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총 68 건 검색)
- ‘보수 실용주의자’ 이재명의 금투세 폐지…민주당 정체성 훼손 비판
- 2024. 11. 04 16:27정치
- ... 8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금투세 시행 유예론을 꺼내는 등 스스로 논란을 키웠다. 이 대표의 소위 실용주의 노선도 배경이 됐다. 그는 지난 9월 방송 인터뷰에서는 자신을 “보수에 가까운 실용주의자”라고...
- KGM, 새 브랜드 전략 ‘아름다운 실용주의’ 발표
- 2024. 08. 20 16:48경제
- ... 높은 기대와 신뢰감이 반영된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KGM은 브랜드 전략을 ‘아름다운 실용주의’로 정했다. 옛 쌍용자동차 시절 오프로드를 거침없이 달리던 튼튼하고 강인한 남성적인 이미지에...
- ‘위대한 외교관 잃었다’ 각계 애도 물결…‘냉혈한 실용주의자’ 비판도
- 2023. 11. 30 16:43국제
- ... 비교할 수 없는 통제권을 행사한 외교관이지만, 전략적 이익을 인권보다 우선시하는 냉혈한 실용주의자라는 비난도 받았다”고 전했다. 미국 롤링스톤지는 키신저 전 장관의 부고 기사의 제목으로...
- 헨리키신저부고
- [정동칼럼] 윤석열 정부 실용주의의 허실
- 2022. 07. 05 03:00오피니언
- ... 설 자리가 없다. 윤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에 “국정과제를 세팅하는 가운데 가장 중시해야 하는 것은 실용주의, 그리고 국민의 이익”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토 정상회의에 가서 미국의 편에 서서 중국을...
- 정동칼럼윤석열 대통령나토정상회의 참석실용주의균형전략
스포츠경향(총 2 건 검색)
- 강봉균 전 재경부 장관 별세…철저한 실용주의자였던 그의 공직인생
- 2017. 02. 01 13:59 생활
-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직후 김대중 정부에서 위기 극복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강봉균 전 재정경제부 장관이 지난 31일 별세했다. 향년 74세. 강봉균 전 장관은 최근 췌장암으로 건강 상태가 급속히 악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DJ 정부 시절 정책 브레인으로 통한 경제관료로 IMF 외환위기 여파로 한국 경제가 위기에 몰렸던 1999년 재경부 장관을 지내며 위기 극복을 이끌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 강봉균 재정경제부 장관(가운데)이 경제조정정책회의에 참석한 모습. 왼쪽부터 이헌재 금감위원장, 진념 기획예산처 장관, 강 장관, 전윤철 공정거래위원장, 전철환 한국은행 총재. 경향신문 자료사진 경향신문에 따르면 재경부 장관직에서 물러난 후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을 거쳐 2002년 8월 8일 재보선에서 고향인 전북 군산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했다. 그해 대선 때는 노무현 전 대통령 후보의 경제 분야 공약을 주도했다. 16대 재보선 당선에 이어 17∼18대 내리 국회의원으로 활약했다. 2012년 3월 민주통합당 공천에서 탈락하자 정계 은퇴선언을 했다. 이후 군산대 석좌교수, 건전재정포럼의 대표를 맡으며 경제 원로로서 활동했다. 지난해 4·13 총선 당시에는 새누리당에 입당하며 공동선대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지난해 총선에서 새누리당 공동선대위원장으로 활동했던 강봉균 전 재경부 장관(왼쪽). 경향신문 자료사진 강봉균 전 장관은 대학에 가지 못하고 고등학교 과정에 해당하는 군산사범학교를 졸업했다. 가정 형편 때문에 초등학교 교사로 학비를 벌어 대학에 가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대학입시에서 두번이나 실패했다. 당시 인기가 높은 서울대 화공과와 기계과를 지원했으나 고배를 마셨다. 결국 서울대 상대에 늦깎이로 입학하고서 행정고시 합격을 통해 관가에 발을 내디뎠다. 그는 우리나라 경제개발시대 최고의 요직이라는 경제기획원의 경제기획국장을 4년이나 지냈다. 이어 차관보를 4년 가까이 지냈으며 노동부 차관과 경제기획원 차관, 정보통신부 장관 등을 거쳤다.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 청와대 정책기획수석과 경제수석, 재경부 장관 등 요직에 중용됐다. 외환위기가 발생한 이후 경제수석과 재경부 장관을 지내면서 재벌 개혁, 부실기업과 금융기관 구조조정 등을 이끌었다. 강봉균 전 장관은 철저한 실용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공직사회에서 아이디어가 많은 꾀주머니로 통했다. 1980년대 초 신군부가 경제기획원 고참 과장인 그를 차출하려 했으나 못가겠다고 버틴 일화가 있다. 전두환·노태우 대통령 시절 청와대에서 정식으로 근무한 적이 없다. 다만 한 프로젝트 때문에 한달 정도 일시적으로 일한 게 전부다. 강봉균 전 장관은 지난해 11월 30일 <코리안 미러클 4 : 외환위기의 파고를 넘어> 발간보고회에서 한국 경제 상황에 대한 쓴소리를 쏟아냈다. 이것이 그가 참석했던 마지막 공식 행사였다. 그는 당시 “정치적 안정이 지금 가장 중요하다. 정치적 불확실성만 제거하면 예전의 잠재력을 다시 발견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강 전 장관은 암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음에도 이 책의 편찬위원장을 맡았으며 지난해 말부터 입원 치료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다. 발인은 3일 오전 7시, 장지는 전북 군산 옥구읍 가족묘.
- [비즈&컴퍼니] ‘실용주의 생활보험’눈길
- 2006. 11. 30 22:24 생활
- 오랜만에 만난 선배 언니의 값비싼 옷을 망치거나, 모처럼 큰맘 먹고 찾아간 고급 옷가게에서 입어본 옷의 단추를 떨어뜨린다면 조금은 당혹스럽다. 하지만 이런 어의없는 일을 쉽게 처리하는 방법이 있다. 바로 보험이다. 이는 현대해상이 하이라이프라는 장기보험 브랜드를 리뉴얼하기 위해 새롭게 선보인 TV CF 속 상황이지만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최근 손해보험회사들은 장기보험 브랜드를 개발하면서 생활 구석구석까지 챙길 수 있도록 보장범위를 확대하는 한편 손해가 발생한 만큼 즉시 보상해주도록 실손보장을 강화하고 있다. 이렇게 탄생한 컨셉트가 바로 ‘실용주의생활보험’이다. 일상생활에서 흔히 일어나는 실수들이 모두 보험으로 해결된다면 이 얼마나 실용적일까. 그런 소비자의 바람을 충족시킬 수 있는 하이라이프가 되고 싶은 간절함을 이번 CF에 담은 것. CF 속 주인공은 박진희. 드라마 ‘돌아와요 순애씨’에서 능청스러운 아줌마 역을 톡톡히 소화해냈던 그는 실수를 해도 미워 보이지 않는 이미지 덕에 만장일치로 주인공에 선발됐다. 게다가 그의 밝고 화사한 웃음이 긍정적이고 건강한 하이라이프의 이미지와 딱 맞아떨어진다는 게 제작진의 전언이다. 〈윤대헌기자〉
주간경향(총 4 건 검색)
- [신동호가 만난 사람]이태복 전 보건복지부 장관 “일왕 방한이 실용주의가 아닙니다”(2009. 11. 12 11:51)
- 2009. 11. 12 11:51 사회
- 참 특이한 사람이다. 30대 초반에 반국가단체를 조직한 죄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7년4개월을 복역한 장기수 출신이다. 50대 초반에 청와대 수석비서관과 장관을 지냈고, 정부로부터 청조근정훈장을 받았다. 국가의 존립을 위협했던 무시무시한 범죄자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최고 공적자로. 이렇게 극과 극을 넘나든 인생은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격변기를 산 우리 세대에게는 매우 희귀하다고 말할 정도까지는 안 된다. 그의 특별한 점은 다른 데 있다. 출판사와 신문사를 운영한 이력을 보면 그는 언론인처럼 보인다. 10여 권의 저서를 썼으니 저술가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여러 대학에 출강한 경력으로 봐서 교수라고 불러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모두 아니다. 기자도 작가도 교수도 그의 직업이 아니다. 이태복 전 보건복지부 장관을 인터뷰한 곳은 서울 구로구 신도림동에 있는 (사)인간의대지 사무실이었다. 1996년에 그가 만든 사회복지단체다. 보건복지 행정의 수장을 지내고, 대학 강단에서 노인복지학을 가르치고, 이라는 저서도 내고 했으니 이제 그에 대한 수수께끼 같은 설명을 멈춰도 될 것 같지 않은가. 복지전문가가 틀림없다. 속단하지 마시라. 그의 저서를 보면 다시 헷갈린다. 예를 들면 등이다. 왕년에 그는 학생운동가였고, 현장 노동운동가였다. 조직운동가로 일세를 풍미했으며(이 때문에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흥사단을 기반으로 한 민족운동도 벌였다. 1990년대부터는 엉뚱하게도 빈자일등(貧者一燈), 사랑의 동아줄 잡기 등과 같은 복지운동으로 선회했다. 최근에는 또 국가발전전략 연구에 열심이다. 이 전 장관의 특별한 점이 바로 이것이다. ‘인간의 대지’ ‘5대거품빼기 범국민운동본부’ ‘점핑코리아연구소’ ‘중국 흑룡강성 밀산 항일유적기념비 건립추진위원회’ 등 그가 주도하는 단체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매우 폭넓은 활동을 펼치고 있다. 어느 하나만으로도 벅차고, 또 충분한 것일 터이다. 그는 왜 이런 일들을 하고, 무엇을 꿈꾸고 있을까. 최근에 중국 흑룡강성 밀산에 항일투쟁 기념비를 세우고 오셨더군요. 밀산은 그동안 독립운동 근거지로서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곳인데요. “지금까지 해외 항일운동 기념사업은 상해(上海)임시정부나 안중근·윤봉길 의사와 같은 지명도 높은 인사들 중심으로 이뤄지지 않습니까. 연구도 주로 정치적 면에 비중이 두었지 무장투쟁 부분은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점이 있었죠. 밀산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 독립전쟁의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개척한 곳으로, 3500여 명의 무장병력을 가진 대한독립군단 군영이 주둔한 지역이었습니다.” 이 전 장관은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미산시(蜜山市) 스리와(十里 )라는 지명을 ‘흑룡강성 밀산시 십리와’로 발음하고, 표기도 그렇게 해 달라고 주문했다. 우리와 연고가 깊은 지명이고, 당시에 그렇게 불렀으며, 지금도 현지에서 그렇게 말하거나 적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에 세운 기념비의 비문도 한글 표기를 ‘십리와 항일투쟁 유적지 기념비’라고 했다. 이 글에서도 중국 지명을 같은 취지에 따라 표기하기로 한다. 밀산을 중심으로 이뤄진 한인촌 개척과 독립운동에 대해 좀 설명해 주시죠. “1908년 안창호 선생이 이강 선생을 파견해 독립전쟁 근거지를 물색할 당시 밀산은 한족은 물론 만족도 거의 없는 허허벌판이었습니다. 밀산은 땅이 비옥하고 연해주와 가까워 유사시 쉽게 러시아로 넘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식량 생산은 물론 군사적으로도 유리한 조건이었죠. 그래서 십리와에 500가구 규모의 한인부락을 형성했고, 인근 한흥동(韓興洞) 등지에도 이상설을 중심으로 한 근왕파의 노력으로 한인 집단 거주가 이뤄졌습니다. 그 토대 위에서 대한독립군단의 서일 사령관과 이청천·김좌진 부사령관, 평민 의병 세력을 기반으로 한 홍범도 부대 등의 근거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이죠.” 이런 사업을 하게 된 계기가 무엇입니까. “동포 초청 역사 체험, 항일유적지 탐방 등 민족 사업을 하다가 항일독립운동의 주요 근거지였던 밀산에 대해 아는 사람이 국내에 거의 없고, 그 흔적도 희미해져 가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올해가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거사 100주년이라고 해서 많은 기념행사가 열렸지만 우리는 안 의사의 유해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지요. 그래서 시범사업으로 밀산의 항일유적을 드러내 놓고 국민에게 알릴 수 있는 기념비를 세운다면 항일독립운동의 지평을 넓히고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데 보탬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밀산 항일유적 기념비 건립 사업은 지난해 7월 이 전 장관의 밀산 방문을 계기로 시작됐다. 이 전 장관은 국내에서 1000만원을 모금해 사업비를 지원했고, 밀산시 인민정부는 사업 승인과 부지 제공, 조경과 진입로 공사 등을 해 주었다. 1년 여 만에 높이 2m, 너비 1m의 백옥돌에 한글과 중국어 비문을 새긴 기념비가 밀산시 십리와 마을 뒷동산 소나무 숲에 세워져 지난 10월17일 제막식을 가졌다. 이 전 장관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북만주 밀산 지역의 독립운동에 대한 학술적 재조명과 기념관 건립 등 후속 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내년이 한일병합 100주년인 만큼 여러 가지 관련 사업과 행사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감회가 특별할 것 같은데…. “참 부끄럽고 안타깝습니다. 긴 세월이 지났는데…. 일제 치하 징용 피해자는 물론 독립운동가의 유해 발굴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잖습니까. 우리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 윤동주인데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어떻게 사망했는지에 대해 일본 정부로부터 공식적인 해명을 들은 적이 없잖아요. 요구하지도 않고요. 생체 실험 얘기도 나왔는데 그건 설이고 주장입니다. 안중근 유해 발굴과 관련해서도 중국 당국에 어떻게 해 달라고 요구해야 하거든요. 정부 차원에서 이런 여러 일을 구체화하고 현실화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일왕 방한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일본과의 우호친선을 강화하고 확대해야 한다는 데는 전적으로 찬성합니다. 다만 어떤 상황, 어떤 조건에서 풀어가고 순서를 어떻게 할 거냐가 문제죠. 징용 피해자 문제나 강제로 차출된 조선인 처녀들의 문제. 이걸 위안부라고 표현하는 건 옳지 않다고 봐요. 이런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본 정부 차원에서 협조가 필요합니다. 실제로 보상 문제는 계속 일본 재판부에 의해 거부되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정부가 적극적으로 해야 할 노력은 하지 않은 채 일왕 초청으로 한·일 간 우호친선을 강화하겠다는 것은 정치적이고 정략적인 차원의 접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걸 실용주의라고 잘못 이해하는 듯도 한데, 경제적으로도 봅시다. 대일 무역 역조가 1년에 300억 달러입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구조를 20여 년 동안 방치해 왔지 않습니까. 일본뿐 아니라 중국에도 우리가 요구할 것은 당당하게 요구해야 합니다.” 이 대목에 이르러 이 전 장관은 국가 발전을 위한 거시적 전략과 실용적 대안을 줄줄이 내놓는다. 그는 이런 주장을 등 저서와 ‘이태복의 새벽편지’라는 이메일 칼럼을 통해 줄기차게 펴고 있다. 2007년부터 시작한 5대거품빼기운동도 이런 활동의 일환으로 매우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방안을 담고 있다. 5대 거품은 기름값, 휴대전화 요금, 카드 수수료, 약값, 은행 금리를 말한다. 모두 서민, 영세상인, 소외계층을 위한 운동이다. 지난 4월에 본격화한 ‘노인 틀니 건강보험 적용’ 입법청원 운동이 그 한 예다. “복지 예산을 OECD 기준에 맞게 얼마로 올려야 한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현재의 허술하고 낭비적인 복지시스템을 정비하는 게 더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노인 틀니 건강보험 적용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공동대표이시죠? 왜 노인 틀니 문제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게 됐습니까. “240만명의 노인이 식사 때마다 고통을 겪고 있어요. 참 안타깝습니다. 노인복지회관에 가 보면 노인들이 대개 밥을 말아서 먹는데 예외 없이 이가 문제예요. 어떤 분은 사과를 한번 먹어 봤으면 한이 없겠다고 그래요. 중산층 이상은 임플란트다 뭐다 해서 어떻게든 해결하지만 노후 준비가 안 되고 연금도 없는 영세민은 방법이 없습니다. 원가 20만원 정도인 틀니 가격이 적게는 5배, 많게는 10배 되니까 꿈도 꾸지 못하는 거죠.” 노인 틀니에 건강보험 적용이 잘 안 되는 이유가 뭡니까. “기득권의 벽이 워낙 완강합니다. 노인들의 의견도 은퇴한 분들이라 잘 모아지지 않고요. 대선 때는 다들 당선만 되면 즉시 해 주겠다고 하고선 미적거리고, 국회의원도 보건복지위원만 되면 입장이 싹 바뀌더라고요. 재정 타령에다 ‘핸드백 틀니’ 얘기까지 온갖 이유를 대지만 저는 의지의 문제라고 봅니다. 지금의 폭리 구조를 그대로 가져가는 데서 나온 논리지요. 거품을 빼면 됩니다. 재정은 의사들의 수가를 적절히 인정해 줘도 연 3000억원이면 충분하고, 이는 연간 2조원에 이르는 약값 리베이트와 2조~3조원씩 폭증하는 건강보험료의 일부만 줄여도 해결되는 겁니다.” ‘핸드백 틀니’는 일본에서 노인 틀니에 보험을 적용한 뒤 한 사람이 여러 개의 틀니를 갖고 다닌 것을 비꼰 말이다. 이런 부작용도 핑곗거리에 불과하다는 게 이 전 장관의 주장이다. 제도적 장치를 통해 충분히 막을 수 있기 때문이란다. ‘노인 틀니 건강보험 적용’ 입법청원서는 지난 7월 국회에 제출됐으나 아직 처리되지 않고 있다. 이명박 정부 들어 복지정책이 후퇴했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정부 전체 예산 증가분으로 볼 때는 복지 예산 규모가 그 수준만큼 올라가지 않았다는 것이고, 매년 증가분으로 보면 비슷하게 올라간다고 봐요. 복지 예산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준에 맞게 얼마로 올려야 한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현재의 허술하고 낭비적인 복지시스템을 정비하는 게 더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도 못한 부분이죠. 예를 들어 가장 대표적인 한국의 복지제도라고 할 수 있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를 봐도 그래요. 현재의 최저생계비 기준이나 부양가족 문제와 같은 부분이 해결되기 전에는 예산을 늘려봐야 소용이 없어요. 가짜들도 괜히 끼어들어 와 있는 거죠. 가짜를 걸러내는 작업이 먼저입니다.” 복지 예산에 끼어 있는 가짜가 구체적으로 어떤 게 있습니까. “실제 점검하고 확인해 보면 그런 게 많아요. 주변에도 멀쩡한 사람이 장애인 차량을 끌고 다니고 있는데 그런 사람에게 주는 혜택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전에 전문의사가 아니라 아무 의사가 발급한 진단서를 갖고 장애인 등록을 해 줬지요. 문제가 많아서 지금은 제도가 바뀌었지만…. 그래서 장애인 차량을 끌고 사냥하러 다니는 일이 공공연하게 벌어졌죠. 이런 것이 복지제도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거죠.” 이 전 장관은 김대중 정부가 의약분업 강행으로 극심한 후유증을 겪던 2001년 3월 청와대 복지노동수석비서관을 맡았다. 그전에 그는 의약분업 유보를 강력히 주장했고, 외환위기 극복을 위한 정부 정책에도 매우 비판자적 입장에 있었다. 당시 그는 전력 시비와 ‘색깔론’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가 김대중 정부 후반기 복지 정책과 행정을 책임지게 된 배경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김대중 정부에 참여하면서 복지 분야를 맡은 배경이 궁금합니다. “국민의 정부는 민주화 진영의 일부가 정권을 담당했던 것이고, 정책의 성공과 실패는 민주화 진영 모두의 책임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문제잖아요. 그래서 계속 문제 제기를 하고 얘기를 했는데도 전혀 듣지 않았습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강요한 초긴축 고금리 정책은 우리 경제를 무너뜨리는 것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자금난에 빠져 있는 기업을 죽이는 정책이었거든요. 그래서 얼마나 헐값에 국부 유출이 있었습니까. 의약분업도 똑같습니다. 2년 동안 철저히 준비하고 시행해야 하는데 그냥 강행해 대파탄이 난 것이죠. 그때 정부 내부의 분위기는 어땠느냐 하면 ‘정상회담이 이뤄지면 5년 동안 아무 문제가 없다’는 엉뚱한 판단을 하고 있었어요. 제가 그때 경고했어요. ‘이건 생활의 문제이고, 남북정상회담은 꿈의 문제다. 국민들에게 꿈을 주는 건 굉장히 필요하고 좋은 일이지만 생활의 문제가 생길 경우 즉각적인 이반이 생긴다’라고요. 일이 터진 뒤에야 ‘잘못했다, 도와달라’고 하더군요.” 그동안의 이력으로 볼 때는 노동전문가인데 뒤늦게 복지전문가로 ‘전공’을 바꾼 셈이 아닙니까. 복지 문제에 관심을 가진 까닭이 무엇입니까. “1990년대 들어 대규모 사업장에서는 임금협상이나 단체협약 같은 제도가 정착하고 노동자들의 생활도 어느 정도 안정이 되기 시작했지요. 그러나 영세기업이나 아예 노조가 없는 곳처럼 그 틀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소외되는 노동자가 많아졌습니다. 1993년에 노동계 안에서 유명한 ‘밥그릇 논쟁’이라는 게 있었죠. 나는 개별 노동조합의 밥그릇도 소중하고 지켜나갈 필요가 있지만 동시에 국민 전체의 밥그릇, 즉 개별 국민의 어려움과 고통도 함께 풀어갈 줄 아는 문제의식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역할을 노동조합이 할 것을 주장하고 또 강력히 요구했던 거죠. 그걸 구체화한 것이 사랑의 동아줄 잡기 운동, 빈자일등 캠페인입니다.” 복지와 노동은 함께 갈 수 있는 운동입니까. “참 어렵더라고요. 노조 내부에 전투적 분위기가 여전히 남아 있고, 그게 마치 노조운동의 올바른 길인 양 착각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죠. 나는 우리가 싸워야 될 때 싸우더라도 그렇지 않을 때에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도 더 가져야 한다는 얘기를 많이 했죠. 그런 작업을 하면서 노동운동의 일부로 복지 문제를 바라봐서는 안 되겠더군요. 복지는 복지 영역대로 틀을 잡아서 따로 갈 필요가 있더라고요.” 노동, 복지, 국가, 민족…. 이 전 장관의 말과 행동에서 가장 많이 묻어나는 이런 주제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가장 높은 데서 바라보고 한없이 낮은 곳으로 다가가도록 그를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을 법하다. 도산이 5만 달러의 기금을 모아 밀산에 한인 정착촌을 세운 의도를 물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3·1운동 직후 도산은 ‘세계모범공화국을 세우고 싶다’고 했습니다. 도산은 꿈을 갖고 있었습니다. 저는 어떤 일에 부닥쳤을 때 ‘도산이라면 어떻게 판단했을까’라는 생각을 늘 합니다.”
- 신동호가 만난 사람
- [시사와 문화]청소년 프로그램의 실용주의(2009. 11. 12 11:43)
- 2009. 11. 12 11:43 문화/과학
- <공부의 제왕>(위)과 ‘해리 포터’ 시리즈 3편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흔히 미디어 비평 프로그램에서는 방송에서 청소년 프로가 없어지는 현실을 개탄한다. 얼마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이는 이명박 정부 들어 더 심해졌기 때문이다. 그나마 있던 프로그램이 없어지고, 할애된 시간대에는 학습과 어학에 관한 프로그램이 차지했다. 예컨대 청소년 인권을 다룬 MBC <느낌표> 같은 프로는 없고 <공부의 제왕>이나 <꼴찌탈출>과 같은 프로가 등장했다. 비중 있는 케이블 방송에서는 수능 백점 올려주기 프로도 방송됐다. EBS도 문화 대신 영어 학습 프로그램을 강화했다. 이른바 실용주의의 영향이었다. 한편으로 청소년 프로란 방송 범주를 애써 만들어야 하는가 싶기도 하다. 청소년이라는 딱지는 대개 불완전하고 불안한 존재를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청소년은 교육시키고 인도하거나 배려해야 하는 비주체적인 존재들로 상정된다. 이런 때 청소년 프로그램이 청소년을 중심에 두는 듯 싶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게 된다. 따라서 몰입감은 떨어지게 된다. 이 때문에 청소년 프로는 명분상 의욕적으로 추진되고 낮은 시청률 때문에 고전하다가 슬그머니 사라진다. 악순환은 두 가지 축을 기반으로 이뤄진다. 즉 명분과 가치를 내세우고 실질적으로 인공낙원 같은 기성세대의 편견이 작용한다. 무엇보다 청소년은 공통적인 상징이나 매개고리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최근 청소년 문학에 활력을 넣고 있는 소설인 <완득이>와 <위저드 베이커리>는 ‘1318’이라는 범주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해외 소설 <모모>와 ‘해리포터’ 시리즈, <연금술사> <연을 쫓는 아이> <리버보이>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우리 청소년 문학이나 방송 프로그램이 존재해도 착한 결말에다 학교와 가족 안의 소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영국을 중심으로 한 ‘영 어덜트’(Young-adult)는 리얼리티만을 강조하지 않는다. 착한 결말로 흐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스릴러·판타지·역사물·공상과학 등 장르를 넘나들고, 성폭행·강간·흉악범죄 등의 소재도 가리지 않는다. 공영방송에서 이를 적절하게 걸러야 할 필요는 있지만 핵심은 전달 방식과 메시지다. 청소년 관련 방송 프로는 세 가지다. 우선 주인공은 청소년이고, 주제나 소재가 청소년과 직접적이다. 두 번째는 주인공과 주제 및 소재가 청소년에 관한 것이 아니어도 청소년을 겨냥한 것이다. 세 번째는 애초에 청소년을 염두에 두지는 않았지만 청소년들이 선호하는 콘텐츠이다. 이는 청소년 문학에도 해당되는 것이다. 어쨌든 문학이나 방송프로는 이 세 가지를 포괄해야 한다. 이것은 ‘키덜트’로 귀결될 수 있다. 탈경계 시대에 키덜트와 이어지는 청소년 범주는 하나의 매개 고리다. 이것은 인간 모두에게 해당되는 보편적 영역이기 때문이다. 세계 대중문화산업을 휩쓰는 킬러콘텐츠는 모두 이 ‘키덜트’에서 비롯했다. 따라서 방송도 청소년이라는 당위적인 가치에만 집중할 때 악순환의 늪에 빠지고 실용주의에 쉽게 두 손을 들게 된다. 김헌식<문화평론가>
- 시사와 문화
- [커버스토리]“이명박 정부 철학은 실용주의 아니다”(2009. 02. 19)
- 2009. 02. 19 사회
- “나는 고발한다, 이명박 정부를” 철학분야 이병창 동아대 철학과 교수 1954년생. ‘헤겔정신현상학에서 정신 개념’을 주제로 서울대 철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아대에서 사회문화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김석구 기자 “뒤죽박죽이다.” 이병창 동아대 철학과 교수가 철학적 관점에서 보는 이명박 정부의 성격이다. ‘실용주의’라는 주장도 나왔지만 실용주의의 밑바닥에는 국민 전체를 위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그는 “많은 사람이 도대체 누구를 위한 실용인지 의심스러워한다”면서 “소수재벌이나 권력자만을 위한 실용 아니냐. 그렇다면 그게 자기이익 논리지 무슨 실용이냐고들 말한다”고 이 정부의 철학을 고발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실용주의의 전제는 합리주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며, 가능하면 국민을 설득해 끌고가는 것이 대전제다. “지난해 촛불집회도 그렇고, 미네르바의 구속이나 바로 얼마 전 있었던 용산 참사…. 이건 강압의 유혹과 편의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닌가.” 이 교수는 지금까지 ‘학자의 삶’에 충실했다. 지금도 실천을 하더라도 학문적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믿고 있다. 현실 정치·정파에 가담하거나 행동·실천적 조직은 거의 거리를 두어왔다. 하지만 그는 최근 철학학회 내부게시판에 철학적 관점에서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그 이유에 대해 이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물론 연구와 글을 쓰는 작업은 늘 연관된다. 과거 노무현 정권도 비판했다. 그때는 거리낌이 없었다. 요즘은 절대로 그렇게 안 한다. 이미 스스로 검열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까지는 글이 나오고 있는데 지금의 경향이 더 심화하면 아예 글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게 무섭다.” 그는 학문에서 이미 내면 검열이 시작되고 있다고 말했다. “많은 학자가 숨이 막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전두환·박정희 독재 시대가 연상되니까 그런 것이다. 철학을 비롯해 학문이라는 것은 사실 내적 자유가 굉장히 중요하다. 자유롭게 상상하고 사고해야 새로운 것을 포착할 수 있는데 억압적 조건에서는 주어진 것을 되풀이하거나 외울 수밖에 없다.” 이 교수에 따르면 전두환 시절까지 한국 철학이 딱 그랬다. 모방의 철학이었다. 지난 10년간, 그래도 시민적 자유가 존재했다. 숨통이 틔었다. 어느 정도 학문이 뭔가 생산할 것 같고, 새로운 것이 나올 것 같은 ‘문턱’에 올라섰다. 그러다 딱 막혀버린 느낌이라는 것이다. 철학계는 딱히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있지 않다고 이 교수는 말한다. 이를테면 경제학 하면 박현채, 역사학 하면 강만길·김용섭 식으로 이야기할 만한 ‘진보 쪽 태두’가 없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특징이었다. 보수적 경향은 아카데미즘이 강했고, 그래도 진보적인 부분은 현실 지향적이지만 대화채널이 서로 단절되진 않았다. 그는 이명박 정부가 ‘뒤죽박죽’인 이유에 대해 “이 정부는 처음에 극우파도 아니고, 자신들의 시각에서 볼 때 좌파도 아닌 실용주의를 표방했고 그걸 국민이 기대했던 면이 있다”면서 “그런데 막상 정권을 장악하고 그 포지션을 지키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존 듀이로 대표되는 미국식 실용주의는 미국 민주당의 주요한 이념적 기초다. 이명박 정부의 철학과는 궤가 다르다. “이 정권이 착각하고 있는 게, 목표만 실용주의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그건 실용주의가 아니다. 끝까지 설득하고 타협 속에서 합리적인 대안을 모색해 나오는 길이 실용주의다. 힘으로 밀어붙이려면 실용주의적 사고가 무슨 필요가 있나. 그게 독재지.”
- 표지 이야기
- [秘錄환경운동25년]실용주의 깃발 든 ‘리우회의 모범생’(2006. 12. 19)
- 2006. 12. 19 사회
- 환경개발센터 경실련의 문어발식 운동영역 확장 논란 불구 지속가능발전·환경정의 실천 토대 구축 경실련 산하기구로 출발한 환경개발센터는 리우회의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은 환경운동단체였다. ‘우리의 환경 우리 손으로!’ 는 유엔환경개발회의 한국위원회의 슬로건이었다. 20세기 최대의 회의인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유엔환경개발회의(UNCED)가 폐막된 지 5개월 지나 국내에서 특이한 환경운동단체가 하나 탄생한다. 이 단체는 리우회의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은 듯 이름부터가 특별했다. 1992년 11월 14일 창립식을 가진 ‘환경개발센터’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하 경실련)의 산하 기구로 출발했다. 여기에는 미묘한 복선이 있다. 경실련이라면 당시 한국에서 가장 잘 나가던 시민운동단체였다. 환경개발센터의 출범은 경실련이 환경운동에 본격적으로 손을 대겠다는 뜻이었고, 이는 리우회의를 기점으로 한국 환경운동에 새로운 흐름을 제공한 큰 물결 가운데 하나였다. 경실련 환경개발센터 출범 ‘주목’ 1991년을 뒤흔든 페놀사건은 전국 각지에 강력한 환경운동단체를 태동시킨 기폭제가 됐다. 대구공추협, 마산·창원공추협, 진주 ‘남강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 등이 페놀사건이 계기가 돼 결성된 지역 환경운동 조직이었다. 환경운동의 지방화는 역으로 전국화의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었다. 리우회의는 여기에 또 하나의 길을 터주었다. 경실련 환경개발센터의 출범은 환경운동의 보편화, 즉 주류 운동으로의 편입을 의미했다. 당시 운동권에서는 경실련의 이런 행보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적지 않았다. 경실련은 이름 그대로 ‘경제 정의’를 지향하는 운동 조직이다. 경제 정의를 세우는 일도 어려운데 환경운동까지 하겠다고 하니 주변의 우려나 시비가 따를 수밖에. 환경개발센터 설립을 주도한 유재현 당시 경실련 경제정의연구소장(현 명지대 건축도시설계원 교수, 녹색미래 이사장)의 최근 회고에 따르면…. “처음에는 운동단체나 최열씨 등 환경운동하는 그룹이 ‘왜 경실련이 환경운동을 하느냐, 경제 정의 하면 되지’라고 했다. 문어발식 확장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이론은 명확했다. 투쟁적인 환경운동만이 아니라 새로운 패러다임을 바탕으로 하는 대안사회를 만드는 것이 UNCED의 정신이다, 그러면 모든 사회, 모든 단체가 다 참여해서 (실천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유재현과 경실련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수용하게 되기까지에는 간단치 않은 사연과 과정이 숨어 있다. 재벌의 문어발식 사업 영역 확장을 도마 위에 올리던 경실련이 스스로 운동 영역을 문어발식으로 확장하지 않을 수 없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이들이 말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UNCED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먼저 이런 질문들에 대답해야 했다. 여기서 우리는 한 인물과 만나게 된다. 서경석 당시 경실련 사무총장(목사, 현 기독교사회책임 공동대표)이다. 서경석은 서울대 공대 운동권의 뿌리가 된 산업사회연구회(이하 산사연)의 창립자이자 새문안교회를 근거지로 민주화운동을 했던 교회운동권의 핵이었다. 즉, 산사연과 새문안교회의 운동권 인맥이 경실련의 토대를 이루고 있었다는 얘기다. 눈총 받았던 유재현의 놀라운 시도 ‘환경개발센터’ 설립을 주도한 유재현 당시 경제정의연구소장과 연구원(활동가)으로서 ‘환경정의’ 로의 조직 전환을 이끈 서왕진·오성규(왼쪽부터). 유재현은 서울대 공대 건축공학과 출신으로, 대학 시절 산사연과 새문안교회 양쪽과 연을 맺었다. 서경석(66학번)·유재현(69학번)·신철영(70학번)으로 이어진 초창기 경실련 사무총장들이 모두 산사연-새문안교회 인맥이다. 여느 운동권처럼 좌파적 색채가 다분했던 이들이 새로운 변화를 추구한 것은 미국 유학에서였다. 유재현의 기억을 다시 살려보면…. “학생운동을 할 때야 다 같이 했지만 그 후의 진로에 대해서는 각자 고민이 많았다. 마침 서 목사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 가게 되어 거기서 함께 이런 고민을 많이 했다. 미국에 가서 공부하고 세계의 시장경제와 시민사회를 경험한 그룹은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어 돌아왔다. 이제 좌파와 손을 끊고 합법적인 운동을 하자…. 그래서 서 목사는 기사연 원장으로 국내에 복귀해 거기서 스스로 ‘파문’을 당한 것이다.” 유재현은 미국 콜럼비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 울산대 교수를 거쳐 한샘주거환경연구소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가 직장을 그만두고 경실련 경제정의연구소장으로 상근하게 된 사연은 엉뚱한 면이 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매우 ‘낭만적인’ 동기에서 비롯됐다. “졸업하고 운동을 다 끊었지만 서 목사의 제의를 받고 다시 한 번 시작해볼 마음이 생겼다. 내 친구들이 감옥에 유독 많이 갔다. 산사연 동기, 교회 친구…. 기독교적 종교운동의 메카가 새문안교회였다. 나는 어떻게 보면 부르주아이고 혜택을 받은 사람으로서 이들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마음 한 구석에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낭만적인 동기였다.” 경제정의연구소장으로 상근하게 된 그는 활동 영역을 넓혀 연구소 안에 환경연구부를 신설했다. 이때가 리우회의 직전인 1992년 4월 14일이었다(환경개발센터, 경실련의 환경운동, 1994년). 그가 ‘경제 정의를 연구’하는 것과 무관한 것처럼 보였던 ‘환경 연구’를 시작한 까닭이 바로 ‘새로운 패러다임’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면 지속가능발전(Sustainable Development)이다. 그의 얘기를 더 들어보자. “리우회의가 열리기 전 해인 1991년부터 준비회의에 몇 차례 갔다. 뉴욕에서 회의할 때 보니까 충격적이었다. 뉴욕에 살았어도 지속가능발전이라는 개념을 잘 몰랐다. 이름은 들었지만 내용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니까…. 일주일 동안 영문 자료를 보면서 전율을 느꼈다. ‘21세기 패러다임이 새로 만들어지는구나’라고….” 그는 최열(현 환경재단 대표)이 주도한 UNCED 한국위원회에 참여해 국제위원장을 맡았다. 4월 23일부터 미국 뉴욕에서 열린 UNCED 4차 준비회의에 참가하기도 했다. 리우회의에도 그를 포함해 원경선(현 환경정의 이사장)·이진아(현 환경정의 정책위원) 등 4명이 참여했다. 유재현의 예견대로 21세기 국가사회의 중심 의제가 된 ESSD(Environmentally Sound & Sustainable Development, 환경적으로 건전하고 지속가능한 개발)의 연원은 멀게는 1992년 로마클럽 보고서, 가깝게는 1987년 ‘환경과 개발에 관한 세계위원회’(WCED) 보고서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이것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겨진 것은 리우회의에서 채택된 ‘의제21’에서였다. 리우회의에서 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움켜쥔 그가 돌아와서 할 일은 분명했다. UNCED의 이름 그대로 환경개발센터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문어발식 확장’이라는 시선을 무릅쓰고 환경운동에 뛰어든 유재현은 또 한 가지 놀라운 시도를 행동으로 옮긴다. 환경개발센터를 법인화하는 것이었다. 운동단체의 사단법인 등록은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이었다. “어떻게 운동을 정부에 등록하고 하느냐”는 게 운동하던 사람들의 보편적 정서였다. 환경개발센터는 1998년 환경정의시민연대로 명칭을 바꾼 뒤 그 다음해에 경실련으로부터 아예 독립하게 된다. 2004년에는 다시 환경정의라는 이름으로 재출발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연히 환경정의의 조직 형태는 사단법인이다. 환경운동연합·녹색연합 등 대부분의 메이저 환경운동단체가 지금도 미등록 단체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들 두 조직은 모단체는 임의단체로 남아 있는 대신 산하기구인 시민환경연구소·녹색사회연구소 등은 사단법인화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 등록 단체는 후원자에 대한 세금공제 등 각종 세제 혜택을 받을 수 있고 정부의 연구 용역 등에도 참여할 수 있다. 모단체든 산하기구든 법인으로 등록돼 있으면 큰 차이가 없지만 당시로서는 운동단체의 법인화는 운동권 내부의 큰 논란거리 가운데 하나였다. 조직 구성도 “그게 무슨 운동단체냐”고 외부에서 시비를 걸 정도로 전문가 일색이었다. 이사장은 원경선 한삶회공동체 이사장, 대표는 권태준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현 서울대 명예교수)였고 김명자 숙명여대 화학과 교수(현 열린우리당 의원, 전 환경부 장관), 신의순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현 연세대 학부대학장) 등 각 분야의 다양한 전문가들이 연구위원에 포진했다. 그는 서경석 경실련 사무총장 등과 함께 이사로 참여했다. 이진아·유병진 등이 운동성 불어 넣어 1992년 환경개발센터 창립 기념식(위)과 1999년 환경정의시민연대의 그린벨트 해제 반대 고공시위. 단체명이 풍기는 전문성과 운동성의 무게중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운동단체라고 보기 어려운 조직 형태와 구조, 지향하는 바는 창립 선언문에도 어느 정도 드러난다. 환경문제의 근원을 ‘인간이 지녀왔던 가치관이나 문화 자체’에 있다고 못 박고 “새로운 가치관과 행동 양식을 찾는 문화운동이라는 토대 위에서 환경운동을 펴나갈 것”이라고 밝힌 것이다. 창립 선언문의 일부를 보면…. “현단계에서 우선적으로 필요한 일은 환경을 고려하지 않는 사회경제정책이 가져올 장기적이고도 치명적인 결과를 막기 위해 환경관리라는 개념에 입각한 정책대안을 제시하며 그것의 실행을 위해 하나의 시민단체로서 국내외 타 시민단체와 연대하고 정부 및 기업과의 대화를 통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하는….”(환경정의시민연대, 환경정의 10년사, 2002년) 환경 파괴의 원인을 ‘인간’이라는 넓은 범위로 설정하고 ‘대안 제시’ ‘정부 및 기업과의 대화’ 등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자세는 공추련 등 주류 환경운동 진영의 시각이나 입장과는 분명 큰 괴리가 있었다. 뜻은 좋지만 자칫 실효성 없는 담론 생산에 그칠 수도 있었던 조직이 그 기본 정신을 살려가며 굳건한 운동체로 거듭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경제개발센터는 초기에 전문성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정책 제안과 갈등 중재, 국제 연대 등에 나서는 한편 그린벨트 해제 반대, 내린천댐 반대 등 ‘활동’ 부분에서도 성과를 올렸다. 새로운 흐름은 전문성만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다. 머리를 뒷받침할 손발이 있어야 한다. 환경개발센터가 운동조직으로 거듭 태어날 수 있었던 데는 뭔가 다른 이유가 있었다는 뜻이다. 오성규(현 환경정의 사무처장)가 환경개발센터에 들어간 것은 공추련의 주축인 1980년대 반공해운동권의 환경운동 입문 과정과는 다소 다른 점이 있다. 세월의 격차만큼 운동 환경이 바뀐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까. 그 역시 1980년대 말 ‘PD의 소굴’로 불리던 성균관대 운동권이었다. 기계공학과 86학번인 그는 ND에서 분화한 PD계열 중에서도 여명(신새벽) 그룹에 속했다. 1991년 학교 조직과 경기지역 일부의 책임자로서 성균관대에서 결행된 전노협 출범을 ‘사수’할 임무를 맡았던 그는 이 일로 인해 도망다니다 군에 입대했다. 군대에 있을 때만 해도 그는 장래 ‘현장’에 들어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제대해 보니 그게 아니었다. 세상이 바뀌어 있었다. YS정부가 들어서서 ‘비합’(비합법)조직이 합법화되고 현장에 들어갔던 인자들도 빠져나오는 분위기였다.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생각할 여유를 갖기 위해 학교에 복적해 다니던 중에 덜컥 취직이 되고 말았다. 한 개인이 뛰어난 활동가가 되기까지에는 ‘운명의 사슬’과 같은 특별한 인연이 개입된 예가 많지만 오성규의 경우는 그 사연이 묘하다. 그는 현대중공업 해외기술영업부에서 근무했다. 개발도상국에 중장비를 파는 것이 업무였다. 1년 쯤 되었을까. 비합조직에 있을 때 선배였던 서왕진(현 환경정의연구소 부소장)으로부터 ‘콜’이 왔다. 환경개발센터에는 전문가 그룹 외에도 활동가들이 있었다. 사무국장 이진아, 사업부장 유병진(미국 이민), 연구원 서왕진·김종익(현 목포경실련 사무국장) 등이다. 바로 이들이 자칫 손발 없는 연구단체가 될 뻔했던 환경개발센터에 운동성을 불어넣은 주인공이다.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늘 불안하고 고민스러웠다. 계속 샐러리맨으로 살 생각은 없었다. 그러던 중에 서왕진 선배가 보자고 해서 만났더니 같이 하자고 권유했다. 지금 생각하면 고마운 제안이었다. 곧바로 직장을 정리했다. 내가 해외에 중장비를 하도 팔아먹어 그걸 보상하는 차원에서 환경운동을 하게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성규의 최근 회고다. 환경개발센터는 ‘개발’에 기여하다 ‘환경’ 일을 하게 된 그를 위한 작명이었을까.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직장생활을 접고 비합운동과는 거리가 먼 운동에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은 ‘진보적 사회 진출’에 대한 정리가 이미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몸담았던 비합조직에서 상당수가 경실련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 역시 환경개발센터에 들어가기 전에 환경운동연합에도 줄을 대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1980년대 학생운동권이 반공해운동마저 주변부 운동으로 치부했던 것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장면이다. 환경운동에서 운동성과 전문성은 수레의 양 바퀴처럼 같이 돌아가는 것임은 지나온 환경운동사가 잘 말해준다. 운동성이 강했던 공추련 진영이 끊임없이 전문성을 보강했던 것처럼 전문성을 표방한 환경개발센터는 운동성을 강화하는 쪽으로 조직 변화를 꾀하게 된다. 환경개발센터 시절부터 젊은 활동가들 사이에서 제기된 경실련으로부터의 독립 요구가 그 한 단면이다. 환경개발센터 실립 당시의 이사장 원경선, 대표 권태준, 이사 서경석, 연구위원 김명자(왼쪽부터). 환경·개발 함께 추구한 환경개발센터 환경운동의 패러다임이 ‘반공해’에서 ‘환경’으로 바뀌고 환경운동의 저변이 크게 확장되면서 가장 필요해진 것이 이런 수요를 충족해줄 활동가였다. 환경개발센터는 경실련의 산하기구이기 때문에 그 틀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었다. 활동가 수를 늘리더라도 다른 부서와 형평을 맞추어야 했다. 유재현의 최근 회고를 들어보면…. “우리 때도 독립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나는 통합해서 나가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통합 모델로 발전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독립 주장은 T/O 문제, 활동 제약 등을 이유로 활동가들이 선호했다. 경실련의 문어발식 확장이라는 부담도 덜 수 있었다.” 아무래도 젊은 활동가 그룹은 ‘액티브한’ 운동에 매력을 느끼게 마련이다. 환경개발센터의 운동은 이들에게 매우 정적이었다. 그것이 일선 활동가나 젊은 회원들에게는 불만 요인이었다. 이번에는 오성규의 얘기를 들어보면…. “군대에 갔다 와서 학교에 다닐 때 안양경실련 회원으로 활동했다. ‘너무 정적인 것 아니냐’는 게 젊은 활동가들의 불만이었다. 예를 들면 경실련 과학기술위원회는 당시 핵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지 못했다. 나중에 내가 한전 앞 시위에 참여해 학생운동 이후 처음으로 닭장차에 실려간 일이 있었다. 경실련에서는 ‘왜 불법집회에 참석해서 그러느냐’고 했다. 여러 기관과의 충돌이나 현실적인 제약으로 액티브하지 못했던 게….” 실제로 환경개발센터는 환경정의시민연대로 이름을 바꿔 경실련에서 독립하면서 현장활동이 크게 강화됐다. 이념도 ‘환경개발’에서 ‘환경정의’로 약간 왼쪽(?)으로 튼 느낌을 준다. 그린벨트 살리기 운동, 용인 난개발 반대 운동, 내셔널트러스트 운동 등이 이 시기에 주력했던 활동이다. 리우회의에서 확립된 ‘지속가능발전’의 이념을 적극 수용해 ‘환경’과 ‘개발’을 함께 추구한 환경개발센터는 실용주의에 바탕을 둔 환경운동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환경개발센터는 경실련 지방 조직을 기반으로 ‘지방의제(Local Agenda) 21’의 실천을 주도, 과연 리우회의의 ‘모범생’다운 면을 보여주었다.
- 秘錄환경운동25년
레이디경향(총 2 건 검색)
- 실용주의를 더한 감각적인 공간
- 2014. 12. 23 16:04 리빙
- 합리적인 가격에 깔끔한 디자인을 갖춘 리빙 스파 브랜드가 인기다. 셀프 인테리어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비교적 저렴한 제품을 소개하는 브랜드에 주목하는 것. 실용주의 브랜드에서 선보이는 제품만으로 공간을 꾸며봤다. 아늑한 멋이 나는 코지 공간 1인 소파와 수납 테이블을 활용해 간단하게 코지 공간을 꾸며보자. 심플한 디자인의 수납 테이블은 물건을 깔끔하게 보관할 뿐만 아니라 작은 소품을 놓아 장식 효과까지 낼 수 있다. 소품은 중간중간 컬러풀한 것을 섞어 지루함을 덜어낼 것. 테이블 옆에는 1인 소파를 두고 위에는 퍼 블랭킷을 걸쳐 온기를 더한다. 1 깔끔한 디자인이 돋보이는 도자기 화병. 9만원, 까사미아. 2 벽을 꾸미는 가장 간단하면서도 쉬운 방법은 액자를 거는 것. 담백한 컬러의 프레임이 감각적인 액자. 4만8천8백원, 니코앤드. 3 애니멀 프린트의 퍼 블랭킷. 추운 겨울철 1인 소파 위에 두어 따스하게 연출하기에 제격이다. 14만9천원, 까사미아. 4 깜찍한 강아지 모형이 디자인된 액자. 2만1천8백원, 니코앤드. 5 타이포그래피가 새겨진 도자기 병. 장식용 오브제로 사용하기에 그만이다. 3천9백원, 모던하우스. 6 포인트 소품으로 활용하면 좋은 상큼한 민트 컬러의 컵. 5천원, 자주. 7 심플한 디자인과 깨끗한 화이트 컬러가 돋보이는 수납 테이블. 7만9천원, 모던하우스. 8 감각적인 북유럽 스타일의 지그재그 패턴 러그. 6만9천9백원, 까사미아. 9 가운데 단추가 장식된 패브릭 쿠션. 심플한 디자인이라 어디에나 잘 어울린다. 1만2천9백원, 모던하우스. * 나머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침구로 디자인하는 침실 침실 인테리어에 변화를 주고 싶다면 침구를 바꿔 분위기를 변신시켜보자. 계절에 따라 컬러와 소재를 달리해 색다르게 연출할 수 있다. 겨울에는 상큼한 컬러의 따스한 소재로 만든 침구로 온기와 화사함을 더해보자. 침대옆에는 심플한 디자인의 협탁과 스탠드 조명을 두어 멋을 살릴 수 있다. 창가에는 암막 커튼을 달아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1 햇빛을 차단하면서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베이지 컬러의 암막 커튼. 3만9천원9백원, 모던하우스. 2 침실을 멋스럽게 하는 가장 대표적 소품인 스탠드 조명. 심플한 디자인과 그레이 컬러가 감각적이다. 13만9천원, 까사미아. 3 보드라운 양털 소재 베개 커버. 1만9천9백원, 모던하우스. 4·5 겨울철 침실에 따스함을 전하는 방법은 니트, 양털과 같은 소재의 패브릭을 활용하는 것. 양털 베개 커버 1만9천9백원·차렵이불 9만9천원, 모던하우스. 6 반짝이는 소재를 가미해 디자인한 쿠션. 2만9천원, 까사미아. 7 컬러풀한 패턴이 화사한 분위기를 전하는 극세사 블랭킷. 7만9천원, 까사미아. 8 깔끔한 흰색 협탁. 2만9천9백원, 모던하우스. 9 감각적인 타이포그래피가 새겨진 머그. 9천7백원, 니코앤드. * 나머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개성을 살린 벽 장식 최근 인테리어 사례에서 자주 발견되는 벽 장식 소품 중 하나는 헌팅 트로피다. 북유럽 사람들이 사냥을 기념하며 동물 머리를 박제해 벽에 장식한 것에서 시작된 헌팅 트로피는 요즘 다양한 디자인과 소재로 소개되며 뜨는 인테리어 소품이 됐다. 종이로 만든 것부터 철제, 플라스틱, 도자기 등 종류도 다양한데 실제 동물 머리와 같은 디자인을 비롯해 심플하게 형상화한 것도 있다. 이와 함께 감각적인 일러스트 카드나 페이퍼, 사진으로 벽을 장식해도 멋스럽다. 직접 찍은 사진을 붙여도 좋은데 볼 때마다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의미가 있다. 사진이나 일러스트 카드를 붙일 땐 패턴 테이프를 활용하면 더욱 멋스러워 보인다. 1·3 최근 떠오르는 헌팅 트로피로 벽을 근사하게 꾸며보자. 귀여운 강아지와 말 디자인의 헌팅 트로피. 각 5만6천9백원, 니코앤드. 2 친환경 종이로 제작한 일러스트 프린트. 3천원, 에코브릿지. 4 북극에 주로 사는 원주민 이누이트를 일러스트로 표현했다. 화려하지 않은 심플한 색감이 인상적. 2천원, 에코브릿지. 5 감성적인 일러스트 카드. 8개가 1세트로 구성된다. 7천7백원, 레드클라우디. 6 아름다운 북극 마을을 담은 포스터. 환경을 생각해 식물성 콩기름 잉크로 인쇄했다. 2천원, 에코브릿지. 7 책 모양의 수납함. 1만5천8백원, 니코앤드. 8 깔끔한 디자인의 네이비 수납함. 3만8천8백원, 니코앤드. 9 심플한 헤링본 소재 실내화. 1만3천9백원, 자주. 10 빈티지한 블록 디자인의 러그. 4만9천9백원, 자주. * 나머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사랑스러운 파스텔톤의 아이 방 아이 방은 화사하고 사랑스러운 분위기로 꾸며보자. 벽은 차분하면서 은은한 멋이 나는 살구빛으로 칠하고, 소품 역시 민트나 핑크 등의 파스텔톤으로 조화를 이루도록 한다. 컬러풀한 소품이 많으면 자칫 산만해질 수 있으므로 비슷한 컬러의 소품으로 통일감도 꾀한다. 깜찍한 폼폼 장식이 달린 러그나 동물 모양 인형, 블록 등으로 시각적인 재미를 선사할 수도 있다. 1 심플한 실루엣의 민트 컬러 스탠드 조명. 3만9천원, 까사미아. 2 집 모양으로 디자인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책장. 장난감이나 장식용 소품을 놓기에 좋다. 39만7천원, 김코디네. 3 장식용 오브제로 그만인 옐로 컬러의 모래시계. 4만9천원, ZARA HOME. 4·5 세라믹 소재의 집 모양 오브제. 각 1만7천원·1만5천원(왼쪽부터), 까사미아. 6 버스 그림이 그려진 옐로 컵. 5천원, 까사미아. 7 귀여운 고양이 프린트 면 쿠션. 아이 방에 포인트 소품으로 제격이다. 3만9천원, 까사미아. 8 술이 달린 상큼한 오렌지 컬러 블랭킷. 8만9천원, 까사미아. 9 3D 패턴이 독특한 바구니. 장난감이나 소품을 보관하기에 알맞다. 3만9천원, 까사미아. 10 부엉이 일러스트로 디자인한 면 쿠션. 2만5천원, 까사미아. 11 컬러풀한 블록 장난감. 9천9백원, 모던하우스. 12 폼폼 장식이 달린 원형 러그. 핑크, 옐로, 스카이 블루 등 파스텔톤의 조화가 감각적이다. 3만9천9백원, 자주. * 나머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심플하지만 감각적인 주방 테이블 세련된 디자인의 테이블클로스와 테이블웨어를 놓아 멋스러운 주방 테이블을 연출해보자. 테이블클로스는 심플한 것과 일러스트가 있는 패턴 2가지를 겹쳐놓으면 더욱 감각적인 분위기가 살아난다. 테이블웨어는 솔리드 컬러의 제품을 메인으로 선택하고 심플한 패턴 제품 1, 2가지를 섞어 연출한다. 이때 1가지 색으로만 구성하는 것보다 2, 3가지 컬러를 섞어 세팅해야 더 완성도 있는 주방 테이블이 완성된다. 1 멋스러운 타이포그래피가 돋보이는 티포트. 2만9천원, 까사미아. 2 보태니컬 프린트의 테이블클로스. 단조로운 식탁을 금세 감각적으로 꾸밀 수 있는 효과적인 소품이다. 2만5천9백원, 모던하우스. 3 여성스러운 실루엣의 머그. 모노톤 컬러라 다양한 공간에 활용하기에 좋다. 8천원, 까사미아. 4 무늬 없는 디자인과 짙은 컬러가 단출한 멋을 내는 네이비 컬러의 볼. 5천9백원, 까사미아. 5·6·8 정갈한 디자인의 테이블웨어는 언제 봐도 멋스럽다. 심플한 체크 패턴으로 담백한 멋을 더한 샐러드 접시 9천원·샐러드 볼 9천원·디너 접시 1만2천원, 까사미아. 7 깜찍한 사이즈의 저그. 따스한 베이지톤 컬러와 깔끔한 타이포그래피가 돋보인다. 2천7백30원, 까사미아. 9 넓고 큰 사이즈의 디너 접시. 심플한 체크 패턴이 멋스럽다. 2만9천원, 까사미아. 10 식탁에 2가지 패턴의 테이블클로스를 깔면 보다 감각적인 테이블 세팅을 완성할 수 있다. 체크 패턴의 테이블클로스. 1만2천9백원, 모던하우스. 11 테이블 세팅을 더욱 멋스럽게 하는 티타월. 1만9천원, 까사미아. * 나머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취향에 따라 꾸미는 선반 장식 선반을 설치해 취향에 따라 책이나 장식 소품, 수집품 등으로 색다르게 장식할 수 있다. 벽에 선반을 2, 3개 정도 설치해 원하는 소품으로 장식해보자. 소품을 놓을 땐 크기를 서로 달리해 리드미컬하게 연출하면 좋다. 소품 중간중간에 커다란 액자를 놓아도 멋스럽고, 소품 없이 액자 몇 개만으로도 감각적이다. 선반 사이사이에는 빈 공간을 남겨둬 여백의 미를 살린다. 1 장식용 소품으로 더없이 좋은 토끼 모양 오브제. 2개 세트 3만5천원, 까사미아. 2 빈티지한 디자인의 얼룩말 오브제. 1만8천2백원, 니코앤드. 3 액자를 벽에 거는 대신 선반 위에 올려놓는 것도 멋스럽다. 자전거 일러스트가 프린트된 액자. 7만원대, 니코앤드. 4 미니 사이즈의 유리병. 6천1백원, 니코앤드. 5 앤티크한 멋이 느껴지는 갈색 유리병. 6천1백원, 니코앤드. 6 입구에 열쇠가 달린 유리병. 1만7백원, 니코앤드. 7 모던한 색감과 디자인이 돋보이는 시계. 15만7천3백원, 니코앤드. 8 집 모양 오브제. 같은 디자인의 제품을 여러 개 놓아도 꽤 멋스럽다. 2만7천원, 까사미아. 9·10 투명하게 비치는 빛깔이 고급스러운 식기. 아이스크림 볼 8천5백원·유리볼 5천6백원, 니코앤드. 11 빈티지 숍에서 발견한 듯한 앤티크한 골드 컬러의 강아지 오브제. 3만3천9백원, 니코앤드. 12·13 클래식한 멋이 전해지는 타탄체크 패턴 쿠션. 각 2만5천9백원, 자주. 14 담백한 컬러와 부드러운 촉감이 돋보이는 헤링본 러그. 4만9천9백원, 자주. * 벽에 칠한 살구색 페인트 던에드워드페인트 by 나무와사람들. 나머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진행 / 장인화 기자 ■사진 / 장태규(프리랜서) ■제품 협찬 / 김코디네(031-439-3639), 까사미아(02-595-0843), 니코앤드(www.nikoand.dot-st.kr), 던에드워드페인트 by 나무와사람들(02-3679-0101), 레드클라우디(www.redcloudy.com), 모던하우스(02-591-1592), 에코브릿지(www.ecobrg.com), 자주(02-3447-3600), ZARA HOME(www.zarahome.com) ■스타일리스트 / 신수민>
- 실용주의적 몽상가 스티브 잡스 비하인드 스토리
- 2011. 10. 28 17:59 화제
- 지난 10월 5일, 애플의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였던 스티브 잡스가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나 대학을 중퇴했고, 자신이 창업한 회사에서 방출됐으며 7년여 동안 암 투병으로 세상을 마감한 그의 인생은 실패와 성공, 그리고 쉼 없는 도전의 연속이었다. Childhood “잡스는 엄청난 울보였어요. 경기에 지기라도 하면 분에 못 이겨 울부짖으며 가버리곤 했죠. 어느 누구와도 잘 어울리지 못했어요. 아주 별난 친구였어요” (수영 클럽 친구 마크 워즈니악) 스티브 잡스는 1955년 2월 24일 미국 캘리포니아의 항구도시 샌프란시스코에서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나 곧바로 입양됐다. 당시 대학원생이었던 그의 친모는 자신이 직접 아이를 키우지 못하는 대신 부유하고 교육 수준도 높은 집안에 아이를 보내기를 원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고, 결국 넉넉지 않은 형편에 대학 교육도 받지 않은 폴과 클라라 잡스 부부에게 보내게 된다. 아이를 입양 보내며 그녀가 양부모로부터 약속받은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잡스를 꼭 대학에 보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후에 폴과 잡스 부부는 잡스를 미국 내에서도 학비가 비싸기로 유명한 사립대 리드칼리지에 보내며 친모와의 약속을 지킨다. 비록 잡스가 6개월 만에 학교를 그만두고 다시는 대학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말이다. 친부모에게 버림받았지만 잡스는 양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것으로 전해진다. 어린 시절 잡스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과잉 활동아였는데 새벽 4시부터 일어나 집 안을 뛰어다니고 호기심이 지나쳐 자주 응급실 신세를 질 정도였다. 하지만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보다 혼자 지내는 시간을 좋아했고 건강이 나빠질 정도로 하루 종일 TV 앞에 붙어 살기도 했다. 혼자 있길 좋아하는 성격 때문에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거나 놀림을 당하기 일쑤였다. 그의 어린 시절 친구들은 하나같이 잡스를 회상하며 “늘 우는 소리를 하는 외톨이”라고 기억할 정도다. 못 말리는 말썽쟁이였지만 폴과 클라라 부부는 아들을 사랑했다. 어린 잡스가 매우 총명하다는 것을 일찌감치 직감했고 아이가 자유롭게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도록 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잡스가 훗날 숱한 방황과 말썽을 피우면서도 끝까지 자신이 가는 길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 양부모로부터 받았던 사랑이 큰 몫을 차지한다. 잡스는 성인이 된 후에 대화 치료사였던 친어머니와 정치학 교수였던 아버지의 존재를 알게 되지만 언제나 양부모를 친부모로 여기며 그들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숨기지 않았다. Apple “애플로 회사 이름을 정한 잡스는 로고를 한 입 베어 문 사과 모양으로 하자고 주장했어요. 그 주장에서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죠. 이건 아마 잡스의 사과에 대한 병적인 집착 때문인 것 같아요”(애플 설립 당시 회사 동료들) IT 종사자들에겐 천혜의 환경이었던 샌프란시스코 마운틴뷰 인근에서 나고 자라며 전자기기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온 잡스는 중학교 시절 그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친구이자 애플의 공동 창업자인 스티브 워즈니악을 만난다. 그보다 다섯 살 많은 워즈니악은 전자기기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전형적인 천재였다. 두 사람은 남의 집 허름한 창고에서 자신들만의 컴퓨터를 만들기 시작했고 설계에 관한 한 천재성을 지니고 있던 워즈니악과 제대로 돈 버는 방법을 아는 수완 좋은 청년 잡스는 곧 사업을 구상하게 된다. 두 사람은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 공통된 기질이 있었다. 1976년, 두 사람은 컴퓨터 회로기판을 제조하는 회사를 공동 창업하고 이름을 ‘애플(Apple)’이라 짓는다. 당시 선불교에 심취해 있었던 잡스가 자신이 수행을 하던 사과농장을 연상해 지은 ‘애플’이란 회사명에 워즈니악은 찬성하지 않았다고 한다. 회사명을 애플로 할 경우 비틀스의 음반 회사인 애플레코드와 법적인 다툼에 휘말릴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의 이러한 걱정은 나중에 현실이 된다. 애플이 주식시장에 상장되기 직전인 1981년, 애플은 애플레코드와 음악 관련 사업을 하지 않겠다는 계약을 체결하게 된다. 애플이 컴퓨터만 만들 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2000년대 들어 아이팟을 내놓으면서 애플레코드가 소송을 걸고 이 소송은 2010년 두 회사가 화해에 이를 때까지 이어진다. 애플의 상징인 ‘Bite Apple(베어 문 사과)’의 유래에 대해선 열 가지도 넘는 설이 있다. 잡스가 한 번도 밝힌 적이 없기 때문에 갖가지 추측만 난무한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잡스는 사과가 완벽한 과일이라고 생각하고 자신들의 회사 역시 그렇게 되길 바랐다는 설이다. 사과를 한 입 베어 물다가 아이디어를 떠올리곤 했던 잡스가 회사 이름을 애플로 짓고 컴퓨터 이름까지 매킨토시(Macintosh: 사과 품종의 하나인 Mclntosh를 변형시켜 지은 이름)로 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영세한 업체로 불리한 사업 여건 속에서도 잡스는 자신이 믿는 비전을 열정적으로 설득해 나간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만든 퍼스널 컴퓨터가 시장에서 성공을 하게 되고 그에 힘입어 1980년에는 주식시장에 공개되며 스티브 잡스는 억만장자가 되는 동시에 미국 최고 부자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Family 성공적으로 사업을 이끌어가던 1970년대 말, 잡스는 고등학교 때부터 사귀어온 여자친구 크리스 앤의 임신 소식을 듣게 된다. 당시 스물세 살이었던 그는 여자친구 배 속의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부인한다. 아버지 없는 아이로 태어나 입양돼 자라며 오랫동안 정체성에 대해 고민해온 그가 자신의 아이를 같은 처지로 만든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면서도 이기적인 행동이었다. 맨 처음 딸이 태어났을 때 그는 여자친구를 찾아가 아이 이름을 리사(Lisa)라 짓고 얼마간 양육비도 보내주었다. 하지만 곧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법정 싸움을 벌였고 친자 확인 검사까지 거쳐 리사가 친자임이 증명된 후에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잡스와 크리스 앤, 그리고 리사가 화해하는 데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훗날 그는 딸의 이름을 딴 ‘리사’라는 컴퓨터를 출시하기도 하는데 비록 잡스 생애 최고의 실패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모델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딸에게 전하는 화해의 메시지라 해석된다(아버지의 머리를 쏙 빼닮은 리사는 하버드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다). 스티브 잡스의 유품이라 할 수 있는 애플의 제품들. 잡스는 죽기 전 애플의 향후 4개년 계획을 수립해 경영진에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젊은 시절 잡스는 떠오르는 IT의 황태자답게 화려한 여성 편력을 자랑했다. 자신과 비즈니스 관계에 있던 레지스 매키너 사무실의 여직원과 염문을 뿌리기도 했고 가수 조엔 바에즈, 그래픽 디자이너 크리스티나 레제와도 연인 관계였다. 그는 주로 스탠퍼드대 출신의 금발 미인들에게 관심을 보였는데 잡스와 결혼해 20년 가까이 그의 곁을 지킨 아내 로렌 파월 역시 스탠퍼드대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공부하던 학생이었다. 1989년 잡스는 스탠퍼드대에서 강의를 하던 중 로렌을 만났고 두 사람은 2년 뒤인 1991년 잡스의 선불교 스승인 승려 코빈 치노의 주례로 간소한 결혼식을 올린다. 결혼 당시 로렌의 배 속에는 두 사람의 첫아들인 리드가 자라고 있었고 결혼 후 두 딸이 태어나며 잡스는 리사를 포함한 네 자녀의 아버지가 된다. 잡스는 로렌을 처음 만났을 당시를 ‘저항하기 어려운 감정에 이끌렸다’라고 회상했다. 잡스보다 아홉 살 연하로 펜실베이니아의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로렌은 펀드매니저 생활을 하다 다시 스탠퍼드대에 입학해 잡스를 만났다. 남편만큼이나 신분 노출을 극도로 꺼렸던 그녀는 교육과 여성권리운동 등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앞장서온 사실이 알려지며 세상을 바꾸려 한 혁신가의 ‘진정한 동반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자신의 첫아이를 부인했던 잡스는 가정을 꾸리며 점차 가정적인 면모를 가지게 된다. 바쁜 생활 속에서도 그는 아들과 집 주변을 산책하며 대화를 즐기고 학부모 참관 수업에도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2004년 췌장암 선고를 받은 뒤 죽기 전 대부분의 시간을 가족과 함께 보냈고 마지막 몇 주일 동안은 애플과 네 자녀, 아내 생각뿐이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가족의 곁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힘들어했고 이와 같은 사실을 가족에게 상냥하게 사과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일생 동안 수많은 출판사로부터 제안을 받은 자서전 집필을 거절해온 그는 죽기 전 자신의 친구였던 전기작가 아이잭슨에게 집필을 허락했는데 이는 자녀들에게 자신을 이해시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Money “저는 스물셋에 백만장자가 됐습니다. 스물넷에는 억만장자가 됐고요. 하지만 스물다섯부터는 그런 것들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됐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일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스티브 잡스) 1980년 12월 둘째 주 금요일. 시장에 처음 공개된 애플의 주식 460만 주는 1시간에 모두 팔리며 사상 초유의 기록을 세운다. 투자자들이 몰리며 주가는 곧 30배 가까이 폭등했고 750만 주의 주식을 갖고 있던 잡스는 스물넷의 나이에 2억1천7백만 달러를 소유한 거부가 됐다. 그는 미국에서 가장 젊은 억만장자였다. 이른 성공 이후 그의 비즈니스가 언제나 평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스티브 잡스가 즐겨 입던 검은색 터틀넥을 입고 그의 마지막을 배웅하는 픽사의 캐릭터들. 스티브 잡스는 애플을 떠나 있던 시절 애니메이션 회사인 픽사의 CEO로 재직하며 ‘토이 스토리’를 탄생시켰다. TAUNTR.COM 자신이 만든 애플사에서 쫓겨나고 새로 차린 신생 회사가 실패하는 등 벼랑 끝에 몰린 적도 있지만 잡스는 위기를 극복했고 그의 부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지난 9월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에 따르면 잡스의 재산은 70억 달러, 우리 돈으로 약 8조3천억원가량이다. 대부분 부동산이나 현금이 아닌 주식 평가액에 따른 것으로 잡스는 애플사를 나와 있는 동안 만들었던 애니메이션 회사 ‘픽사’를 디즈니에 팔며 얻은 주식 1억3천8백만 주와 1997년 애플로 복귀한 뒤 받은 주식 540만 주를 가지고 있었다. 8조원이 넘는 잡스의 재산은 아내인 로렌 파월과 네 명의 자녀에게 우선 배분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잡스의 유언장이 공개되지 않아 정확한 향방은 아직 알 수 없다. 그는 애플에서 쫓겨난 지 11년 만인 1997년 애플로 돌아온 뒤 지난 8월 CEO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는 매년 1달러씩 14년간 총 14달러의 연봉만 받았다. 실리콘밸리의 다른 CEO들이 탐욕스럽게 챙기던 스톡옵션(기업이 임직원에게 일정 수량의 자기 회사 주식을 일정한 가격으로 매수할 수 있도록 권리를 주는 것)도 받지 않았다. 잡스는 애플로 돌아온 뒤 보유하고 있던 540만 주의 애플 주식 중 단 한 주도 매각하지 않았는데 그에게 애플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닌 자신의 일부였음을 말해주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그는 1달러의 연봉만으로 어떻게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었을까? 잡스가 가지고 있던 1억3천8백만 주의 디즈니 주식에서 나오는 배당금이 1년에 약 4천8백만 달러, 우리 돈으로 5백80억원에 해당했다. 대부분의 CEO들이 회사에서 지원받는 비용 외에는 애플에 금전적인 보상을 거의 요구하지 않은 채 보유한 주식의 배당금으로 생활해온 것이다. 그가 6개월 동안 병가를 떠나 있던 2008년 애플이 잡스에게 쓴 비용은 그의 병원비를 비롯해 80만 달러 정도다. 애플은 1999년 잡스에게 보너스로 제트기 한 대를 선물했다. Personality “‘단추를 세 번만 눌러서 원하는 곡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메뉴가 눈에 금방 들어오지 않아요’ ‘손에 잡히는 느낌이 불편해요’ 잡스가 일일이 지적한 사항은 거론하자면 끝도 없을 정도예요” (아이팟 개발 당시 스티브 잡스를 회상하며) 스티브 잡스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해선 평가가 엇갈린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세운 기준대로만 움직이는 독선가였고 때로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냉정한 실용가였다. 젊은 시절 스티븐 워즈니악과의 공동 작업으로 얻은 수익을 가로채고 이를 안 워즈니악이 분노하자 “내가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건 없었던 일이야”라며 부정하는 식이었다. 회사가 성공해 직원들에게 스톡옵션을 나눠줄 때도 자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만 골라 줬다. 회사 성공에 기여한 이들을 가르는 자의적인 기준을 내세웠는데 제외된 사람 중에는 오랜 친구이자 창업 멤버인 페르난데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보다 못한 워즈니악이 자신의 주식 8만 주를 제외된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줄 정도였다(스티브 잡스는 이를 두고 “바람직하지 않다”라고 비판했다). 그는 도태되는 사람을 끌어안고 가기보다는 가차 없이 버리는 타입이었다. 자신에게 충성하는 사람, 자신을 잘 따를 사람만을 중용하는 잡스와 함께 일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극히 세부적인 것까지 완벽과 최선을 고집하며 직원들을 몰아붙이는 독재자의 면모를 드러내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철권통치는 그가 애플에 떠났다 다시 돌아온 1997년 극에 달했는데 당시 애플 직원들 사이에서는 ‘엘리베이터에서 잡스와 마주치지 말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였다. 잡스는 엘리베이터에서 직원을 만나면 “지금 하는 일이 뭐죠?”라고 묻는데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잘 못하거나 신통치 않은 대답이 나오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곧바로 해고 통보를 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한동안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하는 직원들이 많았다고 하니 당시의 살벌한 분위기를 짐작할 만하다. 애플 복귀 후 사내 기부 프로그램을 폐지시키는 등 가지고 있던 막대한 재산에 비해 기부에 인색했던 일, 일반인들이 생각하기에 사소한 것을 ‘트집’ 잡아 전 세계 기업들을 상대로 끊임없이 소송을 제기해온 일(애플은 삼성 갤럭시탭에 특허권 침해 소송을 제기했고 두 기업 사이의 소송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등을 들어 ‘잡스는 대단한 사람이긴 하지만 훌륭한 사람은 아니다’라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지만 잡스가 끊임없는 혁신 제품으로 인간과 기술의 소통 방식에 일대 혁명을 일으킨 기술 산업의 아이콘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데는 그의 이런 괴짜 같은 인간성도 한 몫을 하지 않았을까? Remains “죽음은 가장 위대한 발명이다. 곧 죽게 된다는 생각은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을 할 때마다 큰 도움이 된다. 거의 모든 것들이 죽음 앞에서 무의미해지고 정말 중요한 것만 남기 때문이다.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없다. 잃을 게 없으니 가슴이 시키는 대로 따르지 않을 이유도 없다” - 스티브 잡스의 스탠퍼드대학교 졸업식 연설(2005년) “스티브의 성공에 대한 가장 큰 찬사는 전 세계가 그가 발명한 장치들로 그의 죽음을 알게 됐다는 사실이다”라는 오바마 대통령의 말처럼 10월 6일, 전 세계 사람들은 아이폰 혹은 아이패드를 통해 스티브 잡스의 부고를 접했다. 누군가는 조깅을, 누군가는 점심식사를, 누군가는 침대에 누워서였다. 애플Ⅱ의 개발로 개인용 PC시대를 열었고 매킨토시와 속이 비치는 컴퓨터 아이맥으로 혁신을 거듭했다. 아이튠즈와 아이팟을 통해 IT를 감성적 영역으로 끌어왔으며 태블릿 PC인 아이패드를 내놓음으로써 포스트 PC시대를 이끌었다. 그리고 이 모든 기능을 하나로 합친 아이폰을 통해 ‘세상을 놀라게 하고 싶다’라는 자신의 꿈을 실현시킴과 동시에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지구상의 모든 정보에 접속하는 것을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검은색 터틀넥에 청바지, 회색빛 뉴발란스 운동화를 신고 봉투 속에서 맥북에어를 꺼내던 그의 모습은 인류 역사상 가장 짜릿했던 순간 중 하나로 오랫동안 회자될 것이다. 실용주의적 몽상가 스티브 잡스로부터 시작된,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미래의 무언가를 통해서 말이다.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 ■참고 서적 /「스티브 잡스를 꿈꿔 봐」(임원기 저, 토토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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