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총 368 건 검색)
- ‘고문기술자’에 의해 간첩 누명···법원 “이근안·국가는 7억 배상하라”
- 2024. 06. 29 15:17 사회|사회
- ... 1978년 간첩 혐의로 불법 체포됐다. 당시 수사에는 ‘고문 기술자’로 불린 경기도 경찰국 수사관 이근안씨가 참여했다. 이씨는 박씨를 고문해 ‘북한에 있는 삼촌과 연락해 이적행위를 했다’는 허위...
- 고문기술자이근안납북어부간첩
- 유튜버 모욕 혐의 이근 전 대위··· 벌금 500만원
- 2024. 06. 22 09:23 사회|사회
- 이근 전 대위. 유튜브 화면 갈무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유튜버들을 모욕한 글을 올린 이근(40) 전 해군 대위에게 벌금형이 선고됐다. 22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형사21단독 정재용 판사는 모욕,...
- ‘2심도 집행유예’ 이근 전 대위, 법원 “책임있는 자세” 주문에 “알겠습니다!”
- 2024. 06. 18 10:42 사회|사회|사회|인물
- ..., 이 전 대위와 검찰 측 항소 모두 기각 뺑소니와 우크라이나 참전 여권법 위반으로 2심 선고를 받은 이근 전 대위가 18일 서울중앙지법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러시아·우크라이나...
- 이근법원
- ‘모유 수유 전도사’ 이근 이대 명예교수 별세
- 2024. 05. 19 20:27 사회
- ... 차원, 권장 사업 펼쳐 아동권리 옹호의 일환으로 ‘모유 수유’의 중요성을 알려온 이근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지난 14일 오전 별세했다. 향년 81세. 19일 유족에 따르면 이 교수는 1942년 서울에서...
스포츠경향(총 404 건 검색)
- [스경X현장]다시 살아난 KCC 버튼, 29득점 20리바운드로 승리 견인···소노 ‘괴물 신인’ 이근준 16득점 대활약
- 2024. 12. 01 16:34 스포츠종합
- 부산 KCC 디욘테 버튼이 1일 고양소노아레나에서 열린 고양 소노와의 경기에서 드리블 돌파하고 있다. KBL 제공 베테랑 군단 부산 KCC가 젊은 피로 무장한 고양 소노를 꺾었다. 김태술 소노 감독의 데뷔 첫 승리는 또다시 미뤄졌다. KCC는 1일 고양소노아레나에서 열린 고양 소노와의 2024~2025 KCC 프로농구 경기에서 74-67로 이겼다. KCC 디온테 버튼이 29득점 20리바운드 3어시스트로 더블더블을 작성하며 직전 경기의 부진을 설욕했다. 최준용이 10득점 2리바운드 6어시스트 2블록, 전준범이 12득점으로 활약했다. 등에 담 증상이 있어 교체된 허웅은 15분 5초를 뛰며 무득점에 그쳤다. 송교창은 무릎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했다. 전창진 KCC 감독은 “힘든 경기였다”라며 “가용 인원이 자꾸 줄어서 걱정”이라고 마음껏 기뻐하지 못했다. 김태술 소노 감독은 “원하는 대로 팀플레이를 하며 슛을 쏘는 과정이 좋았다”고 말했다. 이날 소노 신인 이근준이 16득점 7리바운드로 화려한 데뷔전을 치렀지만 승리까지 가져오진 못했다. 김 감독은 이근준에 대해 “연습 때는 이렇게 잘하는 상태가 아니었다”라며 “빠른 속도로 성장할 거라는 희망이 보인다. 3번 포지션에서 충분한 경쟁력이 있다”라고 평가했다. 최준용이 살아난 KCC는 외곽 공격과 속도전에서 활기를 찾았다. 그러나 소노에는 이근준이라는 복병이 있었다. 2024년 드래프트에서 선발된 ‘2005년생 고졸 신인’ 이근준이 경기 초반 답답했던 소노의 공격 흐름을 뚫었다. 고양 소노 이근준이 1일 고양소노아레나에서 열린 부산 KCC와의 경기에서 레이업 슛을 시도하고 있다. KBL 제공 김태술 소노 감독은 1쿼터 좀처럼 공격이 풀리지 않자 과감하게 이근준을 투입했다. 이근준은 코너 3점 슛으로 데뷔 첫 득점을 신고했다. 이근준은 골 밑에서 상대 에이스 최준용을 상대로 거침없는 수비를 선보였다. 이어진 공격 기회에서 이근준이 버튼의 수비를 뚫고 두 번째 3점 슛까지 터트렸다. 객석에서는 이근준의 이름을 연호하는 팬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2쿼터 전준범이 연속 3점포를 터트리며 KCC가 기세를 끌어올렸다. 소노가 번번이 슛에 실패하며 고전하는 사이 버튼이 수비를 뚫고 골 밑 득점해 점수 차이를 두 자릿수대로 벌렸다. 이재도의 스틸 이후 이근준이 레이업 득점으로 마무리해 조금씩 추격했다. KCC가 38-29로 앞선 채 전반전이 끝났다. 후반전 소노가 외곽에서 감을 찾으며 분위기를 탔다. 3쿼터 시작 직후 끈질기게 공을 사수해 공격권을 지켜낸 이근준은 직후 수비를 뚫고 골 밑으로 돌파해 득점으로 마무리했다. 최승욱과 이근준의 연속 3점 슛이 터지며 소노가 바짝 추격했다. 번즈의 골 밑 득점에 힘입어 소노가 52-49 리드를 만들었다. 승부처인 4쿼터는 KCC의 것이었다. 최준용이 해결사로 나서 외곽포를 터트린 뒤 자유투 찬스까지 얻어내며 다시 앞서갔다. 이재도와 이근준이 마지막까지 외곽에서 분전했으나 점수 차는 다시 좁혀지지 않았다. 결과는 KCC의 74-67 승리였다.
- 스경X현장
- 2024 KBL 드래프트는 고교생 천하, 박정웅·이근준 1~2순위로 지명
- 2024. 11. 15 16:36 스포츠종합
- 안양 정관장 김상식 감독(왼쪽)이 15일 고양소노아레나에서 열린 2024 KBL 국내 신인선수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지명한 박정웅과 기념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KBL 제공 2024년 프로농구 신인 드래프트는 고교생 천하였다. 드래프트 사상 1~2순위가 모두 고교생으로 선정되는 이변이 일어났다. 안양 정관장은 15일 고양소노아레나에서 열린 2024 KBL 국내 신인선수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홍대부고 졸업 예정인 포워드 박정웅(18)을 지명했다. 고교생이 전체 1순위로 지명받은 것은 제물포고 출신으로 2020년 1순위로 뽑힌 차민석(삼성)에 이어 두 번째다. 박정웅은 고교생 강세가 예상됐던 올해 드래프트에서도 최고의 재목으로 불렸던 선수다. 탁월한 운동 능력을 자랑하는 그는 패스와 수비 능력까지 겸비해 가드와 포워드를 모두 소화할 수 있는 멀티 플레이어로 평가받았다. 박정웅은 홍대부고 주장을 맡아 협회장기 우승과 연맹회장기 준우승 등의 성과를 냈다. 또 18세 이하 남자농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돼 밝은 미래를 보장받았다. 박정웅은 “지명해주신 김상식 감독님과 정관장 구단에 감사드린다. 1순위 지명은 예상하지 못했다. 고졸 신화를 써보겠다”고 다짐했다. 김승기 소노 감독이 15일 고양소노아레나에서 열린 2024 KBL 국내 신인선수 드래프트에서 전체 2순위로 지명한 이근준과 기념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KBL 제공 이날 드래프트 현장을 더욱 뜨겁게 달군 것은 2순위 역시 고교생이었다는 사실이다. 고양 소노가 경복고 3학년 포워드 이근준(19)을 지명했다. KBL이 드래프트를 시작한 1998년 이래 1~2순위가 모두 고교생으로 선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승기 소노 감독은 슈팅과 수비 능력을 겸비한 선수를 선발하겠다는 의사를 여러 차례 표현했는데, 이근준이 걸맞는 재목이었다. 이근준은 올해 연맹회장기와 종별선수권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돼 즉시 전력감으로 평가받았다. 이근준은 “(김승기) 감독님이 원하는 농구에 빨리 적응하고 노력해 필요한 선수가 되고 싶다”고 다짐했다. 연세대 3학년 센터인 김보배(21)가 3순위로 원주 DB 지명을 받으며 형님들의 체면을 지켰다. DB는 서울 삼성에 가드 박승재를 내주는 대신 1라운드 3순위 지명권을 얻은 바 있다. 이번 드래프트 최장신(202㎝)인 김보배는 큰 키 뿐만 아니라 빠른 발과 공을 다루는 능력까지 갖췄다는 평가를 받았다. 영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귀화 선수 손준(24·명지대)도 4순위로 대구 한국가스공사의 유니폼을 입었다. 준 해리건이라는 이름으로 익숙한 그는 2022년 명지대에 입학하면서 준수한 골밑 자원으로 주목받았다. 손준은 드래프트에 앞서 진행된 컴바인에서 맥스 버티컬 리치(353.55㎝)와 맥스 버티컬 점프(96.2㎝)에서 1위에 뽑혔다. 손준은 “어머니 아버지 감사합니다. 효도하겠습니다. 가족들이 미국으로 이주했지만 농구를 위해 귀화를 선택했다. 매 경기 발전하는 선수가 되고 싶다. 한국어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드래프트에선 일반인 참가자로 드래프트에 참가한 정성조(24)가 3라운드에서 소노의 지명을 받아 프로 선수로 꿈을 이어가게 됐다. 엘리트 농구 경험이 없는 그는 동호인 대회와 3대3 농구 무대를 휩쓸면서 이름을 알렸다.
- [단독] 이근, 가세연 김세의 고발···“쯔양 2차가해”
- 2024. 08. 13 16:18 연예
- 대위 출신 유튜버 이근(왼쪽)이 김세의 가로세로연구소 대표를 고발 조치한 것으로 확인됐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대위 출신 유튜버 이근이 김세의 가로세로연구소(가세연) 대표를 고발 조치했다. 이근은 최근 수원지검에 김세의 대표에 대해 정보통신망이용촉진및정보보호등에관한법률 위반과 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 위반 혐의로 처벌해달라는 고발장을 제출한 것으로 13일 확인됐다. 고발장에 따르면 김세의 대표는 자신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가세연에 총 10회(커뮤니티 게시글 게재 6회, 동영상 개재 4회)에 걸쳐 유튜버 쯔양(박정원)의 인적사항과 사진 등을 피해자(쯔양) 동의를 받지 않고 공개했다. 이외에도 김세의 대표는 불상의 날짜, 불상의 장소에서 구제역(이준희)의 휴대전화 기기에 있는 음성녹음파일 등 정보통신망에 의해 처리·보관 또는 전송되는 타인의 정보 내지 비밀을 제공 받았다. 이로써 1만7000개 음성녹음파일을 확보해 약 6회에 걸쳐 타인의 비밀을 제3자인 불특정 다수에게 누설했다. 앞서 김세의 대표는 구제역의 휴대전화 안에 있던 녹취를 확보한 뒤 구제역과 유튜버 주작감별사(전국진)가 쯔양을 공갈한 정황을 유튜브 채널에서 방송했다. 유튜버 카라큘라(이세욱)는 이들의 공갈 혐의를 방조하고 독려까지 한 내용의 녹취도 포함됐다. 이들 모두 관련 혐의로 구속수사를 받는 중이다. 쯔양은 총 세 차례의 해명 방송에서 전 남자친구이자 소속사 대표인 이모씨의 강요와 폭행 등으로 인해 유흥업소에서 일해야 했다며 관련 자료를 공개했다. 하지만 이에 반대되는 증언이 이어지면서 쯔양과 가세연간의 공방전이 오간 상태다. 쯔양 측은 김세의 대표를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고소했다. 수원지검으로부터 사건을 이송받은 경기남부경찰청은 이와관련한 수사를 이어갈 예정이다. 이와 관련해 이근은 “전 남자친구에게 성폭력 피해 등을 입은 피해자의 인적사항을 공개해 2차 가해를 하고, 합법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녹취파일을 불상의 자에게 제공 받아 이를 공개하는 행위는 명백히 범죄행위”라며 “지금도 김세의 대표는 계속해서 피해자들을 괴롭히고 있다. 수사기관에서 빠른 구속 수사를 해주시기를 간청드린다”고 했다.
- 단독
- ‘K리그·J리그 타깃’ 골키퍼 이근형, 보인고 8강 견인한 승부차기 ‘눈부신 선방’
- 2024. 07. 27 17:00 축구
- 서울 보인고 이근형이 26일 충북 제천축구센터 제3구장에서 열린 57회 대통령금배 전국고등학교 축구대회 16강 경북관광비즈니스고등학교와 서울 보인고등학교의 경기에서 승부차기를 막아내고 있다. 2024.07.26. 조태형 기자 서울 보인고 이근형이 26일 충북 제천축구센터 제3구장에서 열린 57회 대통령금배 전국고등학교 축구대회 16강 경북관광비즈니스고등학교와 서울 보인고등학교의 경기에서 승부차기를 막아낸 뒤 기뻐하고 있다. 2024.07.26. 조태형 기자 대통령금배의 강자 서울 보인고가 골키퍼 이근형의 활약으로 고비를 넘었다. 보인고는 26일 충북 제천 제천축구센터에서 열린 제57회 대통령금배 16강에서 경북 관광비즈니스고와 정규시간에서 0-0으로 비긴 뒤 승부차기 끝에 승리했다. 이번 시즌 보인고에 두 차례 진 관광비즈니스고는 수비라인을 내려 보인고 공세에 맞섰다. 보인고는 경기 주도권을 잡고도 골문 앞으로 전달하는 마지막 패스와 슈팅에서 세밀하지 못했다. 관광비즈니스고 역시 날카로운 역습으로 맞섰으나 득점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전후반 80분간 승부를 내지 못한 두 팀간 승자는 이어진 승부차기에서 가려졌다. 보인고는 5명의 키커가 모두 성공하면서 관광비즈니스고에 5-4로 승리했다. 보인고 3학년 골키퍼 이근형이 네 번째 키커의 슈팅을 쳐내면서 팀에 승리를 안겼다. 이근형은 경기 뒤 “동료들이 모든 골을 다 넣어줬고, 나는 다 막으려고 했다. 노력한 만큼 하나 막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며 동료들에게 공을 돌렸다. 이근형은 이미 K리그와 일본 J리그 등 여러 구단에서 뜨거운 관심을 받는 선수다. 193㎝의 뛰어난 체격 조건에 뛰어난 순발력까지 갖췄다는 평가다. 이근형은 관광비즈니스고의 두 번째 승부차기도 방향을 잘 읽어 거의 막을 뻔하는 등 자신의 장기를 유감없이 뽐냈다. 이근형은 “내 스스로도 민첩성이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선방한 상황도)상대가 차는 순간까지 끝까지 보고 뛰려고 했고, 상대가 멈칫하면서 막을 있었다”고 승부차기 상황을 떠올렸다. 16강에서 다소 고전했지만 보인고는 이번 대회 4경기에서 무실점 경기를 하며 우승후보다운 안정감을 보여준다. 이근형의 역할이 컸다. 이근형은 “골을 막는 것은 골키퍼의 가장 큰 역할이니 기분이 좋다. 마지막까지 더 집중하겠다”고 말했다. 보인고는 지난해 골키퍼 권능(포항 스틸러스)의 활약을 앞세워 토너먼트에서 두 차례 승부차기를 승리한 뒤 준우승을 차지했는데, 올해는 이근형이라는 정상급 골키퍼를 앞세워 우승에 재도전한다. 토트넘(잉글랜드) 수문장 굴리엘모 비카리오를 롤모델로 꼽은 이근형은 “권능 선배는 항상 ‘남들 신경쓰지 말고, 골을 먹더라도 네 것을 해야 한다’고 조언한다”며 “비카리오처럼 팀에 헌신적인 선수, 팀에 도움을 주는 선수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서울 보인고 백가온과 경북관광비즈니스고 이화준이 26일 충북 제천축구센터 제3구장에서 열린 57회 대통령금배 전국고등학교 축구대회 16강 경북관광비즈니스고등학교와 서울 보인고등학교의 경기에서 공중볼 다툼하고 있다. 2024.07.26. 조태형 기자 심덕보 감독은 “대통령금배 같은 큰 대회에서는 골키퍼가 좋지 않다면 우승할 수 없다. 이근형은 골키퍼로서 좋은 자질을 갖춘 선수”라고 칭찬했다. 대통령금배 직전 대회인 6월 문화체육관광부장관기에서도 정상에 오른 학원축구의 강자 보인고는 대통령금배에서 특별히 강한 면보를 보였다. 역대로 세 차례 우승했는데, 지난 7번의 대회에서 빠짐없이 8강에 진입하며 우승 2회, 준우승 1회, 4강 진출 1회 등의 성적을 남겼다. 심 감독은 “올해만 관광비즈니스고와 세 번째 만남이라 쉽지 않은 경기였다. 골을 빨리 넣었다면 흐름을 가져올 수 있었을텐데 그게 안됐다. 하지만 전체적인 팀 흐름은 좋다”고 여유를 보였다. 보인고의 우승 경쟁에 있어 8강전은 또다른 고비가 될 것으로 보인다. 보인고와 함께 우승후보로 지목된 경기 평택진위FC U18과 4강을 다툰다. 심 감독은 “토너먼트니 매 경기 긴장을 풀지 않고 잘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주간경향(총 4 건 검색)
- [주목! 이 사람]네팔 의료봉사와 문화교류 힘쓰는 이근후 박사 “네팔은 고향 같은 마을입니다”(2019. 04. 29 11:04)
- 2019. 04. 29 11:04 사회
- 이근후 박사(84)는 이화여대 의과대학에 재직하던 1982년 네팔과 첫 인연을 맺었다. 한국 마칼루 학술원정대 소속 학술요원으로 처음 네팔을 방문했다. 그는 학술논문 제출과 등반이 가능한 몇 안되는 학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당시만 해도 네팔은 생소한 나라였다.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는 힌두교 국가였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선량한 품성을 공유하고 있었다. “네팔은 고향 같은 마을입니다. 문화의 원형질 같은 인상을 갖고 있어요. 언제 방문을 해도 나에게는 평온함을 안겨주는 환경입니다.” 네팔 방문은 이 박사의 삶을 바꿔놓았다. 1982년 마칼루 원정 당시 이 박사는 학술조사를 위해서 셀파 1명과 쿰부 지역을 트레킹했다. 쿰부 지역의 쿰중마을에는 에베레스트를 최초로 오른 에드문드 힐러리 경이 세운 학교와 병원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힐러리 경을 만났다. 힐러리 경과의 만남을 계기로 그는 의료봉사에 대한 뜻을 마음에 새겼다. 이후 1986년 네팔 간질환자가 복용할 수 있는 항경련제 공급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네팔 의료봉사 활동에 뛰어들었다. “당시 유학생 중에 네팔에서 온 사쿠라 라즈반다리라는 여학생이 있었어요. 1984년 라즈반다리가 졸업 후 네팔로 귀국해 네팔 간질협회라는 NGO를 만들었어요. 거기서 제게도 의료봉사를 해달라고 요청을 하더군요. 그렇게 시작했어요.” 도움의 손길이 이어졌다. 한국 간질협회도 적극 나섰다. 1989년에는 네팔의 오지인 돌카 지역에 자선병원을 세웠다. 10명이 입원할 수 있는 3층 규모 병원이었는데 수도 카트만두를 제외하고 오지에 건립된 병원 중에서는 가장 큰 규모였다. 병원이 생기고 이화여대가 주축이 된 네팔 이화 의료봉사단을 출범했다. 이 박사도 2001년 정년퇴임 때까지 꼬박 의료봉사를 했다. “예전에는 봉사라는 행위가 일방적으로 상대를 돕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니더군요. 어느 순간 서로 나누는 행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나눔이 삶에서 참 중요하다는 것도 알게 됐지요.” 정년퇴임 이후에 정기적인 의료봉사를 할 수 없게 된 이 박사는 네팔과 한국 간 문화교류 활동을 돕기로 했다. 2004년부터 지금껏 이어오고 있는 네팔·한국 작가 교환 전시가 그가 진행하는 대표적인 교류행사다. 한국 작가가 네팔에서 전시를 하고 나면 같은 해 네팔 작가를 초청해 한국에서 전시를 하는 식이다. 올해 주제는 민화다. 향원재에서 네팔 민화 전시를 하고 있다. 종족 고유의 전통적인 표현이 작품에 녹아 들어가 있어 네팔을 ‘날것’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네팔과의 인연은 이어진다. 요즘 그는 네팔 우표에 관한 책을 집필 중이다. 개인 수필도 쓰고 있다. 청탁 원고를 쓰고 봉사활동 때 맺은 인연들을 만나러 해외로 다니다 보면 늘 시간이 부족하다. 아무리 바빠도 그는 ‘죽을 때까지 재밌게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미련을 남기고 싶지 않아요. 봉사활동도 하고 문화교류도 힘 닿을 때까지 하려고 합니다. 물론 나이가 나이인 만큼 틈틈이 내려놓는 연습은 하고 있지요.”
- 주목! 이 사람
- 월드컵 나가려면 이근호처럼 뛰어라(2017. 08. 21 17:17)
- 2017. 08. 21 17:17 스포츠
- 신태용 대표팀 감독은 취임 후 “90분 동안 목숨을 바치듯 뛰는 선수를 원한다. 대표팀에 대한 사명감과 희생정신을 보여줄 선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근호 같은 선수다. “잉글랜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뛴 박지성도 대표팀에선 동료들을 위해 헌신했다. 그런데 요즘 후배들은 대표팀에서 자기만 돋보이려 애쓰는 것 같다. 이근호처럼 최선을 다해서 뛰는 선수가 10명만 있으면 월드컵에 충분히 나갈 수 있다. 후배들이 태극마크의 무게를 알았으면 한다.” 프로축구 전북 현대의 베테랑 공격수 이동국(38)은 지난달 기자와 만나 이렇게 말했다. 대표팀 선수들이 이근호(32·강원FC)처럼 목숨 걸고 뛰면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 나갈 수 있다는 의미였다. A매치 103경기에서 33골을 터트린 이동국의 진심이 담긴 조언이었다. 축구대표팀은 한국축구의 운명이 걸린 두 경기를 앞두고 있다. 축구대표팀은 31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이란과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A조 9차전을 치르고, 다음달 5일 우즈베키스탄과 원정 10차전을 갖는다. A조 2위 한국(4승1무3패·승점13)은 3위 우즈베키스탄에 승점 1점 차로 쫓기고 있다. 조 2위까지 주어지는 본선행 티켓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신태용 축구대표팀 감독은 지난 14일 26명의 명단을 발표하며 이동국과 함께 이근호를 뽑았다. 신 감독은 “노장선수라고 해서 실력이 없는데 뽑진 않았다. 그동안 이근호가 어느 후배들보다 열심히 뛰는 모습을 봐왔다. 정신적으로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근호가 6월 14일 카타르 도하 자심 빈 하마드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8차전 카타르와의 경기에서 상대 진영을 파고들고 있다. / 대한축구협회 제공 이동국과 함께 후배들의 귀감 기대 이근호는 ‘2군 선수’였다. 부평고를 졸업하고 2004년 K리그 인천 유나이티드에 입단했지만 설 자리가 없었다. 2군을 전전하며 ‘눈물 젖은 빵’을 먹었다. 절치부심한 이근호는 2006년 K리그 2군리그 우승을 이끌며 MVP에 뽑혔다. 2007년 대구로 이적해 골 폭풍을 몰아쳤고, 여세를 몰아 대표팀까지 뽑히며 ‘2군 신화’를 썼다. 이근호는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3골을 터트리며 본선행을 이끌었다. 허정무 당시 대표팀 감독의 ‘황태자’라 불렸다. 하지만 유럽 진출 실패와 컨디션 난조로 23명 엔트리에서 탈락했다. 남아공 월드컵 최종 전지훈련지였던 오스트리아까지 동행했지만, 대회 개막을 불과 보름 앞두고 쓸쓸하게 귀국했다. 대표팀 트레이닝복을 입고 돌아오는 게 너무 창피해 면세점에서 사복을 급히 구입해 갈아입고 취재진을 피해 공항을 빠져나갔다. 이근호는 무너지지 않고 다시 일어섰다. 2012년 울산 현대 유니폼을 입고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AFC 올해의 선수상도 받았다. 2012년 말 입대한 상무에서는 레슬링·사이클 등 비인기 종목 선수들을 보며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비인기 종목이라 각광받는 순간은 아시안게임과 올림픽밖에 없는데, 새벽에 체육관에 나가면 늘 그들이 먼저 훈련을 하고 있었다. 나태해지지 말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이근호는 2013년 K리그 챌린지(2부 리그)에서 득점왕(15골)을 차지하며 팀을 1부 리그로 올려놓았다. 이근호는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을 앞두고 왼쪽 무릎을 다쳤다. 수술을 피하며 가까스로 재활에 성공했지만, ‘이근호가 또 탈락하는 거 아니냐’는 루머가 돌았다. 홍명보 당시 대표팀 감독은 월드컵 최종 엔트리 발표 기자회견에서 23명 중 21번째로 이근호의 이름을 불렀다. 당시 이근호는 “월드컵 출전을 위해 노력했을 많은 선수들을 대신해 책임감을 갖고 임하겠다”고 말했다. 오스트리아의 아픈 기억을 묻자 “지금은 추억이다. 지금은 추억이다”라고 같은 말을 두 번이나 반복했다. 이근호는 지인들에게 “월드컵 한 골이면 드라마가 완성된다”고 말했다. 이근호는 2014년 6월 18일 러시아와 브라질 월드컵 조별리그 1차전에서 후반 23분 골을 터트렸다. 기습적인 오른발슛이 러시아 골키퍼 아킨페예프의 손에 맞고 들어갔다. 당시 군팀 상주 상무 소속 ‘육군 병장’이었던 이근호가 한방을 터트렸다. 당시 이근호가 받은 병장 1호봉 월급(14만9000원)을 연봉으로 환산하면 178만8000원. 브라질 월드컵에 참가한 736명 중 무적(無籍) 선수를 제외하고 최저 연봉이었다. 2014년 9월 상주에서 군복무를 마친 이근호는 카타르 프로축구 엘 자이시로 이적했다. 3년 계약에 연봉 300만 달러(약 32억5000만원)를 받았다. 육군 병장 신분으로 월급 14만9000원을 받던 이근호는 몸값이 1700배 뛰었다. ‘축구 신데렐라’의 스토리였다. 이근호는 힘들었던 시절을 잊지 않고 꾸준히 기부에 앞장서고 있다. 지금까지 기부한 액수는 수억원이다. 강한 근성과 헌신적인 움직임 ‘아시아 호랑이’로 불렸던 한국축구는 요즘 ‘종이 호랑이’ 신세다. 축구대표팀은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약체 중국·카타르한테 졌다. 졸전을 거듭하던 울리 슈틸리케 감독의 경질 타이밍을 놓쳐 벌어진 참사다. 선수들의 정신력도 문제다. 익명을 요청한 한 국가대표 선수의 에이전트는 “중국 프로팀 소속 선수가 대표팀 단체 카톡방에서 연봉을 자랑하고 다른 선수들은 부러워하는 게 현 상황”이라고 귀띔했다. 슈틸리케 감독 시절 몇몇 선수들은 숙소에서 카드도 쳤다는 후문이다. 지난 12일 임명된 김남일 대표팀 코치는 “대표선수들에게 간절함이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마음 같아서는 ‘빠따’라도 치고 싶은데, 시대가 시대인 만큼 그렇게 해서는 안될 것 같다”고 에둘러 말하기도 했다. 많은 축구팬들은 대표팀이 비록 패하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싶어한다. 한국축구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때 1무2패에 그쳤다. 하지만 벨기에와 3차전(1-1무)에서 머리에 피가 나도 붕대를 묶고 뛴 이임생의 투혼에 팬들의 마음이 누그러졌다. 축구대표팀은 지난 6월 14일 카타르와 월드컵 최종예선 8차전에서 2-3으로 졌는데, 당시 거의 유일하게 욕을 안 먹은 선수가 이근호였다. 팔부상을 당한 손흥민(25·토트넘)을 대신해 전반 33분 교체출전한 이근호는 정말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이근호의 발에 흰색 페인트를 바르면 그라운드가 온통 흰색으로 변할 것’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강한 승부근성과 헌신적인 움직임을 선보였다. 신태용 대표팀 감독은 취임 후 “90분 동안 목숨을 바치듯 뛰는 선수를 원한다. 대표팀에 대한 사명감과 희생정신을 보여줄 선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근호 같은 선수다. “이근호처럼 최선을 다해서 뛰는 선수가 10명만 있으면 월드컵에 충분히 나갈 수 있다”는 이동국의 말을 이근호에게 전했다. 이근호는 이렇게 답했다. “이동국 선수가 그렇게 말해줘서 감사합니다. 제가 팀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많이 뛰어서 수비수들을 괴롭히는 겁니다.” 이근호의 별명은 ‘태양의 아들’이다. 팬들이 2007년 대구FC 시절 대구 마스코트가 태양인 점에 착안해 붙여줬다. 이근호는 일본 J리그 주빌로 이와타에서 뛸 때도 ‘SON OF SUN’이라 불렸다. 태양처럼 뜨거운 남자 이근호는 한국축구를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본선에 올려놓겠다는 생각뿐이다.
- [사회]고문기술자 이근안의 회개?(2012. 01. 10 17:14)
- 2012. 01. 10 17:14 사회
- ㆍ이근안 목사 최근까지 자신의 ‘고문전력’ 신앙간증 형태로 강연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타계로 주목을 받은 이근안 목사(74)가 불과 몇 개월 전까지 교회를 돌며 신앙 간증의 형태로 자신의 ‘고문전력’을 강연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2011년 6월 18일 저녁 7시쯤 이 목사는 서울 관악구의 한 교회에서 간증자로 나섰다고 했다. 당시 이 목사는 ‘간첩 잡는 킬러’로서의 활약상,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고문사건의 ‘진실’ 등을 이야기했다. 이 자리에서 이 목사는 “공소시효를 1년 남기고 성경 말씀에 따라 자수하게 됐다. 성경 말씀을 통해 모든 것을 용서하고 화해하는 마음을 가지게 됐다”는 말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집회를 조직한 한 관계자는 “이 목사가 김 고문에게 공갈만 했지 고문은 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고 전했다. “용서·자기 회개 없이 신앙으로 포장” 지난 2006년 만기출소한 이근안씨가 경기도 여주교도소를 나서며 기자들에게 소감을 밝히고 있다. | 연합뉴스 이 집회를 주관한 단체는 두란노아버지학교다. 이는 지난해 사망한 하용조 온누리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목사가 설립한 단체로, 이 목사와 인연이 깊다. 이 목사는 여주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던 2003년부터 교도소 안에서 열린 아버지학교 행사에 참가했고, 아버지학교 여주교도소 1기생이 됐다. 목사 안수를 받기 직전인 2008년 9월, 이 목사는 충남 당진의 한 교회에서 간증 집회를 했다. 이 집회도 역시 두란노아버지학교에서 주관했다. 40분가량 진행된 간증의 형식은 지난해 6월의 간증 형식과 거의 흡사했다. 이날 간증에서 이 목사는 “내가 김근태를 조사한 것도, 고문한 것도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이 목사는 “그 당시 묵비권을 펴는 김근태씨한테 내가 그랬다. 난 인내심이 약하다. 하루 이상 기다릴 수가 없다. 그리고 하루를 기다려도 소용이 없어서 강제신문으로 단 두 시간 만에 조직을 캐냈다”고 말했다. 이 목사는 이 대목에서 조직도로 보이는 종이를 교인들 앞에서 흔들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이 목사는 전기고문의 ‘실체’도 언급했다. “내가 했다는 전기고문은 220볼트 전기를 쓴 것이 아니라 손가락만한 AA 배터리로 한 것이다. 그걸 혓바닥에 넣었는데 꽤 짧더라. 몇 시간 동안 너 전기로 지지겠다, 공갈을 친 뒤 바닥에 소금물을 뿌리고 공갈을 했더니 ‘아이구야, 조직도 드리겠소’, 이래서 조직을 밝혀냈다.” 이근안 목사가 참여한 여주교도소 아버지학교를 진행했던 두란노아버지학교의 이모 장로는 “이근안씨도 많은 삶의 변화가 있던 분이라 다른 분들처럼 2008년에 간증의 기회를 드린 것뿐”이라고 말했다. 이 장로는 “하지만 이후 여러 교회나 단체에서 초대하는 모습을 보며 썩 좋은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2008년 이후로는 아버지학교에서 초대를 자제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에 연락을 나눈 적 있느냐는 질문에 이 장로는 잠시 망설이다가 “최근에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연세도 70대 중반이신데 여생을 편안하게 사실 수 있게 도와야 하지 않겠느냐”고 답했다. 개신교 개혁론자인 김민수 기독교장로회총회교육원 출판부장은 “이근안이 성경 말씀을 통해 모든 것을 용서했다는 대목에서 영화 이 떠올랐다. 피해자가 용서를 해준 것도 아니고 자기 회개도 없으면서 신앙적으로 포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부장은 “고문기술자나 깡패가 목사가 돼서 신앙 간증을 한다고 하면 상품성이 좋다. 일부 그릇된 교회들이 이를 이용해 장사를 한다”고 말했다. 김근태 고문 사망에 대한 입장을 듣기 위해 두란노아버지학교 측으로부터 확보한 이 목사의 연락처로 수 차례 통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이 목사는 받지 않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
- [나의 단골 맛집]이근배 시인협회장의 서울 운니동 '경남'(2004. 02. 05)
- 2004. 02. 05 스포츠
- 한국시인협회장인 이근배 시인. 그는 '촌것'이다. 그는 1940년 충남 당진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늘 자기 자신을 '촌것'이라고 말하고 다닌다. 그와 만나 얘기를 하다보면 '아, 내가 정말 확실한 촌것을 만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의 말에는 구수한 숭늉 냄새가 난다. 말하는 폼새도 시골 촌부의 인정미가 넘쳐난다. 하지만 그는 '촌것'이 아니다. 말의 유창함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시인 중에서 말 잘하는 사람을 꼽으라면 많은 문인이 주저없이 이근배 시인이라고 말할 정도다. 그는 말문이 터지면 1시간도 좋고 2시간도 좋다. 시간에 구애받 지 않고 끝없이 얘기한다. 오랜 시간 같은 주제로 얘기를 하다보면 재미가 반감될 만도 한데 그의 말은 끊임없이 웃음을 준다. '촌것'의 구수한 매력과 시인의 '지성'이 합쳐졌으니 듣는 사람의 혼을 빼놓기 십상인 것이다. 음식을 대하는 태도도 그렇다. 음식점에 가면 그냥 먹는 법이 없다. 김치는 어떤 것이 맛있고, 된장은 어떻게 만들어야 맛있고.... 하나하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얘깃거리를 풀어놓는다. 희한한 점은 그렇게 많은 말을 하면서도 듣는 사람보다 밥을 더 많이, 더 빨리 먹는다. "내 뱃속에 시골거지가 들어앉아서"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는 외국에 나갈 때 반드시 김치를 비닐에 포장해서 가지고 간다고 한다. '시골거지' 때문이라는 것이 이유다. 그가 외국으로 가져간 김치는 그 나라에 도착하자마자 먹는 게 아니다. 김치가 푹 익어 비닐봉지가 터지기 직전에 개봉한다. 한 번은 그와 동행했던 소설가 박완서씨가 "냄새만 폴폴 풍기는 그 김치 언제 먹을 수 있냐"며 항의 아닌 항의를 하다가 "개봉하자마자 제일 먼저 달려들어 허겁지겁 먹었다"고 행동을 곁들여 그림 그리듯 설명한다. 그는 음식 먹을 때 단품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김치찌개-된장찌개-비지찌개 등 찌개류를 즐기지만 이들 음식을 어느 한 가지만 먹는 것은 성에 차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들 음식을 한꺼번에 '짬뽕'으로 먹어야 직성이 풀린단다. 그런 음식이 뭐냐고 물으니 '시골밥상'이란다. 시골밥상에는 된장도 나오고 비지도 나오고 두부도 나온다. 국도 먹을 수 있고 각종 나물도 먹을 수 있다. 생선과 보쌈까지 먹는다. 어류-육류-채소류를 다 먹을 수 있는데 이보다 좋은 음식상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런 그가 소개한 음식점은 서울 운니동에 있는 '경남'이라는 집이다. 한정식 집인데 메뉴에 '시골밥상'이라고 돼 있다. 음식이 나오는데 각종 젓갈은 물론 오이소박이-동치미-파김치-마늘쫑-게장 등 풍성함 그 자체이다. 그가 젖 은 다시마와 함께 놓여 있는 굴을 보더니 옛날 얘기를 풀어놓는다. 그는 어릴 때 동네에서 알아주는 부잣집 외동아들로 자랐다. 집이 넓어 굴장사 아주머니들이 자주 들러서 쉬어가곤 했단다. 이 아주머니들이 방으로 들어가면 이 시인은 슬그머니 밖으로 나와 표주박에 굴을 한 웅큼 떠서 '후루룩' 마시곤 했다. 그리고는 방으로 들어서선 눈치 한 번 보고 다시 나와 다른 아주머니 굴을 한 바가지 또 떠서 마셨다. 자신이 '너무 착해서' 한 사람 것만 훔쳐먹을 수 없었다는 것이 그의 변명이다. 그러면서 훔쳐먹은 굴이 목구멍을 지나 식도를 거쳐 위로 들어가는, 마치 소주 넘어가듯 쏴한 느낌에 오르가슴을 느꼈다고 말한다. 듣는 사람이 웃지 않을 수 없다. 굴맛에서 오르가슴을 찾다니. 더욱 재미있는 것은 굴을 입에 넣음과 동시에 굴 껍질은 오른쪽 입 끝으로 빠져나오고 알맹이만 넘어 간다며 시범을 보인다. 그 노하우는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과학'이라고 자랑한다. 누구든 배꼽을 잡지 않을 수 없다. 그가 굴 먹는 모습을 자랑삼아 얘기하는 이유는 당시에는 굴이라는 음식을 손쉽게 먹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문단에서 부잣집 딸로 소문났던 신달자 시인조차 생선 한 점 제대로 먹지 못하던 시절이다. 신달자 시인은 아버지가 목재소를 경영해서 돈을 장롱에 쌓아 두었던 부잣집 딸이었지만 생태찌개를 하는데 살이 퍼져 살을 못먹을까봐 생태를 토막쳐서 짚으로 묶어 끓였다고 한다. 고이 간직된 살은 아버지가 먹고 신 시인에게는 국물만 돌아왔다고 회고할 정도의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에 그토록 낭만적으로 굴을 훔쳐먹을 수 있었으니 그가 침을 튀며 자랑할 만한 일화이기는 하다. 찾아가는 길: 종로2가역에서 내려 허리우드극장을 지나 옛 덕성여대 자리인 운현궁을 지나면 운현궁을 끼고 작은 골목이 나온다. 이 골목으로 약 40m 정도 지나면 '경남'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채소는 시골 친척집서 재배 서울 운현궁 뒤편에 자리한 한정식집 '경남'은 2001년 10월 문을 열었다. 하지만 이 집 주인 백신희씨(56)는 음식장사 12년 된 베테랑이다. 경남 바로 앞에 '강호'라는 한정식집이 있는데 이 집은 백씨의 큰언니가 하는 집이다. 백씨는 이 집에서 줄곧 음식에 관한 노하우를 익혔다. 남편은 청과물시장에서 28년간 사업을 했다. 사업에 실패하면서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찾다보니 음식점이었다. 더군다나 부인인 백씨가 음식점 노하우가 있으니 모든 역량을 집중하면 성공할 수 있을 듯싶었단다. 청과물시장에서 사업을 한 남편은 음식 기초재료를 고르는 데는 누구보다 탁월한 능력을 지닐 수밖에 없다. 더구나 모든 재료는 시골 친척집에서 직접 재배해 공급하도록 했다. 재료가 좋으니 음식맛이 좋은 것은 당연하다. 주로 유명인사들이 자주 찾는다. 정치인-문화인이 단골이다. 모두 70명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것도 이 집의 특징이다. 점심메뉴는 된장-게장-비지-김치찌개가 있고 가격은 각 5,000원이다. 이근배 한국시인협회장이 먹은 시골밥상은 정식 명칭이 '시골상차림'인데 값은 10,000원이다. 이외에 경남 정식 A코스와 B코스가 20,000원과 25,000원이다. 전화는 (02)745-9191
레이디경향(총 3 건 검색)
- 그는 반성하고 있는가, 변명하고 있는가…고문기술자 이근안의 2012
- 2013. 01. 07 15:56 화제
- 지난 12월 14일 서울 성동구의 한 음식점에서 이근안 전 경감이 자서전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고백」의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영화 ‘남영동 1985’가 아직도 극장에서 상영중인 시점이라 그의 말한마디 한마디에 이목이 집중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해 11월 22일 개봉한 영화 ‘남영동 1985’는 군부 독재가 기승을 부리던 1985년 9월 4일 민주화운동가 김종태가 경찰에 연행돼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간 뒤 벌어진 잔혹한 22일을 그려낸 영화다. 극중 김종태는 공안 당국으로부터 갖은 고문을 받게 되고 여기서 ‘장의사’라 불리는 고문기술자 이두한이 등장한다.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이라 해도 김종태에게서 고(故) 김근태 민주당 전 상임고문을, 이두한에게서 이근안을 떠올리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는 고문 과정을 정면으로 다뤘다. 김종태 역을 맡은 주연배우 박원상은 물고문, 전기고문, 고춧가루고문 등을 받는 연기를 하며 실제가 아닐까 싶을 정도의 처절한 고통을 표현해냈다. 영화를 본 뒤 큰 충격을 호소하는 관객이 있는가 하면, 차마 영화를 다 보지 못한 채 극장을 나섰다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본 또 한 명의 관객이 있었다. 말로는 회개, 책 속에서는… 백발에 다부진 체격을 가진 70대 남성이 1.5V 소형 건전지를 오른손으로 들어보였다. “이 소형 건전지로 전기고문이 이뤄졌습니다.” 그 남성은 유신과 군사독재 시절 고문기술자로 악명을 날린 이근안(74) 전 경감이다. 자신의 자서전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고백」의 출판기념회에서 그는 고문의 사실적인 묘사로 화제가 됐던 영화 ‘남영동 1985’의 고문 장면에 대해 언급하며 “이는 사실과 다르며 과장됐다”고 말했다. “(영화에 나온) 계기판과 손잡이가 딸린 기계는 처음 봤습니다. (고문 장면을 보며) 내가 저렇게 악질이었나 하는 마음에 울었어요. 그러나 젓가락으로 맞으나 몽둥이로 맞으나 맞은 건 맞은 거지요.” 그는 고 김근태 전 상임고문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큰 고문 없이 자백을 받아낼 방법을 궁리하다가 1.5V 건전지를 사용했다고 말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1985년 5월 당시 박처원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장은 경기도청에서 근무하는 이씨를 호출했다. 박 단장은 고문 없이 12일째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는 김 전 고문에게서 자백을 받아내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씨는 김 전 고문을 칠성판(원래는 시신을 올려놓는 장례용품이지만 피해자를 묶어놓은 뒤 물고문 등을 하는 용도로 사용된 나무판)에 묶었다. 그는 “너 같은 놈은 전기로 지져야 돼”라고 한참을 협박한 뒤 김 전 고문의 발에 소금물을 뿌리고 건전지를 갖다댔다. 결국 김 전 고문은 민청학련 계보도 등을 모두 자백했다고 이씨는 기억했다. 겁을 준 뒤 전기충격을 줬기 때문에 큰 고문 없이 자백을 받아낼 수 있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20년 뒤 이들은 죄수와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다시 만났다. 2005년 2월 여주 교도소에서 이씨는 김 전 고문에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이에 김 전 고문은 “그게 시대의 탓이지, 개인의 탓이었겠습니까”라고 답한 바 있다. 출판기념회에서 2011년 12월 김 전 고문의 사망 당시 문상을 가지 않은 데 대한 질문을 받자 그는 “(문상을 가서) 분란이 나면 오히려 괴로움을 드릴 수 있겠다 싶어 안 가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김 전 고문이 자신을 용서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그렇다고 답했다. “그렇지 않으면 (2005년 당시) 나를 안으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겠습니까?” 그는 자서전에서 자신의 인간적인 면을 강조하기도 했다. 1981년 전국민주노동자연맹(민노련)사건 관련자를 수사할 당시, 이씨는 옆방에서 나는 큰 소리를 들었다. 옆방에 가보니 “신사로 소문난 김 반장(경찰)이 화가 나 있었다”라면서 “나는 김 반장이 들고 있는 몽둥이를 빼앗아 형식적으로 한 대 때리고 이태복(전 보건복지가족부 장관)의 상처에 약을 발라줬다”라고 밝혔다. 1 지난 12월 14일 열린 자서전 출판기념회 현장에서 만난 이근안. 2 이근안이 자서전 작업을 했다는 가평군의 숙소. 이근안, 여전했다 그는 지난 2월 퇴직 경찰들의 모임인 대한민국재향경우회 전 관계자의 소개로 강남의 한 대형 교회 목사를 만났다. 이 교회 측은 경기도 가평군의 한 기도원 근처에 그가 머물 숙소를 내줬다. “교회 측에서 고맙게도 가평군의 한 기도원 근처에 숙소를 제공해줬어요. 특히 ‘빨갱이 간첩 몰아내 통일국가 이루자’라는 기도원 표어를 보고 정말 감탄했습니다.” 이근안은 이곳에서 쓴 글을 엮어 책으로 내고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출판기념회가 열린 음식점은 1백20석 규모였으나, 행사장에는 그의 지인 30여 명이 참석했다. 이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는 사죄라는 말보다는 회개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 “고문 행위 자체가 잘못이다”라고 밝히면서 “간첩이라도 쥐어박아선 안 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 고문 피해자들에게 찾아가 사과를 한 적은 없다.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예를 갖추진 못해도 종교적인 삶을 통해 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정말 과거 행위에 대해 회개하고 있을까? 자서전의 내용은 의구심을 품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는 책머리에 ‘공산당 잡는 일은 영원한 애국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라고 썼으며 ‘영화까지 상영하면서 매도하는 것을 바라보며 한 시대는 사상범으로 옥살이하고, 한 시대는 민주화 인사로 탈바꿈하며 민주화 보상금까지 받는 행운을 바라보면서 시대를 잘 만나야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라고 적기도 했다. 그는 말로는 회개를 언급했지만 책을 통해서는 고문 피해자였던 민주화 인사들을 공산당으로 매도했다. 피해자에 대한 사과가 자서전에 나타나 있지 않다는 취재진의 지적에 대해 “전반적으로 다 회개하는 것이지 한 건 한 건에 대해서 말하기는…”이라며 말끝을 흐리기도 했다. 이근안의 역사관은 과거와 다르지 않았다. “도피생활 11년, 담장 안에 갇혀 7년, 도합 18년 만에 세상에 나와보니, 온통 나라가 붉게 물들어 간첩이 제도권에 들어와 국록을 먹고(있다).”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희망버스’를 ‘대한민국 흔들기 2011년 좌파 10대 난동 사태’ 중 하나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았고, 인터넷 방송 ‘나꼼수’에 대해서는 ‘악랄하고 진화된 흑색선전’이라고 평했다. 또 4대강 사업 반대에 대해서는 ‘반대를 위한 반대’, 한미 FTA 반대 시위는 ‘반국가적인 태도’라고 주관을 밝히기도 했다. 이근안이 “‘남영동 1985’의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라고 피력한 기사가 언론에 보도된 이후 김 전 고문의 부인인 인재근 통합민주당 의원이 트위터를 통해 이근안에게 한마디를 남겼다. ‘하늘이 두렵지 않은가 봅니다. 진실은 감출 수 없습니다. 이제라도 진심으로 참회하고 용서를 구하기 바랍니다.’ 이근안은… 1970년 경찰에 입문해 1988년까지 대공 분야에서 일했다. 그는 고문을 통해 간첩을 잡은 공로로 4회의 특진과 옥조근정훈장 등 총 16차례 표창을 받았다. 대공 분야에서는 “이근안이 없으면 수사가 안 된다”라는 말까지 나돌았다. 1988년 경기경찰청 대공분실장을 끝으로 경찰을 그만둔 뒤 공개수배당했다. 민주화 인사를 고문한 혐의였다. 그는 10년 10개월을 서울 동대문구 자택에서 숨어 지내다 1988년 10월 자수했다. 7년간의 옥살이를 마치고 2006년 출소. 이후 2008년 10월 대한예수교장로회의 한 분파로부터 목사안수를 받았지만, 2011년 12월 그에게 고문당한 김근태 민주당 전 상임고문의 사망 이후 여론이 악화되면서 2012년 1월 목사직을 박탈당했다. <■글 / 곽희양 (경향신문 사회부 기자)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
- ‘유쾌한 두 남자’ 박수홍·이근철 외국인 앞에서도 기죽지 않는 비결
- 2009. 07. 06 연예
- 안 다녀본 학원이 없고 안 본 책이 없는데 영어 실력은 늘 제자리다. 어제 외운 영어 단어가 기억나지 않는다. 외국인 앞에만 서면 입 한 번 뻥긋하기 어렵다. 이런 고민을 안고 있는 사람에게 개그맨 박수홍과 영어 강사 이근철은 “더 이상 배우지 마라. 알고 있는 영어만 써도 충분하다”고 말한다.얼마 전 기자에게 한 외국인이 말을 걸어왔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단어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때마침 지나가던 사람이 유창한 회화로 외국인과 얘기했다. 다행이다 싶다가도 한편으로는 하고 싶은 말이 영어로 술술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고속도로 달리듯 시원하게 입이 뚫리려면 오랜 시간 투자해야 해요.” 박수홍은 요즘 영어 삼매경에 빠져 있다. 하루 한 가지씩만이라도 제대로 표현하면 언젠가는 영어 고수가 될 거란다. 그의 얘기를 들으니 “요즘 영어는 기본이고 중국어, 일어는 옵션”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거리에 즐비한 영어 간판을 보면 영어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 듯하다. 이대로 영어를 포기하면 자신만 손해다. “국내 체류 중인 외국인이 1백만 명이 넘는대요. 비싼 돈 들여 해외에 나가지 않고도 외국인을 쉽게 만날 수 있게 됐죠.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 거리낌 없이 얘기하고 친구가 되면 얼마나 좋겠어요. 의사소통 수단이 한국어냐 영어냐일 뿐인데, 글로벌시대니만큼 영어로 자신을 표현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인터뷰 도중 몇몇 영어 문장을 읊던 박수홍이 도움의 눈빛을 보내자 영어 강사 이근철이 군데군데 틀린 표현을 짚어줬다. 평소에는 형님, 아우님지만 영어를 배울 땐 스승과 제자.두 사람은 얼마 전 의기투합해 「10년 배운 영어 사용설명서」(중앙북스)를 펴냈다. 이근철은 “중학생 때부터 적어도 10년 이상 영어를 배웠다면 필요한 영어는 이미 다 알고 있다. 다만 써먹는 법을 모를 뿐”이라고 말한다. 이들의 영어책 출간 소식을 접한 사람들이라면 궁금할 것이다. 두 사람이 어떻게 뭉쳤는지, 방송 진행과 사업 등으로 바쁜 날을 보내고 있는 그들이 갑작스레 책을 쓴 계기가 무엇인지…. 이 둘의 공통점이라면 부드러운 진행과 적재적소의 유머로 사람을 유쾌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1990년대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끈 영어 강사 이근철은 현재 KBS 라디오 프로그램 ‘굿모닝 팝스’를 진행하고 있고, 개그맨에서 웨딩사업가, 요리사로 다양한 변신을 시도하고 있는 박수홍은 KBS 라디오 프로그램 ‘박수홍의 두근두근 11시’ 등 다수의 프로그램에 출연 중이다. 농담과 진담을 오가며 수다를 늘어놓던 두 사람은 “평소 어떻게 하면 쉽고 재미있게 영어 공부를 할 수 있을까 고민해왔다”고 입을 모았다. “저는 외국 한 번 나가본 적도 없고 영어회화 학원 한 번 다녀본 적도 없어요. 어렸을 때 외국인과 얘기하고 싶어서 영어에 관심을 갖게 됐고 만나면 무작정 말을 걸었죠. 15년 이상 영어 강사로 일하면서 학생들에게 ‘어렵다는 생각만 바꾸면 영어는 쉽고 재미있어진다’고 말하는데 그게 참 어려운 것 같아요. 언어란 누가 더 빨리 ‘따라쟁이’가 되느냐의 문제예요. 쉽고 많이 쓰이는 표현을 매일 반복해서 쓰면 누구나 ‘따라쟁이’가 될 수 있어요.”평소에는 형님과 아우, 영어 공부할 땐 스승과 제자 박수홍과 이근철은 7, 8년 전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처음 만났다. 마음이 잘 맞아 금세 친해졌고 3, 4년 전부터는 함께 자전거를 타고, 공연을 보러 다니고, 크리스마스나 불꽃축제 같은 기념일을 함께 보낼 정도로 돈독해졌다. 이근철이 “성격 좋고 배려심 깊은 수홍씨에게 많은점을 배운다”고 말하자, 박수홍은 “형님은 영어 스승이자 인생의 멘토”라고 응수했다. 그리고 장난스러운 얼굴로 “그렇다고 형님과 나를 이상야릇한 관계로 오해하진 말아달라”며 손사래를 친다. “얼마 전 형님과 자전거를 타던 중 부모님을 만났는데 아버지가 그러시더라고요. ‘수홍아, 네가 말하던 남자가 저 남자니?’ 하고…(웃음). 오래전부터 형님과 친분을 쌓아왔는데, 어느 날 보니 (김)영철이가 형님과 자주 어울리더라고요. 영어 실력이 향상된 건 물론이고 「뻔뻔한 영철영어」를 내고 강연하는 걸 보고 속으로 ‘어쭈, 이것 봐라? 그 자리는 원래 내 자리인데!’ 했어요.” 그는 “영철이가 낸 책보다 많은 부수를 찍어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다”며 짓궂게 웃었다. 처음 집필 얘기를 꺼낸 건 박수홍이었다. 이근철이 지난 2007년 ‘박수홍의 두근두근 11시’ 게스트로 출연, ‘영어로 스트레스를 풀자(이하 영스풀)’ 코너를 진행했는데, 당시 요리책을 출간한 박수홍이 “형님, 기회가 되면 또다시 저자가 되고 싶어요”라고 말한 것. 그 말을 잊고 있었던 박수홍과 달리 그 말을 기억한 이근철은 ‘영스풀’을 통해 박수홍이 영어회화가 점점 늘자 영어회화 책 집필을 제안했다. “수홍씨가 단어는 꽤 아는데 머릿속에서 문장을 만들어내는 걸 어려워하더라고요. 그때마다 ‘이런 방법으로 말하면 돼. 모두 네가 아는 단어야’ 하면서 한 번에 완성된 문장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단어 하나하나 연결해서 표현을 늘리는 방법을 알려줬죠. 그러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홍씨와 같은 어려움을 갖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근철은 “영어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그가 꼽은 박수홍의 가장 큰 장점은 센스. 문법, 관용표현 등 전문 지식은 다소 부족하지만 상황에 맞게 표현하는 방법이 늘었다고. “수홍씨는 유창하진 않지만 외국인을 만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해요. 곁에서 들어보니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지만 상대방이 즐거워하죠. ‘거침없이 들이댄다’는 게 딱 맞는 표현이에요. 그런데 영어 실력 편차가 심한 것 같아요. 남자와 있을 땐 말이 잘 안 나오던데 여자와 있으면 술술 나오더라고요. 특히 매력적인 분과 얘기하면 발음부터 달라지던걸요(웃음).” 박수홍은 “말이 통한다는 건 가치관이 통한다는 뜻이지 않느냐”며 얼굴을 붉혔다. “형님 같은 멘토에게 배우는 것도 좋지만 외국 이성친구를 만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크리스티나 아길레라가 곁에 있다면 몇 시간이고 얘기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웃음).” 그러자 이근철은 “이성친구와 관계가 깊어지면 눈빛만으로 대화가 통하므로 탐색 기간을 오래 갖는 게 중요하다”며 우려하기도 했다. 생활패턴에서 영어 찾고 스스럼없이 감정 표현해야 이 책은 일어나서 세수하고 아침식사하고 출근해 업무 진행하고 점심 먹은 뒤 친구와 약속을 잡고 동료들과 회식을 즐겼다가 집으로 돌아와 가족과 대화하고 TV 보다가 자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을 시간 순으로 나열했다. “문장을 외우기보다 상황을 먼저 떠올리는 게 좋아요. 이를테면 아침에 일어나니 얼굴이 부어 있고 머리카락에 비듬이 있고 이를 닦으려고 보니 치약이 다 떨어진 거예요. 이런 상황을 떠올리며 한두 개씩 영어 표현을 이어나가는 거죠. 여기에 감정을 잘 활용하면 기억 속에 오래 남아요. 별일 아닌데 손을 들고 어깨 들썩이며 ‘와우~’, ‘웁~스’ 하는 거죠.” 박수홍은 “배운 영어 표현을 잠시 덮어두고 다른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생활 패턴에서 영어를 녹여내면 오래 남는다. 그러다 보면 생활영어, 비즈니스영어, 클럽영어 등 다양한 영어를 접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가 추천하는 영어공부법은 U-M-R식 회화. 어떤 상황에 마주쳤을 때 일단 알고 있는 영어를 소리 내어 말하고(Use), 잘못된 표현을 수정해 기억하면(Memorize) 며칠 뒤 같은 상황이 되었을 때 쉽게 떠올릴 수 있다(Remind)는 원리인데, 예를 들면 “그 사람 이름이… 박… 박, 뭐더라? 아, 그래, 박수홍이지!” 하고 먼저 말을 내뱉은 후 박수홍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다. “궁금한 건 표시해뒀다가 일주일에 두세 번씩 형님을 만나 물었어요. 경험한 내용을 바탕으로 공부하고 응용하니까 외우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떠오르더라고요.” 이렇게 이근철에게 비밀 지도(?)를 받은 박수홍의 영어 실력은 많이 향상됐다. 김영철에 이어 또 한 명의 수제자를 키운 이근철에게 두 사람을 비교해달라고 하자 그는 난색을 표했다. “두 사람은 공부하는 스타일이 달라요. 영철씨는 한 번 질문하면 묻지 않은 얘기까지 다 얘기하는 스타일이고 수홍씨는 필요한 얘기만 적재적소에 던지는 스타일이죠. 영철씨에게 추천사를 써달라고 했더니 ‘근철 쌤의 수제자 1호를 자부하는 저 대신 수홍 선배와 책을 내다니 약간 샘나면서도 기대가 큰걸요?’ 하더라고요(웃음). 영철씨나 수홍씨를 도운 건 1퍼센트에 불과합니다. 99퍼센트는 자신의 노력으로 이뤄진 겁니다.” 이에 대해 박수홍은 “영철이는 영어학원을 거의 빠지지 않고 다닌다고 한다. 나도 저자로서 책임감을 갖고 더 열심히 공부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창작물이나 작품은 각별한 법이잖아요. 이 책이 꼭 자식 같아요. 주위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자랑스러운 책으로 만들어져서 만족스럽고 뿌듯해요.”많은 사람들과 영어 정보 교류하고 싶어 박수홍은 해외 진출에 대한 꿈을 꾸고 있다. 지난 2003년 MBC-TV ‘느낌표’에서 외국인 노동자 가족을 만나게 해주는 ‘아시아 아시아’라는 코너를 진행하면서부터 가진 막연한 생각이었는데, 최근 영어 공부를 하면서 좀 더 구체화되고 현실화됐다. “지인이 일본, 중국뿐 아니라 네덜란드에서도 제가 출연한 오락 프로그램이 방영된다고 하더라고요. 기쁜 일이죠. 저는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같은 나라에 진출하고 싶어요. ‘아시아 아시아’를 하면서 그곳에 가봤는데 자연경관이 좋고, 가난하고 열악하지만 순박하고 삶의 만족도가 높더라고요. 언젠가는 저와 비슷한 꿈을 꾸는 후배들과 그곳에서 코미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어요. 후배들이 마음껏 활동할 수 있도록 프로듀싱하는 게 목표인데, 그러려면 돈을 많이 벌고 영어도 더 잘해야겠죠?” 그는 “해외 진출이 현실도피로 보이지 않도록 단단히 준비할 생각”이라고 했다. “요즘 일주일에 다섯 개 이상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데 한번은 어머니가 ‘네가 나온 프로그램은 녹화를 해도 허탈해. 네가 잘 안 나오니까……’ 하시더라고요. 있는 듯 없는 듯한 게 장점이자 단점인데, 앞으로는 개그맨으로서, MC로서 더 많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도록 노력할 생각입니다.” 2007년부터 시작한 웨딩사업도 순항 중이다. 경기침체가 장기화되면서 결혼을 미루는 사람이 많아졌지만 큰 손실은 없다고. 박수홍은 해외에 관심이 많은 만큼 우수 직원을 선발해 해외연수를 보내는 ‘통 큰’ CEO이기도 하다. 그의 다음 도전은 결혼이다. 그는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싶다”고 말했다. “요즘은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라는 플래카드가 눈에 들어와요. 얼마 전 경림이가 남편, 아이와 산책하면서 영상전화를 연결해줬는데 아이가 정말 예쁘더라고요. 영어를 배우면 세계 여성들과 교류할 가능성이 커지니 그쪽에도 관심을 가져보려 합니다. 나중에 근철 형님하고 저하고 각각 결혼해 부부 동반 해외여행을 떠나 사람들에게 숨은 맛집과 여행 정보를 알려주고 싶어요.” 온라인 강의와 저술활동을 하고 있는 이근철은 “많은 사람들이 영어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날개를 달아주고 싶어요. 그리고 기회가 되면 영철씨, 수홍씨와 함께 영어 관련 책도 내고 싶어요”라며 미래에 대한 포부를 밝혔다.■글 / 두경아 기자 ■사진 / 이성훈
- 만기 출소한 ‘고문 기술자’ 이근안의 알려지지 않은 가족사
- 2006. 12. 01 화제
- 그가 나왔다. 5공 시절 ‘고문 기술자’로 악명을 떨쳤던 전 경기도경 대공분실장 이근안이 지난 11월 7일 징역 7년의 형기를 마치고 경기도 여주교도소에서 출소했다. 11년의 도피생활과 7년의 수감생활을 거치는 동안 그의 가정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서울 용두동 자택 앞에서 만난 그의 부인 신옥영씨는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폐품 수거와 건물 청소로 고단한 삶을 꾸리고 있었다. 가장의 몰락과 함께 가족 역시 나락의 길 ‘인간 백정’ ‘지옥에서 온 장의사’ ‘고문 대부’…. 지난 11월 7일 만기 출소한 이근안(68) 전 경감은 듣기만 해도 섬뜩한 별명을 여럿 가지고 있다. 그만큼 그는 1980년대 군사정권 시절 자타가 공인하는 ‘고문 기술자’로 통했다. 1970년 순경으로 경찰생활을 시작해 주로 대공 수사 분야에서 일한 이 전 경감은 민청학련 의장이던 김근태 현 열린우리당 의장을 고문한 혐의로 1988년 12월 수배됐고, 약 11년의 잠적 끝에 1999년 10월 검찰에 자수했다. 이후 7년형을 선고받고 여주교도소에서 복역한 그는 “사회에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며 “그 시대엔 애국인 줄 알고 했는데 지금 보니 역적이다. 세상사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말로 출소의 변을 대신했다. 1988년 이씨가 수배자 신세가 되면서부터 아내 신옥영씨(68)와 세 아들은 가장의 몰락과 더불어 나락의 길을 걸었다. 번듯한 직장에 다니던 큰아들과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이근안이라는 사실이 사내에 알려지면서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회사를 그만뒀다. 특히 차남은 심한 당뇨병까지 얻어 더 이상 직장을 잡지 못했다. 이씨가 수배받을 때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셋째 아들은 경기도 파주의 모 부대에서 공병으로 근무하다 아버지가 자수하기 직전 제대했다. 결혼 초기에 미용실을 운영했던 아내 신씨는 가세가 기울자 집 근처에 3평 남짓하는 허름한 미용실을 다시 냈고 그 수입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미용실에서 시어머니의 조수 노릇을 하며 집안 살림을 맡았던 둘째 며느리는 10년이 넘도록 집에서 숨어 지내는 시아버지를 위해 시어머니와 교대로 점심을 차려주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자수할 당시 이씨는 “효부인 둘째 며느리에게 특히 미안하다”며 눈물을 글썽였다고 한다. 어두운 역사의 한 축에서 권력의 하수인으로 호가호위(狐假虎威)했던 이근안 전 경감. 이제 칠순을 앞둔 그는 당뇨, 고혈압 등에 시달리고 있다. 출소 후의 심경을 듣기 위해 옛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주인이 바뀐 지 오래였다. 동네 주민들에 따르면 그간 그의 가족은 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운 생활을 해왔다고 한다. 부인이 미용실을 운영해 근근이 생계를 꾸렸지만 손님이 거의 없어 유지가 어려울 정도였고, 큰아들도 사업이 잘 안 돼 가족과 왕래가 끊어지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신씨가 동네를 다니며 폐지 줍는 모습을 봤다는 주민도 몇 있었다. 지병을 앓던 둘째 아들은 몇 해 전 숨졌다. 수감중 자식을 잃은 이씨는 출소 당일 취재진에게 “자식의 시신이라도 내 손으로 묻어주고 싶었는데 그게 허락이 안 됐다”며 안타까움을 표하기도 했다. 이씨 가족을 기억하는 이웃들은 조금씩 다른 입장을 보였다. 어떤 이는 “가장이 저지른 일인데 가족이 무슨 죄가 있느냐, 고생하는 모습이 안됐다”고 했고 또 어떤 이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 때문에 피눈물을 흘렸는데 그 가족들을 동정하냐”며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법이 내린 죄값을 치르고 다시 세상에 나왔지만 20년 가까운 가장의 부재는 부인 신씨를 비롯한 가족 모두에게 고스란히 삶의 무게로 남은 듯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부인 신씨가 미용실에서 생활하며 영업을 계속 했다는 제보를 듣고 미용실을 찾아가 봤다. 4층짜리 벽돌 건물 1층에 있던 미용실 자리엔 대신 지물포가 들어서 있었다. 미용실에는 평소 손님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지난 6월에 가게를 냈다는 지물포 주인은 자기가 들어오기 전에도 약 1년 간 가게가 비어 있었다고 말했다. 미용실 간판은 그대로 있었지만 신씨가 가게를 그만둔 지는 꽤 된 셈이다. 동네에서 종종 모습을 봤다는 이웃은 몇 있었지만 신씨 가족이 어디에서 사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며칠에 걸친 수소문 끝에 신씨가 동네 한 건물에서 청소부로 일하고 있고, 그 건물에서 500m 떨어진 음식점 건물 2층에 세 들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지난 11월 7일, 7년의 형기를 마치고 여주교도소를 나서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는 이근안 전경감(사진 위). 1999년 10월 검찰에 자수하고 구속되던 당시의 모습.신씨가 살고 있는 집은 대로변에 인접한 작은 골목 안에 있었다. 허름한 2층 건물의 1층에는 한식당이 있고 식당 옆에 붙은 자그마한 대문이 신씨네 집으로 통하는 출입문이었다. 신씨가 이 집에서 지낸 지는 2년 정도 됐지만 이웃들은 신씨와 대화를 나눈 적이 거의 없는 모양이었다. 여전히 둘째 며느리와 함께 사는 듯했고 이따금 막내 며느리가 어린 손자를 데리고 들른다고 했다. 그러나 출소한 이 전 경감을 동네에서 봤다는 사람은 없었다. 부인 신씨를 만난 건 11월 18일 오전 9시경이었다. 빨간색 점퍼 차림의 그는 연배에 비해 젊어 보이는 편이었다. 폐지를 담은 작은 수레를 끌고 집으로 돌아오던 그는 기자가 신분을 밝히고 인터뷰를 요청하자 “아무 할 말이 없다”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지난 99년 남편이 자수했을 당시 신씨는 취재진에게 “일밖에 모른 남편이 잘못한 게 뭐냐, 남편은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모든 것을 남편에게 뒤집어씌우려 한다”고 항변했지만 이제는 극도로 말을 아끼는 모습이었다. 이 전 경감의 건강 상태와 근황을 묻자 신씨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며 계속해서 답변을 회피했다. 고생이 많았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을 건네자 잠시 침묵한 그녀는 이내 결심한 듯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으로 들어가버렸다. 전화를 걸어 다시 한번 정중하게 인터뷰를 요청해봤지만 역시 묵묵부답이었다. 대문 앞에 둔 작은 수레에는 빈 종이상자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여생을 참회하며 신앙생활 하겠다고 밝혀 이근안 전 경감은 재야 인사들을 상대로 한 갖가지 고문 수법, 거짓말처럼 사라졌던 10년 간의 잠적과 전격적인 자수, 그리고 7년 간의 수감생활과 최근의 출소로 몇 차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장본인이다. 그는 1970년 경찰생활을 시작한 이후 줄곧 대공분야에서 일하며 특진으로만 고속승진했다. ‘이근안이 없으면 수사가 안 된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재직기간 동안 청룡봉사상 등 모두 16차례의 표창을 받았는데 여기에는 ‘간첩 검거 유공’이 4회나 포함돼 있다. 22년 동안 간첩 누명을 쓰고 살다가 지난해 7월 무죄 선고를 받은 함주명씨 역시 이 전 경감의 고문에 못 이겨 간첩 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지난 1983년 서울 종로구 기독교회관 앞길을 걷다가 납치되듯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간 함씨는 이 전 경감으로부터 ‘북한의 지령을 받아 30년 동안 남파간첩으로 활동했다’는 내용의 진술을 강요받고 악몽과 같은 고문에 시달렸다. 몽둥이로 온몸을 때리는 것은 기본이고, ‘칠성판’에 몸을 묶고 얼굴에 수건을 뒤집어씌운 다음 샤워기를 들이대 숨을 못 쉬게 하는 물고문, 새끼발가락에 전깃줄을 감아 전류를 흘려보내는 전기고문이 두 달 가까이 이어졌다. 고정간첩으로 활동해왔다는 거짓 자백을 하고 나서야 고문이 멈춰졌다고 한다. 결국 함씨는 지난 84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무기징역이 확정됐고 98년 특별가석방으로 풀려나기까지 16년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이 전 경감은 연행자들 앞에서 한 손으로 사과를 으깨 보이면서 “내가 손대면 입을 열게 돼 있다”는 등 위협적인 말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것으로 전해졌다. 전기고문, 물고문, 관절 뽑기, 날개 꺾기, 집단 구타, 볼펜심 신문, 통닭구이 등 각종 고문에 통달한 그는 종종 다른 기관에까지 ‘고문 출장’을 다닌 것으로 알려졌다. 1980년대 ‘학림사건’으로 그에게 고문을 당한 경험이 있는 열린우리당 민병두 의원은 한 기고문에서 “고문 기술자로 악명 높은 이근안은 「선데이서울」을 보면서 전기고문의 볼트수를 올렸다 내렸다”며 “나 역시 온갖 구타와 잠 안 재우기 등의 고문을 당하고 동료들의 소재지를 댔다”고 고백했다. 또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은 “그가 고문을 하면서 ‘지금은 네가 당하고, 민주화되면 내가 그 고문대 위에 서줄 테니 그때 가서 복수하라’고 했다”는 말을 전하기도 했다.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재직 중이던 김근태 의장은 올해 초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이근안 전 경감에 대한 심정을 솔직하게 토로한 적이 있다. 김 의장이 여주교도소에 복역 중이던 이근안 전 경감을 면회한 직후였다. 당시 김 의장은 여주교도소에 수감된 후배를 면회하기로 약속한 상태였고 그때까지만 해도 이근안 전 경감의 존재는 미처 감안하지 못했다고 한다. 면회를 앞두고 그곳에 이 전 경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돼 갈등에 빠졌다는 것이다. 이씨가 감옥에서 간증을 하며 용서를 빌었다는 말을 들었지만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면회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후배와의 약속을 어길 수 없었고 이씨와의 만남이 또 다른 운명이구나 싶어 면회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김 의장은 당시 면회실에서 만난 이씨가 무척 작아 보이더라고 했다. 자신에게 군림하며 고문할 때는 항공모함처럼 커 보였는데 신세가 역전되니 이상할 정도로 작아 보이더라는 것이다. 눈 감을 때까지 용서를 구한다고 말하는 그를 보면서 김 의장의 마음에는 과연 진심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고 한다. 상처가 깊었던 탓인지, 무릎을 끓고 용서를 구하는데도 마음에 와 닿지를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의 만남 직후 한 목사님의 조언을 듣고 마음을 고쳐 먹었다. 그 사람의 진심이 무엇인지 따질 권리는 신에게만 있는 것이므로 신의 권리에 개입하기보다는 그 사람이 구하는 용서의 말을 마음으로 받아들여야겠다고 마음먹었다는 것이다. 이씨가 출소한 뒤 김 의장은 공식 석상에서 “그가 여생을 건강하게 지내길 바란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근안 전 경감은 10여 년간 잠적생활을 하는 동안 성경을 탐독하며 기독교에 귀의했다고 알려졌다. 그는 출소 후에도 신앙생활에 몰두하겠다고 밝혔다. 자신은 피해자 당사자는 물론 그 가족들에게도 죄인이기 때문에 회개의 삶을 신앙에서 찾겠다고 했다. 무자비한 고문으로 인권을 유린한 그의 작죄는 두말할 나위 없이 크다. 그러나 하수인에 불과한 이씨가 법의 심판을 받을 동안 그에게 고문을 지시하고 방조한 배후 세력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채 버젓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 글 / 박연정 기자 ■ 사진 / 박원태·원상희·경향신문포토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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