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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총 763 건 검색)

연세대와 수험생 간 ‘논술 문제 유출’ 법적 다툼 마무리
2024. 12. 24 18:10사회
... 냈다. 법원은 지난달 논술시험의 효력을 정지해달라는 수험생 측의 가처분 소송을 인용했다. 연세대 측은 이의신청을 제기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서울고법에 즉시항고했다. 서울고법은 지난 3일...
2025 대입수능
연세대·고려대 수시 ‘최초 합격’ 포기 늘어났다, 의대 영향?
2024. 12. 20 08:07사회
... 고려대 수시 최초합격자 4854명 중 46.1%에 달하는 2236명이 등록을 포기했다. 이는 지난해 연세대, 고려대 최초합격자 중 등록을 포기한 비율인 40.6%(1927명)보다 5.5%포인트 늘어난 수치다. 총 6번...
2025 대입수능
연세대도 이화여대도 학생총회 열어 “윤석열 탄핵”…불붙은 대학생 총궐기
2024. 12. 13 18:03사회
... 말했다. 대학교 시험기간이라 곳곳에 태블릿PC를 켜고 공부를 하는 학생들도 보였다. 최서윤씨(19·연세대 경영학과)는 “사흘 뒤 시험”이라며 “공부도 해야 하고 시위도 나가야 해 대통령 때문에 너무...
탄핵, 국내외 영향
연세대 18년만에 학생총회 성사···“윤석열은 퇴진하라”
2024. 12. 13 10:47사회
... 신촌캠퍼스 잔디광장에서 ‘윤석열 퇴진’을 요구하는 학생총회에 참석하고 있다. 연세춘추 제공 연세대학교 학생총회에서 윤석열 대통령 퇴진 요구안이 98.9% 찬성으로 가결됐다. 지난 2006년 대학의...
탄핵, 국내외 영향

스포츠경향(총 178 건 검색)

오는 23일 연세대에서 한국체육정책학회 추계 학술대회 개최
2024. 11. 15 16:32 스포츠종합
오는 23일 연세대에서 한국체육정책학회 추계 학술대회 개최 오는 23일 오후 1시부터 연세대 스포츠과학관에서 한국체육정책학회 추계 학술대회가 개최된다. 주제는 ‘스포츠정책의 융복합적 접근과 확장 가능성 탐색’이다. 김상훈 스포츠산업연구실장(한국스포츠과학원)이 ‘미래 환경변화와 스포츠 응용학 연구과제’라는 제목으로 기조발제를 한다. 이어 김선희 교수(국립목표대학교)가 ‘스포츠교육과 정책 - 아동 및 청소년을 위한 체육정책 연구의 새로운 방향과 과제’이라는 주제로 첫번째 발제를 한다. 송홍선 교수(국립관동대학교)가 ‘스포츠과학과 정책-국민건강증진을 위한 스포츠과학의 역할, 국민체력 100 중심으로’를 발표하며 마지막으로는 신윤아 교수(단국대학교)가 ‘스포츠의학과 정책 - 여성 선수의 건강관리와 부상 예방 등을 위한 스포츠의학 연구 정책과 지원 방안 탐색’를 소개한다. 이어 권순용 교수(서울대학교)가 좌장을 맡아 토론을 진행한다. 토론자로는 김세훈 기자(경향신문), 이은군 선임건강운동관리사(국민체육진흥공단), 홍은아교수(이화여자대학교)가 나선다.
5수생 미미미누 “연세대, 참 마음에 안들어” 도발 (라스)
2024. 11. 13 17:50 연예
MBC ‘라디오스타’ 연세대 출신 손범수와 고려대 출신 미미미누가 학교의 명예를 건 자부심 대결을 펼친다. 오늘 (13일) 방송되는 MBC ‘라디오스타’는 손범수, 한상보, 뉴진스님, 미미미누가 출연하는 ‘투 머치가 온다’ 특집으로 꾸며진다. 이날 오전 선공개된 영상에선 5수생 유튜버 미미미누가 남다른 모교 자랑을 펼쳤다. 5수 끝에 고려대에 입학한 미미미누는 “고려대의 자랑이라고 하면 많은 정치인분들이 배출됐고, 스포츠에는 김연아 선수도 있고 이천수, 박주영 선수도 있고, 김태호 PD님도 계시고”라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MBC ‘라디오스타’ 그러면서 “연세대를 배척하고 있다, 제가 논술 시험을 세 번이나 봤는데 저를 다 떨어뜨렸다. 교수님들이 인재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최근 ‘연세’라는 이름이 붙은 우유와 빵이 인기를 끈 것에 대해 “이런 행태가 참으로 마음에 안 든다”고 도발해 MC들을 당황시켰다. 하지만 이를 듣던 연세대 출신 손범수는 “대개 연세대 합격을 못 한 사람들의 후유증이 상당히 크다”고 반격했다. 심지어 “고대생들은 약국에 가도 ‘연고’ 달라고 안 하고 ‘고연’ 달라고 한다”라고 말해 모두를 빵 터지게 만들었다는 후문. 게다가 손범수는 “이미 게임은 끝났다”라며 최근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연세대 출신 한강 작가를 언급한 것에 이어 “영화에는 봉준호, 요리하면 백종원, 예능에는 나영석 PD, 방송에는 손범수, 전현무까지”라고 ‘Y블러드’의 자부심을 자랑한다. MC 김국진은 조용해진 미미미누를 향해 “꼬리 내리는 거예요?”라고 물었는데, 미미미누는 본인의 밈 유행어인 “넘어갈게요”라고 받아 치며 다급히 토크를 패스해 폭소를 유발한다. 오늘(13일) 오후 10시 30분에 방송.
‘최강야구’ 14일 연세대전···쏟아진 기록들
2024. 07. 10 16:04 야구
JTBC ‘최강야구’ 동시 접속자 수 15만명 전 시즌 13경기 연속 매진 최다 9연승···직관전 6연승 질주 ‘최강야구’가 또 한번 직관 경기 전석 매진을 기록하며 뜨거운 인기를 입증했다. 14일(일) 오후 2시 고척 스카이돔에서 열리는 ‘최강 몬스터즈’와 연세대학교 야구부의 직관 티켓이 전석 매진됐다. 예매를 위한 동시 접속자 수는 15만명 이상, 이번 시즌 5경기 연속, 전 시즌 13경기 연속 매진 기록이다. 이번 경기는 대학 야구의 전통 강호 연세대학교와의 경기로 ‘최강 몬스터즈’와의 대결은 처음이다. ‘최강 몬스터즈’의 기세도 무섭다. 최근 방송 기준(7/8) 강릉 영동대학교에게 7-4로 승리하며 최다 연승인 9연승과 직관전 6연승이라는 대기록을 쓰고 있다. 이 기세를 몰아 ‘최강 몬스터즈’가 또 다시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지 관심이 뜨겁다. JTBC ‘최강야구’는 매주 월요일 오후 10시 30분에 방송된다.
한국스포츠미디어학회, 7일 오후 2시 연세대에서 ‘파리올림픽 관련’ 춘계 세미나 개최
2024. 06. 06 08:42 스포츠종합
한국스포츠미디어학회 춘계 세미나 대학 스포츠 관련 학과 교수와 방송과 신문 언론인으로 구성된 한국스포츠미디어학회가 7일 오후 2시 서울 연세대학교 스포츠과학관에서 2024년도 한국스포츠미디어학회 춘계세미나를 개최한다. 주제는 ‘2024 파리올림픽과 대한민국 스포츠 : 미디어, 스포츠 그리고 거버넌스‘다. 학계, 미디어계, 체육계 전문가들이 참석해 발제 및 토론을 벌인다. 유상건 상명대 교수가 ‘공공재로서 올림픽 콘텐츠’라는 제목으로 첫번째로 발제한다. 이어 우상일 전 문화체육관광부 체육국장이 ‘파리올림픽에 대한 기대와 전망’을, 남정훈 한국체대 교수가 ‘스포츠 거버넌스와 팀 코리아’라는 제목으로 발제를 이어간다. 발제가 모두 끝나면 토론회가 벌어진다. 유승민 국제올림픽위원회 선수위원 겸 대한탁구협회장, 김기범 KBS 스포츠취재팀장, 김세훈 경향신문 스포츠부 기자, 김창금 한겨레신문 스포츠팀 선임기자, 이현우 텍사스 A&M 대학 교수가 토론자로 참여한다. 김기한 서울대 교수, 이준성 연세대 교수, 정영재 중앙선데이 국장이 차례로 사회를 맡는다.

주간경향(총 6 건 검색)

[언더그라운드. 넷]연세대 신경영관 애정행각 커플 논란, 그 후(2016. 05. 10 18:28)
2016. 05. 10 18:28 사회
이른바 '연세대 신경영관 커플 영상' 유포 후 학교 측 조치라고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 '그 사건'에 대한 학교 측 대응조치는 사실이었다. / 클리앙 “쪼잔하게 일부만 공개하지 말고 전체를 공개하라는 뜻인가. 생각하는 것 참 한심하네요.” 4월 28일 초저녁. 인터넷에 유포된 한 사진을 두고 ‘스테레오타입’이라는 닉네임을 쓰는 누리꾼이 내놓은 촌평이다. 사진을 보면 직원들이 유리창의 불투명 코팅을 열심히 제거하고 있다. 장소는 지난해 완공한 연세대 신경영관의 세미나실이다. 이날 낮 이 곳은 인터넷에서 폭발적인 화제를 모았다. ‘연세대 신경영관 세미나실 커플’이라는 제목의 영상이 카톡이나 밴드 등을 타고 암암리에 퍼졌다. 문제의 불투명 코팅 때문에 신상은 노출되지 않았지만 신원미상의 남녀가 이곳에서 과도한 애정행각(?)을 벌였고, 그 장면을 누군가 휴대폰으로 찍어 인터넷에 올렸다. “오늘 경영관에서 벌어진 사건이 뭔가요?” “했대요.” “아직 하는 중이라는데.” “구경 중이신 분?” “실시간인 듯.” 영상을 두고 이 학교의 한 단톡방에서 오간 이야기들이다. 남녀의 애정행각이 ‘실시간으로 SNS 등에 중계됐다’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시차가 있다. 재학생 익명 커뮤니티에 첫 제보가 올라온 시간은 오후 2시10분이고, 위 단톡방에서 이야기가 오간 시간을 보면 오후 3시48분쯤이다. 1시간30분이 넘게 애정행각이 이어졌다는 얘기인데, 그럴 가능성은 없다. 뒤늦게 현장검증하겠다고 몰려든 구경꾼 때문에 상황을 모르고 해당 세미나실을 이용하던 다른 커플이 느닷없게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그나저나 이날 저녁 학교 측이 취한 조치라는 사진은 사실일까. 정말 이날 낮에 벌어진 불미스런 사건 때문에? 이 학교 홍보팀장에게 물어봤다. “아… 예…, 그렇다고 봐야지요. 경영대학에서 취한 조치이기 때문에 정확한 경위는 모르겠습니다.” 경영대 행정실에 다시 물어봤다. ‘그 사건’ 때문에 불투명막을 제거한 것은 사실이다. 학교 측의 대응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이 많다. 불투명막이 있었던 것이 나름 집중력 향상이나 프라이버시 보호 때문이라는 건데, 예를 들어 화장실에서 그런 사건이 난다면 화장실 문을 없앨 거냐는 의견도 있는데? “글쎄요. 모든 사람을 다 만족하는 조치는 없을 겁니다. 일방적이라면 일방적이긴 한데. 그런 사건도 있어서 학생회 측에도 양해를 구했고.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만약 이런 공간에서 성폭행 사건이 발생한다면 그건 더 큰 문제일 수도 있으니. 지금 현재로서는 어떻게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보니, 더 큰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우선 중요하다고 판단했어요.” 이야기를 들어보면 일리가 없는 건 아니다. 최근 들어 이런 종류의 사건에서 화제를 모았던 것은 중국 유니클로 매장 탈의실 영상이다. 차이라면 유니클로 영상은 자신들이 직접 찍은 영상인데, 이 영상은 누군가에 의해 도촬된 영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해당 영상 속에 등장하는 학생들이 여성은 한국학생이고, 남성은 중국 유학생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이 학교 경영대학 관계자는 “영상 속 등장 남녀의 신원은 확인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언더그라운드. 넷
[추적]‘사회공헌’ 탈 쓴 일본재단과 연세대의 수상한 커넥션(2015. 09. 01 17:18)
2015. 09. 01 17:18 사회
ㆍ아시아연구기금 바탕, 총장과 교수들 네트워크 형성… 20년 논란 아직도 해소 안 돼 “교수사회가 좁다면 좁은 사회입니다. 개인적인 소신이 있다면야 그걸 뭐라고 할 수는 없겠죠. 혼자만의 생각을 넘어서 다른 사람에게 돈을 매개로 그렇게 전파하는 데서 문제가 발생하는 겁니다. 아무리 객관적이라고 하더라도 암묵적인 컨텍스트가 깔려 있는데,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연세대 교수 ㄱ씨) “사실 돈을 받기 위해 경쟁하는 분위기도 아니었던 것으로 압니다. 이를테면 국가연구비 집행기관인 학술진흥재단은 경쟁도 심하고, 무슨 돈을 어떻게 썼는지 영수증 관리도 염격하게 해야 합니다. 연차보고서에 나온 제목만 보더라도 무슨 돈을 어디에 썼는지 사후 관리가 거의 드러나지 않습니다. 교수들 입장에서는 일종의 ‘꽁똔’이죠. 사람을 포섭할 때 하책은 너 이거해, 라고 시키는 것이고 상책은 마음대로 하라고 풀어놓는 것이죠.”(연세대 교수 ㄴ씨) “사사카와재단이라고 혹시 아십니까.” 지난 8월 중순, 기자는 제보를 받았다. 제보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사카와재단은 일본의 대표적 우익인사이자 A급 전범이었던 인사가 일본 패망 후 경정 도박으로 번 돈으로 만든 재단이다. 2011년 이름을 일본재단으로 바꿨다. 20년 전에도 연세대가 사사카와재단으로부터 돈을 받아 연구하는 것이 논란이 된 적이 있는데, 총장을 비롯해 학교의 주요 보직교수들이 이 기금을 바탕으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사회공헌의 외피를 쓴 일본 극우재단과 연세대는 왜 연구기금을 만들었을까. 사진은 연세대 총장실이 있는 본관 전경 / 연세대학교 A급 전범 출신 인사가 설립한 ‘우익재단’ 확인이 필요했다. 제보자는 사사카와재단이 이름을 바꾼 것도 “마치 일본의 공식기금인 양 위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외무성 산하의 공식 행정기구인 국제교류기금의 영문명칭은 ‘Japan Foundation’이다. 반면, 제보자가 거론한 일본재단의 영문이름은 ‘Nippon Foundation’이다. 민간조직이다. 설립자인 사사카와 료이치(笹川良一)가 A급 전범인 것은 맞다. 그는 1995년 타계했다. 현 일본재단의 이사장은 그의 3남인 사사카와 료헤이(笹川陽平)가 맡고 있다.(박스기사 참조) 1996년에 설립된 ‘아시아연구기금’ 설립과 이후 운영에서 ‘일본재단’이 어느 정도 참여하고 기여했는지는 기금 홈페이지 등에 밝히지 않고 있다. 다만 아시아연구기금 소개에서 ‘일본재단’ 관련 부분은 이렇게 기술돼 있다. “…그동안 동북아시아 국가간의 협력과 이해증진을 위해 노력해 왔던 한국의 연세대학교와 일찍이 국제협력과 이해증진을 통한 동북아시아 국가들과의 협력 확대를 위한 사업을 전개해 왔던 ‘일본재단’이 1995년 종전 50주년과 한·일 국교정상화 30주년을 맞이해 동북아시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상호이해의 증진은 물론, 지역의 안보와 경제협력 증진을 위한 연구기금의 설립에 합의함으로써 탄생됐다.” ‘공익재단법인 아시아연구기금’은 1996년 6월 외무부의 공식 허가를 받고 한국 국내 기업들의 추가 출연을 받은 것으로 돼 있다. 2014년 연차보고서에 공개한 재무상태표에 따르면 약 103억의 기본금을 재단은 보유하고 있다. 이 중 설립자가 낸 기본금은 5000만원이고, 기타 기본금이 79억7000만원으로 상태표에는 제시돼 있다. 아시아연구기금의 ‘설립자’는 연세대학교다. 나머지 액수의 상당 부분이 일본재단이 낸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 9년 사이 학술교류와 연구과제 등에 지출한 금액은 총 42억원가량이다. 이 연구기금의 성격을 어떻게 봐야 하느냐는 논란은 조성 첫 단계 때부터 제기됐다. 햇수로는 20년째 간헐적으로 되풀이된 논란이다. 2005년쯤에는 TV 시사프로그램에서 연구기금의 성격 논란을 다룬 프로그램을 방영하기도 했다. 당시 아시아연구기금 측은 반박성명을 내 “아시아 연구기금에 기부금을 출연한 일본재단은 일본 경정사업 수입의 3.3%를 공익사업에 쓰도록 규정하고 있는 일본 국내법에 따라 설립된 공익법인으로서 ‘극우단체’라는 주장은 전혀 적절치 않다”고 주장했다. 과연 그럴까. 日극우 인사들, 일본재단 이사로 참여해 지난 8월 15일 오전 일본 도쿄의 야스쿠니 신사에서는 ‘29회 전몰자 추도 중앙국민집회’라는 행사가 열렸다. 이 행사는 ‘영령에 보답하는 모임’이라는 단체와 일본회의라는 단체가 공동 주최한 것으로 돼 있다. 이날 행사를 열면서 이 단체가 내건 캐치프레이즈는 “종전 70년, 이제라도 영령들의 명예를 회복해야 한다!”였다. 일본회의가 공개한 이날 행사 프로그램에 따르면 ‘각계 대표’ 제언이라는 이름으로 나열된 발언자들의 명단이 나오는데, 중의원이자 자민당 정조회 회장을 맡고 있는 이나다 토모미(稻田朋美), 오선화(吳善花) 다쿠쇼쿠대학 교수 등의 이름이 눈에 띈다. 일본 최초의 여성 총리를 노리고 있는 중견 정치인인 이나다 토모미는 2013년 “위안부제도는 전시에는 합법이었다”는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1998년 일본으로 귀화한 오선화씨는 , 등의 저서와 TV 정치평론 출연 등의 ‘친일’ 활동으로 한국에서는 입국 거부대상자다. 이날 야스쿠니 참배 행사를 공동주최한 일본회의의 회장은 타쿠보 타다에(田久保忠衛) 교린대학교 명예교수다. 은 일본재단의 조직표에서 타쿠보 교수의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지난 6월 24일 전원 새로 취임한 것으로 돼 있는 이 재단의 평의원 명부에는 타쿠보 교수뿐 아니라 다른 범상치 않은 이름들도 발견된다. 정치평론가로 직함이 돼 있는 야야마 타로(屋山太郞·83)는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에서 갈라져 나온 ‘일본교육재생기구’라는 단체의 중심인물이다. 그는 2007년 뉴욕타임스에 “위안부 성노예 주장은 날조된 것”이라는 내용의 전면광고를 주도하기도 했다. 평의원을 맡고 있는 와타나베 쇼이치 일본 조오지대 명예교수(85) 역시 위 광고에 참여했는데, “남경사건(남경대학살)은 조직적인 학살이라고 볼 수 없다”는 등의 극우발언으로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일본 우익’을 연구해온 이향철 광운대 교수는 “세 사람 모두 일본의 대표적인 극우인사로, 일본재단의 이사로 오랫동안 활동해온 인물들”이라며 “조직이 개편되면서 평의원으로 옮긴 것을 보면 외부에서 봤을 때 극우인사들을 중심으로 재단이 운영된다는 비판을 회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재단 회장을 맡고 있는 사사카와 요헤이의 성향은 어떨까. ‘겁 먹지 말고 국제사회 리더가 돼라.’ 지난 8월 26일 산케이신문의 ‘정론’에 그가 쓴 칼럼의 제목이다. 칼럼에서 다음과 같은 대목이 눈에 띈다. “아베 총리의 전후 70주년 담화에 대해 역사인식과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한국과 중국 측의 공격이 눈에 띄지만, 세계로 눈을 돌리면 평화국가로의 행보와 국제공헌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일본은 자신감을 갖고 자기 주장을 세계에 내놓아야 할 것이다.” 요컨대 위안부 문제와 같은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아베 담화의 핵심인 ‘평화’와 국제안보로 나가라는 주문이다. 이 교수는 “우리의 시각에서는 ‘반성은 그만할 때가 됐다’는 주장으로 읽힐지 모르지만, 심하게 우경화되고 있는 일본 현지 분위기에서는 양식 있는 주장으로 읽힐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문제는 다시 아시아연구기금이다. 일본재단과 관계를 묻는 의 질문에 대한 서면답변에서 기금 측은 “기금의 출처가 일본재단이라고 하더라도 일본재단과 법률적인 관계가 전혀 없는 완전히 독립된 법인체”라며 “기금의 기본적인 활동에 대해서도 일본재단이 개입하거나 영향을 미쳐 아시아연구기금의 활동을 주도하지는 않는다”고 답했다. 그러나 일본재단이 개입하거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기금 측의 주장에는 의혹이 남는다. 단적인 사례가 2012년 재단의 이사로 참여했던 아카자와 료세이 자민당 중의원의 경우다. 3년의 임기를 마치고 지난 6월 물러난 아카자와의 과거 행적을 살펴보면 그는 앞서 언급한 이나다 토모미 등 2011년 입국 거부를 당한 일본 의원 3인의 자민당 보고회에 참석해 “다케시마(독도)를 불법점거 중인 한국 정부는 논리와 법률로 논의할 자신이 없기 때문에 감정에 호소했다” 등의 발언을 했다. 논란과 관련, 지난 8월 19일 한겨레신문의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아시아연구기금 측은 “아카자와 의원을 이사로 일본 쪽이 추천했을 때 한국 쪽에서 논란이 되기는 했다”고 답변했다. 이와는 별도로 오가타 타케주 일본재단 이사장이 2008년부터 8년째 이사로 참여하고 있다. 연세대 교수 ㄱ씨는 “일본재단 이사장이 직접 이사로 들어왔다는 것은 기금 측이 주장한 외관상의 독립성은 이미 훼손됐다고 봐야 한다”며 “아카자와 료세이 의원의 발언도 이미 언론 보도 등을 통해서 알려진 문제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측이) 받아들였다는 것은 일본재단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아시아연구기금 측은 “기금의 이사회는 이사 한두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으며, 기금 주요 업무가 학술연구 지원사업이기 때문에 이사들의 역할은 제한적일 수 있으며, 한 사람의 이사 성향이 기금을 좌지우지하지는 않는다”고 답했다. 연대 현 총장, 기금 설립 핵심 역할? 그런데 왜 연세대였을까. 기금 측은 “이사회에 재직 중인 연세대 교수는 3명뿐”이라며 현재 재단은 학교와 무관하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연차보고서에 기록된 역대 이사회 명단을 보면 연세대 주요 보직자들이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핵심 라인은 연세대의 역대 총장과 재무처장이다. 12대 송자 총장(1992~1996)부터 시작해 13대 김병수, 15대 정창영, 17대 정갑영 현 총장이 역대 주요 임원을 역임한 것으로 돼 있다. 여기에 박태규·박상용·김학은 전 연세대 재무처장, 백윤수 현 연세대 재단본부장이 역시 핵심 임원으로 참여했다. 김학은 전 재무처장은 현 아시아연구기금의 이사장이다. 은 기금의 초기 설립과정에 깊숙이 관련돼 있는 관련 인사로부터 기금 설립 초기 상황에 대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기금 설립과정을 주도한 인사가 정갑영 현 연세대 총장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일본재단 측에서 굉장히 놀라워했다. 사전 정지작업 없이 다이렉트로 한국 쪽에서 기금을 만들자고 제안이 왔던 것이다. 10억 엔은 일본에서도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당시 일본재단에서 한국 쪽 요청을 검토했던 시게무라 도시미쓰 교수나 지난해 타계한 오카자키 히사히코(岡崎久彦) 대사가 회의에 참석해서 발언한 것을 기억하는데, ‘거꾸로 일본 우익단체 돈을 받아서 기금을 만드는 것에 대해 한국 여론의 반대가 예상된다’며 부정적 평가를 한 것이 기억난다.” 그리고 이 협상에서 핵심 역할을 한 것이 정갑영 현 총장이라는 것이다. “당시 연세대학 총장들은 사실상 들러리에 가까웠고 정 총장이 주도하는 위치였다. 물론 좋게 보면 새로운 한·일관계를 만들어내는 데 극우 의혹을 받고 있는 일본재단으로서는 이미지 변신을 할 수 있다는 측면도 있었겠지만….” 2005년 프로그램위원장을 마지막으로 역임한 정갑영 총장의 이후 관련 행적은 이사회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정 총장은 그 이후에도 기금 운영과 배분에서 사실상 주도하는 역할을 했다고 복수의 전·현직 연세대 교수들은 말한다. 앞서 언급한 연세대 ㄴ교수도 “외국에서 돌아왔을 때 ‘연구비를 다 만들어놨으니 찾아가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밝혔다. 연세대학교 본부에서 핵심 보직을 맡았던 한 교수는 “아시아연구기금을 연대 안으로 가지고 들어오려는 것에 대해 몇몇 교수들이 강하게 반대하자, 정 총장 등이 주도해 학교 바깥에 기금을 세우고 여러 사람들에게 권유하다시피 해 연구비를 뿌렸던 것으로 기억한다”며 “특히 인문사회 계열 교수들은 상대적으로 연구비도 부족하기 때문에 쉽게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정 총장의 이름은 아시아연구기금이 2013년 공개한 연차보고서에서 다시 등장한다. ‘2025년을 향한 한·일 협력의 모색’이라는 제목으로 열린 ‘제12차 한·일 밀레니엄 포럼’ 행사에서 정 총장은 김병철 고려대 총장, 카마타 카오루 와세다대 총장, 세이케 아츠시 게이오대학 총장과 함께 ‘한·일 협력의 미래를 향하여: 대학의 긍정적 역할’이라는 제목의 토론에서 발표를 한 것으로 돼 있다. 정 총장의 역할과 관련해 아시아연구기금 측은 “당시 정 총장의 역할과 관련해서는 사무총장의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이해된다”며 “아시아연구기금에서 한·일관계 발전을 위해 봉사해온 분들이 있는데, 정 총장을 찍어서 연관성을 부각시키는 것 자체가 적절한 평가가 아니며, 다소 편향된 정치적 시각에 따른 언급”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은 정 총장에게 제기된 의혹에게 해명을 듣고자 연락을 취했으나, 마감시간까지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일본재단 설립자 사사카와 료이치는 극우 파시스트 사사카와 재단 설립자 사사카와 요이치 “솔직히 경정사업이라는 것이 겜블, 말하자면 도박사업인데 그 수익권을 국가가 아니라 개인에게 줬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이향철 광운대 교수의 말이다. 1889년 오사카에서 태어난 사사카와 료이치는 만 96세인 1995년 사망했다. 그의 인생역정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풍운아’다. 일본의 국민작가로 불리는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초등학교 동창이다. 36세인 1925년에 정치활동을 시작한 그는 일본 군국주의가 대륙으로 팽창하던 시절인 1931년 우익단체인 ‘국수대중당’을 결성한다. 그는 자신의 우익성향을 감추지 않았다. 1974년 미국 타임과의 인터뷰에서는 “나는 세계에서 가장 부자인 파시스트다”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1935년 공갈 혐의로 국수대중당의 다른 간부들과 체포돼 4년을 복역한 그는 무죄로 풀려난 뒤 평상시 존경한다고 밝힌 무솔리니를 찾아가 회견을 하기도 한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한 뒤 A급 전범 혐의로 형무소에 수감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외조부이자 일본 정계의 막후 실력자였던 기시 노부스케를 만난다. 이 교수는 “그는 기시 노부스케를 옥우(獄友·감옥친구)라고 불렀는데, 일본 정가에서는 그 인연으로 경정사업권을 따낸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고 말했다. 경정 도박으로 막대한 부를 쌓아올린 사사카와에게는 ‘전후 일본 정계의 흑막을 조종하는 손’, ‘일본 우익의 돈줄’ 등의 수식어가 붙었지만, 막상 일본의 일반 국민들에게 알려진 그의 모습은 ‘자선사업을 하는 할아버지’, ‘한센병 퇴치에 앞장선 일본의 사회복지가’다. 그가 설립한 재단인 일본선박진흥회의 TV 광고물 ‘일일일선(一日一善: 하루에 하나씩 착한 일 하기)’ 할아버지로 유명세를 떨쳤다. 자선활동의 한편으로 우익활동을 계속했는데, 승공연맹 등의 단체활동을 하면서 통일교 문선명 총재와 막역한 관계를 맺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통일교 관계자는 “과거 반공을 매개로 보조를 맞췄을지는 모르지만, 현재는 아무런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한센병 퇴치와 관련한 활동으로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은 그는 한국에서도 1975년 한국 한센병 구호활동에 10억 엔을 기부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1976년 박정희 정부는 그에게 외국인에게 주는 1등급 훈장인 수교훈장 광화장을 수여했다.
특집
[광복 70년 역사르포](23)남영동 대공분실~연세대… 박종철·이한열, 6·10항쟁 불씨가 되다(2015. 07. 28 10:38)
2015. 07. 28 10:38 사회
기자는 고등학교 시절인 1976년 서울역에서 전철을 타고 학교가 있는 용산역까지 통학했다. 그 중간 남영역 앞에 한 건물이 신축 중이었다. 검은 벽돌로 창문도 좁게 짓는 이 건물은 마치 토치카를 쌓는다는 느낌을 줬다. 물론 이 건물이 무슨 용도이며, 누구의 소유인지도 몰랐다. 이 건물의 정체가 드러난 것은 한참 후다. 1987년 1월 15일 한 신문에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제목으로 “경찰은 박군의 사인을 쇼크사라고 검찰에 보고했다. 그러나 검찰은 박군이 수사기관의 가혹행위로 인해 숨졌을 가능성에 대해 수사중이다”라는 2단짜리 기사가 실렸다.(중앙일보 1987년 1월 15일자) 이 기사는 제5공화국 보도지침을 뚫고 신문에 실렸다. 당시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이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연행된 것은 1월 13일 밤. 수배된 대학선배의 소재를 대라며 혹독한 물고문이 계속됐다.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고 말했다. 이 과정을 최근 발간된 박종철의 부친 박정기씨의 회고록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부검을 마친 후 황적준은 안상수(담당 검사)에게 말했다. ‘질식사입니다. 물고문 같습니다’… ‘온몸에 피멍자국이 많아, 두피에도 피멍이 있고’… 경찰은 허위 보고서 작성을 요구했다.… 황적준은 16일 하루 내내 고민하다 그날 밤 잠자는 아내와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정의로운 아빠가 되겠다’는 결심을 한다.”(송기역, 유월의 아버지, 2015년) 유명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남영동 대공분실은 철저히 피의자를 위축시키기 위해 설계된 ‘흉기’이다. 정교하게 지어진 공포스러운 ‘흉기’ 이곳은 고문기술자 이근안이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후에 국회의원) 김근태를 고문한 장소였다. 김근태는 이곳 경험을 이라는 책으로 남겼고, 이를 정지영 감독이 로 영화화했다. 하지만 1948년 10월 치안국 특수정보과 중앙분실로 시작된 이곳이 김근태만을 고문한 곳이었을까. 고문으로 조작된 많은 간첩사건의 상당수는 이곳에서 이뤄졌을 것이다. 이 건물은 유명한 건축가 김수근의 ‘작품’이라고 한다. 하지만 기자는 이 건물이 ‘작품’이라는 것에 동의하지 못한다. 이것은 정교하게 설계된 ‘흉기’다. 검은 벽돌건물에 육중한 철문은 보는 순간부터 위협적이다. 조사실 5층 창문을 매우 좁게 낸 것은 투신을 못하게 하려는 의도다. 1973년 남산 중앙정보부 조사실에서 혹독한 고문을 견디다 못해 창문으로 투신 자살한(중정의 공식발표) 서울대 최종길 교수 사례를 염두에 뒀을 것이다. 건물 뒤 입구와 역방향으로 설치된 5층 조사실까지 원형 계단은 철저하게 피의자의 공간지각 능력을 상실하게 만든다.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를 들으며 철제계단을 오르는 피의자는 이미 절반쯤 의지를 상실했을 것이다. 박종철이 숨진 509호 조사실 내부이다. 5층 조사실에서 보면 복도 출입구와 14개 방 출입구는 크기와 모양이 똑같다. 한 번 들어오면 어디가 나가는 곳인지 알 수 없는 미로이다. 복도 끝에서 보면 일제가 지은 서대문형무소 감방 복도 그대로 빼다 박았다. 밖에 설치된 전기 스위치는 서대문형무소 감방마다 설치된 패통 모습 그대로다. 실내는 철제 방음시설로 둘러쳐져 있다. 인권에 무지하고 승진의 공명심에 불타는 경찰들은 여기서 폭행과 전기·물고문을 일삼았을 것이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건물 외형은 물론, 입구에서부터 실내까지 정교하게 피의자를 시각적·심리적으로 위축시키기 위해 설계됐다. 폴란드에 세워진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유태인을 효율적으로 ‘정리’하기 위한 최적화된 시설이라는 점과 비슷하다. 천재 건축가라는 김수근이 이 건물의 용도를 몰랐을까. 그런 면에서 이 건물은 작품이 아니라 흉기다. 이곳은 2005년 경찰청 인권센터로 바뀌어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아우슈비츠도 보존하듯 이곳 보존도 잘한 것이다. 이곳을 관리하는 한 직원은 “버스를 대절해 단체로 관람하는 대학생들과 고등학생들이 간혹 있고, 개인적으로 관람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말했다. 박종철기념사업회는 단체 탐방하면 안내를 맡고 있다. 김학규 사무국장은 “전시관 운영주체가 경찰이기 때문에 휴일 개방을 하지 못해 일반시민들이 편리하게 찾지 못하고 있다”면서 “단체 관람일 경우 경찰의 협조를 얻어 개방할 수 있다”고 말했다. 1987년 1월 서울대에서 열린 박종철 추도식 모습. | 경향신문 자료사진 분노한 국민에 신군부세력의 ‘항복선언’ ‘광주의 피’를 통해 집권한 전두환은 과거 유신체제를 능가했다. 대학 시위자는 철저히 학원에서 내쫓았다. 1983년까지 3년 동안 대학생 1400여명을 제적했다. 단순 시위가담자도 ‘강제징집’으로 군대에 보냈다. 1983년 5월 18일 가택 연금 중인 김영삼은 ‘구속인사 석방과 제적학생 복교, 언론자유 보장’ 등을 요구하며 단식에 돌입했다. 그리고 이듬해 5월 18일 범민주세력을 망라한 정치결사체 ‘민주화추진협의회’가 만들어졌다. 이들이 만든 신민당은 창당 한 달 만인 1985년 2·12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제1야당으로 떠올랐다. 학생 및 재야 노동계도 결집하며 힘을 키워 1985년 3월 29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으로 통합했다. 1986년 2월 12일 신민당은 직선제 개헌을 위한 1000만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정권 재창출을 구상하던 신군부에게는 위협이었다. 전두환은 야만적인 학원 및 재야인사 탄압에 돌입했다. 1986년 10월 28일 서울 건국대에서 열린 학생집회에서 1525명의 학생을 연행, 1259명을 구속했다. 정부수립 이후 단일사건으로 최대 구속사건이다. 연세대에서 열린 이한열 장례식에 모인 군중들이 장례행렬을 따르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런 상황에서 1987년 1월 14일 이곳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실에서 박종철이 죽었다. 신군부세력에는 치명타였다. 민주세력은 ‘고문추방’ 이슈를 추가했다. 3월 3일 박종철 사십구재에 ‘고문추방 국민대행진’이 열렸다.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축소·은폐 사실을 폭로했다. 1987년 6월 10일 서울 잠실 체육관에서는 민정당 노태우 대표가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는 전당대회가 예정돼 있었다. 신민당을 포함한 모든 민주세력이 망라된 국민운동본부는 ‘박종철 고문살인 및 호헌철폐 규탄 시민대회’, 이른바 6·10대회로 맞불을 놓을 계획을 세웠다. 6월 9일 오후 2시 연세대학교 앞에서 ‘구출학우 환영 및 6·10 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가 열렸다. 집회를 마친 1000명의 학생들이 교문 밖 진출을 시도했다. 오후 5시, 전투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이 직격으 로 날아 시위대 선두에 있던 학생 머리에 맞고 터졌다. 학생의 머리는 흐르는 피와 최루탄 가루가 범벅이 됐다. 그는 경영학과 2학년 이한열이었다. 박종철 고문치사에 이어 최루탄에 맞아 이한열이 의식불명 상태에 빠지자 국민의 분노는 더욱 높아졌다. 전국적으로 시위가 이어졌다. 경찰은 무차별 연행으로 맞섰지만 분노한 시민을 막을 수 없었다. 경찰의 최루탄이 다 떨어졌다. 6월 19일 청와대에서 군 최고회의가 열렸다. 제2의 5·18 광주 비극이 재연될 수 있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극적으로 상황이 반전됐다. 6월 29일 민정당 대통령 후보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수용한다”는 이른바 ‘6·29 선언’을 했다. 신군부세력의 ‘항복선언’이었다. 이한열 추도비는 2015년 6월 4일 새로운 기념비로 바뀌었다. ‘198769757922’라는 숫자는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은 1987년 6월 9일과 숨진 7월 5일, 그리고 7월 9일 장례식, 22세라는 의미다. 7월 5일 새벽 2시5분 이한열은 숨을 거뒀다. 그의 장례식에는 8만여명의 조문객이 찾았다. 기자는 당시 그 현장을 취재했다. 문익환 목사의 절규하는 추도사와, 정문에서 펼쳐진 무용가 이애주가 긴 삼베 가운데를 가르다 쓰러지는 ‘바람맞이 춤’이 생생하다. 이 춤에 대해 통일운동가 백기완은 “저 기가 막힌 울부짖음을 보라. 여기서 우리는 춤이란 한낱 표현예술이 아니라 역사를 이끄는 힘의 모든 것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고 평했다.(이애주 한판춤 그림책, 1988년) 수백개의 만장을 앞세운 이한열 운구행렬은 서대문을 거쳐 시청 앞으로 향했고, 100만명이 넘는 시민이 추도했다. 시청 앞 노제 때, 서울시청 옥상에는 정상 태극기가 펄럭였다. 수만명의 시민들은 “조기” “조기”를 외쳤다. 결국 서울시청은 태극기를 조기로 고쳐달았다. 이한열은 고향 광주로 내려가 망월동 묘지에 묻혔다. 박종철이 경찰의 독촉으로 서둘러 화장돼 임진강 샛강에 뿌려진 것과는 달랐다. 정치인 분열로 ‘1987년 체제’는 미완 이한열이 숨지고 1년이 지난 1988년 9월 14일 총학생회는 학생회관 남쪽 작은 동산(한열동산)에 추모비를 세웠다. 추모비에는 “여기 통일 염원 43년 6월 9일 본교 정문에서 민주화를 부르짖다 최루탄에 쓰러진 이한열 님을 추모하고자 비를 세운다”고 썼다. 그러나 인조대리석 추모비는 27년의 세월을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올 6월 4일 통돌 모양의 기념비로 바꾸었다. 길이 약 4.5m 높이 약 1.4m의 육중한 보령산 검은돌에 ‘198769757922’라고 큼직하게 숫자를 썼다.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은 1987년 6월 9일과 숨진 7월 5일, 그리고 7월 9일 장례식, 22세라는 의미다. 그 옆에 납작한 통돌에는 LED 디지털로 현재 연·월·일·시간을 표시하는 시계가 있다. 현대적 감각이 가미되고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교차하는 느낌이다. 요즘 이곳 주변은 수십년된 백양나무를 베고 지하 할인매장과 쇼핑몰을 짓는 ‘백양로 재창조 프로젝트’가 한창이다. 거기다 세브란스병원을 찾는 사람들로 시장통을 방불케 한다. 철저히 자본만 넘쳐나는 느낌이다. 이한열이 꿈꿨던 세상은 이런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1987년 6월항쟁은 1월 박종철에서 시작해 6월 이한열로 끝났다. 그러나 6월항쟁은 절반의 승리, 아니 절반의 패배였다. 민주세력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뤄냈지만, 양 김씨가 분열해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젊은이의 순교로 쟁취한 민주 승리를 기성 정치인의 분열로 신군부에 헌납하고 만 것이다. 6·10항쟁의 결과물인 ‘1987년 체제’에 대한 이해다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기성 정치인은 1987년 12월 양 김씨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정략적 이득만 앞세운다. 내각제 개헌 주장이 그것이다. 그러나 ‘1987년 체제’의 결과는 권력구조에만 있지 않다. 양 김씨의 분열은 시민세력·노동·대학 운동권 등 총체적인 민주세력의 분열로 이어졌다. 분열된 민주세력은 1992년 대선에서 ‘신군부 동지’와 손을 잡았고, 1997년 대선에서는 ‘박정희 후예’와 연합했다. 진정한 6·10항쟁의 승리는 2002년 대선에서 겨우 이뤄냈으나 5년밖에 지키지 못했다. 그리고 역사는 곧 반동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6·10항쟁의 결과물인 ‘1987년 체제’에서 진정으로 극복해야 할 과제는 바로 이것이다.
광복 70년 역사르포
[유인경이 만난 사람]96세에도 왕성한 활동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65세에서 75세까지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2015. 05. 26 20:12)
2015. 05. 26 20:12 사회
아무리 100세 시대라고 하지만 나이 들어서도 행복하게 계속 일하는 이들은 드물다. 60세로 정년이 연장되어도 50세가 되면 벌써 직장에서 눈치가 보이고 퇴직 후에는 가족의 눈치가 보인다. 한국 철학계의 대부로 불리는 김형석 교수(연세대 명예교수)는 96세인 요즘도 곳곳에서 강의를 하고, 방송에도 출연하며, 책도 집필 중이다. 1960~70년대에 김형석 교수의 철학과 인생론에 관한 책을 보며 감동받았던 이들은 50년 후에도 건재한 김 교수가 경이롭기만 하다. 강의와 저작활동 외에 강원도 양구군에 있는 ‘김형석·안병욱 철학의 집’에 저서와 원고 등 1000여점의 자료와 평생 모은 도자기를 기증하는 등 풍성한 만년을 보내는 김형석 교수를 만났다. 40여년 전 책에 소개된 사진보다 조금 주름진 얼굴의 김 교수는 보청기, 틀니, 지팡이 등 노인용품(?)이 전혀 없이 그 어떤 질문에도 흐트러짐 없는 답을 했다. 96세에 그토록 왕성한 활동을 하는 건강 비결은 무엇인가요. “건강 비결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제 경우는 일을 좋아하는 것이 건강 비결입니다. 친구들과 ‘누가 더 건강한가’를 가끔 이야기하는데 그 기준이 누가 더 일을 많이 하는가입니다. 저도 50대까지는 그저 일만 열심히 하느라 건강은 신경도 안 썼습니다. 그러다 50대 후반에야 운동이나 하나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테니스도 짝이 있어야 하고 골프 같은 운동은 너무 시간과 돈이 들어서 안 되고 등등 찾다가 혼자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수영을 선택했어요. 그 후 30년이 넘게 매일 수영을 합니다. 운동을 목적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운동은 건강을 위해서 하고, 건강은 결국 일을 잘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덕분에 지금도 일주일에 두 번 정도 곳곳을 다니며 강의하고, 쓰고 있는 글도 연말이면 책으로 나올 겁니다. 사상이 들어간 수필집입니다.” 교수님도 그렇지만 세계적으로 다른 직업에 비해 학자들이 유독 장수하더군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학자들은 대부분 자신이 좋아하는 공부를 합니다. 돈이나 명예에 욕심 없이 그저 공부하는 것이 즐겁고 기쁘니 스트레스도 덜 받아 장수하는 것이 아닐까요. 저는 어릴 때 몸이 약했고 일제 치하와 한국전쟁 등을 겪으며 궁핍한 생활을 해서 동생이나 아들에 비해 키도 작습니다. 평소 건강이 안 좋아서 항상 무리하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됐습니다. 일이 많지만 절대 무리하지 않아요. 다음 주에 강의가 세 군데 있는데 강의할 내용을 미리 준비해두고 다른 약속은 줄이고 산책을 하면서 조용히 구상을 합니다. 이렇게 미리 준비해두니 스트레스도 안 받습니다.” 최근 인문학과 철학 열풍이 뜨겁습니다. 철학자가 베스트셀러 저자나 대중스타 같은 인기를 누리기도 하고요. 왜 지금 철학 붐이 일까요. “하나의 과정입니다. 서양사회의 성장사를 보면 인문학 시대가 몇 백년 지속된 후에 사회과학이 이어지고 다시 자연·기계과학 시대가 왔습니다. 인문학으로 시작한 뿌리와 밑동이 튼튼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 과정을 밟지 못하고 갑자기 기계과학만 강조되었죠. 압축성장을 하며 공장 지어서 돈 벌면 된다는 사고가 만연하다 보니 정신적 가치가 빈곤해졌습니다. 왜 사는지 목적을 잃어버렸고, 그 가치를 찾다 보니 인문학과 철학에서 답을 구하게 된 것입니다. 인문학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철학적 사고, 역사적 관찰, 문학적 상상력입니다. 인문학적 사유와 가치관이 인간의 존엄성, 삶의 가치, 윤리성 등에 도움을 줍니다. 이제 물질만능의 사회에서 그런 윤리성 등이 요구되니까 철학이나 인문학에서 답을 찾게 된 것입니다.” 인생철학, 정치철학 등 철학이라는 말은 참 자주 쓰이고 ‘그 사람은 철학이 부족하다’라는 말도 많이 합니다만, 정작 철학의 바른 의미를 아는 이들은 드문 것 같습니다. “시작에서 끝까지 ‘진리란 무엇인가’에 대해 묻고 또 묻는 것이 철학의 기본입니다. 모든 사람이 공감하고 인정해줄 수 있는 가치, 그것이 생활의 진리이고, 철학입니다. 일상에서 예를 들자면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철학이 무엇인가’란 말은 정치에 대한 종합적 사상을 뜻합니다. 철학은 개인적으로 보면 인생관이고 사회적으로 보면 가치관이죠. 더 높게 보면 그 분야에 있어 전문 지도적인 사상, 더 넓게 보면 세계관을 의미합니다. 법학도 민법·형법 등으로 나뉘지만 왜 법이 있나, 법이 사회에 주는 영향이 무엇인가, 사회질서와 어떤 관계가 있나를 연구하면 법철학이 됩니다. 미국의 경우 군인이 대령이 되면 국방대학원에 꼭 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군사전술 등이 아니라 민주주의 윤리, 사회학 등 철학을 배우게 됩니다. 그런 윤리와 철학을 배워야 진정한 지도자의 자질을 갖추게 됩니다. 그런 교육을 한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는 국격이 달라집니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수시로 싸우고 상스러운 막말을 하는 이유는 정치철학은 물론 인문학과 윤리 교육을 안 받은 탓 같습니다.” 철학은 막연히 어렵거나 딱딱하게만 여겨집니다. 인문학·철학을 가장 쉽게 접근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학문으로서의 인문학은 철학·문학·역사인데 모든 인문학의 식량창고는 고전입니다. 얼마 전 목사 100여 분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면서 ‘목사님 가운데 를 읽은 분이 있나요’라고 물으니 정말 몇 분이 안 되더군요. ‘학교에서 안 배워서 모른다’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스님들이 쓴 책은 베스트셀러가 많은데 목사나 신부가 쓴 책은 잘 안 팔리고 사회적 공감대도 적은 이유를 알겠다’고 했죠. 예수도 교회를 크게 만들거나 잘 운영하라는 말씀은 하지 않았습니다. 진리만 이야기했죠. 종교인은 물론 모든 이들이 수시로 고전을 읽어야 합니다. 논어는 아니더라도 고전을 차근차근 읽는 것이 필요합니다.” 인문학 붐이 불지만 현재 우리 사회에는 분노와 울분이 너무 가득합니다. 화를 부르는 사회구조도 문제이지만 인터넷에 올라온 악성 댓글을 보면 성악설이 맞는 것 같고, 아이부터 어른까지 너무 화를 많이, 자주 내는 듯합니다. “정서가 메말라서 그렇다고 봅니다. 너무 성적이나 취업 등 경쟁사회에서 각박하게만 살다 보니 정서의 빈곤이 그런 분노를 가져왔습니다. 하버드 등 미국 명문대에서는 입학 조건이 성적, 운동, 예술, 리더십, 봉사경험 등이고 그 조건 중 하나라도 모자라면 안 뽑습니다. 공부만이 아니라 건강한 몸, 다른 이들을 통솔하면서도 배려할 수 있는 능력, 악기건 그림이건 예술을 통한 정서, 그리고 봉사활동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돕고 이해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제가 예전에 국방부 교육지도위원을 맡은 적이 있는데 여러 분야에서 조사해보니 중·고생 시절에 봉사 경험이 있는 이들은 군대에서 절대 사고를 안 저지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제가 건의해서 중·고교에서 봉사활동을 점수화하자고 했는데, 일부이지만 어머니들이 자가용 태워 가서 도장만 받아오는 것으로 변질되었어요. 남을 위해 사는 것을 경험하고, 더불어 사는 것을 청소년 시절에 체험하면 분노나 울분을 다스릴 능력이 생깁니다. 선진국의 가정교육 특성도 첫째가 거짓말을 하지 말라, 둘째가 남을 욕하지 말라입니다. 거짓말은 그저 실수나 습관이 아니라 인격의 병으로 여깁니다. 제가 다닌 미국의 대학에서는 시험칠 때 교수가 감독을 안 합니다. 학생들은 자신을 믿어주는 교수를 배반하지 않으려고 커닝을 하지 않고 친구를 편법이나 거짓말로 이기려고 하지 않죠.” 한 방송에서 강의하시면서 물질적 가치에서 벗어나 정신적 가치를 알게 됐을 때 행복한 느낌을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정신적 만족을 더 자주 느끼자는 의미에서 한 말입니다. 언젠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전경련 회장직 제안을 사양하며 회원들을 초대해 최고급 프랑스 와인을 접대했다는 기사를 보며 혼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기업인들이 시인이 시를 완성한 후에 느끼는 환희를 알까, 학자들이 새로운 연구를 한 후에 느끼는 희열감과 그 와인 맛이 비교나 될까…. 제 지인은 나이 들어 뒤늦게 독일어를 배워 괴테의 책을 읽었답니다. 무척 보람 있고 행복해 하더군요. 정신적 행복감을 우리는 너무 모르고 사는 것 같습니다. 저는 재산이 너무 많으면 오히려 그걸 신경쓰느라 더 불행할 것 같습니다. 자식들에게도 가훈은 아니지만 이렇게 말합니다. ‘정신적으로는 상류층으로 살고 경제적으로는 중산층으로 살자.’ 그것만 받아들이면 행복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공자는 40에 불혹, 50에 지천명 등 연령대별로 분류를 했습니다. 교수님은 90여년을 살아보시니 각 나이별로 특징이 있던가요. “김태길, 안병욱 교수와는 셋 다 동갑이고 전공도 같아서 친분이 깊었습니다. 이젠 두 사람 다 고인이 되었지만 90세까지는 살았죠. 어느 날 우리끼리 ‘계란에 노른자가 있어서 병아리도 나오는데 우리 인생에서 노른자의 시기는 언제일까’란 이야기를 했어요. 그런데 ‘65세에서 75세까지가 우리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좋은 시절’이라고 의견일치를 보았습니다. 인간적이나 학문적으로 가장 성숙한 시기였습니다.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더군요. 오랜 경륜으로 후배들이 질문을 해도 적절한 조언을 해줄 능력이 생기고요. 김태길 교수도 60세에 사회철학 책을 쓴 후 ‘나 또 하나 시작했어’라고 하더니 15년 후인 75세에 ‘가치관’에 대한 책을 펴냈습니다. 그러나 몇몇 특별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75세 이후엔 창의성이 확실히 정체됩니다. 제가 최근에 어느 단체에서 이사가 되었는데 3년 임기랍니다. 임기를 채우면 99세가 되기에 사임하겠다고 하니까 그냥 맡으라고 하더군요. 유달영 박사가 94세까지 이사직을 맡았는데 제가 그 기록을 깬 셈이라면서요.” 세 분이 90세 이상 장수하고 만년까지 건재한 비결이 따로 있습니까. “안병욱 교수는 늙지 않는 비결로 나이 들어서도 꾸준히 공부하고 여행하고 연애하는 것을 꼽았습니다. 공부나 여행은 혼자 할 수 있지만 연애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맘대로 되진 않지만요. 세 가지 다 정신적 자극을 주는 것이라는 공통점은 있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본격적인 고령화가 시작되었고 호모헌드레드, 곧 100세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온몸으로 100세 시대를 사시는 교수님이 생각하시는 100세 인생을 무사히 사는 법은 뭘까요. “개인과 사회적 문제가 다르겠지요. 개인적으로는 이제 모두 70세까지 일해야 한다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직장에서 정년퇴직을 한 후 무슨 일을 하더라도 사회생활을 할 생각과 준비를 해야 합니다. 또 다른 이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나이 들어서도 자기 재산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70세 이상의 홀로된 남성들이 갖는 가장 큰 고민 중의 하나가 어느 정도 재산이 있으면 유산문제 때문에 자식들이 재혼을 반대한답니다. 아버지의 고독감이나 생활의 불편함보다 유산에 더 신경을 쓰는 거죠. 사실 70대가 넘은 남자들은 자식들에게도 환영받지 못하고 용처도 없어요. 식사나 빨래 등을 해결하는 것도 쉽지 않고 무엇보다 고독감과 상실감이 큽니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도 성인이 된 자녀들이 노인 부모의 재산을 기대하지 않고, 노인들도 얼마든지 결혼할 수 있다는 것이 습관화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도 상처한 지 11년째인데 자식들이 제 결혼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아요. 한 친구가 익명으로 ‘96세의 남자가 재혼 상대를 찾는다’고 광고를 내보라고 하더군요. 실명으로 낸다고 누가 신청하겠습니까.(웃음) 저는 그래도 고독을 극복했습니다. 어린 후배들이 이젠 친구가 되어주고 이런저런 일로 항상 바쁘기도 하니까요. 소망이 있다면 앞으로 1~2년만 요즘처럼 일을 계속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이렇게 기도드립니다. ‘주님 오래 일할 수 있게 해주시고,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도움과 기쁨을 줄 수 있을 때까지 살았으면 합니다. 그거 못하면 찾아가셔도 좋고요’라고요.”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동안은 늙지 않고, 늙는 것은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 것’이라고 강조하는 김형석 교수에게서 노인의 모습은 찾기 힘들었다. 또 인터뷰 중에 전화가 오자 “여자친구예요”라더니 짧은 통화 후에 “친구들에게 무조건 여자친구에게서 전화 왔다고 하면 다들 부러워합니다”라며 소년같이 천진한 미소를 지었다. 한국 철학계의 대부인 그분의 학문적 위대함보다 그런 귀여운(?) 유머감각이 더 인상적이었다. 주님은 분명히 김 교수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 같다. 아니 그래야만 할 것 같다. 우리들의 행복을 위해서.
유인경이 만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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