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총 346 건 검색)
- 안중근 의사의 혼이 담긴 ‘獨 立’ [현장 화보]
- 2024. 10. 23 16:58 문화|사회
- ...伊藤博文)를 저격했다. 안중근 의사에게 추대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다음날 일본 경찰이 촬영한 안중근 의사 가족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 현장 화보
- 안중근 의사 유묵 110년 만에 ‘환수’
- 2023. 12. 20 22:00 문화
- ... 낙찰 안중근 의사(1879~1910)가 1910년 쓴 유묵이 국내 경매에서 19억5000만원에 낙찰돼 한국에 돌아오게 됐다. 서울옥션 강남센터에서 19일 열린 경매에서 안 의사가 하얼빈 의거 후 1910년 3월 사형...
- 애국·민족주의와 국경에 갇힌 안중근···“‘조작된 허구’의 ‘장엄한 역사’ 편입 막아야”
- 2023. 10. 26 06:00 문화
- ... 능란하게 훔치라고 이야기하죠.” 연도 오류나 의상 고증의 오류 등은 큰 잘못이 아니라고 했다. “안중근 장사를 하려면 영화든 뭐든 잘 만들어야죠. 안중근이 변화를 촉구한 일본에서도 인기를 끌겠다는...
- 도진순
- ‘드림’ 빠진 안중근 유묵···철도 온힘 쓰다 철도에서 죽은 이토
- 2023. 09. 28 08:59 문화|문화
- ... 도진순의 여러 논문을 인용한다. 논문 중 하나가 지난 3월 한국근현대사연구 104호에 실언 <안중근의 ‘근배’ 유묵과 사카이 요시아키 경시>다. “일본인들에게 유묵 써준 사실 직시해야”...
- 김훈박훈도진순안중근일본인에게써준유묵
스포츠경향(총 83 건 검색)
- ‘하얼빈’ 현빈 “안중근 장군 役, 기쁘면서도 부담과 고민 컸다”
- 2024. 11. 27 11:30 연예
- 영화 ‘하얼빈’ 속 현빈. 사진제공|CJ ENM 배우 현빈이 영화 ‘하얼빈’(감독 우민호)에서 안중근 장군을 연기하는 벅찬 심정을 고백했다. 현빈은 27일 서울 용산구 CGV아이파크몰에서 진행된 ‘하얼빈’ 제작보고회에서 우민호 감독과 첫 작업으로 ‘하얼빈’에 참여한 소감을 묻자 “실존인물을 연기해야한다는 부담과 걱정은 이루말 할 수 없이 많았다. 그럼에도 이런 뜻깊은 인물을 연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서 좋았다”고 밝혔다. 현빈은 “처음 이 작품을 제안받고 우민호 감독과 첫 미팅을 했을 때가 기억이 생생하다”고 운을 뗐다. 이어 “우민호 감독에게서 작품에 관한 진심과 제대로 만들고자 하는 의지, 그 열정이 뿜어져나왔다. 우민호 감독과 이 작품을 하면 의미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며 “현장에선 그 에너지가 더 거세졌고, 나도 좋은 영향을 받아 매컷 더 잘 해내려고 하는 의지가 커졌다. 결과적으로 참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함께 자리한 우민호 감독은 “전작인 ‘남산의 부장들’을 끝내고 너무나 힘들어서 다시는 시대극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면서도 “우연치 않게 안중근 서적과 제작사 하이브미디어코프가 가진 시나리오를 보니 안중근 장군과 그 동지들의 마음이 느껴져서 내 마음까지 움직이더라. 지금까지 했던 작품 중 가장 힘들 거라고 직감했지만 각오하고 한번 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하얼빈’은 1909년, 하나의 목적을 위해 하얼빈으로 향하는 이들과 이를 쫓는 자들 사이의 숨 막히는 추적과 의심을 그린 작품이다. 12월 25일 개봉.
- [오늘 뭐함?] 현빈의 ‘안중근’, 백종원의 ‘장발장’, 규현의 ‘첫 정규앨범’
- 2024. 11. 27 09:48 연예|연예|연예|연예
- 우민호 감독의 영화 ‘하얼빈’ 포스터. 사진 CJ ENM 무비 아침부터 수도권을 중심으로 첫눈의 설렘이 있는 수요일. 27일에도 다양한 연예계 행사와 인터뷰가 독자들을 찾아간다. 이날 오전 11시에는 우민호 감독의 영화 ‘하얼빈’이 제작보고회를 열고 베일을 벗는다. 서울 용산구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리는 제작보고회에는 우민호 감독을 비롯해 현빈, 박정민, 조우진, 전여빈 등 주연배우들이 참석한다. ‘하얼빈’은 투사로서의 안중근이 아닌 대한의군을 이끄는 장군으로서의 안중근 캐릭터를 재조명했다. 1909년 배경으로 돌아가 독립군들의 파란만장한 여정과 당시를 되짚는 다양한 사건을 돌아본다. ENA 예능 ‘백종원의 레미제라블’ 포스터. 사진 ENA 같은 시간에는 ENA의 새 예능 ‘백종원의 레미제라블’도 제작발표회를 연다.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제작발표회에는 요리연구가 백종원을 비롯해 김종무PD, 한경훈PD, 김민성, 데이비드 리, 임태훈, 윤남노 셰프가 참석한다. 올해에도 넷플릭스 ‘흑백요리사’로 요리 예능의 전성기를 연 백종원은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역전을 노리는 참가자들을 수련시키고 응원하는 멘토로 분한다. 이들은 셰프들과 함께 경연을 벌여 우승을 향해 참가자를 줄여간다. 또한 11시에는 KBS1의 다큐멘터리 ‘화산, 인간’의 제작발표회가 열린다. 서울 마포구 서교동 온맘씨어터에서 열리는 제작발표회에는 연출을 맡은 박병길PD, 정용재PD, 촬영을 맡은 신성일, 조호영 감독이 참석한다. ‘화산, 인간’은 이른바 ‘불의 고리’로 불리는 환태평양 조산대에서 화산을 바로 옆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가수 규현의 첫 정규 앨범 ‘컬러스’의 재킷 이미지. 사진 안테나 오후에는 가요계 행사가 이어진다. 오후 2시 서울 청담동 씨네시티 3층 엠큐브에서는 새 앨범으로 돌아오는 가수 규현의 첫 정규앨범 ‘컬러스’의 음감회가 열린다. 그의 정규앨범은 2014년 솔로데뷔 후 처음이다. 타이틀곡 ‘하루마다 끝도 없이’는 이별의 후유증을 섬세하게 풀어낸 곡으로 밴드 사운드를 기반으로 한 짜임새 있는 편곡, 규현의 서정적인 보컬이 돋보인다. 갓세븐의 멤버 제이비 역시 오후 4시 서울 광진구 예스24 라이브홀에서 쇼케이스를 연다. 그의 정규앨범 ‘아카이브 1: [로드 러너]’는 갓세븐의 리더이지만 솔로 아티스트이기도 한 그가 첫 마음으로 돌아가 좀 더 성숙해진 자신과 만나는 설렘을 그린 앨범이다. 작사, 작곡에 참여한 총 13곡이 발매됐다. 배우 지창욱이 출연하는 디즈니플러스 오리지널 드라마 ‘강남 비-사이드’ 포스터. 사진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그는 쇼케이스를 통해 주요 곡의 무대와 함께 솔로 결과물을 내는 심경도 전할 예정이다. 이밖에 웨이브에서 재탄생하는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이형민 감독이 서울 여의도에서, 디즈니플러스 드라마 ‘강남 비-사이드’의 주연 지창욱은 서울 삼청동에서 인터뷰를 갖는다. JTBC 드라마 ‘조립식 가족’에 출연한 정채연은 서울 논현동 소속사 BH엔터테인먼트 사옥에서 종방 인터뷰를 연다.
- 김호중, 안중근 의사 유묵에 ‘숙연’ (가보자GO)
- 2024. 03. 31 13:53 연예|연예
- ‘가보자GO’ 영상 화면 캡처 갈무리. ‘가보자GO(가보자고)’가 웃음과 감동 그리고 교훈까지 3박자를 완벽하게 잡았다. 지난 30일 오후 방송된 MBN 예능 ‘가보자GO’ 3화에서는 연 매출 1,700억을 돌파한 자수성가 화장품 CEO부터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담은 안중근 의사의 필서를 통한 감동과 교훈까지 특별한 시간을 담아냈다. 어둑어둑해진 저녁, 마지막 친구를 찾아 나선 안정환과 홍현희 팀은 연예인 고소영, 프로 골퍼 박인비 등이 사는 것으로 알려진 국내 최고가 아파트를 지나게 됐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친구를 물색하던 두 MC는 집으로 들어가던 주민과 마주치게 되고, 흔쾌히 집으로 초대해준 친구 덕에 초호화 아파트에 입성하게 됐다. 안정환과 홍현희는 화장품 회사 CEO가 사는 으리으리한 아파트에서 첫 사업 실패 좌절, 층간 소음, 그리고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특별한 진솔한 시간을 가졌다. 이어진 에피소드에서는 김용만과 김호중 그리고 안정환이 팀을 이루어 인사동 거리에서 친구 찾기에 나서는 장면이 그려졌다. 정겨운 인사동 거리에서 세 사람은 상냥하고 센스 있는 신세대 사진작가 할아버지와 만나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진품명품 감정사인 이상문 교수를 만나기도 했다. 다양한 보물로 가득 차 있는 이상문 교수의 공간에서 세 MC는 삼국시대 유물부터 고려청자는 물론 안중근 의사의 옥 중 필서까지 많은 진품을 봤다. 안중근 의사의 유묵 등장에 세 MC는 좁은 감옥 방에서 마지막까지 투항의 문구로 국가 안위를 걱정하던 안중근 의사의 마음에 숙연해졌다. 특히 안정환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시절, 아내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공간을 가본 경험이 있다고 밝혔고 이를 보는 시청자들까지 숭고한 정신을 되새기는 시간을 가지게 됐다. MBN ‘가보자GO’는 매주 토요일 오후 8시 20분 방송된다.
- 中 바이두, 윤동주 이어 안중근에 ‘조선족’…서경덕 “역사 왜곡 심각”
- 2023. 09. 05 10:54 생활
- 중국 최대 포털인 바이두 백과사전에서 안중근 의사의 ‘민족집단’을 ‘조선족’으로 표기했다. 중국 최대 포털인 바이두 백과사전에서 안중근 의사를 왜곡하고 있어 논란이 일었다. 중국의 역사 및 문화 왜곡에 대응하고 있는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5일 “바이두 백과사전에서 안중근 의사가 ‘민족집단’에 ‘조선족’(朝鮮族)으로 표기된 것을 발견했다”고 알렸다. 서 교수는 “중국의 역사 왜곡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단편적인 예시며,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들을 중국의 인물로 만들려는 ‘동북공정’의 일환이라 볼 수 있다”고 했다. 이어 “최근 중국이 안중근 의사 전시실과 윤동주 시인 생가 운영 중단에 대해 내부 수리를 위한 임시 휴관이라고 관영매체를 통해 밝혔지만, 언제 열지는 기한이 없는 상태”라고 덧붙였다. 중국 최대 포털인 바이두 백과사전에서 안중근 의사의 ‘민족집단’을 ‘조선족’으로 표기했다. 그러면서 “이제는 오프라인도 모자라 온라인까지 왜곡하고 있으니 이제부터라도 강력한 대응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짚었다. 앞서 바이두 백과사전에서는 윤봉길 의사, 이봉창 의사도 ‘민족’을 ‘조선족’으로 표기했는데, 이에 서 교수가 꾸준히 항의해 윤봉길 의사의 ‘조선족’을 없애는 성과를 낸 바 있다. 무엇보다 바이두 백과사전에서 시인 윤동주의 국적을 ‘중국’(中国), 민족을 ‘조선족’(朝鮮族)으로 표기해 지난 몇 년간 큰 논란이 되기도 했다. 서 교수는 “우리가 중국의 역사 왜곡에 분노만 할 것이 아니라, 차분히 체계적으로 준비해 강하게 대응한다면 역사 왜곡을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주간경향(총 7 건 검색)
- [문화캘린더]서른, 안중근 의사의 삶과 고뇌(2024. 05. 22 06:00)
- 2024. 05. 22 06:00 문화/과학
- [뮤지컬]<영웅> 15주년 기념공연 일시 5월 29일~8월 11일 장소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관람료 VIP석 16만원, R석 14만원, S석 10만원, A석 8만원, B석 6만원 2009년 안중근 의거 100주년을 기념해 제작된 뮤지컬 <영웅>이 올해 15주년 기념 공연을 연다. <영웅>은 지난 15년 동안 9번의 시즌을 보내며 한국을 대표하는 뮤지컬로 자리 잡았다. 올해는 15주년이자 <영웅>의 10번째 시즌으로 더욱 의미를 더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영웅>을 대표하는 배우 정성화, 양준모, 민우혁 등이 안중근 의사 역할로 합류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배우 김도형, 서영주, 이정열 등이 맡았다. 2009년 10월 한국에서 초연한 <영웅>은 2011년에는 미국 뉴욕, 2015년에는 중국 하얼빈에 진출하는 등 세계로 무대를 넓혔다. 2019년에는 10주년 기념 전국 10개 지역 투어를 진행했고, 20만명의 관객을 모았다. 지난해에는 <명성황후>에 이어 국내 창작 뮤지컬 사상 두 번째로 누적 관객 100만명을 돌파했다. 뮤지컬 <영웅>이 다루고 있는 이야기는 안중근 의사의 삶 중 1909년에 맞춰져 있다. 대한제국 주권을 일제에 완전히 빼앗길 위기에 놓인 시점에서 갓 서른 살이 된 청년 안중근의 고뇌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가 독립운동의 결의를 다지고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을 방문하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과정을 모두 담고 있다. <영웅>이 다루고 있는 안중근 의사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 시대 상황과 조선 청년들의 고뇌를 함께 엿볼 수 있다. 이번 <영웅> 공연에서는 세종예술아카데미와 연계해 초등학생 대상 교육을 함께 진행한다. 교육은 노래, 서예, 안무, 역사 강좌로 구성되며 수강을 하면 <영웅> VIP석 표를 할인된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다. 교육에 참여하는 초등학생의 보호자에게도 VIP석 표를 할인된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는 할인권을 제공한다. 아이와 함께 <영웅>을 관람하고자 하는 부모님들에게는 좋은 기회가 될 전망이다. 02-2250-5900 *주간경향을 통해 소개하고 싶은 문화행사를 이 주소(flycloser@kyunghyang.com)로 알려주세요. 주간경향 독자들에게 혜택을 줄 수 있는 공연이나 전시면 더욱더 좋습니다. [연극]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 일시 6월 1~30일 장소 상명아트홀 1관 관람료 전석 6만원 인간의 도덕성과 그것을 판단하는 잣대에 관해 이야기하는 연극이다. 1980년 러시아 극작가 류드밀라 라주몹스까야의 작품으로 유럽 내 100개가 넘는 극장에서 공연됐다. 선과 악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바꾸려는 철학적인 작품이다. 1566-5588 [무용]몽유도원무 일시 6월 28~30일 장소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관람료 R석 4만원, S석 3만원 꿈속에서 본 듯한 아름다운 모습을 춤으로 풀어낸다. 이상과 현실이 공존하는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모티브로 삶의 무게를 벗어던지고 이상으로 향해가는 인간의 모습을 춤으로 형상화했다. 02-2280-4114 [콘서트]아시안 팝 페스티벌 2024 일시 6월 22~23일 장소 파라다이스시티 관람료 양일권 17만6000원, 1일권 11만원 다양한 장르와 스타일의 공연을 한 공간에서 만나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넬, 마이 엔트 메리, 김창완밴드, 백예린, 브로콜리너마저, 크라잉넛 등 국내 정상급 가수들도 함께한다. 1544-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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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환의 Hi-story](44)안중근 의사 유묵 31점 보물, 너무 많다고요?(2022. 07. 29 14:16)
- 2022. 07. 29 14:16 문화/과학
- 한 인물의 작품이 31점이나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는 것은 과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유묵들은 단순한 붓글씨가 아닙니다. 안 의사의 삶과 학식, 정신, 사상을 오롯이 담은 것이라 평가할 수 있습니다. 유묵 한점 한점이 안 의사의 유언이자 분신입니다.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된 안중근 의사의 유묵 31점. 안 의사는 사형언도를 받은 1910년 2월 14일부터 집행 때인 3월 26일까지 40여일 동안 유묵을 집중적으로 썼다. / 안중근의사기념관 제공 “아니 너무 많은 거 아닙니까?” 며칠 전 이주화 안중근의사기념관 학예팀장이 약간 곤혹스러운 전화를 받았습니다. 얼마 전 문화재청이 안중근 의사의 유묵 5점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했거든요. 일종의 항의전화 요점은 이겁니다. 역사상 3대 명필 중 두분인 석봉 한호(1543~1605)나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작품도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예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런데 두분보다 결코 잘 썼다고 할 수 없는 안 의사의 유묵이 너무 많이 보물로 지정되는 거 아니냐, 뭐 이런 문제 제기였습니다. 개인 최다 31점이 보물 이번에 보물로 지정된 5점은 안중근 의사(1879~1910)가 중국 뤼순(旅順)감옥에서 순국하기 전인 1910년 3월에 쓴 유묵입니다. 이중 ‘인무원려필유근우(人無遠慮必有近憂)’는 다롄(大連) 세관에 근무하던 일본인 가미무라 쥬덴(上村重傳)에게 써준 것인데, “사람이 깊은 사려가 없으면 반드시 가까운 근심이 있다”는 <논어> ‘위령공’ 편의 구절입니다. ‘일통청화공(日通淸話公)’은 일본인 간수과장 기요타(淸田)에게 써준 글귀입니다. ‘날마다 고상하고 청아한 말을 소통하던 분’으로 풀이되는데요. 중국 동진 시대 시인 도연명(365~427)의 시(‘은진안과 헤어지며’)의 “이틀 밤을 머물러 고상하고 청아한 이야기를 나누며, 더욱 친해졌음을 알았네(信宿酬淸話 益復知爲親)”라는 글이 연상됩니다. ‘황금백만냥불여일교자(黃金百萬兩 不如一敎子)’는 일본인 경수계장 나카무라(中村)에게 써준 것으로, “황금 백만냥이라도 자식에게 하나의 가르침만 못 하다”는 <명심보감>의 문구에서 따왔습니다. ‘지사인인살신성인(志士仁人殺身成仁)’은 안중근 공판을 지켜봤던 일본인 기자 고마쓰 모토코(小松元吾)에게 써준 겁니다. “뜻이 있는 선비와 어진 이는 몸을 죽여 인을 이룬다”라는 <논어> ‘위령공’ 편의 구절에서 유래했습니다. ‘마음을 씻는다’는 뜻의 ‘세심대(洗心臺)’는 가운데 ‘세심대’ 글자와 함께 왼쪽에 작은 글씨로 “경술삼월 여순감옥에서 대한국인 안중근 쓰다(庚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書)”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이렇게 5점인데요. 한꺼번에 5점이라니 좀 많아 보이기는 합니다. 그렇다고 “너무 많다”고 문제 제기할 수준은 아니지 않나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문화재청 사이트의 ‘문화재 검색란’에서 ‘안중근’이라는 키워드를 쳐보십시오. 보물로 지정된 유묵만 이번 5점을 포함해 31점이 검색됩니다. 3대 명필에 꼽히는 석봉 한호와 추사 김정희는 어떨까요. 지정건수로 보면 석봉 한호는 4점, 추사 김정희는 8점으로 검색됩니다. 개인의 유물이 31점이나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유례가 없습니다. 그러니 “안중근 의사 유묵이 지나치게 많다”는 문제 제기가 있었던 겁니다. 안 의사 유묵을 받으려 줄 섰던 일본인들 과연 그런 소리를 들어도 되는 건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유묵을 집중적으로 쓴 것은 사형언도를 받은 1910년 2월 14일부터 집행 때인 3월 26일까지 40여일 동안입니다. 안 의사의 자서전(<안응칠 역사>)에 그 이유가 나와 있는데요. “<동양평화론>을 쓰기 시작했다. 법원과 감옥의 관리들이 내 필적을 기념하려고 비단과 종이 수백장을 사 넣으며 청구했다. 나는 필법이 능하지도 못하고, 또 남의 웃음거리가 될 것도 생각하지 못하면서 매일 몇시간씩 글씨를 썼다.” 보물로 지정된 5점에서 보듯이 이 유묵들은 모두 일본인들에게 써줬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극적인 예가 있죠. 1910년 3월 26일 오전 9시, 안 의사가 사형집행장으로 나가기 직전 호송관인 지바 도시치(千葉十七) 상등병에게 “지필묵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며칠 전 안 의사에게 “휘호 한점을 받고 싶다”고 했던 지바의 요청을 떠올린 겁니다. 안 의사는 급히 준비한 비단천과 필묵으로 단숨에 글씨를 써내려갔는데요.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라는 행서 8자였습니다. 안 의사는 지바에게 “동양에 평화가 찾아오고 한일 간 우호가 회복되는 날 다시 태어나 만나고 싶다”고 작별인사를 해주었습니다. 지바뿐이 아닙니다. 안 의사를 뤼순 옥중에서 취조한 야스오카 세이시로(安岡 靜四朗) 검찰관, 간수 시타라 마사오(設樂正雄), 경관 야기 마사노리(八木正禮), 의사 오리타 다다쓰(折田督), 경수계장 나카무라(中村), 감옥을 찾은 경시 타케시(猛), 간수 미쓰이 도쿠이치(三井德一), 한국통감부 경시 사카이 요시아키(境喜明), 뤼순 초교 교사 히시다 마사모토(菱田正基) 등도 안 의사의 유묵을 받았습니다. 심지어는 사형수 신분인 안중근 의사의 담당 승려(쓰다 가이준·津田海純)도 안 의사의 유묵을 3점이나 보관했습니다. 뤼순감옥의 교도소장과 간수, 경찰, 검찰관, 통역, 세무관, 교사, 교화승까지 안중근 의사의 인품과 사상에 감복했다는 거죠. 안 의사가 어떤 분입니까. “내 거사는 개인 자격이 아니라 한국 의병 참모중장의 신분으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를 척살한 독립전쟁의 일부”라고 강조했죠. 안 의사가 내건 ‘이토를 죽인 15가지 이유’ 중 하나가 ‘동양평화를 깨뜨린 죄’이거든요. 따라서 안 의사는 죽는 그 순간까지 보통 일본인들의 양식을 일깨워 자신의 동양평화 의지를 심어주고 싶었을 겁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안 의사의 학식 안중근 의사의 삶과 학식, 철학을 알 수 있는 저술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다수의 저작과 글들은 수감 후 나왔는데요. 그 기간에 쓴 자서전(<안응칠 역사>)과 미완성으로 남은 <동양평화론> 등이 있습니다. 그밖에 뤼순감옥 이감 직후 검찰관에게 제출한 ‘한국인 안응칠 소회’와 ‘이등박문 죄악 15개조’ 등의 글이 있죠. 그 가운데 마지막 40여일간 붓을 휘둘러 써내려간 것이 바로 유묵입니다. 생각해보면 옥중에 무슨 참고문헌이 있었겠습니까. 지금까지 안중근 의사의 필체로 확인된 유묵은 62점 정도에 달하는데요. 그중 같은 문장이 하나도 없습니다. 불과 서른두 살에 순국한 안중근 의사의 깊고도 넓은 학문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안 의사가 인용한 중국 고전 중에는 공자의 <논어>가 유독 많습니다. 이중 ‘거친 옷과 거친 음식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은 더불어 논의할 수 없다(恥惡衣惡食者不足與議)’는 유묵은 <논어> ‘이인’에서 인용했고요. ‘(일신상) 이익을 얻으면 의로움을 생각하고, (나라가) 위태로움에 처하면 목숨을 바친다(見利思義 見危授命)’는 글은 <논어> ‘헌문’에서 따왔습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도 인용된 ‘날이 추운 뒤에야 소나무·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歲寒然後知松柏之不彫)’는 유묵의 출전은 <논어> ‘자한편’입니다. ‘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않으면 큰일을 이룰 수 없다(人無遠慮 難成大業)’와 ‘글을 널리 배우고 예로써 절제한다(博學於文 約之以禮)’도 <논어> ‘헌공’과 ‘안연’ 등을 인용했습니다. 중국의 역사서와 시도 두루 인용했는데요. ‘서툰 목수는 아름드리 좋은 목재를 다룰 수 없다(庸工難用 連抱奇材)’(<자치통감>)와 ‘오로봉을 붓으로, 삼상을 연지로 삼고, 푸른 하늘만 한 큰 종이에 내 마음속의 시를 쓰리라(五老峯爲筆 三湘作硯池 靑天一丈紙 寫我腹中詩)’(이백의 시)는 유묵이 그렇고요. 중국 진(秦)나라 말 인물인 황석공의 병법서(<소서>)와 옛 선현의 구전 문장까지도 인용했습니다. ‘홀로 자만하는 것보다 더한 외톨이는 없다(孤莫孤於自恃)’(<소서>)와 ‘백 번 참는 집안에 태평과 화목함이 있다(百忍堂中有泰和)’(구전 문장)가 그것입니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는 유명한 유묵도 있죠. 우국충정을 드러낸 유묵들도 있습니다. ‘천리 밖 임(나라) 생각에 바라보는 이 눈 뚫어질 듯하오이다. 이로써 작은 정성 표하니 행여 이 마음을 저버리지 말아달라(思君千里 望眼欲穿 以表寸誠 幸勿負情)’와 ‘장부는 비록 죽을지라도 마음은 쇠와 같이 단단하고 의사(義士)는 위태로움에 이를지라도 기상은 구름같이 드높다(丈夫雖死 心如鐵 義士臨危 氣似雲)’는 유묵이 그렇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내건 ‘이토를 죽인 15가지 이유’ 중 하나가 ‘동양평화를 깨뜨린 죄’였다. 안 의사는 죽는 그 순간까지 보통 일본인들의 양식을 일깨워 자신의 동양평화 의지를 심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 안중근의사기념관 제공 ‘국가의 안위를 마음으로 애쓰고 노심초사한다(國家安危勞心焦思)’는 글도 심금을 울리죠. 사형집행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눈이 뚫어질 듯’ ‘노심초사’하며 누란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걱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안 의사의 염원인 동양의 평화가 일본의 침략야욕 때문에 어려워진 것을 비판하는 유묵도 있습니다. ‘동양의 대세 생각하면 아득하고 어두우니 뜻있는 사나이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없구나. (동양)평화시국 이루지 못한 게 개탄스럽기만 한데, (일본이) 침략 정책을 고치지 않으니 참으로 가엾도다(東洋大勢思杳玄 有志男兒豈安眠 和局未成猶慷慨 政略不改眞可憐).’ 글씨로 동양평화 외친 안 의사 순수한 서예의 측면에서 보면 어떨까요. 안 의사는 “필법도 능하지도 못하고 남의 웃음거리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죠. 그러나 이것은 겸손의 소치라 할 수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글씨는 해서(정자체)와 행서(흘림체)의 중간인 해행(楷行)이 주가 되고 있는데요. 이동국 예술의전당 수석큐레이터는 “엄정하고 단아한 해서 중에서도 필묵이 정확하고 법도가 엄격한 안진경(709~785)류의 필법을 구사했다”고 평가했습니다. 대표적인 작품이 ‘천여불수반수기앙이(天與不受反受其殃耳)’, 즉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을 뿐’이라는 유묵인데요. 사람을 전율시키는 송곳 같은 필획이 돋보인다고 합니다. 안 의사의 성정·기질과 정신력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네요. 안 의사의 작품으로 확인된 62점 가운데 국내에 소재한 것이 40여점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한 인물의 작품이 31점이나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는 것은 과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유묵들은 단순한 붓글씨가 아닙니다. 안 의사의 삶과 학식, 정신, 사상을 오롯이 담은 것이라 평가할 수 있습니다. 유묵 한점 한점이 안 의사의 유언이자 분신입니다. 이동국 수석큐레이터의 언급이 심금을 울립니다. “안 의사는 1910년 2월 14일부터 집행 때인 3월 26일까지 40여일 사이에 집중적으로 유묵을 썼습니다. 안 의사는 글씨로 죽음을 극복했고, 글씨로 동양평화를 외친 분입니다.” 안중근 의사의 유묵 가운데는 안 의사의 염원인 동양의 평화가 일본의 침략 야욕 때문에 어려워진 것을 비판하는 것도 있다. 유묵은 “동양의 대세 생각하면 차마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없다”면서 “(일본이) 정략(침략 정책)을 고치지 않으니 참으로 가엾다”고 질타하는 내용이다. / 안중근의사기념관 제공 다만 이런 이야기는 할 수 있답니다. 안중근 의사의 유묵이 너무 많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것이 문제가 아니다, 석봉 한호나 추사 김정희의 작품이 너무 적게 지정됐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뭐 이런 얘기입니다. 이동국 수석큐레이터는 “그동안 서양의 잣대로 서예는 미술도 예술도 아니라는 인식이 너무 커서 상대적으로 홀대받았다”면서 “앞으로는 한호와 김정희의 작품도 적극적으로 국가지정문화재로 대우해줘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백범 김구(1876~1949)와 만해 한용운(1879~1944), 몽양 여운형(1886~1947) 선생 등의 유묵도 국가지정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차고 넘친다고 합니다. 이제는 이분들의 작품도 국가지정문화재의 가치를 평가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분실된 청와대 소재 유묵 참 제가 안중근 의사의 유묵을 언급할 때마다 빠뜨리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요. 청와대가 소장하고 있다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유묵(보물)이 있습니다. ‘거친 옷과 거친 음식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은 더불어 논의할 수 없다(恥惡衣惡食者不足與議)’는 작품인데요. 문화재청의 문화재 정보란에 이 유묵의 소재지가 ‘서울 종로 세종로1 청와대’라 돼 있는데요. 도난 문화재 정보란에 ‘청와대에서 도난 분실’로 표시돼 있습니다. 한마디로 청와대가 갖고 있던 안중근 유묵이 사라져 행방을 알 수 없다는 건데요. 이 유묵은 1976년 3월 17일 당시 소유자인 이도영 홍익대 이사장이 청와대에 기증했다는데요. 어느 순간부터 감쪽같이 사라졌다네요. 도대체 언제 어떻게 분실됐는지 알 수 없답니다. 청와대가 어수선할 때인 1979년 10·26 사태 이후나 1980년대 중후반 누군가가 슬쩍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입니다. 정말 기가 찰 노릇이죠. 문화재 사범단속반이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추적해주기 바랍니다. *이 기사를 쓰는 데 이주화 안중근의사기념관 학예팀장과 이동국 예술의전당 수석큐레이터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줬습니다.
- 이기환의 Hi-story
- [이기환의 Hi-story](23)불꽃으로 산 ‘여자 안중근’과 ‘안사람 의병대장’(2022. 02. 25 15:00)
- 2022. 02. 25 15:00 문화/과학
- ‘여자 안중근’으로 불린 남자현 선생. ‘안사람 의병대장’으로 불린 윤희순 선생. 그들은 드라마 의 고애신처럼 ‘꽃으로, 불꽃으로’ 살았던 여성 독립투사들이었습니다. 남자현 선생이 1933년 2월 19일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 전권대사인 무토 노부요시를 암살하려다 체포됐다는 기사가 100여일간의 보도통제 후 나왔다. 그가 풀렸다는 알림과 함께 사건의 전말을 보도한 조선일보 1933년 6월 11일자(왼쪽 ). 남자현 선생은 단식투쟁을 벌이다가 옥중 순국을 염려한 일제에 의해 보석으로 풀려났지만 5일 후 서거했다. 조선중앙일보는 1933년 8월 27일 선생의 순국 소식을 전했다. 재방, 삼방, 사방, 아니 십수방을 봐도 눈물이 나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인데요. 그중 기억에 남는 대사가 몇줄 있습니다. 유진 초이(이병헌 분)가 의병인 고애신(김태리 분)과 나누는 대화가 있죠. “…(당신은) 수나 놓으며 꽃으로만 살 수 있을 텐데… 조선 사대부 여인들은 그렇게 살던데….”(유진 초이) “나도… 꽃으로 살고 있소. 다만 나는… 불꽃이오. 그렇게 환하게 뜨거웠다 지려 하오.”(고애신) 고애신이 일본군의 무차별 구타에 위험에 빠진 조선 여성을 구하려고 “총을 빌려달라”고 하자 유진 초이가 말리는 장면은 또 어떻고요. “저 여인 하나 구한다고 조선이 구해지는 것이 아니오.”(유진 초이) “구해야 하오. 저 여인이 언젠가 내가 될 수도 있으니까….”(고애신) 61세 할머니 독립투사 드라마뿐이 아니죠. 실제로도 ‘고애신’처럼 ‘꽃으로, 불꽃으로’ 살았던 여성 독립투사들이 있습니다. 1933년 2월 19일 오후 3시 45분, 하얼빈 교외 정양가 거리에서 거지 차림의 여인이 일제 경찰에게 붙들렸습니다. 여인의 품에는 권총과 비수, 폭탄도 나왔습니다. 붙잡힌 여인은 당시 61세의 독립투사 남자현 선생(1872~1933)이었습니다. 여인의 몸은 죽은 남편이 생전에 입고 있던 옷을 감고 있었습니다(일설에는 의병전쟁에서 전사한 남편의 피 묻은 적삼이라든가, 혼인 당시 입었던 옷이라든가 여러 설이 있다). 선생은 일제 괴뢰국인 만주국 설립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는 만주국 전권대사(무토 노부요시·武藤信義·1868~1933)를 암살하려고 중국인 거지로 변장했습니다. 조선인 밀정(이종영)의 밀고로 수포가 됩니다. 선생은 혹독한 고문 속에 9일간 단식투쟁으로 버텼습니다. 옥중 순국을 두려워한 일제가 급히 병보석으로 풀어줬지만 5일 만에 서거했습니다. 남자현 선생은 만주에서 ‘독립군의 어머니’, ‘만주 투쟁의 여걸’, ‘여자 안중근’이라는 별명을 얻었는데요. 일제강점기 언론을 검색하다 보면 여성인 남자현 선생과 관련된 기사가 이례적이라 할 만큼 눈에 띄더라고요. 그분이 그만큼 독립운동사에서 대단한 비중을 차지하는 여성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강철 투사가 됐을까요. 1891년 19세의 나이에 혼인(남편 김영주·1871~1896)한 남자현 선생의 인생을 바꾼 계기가 있었습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선포’ 이후 의병전쟁에 참전한 남편이 1896년 전사한 겁니다. 이후 유복자(김성삼)와 시어머니를 부양하던 남자현 선생은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독립운동에 발 벗고 나섭니다. 손가락 끊어 쓴 혈서 남자현 선생은 1919년 3월 서울에서 독립선언 격문을 돌리며 3·1운동을 펼친 뒤 만주로 떠납니다. 그때 그의 나이가 ‘무려’ 47세였습니다. 선생은 ‘무지와 몽매도 적’이라며 조선여자교육회를 10여곳이나 만들어 여성의 항일투쟁 의식을 북돋웠습니다. 무장투쟁에도 나섰습니다. 1934년 조소앙(1887~1958)이 쓴 <여협 남자현전>은 “남자현 선생이 남녀 한인 600명을 조직해 맹렬한 항전을 벌였다”고 소개했습니다. 1920년대 서간도 일대에는 90여개 독립운동단체가 난립하고 있었습니다. 선생은 동분서주하며 동지들 간 불화를 불식시키고자 적극 노력했습니다. 남편(김영주)이 죽은 직후인 1897년 무렵 갓 태어난 아들(김성삼)을 안고 시댁 식구들과 찍은 사진(왼쪽,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 오른쪽 사진은 옥중 단식투쟁 중 보석으로 출감했지만 5일 만에 순국한 남자현 선생의 임종을 아들과 손자(김시련)가 지키고 있는 장면이다. 어떤 자료는 “남자현 선생이 손가락을 베어 그 피로 글을 써서 책임자들을 소집함으로써 화합이 성립됐다”(‘독립운동의 홍일점-여걸 남자현’, ‘부흥’ 1948년 12월호)고 소개했는데요. 단지 혈서가 팩트인지는 확인할 수 없더군요. 선생은 의열 활동에도 나서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3·5대 총독, 1919~1927, 1929~1931)의 암살미수사건을 주도했습니다. “남자현은 박청산·김문거·이청수 등과 사이토 총독을 암살하기로 모의했다. 1927년 4월 권총 한자루와 탄환 8발을 지니고 몰래 들어와 총독을 암살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만주로 돌아갔다.”(<조선중앙일보> 1933년 8월 26일) 만주사변(1931)을 일으킨 일제가 괴뢰국(만주국·1932)을 세우자 국제연맹은 하얼빈(哈爾濱)에 조사단(리턴조사단)을 파견합니다. 선생은 이때야말로 조선의 상황을 알릴 기회라고 여깁니다. 선생은 왼손 손가락을 끊어 무명천에 ‘조선은 독립을 원한다(朝鮮獨立願)’라는 혈서를 써서 조사단에게 보내려 합니다. 삼엄한 경비를 뚫지 못하자 인력거꾼에게 돈을 주고 리턴조사단에 전달하려 합니다. 그러나 실패로 돌아갑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은 선생이 이듬해(1933) 만주국 전권대사인 무토 노부요시를 암살하려다가 역시 무위에 그칩니다. 남자현 선생에게서 안중근 의사의 얼굴이 중첩됩니다. 남자현 선생(1872)이 안중근 의사(1879~1910)보다 일곱 살 위거든요. 그분의 기개와 행동이 어쩌면 그렇게 안중근 의사와 닮았는지 모릅니다. 남자현 선생의 유언이 심금을 울립니다. “내가 갖고 있는 249원 80전 중 200원은 조선 독립의 날, 정부에 독립축하금으로 바쳐라. 그리고 손자(김시련)를 대학까지 공부시켜 내 뜻을 알게 해라. 이 49원 80전으로 반은 손자 공부에 쓰고, 반은 친정의 종손에게 주어라.” 철혈 독립투사였지만, 한편으로는 한 가정의 평범한 어머니와 할머니의 면모를 보여주는 대목이죠. 독립정신의 근간인 교육을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당부로도 읽힙니다. 1933년 8월 23일 30여명의 동지가 모인 가운데 장례식을 치른 남자현 선생의 유해는 하얼빈의 외국인 공동묘지에 묻혔는데요. 이때 아들인 김성삼이 어머니의 부고 400장을 돌리다가 일제 경찰에 의해 압수당했습니다. 선생을 기리는 시를 한편 소개합니다. “…동포여, 무엇이 그리 바쁘뇨/ 황망한 발길을 잠시 멈추시고/ 만주벌에 떠도는 남자현이 혼백 앞에/ 자유세상 밝히는 분향을 올리시라… 아낙의 혈서와 무명지를 보게 되리라.”(고정희 시인의 ‘남자현의 무명지’) ‘안사람 의병대’를 아시나요 <미스터 션샤인>의 고애신이 활약한 그 시대, 그 무렵에 불꽃처럼 산, 최초의 여성 의병장이 계십니다. 바로 ‘안사람 의병가’를 지은 윤희순 선생(1860~1935)인데요. 윤희순의 중 ‘안사람 의병가’(왼쪽)와 ‘오랑캐들아 경고한다’는 주제의 격문. 특히 글쓴이가 ‘선비의 아내 윤희순’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 강원대중앙박물관 소장 “아무리 왜놈들이 강성한들 우리들도 뭉쳐지면 왜놈 잡기 쉬울세라.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 사랑 모를쏘냐. 아무리 남녀가 유별한들 나라 없이 소용 있냐. 우리도 의병하러 나가보세….” 가정 일만 전담했던 당대 여성들의 구국운동을 일깨우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요. 쉬운 단어의 반복과 강조를 동원한 감성적인 설득으로 선동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윤희순 선생이 의병운동에 투신한 계기는 역시 1895년 일어난 명성황후시해사건과 단발령 선포 등이었는데요. 이때 시아버지 유홍석(1841~1913)을 비롯한 가문 전체가 의병 활동에 뛰어듭니다. 당시 35세였던 윤희순 선생은 시아버지의 만류로 나갈 수는 없었지만 나름대로의 방식대로 의병 활동의 일익을 담당합니다. 이때 선생은 ‘안사람 의병가’는 물론, ‘애달픈 소리’, ‘방어장’, ‘병정가’, ‘의병군가 1·2’, ‘오랑캐들아 경고한다’, ‘왜놈 앞잡이들은’, ‘금수들아 받아보거라’ 등 다수의 의병가와 격문을 지어 민간에 퍼뜨립니다. “우리 조선사람 농락하며 안사람들 농락하며 민비를 살해하니 우리인들 살 수 있나. 빨리 나와 의병하세.”(‘방어장’) “…좀벌레 같은 놈들아… 오랑캐가 좋단 말인가… 죽더라도 서러워 마라. 우리 의병은 금수를 잡는 것이다….”(‘병정가’) 또 ‘나라 없이 살 수 없네. 나라 살려 살아보세… 조상 없이 살 수 없네, 조상 살려 살아보세….’(‘의병군가’) ‘원수 같은 왜놈들아. 느이 놈들 잡아다가 살을 갈고 뼈를 갈아 조상님께 분을 푸세.’(‘병정가’) ‘오랑캐들아 경고한다’는 격문 또한 흥미로운데요. “…우리 안사람들도… 의병을 할 것이다… 이 마적떼 오랑캐야. 좋은 말로 할 때 용서를 빌고 가거라. 이 오랑캐야. 대장놈들아. 우리 조선 안사람이 경고한다. 조선 선비의 아내 윤희순.” 윤희순 선생은 만주 망명 후인 1912년 노학당이라는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학교는 1915년 폐교할 때까지 50여명의 반일애국자를 키워냈다. 선생은 “조선의 안사람들이 의병을 뒷바라지하는 것이 곧 나라 찾기이고 왜놈들 잡는 것”이라면서 “이 가사를 자주 읽고 외우라”고 신신당부하는 글귀를 붙이기도 했습니다. 윤희순 선생이 얼마나 이런 노래를 불러댔는지 친척 한분이 걱정을 태산같이 하는 편지를 선생의 시댁에 보냅니다. “밤낮없이 부르는 소리가 왜놈들이 들으면 죽을 소리만 하니 걱정이로소이다. 실성한 것 같은데… 이젠 아이들까지 그러하고 젊은 청년들까지 부르니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그만큼 선생의 의병가가 저잣거리에 퍼졌다는 것을 방증하죠. 자신의 안위는 조금도 염려하지 않은 겁니다.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 이후 고종이 강제 퇴위 되고 ‘정미 7조약’으로 군대가 해산되자 다시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났죠. 이때 선생은 30여명으로 구성된 이른바 ‘안사람 의병단’을 조직합니다. ‘안사람 의병단’은 남자 의병들의 뒷바라지에 만족하지 않고 강원 춘천 여우내 골짜기에서 실전훈련까지 받았는데요. 심지어 화약 만드는 일까지 뒷바라지했고, 군자금까지 거두었습니다. 1912년 노학당이라는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이 학교는 1915년 폐교할 때까지 50여명의 항일투사를 키워냈습니다. 불행한 일도 겹쳤습니다. 시아버지(1913)와 시동생(유재열·1914), 남편(유제원·1915)까지 잃었습니다. 선생은 이후 아들인 유돈상(1894~1935)과 함께 3대 독립운동을 이어갔습니다. 이때 윤희순 선생은 여러 독립투사의 친인척 20여명으로 조선독립단을 결성해서 통신 연락 업무와 모금활동, 정보수집, 군사훈련 등의 활동을 이어나갑니다. 선생도 독립운동을 펼치던 아들이 체포돼 모진 고문 끝에 순국하자(1935년 7월 19일) 끝내 무너지고 맙니다. 조국의 독립을 꿈꾸며 시아버지와 남편의 죽음 앞에서도 의연했던 윤희순 선생도 자식의 죽음 앞에서는 한사람의 어머니였던 겁니다. 윤 선생은 아들이 순국한 지 불과 11일 만에 세상을 떠납니다. 선생의 안타까운 외침이 가슴을 저밉니다. “내 몸도 슬프련만 우리 의병 불쌍하다… 왜놈들 득세하니 배고픈들 먹을 수 있나 춥다 한들 춥다고 할 수 있나. 내 땅 없는 설움이란 이렇게 서러울까… 불쌍하다 불쌍하다… 방울방울 눈물이라. 맺히나니 한이로다.” 3.2%에 불과한 여성독립운동가 어떻습니까. <미스터 션샤인>의 고애신처럼 불꽃 같은 삶을 산 분이 어디 남자현·윤희순 선생뿐이겠습니까. 통계를 보니 2022년 2월 말 현재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여성독립유공자가 544명이더군요. 이 두분과 함께 몇분을 더 소개해드릴까 했는데요. 한분 한분의 ‘불꽃 삶’을 고작 원고지 몇장으로 정리할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부해서 심도 있게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보훈처에 등록된 독립유공자 수가 1만7066명입니다. 544명이라면 적잖아 보이지만 ‘1만7066분의 544’라면 어떻습니까. 3.2%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부장적인 유교사회에 있던 19세기~일제강점기의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면 무 자르듯 많다 적다라고 재단할 수는 없겠죠. 그러나 솔직히 말해 남녀 독립운동가의 서훈 기준이 같다면 여성들은 불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성들은 남편이 독립운동가라면 자식과 시부모를 부양하고, 가정의 대소사까지 도맡아야 했습니다. 그러니 그런 여성들도 독립유공자에 해당하는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여론도 있습니다. 독립운동가의 동지이자 어머니이고, 가족으로서 뒷바라지한 여성들이니까요.
- 이기환의 Hi-story
- [이 한 권의 책](2020. 10. 16 15:47)
- 2020. 10. 16 15:47 문화/과학
- ㆍ행동하는 사상가 안중근의 고뇌와 투쟁 한국 현대사에서 ‘10월 26일’은 총소리로 기억된다.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육군 중장 출신의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쏘았고, 그보다 꼭 70년 전에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은 일본제국주의의 설계자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흔히 화약 냄새가 나는 사건들에는 정치적 상대주의가 작동한다. 한쪽의 영웅이 다른 쪽에서 역적으로 폄하되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 총리 스가는 장관 시절에 “안중근은 범죄자이고 테러리스트”라는 자국중심주의적 발언을 거리낌 없이 내뱉었다. 안중근 지음·범우사 그렇지 않다. 당시 국제법에 따르면 일반인도 의용군, 즉 군인이 될 수 있고 거듭된 강제조약이나 고종의 퇴위는 침략 행위로 인정된다. 무엇보다 대한제국의 주권자인 고종은 물러나면서 수수방관하는 국민이 되지 말라는 조칙까지 발표했다. 따라서 하얼빈역에서 울린 총성은 정당한 교전 행위의 일환이며 의거가 아니라 대첩으로 정정되어야 한다. 안중근 의사가 아니라 안중근 장군이 좀 더 그의 역사적 행위에 어울리는 작명인 것이다. 무엇보다 뤼순의 감옥에서 다듬은 ‘동양평화론’은 안중근이 민족주의자의 한계를 넘어 세계평화를 고민하는 사상가였다는 재발견의 희열까지 던져준다. 사격에 재능이 있어 사냥을 즐기던 평범한 젊은이가 어떻게 민족과 인류를 위한 역사적 기폭제로까지 진화할 수 있었을까. 영어의 몸으로 집필한 <안응칠 역사> (<안중근 의사 자서전> 원제)라는 자서전이 실마리다.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을 때 그의 집안은 부유했고, 과거에 급제한 부친은 관리의 경력을 시작하려 했다. 그러나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됐던 부친이 갑신정변의 회오리에 휘말려 꿈은 좌절되고 가문의 경제력도 줄어들었다. 곤경에 휩싸인 부친은 천주교의 도움을 받아 어려움을 벗어났고, 집안이 통째로 귀의했다. 안중근은 세례를 준 홍요셉 신부와 전도 활동을 다니면서 사랑과 평등의 윤리를 내면에서 발효시켰다. 동양의 ‘살신성인’과 서양의 ‘사해동포’라는 두 가지 밑거름이 어우러져 행동하는 사상가 안중근을 맺은 것이다. 국운이 몰락하면서 그의 고뇌는 깊어지고 동아시아 각국을 돌아다니며 계몽운동과 무장투쟁 등 다양한 해결책을 추구했다. 연해주 지방에서 300명의 대원을 이끌고 일본군과 전투를 치르면서 붙잡은 포로를 만국공법에 따라 풀어주고 심지어 총기까지 돌려줬다. 물정 모르는 몽상가라는 비난 속에서도 원칙을 어길 수 없다는 것이 선비정신이요, 휴머니스트로서의 진면목이다. 숱한 패배와 좌절 속에서도 그는 생애 최고의 승리를 하얼빈에서 거두었다. 말과 행동이 일치된 고매한 인격은 법정과 감옥에서 광채를 발했고, 취조하던 검찰관과 옥리들까지 감화될 정도였다. 적까지 경의를 표하게 만든 언행의 원천은 무엇보다 할머니 조마리아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조카이자 김구의 맏며느리인 안미생은 증언한다.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말라고 했던 어머니가 지어 보낸 수의를 입고 아들은 교수대에 올랐다. 지상에서 영원으로 향하는 그 순간, 안중근의 표정은 고요한 물이었다. 그 어머니가 그 아들을 만든 것이다.
- 이 한권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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