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총 527 건 검색)
- 전태일 열사의 ‘가장 행복했던 시절’…시민 손으로 활짝 열다
- 2024. 11. 13 21:31 사회
- ... 열사 옛집’ 개관식 및 54주기 추모 행사를 개최하고 복원된 공간들을 공개했다. 행사를 주도한 전태일의친구들은 전 열사의 삶과 정신을 계승하고 알리기 위해 시민사회 등 각계 인사가 모인 단체다. 이...
- 전태일의 “가장 행복했던 시절” 대구 옛집, 시민들 손으로 다시 태어났다
- 2024. 11. 13 18:00 사회|지역|사회|사회
- ... 과정을 소개하는 영상 상영과 기부자들의 축사 및 축하공연, 기념 식수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전태일 열사의 여동생인 유족 전순옥 전 국회의원을 비롯해 노동계와 시민사회단체 관계자 등이 함께 했다....
- ‘전태일 열사’ 대구 옛집 5년 만에 복원…13일 개관·추모행사
- 2024. 11. 11 09:59 지역
- ... 비용 마련해 사업 완료 전태일 열사의 대구 옛집 복원 작업이 5년 만에 마무리됐다. 사단법인 ‘전태일의친구들’은 오는 13일 중구 남산동 전태일 열사의 옛집에서 개관식과 함께 54주기 추모 행사를 열...
- [지금, 여기]전태일에게 진 빚 갚기
- 2024. 11. 03 21:34 오피니언
- .... 이렇게 쓰고 보니 지난 50여년 동안 많은 것이 달라지고, 나아진 것이 실감난다. 이렇게 되기까지 전태일만이 아니라 수많은 노동자들의 피땀과 투쟁, 때로는 생명의 희생이 있었다. 그러나 아직 가야 할...
- 지금, 여기
스포츠경향(총 14 건 검색)
- 전태일 열사 52주기 추모 다큐 ‘야근 대신 뜨개질’ 오늘 본다
- 2022. 11. 11 16:25 생활
- 전태일 열사 52주기 추모 다큐 ‘야근 대신 뜨개질’ 전태일 열사 52주기를 맞아 추모 다큐 ‘야근 대신 뜨개질’이 전파를 탄다. TBS는 오늘(11일) 전태일 열사 52주기 추모 다큐 ‘야근 대신 뜨개질’을 방송한다. 2016년 11월 개봉한 ‘야근 대신 뜨개질’은 박소현 감독이 연출한 다큐멘터리로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다큐멘터리상, 서울독립영화제 특별언급 등을 수상하며 개봉 당시 큰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야근 대신 뜨개질’은 야근에 지친 직장인들의 소소한 일탈과 현실적인 고민, 도전, 실패, 재기를 담고 있다. 주인공 ‘나나’는 사회적 기업에서 근무하고 있다.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상, 과중한 업무, 잦은 야근에 지친 그녀와 동료들은 뜨개질을 통해 삭막한 도시를 알록달록 물들이겠다는 다소 엉뚱한 목표를 세운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 어쩐지 순조롭지 않다. 그녀들이 애써 만들어 버스정류장 곳곳에 걸어놓은 뜨개질은 쓰레기 취급을 받고 곧 폐기된다. 뜨개질이 도시를 알록달록 물들이지도, 야근으로 점철된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나나’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낸다. 그녀는 사회적 기업 최초로 노조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실행에 옮긴다. ‘야근 대신 뜨개질’은 일에 지친 직장인들이 자신 노동 환경을 변화시키기 위해,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지 솔직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처음엔 뜨개질로 시작한 작은 움직임이 점차 크고 단단해지는 과정을 흥미롭게 담고 있다. 전태일 열사 52주기 추모 다큐 ‘야근 대신 뜨개질’은 오늘(11일) 오후 10시 30분 TBS TV를 통해 방영된다.
- [편파적인 씨네리뷰] 전태일, 그리고 ‘미싱타는 여자들’
- 2022. 01. 08 09:21 연예
-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 공식포스터, 사진제공|(주)영화사 진진■편파적인 한줄평 : 또 기억해야할 그들의 이야기. 수많은 노동인권 열사 중 ‘시다 7번’ ‘미싱사 1번’ 등으로만 불렸던 앳된 소녀들이 있었다는 걸 알고 있는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은 ‘전태일’ 뿐만은 아니다. 다시금 꺼내보고 기억해야하는 이들의 이야기, 다큐멘터리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감독 이혁래, 김정영)이다. ‘미싱타는 여자들’은 1977년 9월 9일 청계노조가 운영하던 노동교실을 폐쇄한 국가폭력에 맞서 투쟁한 여공들의 그때와 지금의 이야기다. 갓 스무살도 안됐던 꽃다운 소녀들이 이제는 환갑을 바라보는 장년이 되어 어제와 오늘을 재조명한다. 뒤로 갈 수록 힘을 받는 영화다. 시작은 잔잔하나 이숙희, 신순애, 임미경 세 주인공과 이들을 둘러싼 주변인들이 충격적 ‘그 날’을 떠올리면서 담담하게 밝히는 사건의 진실엔 보는 이의 눈시울을 젖게하는 강력한 힘이 있다. 국민학교만 졸업하곤 가족과 생계를 위해 평화시장 시다로 들어온 어린 여공들. 전태일의 분신을 두고도 ‘깡패같은 놈이 죽은 사건’으로만 알았다는 이들이 어떻게 노동 인권에 눈 뜨고 조합까지 제 발로 찾아가 뜨거운 역사에 휘말리게 됐는지 과정을 직접 밝히며 108분간 눈과 귀를 붙잡아둔다. 또한 당시 꽃다운 모습을 담은 사진과 공소장, 재판 받은 기록, 감옥으로 보낸 편지 등 여러 자료가 교차편집되며 이들의 아픔과 상처를 객석에 전달한다. 특히 작품 말미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소녀 투사들이 40년 만에 평화시장을 찾아 곳곳을 둘러보며 옛 기억과 마주하는 순간은 뭉클한 무언가를 넘어선다. 평화시장 벽에 걸린 자신의 옛 사진을 바라보며 “20대의 나를 사랑한다” “그때도 잘 살았고, 지금도 잘 살고 있다” “참 수고했어”라고 위로와 사랑을 건네는 그들에게선 엄마가 보이고, 소녀가 보이고, 나아가 개인의 고귀한 역사를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이들이 함께 모여 노조에서 자주 불렀던 ‘흔들리지 않게’ 역시 영화의 미덕이다. 여성 조합원들의 고초와 슬픔, 그리고 이 모든 걸 이겨낸 지금의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마음이 뒤섞이며 웅장한 전율을 선사한다. 다만 진입장벽은 높다. 노동인권을 다룬 다큐멘터리이면서도 초반 시동이 다소 늦게 걸리는 탓에 자칫 지루한 첫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오는 20일 개봉.
- 편파적인 씨네리뷰ㄹ
- 영화 ‘태일이’ 관람한 김재연 대선후보 “지금 시대 전태일들의 ‘전국민노동법’ 만들겠다”
- 2021. 11. 11 00:23 연예
- 노동당 제공진보당 김재연 대선 후보가 지난 9일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배달노동자들과 함께 전태일 열사의 생애를 담은 영화 ‘태일이’를 관람했다고 전했다. 김 후보는 영화 관람에 앞서 배달노동자들을 만나“‘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고 외쳤던 전태일 열사의 외침이 51년이 지났지만 현실은 근로기준법을 적용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며 지적했다. 김재연 후보는 “특히 배달노동자는 근로기준법도 적용받지 못하고, 언제 다칠지 모르는 위험한 노동환경에서 기계처럼 일만하고 있다”며 배달노동자, 청년노동자, 5인미만 사업장 노동자들을 언급하며“지금 시대 전태일들의 ‘전국민노동법’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전국민노동법’은 김재연 후보가 지난 9월 29일 발표한 10대 핵심 노동공약 중 하나로, 5인 미만 사업장까지 근로기준법 전면 적용, 주52시간제, 각종 수당, 직장 내 괴롭힘 금지, 부당해고 구제신청 등 근로기준법의 핵심조항 적용, 근로기준법의 근로자 개념을 ‘계약의 형식에 관계없이 타인의 사업을 위하여 노무를 제공하는 자’로 개정하여 특수고용노동자, 플랫폼노동자, 프리랜서, 자영업자 등 모든 일하는 사람들에게 근로기준법 적용 등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김재연 후보는 “일하는 모든 노동자들을 위해 정권교체를 넘어 체제교체로, 불평등 사회를 타파하고 노동중심의 평등 사회를 실현하는데 배달노동자들이 앞장서서 함께 만들어가자”고 강조했다. 김 후보는 전태일열사 51주기를 맞는 오는 13일, 불평등 세상을 뒤집는‘전태일열사 정신계승 2021전국노동자대회’에 참가할 예정이다. 영화 ‘태일이’는 오는 12월 정식 개봉이며, 9일 상영은 민주노총에서 주최한 시사회다.
- 김재연
- 국민의힘 윤희숙 “52시간 유예가 전태일 정신” 주장···“반성 없이 더 쥐어짜자고 하는 것” 비판 이어져
- 2020. 11. 13 23:02 생활
- 윤희숙 의원 SNS 캡처.국민의힘 윤희숙 의원이 전태일 열사 50주기인 13일 주 52시간 근로제와 관련, “50일 앞으로 다가온 ‘52시간 근로’ 때문에 중소기업들이 절망하고 있다. 그나마 있는 일자리를 없애 근로자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리지 않도록 유예해야 한다”며 “중소기업 전면적용을 코로나 극복 이후로 연기하는 것이 전태일 정신”이라고 주장해 파문이 일었다. 윤 의원은 SNS 글에서 이런 주장을 펼친 후 “우리 근로기준법이 1953년 전쟁통에 만들어지면서, 주변 선진국법을 베껴 ‘1일 8시간 근로’를 채택했다”며 “제정 당시 법과 현실이 괴리됐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더불어민주당 김현정 노동대변인은 논평을 내고 “전태일 정신을 모독하지 말라”면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열사의 외침이 어떻게 주 52시간 도입을 연기하라는 것으로 들리는지 분노를 넘어 실소를 금할 수 없다”고 말했다. 조혜민 정의당 대변인은 논평에서 “윤 의원의 황당무계한 주장”이라며 “아직도 노동자들의 고혈을 짜는 장시간 노동으로 기업 경영이 이뤄져야 한다는 식의 저열한 인식이 노동자들의 노동권과 대한민국 경제를 후진적으로 만든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페이스북에 “이런 소리를 하는 데 왜 전태일을 파느냐”며 “저러니 저 당은 답이 없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우석훈 성결대 교수는 SNS에서 “자기들이 집권하는 10년 동안 노동자들은 죽어 나가고 있었는데 최소한의 반성도 없이 더 쥐어짜자고 하는 게 코로나 국면에서 맞는 얘기인지 모르겠다”며 “이렇게 안이하게 상황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국민의힘이 대안세력에서 점점 더 멀어져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주간경향(총 22 건 검색)
- [렌즈로 본 세상]전태일 열사 옆에 잠든 ‘시대의 어른’(2021. 02. 26 14:20)
- 2021. 02. 26 14:20 사회
- 우리 사회의 가장 아프고 서러운 이들의 벗이자,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백기완 선생이 지난 2월 15일 세상을 떠났다. 선생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5일 동안 치러졌다. 2월 19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발인식을 시작으로 ‘시대의 어른’을 떠나보내는 의식이 진행됐다. 발인에 이은 노제는 고인이 설립한 통일문제연구소와 생전에 자주 찾았던 학림다방 등에서 열렸다. 대학로를 출발한 긴 운구행렬은 종로를 지나 영결식장인 서울광장에 닿았다. 선생의 시 ‘묏비나리’가 원작인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퍼지고, 고인의 오랜 동지였던 문정현 신부와 송경동 시인,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 등이 고인을 기리는 글을 읽었다. ‘거리 두기’를 한 1000여명의 시민이 고인의 마지막 길을 지켰다. 이날 오후 경기 남양주 마석 모란공원에서는 하관식이 엄수됐다. 백기완 선생은 전태일 열사의 옆자리에서 영면에 들었다.
- 렌즈로 본 세상
- [취재 후]50년 후, 2020년에 되돌아보는 전태일(2020. 11. 13 15:10)
- 2020. 11. 13 15:10 사회
- 그렇게 길어질지는 몰랐습니다. 한두 시간 정도 이야기를 듣겠거니, 했는데 어머니의 말씀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습니다. 결국 막차 시간 직전에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습니다. 예상 못 했던 저녁식사 대접도 받았습니다. 전기밥솥에서 밥을 뜨고 콩자반, 마른 오징어채볶음, 깍두기 같은 반찬을 곁들인 소박한 집밥이었습니다. 이소선 어머니와 전태일 열사의 동생 태삼씨 그리고 저까지 셋이서 밥을 먹었습니다. 꿈인지 생시인지, 그때까지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대학 1학년 시절, 신입생 예비학회에서 가장 먼저 읽은 책이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전태일평전>이었습니다. 지금은 모 보수 매체에서 데스크를 맡고 있는 동기가 “전태일은 자신을 희생한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대부분의 다른 사람은 게으름을 피우다가 노동자가 된 것이 아닌가”라는 주장을 용감히(!) 꺼내놓았다가 같이 세미나에 참석한 다른 동기들의 지탄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기 학벌은 자신의 힘으로 달성했다는 일종의 능력주의적 환상이 깃든 순진한 발언이겠지요. 제가 대학 신입생일 때가 1989년이니 벌써 30년도 넘은 이야기입니다만, ‘노동’에 대한 한국사회의 인식은 그 뒤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분명 많이 달라지긴 했습니다. 군대를 다녀와서 대학원에 들어갈 즈음인 1995~1996년 무렵에 민주노총이 결성됐고, 2010년대에도 최규석 작가의 <송곳>과 같은 작품이 비정규직이나 노동조합에 대한 인식을 환기하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부족합니다. 지난해 경향신문 1면 기획이 생각납니다. 노동자 산재문제를 다루는 기획이었습니다. ‘오늘도 3명이 퇴근하지 못했다’는 표제로 배경에 깔았던 산재사망 노동자의 이름들, 그들은 여전히 그냥 잊힌 사람들입니다. 여·야 모두 동의한다고 하니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위시한 전태일 3법이 연내 국회에서 통과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옵니다만, 그 이후에도 ‘잊힌 산재사고 사망자’는 있을 겁니다. 50년이 흐른 지금 다시 전태일을 생각합니다. 전태일의 삶을 미화하거나 영웅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있는 것은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다”라고 외쳤던 그의 말이 남긴 울림을 곱씹어 봅니다. 참, 인터뷰 후 이소선 어머니를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개인적인 사정입니다만 1년에 두어 차례 마석 모란공원 묘지를 갑니다. 다음번 방문 때는 한번 찾아뵈려 합니다.
- 취재 후
- [표지 이야기]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기억법(2020. 11. 06 15:24)
- 2020. 11. 06 15:24 사회
- ㆍ전태일기념관 지난해 개관… 50주기 개정판 나와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 앞 버들다리 위에는 전태일 동상이 있다. 그래서 버들다리는 ‘전태일 다리’라는 이름도 얻었다. 동상 주변 보도에는 열사의 뜻을 기리는 시민들이 새겨넣은 동판이 빼곡하다. 2005년 35주기에 동상과 동판이 설치된 뒤 수많은 전태일이 이곳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오토바이와 사람 소리로 분주한 평화시장 초입. 둥그런 동판이 전태일이 분신한 장소임을 알린다. “1970. 11. 13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 여기서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다” 전태일의 삶을 기억하는 방법은 멀리 있지 않다. 서울 종로구 전태일기념관 3층 상설전시장 모습 / 권도현 기자 전태일 다리에서 1.5㎞ 떨어진 청계천 수표교 인근에는 6층짜리 전태일기념관이 있다. 노동절을 하루 앞둔 지난해 4월 30일 문을 열었다. 입구 외벽에 새겨진 글은 질문을 던지며 시작한다. “오늘날 여러분께서 안정된 기반 위에서 경제 번영을 이룬 것은 과연 어떤 층의 공로가 가장 컸다고 생각하십니까?” 1969년 12월 전태일이 근로감독관에게 보낸 진정서다. 그의 삶을 담아놓은 전시장, 노동권익센터, 노동단체 네트워크 공간인 노동허브 등이 기념관을 이룬다. 상설전시장은 전태일의 생애와 허리조차 펴기 힘든, 좁고 어두운 다락 작업장을 재현했다. 1960~1970년대 평화시장의 어린 여공들은 하루 15시간 넘게 쭈그리고 앉아 ‘미싱’을 돌렸다. 전태일은 버스비를 털어 배곯는 여공들에게 풀빵을 사주고, 2시간 넘게 쌍문동의 집으로 걸어가곤 했다. 그 시절 노동문제에 눈을 뜨고 행동하며 남긴 글과 유품, 전태일 사후 어머니 이소선 여사와 동료들의 투쟁 기록들이 전시장을 채우고 있다. 내년 상반기 개봉 예정인 애니메이션 영화 포스터(왼쪽)와 50주기 개정판 표지/ 명필름, 전태일재단 내년에 애니메이션 <태일이> 개봉 기획전시장에서는 내년 8월 15일까지 <청계, 내 청춘, 나의 봄> 전시가 열린다. 전태일의 분신 이후 이소선 여사, 친구들, 여성노동자들이 그의 뜻을 이어 결성한 청계피복노동조합의 활동을 엿볼 수 있다. 기념관은 매주 월요일 휴관이다. 현재 코로나19로 홈페이지에서 예약해야 관람할 수 있다. 전태일은 공책 7권 분량의 일기를 남겼다. 일기는 고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평전>의 밑바탕이 됐다. 최근 <전태일평전> 50주기 개정판이 나왔다. 본문은 2009년의 세 번째 개정판을 따랐다. 전태일의 일기와 수기를 인용한 부분에는 색을 입혔고, 요즘에는 잘 쓰지 않는 말이나 젊은 세대에게 생소한 사건에는 주를 달았다. 보릿고개를 넘긴 지가 언제인데 전태일의 시대를 떠올리냐고? 개정판을 펴낸 전태일재단은 ‘책소개’에서 그 의문에 답한다.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속 분신 장면. “인간은 밥 없이는 살 수 없지만, 그 만고의 진리가 인간더러 밥의 노예가 되라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만 스물두 살 젊은 육신에 불을 댕기며, 전태일이 이루려 했던 것. 그것은 바로 인간의 나라였다. 전태일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까닭이다.” 전태일은 25주기였던 1995년 11월 영화가 되었다. 한국영상자료원 홈페이지 또는 자료원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한국고전영화’에서 무료로 만나볼 수 있다. 내년 상반기에는 애니메이션 영화 <태일이>가 개봉한다. 장동윤, 염혜란, 진선규, 박철민, 권해효 등 쟁쟁한 배우들이 목소리 연기를 맡았다. 50주기에 개봉하려 했으나 제작일정이 길어지면서 2021년 개봉으로 가닥을 잡았다
- 표지 이야기
- 전태일 50주기 맞아 ‘전태일 3법’ 운동(2020. 09. 04 16:28)
- 2020. 09. 04 16:28 사회
- ㆍ‘근로기준법 11조’와 ‘노조법 2조’ 개정과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추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 스물두 살의 노동자 전태일이 자신의 몸에 기름을 끼얹고 불을 붙였다. 반세기가 지났다. 여전히 그의 말은 유효하다. 어떤 노동자는 근로기준법의 보호조차 받지 못하고, 어떤 노동자는 노조를 만들어도 인정받지 못한다. 또 어떤 노동자는 기계처럼 다뤄지다 죽어간다. 지난 5월 7일 서울 종로구 전태일다리에서 열린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50주기 범국민행사위원회 출범 기자회견에서 전태일 열사의 동료 임현재씨가 발언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코로나19의 등장은 사각지대에 내몰린 노동자들이 맨 먼저 가장 심하게 고통받는다는 것을 드러냈다.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맞아 ‘전태일 3법’ 법안 발의 운동이 시작됐다. 전태일 3법의 알맹이는 새롭지 않다. 노동계와 시민사회가 지속적으로 요구해왔지만 오랫동안 제자리걸음이었다. 전태일 3법은 ‘근로기준법 제11조’와 ‘노조법 제2조’ 등 두 개의 법을 개정하고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제정하는 것을 말한다. 모든 노동자에게 근로기준법 적용, 모든 노동자의 노조할 권리, 모든 노동자의 죽지 않고 일할 권리로 압축된다. 민주노총은 지난 총선 당시 모든 노동자에게 근로기준법 적용과 노조할 권리 보장을 골자로 하는 ‘전태일 2법’을 제안했고, 정의당은 중대재해기업처벌법까지 전태일 3법을 공약했다. 이후 민주노총과 정의당은 21대 국회에서 ‘전태일 3법’ 등을 위해 공동대응하기로 했다. 여기에 진보정당, 시민사회, 종교계 등 각계에서 힘을 보태고 있다. 국회는 올해 1월부터 온라인 청원사이트인 ‘국민동의청원’에 올라온 청원 중 30일간 10만명의 동의를 얻은 청원은 소관 상임위에 넘겨 심사토록 하고 있다. 예전처럼 법안을 만들어 해당 상임위 의원에게 입법 발의를 요청하는 소극적 방식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기존 법이 존재하는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법 개정은 환경노동위원회 소관이고,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은 법제사법위원회로 상정된다. 이에 따라 청원은 두 개가 올라와 있다. 오는 9월 25일까지 진행된다. 한상진 민주노총 대변인은 “10만명 동의 조기달성을 자신하고 내부적으로는 20만명을 목표로 하고 있다”며 “올해 기필코 전태일 3법을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두 개의 청원 근로기준법은 헌법에 따라 노동조건의 기준을 정함으로써 노동자의 기본적 생활을 보장·향상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하지만 제11조(적용범위)에서 5인 미만의 노동자가 일하는 사업장은 적용을 배제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전체 사업장 중 60%가 5인 미만 사업장이다. 법 적용에서 배제된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는 35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1일 8시간, 주 40시간 노동이 적용되지 않아 무제한 연장근로가 가능하다. 사업주가 연차휴가부터 연장·야간·휴일수당을 줘야 할 의무도 없다. 이유 없이 해고를 당해도 노동위원회에 구제신청을 할 수 없다. 법적 최저선을 보장해야 하는 의무를 회피하기 위해 회사를 5인 미만 사업장으로 쪼개는 사용자도 비일비재하다. 초단시간 노동자, 특수고용노동자, 파견 노동자들 역시 해고·휴일·노동시간 등을 다룬 핵심 조항에서 제외돼 있다. 개정안은 “상시 5명 이상의 근로자를 사용하는 모든 사업 또는 사업장에 적용한다”는 조항을 “모든 사업 또는 사업장에 적용”하는 것으로 바꾸도록 했다. 노조법 제2조 개정의 핵심은 두 가지다. 특수고용노동자에게 노동조합을 할 권리를 보장하는 것과 간접고용노동자가 ‘진짜 사장’과 교섭할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다. 노동조합은 근로기준법에서 제외되거나 일부만 적용받는 노동자,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노동조건을 개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현행 노조법은 특수고용노동자와 간접고용노동자(파견·용역) 등 근로기준법에서 배제된 노동자들을 노조법에서도 밀어내고 있다. 서울 정동 민주노총에서 8월 26일 전태일 3법 입법 발의 대표자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 강윤중 기자 특수고용노동자는 사용자로부터 지시·감독을 받지만, 근로계약이 특수 형태여서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비정규직이다. 택배기사, 대리운전 기사, 학습지 교사 등이 해당하며 221만명에 달한다. 설립신고증을 받은 노동조합조차 사측의 교섭거부에 가로막혀 있다. 노조법이 특수고용노동자의 노동자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노조법 핑계를 대는 것이다. 기업이 제3자에게 고용된 노동자를 이용하는 형태인 간접고용노동자는 346만명 규모다. 현행 노조법은 원청을 간접고용 노동자의 사용자가 아니라고 본다. 간접고용 노동자들은 원청을 대상으로 교섭할 수 없다. 이들이 단체행동에 나서면 원청은 원청 노동자들을 대체 투입하거나 하청업체와의 계약 해지로 맞선다. 하지만 노조법상 사용자가 아니라 부당노동행위의 책임이 없다. 노조법 개정이 필요한 이유다. 일하다 죽지 않게 2016년 5월 28일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열아홉의 비정규직 노동자 김군이 열차에 치여 세상을 떠났다. 2018년 12월 11일 태안화력 하청업체의 스물넷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씨가 석탄 이송용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숨졌다. 일하다 죽지 않는 사회를 만들자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올해도 죽음은 계속됐다. 지난 4월 이천 물류센터 화재는 38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5월에는 광주의 한 폐자재처리공장에서 스물다섯 노동자 김재순씨가 파쇄기에 끼어 숨졌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중대재해가 일어나면 노동자 안전을 책임질 능력과 최종 권한을 가진 기업을 엄격히 처벌하자는 취지다. 그래야 기업들이 안전한 일터를 위한 시스템을 갖추고 산재를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해 평균 2400명, 하루 평균 7명의 노동자가 산재 사고로 죽는다. 추락이나 끼임 같은 재래형 사고 비중이 높고 대부분이 하청노동자에게 일어난다. 2018년 노동부의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사건 판결 분석연구’를 보면 산안법 위반의 재범률은 약 97%로, 일반 범죄 재범률 43%의 2배를 웃돈다. 김용균재단에 따르면 중대재해사업장에 대한 처벌 중 금고 이상의 형은 0.4%에 그친다. 산재 사망 노동자 1명당 기업이 내야 하는 벌금은 평균 450만원에 불과하다. 올해부터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시행되면서 원청 책임이 강화됐다. 하지만 처벌 대상이 하급관리자에 그치고 양형이 낮아 예방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왔다. 전태일 3법은 사업주 및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보건조치 의무를 위반해 산재 사망사고가 일어나면 3년 이상 유기징역 또는 5억원 이하 벌금형에 처하도록 했다. 다단계 하청 노동자, 특수고용노동자의 중대재해도 실질적인 책임이 있는 원청을 처벌하도록 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위한 청원에는 ‘용균 엄마’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이 대표 청원인으로 나섰다. 그는 9월 1일 ‘중대재해기업처벌법 10만 국민동의청원 선포 기자회견’에서 아들에게 쓴 편지를 읽었다. “엉망이 된 사회를 단죄할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발의 청원을 엄마 이름으로 넣었단다. 이것은 그동안 너처럼 수없이 억울하게 죽어간 영령들을 위로하고 살아 있는 노동자들이 더 이상 허망하게 죽는 것을 막는 강력한 법이 되어야 해.”
레이디경향(총 1 건 검색)
- 시민운동가에서 교수로 변신한 故전태일 열사 매제 임삼진
- 2004. 02. 01 화제
- “제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전태일 열사보다 유명해지기는 어렵죠” 20여 년간 시민운동을 했던 임삼진씨가 연구교수로 발령받았다. ‘고 전태일 열사의 매제’라는 꼬리표 때문에 그의 행보는 종종 관심의 대상이 됐다. 총선을 앞두고 한양대 교정에서 그를 만났다. 미완의 도전으로 끝난 녹색 정치의 실험이 어떻게 될 것인지 궁금했다. 광화문 사거리에 횡단보도 만든 시민운동가 바야흐로 총선의 시기다. 총선이 다가오면서 정치판이 요동을 친다. 각 당에서는 능력 있고 이름 있는 사람을 영입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20여 년간 시민·사회 활동을 해온 고 전태일 열사의 매제 임삼진씨(44)의 행보가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서울대 철학과 졸업 후 1980년대 운수노보 편집장, 박종만추모사업회 사무국장, 서울노동운동단체협의회 공동대표, 녹색교통운동 사무총장, 녹색연합 사무처장 등 시민운동계에서 화려한 이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DJ 정부에서는 대통령 민정비서실 국장(98~99)까지 했으니 그가 이번 총선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에 관심이 쏠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정치판이 아닌 대학 캠퍼스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민운동가에서 교수라는 직함을 얻은 것. 얼마 전 한양대학교 교통공학과 첨단도료연구센터의 연구교수 발령을 받았다. 석사 학위로 연구교수 발령을 받기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동안 시민운동을 하면서 경험한 교통 관련 행정 경험을 인정받아서 가능한 일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축하 전화를 해줬어요. 청와대에서 나온 이후에 힘든 점이 많았거든요. 제 어려움을 아는 사람들은 ‘차라리 정치를 하지 왜 힘들게 사회운동을 하느냐’는 이야기도 많이 했어요. 그러다 안정적인 직장을 잡으니까 아는 분들이 많이 좋아하셨죠. 특히 장모님(이소선 여사)이 정말 좋아하시던데요.(웃음)” 임삼진 교수는 대학에서 석사 과정에 있는 학생들과 함께 프로젝트를 맡아서 운영할 예정이다. 그리고 서울대에서 교통기술정책에 관한 박사 과정을 밟을 예정. 임 교수는 함께 있는 학생이나 교수들도 시민운동을 하면서 알던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적응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다고 말한다. 그는 시민단체에서 일할 때부터 교통에 관한 세미나와 포럼에 단골로 초대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학교에 가니까 젊어져서 좋아요. 제가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말을 잘 놓지 않는데, 학생들이 말 놓으라고 성화네요. 시간이 가면 스스럼없이 이야기할 수 있겠죠.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는 게 너무나 좋고, 생활이 안정되니까 행복이 두 배예요.(웃음)” 그는 전부터 교통에 관한 한 전문가 소리를 들었고, 그동안 이룬 성과도 상당하다. 1999년에 광화문 사거리에 드디어 횡단보도 2개가 만들어졌다. 당시는 광화문에 횡단보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고발 프로그램이 방송된다 해도 꿈쩍도 하지 않던 때다. 임 교수는 1998년 서명운동을 벌여 1만 명의 참여를 얻었다. 그리고 노약자나 장애인이 거리를 걸어다니는 권리인 ‘보행권’의 개념을 알린 주인공이다. “서명운동 이후 광화문에 횡단보도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제가 직접 그리려고 했어요.(웃음) 벌써 만들어졌어야 하는데, 복지부동하는 공무원들의 특징 때문에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거죠. 그리고 보행권이라는 개념을 알리기 위해서 ‘보행권 회복을 위한 도심지 걷기 운동’도 했어요. 시민운동을 할 때는 정신없이 뛰어다닌 기억밖에 없네요.(웃음)” 그는 ‘스쿨 존(School Zone)’을 만들기도 했다. 95~96년에 거의 모든 학교 부근에 설치됐는데, 이것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학교 담을 빙 둘러싸고 주차해놓은 풍경이 일상이었다. 하지만 스쿨 존이 만들어진 이후에는 주차가 불가능해졌다. 아이들이 등·하교할 때 위험한 장면들이 없어진 것. 과속 차량의 범칙금을 파출소에서 받던 것을 벌금 통지서로 만들어 징수하게 한 것도 임 교수다. 그는 시민운동을 할 때부터 사회 전반의 제도 개혁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시민운동 경력과 경험을 인정받아 DJ 정부 시절에는 민정비서실 국장으로 청와대에 합류했다. 이번 총선에는 출마하지 않을 것 임 교수는 청와대에서도 능력을 발휘했다. 제주 4·3 특별법을 제정하는 데 산파 역을 맡았고, 신용카드 영수증 복권 제도를 제안한 당사자다. 또 여러 시민·사회 운동 단체와 대통령의 면담을 주선하고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하지만 시민운동을 하던 사람이 정치 한복판에 들어가는 데 많은 의심의 눈초리도 받았다. “당시 우리나라는 IMF 시국이었어요. 만일 IMF가 없었다면 청와대에 들어가지 않았을 겁니다. 지식인으로서 뭔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국난 극복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었거든요.” 청와대에서 한 일 중 가장 보람을 느끼는 것은 ‘제주 4·3특별법 제정’이다. 그는 ‘강성구 선배의 눈물’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당시 4·3 사건은 보수와 진보 세력간에 다양한 의견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희생자 사이에서도 보상 문제로 특별법 제정에 많은 어려움이 있어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하지만 제주도에서 비행기를 타고 밤에 그를 찾아온 제주평화목장 대표 강성구씨의 눈물은 그를 움직였다. “4·3 사건 희생자들이 얼마나 어렵게 지내고 있는지 아느냐”며 눈물 흘리는 강성구씨를 보고 특별법 제정에 열을 올리게 됐다. 당시 임 교수의 성화 때문에 밤잠 못 잔 정부 관료들도 많다고. “절박한 마음으로 가지고 하는 일은 사람을 감동시킨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제가 너무나 열성적으로 여기저기 쫓아다니고 전화해서 약 한 달 만에 국회에서 특별법을 통과시켰으니까요.(웃음) 당시에 관련 단체들이 보상이 아닌 명예회복을 원해서 특별법이 제정될 수 있었죠.” 총선이 있던 지난 2000년, 그는 청와대를 나왔다. 공천만 받으면 당선이 확실시되는 후보 중 한 명이었다. 당시 임 교수는 장모와 함께 권력 실세를 만났다. 공천에 관한 이야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많은 고민을 하게 됐다. 시민운동가의 양심으로 실세의 낙점에 의해 정치인이 된다는 것을 인정하기 어려웠던 것. 집에 와서 아내(전순덕씨)와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와 아내가 내린 결론은 정치를 포기하는 것. 그리고 ‘경선을 통한 상향식 공천’과 ‘정당 민주화’를 주장해 화제의 인물이 됐다. 임 교수는 정치권 대신 시민운동가로 돌아간다. 2000년 4월부터 녹색연합 사무처장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건 또 다른 시련이었다. 녹색연합에 들어간 지 2개월 만에 녹색연합의 간판스타(?)인 장원씨의 성추행 사건이 터진 것. 실망한 녹색연합 회원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재정 상태는 최악이었고, 간사들의 월급은 3개월씩 체불되기 시작했다. “그때 무척 힘들었죠. 하지만 신앙의 힘으로 평상심을 유지하면서 일했어요. 녹색연합의 명성이 부활한 계기가 7월에 있었던 주한미군 독극물 방류 사건이죠. 저희가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으로 미군의 공식 사과를 받아냈어요. 그때부터 녹색연합이 다시 살아났죠. 그 후 백두대간에 대인지뢰가 묻혀있다는 것, 캠프 이글에서 폐유를 방류한 사건 등을 계속 폭로했어요.” 임 교수가 ‘녹색’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난 것은 1990년 유럽에 갔을 때다. 당시 유럽에서는 녹색운동이 하나의 운동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사회 현상 전반을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재해석한 존 버튼의 「녹색사전」을 읽고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뀐 것. 그는 녹색연합의 경험을 살려 2002년 ‘녹색평화당’을 만들었다. 환경·생명 존중과 함께 정치권의 부패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한 정치사의 새로운 실험이었다. 하지만 미완의 도전으로 남은 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임 교수는 지금도 녹색평화당 이야기가 나오면 가슴이 아려온다. 자신의 주도로 만들었지만, 주변 상황과 정치적인 어려움 때문에 성공시키지 못한 책임을 느끼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녹색당은 한 지역에서 10년 이상을 뿌리내리면서 전국적인 정당이 됐어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지역당을 만들기 너무 어려워요. 당시 녹색당 참여를 약속했던 사람들도 마지막에 취소하는 경우가 많았고. 녹색당을 포기하고 제가 책임졌어야 하는데…. 개인적으로 사람들에게 약속했던 것도 있어서 그러질 못했어요.” 그리고 서울시장 선거에 나가서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하고 낙선했다. 지난해 6월 선거 이후 가장 힘든 시간을 보냈다는 임 교수. 이번에 한양대 연구교수로 발령받아 그동안의 고생을 보상받을 수 있었다. 아직 그는 정치에 대한 꿈을 버리지는 않고 있다. 다만, 이번 총선에는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에게 약속한다. 시민운동가와 정치인. 별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그는 정치인으로서 자신이 할 일이 분명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 전태일 열사의 매제라는 꼬리표 때문에 항상 자신이 손해 보는 쪽으로 활동해온 임 교수. 그에게 전태일이라는 꼬리표는 어떤 의미일까.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고 전태일 열사 공무원의 아들로 부족한 것 없이 지내던 임 교수의 어린 시절. 5·16 쿠데타로 인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 후 빈농의 자식으로 자라면서 사회를 보는 눈이 남달랐다. 시대가 요구하는 대로 대학을 나와 시민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운수노보 편집장으로 일할 때 전순덕씨를 소개받았다. 당시 아내는 외환은행 노조 활동을 하고 있었다. 만난 지 1년 만에 둘은 결혼했다. 하지만 결혼을 결정하기까지는 큰 부담감이 있었다. 바로 ‘전태일’이라는 이름 때문이다. “집사람과 저의 성향은 물론 비슷했죠.(웃음) 하지만 전태일 가족이라는 부분이 상당한 부담이었어요. 물론 우리 집안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나왔어요. 그때는 장모님도 수배중이셨거든요. 장모님도 마치 접선하듯이 한 번씩 만나뵙고, 여러 가지로 어려운 결혼이었죠.” 그를 가장 아껴주는 사람은 바로 장모인 이소선 여사. 지금도 유가협(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일을 하는 장모는 시간이 날 때마다 사위에게 전화를 걸어서 안부를 묻는다. 처형인 전순옥 박사는 성공회대 교수를 그만두고 동대문 여성노동자들의 단체인 ‘참여성노동복지회’ 일을 하고 있다. 전순옥 박사가 일하는 모습은 임 교수를 감동시킬 정도로 열정적이라고 자랑한다. “사람들이 웃으면서 그래요. 제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전태일 열사만큼 유명해지기는 어렵다고요.(웃음) 저에게 항상 따라다니는 꼬리표겠죠. 저는 항상 자신의 이익을 버려야 큰 사람이 된다고 생각해요. 나중에 어느 누구에게나 떳떳하게 제 활동을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중학교 2학년과 초등학교 6학년 아들을 둔 임 교수. 공부 압박에 시달리는 아이들을 보면서 가슴 아파하지만, 결과보다는 과정에 충실하도록 가르친다. 그는 당분간 캠퍼스에서 학문 연구에 전념할 계획이다. 하지만 시민운동과 정치를 하면서 얻은 소신이나 녹색의 이념을 버린 것은 아니다. 그의 녹색 실험은 캠퍼스에서도 계속될 것이다. 글 / 최영진 기자 사진 / 정준욱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