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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총 725 건 검색)

백제의 향, 신라 향로, 고려 향완…유물로 만나는 1500년 향(香)문화사
2024. 12. 11 11:14문화
... 인각사 출토, 9세기, 불교중앙박물관 소장, 아래 왼쪽), ‘청동 탑모양 향합’(통일신라 9~10세기, 호림박물관 소장). 호림박물관 제공 특별전에는 삼국시대~근현대에 이르기까지 향과 관련된 각종...
호림박물관특별전종묘
영상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고구려 태자가 신라왕에게 ‘무릎 꿇어라’ 했다”…제2광개토대왕비 ‘8자’의 비밀
2024. 11. 19 05:00문화
... 구절이 나온다. ■‘무릎 꿇어라!’ 고려 태왕(광개토대왕·391~412)은 조왕(고국원왕·331~371) 때부터 신라 매금(왕)과 영원히 형제와 같이 지내기를 원했다. 그에 따라 광개토대왕은 신라...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부산 오시리아관광단지에 5성급 호텔 ‘신라 모노그램’
2024. 11. 14 09:54경제
... 박형준 부산시장을 비롯해 이정호 호텔신라 부사장, 송창석 이스트베이 대표가 참석한다. 신라모노그램은 최상위급 호텔인 ‘더신라’의 특성과 현지의 특성을 담아낸 5성급 호텔이다. 국내에는...
호텔신라이스트베이오시리아신라호텔신라스테이아닌티코브빌라쥬드아난티반얀트리신라모노그램부산
경주 금령총에 묻힌 ‘신라 왕자’는 누구일까···
2024. 10. 24 17:42문화
... 아직 어떤 인물인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이 학예사는 금관총의 주인공이라 할 이사지왕이 신라 제20대 자비왕(재위 458~479년)의 아들이자 제21대 소지왕(재위 479~500년)의 동생으로 추정했다....
금령총주인공이사지왕금관국립경주박물관

스포츠경향(총 211 건 검색)

‘여행 마니아’ 배우 김재화도 매료시킨 신라의 땅, 대구광역시 군위군 (아주 史적인 여행)
2024. 09. 22 05:24 연예
KBS 22일 오후 9시 40분 KBS1 ‘아주 史적인 여행’이 대구광역시 군위군으로 열두 번째 여행을 떠난다. 삼국유사의 고장이자 신라시대 문화 유적이 가득한, 대구광역시 군위군. 사방이 초록 초록한 평화로운 시골 마을 같지만, 그 속에는 천년이 넘는 신비한 역사가 가득하다. 단군신화부터 김유신 장군의 삼국통일 비하인드 등 영웅들의 설화와 제2의 석굴암까지. 군위의 다양한 史적인 이야기를 찾아, 연기파 배우 김재화와 함께 떠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간이역으로 손꼽히는 화본역에서 군위 여행을 시작한다. 군위군 유일의 기차역인 화본역은 일제강점기인 1938년에 세워진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시간이 멈춘 듯한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군위군 대표 레트로 여행지다. 오는 12월이면 폐역되며 87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올해가 지나면 더 이상 울리지 않을 화본역의 기적소리는 많은 생각에 빠지게 만든다. 역사의 끝자락에 서 있는 화본역에서 군위군 화본마을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세월의 흔적과 우리에게는 낯선 증기기관차의 역사를 짚어본다. KBS 군위군은 신라시대의 신비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유적이 여럿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군위군 팔공산 기슭 절벽에 자리한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이다. 대구광역시 유일의 국보인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은 경주 석굴암보다 무려 100여 년 앞서 만들어진 것으로, 그 존재를 처음 알게 된 출연진들은 모두 석굴의 장엄함에 연신 감탄하며 눈을 떼지 못했다. 신라의 명장 김유신 장군이 삼국통일을 이루는 과정에서 장군리 마을의 장군봉에 오른 이유를 알아보고, 고려말 국사였던 일연스님이 군위 인각사에서 쓴 삼국유사 속 설화를 직접 체험해 본다. 군위 여행에서는 개성 있는 명품 연기로 사랑받는 배우 김재화가 함께한다. 그녀는 대학 시절 29개국을 일주할 정도로 유명한 여행 마니아. KBS 영화 ‘그녀에게’ 홍보와 작품 활동으로 바쁘지만 ‘아주 사적인 여행’ 출연으로 오랜만에 떠나는 여행에 설??다고. 이번 사적인 군위 여행을 통해 역사 여행의 매력을 알게 됐다며 아이들과 다시 군위를 방문하겠다는데. 군위의 어떤 매력이 그녀를 사로잡았을까?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군위군의 숨은 이야기. 명품 배우 김재화가 사랑에 빠져버린 아주 사적인 군위 여행은 오는 9월 22일 밤 9시 40분 ‘아주 史적인 여행’에서 공개된다. KBS
신라면세점, 글로벌 와인 명가와 손잡고 VIP 초청 행사 성료
2024. 09. 20 13:51 생활
호텔신라가 운영하는 신라면세점이 글로벌 와인 브랜드와 손잡고 VIP 고객 초청 행사를 진행했다. 신라면세점은 지난 12일 서울시 중구 장충동 소재 서울점에서 내국인 VIP 고객 약 20명을 대상으로 이탈리아의 친환경 와인 ‘보테가(Bottega)’, 영국 왕실 인증을 받은 프리미엄 포트 와인 ‘테일러 포트(Taylor’s Port)’의 VIP 초청 행사를 성황리에 마쳤다고 밝혔다. 이날 행사는 소믈리에가 보테가와 테일러 포트 브랜드를 소개한 후, 참여객은 보테가와 테일러 포트의 인기 와인 6종에 대한 상품 설명을 듣는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구성됐다. ‘보테가’는 유기농 포도밭에서 기계 사용을 최소화해 수확한 포도로 생산하는 친환경 와인 브랜드이다. 이탈리아 북부 지역의 최상급 포도를 사용하여 생산되는 와인은 보테가의 뛰어난 기술과 엄격한 품질 관리를 통해 세계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테일러 포트’는 포트 와인을 생산하는 와이너리 중 가장 오래된 곳 중 하나로, 우수한 품질의 와인 산지로 유명한 포르투갈 도루(Douro) 지역에서 재배한 포도를 사용해 전통 방식으로 숙성시키고 브랜디를 첨가해 만든 와인 브랜드이다. 행사에 참여한 고객 전원에게는 참여 감사의 의미로 △보테가 골드 프로세코 1병, △당일 이용 가능한 테일러 포트 30% 할인권 등 다양한 혜택을 추가로 제공했다. 한편, ‘혼술 문화’라는 새로운 주류 문화의 등장으로 성장해온 글로벌 주류 시장이 24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전망되는 가운데, 신라면세점은 다양한 고객 경험을 제공하며 주류 쇼핑 핫플레이스로 떠오르고 있다. 현재 인천공항 제2여객터미널에서는 프리미엄 스카치 블렌디드 위스키 ’듀어스’의 팝업 스토어를 운영하고 있으며, ‘산토리’ 위스키의 한정판 컬렉션을 국내 단독으로 판매하고 있다. 올해에는 위스키 명가 ‘글렌파클라스’와 함께 마스터 클래스, 업계 최초로 ‘글렌알라키’ 시음회 등을 개최해 고객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신라면세점, 인천공항서 위스키 ‘듀어스’ 팝업 11월 6일까지
2024. 09. 14 16:12 생활
호텔신라가 운영하는 신라면세점이 인천공항 제2여객터미널점에서 프리미엄 스카치 블렌디드 위스키 ‘듀어스(Dewar’s)‘의 신제품 론칭 기념 팝업 스토어를 운영한다. 신라면세점은 ‘듀어스’의 신제품 출시를 기념해, 추석과 10월 황금연휴에 여행을 떠나는 출국객을 대상으로 위스키를 체험할 수 있는 ‘듀어스 스톤 토스티드 론칭 기념 팝업 행사’를 11월 6일까지 진행한다고 밝혔다. 신라면세점 듀어스 팝업에서는 듀어스의 신제품 ‘듀어스 더블더블 스톤 토스티드 21년(Dewar’s DOUBLE DOUBLE 21 Year Old STONE TOASTED)’을 만나볼 수 있다. ‘스톤 토스트(Stone Toast)’는 위스키에 풍미를 극대화하기 위해 캐스크에 직접 불이 닿지 않은 형태로 가열하여 간접적으로 토스팅하는 방식이다. 듀어스는 스톤 토스트 방식으로 위스키에 더욱 강렬하고 복합적인 맛을 입히면서 부드러운 맛을 구현해냈다. ‘듀어스 더블더블 21년 스톤 토스티드’ 위스키는 아메리칸 오크, 프렌치 오크에 각각 피니쉬과정을 진행한다. 팝업 매장에서는 ‘듀어스 스톤 토스티드 디스커버리팩’으로 두가지 상품을 한 번에 만나볼 수 있다 신라면세점 듀어스 팝업에서는 △듀어스 인기 위스키 시음 및 △구매 금액에 따른 풍성한 사은행사도 진행한다.
‘콘텐츠 최상위는 아트다’ 신라호텔, 문화 예술 공간으로 주목 받은 이유 무엇일까
2024. 09. 09 15:57 생활
힐링산업을 이끌고 있는 호텔업계가 ‘아트’와 ‘쉼’을 연결해 콘텐츠와 연계된 차별화를 더해 나가고 있다. 그 만큼 호텔레저산업 업계가 협업을 이어가며 가치밸류에이션 지향 힐링 수요를 이끌고 있는 것이다. 이런 흐름 속 서울신라호텔은 최근 ‘프리즈 서울 2024 시즌 기간 문화 예술 공간으로 거듭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 ‘프리즈 서울 2024’ 기간, 파트너 호텔로 로비, 아케이드, 야외 수영장 등 호텔 전역에서 이배 작가, 박선기 작가,박서보 작가 등의 다양한 전시를 개최해 호텔 전체가 예술품으로 조명을 받은 것이다. 동급 호텔 중 가장 돋보이는 아트를 지향한 행보였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는 서울신라호텔 로비에서부터 시작되어끝없이 이어지는 은하수를 형상화한 박선기 작가의 ‘조합체’ 작품과 어우러지는 블랙 버전의 콜라보레이션 작품을 로비 군데 군데에 추가 설치했었다. 블랙을 컨셉으로 새단장한 로비의 작품들은 지난해 새로 전시한 이배 작가의 ‘붓질(Brushstroke)’ 시리즈와 조화를 이뤄, 로비 공간을 연결된 하나의 작품처럼 보이도록 깊이와 생동감을 부여한다. 서울신라호텔 로비를 채운 박선기 작가의 전체 작품은 기존 작품과 연결, 중첩되어 서로 어우러지며, 전 세계 어느 호텔에서도 찾아 보기 힘든 대규모 설치 작품이었다. 서울신라호텔 지하 1층 아케이드에서는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을 주도했던 박서보 작가의 묘법(猫法, 그린 것처럼 긋는 방법)이 인상적인 작품 2점을 전시했다. 캔버스를 뒤덮은 물감이 마르기 전에 연필로 선을 긋고 물감으로 지워버리고 다시 선을 긋는 행위를 반복하며 회화의 완성에 시간의 개념을 개입하는 동양 회화의 세계관을 담아낸 작품이었다. 아트가 곧 가치이자 , 소구력이다 이 같은 ‘프리즈 서울’ 등 아트 전시들은 비단 예술계뿐만 아니라 호텔업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전세계 32개국 110여 갤러리가 참가하는 대규모 아트 페어이고, 이를 관람하러 수많은 관중이 서울을 방문하기 때문이다. 서울신라호텔은 ‘프리즈 서울’이 개최된 2022년부터 행사 기간동안 객실 투숙률과 식음 매출이 크게 증가했다. 지난해 ‘프리즈 서울’ 관련 투숙 인원은 ‘22년 대비 20% 증가했으며, 올해도 지난해 대비 20% 이상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지난해 행사 기간 동안 식음 매출도 올데이 다이닝, 파인 다이닝, 룸서비스, 주류 등이 크게 늘어 지지난해보다 50%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주간경향(총 13 건 검색)

[이기환의 Hi-story](92)스님들이 묻고 도망? ‘신라의 미소’ 출토지 무슨 일이 있었을까(2023. 07. 14 11:20)
2023. 07. 14 11:20 문화/과학
2008년 경북 경주공고 운동장 배수구 공사 중 출토된 명문기와. ‘흥(興)’ 자의 위 글자가 ‘왕(王)’이고, 아래 글자가 ‘륜(輪)’이라면 ‘~왕흥륜~’이 된다. 이는 “진흥왕이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를 완성한 뒤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라는 현판을 내렸다”는 구절을 연상시킨다. / (학술조사보고 23책), 국립경주박물관, 2011 “절과 절들은 별처럼 벌여 있고, 탑과 탑들은 기러기 행렬인 양 늘어섰다(寺寺星張塔塔?行).” 신라 불교의 위용을 표현할 때 흔히 이 <삼국유사> ‘원종흥법 염촉멸신’조의 멋들어진 구절을 인용합니다. 그렇게 ‘별처럼, 기러기처럼’ 늘어선 사찰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빅3’가 있죠. 흥륜사(527~544)와 영묘사(535), 황룡사(553~569) 등입니다. 그중에는 황룡사가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하죠. 높이 80m가 넘는 9층 목탑터가 절터와 함께 남아 있으니 보는 이마다 상상의 나래를 펼 수가 있습니다. 왕까지 출가한 흥륜사 그러나 흥륜사와 영묘사 역시 둘째, 셋째 가라면 섭섭하죠. 먼저 흥륜사는 신라에서 가장 먼저 창건된 사찰입니다. 특히 이차돈(506~527)의 순교(527)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법흥왕은 527년 첫 번째 사찰인 흥륜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대소신료가 벌떼처럼 일어났고요. 왕의 최측근인 이차돈이 수습을 위해 순교를 자처했습니다. 이윽고 이차돈의 목을 베자 우윳빛 피가 흘렀고, 그제야 모든 반대가 사그라들었죠. 법흥왕 때 짓기 시작한 흥륜사는 544년(진흥왕 5) 최종 완성돼 낙성식을 여는데요.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의 원위치로 새롭게 추정되고 있는 경북 경주공고 자리. 1965년 이후 사찰의 흔적이 계속 확인됐고, 급기야 2008년에는 ‘흥륜사’임을 짐작게 하는 명문기와가 나왔다. /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대를 이어 절을 완성한 진흥왕은 ‘대왕 흥륜사’라는 현판을 내렸습니다. “말년에 출가한 진흥왕(혹은 법흥왕)이 법운(혹은 법공)이라는 법명으로 흥륜사의 주지가 됐다”(<삼국사기>, <삼국유사>)는 기사가 눈에 띄네요. <삼국유사> ‘흥륜사 금당십성’조는 “흥륜사 금당에 10명의 불교 성인을 진흙으로 빚은 상을 모셨다”면서 “동벽에는 아도·염촉·혜숙·안함·의상을, 서벽에 표훈·사파·원효·혜공·자장 등을 배치했다”고 했어요. 흥륜사 하면 떠오르는 유명한 설화가 한 편 있죠. <삼국유사> ‘김현 감호’조입니다. 신라에서는 해마다 2월 서라벌의 남녀가 대거 흥륜사로 몰려와 펼치는 탑돌이 행사가 장관을 이뤘는데요. 원성왕(재위 785~798) 연간에 흥륜사 탑을 돌던 김현과 어느 처녀가 눈이 맞아 으슥한 곳에서 사랑을 나눈 뒤 부부의 연을 맺습니다. 이 처녀가 실은 호랑이였고요. 이야기는 처녀(호랑이)의 희생으로 남편인 김현을 벼슬길로 올리는 것으로 끝납니다. 1916년 경주에 대서소를 차려놓고 취미로 신라 사찰을 답사했던 모로가 히데오는 사정동 일대에서 우연히 발견된 절터 유구를 두고 ‘흥륜사터’로 특정했다. 당시 경주 주민들이 이 일대를 ‘흥륜들’이나 ‘흥륜원’이니 하고 부른다는 이유로 ‘흥륜사터’라 한 것이다. / 함순섭 국립경주박물관장 제공 선덕여왕의 ‘지기삼사’ 사찰  선덕여왕 4년에 창건한 영묘사는 어떨까요. 선덕여왕의 ‘지기삼사(知幾三事·세 가지 신비로운 예측)’로 유명한 절이죠. 즉 ‘지기삼사’ 중 하나가 영묘사의 옥문지에 겨울인데도 개구리가 우는 것을 보고 절 인근 여근곡에 백제군이 매복한 사실을 알아내 전멸시킨 ‘신묘한 사건’이죠(<삼국유사>). 이런 설화도 있어요. 진지왕 연간(재위 576~579)에 흥륜사의 진자스님이 ‘미륵선화(화랑으로 거듭난 미륵)’을 찾아 전국을 헤맸는데요. 등잔 밑이 어두웠습니다. 진자스님이 영묘사 인근 나무 밑에서 뛰놀고 있던 소년(미시랑)을 보고 ‘미륵선화’임을 단박에 알아차렸답니다. 진자스님은 미시랑을 모시고 궁으로 돌아갔고요. 임금(진지왕)은 미시랑을 국선(화랑의 우두머리)으로 모셨습니다(<삼국유사> ‘미륵선화·미시랑·진자스님’조). 그렇다면 영묘사는 화랑들의 추모 공간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영묘사가 배출한 인물 중에는 신라 최고의 조각가인 양지스님(생몰년 미상)이 있습니다. <삼국유사>는 “양지가 영묘사 삼육삼존상 등을 제작할 때 백성이 앞다퉈 진흙을 날랐다”(‘의해·양지사석’조)고 소개했습니다. ‘신라의 미소’ 수막새는 흥륜사 제작품? 이렇게 흥륜사와 영묘사는 숱한 이야깃거리를 갖고 있는 신라의 대표적인 사찰입니다. 그러나 그나마 ‘터’는 남아 있는 황룡사와 달리 두 사찰의 원위치를 두고 혼란만 야기됐는데요. 사실 일제강점기에 흥륜사의 원위치를 멋대로 특정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경주에 대서소를 차려놓고 취미로 신라 문화재를 연구했다는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 1882~1954)였는데요. 이 자가 당시 경주 사정동 일대에서 발견된 절터의 흔적을 두고 ‘흥륜사터’로 특정했습니다. 주민들이 이 일대를 ‘흥륜들’이나 ‘흥륜원’이니 하고 부른다는 단순한 이유였죠. 이런 ‘선무당 사람 잡기’가 엄청난 나비효과를 일으켰습니다. 일본학자들은 물론이고, 해방 이후에도 진홍섭(1918~2010)·황수영(1918~2011) 등 국내 학자들까지 아무 의심 없이 ‘흥륜사터’로 해석했습니다. 심지어 모로가가 지목한 그곳을 ‘사적=흥륜사터’로 지정했습니다(1963). 그러다 보니 ‘신라의 미소’로 유명한 ‘얼굴무늬 수막새’ 출토지를 둘러싸고도 혼선이 빚어집니다. ‘얼굴무늬 수막새’는 1934년 경주에 거주하던 의사(다나카 도시노부·田中敏信)가 골동품상에서 구입한 것인데요. 그런데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장이던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가 ‘수막새 출토지=사정리 흥륜사터’로 전하면서 “조사해보니 확실하다”고 못 박았습니다. ‘영묘사’ ‘~왕흥륜~’ 명문의 비밀  하지만 심상찮은 발굴 결과가 잇따르기 시작했습니다. 1976년부터 기존의 ‘사정동=사적 흥륜사터’ 일대에서 잇달아 수상한 명문기와가 확인됐습니다. ‘영묘지사(靈廟之寺)’ 또는 ‘대영명사조와(大令妙寺造瓦)’ 등 ‘영묘사’명 기와들이 수습된 겁니다. 모로가 이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흥륜사터가 사실은 영묘사터’라는 거죠. 그렇다면 ‘얼굴무늬 수막새’ 또한 영묘사에서 출토된 것이라는 얘기가 되죠. 그럼 진짜 흥륜사터는 어디라는 말입니까. 사실 1965년부터 심상찮은 조짐은 있었습니다. 여기서 800m쯤 떨어진 경주공고 내에서 절터 유구와 유물들이 계속 출토되고 있었는데요. 그러던 2008년 운동장 배수구 설치를 위한 발굴조사 결과, 결정적인 명문기와편이 확인됩니다. 최근 발굴 및 연구성과에 따르면 신라 최초의 사찰은 경주공고 자리로, 영묘사는 지금까지 흥륜사로 알려졌던 자리로 수정돼야 한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기와 뒷면에 세로로 ‘~왕(王)’ 자와 ‘흥(興)~’가 새겨져 있었는데요. ‘흥(興)’ 자의 윗부분은 ‘ㅗ’ 형태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게 ‘왕(王)’ 자의 획으로 보였습니다. 또 ‘흥’ 자의 아랫부분엔 ‘십(十)’ 자와 같은 획이 보이는데요. ‘륜(輪)’ 자의 ‘차(車)’ 변의 위쪽 획일 가능성이 큽니다. ‘흥(興)’ 자의 위 글자가 ‘왕(王)’이고, 아래 글자가 ‘륜(輪)’이라면 ‘~왕흥륜~’이 되는데요. 왜 <삼국유사>에 “진흥왕이 (왕위에 오르니)…‘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라는 현판을 내렸다”(‘원종흥법 염촉멸신’조)는 구절이 있죠. 만약 ‘~왕흥륜~’이 맞다면 <삼국유사>의 ‘대왕흥륜사’ 구절과 부합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삼국유사> ‘기이 미추왕 죽엽군’조에는 “미추왕릉이 흥륜사 동쪽에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흥륜사가 미추왕릉의 서쪽에 있었다는 얘기죠. <신증동국여지승람> ‘고적’조는 “흥륜사가 경주부 남쪽 2리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 경주 읍성 내의 객사와 현재 경주공고의 실제거리는 1.2㎞인데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2리(약 1.3㎞)’와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영묘사’는 어떨까요. <삼국유사> ‘흥법제상 아도기라’조는 “영묘사는 ‘사천의 꼬리 쪽(沙川尾)’에 있다”고 했습니다. ‘사천’은 오늘날의 경주 ‘남천’을 가리키는데요. 그렇다면 ‘사천미(沙川尾)’라는 표현은 ‘남천의 끝자락’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고려시대 공양구의 정체 요즘은 ‘선무당’ 모로가가 ‘흥륜사터’로 특정해 사적지정까지 된 절터를 ‘영묘사터’로 고쳐 보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따라서 ‘얼굴무늬 수막새의 출토지=영묘사터’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흥륜사터는 경주공고 자리에 있었다는 거고요. 며칠 전 공식명칭이 ‘사적 흥륜사터’인 지역 서쪽에서 또 한 차례 의미심장한 유구와 유물이 확인됐습니다. 그중 ‘영묘사(靈廟寺)’ 글자가 찍힌 명문기와가 출토됐습니다. 이 정도가 됐으니 이젠 ‘사적 흥륜사터’가 아니라 ‘사적 영묘사터’로 이름을 바꿀 시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이번 발굴에서 통일신라~고려시대 사찰 관련 유구와 유물이 대거 출토됐는데요. 그중 11세기 청동공양구와 의식구 등을 한가득 넣은 철솥이 특히 눈길을 끌었습니다. 솥 안에는 향로와 향완(향 그릇), 촛대 등의 청동공양구와 금강저 같은 청동의식구, 청동그릇 등 육안으로 확인되는 유물만 54점 정도 나왔습니다. 기존의 ‘사적=흥륜사터’에서 잇달아 확인되고 있는 ‘영묘사’명 기와 /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문화재청이 낸 보도자료는 이 출토물의 성격을 일단 ‘퇴장(退藏)유물’로 추정했습니다. 화재나 사고 등의 비상 상황을 맞아 급히 한곳에 모아 묻어둔 유물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몽골군의 침략이 급히 소환됐습니다. 몽골군이 13세기 경주 일대까지 들어와 황룡사와 9층 목탑을 불태웠죠. 그때 영묘사의 스님들이 이런 물품 일체를 땅에 묻고 떠난 게 아니냐는 추정이 나온 겁니다. 과연 스님들은 “나 살려라” 도망갔을까  그러나 ‘퇴장유물’로 추정하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습니다. 일각에서 이런 말이 나오더라고요. <마하승기율>(스님이 지켜야 할 계율을 정한 경전)은 “도적이 물건을 요구하거나 훔치러 올 때는 감추지 말고 내주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스님들이 위기에 빠진 사찰을 두고 나 몰라라 하고 도망간다? 그것도 온갖 귀중품은 땅에 묻고? 자칫 스님들을 매도하는 해석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문화재청이 ‘퇴장유물’의 사례로 거론한 10곳의 유적을 볼까요. ‘퇴장유물’보다는 건물을 지을 때 땅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지진구’로 볼 수 있고요. 건물 기단을 쌓을 때 액막이를 위해 물품을 공양하는 ‘진단구’로도 해석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중 ‘영국사터’(서울 도봉서원) 발굴 사례가 대표적인데요. 2012년 절의 건물터 기단에서 청동유물 77점이 일괄 출토됐습니다. 특히 청동유물을 일괄 매납할 때 따로 구덩이를 판 흔적이 없었습니다. 영국사의 건물 기단을 조성할 때 일종의 진단의식을 펼친 뒤 청동 용품을 고이 모셔둔 증거일 수 있답니다. 건물의 모서리에 구덩이를 파고 솥과 같은 대형 용기 안팎에 금속유물을 넣고 묻는 경우도 있습니다. 경남 창녕 말흘리 유적을 볼까요. 2003년 건물터 모서리에서 금속유물 500여 점을 겹겹이 채운 쇠솥이 발견됐는데요. 유물은 불전 장엄구나 의식구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두 사례 외에도 ‘퇴장유물’ 보다는 ‘의례용 유물’로 파악해야 하는 유적이 많다는 견해가 주목을 끕니다. 이번에 출토된 각종 불교공양구. 향로와 향완(향 그릇), 촛대 등의 청동공양구와 금강저 같은 청동의식구, 청동소완(반찬그릇) 등이 솥 안에 가득 차 있었다. 문화재청은 전란 등 급박한 상황에서 사찰 승려들이 숨겨놓고 피란한 이른바 ‘퇴장유물’로 추정했다. / 춘추문화재연구원 제공 이와 관련해서 인용되는 경전이 <불설다라니집경>입니다. 7세기(654) 번역된 이 경전의 12권에는 ‘제단의 건립’에 쓰이는 공양물의 목록과 납입수량이 표기돼 있습니다. 그중 병·접시·쟁반·국자·향로·금은그릇 등 금속용기 11종(879건)와 금동령대, 오색납촉, 등잔, 금·동향로보자, 거울 등 금속장엄구 9종(1131건)의 목록이 작성돼 있습니다. 이외에도 갖가지 식물과 향, 오곡, 여러 선신에게 바칠 꿀과 기름, 떡 등 음식까지 포함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국내유적에서 확인된 유물을 이 경전(<불설다라니집경>)이 권장하는 납입목록과 비교해볼까요. 마침 최태선 중앙승가대 교수가 정리해놓은 논문이 있네요. 말흘리의 경우는 깃대(幡)와 허리띠장식(?) 등에 해당하는 금동제품류가 충실하게 매납됐고요. 영국사터와 청주 사뇌사터의 경우도 부족한 수량이지만 목록에 있는 물품을 넣어 두었습니다. 그 외 유적의 출토유물도 기단 조성을 위한 의례용 용기 및 장엄류 등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번 영묘사터에서 확인된 고려시대의 솥에서 출토된 유물도 그렇습니다. 최태선 교수는 “이들 유물도 <불설다라니집경>에 나와 있는 ‘작단의식’(기단 조성 때 지낸 진단 의식) 때 납입한 물목에 포함돼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제가 봐도 전란을 맞아 스님들이 허겁지겁 각종 귀중품을 묻고 자리를 피했다고 섣불리 추정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이제 유물을 수습한 것에 불과합니다. 발굴 유물이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로 급히 이관됐다죠. 문화재청 보도자료가 언급했듯, 앞으로 정확한 성격 파악과 면밀한 분석이 뒤따라야 할 것 같아요. 일제강점기에 영묘사터를 흥륜사터로 잘못 특정하는 바람에 100년 넘게 정력을 소모한 전철을 다시 밟지는 말아야겠죠. <참고자료> 최태선, ‘불설장엄도량급공양구지료도법의 보구와 고고학적 매납사례’, <불지광조>, 정인스님 정년퇴임기념논총 간행위원회, 2017 국립경주박물관, <경주공고 유구수습조사>(학술조사보고 23책), 2011 박홍국, ‘와전자료를 통한 영묘사지와 흥륜사지와 위치 비정’, <신라문화> 20호, 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 2002 이근직, ‘신라 흥륜사 위치 관련 기사 검토’, <신라문화> 20호, 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 2002 춘추문화연구원, ‘경주 흥륜사 서편(사정동 292-1번지 일원) 하수관로 설치공사 유적 매장문화재 발굴조사 자료, 2023 허형욱,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얼굴무늬수막새의 발견과 수증 경위’, <신라문물연구> 8, 국립경주박물관, 2015
이기환의 Hi-story
[이기환의 Hi-story](68)1500년 전 신라에 왜 ‘이모티콘 세트’가(2023. 01. 27 14:40)
2023. 01. 27 14:40 문화/과학
2019년 경북 경산 소월리에서 출토된 사람 모양 도기 항아리(위). 문화재청은 2019년 발굴된 경북 경산 소월리 출토 ‘사람 얼굴 모양 도기’를 활용한 이모티콘 24종을 최근 공개했다. / 문화재청 제공 ‘무표정인 듯, 심각한 듯, 말하는 듯…. 어찌 보면 뾰로통한 듯, 잔뜩 화난 듯….’ 문화재청이 얼마 전 경북 경산에서 출토된 ‘사람 얼굴 모양 도기(토기) 항아리’를 활용한 그림말(이모티콘) 24종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공개했습니다. 네이버 블로그, 인스타그램 및 트위터 등에서 쓸 수 있답니다. 이 ‘도기 항아리’는 각기 다른 표정의 세 얼굴을 드러낸 독특한 모습으로 출토됐는데요. 문화재청 공식 SNS는 유물이 출토된 2019년 말부터 프로필 이미지로 활용해왔답니다. ‘문화유산이 어렵고 지루하다’는 고정관념을 없애려는 의지를 반영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잘 들여다보면 이 ‘항아리’는 세 얼굴로만 볼 수 없습니다. 항아리를 살살 돌리면 얼굴과 얼굴 사이에 ‘또 다른 표정의 얼굴’이 보입니다. 입을 동그랗게 벌린 얼굴들이 나타납니다. 그렇게 따지면 이 항아리에는 모두 여섯 얼굴이 표현된 겁니다. 이제 한국 고고학 발굴사상 처음 출토된 ‘다중인격의 도기 항아리’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다중인격의 항아리 출현 2019년 11월이었습니다. 조사기관인 화랑문화재연구원이 경북 경산 와촌면 소월리에서 도로공사를 위한 사전발굴조사를 펼치고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심상치 않은 구덩이(깊이 2m·밑지름 1.6m) 1기를 확인했습니다. 30㎝ 땅 밑에서 도기편들이 출토됐고요. 그보다 50㎝ 정도 더 파내자 정체 모를 도기 항아리 1점과 시루 1점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겉에 묻은 흙을 걷어내던 발굴자(김상현 화랑문화재연구원 연구부장)는 깜짝 놀랐습니다. 둥그런 항아리에 사람 얼굴이 셋이나 표현돼 있었습니다. 각 사람 얼굴은 두 눈과 입은 길게, 타원형으로 표현했습니다. 콧구멍은 안에서 밖으로 찔러 만들었는데요. 손가락을 이용해 콧등을 중심으로 양쪽을 살짝 눌러 도드라지게 했습니다. 항아리 높이는 28.4cm, 지름은 17.5cm 정도 됐습니다. 이리저리 한참 돌려보던 발굴단은 바로 옆에서 출토된 시루의 뚫린 부분에 이 항아리를 맞춰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꼭 맞았습니다. 그제야 ‘얼굴항아리+시루’가 한 세트가 됐습니다. 시루의 양 손잡이가 마치 사람의 양손처럼 보였습니다. 발굴단은 이 ‘얼굴항아리+시루’ 세트의 연대를 5세기로, 이 구덩이를 조성한 시기는 6세기로 추정했습니다. 얼굴항아리를 살살 돌려보면 세 얼굴뿐 아니라 전혀 다른 표정의 얼굴이 나타난다. 다면인격의 얼굴처럼 보인다. / 화랑문화재연구원 제공 유난히 ‘줄임말’을 선호했던 신라인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는 ‘얼굴항아리+시루’ 세트 밑의 유물이었습니다. 명문 목간과 함께 나뭇가지 다발, 목기가 정연하게 놓여 있었습니다. 특히 목간은 지극히 장대했습니다. 그 길이(74.2㎝·직경 4.3~2.8㎝)가 다른 신라 영역 출토품보다 2~3배 이상 길었습니다. 목간의 5개 면마다 글씨가 쓰여 있었고요. 읽을 수 있는 글자만 100여자에 달했습니다. 명문 가운데 눈에 띄는 글자들이 몇 보였습니다. 골짜기를 경계로 들어선 마을을 가리키는 ‘곡(谷)’과 논을 가리키는 ‘답(畓)’, 제방(둑)을 의미하는 ‘제(堤)’, 그리고 신라의 토지면적 단위인 ‘결(結)’과 ‘부(負)’였습니다. 그중 ‘답(畓)’ 자가 흥미로웠습니다. 왜냐면 이 ‘畓’ 자는 신라에서만 쓰인 줄임말이었던 겁니다. 백제에서는 논을 지칭할 때 ‘수전(水田)’이라는 중국 단어를 쓰고 있었거든요. 예컨대 561년(진흥왕 22) 창녕에 세운 척경비에 ‘전답(田畓)’으로 표기됐고요. 각 마을의 인구 및 농사 등의 현황을 기록한 ‘신라촌락문서’(일본 쇼소인·正倉院 소장·7세기 이후)에도 ‘답’ 자가 여러 차례 나옵니다. 신라인들은 밭은 ‘전(田)’으로, 논은 ‘수전(水田)’을 한 글자로 줄인 ‘답(畓)’으로 분류해 표기했습니다. 비단 ‘답(畓)’ 자뿐이 아니고요. 신라에서는 관직명이나 숫자처럼 많이 쓰는 표현을 줄여 기록한 예가 많습니다. 예컨대 ‘사천신라비’(8세기)에는 ‘상대등(上大等·최고관등·국무총리)’을 쓰면서 ‘상(上)’ 자는 정자로 쓰고 ‘대등(大等)’은 ‘大 밑에 木’이라는 한 글자로 표현했습니다. 또 ‘남산신성비’(제4비·591년)는 ‘일벌(一伐·지방 관직 중 8번째)’과 ‘일척(一尺·지방관직 중 9번째)’ 등을 한 글자처럼 표기했습니다. 이를 두고 경상도 출신의 연구자는 우스갯소리로 “성질 급한 경상도 사람들이라 줄여 쓴 단어가 아니겠냐”고 하더라고요. 그런 면에서 ‘답(畓)’ 자는 ‘1500년 전 인터넷 줄임말’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토지장부인가 업무수첩인가 명문 목간은 6세기 경산 와촌면 소월리 인근 지역의 토지현황을 기록한 문서로 추정되는데요. 소월리는 금호강의 지류인 청통천 주변 언덕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신라에서는 429년(눌지왕 13) 제방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고요. 531년(법흥왕 18) 임금이 저수지 축조를 명한 사실도 있습니다. 이때부터 각 지방에서 본격적으로 제방을 쌓은 것으로 보이는데요. 금호강 유역에는 ‘청제(菁堤)’라는 제방을 쌓은 기록인 ‘영천 청제비’(536)와 영동리촌의 저수지 축조기록인 ‘대구 무술오작비’(578) 등이 보입니다. ‘청제’ 축조에는 연인원 7000명을 동원했답니다. 국가적인 대역사였습니다. 이러한 수리시설 축조를 통해 자연재해로부터 안전한 전답을 확보하고 수확량과 토지이용률을 향상시켜 중앙정부의 재정을 안정적으로 늘렸을 겁니다. 그렇다면 같은 금호강 유역인 소월리 부근에서도 같은 맥락으로 제방이 축조됐을 거고요. 소월리 목간에서 보이는 ‘제(堤)’ 자가 당시의 상황을 암시해 줍니다. 제방 축조 후 소월리의 논·밭과 그곳에서 나온 소출량을 꼼꼼하게 쓴 1차 기록물이었던 겁니다. ‘지명+토지종류+토지면적’ 등으로만 나열된 목간에는 동사가 보이지 않는데요. 때문에 정식 문건이라기보다는 ‘감말곡 마을 논 7결(結)’, ‘둑 위(堤上)의 땅 1결’, ‘구미곡 마을 3결’, ‘둑 아래(堤下) 땅 40부’, 뭐 이런 식으로 정리한 일종의 장부 혹은 업무용 수첩일 가능성도 개진됩니다. 또 목간 한 면의 밑을 보면 ‘제제제(堤堤堤)’, ‘사사사사(四四四四)’와 같은 반복된 글자들이 보이는데요. 이것은 필자가 연습한 글씨, 즉 습서(習書)로 보이죠. 이 명문 목간은 장부 혹은 업무용 수첩으로 쓰였다가, 연습 글씨 용도로 재활용된 뒤 마지막으로 ‘얼굴항아리+시루’ 밑에 고이 모셔둔 것으로 해석됩니다. 혹리를 다스리는 징벌의 회초리? 이 명문 목간이 나뭇가지 다발과 함께 정연하게 놓여 있었다는 점도 재미있습니다. 나뭇가지 다발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요. 일종의 싸리비이며, 옆에 있는 ‘폐기 목간’은 그 싸리비의 손잡이 구실을 한 것이 아니냐고 추정하는 연구자들이 있습니다. 그럼 왜 싸리비를 그렇게 고이 모셔두었을까요. 어떤 연구자는 6세기 무렵 소월리 주민들이 지신(地神·땅의 신)에게 수확량의 40%를 뜯어간 세리들의 수탈을 고발하는 의식을 치른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이 연구자는 “목간에서 논 13결 30부에서 5결 40부를 거뒀다는 내용이 읽힌다”면서 “그렇다면 대략 40%가량을 세금으로 뜯어갔다”는 얘기라는 겁니다. 맞다면 너무나 가혹한 세금이죠. 소월리 구덩이에서는 지금도 지하수가 계속 용출되고 있다. 따라서 지하에서 용출되는 물이 눈, 코, 입과 정수리 등에 뚫린 구멍으로 솟구쳐 쏟아질 수밖에 없다. 이 얼굴항아리가 물과 관련된 신이거나, 상반신은 사람인 용어(龍魚)의 의인화된 모습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다. / 이동주의 논문에서 여기에서 세리의 혹정을 꾸짖는 징벌의 회초리, 즉 싸리나무가 등장합니다. ‘회초리’와 관련된 고사가 있죠. 중국 전국시대 조나라의 두 인물인 염파와 인상여의 ‘문경지교(刎頸之交)’입니다. ‘평소 인상여를 시기 질투하던 염파가 인상여의 진심을 알아차리고는 웃통을 벗고 가시나무 채찍을 짊어지고(肉袒負荊) 용서를 빌었다’는 내용이죠.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죽음도 함께할 친구(刎頸之交)’가 됐답니다.(<사기> ‘염파·인상여 열전’) 소월리 주민들이 수확량의 40%나 징수하는 세리를 고발하면서 ‘혹정의 증거’인 목간과 세리를 징벌하는 의미의 회초리(싸리나무 다발), 세리의 얼굴을 토기에 새긴 ‘항아리’를 넣어두었다는 겁니다. 지신에게 봉헌한 시루의 음식(떡과 밥)과 함께요. 그래서 항아리의 세 얼굴은 ‘세금을 많이 낸 사람에게는 흡족한 표정’, ‘적당히 낸 사람에게는 보통의 표정’, ‘적게 낸 사람에게는 화내는 표정’을 각각 지었다는 겁니다. 풍년을 기원하는 어린 토착신의 3단 표정? 다른 견해도 있습니다. 나뭇가지 다발이 싸리비일 수도, 볏가리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싸리비일 경우 ‘혼(魂)이나 잡귀를 쓸어버리거나 수확물을 담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고요. 중국에서는 점을 칠 때 사용하기도 했답니다. 일본에서는 임산부가 빗자루로 배를 쓰다듬거나 머리맡에 두어 순산을 빌었습니다. 한국의 민담에서 빗자루는 풍요와 재복의 상징으로 활용됐습니다. 또 작물이 잘 자라기를 기원하며 짚꾸러미를 단 장대를 높이 올리는 볏가리가 있죠. 몽당이 빗자루나 나무 다발에 불을 붙여 논·밭두렁을 태우는 정월 대보름의 쥐불놀이가 있습니다. 얼굴항아리와 시루는 한 세트를 이루고 있었다. 시루의 양 손잡이가 마치 사람의 양팔처럼 보인다. / 화랑문화재연구원 제공 어떤 경우든 소월리 출토 나뭇가지 다발은 풍요를 기원하는 주술적인 도구일 가능성이 있답니다. 명문 목간은 어떨까요. 지역사회의 수확량이 기록된 내용을 감안하면 이 역시 풍작의 의미로 묻어두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시루 역시 비슷합니다. 경북 봉화에서는 떡시루에 불밝이를 하고 절을 하면서 농사의 풍작을 비는 농신제가 있었고요. 그러면 사람 얼굴항아리는 어떨까요. 일본에서는 소월리 항아리처럼 구멍을 뚫어 표현한 예는 없지만, 도기에 얼굴을 그린 사례가 더러 보이는데요. 일본의 사람 얼굴 도기에서는 질병신, 물신(水神), 부엌신(조신·?神), 토착신 등과 관련된 명문이 보인답니다. 또한 소월리가 속한 경북 경산에서는 ‘전동신(田童神)’을 믿었는데요. ‘풍작’을 뜻하는 전동신은 비와 바람을 거느리는 신이었다고 합니다. 또 경북 영일과 의성 등에서도 비슷한 신(영동신·靈童神)을 믿었는데요. 영일에서는 민가 양쪽에 기둥을 세우고 그 끝에 가늘고 긴 볏짚단을 붙였고요. 의성에서는 취사장에서 각종 음식을 옮기고 그해의 풍요를 기원했답니다. 이들 지역에서 믿는 신의 공통요소는 ‘아이(童)’이고요. 소월리 출토 ‘나뭇가지 다발’을 ‘볏짚단(영일)’으로, ‘시루’를 취사장(의성)의 구성요소로 대입시킨다면 어떨까요. 소월리 출토 ‘얼굴 도기+시루+목간+나뭇가지 다발’은 바람과 비 등을 관장하며 농업의 풍흉과 지역의 안녕을 좌우하는 ‘아동 토착신’으로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런 해석을 토대로 아이 얼굴의 3단 표정을 풀어볼까요. 평온~심각~분노까지 3중인격으로 묘사된 이 토착신은 각각 날씨와 기후변화에 따라 표정이 바뀜을 가리킵니다. 또 다른 견해가 제시되기도 했습니다. 유물이 확인된 구덩이의 맨 밑바닥에 설치된 가공목재에 주목한 연구인데요. 이 목제가 흡사 콩나물시루 받침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겁니다. 이 받침대 위에 시루와 얼굴항아리를 올려놓았다면 어떨까요. 이 구덩이에서는 지금도 물이 샘솟듯 올라오고 있습니다. 지하에서 끊임없이 용출되는 물이 얼굴항아리의 눈, 코, 입 등 구멍마다 솟구쳐 쏟아지겠죠. 바로 이 얼굴항아리가 물과 관련된 신이거나, 상반신이 사람인 용어(龍魚·인어)의 모습이지 않을까, 뭐 이렇게 보는 연구자도 있더라고요. 즉 이곳 사람들이 지하에서 용출되는 풍부한 물을 통해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을 벌였다는 겁니다. 또 일본학자 가운데는 소월리의 골짜기 논을 수호하기 위한 일종의 부적으로 이 얼굴항아리 세트 유물을 해석하는 이도 있습니다. 소월리에서 출토된 얼굴도기+시루+목간+나뭇가지 다발은 바람과 비 등을 관장하며 농업의 풍흉과 지역의 안녕을 좌우하는 ‘신격화된 아동’, 즉 토착신으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다. / 국립민속박물관 소장자료·이용현 경북대 인문학술원 HK연구교수의 논문에서 세 얼굴인가 여섯 얼굴인가 어떻습니까. 각기 나름의 근거를 두고 어느 날 갑자기 출현한 ‘얼굴항아리’를 두고 갖가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습니다. 1500년 전 소월리 사람들이 왜 이 얼굴항아리를 시루와 명문 목간, 싸리비(혹은 볏짚단) 등과 함께 그렇게 정연한 상태로 고이 놓아두었는지 가늠하기 쉽지는 않습니다. 또 겉으로 보기엔 ‘세 얼굴을 가진 항아리’로 보이지만 슬슬 돌리면 보기에 따라 ‘여섯 얼굴’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게 보이도록 일부러 만든 것일 수도 있죠. 무엇보다 소월리 출토 유물들은 아직 완전공개되지 않은 채 발굴기관(화랑문화재연구원)이 보관 중인데요. 보존처리 중입니다. 그 과정에서 유물의 성격이나 성분도 면밀히 분석 중이고요. 2024년에 발굴보고서를 완성한 후에 국가기관(국립중앙박물관 혹은 국립대구박물관)에 이관할 것이라고 하네요. 그 이후 실물이 공개되면 더 다양한 연구가 나오겠죠. 분명한 것은 세 얼굴이든, 여섯 얼굴이든 ‘사람 얼굴 항아리’로 대표되는 소월리 출토품들은 오랜만에 ‘스토리텔링’의 무대를 마련했네요. ‘1500년 전의 이모티콘’, ‘1500년 전의 인터넷 줄임말’…. 뭐 이런 스토리가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이 기사를 위해 오승연 화랑문화재연구원장, 김상현 화랑문화재연구원 연구부장, 이용현 경북대 인문학술원교수, 전경효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주무관, 이관호 전 국립민속박물관 민속연구과장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참고자료> 김상현. ‘경산 소월리 유적 추가발굴조사보고’, <경산소월리 유적의 종합적 검토>, 경북대 인문학술원 HK-사업단 제3회 국제학술대회 발표자료, 2021 김재홍. ‘금호강 유역의 제와 오의 축조 의미’, <경산 소월리 유적의 종합적 검토>, 경북대 인문학술원 HK-사업단 제3회 국제학술대회 발표 자료, 2021 손환일. ‘경산 소월리 출토 목간의 내용과 서체’, <한국고대사탐구> 제34집,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20 오승연·김상현. ‘투각인면문 옹형토기가 출토된 경산 소월리 유적’, <한국고고학저널>, 국립문화재연구소, 2019 이동주. ‘경산 소월리 출토 목간과 유구의 성격’, <동서인문> 16호, 경북대 인문학술원, 2021 이용현. ‘경산 소월리 유적 출토 인면투각토기와 목간의 기능-목간의 기능과 농경의례’, <동서인문> 16호, 경북대 인문학술원, 2021 이용현. ‘경산 소월리 문서 목간의 성격’, <목간과 문자> 27호, 한국목간학회, 2021 전경효. ‘경산 소월리 목간의 기초적 검토’, <목간과 문자> 24호, 한국목간학회, 2020 주보돈. ‘경산 소월리목간과, 금호강 문화’, <동서인문> 16호, 경북대 인문학술원, 2021 화랑문화재연구원, ‘경산지식산업지구 진입도로 개설공사부지 내 유적발굴조사 약식보고서’, 2022 히라카와 미나미(平川南). ‘고대 한국과 일본의 곡호(谷戶)와 마을’, 경북대 인문학술원 HK-사업단 제3회국제학술대회 발표자료, 2021
이기환의 Hi-story
[이기환의 Hi-story](46)신라공주의 무덤에서 쏟아져 나온 바둑돌(2022. 08. 12 13:32)
2022. 08. 12 13:32 문화/과학
최근 들어 신라의 천년고도 경주에서는 때아닌 바둑 관련 이벤트가 잇달아 열리고 있습니다. 지난 4월에는 쪽샘 44호 발굴현장에서 아마 바둑기사 두 사람이 참여한 ‘천년수담-신라바둑 대국’ 행사가 열렸고요. 지난 8월 11일에는 경주 시민들을 위한 ‘대담 신라-신라바둑, 바둑돌’ 행사를 열기도 했습니다. 행사를 주최한 쪽이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고요. 4~6세기 신라 귀족들의 고분 800여기가 밀집한 경주 쪽샘 지구 가운데 왕족급 무덤인 44호분(돌무지덧널무덤)에서 무덤 주인공이 금은동제 당대 최고명품을 온몸에 치장한 상태로 발굴됐다. 봉분의지름(30m)은 중형급이지만 돌무지의 규모(지름 16~19m)는 금관총(20~22m)·서봉총(16~20m) 등 비슷한 시기의 왕릉급 고분과 엇비슷하다. 쌓인 돌무지의 무게가 5t 트럭 200대분(1000t)에 이른다.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이상한 일 아닙니까. 신라 유적의 발굴과 조사, 연구를 담당하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왜 이런 뜬금없는 ‘바둑행사’를 벌인단 말입니까. 왜 그런 건지 시계를 2019년으로 돌려보겠습니다. 쪽빛 샘 동네의 비밀 경주 시내 한복판에 ‘쪽샘’이라는 지명이 있습니다. 쪽빛 하늘이 그대로 비치는 샘이 있다고 해서 이름 붙인 곳인데요. 이 쪽샘 지구는 4~6세기에 살았던 신라 왕·귀족들의 무덤 800여기가 집중돼 있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이 가운데 2014년부터 조사가 이어진 44호분(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 있는데요. 2019년 신라 행렬도가 새겨진 토기와 말 문양 토기, 그리고 제사와 관련된 유물 110여점을 확인했습니다. 이중 말 탄 사람, 춤추는 사람과 사슴·멧돼지·말·개 등을 새긴 토기는 안악 3호분(4세기 중반)과 무용총(5세기 전반) 등 고구려 행렬·수렵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해석됐습니다. 당연히 화제를 뿌렸죠.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1년 뒤인 2020년 바로 이 44호 고분에 묻힌 주인공은 키 150㎝ 정도 되는 ‘신라공주’로 추정되는 증거들이 확인됐는데요. 왜 ‘신라공주’로 특정할까요. 쪽샘 44호의 봉분 규모는 중형급(지름 30m)입니다. 돌무지의 규모(16~19m)는 금관총(20~22m)·서봉총(16~20m) 등 비슷한 시기의 왕릉급 고분과 엇비슷합니다. 쌓인 돌무지의 무게가 5t 트럭 200대분(1000t)에 이릅니다. 이 고분은 주변에 10여기의 고분이 함께 조성됐는데요. 그랬기에 봉분을 크게 할 수 없어 중형급이 됐지만, 금관총·서봉총 등 왕릉급에 준하는 돌무지로 그 위상을 나타냈으리란 추정이 가능한 거죠. 주인공은 ‘신라공주’일 가능성도 큰데요. 왜냐면 금동관(1점), 금드리개(1쌍), 금귀걸이(1쌍), 가슴걸이(1식), 금·은 팔찌(12점), 금·은반지(10점), 은허리띠 장식(1점) 등 당대 최고의 명품을 풀세트로 치장하고 있었거든요. 예컨대 금동관에 매달린 순금의 드리개 장식은 왕릉인 황남대총 남분의 출토품과 비슷하답니다. 또 ‘가슴걸이’에는 남색 유리구슬과 달개가 달린 금구슬, 은구슬을 4줄로 엮어 곱은옥을 매달았는데요. 이런 형태는 황남대총이나 천마총 같은 최상위 계층 무덤에서만 확인된 디자인입니다. 영롱한 녹색의 비단벌레 날개로 장식한 하트 문양의 펜던트도 주목되는데요. 비단벌레의 날개 2매를 겹쳐 물방울 모양으로 만들고, 앞뒤판 둘레를 금동판으로 고정해 만들었습니다. 이 비단벌레 장식은 황남대총 남분, 금관총, 계림로 14호 등 최상급 무덤에서만 출토된 바 있거든요. 이 쪽샘 44호분에서 쏟아져 나온 유물의 특징은 ‘아담 사이즈’라는 데 있습니다. 노출된 44호분 금동관의 추정 높이(약 18㎝)는 황남대총 북분(높이 27.3㎝)과 금관총(27.5㎝) 및 금령총(27㎝) 등에 비해 상당히 작은 편입니다. 관테와 세움장식 역시 상대적으로 작고요. 출토된 허리띠의 폭(34㎝) 역시 작은 편에 속합니다. 그렇다 해도 ‘어린 왕자’일 가능성은 없을까요. 이 고분에서는 장식대도가 아니라 은장도가 출토됐거든요. 일반적으로 은장도가 출토되면 여성 무덤으로 분류됩니다. 출토유물의 착장 흔적으로 신장을 가늠해보니 150㎝나 됐거든요. 모든 상황을 종합해볼 때 쪽샘 44호분의 주인공을 ‘키 150㎝ 내외의 신라공주’로 추정한 겁니다. 돌 863개의 정체 이 ‘(추정) 신라공주’ 고분을 발굴하던 조사원(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들이 고개를 갸웃거린 유물들이 있었는데요. 지난 4월 13일 쪽샘 44호분에서 열린 ‘천년수담-신라바둑 대국’ 행사. 김수영 아마 7단(오른쪽)과 홍슬기 아마 6단이 쪽샘 44호분에서 출토된 바둑돌로 대국을 벌였다.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공주의 발치 아래에 부장된 토기군 사이에 모여 있던 작은 돌들이었습니다. 다 세어보니 863점이나 됐습니다. 분류해보니 검은돌이 425점, 흰돌이 438점으로 띠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돌의 크기는 지름 1.0~2㎝, 두께 0.5㎝ 내외였으며, 평균 1.5㎝ 정도였습니다. 이 돌들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요. 조사원들은 과거의 발굴사례를 들춰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쪽샘 44호분뿐이 아니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발굴된 금관총(1921·247점)을 시작으로 천마총(1973·350여점), 황남대총 남·북분(1973~1975·243점) 등 왕과 왕족 무덤은 물론이고요. 7세기 무렵 조성된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인 용강동 6호분(253점)에서도 확인된 바 있었습니다. 발굴단에서는 경주 분황사지에서 출토된 가로·세로 15줄이 그어진 바둑판 모양의 전돌을 주목했는데요. 그래서 조사단은 쪽샘 44호분, 즉 신라공주(추정)의 무덤에서 출토된 200여점의 돌이 바둑돌일 가능성을 제기했습니다. 후에 밝혀진 의미심장한 사실이 있습니다. 1973~1975년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칠기의 바닥에 ‘마랑(馬朗)’ 명문이 보였는데요. 이 ‘마랑’은 중국 서진(265~316) 시대에 활약한 바둑 최고수인 ‘기성(棋聖)’의 칭호를 얻은 인물이었음이 뒤늦게 밝혀졌습니다. 그렇다면 이 ‘마랑’명 칠기는 불세출의 기성인 ‘마랑’의 사인이 새겨진 바둑통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바둑 간첩 때문에 쇠망한 한성백제 이 대목에서 두가지 궁금증이 생기죠. 바둑이 신라시대에 그렇게 유행했다는 걸까요. 또 하나 그 시대엔 신라공주까지 바둑을 즐겼다는 얘기일까요. 그래서 젊은 나이에 사망한 공주의 무덤에 생전에 즐겼던 바둑돌을 넣어주었던 걸까요. 틀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 ‘신선놀음에 도낏자루(柯) 썩는(爛) 줄 모른다’는 ‘난가(爛柯)의 전설’이 있죠. 바로 바둑을 일컫는 전설이죠. 동양에서는 예부터 바둑을 우주의 삼라만상에 빗댔는데요. 바둑판의 한가운데 점을 ‘천원(天元)’이라 했고요. 또 바둑을 치세의 도로 여겼습니다. 서진 장화(232~300)가 편찬한 <박물지>는 “요임금이 바둑으로 어리석은 아들 단주를 가르쳤다”고 했고요. 공자는 “온종일 배불리 먹고 마음 쓸 데가 없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박혁(바둑과 장기)이라는 게 있지 않느냐. 그걸 하는 게 그래도 현명한 일이다(不有博奕者乎 爲之猶賢乎已)”(<논어> ‘양화’)라고 했습니다. ‘손으로 나누는 대화’는 ‘수담(手談)’, ‘앉아서 은둔한다’는 ‘좌은(坐隱)’, ‘근심을 잊는다’는 ‘망우(忘憂)’ 등이 모두 바둑을 가리키는 고차원적인 표현이죠. 고구려와 백제에서도 대유행했죠. <북사>와 <주서>, <수서> 등은 일제히 “고구려와 백제인들이 바둑을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바둑 때문에 한성백제 500년 사직이 무너졌다는 생생한 <삼국사기> 기록도 있지 않습니까. 즉 백제 개로왕(재위 455~475)은 “바둑을 가르쳐 준다”며 접근한 고구려의 국수(國手) 도림(道林)에게 흠뻑 빠졌죠. “내가 왜 그대를 이렇게 늦게 만났느냐”고 한탄할 정도였죠. 바둑으로 개로왕을 홀린 도림이 마각을 드러내죠. 개로왕에게 “국력에 걸맞게 성곽과 궁실을 크게 쌓으라”고 속삭인 겁니다. 개로왕은 도림의 참언을 그대로 믿었죠. 대대적인 토목공사에 국고가 텅 비었고, 백성은 도탄에 빠졌죠. 결국 한성백제는 475년 고구려 장수왕(재위 412~491)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습니다. 신라-당나라 반상대결 그럼 신라는 어떨까요. 효성왕(재위 737~742) 연간의 기록이 눈에 띄던데요. <삼국유사> ‘피은·신충괘관’조를 볼까요. 쪽샘 44호분에서 출토된 돌은 총 863점이었다. 분류해보니 검은돌이 425점, 흰돌이 438점이었다. 돌의 크기는 지름 1.0~2㎝, 두께 0.5㎝ 내외였다.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즉 효성왕이 태자 시절, 어진 선비 신충과 함께 궁궐의 잣나무 밑에서 바둑을 두면서 굳게 약속했죠. “내 잊지 않으마. 혹여 나중에 그대를 잊는다면 저 잣나무가 증거가 될 것이다.” 왕위에 오른 효성왕은 신충을 까맣게 잊었습니다. 신충이 원망하면서 노래를 지어 잣나무에 붙였죠. 그러자 나무가 갑자기 말라버렸고요. 노래가 삽시간에 퍼졌고요. 그때서야 신충을 기억해낸 왕이 신충에게 벼슬을 내리자 잣나무는 다시 살아났답니다. 738년(효성왕 2)의 일화는 <구당서>, <신당서> 등 중국과 <삼국사기> 등 한국 사서에 자세하게 나오는데요. 당나라 현종(재위 712~756)이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면서 두가지를 당부했다는 겁니다. “신라는 군자의 나라란다. 그들에게 대국(중국)의 유교가 융성함을 자랑해라.” 현종의 또 다른 당부가 있었습니다. “당의 바둑 실력을 뽐내고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현종은) 신라인들이 바둑을 잘 둔다고 하여 (바둑을 잘 두는) 양계응을 부사로 삼아 보냈다. 신라의 고수들이 모두 그의 아래에서 나왔다. 이때 왕(효성왕)이 당나라 사절단에게 금·보물·약품 등을 하사했다.”(<삼국사기>, <구당서>, <신당서>) 당나라는 당시 ‘기대조(棋待詔)’라고 하는 제도를 두었는데요. 요즘의 전문기사제도 같은 것이죠. 당대 신라-당나라 최고수 간의 반상대결로 서라벌 시내가 들썩거렸을 것 같습니다. <구당서>, <신당서> 등 중국 사료는 “신라의 바둑 수준은 양계응보다 낮았다”면서 “양계응 등이 신라인들로부터 대단한 존경을 받았다”고 했는데요. 신라 고수들이 일방적인 패배를 당했다는 걸까요. 2006년 분황사에서 15줄짜리 바둑판이 출토됐는데요. 당시 당나라에서는 19줄 바둑을 두고 있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15줄 바둑에 익숙했던 신라의 고수들이 19줄 바둑으로 무장한 당나라 바둑기사들에게 연전연패한 것은 아닐까요. 8세기 중반에 조성된 투르판 아스타나 187호 묘에 그려져 있는 ‘바둑두는 여성’. 당나라 시대부터 여성들도 바둑을 두었다는 실증 자료다.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당나라에서 유학한 신라 바둑기사의 실력이 대단했다는 문헌 기록도 있습니다. 즉 조선의 실학자 이덕무(1741~1793)의 <청장관전서> 등은 당나라 시를 모은 전집(<전당시>·1705년 편찬)에 등장하는 시 한수를 소개했는데요. 당나라 시인 장교(생몰년 미상)가 신라로 귀국하는 ‘기대조’ 박구(생몰년 미상)를 전송하는 시(‘송기대조박구귀신라·送棋待詔朴球歸新羅’)입니다. “해동(신라)에 그대의 적수 누가 있을까(海東誰敵手). 고국에 돌아가면 바둑 둘 상대가 없어 외로우리(歸去道應孤). 당나라 대궐에 새로운 묘수 전파하고서(闕下傳新勢) 귀국하는 뱃전에서 옛 기보 펼쳐보네(船中覆舊圖)….” 신라판 최정 9단 그렇다 해도 ‘바둑을 신라공주까지 즐겼을까’ 하고 회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분들도 있겠죠. 하지만 ‘바둑이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등식은 어디서 나온 겁니까. 근거가 없습니다. 실제로 8세기 중반에 조성된 투르판 아스타나 187호 묘에는 ‘바둑 두는 여성 그림(위기사녀도·圍棋仕女圖)’이 그려져 있거든요. 경주는 실크로드의 가장 동쪽 도시잖습니까. 신라 여성들이라고 바둑을 두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쪽샘 44호분에서는 공주의 수의(壽衣)에 장식한 것으로 보이는 운모(雲母)가 눈에 띄는데요. 도교에서 운모는 장기간 복용하면 불로장생을 할 수 있는 선약으로 인식됩니다. 이를 두고 바둑돌과 연관짓기도 합니다. 즉 ‘바둑=신선놀음’이라 했잖습니까. 결국 바둑돌과 운모의 등장을 도교의식과 연결지을 수 있지 않냐는 해석도 나옵니다. 이 대목에서 요즘 세계 여성 바둑계를 평정하고 있고, 정상급 남자 기사들과도 대등한 실력을 뽐내는 최정 9단을 떠올리게 되네요. 쪽샘 44호분의 주인공을 ‘신라판 최정 9단’으로 일컬어도 좋지 않을까요. 벌써 6년이 훌쩍 지났죠. 2016년 1월 인공지능(AI) 알파고가 ‘신의 경지(入神·9단)’에 도달했다는 이세돌 9단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였죠. 지금 와서는 어떻습니까. 최정상급 프로 9단도 이제는 2~3점을 깔고 둬야 겨우 인공지능에 맞설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죠. 그러나 인공지능은 인공지능이고, 인간이 돌을 놓는 한 바둑은 인간의 영역입니다. 그런 면에서 인간이 인공지능 프로그램인 ‘알사범(알파고 사범)’에게 바둑을 배우고, 인공지능이 매기는 승률그래프에 일희일비하는 모습은 좀 안타깝더라고요.
이기환의 Hi-story
[이기환의 Hi-story](19)어떻게 돌아왔나, 사라진 ‘신라의 미소’(2022. 01. 21 15:21)
2022. 01. 21 15:21 문화/과학
충남 서산 가야산 계곡의 큰 바위에 새긴 마애삼존불을 흔히 ‘백제의 미소’라 하죠. 세분 부처님의 얼굴에 담긴 꾸밈없고 밝고 너그러운 미소가 트레이드 마크입니다. ‘신라의 미소’가 무엇인지도 아시죠. 바로 ‘얼굴무늬 수막새’입니다. ‘신라의 미소’라는 별명을 얻은 얼굴무늬 수막새. 1934년 처음 소개됐다가 38년 만인 1972년 기증 반환됐다./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서산마애삼존불은 바위 벽면에 새겼기 때문에 누구도 가져갈 엄두를 낼 수 없었겠죠. 그러나 이 얼굴무늬 수막새는 동산이잖아요. 일제강점기에 한 일본인 의사의 수중에 들어간 뒤 행방불명됐다가 38년 만인 1972년 극적으로 기증 귀환했습니다. 올해가 ‘잃어버린 신라의 미소’를 되찾은 지 꼭 50주년 되는 해입니다. 이참에 얼굴무늬 수막새의 매력과 극적인 귀환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웃는 낯으로 악귀를 쫓는다? 왜 이 얼굴무늬 수막새를 ‘신라의 미소’라 할까요. 사실 해방 이후 경주 황룡사터 등에서 발굴한 대형 치미와 미륵사지 출토 기와 조각에서도 사람 얼굴 무늬가 보입니다. 기와는 지붕을 덮으려고 점토 등을 가마에서 구워 만든 건축재입니다. 옛사람들은 그렇게 기능적인 측면으로만 보지 않았습니다. 건물의 윗부분에 있으면서 하늘과 땅 그리고 신과 인간의 세계를 구분 짓는 장치로 인식했습니다. 옛사람들은 하늘과 맞닿은 건축물의 경계선을 다양한 문양을 새긴 기와로 장식했는데요. 기와에 건축물의 위엄을 높이고 재앙을 피했으며, 복을 바라는 주술적인 의미를 담았습니다. 보통은 무서운 동물이나 도깨비 문양(귀면문) 기와를 주로 썼습니다. 건축물에 들어오는 나쁜 기운을 물리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죠. 특히 기왓골의 끝을 메워 보호하고 장식하는 수막새는 이러한 ‘벽사(?邪·사악한 기운을 뿌리침)’의 의미를 담아 더욱 험상궂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더러 사람 얼굴을 새긴 기와들도 보이기는 합니다. 이 ‘신라의 미소’ 수막새를 보십시오. 어디 ‘벽사’의 의미로 만든 것 같습니까. 저런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무슨 사악한 기운을 쫓는다는 말입니까. 이상하죠. 연구자들은 이게 바로 매력이라고 합니다. 도깨비 형상 및 동물무늬 기와는 눈을 부라리고 이빨을 드러내 병과 불행을 몰고 오는 악령을 막으려 하죠. 진짜 악귀라면 웬만한 도깨비나 동물 얼굴쯤은 얼마든지 깔아뭉갤 수 있다는 겁니다. 얼굴무늬 수막새는 이 점을 노립니다. 험상궂은 표정 대신 넉넉한 미소로 사악한 기운을 돌려보낸다는 거죠. ‘난 당신을 해코지할 생각이 없어. 오히려 환대하니 당신(악령)도 날 해치지 마’ 하고 온화한 웃음으로 맞이합니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는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악귀도 경계를 풀며 ‘피식’거리며 물러날 수 있다는 거죠. 얼굴무늬 수막새에는 이렇게 신라인들의 기발한 해학이 녹아 있습니다. 비대칭 얼굴의 미소 수막새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볼까요. 진흙의 함유량이 일반 기와보다 많고 매우 단단합니다. 기본적으로는 사람 얼굴이 음각된 목제틀에 넣고 찍어냈을 텐데요. 다른 수막새와는 다소 다릅니다. 한가운데 얼굴면은 틀로 만든 흔적이 없고, 기와 장인이 자기 손끝으로 눌러 세부를 표현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반 기와와는 달리 양쪽 눈과 광대뼈가 비대칭을 이루죠. 왜 좌우 얼굴이 완전 대칭인 사람은 드물지 않습니까. 그러니 수막새의 얼굴은 매우 자연스럽고, 그래서 더욱 인간적이라는 겁니다. 튀어나온 눈과 큼직한 코, 도톰한 입술이 눈에 띄는데요. 무엇보다 위로 올린 입가의 천진난만한 미소가 압권입니다. 덕분에 ‘신라의 미소’라는 수식어가 붙은 거죠. 누가 이 기와를 만들었을까요. 수막새에 제작자를 새기지 않았으니 특정할 수는 없겠지만, 뭔가 짚이는 건 있습니다. 신라시대에 활약한 소조(塑造·조형미술)의 대가인 ‘양지 스님’이 수상쩍습니다. 이 수막새를 발굴한 곳은 영묘사터(처음에는 흥륜사터라고 잘못 지목)였는데요. ‘영묘사’는 선덕여왕(재위 632~647)이 창건(635)한 절입니다. 이 영묘사에 각종 소상(塑像·흙으로 빚어 만든 형상)을 만든 조각가가 있었는데, 그분이 바로 양지(良志) 스님이었습니다. <삼국유사>는 “여러가지 기예에 통달한 양지는 영묘사의 장육삼존상과 천왕상, 벽돌탑의 기와 그리고 사천왕사 탑 밑의 팔부신장 등을 제작했다”(‘의해·양지사석’)라고 기록했습니다. 양지는 ‘조형미술 전문’ 조각가였음이 분명합니다. 실제로 영묘사터에서 출토한 얼굴무늬 수막새를 비롯해 사천왕사에서 확인한 녹유신장상 등이 양지 스님이나 혹은 그의 유파가 남긴 작품일 가능성이 크다는 겁니다. 박일훈 전 국립경주박물관장과 주선자 오사카 긴타로, 소장자인 다나카 도시노부 등 3자가 주고받은 편지. 모두 10여차례 편지를 주고받은 끝에 얼굴무늬 수막새 기증을 결정했다./허형욱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박일훈 전 국립경주박물관장 유족 제공 잃어버린 ‘신라의 미소’ 이렇게 소박하고 천진난만한 ‘신라의 미소’를 영영 잃어버릴 뻔했다고요, 어찌 된 일일까요. 193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죠. 그해 6월 1일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조선’ 229호에 흥미로운 글이 실립니다.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1877~1974년 이후 사망)라는 인물이 오사카 로쿠손(大坂六村)이라는 필명으로 쓴 글(‘신라의 가면와·假面瓦’)인데요. 기와의 사진을 곁들인 이 글은 “이 기와가 경주 야마구치(山口) 의원의 의사인 다나카 도시노부(田中敏信)가 구리하라(栗原) 골동품상에서 몇개월 전에 구입한 유물”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오사카는 “경주 출토의 신라 기와는 다종다양한 무늬가 수준급이라 자랑할 만하지만, 이런 가면와는 단 하나도 출토되지 않았다”면서 “이 와당의 출현은 신라 예술 연구상 귀중한 자료의 하나”라고 극찬했습니다. 오사카는 소장자인 다나카의 허락을 얻어 이 기와를 소개했노라고 마무리했습니다. 수막새의 소장자라는 다나카 도시노부(1905~1993)는 누구일까요. 1933년 오사카(大阪) 의대를 수석 졸업한 뒤 조선으로 건너와 경주군 공의(公醫)로 근무했는데요. 다나카가 근무한 야마구치 의원 건물은 현재의 화랑수련원 자리(경주 시내 동부동 경찰서 건너)였습니다. 일제강점기의 사진엽서를 보면 병원의 ‘취미실’이라는 곳이 있고, 그곳에 신라 기와를 비롯한 많은 문화재를 진열된 모습이 보입니다. 다나카가 이 무렵 얼굴무늬 수막새를 비롯한 다수의 신라 기와를 수집했을 겁니다. 소장자인 다나카의 동의를 얻어 수막새를 소개한 오사카 긴타로가 누구인지도 궁금하네요. 1915~1930년 사이 경주공립보통학교(현재 계림초등학교)에서 교사-교장으로 근무했다가 정년 퇴임했고요. 이후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국립경주박물관 전신)에서 근무하면서 1938년부터 해방이 될 때까지 제3대 경주분관장을 지냈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지역에서 출토된 기와에 표현한 사람 얼굴무늬. 미소 짓는 얼굴을 새긴 기와는 ‘얼굴무늬 수막새’가 유일하다.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이렇게 소개된 얼굴무늬 수막새는 3개월 뒤인 1934년 9월 고고학자인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1881~1938)와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1890~1983)의 보고서(<신라고와의 연구>·제13책)에도 도판과 설명문이 실렸습니다. 이후 얼굴무늬 수막새의 존재는 잊힙니다. 소장자인 다나카가 1940년 귀국한 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까지 필리핀 전선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했기 때문입니다. 이후의 행적을 까맣게 잊은 거죠. 96세 스승에게 들은 낭보 1972년 2월 15일 당시 박일훈 국립경주박물관장(1913~1975)이 나라(奈良) 시장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합니다. 박 관장은 1920년대 말 경주공립보통학교를 다녔거든요. 이때는 오사카 긴타로가 이 학교의 교사였으니 박일훈과는 스승·제자 사이였습니다. 이런 인연 때문에 박일훈은 스승이 관장으로 있던 경주분관(박물관)에서 근무했고요. 박일훈 관장은 일본 방문 길에 옛 스승을 찾았습니다. 오사카는 당시 96세의 고령이었답니다.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주로 1930년대에 공유했던 신라 문화 이야기의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이때 박일훈 관장의 뇌리에 얼굴무늬 수막새가 떠올랐습니다. “참! 예전에 선생님이 소개한 인면문와당(얼굴무늬 수막새), 지금 어디 있나요?” 96세 노령의 오사카가 뜻밖의 대답을 했습니다. “(소장자인) 다나카가 지금 기타큐슈(北九州)에서 개업의사로 일하고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뜻밖의 말을 들은 박일훈 관장의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선생님이 그 와당을 경주박물관으로 기증하도록 주선하면 어떻겠습니까. 그 와당은 단 한개뿐인 귀중한 자료인데 개인이 소장하면 바로 사장(死藏)이 되잖습니까. 그러니 곧 신축할 경주박물관에 기증한다면 제자리를 찾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갑자기 조바심이 난 박 관장은 96세 스승에게 매달렸습니다. 박일훈 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이 얼굴무늬 수막새를 살펴보고 있다. /박일훈 관장 유족 제공 “만약 기증한다면 신축 경주박물관의 개설기념으로 진열할 수 있습니다. 제 개인으로 봐서도 내년(1973년)이면 정년퇴직인데, 최후의 업적으로 남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정년퇴임의 업적으로 삼겠다”는 제자의 간곡한 부탁에 오사카는 결국 “알았네. 내가 다나카에게 (기증을 권유하는) 편지를 써보겠네” 약속했습니다. 박 관장은 다나카가 이 얼굴무늬 수막새를 100엔에 구입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요. 1930년대 기와집 한채 값이 1000원 정도였거든요. 깨진 기와를 거금을 들여 샀다는 얘기를 듣고 박 관장은 ‘기증 반환은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에 사실상 체념하고 귀국했다고 합니다. 신라를 대표하는 얼굴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귀국한 박일훈 관장에게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는데요. “다나카가 기증 의사를 밝혔다”는 오사카의 편지를 받은 겁니다. 이후 박일훈 관장-오사카 긴타로-다나카 도시노부 등 3자가 10여차례 편지를 주고받은 끝에 기증을 결정했습니다. 결국 1972년 10월 14일 경주를 방문한 다나카 부부가 이 수막새를 국립경주박물관에 기증했습니다. 다나카는 기증서에서 “보는 이의 마음 깊이 감명을 주는 기와를 작업한 와공의 절절한 정성을 생각할 때 느끼는 바가 있어 신라의 국토에 안주(安住)의 땅을 줘야겠다고 생각했다”고 기증 이유를 밝혔습니다. 잊힌, 아니 영영 잃어버릴 수 있었던 ‘신라의 미소’를 그렇게 되찾았습니다. 이 미소는 전 세계를 대상으로 물건을 팔아야 하는 글로벌 기업의 심볼마크가 됐는데요. 얼굴무늬 수막새를 ‘과거의 얼굴’로, 그것에 영감을 얻어 제정한 심벌마크를 ‘미래의 얼굴’로 디자인했습니다. 기업의 얼굴인 ‘CI(Corporate Identity)’는 디자인이나 미학의 측면에서도 고객의 시선을 끄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요. 1400년이나 묵은, 고리타분한 구시대의 유물이 전 세계를 대상으로 물건을 팔아야 하는 글로벌 기업의 CI에 깊은 영감을 주었던 거죠. 그뿐이 아니죠. 1998년 열린 경주 엑스포의 공식 심벌마크도 ‘얼굴무늬 수막새’였습니다. 지금도 경주와 신라를 대표하는 상징 얼굴이 바로 얼굴무늬 수막새입니다. 경주 시내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도 얼굴무늬 수막새를 새긴 이미지 홍보물이 걸려 있죠. 돌이켜보면 1973년 정년 퇴임을 앞둔 박일훈 관장으로서도 얼굴무늬 수막새의 귀환은 그야말로 마지막 업적이 됐습니다. 박 관장뿐이 아니죠. 사실 일제의 강제병합이 없었다면 이 땅의 수많은 문화유산이 일본으로 건너갈 이유가 없었죠. 일본인의 원죄를 고려한다 해도 오사카와 다나카는 그래도 말년에 한국을 위해 ‘기증 반환’이라는 선물을 안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사카는 96세 고령임에도 기증을 위해 다리를 놓아줬고, 다나카는 내주지 않아도 될 소장품을 선뜻 내놓았으니까요. 특히 오사카 긴타로는 초등학교 교장 시절인 1921년 대서소를 운영했던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를 도와 금관총을 무단발굴하는 잘못을 저질렀거든요. 이때의 금관총 발굴은 전문가도 아닌 아마추어끼리 졸속으로 끝냈다 해서 많은 비판을 받았는데요. 오사카로서는 그나마 말년에 수막새의 기증을 위해 다리를 놓은 것으로 조금이나마 용서를 구했다고나 할까요.
이기환의 Hi-story

레이디경향(총 11 건 검색)

‘석양 명소’ 신라스테이 해운대 루프톱 수영장 조기 개장
2024. 06. 20 18:00 레저/여행
신라스테이 해운대 루프톱 야외 수영장 신라스테이 해운대가 때 이른 더위에 루프톱 야외 수영장을 앞당겨 개장했다. 전국적으로 폭염이 이어지는 가운데, 신라스테이 해운대는 평소보다 보름 앞서 루프톱 야외 수영장을 오픈했다고 20일 밝혔다. 특히 올해는 신라스테이 창립 10주년을 맞아 투숙객이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도록 무료로 개방하기로 했다. 신라스테이 해운대의 루프톱 야외 수영장은 여름 시즌에만 한정 운영되는 부대시설로, 올해는 8월 31일까지 운영할 예정이다. 수영장은 호텔 최상층인 18층에 위치해 탁 트인 해운대 바다와 석양을 조망할 수 있어 이용객에게 인기가 높다. 2017년 4월 개관한 신라스테이 해운대는 해운대 해변 인근에 위치에 407개의 객실 중 절반 이상이 오션뷰이며, 루프톱에 위치한 야외 수영장에서 바다를 조망할 수 있다. 야외 수영장이 위치한 18층 루프톱에는 핀란드식 사우나, 풀 사이드바도 있어 수영과 휴식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 피톤치드 성분과 자연의 향기가 나는 핀란드식 사우나는 수영을 즐긴 뒤 지친 몸을 풀기에 좋다. 풀 사이드바에서는 하몽 토마토 피자, 폭립과 감자튀김 등 허기를 달랠 메뉴와 하이볼과 생맥주 등 다양한 음료도 함께 판매한다.
신라스테이 10주년 기념 이벤트 풍성
2024. 06. 06 12:20 레저/여행
신라스테이가 회사 설립 10주년을 맞아 풍성한 혜택을 담은 10주년 기념 패키지를 출시했다. 신라스테이가 창립 10주년을 맞아 선보인 ‘해피 스토리 오브 텐 이어스(Happy Story of Ten years)’ 패키지는 포토 키오스크 촬영부터 경품 응모권 등 풍성한 혜택을 담아냈다. 오는 6월 10일부터 7월 10일까지 이용 가능한 이번 패키지는 객실 1박, 당일 객실료 무료 행운이 담긴 럭키드로 응모권 1매, 포토 키오스크 무제한 이용, 조식 1인당 5000원 이용권으로 구성됐으며, 패키지 이용 고객은 투숙 당일 신라스테이 체크인 시 럭키드로 경품 응모권을 수령하게 된다. 럭키드로는 매일 오후 8시부터 30분 동안 프런트 데스크 로비에서 추첨이 진행된다. 숫자 10이 적힌 볼을 뽑은 고객에게는 각 색상별로 1박 객실료 전액 무료, 1박 객실료 50% 할인, 신라스테이 시그너처 베어 1개, 전지점 뷔페 50% 할인권 등 푸짐한 경품을 제공한다. 신라스테이를 찾는 고객들과 10주년을 함께 축하하기 위한 ‘포토 키오스크 이벤트’도 진행한다. 패키지 기간 동안 전국 15개 신라스테이를 찾는 모든 고객이 로비에 설치된 포토 키오스크에서 사진을 인화할 수 있으며, 특히 10주년 기념 패키지 투숙객은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다. 한편, 신라스테이는 지난 10년 동안 전국에 15개 지점을 오픈하며, 대한민국 대표 비지니스호텔로 자리잡고 있다. 지난달에는 첫 레저형 호텔인 ‘신라스테이 플러스’를 제주 이호테우에 선보이며 제주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받고 있다.
신라면세점, ‘김포공항 K약과’ 선보인다
2023. 12. 19 10:06 레저/여행
신라면세점이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김포공항 K약과’를 선보인다. 신라면세점이 이달 20일부터 김포공항에서 판매하는 제품은 약과에 파운드케이크를 조합한 제품이다. 육각형의 버터케이크에 미니 약과를 토핑한 형태로, 브라우니 맛과 버터 맛 2종이 금색 케이스에 개별 포장 방식으로 담겨 있다. 전통한과 제조업체 미송한과와 협업하는 이 제품은 최근 한국공항공사가 실시한 공항 대표 특화상품 공모전에서 당선되면서 출시로 이어졌다. 신라면세점 정동성 김포공항점장은 “올 11월까지 면세점에서 판매된 농식품 실적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배 이상 증가했다”면서 “앞으로 내외국인 고객에게 케이푸드의 우수성을 지속적으로 알리겠다”고 말했다. 김포공항 케이약과
신라시대 장신구’ 현대 주얼리가 됐다
2023. 07. 24 15:02 패션
주얼리브랜드 WOOYOUNGMI(이하 우영미)는 신라의 왕족 문화를 재해석한 23FW 주얼리 컬렉션을 출시했다고 밝혔다. 화려함의 극치에 달하는 신라시대 장신구들이 현대 주얼리로 탄생했다. 주얼리 브랜드 WOOYOUNGMI(이하 우영미)는 신라의 왕족 문화를 재해석한 2023FW 주얼리 컬렉션을 출시했다고 밝혔다. 역사상 가장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고 이야기되는 신라시대는 유럽의 벨에포크 시대와 비견된다. 디자이너 우영미는 신라의 화려한 복식에 대한 탐구와 재해석에 벨에포크의 향수를 더해 이번 시즌을 완성했다. 2023FW 주얼리 컬렉션은 신라 왕족의 화려한 장식 요소로 사용됐던 보석들의 모양을 유지하면서도 핵심 형태만 남겨 이를 조각적 차원으로 확대하였다. 금관총 금관에 장식된 굽은 옥의 모양은 ‘곡옥 체인 네크리스’의 팬던트가 되고 금으로 만들어진 볼드한 형태의 귀걸이와 방울은 모던한 디테일의 귀걸이와 반지로, 섬세한 세공이 감탄을 자아내는 금제드리개는 실버드롭 참으로 표현되며 유니크하고 현대적인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WOOYOUNGMI 제공 또한 분리와 결합이 가능하지만 두 개의 링이 떨어지지 않아 사람 간의 인연을 상징하고 있는 ‘인연반지’ 등 신라의 화려한 세공 기법에서 받은 영감을 모던하고 과감하게 표현한 디자인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과거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어느 때 보다 현대적인 형태의 이번 시즌 컬렉션은 구조적이고 실용적인 접근법으로 만든 벨에포크 감성에 느슨한 영향을 받은 로맨틱 실루엣을 가지고 있는 의상에 리듬감을 주며 2023FW 우영미 컬렉션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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