만 질적 변화는 없다는 주장도 많다. 마침 5월 29일 참연구소(한국패션봉제아카데미 부설 연구소)가 주최하고 전태일 재단이 후원하는 ‘전태일 열사 45주년 기념 특별 심포지엄’이 열렸다. 주제는 ‘상징의 재해석; 2015년 전태일’이다. 이날 노동분야의 주제발표를 맡은 김승호 사이버노동대학 대표는 “전태일을 이해하는 흐름에는 ‘최소한의 인간적 요구’라는 자유주의자들과 1980년대에 착취와 억압으로부터 변혁을 요구한 ‘노동해방의 요구’가 있다”면서 “하지만 진정한 전태일의 생각과 주장은 이것을 뛰어넘는 ‘인간해방’이다”라고 설명했다. 전태일의 분신 아니 노동의 가치는 계속 재해석, 진화되는 것이다.
광복 70년 역사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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