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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랙핑크 로제 솔로·스트레이키즈 신보, 영국 앨범차트 진입
- 2024. 12. 21 10:14 문화
- 블랙핑크의 로제가 선공개곡 ‘아파트’(APT.)와 솔로 1집 ‘로지’(rosie)로 영국 오피셜 싱글·앨범 차트에 모두 진입하며 ‘쌍끌이 흥행’을 이어갔다. 20일(현지시간) 공개된 최신 차트에 따르면 로제가...
- 교황 “이라크 방문 중 자살폭탄 테러 표적···영국 정보기관이 막아”
- 2024. 12. 18 07:10 국제|국제
- ... 안전을 위해 수천 명의 보안 요원을 배치한 것으로 알려졌다. 교황은 자살폭탄 테러 시도와 관련해 영국 정보기관이 이를 사전에 감지해 정보를 전달했다고 언급했다. 이후 교황이 보안 책임자에게...
- 프란치스코 교황이라크모술IS중동 전운 고조
- [포토뉴스] 영국 저당 간식 ‘디아블로’ 국내 상륙
- 2024. 12. 08 20:05 경제
- 신세계백화점은 8일 영국 프리미엄 저당 간식 브랜드 ‘디아블로’를 국내에 처음 선보인다고 밝혔다.
- 시한부 환자의 ‘스스로 죽을 권리’, 영국 하원 문턱 넘었다
- 2024. 12. 01 20:41 국제
- ... 부결될 수도 있다. 그러나 법안이 하원의 첫 관문을 넘은 것만으로도 “역사적인 일”이라는 게 영국 언론들의 공통적 평가다. 조력 사망이 세계 대부분 국가에서 불법이고, 영국에선 유사한 법안이...
- 영국조력 사망
스포츠경향(총 1,019 건 검색)
- 영국 가디언“계엄사태, K팝·한류 나라 ‘두 얼굴’ 들춰”
- 2024. 12. 07 14:05 연예|연예|연예|생활|생활
- 방송화면 캡처 “K팝 긍정적인 분위기에 익숙해 있던 전 세계 관중들은 그동안 몰랐던 한국의 다른 면을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다” 6일(현지시간) 영국 정론지 가디언은 “K팝과 독재자들: 민주주의에 가해진 충격이 한국의 양면을 드러냈다”는 기사에서 한류 열기에 가려져 주목받지 못하던 한국 군사 독재 등 ‘어두운 면’을 조명했다. 이 매체는 수십 년 만에 한국에서 계엄이 선포된 이번 사태가 군사 독재 체제의 한국을 경험하지 못한 국내외 젊은 세대들에게 충격을 가져다줬다고 관측했다. 가디언은 한국은 “최근 몇 년간 ‘소프트 파워’(문화적 영향력) 패권을 둘러싼 국제적 경쟁에서 분명한 승자였다”며 BTS(방탄소년단)로 대표되는 한류 열풍은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던 이 나라를 ‘문화적 거물’로 변모시켰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세계에서 또 다른 한류 열풍의 주역인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 시즌 2 공개를 둘러싼 기대가 커지고 있던 불과 며칠 전, 난데없이 벌어진 계엄 사태로 “‘현실판 디스토피아’가 여기에 불쑥 끼어들었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한류 열기와 최근의 혼란상 간의 가장 충격적인 대비는 화요일 밤 서울 국회의사당 밖에서 의원들이 담벼락을 기어 올라가고, 군용 헬기가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와중에 자신들의 대통령이 중단시킨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해 무장 군인들에 맞서는 현장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고 전했다. 가디언은 계엄 선포는 분명 충격적인 일이었지만 한국이 사실 군사 독재에서 벗어나 민주화를 이룬 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는 점도 주목했다. 이 매체는 한국이 30년 가까이 이어진 군사 독재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국제 사회에 공표한 것은 불과 1988년 서울 올림픽 때부터였다면서 그전까지 한국의 지도자들은 반정부 시위를 탄압하기 위해 군인들과 계엄 선포를 이용했다고 설명했다. 민주화 이후 한국이 일궈낸 눈부신 경제, 문화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사회 곳곳에 남은 권위주의적 문화의 잔재는 이번 계엄 선포 사태에도 여실히 드러났다고 풀이했다. 가디언은 한국의 “경제, 문화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는 여전히 제도들 깊이 뿌리내린 권위주의적 경향과 씨름하고 있다”며 “이러한 것들은 종종 전통적인 위계 구조와 네트워크들에 의해 방조되고 더 커지는데, 이는 이번 계엄 사태에서 윤 대통령의 고등학교 연줄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는 의혹에서도 드러난다”고 지적했다. 가디언은 이번 일을 두고 한국 내에서는 그동안 쌓아 올린 국가적 위상과 이미지가 훼손됐다는 비판과 함께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한국 민주주의의 힘을 보여줬다는 평가가 함께 나온다고 전했다.
- 영국 NME, TWS(투어스) 집중 조명 “‘마지막 축제’, 새로운 여정의 시작점”
- 2024. 11. 29 16:14 연예|연예|연예
- 플레디스 엔터테인먼트 신예 아이돌그룹 TWS(투어스)가 컴백과 동시에 글로벌 음악 전문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영국 음악 전문 매거진 NME는 26일(현지시간) 홈페이지를 통해 “TWS(신유, 도훈, 영재, 한진, 지훈, 경민)의 새로운 겨울 곡 ‘마지막 축제’, 이 신인 그룹이 보여주는 멜랑콜리함의 정점(TWS’ new winter single ‘Last Festival’ is a melancholic high-note for the rookie boyband)”이라는 제목의 트랙 리뷰를 게재하며 별점 4점(만점 5점)을 부여했다. NME는 TWS 데뷔곡 ‘첫 만남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를 언급하면서 “밝고 발랄한 ‘보이후드 팝’으로 한국의 대중에게 즉각적인 반향을 일으켰다”라고 이들을 소개했다. 이어 “‘마지막 축제’는 불꽃놀이 소리와 따뜻하고 몽환적인 신스로 인해 TWS가 새롭게 시작하는 여정의 시작점처럼 느껴진다. ‘첫 만남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라는 소년 드라마에서 멜랑콜리한 감정으로 흘러가는 2024년의 커튼콜 같은 곡”이라며 한층 확장된 이들의 음악색을 조명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부른 동명의 곡을 TWS만의 감성으로 재해석한 점도 주목받았다. NME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마지막 축제’보다 더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무게감이 느껴진다”라며 “이러한 감성은 통통 튀면서도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아프로비트 리듬과 함께 곡에 삽입된 아련한 사운드에서 기인한다”라고 전했다. 플레디스 엔터테인먼트 TWS 첫 싱글 ‘Last Bell’은 음악 팬들로부터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 신보는 발매 첫날(25일) 33만 8757장 판매돼 전작 미니 2집 ‘SUMMER BEAT!’ 첫날 판매량(30만 8300장)을 넘기며 성장세를 보였다. ‘마지막 축제’ 뮤직비디오는 학창 시절의 추억을 떠오르게 하는 아련한 영상미로 호평 받으며 29일 오전 7시 기준 조회수 1500만 건에 육박했다. TWS는 29일 KBS2 ‘뮤직뱅크’를 시작으로 음악방송 나들이에 나선다. 멤버들은 전매특허인 ‘파워 청량’ 퍼포먼스로 에너지 넘치는 컴백 무대를 선사하겠다는 각오다. 지난 27일 공개된 유튜브 콘텐츠 ‘스튜디오 춤’에서 멤버들은 다이내믹한 동작을 자로 잰듯한 ‘칼각’으로 소화하며 보는 이들에게 짜릿한 쾌감을 선사했다.
- ‘손흥민 외면, 벤탄쿠르 감싸기’ 토트넘과 포스텍 감독, 영국 매체도 도저히 이해 불가···“분명히 잘못된 행동”
- 2024. 11. 23 02:38 축구
- 손흥민과 로드리고 벤탄쿠르. 영국 ‘BBC’ 토트넘 홋스퍼와 엔제 포스테코글루 감독은 피해자 손흥민(32)이 아닌 인종차별 발언 가해자 로드리고 벤탄쿠르(27)를 옹호하고 나섰다. 영국 현지에서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며 비판했다. 영국 매체 ‘미러’는 22일(이하 한국시간) “토트넘은 최근 팀 동료 손흥민에게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해 징계를 받은 벤탄쿠르의 판결에 항소했다”라며 “분명하게 이는 잘못된 행보다. 인종차별에 반대하면서 정작 자신들이 그러한 상황에 처하자 다르게 행동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잉글랜드축구협회(FA)는 지난 18일 “우리는 벤탄쿠르가 미디어 인터뷰에서 규칙 E3를 위반한 혐의로 7경기 출전 정지와 벌금 10만 파운드(약 1억 7,600만 원)를 부과했다”라며 벤탄쿠르에 대한 징계를 공식 발표했다. 손흥민에 대한 인종차별 발언에 사과한 벤탄쿠르. 벤탄쿠르 SNS 벤탄쿠르의 인종차별 발언 사건은 뜨거운 이슈였다. 벤탄쿠르는 지난 6월 자신의 조국 우루과의의 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팀 동료 손흥민을 향해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했다. 당시 손흥민의 유니폼을 가져다 달라는 요청에 그는 “손흥민? 그의 사촌의 유니폼을 가져다줘도 모르겠네. 손흥민이나 그의 사촌이나 모두 똑같이 생겼으니까”라고 말했다. 이는 ‘동양인들이 모두 똑같이 생겼다’라는 인종차별적인 발언이다. 따라서 이 발언은 이후 큰 논란이 됐고, 팬들의 거센 비판을 받았다. 벤탄쿠르는 자신의 개인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사과문을 올렸지만 그럼에도 비판 목소리는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피해자인 손흥민이 직접 SNS를 통해 벤탄쿠르의 사과를 받아주는 게시글을 올리면서 사건은 일단락됐다. 로드리고 벤탄쿠르. 게티이미지코리아 하지만 FA가 나섰다. 지난 9월 벤탄쿠르가 미디어에서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해 규정 E3를 위반한 혐의로 그를 공식 기소했다. 벤탄쿠르는 “내가 했던 말은 진행자를 꾸짖기 위한 발언이었다. 당시 그는 손흥민을 한국인이라고 칭했다. 이는 아시아인을 일반화하는 말이었고, 나는 이를 꾸짖기 위해 돌려서 말한 것이다”라며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늘어놨다. 하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FA는 벤탄쿠르에게 중징계를 내렸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또 벌어졌다. 토트넘이 벤탄쿠르의 징계 처분에 대해 항소를 한 것이다. 지난 20일 토트넘은 “이번 주 초에 내려진 벤탄쿠르에 대한 FA의 출전 금지 기간에 대해 항소했다. 우리는 징계의 결정에 대해선 받아들이지만, 그에 대한 제재가 가혹하다고 믿고 있다. 항소 진행 기간에는 벤탄쿠르의 국내 경기 출전은 제한되며 구단은 해당 기간 추가적으로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발표했다. 엔제 포스테코글루 토트넘 감독과 로드리고 벤탄쿠르. Getty Images 더불어 포스테코글루 감독 역시 피해자 손흥민이 아닌 가해자 벤탄쿠르를 옹호하고 나섰다. 포스테코글루 감독은 영국 ‘스카이스포츠’와의 인터뷰에서 “과도한 징계에 대해 항소한 구단의 결정을 지지한다. 벤탄쿠르는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고, 어떠한 징계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비록 실수를 저지르긴 했으나 그는 훌륭한 팀원이고, 최고의 인성을 가진 선수다”라며 벤탄쿠르와 토트넘의 항소 결정을 지지했다. 팬들이 보기에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행동이다. 영국 현지 매체도 마찬가지로 토트넘의 행보를 이해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 XG, 유럽 팬도 홀렸다···월드투어 영국 공연 성료
- 2024. 11. 21 18:47 연예|연예
- XGALX 걸그룹 XG(엑스지)가 월드투어 유럽 순회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XG(주린, 치사, 히나타, 하비, 쥬리아, 마야, 코코나)가 지난 18일과 19일 영국 맨체스터, 런던에서 월드투어 ‘The First HOWL’(더 퍼스트 하울)를 개최, 현지 팬들의 폭발적인 반응 속 유럽투어의 화려한 막을 열었다. XG는 ‘SHOOTING STAR’(슈팅 스타) 밴드 버전 무대를 시작으로 ‘GRL GVNG’(걸 갱), ‘WOKE UP’(워크 업) 등 다채로운 무대를 선보이며 현장을 완벽히 장악했다. 유럽에 첫 방문한 XG를 향한 팬들의 환호성 역시 현장을 가득 채웠다. XG 멤버들은 랩 커버 무대를 비롯해 아델, 테일러 스위프트, 레이디 가가 커버 무대까지 선보였다. 랩부터 보컬까지 모두 섭렵한 ‘완성형 그룹’의 면모를 보여주며 관객들을 제대로 열광시켰다. 이어 XG는 컴백 앨범에 담긴 ‘IYKYK’, ‘SOMETHING AIN’T RIGHT’(썸띵 에인트 라이트) 등 무려 22곡의 무대를 선보이며 현지 팬들과 뜨겁게 호흡했다. 특히 관객들의 뜨거운 앙코르 요청에 따라 ‘NEW DANCE’(뉴 댄스)부터 이번 신보 타이틀곡 ‘HOWLING’(하울링) 무대로 열기를 제대로 폭발시켰다. 또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과 떼창에 감동한 XG는 공연 중 관객을 랜덤으로 지목, 즉흥으로 함께 댄스를 즐기는 등 관객들과 잊지 못할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월드투어 아시아, 북미 순회를 마친 XG는 영국을 시작으로 독일 베를린, 프랑스 파리,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등 유럽 각지에 방문할 예정이다. 이번 유럽 순회는 XG가 컴백 이후 팬들과 처음으로 마주하는 자리인 만큼, 팬들의 기대감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XG는 최근 미니앨범 ‘AWE’(아우)로 컴백, 자체 최고 초동 판매량을 경신하며 거침없는 인기 상승세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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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환의 Hi-story](71)이토 통감 괴롭히고 유일한 의병 사진 남긴 진짜 ‘영국신사’들(2023. 02. 17 11:04)
- 2023. 02. 17 11:04 문화/과학
- 19~20세기 국권 침탈기에 조선과 대한제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평생을 싸운 영국인들이 있다. 그중 항일신문인 대한매일신보(왼쪽)를 창간한 어니스트 베델과 1907년 각지를 돌며 의병전쟁을 취재하면서 분투하는 의병들의 사진(오른쪽)을 찍고 일본군의 만행을 고발한 프레더릭 매켄지 기자가 대표적이다.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이 이토의 백 마디 말보다 신문의 일필(기사)이 한국인을 감통(느낌이나 생각이 통함)시키는 힘이 크다. 그중 일개 외국인의 대한매일신보는 일본 시책을 반대하고 한국인을 선동함이 계속되니 통감으로서 가장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초대통감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의 언급입니다. 대한제국을 집어삼킬 야욕을 거리낌 없이 펼쳐가던 이토를 괴롭힌 ‘일개 외국인’이 누구일까요.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인인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1872~1909)이었습니다. 최근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이 한·영 수교 140주년을 맞아 영국 브리스톨시에 ‘베델(한국명 배설) 동상’의 건립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저는 “일제강점기 영국 출신의 독립운동가가 베델을 비롯해 6명에 이른다”는 보훈처장의 언급에 관심을 갖게 됐는데요. 그분들은 베델(대통령장)과 프레더릭 매켄지(1869~1931)·조지 루이스 쇼(1880~1943)·프레더릭 브라운 해리스(1883~1970·이상 독립장), 더글러스 스토리(1872~1921)·어거스틴 스위니(1909~1980·이상 애족장) 등입니다. 진정한 영국신사 6명 ‘영국신사’라는 말이 있잖아요. ‘영국인들이 여성과 약자를 배려하는 신사도를 중시한다’는 표현이죠. 적어도 이 여섯분이야말로 진정한 ‘영국신사’라 단정 지을 수 있습니다. 사실 이분들이 활약한 19세기 말~20세기 초 영국은 우리에게 절대 ‘신사의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1885년(고종 22) 러시아의 조선 진출을 견제한다는 명분으로 거문도를 불법 점령한 나라가 영국이었죠. 영국과 일본은 1·2차 동맹(1902·1905)을 맺어 ‘영국=청과 인도, 일본=대한제국과 관련된 특수한 이익과 지배권’을 서로 보장해줬죠. 하지만 그 와중에서 한국을 위해 몸을 바친 영국인이라면 그분들이 ‘영국신사’가 아니고 누구겠습니까. 그중 대표적인 영국신사는 바로 베델이라 할 수 있죠. 베델은 서른두 살 때인 1904년 3월 10일 ‘런던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별 통신원으로 조선에 부임합니다. 2월 8일 발발한 러일전쟁을 취재할 종군기자 자격이었습니다. 기자정신을 발휘해서 특종기사까지 실었지만, 곧 해임됐습니다. 데일리 크로니클이 친일성향의 신문이었기 때문에 베델의 체질과 맞지 않았던 겁니다. 베델은 아예 대한제국에서 터를 잡습니다. 한글과 영문을 섞은 대한매일신보(The Korea Daily News)를 창간했습니다.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가 된 영국인은 베델(대통령장), 프레더릭 매켄지(1869~1931)·조지 루이스 쇼(1880~1943)·프레더릭 브라운 해리스(1883~1970·이상 독립장), 더글러스 스토리(1872~1921)·어거스틴 스위니(1909~1980·이상 애족장) 등 6명이다. / 국가보훈처 소장 물론 베델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발행인 겸 편집인이 베델이었고, 양기탁(총무)과 박은식(주필), 신채호(필진) 등이 참여했습니다. 1904년 7월 18일 창간한 대한매일신보는 곧 항일의 필봉을 휘둘렀습니다. 7월 22일 영문판(코리아 데일리 뉴스)에 일제의 ‘황무지 개간 계획’을 비판하는 글을 실어 일본의 부당한 요구를 비판하는 여론을 일으켰습니다. 일제가 한반도 땅의 3분의 1에 달하는 황무지 개간권을 움켜쥐겠다는 야욕을 드러내자 “절대 안 된다”고 나선 겁니다.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 등이 시중의 여론을 주도하자 일제의 ‘황무지 개간 계획’은 철회됐습니다. 영문판 ‘시일야방성대곡’ 보도 1905년 11월 27일자에는 ‘을사늑약’을 반대하는 장지연(1864~1921)의 논설(‘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의 영문 번역기사를 ‘코리아 데일리 뉴스’의 호외로 발행했습니다. 1906년 1월 29일 고종 황제가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조목조목 기록한 밀서를 영국 트리뷴 기자인 더글러스 스토리에게 건네주었는데요. 스토리는 이 밀서를 2월 8일자 트리뷴에 보도했습니다. 이 사건은 이후 1년 이상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습니다. 스토리는 그해(1906년) 12월 1일 ‘동양의 미래’라는 기획기사를 쓰면서 다시 이 문제를 다뤘고, ‘밀서’ 사진까지 실었답니다. 대한매일신보도 그냥 넘기지 않았습니다. 1907년 1월 15~16일자에 ‘스토리 밀서’ 기사를 밀서 사진과 함께 대문짝만하게 실었습니다. 대한제국 국새가 찍힌 밀서의 골자는 “을사늑약은 한국 황제가 동의하지도, 서명하지도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1월 23~24일자에는 논설을 통해 이 밀서를 부정하는 일본과 친일내각의 주장을 비판했습니다. 대한매일신보는 일본인들의 협박으로 이 밀서가 가짜로 규정될 경우 고종의 진심이 허사가 될 것을 우려해 ‘스토리 밀서’의 진상을 낱낱이 밝혔습니다. 이어 1907년 2월부터는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해 관련 논설과 미담, 의연 인원 명단을 대대적으로 실었답니다. 경천사탑 강탈사건을 끝까지 추적 보도 그즈음(1907년 2월 초) 경기 풍덕군 부소산 절터에서 천인공노할 사건이 일어납니다. 1348년(고려 충목왕4) 제작된 높이 13m의 대형 대리석탑이 사라진 겁니다. 범인은 황태자(순종·재위 1907~1910)의 혼례식에 참석한 일본 궁내부 장관인 다나카 미쓰아키(田中光顯·1843~1939)였습니다. 평소 학술자료를 통해 경천사탑에 눈독을 들였던 다나카가 대한제국 방문길에 무뢰배들을 동원해 탑을 무단 해체한 뒤 일본으로 반출한 것입니다. 다나카는 “고종이 탑을 기증했다”고 강변했지만 새빨간 거짓이었습니다. 주민들을 총칼로 위협하며 탑을 140조각으로 뜯어 실어 날랐습니다. 베델은 그 꼴을 그냥 넘기지 않았습니다. 대한매일신보는 3월 7일 이 천인공노할 뉴스를 특종 보도합니다. “일본의 특사 다나카 궁내대신의 흉계로 무기를 가진 일본인들이 경천사탑을 급습해 탑을 해체한 뒤 실어갔다고 한다.” 대한매일신보는 1907년 당시 무려 1만3000부를 발행했는데, 이것은 당시 모든 신문 총발행 부수보다 많았답니다. 그런 대한매일신보가 나섰으니 여론이 들끓었습니다. 대한매일신보는 “고종 황제의 허락을 얻었다는 것은 꾸며낸 말이다”(4월 13일), “석탑을 빨리 되돌려보내 잘못을 사죄하라…. 일본으로선 역사의 무한한 수치가 될 것…”(6월 5일)이라고 끈질기게 파고들었습니다. 대한매일신보는 한글판과 국한문 혼용판, 영문판(코리아 데일리 뉴스) 등 3개 매체를 발행했다. / 국립중앙도서관·연세대중앙도서관 소장 베델과 함께 당대의 교육자·언론인·사학자이자 독립투사인 호머 헐버트(1863~1949)는 이 문제를 국제 여론에 호소했습니다. 결국 경천사탑은 1918년 11월 15일 약탈한 그대로, 포장도 뜯지 않은 채 반환됐습니다. 거센 비판 여론에 서슬 퍼런 일제도 두 손을 들었던 겁니다. 대한매일신보는 또 친일외교관 더럼 스티븐스(1851~1908)를 처단한 장인환(1876~1930)·전명운(1884~1947) 의거의 상세한 소식을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만일 양씨(장인환·전명운)의 피(血)가 아니면 우리의 원통한 것을 세계만국에 공표했을까. 오호라. 한국 독립은 곧 오늘이요. 한국 자유는 곧 오늘이니 우리의 큰 뜻을 이룰 날이오….”(1908년 4월 17일) 일제의 핍박에 서른일곱 살에 서거 이 정도였으니 일제가 얼마나 눈엣가시처럼 생각했겠습니까. “일제는 베델의 우편물까지 하나도 거르지 않고 검열했고… 그의 집 주변에는 첩자가 그림자처럼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매켄지 기자) 결국 이토 히로부미가 직접 대한매일신보 탄압에 나섭니다. 일본에 우호적인 영국 정부에 “대한매일신보에 영향력을 행사하라”고 압력을 가했습니다. 외교문제로 부각시킨 거죠. 일제는 대한매일신보에 게개된 몇 가지 논설을 번역해 영국 정부에 보냈습니다. 일본과 밀월관계를 맺고 있던 영국은 베델을 법정(영사재판)에 두 번(1907·1908)이나 세웠습니다. 이 재판을 지켜본 매켄지 기자는 “이 재판은 영국의 언론자유에 관한 금세대 최악의 타격이었다”고 개탄했습니다. 매켄지는 “의병의 영롱한 눈초리와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고 그들의 애국심을 보았다”고 했다. 의병들은 매켄지에게 “어차피 우리는 죽게 되겠지만 일본의 노예가 돼 사느니보다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좋다”고 했다.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결국 베델은 ‘의병 및 스티븐스 처단 기사 등으로 소요를 일으키거나 조장시켜 공안을 해쳤다’는 죄목으로 3개월 금고 등의 판결을 받았습니다. 베델은 중국 상하이(上海)의 영국영사관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는데요. 출소한 베델은 1908년 7월 서울에 돌아왔습니다. 강건했던 베델도 급격하게 쇠약해졌습니다. 영국 정부에 의해 자행된 옥살이와 일제의 끊임없는 박해가 그의 심신을 갉아먹었던 겁니다. 결국 1909년 5월 1일 서른일곱 살의 젊은 나이에 서거했습니다. 베델은 “나는 죽더라도 대한매일신보는 영생해 대한의 민족을 구하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미스터 션샤인>의 의병 사진을 남긴 영국인 저는 일제가 대한매일신보의 논조를 문제삼아 영국 정부에 제시한 논설·기사 중 ‘의병’ 기사가 눈에 밟혔습니다. “내륙지방에서 전해진 믿을 만한 소식이다…. 의병들이 50명의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해서 8명을 죽이고… 일본군은 아낙네와 아이들 죽이고….”(9월 12일) “한국의 내륙을 목격한 사람의 목격담인데… ‘어느 날 저녁 의병 10명을 만났다…. 의병들은 민족을 구하지 않으면 중도에 죽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일본인들이 약탈하고 능욕하고 살인하고 있었다.”(9월 24일) 이 기사에 등장하는 ‘한국의 내륙 상황을 전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1904년 영국 데일리메일 극동특파원으로 한국에 온 프레더릭 아서 매켄지입니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의병을 취재하고 사진을 찍은 외국기자의 모델이 바로 매켄지 기자입니다. 유일하게 남은 ‘항일의병’ 사진입니다. 당시 서울에 머물던 매켄지에게 들려온 지방 소식은 심상치 않았습니다. 고종의 폐위와 군대해산 후 곳곳에서 항일의병이 궐기했다는 소문이 속속 들려왔습니다. 매켄지는 현장취재를 통해 확인하려고 길을 떠납니다. 경기 이천~충북 제천~강원 원주를 거쳐 의병이 자주 출몰한다는 경기 양평으로 발길을 돌렸는데요. 취재길에 잿더미가 된 고을과 주민들의 일관된 ‘일본군 만행’ 증언을 보고 들으며 충격에 빠집니다. 1906년 1월 고종 황제는 영국 트리뷴의 더글러스 스토리 기자에게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알리는 밀서를 전달했다. 밀서의 내용은 “(을사늑약에) 한국 황제가 동의하지도, 서명하지도 않았다”는 것이었다. 스토리 기자는 고종의 밀서를 1년 이상 끈질기게 다뤘다. “일본군은 집을 불태우지 말라고 애원하는 노인을 쏘아 죽였다. 한 임산부는 해산이 가까워 집에 누워 있다가 참변을 당했고….” 일본군이 여인들을 능욕했고, 심지어 열 살짜리 여자아이까지 총을 쏴 죽였답니다. 특히 일본군은 의병과 격전을 벌인 제천 시내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이 와중에 미처 피하지 못한 남녀와 아이들이 불에 타 죽었답니다. 의병의 눈초리에서 애국심을 보았다 매켄지 일행이 양평에서 숙소를 잡았을 때 드디어 의병 5~6명이 나타났습니다. “준수하고 훤칠한 청년은 구식 군대 제복을 입고 있었다. 다른 두 사람은 군복 바지, 두 사람은 초라한 누더기 한복 차림…. 여섯 명의 총이 제각기 달랐는데 어느 하나 성한 것이 없었다….” 매켄지는 “희망 없는 전쟁에서 이미 죽음이 확실해진 이 사람들이 매우 측은하게만 보였다”고 했습니다. 매켄지는 그러나 “의병의 영롱한 눈초리와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고 그들의 애국심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의병들은 매켄지에게 확고한 의지를 밝혔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죽게 되겠지요. 그러나 일본의 노예가 돼 사느니보다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매켄지 기자는 의병들과 하룻밤을 지내면서 부상병들을 치료하고 누더기가 된 그들의 옷을 빨아주었습니다. 음식도 먹였습니다. 다음날 의병들은 만날 때의 그 ‘보잘것없는 장비와 열악한 차림으로’ 열 지어 떠났습니다. 매켄지는 혹시 자신이 가지고 간 호신용 무기들이 없어졌나 하고 살폈지만 그대로였습니다. 의병들이 아무리 처지가 궁하다 해도 남의 물건을 훔치는 등의 무례한 짓은 자행하지 않았다는 뜻이죠. 숙소를 떠난 매켄지 일행은 자갈과 모래가 깔린 강변에서 20여 명의 의병과 맞닥뜨렸습니다. 신식 군대의 제복을 입은 청년이 그들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몇 명은 14~16세가 채 안 되는 소년들이었답니다. 매켄지는 이 의병들의 사진을 찍었는데요. 이 사진이 역사에 길이 남을,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이 모델로 삼은 유일한 의병 사진입니다. 매켄지는 이 의병들의 활동상과 일제의 잔학상을 담은 책 <대한제국의 비극>(Tragedy of Korea)을 발간했습니다. 어떻습니까. 매켄지와 베델이 없었다면 우리는 1907년 고종 폐위와 군대해산 후 들불처럼 일어났던 항일의병의 생생한 장면을 증거하지 못했을 겁니다. 이제까지 진정한 영국 신사의 삶을 살펴보았는데요. 베델 선생이 서거한 뒤 박은식·양기탁 선생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답니다. “구주(유럽)의 열혈남아가 조선의 어둠을 씻어냈네.”(박은식) “대영(영국) 남자가 대한에 와서 캄캄한 밤중을 밝게 비추었네.”(양기탁)
- 이기환의 Hi-story
- 영국 전문가 “우르르 몰린 게 아냐…관리 부재로 군중 압착”(2022. 11. 04 11:17)
- 2022. 11. 04 11:17 사회
- ㆍ‘군중 압착 연구자’ 에드윈 갈레아 영국 그리니치대학 교수 인터뷰 “과밀화, 관리되지 않은 인파, 넓은 길에서 인파가 밀려드는 좁은 길은 참사의 재료다. 셋이 합쳐지면 큰 위험으로 이어질 게 뻔하기 때문에 운에 맡겨둬선 안 된다.” ‘군중 압착? 연구자인 영국 런던 그리니치대학 에드윈 갈레아 교수 / 갈레아 교수 제공 영국 런던 그리니치대학 ‘소방안전공학그룹(FSEG)’의 창립이사인 에드윈 갈레아 교수는 지난 10월 말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태원 핼러윈 참사’ 소식을 전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호주 멜버른 출신인 갈레아 교수는 1986년부터 인간행동, 대피, 화재역학 및 시뮬레이션 분야를 연구해온 학자다. 이태원 참사와 같은 군중 압착(crowd crush)도 그가 꾸준히 천착해온 연구 주제다. 갈레아 교수는 그간 ‘우르르 몰림(stampede)’과 ‘군중 압착’을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우르르 몰림은 정부가 피해자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려는 의도가 담겨 있는 표현이기 때문에 군중 압착이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는 취지다. 그는 또 군중 압착은 항상 참사 예방을 위한 정부의 관리 문제와 맞물리기 때문에 “정치적 문제”라고 강조한다. 주간경향은 지난 11월 1일 갈레아 교수와 원격 영상 인터뷰를 했다. 군중 압착의 위험성, 참사 예방을 위한 방안 등의 이야기를 들었다. 인터뷰에 앞서 그가 이태원 참사 정보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기초자료를 제공했다. -우르르 몰림과 군중 압착의 차이는 무엇인가. “두 개념을 구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정부 당국이 피해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우르르 몰림이라는 단어를 쓴다. 우르르 몰림이라고 하면 성급하며 이성이 없는 동물을 떠올리게 된다. 다시 말해 우르르 몰리는 상황에 처한 사람들은 공포로 허둥지둥하면서 타인이 다치는 걸 신경쓰지 않으며 비이성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여러 유형의 사고를 살펴보면 실제로 이런 상황이 벌어지진 않는다. 99%는 우르르 몰림이 아니라 군중 압착이다. 행사와 인파를 관리해야 할 책임이 있는 정부 당국은 ‘군중이 비이성적이었는데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느냐’고 항변한다. 정부와 언론의 이런 언급을 접하면 내 마음속엔 비상벨이 울린다. 실제로는 당국이 큰 실수를 저질러 수많은 이의 죽음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군중 압착은 군중 밀집도를 관리하지 못할 때 발생한다. 사람들이 움직이는 좁은 공간에선 1㎡(제곱미터)당 4명이 모이면 정상적으로 걸을 수 없다. 6명이 모이면 참사가 발생할 수 있다. 음악 콘서트, 축구장과 같이 사람들이 제자리에 서서 이벤트를 보는 상황과 다르다. 사고 당시 이태원 영상, 사진 등을 보니 6명을 초과했더라. 끔찍한 상황이었다.” -이태원 참사 당시 일방통행이 이뤄지지 않은 점도 문제로 꼽힌다. “양방통행이라 좁은 길 양쪽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독일에서도 유사한 사고가 발생한 적이 있다. 2010년 7월 독일 뒤스부르크에서 열린 ‘러브 퍼레이드’ 음악 축제였다. 100만명 가까운 사람이 참여했다. 당국의 어리석은 계획이 참사로 이어졌다. 당시 한개의 주요 통로가 있었다. 이 통로는 입구뿐 아니라 출구 역할을 했다. 나가려는 사람과 들어오려는 사람들이 엉키면서 통제가 안 됐다. 경찰이 인파 관리에 문제가 발생하자 해결하려 했지만, 되레 이 개입이 더 큰 문제를 일으켰다.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인파 관리시스템을 잘 아는 경찰이 필요하다는 뜻인가. “그렇다. 경찰 인력 배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참사를 예방하려면 잘 짜인 행사 계획과 인파의 흐름 관리가 중요하다. 현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인파 관리 방법을 잘 알고 체계적으로 훈련받은 경찰 인력이 필요하다. 1989년 영국 힐즈버러 축구경기장 참사도 경찰의 관여로 상황이 더 악화됐다. 경찰이 인파 관리가 아니라 소요 사태 대응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놓고선 훌리건(극렬 축구팬)에게 책임을 돌렸다.”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골목이 경사로여서 더 위험했다는 지적도 있다. “지난해 4월 이스라엘 종교 축제에서 유사한 사고가 있었다. 행사 뒤 많은 사람이 동시에 출구로 나가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좁은 비탈길이었다. 일부 사람들이 미끄러지거나 걸려서 넘어졌다. 그 도로가 수리 중이어서 표면이 금속으로 돼 있었던 탓에 더 미끄러운 상황이 됐다. 고밀도이기 때문에 뒤에 있는 사람들은 앞에서 누군가가 미끄러졌다는 사실을 알 수가 없었다. 뒤에 있는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군중 압착 연구자로서 이태원 참사 소식을 접하고 어떤 생각을 했나. “우선 코로나19 팬데믹 규제 이후 열린 핼러윈 축제였기 때문에 수많은 청년이 나올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 당국이 사전에 준비를 제대로 해야 했다. 두 번째로 112, 119 등으로 신고전화가 오면 인파 관리 훈련을 받은 경찰을 위험한 지역에 빨리 배치했어야 한다. 주최자가 없는 행사였다 해도 구름인파가 예상되는 만큼 당국이 더 경각심을 가져야 했다. 수많은 인파, 양방통행, 대로와 연결된 좁은 골목, 경사로 등은 참사의 재료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참사를 막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의 수를 제한하는 일이다. 적어도 골목에서 일방통행이 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군중 압착 예방은 정말 복잡하고 어려운 과학 공학이 필요한 게 아니다. 상식적인 일이다. 전 세계에서 이런 참사들이 벌어질 때마다 우리가 확인하는 건 안타깝게도 계획, 관리의 부실이다.” -군중 압착으로 인한 참사를 단순한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문제라고 볼 수 있나. “경찰이 관여하기 때문에 항상 정치와 연관될 수밖에 없다. 결국 관리가 중요하다. 군중이 좁은 공간에 밀집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위험하기 때문에 더 많은 관리 인력을 배치하고 위험 신고에 더 빨리 반응해야 한다. 또 일방통행을 유도했어야 한다. 이 모든 것에는 항상 정치적 요소가 있다. 이번 참사의 핵심 이유가 정치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 없지만 확실한 건 당국이 조기에 위험 완화조치를 충분히 하지 않은 책임이 있다는 점이다. 그 좁은 골목길을 잘 관리했다면 아무도 죽지 않을 수 있었다. 영국 힐즈버러 참사의 경우 참사의 책임이 경찰에게 있다는 점을 확인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불명예스러운 일이다. 실제로 발생한 일을 인정하지 않고 정부가 스스로를 보호하려고만 하면 참사에서 교훈을 얻을 수 없다. 참사 재발을 막을 수 없게 된다는 얘기다.” -한국 경찰은 이태원 참사 현장에서 군중을 밀쳤다는 의혹을 받는 남성을 조사하고 있다. “난센스다. 희생양을 찾으려는 시도다. 이 참사는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니다.”
- 표지 이야기
- 여왕 떠나자…흔들리는 영국 군주제(2022. 09. 16 14:50)
- 2022. 09. 16 14:50 국제
- 영국인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영연방의 수장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지난 9월 8일(현지시간) 96세로 서거했다. 최장수 군주이자 현대사의 산증인인 그의 서거에 세계 각국에선 애도의 메시지가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9월 12일(현지시간) 영국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홀리루드 궁전을 떠나 성 자일스 대성당으로 향하는 고(故)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관을 실은 운구차(맨 앞 차량) 뒤를 찰스 3세 국왕과 앤 공주, 앤드루 왕자 등 여왕의 자녀들이 도보로 따라가고 있다. / 에든버러 | 로이터연합뉴스 엘리자베스 2세의 서거는 향후 영국사회에 적잖은 변화를 몰고 올 것으로 보인다. 국민의 존경을 바탕으로 왕실을 떠받쳐온 존재가 사라지며 군주제 폐지 목소리가 영국 안팎에서 힘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호주·뉴질랜드 등 영연방 국가들의 군주제 철폐 논의가 현실화되면 그나마 상징으로 남아 있던 국왕의 존재감은 크게 위축될 것으로 예상된다. 서방 언론은 엘리자베스 2세의 죽음과 이에 따른 왕권 교체가 정치·경제적 격변기에 있는 영국에 적잖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전망했다. 최장수 군주이자 현대사의 산증인 영국 버킹엄궁이 엘리자베스 2세의 부고 소식을 전한 시점은 지난 9월 8일 오후였다. 여왕은 서거 당시 예년처럼 스코틀랜드 밸모럴성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던 중이었다. 서거 이틀 전인 지난 6일에는 리즈 트러스 신임 총리의 임명식을 열기도 했다. 당시에도 여왕의 건강에 이상 조짐이 보였으며, 왕실은 7일 오후 “의료진의 휴식 권고로 여왕의 저녁 일정을 취소한다”고 발표했다. 8일 오후에는 건강이 염려스럽다는 의료진의 소견이 나왔고, 결국 여왕은 이날을 넘기지 못하고 서거했다. 영국 왕실은 엘리자베스 2세의 정확한 사망 원인을 공개하진 않았다. 다만 일각에선 여왕이 70년을 해로한 남편 필립공을 지난해 4월 떠나보낸 뒤 급격히 쇠약해진 점에 주목했다. 여왕은 올해 초 코로나19에 감염되기도 했다. 최근 들어서는 간헐적인 거동 불편으로 일정이 임박한 상태에서 취소하는 일도 잦았다. 사실 엘리자베스 2세는 이미 그간의 재위 기간만으로도 세계적인 최장수 군주 대열에 올라 있었다. 그는 1952년 2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뒤 70년간 재임해왔다. 그의 재위 기간은 고조모인 빅토리아 여왕(63년 216일)을 훌쩍 넘어 영국 역사상 가장 길다. 세계적으로 봐도 그보다 재위 기간이 긴 군주는 프랑스의 루이 14세(72년 110일) 정도만 손에 꼽는다. 최장수 군주였던 만큼 엘리자베스 2세는 현대사의 산증인이기도 했다. 그의 재위 아래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의 풍파를 견뎌왔다. 유럽연합(EU)의 출범과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등의 격동도 거쳤다. 여왕은 이 기간 영국의 ‘정신적 지주’로서 국민의 단결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대영제국 해체 이후에도 영연방을 묶는 구심점 역할을 해낼 수 있었던 이유다. 덕망 높은 군주의 빈 자리 영국 국왕은 영국을 비롯해 캐나다와 호주, 뉴질랜드까지 15개국의 군주이자 56개국이 참여한 영연방의 수장이다. 비록 상징적인 역할에 그치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은 ‘왕실 무용론’이 퍼지지 않고 21세기에도 군주제가 유지되도록 지켜냈다. 여기에는 여론조사에서 늘 압도적 지지율을 보이는 여왕 개인의 인기가 크게 작용했다. 리즈 트러스 영국 집권 보수당의 신임 당대표 및 차기 총리 내정자가 지난 9월 6일(현지시간) 스코틀랜드 밸모럴성을 예방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알현하고 있다. 이 사진은 여왕이 공식 행사에서 촬영한 마지막 사진이 됐다. / 밸모럴 | AP연합뉴스 다만 엘리자베스 2세의 역할이 컸던 만큼 그의 뒤를 잇는 찰스 3세(찰스 왕세자)의 어깨는 무겁게 됐다. 그는 왕세자로 낙점된 뒤 환경보호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으나, 다이애나비와의 이혼이나 커밀라 파커 볼스(현 왕비)와의 불륜 논란 등으로 어머니와 비교해 인기가 크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는 또 알카에다 수장이었던 오사마 빈 라덴의 가족과 사우디 기업인 등으로부터 거액의 기부금을 받아 자신이 후원하는 자선단체에 보낸 일로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찰스 3세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미약하기에 영국에서는 이참에 군주제를 폐지하자는 공화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영국에서 군주제 폐지 캠페인을 벌이는 단체인 ‘리퍼블릭’ 등은 현대 민주주의에서 왕실은 설 자리가 없고, 유지 비용만 막대하다며 군주제 폐지를 위한 선거를 벼르고 있다. 반면 일각에선 찰스 3세가 오히려 엘리자베스 2세보다 더 적극적인 역할 정립에 나설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찰스 3세는 이전부터 어머니와 달리 정치적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명하는 성향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그는 왕세자 시절부터 기후변화 대응, 환경오염 대처 등 자신의 가치를 주장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또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는 편지와 메모를 정부 각료와 의원들에게 보낸 사실이 밝혀져 논란이 되기도 했다. 영국 군주제의 앞날은 찰스 3세가 당장 해결해야 할 과제는 엘리자베스 2세 서거에 따른 영연방 국가들의 동요다. 강력한 구심점이 사라지면서 연방 내 다른 국가들에서도 공화제 전환 논의가 빗발치고 있어서다. 호주에선 공화주의자들을 중심으로 공화제 전환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으며, 뉴질랜드에서도 비슷한 분위기가 감지된다.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는 지난 9월 12일 “결국 (뉴질랜드도) 공화국으로 전환될 것”이라며 “내 생애 중 반드시 일어나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영연방 내 카리브해 섬나라들 사이에서도 공화제 전환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앤티가바부다의 개스턴 브라운 총리는 지난 9월 10일 언론 인터뷰에서 3년 내 공화국 전환에 대한 국민 투표를 하겠다고 밝혔다. 자메이카와 바하마, 벨리즈 등 다른 국가도 마찬가지다. 앤드루 홀니스 자메이카 총리는 지난 3월 영국의 윌리엄 왕세자 부부가 자국을 방문했을 때 영국 왕실과 결별하고 공화정으로 독립하고 싶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일부 국가에선 영국의 과거 식민 지배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유럽 제국주의가 한창이던 15~19세기 아프리카인 1000만명 이상이 백인 노예상에 의해 카리브해로 강제 이주했고, 플랜테이션 농장 등지에서 노동착취를 당했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워싱턴포스트는 “영국의 옛 식민지였던 국가들에서는 여왕의 죽음에 조의를 표하면서도 식민 지배의 아픔을 떠올리며 복잡한 심경을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엘리자베스 2세의 서거와 이에 따른 왕권 교체가 영국의 현 상황과 맞물려 정치·경제적으로 적잖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놨다. 앞서 영국 정부는 코로나19 봉쇄 기간 보리스 존슨 전 총리 등이 연루된 것으로 드러난 ‘파티 게이트’로 지난 수개월간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겪은 바 있다. 또 인플레이션(물가 인상)과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에너지 불안 등으로 경제적으로도 상당한 불안에 직면한 상황이다.
- [전규열의 세계는 창업 중](5)알파고 탄생시킨 영국의 테크시티, 유럽 ‘AI 천국’으로 변신(2021. 07. 23 15:03)
- 2021. 07. 23 15:03 국제
- 알파고로 전 세계 인공지능(AI) 열풍을 일으켰던 유니콘 17개 중에서 11개가 AI 기반 스타트업인 나라. 매일 1000개의 스타트업이 생겨나고, 중소기업이 민간부문 고용의 약 60%를 차지하는, 전 세계로부터 아이디어, 자금, 조언이 모여드는 나라. 2010~2017년 1234개의 스타트업 엑시트로 미국에 이어 스타트업 엑시트 세계 2위, 글로벌 스타트업 생태계 리포트 마케팅 리치 부분 세계 2위, 글로벌 도시 생태계 평가에서 실리콘밸리, 뉴욕에 이어 세계 3위 도시를 보유한 나라. 미성년자도 아이디어만 있으면 10파운드(약 1만6000원) 이하의 자본금으로 창업할 수 있고, 창업절차도 간편한 나라. 유럽의 실리콘밸리 영국 이야기다. 영국 런던 테크시티의 전경/픽사베이 엑시트 용이, 창업 간편, 자본금 제한 없애 영국의 스타트업은 금융위기 이후 도심 곳곳이 녹슬고 버려진 창고와 공장이 즐비했던 빈민가 지역을 스타트업 천국 ‘테크시티(Tech City)’로 재구성하면서 시작됐다. 런던의 동쪽 주변부 중 땅값이 싼 쇼디치, 올드 스트리트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됐던 이곳이 처음부터 붐볐던 것은 아니다. 2008년 이전만 해도 주변에 정보통신(IT) 기업 20여개가 전부였다. 그러다 금융위기로 금융 서비스가 위축되자, 그 자리를 IT업계가 차지했다. 지금은 구글, 아마존 등 글로벌 기업과 1300여개 스타트업이 모여 세상의 주목을 받는 곳으로 변했다. 이곳이 벤처캐피털(VC), 크라우딩펀딩, 엔젤투자자 등 스타트업 3박자를 고루 갖추게 되자 예비창업자와 기술자가 모여들면서 스타트업 생태계가 구축되는 계기가 됐다. 런던의 테크시티는 미국의 ‘실리콘밸리’와 영국의 로터리를 지칭하는 ‘라운드어바웃’이 합쳐져 ‘실리콘 라운드어바웃’이라고도 불린다. 원래는 공장지대로 가난한 노동자들이 모이는 허름한 분위기로 유명했던 곳이다. 금융위기 이후 산업구조가 바뀌면서 슬럼화가 진행되자 런던 도심과 불과 10분 거리에 있었지만, 우범지역으로 변했다. 하지만 낙후된 건물에 따른 싼 임대료 덕분에 한푼이 아쉬운 창업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이것이 반전의 계기가 됐다. 영국 정부도 이들을 주목했고, 2010년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나서서 테크시티 조성안을 발표했다. 낙후된 공장부지가 IT 중심지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내용으로 보면 서울 성수동이나 구로공단과 유사하다. 핀테크 기업 ‘트랜스퍼와이즈’와 항공권 가격비교 사이트 ‘스카이스캐너’는 대표적인 영국의 스타트업이다. 영국은 달랐다. 재개발을 통해 신축건물을 올리고 상권을 형성시키지 않았다. 기존 낡은 건물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 영국 스타트업 생태계 성장의 기반이 됐다. 출범 당시 100개도 안 되던 입주기업이 최근에는 5000여개가 넘어서면서 스타트업 천국으로 발전하게 됐다. 테크시티 덕분에 세계 금융의 중심지였던 런던은 이제 IT 중심의 미국 실리콘밸리와 달리 영화, 미디어, 음악, 금융 등 IT와 연계된 다양한 산업들의 성장하면서 미국 실리콘밸리와 뉴욕에 이어 세계 세 번째로 큰 스타트업 도시로 성장했다. 2016년 이세돌 9단과 세기의 대결을 펼치며 전 세계적으로 인공지능 열풍을 일으켰던 AI, 알파고를 만든 구글의 딥마인드가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특히 영국은 유럽 AI 스타트업의 3분의 1을 가지고 있어 이 분야에서 활약이 돋보인다. 3박자 고루 갖춘 스타트업 생태계 영국의 대표적인 스타트업으로는 2010년 설립된 ‘트랜즈퍼와이즈’가 있다. 송금 및 환전이 필요한 이용자들을 서로 매칭해 기존 은행에 지불해야 했던 수수료를 절감시킨 핀테크(P2P) 분야의 스타트업으로 세계 59개국에서 매월 약 100만명의 고객이 총 10억파운드의 금액을 송금하고 있다. 2003년 스코틀랜드에서 시작한 항공권 가격비교 검색엔진으로, 웹사이트 및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서비스를 제공하는 ‘스카이스캐너’도 대표적인 영국산 스타트업이다. 지금은 항공권과 숙박, 자동차 렌트 등의 가격비교 사이트로 서비스가 확대됐으며, 30여개 언어, 70개 이상의 통화로 서비스 이용이 가능하고 월 방문자 수가 6000만회를 기록할 만큼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 밖에도 실시간 대중교통 내비게이션 맵인 ‘시티 맵퍼(City Mapper)’, 명품의류 온라인 쇼핑몰인 파페치(Farfetch), 개인 간(P2P) 신용대출 플랫폼 펀딩서클(Funding Circle) 등이 있다. 이세돌 9단이 2016년 3월 구글의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와 대결을 하고 있다./구글코리아 영국의 스타트업은 런던을 중심으로 스타트업 클러스트를 조성하고 정부·민간이 다양한 창업지원 활동을 한 것으로 집약된다. 대표적인 창업육성 프로그램으로 성장 가능성이 높은 50개의 스타트업을 선정해 정부가 적극 지원하는 ‘미래 50(Future Fifty)’, 영국 내 산재한 16개 산업 클러스트 간의 교류를 통해 성공사례와 정보를 공유하는 활동을 지원하는 ‘테크시티 영국 클러스트 동맹’, 전 국민을 대상으로 대학의 전문가들이 창업과 운영에 대한 전반적인 강의를 해주는 온라인 교육프로그램 ‘디지털 비즈니스 아카데미’가 있다. 특히 영국은 창업자가 빠른 시간 안에 아이디어를 사업화해 안정적인 기업이 될 수 있도록 돕는 액셀러레이터 활동도 활발하다. 성장 잠재력이 높은 기업만을 특별 지원하는 ‘더 디퍼런스 엔진’, 핀테크 관련 스타트업에 자금조달과 경영자문을 지원해주는 민관합동 핀테크 육성기관 레벨39(Level 39)도 있다. 또한 해외 각지에서 활동 중인 글로벌 기업 본사를 영국에 유치하기 위한 ‘HQ-UK’ 프로그램을 통해 페이스북, 구글, 맥킨지 등 유수의 글로벌 기업을 유치하는 성과를 냈다. 영국은 정부가 스타트업 저변을 확대하기 위한 포괄적인 정책을 추진하고, 민간이 개별 원칙에 따라 차별적인 지원전력을 펼치는 것이 특징이다. 실패를 용인하는 실리콘밸리 문화가 런던의 창업생태계에 형성된 것도 긍정적이다.
- 전규열의 세계는 창업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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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앤티크st’ 조 말론 런던, 성수에 팝업 스토어 오픈
- 2024. 03. 10 10:16 뷰티
- 부티크 향수 브랜드 조 말론 런던이 서울 성수동에서 팝업 스토어를 연다. 카카오톡 선물하기로 선물 받은 고객 한정으로 선착순 예약이 가능하다. 부티크 향수 브랜드 조 말론 런던이 오는 27일까지 서울 성수동에서 팝업 스토어를 연다. 리미티드 신제품 ‘센티드 메멘토 컬렉션’ 출시를 맞아 진행되는 이벤트다. ‘센티드 메멘토 컬렉션’은 영국 앤티크 마켓에서 발견한 독특한 소품들과 추억으로 가득 찬 물건들에서 영감을 받아 다채로운 향기로 구성된 리미티드 컬렉션이다. 네 가지 향의 코롱과 한 개의 홈 캔들로 구성돼 있으며 특히 전통적인 형태의 비누에서 영감을 받은 ‘머스크 메멘토 코롱’은 맑은 머스크 향으로, 부드러운 머스크와 알데하이드의 깨끗한 노트가 편안함과 함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또한 ‘진저 비어 코롱’은 영국의 대표적인 음료인 진저 비어가 가진 생동감 넘치는 아로마에서 영감을 받은 스파이시한 나무 향으로 자연에서 얻은 생강의 신선함이 따뜻하고 편안한 시나몬, 강렬한 로스티드 오크와 대조를 이루는 매력적인 향을 가진 제품이다. 이번 팝업 스토어는 영국의 앤티크 숍에서 모티브를 얻어 꾸며졌다. 고급 앤티크숍 무드를 느낄 수 있는 포토 스폿, 앤티크 스타일 브로치 메이킹 클래스와 소중한 기억이 담긴 사진이 인쇄된 포토 파우치 등 다양한 액티비티가 마련됐다. 베스트 프레그런스 체험 등 다양한 이벤트도 준비됐다. 이외에도 에메랄드 타임 코롱과 패시플로라 코롱, 던 머스크 홈 캔들도 함께 만나볼 수 있다. 한편 신제품 ‘센티드 메멘토 컬렉션’ 1종 구매 시 리미티드 벨벳 파우치 증정하며 2종 혹은 4종 구매 시 리미티드 박스가 제공된다.
- [세기의 비하인드]영국 빅토리아 여왕과 인도 하인의 ‘은밀한 우정’
- 2024. 01. 28 10:59 문화/생활
- 2017년도 영화 <빅토리아 & 압둘> 이미지. 왕과 환관 혹은 왕비와 궁녀처럼 수많은 나라의 역사 속에서 왕과 그를 측근에서 보필하는 하인들은 신분을 떠나 특별한 사이가 되는 이야기는 참 많습니다. 1983년에 재위한 영국 여왕 빅토리아도 노년에 만난 젊은 인도인 하인 압둘 카림과 인종과 신분 그리고 성별을 넘어 우정을 쌓았습니다. 두 사람은 우정이라고 말하기 부족한 특별한 관계였죠. 독일 하노버 공국의 후손 빅토리아 여왕은 1837년 18살의 나이로 여왕에 즉위, 재위 64년 동안 영국과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에 걸쳐 확장된 식민지를 하나로 통합하며 대영제국의 위세를 떨쳤던 인물입니다. 바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만든 여왕입니다. 수많은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어 착취한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으로 평가받았지만 빅토리아 여왕에게는 누구보다 아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바로 영국의 식민지 인도에서 건너온 40세 연하의 젊은 하인 압둘 카림입니다. 1887년 두 사람이 처음 만납니다. 여왕은 68세, 압둘이 24세였습니다. 그리고 여왕이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14년 동안 두 사람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지내게 됩니다. 노년의 여왕 그리고 젊은 하인의 관계에 대해 지금의 역사가들도 뭐라 규정짓기 어려워합니다. 여왕이 서거한 후 왕실 사람들은 두 사람 관계를 밝힐 만한 문서를 모두 불태워버렸으니까요. 그러나 여왕에게 그는 친구이자 연인이며 때로는 아들 노릇을 하던 소중한 존재였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압둘 카림은 1863년 북인도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는 여느 인도 부모처럼 교육열이 뜨거웠죠. 다양한 언어를 배우게 하고 북인도와 아프가니스탄까지 여행을 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게 합니다. 압둘 카림은 아그라 감옥을 관리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런 그가 곧 영국 여왕과 운명적인 만남을 할 거라곤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죠. 빅토리아 여왕은 1887년 식민지인 인도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여왕은 인도 문화나 종교에 큰 호기심을 품고 있었고 즉위 50주년을 기리는 황금 주년 연회를 맞아 인도인에게 서빙을 하도록 지시합니다. 아마 자신이 만든 식민지에 대한 과시욕의 일환이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날을 위해 간택된 두 명 중 한 명이 바로 인도인 하인, 압둘 카림입니다. 여왕이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14년 동안 압둘은 여왕의 최측근으로 지내게 됩니다. 1887년 6월 23일 영국 윈저성에서 두 사람이 만납니다. 압둘 카림의 성실하고 침착한 태도에 흡족한 마음이 든 여왕은 카림과 대화하기 위해 힌두어를 배워보기로 결심까지 합니다. 인도에서 중요한 손님이 오면 그들의 언어로 인사하는 호의를 베풀고 싶었던 겁니다. 압둘 카림은 영어를 배우는 동시에 여왕에게 인도어를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여왕과 친밀해진 압둘 카림은 여왕의 개인 비서 자격을 얻으면서 궁정의 하인 중에서도 지위가 오르기 시작합니다. 여왕의 고문이자 역사학자였던 수실라 아난드는 두 사람의 관계를 이렇게 기술합니다. “여왕은 카림을 다른 인도 하인들의 상사로 지명했다. 그녀는 일기에 카림을 친절하고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지속적인 칭찬의 글을 썼다. 심지어 압둘을 두고 ‘나에게 진정한 위로가 되는 사람’이라고 적었다. 단 하루도 비서 없이는 지낼 수 없는 그런 소중한 사이가 됐다.” 그렇지만 여왕과 식민지 하인과의 관계가 가까워질수록 왕실 구성원들은 우려를 표명하기 시작합니다. 여왕이 순수한 마음으로 인도인 하인을 곁에 두었더라 하더라도 노년의 여왕과 젊은 인도인 하인은 추문이 일어나기 좋은 관계였던 겁니다. 실제로 나라 안팎에서는 여왕이 노년에 치매로 40세나 어린 하인에게 반해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합니다. 여왕은 이런 소문에도 개의치 않고 모든 공식 여행과 휴가에 압둘을 동행시킵니다. 게다가 여왕은 압둘에게 그의 고향인 인도에 넓은 땅도 하사합니다. 영화 <빅토리아 & 압둘> 이미지. <빅토리아와 압둘: 여왕의 가장 가까운 남자 이야기>의 저자인 샤라버니 바수는 “두 사람이 오랜 시간 동안 확실히 단 한 번의 밤은 함께 보냈을 것”이라며 “그 일은 스코틀랜드 휴가 중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두 사람이 보통의 남녀 간 사랑은 아닐 거라 선을 긋습니다. 어머니와 아들 같은 유대관계에 플라토닉한 사랑이 한 방울 첨가됐을 거라는 묘한 추측을 내립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죽기 직전까지 압둘에게 의지합니다. 그녀의 장례식에 그를 주요 애도자로 내세우죠. 애도자란 영국 군주의 장례식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입니다. 이런 영광은 일반적으로 왕실 가족이나 귀족 중 친구에게만 주어집니다. 압둘 카림. 빅토리아 여왕이 세상을 떠나자 압둘에게는 곧 비극이 닥칩니다. 왕실 구성원들은 가차 없이 그를 윈저궁에서 쫓아냅니다. 게다가 경비병들을 시켜 그의 집에 여왕과 압둘이 나눈 서신들을 찾아내 즉시 불태우게 합니다. 편지를 불태운 후 압둘의 가족들에게 즉시 잉글랜드 땅에서 떠날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여왕과의 관련된 일을 발설할 시 그의 가족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협박을 하죠. 압둘 카림은 아내와 함께 인도로 떠나 빅토리아 여왕이 하사한 아그라 근처 땅에 정착합니다. 그러나 여왕이라는 큰 존재를 잃은 상실감 때문이었을까요? 그는 얼마 있지 않아 46세에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여왕과 나눈 편지나 기록을 없애고 평생 입막음을 했으니 123년 전 대영제국의 통치자 빅토리아 여왕과 인도에서 온 하인 압둘의 이야기는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신분과 인종 그리고 나이를 넘어선, 사랑과 우정 사이 같은 이야기는 2017년도 영화 <빅토리아 & 압둘> 같은 동화로만 남게 됩니다. ■자료제공 유튜브 <지식 아닌 지식> 영국 빅토리아 여왕과 40세 연하 인도 식민지 하인 압둘, 사랑과 우정 사이대영제국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노년에 함께 했던 식민지 인도에서 온 하인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인종과 나이 그리고 신분을 넘어 사랑과 우정 사이 감정을 교감했습니다. 백여년 전 역사 속 비하인드입니다.https://youtu.be/zThW-Td8zc0?si=R4UegidBqN0FVB66
- 영국도 K푸드 열풍…유럽 최초로 ‘김치의 날’ 제정
- 2023. 11. 20 15:45 요리|문화/생활
- 영국 런던 킹스턴 왕립구는 유럽 최초로 11월 22일을 ‘김치의 날’로 제정했다. 한식진흥원 제공 영국 런던에서 한바탕 김치축제가 벌어졌다. 영국 런던 킹스턴 왕립구는 유럽 최초로 11월 22일을 ‘김치의 날’로 제정했다. 농림축산식품부과 한식진흥원은 영국의 ‘김치의 날’을 기념해 오는 11월 18일(현지 시간), ‘코리아 김치 페스티벌’ 개최 지원에 나섰다. 한식진흥원은 ‘해외 한식당 협의체 역할 강화’ 사업을 통해 한식의 우수성을 알리고, 한식에 대한 인식개선을 위한 지역사회 공헌 행사 개최 등을 지원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이번 ‘김치의 날’ 제정을 축하하기 위해, 런던한식당협의체와 협력하여 이번 행사를 준비하게 됐다. 이 행사에는 런던한식당협의체 뿐만 아니라, 현지의 영국 킹스턴대학 식품영양학과 교수진 및 학생들과 연계하여 ‘김치 만들기 경연대회’, ‘팔도 김치 전시회’, ‘창작 김치 전시회’ 등의 프로그램을 기획하여 다양한 문화공연과 함께 ‘김치의 날’ 제정 기념을 대대적으로 축하했다. 한식진흥원 임경숙 이사장은 “올해는 한국·영국 수교 14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며, ‘김치의 날’이 유럽에서 최초로 영국에서 공식적으로 제정된 것이기에 한국과 영국 모두에게 더욱 뜻깊은 해이다”며, “이번 행사를 통해 한식의 지속적인 열풍을 이어가며 한식의 맛과 우수성을 알리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지 한식당들의 동반성장을 위해서 효과적인 지원 프로그램들을 모색하여 전 세계 한식당들의 성장과 한식이 확산될 수 있도록 돕겠다”고 말했다.
- [세기의 비하인드] 영국기자, 13세 소녀를 단돈 5파운드에 샀다
- 2023. 11. 05 19:05 문화/생활
- 19세기 윌리엄 토마스 스테드 기자는 13세 소녀를 직접 5파운드에 사면서 그 과정을 생생하게 기술해 영국 사회에 큰 화두를 던집니다. Pall Mall 홈페이지 19세기 영국에서는 불과 13세가 되면 성인으로 인정받았습니다. 13세 소년·소녀들이 성인과 동등하게 공장에서 일할 수 있었고 월급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법을 위반하면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형벌도 받았습니다. 바꿔말하면 13세 소녀가 성적 착취를 당해도 아동 범죄가 아닌 매춘으로 취급받았고 일부 정치인과 대중은 이를 악용한 사례를 알고 있었지만 새 법률 만들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이때 탐사 저널리즘의 선구자 월리엄 토마스 스테드 기자가 독특한 취재 방식으로 기사를 써서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안깁니다. 스테드는 당시 인기 잡지인 <Pall Mall>에 ‘현대 바빌론의 처녀 공물’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씁니다. 그는 13세 소녀의 처녀성을 사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 기사에 그 과정을 자세하게 기술합니다. 그는 엘리자 암스트롱이라는 소녀를 5파운드에 삽니다. 이 금액에는 처녀성 확인을 위한 건강 검진 비용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지금의 가치로는 한 40여만 원입니다. 스테드는 암스트롱을 릴리라는 가명으로 표기했고 아이를 사고 납치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써 내려갔습니다. 그는 그 과정에서 아이들이 자신의 상황을 적절하게 판단할 수 없으며 자신이 낯선 사람에게 팔려 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기술했습니다. 보통 이런 끔찍한 상황에 부닥친 아이는 남은 생애를 매춘업소에서 보내거나 거리의 부랑자나 범죄자로 남게 된다는 결말도 알려줍니다. 스테드가 쓴 당시 탐사 기사 ‘현대 바빌론의 처녀 공물’ 그의 기사는 영국 사회에 그야말로 엄청난 화두를 던집니다. 엄격한 청교도적인 개념에 젖어있던 많은 영국인들은 빅토리아 사회에 런던이나 리버풀 같은 거대 도시 빈민가에서 무슨 추악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랐던 겁니다. 스테드는 중산층과 상류 지도층 인사들에게 “커튼을 열고 하수구를 들여다보아라”라고 말합니다 기사가 게재된 후 전국적으로 정부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아동보호를 위한 법안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영국 의회는 만장일치로 성인 연령 변경에 관한 법률을 통과시켰습니다. 같은 해 1885년 성년 연령은 13세에서 16세로 상향 조정됐고 아동 성착취는 불법이 됐습니다. 스테드는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언론인이 됐지만 비극이 시작됐습니다. 시기 어린 동료들이 기사에 릴리로 표기된 소녀의 부모를 적극적으로 찾아댔고, 이내 엘리자 암스트롱의 어머니를 통해 스테드가 실제로 아동을 사는 과정을 거쳐 기사를 쓴 사실을 밝혀낸 거죠. 취재 대상이던 엘리자는 이후 구세군에게 인도되어 보살핌을 받고 평범한 삶을 살았지만 말이죠. 영국 사법부는 윌리엄 스테드를 아동 납치 혐의로 기소합니다. 취재를 위한 행동이었지만 실제로 아이를 매수한 것은 정당화할 수 없었습니다. 스테드와 관련자들은 모두 투옥되고 맙니다. 당시 런던 빈민가를 표현한 신문 삽화.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당시만 해도 영국에서 인신매매 사건의 형량은 상당히 관대했고 스테드는 3개월의 징역형을 받았고 그의 조수는 6개월을 받았습니다. 스테드는 감옥에서 보낸 시간을 “마치 휴가와 같다”고 의연하게 대처했습니다. 아동 인권에 새 역사를 만들어낸 스테드는 죽음의 순간도 역사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는 대서양을 항해하던 타이태닉호 승객의 한 명이었던 겁니다. 타이태닉호가 빙산과 충돌하자 그는 두려움 없이 갑판 위에 서서 여성과 어린이, 노인을 보트에 앉히는 것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증기선 살롱 내 의자에 앉아서 파이프를 피우고 신문을 읽으며 죽음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죽음까지도 여유롭고 초연한 모습이었습니다. ■자료제공: 유튜브 채널 <지식 아닌 지식> 지식 아닌 지식역사의 뒤안길 인물을 조명합니다. 매주 토,일 업로드합니다https://www.youtube.com/@yeswawa/vide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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