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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총 464 건 검색)

‘비선실세’ 트럼프 장남, 충성심 검증부터 기자석 지정까지
2024. 11. 29 15:51 국제
... 외부 지원 아버지 책 출간 등 ‘돈벌이’도 부친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과 포옹하는 장남 트럼프 주니어(오른쪽). A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장남 도널드 트럼프...
다시, 트럼프
‘유동성 위기설’ 롯데 역대급 임원 물갈이…장남 신유열 부사장 승진
2024. 11. 28 15:36 경제|경제|경제|인물
... 36%(21명)를 교체하고 임원 22%를 퇴임시키는 등 역대 최대 규모의 인사를 단행했다. 신동빈 회장의 장남인 신유열 롯데지주 미래성장실장은 부사장으로 승진해 경영 전면에 나선다. 60대 이상 임원은 절반...
롯데, CEO ‘3분의 1’ 날렸다…장남 신유열 부사장 승진
2024. 11. 28 14:23 경제|경제
... 전체 임원 작년 대비 13% 줄여 신동빈 회장 장남, 경영 전면에 롯데그룹 신동빈 회장(왼쪽 사진)과 장남인 신유열 부사장. 연합뉴스 롯데그룹이 28일 역대 최대 규모의 정기 임원인사를 단행했다. 신동빈...
SK 최태원, 장녀·장남과 첫 공식석상 “전통이니깐 훈련받아야”
2024. 11. 27 10:30 경제|경제|경제
... 기념사를 하고 있다. SK그룹 제공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장녀 최윤정 SK바이오팜 사업개발본부장, 장남 최인근 SK E&S 패스키 매니저와 공식 석상에 나란히 참석했다. 27일 재계에 따르면 최 회장과...

스포츠경향(총 93 건 검색)

[종합] 김준호 子 은우, 장남이 체질인가 봐 “동생 더 있으면 좋겠어” (슈돌)
2024. 12. 04 22:46 연예
KBS 2TV ‘슈퍼맨이 돌아왔다’ 전 펜싱 선수 김준호가 첫째 아들 은우 군의 발언에 당황했다. 4일 방송된 KBS 2TV ‘슈퍼맨이 돌아왔다’ (이하 ‘슈돌’)에서 김준호가 선배 김정환의 집에 방문했다. 집 방문에 앞서 김준호는 김정환에 대해 “펜싱 금메달리스트로 청룡장을 받았고 나보다 먼저 청룡장을 받은 선배”라고 소개했다. 청룡장은 1등급 체육 훈장이라고. 이어 “아마 펜싱선수 중에서 금메달이 가장 많은 선수일 거”라고 덧붙였다. 이에 김정환은 “그동안 준호 청룡장 없다고 놀렸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KBS 2TV ‘슈퍼맨이 돌아왔다’ 이날 김정환의 아들 로이는 31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영어로 숫자를 세는 모습을 보여 놀라움을 자아냈다. 로이는 1부터 1000까지 영어로 셀뿐만 아니라 가족들 차 번호까지 외우는 영특함을 보였다. 이에 김정환은 “가르친 게 아니다. 8시 반에 잠을 자는데 29분까지 숫자와 영어를 읽다가 잠이 든다”고 설명했다. 이어 두 아빠의 자존심을 건 아이들 간의 펜싱 대결이 시작됐다. 김준호는 “사실 로이가 숫자를 잘하는 거엔 크게 관심 없었는데, 펜싱 대결할 땐 승부욕이 올라오더라”라며 승부욕을 보였다. 정우와 로이는 서로 장난감 칼을 들고 방구석 펜싱 대결을 펼쳤다. 그저 장난을 치는 아이들과 달리 김준호와 김정환은 진지하게 바라봤다. 이에 MC 최지우는 “너무 진지한 거 아니냐”며 웃음을 보이기도 했다. KBS 2TV ‘슈퍼맨이 돌아왔다’ 아빠들의 열기가 과열됐고 김준호는 정우를 향해 “타깃을 봐. 정확하게”라고 조언했다. 그러자 정우는 칼을 하나 더 챙겼고, 김준호는 “쌍칼은 원래 안 되는데 이번엔 허용하겠다”라며 형을 찌르라고 지시했다. 김정환은 “정우는 뻥튀기도 2개 먹고, 칼도 2개 든다. 오늘부터 ‘곱빼기’란 별명이 생겼다”고 했고, 김준호는 “접때 형이 좀 (승부욕이) 올라왔다. 갑자기 아기한테 별명을 곱빼기로 짓는 사람이 어디 있냐”며 발끈했다. 이후 김정환은 은우에게 “동생 하나 더 있었으면 좋겠어?”라고 물었다. 그러자 은우는 “하나 더 있었으면 좋겠어. 남동생!”이라고 말해 김준호를 당황케 했다. 이를 들은 최지우는 “그럼 셋째 소식도 기다려볼 수 있나요?”라며 기대를 자아냈다. 김준호는 인터뷰에서 “은우가 오늘 남동생인 로이와 하루를 보내지 않았느냐. 오늘 즐거웠는지 남동생 있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금수저 전쟁’ 3400억 건설사 장남, ‘주식 위험성’ 심각 경고 왜? “주식은 도박, 죽을 때까지 하면 안돼”
2024. 11. 21 18:58 연예|연예
STUDIO X+U LG유플러스 STUDIO X+U 제로 베이스 게임 ‘금수저 전쟁’이 일명 ‘금수저 주식짤’을 대방출했다. 이는 ‘금수저 전쟁’ 방송에서 다뤄졌던 주식 투자 게임의 주요 모먼트들을 모은 것으로, 가짜 주식에도 무섭도록 진지한 금수저들의 불타는 승부욕을 엿볼 수 있다. 매주 월, 화 0시 U+모바일tv에서 공개되고 있는 ‘금수저 전쟁’은 대한민국 상위 0.1% ‘모태 금수저’ 8인이 펼치는 본격 생존 서바이벌이다. 부모의 후광, 현실에서의 부와 명예는 모두 무용지물, 오직 자신의 힘으로 0원부터 재산을 늘려 능력을 인정받아야 하는 쉽지 않은 도전이다. 현재 6회까지의 방송을 통해 베일에 가려졌던 ‘MZ 금수저’들의 면면은 물론, 개개인의 게임 운영 능력과 팀워크 등이 낱낱이 공개되며 많은 시청자들의 관심이 폭주하고 있다. ‘현실의 축소판’과도 같은 주식 투자 게임에서 금수저들의 ‘찐텐’이 폭발했다. 금수저들의 주식 시장은 신들린 적중률과 미친 운발, 떡상과 떡락을 오가며 도파민을 제대로 터트렸다. ‘1000억 풍력기업 대표’ 스타크, ‘더 지니어스’ 준우승 출신의 뇌섹남 인혜는 특정 종목에 대한 ‘개꿀정보’를 공유하며 ‘주식브로’를 결성했다. 또 두 사람은 보유하고 있는 주식의 하락에도 ‘존버’를 외치며 버틴 끝에, 장타로 대박을 터트리며 모두의 부러움을 샀다. 그러자 ‘대기업 창업주 외손자’ 재벌 3세 자인은 가짜 찌라시로 ‘주식브로’를 견제했다. 주식에 관해 문외한인 로빈슨을 자기 편으로 포섭한 뒤, 최대 경계 대상인 스타크에게 “허위 사실을 유포하라”라는 지시를 내렸다. 자인의 이러한 계략은 그대로 적중했고, 경쟁자의 몰락에 탄력을 받은 자인은 승승장구했다. 그는 ‘메르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등 과거 현실 세계에서의 주요 이슈를 정확하게 예측하는가 하면, 감으로 찍은 것마저 신기하게 맞아떨어지며 ‘다이아수저’의 타고난 운발을 과시했다. ‘1500억 마스크팩 신화 2세’ 무무는 주식계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자처했다. 그는 화장품 주식을 가지고 있던 자인에게 중국의 ‘사드 보복 조치’를 언급하며 매도를 제안, 자인의 은인으로 등극했다. 이에 대해 무무는 “어차피 제가 가질 수 없는 주식이니 아는 대로 가르쳐줬다”라고 대답해 더욱 감탄을 자아냈다. ‘3400억 건설사 장남’ 먼성의 ‘5G급 태세 전환’은 폭소를 유발했다. 먼성은 금수저 8인 중 가장 주식에 관심이 없는 듯 심드렁한 모습으로 게임을 시작했다. 그러다 게임이 무르익자 “이건 절대 하면 안 되겠다. 이건 진짜 도박이다”라며 푹 빠진 모습을 보이더니, 급기야 “주식은 죽을 때까지 안 할 것”이라고 다짐하며 게임을 마쳤다. ‘금수저 전쟁’이 출연자들의 예상치 못한 과몰입으로 ‘주식 맛집’이자 ‘게임 맛집’으로 거듭난 가운데, 앞으로도 다양하고 신박한 미션의 ‘금수저 능력 검증’은 계속된다. 제로 베이스 게임 ‘금수저 전쟁’은 매주 월, 화 0시에 공개되며, U+모바일tv 어플에서 무료로 시청할 수 있다.
‘다리미 패밀리’ 김현준, 겉바속촉 ‘K-장남’ 이무림 캐릭터로 첫 주말극 도전
2024. 10. 08 21:56 연예|연예
KBS 캡처 김현준이 ‘다리미 패밀리’에서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김현준은은 지난 5일과 6일 방송이 된 KBS2 특별기획 주말드라마 ‘다리미 패밀리’에서 봉희(박지영 분)의 무뚝뚝한 첫째아들이자 청렴 경찰서 형사 이무림 역을 맡아 현실적인 장남의 면모로 묵직한 분위기를 자아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무림은 첫 등장부터 예비 장모이자 경찰 서장인 미옥(김선경 분)과의 대화에서부터 대쪽 같은 성향을 뽐냈다. 그는 자신을 ‘장모님’이라고 부르라는 미옥의 권유에 “말 나오는 거 싫습니다. 서장님께 해가 될지도 모릅니다.”라고 단호히 거절하며 조금의 빈틈도 없는 고지식한 성격을 드러냈다. 그런가 하면, 지난 4화에서 무림은 지승돈(신현준 분)의 집에서 발생한 도난 사건을 수사하며 본격적인 이야기의 신호탄을 터트렸다. 무림은 드레스룸에서 풍기는 정체 모를 쇠냄새를 혼자만 수상하게 여기는 집요함으로 수사 방향 변화를 꿰하며 극에 긴장감을 더했다. 증거로 채택된 라이터에 남은 지문으로 용의자 오민기(강덕중 분)를 추적, 현장 급습을 통해 체포하며 거침없는 행동력으로 형사로서 진면모를 뽐내기도. 극 중 김현준은 캐릭터의 무게감을 섬세하게 표현하며 보는 이들로 하여금 이야기의 몰입감을 높였다. 긴장감 넘치는 전개 속에서 청렴동 도난 사건의 진실을 무림이 어떻게 파헤칠지, 김현준이 어떻게 캐릭터의 변화와 성장을 그려낼지 앞으로의 전개에도 기대가 모인다. 김현준이 출연하는 ‘다리미 패밀리’는 매주 토, 일요일 오후 8시 방송된다.
‘새벽 2시의 신데렐라’ 윤박, 표 K-재벌 장남 ‘다이아몬드 수저’
2024. 08. 27 22:42 연예|연예
쿠팡플레이 ‘새벽 2시의 신데렐라’ 배우 윤박이 쿠팡플레이 시리즈 ‘새벽 2시의 신데렐라’(연출 서민정, 배희영 극본 오은지, 크리에이터 박준화, 제공 쿠팡플레이, 제작 이매지너스, 스튜디오알짜)에서 재벌 그룹의 K-장남 ‘서시원’ 역을 맡아 럭셔리와 편안함을 오가는 매력을 펼치고 있다. 지난 24일과 25일에 공개된 ‘새벽 2시의 신데렐라’에서 서시원은 첫 등장부터 고급스러운 패션과 함께 ‘다이아몬드 수저’다운 여유를 선보였다. 집안에서 정해준 비즈니스 관계로 이미진(박소진 분)과 정략결혼을 한 시원은 어머니 김선주(진희경 분)가 동생 서주원(문상민 분)의 연애까지 간섭하자 씁쓸함을 숨기지 못하며 주원을 걱정했다. 시원은 헤어진 연인에게 매달리기로 한 주원의 고민을 진지하게 들어주며 끈끈한 형제애를 드러내기도 했다. 앞서 주원의 연인 윤서(신현빈 분)가 선주가 건넨 돈을 받고 주원에게 이별을 고했고, 주원은 윤서의 팀 상사가 되어 그녀의 마음을 돌리기로 결심한 것이다. 시원은 주원이 윤서를 만나 싫어하던 영화를 취미로 삼게 됐다고 하자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시원은 우연히 회사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윤서에게 “주원이 원래 영화 질색한다”고 귀띔했고, 이에 윤서는 주원이 자신을 위해 배려하고 있었던 사실을 알게 됐다. 윤박은 ‘새벽 2시의 신데렐라’에서 첫 등장부터 K-재벌 OOTD를 완벽하게 소화하며 눈길을 끌었다. 특히 윤박은 탁월한 사업가 기질을 발휘하며 회사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과 사적인 공간에서 편안한 복장의 자유로운 영혼을 오가는 캐릭터의 온 앤 오프를 입체적으로 담아냈다. 극 중 문상민과의 진지한 대화 중에도 윤박은 상의만 제대로 갖춰 입고 아래는 트렁크 차림을 하는 등 로운 싱글 라이프를 현실감 있게 그리며 극의 위기를 유쾌하게 이끌었다. 지난 2회 말미에 시원의 아내 미진의 컴백이 암시된 가운데 두 사람이 그릴 역주행 로맨스에도 기대가 모인다. 쿠팡플레이 시리즈 ‘새벽 2시의 신데렐라’는 매주 토, 일 밤 9시 쿠팡플레이에서 공개되며, 밤 9시 20분 채널A에서도 방송된다.

주간경향(총 4 건 검색)

[가깝고도 먼 아세안](13)훈센 ‘친중’ 목적은 장남에 정권 이양(2023. 06. 23 11:17)
2023. 06. 23 11:17 국제
지난 글에서 언급한 대로 중국은 고속도로, 정유공장, 발전소부터 해군기지 정비와 군사 목적이 의심되는 공항건설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캄보디아를 장악하고 있다. 훈센 캄보디아 총리의 적극적인 친중 행보 배경에는 첫째 아들 훈마넷에게로의 정권 이양이 있다. 훈센 캄보디아 총리 / VOA 캄보디아판 최고 성적의 국제대회 개최는 총선용  프놈펜 동남아시안게임 주경기장 건립에서부터 중국 원정 특별 훈련을 거쳐 국제대회 참가 사상 최대 성적을 거둔 캄보디아의 선전(지난 5월 19일 폐막한 제32회 동남아시안게임)은 오는 7월에 있을 캄보디아 총선을 위한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최초의 성공적인 국제대회 개최와 캄보디아의 사상 최고 성적은 정부에 대한 우호적인 여론이 형성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캄보디아 정부는 질서유지를 통한 원활한 대회 운영이라는 명분으로 한 달 동안 전국의 초·중·고는 물론 대학교까지 휴교령을 내렸다. 여기에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까지 모든 경기를 무료 관람하게 했다. 해외 TV 중계료에 경기에 참가하는 외국 선수단의 교통편, 숙박비와 식비까지 모두 무상으로 제공했다. 훈센이 통 큰 세계적인 지도자임을 보여주려는 포퓰리즘 정책이다. 이런 선심은 그러나 1인당 GDP 1765달러로 세계 최빈국인 캄보디아로선 상당한 무리수였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경제적으로 뒷받침해준 곳이 중국이다. 캄보디아는 다수당에서 총리가 선출되는 의원내각제 국가다. 2013년 총선 당시 의석 123석 중 훈센이 이끄는 캄보디아 인민당(CPP)이 68석을 획득해 간신히 과반을 유지했다. 30년이 넘는 철권통치에 관권 선거가 의심되는 상황에서도 야당의 선전은 훈센에게는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정권교체 여론이 형성되자 다음 선거를 장담할 수 없던 훈센이 정치 공작을 단행하기 시작했다는 의심마저 나오고 있다. 야당의 강력한 차기 총리 후보였던 삼랭시 대표는 2015년 ‘비방죄’로 의원직을 박탈당하고 지금도 프랑스에서 망명 중이다. 그럼에도 2017년 지방선거에서 야당이 44%의 위협적인 득표를 하자 야당 탄압은 더욱 거세어졌다. 야당 의원 절반 이상이 의원직을 잃거나 도망치듯 해외로 빠져나갔다. 2017년 11월 야당 CNPR은 ‘외부 세력에 의한 정부 전복 혐의’로 캄보디아 대법원에 의해 강제 해산됐다. 소속 정치인 118명은 5년간 정치 활동을 금지당했다. 훈센 총리는 불법 선거와 야당 탄압을 우려하는 캄보디아 주재 서방 대사들에게 ‘주권 모독’이라고 반발한다. 캄보디아의 주요 수출국인 미국, EU, 일본이 이러한 정치 탄압에 수입 규제 보이콧 움직임을 보이자 훈센은 적극적으로 친중 행보를 보이고 있다. 2세 세습을 위한 2023년 총선  2021년 12월 훈센의 첫째 아들이자 캄보디아 왕립육군사령관인 훈마넷은 만장일치로 집권 여당의 차기 총리 후보로 추대됐다. 경쟁력 있는 야당 정치인들의 정치 활동을 금지해 2023년 총선은 여당의 압도적인 승리가 예상된다. 훈마넷이 언제든지 총리가 될 수 있어 본격적인 2세 세습 정치로의 승계 준비를 마친 셈이다. 1977년생 훈마넷의 이력은 화려하다. 캄보디아인 최초 미 육군사관학교 졸업에 뉴욕대학 경제학 석사와 영국 보리스톨대학 경제학 박사를 받은 엘리트다. 철권통치를 위해 반드시 장악해야 할 군 권력을 위해 일찌감치 육군에 입대한 후 초고속 승진으로 군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일각에서는 강력한 군 권력과 해외 명문대학 경제학 박사 경력을 바탕으로 캄보디아를 개혁하지 않겠느냐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지일 뿐 야당 탄압에 앞장선 군 정보기관의 움직임에 훈마넷이 일정 부분 관여하지 않았겠냐는 부정적인 평가가 더 높다. 훈센 캄보디아 총리의 아들 훈마넷 / VOA 캄보디아판 캄보디아와 중국의 군사 협력은 5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캄보디아를 장악한 공산당 무장조직 크메르루주의 폴 포트는 캄보디아인 200만명을 학살한 극악한 인물이었다. 이 폴 포트 정권에 탱크와 무기를 지원한 곳이 중국이다. 호주 국립보안대학의 압둘 아만 야콥은 2023년 3월, 이스트 아시안 포럼(East Asian Forum)에서 1983년 2월 기밀 해제된 CIA 문서를 근거로 중국이 폴 포트에 T-54, T-63 탱크를 비롯한 각종 무기를 지원하며 베트남 침공을 유도했다고 주장했다. 폴 포트가 수년간 국지전 형태로 베트남을 공격하고 베트남인들을 살해하자 1978년 12월 베트남은 10만의 군사로 캄보디아를 공격해 2주 만에 프놈펜을 점령한다. 이에 1979년 2월 베트남의 캄보디아 점령을 빌미로 중국군 최정예 부대 20만명이 베트남 북부 지역을 침공했다. 이들은 한 달 만에 패배하고 철수했다. 베트남군은 프랑스, 미국과의 오랜 전쟁으로 실전 경험이 풍부한 데다 미군이 버리고 간 최신식 무기를 갖추고 있었기에 한국전쟁 이후 전투 경험이 없고 구식 무기를 갖추고 있던 중국군은 베트남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베트남과 오랜 원한이 있는 중국과 캄보디아의 군사 협력이 재개되며 베트남과 캄보디아 사이에 군사적 긴장감이 팽배해지고 있다. 2010년 중국은 캄보디아에 각종 소총과 기관총을 포함한 군복 5만 벌을 제공하며 군용트럭 257대를 지원했다. 2012년에는 캄보디아 특수부대가 중국에서 훈련했고, 2013년에는 중국제 Z-9 다목적 헬리콥터도 무상 제공했다. 중국과 캄보디아의 다양한 합동군사훈련도 진행 중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지금 중국의 캄보디아 해군기지 장악에 크게 반발하는 미국이 50년 전 중국과 함께 폴 포트의 캄보디아를 지원했다는 점이다. 미국은 200만명의 자국민을 죽인 폴 포트 정권만이 합법적인 정부라고 옹호했다. 게다가 중국이 베트남을 침공한 1979년 2월은 미국과 중국이 수교한 1979년 1월 1일 직후였다. 중국의 베트남 침공에 미국과 모종의 합의가 있었다는 건 이미 알려진 역사적 비밀이다. 베트남이 어느 특정 국가와도 군사동맹을 맺지 않고 모호한 입장의 외교전술을 펼치는 건, 적과 동지가 언제든지 뒤바뀌는 냉엄한 외교 상황을 익히 잘 알아서일 것이다. 베트남의 힘으로 킬링 필드의 폴 포트 정권을 몰아내고 38년 철권통치 중인 훈센이 베트남을 등지는 모습이나, 당장이라도 중국과 전쟁을 할 것 같던 미국이 어느새 중국에 손을 내미는 상황을 보며 국제정치와 외교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가깝고도 먼 아세안
[주간 여적]조순제 장남 조용래의 30년, 그리고 정유라(2017. 03. 21 18:43)
2017. 03. 21 18:43 오피니언
운이 좋았다. 출판사 대표와 연락하니, 마침 저자와 함께 있다고 했다. 게다가 회사와 가까운 곳에.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경향신문사에 방문하실 수는 없느냐”고 물었다. 인터뷰는 오후 9시에 성사됐다. 품었던 오랜 ‘의문들’을 털어놨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시간은 밤 11시를 훌쩍 넘겼다. '녹취록'의 주인공 조순제의 장남 조용래씨 / 박민규 선임기자 조용래씨의 책 은 탄핵이 인용되던 3월 10일, 서점가에 나왔다. 주요 대형서점 베스트셀러 정치사회분야 1위다. 16일 출판사에 문의해보니 3쇄에 들어갔다고 한다. 조용래씨는 이번 최순실 게이트 국면에서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된 이른바 ‘조순제 녹취록’의 주인공 조순제의 장남이다. 최태민의 의붓아들 조순제는 2007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때 박근혜 후보가 자신을 모른다는 말을 하는 것을 보고 격분해 당시 한나라당 후보검증위원회에 탄원서를 냈다. 그 후 자신을 찾아온 이명박 후보 측에 박근혜와 최태민의 관계에 대해 털어놨고, 그것을 채록한 게 ‘조순제 녹취록’이다. 저자를 만나 물어보고 싶었던 것 중 하나는 그 역시 1980년대 후반 벌어졌던 이른바 ‘영남대 박근혜 및 이사 친인척 비리사건’에 거론된 당사자라는 점이다. 이른바 영남대 친인척 비리 4인방 명단에는 ‘박근혜 비서 출신, 최태민 처의 전 남편 아들’이라는 설명이 붙은 조순제 이사가 있었고, 비리 중 하나로 ‘아들을 부정입학시켜 물의를 빚음’이라는 항목이 당시 작성된 문서에 있었다. 그 아들이 바로 조용래씨였다. 1988년 국정감사에서 폭로된 내용에 따르면 총 29명의 부정입학이 있었고, 각 2000만원을 거둬 재단 비자금으로 사용했다. 그 29명은 그 후 어떻게 됐을까. 2000만원을 냈다고 하더라도 당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었을 학생들이 낸 돈이 아니라 그들의 부모가 낸 돈이었을 텐데. 조심스레 물어봤다. “그 뒤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했어요.” 개인으로선 말로 다 못할 마음의 상처였을 것이다. 30년 전의 영남대 비리사건은 어찌보면 정유라 이화여대 부정입학 사건의 판박이다. 조순제 이사가 ‘실세’인 것은 그가 이사장 박근혜 관련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조용래씨는 “아버지가 옳지 않은 일을 한 것은 잘 알고 있고, 본인도 돌아가시기 전에 많이 후회했다”며 “사실이 남기를 바라 책을 쓴 것이며, 탄핵 이후 한국 사회에서 부정부패가 사라지는 데 책이 기여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달 중순, 덴마크에서 범죄인 인도 심사를 받고 있는 정유라가 송환이 확정되면 정치망명을 신청할 것이라는 현지 변호사의 발언이 보도됐다. “능력 없으면 니네 부모를 원망해. 돈도 실력이야”라고 SNS에 썼던 유라씨는 30년 뒤 무슨 이야기를 할지 자못 궁금해진다.
주간 여적
[이사람]남해군-부산시 가교역할 (주)덕인산업 장남인 대표이사(2007. 12. 18)
2007. 12. 18 경제
재부남해군향우회의 ‘영원한 리더’ 남다른 애향심으로 '남해군민대상'과 우수한 기업활동으로 '2007 국방품질경영상'을 수상한 장남인 대표이사. 최근 경남 남해군의 통합 브랜드인 ‘보물섬’이 소비자가 선정한 전국 대표 브랜드에 이어 브랜드 전문기관 평가에서도 대상을 차지하는 성과를 이뤘다. (사)한국브랜드경영협회가 주최하는 ‘2007 대한민국 소비자 신뢰 대표 브랜드 대상’ 최종 심사 결과, 군의 통합브랜드 ‘보물섬’이 기초단체 부문 브랜드 대상을 차지한 것이다. 이 상은 한국브랜드경영협회와 한국리서치가 공동으로 전국 브랜드에 대한 소비자 리서치 조사와 서류 심사, 국내 학계와 산업분야 브랜드 전문가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의 최종 검사를 거쳐 확정하는 만큼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올해 남해군민대상 수상 영예 '보물섬'이라는 브랜드로 더 친숙한 경남 남해군. “제 고향, 보물섬은 예나 지금이나 정말 살기 좋은 곳이에요. 인심이 좋기로 소문이 나 있고, 천혜의 자연환경으로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지요. 그래서인지 저 역시 몸은 비록 고향을 떠나 있지만 그곳에 대한 향수를 잊지 못하고 늘 그리워하는 것 같아요.” 지난 6월까지 재부남해군향우회 회장직을 연임했을 만큼 고향에 대한 애착이 남다른 ㈜덕인산업 장남인 대표이사는 수장에서 물러난 지금도 남해군의 발전을 위한 노력에 여념이 없다. “회장에서 물러났다고 해서 고향이 바뀌거나 애향심이 사라질 리 있나요. 오히려 지금은 예전보다 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고향을 오가며 여유도 즐길 수 있어 편안합니다(웃음).” 그는 올해로 제21회를 맞이한 남해군민대상 수상식에서 군민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앉기도 했다. 고향 남해군과 부산시(향우회)의 가교 역할을 제대로 해왔다는 것이 높은 점수를 받은 것이다. 실제로 남해의 특산물들을 구매하고 판매하는 것부터 향토장학사업, 부산시와의 자매결연 추진, 불우이웃돕기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제1의 고향 남해와 제2의 고향 부산의 상호협력 및 보완 관계를 진전시키는 역할을 해왔다. “꼭 고향이라서가 아니라 주변의 여러 어려운 이웃들을 보면 쉽게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입니다. 살면서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서로 어울려 정을 나누며 돕고 살아야 한다는 게 제 지론이지요.” 지난 11월 7일에는 김장수 국방부 장관으로부터 ‘2007 국방품질경영상’(중소기업부문)을 받아 기업가로서의 명성도 함께 얻는 영예를 앉았다. “작지만 품질력과 기술력을 지닌 기업이라는 자신감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특히 직원들에게 큰 자부심을 느끼게 할 수 있는 기회로 삼고 앞으로 더욱 열심히 기업활동에 전념할 생각입니다.” 현재 부산에는 35만 명에 육박하는 남해군 출향인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다른 향우회에 비해 결집력과 단합이 가장 뛰어나기로 소문난 재부남해군향우회는 평소 돈독한 향우애로 친목을 도모하고 있다. 향토 발전에 기여할 목적으로 1946년 결성된 재부남해군향우회는 그간 수많은 발자취를 남겼다. 매년 향우위안잔치와 정기총회, 신년하례회, 고향방문행사, 향우친선골프대회, 향우친선등반대회, 향우친선체육대회 등 크고 작은 행사를 다양하게 개최하고 있다. “다른 목적은 전혀 없죠. 고향 사람들끼리 모여 오랜 만에 타지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도 나누고, 정도 쌓고 그러는 거죠 뭐.” 지난 6월에 개최한 정기총회는 재부남해군향우회의 결집력을 한눈에 보여준 일례로 남았다고 한다. KBS 부산홀을 가득 메운 향우들로 빈 자리가 없어 무대를 둘러싼 예비 좌석을 모두 채우고도 1400여 명이 넘는 인원이 자리를 얻지 못해 그냥 돌아가는 ‘사태(?)’가 발생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해군 10개 읍면 단위의 향우회와 6개 지역향우회를 아우르기 위해 동창회와 동기회 각종 동호회를 비롯해 마을 단위의 향우회 등 특색 있는 모임을 통해 향우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기도 하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터를 닦고 기반을 잡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 향우들은 고향을 향한 마음을 한데 모아 희망을 공유하고 일생생활에서의 원동력을 되찾는 기회를 만들고 있답니다.” 35만 향우회 결집력·단합 뛰어나 향우회의 특성상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이뤄진 순수한 친목단체이자 한 지역에서만 존재하는 단체이니만큼 회원들의 단결과 화합이 가장 중요한 관건이다. 또 고향에 대한 마음만큼이나 현재 뿌리를 내리고 있는 제2의 고향에 대한 관심과 지원도 결코 소홀해선 안 된다는 점도 적지 않은 부담일 듯하다. 재부남해군향우회는 이를 위해 향우회관을 늘 개방함으로써 향우들이 상호간 거리를 좁히고 화합을 도모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또 매년 일정한 장학금을 전달해 성장하는 후배들이 길을 닦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기회가 닿을 때마다 35만여 향우들과 양 시군의 발전을 위해 기관단체장과 자리를 만들어 평소 지니고 있던 뜻을 전달하기도 합니다.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한 단체가 아니라서 그런지, 기관 운영에 오히려 더 잘 반영되는 것 같더군요.” 그는 35만여 향우가 고향에 대한 일이라면 서슴지 않고 나서는 것에 대해 늘 고마운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회장직에서 물러난 지금도 남해군을 오가며 고향과 부산에서 활동하는 향우들이 더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그가 있기에 전국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범위와 최고의 결집력을 보이는 향우회로 발전했는지 모른다.
장남 문호근과의 '고집대결'(2003. 09. 04)
2003. 09. 04 사회
인간의 서사는 때로 불합리한 길을 따라 걷는다. 산의 정상에 닿기 위해 봉우리를 등지는 내리막을 하산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을 오르막이라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문익환의 중년 세월이 그랬다. 깊고 깊은 생활의 계곡에서 허덕이고 있을 때 그가 과연 모세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든 완전주의자들이 그렇듯이 결벽을 버리지 못해 작은 일로 바둥대는 처량하기 그지없는 소시민적 고투를 세상은 애써 기억하려 들지 않는다. 당연히 지상에는 문익환의 40대가 어떻게 저물었는지 기록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없었다.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고 한-일협정이 체결되며 〈사상계〉지를 앞세운 장준하의 정치운동과 함께 함석헌-김재준 목사의 주위에 광범한 재야 지식인 그룹이 출현하는 그 숱한 시간 속을 문익환은 어떤 모습으로 통과했던가? 훗날 수없이 많은 단체와 출판사가 작성한 문익환 연보에도 그 시기의 일들은 송두리째 빈칸이 되었다. 전체를 통틀어서 언급되는 것이라곤 1965년 48세가 되던 칸에 덩그마니 '미국 유니온신학교에서 1년간 수학'만 놓여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1960년대 초엽의 어느날, 한약을 먹고 쓰러져서 귀가 먹은 이후로 그 영혼은 하루에 한 알씩 사과를 축낸 것밖에는 한 일이 없었다는 말인가? 아버지가 매일같이 사과 하나씩 먹되 한 번도 나눠주지 않는 것을 막내아들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땅 위의 인간들이 뿜어대는 모든 시선은 하늘의 별빛처럼 저마다의 자리에서 투사되는 법이다. 인간 하나하나가 오직 만물의 척도이어니. 문익환은 주변의 누구에게도 자신의 그 시절을 납득시킬 수 없었다. 언젠가 그를 도쿄 유엔사령부로 보낸 이가 장면 총리이고, 군사쿠데타로 밀려난 윤보선 대통령이 공덕귀 여사와 선볼 때 박용길의 남편 자격으로 불려나가기까지 한 내자측 최측근이라는 점만으로도 그가 정세의 흐름에서 깜깜하게 살아도 되는 처지는 아니었다. 한 술 더 떠 군사쿠데타의 주역을 맡은 만주군관학교 인맥들은 온통 광명중학의 동창이거나 선-후배였으니(아뿔싸! 목숨을 걸고 혁명공약을 발주한 업체 이름까지도 광명인쇄가 되다니!), 문익환에게 낯선 이라면 박정희와 김종필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만큼 배우고 리더십도 있었다면 무슨 일을 해도 했어야 옳았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복음동지회 친구들과 '조언하기 게임'을 할 때 전택부가 적어준 "야인이 되소서. 험하게 놀기도 하시고..."는 정곡을 정확히 찌른 촌철살인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러나 관심을 막상 문익환의 내면 쪽으로 돌리고 보면 아무리 전택부라 할지라도 그렇게만 말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당시 문익환은 기웃거리지 않는 곳이 없을 만큼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승만 정부가 간간이 저지르던 암살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시절의 재야였지만 그런 동네라 해서 문익환이 피해간 것은 아니었다. 김경재가 쓴 〈김재준 평전〉은 1960년대 후반기를 논하며 "박형규를 비롯하여 장준하-천관우-김관석-한승헌-이문영-서광선-현영학-이극찬-홍동근-안병무-이우정-서남동-문익환-문동환-김용준-신애균-강문규-김찬국-지명관-박상증 등이 김재준이라는 인물을 구심점으로 해서 반독재 지성인 그룹을 형성"했다고 서술한다. 현실 개혁에 앞장서지는 못했을망정 문익환이 세속의 구원에 무관심했을 턱은 없다. 추측컨대 그는 아마도 거장들의 뒷모습을 열렬히 응원하며 전위에 있는 자들을 부러워하고 추앙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타자와의 관계에서 자신에게 결여된 것을 끝없이 확인하고 객관화시키는 '아름다운 뺄셈의 사상'을 보유한 자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문익환이 공개적으로 '콤플렉스를 느끼는' 행위가 얼마나 적극적인 현실참여의 일환이었는지 이웃들이 깨닫는 데는 그후로도 무려 1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문익환의 40대 후반은 차라리 그의 개인사에서 가장 거족적인 약진이 이루어진 시기로 평가되어야 옳다. 그 고요한 소시민적 일상에 배어 있던 고투의 냄새들은 훗날 낱낱이 예언의 말씀으로 전환되었다. 혹자는 너무도 빨리 거물이 되며 보란 듯 스승이고 말지만 완전주의자 문익환은 너무도 오래오래 소년이길 고집했고 학생이길 희망했다.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끈기 있게 견디며 자신의 작업을 진행할 때 이따금 찾아오던 경제적 빈곤감과 장기간의 신경쇠약 그리고 참기 어려운 불면 속에서 그의 신학 세계는 한 걸음 한 걸음 익어갔다. 그의 동료들이 애독하던 〈기독교사상〉은 거의 한 호도 거르지 않고 문익환의 글을 실었다. 1962년 11월호부터 다섯 차례에 걸쳐 연재되는 '예언운동의 개척자들'은 대표적인 사례였다. 완전주의자! 스스로 납득되지 않는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 세상은 그런 자에게 언제나 두 몫을 맡기고도 쉬이 결실을 안겨주지 않는다. 문익환의 까다로운 한글 사랑은 성서 번역에서 한없이 완성도를 높이되 마침표를 찍기도 어렵게 만들었다. 완전주의의 불완전성이 여기 있었다. 하지만 성서 연구와 한글 연구가 똑같은 비중으로 개진되는 와중에서 그는 중요한 '생의 숙제' 하나를 해치웠다. 함경도에서 북간도로, 북간도에서 남한으로, 이후 서울의 허공에 떠버린 저 어둡던 날의 '19세기로부터의 망명자들'의 공동체를 육신화하는 고구려적 현현체로서의 가족을 수유리 한신대 캠퍼스 안에 무사히 안착시키는 위업을 남기는 것이다. 그런데 위업이라? 한국인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가문에 대한 헌신은 한 가문이 다른 가문과 물질적 부를 다투는 고질병 중 하나였다. 문익환의 가족애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비도덕적 가족주의와 다르지 않게 자녀들의 향학열을 부추기고 각자의 소질을 계발토록 하는 보살핌으로 작용했다. 그것은 그 모습 자체로만 보면 일반적으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언급했던 "햄릿을 읽고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교육받은) 사람들이 이웃집에서 받고 있는 인간적인 절망에 대해 눈물짓는 능력을 마비당하고 또 상실당하는" 결과를 낳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문익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가계사의 존속이 그에게는 남에게 이해시키기 어려운 중요성을 가진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것이 문익환의 역사에서는 반드시 갚아야 마땅한 '지상에 산 대가로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는 커다란 역사의 빚'이었던 것이다. 그같은 인식이 성립될 수 있는 근거를 우리는 다시 문익환의 가계가 하나의 결사체처럼 움직였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명동촌을 지키는 마지막 패밀리라는 의식의 가족주의는 대부분의 명문 가계가 파괴되어버린 후에도 파괴되지 않고 보존된 보기드문 사례에 속한다. 사실 문익환에게서 가족의 문제는 중년의 분발을 주저앉히는 세 가지 장애 중 하나였다. 만성 허약 체질과 체험적 반공주의의 체득 이외에도 북간도에서부터 전해오는 문씨 가계의 유지. 그 중 세번째는 전적으로 장남 몫이었는데, 어쨌든 문익환대에 떠맡겨진 명문의 '가족결사체'는 1960년대에 무사히 완성을 보았다. 문재린 목사와 김신묵 권사의 정착, 자녀들의 눈부신 성장, 아우 문동환의 귀국. 이로써 오랜 떠돌이 가족이 정상화되자 집안 곳곳에서 역동적인 힘들이 떠다니기 시작했다. 문선희가 미국과 캐나다 유학에서 돌아오면서 피아노를 가지고 왔고, 피아노는 다시 문익환의 자녀들에게 훌륭한 음악교사가 되었다. 그 아래 문영환은 연세대 영문과를 다녔는데 연극반을 하면서 개교기념회 때마다 촌극상을 제패했다. 대사도 없으면서 장장 2시간 15분 동안 무대 위에서 견뎌야 하는 장편 〈17포로수용소〉를 열연하고 다시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학사편입해 최불암 등과 함께 제1회 졸업생이 되었는데, 그는 오태석 등과 연극을 하면서 어린이 코러스로 문영금과 문성근 등을 데리고 다니면서 목사의 자녀들에게 저잣거리를 체험시켰다. 막내여동생 문은희는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세브란스 의과를 다녔는데 주로 교회에서 문익환의 설교를 모니터링하는 역을 맡았다. 텃밭이 좋으면 작물은 절로 익는 법이다. 아이들에게, 최고급 지성을 갖춘 할아버지와 할머니, 작은아버지 둘에 고모가 둘인 경우보다 더 좋은 환경은 없을 것이다. 이모도 둘인데, 한 이모부는 국회의원이요 한 이모부는 외교관이었다. 특히 수필가였던 큰이모(박용길의 큰언니) 박남길은 남편을 잃고 혼자 자녀들을 길러 조만간 한국을 대표하는 음악 명문가와 겹사돈을 맺어 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의 장모요 정경화의 시어머니가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익환의 완전주의는 가정에서도 좌절을 겪었다. 문익환의 결벽어린 교육관을 뒤집은 것은 장남 문호근이었다. 문호근의 성장기는 숱한 무용담으로 이루어져 어려서부터 온 집안을 장남타령으로 들썩거리게 했다. 문호근의 권위는 이미 다섯 살 때 확보되었다. 1-4후퇴로 피난을 가면서 목사와 국회의원들이 인천의 어느 교회 앞에서 모이기로 했을 때 문재린 목사가 통솔을 맡느라 경황없는 상황에서 심부름을 간 문호근이 오기도 전에 대열이 모두 떠나와 버린 일이 있었다. 배에 타면서야 어린 문호근을 빠뜨린 사실을 알고 문씨네 가족은 다급해졌다. 부랴부랴 돌아가보니 거기 침착하게 서서 한다는 말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할아버지가 찾으러 올 수 있을 것 같았다는 것이었다. 두 번 들은 노래는 따로 배우지 않고도 그냥 부를 줄 아는 영특함도 있었고, 아버지가 미국에 가 있는 동안 동생들을 지켜내는 어른스러움도 있었다. 학교에 다닐 때도 한 번은 머리에 붕대를 감고 와서 한다는 말이, 놀다가 머리를 다쳐서 혼자 병원에 가서 꿰매고 오느라고 늦었다고 말하더란다. 아버지 문익환과 아들 문호근의 대결은 아무도 막을 수 없는 고집 대 고집의 충돌이었다. 아버지는 학교에서 '문이 쾅'이라고 부르는 제자보다 훨씬 더 난처한 피교육자와 맞닥뜨렸다. 경기고를 마치고 서울대로 진학할 때도 부모 몰래 음대를 선택해버렸고, 학교에 들어간 후에도 납부금을 타다가 가수 조영남과 함께 연극을 한다고 돈을 몽땅 무대 올리는 데 써버리기도 했다. 아들은 낙제시킬 수도 없는 머리 아픈 제자에 속했다. 끝까지 원칙을 강조하는 아버지와 자신의 생각을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아들의 갈등은 가족공동체에 대해 각별한 가치관을 가진 문동환이라는 교육적 완충지대에서 끝없이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여과되어서야 해결되었다. 장남 문호근과의 갈등으로 문익환은 가족집단 내의 질서에 눈뜨게 되었다. 실로 3대에 이르는 십수 명의 거물이 한 지붕 아래서 공존의 훈련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가정의 민주화를 획득한 것이다. 토의와 자율! 이것은 이후 문씨네 가족과 다른 가족을 가르는 가장 큰 차이점이 되었다. 가족은 매일같이 식탁에 앉아 심포지엄을 방불케 하는 토론을 벌였다. 김형수〈소설가-중앙대 예술대학원 객원교수〉

레이디경향(총 5 건 검색)

탤런트 김혜자의 장남 임현식대표, 어머니표 도시락 담다
2014. 11. 23 17:30 화제
시판 조리음식의 과장된 포장이나 부실한 내용물은 늘 도마 위에 오르는 이슈다. 그 안에서 김혜자표 도시락은 고고한 자태를 뽐낸다. 맛과 구성이 뛰어나고 가격까지 착해 주린 배와 빈약한 지갑의 젊은이들에게 포만감을 선사한다. 그래서 그녀는 ‘마더 혜레사’라는 성스러운 별칭도 얻었다. 직접 해당 도시락의 품질을 관리하고 있는 배우 김혜자의 장남 임현식 대표를 만났다. 완고한 어머니 닮아 타협은 없다 정성에프에스 임현식(50) 대표는 배우 김혜자의 친아들이다. 서글서글한 눈매와 사근사근한 말투가 어머니를 꼭 닮았다. 유하고 차분해 보이는 인상은 왠지 사업가로는 보이지 않기도 한다. 그가 식품사업을 시작한 것은 2007년부터다. 건실한 일본 기업에 다니다 독립해 차린 의류사업이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그가 새로운, 그것도 식품업체를 운영하겠다고 했을 때 어머니 김혜자의 반대는 극렬했다. “사업을 하겠다고 말씀드리니 절대 안 된다고 하셨어요. 그런 상황이라고 포기하면 안 되니 혼자서라도 진행을 했죠. ‘정성찬’이란 이름으로 전복장, 육우 장조림, 더덕무침, 멸치조림, 콩자반, 깻잎무침이 들어간 종합 반찬 세트였어요. 모두 국산 재료에 설탕과 MSG는 넣지 않은 웰빙 반찬이었죠. 그러나 인공조미료에 대한 인식이 별로 없을 때라 사람들의 반응은 ‘좋은 건 알겠지만 맛이 좀 부족하다’였어요. 어머니가 반대했던 기획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품질에 타협할 수 없었던 이유는 어머니 김혜자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이름으로 시판되는 제품이니만큼 평생을 올곧게 쌓아온 이미지를 자신의 사업 때문에 상처를 낼 순 없었다. 게다가 그녀가 워낙 완고한 성격이라 새 상품이 나올 때마다 임 대표는 제일 먼저 맛과 품질에 대한 확인을 받아야 했다. “‘천연 다시 팩’을 작년 초에 기획했어요. 제품을 직접 사용해보신 어머니가 맛이 없다고 승낙하지 못하겠다는 거예요. 다시 팩의 내용물이 너무 적어서 국물이 만족스럽게 우러나오지 않았던 거죠. 시행착오 끝에 디포리를 첨가하면서 맛이 확연히 달라졌어요. 디포리는 살이 두툼해 적은 양으로도 국물이 충분히 우러나거든요. 그제야 어머니께서 승낙하셨어요.” 임 대표는 ‘천연 다시 팩’과 함께 ‘꽃게 다시 팩’을 개발해 4곳의 홈쇼핑을 통해 판매하고 있다. 그 외에도 김치, 떡, 언양식 불고기 등의 상품들이 ‘정성’이란 브랜드로 나와 있다. “새 상품이 나올 때가 되면 어머니께 더 많이 신경 쓰고 챙겨드리려 하죠. 이미지를 쓰겠다는 허락을 일일이 받아야 하니까요. 그럼 이미 눈치를 채시고 ‘너 또 뭐 하려고 그러지?’라고 하세요. 홈쇼핑 출연하시도록 설득하려면 한 달 전부터 작업에 들어가야 합니다(웃음).” 최근 화제가 됐던 ‘김혜자 도시락’은 그가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해당 업체가 김혜자를 브랜드로 좋은 제품을 만들고 싶다고 제안했고, 임 대표는 품질 관리에 개입하는 조건하에 계약을 했다. “도시락은 중간 유통 과정이 빠졌기 때문에 가성비 좋은 제품이 나올 수 있었던 거죠. 요즘 연예인들이 이름만 빌려줬다가 이미지에 타격을 받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 만큼 품질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감독하려 해요. 직접 사 먹어보기도 하고요.” 그는 도시락 신상품이 출시될 때마다 항상 먹어보고 본사에 의견을 전달한다. 모두 반영되는 것은 아니지만 좋은 제품을 통해 소비자의 입맛을 만족시킨다는 기본 일념은 두 업체 모두 같을 것이다. 1·3 젊은 엄마 김혜자는 몸매와 외모가 지금의 미시족 뺨치도록 매력적인 모습이다. 2 어머니 김혜자와 아들 임현식 대표의 과거 사진.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스타의 아들로 살아가는 것 김혜자는 1남 1녀의 자녀를 두었지만 한 번도 방송에서 공개한 적이 없다. 그만큼 가족에 대한 노출을 꺼렸다. 임 대표의 아들인 임동혁이 배우를 한다고 나섰을 때도 할머니 김혜자는 탐탁지 않게 생각할 정도였다. “큰딸은 영국 명문 의대에 진학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어요. 그런데 아들이 이번에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한국에서 연기를 하겠다고 말이죠. 할머니나 저나 대학만큼은 졸업하라고 아들을 설득 중이에요.” 임 대표는 어머니를 통해 연예인이란 타고나야 한다는 걸 옆에서 여실히 느낀 사람이다. 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아들에게 잠재적인 재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시작하려면 맨 바닥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올라가라고 했어요. 배우는 배경으로 되는 것이 아니니까요. 할머니를 통해 한두 번이야 케어를 받을 수 있겠죠. 그렇다고 배우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임동혁은 ‘세상에 믿을 놈 없다’라는 단편영화로 스크린 데뷔를 했다. 김혜자는 귀여운 손자라도 연기 평가만큼은 엄격했다. “어머니랑 저랑 시사회에 가서 영화를 봤어요. 근데 가만히 지켜보시던 어머니께서 ‘얘, 내가 이거 끝까지 보고 있어야 하니?’라고 하시는 거예요. 아주 혹평을 하셨어요(웃음).” 그러면서도 뒤로는 손자의 일일 연기 레슨을 해주기도 하는 따뜻한 할머니이기도 하다. “함께 일하는 분들은 어머니에 대해 냉정하고 차갑다는 평을 종종 하지만 저한테는 한없이 따뜻한 어머니셨어요. 스물두 살에 저를 낳으셨는데, 자식 기르는 재미에 푹 빠져 배우 생활을 잠시 그만두기도 하셨으니까요.” 임 대표는 잠시 대화를 멈추고 책장으로 가서 낡은 앨범 한 권을 꺼내 왔다. 어머니와 함께한 그의 어린 시절 흑백사진들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사진 속의 김혜자는 젊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가 엄마와 함께 방송국에 가서 최불암을 포함한 여러 배우들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들은 참 흥미로운 모습이다. “당시 상황이 모두 기억나지는 않지만 뚜렷하게 남아 있는 장면이 하나 있어요. 송재호 선생님께서 짓궂게 저를 놀리시려고 ‘현식아, 이거 봐라~’ 하면서 엄마를 포옹하셨죠. 저는 ‘어? 우리 엄만데!’ 하고 삐쳤던 기억이 아주 생생해요(웃음).” 김혜자는 누구나 인정하는 ‘국민 엄마’이지만 ‘음식 솜씨가 전혀 없다’라는 반전 소문도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오랫동안 배우 생활을 하다 보면 가정일은 소홀할 수밖에 없는 것 같은데, 사실일까? “요리를 전혀 못하신다는 소문, 저도 들었어요. 근데 그건 잘못된 이야기고요. 전업주부처럼은 못하셨지만 엄마 역할, 며느리 역할은 충실히 하셨죠. 시어머니인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30년간 수발을 드셨으니까요. 어머니가 해주신 음식 중 제가 제일 좋아하는 건 쇠고기 미역국이에요. 정말 맛있게 잘 끓이세요.” 김혜자는 ‘한국의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아프리카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20년이 넘도록 수백 명의 현지 아이들을 후원하고 있으며, 얼마 전에는 중앙아프리카를 다녀왔다고 한다. “가족으로서 말하자면 사실은 이젠 가지 않으셨으면 하는 마음도 있어요. 며칠씩 연락되지 않을 때면 정말 마음 졸이게 되죠. 이젠 체력이 떨어져서 한 번 다녀오시면 열흘씩 앓기도 하시고요.” 김혜자는 “만약 내가 거기서 죽게 된다면 그거 참 영화 같은 스토리 아니니?”라며 걱정하는 아들에게 웃음으로 응수한다. 젊은 시절에는 연기에 미쳤고, 나이가 들면서는 아프리카에 모든 것을 바치고 있다. 미련 따윈 없어 보이는 김혜자의 멋진 인생, 맛으로 표현하면 어떤 맛일까? <■글 / 이유진 기자 ■사진 / 장태규(프리랜서)>
고(故) 장준하 선생의 장남 장호권의 한(恨) 그리고 내일
2013. 03. 11 18:23 화제
ㆍ“무죄 판결, 기쁘기보다는… 서글펐다” 유신헌법 개정을 반대하며 1백만 인 서명운동을 벌이다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으로 기소됐던 고 장준하 선생에게 법원이 지난 2월에 무죄를 선고했다. 유죄 선고를 받은 지 39년 만이다. 그의 아들 장호권씨를 만났다. 그의 삶 속에 겹겹이 쌓인 한을 어찌 다 풀어낼 수 있을까. 그는 아버지의 죽음에 타살 의혹을 제기했다가 고초를 겪고 27년간을 도망치듯 한국을 떠나 있었다. 그가 밝히는 대통령 긴급조치 장호권씨(64)에게 고 장준하 선생의 무죄 판결에 대한 소감을 물었다. 미세하게 떨리는 그의 입술은 쉽게 말문을 열지 못했다. 표정에는 만감이 서렸다. 그는 선친을 ‘장 선생님’이라 칭했다. “기쁘다. 뭐 그런 건 별로 없어요. 39년 전에 아무 죄가 없는 장 선생께서 긴급조치로 잡혀가서 당한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독재 정권에서 ‘유신을 철폐하라’ 요구하는 건 국민의 당연한 권리잖아요.” 당시 누구도 진실이나 정의에 대해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모든 사회구조가 한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유신의 부당함을 이야기할 수 있는 수단은 국민들을 향한 청원운동뿐이었다. 장준하 선생의 개헌청원 서명운동에 첫 번째로 참여한 사람들은 김수환 추기경, 함석헌, 김영삼, 김대중… 그리고 김지하다. “장 선생님이 1백만 인 서명운동을 시작하고 나서 불과 며칠 사이에 40만 명이 서명을 했어요. 저는 서명한 용지를 거두기 위해 지프차로 전국을 밤새워 달렸던 기억이 생생해요. 국민적 관심이 점점 높아지니 다급해진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1호를 발동하게 되지요.” 민간인이었던 장준하 선생은 군사법정에서 15년형을 받고 구속된다. 그는 6개월 후 심장병으로 구치소에서 병원으로 옮겨 있다가 1년이 안 돼서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대통령 긴급조치 명령은 법보다 더 무서운 것이었다. 장 선생의 사인에 대해 얘기하는 것조차 긴급조치로 다스렸고 긴급조치에 대한 비방 역시 그것으로 다스렸다. “언젠가 민주화가 됐을 때 정리(무죄 판결)가 될 거라고 생각은 했었죠. 그 과정이 괴로웠던 거죠. 39년이나 걸렸으니까요.” 기득권과 연결고리가 없는 김대중·노무현 정권에서는 장준하 선생의 문제를 풀지 못했을까. 그는 그 이유를 친일과 군사독재 세력들이 여전히 이 나라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라 주장했다. “이 나라에 그들이 내린 뿌리가 얼마니 깊은지… 위정자들을 말끔히 청산하지 못했던 우리의 슬픈 역사 때문이겠죠. 제가 해외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해 의문사 진상 규명에 대한 조사권을 요구하는 서명 자료와 서한을 국회에 제출했어요. 그런데 영 소식이 없더군요. 알아보니 법사 위원장 서랍 속에 갇혀 있더라고요. 정수장학회 출신의 법사 위원장이었습니다.” 우리의 아픈 근대사는 여전히 그의 가슴속에 지울 수 없는 한으로 남아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도피 지금까지도 그를 보며 사람들이 말한다. “얼굴에서 아직 화가 빠지지 않은 것 같다”라고. 그가 당한 고통의 삶은 누구도 쉽게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털어낼 수 없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장 선생님을 모시고 재야운동을 하다보면 늘 기관원들이 제 뒤를 밟았고 제가 누군가와 인사라도 나누면 그를 따라가 신분증을 빼앗았기 때문에 마음 나눌 친구도 없었어요. 그런데 그보다 더한 고통은 살해당한 아버지의 시신을 눈으로 확인해야 하는 자식의 처지가 됐을 때입니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시신을 모시고 내려오던 때는 새벽녘이었다. 멀리 산등성이에서 아련히 해가 뜨고 있었고 산 밑에는 시신을 실을 군용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가 지금도 가끔씩 꿈에서 보는 광경이다. “장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 가족 전체가 풍비박살이 났어요. 어머니와 동생들과 함께 남산 밑 여관방에서 6개월을 산 적도 있어요. 내내 라면만 먹었던 기억 때문에 지금도 라면은 입에 대지 않아요.” 아버지의 의문의 죽음을 밝히려 동분서주하다가 괴한에게 테러를 당해 턱뼈가 여덟 조각이 나기도 했다. 3개월간 식음을 하지 못해 몸무게가 38kg이 됐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그는 말레이시아로 도피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한 뒤 귀국했지만 전두환 정권에 의해 체포돼 고문을 당하고 다시 싱가포르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물리적인 어려움은 몸이 부서질지언정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선친이 이루고자 했던 것을 따르지 못했던 자조감이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느꼈다. “화를 못 이겨 내가 아닌 나로 살았죠. 제 자신을 만신창이로 만들어 시궁창에 던지고 싶었어요. 술을 엄청 마시고 산 위에 올라 하늘을 향해 육두문자를 쏟아내기도 했어요. 그렇다고 쌓인 화가 풀리는 건 아니더군요.” 그는 도망치듯 한국을 떠났지만 외국에서 자신을 다시 찾게 됐다. 다른 환경에서 잠시 화를 잊고 지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는 아내와 두 딸과 헤어져 10년 이상을 홀로 타지 생활을 했다. 한국에서 가장 없이 두 딸을 키워야 했던 아내 신정자씨도 고생이었다. “1975년 5월 8일에 아내와 결혼했어요. 그러곤 석 달 만에 아버지를 여의었죠. 아내는 시아버지 사랑도 받지 못하고 참 힘들게 살았어요. 제가 자리를 비운 동안 딸 둘을 데리고 10년 동안 행상을 하며 지냈어요.” 그가 싱가포르에서 방 한 칸을 얻고 난 후에야 가족과 상봉할 수 있었다. 큰딸은 중학생이 됐고 작은 딸은 네 살이었다. “가족이 도착한다는 소리에 밥솥을 빌려다 밥을 짓고 반찬을 사왔지요. 신문지를 펴놓고 일회용 접시에 밥을 먹는데 그만 젓가락, 숟가락을 못 챙긴 거예요. 밖에 나가서 나무를 꺾어 즉석에서 젓가락을 만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이후 그는 그곳에서 금융소개업을 시작해 한국과의 무역 중개를 하며 생계를 꾸려나갔다. 어려운 이민 생활 속에서도 두 딸은 장성해 독립했다. “큰애는 미국 컬럼비아대학을 졸업하고 변호사를 하고 있고요. 작은애는 뉴욕대학을 나와 투자 회사 세일즈를 맡고 있어요. 제 철칙으로 둘 다 미국 시민권을 못 받게 했어요. 큰애가 월급이 차이가 난다고 하는 바람에 영주권까지만 허락했죠.” 대한민국 국적을 절대 버리지 말라는 그의 철칙 때문에 두 딸은 시민권은 받지 않을 계획이다. 그 역시 싱가포르에서 한인교민회 부회장을 맡으며 귀화하라는 의견도 많았지만 모두 거부했다. 그리고 다시 밟은 조국 그는 타지 생활에 적응하면서 문득 ‘내가 왜 피해 있어야 하나’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2003년 싱가포르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한 후, ‘장준하 의문사’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으로 조사와 규명의 성과를 올렸고 39년 전 긴급조치에 의한 잘못된 판결에 대해서도 무죄를 선고받았다. “무죄 판결을 받은 후 서글픈 생각이 먼저 들었어요. 사법부는 기본권 보장의 마지막 보루인데 그런 기관이 그동안 권력에 끌려다녔다는 방증이 아니겠습니까? 그동안 양심적인 재판관들이 얼마나 창피했을까요. 이번 일은 사법부의 명예를 회복하자는 의미에서 시작된 것이고 그렇게 선고를 해준 걸로 알고 있어요.” 그는 뿌리 없는 나무는 잎을 키울 수 없다고 말한다. 뿌리를 알아야 국민 대통합의 잎도 피울 수 있다는 주장이다. “지금이라도 과거사를 청산, 아니 최소한 정립해줄 필요가 있어요. 그들을 추궁해서 죄를 묻자는 것이 아니라 다시 정립하자는 말입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께서 ‘국민 대통합을 이루자. 이제는 싸우지 말자’라고 하셨지요. 잘못된 과거를 인정하고 그 바탕 위에서 손을 잡고 같이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또 덮고 가면 언젠가는 터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3월 초 장준하 선생의 유해 안장식이 열릴 예정이다. 그는 유골 감식을 이유로 선친의 관을 두 번이나 깬 것은 후손으로서 씻지 못할 죄라고 말한다. 그리고 얼마간 선친의 묘 옆에서 시묘살이를 할 것이란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이 나라가 밉지 않느냐고 물었다. “대한민국은 그들의 나라가 아닙니다. 내 나라, 우리나라입니다. 비록 그들이 나라의 권력을 잡고 잇속을 챙겼지만 그건 탄압이고 수탈당한 거예요. 나라를 그것으로부터 지키고 아껴야 합니다. 왜 미워합니까. 내 나라인데.” 장준하 선생 긴급조치 위반 무죄 선고 판결문 (일부) “이 사건 재심 판결이 유명을 달리하신 고인에게 조금이라도 평안한 안식과 위로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하며 주문과 같이 판결을 선고한다. 피고인은 무죄.” 고인은 격변과 혼돈으로 얼룩진 한국 현대사에서 조국 광복과 반독재 민주화 투쟁, 사상 계몽운동 등을 통해 나라의 근본과 민주적 가치를 바로 세우고자 일생을 헌신하셨던 우리 민족의 큰 어른이자 스승으로서 역사적 평가를 받는 분이고, 재판부도 그와 같은 역사 인식에 이견이 없다. 오늘 이 자리는 권위주의 통치시대에서 위법, 부당한 공권력의 행사로 크나큰 시련과 옥고를 겪게 됐던 고인께 국가가 범한 지난날의 과오에 대해 공적으로 사죄를 구하고, 아울러 잘못된 재판 절차로 인해 고인께 덧씌워졌던 인격적 불명예를 뒤늦게나마 명예롭게 복원시키는 매우 엄숙한 자리이기도 하다. 이에 본 재심 사건을 담당하게 된 재판부로서는 국민의 한 사람이자 사법부의 일원으로서 무거운 역사적 책임 의식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국민주권, 주권재민이라는 지극히 상식적이고도 보편적인 근대 헌법의 기본적인 헌법 가치가 무참히 핍박받던 인권의 암흑기에 고인은 민주주의의 기본적 가치를 회복하고 어둠을 밝히는 시대의 등불이 되고자 스스로 개인적인 희생과 고난을 마다하지 않으셨고, 그러한 고인의 숭고한 역사관과 희생정신은 장구한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이 시대를 같이 호흡하는 사회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큰 울림과 가르침으로 남아 연연히 이어져 오고 있는 바, 고인께 진심 어린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나아가 한평생 조국을 위해 헌신하셨던 고인께 유죄를 선고했던 잘못된 과거사로부터 얻게 된 뼈아픈 교훈을 바탕으로, 기본권 보장의 최후 보루로서 국민의 권익을 보호하고 보편적 정의를 실현하는 국민의 사법부가 될 것을 다시 한번 다짐하고 이 사건 재심 판결이 이미 유명을 달리하신 고인께 조금이나마 평안한 안식과 위로의 계기가 될 수 있기를 염원한다. 마지막으로 고인께서 유명을 달리하신 지 어언 37년의 유구한 세월이 흘렀음에도 좀 더 이른 시점에 잘못된 사법부의 지난 과오를 바로잡지 못한 점에 대해 고인과 그 유가족께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리고, 아울러 이 사건 재심 판결이 고인의 유가족께도 명예를 회복하고 자긍심을 갖게 되는 심적 위로가 되기를 기원한다. 고 장준하 선생은…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 종교인, 언론인이다. 일제강점기에 광복군 장교로 독립운동을 하다 정부 수립 후 문교부 국민정신계몽 담당관, 국민사상연구원 기획과장, 사무국장 등을 지내고 잡지 「사상계」를 창간했다. 이후 「사상계」는 당시 4·19 혁명의 단초가 되기도 했다. 또 그는 5·16 쿠데타 이후 한일회담 반대운동, 베트남 전쟁 파병 반대운동에 가담했고, 1974년 대통령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기소돼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다 1975년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최후를 맞는다. 사건 직후부터 박정희 정권에 의한 타살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돼왔다. <■글 / 이유진 기자 ■사진 / 안진형(프리랜서)>
‘삼성가 장남’ 이맹희씨 친자·양육비 소송 이어 형제간 재산 싸움까지…
2012. 03. 05 14:24 화제
ㆍ‘비운의 황태자’라 불리는 파란만장한 인생 삼성家 상속 분쟁으로 화제의 중심에 섰다. 삼성그룹의 창업주인 故 이병철 회장의 장남이자 CJ 이재현 회장의 부친인 이맹희씨(81)가 동생인 이건희(70) 삼성전자 회장을 상대로 상속재산 분할 소유권을 요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맹희씨는 지난 2006년부터 이어진 친자·양육비 소송 등으로 세간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삼성家 ‘비운의 황태자’ 이맹희씨는 누구? 故 이병철의 삼성그룹 창업주 장남인 이맹희씨(왼쪽), 3남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삼성 계열사의 경영자 자리에서 오래전에 물러난 이맹희씨. 아버지 故 이병철 회장과 어머니 故 박두을 여사 사이에 태어난 3남 7녀 중 장남인 그는 한때 삼성그룹의 후계자로 지목되며 활발한 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3남인 이건희 회장에게 밀려났다. 그 후 그에겐 ‘비운의 황태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이맹희씨는 20여 년 전인 1993년 회고록 「묻어둔 이야기」를 펴내며 삼성 경영권 승계 과정을 털어놨다. 그 내용은 1986년에 아버지 이병철 회장이 출간한 자서전 「호암자전」과는 사뭇 달랐다. 이병철 회장은 저서를 통해 “처음에는 주위의 권고도 있고 본인의 희망도 있어, 장남 맹희에게 그룹 일부의 경영을 맡겨보았다. 그러나 6개월도 채 못 돼 맡겼던 기업체는 물론 그룹 전체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본인이 자청해 물러났다”라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이맹희씨는 회고록에서 “내가 회사를 맡은 것은 7년이었으며, 회사에서 물러난 것은 기업이 혼란에 빠져서가 아니라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였다”라며 ‘사카린 밀수사건’ 후 이병철 회장의 경영 복귀 문제와 둘째 이창희씨의 ‘모반사건’을 둘러싼 오해를 그 예로 들었다. ‘사카린 밀수사건’은 1966년 삼성 계열사인 한국비료가 사카린을 밀수해 관세를 포탈한 혐의로 둘째인 이창희씨가 구속되고 이병철 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게 된 사건이다. 그 당시 이병철 회장은 장남을 후계자로 지목하고 공식적인 은퇴를 선언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맹희씨가 삼성그룹 총수에 오르지만 그의 천하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이맹희씨는 “정부와의 관계가 부드러워지자 아버지는 서서히 삼성의 경영자로 컴백할 결심을 하고 있었던 듯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일은 전혀 눈치도 채지 못하고 있었다”라며 “동생 창희의 아버지에 대한 ‘모반사건’이 터지자 사건은 더욱 심각해졌다”라고 회고했다. 이맹희씨는 회고록에서 이창희씨의 ‘모반사건’에 대해 1969년, “창희가 ‘아버지의 일선 복귀’에 대한 반대의 뜻을 담은 ‘탄원서’를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보냈다”라고 설명했다. 탄원서에는 이병철 회장의 비리, 외화 밀반출, 탈세와 관련된 의혹을 담고 있어 이병철 회장의 진노를 산 것으로 전해진다. 이맹희씨는 “아버지가 나도 이 일에 개입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라며 “하지만 지금도 나는 그 문제에 절대 개입하지 않았다고 맹세할 수 있다”라고 억울한 심정을 밝히기도 했다. 그는 “결국 이 사건이 부자간의 보이지 않는 불신의 씨앗이 됐다”라며 “내가 경영권에서 물러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라고 설명했다. 1972년부터 공공연히 회장 복귀 의사를 내비치던 이병철 회장은 급기야 1973년 이맹희씨를 불러 그가 가진 직함 17개 중 14개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그에게 남은 직함은 삼성물산, 삼성전자, 제일제당의 부사장 직함 세 개뿐이었다. 그 후 이병철 회장은 삼성그룹 회장으로 경영에 복귀했다. 그 뒤 이맹희씨는 아버지에게 ‘반항’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겨울에는 사냥을 하고 여름에는 제주도의 마라도를 떠돌며 아버지와 거리를 뒀다. 이에 대해 그는 “그때라도 자존심을 죽이고 매달렸으면 상황은 달라졌겠지만 차마 그러고 싶지 않았다”라며 “아버지가 나를 완벽하게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너무 억울했다”라고 전했다. 이맹희씨가 삼성그룹의 총수를 맡았던 7년간의 군림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976년, 이병철 회장은 구두 유언을 통해 차기 경영자로 3남인 이건희씨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뜻을 밝혔다. 그리고 1987년, 이병철 회장의 사망 후 이건희 회장이 후계자로서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하면서 이맹희씨는 재벌가의 장남이면서도 경영권을 승계받지 못한 ‘비운의 황태자’가 됐다. 선대회장의 유산을 둘러싼 이맹희·건희 형제의 분쟁 친자확인 소송과 양육비 청구 소송으로 화제를 모은 이재휘씨와 그의 어머니. 故 이병철 선대회장의 유산 상속은 삼성, 신세계, CJ 등 그룹 분할 과정을 거치며 일단락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지난 2월 14일, 이맹희씨가 이건희 회장을 상대로 주식 인도 등의 청구 소송을 서울중앙지법에 냈다. 부친이 타계한 지 25년이 지난 지금, ‘유산 상속’ 문제가 다시 불거져 나왔다는 것 자체가 새삼스럽다. 하지만 이맹희씨 측은 “이병철 회장은 사망 당시 차명주주 명의로 삼성생명 주식과 삼성전자 주식을 소유하고 있었다”라며 “이 주식을 이건희 회장이 다른 상속인들에게 알리지 않고 자신의 명의로 변경해 소유하고 있으므로 이를 상속분에 맞게 돌려달라”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맹희씨 측이 말하는 ‘차명주식’은 2008년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와 특별검사 팀의 수사를 거치며 세상에 처음으로 드러났다. 당시 “삼성이 전·현직 임직원의 차명계좌로 비자금을 관리하고 있다”는 김 변호사의 폭로로 특검수사가 시작됐다. 하지만 비자금 의혹을 받는 자금이 이병철 회장의 유산이었다는 결론으로 사건은 마무리됐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이건희 회장은 차명으로 관리해온 삼성생명 주식 3,244만여 주와, 삼성전자 주식 225만여 주를 자신의 명의로 변경했는데 이병철 회장의 유산이라던 이 자금이 지금의 소송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맹희씨 측은 “지난해 6월 이건희 회장 측이 차명재산을 실명 전환하는 시점에서 ‘다른 상속인들이 자신의 상속지분에 문제를 제기할 수 없다’는 문서를 보내 서명을 요구했다”라면서 “이 과정에 이건희 회장이 차명주식을 실명 전환한 뒤 보유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소송을 냈다”라고 전했다. 이에 이맹희씨 측은 삼성생명 주식 824만여 주와 삼성전자 주식 20주, 그동안의 이익배당금 1억원을 요구하고 있다. 이와 함께 이맹희씨는 삼성에버랜드를 상대로 삼성전자 주식 100주와 이익배당금 1억원도 청구했다. 현재 삼성생명 주가로 환산하면 이번 소송가액만 7천억원을 넘어선다.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다. 삼성생명 차명주식 중 삼성에버랜드로 명의가 변경된 875만여 주와 삼성전자 차명주식 57만여 주는 우선 일부만 청구한 뒤 나중에 추가로 소송을 낼 계획이어서 이를 포함한 소송가액은 약 2조원에 달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건희 회장의 누나인 이인희 한솔 고문, 동생인 이명희 신세계 회장 역시 이건희 회장 측에서 요구한 문서에 서명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만약 이 소송에서 이맹희씨가 승소하고 두 사람까지 소송을 제기 한다면 이건희 회장은 3조원이 넘는 돈을 내줘야 한다는 예상도 제기되고 있다. 이에 대해 이건희 회장 측은 “삼성생명의 차명주식 등은 선대회장(고 이병철 회장)의 유지에 따라 이건희 회장 소유로 하기로 했다”라며 “굳이 유지를 따르지 않더라도 상속권을 주장할 수 있는 시효가 지났다”라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맹희씨 측은 “상속재산에 대한 협의가 없었고, 삼성생명 주식 명의 변경은 2008년 12월에 있었기 때문에 소송이 가능하다”라며 맞서고 있다. 한편 지난 2월 15일, 이맹희씨 측이 소송 인지대 22억4천9백만원을 지불함에 따라 형제간의 소송 분쟁이 본격화될 전망이다. 지난 2006년부터 이어진 친자·양육비 소송 이미 오래전부터 유랑생활을 하고 있는 이맹희씨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다. 최근까지 중국과 동남아를 오가며 은둔생활을 하고 있다고 추정될 뿐이며, 장남인 이재현 CJ 회장을 비롯한 다른 가족과도 연락을 자주 주고받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왔다. 행방이 묘연하던 그가 세간의 이목을 끈 것은 지난 2006년에 불거진 ‘친자확인 소송’과 2010년에 이어진 ‘양육비 청구 소송’에 휘말리면서 부터다. 2006년 당시 이맹희씨의 친아들이라 주장했던 이재휘씨가 친자확인 소송을 냈고 대법원으로부터 이맹희씨의 친자가 맞다라는 승소 판결을 받았다. ‘친자일 확률 99.9%’라는 유전자 감식 결과가 결정적이었다. 이어 2010년에는 이재휘씨의 친모, 이맹희씨의 연인이었던 박 모 여인이 그간 혼자 아들을 키운 것에 대한 양육비 명목으로 4억8천만원의 청구 소송을 냈고 지난 2월 14일 법원으로부터 승소 판결을 받았다. 현재 이맹희씨는 중국 베이징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언론 보도에 따르면 그가 머물고 있는 별장은 베이징 3대 별장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최고급 주거 지역에 위치해 있으며 시세는 약 140억원에 달하고 이맹희씨가 7년 정도 베이징에서 거주해온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글 / 진혜린(객원기자)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
장남 SBS ‘웃찾사’ 임형택 PD 장가보낸 국민 MC 임성훈
2007. 05. 29 연예
MC 임성훈이 새 식구를 맞았다. 현재 SBS ‘웃찾사’의 조연출을 맡고 있는 장남 형택씨는 9년간의 연애 끝에 신부 서은정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현명하고 밝은 성격’의 딸 같은 며느리를 얻은 임성훈은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딸 같은 맏며느리 얻는 날 편안하고 재치 있는 진행으로 오랜 시간 시청자에게 사랑받아온 MC 임성훈(57)이 새 식구를 맞았다. 현재 SBS 예능국 PD로 ‘웃음을 찾는 사람들’의 조연출을 맡고 있는 임성훈의 장남 형택씨(30)는 지난 4월 7일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신부 서은정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두 사람은 고려대 캠퍼스 커플로 9년간의 교제 끝에 결실을 맺었다. 이날 결혼식의 주례는 임성훈과 오랜 시간 이웃사촌으로 지낸 한완상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맡았으며 사회는 유재석, 축가는 김종국이 불렀다. 식장에는 전영록, 강호동, 박미선, 정소녀, 조영구 등 많은 연예인이 참석해 며느리를 얻고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 임성훈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고 식장을 찾은 정소녀는 “워낙 겸손한 사람이라 아들 자랑을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잘 컸을 줄 몰랐다”며 형택씨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날 시종일관 웃으며 하객을 맞은 임성훈은 “처음 혼사를 치르다 보니 너무 정신이 없다”며 식장을 찾은 하객들에게 감사의 말을 잊지 않았다. “아들이 둘인데 첫 혼사다 보니 경황이 없어서 손님들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다 전하지 못한 것 같아 죄송해요. 아들 결혼식이니 기쁜 마음이야 당연하지만 떠들썩하게 여기저기 알려지는 걸 바라지 않아서 조용하고 조촐하게 치를 생각이었는데, 생각지도 않게 많은 분이 축하해주셔서 너무 고맙고 감사합니다.”“잘사는 것 말고 뭘 더 바라겠어요” “며느리가 딸처럼 느껴진다”는 임성훈에게 며느리 자랑을 부탁하자 그는 “쑥스럽다”며 말을 아꼈다. 그러고는 “현명하고 성격이 밝아요. 앞으로 그 아이 덕분에 집안 분위기가 달라질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손자를 빨리 보고 싶지 않냐?”고 묻자 그는 “손자를 보고 싶은 마음이야 있죠. 하지만 아직 할아버지 소리는 듣고 싶지 않은데요(웃음). 두 사람 모두 젊고 이제 막 결혼했으니까 아이는 천천히 가졌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이제 막 부부의 연을 맺은 아들 내외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의 말을 전했다. “부모로서 자식이 잘사는 것 말고 뭘 더 바라겠어요(웃음). 굳이 하나를 덧붙이자면 오랫동안 서로 아끼고 사랑한 것처럼 앞으로도 서로에게나 사회적으로 책임감을 갖고 행동하며 행복한 가정을 꾸렸으면 좋겠어요.” 국민 MC 임성훈. 올 한 해 그의 가정에 웃음소리가 떠나지 않을 것 같다. ■글 / 김성욱 기자 ■사진 / 이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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