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총 39 건 검색)
-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 7월 1일부터 임시휴관
- 2024. 06. 20 11:11문화
- ... 실록과 조선왕조 의궤의 오대산사고본을 전시·관리하기 위해 지난해 11월 부분 개관했다.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국보)은 조선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에 걸친 역사 기록인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조선왕조실록의궤임시휴관오대산사고
- [경향포토] 조선왕조실록 궤
- 2020. 07. 20 13:15문화
- ... 전시하는 '새 보물 납시었네, 신국보보물전 2017-2019'를 오는 9월 27일까지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개최한다. 20일 언론에 공개된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실록 궤'가 전시돼 있다. ...
- 조선왕조실록, 96책 더 찾았다
- 2019. 03. 26 20:51문화
- ... 편전 문을 밀고 들어와 “사관의 위에는 하늘이 있으니 곧게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왕조실록>은 군주와 신하들의 잘잘못과 당대의 정사를 일일이 기록하고 포폄(평가)까지 했던 뭇...
- [역사와 현실]조선왕조실록 ‘졸기(卒記)’
- 2018. 08. 08 20:40오피니언
- ... 불렀는데, 꼭 대부가 아니어도 사회적으로 그 정도 지위에 있던 사람들의 졸기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졸기가 실릴 정도면 대단히 출세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졸기의 인물평은 대체로...
- 역사와 현실졸기
스포츠경향(총 202 건 검색)
- [신간] 별자리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 2021. 04. 23 00:00 생활
- 별자리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시대의창 제공별자리를 통해 조선 왕들의 삶과 역사를 들여다본 ‘별자리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이 출간됐다. 책은 조선의 대표적인 왕의 별자리를 살펴 그의 삶과 우리의 역사를 되짚어본다. 흔히 별자리는 동양의 운명학인 명리학보다 정교하다고 한다. 이러한 별자리를 통해 왕들의 운명이 왜 그러했는지, 왜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 짐작해 본다. 1397년에 태어난 세종은 태양별자리가 황소자리이고 달별자리는 처녀자리다. 황소자리 특성상 오감이 발달해 식욕이 왕성하지만 맛없는 음식은 거부한다. 조선 최고의 성군 세종이 왜 며느리를 쫓아내야했는지에 대한 답이 하늘에 반짝이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동서 고금 유명 인사의 별자리 정보도 수록되어있어 조선시대 왕들의 운명과 나란히 놓고 볼 수도 있다. 물론 자신의 별자리를 찾아 왕의 운명에 빗대어 보는 즐거움도 느낄 수 있다. 저자 김은주는 “별자리는 단지 ‘미신’으로 치부할 수 없다”면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오래된 관찰과 탐구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 작가는 “별자리를 통해 ‘나를 알고 싶다’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인구 KBS아나운서는 추천사를 통해 “별자리의 역사는 물론 그리스 신화의 심리가, 단어의 어원까지 방대한 자료 조사를 통해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낸 20년차 방송작가의 내공이 느껴진다. 당신의 별자리를 안다는 것은 삶의 지도를 얻는 것이라 작가는 말한다. 완성된 지도가 아닌 내가 만들어가는 지도에 이 책이 길잡이가 되어주길 바란다”고했다. 방송인 홍석천은 “김은주 작가는 언제나 호기심의 눈을 반짝이며 재미있는 이야기로 사람들을 홀린다. 한동안 70억개의 빛으로 빛나는 70억개의 소우주, 별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 그러더니 이 책을 들고 나타나 또 한 번 나를 놀라게 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혼란스러운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고 말했다. ▲별자리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김은주 지음/ 시대의창/ 1만7500원. #조선사 #세종 #단종 #광해군 #선조 #천문학 #점성학 #아스트랄러지 #네이탈차트 #명리학 #운명 #별자리
- 조선왕조실록은 지라시?…‘철인왕후’에 뿔났다
- 2020. 12. 14 15:16 연예
- tvN 드라마 ‘철인왕후’가 부적절한 대사로 논란이다. tvN 제공tvN 드라마 ‘철인왕후’가 “조선왕조실록은 지라시”라는 부적절한 대사를 사용해 논란이다. 지난 13일 방송된 ‘철인왕후’에서 신혜선(김소용 역)은 김정현(철종 역)과 첫날밤을 보낸다. 신혜선은 김정현과 첫날밤을 피하기 위해 술상을 차렸다. 이에 철종은 “잠자리가 예민하니 멀리 떨어져 자라”며 홀로 잠자리에 들었다. 이같은 말을 들은 신혜선은 “주색으로 유명한 왕의 실체가...조선왕조실록 한낱 지라시네. 괜히 쫄았어”라고 말한다.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부터 철종까지 472년 동안 기록한 역사서다. 우리나라 국보임과 동시에 지난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가치있는 유산이다. 이를 접한 누리꾼들은 “역사 왜곡이 너무 심하다” “해당 발언은 아무리 드라마라고 하지만 선을 넘었다” “제작진은 그냥 지나가는 대사 한줄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등 대체로 격양된 반응을 보였다. ‘철인왕후’는 ‘태자비승직기’라는 중국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그러나 이 소설을 집필한 작가가 ‘화친공주’라는 ‘혐한’(한국을 혐오하는 것) 작품을 쓴 것으로 알려지며 논란이 일었다. 이에 윤성식 PD는 제작발표회에서 “현대 남성의 영혼이 왕후 몸에 들어간다는 설정만 가져왔다. 스토리나 전개는 원작과 젼혀 다르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은 지라시’란 대사가 등장하며 ‘혐한’ 논란의 불씨는 꺼지지 않는 모양새다. 이같은 논란에도 시청률은 흥행몰이 중이다. 1회 8.03%에 이어 2회 방송은 8.8%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 찌라시철인왕후
- [간밤TV]“전율 느꼈다” ‘선녀들’ 전인화, 태조부터 세조까지 ‘조선왕조실록’ 꿀잼 역사 여행
- 2019. 11. 04 08:45 연예
- 부처님 사리부터 세조의 수결까지, 전인화 “전율 느꼈다” ‘선을 넘는 녀석들-리턴즈’. MBC 제공‘선을 넘는 녀석들’ 그야말로 국보급 역사 탐사였다. 3일(일) 방송된 MBC ‘선을 넘는 녀석들-리턴즈’(이하 ‘선녀들’) 12회에서는 조선왕조실록을 따라 떠나는 ‘태정태세문단세 로드’ 역사 탐사가 펼쳐졌다. 실록의 선을 넘어 국보급 보물들과 차례로 마주한 이번 방송은 수도권 가구 기준 5.1%(닐슨코리아)를 기록, 지난 방송보다 상승한 수치로 시청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입증했다. 이날 설민석-전현무-김종민-유병재는 특급 게스트 ‘국민 왕비’ 전인화와 함께 평창 오대산을 찾았다. 오대산은 조선왕조실록이 보관된 사고가 있는 곳. 설민석은 태조부터 세조까지, 조선왕조 초기 왕들의 이야기들을 들려줬다. 어떤 역사책에서도 배울 수 없던 이야기들이 ‘선녀들’은 물론, 시청자들의 귀를 솔깃하게 만들었다. 설민석은 “태종 이방원 하면 ‘무인’의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조선시대 왕 중 유일하게 과거 급제를 한 왕”이라고 말했다. 이어 온갖 성인병을 앓아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었다는 세종대왕의 이야기, 지덕체 모두가 완벽한 ‘사기 캐릭터’였다는 문종과 그가 일찍 승하할 수밖에 없던 배경,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태종과 자기 사람들을 믿었던 세조의 같은 듯 다른 일화 등을 들려줬다. 파란만장한 조선왕조 초기 왕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선녀들’은 월정사, 상원사를 연이어 방문했다. 특히 상원사는 세조가 깊이 사랑한 절이었다. 조카 단종의 눈물을 발판 삼아 왕이 된 세조는 말년에 피부병을 크게 앓게 됐다고. 이에 세조가 저주받았다는 소문에 민심은 흉흉해지고, 피부병을 고치기 위해 이곳에 온 세조는 문수동자를 만나 피부병이 호전됐다고 한다. ‘선녀들’은 이러한 세조의 간절한 마음이 깃든 상원사에서 국보 221호 목조 문수동자좌상을 마주했다. 그리고 문수동자상 안에 있던 복장유물들을 차례로 만났다. 그중에서도 부처님의 ‘진신사리’는 ‘선녀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전현무는 “사리 자체를 처음 보는데, 내 인생 처음 본 사리가 부처님 진신사리”라며, 영롱한 자태에 감탄을 표했다. 유병재는 사리를 통해 죄를 씻고자 세조의 마음을 추측하기도. 무엇보다 이날 ‘선녀들’을 전율하게 만든 보물은 바로 국보 292호 상원사 중창권선문이다. ‘선녀들’에서 방송 최초로 공개된 이 기록유산에는 불교를 통해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했던 세조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한자 원문과 한글 번역으로 구성된 이 보물은 조선 초기 한글 서체가 잘 기록되어 있어 가치를 더하기도. 555년 전의 기록을 눈 앞에서 본 ‘선녀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인광 스님은 “여기에 찍힌 수결(서명)과 도장은 세조가 직접 했을 것이라 추정된다”라며, 신숙주, 한명회 등 당시 주요 관리들뿐 아니라 왕실 여인들의 수결까지 담겨 있는 이 보물의 귀중한 가치를 설명했다. 이날 조선왕조실록을 따라 국보급 역사를 배운 ‘선녀들’. 전인화는 “책으로만 보고 앉아서 얘기하면 와 닿지 않을 것 같은데, 눈으로 보고 직접 들으니 온 몸에 역사가 스며드는 기분”이라는 소감을 남기기도. 마지막에는 “마음에 일심을 품고 가는 것에 큰 전율을 느낀다”라고 전해, ‘태정태세문단세’ 로드의 깊은 여운을 더했다. 꿀잼 가득 유익한 역사 지식은 물론, 매회 감동과 전율을 선사하고 있는 TV로 배우는 역사 수업 MBC 역사 탐사 예능 ‘선을 넘는 녀석들-리턴즈’는 매주 일요일 밤 9시 5분 방송된다.
- 간밤TV
- [남정미·김성신의 북톡카톡] 재미있게 만화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 2015. 07. 20 18:39 생활
- MBC <개그야>의 ‘명품남녀’에서 웃음 제조기로 인기를 모은 남정미. 하지만 요즘 그녀는 개그우먼보다 ‘책방 옆집 여자’로 더 유명하다. 개그 못지않은 서평가로서의 매력을 폴폴 풍기는 덕이다. 그녀 옆에는 ‘책방 옆집 여자의 남자’이기를 소원하는 출판평론가 김성신이 함께한다. 자칭 ‘책방 죽순이·죽돌이’인 두 사람의 유쾌상쾌통쾌한 북톡카톡 서른여섯 번째 이야기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이다. 성신 : 어이! 안동아가씨!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동네에서 태어난 그대는 역사에 대해 아주 잘 알겠지? 정미 : 선생님! 하이하이~ 요즘 네이버에 ‘조선왕조실톡’이라고 하는 웹툰이 있거든요. 저 그거 완전 광팬이에요. 그걸로 요즘 역사 공부를….ㅋ 성신 : 하하! 조선왕조실톡! 조선의 임금님들이 카톡으로 수다 떠는…. 정미 : 맞아요! 우리 책 <북톡카톡>처럼 왕들이 카카오톡으로 대화를 하시죠. 이를 테면, 이렇게! 성신 : 그 웹툰이 하도 인기가 좋아서 곧 TV드라마로도 만들어 진다던데? 정미 : 그래요? 오호홍 재미있겠네! 요즘 책 읽느라 TV를 도통 못 봐서… 성신 : 뻥치시네. 술 마시느라 바쁘시겠지!ㅋ 정미 : 조신한 반가의 규수에게 모주망태 캐릭터 부여하는 게… 재밌냐? 성신 : 재미있다! ‘조선왕조실톡’처럼 재미있다! 정미 : 조선 왕들의 모습과 중요한 역사적 장면들을 그렇게 코믹한 방식으로 재구성하니, 역사라는 것이 정말 굉장히 재미있게 느껴지더라고요. 성신 : 참 기발한 형식이죠. 근데 혹시 ‘조선왕조실톡’이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이 ‘북톡카톡’ 칼럼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닐까? 최근에 숭례문학당이란 독서공동체도 ‘카톡독토’라고, 독서토론을 단체카톡방을 만들어 진행하더군요. 하하! 만약 이런 문화 트렌드와 콘텐츠들이 우리 ‘북톡카톡’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거라면, 우린 정말 세상에 많은 덕을 쌓고 있는 거예요. 그렇죠?^^ 정미 : 쌤! 고정하시고요! ‘조선왕조실톡’을 읽으며 조선역사에 흥미를 느꼈어요. 그럼 이 다음으로는 어떤 책을 읽으면 좋을까요? 성신 : ‘조선왕조실록’을 직접 읽어보든지! ㅋㅋㅋ 정미 : 쌤! 지금 ‘조선왕조실록’의 분량을 아시면서 하시는 말씀이지요? 1893권 888책이라고 하니, 이제부터 슬슬 읽기 시작하면 제가 환갑 때쯤 다 읽겠네요. 아! 아니다. 한문으로 적혀 있으니 이제부터 공부 시작해서 60살 때쯤 천자문 떼고, 그러고 나서 읽기 시작하면 100살쯤 돼야 책거리를 할 수 있겠네요. 아! 그러고 보니 그리 긴 시간은 아니네요. 요즘엔 누구나 400살은 사니까 말이죠. 성신 : ㅋㅋㅋ 그러게! 근데 다른 방법도 있지! 정미 :? 성신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읽으면 되지! 정미 : 우와아아아아~ 만화! 맞아요. 전 그 어렵던 한문도 <마법천자문>으로 쉽게 배울 수 있었고, <삼국지>도 고우영 선생님 덕에, <그리스 로마 신화>도…. 그러니 <조선왕조실록>도 박시백 판본으로 보면 되겠네요. 성신 : 그렇지!^^ 정미 : 20권이니까 하루에 한권씩만 읽어도 20일! 그러니까 60년 걸릴 독서를 20일로! 축지법 같군요.^^ 성신 : 만화가 가진 힘은 실로 대단하지요. 한 가지 웃기는 것은, 우린 만화의 시혜는 있는 대로 다 받아 놓고도 만화를 좀 우습게 여기는 안 좋은 습성이 있단 말이지요. 정미 : ‘웃는 것’과 ‘우스운 것’을 구분하지 못해서 그래요. 만화는 재미있고 웃기지만, 그렇다고 하찮고 우스운 존재는 결코 아니거든요. 코미디언도 그렇잖아요. 웃기는 사람이지 우스운 사람은 아니죠. 역사 속에 빛나는 위대한 코미디언들도 있었잖아요. 성신 : 예리한 지적! 정미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이라! 박시백이란 분이 대체 어떤 분이기에 제목에 이름이 떡하니 새겨져 있지요? 성신 : 떡하니 이름이 새겨질 만해요. 이 전집을 완간하기까지 집필기간만 무려 10년이 걸렸죠. 준비 기간을 포함하고, 완간 3년 만에 다시 다듬어서 개정판을 낸 기간까지 합치면, 작가의 입장에서는 총 15년을 몰입한, 그야말로 역작이니까요. 정미 : 오오오~~!! 15년! 상상이 안 되는 시간이군요. 성신 : 완간 후 곧바로 개정판을 준비한 그 의지와 정성이 참 대단해요. 책이 뭐 잘못됐던 것도 아니고 디테일을 보강하기 위해 몇 년을 다시 작업을 했다니! 나 같으면 10년 이상 걸린 작품을 끝냈으면, 뒤도 안 돌아보고 아예 안드로메다로 도망갔을 거예요.^^ 300만부나 팔린 이유가 있었던 거예요. 정미 : 책의 첫 장을 열어보니까 조선 임금님들의 단체 사진이 있더라고요. 익선관에 곤룡포 입은 왕들이 수학여행 때처럼 줄지어 단체사진을 찍다니 귀엽고 친근하게 느껴지던데요. 성신 : 첫 페이지부터 그런 만화적 친근함을 통해 독자들의 눈과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지요. 정미 : 서문 읽어 보는데, 워낙 이 작품에 인기가 많았으니, 그에 비례해 독자들의 섬세한 지적도 많았다고 하죠. 연재 이후에 새롭게 발굴된 역사적 사실도 있었고요. 그것을 일일이 다시 고증해 하나하나 전부 수정을 했다지요. 진짜 대단하단 생각이 들어요. 성신 : 가령 이런 지적이었다고 해요. 거북선에 달린 용머리의 목이 처음에는 굽어진 것으로 그려져 있었답니다. 그런데 어느 독자가 말하길 ‘그 용머리에 포신이 장착돼 포를 쏠 수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목이 굽어져 있으면 포를 어떻게 쏘나요?’라고 했대요. 그래서 작가는 이 의견을 확인하고 거북선의 머리 모양을 다시 그렸다는 거예요. 이런 식의 수정이었던 것이지요. 정미 : 그 독자, 책에 대한 엄청난 애정이 있었군요. 그림 한 컷 한 컷에 대해 그렇게 고증하려면 아직도 수정할 부분이 있겠어요. 성신 : 맞아요. 독자의 애정 어린 의견 개진! 이게 참 재미있는 현상이에요. 그래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은 독자와 작가가 함께 완성시켜 나가는 책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계속 ‘완성되어 가는’ 살아서 성장해가는 텍스트가 되었다는 것이죠. 또 세월이 흘러 시대가 바뀌면 역사에 대한 고증도 계속 진전되고, 그에 따라 해석도 달라질 수 있으니, 이런 열린 구조가 역사책에는 더 최적이라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정미 : 확실히 역사라는 것을 기록하고 해석하여 전달하는 작가라서 그런지 태도도 훌륭하네요. 성신 : 우린 박시백 화백이 역사 만화로 유명한 분이니, 역사나 만화나, 그 둘 중 하나의 전공자가 아닐까 생각하잖아요? 정미 : 그렇죠! 성신 : 그런데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분! 그런데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만화가가 되고 싶더랍니다.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고 신문사인 한겨레에 입사했는데, 얼마 후 오랫동안 만평을 맡고 있던 박재동 화백이 자리를 비우게 되면서 기회를 얻었다고 해요. 정미 : 전 박재동 화백의 팬이기도 한데…^^ 성신 : 정미씨에게 팬이 아닌 분도 있소?ㅋㅋ 어쨌든 그러다가 1999년부터 조선왕조실록에 퐁당 빠져서는 공부를 시작했고…, 정미 : 그분 중간에 백수로 1년 정도 지낸 적 있다고 하던데 와이프님이 대단합니다! 성신 : 책은 2003년도에 첫 권이 출간되었지요. 2001년에 이 작품을 그리기 위해 신문사를 그만뒀고, 책이 나온 것이 2003년이니까 꼬박 2년 동안이 공백이지요. 물론 그 사이에 책 계약금도 받고, 작업도 시작을 하셨을 테니, 순결한 백수(?)라고 할 수는 없었겠지만, 집에선 무지 걱정스러웠을 듯!ㅋㅋㅋ 정미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만큼 박 화백의 실록도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파란만장함이었네요. 성신 : 위대한 장도는 본래 시작이 쉽지 않은 법이지요. 정미 : 저는 일단 좀 재미있는 책 좋아하거든요. 이 책 조선왕조실록은 박 화백의 유머러스한 표현도 좋고, 오늘날의 입장에서 재해석하거나, 현대의 인물과 비교하는 식으로, 시공을 넘나드는 해석을 하는데, 그 점이 정말 매력 있어요. 그런데 왕조실록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성신 : 물론 중국이나 일본·베트남에도 왕조실록은 있어요. 일본의 <문덕황제실록(文德皇帝實錄)>이나 <삼대실록(三代實錄)>, 중국의 ‘대명실록(大明實錄)’이나 ‘청실록(淸實錄)’, 월남의 ‘대남식록(大南寔錄)’ 등이 대표적이지요. 정미 : 조선왕조실록과 다른 점이 있나요? 박시백성신 : 외국의 실록은 주로 궁중에서 일어난 정치만을 다루는 것이 일반적인 데 비해 ‘조선왕조실록’은 중앙정치뿐만 아니라 민간의 시시콜콜한 일까지 중요한 것은 다 기술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에요. 정미 : 그래서 문화사적 가치가 더 높다고 할 수 있겠군요. 성신 : 참! 그건 안 궁금해요? ‘조선왕조실록’이 왜 철종까지만 있는지 말이죠. 정미 : 글쎄요. 왜 그랬을까요? 고종이랑 순종이랑 삐치겠어요.^^ 성신 : 일제강점기에 <고종실록> 52권 52책, <순종실록> 22권 8책, 도합 74권 60책이 더 간행되었지만 그 내용이 일본에 유리하도록 편파적으로 기술되었죠. 조선왕조실록으로서의 기록적 가치가 없어진 거예요. 정미 : 아 그렇구나! 아픈 역사를 새삼 다시 떠올리게 되네요. 어쨌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도 등재되어 있는 이 귀하고 소중한 우리 국보를 내가 좋아하는 만화로 만나 볼 수 있다니 두근두근 쿵쿵이네용~ >.< 성신 :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안타까운 역사적 사건도 많지만, 조선과 같은 시기에 하나의 왕조가 무려 500년간이나 버틴 경우도 없어요. 조선의 국가 시스템이 엄청나게 정교하고 굳건했다는 방증이 될 수도 있지요. 그런데 이에 대해선 전혀 다른 견해도 있어요. 기자간담회 모습.정미 : 다른 견해? 성신 : 조선 중기 이후 조선의 국가 시스템에 위기가 왔을 때 오히려 새로운 세력에 의해 조선 왕조가 무너질 만큼의 수준으로 국가가 개혁되고 개조되었다면, 후일 남의 나라 식민지로까지 전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관점도 있지요. 그런 중요한 때 조선의 개혁을 가로 막은 것이 당시의 기득권세력이었다는 견해지요. 정미 : 아하! 어느 쪽이든 생각해 볼만한 견해군요. 성신 : 역사라는 것이 고작 아전인수로 헛된 자만심이나 채우려고 존재해야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지나온 과거를 해석하는 우리의 태도에 따라 미래가 달라질 테니 말이지요. 정미 : 오늘 기록의 중요함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엄정한 기록으로 역사를 세워놓지 않으면, 권력자들은 정말 아무 짓이나 하게 되겠네요. 당시의 이익에 따라서 말이지요. 성신 : 그래서 기록이 없으면 국가도 없는 겁니다. 정미 : 갑자기 이런 문장이 떠오르네요. “정치인은 다음 선거를 생각하고, 정치가는 다음 세대를 생각한다.” 미국의 신학자인 제임스 클라크가 한 말이라지요. 성신 : 오호!!! 그런 멋진 말을 기억하다니!!! 그 말 듣다 보니 이젠 그마나 제대로 된 ‘정치인’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다음 선거는 고사하고, 감방에 다녀오더라도 지금 한자리 해먹을 때 얼른 배때기를 채우자! 이건 뭐… 사람의 탐욕조차 아닌…. 정미 : 신랄하게 ‘기록’하며 지켜봐야죠. 기록은 ‘역사의 칼날’과도 같은 거니까!
- 남정미·김성신의 북톡카톡책
주간경향(총 2 건 검색)
- 조선왕조실록 ‘평양 반출’은 김일성이 직접 지시했다(2014. 09. 16 13:42)
- 2014. 09. 16 13:42 문화/과학
- 창경궁 장서각에는 무주 적상산 사고에서 보관해오던 조선왕조실록이 있었다. 실록은 북한의 남침 후 혼란스러운 과정에서 아무도 관리하지 않은 채 남아 있다가 북한으로 반출된 것으로 추론된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김일성이 조선왕조실록을 평양으로 가져오라고 직접 지시한 것으로 밝혀졌다. 은 김일성(당시 직함은 내각수상)이 서울을 점령한 지 열흘 뒤인 7월 8일 ‘리조실록을 구출할 데 대하여’라는 지시를 내린 문건의 전문을 확인했다. 그동안 북한발 소식통을 통해 김일성이 지시를 내렸다고 알려져 왔으나 지시문건이 직접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북한은 한국전쟁 때 서울에 있던 조선왕조실록 전질 원본을 평양으로 가져간 후 1975년부터 이를 국역해 1991년 완역본을 발간했다. 김일성의 조선왕조실록 반출 지시문건은 2012년 평양의 조선노동당출판사에서 발행한 라는 김일성 저서에 들어 있다. 한국전쟁 전후 김일성이 내린 지시를 모아놓은 이 책에서 조선왕조실록 반출에 대한 지시는 ‘리조실록을 구출할 데 대하여’라는 제목 아래 전체 내용이 실려 있다. 이 문건에서는 ‘도 피해를 입거나 없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에 대하여 절대로 수수방관할 수 없습니다’라는 내용으로 조선왕조실록 반출의 정당성을 강변하고 있다. 또 ‘을 후방의 안전한 장소에 옮기고 잘 보관하여야 합니다’라고 지시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당시 창경궁 장서각에는 무주 적상산 사고에서 보관해오던 조선왕조실록이 있었다. 실록은 북한의 남침 후 혼란스러운 과정에서 아무도 관리하지 않은 채 남아 있다가 북한으로 반출된 것으로 추론된다. 이 지시문건에는 조선왕조실록이 있는 장소를 구체적으로 적지 않았다. 다만 ‘근 1800권’이라는 분량을 적시해 놓았다. 이성무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전 국사편찬위원장)은 “적상산 사고본이 언제 어디를 통해 운반돼 갔는지 알 수 없고, 지금은 적상산 사고본이 북한에서 국역돼 나와 추론만 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실록 원본은 현재 평양의 김일성대학 도서관에 보관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국립도서관 서고에 꽂혀 있는 북한의 . | 윤호우 기자 현재 김일성대학 도서관에 보관 지시문건은 김일성이 교육상에게 내린 지시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1950년 7월 8일이라는 날짜도 적혀 있다. 서울이 북한에 의해 점령된 6월 28일 이후 불과 열흘 만에 조선왕조실록을 갖고 오라는 지시가 신속하게 내려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초 남한의 학계에서는 조선왕조실록의 반출이 7월 또는 7월 초로 알려져 왔으나 김일성이 7월 8일 지시했다는 날짜가 처음으로 확인된 것이다. 한 페이지 분량인 이 지시문건에는 교육성에서 조선왕조실록을 반출할 수 있는 인력을 뽑아 빨리 서울에 파견하라는 내용이 담겨져 있고, 모든 기관과 인민군 부대에서 이 반출을 보장할 수 있도록 김일성 명의로 된 신임장을 준다는 내용이 있다. 운반을 위해서는 군용차를 동원하고 서울에 주둔하고 있는 인민군 부대에 조선왕조실록의 운반을 적극 돕도록 하라는 지시도 담겨 있다. 지난 2010년 북한이 발행한 제3호에는 이 같은 문건의 내용과 일치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비전향 장기수였던 손성모씨가 쓴 ‘에 깃든 위인의 숭고한 뜻을 새겨 본다’라는 글에서다. 손씨는 이 글에서 2010년 7월 8일이 ‘을 구출하도록 해주신 60년이 되는 날’이라고 적어놓았다. 손씨의 글에는 또 당시 서울대 학생으로 인민군에 입대한 자신의 경험담이 실려 있다. 인민군 부대에서 특별명령을 받고 떠나는 인민군 구분대를 만났는데 전투임무를 받은 줄 알고 있었으나 실은 조선왕조실록을 반출하는 작전에 동원된 구분대였다는 것이다. 이성무 원장은 “그동안 조선왕조실록이 어떻게 북한으로 넘어갔는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없다”면서 “(비전향장기수의) 전쟁 때 실제 경험담이라면 지금까지 여러 이야기 중 역사적 사실에 가장 가까운 내용이 아닐까 생각된다”고 설명했다. 손씨는 반출된 조선왕조실록이 평양의 최고사령부에 보관됐다는 사실도 밝혀 놓았다. 또 하나 관심을 끄는 대목은 김일성이 1948년 남북 연석회의 때 북한으로 간 벽초 홍명희에게 서울에 있는 조선왕조실록의 관리에 대해 걱정했다는 내용이다. 손씨는 이 이유로 한국전쟁이 일어나자마자 조선왕조실록 반출을 바로 할 수 있었다고 밝혀 놓았다. 한국전쟁 이전의 신문기사를 보면 북한에서 조선왕조실록을 몰래 가져가려다 실패한 사건이 나타나 있다. 1949년 11월 26일자 일간지에는 월북한 백남운 학자의 지령으로 백남운의 비서가 창경궁 장서각에 있던 조선왕조실록 원본을 훔쳤다가 체포돼 책을 압수당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때 실록을 가져가려다 실패한 북한이 한국전쟁 후 곧바로 반출작업에 착수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전쟁 이전에도 반출 시도 한국전쟁 때의 반출에는 월북 학자들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임채욱 극동문제연구소 전 연구위원은 ‘조선왕조실록 번역사업’(2001년)이라는 논문에서 “일설에 의하면 이 반출을 가장 주장한 것은 경제사학자 백남운이었다지만 (…) 실록의 존재와 가치를 아는 모든 북한학자들이 탐내었으니 실록 확보가 북한 학자들로서는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양완 전 정신문화연구원 교수도 ‘국역 에 대하여’(1994년)라는 논문에서 “영구보존 대책까지 강구하도록 한 진정한 제안자는 아마도 월북한 학자들이 아니었을까 한다”고 추론했다. 이렇게 반출한 조선왕조실록의 국역에 벽초 홍명희의 아들인 홍기문 박사가 중심 역할을 했다는 것에서도 월북학자들의 조선왕조실록에 대한 애착을 엿볼 수 있다. 홍 박사 역시 부친인 홍명희를 따라 월북한 대표적인 학자다. ‘조선왕조실록 환수위원회’ 간사로 활동했던 혜문 스님은 평양으로의 실록 반출에 대해 “북한으로서도 조선왕조실록이 역사적 사료로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북한에 소장하려고 노력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조선왕조실록 반출에 대한 북한의 기록에는 ‘미국과 남한이 도발한 전쟁으로 문화유산이 적들에 의해 파괴, 소각되거나 도난당한다’는 북한식 억지 논리가 전개돼 있다. 평상시 정당한 방법의 운반이 아닌 전쟁 때의 반출을 ‘구출’이라고 이름 붙인 데에서 북한식 논리를 읽을 수 있다. 북한의 사회과학출판사에서 1991년 발간한 라는 책에는 조선왕조실록이 ‘총 1763권(근 900책)’이라고 밝혀놓은 뒤 김일성의 명령서를 받은 역사학자들이 서울에 도착하니 조선왕조실록이 ‘포연과 흙더미 속에 여기저기 날리며 나뒹굴고 있었다’고 표현해 놓았다. 임채욱 극동문제연구소 전 연구위원은 ‘조선왕조실록 번역사업’이라는 논문에서 북측 학자인 박동진이 ‘이 세상에서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비참한 운명’이라고 표현한 데 대해 “이 운명에 처하게 된 원인 제공자는 누구인가”라고 반문했다. 이런 이유로 임 전 연구위원은 논문에서 “전쟁 중에 나라와 나라 사이에 물건을 빼앗아가는 것을 약탈이라 하지만 북한이 실록을 북으로 가져간 것은 약탈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라면서 “같은 조상의 문화유산을 가져간 것이라 할 때 반출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성무 원장은 “반출이란 용어는 점잖게 가져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어 적당한 표현은 아닌 것 같다”면서 “북한이 어떻게 가져갔는지 역사적 사실로 밝히는 것이 중요하지 반출·운송 등의 용어 표현은 차후의 문제”라고 말했다.
- [커버스토리]조선왕조실록 전통 부활하는가(2006. 05. 30)
- 2006. 05. 30 사회
- 정부 대통령기록물관리법 입법 예고 지극히 사적용무 외 모든 행위 기록 근·현대사 기록문화의 혁명으로 평가 대통령의 또 다른 ‘감시의 눈’ 부상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과연 어떤 논의 과정을 통해 재신임을 제의하게 됐을까. 2004년 탄핵과정에는 어떤 논의를 하였을까. 한미 FTA 협상 과정에 청와대는 어떤 역할을 했을까. 국민들이 무척 궁금해할 법한 대통령 관련 기록물이 앞으로는 영구히 남게 된다. 공개 여부는 차후 문제지만 대통령이 집무실로 출근한 후 퇴근하기까지 일거수 일투족이 기록된다. 지극히 사적인 용무 외에는 모든 행위가 역사적 기록물로 남게 되는 것이다. 입법예고를 한 대통령 기록물 관리법에는 대통령 관련 기록물이 낱낱이 보존되도록 명시돼 있다. 정부 입법안에 앞서 야당인 한나라당 정문헌 의원은 역시 대통령의 기록물을 관리·보존하는 내용의 ‘예문춘추관법’을 지난해 말 발의했다. 대통령의 기록물을 보존해야 한다는 취지에는 여야간 이견이 없어 올해 국회에서 통과될 경우 내년 1월 1일에는 법이 정식으로 발효하게 된다. 연내 국회 통과 땐 내년 초 발효 정부기록 문서를 보존하고 있는 국가기록원 부산기록정보센터. 기록관리 전문가들은 대통령 기록물에 관한 법안의 마련을 ‘기록관리의 혁신’으로 평가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의 출범 이후 대통령 관련 기록물이 제대로 남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전임 대통령이 물러나면서 남긴 관련 기록물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퇴임하면서 몇 트럭 분의 관련 기록물을 싣고 갔다’는 소문만 무성하다. 현재 국가기록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대통령 비서실 생산 문서는 12만여 건. 이중 대통령 관련 기록물로 분류될 수 없는 단순 민원접수 기록이 9만 건에 달한다.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한 1948년 이후 50여 년 동안 3만 건만이 대통령 관련 기록물로 남아있는 것이다. 참여정부가 지난해 말까지 3년 동안 생산한 대통령 관련 기록물이 17만여 건에 이른 것을 보면 얼마나 많은 기록물이 사라졌는가를 알 수 있다. 대통령 기록물 관리법이 제정되면 대통령 관련 기록물을 무단 파기하거나 반출할 때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이라는 처벌을 받게 된다. 한국은 일찍이 세계적인 기록국가 대통령의 기록물이 남겨지면 공개여부와 관계없이 그것 자체로 근·현대 기록문화에 하나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가져오게 된다. ‘혁신’을 뛰어넘은 ‘혁명’으로까지 평가될 정도다. 한 기록관리전문가는 “기록문화의 혁신이라고 말을 하지만 사실은 정상화라고 해야 한다”면서 “지금까지 한번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 대통령 관련 기록의 역사를 새로 쓰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시대 사관을 통해 기록된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비서실에 해당)의 문서가 기록된 승정원 일기가 세계기록유산에 지정될 정도로 한국은 일찌감치 세계적인 기록국가의 면모를 갖췄다. 이성무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조선시대의 역사 의식에서 보듯 역사에 경외감을 가진다면 자료를 남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일제 시대를 거치면서 조선 시대의 찬란한 기록문화 전통은 없어졌다. 일제는 실록을 집필하는 기구인 춘추관을 없애버렸다. 광복 후에도 대통령 관련 기록물은 당연히 보존하지 않는 것이었다. 대통령 관련 기록물의 생산 역시 아무런 규정 없이 대통령의 자의적인 의지에 내맡겨 있었다. ‘예문춘추관법’을 발의한 한나라당 정문헌 의원은 “전 세계가 본받아야 할 기록문화를 갖고 있으면서도 일제를 거치면서 이 전통이 끊어졌다”며 “대통령 관련 기록을 남기는 것은 기록편찬 문화의 전통을 잇는 것이자 하나의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이 된다”고 강조했다. 기록문화에서 있어 의식전환의 출발점은 공공기록물 관리법 제정에서 이뤄졌다. 이 법은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후인 1999년 제정돼 2000년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정부내 모든 기관의 문서 보관을 의무화함으로써 공문서 뿐만 아니라 회의록, 비공식보고서까지 남기도록 했다. 공공기록물 관리법은 개정안이 지난 2월 국회에서 행정자치위를 통과, 법사위에 계류돼 있다. 정부에서 만든 이 개정안은 국가기록관리 기구 및 기능체계를 전면적으로 개편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공공기록물 관리법 개정안은 역시 정부에서 제출한 대통령 기록물 관리법 제정안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기록관리혁신단 이창규 서기관은 “대통령 기록물 관리법은 기록관리법 전면 개정안의 방향과 같다”고 말했다. 민주화 이후 점점 커지고 있는 투명사회에 대한 요구가 공공기관의 기록문화에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명지대 기록관리학과 김익한 교수는 “대통령 기록물 관리법 제정안과 공공기록물 관리법 개정안은 한 짝이며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점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통령 기록물을 의무적으로 보존한다는 대통령 기록물 관리법은 일반 공공기록물의 보존을 규정한 공공기록물 관리법을 대통령의 영역에까지 확장시켰다는 의미가 있다. 공공기록물 관리법에는 대통령 기록물 관리의 근거 규정이 있으나 미비한 상황. 대통령 기록물 관리법은 대통령 기록물의 특수성을 감안해, 대통령 기록물의 국가소유 원칙을 명시하고 대통령 기록물의 관리범위를 확대했다. 또한 대통령 퇴임 후 이 기록물이 모두 이관돼 새롭게 신설된 대통령 기록관에서 이를 관리하도록 하고 있다. 대통령 기록관은 대통령 기록물을 영구 보존하기 하기 위해 전문 인력을 갖춘 영구기록물 관리기관을 말한다. 대통령 기록물 관리에 대한 보관·재분류·공개·폐기 등의 결정은 대통령기록관리특별위원회에서 이뤄진다. 특별위원회는 전체 위원 15인의 2분의 1이상을 외부 전문가로 위촉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5월 9일 대통령기록물 관리법 제정에 대한 공청회가 열렸다. 민주·투명사회에 대한 요구 반영 5월 9일 열린 대통령기록물 관리법 제정 공청회에서는 대통령 퇴임 후 기록물의 공개 부분이 논란의 중심이 됐다. 법안에 의하면 대통령 지정기록물은 15년의 범위 내에서 공개되지 않도록 규정돼 있다. 모든 서류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국가안전보장에 중대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군사·외교·통일에 관한 비밀기록물, 경제 안정을 저해할수 있는 경제관련 기록물, 인사에 관한 기록물, 공개될 경우 개인의 사생활이 침해될 수 있는 기록물, 대통령과 보좌진 사이의 의사소통기록 중 공개가 부적절한 기록물 등이 포함된다. 기록물을 생산하는 입장에서는 일종의 안전장치이자 봉인인 셈이다. 이창규 서기관은 “일단 기록을 무조건 남길 수 있도록 최소한의 보호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런 보호장치가 없다면 누가 기록물을 남기겠느냐고 정부와 청와대 측은 주장한다. 미국의 대통령 기록물 관리법은 보호기간을 12년으로 규정하고 있다. 4년 임기에 재임이 가능하므로 클린턴 정부 시절의 관련 서류는 다음 정권인 부시 정부의 1차 임기 때에는 열람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차기 정권의 정치적 악용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라고 할 수 있다. 공개 시기가 차차기 정권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나라의 5년 대통령제하에서는 15년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하지만 재임이 아닌 단임인 만큼 10년이 적당하다는 의견도 제시되고 있다. 참여연대 투명사회팀 이재근 팀장은 “10년으로 단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이에 반해 한양대 사학과 박찬승 교수는 공청회에서 “조선왕조실록을 만들 때 가능한 한 공개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원칙으로 했기 때문에 훌륭한 사료가 만들어 질 수 있었다”며 15년이 아닌 30년의 보호기간을 제안했다. 대통령 기록물 관리법은 전직 대통령의 재임 당시 생산된 개인 기록물에 대해서도 이를 수집·관리할 수 있다는 규정을 두고 있다. 전직 대통령이 사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기록물이라 할지라도 국가적으로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인정될 경우 제출을 요구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이 규정과 관련해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의 권위적 정권 시절에 생산됐으나 아직 국가기록원에서 보존하고 있지 못한 관련 기록물을 얼마만큼 회수할 수 있을지 여부에 귀추가 모아지고 있다. 퇴임 후 기록물 공개 시점 논란 대통령 기록물 관리법의 국회 통과 여부와 관련해 관심을 끄는 법안은 야당에서 내놓은 ‘예문춘추관법’. 이 법안에 따르면 ‘예문춘추관’이라는 헌법적인 독립 기구가 대통령의 관련 기록물을 생산·보존·관리하게 된다. 특히 생산 기능에 있어서 현직 대통령이 법에 따라 기록물을 생산한 후 퇴임 후 대통령 기록관에 이관하는 대통령 기록물 관리법과는 달리, 조선시대의 사관처럼 춘추사관이 배석해 모든 기록을 남기도록 규정하고 있다. 대통령이 사적인 기록임을 전제로 춘추사관의 일시 이석을 요구할 경우 이석 사유와 사실을 기록해야 한다고 명시해 놓았다. 법안을 발의한 정문헌 의원은 “미국 법안을 참조했지만 춘추사관 제도는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사관 제도를 살리자는 취지에서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이 법안에 대해서 참여연대 투명사회팀 이경미 간사는 “인상 깊은 법”이라고 전제하면서도 “예문춘추관과 같은 독립적인 기구보다 국가기록원 밑에 두고 특별위원회의 독립성을 갖추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평가했다. 예문춘추관법보다 대통령 기록물 관리법에 더 비중을 둔다는 설명이다. 청와대 정인화 기록관리비서관은 “대부분의 청와대 문서가 e-지원 시스템으로 전산화된 만큼 옛날 사관처럼 배석해 기록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대통령 기록물 관리법과 예문춘추관법은 국회 행자위에서 병합 심리돼 본격적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어떤 방향이든 여야 모두 대통령의 기록물을 보존해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하고 있는 상황. 이 법에 따라 대통령은 또 하나의 ‘감시의 눈’을 갖게 된다. 기록 문화가 대통령을 견제하는 기구가 되는 것이다. 인하대 행정학과 김영민 교수는 “기록 보존은 어떻게 체계화하느냐가 관건”이라면서 “대통령 기록물에 관한 법이 통과되면 대통령 뿐만 아니라 입법부와 사법부 등의 권력 기관에도 역시 ‘기록’이라는 또 하나의 견제장치를 갖게 된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 기록 의지 확고하네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 “이렇게 해서는 우리가 새 출발 못합니다. 기록물 관리부터 새롭게 하고 지난날 자료를 모두 없애고 폐기하던 관습에서 벗어나 국민들 앞에 진상을 공개하고 앞으로 안 그러겠다고 맹세해야 합니다.” 2004년 7월 20일 노무현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한 발언이다. 노 대통령의 기록 관리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청와대 측은 보좌진보다 노 대통령의 기록문화 보존 의지가 더 확고하다고 말한다. 2004년 대통령 기록관리 혁신 TF가 구성됐다. 이 곳에서 대통령 기록물 관리법 제정이 추진됐다. 2005년 10월 국가기록관리 혁신 로드맵도 마련됐다. 참여정부 측은 대통령 기록물 관리법이 통과될 경우 법 제정 이전에 생산한 기록물도 대통령 기록관에 그대로 이관한다는 뜻을 표명하고 있다. 법이 발효되면 2007년 1월 1일 이후 기록물을 반드시 대통령 기록관으로 이관하지만 이전의 문서에 대해서는 구속력이 없다. 청와대 정인화 기록관리비서관은 “소급이 아니라 관리 차원에서 이전의 기록물도 대통령 기록관으로 이관될 것”이라고 말했다. 재신임과 탄핵 같은 민감한 정치적 사안에 대해 정 비서관은 “이런 문서들도 그대로 이관된다”면서 “하지만 관리 또는 이관이 바로 공개로 연결되는 것으로 봐서는 안 된다”고 설명했다. 기록과 관리가 공개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정 비서관은 “이전에는 대통령 관련 기록물이 생산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생산되더라도 모두 버렸다”면서 기록물 관리에 대한 참여정부의 확고한 의지를 전했다. 참여정부의 대통령 기록물은 전자기록물이 상당한 양을 차지한다. 2004년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운영된 ‘e-지원 시스템’을 통해 온라인 결재 과정이 낱낱이 기록돼 있는 것. 해당 부서에서 의견을 첨부한 것까지 남아 있다. 2005년말까지의 현황에 의하면 전체 17만여 건 중 전자기록물이 15만 건에 육박하고 대통령 행사기록물이 2만여 건, 종이기록물이 9000여 건으로 전자기록물이 큰 비중을 차지함을 알 수 있다. ‘e-지원 시스템’에 의거해 생산된 전자문서는 기록관리시스템(RMS)에 의해 모두 기록된다. 현재 개발중인 RMS는 6월말 완성될 전망이다. 기록관리학과가 뜬다 명지대 기록관리대학원의 수업 모습. 기록 관련 법들이 속속 제정됨에 따라 기록관리학이 인기 학문으로 부상되고 있다. 지난해 50여 명의 기록연구사가 정부 각 부처에서 선발됐다. 공공기록물 관리법에 따르면 공공기관에서는 기록연구사를 채용, 공공 기록물을 관리하도록 하고 있다. 채용범위는 지난해 종합부처에서 올해말 지방자치단체로, 2010년 기타 공공기관으로 확대된다. 2010년까지 1000명의 기록연구사가 필요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기록연구사는 기록학 석사 학위수여자가 자격을 갖게 된다. 인접학문인 역사학·문헌정보학 연구자는 석사학위 수료 후 행정자치부 장관이 인정하는 교육기관에서 1년 동안 기록학을 연구해야 한다. 현재 이런 교육기관은 한국기록관리학교육원이 유일하다. 기록관리학 대학원은 최근 몇년 사이에 부쩍 늘었다. 명지대 기록과학대학원이 처음 설립된 후 서울에서는 외국어대, 서울대, 이화여대에서 대학원 과정을 신설했다. 지방은 국가기록원이 소재한 충청도 인근 지역에서 많이 신설됐다는 점이 특이하다. 공주대·원광대·한남대·충남대에서 대학원 과정을 만들었다. 이외에도 부산대·목포대·경남대에도 대학원 과정이 만들어졌다. 기록관리학과가 있는 학교에서 학부과정에 역사나 문헌정보학을 전공한 후 기록관리학 대학원으로 진학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볼 수 있다. 한성대에서는 학부과정에 기록관리학을 두었다. 석사 학위를 취득할 경우 기록연구사로 바로 취업이 가능하기 때문에 기록전문가인 아키비스트(Archivist)를 지망하는 학생들도 덩달아 늘어 났다. 명지대 기록대학원의 경우 올해 신입생의 경우 30명 정원에 127명이 지원, 4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명지대는 기록관리학의 선두 주자로 평가되고 있다. 2000년 3월 대학원 과정을 신설, 국내에서 첫 테이프를 끊었다. 명지대의 기록과학대학원은 역사학자들이 기록문화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만든 한국국가기록연구원에서 출발한다. 독립적인 사단법인인 이 연구단체는 명지대 유영구 이사장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명지대 내에 사무실이 두게 됐다. 이런 과정에서 기록관리대학원 과정이 신설되고 기록관리학을 전공한 김익한·이승휘 교수가 전임교원으로 채용됐다. 현재 기록관리학 대학원 중 기록관리학 전공 전임교원을 설치한 곳은 명지대밖에 없다. 1년 교육과정의 한국기록관리학교육원도 명지대 안에 유일하게 설치돼 있어 기록관리학에 관한 한 명지대는 메카로 부상해 있다. 지난해 기록연구사에 채용된 50명 중 교육원을 포함해 명지대 출신 학생이 35명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승휘 교수는 “기록관리는 전문적인 학문인 만큼 수요에 맞춰 학과를 신설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교육의 질을 높이는데 충실해야 한다”고 말했다.
- 표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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