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옵션
닫기
범위
전체
제목
본문
기자명
연재명
이슈명
태그
기간
전체
최근 1일
최근 1주
최근 1개월
최근 1년
직접입력
~
정렬
정확도순
최신순
오래된순

경향신문(총 2,546 건 검색)

이명박 전 대통령 “정권 재창출 위해선 당정 똘똘 뭉쳐야”···윤 대통령 부부와 관저 만찬
2024. 08. 12 20:14 정치|정치
... 후 처음으로 이 전 대통령과 함께하는 공식 식사 자리다. 대통령실 제공 윤석열 대통령이 12일 이명박 전 대통령과 부부 동반 만찬을 가졌다. 이 전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정권 재창출을 위해서는...
윤석열 대통령, 다음 주 이명박 전 대통령과 만찬…김건희 여사도 참석
2024. 08. 10 14:13 정치
... 연세대 명예교수 빈소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의 조문을 받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윤석열 대통령이 이명박 전 대통령과 다음 주 만찬을 한다. 여권 관계자는 10일 연합뉴스 통화에서 “윤 대통령 부부와 이...
황우여·추경호, 오늘 이명박 전 대통령 만난다
2024. 05. 21 07:11 정치
... 진우스님을 예방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황우여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21일 오후 이명박 전 대통령을 예방한다. 지난 13일 비대위 정식 출범 후 8일 만에 이뤄지는 전직 대통령 예방이다. 황...
예방황우여추경호이명박
이명박·정몽준 등 각계각층 조석래 명예회장 빈소 찾아
2024. 03. 31 21:53 경제
... 등 국내 경제계에 큰 획을 그은 고인을 추모하는 각계의 발길이 이어졌다. 31일 장례식장에서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셋째 사위 조현범 한국앤컴퍼니 회장의 안내에 따라 빈소로 들어가 고인을 추모하고...

스포츠경향(총 331 건 검색)

사면·복권된 이명박 전 대통령 "국민들께 심려를 끼친 데 대해 대단히 송구스럽다"
2022. 12. 30 15:53 생활
“지난 5년 동안 많은 분들이 성원해 주시고 기도해 주셔서 감사하단 말씀 드립니다” 지난 28일 신년 특별사면으로 사면·복권된 이명박 전 대통령이 30일 서울대병원에서 퇴원해 오후 1시56분쯤 서울 강남구 논현동 사저 앞에 도착했다. 이 전 대통령은 이날 자택 정문에서 50m가량 떨어진 사거리에 정차한 검은색 카니발에서 부인 김윤옥 여사와 함께 내렸다. 다소 거동이 불편한 듯 다리를 절뚝이기도 했지만, 10여 분가량 걸어 이동하며 폴리스라인 뒤로 도열한 지지자들과 일일이 악수하며 인사를 나눴다. 이 전 대통령은 취재진과 만나 대국민 메시지를 발표했다. 이 전 대통령이 뇌물·횡령 등 혐의로 지난 2018년 3월 수감된 이후 재판장 변론을 제외하고 공개된 장소에서 육성으로 대국민 메시지를 내놓은 것은 처음이다. 이날 이명박(MB) 전 대통령은 “국민 여러분들께 심려를 끼친 데 대해 대단히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또 지난 5년 동안에 많은 분들이, 또 특히 젊은층이 저를 성원해주시고 기도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고 덧붙였다.
11
이명박, 비자금 의혹 제기 MBC ‘스트레이트’ 소송 패소
2022. 08. 11 17:45 생활|연예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명박 전 대통령이 MBC 탐사기획 프로그램 ‘스트레이트’ 보도로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제기한 소송서 최종 패소했다. 대법원 2부(주심 조재연 대법관)는 11일 이 전 대통령이 MBC와 스트레이트 진행자 배우 김의성, 주진우 전 시사인 기자, MBC 취재기자를 상대로 낸 정정보도 등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이 전 대통령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에 따르면 스트레이트는 2018년 11월 이 전 대통령 최측근과 동명이인 A씨로부터 ‘리밍보’(‘이명박’의 중국어 발음)라는 인물이 자신에게 거액의 달러를 송금하려 했다는 제보를 받았다고 방송했다. 제작진은 이를 근거로 이 전 대통령 비자금 의혹을 제기했다. 거액 달러를 송금하는 과정에서 실수로 동명이인에게 보내려 했던 정황이라고 추측한 것이다. 이 전 대통령은 정정보도와 위자료를 청구하는 소송을 냈으나 1심 재판부는 “원고는 보도에서 언급된 내용 중 사실로 드러난 것이 없다고 지적하지만, 사실이 드러나지 않았다는 사정이 허위성을 담보하지 않는다”며 청구를 기각했다. 2심도 동일한 판단을 유지했다. 대법원도 이명박 전 대통령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패소 판결을 확정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 비자금 의혹 제기 '스트레이트'에 패소
2022. 04. 08 16:52 연예
MBC 온라인 캡처이명박 전 대통령이 MBC 탐사기획 프로그램 ‘스트레이트’ 보도로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소송을 냈으나 1심에 이어 항소심도 패소했다. 서울고법 민사13부(강민구 정문경 이준현 부장판사)는 8일 이 전 대통령이 MBC(문화방송)와 스트레이트 진행자인 배우 김의성, 주진우 시사인 기자, 취재진인 권희진 MBC 기자를 상대로 제기한 정정보도 등 청구 소송을 1심과 마찬가지로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스트레이트는 2018년 11월 이 전 대통령 최측근과 동명이인인 A씨로부터 ‘리밍보’(‘이명박’의 중국식 발음)라는 인물이 자신에게 거액의 달러를 송금하려 했다는 제보를 받았다고 방송했다. 제작진은 이를 근거로 이 전 대통령의 비자금 의혹을 제기했다. 이 전 대통령이 거액의 달러를 송금하는 과정에서 실수로 동명이인에게 보내려 했던 정황이라고 추측한 것이다. 이 전 대통령은 정정 보도와 손해배상금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으나 1심 재판부는 “원고는 보도에서 언급된 내용 중 사실로 드러난 것이 없다고 지적하지만, 사실이 드러나지 않았다는 사정이 허위성을 담보하지 않는다”며 청구를 기각했다. 항소심 재판부 역시 “원고가 여러 가지를 주장했지만, 받아들이지 않고 피고들에 대한 항소를 전부 기각한다”고 밝혔다.
이명박 전 대통령에 쥐약 보낸 유튜버, 징역 1년 6개월 구형
2021. 04. 17 13:23 생활
이명박 전 대통령 자택에 쥐약을 택배로 보내고 이를 방송한 유튜버 고양이뉴스(원재윤씨)가 검찰로부터 1년 6개월의 실형을 구형받은 사실을 직접 알렸다. 유튜브 방송 화면진보 시사 유튜버 고양이뉴스(원재윤)가 직접 징역을 구형받은 사실을 알렸다. 고양이뉴스 제작자 원재윤씨는 17일 진보 성향 온라인 커뮤니티 딴지일보에 “징역 1년 6개월을 구형받았다”면서 “기소 후 삼 주만에 재판이 시작되는 살벌한 일정으로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재판을 받았다”고 했다. 이어 “알고보니 문제의 택배는 경비 직원이 보고 없이 그냥 폐기처리 했고 ‘가카’(이명박 전 대통령)께서는 기사를 보고 아셨다고 한다”며 “작년 총선 한달 전에 기소가 됐다”고 했다. 뉴스핌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형사1단독 홍창우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고양이뉴스 원재윤씨 결심공판에서 검찰은 특수협박 혐의를 적용해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을 구형했다. 원재윤씨 변호인은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협박 고의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고 실질적으로 피고인이 보낸 택배가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도달했다고 보기도 어렵다”며 “풍자 또는 해악, 사람들에게 웃음과 재미를 주기 위한 행위 일환이었지 협박을 하겠다거나 공포심을 유발하겠다는 생각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고 변론했다. 보도에 따르면 원재윤씨 또한 최후진술에서 “언론인으로서 정치인에 대한 풍자를 했다고 생각한다”며 “제 행동에 어떤 폭력적인 의미나 해악을 고지하고자 하는 마음은 전혀 없었다”고 했다. 고양이뉴스는 구독자 수 약 21만명을 가진 유튜버로 지난 2019년 3월 이명박 전 대통령을 조롱할 목적으로 약국에서 쥐약을 구매한 뒤 김어준 얼굴과 함께 ‘건강해야돼’라고 적힌 상자에 담아 직접 전달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명박 전 대통령 자택에서 근무 중인 경찰의 제지로 실패했고 택배에 이를 부쳤다. 고양이뉴스는 해당 장면이 담긴 영상을 유튜브 채널에 공개했다. 서울 강남경찰서는 고발장을 접수해 수사에 착수했고 검찰은 지난해 2월 원재윤씨를 특수협박 혐의로 기소했다.

주간경향(총 142 건 검색)

[기고]“사교육 잡은 이명박” 칭찬은 팥소 없는 찐빵(2021. 08. 13 14:57)
2021. 08. 13 14:57 사회
교육평론가이자 <문재인 이후의 교육> 저자 이범 선생은 ‘이명박이 잘했다’ 제목의 글을 경향신문(8월 5일자 25면)에 기고했다. 아파트값과 사교육비가 이명박 정부에서 하락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2022년 대선후보들은 이명박 정부의 정책을 참조해 중심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울 대치동의 한 어학원 앞 도로에서 학원 수업을 마친 초등학생들이 집으로 가기 위해 학원버스로 향하고 있다. / 정지윤 기자 그런데 정말 이명박 정부가 잘했을까? 아파트값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으나 적어도 이명박 정부가 대입과 고입 정책을 잘해 사교육비가 줄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먼저 이범 선생의 주장을 요약해보자. 그에 따르면 ①‘학생 1인당 사교육비’는 2009년 이후 하락 반전해 3년 연속 내렸다. ②이명박 정부가 선발 전형의 난이도를 낮추고 전형요소의 복합성을 해소했기 때문이다. 실제 사교육 ‘참여’학생 평균이 핵심 통계청이 매년 발표하는 사교육비 조사결과에는 초·중·고 전체 사교육비와 학교급별 사교육비가 구별된다. 또한 ‘총 사교육비’와 ‘학생 1인당 평균 사교육비’가 구별되고 사교육 참여율이 보고되기 때문에 ‘참여학생 1인당 평균 사교육비’를 구분할 수 있다. 총 사교육비는 2009년에 정점을 찍고, 2015년까지 매년 하락하다가 2016년 다시 상승세로 돌아서서 매년 증가하는 추세다. 하지만 이러한 총 사교육비의 추세는 실제 사교육 부담을 보여주지 못한다. 학생수의 변동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총 사교육비가 같더라도 학생수가 절반으로 줄었다면, 실제 부담해야 하는 사교육비는 2배 증가하게 된다. 그래서 사교육비 부담 수준의 변화를 보기 위해서는 총 사교육비가 아니라 학생 1인당 평균 사교육비의 변화를 봐야 한다. 학생 1인당 평균 사교육비는 총 사교육비를 학생수로 나눈 값이다. 학생 1인당 평균 사교육비는 2009년 월평균 24만2000원까지 올랐다가 24만1000원(2010년), 24만원(2011년), 23만6000원(2012년)으로 3년 연속 하락한다. 그리고 2013년 이후 상승세로 돌아서서 2019년까지 매년 계속 상승했다. 따라서 학생 1인당 평균 사교육비만 보면 이명박 정부 시기에 3년 연속 사교육비가 하락했다는 이범 선생의 주장은 ‘사실에 근거’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총 사교육비가 사교육비의 실제 부담 정도를 보여주지 못하듯이 학생 1인당 평균 사교육비도 마찬가지로 사교육비의 실제 부담 정도를 보여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매년 사교육에 참여하는 학생수가 변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학생 1인당 평균 사교육비가 동일하다고 하더라도 사교육에 참여하는 학생수가 절반으로 줄었다면, 실제 사교육비의 부담은 2배로 늘어난다. 그러므로 실질적인 사교육비 부담 정도를 알기 위해서는 ‘학생 1인당 평균 사교육비’가 아니라 ‘참여학생 1인당 평균 사교육비’를 봐야 한다. 그리고 ‘참여학생 1인당 평균 사교육비’를 알기 위해서는 사교육에 참여하는 학생의 비율을 고려해야 한다. 사교육에 참여하는 학생 비율은 2009년 이후 2016년까지 매년 하락했다. 특히 이명박 정부 시기인 2009년에서 2012년 사이에는 매우 큰 폭으로 하락했다. 더구나 이 시기에 전체 학생수도 지속적으로 감소했다. 따라서 사교육에 참여하는 학생수는 대폭 줄어들었다. 고등학생 사교육비 오히려 늘어 그러면 이명박 정부 시기에 사교육에 참여하는 학생들의 1인당 사교육비는 어떻게 됐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이명박 정부 내내 사교육에 참여하는 학생들의 사교육비 부담은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참여학생 1인당 사교육비는 월평균 32만3000원(2009년)에서 32만7000원(2010년), 33만5000원(2011년), 34만원(2012년)이다. 그러므로 이명박 정부의 성공적인 대입·고입 정책에 덕분에 사교육비가 하락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이 점은 고등학생 사교육비의 변화를 보면 더 극명하게 확인된다. 고등학생의 사교육 참여학생 1인당 사교육비는 40만3000원(2009년), 41만2000원(2010년), 42만2000원(2011년), 44만2000원(2012년) 등 이명박 정부 내내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이범 선생은 “나는 참여학생은 고려하지 않고, 학생 1인당 평균 사교육비 추세”에 근거했기 때문에 주장에 문제가 없다고 변명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변명은 설득력이 없다. 이범 선생이 주장하듯 이명박 정부가 대입 전형의 난이도를 낮추고 복잡성을 줄이는 정책을 통해 사교육비가 감소했다는 것은 그런 정책 덕택에 사교육에 참여한 학생들의 비용부담이 줄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좋은 정책 덕분에’ 사교육에 참여하지 않는 학생들의 사교육비 부담이 줄었다고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따라서 이런 주장이 입증되려면, 단순히 사교육비를 전체 학생수로 나눈 1인당 평균 사교육비 자료를 들이대는 것이 아니라 사교육에 참여하는 학생들의 수를 고려한 사교육에 참여하는 학생들의 사교육비 부담 자료를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객관적 자료가 보여주는 것은 이명박 정부 시기에는 사교육에 참여하는 학생수가 줄어들어 1인당 평균 사교육비가 적어 보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 사교육에 참여하는 학생들의 사교육비는 오히려 증가했다. 따라서 “이명박 정부가 뭔가 잘해서 사교육비가 하락했다”는 주장은 사실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칭찬도 데이터에 근거해야 문제는 이런 주장을 진보적인 교육평론가로 잘 알려진 이범 선생이 했다는 점에 있다. 그런 만큼 이 주장은 진보적인 인사가 보수정부의 좋은 정책을 칭찬한 ‘객관성과 합리성’을 갖춘 견해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크다. 조금 더 나아가서는 “그것 봐라. 그래도 보수적인 이명박 정부가 정책을 훨씬 잘했잖아”라고 주장하는 근거로 이용될 가능성이 크다. 진영 논리를 넘어서 진보적인 인사가 보수 정부의 정책을 칭찬하거나, 보수적인 인사가 진보 정부의 정책을 칭찬하는 일은 그 자체로 아름다워 보일 뿐 아니라 우리 사회가 건강하게 발전하는 데 꼭 필요한 일이다. 특히 이와 관련해 지식인이나 전문가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러나 모든 칭찬 또는 비판은 객관적 데이터와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 데이터를 편향적으로 사용하고, 사실을 왜곡하는 정보에 근거한 주장은 어떤 경우에도 생산적인 논의와 올바른 정책형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언더그라운드 넷]‘하츠네 미쿠’는 어쩌다 ‘이명박’이 됐을까(2021. 03. 12 16:11)
2021. 03. 12 16:11 사회
보배드림 “누가 설명 좀 해줘요. 저 녹색 머리 캐릭터가 이명박인가요?” 3월 9일, 인터넷커뮤니티 보배드림에 올라온 질문 글이다. 올라온 글을 보면 트위터 글이다. 일본어로 적힌 글인데 바로 아래 마이크로소프트 ‘빙’의 자동번역에 따르면 그 내용은 이렇다. “삼성역 이명박 10주년 광고가 9월 27일 수요일까지 연장되었습니다. 위대한 이명박의 광고를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이게 뭔 소리? 감옥 간 ‘그분’의 추종 단체가 낸 광고일까. 그런데 첨부된 삼성역 사진 속 광고패널 등장인물은 보컬로이드 캐릭터 ‘하츠네 미쿠(初音ミク)’다. 하츠네 미쿠는 어쩌다 ‘이명박’이 됐을까. 웹 자동번역 서비스 오류다. 먼저 확인해 봐야 할 것은 실제 저런 트위터 글이 있었는지, 만약 있다면 지금도 자동번역은 이명박으로 되고 있는지 여부다. 하츠네 미쿠 보컬로이드 서비스가 처음 론칭된 것은 2007년 8월 31일이다. 트위터 글에서 10주년이라고 했으므로 삼성역에서 저 행사가 열리고 사진이 찍힌 것은 2017년 8월에서 9월 사이다. 원본 글을 찾는 건 실패했다. 실제 해당 트위터 글을 작성한 사람은 지금도 열혈 사용자인데, 웬일인지 2018년 초 이전 글은 뜨지 않았다. 사실 하츠네 미쿠가 이명박이 된 경위와 관련해서는 더 오래된 풀이가 있다. 구글 번역이 서비스되던 초창기에 사용자 참여로 번역오류를 잡는 도구가 있었다. 여기에 장난기가 발동한 일부 사용자들이 하츠네 미쿠의 한국 번역어로 이명박을 넣었는데, 당시 구글 측 가설로는 집단지성이 오류를 바로잡을 것으로 봤는데 그게 작동 안 되면서 참사가 벌어졌다. 인터넷에 보면 여러 ‘이명박’ 굿즈 증거사진이 올라와 있다. ‘이명박 수영복 ver. Freeing’, ‘『페르소나 4 댄싱 / 올나이트』?에 이명박이 등장! 8월 중순 곡 배달 확인’, ‘이명박 인간처럼 노래’ 등. 그런데 궁금한 건 이것이다. 애초의 오류는 구글 번역에서 난 것이다. 그런데 왜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제공하는 빙에서도 ‘하츠네 미쿠=이명박’ 오역이 이어진 것이었을까. “2017년에 왜 번역오류가 났는지 지금은 확인할 수가 없네요. 머신러닝 기술로 웹 검색에서 사용자들이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번역어를 캐치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당시 어떤 알고리즘이 적용됐는지 알 수 없습니다.” ‘구글 번역에서 발생한 오류가 어떻게 마이크로소프트 빙 번역 오류로 이어졌는지’ 질문에 대한 마이크로소프트 측 답변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측은 “특수문자를 더하면 여전히 ‘이명박’으로 오역된다는 주장이 있으나 확인 결과 현재는 정상적으로 번역된다”고 덧붙였다. 트위터가 제공하는 번역서비스는 현재는 빙이 아닌 구글 번역이다. 트위터 코리아 측은 “2018년 12월부터 구글 번역이 사용됐으며, 현재도 구글 번역 기능이 적용 중”이라고 밝혔다.
언더그라운드 넷
[MBC의 몰락 10년사](13) 「PD수첩」, 이명박 정부의 치부를 드러내다(2017. 10. 10 16:29)
2017. 10. 10 16:29 사회
MB 정부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서 관용이 없었고, 국정운영은 법치를 가장한 독재에 가까웠기 때문에 「PD수첩」이 다루어야 할 내용들은 차고 넘쳤다. 21세기 문명국가에서 공영방송의 한 시사프로그램이 국가정보기관으로부터 이토록 처참하게 장악당한 적이 있을까?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 언론장악 문건에 대한 조사를 위해 검찰에 출석한 전직 「PD수첩」 PD들은 비통한 마음이었다. 문건에 따르면 김재철·안광한 전 MBC 사장들과 측근들은 국정원의 ‘끄나풀’에 불과했다. 왜 MB 정부의 국정원은 이토록 집요하게 PD수첩을 장악하려 했을까? 이명박 정부는 2008년 출범하자마자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따른 거대한 촛불시위로 위기를 맞이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30개월령 이상의 거의 모든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라는 희대의 실책에는 눈을 감고, 위기를 오로지 「PD수첩」으로 돌렸다. 몇몇 기술적인 실수를 빌미로 프로그램을 공격했고, 「PD수첩」을 압수수색하기 위해 검사와 수사관을 MBC로 보냈다. PD들을 체포하고, ‘공무원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기소를 했다. 다시는 권력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지 말라는 위협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PD수첩」은 이후에도 굴하지 않았다. MB 정부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서 관용이 없었고, 국정운영은 법치를 가장한 독재에 가까웠기 때문에 「PD수첩」이 다루어야 할 내용들은 차고 넘쳤다. 9월 26일 최승호 전 MBC PD가 ‘방송사 블랙리스트’ 관련 피해자 조사를 받기위해 서울 서초동 중앙지검으로 들어서고 있다. 최 PD는 기자들에게 “이명박 정부 당시 국정원은 MB의 개인 정보기관”이라며 비판했다. / 이준헌 기자 권력에 굴하지 않은 「PD수첩」 「PD수첩」은 이명박 정부의 불법적인 공권력 사용에 반기를 들었다. 2009년 1월 용산참사가 터졌는데, 「PD수첩」은 경찰이 용역깡패들을 작전에 투입했다는 사실을 ‘용역깡패들이 물대포를 쏘는’ 장면을 포착해 증명해냈다. 공권력이 일부 건설자본에 포섭되었다는 결정적인 증거였고, 시민 안전을 위해 할 수 없이 무력진압을 했다는 논리는 설득력을 잃었다. 6월에는 노무현 대통령 서거국면에서 공권력이 광장을 경찰버스로 막고, 집회를 하는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체포하는 폭력을 고발했다. 경찰은 심지어 일본인 관광객을 시위하는 사람으로 오인하고 때리고 체포할 정도로 포악했다. 「PD수첩」은 4대강 사업을 집중적으로 해부했다. 2009년 11월 엄기영 사장은 ‘특별생방송 이명박 대통령과 국민의 대화’를 위해 진행자로 예정되었던 손석희를 내쫓는 ‘성의’를 보였다. 이 자리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4대강 수질을 지키는 로봇물고기’를 소개했다. 이 생방송이 끝나고 며칠 후 「PD수첩」은 보란 듯이 4대강 사업의 실체를 알리는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MB의 말은 거의 다 거짓말이었다. 정권 입장에서 엄기영 사장은 「PD수첩」을 정권의 입맛대로 ‘컨트롤’할 인물이 아니었다. ‘MBC 정상화’라는 타이틀을 가진 국정원 문건은 2010년 3월 2일 작성되었다고 한다. 바로 그날은 김재철 사장의 취임일이었다. 「PD수첩」 제작진이 검찰에서 확인한 문건에는 「PD수첩」에 존재하는 좌파 PD와 작가 등을 내보내고 「PD수첩」을 고립시킬 수 있는 방안이 세세하게 적혀 있었다고 한다. 김재철 사장은 실질적으로 국정원의 행동대장이었다. PD수첩 정리작전 김재철 사장은 부임하자마자 국정원 문건대로 먼저 ‘광우병 사태’ 이후 「PD수첩」을 이끌던 김환균 CP를 정리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MBC 시사교양국의 영혼은 살아있었다. 바뀐 국장과 후임 CP는 김재철의 ‘하수인’이 아니었고, ‘권력에 대한 감시’라는 명분과 PD들의 의지가 있으면 아이템에 성역은 없었고, 사장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2010년 5월에는 ‘검사와 스폰서’편을 통해 부패를 막아야 할 검찰이 도리어 부패의 본산임을 밝혀냈다. 6월에는 이명박 정부의 ‘국무총리실 민간인 불법사찰’을 폭로했다. 8월에는 4대강 사업의 정당성을 뒤흔들 ‘4대강 수심 6미터의 비밀’ 방영을 앞두고 일촉즉발의 위기상황까지 갔다. 국토부는 법원에 ‘방영금지 가처분신청’을 내면서 결사적으로 막으려 했지만 이유가 없다며 기각을 당해 방송을 막을 수 없었다. 김재철 사장은 존재를 과시해야 했다. 단체협약을 어기면서 MBC에서는 전례가 없었던 ‘사장 시사’를 내걸고 방영을 금지시켜 큰 사회적 파장이 일었다. 김재철 사장은 더 물러설 수 없었고, 이제 직접 칼을 휘둘러야 했다. 2011년 3월부터 「PD수첩」에는 피바람이 불었다. 국정원 문건에는 「PD수첩」을 ‘보도본부’로 이양해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김재철 사장은 더욱 세련된 묘안을 만들었다. 편성과 제작의 분리라는 원칙을 어겨가며 편성부문에 시사교양국을 얹어 편성제작본부라는 이상한 조직을 만들었고, 여기 수장으로 백종문 본부장을 임명했다. 직접 「PD수첩」을 담당하는 시사교양국장에는 윤길용을 임명했다. 「PD수첩」에서 잔뼈가 굵었던 그들은 국정원 문건대로 「PD수첩」을 초토화시켰다. 먼저 최승호 PD를 비롯해 6명의 PD를 강제로 전출 보냈다. 이어 ‘개성공단 폐쇄 1년’을 다루려는 이우환 PD를 용인 드라미아로, 시사교양국 총회에서 사회를 보던 한학수 PD를 경인지사로 강제 전출 보냈다. 남아있던 시사교양국 PD들은 매일 아침 국장 앞에서, 저녁에는 로비에서 피케팅을 했다. 「PD수첩」 젊은 PD들은 오전에는 피케팅을 하고, 오후에는 피케팅 당사자인 국장에게 아이템을 내고 까이는 아이러니한 시간을 보냈다. ‘MB 무릎기도 사건’, ‘내곡동 사저 논란’ 등 MB 정부가 불편해 할 아이템들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임명한 ‘한상대 검찰총장 검증 논란’ 아이템의 경우, 담당 PD가 아이템 컨펌 여부를 알기도 전에 서초동 검찰청에서 이미 그 아이템이 ‘킬이 되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황당하게도 담당 PD에게 소문이 들려왔다. 거짓말처럼 다음날 부장은 아이템을 불허했다. MB가 직접 독려한 ‘제주도 7대 자연경관 선정 논란’은 부장이 담당 PD의 기획서를 찢는 기행을 보여주었는데, 이후 제주도 7대 자연경관 선정이 사기극에 가깝다는 게 밝혀졌다. PD들은 끊임없이 싸웠지만, 국정원 문건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170일 파업이 끝나자 신념을 지키려 싸웠던 「PD수첩」 PD들은 브런치 교육을 받는다는 신천교육대를 거쳐 비제작부서로 뿔뿔이 흩어졌다. PD수첩 작가 6명 해고가 잔혹극의 대미였다. 그렇게 2년여에 걸친 국정원·MBC 커넥션과 PD들의 싸움은 완벽하게 국정원·MBC 커넥션의 승리로 끝이 났다. 김재철·안광한·김장겸 밑에서 「PD수첩」을 망가뜨린 당사자들은 영전을 거듭했다. 백종문·윤길용·김철진·김현종 등은 모두 본사 임원과 지역사 사장을 수년씩 했고, 몇몇은 거기에 더해 좋지 않은 소문이 끊이질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중 몇몇은 과거 ‘시대의 정직한 목격자, 「PD수첩」’을 제작했던 PD들이었다. 백종문 현 부사장은 2003년 모교에서의 강연에서 ‘인생의 황금기를 「PD수첩」에서 맞았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랬던 이들이 왜 ‘국정원의 끄나풀’로 자신의 인생 행로를 끝장내는 선택을 해야만 했을까? 아무런 단죄도 없이 시간이 흘러갈 것이라 믿었을까. 이런 질문들 옆에 그들과 비슷한 연배의 많은 선배들이 20년 터울의 후배들과 파업을 하며 언론자유를 외치는 모습이 보인다. 역사는 어떤 삶을 더 존중하고 기억할 것인가? 이제 촛불시민의 힘에 의해 탄생한 정부가 답할 차례다.
MBC의 몰락 10년사
[인터뷰]미세먼지 첫 한·중 국가 상대 손배소 낸 최열 환경재단 대표 “이명박과 내가 임무교대할 시간, 반드시 옵니다”(2017. 04. 18 11:11)
2017. 04. 18 11:11 사회
“7명이서 우선 시작했습니다. 소장 내고 1시간쯤 지나니 언론보도가 나옵디다. 그걸 보고 여기저기서 참여하겠다고 연락이 와요. 더 참여시킬 것인가 논의를 해보니 7명이면 숫자가 적고, 어느 정도 숫자가 되면 합의부가 다룬다는 거예요. 그래서 소송인단을 100명으로 늘리자고 결정했습니다.” 4월 12일, 환경재단에서 최열 대표를 만났다. 일주일 전인 4월 5일, 식목일 최 대표와 강원도 춘천의 안경재 변호사, 주부 등 7명이 한국과 중국 정부를 상대로 미세먼지 피해 소송을 냈다. 미세먼지 관련 국가를 상대로 한 첫 손배소다. 소장에서 중국 정부를 향해서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오염물질을 수인가능한 범위 내에서 관리하여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염원을 관리하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사실관계를 규명하기 위해 중국은 이와 관련한 상세한 설명과 자료를 제출해 줄 것’을 요구했다. 대한민국 정부에는 인간 존엄성과 행복추구권이 명시되어 있는 헌법 10조를 근거로 ‘현재까지 대한민국은 미세먼지의 원인이 무엇인지조차 정확히 파악하지도 못하고 있다’며 석명을 요구했다. 중국 쪽에서도 반응이 나옵니까. “환구시보라고 중국 매체가 있습니다. 한국 소송 보도 이후 긴급 여론조사를 했습니다. ‘한국에서 중국발 미세먼지 피해소송을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2000여명이 참여했는데 95%가 ‘이해할 수 없다’이고, 5%가 ‘충분히 이해한다’는 답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를 같이 소송한 것은 우리가 중국에 무언가를 요구하려면 우리가 잘 하면서 요구해야지, 우리가 못하면서 요구하는 것은 아무런 힘이 없다고 생각해서입니다. 우리가 석탄화력발전을 계속하고 디젤차에 ‘클린디젤’이라는 딱지를 붙여주고 아무런 개선대책을 내놓지 못하면서 중국에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합니다.” 미세먼지 원인에 대한 기존 환경운동단체들의 캠페인을 보면 원인에서 우리 문제가 더 심각하다며 석탄발전 문제 등을 거론해 왔는데요. “국토는 한국과 중국으로 나뉘어 있는지 모르지만 오염물질은 이미 국경과 관계없이 퍼지고 있습니다. AI 등 인수공통전염병을 일으키는 철새의 이동도 마찬가지이고 바다쓰레기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세먼지에는 경계가 없어요. 현재의 법체계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한·중 간에 미세먼지 협정도 없고, 같이 공동조사하자는 협의가 있더라도 형식적입니다. 아무리 공동조사를 해도 효과가 없으니 안 해야 할까,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운동은 안 되는 것에 대해 여론을 형성하고 전략을 마련하며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소송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결론을 내렸다면, 빨리 진행하는 것이 맞다고 판단했습니다.” 최열 대표는 1949년생이다. 조용필보다 한 살 많다. 환갑이 지나 70대를 바라보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운동’을 말하고 있다. “1인당 손해액을 우선 정신적 피해로 300만원씩 잡았는데, 7명이 하면 총 피해액 규모가 2100만원으로 약식재판을 할 수도 있다는 거예요. 100명이 소송을 하면 3억원이 아닙니까. 물론 재판은 길어지겠지요. 환경운동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 순발력과 지구력이 같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공익 목적의 소송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소송할 때만 반짝 관심이 있고 소송을 진행하는 변호사만 생고생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지요.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소송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프로그램도 필요합니다.” 환경재단과 ‘미세먼지 소송모임’은 후속 프로그램으로 ‘미세먼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주제로 4월 21일 대한상공회의소에서 긴급토론회도 개최할 예정이다. 미세먼지가 기후변화 문제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대표님 기고를 보니 시리아 난민문제에 대해 기후난민이라고 언급하신 것이 인상적이던데요. “학자들은 전 세계적으로 기후난민을 5500만명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인구보다 많아요. 다보스포럼에서 해마다 인류가 해결할 과제를 계속 제시하는데, 2000년대 들어 계속 나오는 것이 세 가지입니다. 빈곤, 양극화, 그리고 기후변화. 최근에 나오는 것이 4차 산업혁명인데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양극화와 빈곤이 연결되어 있고, 기후변화는 모든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지구온난화뿐만 아니라 기온 자체가 양극화되고 있어요. 비가 많이 오는 데는 더 많이 오고 안 오는 데는 더 안 옵니다. 시리아가 대표적이에요. 2005년부터 2010년 사이에 비가 거의 안 왔어요. 그러니 농사를 짓지 못한 사람들이 도시로, 다마스커스로 몰린 겁니다. 독재정권인데 가난한 젊은 청년들을 때리니 도화선이 되어 IS가 생긴 거예요. 북아프리카 재스민 혁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는 군사안보보다 기후안보가 더 심각한 문제라고 봅니다. 기온이 1도 올라가면 식량생산이 10% 줄어듭니다. 미세먼지 문제도 마찬가지예요. 기후변화로 기류가 바뀌니 공기 이동을 차단시키는 것 아닙니까. 이전에는 바람으로 날아가던 것이 한반도 상공에 머물러 있는 겁니다. 공기는 생존권 문제입니다. 대기오염물질로 피해가 나타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큽니다. 특히 65세 이상된 사람들이 조기사망하는 원인일 수도 있어요.” 최 대표를 찾는 전화로 대화는 간간이 끊겼지만 기후변화, 4차 산업혁명, 국제정세와 한국 대선을 넘나들며 이야기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문득 궁금했다. 어느 쪽이든 정권교체가 되면 영입 1순위의 무게감을 갖고 있지 않을까. 총리나 장관을 맡으면 뜻을 펴기 더 쉬울 텐데. “안 해요. 정치는 할 사람이 따로 있고, 저는 한 길만 갈 겁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된 후 4대강에 찬성하지 않았다고 2008년 가을부터 9년간 탄압을 받았는데, 다른 단체가 그 정도 대통령으로부터 탄압당하면 조직이 사라지지만, 살아남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1년 살고 나왔을 때 기자에게 소감을 이렇게 밝혔어요. 이명박과 내가 임무교대를 할 때가 분명히 온다고. 권력은 5년이고 환경운동은 영원해요. 이번 대선은 인수위도 없는데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국내외적 정세가 누가 해도 힘들게 되어 있어요. 대선캠프에 참여한 사람들끼리 나눠 먹기 식으로 가면 망합니다.” 그러면 대표님은 무엇을 하시려고요? “다보스포럼이 있고, 또 사회운동을 중심으로 세계사회포럼이 있는데, 환경포럼을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2000명 이상 타는 환경친화적 배를 만들어 선상에서 토론하고 결론도 도출하는 겁니다. 늦으면 2022년, 빠르면 2021년까지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70대가 되면 나도 배에서 놀면서 좋은 사람들을 모아 프로그램하는 데 보조원으로 활동하고 싶습니다. 배 타는 게 너무 좋아요.”
인터뷰

레이디경향(총 5 건 검색)

노무현 대통령 이명박 당선인 선거포스터 사진 찍은 박상훈
2008. 02. 15 화제
지난 선거는 이미지 전쟁이었다. 누가 좀 더 마음에 와닿는 이미지로 유권자들의 감성을 붙잡는지가 승부의 관건이 됐다. 미디어의 발달로 영상 광고와 UCC까지 등장했지만 그래도 후보의 이미지를 압축해 단번에 보여주는 것으로는 포스터 사진만 한 것이 없다. 당선자의 후보 사진은 누가, 어떤 고민을 거쳐 만들어낸 것일까. 박상훈 사진작가가 들려주는 사진 촬영 뒷이야기, 그리고 그의 사진 이야기. 당선됐다는 즐거운 생각이 만든 편안한 표정 12명이나 되는 후보자가 나오는 바람에 여느 때보다 치열했던 17대 대통령 선거는 후보자들의 포스터가 진열된 벽보 전쟁으로도 유명했다. 이명박 당선인의 포스터 사진을 촬영한 박상훈(55) 사진작가는 환하게 웃는 이 당선인의 사진을 찍고 나서 지난 대선의 승리를 예감했다고 한다. ‘웃는 표정’이 아니라 진짜 ‘웃고 있는’ 이 당선인의 얼굴을 프레임 속에 잡아냈기 때문이다. 보통 수백 장의 사진을 찍어놓고 서로 비교해가면서 가장 나은 것을 고르는데, 이 사진을 보는 순간 ‘더 볼 것도 없이 딱 이거다’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솔직히 이 당선인이 사진 촬영하기에 만만한 스타일이 아니라 촬영 전에 걱정이 있었죠. 좀 딱딱해 보이기도 하고 포토제닉한 느낌도 없고(웃음). 제가 고민했던 건 과장되지 않은 범위 내에서 ‘어떻게 하면 부드럽고 친근감 있게 표현할까’였어요. 최종 결정된 이 사진은 억지로 만들지 않은 자연스러운 느낌이라 마음에 들었죠.” 카메라 앞에서 긴장하게 마련인 모델에게서 연출이 아닌 자연스러움을 이끌어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바쁜 선거 일정에 치인 탓인지 스튜디오 문을 열고 들어선 이 당선인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편안하고 즐거운 마음을 가지시라고 한 가지 주문을 했죠. 지금 후보 사진을 찍는 게 아니라 당선 축하 기념사진을 찍는다고 생각하라고 했어요. ‘지금 제가 청와대에서 대통령 사진을 찍고 있는 겁니다’라고 했더니 표정이 부드러워지시던데요.” 이 ‘즐거운 상상’은 이 후보의 얼굴에 편안함뿐 아니라 자신감을 새겨 넣으며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뒀다. 후보 느낌이 역력한 다른 후보 포스터들에 비해 이 당선인은 실제로 대통령이 된 것 같은 당당함이 배어나와 유권자들에게 더욱 신뢰감을 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이 당선인은 처음에 “내가 눈이 작아서 웃으면 눈이 안 보이는데…”라며 신경을 많이 썼는데, 촬영한 사진을 본 후에는 웃는 모습이 시원스럽게 나왔다고 만족해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자기 얼굴의 단점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사진이 나오면 그것만 주의 깊게 봐요. 하지만 매력적인 웃음을 보면 거기에 끌리는 거지 누가 눈만 들여다보나요. 저는 눈이 이 당선인보다 더 작은데도 이렇게 활짝 잘 웃잖아요(웃음). 콤플렉스를 의식하지 않게 하는 것도 사진가가 할 일이죠.” 그렇다면 사진에 대한 확신만큼 이명박 후보의 당선도 예감했을까. 박 작가는 이 당선인에게서 당당한 힘을 느꼈다고 했다. ‘내가 사진을 찍어줬으니까 잘됐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진 촬영을 하며 “아직 멀었느냐”고 보채는 편인데 이 당선인은 힘든 기색 하나 없이 적극적으로 촬영에 임하는 모습에 모델로서의 점수도 높게 주었단다. 이번 대선은 워낙 출마 후보가 많았던 탓에 각 후보 진영마다 포스터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굉장한 노력을 쏟았다. 심지어는 사진을 찍고도 시간을 쪼개 두 번이나 재촬영을 감행한 후보가 있을 정도. 다른 후보들 사진이 신경 쓰일 법도 하지만 박상훈 작가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전·현직 대통령과의 특별한 인연 요즘 그를 두고 항간에서는 ‘대통령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002년 대선 때 ‘부르튼 입술’의 노무현 대통령 포스터 사진을 찍은 이도 그이기 때문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기념사진 또한 그의 작품이니 대통령과 인연이 예사롭지 않다. 이명박 당선인도 지난 대선에서 노 대통령 포스터를 찍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았다고 한다. “노 대통령과는 포스터 촬영 전에 두어 번 만났죠. 「노무현 죽이기」라는 책이 있는데 그 표지를 제가 촬영했거든요.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희호 여사께서 오슬로 기념관에 걸 사진을 새로 찍으려고 작가를 물색하다 제 포트폴리오를 보고 낙점해서 만나게 됐구요. 평화상을 수상하러 여사님이 함께 오슬로에 가셨다가 역대 수상자들 사진을 보니까 다들 멋있는데 남편 사진만 어색하고 이상하니까 속상하셨던 거죠.” 3대에 걸쳐 대통령들과 인연을 만들어오면서 기억에 남는 일도 많다. 촬영에 비교적 의욕적이었던 노 대통령, 이 당선인과 달리 김대중 전 대통령은 사진 찍는 것을 어려워하는 편이었다. 게다가 전날 있었던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와의 영수회담 결과가 나빴던 탓에 얼굴이 더욱 굳어 있었다. 기분을 풀어보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특별한 인연을 찾아냈다. 김 전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한 프로그램에서 남대문 상인이 되어 ‘골라골라’를 외치며 좌판을 벌였던 적이 있는데 그 프로그램 담당 PD가 박 작가 동생의 부인이었던 것. 지금도 가끔 이야기할 정도로 그 경험이 재밌었다는 김 전 대통령의 얼굴이 화사해진 건 당연했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김 전 대통령의 연륜과 무게감을 담은 사진이 탄생할 수 있었다. 노르웨이 기념관에 걸려 있는 그 사진은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영원히 보게 될 소중한 작품이다. 노무현 대통령 포스터 사진은 당시로선 새로운 시도였다. 이마에 깊게 파인 주름, 부르튼 입술이 적나라한 노 대통령의 모습은 ‘포샵질’ 한번 거치지 않고 담벼락에 그대로 나붙었다. 흰머리 한 올, 주름 하나 없이 깨끗한 타 후보와 달리 피부결이 거칠게 드러났다. “노무현 대통령은 ‘투박한 질그릇’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뚝배기같이 친근하지만 단단하다는 느낌. 그분이 가진 소탈하고 서민적인 모습이 바로 유권자들이 그분에게 바라는 모습이라 생각했고 그 모습을 좋아할 것 같더라구요.” 배경으로 썼던 태극기도 낯선 것이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태극기는 고리타분하고 강건하다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그때가 바로 2002 월드컵으로 태극기가 하나의 문화 코드가 됐던 때였어요. 디자인적 가능성에 주목하기 시작했고 태극기는 한 나라를 상징하는 의미도 있으니까 대통령 후보 포스터 배경으로 적당하다 싶어서 썼죠. 그땐 우리 포스터에만 있었는데 이번에 보니까 태극기가 많이 나왔더라구요. 생각나는 대로 마음껏 연출했는데 나중에 남들이 그걸 쫓아오는 재미가 사진을 하는 큰 즐거움이 돼요.” 포스터 사진을 찍으며 노 대통령을 만났을 때도 ‘이 사람 되겠구나’ 하는 느낌이 있었다. 당시 여론 조사 결과가 상당히 열세였는데도 불구하고 자신감 있는 ‘환한’ 모습에 어떤 직감 같은 것을 느꼈다고. “설득력이 굉장히 뛰어난, 논리적인 분이었어요. 촬영 중간 장난도 잘 치시고, 어렵지 않고 솔직한 모습이 인상 깊었어요. ‘대통령 되실 것 같다. 청와대에서 만나자’라고 말씀드렸죠. 사람의 기운이라는 게 있나 봐요.”분야를 넘나드는 편안한 그의 이야기 포스터 사진으로 또 한번 관심이 높아졌지만 원래 그는 풍경 사진, 광고 사진 등으로 이름을 떨쳐온 작가다. 특히 뉴욕페스티벌 한국인 최초 금상, 칸 국제광고제 금사자상을 수상하는 등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의 스튜디오는 유명 스타들의 사진이 벽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의 이름을 모르는 이들도 “아, 이거!”라고 할 만큼 알려진 그 사진들은 하나같이 담백하고 편안하다. “저는 꾸미는 게 싫어요. 속에 있는 것을 건드려 내면을 끌어내려고 하죠. 사람들은 결국 ‘진짜’를 보고 싶어 하지 않을까요? 제 사진을 좋아하는 분들은 양념 맛이 아니라 재료 본연의 맛을 음미하고픈 분들이에요.” 수많은 스타들의 사진을 찍으며 그들이 가진 뒷모습을 발견해온 그다. 그중에서도 ‘주름이 만든 카리스마’라는 컨셉트로 찍은 안성기와 ‘눈물이 빛나는’ 김희애의 사진이 마음에 남는다고. 본인들도 그 사진을 가장 마음에 들어 할 정도로 특별했던 작품. 특히 김희애의 남편은 그 사진을 가지고 다니며 자랑할 정도 였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가 스타나 상품 사진을 잘 찍는 ‘상업적인’ 작가라고만 생각하면 오산이다. 십 년 넘게 새벽 사진을 찍어온 그는 여명의 오묘함을 담아낸 ‘새벽 시리즈’로 풍경 사진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나같이 똑같은 일출, 산세 풍경 대신 흐트러진 일상의 시작에 주목했던 것이다. “풍경 사진은 어떤 면에서는 많이 고통스러워요. 생각해보세요. 새벽에 잠도 안 자고 추울 때 나가기가 얼마나 싫겠어요. 기다리고 참고 고통을 즐길 수 있어야 좋은 풍경을 내 눈에 안을 수 있죠. 하지만 시시때때로 변하는 자연을 보면서 겸허함도 느끼고 자연 속에서 나란 어떤 존재인지 생각하게 되죠. 자연과 나, 나와 타인. ‘관계’라는 것에 대해 고민하게 해요.” 풍경, 인물, 광고 사진까지. 아직도 사진에 대한 ‘열정’으로 목마른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흐름은 바로 ‘소통’이다. 사람과 제품과 자연에 끊임없이 말을 걸고 생각을 나눌 때 그는 가장 행복하다. 그리고 그 소통의 결과를 책으로, 전시로 내놓으며 또 다른 소통의 길을 만드는 것이 흥미롭다. “한때는 완벽한 작품을 만들어야겠다고 나를 옭아맨 적도 있었죠. 하지만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알았어요. 이 세상에 완벽한 게 어디 있어요. 완벽하려는 노력 대신 사진을 좋아하는 열정을 거두지 않으려고 합니다.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고, 사람을 알아가는 게 좋아요. 아마 죽을 때까지 사람을 찍고 있을 겁니다.” 박상훈 작가는 아직 해보고 싶은 것이 많다고 했다. 꾸준히 진행하고 있는 작업의 결과물들을 선보일 사진전도 준비 중이다. 최근에는 현대인이라는 존재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내’가 들어 있는 이 도심 속의 사람들에 집중하고 있다. “목표는 거창하지 않아요. 그저 좋은 작가, 훌륭한 작가가 되고 싶은 게 제 바람이에요. 나름 이런저런 결과물을 내놓았고 좋은 평가도 받았지만 아직 나는 ‘좋은’ 작가가 되지 못했어요. 운 좋게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됐고 타고난 예술적 기질이 조금은 있다는 데 감사해요. 그런 열정을 원천으로 삼아 더 많이 노력할 겁니다.” 그에게 사진이란 무엇일까. 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같은 질문을 받지만 그때마다 다른 대답을 내놓는다고. 그만큼 사진이 가진 다양한 힘에 매료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진은 어쩌면 물방울 같은 것이 아닐까요. 물방울은 하나의 작은 방울이지만 독립된 게 아니라 그릇을 이루고 바다가 되면서 의미를 만들잖아요. 세상 모든 것과 연관되어 있죠. 사진도 한 컷 그 자체만으로 완전한 것이 아니라 많은 이야기를 만들고 다양한 의미를 갖는 거예요. 소통의 매개가 되는 거죠.” 제17대 대통령 선거 당선인인 이명박도 그랬고, 그의 카메라 앞에 섰던 이들은 모두 “잘 찍어줘서 정말 고맙다”라는 인사를 남겼다. 하지만 그는 말한다. 없는 것을 억지로 만들어낼 수는 없다고. ‘잘 나왔다’고 생각되는 그 모습은 모델 본인이 가진 원래의 모습 중 한 단면이다. “저는 그 모습을 잘 찾아낸 것뿐이죠”라는 박상훈 작가. 억지로 애쓰지 않고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편안한 그의 사진이 정말 고맙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글 / 이연우 기자 ■사진 / 민영주
17대 대통령 당선인 이명박! 대통령이 되기까지
2008. 01. 28 화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제17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는 어린 시절 가난하고 힘들었지만 특유의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무사히 대학교까지 졸업했고, 이후 현대건설에 입사해 초고속승진으로 35세 CEO 자리에 올랐다. 이후 정치권에 입문해 2002년 서울시장을 역임하면서 ‘청계천 복원사업’ 등 괄목할 만한 성과로 국민들에게 그 능력을 인정받으며 제17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이명박 당선자의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삶의 여정을 살펴본다. “경제 살리는 대통령 되겠다” 어느 때보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제17대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가 드디어 막을 내렸다. 이로써 대한민국의 민심을 뒤흔들던 ‘대선 열풍’은 한 차례 폭풍우처럼 사라지고, 이제 국민들은 새로운 시대를 준비할 일만 남았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당선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국민을 섬기겠으며,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 경제를 반드시 살리겠다”며 당선 소감을 밝혔다. ‘반드시 경제를 살리겠다’는 것이 이 당선자가 여러 가지 비리 연루 의혹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유 중 하나다. “침체된 경제를 살려달라”는 국민의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는 것. 그렇다면 국민들이 이 당선자에게 이토록 ‘경제 활성화’를 기대하는 이유가 뭘까. 국민들이 이 당선자를 신뢰하는 첫 번째 이유는 바로 드라마보다 더 격정적인 인생 여정에 있다. 이 때문에 이 당선자를 모델로 하는 TV 드라마가 두 편이나 제작되기도 했다. 가난한 시골 출신인 이 당선자는 중학교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길거리에서 풀빵 장사를 하면서 돈을 벌기 시작했다. 이후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부모님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 마쳤다. 대학 졸업 이후, 현대건설에 입사한 이 당선자는 선천적인 성실함과 저돌적인 추진력으로 단시간에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결국 29세에 이사로 승진, 35세라는 젊은 나이에 현대건설의 CEO가 됐다. 이 당선자는 당시, 뛰어난 사업수완으로 대형 공사를 수차례 따내면서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총애를 받았다. 부인인 ‘김윤옥 여사’와 결혼한 것도 당선자가 현대건설에서 이사로 재직할 때였다. 불도저 같은 추진력을 가진 CEO 출신 대통령 사업가로서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으며, 인생의 탄탄대로를 걷던 그가 정치권에 발을 들인 것은 지난 1992년 당시 신한국당 대표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전국구 공천을 통해서다. 이후 이명박 당선자는 1995년과 1998년 두 번이나 서울시장에 도전했으나 고배를 마신 뒤 미국 연수 길에 올랐다가, 2002년 세 번째 도전 만에 서울시장 자리에 올랐다. 그는 서울시장 선거공약이었던 당시 ‘청계천 복원사업’을 중심으로 ‘버스 전용 차선제’, ‘서울숲 조성’ 등을 과감하고 발 빠르게 행동에 옮겼다. 이후 서울 청계천은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되살아났고, ‘버스 전용 차선제’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시민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사람들은 이명박 당선자를 두고 “역시 건설회사 사장답다”, “불도저라는 별명이 그냥 생긴 게 아니다”, “추진력이 정말 뛰어나다”며 긍정적인 평가를 했다. 이렇게 서울시장 재임 당시, 시민들로부터 ‘추진력 강하고 능력 있는 CEO 출신 시장’이라는 인정을 받은 이 당선자는 자신감을 얻어 바로 대권 행보를 시작했다. 이명박 당선자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투톱 체제를 구축하며, 국민에게 지지를 얻었고, 2007년 8월 경선에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게 승리를 거두면서 당당하게 한나라당 대선 후보가 됐다. 이후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대선 출마 선언과 BBK 비리 연루 의혹이 대두되면서, 이 당선자의 대선 행보에 암운이 드리워지지 않을까 염려했다. 하지만 결국 검찰의 ‘무혐의’ 발표와 ‘경제를 살려달라’는 국민들의 염원이 합쳐지면서 이 당선자는 2007년 12월 19일 ‘청와대 입성’에 성공했다. 이명박 당선자는 당선 직후 “건국과 산업화, 민주화를 넘어 선진화로 가야 한다”면서 새로운 정부는 ‘경제의 선진화’에 무엇보다 주력할 것임을 밝히고, 이어 “한반도 비핵화를 통해 남북은 새로운 협력의 시대를 열어갈 것”이라고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다. 이 당선자의 주요 공약은 10가지다. 이 당선자의 대표 공약은 ‘한반도 대운하’다. 기존 하천을 토대로 남한에 2100km, 북한에 1000km를 연결하는 운하를 만들어 경제 회생의 계기로 삼자는 것이다. 이는 환경단체 반대, 효율성 등 여러 가지 논란의 소지가 있어 발표 당시부터 많은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 당선자는 현재 4%대에 머물러 있는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을 7%’까지 끌어올리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또 노무현 정부 때 유난히 침체됐던 ‘부동산정책’ 또한 사람들의 주요 관심거리다. 이 당선자는 ‘부동산 규제를 완화’하고, 다양한 형태의 주택 공급을 늘리는 것을 기본으로 한 ‘부동산정책’을 공약으로 내놓았다. 이밖에 ‘주택담보대출 금리인하’, ‘공교육 내실화’, ‘중소기업 맞춤형 지원’, ‘세계 최강 디지털 코리아’, ‘빈곤층 계층 할당제’, ‘실리 외교’ 등을 주요 공약 정책으로 내놓았다. 1천1백만 표를 얻어 50%에 가까운 지지율로 대통령에 당선된, 이명박 당선자. 경제 침체가 길어지면서 늘 진취적인 행보를 펼쳐온 이 당선자에 대한 국민의 기대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불도저 같은 추진력’을 가진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가 지치고 힘들어하는 국민들에게 얼마나 ‘숨 쉴 수 있는 숨통’을 틔워줄 수 있을지 앞으로의 5년이 주목된다. 예비 퍼스트레이디, 김윤옥 여사의 ‘그림자’ 내조이명박 당선자가 대통령이 되기까지는 부인 김윤옥 여사의 ‘그림자 내조’가 톡톡히 한몫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당선자가 현대건설 이사로 재직할 당시 결혼한 김윤옥 여사는 이화여대 ‘메이퀸’ 출신으로 미모와 지성을 겸비했다. 하지만 이 당선자와 결혼한 이후, 김 여사의 일상은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이 당선자가 젊은 나이에 현대건설의 CEO가 됐기 때문에 늘 회사에서 살다시피 했다. 하지만 “중역의 부인은 참는 것부터 배워야 한다”는 친정어머니의 말씀을 새기며, 이 당선자를 위한 ‘맞춤’ 내조를 하게 됐다고 한다. 평소 털털하고, 통이 큰 성격으로 유명한 김 여사는 슬하에 1남 3녀를 두고 있으며, 남편 대신 자식들에게는 매우 엄한 교육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김 여사는 이 당선자에게 직접적인 고언을 잘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경선을 할 때도 “여자 이기는 남자 없다”며 “박 대표와 싸우지 말 것”을 조언했다. 이런 조언 덕분인지 이 당선자는 결국 박 대표와의 경선에서 승리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공식 선거운동 기간이었던 지난 22일 동안, 김 여사는 이명박 당선자가 가지 못하는 ‘재래시장’과 ‘여성, 독거노인’들을 찾아가 지원 유세 활동을 벌였다. 특히 김 여사는 노인 복지에 많은 관심을 보이며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이 당선자가 회사에 입사해 월급을 받았을 때는 이미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효도를 할 수가 없었다”며 “그래서 ‘노인 복지’에 관심이 많다”며 지지를 호소했다. 김 여사는 추운 날씨에도 하루에 보통 5~10개 정도의 지원 유세 일정을 소화하며, 이명박 당선자를 위한 ‘한 표’를 호소했으니, 가히 대통령 당선의 숨은 공로자라 할 만하다. 이 당선자가 대통령으로 뽑히던 날은 이들의 결혼기념일임과 동시에 이명박 당선자의 생일인 것으로 알려져 화제를 모았다. 결혼기념일을 잊지 않기 위해 이 당선자의 생일에 결혼 날짜를 잡았는데, 공교롭게 대선 투표일과도 겹치게 된 것이다. 이보다 기막힌 우연이 또 어디에 있을까. 평소 남편을 위해 고언도 아끼지 않는 털털한 성격의 김윤옥 여사가 앞으로 어떤 ‘영부인’의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된다. ■ 글 / 김민주 기자 ■사진 / 이성훈, 경향신문 포토뱅크
경제 대통령 꿈꾸는 이명박 그를 일궈낸 부모의 이야기
2007. 04. 17 화제
37세의 나이로 현대건설 대표이사에 취임해 최장기 샐러리맨 CEO라는 역사를 남긴 이명박 전 서울시장. 성공한 리더십의 대표주자로 불리는 그는 지난 2월 출간된 이명박의 마음속 이야기 「새벽 다섯시」를 통해 어려움이 닥칠 때 도전하고 극복하는 힘을 주었던 주인공으로 어머니와 아버지를 꼽았다. 시련을 열정으로 이끌어준 이 전 시장의 부모를 통해 진정한 리더십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어머니의 리더십 당당하라, 직시하라. 정면 돌파 없이는 이길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학교와 나를 가로막은 장벽은 바로 어머니다. 어머니는 여러 자녀를 공부시키다가 도중 하차하는 것보다는 다른 자식들이 희생해서라도 한 명을 제대로 공부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계셨다. 제일 똑똑한 자식에게 학비를 몰아주고, 그가 성공했을 때 남은 형제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그러나 거기서 희생자가 되었던 내 입장에서 보면 억울하기까지 한 일이다. 나의 학창 시절은 어머니의 ‘선택’에서 제외된 채 그렇게 흘러갔다. 그리고 10년 후, 20년 후 현대그룹이라는 대기업의 최고 책임자 자리에서 수많은 직원을 거느리면서, 또 공직의 임무를 맡으며 새로운 인재를 뽑는 자리에서 이따금 이런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그 옛날, 어머니라면 어떤 선택을 하셨을까. 어머니의 무서운 길거리 특강 10대에 이미 거리 한복판에서 세상 사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 나는, 고등학교에 다니면서는 뻥튀기 장사를 했다. 장사는 좀 나아졌지만 뻥튀기보다 더 힘든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여학교 앞에 나가 자리를 잡고 기계의 불을 조절해가며 뻥튀기를 만들어내야 한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 불거졌다. 아침 해는 야속하게도 기계를 돌리는 시커먼 손, 남루한 교복 차림, 땟국으로 얼룩진 내 얼굴을 훤히 비추는 것이다. ‘저 여학생들이 나를 보면 뭐라 할까….’ 아무리 자신을 추슬러도 뻥튀기 장사꾼 이전에 지나가는 여학생들과 같은 또래 남학생이라는 입장이 마음을 짓눌렀다. 내 앞을 지나치는 수많은 시선을 받을 때마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너무 창피한 나머지 여학생들이 많이 지나가는 등교 시간에는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 시선을 피하기도 했다. 그들의 눈을 피할 방법은 없을까? 전전긍긍하다 보니 그럴 듯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래!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구해 쓰는 거야, 밀짚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장사를 하면 그들 시선과 마주칠 염려가 없을 거다. 그렇게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뻥튀기 기계를 돌리고 있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호통소리가 들렸다. “지금 뭐하는 기고? 장사하는 놈이 웬 밀짚모자고?” 어머니는 내 머리를 쥐어박으며 버럭 야단을 치셨다. 사람들이 지나가는 거리에서 큰소리로 야단맞는 게 창피하고 서럽기도 해서 눈물이 핑 돌았다. 그때 어머니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말씀하셨다. “얘야, 사는 사람하고 파는 사람하고 시선이 마주쳐야 장사가 되는 기다. 상대방의 눈을 피하면서 어찌 물건을 팔래? 서로 마주치면 사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기는 기라.” 어머니는 야단치는 것이 아니었다. 장사를 하려면 사람들 눈을 마주 보고 당당하게 해라. 그래야 장사가 된다! 정면으로 부딪쳐라. 그래야 산다, 그래야 이긴다! 어머니의 매서운 ‘길거리 특강’은 내가 더 이상 밀짚모자를 쓰지 않는 것으로 끝이 났다. 사춘기에 맞닥뜨린 처절한 삶의 체험 현장 그 시절 나는 거리에서 두 부류의 사람을 경험했다. 내게는 곧 처절한 삶의 체험 현장이기도 했다. “학생, 고생이 많네. 몇 살이고? 부모님은 뭐 하시나? 공부는 잘하고? 그래, 열심히 해야지. 앞으로 좋은 일 안 있겠나”라며 좋은 말을 잔뜩 늘어놓다가 휭 하니 가버리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내게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게는 수치심만 안겨줄 뿐이다. 그런 사람을 만나는 날이면 한동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애를 먹었다. 반대로 힘을 실어준 사람도 있다. “이거 모두 얼마지?”라고 한마디 묻고는 말없이 뻥튀기를 싸들고 사라진다.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상대방을 안쓰럽게 생각하는 마음, 도와주고 싶은 마음, 그러면서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 배려를 느꼈다. 그런 사람을 만나는 날엔 어려움을 극복할 용기가 솟았고, 좀더 잘해야겠다는 마음도 생겼다. 생각해보면 나는 이미 10대 이전부터 두 부류의 사람들을 겪으며 살아왔다. 어린 눈에도 세상은 불공평해 보였다. 누구는 열심히 일하는데도 배를 곯고, 누구는 일하지 않는데도 잘 먹고 잘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리가 사는 방 바로 옆에는 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거지 가족이 살았는데, 그 집 어른들이 마을을 한 바퀴 휙 돌고 오면 밥상에는 음식들이 한상 차려졌다. 우리 부모는 몸이 부서지게 돈을 버는데도 사는 모양으로 보자면 옆집 거지만도 못했다. 그렇게 모두가 열심히 일하는데 우리 집은 왜 이 모양일까. 뒤늦게 진가를 알게 된 부모님의 가정경영 1998년 늦가을, 김포공항으로 향하고 있었다. 미국이 준비하는 21세기의 국가 경영에 대해 공부하고 싶었던 차에 워싱턴 D.C.의 조지워싱턴대학에서 객원연구원으로 와달라는 초청을 받고 1년간의 연구 과정을 갖기로 한 것이다. 그날도 LA 교포를 위한 시국 강연을 끝내고 홀을 빠져나오려는데, 늙수그레한 한 남자가 주최 측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주위에서 애써 만류해도 상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회장님을 잠깐만 만나게 해달라”고 우기고 있었다. 사람을 찾는 데는 무슨 이유가 있을 것 같아 가까이 다가갔다. 박 아무개라고 소개하는데, 알고 보니 어릴 적 절간집에 함께 살던 이웃이었다. 차 한잔을 앞에 두고 어릴 적 시절로 돌아가고 있었다. “어렸을 때 저는 밥도 제때 먹고 옷도 회장님보다 나은 거 입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이 회장님 집보다 더 잘사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이날 이때까지 저는 내 입, 내 자식 입에 밥을 넣어주는 일에만 매달려 살고 있는데, 회장님은 세상의 지도자가 되셨습니다.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어려웠던 그 시절 우리 부모님은 배고프다면 더운밥을 얻어다 먹이고, 추워하면 두꺼운 옷을 얻어다 입혔습니다. 그런데 회장님 부모는 안 그러셨어요. 얻어 입은 우리는 아직까지 제 입만 채우고 살고 있고, 회장님 형제들은 다 잘되셨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회장님 부모님께선 안 그러셨다”는 그의 말은 맞다. 어머니의 강직한 성품으론 아무리 굶주리고 헐벗어도 남의 것을 거저 구해온다거나 얻어다 입히는 일이 통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따뜻한 밥을 얻어다 먹이지 않았다. 아무리 배고파도, 추위에 떨어도 옷을 기워 입힐망정 얻어다 입히지 않았다. 야속하다 싶을 정도로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세상 사는 법을 익히도록 놔두셨다. 말 이전에 눈빛으로, 눈빛 이전에 기도로 세상의 어려움을 뛰어넘게 하셨다. 부족함을 통해 오히려 그것을 뛰어넘는 힘을 알려주려 하셨고, 형편이 어려울 때면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으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을 가르쳐주셨다. 힘들던 시절의 추억담을 나누면서 나와 그 사이엔 회한의 웃음이 번져갔다. 나도 잘 모르고 지내왔는데, 그 옛날 어머니에게서 어떻게 사는 것이 자식을 위하는 길인지를 찾아낸 그 친구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렇게 말했다. “그 어른을 생각하면 복 받는 길이 무엇인지 알 것 같습니다.”아버지의 리더십 가난은 삶을 불편하게 하지만, 거지 근성만큼 위험한 것은 아니다 아버지는 어떻게든 살림에 보탬이 될 만한 일을 찾으려고 애쓰셨다. 포항의 판자촌 시절에는 고물상도 하셨다.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니며 안 쓰는 물건을 수집해 단칸방 뒤에 정성껏 쌓아두곤 하셨다. 전쟁 통에 괜찮은 물건이라고 해봐야 몇 개 되지 않았고, 그나마 손질해서 손에 넣을 만한 돈으로 바뀌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이웃 소년이 먹을 것을 얻으러 우리 집 근처를 기웃거렸다. 아버지는 윗옷도 걸치지 않고 구걸하는 아이에게 당신이 팔아야 할 옷가지와 돈까지 쥐여주고서는 한마디 하셨다. “이놈아! 아무리 구걸을 하고 다녀도 옷은 입고 다녀야 할 것 아니냐. 이걸로 부모님께 국이라도 끓여드려라.” 건너편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어머니가 체념 반 확신 반 말씀하신다. “아부지를 봐라. 우리 대代에는 못 누려도 후손이 복을 받을 기다.” 어머니는 마음이 부자면 나중에 정말로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공부만 잘하면 뭐 해 가정교육이 잘돼 있어야지 아버지는 세상의 모든 가치관이 재물에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신 것 같다. 그랬다면 자식들에게 미안해서 고개를 못 드셨을 것이다. 못 먹이고 못 가르쳐도 미안하다는 얘기를 하신 적이 없다. 어려운 가정 형편이었지만 자식이 바로 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신 아버지는, 학교 공부를 제대로 못 시켜서 그랬는지 평상시 학교 공부라는 말 대신 ‘가정교육’이라는 용어를 자주 쓰셨다. “공부만 잘하면 뭐 해? 가정교육이 잘돼 있어야지.” 어머니는 아버지의 그 말씀이 듣기가 민망했는지 “부모로서 뭐 그리 잘해준 게 있다고 가정교육, 가정교육 하시느냐”고 따져 묻기도 했지만 아버지는 들은 척도 안 하셨다. 한번은 마당 한쪽에 앉아 풀빵 틀을 닦는데 아버지가 곁으로 다가오셨다. “박아, 힘들지. 하지만 가난보다 더 무서운 게 있다. 세상을 둘러봐라. 잘 먹고 잘살겠다고 남을 속이고 거짓과 타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설령 가난에서 벗어난다 해도 자기 이득밖에 챙길 줄 모르는 사람들이 이 나라를 얼마나 어렵게 하는가를….” 아버지는 거지 근성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가난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셨다. “가난보다 더 무서운 게 거지 근성이라는 거다. 물론 가난은 우리를 불편하게 하지만 거지 근성처럼 위험한 것은 아니다.” 세상은 나 혼자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정직이 중요하다… 거지 근성을 갖게 되면 정직을 포기해야 한다… 그것은 결국 세상을 잃는 것과 다름없다…. 이런 나의 신념은 아버지를 보며 배웠다. 아버지는 언제나 상생의 이치를 마음에 심어주셨다. “나만을 위해 이 세상을 살아간다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보다 더 적게 갖는 것에 불만이 생기는 법이다. 그래서 더 많이 갖기 위해 다른 사람을 속이게 돼. 하지만 그래서는 행복할 수 없다.” 아버지가 일깨워준 상생의 이치 사실 요즘 부모들은 자식에게 해줄 것을 다 해주고도 큰소리 한번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또 잘해주는 아버지에게 감사하는 자식도 드물다. 아버지 어머니는 어려운데 자식은 전혀 어렵지 않고, 부모는 가난한데 자식은 부자인 가정이 많다. 또 이웃이 불우할 때 그 어려움을 외면하는 사람들도 있다. 평소 아버지가 늘 들려주신 말씀대로 자기 이득만 내세워서는 나라가 잘살 수 없다. 서울시장에 취임해서의 일이다. 옛날에 내가 살던 달동네를 찾았다. 수십 년 세월이 흘렀건만 비탈길 단칸방은 옛 모습 그대로다. 누가 살까 궁금해 문을 두드려보았다. 하지만 아무런 기척이 없다. 동네사람들은 치매로 거동을 못하는 노인이 사신다며 안쓰러워했다. 주위 분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문을 열었다. 컴컴한 방에는 노인 한 분이 벽을 마주하고 있다. 큰 충격을 받았다. 옛날에 살던 곳이 처량한 모습 그대로 있다는 것에 놀랐다. 한낮인데도 어두컴컴한 그 방은 세상과 단절돼 있었다. 어둠에서 나올 수 없는 사람들, 그들이 우리의 이웃에 산다. 설령 가족이 있다 하더라도 대부분이 기초생활수급자들이니 부모를 모시는 데까지 손이 미치기 어렵다. 그렇다 보니 달동네 꼭대기 단칸방에서 삶의 악순환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복지관련 시 직원들과 이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저소득층 중증 치매 노인들을 모실 수 있는 요양소를 지어 자립이 어려운 분들을 모실 수 있는 제도를 모색해보았다. 노숙자 일자리 갖기, 청년 실업자를 위한 프로젝트 등 정신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삶의 의지를 북돋워줄 수 있는 몇 가지 사업을 동시에 시작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사회 양극화의 원인과 해결 방안을 찾으려 하지만, 결국 양극화된 사회에 희망을 주는 것은 일자리와 복지 문제이다. 양극화 해소는 어려운 사람에게 나눠주고 도와주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일자리를 구해서 희망을 갖게 되면 사회 불평등은 자연히 사라진다. 국가도 가정을 기반으로 하는 커다란 공동체이므로 국민이 어려워하면 국가도 어려움을 함께 느끼고, 나라가 힘들어지면 국민도 함께 나라의 고통을 나눌 마음이 필요하다. 희망은 바로 그 자리에서 싹을 틔운다. * 본문은 「이명박의 마음속 이야기 - 새벽 다섯시」(이화복 엮음·기획출판 책장)에서 발췌했습니다. ■기획 / 장회정 기자 ■사진 / 박형주 · 기획출판 책장 제공
[유인경기자가 만난 사람] 취임 2년, 버스 중심 대중교통 개편 이명박 서울시장
2004. 07. 01 화제
“말단 회사원에서 대기업 사장 거쳐 서울시장까지, 소신 있는 삶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이명박 서울시장은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만큼 바쁘다. 출근 길, 그는 소시민들의 삶을 몸으로 느끼기 위해 지하철을 이용한다. 요즘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오는 7월 1일 시작되는 버스 중심의 대중교통 개편에 쏠려있다. 시민들에게 “어유, 수고 많습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면 뿌듯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는 이명박 서울시장의 취임 2년의 행보. #서울시민인 것이 자랑스럽게 하겠다 환갑이 넘은 영감님이 피부도 팽팽하고 걸음걸이도 청년처럼 활기차다. 목소리마저 짜랑짜랑 쇠기운이 느껴진다. 하루에 4시간도 못 잔다는데, 그리고 하루에 10여 곳의 행사에 참여하고 결제할 서류만도 수십 가지라는데 피곤한 기색도 없다. 산삼을 먹는 걸까? 아니면 몰래 마사지라도 받는 걸까? 이명박 시장을 만나면 그런 의구심이 든다. 청계천 복개 공사 시공 1년, 서울시장 취임 2년 그리고 버스 중심의 대중교통 체계 개편을 시행하는 7월 1일을 앞두고 이명박 시장의 스케줄은 상상을 초월한다. 각종 매스컴에 등장해 홍보도 하고, 다채로운 행사에 참여하느라 10분 단위로 스케줄이 짜여 있다. 이야기를 나눠보면 그 팽팽한 젊음의 비결을 알 것 같다. 즐겁고 신나기 때문이다. 그 어떤 보약이나 화장품보다 좋은 것이 신바람 아닌가. “요즘 서울시민들의 반응이 좋아 보람을 느낍니다. 작년에 청계천 복개 공사를 시작할 때만 해도 다들 불안해하고 걱정도 많이 하셨는데, 막상 공사가 진행되어도 교통대란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또 시청 앞 광장에서 파란 잔디를 밟고 서울 한복판을 여기저기 맘대로 걸어다닐 수 있으니 요즘 저를 만나면 ‘아유, 수고 많습니다’라고 악수를 청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정말 저를 믿고 협조해준 서울시민들께 감사드립니다.” ‘서울시민들에게 감사한다’고 하면서도 얼굴에 자랑스러움이 가득하다. 황인자 여성정책보좌관은 “여성부 등 다른 부처에서도 일했지만 서울시에서 일을 많이 배우고 진짜 일을 많이 한다”고 전했다. 일벌레 시장이 일도 많이 시키고, 수시로 체크하고, 또 안 되는 일을 되게 하라고 자극을 주기 때문이다. 이 시장은 여성 정책에도 밝고, 특히 서울 여성들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여성들의 국제화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하긴 딸이 셋이나 있으니 여성들의 권익이나 미래에 애정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게다. 이명박 시장은 무슨 질문을 해도 거침이 없고, 어떤 비난을 받아도 기죽지 않고, 대기업 사장 출신이 아니라 교수 출신처럼 적절한 비유와 사례를 들어가며 이야기를 잘한다. 그래서인지 좀 마음에 안 드는 질문을 하면 “그런 유치한 질문에는 답하기도 싫습니다” 등의 대답을 하는 것도 목격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도 옆집 아저씨처럼 아주 편안한 분위기를 만든다. 장사하며 야간 상고를 다니던 소년이 대기업 사장을 거쳐 서울시장에 되어서인지 소년 같은 미소부터 노인의 신중함, 소탈함, 주변을 완벽히 제압하는 카리스마, 앙드레 김의 옷을 입고 패션쇼에 나서거나 시트콤에 등장하는 쇼맨십, 곳곳에 필요한 자료와 책을 두고 수시로 공부하는 학구열까지 온몸으로 표현해낸다. 혜화동 시장 공관에서 시청까지 출근길에는 지하철을 타고 다닌다는 이 시장이 요즘 제일 애정을 쏟는 것이 버스다. 얼마 전엔 버스 옷을 갈아입히더니 7월 1일부터 버스 노선도 대폭 바꾸고 도로 가운데에 버스 전용차선을 만들었다. 한글학자들은 버스에도 영어를 쓰고, 너무 영어를 남발한다고 비난하지만 이 시장은 “서울을 국제도시로 만들고 서울 시민들에게 기초 교양 영어 공부를 시키는 것”이라며 전혀 기죽지 않는다. #행운도 만들어가는 노력파 한 서울시청 직원은 “우리 시장님은 하늘이 도우시는 분”이라고 했다. 아부성 발언은 하지 말라고 했더니 구체적인 사례를 든다. “시청이 주관하는 행사가 좀 많습니까? 특히 야외에서 행사를 할 때는 날씨에 신경이 쓰이죠. 그런데 날씨가 아무리 궂어도 이 시장님이 행사에 참석해 가위를 들기만 하면 말짱하게 갠단 말이에요. 작년 5월에 시청 앞 광장에서 ‘하이 서울 페스티벌’을 열었을 때도 비가 부슬부슬 내렸구요. 청계천 고가를 허무는 날, 일기예보에는 오후에 비가 온다고 하더라구요. 정말 역사적인 날이고 말도 많은 행사라 비까지 내리면 어떡하나 걱정이 태산 같았는데 정작 시장님은 태연하신 거예요. “괜찮다, 난 현대에 있을 때도 행사에 참석해서 비가 온 적이 없다. 예정대로 진행하자” 하시더군요. 그런데 신기하게 행사중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고 행사가 끝나자 비가 내렸습니다.” 교회 장로여서 하나님이 편애하는 걸까? 그러나 이명박 시장은 운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모든 걸 치밀히 조사하고 철저히 대안을 준비하면 실패가 없다는 것이다. 행사 날짜를 정할 때도 몇 년 동안의 날씨 통계를 보고 준비해 확률적으로 비올 날을 피한다. 청계천 공사, 시청 앞 광장, 버스 노선 개편도 하루아침에 만든 것이 아니란다. 청계천은 서울시장이 되기 전부터 개인적으로 역사며 관련 자료를 공부했고, 주변 상인들과 만나 설득도 했다. 치밀하게 검토하고 연구하고 준비하면 운은 따라오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그를 ‘여우 불도저’라고 했다. 불도저처럼 추진력이 강하지만, 막무가내식의 밀어붙이기가 아니라 영리하고 주도면밀한 여우 같은 면모를 보인다는 설명도 붙였다. 이 시장은 “여우가 아니라 컴퓨터 불도저, 컴도저란 말은 들었다”고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별명을 전해줬다. 이명박 시장의 왕팬이란 아줌마는 이렇게 말했다. “남자가 박력이 있어야 하잖아요. 이 시장은 22만 명이나 된다는 청계천 주변 상인들이며 수시로 데모하는 노점상들을 설득해 청계천을 뒤집었잖아요. 한다면 한다! 이런 정신도 멋있구요. 또 좀 잘난 척하는 것 같긴 해도 대통령이건 누구건 무서워하지 않고 소신 있게 말하는 것도 근사해 보여요. 무엇보다 집안은 가난한데 머리는 있는 이들이 거치는 길, 고시 공부하고 변호사 되어 정치하는 과정을 안 밟고 말단 회사원으로 시작해 사장 자리에 오른 게 마음에 들어요. 물론 미남은 아니지만….” 「신화는 없다」란 그의 자서전에는 물론 드라마 ‘야망의 세월’ 등에서 그의 소년기와 청춘기가 묘사된다. 제일 공부 잘하는 형만 밀어주느라 동생들은 고등학교조차 못 보내는 가난한 집안. 야간 상고에 적을 두고 생계를 유지하느라 10대에 온갖 장사를 다 해본 것이 소년 이명박이다. 그런데 그는 고시 공부를 하지 않은 것 역시 ‘너무 가난해서’라고 한다. “우리 집안이 권력에 한이 맺혀 출세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기도 했지만, 고시 공부를 하려면 공부에만 몰두하도록 누군가 먹여주고 입혀줘야 할 것 아닙니까. 난 밥값을 해결해야 해서 고시 공부할 엄두도 못 냈습니다.” 그렇게 얻어진 생활력으로 그는 현대건설의 신화를 이뤄냈고, 재산도 많이 축적했다. 지난해 그가 신고한 총 재산은 1백88억원에 이른다. 부럽기도 하지만 은근히 심술이 나서 “부자가 천국 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보다 어렵다는데 돈이 너무 많은 것 아니냐”고 시비를 걸었다. “부자라는 건 나의 자랑입니다. 난 특히 청년들에게 열심히 노력하면 나처럼 출세도 하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싶습니다. 가난을 목표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난 정치인들이 재산 없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위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을 도와줄 돈도 못 벌어본 사람들이 누굴 위해 무슨 일을 하겠다는 겁니까?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가 돈 많다고 욕을 먹던가요? 부자가 욕을 먹는 사회는 그만큼 부패하고 폐쇄적이란 뜻입니다.” 돈 많다고 자랑하면서 나눠주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너무 자신만만하고 당당해서 좀 얄미워 보이는 이명박 시장. 하지만 자꾸 이야기를 하다 보니 처음에는 못생겨 보이던 그의 얼굴이 잘생기게, 심지어 섹시하게 보였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열정과 자신감이 그를 빛나게 하나보다. Profile 경향신문사 「뉴스메이커」 편집장인 유인경 기자는  MBC-TV ‘아주 특별한 아침’, KBS-2FM ‘해피 먼데이’ 등에 고정 출연중이다. KBS-1TV ‘아침마당’  ‘100인 토론’ 등에도 얼굴을 내밀고 있으며, 인간미 넘치는 입담으로 꽤 많은 아줌마 팬들의 환호를 받고 있다. 물론 아저씨 팬도 많다. 글 / 유인경(뉴스메이커 부장)  사진 / 김석구 기자(경향신문 사진부)
유인경기자가 만난 사람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