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총 68 건 검색)
- “전쟁이 멈추고 인종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꿈꾼다”···이영훈 목사 마틴 루터 킹 기념예배 축사
- 2024. 01. 17 17:02문화
- ...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인권이 동등하게 존중받게 될 것을 바라보며 꿈을 꿉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목사가 15일(현지시간) 미국 조지아 주 애틀란타 예벤에셀침례교회에서 열린 마틴 루터 킹...
- [노래와 세상] 이영훈
- 2023. 02. 27 03:00오피니언
- ... 레코딩 스튜디오에서 연주 활동을 하면서 노래를 만들었다. 아버지는 교사, 형은 의사인 집안에서 이영훈은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했다. 아버지는 그가 법조인이 되길 원했다. 유일하게 어머니가 피아노를...
- 이영훈광화문정동길이문세광화문 연가
- 이영훈 목사, "모이는 교회, 교세 자랑 시대는 지나가"
- 2021. 02. 02 18:13문화
- ... 교회로 세포분열” ·코로나19 질책, 개신교 정화에 도움…한국교회 연합 시급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담임목사는 2일 기자 간담회에서 한국교회의 나아갈 방향으로 “지역의 소외된 이웃을 섬기는 작고...
-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코로나19 한국교회 일치
- 김부겸 부인 “친오빠 이영훈 교수 때문에 남편 곤혹, 눈물 흐른다”
- 2020. 08. 04 14:23정치
- ... ‘김부겸 전 의원의 아내인 이유미입니다’로 시작하는 글을 통해 “큰 오빠인 이영훈 교수로 인해 김 전 의원에 대해 안 좋은 말이 떠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하소연을 드릴까...
스포츠경향(총 33 건 검색)
- 행운의 뱅크샷···‘기사회생’ 이영훈, 스페인 강호 또 잡았다
- 2023. 07. 27 10:20 스포츠종합
- 이영훈. PBA 제공 한국 3쿠션의 ‘차세대 기수’ 이영훈(에스와이∙32)이 패배 직전 터진 행운의 뱅크샷으로 ‘스페인 강호’ 다비드 사파타(블루원리조트)를 물리치고 PBA투어 8강에 올랐다. 26일 경기도 고양시 ‘고양 킨텍스 PBA 스타디움’에서 열린 ‘하나카드 PBA-LPBA 챔피언십’ PBA 16강서 이영훈은 사파타와 풀세트 승부 끝에 세트스코어 3-2로 승리하고 8강 진출에 성공했다. 경기 첫 세트를 10이닝만에 11-15로 내준 이영훈은 곧바로 2세트를 15-11(8이닝)로 따내며 맞불을 놨다. 그러나 3세트서 하이런 13점을 포함해 4이닝만에 15점을 채운 사파타에 15-13으로 세트를 빼앗긴 데 이어, 4세트서도 10이닝까지 10-13으로 끌려가며 패배 직전에 몰렸다. 11이닝째 얻은 공격기회를 놓친다면 2득점은 손쉽게 낼 수 있는 사파타에 패배할 수 있는 위기였다. 이영훈은 우선 침착하게 3득점을 낸 이후 과감하게 시도한 뱅크샷이 충돌로 인한 행운의 득점으로 연결되면서 15-13 승부를 풀세트까지 몰고 갔다. 기사회생한 이영훈은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초구를 5득점으로 연결한 이후 2이닝째 3득점, 4이닝째 남은 3점을 채워 5득점에 그친 사파타를 11-5로 꺾고 세트스코어 3-2로 경기를 마무리했다. 앞선 32강서 ‘팀 동료’ 다니엘 산체스(에스와이)를 물리친 이영훈은 16강 사파타전 승리에 이어 8강서는 또 한 명의 ‘스페인 강호’ 하비에르 팔라존(휴온스)을 만나게 됐다. 이영훈이 스페인 선수들의 ‘저승사자’가 될 수 있을지 당구 팬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 문화공간 합작 ‘같이의 가치’ 시즌2, 이영훈 밴드 ‘꿈꾸는 여행자’ 온택트 콘서트
- 2022. 07. 26 21:55 생활
- 문화공간 합작 제공 문화공간 합작 ‘같이의 가치 시즌2 7월 아티스트로 선정된 이영훈 밴드 ’꿈꾸는 여행자‘ 온택트 콘서트 영상이 오는 29일 공개 된다 7월 아티스트 이영훈 밴드의 대표이자 장새납 및 대피리 연주자 이영훈은 국내 유일 장새납 연주자로 대중과 더욱 가까운 만남을 위해 이영훈 밴드를 창단 하였고, 기존 전통국악 스타일 아닌 새로운 작· 편곡의 기법을 더해 현 시대의 누구나 공감 할 수 있는 감수성을 들려준다. 공연 제목인 ‘꿈꾸는 여행자’ 처럼 이영훈 밴드가 들려주는 음악은 꿈속에서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자유로운 음악을 찾아 떠나는 여행자 처럼 내면의 평화와 안녕 기원하고 대중과 함께 음악적 희로애락을 소통하려 한다. 이번 공연의 전곡은 재즈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송지훈이 작·편곡 및 신디사이저를 담당 하였고 타악 이승호 , 객원연주 콘트라베이스 최인환이 함께한다. 이영훈은 중앙대학교 국악대학 및 동대학원 한국음악과, 일본 쇼비음악학교 졸업, 일본 금강산 가극단에서 장새납과 대피리 연수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한일 월드컵 개막식 참가,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 유럽 뮤직페스티벌 투어 등 활동을 했다, 그는 국립국악관현악단, 성남시립관현악단, 세종국악관현악단, 서울시국악관현악단등 여러 관현악단에 협연자로서 이름을 널리 알리고 있으며, 현재 중앙대학교 일반대학원 출강 및 한국개량악기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공연관련 안내는 문화공간 합작 홈페이지, 리버원컴퍼니 유튜브, 네이버 TV, 에스엔제이스튜디오 유튜브에서 29일 오후 5시에 확인할 수 있다.
- “위안부는 수익적 계약관계” 이영훈 교수, 기자 뺨 때리고 폭언…MBC기자회 비판 성명
- 2019. 08. 08 17:48 연예
- 국내 자발적인 발인정서를 비난하고 위안부가 계약관계였다고 주장한 이영훈 교수. MBC 방송 화면 캡처MBC기자회가 취재진을 폭행하고 장비를 훼손한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67)에 대한 비판 성명을 냈다. MBC기자회는 8일 성명을 내고 “취재진은 먼저 정중하게 소속과 신분을 밝히고 질문을 했고 대답을 강요하는 어떠한 행위도 없었다”며 “진실 추구하는 정당한 취재활동을 결코 폭력으로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줄 것”이라고 밝혔다. 기자회는 “이영훈 교수는 취재기자에게 고함을 지르고 녹음 장비를 내려치더니 급기야 취재기자를 손으로 내려치는 폭력행위를 저질렀다”며 “전무후무한 사태에 할 말을 잃은 취재진에게 그는 ‘야 인마’ 등의 폭언과 반말을 섞어가며 20분 동안 강압적인 태도를 이어갔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이영훈 교수는 사과와 반성은 커녕 자신이 폭력이 ‘정당방위’라는 해괴한 주장을 내놓았다”며 “자신을 인터뷰한 장면을 방송으로 내지 말라는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내기도 했다. 기자의 기습적인 인터뷰 시도가 자신의 인격권을 침해했다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기자회는 “이영훈 교수에게 묻고 싶다. 인격권을 침해한 것은 시종일관 진지하고 차분하게 질문을 던진 MBC 취재진인가, 아니면 질문에 답하기 싫다는 이유로 기자를 폭행한 이영훈 교수 자신인가”라고 물었다. ‘스트레이트’ 취재진이 이영훈 교수에 대한 취재를 시작하자 취재 기자의 뺨을 때리고 녹음 장비를 부수는 난동을 벌였다. MBC 방송 화면 캡처마지막으로 기자회는 “방송을 하지 말라며 가처분 신청을 하고 언론사 앞에서 위세를 과시하는 일련의 행위는 본질적으로 언론 자유에 대한 폭력 행사”라며 “우리는 이번 사태에 의연히 대처할 것이고 끝까지 취재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영훈 교수는 한 유튜브 방송에서 “일제 식민지배 기간에 위안부 성노예화는 없었다” “일제가 쌀을 수탈해 간 것이 아니라 쌀을 수출한 것” 등의 망언을 해 논란이 일었다. 또 최근 그는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을 펴내며 자발적인 반일 정서를 비난했다. 이에 MBC 취재진이 취재에 나서자 이영훈 교수는 자신을 기다린 MBC 기자의 뺨을 때리고 녹음 장비를 부수는 난동을 벌였다.
- 故 이영훈 작곡가 노래 ‘보리울의 여름’ 피에스타 린지 가창으로 리메이크
- 2019. 05. 06 10:03 연예
- 작곡가 이영훈. 사진 경향DB 작곡가 故 이영훈의 노래 ‘보리울의 여름’이 5월 새롭게 울려퍼진다. 이영훈의 저작권 승계 회사이자 유가족이 설립한 회사 영훈뮤직 측은 6일 “고인이 생전에 발표해 사랑을 받았던 ‘보리울의 여름’이 리메이크돼 5일 공개됐다”고 밝혔다. 해당 리메이크곡에는 ‘서로 사랑해요’라는 제목이 따로 붙었다. 이 문장은 고인이 생전 남겼던 유언 중 하나이기도 하다. 리메이크곡 ‘보리울의 여름-서로 사랑해요’는 걸그룹 피에스타 출신의 린지가 가창했다. 린지는 올해 막을 내린 뮤지컬 <광화문 연가>에서 젊은 수아 역을 연기했고 평소 이영훈 작곡가에 대한 존경심을 가져오다 이번 리메이크 제안에 기꺼이 응한 것으로 알려졌다. 故 이영훈 작곡가의 노래 ‘보리울의 여름’ 리메이크 곡을 부른 걸그룹 피에스타 출신 린지. 사진 영훈뮤직 린지 외에도 지난해 열린 이영훈 10주기 콘서트에서 ‘보리울의 여름’을 합창한 어린이 합창단 ‘헵시바 주니어 하모니’도 참여했다. ‘보리울의 여름’은 지난 2003년 故 이영훈 작곡가가 이민용 감독이 영화 <보리울의 여름>의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에 넣기 위해 만들었던 노래였다. 그리고 <개그콘서트-봉숭아학당> 코너의 오프닝곡이나 각종 예능 밑 CF음악으로 사용되면서 인기를 얻었다. 영훈뮤직 이정환 본부장은 “해당 음원의 수익은 전액 필요한 곳에 기부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고인은 ‘옛사랑’ ‘사랑이 지나가면’ ‘광화문 연가’ ‘소녀’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등을 작곡했으며 이문세를 톱가수 반열에 올려놓은 작곡가다. 지난 2008년 2월14일 세상을 떠났다.
- 이영훈
주간경향(총 4 건 검색)
- [문화프리뷰]‘이영훈표’ 주크박스 뮤지컬의 감동(2021. 08. 02 11:26)
- 2021. 08. 02 11:26 문화/과학
- 죽음에 이르면 한평생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는 말이 있다. 희로애락으로 가득한 일생을 돌아보는 것이 기쁨이 될지 혹은 후회와 번민으로만 남을지 알 순 없지만, 그래도 늘 곁을 지켜준 생의 동반자에겐 애정과 감사 그리고 연민을 느끼게 마련이다. 뮤지컬 '광화문 연가' / CJ ENM 뮤지컬 <광화문 연가>는 바로 그런 이야기를 다룬다. 유명 작곡가 명우가 세상을 떠나기 1분 전,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 월하와의 여행을 통해 추억을 되돌아본다는 설정이다. 무대는 이를 통해 그의 음악 대부분에서 모티브가 되어준 첫사랑 수아와의 사연, 그리고 거의 일생을 함께 보내며 묵묵히 지켜준 아내 시영의 이야기를 잔잔하면서도 감동적으로 들려준다. 이 뮤지컬의 가장 큰 장점은 물론 음악이다. 가수 이문세의 히트곡들로 익숙한 고 이영훈 작곡가의 노래들을 만끽할 수 있는 주크박스 뮤지컬의 형식적 재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동전을 넣으면 왕년의 인기 대중음악을 틀어주는 음악상자처럼 무대가 흘러간 대중음악을 극적인 도구로 활용한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기존에 공연을 좋아하고 뮤지컬을 즐기던 관객뿐 아니라 그 노래를 기억하고 추억하는 사람들마저 공연장으로 불러 모으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무대를 찾아가 두세시간 처음 들어보는 선율에 체할 듯 새로운 음악을 과식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도 잘 알고 익숙한 선율에 매력적인 이야기에 얹어 다시 즐기게 되는 것이 매력이자 관람 포인트다. 물론 원곡자가 세상을 떠났거나 사정이 있어 더 이상 대형 무대에서 라이브로 감상할 수 없다면, 주크박스 뮤지컬 속 노래들은 더욱 큰 인기를 누릴 수밖에 없는 태생적 매력을 지닐 수 있다. 뮤지컬 속 주옥같은 선율은 명우의 인생 여정을 거치며 살아 숨 쉬는 듯한 열정을 뿜어낸다. 군사정권 시절, 데모 현장에서 성난 시위대와 교차하며 등장하는 ‘그녀의 웃음소리뿐’이나 전경들과 대립하는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가 어우러지는 ‘내 오랜 그녀’ 등은 마치 실제로 그 노래들이 진짜 그 순간 그랬었던 것처럼 절묘하게 시대상과 잘 맞아떨어진다. 요즘 세대에겐 정말 그랬던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노래 가사를 이리저리 확장한 제작진의 끝 모를 상상력이 빚어낸 그럴싸한 가상의 지어낸 이야기들이다. 올해 다시 막을 올린 무대에는 국민 로커 윤도현과 엄기준, 강필석, 리사 등 실력파 배우들이 대거 합세했다. 젠더 프리 캐스팅으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월하 역으로는 차지연과 김호영, 인피니트의 김성규가 나온다. 배우 중 일부가 코로나19에 감염돼 긴장감이 고조됐으나 완치됐다는 후문이 안도의 숨을 쉬게 했다. 물론 마스크를 끼고 관람하는 관객들 간의 감염사례는 아직 한건도 보고된 바 없다. 앙코르송으로 다시 목 놓아 불리는 ‘붉은 노을’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비록 환호성으로까지 이어지진 않지만, 만면에 미소를 품은 관객들의 열화와 같은 박수 소리는 충분히 이끌어내는 마법을 부린다. 답답한 시국에 마음이 뻥 뚫리는 시간을 보냈다는 관객의 후기가 마음 시리고, 또 한편 뿌듯하게 위로가 된다. 누구든 <광화문 연가>에서 느꼈으면 싶은 감동이다.
- 문화프리뷰
- [사람의 빛]광화문 연가 - 이영훈의 삶과 음악(2009. 02. 26)
- 2009. 02. 26 사회
- 이제 모두 세월 따라/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언젠가는 우리 모두/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언덕 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향긋한 오월의 꽃향기가/가슴 깊이 그리워지면/눈 내린 광화문 네거리 이곳에/이렇게 다시 찾아와요 - 이영훈 ‘광화문 연가’ 중에서 2월 14일 서울 정동길에서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작곡가 이영훈(1960~2008)의 1주기를 맞아 세운 그의 노래비 제막을 기념하는 공연이었다. 가수 정훈희, 이문세와 배우 윤석화 등이 나와 그의 히트곡을 불렀다. 그렇게 보고 싶던 그 얼굴을/그저 스쳐 지나가면/그대의 허탈한 모습 속에/나 이젠 후회 없으니//그대 나를 알아도/나는 기억을 못 합니다/목이 메어 와 눈물이 흘러도/사랑이 지나가면 - 이영훈 ‘사랑이 지나가면’ 중에서 ‘사랑이 지나가면’이 불릴 때 고인의 아들 정환과 함께 앉아 있던 아내 김은옥은 연방 눈물을 훔쳤고, ‘광화문 연가’는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시민이 함께 따라 부르기도 했다. 이날 제막한 그의 노래비 앞에는 책 두 권이 놓였다. ‘Art Book 광화문 연가’(이영훈&김은옥 글, 민음사 간). 고인의 삶과 음악을 기록한 책이었다. 여태 살아온 것이 그러했듯이 난 아직도 대중에 익숙하지 않다. 그저 내 음악으로 인해사람들이 행복해하길 바랄 뿐이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대중과 영합하지 않는 음악으로 남길, 또한 내 음악이 여러 사람에게 희망을 주고 삶의 기쁨으로 존재하기를 기도할 뿐이다.(나, 이영훈) 어머니는 독학으로 음악 공부를 하는 아들의 부탁에 70여 만 원 되는 월급에서 서슴없이 58만 원 하는 피아노를 사주셨다. 그는 그때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고 했다. 무엇이든지, 어떤 음악이든지 그 피아노만 있으면 가능할 것 같았다고 했다. 그래서 믿어준 어머니에게 자신의 성공을 보여드리고 싶어 했다. … 그가 처음 발표한 곡 ‘난 아직 모르잖아요’가 10주 동안 각종 가요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을 때는 어머니가 혼수상태로 중환자실에 계실 때였다. 그가 잠깐 의식이 돌아온 어머니를 붙잡고 성공 소식을 알려드렸고, 어머니는 활짝 웃으셨다. “이제 피아노 사 준 돈, 다 갚아.”(어머니, 어머니) 이. 영. 훈. 1985년 가을, 처음 만난 그가 작곡가란다. 미술학원에 같이 다니던 선배를 따라간 작업실에 그가 있었다. … 흔들림 없이 쳐다보는 그의 눈빛 때문에 내 입은 더 굳게 닫혔고, 그 강한 눈빛이 너무 민망해 혜화동 작업실의 작은 창가로 들어오는 햇살만 쳐다보았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래도 내가 등 뒤로 기억할 수 있었던 것은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와 따뜻함이 흘러내릴 것 같은 웃음소리…. 그를 다시 만난 것은 졸업 작품 전시회가 열린 1년 후, 그의 이름이 적힌 꽃다발을 받았다. 그리고 우리의 만남은 시작되었다.(만남) 우리는 꼬박 1년을 붙어다닌 후 결혼했다. 우리가 떨어져 있었던 시간이라면 일본, 미국 공연으로 한국을 며칠 떠나 있었을 때뿐. 그는 아침 9시면 언제나 혜화동 우리 집 근처에서 나를 기다렸다. 그리고 우리의 이른 데이트는 시작되었다. 이른 아침 문을 여는 곳은 고궁뿐. 그와의 고궁 순례는 매일 계속되었다. 창경궁, 경복궁, 비원…. 함께 있으면 아무 말 안 해도 좋았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몰랐다.(결혼) 자포자기에서 나를 일으켜세우는 날이 다가오고 있다. 발소리마냥 그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이젠 절망과 폭음과 자폐에서 우울과 기쁨과 억압에 이르는, 그 모든 형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요즘 아들과 예쁜 아내와 재미있게 살고 있다. 그럼에도 나의 작곡이란 것이 내용 면에서 상충되어 빚어진 모순적 결과로 인해, 조울증에 시달려 왔음은 사실이다.(여름이 시작되며) 담배꽁초 가득한 재떨이, 텅 비어 있는 대용량의 커피포트, 이리저리 뒹구는 담뱃갑, 피아노 위에 떨어져 있는 지우개 가루들…. 밤새 이 방에서 얼마나 힘들게 작업을 했을까, 생각하게 만드는 흔적들. 쓰레기를 비우고 지우개 가루를 털어내고 피아노 음반 구석구석 먼지들을 닦아내면 그가 일어났다.(내 하루의 시작은) 그는 집에 있을 때도 언제나 내 손을 잡았다. 잠자리에 들어서는 심지어 손가락 하나라도 붙잡고서야 잠이 들었다. 가끔은 성가시기도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생긴 그 버릇, 홀로 떨어져 있는 것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싫어했기에 나는 항상 그의 주위에서 맴돌아야 했다.(그의 버릇) 광화문 덕수궁 돌담길에서 열린 이영훈 노래비 제막 기념 공연. 그의 아내 김은옥은 많은 시간이 흐르고서야 알았다. 연애 시절 그렇게 많은 고궁을 돌아다니고 같은 곳을 여러 번 갔는데도 불구하고 한 번도 그와 가보지 않은 궁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그의 음악에 늘 나오는 덕수궁이었다는 것을. 피곤하다. 약을 세 번이나 먹었는데도 통증이 온다. 잠을 좀 자면 나을 것 같은데…. …예전에도 그런 생각은 했었다. 곡을 쓰면서 몸이 피곤하고 지치면 내가 내 명을 줄이는구나, 하고 말이다. 한 곡을 쓰기 위해 몇 날 몇 밤을 새워가며 하루 대여섯 갑씩 담배를 피우고 스무 잔 정도의 커피를 물 마시듯 하며…. 그것도 모자라 며칠씩 잠을 안 잔 날도 허다했다. … 그러나 작업이 없는 동안은 그까짓 술, 남들의 두세 배씩 먹는다. 이유가 있다. 내 마음속에 있던 것들을 어렵게 끌어낸 상처를 치유하는 거랄까. … 음악의 존엄성이란 음악을 만든 이와 그 음악을 듣는 이가 같이하는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만든 이 따로, 듣는 이 따로인 음악은 내팽개쳐진 음악일 뿐.(음악은 존엄하다) 2006년 5월, 인천공항에 내려 제일 먼저 남편 얼굴을 찾았다. 반가움에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지난 3개월 전 시드니에서 봤을 때보다 반쪽이 되어 있었다. 많이 마르고 피곤해 찌든 모습, 가슴이 철렁했다. ‘별일 없겠지. 단순한 염증일지도 모른다고 했으니까 치료하면 금방 나을 거야.’ 스스로 위안하면서도 며칠 전 시드니로 전화한 남편의 목소리가 자꾸 걸렸다. ‘병원에서 검사를 했는데, 큰 병원에 가보라고 하네. 당신 나올 수 있어?’(불안했던 일이 현실로) 의사는 남편의 직업을 물었다. “혹시 목사님이신가요?” “아니요. 노래를 만드는 사람이에요.” “아, 그래서 저리 천진하시군요. 그런데요, 암이 문제가 아니라 세포 종류가 너무 나쁘네요. 저희로서도 보기 힘든 암세포예요. 이 상태라면… 2년 정도 시한부로 봅니다.” 아무 생각 안 하기로 했다. 어차피 그는 이겨낼 테니까. 병실에 돌아와 가만히 남편 옆에 누워보았다.(하루 만에 다시 수술대에) 요즘 그는 무더운 여름을 오전엔 병원, 오후엔 녹음실에서 보내면서 을 작업 중이다. 2년 전에 약속한 앨범을 마무리하기 위해 지친 몸을 이끌고 녹음실로 가는 그를 말리고 싶었는데 아무 이야기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가 선택한 삶이고 그를 살아있게 하는 힘이었으니까.(암 환자 카드를 받고) 이영훈 노래비. 1985년부터 2001년까지 가수 이문세와 정규 앨범 8장, 기획 앨범 3장을 함께 만들면서 1980년대 한국 대중음악에 ‘팝 발라드’라는 장르를 개척하고, 최초의 골든디스크 연속 3회 수상 기록을 세우기도 한 그는 이민용 감독의 영화 음악 작업을 끝으로 잠시 활동을 쉬고 자신의 히트곡으로만 구성된 뮤지컬 를 준비하던 중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49세의 아까운, 참으로 아까운 나이였다. 하고 싶은 말들과 적고 싶은 글들을 가슴에 묻습니다. 굳이 꺼내어 말하지 않아도 적지 않아도 우리가 겪고 있는 삶이고 그런저런 너와 나의 같은 이야기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사랑하는 동안 삶과 사랑은 하늘의 구름과 같이 흘러만 갑니다. 바라보면 손에 잡힐 듯하지만 바라보면 그 사이 먼 곳으로 사라져가 없습니다. … 그리고, 이제 많은 기도가 필요한 저입니다. 항상 사랑하고 늘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십시오.( 서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대신 아파줄 수도, 대신 걸어줄 수도. 그저 속수무책으로 자리에 앉아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걱정 말라는 듯이 오히려 웃어주었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앞만 바라보았다. 창밖을 보며 기도했다. 할 수만 있다면 저 사람 대신 내가 아프고 대신 죽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다.(아들, 그가 사랑한 아들) 20년간 서로 생일을 챙겨주었지만 오늘은 좀 더 각별한 날인 것 같소. 해가 갈수록 당신을 더욱 사랑하오. 점점 아름답고 성숙해지며 인내하는 당신에게 나는 진심으로 감사와 고마움을 느껴…. 사랑하오. PS. 정말 고생 많았소.(2007년 12월 10일, 남편 영훈) 오늘 그가 떠. 났. 다. 2008년 12월 14일 새벽 3시. 모두들 12시쯤 돌아가고, 잠시 쉬는 것처럼 보이던 그가 가빠지는 호흡을 참을 수 없어 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면 허공에다 대고 ‘하늘의 선율’이라며 지휘를 시작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황홀한 미소로 가슴 벅차했다. 자기가 만든 노래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아름다운 멜로디들이 천국에 가득하다며 즐거워했다. …난 너무 두려웠다. 그러나 혼자 가는 그가, 남겨진 나보다 더 힘들 것 같아서… 나는 참아야 했다.(마지막까지 작곡가로) 누군들 떠나간 아픈 사랑을 기억하는 이라면 ‘광화문 연가’를 모를까. 사람은 가고 음악은 남았다. 사랑은 가도 음악은 남는다. 이젠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내 맘에 둘 거야/그대 생각이 나면 생각난 대로 내버려 두듯이…눈 녹은 봄날 푸르른 잎새 위엔/옛사랑 그대 모습 영원 속에 있네 -이영훈 ‘옛사랑’ 중에서
- 사람의 빛
- [인물연구]교과서포럼 공동대표 이영훈 서울대 교수(2008. 10. 02)
- 2008. 10. 02 인물연구
- 학문적 소신인가, ‘일그러진 역사관’인가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그는 금성출판사 근현대사 교과서를 비판한 교과서포럼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나는 잃을 게 없다. 만약 내가 정치인이라면 말을 가렸을 것이다. 교과서 포럼을 제외하고 어떠한 정치단체에도 가입한 적 없고, 정부위원회에도 참여한 적 없다. 나는 학자로서 양심에 바탕한 주장을 해왔다. 대중의 역사의식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연구자가 과감하게 해야 할 일은 있다. 그것이 지식인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물론 이영훈 교수가 이 정부에서 한자리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나름의 학문적 입장을 갖고 연구해왔다는 것은 믿어주고 싶지만, 지금 행태는 정치꾼이나 그런 ‘세력’들에 의해 아주 훌륭하게 이용되고 있지 않는가. 지금 역사교육과 역사학계에 쏟아지는 말도 안 되는 강압을, 그가 의도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주진오 상명대 사학과 교수) “금성사 교과서는 반국가적 통일운동 교재” 근·현대사 역사교과서 논란이 다시 불꽃을 튀기고 있다. 국방부의 역사교과서 개정 ‘의견서’로 시작된 논란은 교육과학부가 국방부나 통일부 등 다른 부처뿐 아니라 상공회의소·교과서포럼 등 여러 단체에 개정 의견을 부탁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확전 양상이다. 지난 3월, 대안교과서를 펴내 물의를 빚었던 교과서포럼은 “지난 9월 17일 금성출판사 발간 고등학교 역사교과서 ‘한국근현대사’의 시정을 요구하는 민원을 냈다”고 밝혔다. 이들은 금성출판사의 2008년도 역사교과서가 ▲반제국주의 민족사관 또는 제3세계 혁명론의 역사관에 입각해 있으며 ▲1945년 이후의 미국은 제국주의 국가이고, 1948년 이후의 대한민국을 미국에 종속된 사회로 규정하면서 60년간 대한민국이 성취한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고 ▲북한 현대사에 대해서는 중립적이고 관대하게 서술하는 한편, 북한 체제의 야만적 반인권성에는 침묵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교과서포럼은 “요컨대 동 교과서는 반국가적 통일운동 교재로서의 특질을 강하게 띠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교과서포럼의 공동대표는 박효종 서울대 국민윤리교육과 교수, 차상철 충남대 사학과 교수·이영훈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3인이 맡고 있지만 이영훈 교수가 실질적으로 주도하고 있다. 인터넷 등에서 그는 ‘친일파 매국노’로 비난받고 있다. 그 근거는 정신대 발언이다. 이영훈 교수의 ‘말’은 2004년 9월 2일 MBC ‘100분 토론’에 출연한 자리에서 나왔다. 과거사진상규명 논란을 주제로 열린 이날 토론회에서 이 교수는 “조선총독부가 강제로 위안부를 동원하지 않았으며, 사료를 보면 범죄 행위는 권력뿐 아니라 많은 민간인 참여로 이뤄졌다”고 말했다. 설화(舌禍)가 커지자 이틀 뒤 이 교수는 “일본군 성노예가 사실상 ‘상업적 목적을 지닌 공창의 형태였다’라고 발언하지 않았고, 상대 측 패널이 멋대로 해석한 주장이 마치 내 발언인 것처럼 알려졌다”고 진화에 나섰다. 해명 다음 날 이영훈 교수는 경기 광주 나눔의 집을 방문, 정신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무릎을 꿇고 사과했다. 그러나 할머니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강주혜 정대협 사무처장은 “일제강점기에 이장이나 경찰서에서 일했던 사람이 일본 사람이 아니고, 식민권력의 하급관리로 조선 사람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책임성 문제에 대한 주장은 황당한 이야기였던 것이 사실”이라며 “당시 이 교수가 본인은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정신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사과했지만 지금도 이 교수를 비롯한 뉴라이트 진영의 역사인식 문제는 계속되는 것이 아니냐”고 말했다. 이 교수에게 곤혹스러운 사건은 2006년 11월 30일, 또 한 차례 터졌다. 이날 오후 서울대 사범대에서 열릴 예정이던 교과서포럼 6차 심포지엄은 끝내 열리지 못했다. 유영익 연세대 석좌교수가 발표자인 이 교수를 청중에게 소개하려는 순간, 심포지엄장 앞쪽 문이 열리며 일단의 사람이 몰려들었다. 4·19 관련 3개 단체 회원들이었다. 이들이 행사장에 난입한 까닭은 교과서포럼이 교과서 시안에서 ‘4·19혁명’을 학생운동으로 폄훼하면서, 4·19단체들의 의견수렴 과정도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이들 단체 회원은 단상으로 올라가 이 교수의 멱살을 잡고 항의했다. 이 교수의 양복 상의가 벗겨졌고 입술이 터져 피가 흘렀다. ‘사태’는 4·19단체와 교과서 포럼이 공동으로 유감 표명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 됐다. 교과서포럼에 관여하고 있는 한 인사는 자신의 발언을 인용하는 것을 거부했다. 정치적 논란에 휩쓸리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이영훈 교수가 소장으로 있는 낙성대경제연구소 관계자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이 연구소의 한 연구위원은 “낙성대경제연구소 회원 중에는 이영훈 교수의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도 있고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라며 “낙성대경제연구소와 이영훈 교수의 관련성은 단지 그가 소장을 맡고 있다는 것이며, 연구소와 특정 정치적 입장, 교과서포럼 등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전태일 분신에 운동권이 된 대학생 이영훈 교과서 수정을 요구하는 뉴라이트 진영의 핵심인물 이영훈. 한쪽에서는 일그러진 역사관의 소유자 혹은 또라이, 심지어 친일파로 규정하는 인물이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소신 있는 인물로 평가하기도 한다. 과연 그의 머릿속에는 어떤 역사관·역사인식이 자리 잡고 있을까. 1971년 대학가는 교련반대시위에 휩싸였다. 당시 서울대 교양학부생이던 이영훈도 이 시위에 적극 참여하다 같은 해 10월 위수령으로 제적된다. 사진은 1971년 6월 서울대 공릉동 캠퍼스에 붙은 휴강 공고문. 먼저 38년 전, 이 교수의 대학 신입생 시절로 돌아가보자.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와 대담집인 ‘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도서출판 기파랑)에서 이 교수는 “전태일의 분신 현장을 돌아본 뒤 운동권 학생이 됐다”고 말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전태일이 분신한 날 오후, 고등학교 동기생인 박동현(현 장로회신학대 교수·구약학)의 제안으로 평화시장 일대를 돌아봤다. 당시 서울대 법대 1학년이던 박동현 교수는 “전태일의 분신 현장도 현장이었지만, 평화시장을 돌면서 닭장처럼 붙어 있는 열악한 작업장 시설을 보고 이영훈이 울분을 느끼며 돌아갔던 것을 기억한다”라고 회고했다. 박 교수의 기억에 따르면 그뒤 그와 이영훈은 당시 교양과정학부가 있던 공릉동 캠퍼스에 전태일의 분신을 알리는 벽보를 붙였다. 그러나 박 교수는 “이 교수의 친지이자 선배인 분이 책을 보내줬는데 그 뒤로는 거의 안 만났기 때문에 내 이름이 나와 있어서 의외였다”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자신은 현재의 이 교수 입장과 많이 다르다고 말했다. 그는 “한문 공부를 열심히 해서 한국 경제사 연구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아는데, 언제부터인가 가치관·세계관이 변한 것 같아 솔직히 놀랐다”고 덧붙였다. 소속 단과대는 다르지만 ‘운동권 이영훈’에 대한 기억은 손호철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도 갖고 있다. 손 교수는 “운동권인 것은 맞는데, 이영훈을 굳이 분류해본다면 ‘행동파’라기보다 ‘이론파’에 가까웠던 걸로 기억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대학 2학년인 1971년 봄, 대학가에서는 교련반대운동이 벌어졌다. ‘데모’를 열심히 하던 이영훈은 상대 선배인 김근태(전 통합민주당 국회의원)에게 방학 때 농촌봉사활동이 아니라 공장에 들어가라는 말을 듣는다. 이영훈은 페인트 공장에 한 달 반 동안 위장 취업한다. 그해 10월, 위수령이 발동되면서 전국적으로 200~300명의 학생이 제적됐다. 손 교수는 “당시 문리대에서 2학년에서는 나만 짤리고, 상대에서는 김문수(현 경기도지사), 이영훈, 이채언(전남대 경영학부 경제학과 교수) 등이 제적된 걸로 안다”며 “3, 4학년의 경우 강제징집이 됐지만 2학년은 나이가 어려 군대를 안 가고 남아 있던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안병직 교수와 대담집에 따르면, 이때 이 교수는 김문수와 함께 안 교수의 집으로 찾아가 “노동운동에 투신하라”는 말을 듣는다.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한 1976년, 진로를 고민하던 이 교수는 다시 안병직 교수를 찾아가고 그의 권유로 대학원에 진학한다. 안 교수를 지도교수로 그가 박사학위를 받은 것은 1984년 2월. ‘조선후기 토지소유와 농업경영’이라는 주제였다. 그해 9월, 이영훈은 한신대학교 경제학과 전임대우교수로 취직했다. 1980년대 중·후반을 풍미한 사회구성체 논쟁에 그는 뛰어들지 않았다. 이 교수는 “사회구성체 논쟁에 아주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모두 현실과 동떨어진 공리공담이었다”라고 회고했다.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근대 해석이 아닌 사료를 통한 실증이 이 교수의 주된 관심사였다.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이영훈 교수 비난게시물. 논쟁은 엉뚱한 데서 촉발했다. 이영훈의 박사논문 지도를 끝으로 일본으로 출국했던 안병직 교수가 ‘중진자본주의론’이라는 새로운 입장을 가져온 것이다. 일본으로 가기 전 식민지반봉건사회론자였던 안 교수가 당시 일본 석학인 나카무라 사토루의 한국 사회 해석 입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1987년 ‘이론보다 실증’을 주장하던 안 교수는 낙성대경제연구소를 설립했고, 이영훈도 동참했다. 낙성대경제연구소는 그후 소위 식민지근대화론의 메카가 된다. 일제시기 공업화나 경제 성장에 대한 실증연구 프로젝트를 독보적으로 진행하는 연구기관이 됐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안병직 교수의 뒤를 이어 이 교수가 있었다. 이 교수는 1989년부터 2002년까지 성균관대에 적을 두다 2002년 서울대 교수로 옮겼다. ‘연구자로서 이영훈’은 조선시대 후기의 농업·촌락 사회의 변동 문제를 천착하는 한편 그 연장선에서 일제시대 농촌 문제를 연구했다. 이 교수 등의 연구에 따르면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 농업 생산의 감소와 환경 파괴로 인한 위기가 극대화됐다. 그 결과 19세기 후반 조선왕조는 멸망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고, 동학농민전쟁 등 민란의 빈발도 그 맥락에서 해석된다는 것이다. 종전 역사학계는 상업 확대 등을 예시하면서 소위 ‘자본주의 맹아론’을 주장하지만 이 교수는 자주적 근대화는 불가능할 정도로 총체적인 쇠퇴를 거듭했고, 일제는 ‘영구병합’을 목적으로 식민 지배를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종전 역사학계는 수탈론, 즉 일제가 식민지 조선의 발전을 가로막았다는 주장이 지배적이었지만 그와 낙성대경제연구소는 각종 통계자료와 실증 연구를 바탕으로 수탈론은 민족주의에 의해 조작된 기억이며, 실제 일제시대에 근대화는 꾸준히 진행되었을 뿐 아니라 경제 성장도 지속적으로 일어났다고 주장하고 있다. 비판 진영에서는 대체적으로 이 교수의 ‘학자로의 진정성’은 인정하지만 이데올로그로 변신은 비판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윤해동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는 “이영훈 교수의 한국 경제사 연구는 1980년대 후반부터 나름의 독자적인 체계를 구축해온 측면이 있고, 특히 조선 후기 시기까지의 농업사와 관련한 실증 연구는 독보적인 성과를 쌓아왔다고 봐야 한다”라면서도 “그러나 본인은 자신의 전근대시대의 작업과 자신의 발언을 연속성이 있는 것으로 보는 것 같지만 그의 ‘정치적 발언’은 이전까지 학문 작업과 괴리된 측면도 있다”라고 지적했다. 조선 후기 시대와 관련된 연구는 학문적 논의 대상으로 인정할 수 있지만, 일제시대 즉 식민지시대 근대화나 연속해서 건국·이승만과 박정희 체제의 평가와 관련된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주진오 상명대 사학과 교수는 “이 교수의 입장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근대사 연구자로서 역량이나 자세는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한다”라며 “몇 년 전부터 왜 저렇게 극단으로 가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렇게 열심히 진지하게 연구했는데도 불구하고 역사학계로부터 무시·매도당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상처받아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라고 말했다. 주 교수에 따르면 현재 역사학계에서 이 교수의 입장을 취하는 이는 거의 없다. 반면, 서울대 경제학과 및 낙성대경제연구소를 중심으로 경제사 영역에서는 이 교수의 입장을 중심으로 하나의 학파가 형성되어 있는 형국이다. 주 교수는 “원래 자신의 영역에서는 진지한 학자였는데 자기 영역도 아닌 곳에서 정치적이고 정제되지 않은 이야기를 왜 그리 쏟아내는지 안타깝다”라고 덧붙였다. “나는 변했지만 그들은 과거에 사로잡혔다” 이 교수를 비판하는 입장에서는 이 교수의 지도교수였던 안병직 교수의 ‘뉴라이트로의 변신’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윤 교수는 “원래 안병직 교수의 입장이던 식반사회론은 1920~30년대 일본 마르크스주의 강좌파까지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이론으로 신고전파 경제학 이론과 연결될 여지가 있었다”라며 “이영훈 교수의 변화나 노동운동하던 김문수가 한나라당에 입당한 것도 안 교수의 입장 변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손호철 교수는 “과거 학문적 활동이 나름의 튼튼한 학문적 기초에 근거한 것이라면 최근 이 교수의 주장은 옳고 그름을 떠나 어떻게 보면 1980~90년대 운동권보다 더 관념적이지 않나 생각한다”라며 “1980~90년대 운동권이 경험에 근거하지 않은 추상적인 테제만 나열했던 모습보다 교과서포럼 등의 활동이나 뉴라이트 등의 주장을 보면 일방적 선언이라는 점에서 더 심한 것 같다”라고 말했다. 과거 동료의 비판에 대해 이영훈 교수는 “이미 세월이 얼마나 흘렀고, 또 세상이 얼마나 달라졌나”라고 반문하며 “나는 끊임없이 현실과 역사를 알면서 생각이 바뀌어왔지만 그 사람들은 1930년대 이래 물려받은 낡은 역사의식에 갇혀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이 교수의 주장이 일제시대를 미화한다는 비판에 대해 그는 “(거꾸로 비난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인 줄 알고 식민지적 전통에서 해방되지 못한 담론체계에 사로잡힌 데서 오는 폐해”라며 “시간이 없어 대응을 안 하고 있지만 (인터넷 등에서 친일파라는 등의 비난이) 도를 넘어도 한참 넘고 있어 어떤 조치가 필요하지 않나 심각하게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조선시대 후기를 넘어선 근·현대사와 관련된 연구가 이데올로기에 가깝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그는 “내 연구 목록이라도 제대로 검토했다면 그렇게 경솔한 말은 못할 것”이라며 “한국 지식사회의 위선적 정치 혐오주의도 벗어날 필요가 있다”라고 덧붙였다. 이 교수의 주장에 대해 주진오 교수는 “지난 20~30년 동안 나 자신을 포함해 입장이 바뀌지 않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라며 “다만 남이 변화한 것은 인정하지 않고, 자신만 옳다는 오만이 문제”라고 꼬집었다. 주 교수는 “대한민국 건국에서 이승만의 역할이나 박정희 독재 체제가 성장에 기여했다는 이 교수의 주장이야말로 과연 학문적 성찰에 기반한 것인지 이 교수가 스스로 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라고 반박했다.
- 인물연구
- [인물라운지]작곡가 이영훈씨, 그의 주옥 같은 노래들은 영원하리(2008. 02. 21)
- 2008. 02. 21 사회
- 삶의 자국 팝발라드의 개척자로 잘 알려진 작곡가 이영훈씨가 2월 14일 별세했다. 2006년부터 암투병을 해왔다. 향년 48세. 고인은 ‘광화문 연가’ ‘옛사랑’ 등 가수 이문세가 부른 히트곡을 뮤지컬으로 재구성한 ‘광화문연가’를 무대에 올리기 위해 숨지기 직전까지 음반작업을 해왔다. 그는 이문세와 콤비를 이뤄 ‘난 아직 모르잖아요’ ‘휘파람’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소녀’ ‘사랑이 지나가면’ ‘깊은 밤을 날아서’ 등 주옥 같은 곡을 발표했다. 그의 노래들은 활동 당시 한국 최초로 1000만 장 이상의 음반 판매를 기록했다. 가수 이문세를 대중음악계의 ‘스타’로 만들었다. 고인은 2001년까지 16년간 정규 앨범 8장을 내면서 한국 대중음악에 팝발라드라는 장르를 개척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악기를 사용한 세련된 음악기법, 서정적 멜로디와 순수한 사랑 이야기를 주제로 한 아름다운 가사로 한국 대중음악사에 큰 획을 그었다.
레이디경향(총 1 건 검색)
- 故이영훈이 선택한 마지막 뮤지션! 치과의사 겸 가수 박소연
- 2009. 05. 15 연예
- 현직 치과의사. ‘가수 박소연’이라는 이름 앞에 붙는 이 수식어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의도치 않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취미나 자아실현의 수단으로 음반을 냈을 거라는 오해다. 하지만 음악은 그녀가 오랫동안 거슬렀던 운명이자 언젠가는 돌아와야 할 자리였다.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찬 뮤지션 박소연의 ‘별과 바람의 노래’를 들어봤다. 학창 시절 음악 전공, 치과의사 생활 15년 만에 다시 제자리로 가수 박소연(41)은 독특한 이력을 가진 뮤지션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음악을 전공한 현직 치과의사이자, 마흔을 넘긴 늦은 나이에 데뷔한 늦깎이 가수다. 지난해 미니 앨범 「별과 바람의 노래」에 이어 올봄 「별과 바람의 노래 2」로 두 번째 앨범을 발표한 그녀의 도전을 일회성의 ‘외도’로 보기엔 그 실력과 열정이 남다르다. “어렸을 때부터 집에 손님들이 오시면 기저귀 차고 그 앞에서 노래를 불렀대요. 말 안 듣고 떼쓸 때 ‘음악 안 틀어준다’고 말하면 울음을 뚝 그쳤고요. 다섯 살 때부터 노래하고 피아노 치고, 누군가 ‘제일 잘하는 게 뭐냐’고 물으면 제 대답은 ‘음악’이었죠. 당연히 꿈도 음악을 하는 거였고요.” 다른 아이들이 유치원을 다닐 시기에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해 예원학교에서 피아노를, 서울예고에서 성악을 전공하며 음악인의 꿈을 키우던 그녀는 합격이 당연시됐던 대학입시에서 석연치 않은 이유로 떨어진 뒤 어린 마음에 큰 상처를 입는다. 음악을 향해 있던 인생의 목표가 의사로 바뀌게 된 것이 바로 그때다. “음악 생각이 안 나도록 완전히 새로운 걸 해야겠다는 생각에 고민하다가 치대 진학을 결심했어요. 고등학교 때까지 음악을 하던 아이가 의대를 간다고 하니 주위에서 곱지 않은 시선도 보냈죠. 물론 쉽지 않았어요. 결국 1년을 재수해서 치대에 갔으니 지금 생각해도 그때 참 ‘독했구나’ 싶어요.” 요즘 아이들과 함께 공부했다면 치대 진학은 힘들었을 거라며 웃어 보이는 그녀지만, 해바라기처럼 바라보던 음악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몰두가 필요했다. 그렇게 대학에 입학하고 졸업 후 강원도 강릉에 병원을 개업한 뒤 그녀는 스스로 의사로서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믿었다. 대학 시절 클래식 서클에서 활동하고 이따금 오케스트라 연주 발표를 할 기회도 있었지만 음악에 대한 향수나 미련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15년 동안 치과의사로 충실하게 살아온 그녀가 자기 안에 억눌려 있던 음악에 대한 열정을 다시 찾은 것은 우연히 정신 분석 상담을 받으면서였다. “강릉에서 개업을 하고 그 다음해였어요. 그때까지 나름 치열하게 살다가 1년쯤 지나니 내 인생에 무언가 큰 게 빠졌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더라고요. 음악을 하지 않고 산 15년간 겉으로는 그리움이 없었지만 사실은 제가 제 자신을 몰랐던 거죠. 사람이 때로는 자기 자신을 가장 완벽하게 속일 수 있는 것 같아요. 2년 정도 상담을 받으며 내면의 나를 하나씩 꺼내보는 과정이 있었는데 그때까지 내가 ‘나’라고 믿었던 껍질이 하나씩 벗겨지기 시작했어요. 그걸 깰 때마다 한없이 아프고 괴로웠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음악을 하지 않고 산 15년 동안 사실은 내가 많이 아팠다는 걸, 음악은 거부할 수 없는 나의 운명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때가 그녀 나이 서른여섯이었다. 한동안 잃어버렸던 자신의 길을 다시 찾았지만 어떻게 가야 할지 몰라 막막해하던 어느 날, 그녀는 작곡가 이영훈과 운명적 만남을 갖게 된다. 음악으로 이끌어준 인연, 작곡가 故이영훈 그녀의 1집 「별과 바람의 노래」는 지난해 2월 세상을 떠난 팝 발라드의 개척자 작곡가 이영훈의 서른두 번째 작품이다. 이문세를 통해 ‘광화문 연가’, ‘옛사랑’,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등 주옥같은 곡을 발표했던 그의 오선지에 마지막으로 써내려갔던 곡들이 그녀의 목소리로 되살아나게 된 데에는 특별한 인연이 있다. “친구와 약속이 있어 나간 자리에서 우연히 이영훈 선생님을 만나게 됐어요. 평소 팬이었기 때문에 인사들 드리며 ‘음악을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이메일 주소를 주시더라고요. 그때 선생님이 호주에 살고 계셨거든요. 음악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으면 메일을 달라고 하셔서 선생님과 근 2년간 메일을 주고받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제 오디션이었던 것 같아요.” 메일을 통해 이영훈은 그녀에게 음악을 하려는 의지와 목적, 동기에 대해 끊임없이 물었다. 음악을 왜 하려고 하는지, 음악을 통해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지, 음반을 낸 다음에는 뮤지션으로서 어떻게 살 것인지…. 언뜻 쉬워 보이지만 대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들에 답을 만들어가며 그녀 스스로도 다시 한번 묻게 됐다. 음악에 대한 막연한 열정을 현실적으로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녀가 추억하는 이영훈은 그 누구보다 음악에 대한 열정과 철학이 남달랐던 사람이다. “그렇게 수많은 질문에 답을 하고 나서야 제 동기가 순수한 것 같다며 노래를 한번 들어보자고 하시더라고요. 두 번의 오디션 끝에 음반을 내기로 했죠. 그동안 선생님께서도 당신 음악에 클래식한 느낌을 접목시키고 싶어 하셨는데 성악만으로는 풀 수 없는 부분이 있어 고민하셨대요. 그러던 차에 제 목소리를 듣고 마음에 드셨나 봐요.” 그녀의 무엇이 고인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묻는 질문에 그녀는 “글쎄요, 저에게서 뭔가를 보셨겠죠”라며 말을 줄인다. 음악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통했다는 게 가장 쉬운 설명일 거다. “이 짧은 세상,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야 되지 않겠나, 음악을 사랑한다면 이 세상으로 들어오라”는 고인의 말은 그녀를 음악의 세계로 이끌었고 그녀는 그토록 바라던 음악인으로서의 삶에 한발을 내딛는다. 그렇게 음반 작업을 시작하고 몇 달 뒤 고인에게 대장암이 발병했다. 하지만 그는 투병 중에도 자신의 음악 노트를 꺼내 그녀와 함께 부를 13곡의 노래를 골라냈다. 13곡 중 6곡은 2007년 1집을 통해 발표됐고 최근 발표한 두 번째 앨범에는 ‘지난 풍경’이라는 곡을 담았다. “‘지난 풍경’은 이영훈 선생님께서 생전에 직접 부르고 싶어 아껴뒀던 곡이에요. 1집 때 선생님과 함께 녹음을 했는데 그땐 정말 처절하게 불렀어요. 이번에는 편안하게 다시 불러서 담았어요. 선생님 투병 중에 1집 앨범이 나왔지만 제대로 알리지 못했다는 생각에 죄스러운 마음이 있었어요. 선생님의 유작을 한 번에 다 발표하면 그냥 묻히게 될 것 같은 생각에 이번 앨범에는 한 곡만 수록하게 된 거예요. 아직 6곡이 더 남아 있어요. 선생님의 음악을 성심성의껏 세상에 알리는 것이 저를 이끌어준 인연에 대한 보답이자 음악인으로서 제 몫이라고 생각해요.” 이번 앨범에는 이영훈의 곡 ‘지난 풍경’을 비롯해 대표적인 서정 가곡을 편곡한 ‘별’, 늦가을의 아픈 이별이 담긴 ‘세월이 가면’ 등 총 4곡의 노래가 수록되어 있다. 클래식과 대중가요 사이를 오가며 맑게 울려 퍼지는 그녀의 청량한 목소리는, 작곡가 이영훈의 자취를 쫓아 그녀의 노래를 찾은 이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는다. ‘귀가 아닌 마음으로 듣는 목소리’라는 이영훈의 평은 뮤지션으로서 그녀의 정체성을 한마디로 축약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 시작하는 열정으로 세상과 소통하고파 ‘치과의사로서는 성인이지만 노래하는 사람으로서는 아이.’그녀가 정의하는 현재 자신이다. 그녀 안의 열정을 어떻게 키우느냐에 따라 음악인으로서의 미래가 달라질 것이다. “처음 계획한 대로 음대에 가서 성악을 했으면 지금쯤 클래식이라는 한 가지 장르에 갇혀 있을 거예요. 치과의사가 되기 위해 힘들었던 시간보다 지난 몇 년간이 훨씬 깊이 아팠어요. 아마 젊었을 때 그런 어려움을 겪었다면 못 견뎠을 거예요. 그런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성인이 된 후 다시 음악을 만났다는 게 어쩌면 다행인 거죠. 먼 길을 돌아온 건 나름 의미가 있다고 봐요.” 그녀는 아직 꿈을 이뤘다고 말하지 않는다. 꿈에 그리던 가수가 되어 음반을 냈지만 아직 노래하고 싶은 만큼 마음껏 하지 못한다. 치과의사라는 선입견도, 작곡가 이영훈이 선택한 뮤지션이라는 후광도, 그녀가 마음껏 노래하기 위해 극복해야 할 과제다. “아직 제가 많이 부족해요. 남들에게 얼마만큼 인정받느냐보다 음악을 통해 세상과 자유롭게 소통하는 날이 오면 제 꿈을 이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앞으로 노래와 공연으로 많은 분들을 만나뵙고 싶어요.” 음악인을 꿈꾸던 소녀는 다른 길 위에서 어른이 되었고 이제 다시 처음 길 위에 선 그녀는 멈춰 있던 소녀의 모습을 마주한다. 엄마가 아이를 키우듯, 자신의 노래하고 싶은 마음을 잘 키워야겠다는 생각은 음악에 대한 열정을 지켜나가겠다는 의지다. 이제 막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 소녀의 음악이 앞으로 오랫동안 아름답게 성숙하길 바라본다.2005년 11월의 어느 날 - 작곡가 이영훈의 편지 中 ‘음악을 한다는 것’ ... 내가 써왔던 300여 곡의 작품이 있는데, 그중에 100여 곡은 노래 습작이었고 120곡 정도만이 발표된 노래입니다. 그런데 그 120여 곡 중에서도 대중들이 사랑하는 곡은 그 반쯤밖엔 안 될 겁니다. 무슨 소린가 하면, 내가 좋아서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내가 피아노 앞에 앉아서 어떤 곡이 나올지는 저 자신도 알 수 없으니까요. 돈과도 상관없어요. 누가 내게 10억짜리 곡을 써달라 한데도 그 가치의 곡이 나올지 모른다는 거지요. 내 필생의 역작이 언제 나올지 나 자신이 알 수가 없으니 늘 피아노를 떠날 수도 없고, 또 쉽게 피아노 앞에 앉지도 못하는 거죠. 내가 만족하는 음악이 나를 이 길로 이끈 것이고 작곡가로 불려질 자격을 준 것입니다. 결국 누구도 내 음악을 판단할 순 없는 것이지요. 하지만 평가는 받겠지요? ^^ 그런 것들이 무슨 큰돈이라도 되겠습니까? 그 노력에 비하면 뭘 해도 그만큼들은 벌 텐데요. 다들 좋아서 밤샘을 하는 겁니다. 나 자신도 젊을 적에 음악인으로서의 ‘가능성’에 대해 참 많이 고민했습니다. 지금도 그렇구요. 나도 소연씨와 마찬가지로 시도하는 겁니다. 다만 내가 소연씨와 다른 건, ‘음악하는 사람이다’라는 마음으로 그 끈을 놓질 않는 겁니다. 내가 소연씨에게 본 것이 바로 그 끈입니다. 가는 실같이 약한 그 끈을 놓지 못하고 살아 온 모습을 보게 된 것이지요. 언제 끊어질지 모르게 가늘지만 희한하게도, 그 끈을 소연씨는 오늘도 잡고 계신 거고 나 같은 경우는 30년이 다 되어가네요. 차라리 시도하시기가 겁나면 항상 즐기세요. 어쨌거나 음악을 사랑하는 소연씨, 음악의 중심부로 들어오세요. 그 안에는 잘하는 사람도 있고, 못하는 사람도 있고, 못생긴 사람도 있고, 잘생긴 사람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고, 돈 많은 사람도 있고, 정직한 사람도 있고, 사기꾼들도 많고, 나이 든 사람도 있고, 어린 놈들도 있고… 징그럽게 우글우글하며 얽혀 있습니다. 거만한 놈, 유치한 놈, 쓰레기 같은 놈, 피아노도 못 치는 놈, 음악도 안 듣는 놈, 여자 남자 애 어른… 지겨운 음악 세계가 있습니다.중요한 건 별 사람이 다 있지만 명칭은 ‘음악 하는 사람’입니다. 그 세상에서 어떤 평을 받든 들어와야 음악 하는 사람이다, 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소연씨가 하는 것뿐입니다. 소연씨가 음악을 해야 음악 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이성원 ■장소 협찬 / 어반가든(02-777-2254)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