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총 99 건 검색)
- 한국전·월남전에 나섰던 이상훈 전 국방장관 별세
- 2023. 09. 12 20:37인물
-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모두 참전한 이상훈 전 국방부 장관이 11일 별세했다. 향년 90세. 고인은 1933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났으며 서울 경기고 재학 당시 학도병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다....
- 이상훈 한국에너지공단 이사장
- 2022. 01. 27 21:24인물
- 한국에너지공단은 신임 이사장으로 이상훈 전 공단 신재생에너지센터 소장(52·사진)을 임명했다고 27일 밝혔다. 임기는 3년이다.
- ‘추신수 외삼촌 박정태’ 보며 꿈 키운 정근우…이동현, 이상훈 보고 “여자가 야구하나”
- 2021. 04. 01 22:06스포츠
- ㆍ1982년 세대가 말하는 ‘프로야구의 기억’ 박정태 | 박충식 박충식·박철순·정경배·김태형… 야구 인생 바꾼 ‘우상의 추억들’ 어린 시절 야구장에 간 경험이 많지 않았던 1970년대생 선배들과 2008년...
- 개막기획
- KCOC 국제개발협력상에 이상훈·이기진씨
- 2020. 12. 21 21:54인물
- 국제개발협력민간협의회(KCOC)는 제1회 KCOC 국제개발협력상 수상자로 이상훈(왼쪽 사진)·이기진(오른쪽)씨와 비정부기구(NGO)인 세이브더칠드런·캠프·위드 등을 선정했다고 21일 밝혔다. 이 상은 뛰어난...
스포츠경향(총 123 건 검색)
- 톡스앤필 수원인계점 이상훈 원장, 눈물고랑 개선 위한 의학적 지식 공유
- 2024. 09. 27 12:52 생활
- 톡스앤필 수원인계점 이상훈 원장 톡스앤필 수원인계점 이상훈 원장이 지난 9월 20일 개최된 제 91회 CASE-PT 세미나에서 눈물고랑 개선 시술을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다고 밝혔다. 눈물고랑은 눈 밑과 코 쪽에 반원형의 함몰 주름을 일컫는 말이다. 노화 등 다양한 원인으로 인해 발생하는데, 이로 인해 눈 밑이 침체되거나 불룩해지면서 어둡고 피곤한 인상이 된다. 심해지면 진한 다크서클이나 인디언 주름까지 나타날 수 있다. 이상훈 원장은 노화 증상 개선에 대한 고객들의 니즈를 파악하고 톡스앤필 전 지점 의료진을 대상으로 눈물고랑 시술에 대해 발표했다. 이번 강의에서는 의학적 접근을 바탕으로 눈물고랑의 발생 원인 및 종류를 설명하고 시술의 안정성을 높일 수 있는 시술법이 공유되었다. 특히 실제 시술했던 임상자료와 함께 케이스 별 노하우를 예시로 들어 참가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한편, CASE-PT는 톡스앤필 의료진의 시술 사례 및 상담법 공유를 위해 주기적으로 개최되는 행사이다. 제91회 행사는 안티에이징 시술과 고객 만족도 향상을 위한 상담법을 중점으로 구성되어 큰 호응을 얻었다.
- 이상훈, 어린이날 맞아 백혈병 환아 위해 350만원 기부
- 2024. 05. 06 09:39 연예
- 개그맨 이상훈. 사진 리코브 개그맨 이상훈이 어린이날을 맞아 백혈병 환아들을 위해 기부에 나섰다. 이상훈은 최근 한국백혈병소아암협회에 개인 소장 피규어, 레고의 자선 경매를 통한 판매수익금 350만원을 기부했다. 한국백혈병소아암협회 측은 “2019년부터 매년 어린이날마다 소아암 환아들을 응원하는 마음을 담아 꾸준한 기부를 실천해주셨다”며 “6년째 한결같은 사랑으로 소아암 어린이들의 든든한 울타리가 돼주신 이상훈 후원자님께 깊이 감사드린다”고 전했다. 개그맨 이상훈. 사진 리코브 이상훈 또한 자신의 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후원 내용과 “어린이날 축하해”라는 문구를 올려 훈훈함을 자아냈다. 그는 지난 5일 공개된 KBS2 ‘개그콘서트’ 어린이날 특집에도 출연해 10년 만에 개그맨 정태호, 송병철과 함께 ‘감사합니다’ 코너를 꾸며 눈길을 끌었다. 과거 방송 당시 어린이들의 많은 사랑을 받은 코너에 출연해 예능감을 발산했다. 또한 이상훈은 피규어를 콘텐츠로 하는 유튜브 채널 ‘이상훈TV’를 운영하는 유튜버로도 활약 중이다. 현재 총 59만명의 구독자를 보유해 사랑을 받고 있다. 이상훈은 앞으로도 다양한 방송 및 콘텐츠를 통해 활발한 활동을 이어갈 예정이다.
- [스경포토] [우수중 초청 인제군 야구] 경기 지켜보는 원동중 이상훈 감독
- 2024. 05. 04 15:51 야구
- 원동중학교 이상훈 감독이 4일 강원도 인제군 야구장에서 열린 제2회 하늘내린인제 우수중학교 초청 스프링캠프 청량중학교와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이번 스프링캠프는 4일부터 8일까지 인제군 야구장 2곳에서 동시에 진행된다. 전국 13개 중학교 및 야구 클럽팀이 참가해 6~7개 팀씩 두 개조로 나뉘어 닷새 동안 팀당 6경기 안팎을 치른다.
- 이상훈 소설 ‘포검비…’, 드라마로
- 2024. 01. 24 11:44 연예
- 소설가 이상훈의 장편 역사 소설 ‘포검비(抱劍悲), 칼을 품고 슬퍼하다’가 드라마로 제작된다. 장편 역사 소설 ‘포검비(抱劍悲), 칼을 품고 슬퍼하다’는 지난해 발간 되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화제를 모았다. 드라마 ‘불꽃속으로’를 제작한 유호식대표는 소설 칼을 품고 슬퍼하다를 읽으면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수 없었다는 말을 하면서 이 소설의 여운을 간직하기 위해 마지막 한 페이지까지 아껴서 읽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 소설을 드라마로 만드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출판사에 전화를 해서 이상훈작가를 만났다 이상훈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역사책은 사명대사를 일컬어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이끈 승려라고 짧게 서술한다. 하지만 적국인 일본의 기록은 굉장히 구체적이다. 사명대사를 다룬 일본의 문헌과 자료가 굉장히 많다. 일본군의 선봉 가토 기요마사는 사명대사와 나눈 서간문을 일본 구마모토현에 있는 그의 개인 사찰 혼묘지에 보관했을 정도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신과 담판 지으러 온 사명대사를 만난 뒤 ‘살아 있는 부처’라며 조선인 포로 1500여 명을 풀어줬다. 명나라의 이여송 장군은 ‘사명대사가 없었으면 전쟁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캐다 보니 사명대사가 왜 우리나라에선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할까 아쉬웠다.” 드라마 ‘불꽃속으로‘를 제작하기도 했던 파인원미디어 유호식대표는 “선명한 장면과 속도감 있는 스토리가 압권인 원작을 읽다 보면 조선 백성을 구한 사명대사야말로 우리 민족의 영원한 영웅임을 자각하게 된다”며“조명받지 못한 역사 속 인물에 상상력이 더해진 웰메이드 드라마 제작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이상훈작가는 “임진왜란때 이순신 뿐만 아니라 사명이라는 영웅이 존재했다.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포로들에게 사명은 곧 살아 있는 부처님이었고 조선인 포로 문제를 처음으로 공론화한 사람도 사명이었다”고 강조했다. 한편, 소설가 이상훈작가는 역사 장편소설 ‘한복입은남자’ ‘제명공주’ ‘김의 나라’ ‘테헤란로를 걷는 신라공주’ 등을 베스트셀러에 진입시킴으로 최인호 역사소설의 맥을 잇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주간경향(총 2 건 검색)
- [무역]동광무역상사 이상훈 대표 세계로 도약(2008. 01. 01)
- 2008. 01. 01 경제
- “무역이 살아야 나라가 살아납니다” 동광무역상사 이상훈 대표는 "세계화 속에서 우리나라가 진정한 경제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20~30대 젊은이들의 분발이 반드시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한국무역협회 무역연구원은 12월 발표한 ‘2008 무역환경 및 전망’ 보고서에서 내년도 우리 수출은 올해보다 11.4% 늘어난 4130억 달러, 수입은 13.1% 증가한 3990억 달러로 140억 달러의 무역흑자를 기록할 것이란 내용을 전했다. 이와 함께 올해는 수출이 작년보다 13.9% 증가한 3708억 달러, 수입은 14.1% 증가한 3529억 달러로 무역흑자가 179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대략 내용을 살펴보면 2007년 한 해는 불리한 무역여건 속에서도 중동·중남미 등 신흥시장으로 수출과 부품·소재, 플랜트 수출이 크게 늘었으며 철강, 비철금속, 원유, 소비재 수입이 꾸준히 증가했다. 하지만 2008년 무역 전망은 그리 밝지만은 않다. 선진국 경기 둔화와 고유가, 환율 불안 등과 같은 악재가 지속될 것이란 전문가들의 예상 속에서 우리나라 무역업계도 이러한 흐름에 대비하는 갖가지 복안을 준비하며 고민 중이다. 매년 10% 이상 꾸준히 수출 성장 ‘작지만 강한 기업’이란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1992년 12월에 설립된 동광무역상사 이상훈 대표는 인적 인프라 구축과 함께 시대에 맞춘 변화를 모색함으로써 우리나라 무역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1992년 회사 설립 당시 불모지나 다름없던 러시아 극동지역을 중심으로 윤활유류 제품(자동차용 및 산업용)을 수출하기 시작해 1998년 100만 불 수출탑 및 산자부 장관상을 수상한 이상훈 대표. 이후 동광무역상사는 매년 10% 이상 꾸준히 수출 성장을 달성해왔다. 2004년 9월에는 한·러 정상회담에서 부산 기업으로는 유일하게 수행 경제 사절단 50인 멤버로 참여했고, 이후 매년 한·러 경제협력 관련 주요회의에 참여해 양국 간 친선 도모를 통한 경제협력 관계 증진에 기여해오고 있다. 특히 2007년 6월에는 부산시 CIS지역 시장 개척단 단장으로 참여해 중앙아시아 신흥 수출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오고 있다. “지금까지 이뤄온 결과로 주력시장인 러시아 외에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등의 국가로부터 수주가 시작되어 현재 약 750만 달러의 수출 실적을 달성했고 앞으로는 부산의 미래성장 동력원 중 하나인 물류사업을 러시아, CIS지역을 연계해 추진할 것입니다.” 이상훈 대표는 올 한 해를 되돌아보며 얻은 결과물도 많지만 안타까운 점도 적지 않다고 말한다. 국토가 좁은 우리나라는 부존자원 부족, 인구 과밀이라는 특수한 사회·경제적 여건하에서 70%가 넘는 무역의존도를 보이고 있다. 이에 따라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경제 성장을 위해서는 무역지향적인 경제정책과 산업정책을 우선적으로 촉진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무역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부산·경남에 위치한 수출 주도 기업들은 현금의 유동성은 있으나 재투자에 대한 불투명성 때문에 현재 큰 고심에 빠져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지속적인 무역 확대로 국가 발전에 기여할 수 있을까. 과거처럼 저임금을 바탕으로 값싼 상품을 수출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R&D투자를 증대시켜 최첨단기술을 꾸준히 개발하고 산업구조를 더욱 고도화시켜 지식경제기반을 굳건히 다지는 것이 시급한 과제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무역전문 인력 양성이다. 물류사업,러시아·CIS지역 연계 추진 위_1992년 12월에 설립한 동광무역상사는 인적 인프라 구축과 함꼐 시대에 맞춘 변화를 모색함으로써 우리나라 무역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아래_동광무역상사는 매년 10% 이상 꾸준히 수출 성장을 달성해 온 내실 있는 업체로 중앙아시아 신흥 수출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오고 있다. “세계는 지금 함께 움직이고 있습니다. 21세기 무역도 세계화와 맞물리고 있습니다. 세계화 속에서 우리나라가 진정한 경제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20~30대 젊은이들의 분발이 반드시 필요하며 그들이 치열한 경쟁을 당당히 이겨내야 합니다. 또한 생산과 선적이 동시에 이뤄질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한다면 제조와 물류가 같이 발전할 수 있고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큰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서로를 위해,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한다면 세계로 뻗어가는 우리나라 무역을 발견할 것입니다.” 이 대표는 전문 인력 양성 및 젊은 인력의 패기를 강조하며 지역 기반시설 확충의 필요성 또한 강조했다. 2007년 12월 21일, 무역의 날 ‘500만불탑’을 수상한 이상훈 대표는 현재 부산무역상사협의회 부회장으로 부산·경남 지역의 무역활성화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특히 부산무역상사협의회는 회원사 250여 개, 회장단 20여 명이 활동하는 협의회로 매년 부산수출대상을 통해 수출 증대에 기여한 부산지역 기업과 유공자들을 선정해 시상해오고 있다. 어느덧 부회장직을 3년간 수행해오고 있는 이상훈 대표는 수출을 위한 시장개척단 등의 지원이 있긴 하지만 소위 ‘잘 나가는’ 제조업체에만 그 지원이 몰려 있다는 점을 안타까워했다. 이 대표는 “성장 가능성 있는 업체는 정부가 지원해 크게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줘야 할 의무가 있다”며 “앞으로 중소기업의 수출 확대의 돌파구를 마련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며 무역 전문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정부·대학·무역유관기관이 무역 전문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라 피력했다. 예전 저렴한 인건비를 바탕으로 수출신장세를 이뤘던 우리나라는 이제 그 틀에서 벗어나 21세기형 산업인 IT·BT산업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작은 국토에 넘쳐나는 인력을 활용할 수 있는 무역업에 거는 기대감과 그 발전 가능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상훈 대표는 한결같은 뚝심으로 성공적으로 동광무역상사를 이끌어 왔고 앞으로 국내 무역의 활성화를 위해 스스로는 물론, 부산무역상사협의회의 더욱 활발한 활동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얼마 전 개성공단을 다녀온 이후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무역을 통해 남북통일도 앞당길 수 있을 뿐 아니라 국내 무역의 재도약을 실현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왔습니다”라며 개성공단과 국내 무역시장의 연계성에 대한 설명도 잊지 않았다. 무역업에 종사하며 국내 무역의 미래를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이상훈 대표가 그리는 2008년 국내 무역 발전의 청사진에 많은 관계자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 [긴호9호세대 비화](43)'테러리스트' 이상훈의 고뇌(2004. 11. 18)
- 2004. 11. 18 사회
- 강성구(전 제2건국위원회 교육홍보국장)는 '쿵'하는 소리와 함께 박물관 바닥으로 떨어졌다. 허벅지에 강한 통증이 지나갔다. 그렇지만 비명을 지를 수는 없었다. 누가 듣는 순간 '계획'이 무산될 것이다. 몸은 탈진 상태였고, 전신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사실 비명을 지를 기운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통증이 가라앉기를 기다릴 수도 없었다. 그는 절뚝거리면서 일어났다. 박물관 안은 괴괴했다. 귀신이라도 나올 것처럼 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창으로 스며든 빛은 힘을 잃은 듯 침침하게 느껴졌고, 코를 자극하는 퀴퀴한 냄새가 의식을 마비시키는 것 같았다. 어설픈 운동권의 도피 대강당 4층에 자리잡은 이곳은 늘 잠겨 있다. 3층까지만 해도 서클룸이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잦지만 이곳은 찾는 사람이 거의 없다. 역사학과에서 가끔 이용하긴 하지만 그런 일은 극히 드물다. 다시 말하면 캠퍼스의 온갖 애환, 속세의 모든 인연과 차단된 비밀의 장소에 그는 와 있었다. 그랬다. 그는 오늘 그 모든 것과 작별하는 날이다. 잠시 기도했다. 이곳에 오기까지의 긴 여정이 꿈결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얼마나 먼 길이었던가. 조금 전까지도 계획이 무산되는 줄 알았다. '아, 끝났구나!' 하고 체념한 게 몇번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살얼음판을 걷듯 가슴 졸이던 과정은 모두 끝났다. 이제 여기 와 있고, 모든 것은 그의 손에 달려 있다. 딱 한 사람만 도와준다면.... 강성구는 믿었다. 자신의 박물관 잠입을 도운 유일한 공범에게 깊은 신뢰감을 품고 있었다. 자신이 맡은 임무만 완수하면 공범이 나머지 임무를 잘 해낼 것이라고 확신했다. 상경대 1년 선배인 응용통계학과 75학번 이상훈(현 경인문고 대표이사). 지금은 '서점 경영의 귀재'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1980년대 중반 운동권을 떠나기 전까지는 '테러리스트'라는 별명으로 통했던 인물이다. 물론 그가 진짜 테러를 일삼은 것은 아니다. 일단 확신을 가지면 좌고우면하지 않고 실행에 옮기는 성격으로 보아 그에게 가장 맞는 직업이 테러리스트라는 뜻이다. 어쨌든 긴급조치 9호 시대 '기념비적 사건'의 주인공에게 제법 어울리는 별명이다. 전북 부안에서 태어난 이상훈은 초-중학교 시절을 광주에서 보내고 고등학교는 서울에서 다녔다. 자식 교육을 위해서는 대처로 나가야 한다는 부모님의 강한 교육열 덕이었다. 1975년 그는 경동고를 졸업하고 연세대에 입학했다. 그의 성장기는 매우 불우했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면서 가세가 극도로 기울었고, 파탄 난 가정 경제를 책임지던 큰누이마저 그가 고등학교 2학년 때 과로로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형은 군에 입대했고 작은누이는 도피성 결혼을 해버렸다. 4남3녀 중 차남인 그는 '학생 가장'이자 '가족의 희망'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천신만고 끝에 학교에 등록해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연명하는 처지였다. 고교 시절 그는 불교에 관심이 깊었다. "병원에 한번 가봤으면 죽어도 원이 없겠다"며 눈을 감은 큰누이를 극락왕생시키는 것이 그의 뼈에 사무친 소망이었다. 기독교계 학교인 연세대에는 불교학생회가 허용되지 않았다. 대신 불교연구회(불교반)라는 이름의 서클이 있었다. 그는 불교반에 입회했다. 기독학생회(SCA)와 달리 불교반에는 의식화된 그룹이 없었다. SCA의 경우 선배가 거세돼도 교회에 소속돼 있어 직-간접적으로 선이 닿았다. 불교반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SCA의 의식화된 동년배와 교유했다. 그들과 스터디그룹 활동을 하면서 운동권에 어설프게 한발 걸친 것이다. '맥시멈 포인트'의 '피크 타이밍' SCA의 75학번 지도부는 76학번 강경파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었다. "선배들이 먼저 치고나가라"는 게 후배그룹의 주문이었다. 이런 SCA의 내부 문제는 그에게 '강 건너 불'이었다. 그는 SCA를 이끄는 동년배를 지켜보며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았다. 자신이 그런 선택을 강요받는다면 어느 편에 서든 '배신자'였다. 배반의 대상이 자신이냐, 가족이냐.... 다만 그것이 문제였다. '테러리스트'의 피를 가진 그는 비록 자신에게 당장 닥친 문제는 아니지만 깊은 고뇌에 빠졌다. 어느 쪽도 배신할 수 없었다. 3학년이 되면 이 문제가 더 첨예하게 떠오를 것이다. 그는 생각했다. '내게 그 잔이 오기 전에 도망치자. 운동권으로부터 멀리 벗어나자. 학교에 나타나지 말자....' 1977년 봄 그는 휴학했다. 그리고는 짐을 싸서 송광사로 들어갔다. 인연이란 묘하다. 운명적이기까지 하다. 송광사에서 잘 지내던 이상훈은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는 눈을 번쩍 떴다. '그렇다면 내가 여기 있을 때가 아니지....' 그는 곧장 하산해 학교로 달려갔다. 물론 헛소문이었다. 학교가 시끄럽다는 게 '휴교'로 와전된 것이다. 이 무렵 강성구는 가족과 심하게 갈등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최고령 행시 합격 기록을 가진 고위공무원이었다. 그가 백지선언문 사건으로 정학을 당하자 그의 아버지는 그를 휴학시켜 군대에 보내려고 했다. 물론 그는 거부했다. 부자지간에 한치 양보 없는 싸움이 벌어졌다. 결국 어머니의 중재로 절충점을 찾았다. 절대 '사고'를 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는 학업을 계속하기로 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강성구와 이상훈이 만난 것은 1977년 10월 18일이다. 노영민(현 열린우리당 의원)-김거성(현 반부패국민연대 사무총장, 목사)이 1차 거사를 한 지 6일째 되는 날이다. 노영민-김거성은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노영민은 현장에서 잡히고, 김거성은 며칠 후 전북 익산에서 검거됐다. '예고편'으로 삼았던 두 사람의 구속은 '본편'을 위한 분위기 조성에 적극 활용됐다. SCA의 의식분자들은 '노영민이 구속됐다' '김거성도 잡혔단다'며 흉흉한 말을 만들어 퍼뜨렸다. 문제는 후속타였다. 시나리오는 있는데 '동'(시위 주동자)이 없었다. '집안 사정'으로 은인자중하던 강성구는 생각했다. '결국 이 잔은 나의 것일 수밖에 없는가....' 그는 신일고 동기이자 SCA 내 도봉단(도시봉사단) 동료인 박성훈(현 아이들과미래 상임전문위원)과 함께 서대문서 정보과 김모 형사의 집중 감시를 받고 있었다. 김 형사가 자신을 자르려고 혈안이 돼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찍힐 대로 찍힌 이상 그의 마수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언젠가는 가야 할 길이다. 게다가 아버지는 날 군대에 보내려고 안달이고....' 그는 결단을 내렸다. 그 순간 모든 고리가 풀렸다. SCA 내 76학번 '인자'들의 역할도 교통정리됐다. 원래 박성훈은 도봉단에 남아서 단과대 지하서클 조직 작업을 하기로 돼 있었다. 오성광(현 호주 시드니교회 담임목사)은 문과대 쪽의 조직을 책임지고, 우원식(현 열린우리당 의원)은 이대수(현 경기시민사회포럼 사무처장, 목사)의 뒤를 이어 SCA 회장을 맡기로 했다. 강성구만 십자가를 지면 뒷일은 문제될 게 없었다. 작전도 이미 짜여 있었다. 거사 지점은 대강당, 시간은 낮 12시 20분이었다. 봄부터 강성구-박성훈 등이 수차례 시뮬레이션해본 '맥시멈 포인트'의 '피크 타이밍'이었다. 거점은 대강당 4층 박물관. 12시 20분께 채플을 끝내고 나오는 학생들을 향해 4층 유리창을 통해 유인물을 뿌리는 게 작전의 골자였다. '유리창을 반드시 깨라. 날카로운 소리가 나게 해야 한다. 학생들의 시선을 최대한 집중시킨 뒤 검거될 때까지의 공백을 이용해 선동 구호를 외치고 유인물을 살포하라. 잡힐 때는 그냥 잡히지 말고 처절하게 잡혀라. 학생들은 흥분할 것이다. 그때 밑에서 누가 나서서 구호만 한번 외쳐주면 된다.' 그는 봄에 박성훈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이제 오직 한 가지, 밑에서 시위대를 조직할 공범 한 사람을 구하는 게 마지막 남은 난제였다. 거사를 함께 할 사람은 사찰선상에 드러나지 않은 자, 그리고 운동권 조직과 연계되지 않은 인물이어야 했다. 그래야 성공 가능성도 높고, 조직도 보호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있을 리 없다. 가장 의식화됐다고 할 수 있는 SCA 내에서도 없는 판에.... 그는 절망할 뻔했다. 믿었던 친구마저 난색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상훈이 등장한 것이 바로 이때다. 판결문에는 두 사람은 1977년 10월 18일 오후 1시쯤 노고산동 혼다방에서 만나 함께 반정부 시위를 벌이기로 합의했다고 되어 있다. 먼저 강성구의 기억을 빌려보자. "그는 1년 선배고 불교반 회장이었다. 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그날 만났을 때는 초면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진리에 대한 믿음은 다 통하지 않느냐'며 사정을 설명하자 그는 그 자리에서 수락했다. 그 뒤부터 모든 준비는 두 사람이 했다. 이대수 선배 이하에서 진행되는 얘기는 일부러 듣지도 않았다. 이상훈 선배는 내가 하자는 대로 따라주었고, 끝까지 믿어주었다." 미남계에 넘어간 여직원 이상훈은 SCA 회장인 이대수를 통해 강성구의 열정적인 성품을 잘 알고 있었다. SCA 내의 주전론과 주화파의 갈등도 지켜보았다. 그게 자신의 일이 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지만 혹시라도 그런 상황이 닥칠까 두려워 도망친 경험도 있다. 그런 그가 왜 강성구의 제의를 덜컥 받아들인 것일까. 이번에는 이상훈의 얘기를 들어보자. "성구는 '영민이가 먼저 감옥에 갔는데 후속타가 필요하다'며 전후사정을 설명했다. 같이 하자는 것이었다. 워낙 진지하게 부탁했고 설득력이 매우 뛰어났다. 거기에 넘어간 것이다. 제의를 수락하고 세상 고민을 혼자 하는 처지가 됐다. 남자답게 거절할 수 있었는데, 빠지려고 그렇게 발버둥쳤는데.... 하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주변과 관계를 정리하고 행동을 같이 했다. 둘 다 시위를 해본 경험이 없었다. 강성구의 경우 시위를 구경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긴급조치 9호 이후 연세대는 물론 대학을 통틀어서도 시위가 전무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물론 주동자에게조차 데모는 아득한 시대의 일이었다. 하지만 강성구는 '프로'였다. 이미 그의 머리에는 모든 전략과 방법론이 다 들어 있었다. D데이는 10월 24일. 중간고사가 끝나고 학생들이 홀가분하게 등교하는 첫 월요일. 이 날은 문과대 채플이 있는 날이었다. 문과대에 의식 있는 학생이 많으니 호응도도 높을 터였다. 거사 예정일 이틀 전인 22일 오후 두 사람은 대강당 4층 박물관으로 잠입했다. 포인트를 답사하고 광목과 페인트, 붓을 미리 갖다놓기 위해서였다. 왼쪽 계단 끝에 있는 나무문은 폐쇄돼 있었다. 오른쪽 계단 위 철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강성구는 학생처로 내려가 여직원을 불러냈다. '미남계'를 쓸 때가 된 것이다. 함께 갔던 이상훈의 얘기를 들어보면.... "아르바이트하는 여고생이었다. 열쇠를 달라고 했다. 성구가 사정을 솔직하게 말했다. 데모를 하는데 꼭 필요하니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내가 설득당한 것처럼 그 여직원도 성구의 설득에 무너졌다. 그녀는 벌벌 떨면서 들었고, 펑펑 울면서 열쇠를 건네주었다." 열쇠를 주는 행위는 긴급조치 9호 위반 사항이다. 학생처 여직원은 감옥 갈 것을 각오한 셈이다. 위험천만한 짓을 하기로는 이상훈-강성구도 마찬가지였다. 만에 하나 여직원이 발설하거나 밀고라도 한다면.... 그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박물관 답사를 마친 두 사람은 곧바로 수유리로 향했다. 가장 중요하고 위험한 유인물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교회에서 주보를 수없이 만들어본 강성구가 있으니만큼 유인물은 큰 문제가 없었다. 두 사람은 등사기, 잉크, 종이 등 모든 용품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체 해결했다. 선배에게 자금을 받거나 후배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것은 양쪽에 다 위험하다는 것을 강성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77연세민주수호결사투쟁선언문'을 직접 초안해 미아리 한빛교회에서 몰래 필경한 뒤 이날 이상훈과 함께 수유리의 한 여관에서 밤새 등사했다. '아차, 정보가 샜구나!' D데이인 10월 24일. 비장한 각오로 등교하던 강성구에게 기절초풍할 일이 벌어졌다. 교문에서 형사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차, 정보가 샜구나!' 서대문서로 연행되면서 이번에는 진짜 절망했다. 그동안 '뭔가 있을 것이다'라는 소문은 학생들 사이에도 퍼져 있었다. 이는 SCA 쪽에서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의도적으로 퍼뜨린 것이기도 했다. 운동권의 철칙 중 하나가 '잡히면 무조건 오리발을 내밀어라'이다. 강성구는 딱 잡아뗐다. 경찰이 어떤 정보를 갖고 있는지부터 알아내야 했다. 경찰은 여기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이상훈이 그랬고, 학생처 여직원이 그랬듯이 경찰도 강성구의 입심에 넘어간 것이다. 강성구의 최근 회고. "나는 거짓말을 안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날 살아가면서 제일 큰 거짓말을 했다. 하나님을 걸고 맹세했다. 정학 당하고 아버지와 한 약속이 있다,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을 속이고 아버지를 배신하겠느냐고 했다. 내 담당인 김 형사는 우리 집안을 잘 알았다. 여기에 넘어간 것이다. 그는 내가 그냥 가겠다는 걸 굳이 붙잡아서 점심까지 사주었다. '미안하다, 네 마음이 그런 줄도 모르고...'라며...." 그날은 상경대 교련이 있는 날이었다. 서대문서에서 풀려나 황급히 학교로 돌아온 때가 오후 2시경. 먼저 이상훈을 찾았다. 다행히 도망치지 않고 학교에 남아 있었다. 두 사람은 즉각 다음날 거사를 강행하기로 했다. 이상훈과 말을 맞춘 강성구는 상경대 강당으로 갔다. 경영학과는 한 학년 정원이 160명이었다. A~F반까지 6개 반으로 나뉜 한 학년이 유일하게 한꺼번에 모이는 때가 교련 시간이다. 그가 들어갔을 때는 7교시가 막 끝날 즈음이었다. 그가 나타나자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노영민 사건으로 가뜩이나 격앙돼 있는 상황에서 잡혀가 수업 중간에 나타났으니 그럴 만도 했다. 7교시가 끝나자 그에게 학생들의 시선이 쏠렸다. 그는 일어나서 앞으로 걸어나갔다. "얼마 전 노영민 학우가 정의로운 일을 하다 잡혀갔습니다. 여러분, 기관원이 학내에 상주하는 걸 아십니까. 오늘 나도 등교하던 길에 불법적으로 잡혀가서 이제 나왔습니다. 그동안 친구가 감옥에 갔는데 정의를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게 부끄러웠는데 오늘 직접 그런 일을 당해보니 개탄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신앙인으로서 깊은 고뇌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때는 우리가 앞장섭시다...." 노영민-김거성 사건 이후 SCA에서는 '친구가 잡혀갔는데 우리는 뭘 하고 있느냐'며 학생들의 자책감을 부추기던 터였다. 특히 거사 당일인 내일의 대강당 채플은 상경대 차례였다. 강성구는 강한 암시를 담은 연설을 하고는 곧바로 교련 교육장을 나왔다. 마침내 수정된 D데이인 10월 25일. 강성구는 평소와 다름없이 등교했다. 전날 조사를 받고 나온 터라 따라붙는 형사도 보이지 않았다. 이날 연세대에서 발생한 사건은 이튿날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의 1면에 대서특필된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신동호 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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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셰프 이상훈의 이달의 보양식…정갈하고 멋스러운 글로벌 한식
- 2010. 09. 06 11:46 요리
- 르네상스서울호텔의 프렌치 레스토랑, 클럽 호라이즌 등을 거쳐 현재 한식당 사비루에서 근무 중인 이상훈 셰프. 지난해 10월 뉴욕에서 개최된 제2회 세계한식요리경연축제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30여 팀이 참가한 이 대회에서그는 외국인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으로부터 최고점을 받았다. 세계한식요리경연축제 이야기를 꺼내자 “외국 손님들이 많은 호텔에서 근무한 경력을 살려 외국인의 입맛을 철저히 분석, 적용한 덕분입니다”라고 말하는 이상훈 셰프. 그는 자신을 낮출 줄 아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한식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들을 위해 비빔냉면의 고추장소스는 과일을 섞어 매운맛을 중화했고, 된장은 단맛을 강화해 외국인이 싫어하는 된장 특유의 향을 줄였다는데, 아이들 밥상에 적용해도 좋을 듯했다. 그 밖에도 찐득한 느낌을 싫어하는 외국인의 식성을 감안해 강정은 조청을 조금만 썼고, 먹지 못하는 재료는 접시에 내지 않는 그들의 문화를 고려해 떡갈비는 뼈 대신 더덕으로 모양과 맛을 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우연히 레스토랑에 취업하면서 요리사란 직업이 천직이 된 이상훈 셰프. 남다른 맛을 내는 비결이 있는지, 어떻게 하면 요리를 잘할 수 있는지를 물어보자 그는 우선 요리가 어렵다는 생각부터 버리라고 한다. 그리고 눈으로만 보지 말고 주위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쉬운 맛부터 도전해보라고 조언한다. “요리는 배려에서 시작해 배려로 끝나는 것 같습니다. 먹는 사람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고민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의무적으로 만든 요리와 이 음식을 먹는 사람이 맛있게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만드는 요리에는 큰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이달 메뉴로 제안한 ‘잔대 유기농샐러드와 장어소금구이’를 예로 들어보자. 그는 「레이디경향」의 주 독자인 여성들을 위해 잔대 요리를 추천했다. 잔대는 요즘 많이 재배가 돼서 구하기도 어렵지 않다. 양념해서 먹으면 더덕처럼 맛있기 때문에 식사로 먹어도 매우 좋다. 특히 여성들에게 좋은 식품으로 여성병 예방과 피부 미용, 비만을 억제하는 효능이 있다고 알려졌다. ‘복분자 소꼬리찜’을 제안한 이유는 전라도에 절친한 친구가 있어 해마다 복분자를 따오면 어머님이 이를 꿀에 재워 보내주시는데, 집에 손님이 올 때마다 그 복분자로 갈비찜이나 꼬리찜을 해서 내놓으면 새콤달콤해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한다고. 이상훈 셰프는 “우선 주부가 잔대 유기농샐러드와 장어소금구이로 원기를 회복한 뒤 온 가족이 복분자 소꼬리찜 보양식으로 건강한 환절기를 맞이하기를 바랍니다”라며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르네상스서울호텔, 한식당 사비루 서백제 시대의 대표적 건축물인 사비성에서 그 이름을 딴 한식당 사비루. 전통 한국 음악을 배경으로 정갈한 한식 요리를 단아한 분위기에서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고객들의 건강까지 고려해서 구성한 다채로운 메뉴는 언제나 변함없는 친숙한 가정의 맛을 느끼게 한다. 특히 각 지역의 특색을 살린 향토 음식과 계절 특선 요리, 한국 전통 왕실 요리를 맛볼 수 있는 고급스러운 정식 메뉴, 반상 세트 메뉴, 각종 일품요리까지 한국 음식 고유의 멋스러움을 선사한다. 잔대 유기농샐러드와 장어소금구이 재료 유기농 채소·장어 100g씩, 잔대 50g, 동충하초·찹쌀가루 10g씩, 기름장(간장 1큰술, 식용유 2큰술), 소금 약간, 유자드레싱(유자청·키위즙 2큰술씩, 라임주스 1큰술, 소금 약간), 식용유 적당량 만들기 1 유기농 채소는 깨끗이 씻고 잔대와 동충하초는 손질한다. 2 잔대의 2/3는 가늘게 뜯은 뒤 절반은 유기농 채소와 섞고 절반은 동충하초와 섞어 찹쌀가루를 묻혀 식용유에 튀긴다. 3 나머지 잔대는 반으로 갈라 방망이로 두들겨 통으로 찹쌀가루를 묻힌 뒤 식용유에 바삭하게 튀긴다. 4 장어는 분량의 기름장을 바르고 소금을 살짝 뿌려 오븐에 넣어 표면이 바삭해질 때까지 굽는다. 5 분량의 재료를 섞어 유자드레싱을 만든다. 6 그릇에 유기농 채소와 장어, 잔대, 동충하초를 보기 좋게 담고 유자드레싱을 끼얹는다. 복분자 소꼬리찜 재료 소꼬리 800g, 대파 1대, 마늘 10톨, 청주 2큰술, 달걀 2개, 물 10컵, 새송이버섯·양송이버섯 4개씩, 은행 10알, 밤 5개, 대추 3개, 소꼬리 양념장(배 간 것 1/2개분, 다진 파·다진 양파 2큰술씩, 복분자청 적당량) 만들기 1 소꼬리는 찬물에 담가 핏물을 충분히 뺀 뒤 끓는 물에 대파, 마늘 6톨, 청주를 넣고 삶아낸다. 2 소꼬리 삶은 물은 체에 걸러 깨끗한 물만 받아 식히고 기름은 걷어낸다. 3 새송이버섯과 양송이버섯은 얇게 저며썰어 마른 팬에 굽는다. 마늘 4톨은 통으로 굽고, 은행은 구워 껍질을 벗긴다. 밤은 껍질을 까고 대추는 깨끗이 씻어 준비한다. 달걀은 황백지단으로 부쳐 곱게 채썬다. 4 분량의 재료를 넣고 소꼬리 양념장을 만든다. 5 소꼬리에 양념장 2/3와 동량의 ② 육수를 부어 끓인다. 6 소꼬리가 익으면 나머지 양념장을 넣고 자작하게 조린 뒤 새송이버섯과 양송이버섯, 은행, 밤, 마늘, 대추를 넣고 한번 더 익힌다. 7 ⑥을 그릇에 담고 고명으로 황백지단을 올린다. <■촬영 협조 / 르네상스서울호텔(02-2222-8620) ■기획 / 신경희 기자 ■진행 / 김지현(프리랜서) ■사진 / 안진형(프리랜서)>
- 야구선수에서 로커로 변신한 ‘야생마’ 이상훈
- 2005. 01. 01 연예
- “야구장으로 돌아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습니다” 아직은 낯설다. 그는 야구팬들에게 영원한 갈기머리 좌완투수 이상훈이기 때문이다. 은퇴 후 야구장이 아닌 록 밴드를 선택한 그의 변신이 신선하기만 하다. 하지만 그의 공연을 직접 본 후, 그의 변신이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동료 선수들 앞에서 기타 연주하며 열창 함께 그라운드에서 뛰고 굴렀던 선수들은 그를 어떻게 바라볼까? 잘나가던 투수였던 동료가 제일화재 프로야구 대상 시상식에서 기타를 메고 나와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 무대 위에서 땀을 흘리며 노래를 부르는 그의 모습과, 무대 밑에서 그의 노래를 듣고 있는 야구선수들. 이 묘한 풍경을 만든 것은 그였기에 가능했으리라. ‘야생마’ ‘삼손’ 이상훈(34). 지난 12월 7일 열렸던 제일화재 프로야구 대상 시상식 현장. 배영수, 이종범, 김기태, 최희섭, 송진우, 선동렬 감독, 김응룡 사장 등 프로야구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속속 도착했다. 땀과 흙으로 범벅이 된 유니폼 대신 말쑥한 정장으로 한껏 멋을 낸 모습들이었다. 2004년 프로야구를 결산하는 자리인만큼 소속팀과 상관없이 반갑게 인사하고 웃는 모습들이 보기 좋았다. 하지만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선수와 감독이 아닌 로커 이상훈이었다. 그가 검은 가죽 바지에 선글라스를 끼고 기타를 메고 축하 무대에 올라오자 시상식장은 순간 짧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어떤 이는 그의 변신에 당황했을 것이고, 어떤 이는 그의 모습이 신기했을 것이다. 이상훈은 말문을 열었다. “저도 예전에 수상자로 한두번 참석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선배님들, 동료, 후배들이 많이 계시네요. 제가 기타를 들고 나타난 것이 죄스럽기도 하고요. 감독님들도 계시는데…. 저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는 동료들이 지켜보는 무대에 선 소회를 짧게 이야기하고 기타 연주에 들어갔다. 록 그룹 콜렉티브 솔의 ‘헤비’를 연주하면서 열창하기 시작했다. 야구선수 이상훈이 아닌 로커 이상훈으로 변한 것이 ‘최선’이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을까? 한 곡을 부르고 무대에서 내려오는 그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었고, 많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클럽에서는 젊은이들의 환호와 박수를 받았을 텐데, 프로야구 대상 시상식 무대는 야구인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됐다. 누구도 선뜻 그의 노래에 헤드뱅잉을 할 수 없었을 것이고, 박수와 환호를 보내기 힘들었을 자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무대에서 내려가자 많은 동료들이 그를 찾아가서 안부를 묻고 덕담을 건넸다. 긴장했던 그의 얼굴에도 웃음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변신에 대해 짧게 심경을 내비쳤다. “야구보다 기타가 좋냐는 물음은 너무 극단적인 질문입니다.(웃음) 지금 선후배들처럼 저도 야구할 때는 열심히 했습니다. 지금은 음악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야구장으로 돌아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흐른 것 같습니다.” 그는 로커로의 변신에 대해 일말의 후회나 주저함이 없다. 방송 섭외나 인터뷰 요청도 거의 거절하고 있다. 음악인 이상훈으로서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다. 요즘도 일주일에 두세번씩 멤버들과 함께 연습을 하고 있다. 음반을 만들기 위해 곡 작업도 함께 병행중이다. 자신의 실력이 다듬어지기 전에는 쉽게 모습을 나타내지 않을 것이다. 그의 이런 상격을 알고 있는 이종범 선수는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반갑습니다. 열심히 했으면 좋겠습니다”라며 덕담을 건넸다. 야구계의 이단아(?), 그의 실력 아쉬워하는 사람 많아 신선한 충격이었다. 용모 단정한 야구선수들 속에서 그는 항상 ‘튀는’ 존재였다. 갈기머리를 휘날리면서 공을 뿌릴 때면 ‘멋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뛰어난 좌완투수로 한국 야구사에서 인정받는 투수였다. 1993년 LG트윈스에 입단, 이듬해 팀의 우승과 함께 명투수 반열에 올랐다. 1995년에는 20승을 올리는 기염을 토했지만, 척추 부상 때문에 마무리 투수로 전환했다. 1997년에 구원왕에 오른 뒤, 그는 홀연 한국 무대를 떠난다. 1998년 일본으로 건너가 주니치 드래곤즈에 입단, 이종범, 선동렬과 함께 일본에 한국 야구의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이듬해 메이저리그 보스턴레스삭스에 입단했다가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고 2002년 LG트윈스로 컴백한다. LG트윈스의 팬들은 그의 복귀를 환영했다. 짧은 시간 동안 한국, 일본, 미국의 야구를 모두 경험한 것은 이상훈이 최초였을 것이다. 하지만 세월의 무게 때문인지, 그는 점점 쇠퇴해갔다. 그러다 ‘기타 파동’이 터진다. 2004년 프로야구 시즌이 시작되기 전 이순철 신임감독과 갈등이 불거진 것. “라커룸에서 기타를 치지 말라”는 감독의 말에 “개성을 이해해주지 않는다면 차라리 트레이드를 시켜달라”고 맞섰다. 그는 고향 같은 LG트윈스를 떠나 SK와이번스로 이적했지만, 2군으로 추락한다. 그의 자존심이 부진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많은 이들은 그가 아직 공을 던질 수 있다고 말렸지만, 잔여 연봉 3억원을 포기하고 은퇴를 선언한다. 그리고 들려온 소식이 록 밴드 ‘왓(What)’을 만들어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밴드 멤버들은 이상훈이 팬클럽 모임에서 노래 부를 때 자주 어울려서 공연하던 사람들이다. 신동현(드럼), 차상현(베이스), 임성한(기타)이 왓의 멤버들이다. 신동현씨와 이상훈이 만난 지는 벌써 7년째라고 한다. 왓은 얼터너티브 록을 하는 밴드다. 이상훈의 변신에 많은 사람들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라는 말을 한다. 이상훈 자신도 주변 사람들의 걱정을 잘 알고 있다. 그는 로커로서 인정받고,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는 쉽게 사람들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곡 작업과 연주 연습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이상훈. 앨범 발매와 구체적인 공연 소식은 아직 없다. 그를 무대에서 다시 보려면 약간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하지만 야구장에서 보여준 개성 강한 야생마의 모습처럼, 무대에서 사람들을 휘어잡는 강력한 로커로의 변신이 성공하기를 기대해본다. 글 / 최영진 기자 사진 / 최병준
- ‘느끼 개그’로 시청자 관심 한몸에 받는 리마리오 이상훈
- 2004. 12. 01 연예
- “저희 어머니도 아들이 이렇게 느끼할 줄 몰랐대요” 떴다, 이 남자. SBS-TV ‘웃음을 찾는 사람들’(웃찾사)에서 신개념(?) ‘느끼 개그’로 시청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리마리오’. 이탈리아풍의 이름과 국적을 알 수 없는 이국적 생김새로 만인의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는 이 낯선 얼굴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요즘 이 남자 때문에 난리가 났다. 한번이라도 TV에서 그를 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이보다 더 느끼할 순 없다! 그 이름도 느끼한 리마리오. SBS-TV ‘웃찾사’의 인기 코너 ‘비둘기 합창’에서 랭보 정(정찬우)의 동생으로 출연중이다. 올백으로 넘긴 머리, 광택 나는 블라우스에 배바지, 기름기 줄줄 흐르는 저음의 목소리는 온몸으로 느끼함을 발산하기에 충분하다. 이탈리아의 느끼한 혈통을 이어받아 미끄러질 듯 기름기 번들대는 마가린 버터 3세 리마리오의 본명은, 성은 이요 이름은 상훈이니 멀쩡한 이름 이상훈(32)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 사람 누구냐고 물을 때만 해도 긴가민가 했다. 그런데 인터넷에 들어가 보니 리마리오가 인기는 인기였다. 인터넷 검색어 3위 안에 드는 기염을 토하는가 하면, ‘리마리오 댄스 강습’이라는 플래시 애니메이션까지 만들어져 네티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어 떠돌고 있을 정도다. ‘이름 리마리오. 1972년생. 키 178cm 몸무게 70kg. 서울예대 방송연예과 졸업. 특기 라틴댄스.’ 모 포털 사이트에 소개된 프로필만으로는 그의 정체(?)가 파악되지 않을뿐더러 궁금증만 증폭된다. 이 남자, 어디서 뭐 하다가 나타나서 우리들의 배꼽을 일시에 빼놓는가? 댄서 출신일 것이다, 매니저 출신 같다, 길거리 캐스팅일지도 모른다 등등 온갖 추측들을 뒤로한 채, 직접 만나 한 꺼풀 한 꺼풀 베일을 벗겨냈다. 궁금증 1| 리마리오는 이세창 동생이거나 외국인이다? 모 포털 사이트 지식검색에 리마리오가 누구냐는 질문이 올라오자 확인되지 않은 답변들이 난무했다. 그중에서 마치 사실처럼 떠도는 소문이 있으니, 바로 탤런트 이세창 친동생설이다. 그 다음은 외국인설, 그 다음이 바로 혼혈아설. “이세창씨 닮았다는 말은 워낙 자주 들었죠. 이세창씨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아마 실제로 만나게 된다면 서로 화들짝 놀라지 않을까 싶어요. 제가 봐도 닮은 것 같아요. 실제로도 그분이 저보다 형인 걸로 알아요. 외국인이라… 사실 어딜 가도 저를 한국 사람이라고 보는 사람이 없었어요. 유럽에 가면 라틴계 미국인으로 오해하고 일본에 가면 중국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반대로 중국에 가면 일본인인 줄 알구요. 이국적으로 생겼다고 해서 별명도 ‘이국’이에요. 그래서 친구들이 이렇게 부르죠. 어이, 국아~.(웃음) 그밖에도 뱀파이어, 아수라백작, 돈주앙 등등 별명들이 주로 외국계예요. 하지만 저 연안 이씨, 뼈대 있는 가문의 후손입니다. 족보 있는 가문의 토종 한국 사람이다 이거죠.” 궁금증 2| 그렇다면 어디서 뭐 하다 이제 나타났나? “컬투의 김태균이 제 친한 친구예요. 서울예대 동기동창이죠. 유재석, 전도연, 예지원 등이 모두 같은 과 같은 학번 친구들입니다. 학교 다닐 때 다들 친하게 지냈죠. 군대 가기 전까지는 전공을 살려 연극 무대에 섰어요. 대학로 연극촌에서 좋아하는 연극하며 몇 년 지내다가 군대에 다녀오면서 현실을 깨달았죠. 적지 않은 나이에 부모님께 용돈 받아쓰며 살 수는 없겠더라구요.” 1996년 군에서 제대한 후 청담동에서 바를 운영했다. 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사업이었지만 IMF 위기를 맞으면서 경기가 안 좋아지자 장사가 잘 되지 않았다. 1년 정도 운영하다가 사업을 접었다. 그 다음에 시작한 것이 무역업이었다. 아는 선배와 손을 잡고 원단 수입업에 뛰어들었던 것. 그때 당시 주 활동 무대가 이탈리아의 로마, 밀라노 등지였다. 얘기를 듣고 보니 ‘이탈리아 필‘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구나 싶다. “장사하고 사업하면서도 늘 외도하는 기분이었어요. 항상 마음 한편이 텅 비어 있는 것 같았죠. 마음속에는 늘 연극 무대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거든요. 그래서 더 늦기 전에 돌아온 겁니다.” 궁금증 3| 리마리오는 어떻게 탄생하게 됐나? 리마리오라는 이름을 지어준 사람은 개그맨 정찬우라고 한다. 김태균의 소개로 정찬우와 알게 된 지도 얼추 10년이 되어간다는데, ‘웃찾사’의 맏형인 정찬우는 평소 그가 가장 믿고 따르는 선배다. 이들이 아이디어를 짜내는 과정은 도저히 상상이 안 될 정도로 난리법석이란다. 책상에 둘러앉아 아이디어 회의를 하는 건 당연히 아니고, 별 말도 되지 않는 이 얘기, 저 얘기들을 왁자지껄 나누다 보면 그 속에서 재밌는 아이디어들이 속출한다는 것. 한번은 그의 이국적인 외모를 살려 느끼한 캐릭터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그에 걸맞은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쪽 이름을 짓되 친숙한 것이 좋겠다 싶었다. 그러다가 ‘슈퍼 마리오’의 마리오를 따서 이름을 지었다. 성은 이, 이름은 마리오, 그렇게 해서 리마리오가 탄생했다. “일단 캐릭터를 짜고 나니까 뭔가 특징적인 걸 보여줘야겠더군요. 노래나 춤을 넣어보자 싶었는데, 노래는 너무 긴데다가 인상적이지도 않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춤이 좋겠더라구요. 라틴댄스 실력을 살려서 직접 안무를 짜서 찬우 형에게도 가르쳐줬죠. 그렇게 해서 리마리오의 ‘느끼 댄스’가 탄생하게 된 겁니다.” 궁금증 4| 이 남자, 실제로 봐도 그렇게 느끼한가? 단발 정도 내려오는 머리를 싹싹 빗어 넘겨 묶은 헤어스타일이 멀리서도 한눈에 쏙 들어온다. 인터뷰를 위해 일부러 그렇게 머리 손질을 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한눈에 봐도 느끼한 인상. 중저음의 기름진 목소리도 상당히 걸지다. 성우 빰치게 좋은 목소리다. 만약 노래를 부른다면 성악가 같은 발성이 나올 것만 같다. 역시, 느끼하다. 노래방 18번이 ‘베사메무쵸’란다. 선곡 역시, 느끼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노래만 부르면 사람들이 다들 테이블 밑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모습은 의외로 진솔해서 편안했다.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는 모습도 능글맞거나 느끼한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여자들은 보통 느끼한 남자를 싫어하는데 리마리오가 인기인 이유는 뭘까. “너무 느끼하기만 하면 징그럽잖아요. 어떤 땐 제가 봐도 막 느끼해요. 그래서 너무 느끼함 일변도로 가지 않고 살짝 절제를 합니다. 그게 묘미죠. 그래서 좋아해주시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근데 얼마 전에 어머니가 ‘내가 널 낳아 키우면서 니가 그렇게 느끼한 줄 처음 알았다’고 하시더라구요.(웃음)” 궁금증 5| 이 남자에게 더 벗겨 먹을 수 있는 것은 무엇? 많이 돌아다니는 편이 아니라 그런 경험이 자주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씩 인기를 실감케 하는 사건(?)을 접할 때가 있다. 한번은 친구가 오픈하는 식당에 축하해주러 갔다가 인근 학교의 중·고등학생 수십 명이 떼로 몰려와 사인을 해달라는 통에 너무 무서워서(?) 식당 주방 속으로 숨어버린 적도 있단다. 그는 ‘끼’와 실력이 탄탄한 개그맨이다. 춤이면 춤, 노래면 노래, 거기다 그림 실력까지 예술적인 기질이 충만하다. 그런 그가 가장 해보고 싶은 건 ‘쇼’라고 한다. “말 그대로 ‘쇼’ 있잖아요. 우리나라에선 현재 전무하다고 볼 수 있는 장르지만. 뮤지컬도 일종의 쇼라고 할 수 있죠. 극적인 장치가 가미된 쇼인 셈이니까. 저는 그저 말 그대로 쇼를 해보고 싶어요. 극적 장치 없이도 얼마든지 사람들에게 멋들어진 무대를 선사할 수 있거든요. 라스베이거스 등지에서 보여주는 다채로운 쇼 같은 파격적이고 흥겨운 무대 말이죠.” 쇼와 함께 그가 해보고픈 것이 바로 영화다. 대형 스크린을 통해 세밀하게 보여지는 연기에도 도전해 보고 싶다는 것. 인터뷰 말미에 자신의 이름으로 4행시를 지어보겠다고 하기에 운을 띄워주었다. 취재진의 폭소를 뒤로한 채 유유자적 기름기 빤짝이며 사라지는 뒷모습이 역시 예사롭지 않다. 리 니들! 마 마음 속에 리 리마리오 있다. 오 (검지를 좌우로 저으며 윙크 살짝) 오우~ 베이베~ 글 / 박연정 기자 사진 / 최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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