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총 49 건 검색)
- “내가 이병철 양자” 허경영 ‘허위사실 유죄’…10년간 출마 못한다
- 2024. 06. 09 21:00사회
- ... 확정했다. 허 대표는 2022년 제20대 대선에 출마해 인터넷 매체와 TV 방송 연설 등에서 “나는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양자이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비선 정책보좌역이었다”는 취지로 말해 허위사실...
-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최애 작가’는?
- 2024. 05. 29 11:03문화
- ... 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행운”이라 여기며 눈 쌓인 설악의 풍경을 ‘잔설’ 속에 담아냈다. ‘이병철 회장의 최애’ 문학진(1924~2019)은 한 작가의 작품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의 상반된 화풍의...
- 이병철이건희도상봉박수근구상회화
- 이병철 첫 사업 ‘협동정미소’ 여기였네
- 2023. 12. 20 21:22지역
- ... 내서면 회원리 403번지’(현재 창원시 회원동 403번지)로 명시돼 있다. 대표직은 박정원씨로 이병철 회장의 동업자이다. <만지선 상공명감>이 발행된 시점(1938년 9월)은 이 회장이 대구에서...
- 삼성 이병철 회장 첫 사업지 ‘마산 협동정미소’ 발굴…지금은 뭐 할까
- 2023. 12. 20 11:44지역
- ... 적혀 있는 ‘만지선 상공명감’. 박영주 경남대 박물관 연구위원 제공 삼성그룹의 창업주인 호암 이병철 창업회장(1910~1987)의 첫 사업지인 마산 협동정미소의 위치가 특정된 자료가 처음으로 발굴됐다....
스포츠경향(총 11 건 검색)
- 경희대한방병원 이병철 교수팀, ‘대시호탕’의 고지혈증 개선 효과 확인
- 2023. 10. 30 09:24 생활
- 고지혈증 관리·치료의 새로운 선택지 될 수 있어 경희대한방병원 신장내분비내과 이병철 교수 경희대한방병원 신장내분비내과 이병철 교수팀이 한약 ‘대시호탕’의 고지혈증 관리 효과에 대한 연구를 진행, 연구결과를 SCIE급 저널인 헬리온(Heliyon)에 발표했다. 이번 연구는 경증 고지혈증 환자 60명(고혈압, 심혈관 질환과 같은 위험 요인 없이 저밀도 콜레스테롤이 130~189㎎/㎗ 사이)을 대상으로 무작위, 이중 맹검, 플라시보 대조 임상시험으로 진행됐다. 8주동안 하루에 3번 대시호탕 또는 효과가 없는 플라시보를 복용하게 했다. 그 결과, 플라시보 그룹에 비해 대시호탕을 복용한 그룹에서 저밀도 콜레스테롤(LDL-Cholesterol) 및 총콜레스테롤의 개선, 동맥경화 및 심혈관 질환의 위험 인자인 지단백콜레스테롤(apoB)의 감소가 관찰됐다. 경희대한방병원 신장내분비내과 이병철 교수는 “대시호탕은 시호, 황금 등의 한약재로 구성된 건강보험용 한약제제”라며 “이번 연구를 통해 심각한 부작용 없이 저밀도 콜레스테롤을 낮추고 지단백콜레스테롤을 줄일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해당 연구는 보건산업진흥원의 한의약혁신기술개발사업의 지원으로 진행됐으며 논문 제목은 ‘이상지질혈증 환자에서의 대시호탕 LDL 콜레스테롤 개선 효과 : 무작위, 이중맹검, 위약 대조 실험(LDL cholesterol-lowering effect of Daeshiho-tang in patients with dyslipidemia:A pilot randomized, double-blind, placebo-controlled trial)이다.
- [인터뷰]‘보이스킹’ 이병철 “내 1호 팬은 혜은이, 손 내밀어줘 감사”
- 2021. 07. 07 09:50 연예
- 가수 이병철이 11일 스포츠경향과 인터뷰에 앞서 본사 스튜디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1.6.11./정지윤 선임기자지지 않는 청춘이란 이런 것일까. MBN 오디션 프로그램 ‘보이스킹’ 참가자 이병철의 무대를 보며 든 생각이다. ‘보이스킹’은 이병철에게 일생일대의 기적이었다. 50세가 넘는 나이에 오디션은 언감생심 이랬던 주변의 말을 뒤집고 아들뻘인 20대 참가자들 사이에서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 기적을 꼭 쥐고 놓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그가 쌓아온 실력의 공이 컸다. 특유의 노련한 무대 매너와 퍼포먼스에도 흔들림 없는 가창력은 ‘이병철의 35년’이 어땠는지 대번에 느끼게 해줬다. 약점인 것만 같았던 오랜 세월이 주춧돌이 된 셈이다. ‘나이’라는 한계를 ‘자신감’으로 딛고 일어난 이병철의 칠전팔기 스토리가 스포츠경향에 전해졌다. 20대 참가자를 꺾고 당당히 다음 라운드에 진출한 그를 향해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보이스킹’에 35년 무명의 애환을 담았다는 이병철. 그가 흘린 땀처럼 푸른 청춘인 것이 없었다. “여러 오디션 방송 프로그램에 지원했지만 전부 나이 때문에 탈락했어요. 싱그러운 뉴페이스들이 많은데 굳이 저를 뽑을 이유가 없었던 거죠. 저 또한 이해하는지라 오디션에 참가하려는 욕심은 버려야겠다 싶었어요. 그 와중에 ‘보이스킹’ 오디션을 발견한 후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필사적으로 준비했어요. 예선에 떨어졌겠거니 생각하고 반쯤 포기했는데, 덜컥 합격해버렸지 뭐예요.(웃음)” 여러 번의 도전 끝에 얻은 결실이었으나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괜히 뽑았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선 첫 무대에 오르기까지 200%의 에너지를 준비해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신인 같은 열정이어도 세월엔 장사 없다고, 마음만큼 몸이 따라주진 못했다. “첫 번째 무대 곡으로 삼바 버전 ‘마음이 고와야지’를 선정했어요. 단조로운 곡에 빠른 리듬이 더해지니 대중들에게도 새롭게 다가올 것 같았어요. 문제는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추기엔 제 호흡이 딸렸어요. 결국 안무를 일부 생략하자는 제안도 받았는데, 그러기는 싫었어요. 쓰러지기 전까진 해보자는 마인드였죠. 매일 아침 산에 올라 체력을 길렀고 밤마다 옥상에서 안무를 연습했어요.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가능해지더라고요. 1라운드 무대 ‘마음이 고와야지’를 끝낸 후 원곡 가수인 남진 선배도 ‘너 나이도 많은데 어떻게 이렇게 열정적으로 춤을 추니?’라며 놀라워했어요. 하늘 같은 선배의 곡을 재현하는 게 꽤 부담됐는데, 그렇게 말씀해주니 되레 힘이 났죠.” 1라운드는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동료 방송인 조영구와 함께해 더 빛나는 무대이기도 했다. 이병철과 조영구의 각별함은 십여 년 전부터 익히 유명했다. 당시 이병철은 지인의 사기로 사업에 실패하면서 인생의 밑바닥을 경험했다. 살던 집도, 사람들도 떠나면서 몸뿐만 아니라 마음마저 추웠던 날들이었단다. 그때 유일하게 손을 내민 이가 조영구였다. 조영구는 이병철에게 자신의 집을 기꺼이 내어주는 것도 모자라 앨범 발매 비용까지 지원해줬다. ‘보이스킹’에서의 합동 무대는 지난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이병철의 아이디어였다. “‘보이스킹’ 출연이 확정됐을 때 조영구 생각이 가장 먼저 났어요. 조영구에게 연락해 ‘보이스킹’에 출연한다고 말하니 처음엔 안 믿더라고요.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은 마음에 ‘보이스킹’ 1라운드 무대에 함께하자고 제안했어요. 각별한 사이인 만큼 함께 추억을 쌓고 싶었죠. 귀한 오디션 무대를 잘 장식할 수 있도록 조영구도 최선의 도움을 주고 싶어 했고요. 그런데 어째, 막상 본 무대에 오르니 저보다 조영구가 더 긴장하는 거예요. 방송 경력도 오래됐으면서…(웃음) 혹시나 본인이 제 무대를 망칠까봐 계속 걱정했대요.” 동료의 지원사격이 시너지가 된 것일까. 이병철은 2라운드에 진출해 또 한 번의 기적을 일궈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맞붙어야 할 상대는 우승 후보로 손꼽히는 아이돌 그룹 레인즈의 성리였다. 이번이야말로 무대에서 내려와야 할 순간일까. 이왕 이렇게 된 거 가장 자신 있는 곡으로 멋있게 끝맺음하자고 다짐했다. 그가 선곡한 곡은 ‘봄날은 간다’. 마지막으로 그간 고집해왔던 재기발랄한 이병철을 버리고 진짜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성리를 이겨야겠다는 생각 없이 마음을 내려놓고 2라운드에 임했어요. 대신 마지막 오디션 무대니까 최선을 다하자는 마인드였죠. 그렇게 최종 리허설에 올라 노래를 불렀는데, 아니 웬걸 심사위원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어요. 예상외로 제가 높은 음정까지 소화해버리니까 다들 놀란 거예요. 그때까지만 해도 ‘혹시?’라는 마음조차 없었어요. 그저 노래에만 온 정신을 집중했죠. 어느 정도였냐면, 본 무대에서 마지막 소절 ‘봄날은 간다’를 부를 때 갑자기 뇌가 정지되는 느낌이 오더라고요. 내가 노래를 부른 것인지 얼떨떨한 상황에서 ‘이제 끝이다’라는 마음가짐으로 결과를 기다렸어요. 반전은 생각지도 못했죠.” 가수 이병철이 11일 스포츠경향과 인터뷰에 앞서 본사 스튜디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정지윤 선임기자반전은 예상할 수 없을 때에 일어난다. 2라운드의 결과가 그랬다. 불과 33점 차로 성리를 앞선 것. 이젠 막판 스퍼트라는 생각을 뒤로하고 제대로 욕심을 부리고 싶었다. 과거 트로트계 싸이라는 수식어를 얻었던 추억을 되살려 이병철 표 ‘강남스타일’을 3라운드에 내세웠다. “당시 백댄서를 서른 명이나 세우겠다고 요청할 만큼 의욕이 앞섰어요. 백댄서들의 옷 치수를 일일이 잰 뒤 새벽 시장을 돌면서 직접 의상을 구했어요. 안무 동선도 맞추고 노래도 연습해야 하니 잠자는 시간이 사치였죠. 돌이켜보면 인생에 이렇게까지 열심히 살았던 적이 있었나 싶어요. 쉰이 넘은 나이에도 혼신의 힘을 불태울 순간이 있어 고마웠습니다.” 끝을 예상하면서도 막상 끝이 오지 않길 바랐던, ‘보이스킹’. 그 속에서 찬란했던 이병철의 드라마는 ‘강남스타일’로 마무리 됐다. 3라운드 경쟁자로 ‘보이스킹’ 절대 강자 가수 장철준을 만났기 때문. 실력과 팬덤이 탄탄한 상대였기에 준결승의 관문을 보장하기란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준결승 문턱을 뒤로 하고 작별 인사를 건네게 됐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동료들의 응원을 받으며 헛 살지 않은 인생이었음을 느낄 수 있었단다. “이번 방송을 계기로 주변 동료들로부터 ‘이병철, 다시 봤다’라는 말을 많이 들어요. 제게 이런 20대에 버금가는 에너지가 숨어 있을 줄 몰랐다면서요. 특히 혜은이 선배가 제게 큰 힘이 되어 주셨어요. 혜은이 선배는 무명이었던 저를 알아봐 준 분이에요. 열심히 하는 제 모습을 보고 팬이 됐다고 말씀하시곤 했어요. 혜은이 선배가 제 1호 팬이라니, 말씀만으로 황홀했죠. ‘보이스킹’ 출연 이후 제가 지금의 소속사를 만날 수 있게 힘도 써주셨어요. 나이 많은 가수와 같이 일하려는 소속사는 없으리라 생각했거든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가능하게 해준 혜은이 선배에게 감사드려요.” 전성기가 시작됐다는 찬사에 이병철은 “아직 달려야 할 길이 삼만 리”라며 겸손을 보였다. 삼만 리의 길을 걷겠다고 말하는 그의 표정에 지친 기색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보이스킹’으로 받은 사랑이 연료가 된 덕택이다. “지난 35년간 그랬듯 평소처럼 노래 부르면서 지내야죠.(웃음) 우선 ‘마지막 승부’를 부른 가수 김민교와 ‘결혼은 미친 짓이야’의 가수 양혜승가 트리오를 결성해 ‘휴게소’라는 노래를 준비 중이에요. 고속도로 휴게소를 주제로 부른 노래라 여름에 드라이브할 때 듣기 좋은 노래예요. 경쾌한 리듬이 매력인, 여행할 때 듣기 좋아요. 그리고 앞으론 정통 트로트 분야도 도전해 진중한 모습도 보여주려고 해요. ‘어머니’와 ‘황혼의 독백’이라는 발라드곡도 발매할 계획이니 기대해주세요.”
- 인터뷰1
- [스경포토] [파주시장기 봄나야구] LGD 이병철 게임MVP
- 2019. 05. 12 13:18 야구
- LG디스플레이 야9단 구원투수 이병철이 12일 경기도 파주 교하야구장에서 열린 2019 파주시장기 경향신문 봄날야구 용팔이의 16강전 경기에서 게임MVP에 선정돼 우리식품에서 제공하는 우리청결고춧가루를 선물받고 있다.
- [스경포토] [파주시장기 봄날야구] YS불스 유격수 이병철 ‘잘 잡았어’
- 2019. 04. 28 14:03 야구
- YS불스 유격수 이병철이 28일 경기도 파주 교하야구장에서 열린 2019 파주시장기 경향신문 봄날야구 광명죠스와의 경기에서 땅볼 타구를 잡고 있다.
레이디경향(총 1 건 검색)
- ‘환상의 짝꿍’ 조영구·이병철의 뜨거운 우정
- 2010. 07. 01 17:02 연예
- ㆍ쨍~ 하고 해 뜰 날 돌아왔단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이었지만 이제는 가족 그 이상으로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된 두 남자가 있다. 인생의 모든 것을 잃고 자살을 결심했을 때는 생명의 은인이 되어주었고, 추운 겨울날 보일러마저 꺼진 작은 방 안에서는 체온을 난로 삼은 채 한 목소리로 희망의 노래를 불렀다.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 가장 큰 위로가 되었던 조영구와 이병철의 남자 이야기. 일장춘몽으로 끝난 일본에서의 성공 스토리 아줌마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트로트계의 아이돌로 불리는 가수 이병철(42)은 20년의 무명 세월과 세 번의 자살 시도 끝에 비로소 이름 석자를 알리는 성공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한때 그는 일본에서 가장 잘나가는 인기 가수이자 음식점 3개를 직접 운영하며 대박을 터뜨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의 주인공이었다. 이병철은 한국이 아닌 일본에서 먼저 데뷔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DJ로 활동하며 음악에 관심을 가졌고 제대 후에 우연히 같은 동네에서 치과 의사로 일하던 재력가의 지원으로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활을 하게 됐다. “저의 음악적인 재능을 높이 사셨던 그분이 어느 날 미국에서 음악 공부를 하고 오지 않겠냐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막상 갑자기 먼 나라로 가려니까 겁이 좀 났죠. 그러다가 마침 일본으로 어학연수를 준비하던 친구를 만났고 그 친구와 함께 미국이 아닌 일본으로 갔어요.”(이병철) 비행기 값만 받고 빈손으로 무작정 떠났기에 현지에서의 생활은 오로지 그의 몫이었다. 낮에는 어학연수를 받으며 일본어를 배웠고 밤에는 도시락 공장과 횟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와 용돈을 벌었다. “1988년 당시에 한 달 일해서 6만 엔을 받았어요. 4만 엔은 학비, 1만 엔은 교통비 그리고 나머지 1만 엔으로 생활했죠. 특히 그때 일본에서는 바나나를 100엔어치만 사도 두고두고 먹을 만큼 꽤 많았는데 세 끼니를 모두 밥 대신 바나나로 때웠어요. 질릴 정도로 바나나만 먹고 버텼어요.”(이병철) 그 사이 그는 어학연수를 마치고 현지의 한 대학에 입학해 실용음악을 공부했고 자신의 재능과 전공을 살려 음악 공연에 뛰어들었다. 클럽이나 선술집을 돌아다니며 노래를 불렀고 그의 노래는 현장에서 그대로 녹음이 된 채 테이프로 다시 팔렸다. “한 달에 30만 엔씩 벌었고 손님들에게 받는 팁도 짭짤했어요. 주위에 입소문이 나서 저를 보기 위해 몰려드는 손님도 날이 갈수록 늘어났고요. 그렇게 살았더니 일본에 간 지 2년 만에 꽤 많은 돈을 모으게 되더라고요. 나중에는 독립해서 제 사업을 시작하게 됐어요.”(이병철) 그는 한국 음식을 전문적으로 팔면서 자신이 직접 손님들을 위해 노래도 할 수 있는 무대가 있는 작은 선술집을 열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의 노래를 듣기 위해 지방에서도 손님들이 찾아올 만큼 가게 앞은 늘 줄을 선 사람들로 붐볐고 심지어 그와 계약을 맺기 위해 비행기에 오른 한국 관계자들도 많았다. “그런데 그때 저는 당장 일본을 떠날 마음이 없었어요. 학교를 다니며 음악 공부도 더 해야 했고 가게도 잘되다 보니 쉽게 그곳 생활을 놓치기 싫었죠.”(이병철) 하지만 결국 한국으로 돌아와야 할 운명이었던 걸까. 수많은 한국 활동의 제안을 다 뿌리쳤던 그는 일본에서 가장 친하게 지냈던 친구의 집안일을 돕기 위해 다시 고국 땅을 밟았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그의 인생은 생각지도 못했던 내리막길로 치닫게 됐다. 세 번의 자살 시도 끝에 만난 ‘은인’ 조영구 재일교포 친구는 갑자기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남은 재산을 찾겠다며 난생처음으로 한국행을 택했고 이병철은 선뜻 통역을 자처하며 함께 한국으로 들어왔다. 그 후 1년을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친구를 도왔다. 하지만 그의 개인적인 삶은 점점 방향을 잃고 침몰하기 시작했다. “일본 가게를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놓고 들어온 상태였는데 제가 신경을 못 쓰다 보니 결국 망했어요. 친구는 한국에서 원하던 일을 잘 정리했지만 정작 저는 반대로 향해가고 있었어요. 친구 일을 돕다가 건설 일에 관심을 갖고 손을 댔다가 처절하게 무너졌어요.”(이병철) 수백억의 투자 비용이 필요했던 빌딩 관련 사업에 도전했지만 결과는 비참했다. 법적인 문제에 휘말리고 그동안 쌓아왔던 모든 것을 잃으며 실패의 쓴맛을 봤다. 결국 사업 실패에 이혼까지 겪고는 노숙자로 전전하며 인생의 밑바닥을 경험하게 됐다. “말도 못하게 힘들었죠. 제 억울함을 호소할 곳도 없었고요. 그래서 차라리 죽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세 번씩이나 자살을 시도했죠. 그런데 죽는다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가 않더라고요.”(이병철) 실낱같은 희망도 보이지 않던 벼랑 끝에서 인생을 포기하려던 무렵에 그의 손을 잡아준 사람은 바로 방송인 조영구(40)였다. 조영구는 과거 그가 일본에서 한창 잘나갈 무렵에 지인의 소개로 만난 후배였다. 그때만 해도 그는 일본의 잘나가는 가수, 조영구는 무명 리포터에 불과했다. “일본에서 지내다가 가끔 휴가를 내서 한국을 찾을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제가 연예인 축구단을 방문했어요. 그곳에서 영구를 알게 됐어요. 촌스러우면서도 순박하고 때 묻지 않은 모습이 참 좋아 보였죠.”(이병철) 이후에도 그는 한국에 올 때마다 호텔 대신 옥탑방에 홀로 살고 있던 조영구를 찾아 밤을 지새우며 함께 술잔을 기울였고 술에 잔뜩 취해 공원 벤치에서 나란히 잠드는 등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며 두터운 친분을 쌓았다. “그때는 제가 영구보다 더 잘나갔으니까 한국에 올 때마다 영구에게 축구화도 사주고 용돈도 주곤 했어요. 그런데 영구는 그걸 모두 잊지 않고 있었더라고요. 그래서 나중에 제가 한국에서 어렵게 지낸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수소문해서 찾아왔어요.”(이병철) 자신이 힘들 때 베풀어줬던 은혜를 잊지 않았던 조영구는 이병철을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왔다. 그렇게 두 남자의 동거가 시작됐다. 겨울에는 난방비를 아끼기 위해 보일러를 켜지 않고 1인용 매트에서 꼭 붙어 자며 체온을 나눴다. “저도 처음에 방송을 시작했을 때 주위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시골에서 올라와 아무것도 모르는 빈털터리였던 저를 당시 KBS 아나운서였던 김병찬 형이 늘 이끌어주고 도와주셨거든요. 그래서 힘들 때 손을 내밀어주는 일이 상대에게 얼마나 큰 희망이고 감동인지 잘 알아요.”(조영구) “영구는 제가 제2의 인생을 살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이에요. 영구가 없었다면 과연 그때 저는 어떻게 됐을지…. 영구 덕분에 죽고 싶었던 마음을 성공에 대한 욕심으로 바꾸고 살기 위해 이를 악물게 됐어요.”(이병철) “병철이 형이 곁에 있어 저도 좋았어요. 행복했고요. 아프면 늘 챙겨줬으니까요. 오죽하면 저의 어머니가 형 때문에 장가를 안 가려고 한다며 뭐라고 하셨겠어요. 그래서 엄마가 시골에서 올라오실 때 되면 형은 잠시 다른 곳으로 피신해 있었어요.”(조영구) 한국에서 인기 방송인으로 우뚝 서며 기반을 잡아가던 조영구와 달리 갈 곳이 마땅치 않고 할 일도 없어 방황하던 이병철은 조영구의 집안 살림을 담당했다. 요리, 청소, 빨래를 하며 집에서 시간을 보냈고 이따금 조영구가 행사를 다닐 때면 따라가서 무료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조영구에게도 이병철은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남들에게는 차마 말하지 못하는 개인적인 고민도 이병철 앞에서는 속 시원히 다 털어놓으며 조언을 구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돈과 명예, 인기 등을 모두 떠나서 그야말로 인간 대 인간으로 서로를 마주할 수 있는 마치 자신의 거울 같은 소중한 존재였다. “결혼 후 이혼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병철이 형이 중간에서 달래주고 도와줬어요. 제 집안의 모든 대소사를 해결해주는 사람이죠. 그래서 형은 제게 없어서는 안 될, 저의 모든 것을 알고 책임져주는 사람이에요.”(조영구) 전국 팔도를 누비며 되찾은 인생의 봄날 특히 조영구는 이병철이 다시 가수로 활동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했다. 지난 2007년에 직접 기획사를 차리고 여성 멤버 신디를 발탁하여 3인조 혼성 그룹인 ‘쓰리쓰리’를 결성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무명이나 다름없는 이병철을 위해 조영구가 직접 나서 자신의 돈으로 앨범을 발매해주며 함께 그룹으로 활동한 것이다. “병철이 형만큼은 제 모든 것을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꼭 성공시키고 싶었어요. 형이 제게 보여준 인간적인 면에 감동을 받았기에 제 모든 것을 걸고 도와야겠다고 마음먹었거든요.”(조영구) 조영구를 만난 이후 다시 인생의 봄날을 맞은 이병철은 ‘쓰리쓰리’라는 그룹을 통해 전국 행사 섭외 1순위에 꼽히며 가수로서 재기에 성공했다. 장윤정을 스타덤에 올린 인기 작곡가 임강현이 제작한 타이틀곡 ‘그래요’는 고급스러우면서도 코믹한 컨셉트로 대중의 마음을 정확하게 사로잡으며 인터넷 포털 사이트 검색어 1위를 장식했다. 덕분에 조영구와 이병철은 지상파와 케이블 방송은 물론 전국 지역 방송국으로부터 출연 제의를 받아 잠자는 시간까지 쪼개가며 노래를 불렀다. 2007년에 방송됐던 MBC-TV 추석 특집 프로그램 ‘트로트열전’에서는 선배 가수 송대관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제가 영구한테 보답하는 길은 가수로 잘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영구가 저를 한국에서 가수로 데뷔시켜줬기 때문에 무조건 성공해야 한다는 마음뿐이었죠.”(이병철) 하지만 각종 방송 프로그램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조영구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이병철을 계속 돕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조영구는 신혼임에도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날들이 점점 늘어났다. “방송하고 행사하며 가수 활동까지 하려니까 영구는 저보다 더 바쁘고 힘들었죠. 영구 입장에서는 저를 띄워주고 싶어서 그런 건데 어느 날부턴가 제수씨가 제게 남편을 돌려달라고 하더라고요. 결국 안 되겠다 싶어서 저 혼자 솔로로 활동하게 됐어요.”(이병철) 이후 다시 홀로서기를 시작한 이병철은 올해 초 첫 솔로 앨범 「돈에 미쳤어」를 발표했다. 지난 2월에 열었던 생애 첫 디너쇼에서는 한 장에 20만원이 넘는 고가의 티켓이 모두 매진을 기록했고, 5월에는 소요산 야외 공연장에서 3천여 명의 팬클럽 회원들과 함께 첫 팬미팅을 개최하며 화려한 부활을 알렸다. “물론 아직까지는 영구가 투자해준 돈에 비해 얼마 못 벌었죠. 그래서 더 열심히 뛰고 있어요. 지난해에는 가수들 중에서 행사 섭외가 제일 많았고요. 지난 12월에는 한 달에 무려 68개의 행사를 찾아다니며 노래를 불렀어요. 하루에 6개 행사를 뛴 적도 있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영구 덕분이에요. 영구를 따라다니면서 행사장에서 인정받기 시작했고 그분들이 다시 저를 불러주셨으니까요.”(이병철) 가수로서 함께 무대에 오르지는 못하지만 조영구와 이병철은 요즘도 한 달에 4번씩 꼬박꼬박 함께 봉사활동을 다닌다. 배우 정준호를 비롯한 여러 연예인이 참여하고 있는 ‘사랑의 밥차’를 시작으로 최근에는 조영구가 직접 5톤짜리 차량을 개조해 ‘사랑의 피자’를 나눠주며 전국을 누비고 있다. “‘사랑의 밥차’를 하면서 섬이나 시골에 다녀보면 평생 피자를 한 번도 못 먹어본 사람들이 정말 많아요. 고아원을 가도 아이들이 제일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이 피자고요. 그래서 1억을 들여서 피자차를 만들었죠.”(조영구) “한 달에 4번씩 군부대, 고아원, 섬을 찾아가는데 한 번 갈 때마다 천 명 이상이 나눠 먹을 수 있도록 피자 300판을 만들어 무료로 제공해요. 차량 한쪽에는 노래를 할 수 있도록 음향 시스템을 만들어놓고 저희가 공연도 해요.”(이병철) 방송인과 가수로서 각자의 영역에서 최고의 파트너가 되어주고 있는 조영구와 이병철. 한때는 절망의 늪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려 했지만 힘들었던 세월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기에 이제 그들은 누구보다 더 환하게 웃을 수 있다. “저는 죽음까지 생각했을 정도로 인생의 밑바닥까지 경험해봤거든요. 그래서 지금 이렇게 노래를 부르며 안정된 삶을 찾아 살 수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럽고 행복해요. 하루 24시간이 부족하고 잠자고 밥 먹는 시간조차 아까울 정도예요. 언젠가는 일본에서 살고 있는 아내와 아들을 다시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은 것이 제 마지막 꿈입니다.”(이병철) “저희들은 무조건 열심히 사는 것밖에는 없어요. 그래서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고요. 진실한 마음으로 꾸준히 노력한 사람들에게는 그만 한 사랑이 다시 찾아오는 것 같아요.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목표는 언젠가 반드시 이뤄진다고 믿습니다.”(조영구) <■ 글 / 윤현진 기자 ■ 사진 / 이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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