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총 244 건 검색)
- [기고]존엄한 삶과 죽음을 위하여
- 2024. 12. 08 20:26오피니언
- ... 공감을 경험하는 노인들은 그렇지 않은 노인들에 비해 삶의 존엄성을 더 강하게 느낍니다. 이는 존엄한 삶을 만드는 일이 단순히 개인의 일이 아니라, 사회가 함께 책임져야 할 공동체적 몫이라는...
- 노인존엄존엄사
- 한강이 말하는 ‘계엄’과 ‘광주’···“광주는 인간의 잔혹성· 존엄함이 동시에 존재했던 보통명사”
- 2024. 12. 08 17:11문화
- ... 작가가 스웨덴 한림원에서 ‘빛과 실’이란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AFP연합뉴스 “인간의 잔혹성과 존엄함이 극한의 형태로 동시에 존재했던 시공간을 광주라고 부를 때, 광주는 더이상 한 도시를 가리키는...
- 가자지구서 구호품 맞아 숨진 세 살배기···“원조 대신 존엄 원해”
- 2024. 10. 23 14:33국제
- ... 인간적 존엄을 박탈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야드의 할아버지는 “우리는 원조를 원하지 않는다. 존엄을 원한다”며 “이스라엘뿐 아니라 아랍 국가들로부터 받는 모욕과 수치는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 가자전쟁 1년
- ‘노벨문학상’ 한강이 되살려낸 존엄의 언어 [김민아 칼럼]
- 2024. 10. 14 16:24오피니언
- ... 받는 날이 올까….. 그날이 와서 기쁩니다. 수상자가 한강이어서 더 기쁩니다. “어떻게든 폭력에서 존엄으로, 그 절벽들 사이로 난 허공의 길을 기어서 나아가는 일”(2017년 노르웨이 문학의 집 강연)을...
- 김민아 칼럼한강작가소설가노벨상노벨문학상채식주의자소년이온다작별하지않는다존엄언어장벽폭력블랙리스트여성한강, 한국 첫 노벨문학상
스포츠경향(총 27 건 검색)
- 김종문 작가 어른들의 동화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출간, 해학과 풍자로 보여준 인간의 존엄성
- 2023. 08. 10 18:35 생활
-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표지 김종문 작가가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을 출간했다. 이 책은 해학과 풍자를 통해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이야기를 펼쳤다. 작가는 그동안 ‘뚜벅이 사랑’(2003), ‘숲에도 풀이 있었다’(2004) 등 어른들을 위한 동화를 출간해 왔다. 동화라고 하면 흔히 동물들에 빗대어 이야기를 풀어나가지만, 작가는 동물뿐만 아니라 공구, 주방용품, 샌드백, 물고기, 식물, 곤충 등을 비롯해 심지어 일상용어까지 동화의 소재로 삼아 이야기를 풀어 간다.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은 37편의 단편으로 가볍고 속도감 있게 읽힌다.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상처받고 자책하는 누구의 모습이 담겨 있지만, 존엄을 폄훼하려는 사람에게 일침을 가하기도 한다 ‘토끼와 거북이’에서는 기존의 동화를 뒤집어 노력해도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는 거북이의 좌절과 토끼의 오만을 꼬집는다. ‘고등생명체’에서는 사무실에서 나름 고등생명체로서 자부심을 갖고 있던 인간이 하등생명체인 파리에게 굴복한다. 서랍에서 녹이 슬어 활용 가치도 없으면서 날카로운 침을 가졌다는 이유로 다른 문구들을 평가만 하다가 쓸쓸히 퇴장하는 ‘압정의 최후’도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동화만큼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는 책도 없다. 그러나 필자 쓴 동화는 아름답지 않다. 동화의 형식을 빌렸지만, 콩트라고도 할 수 있다. 큰 메시지를 전하며 독자를 가르칠 의도도 없다. 보이는 세계에 대한 집착에서 한 발 떨어져 그냥 사람을 있는 그대로 그 사람 자체로 존중해 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작가는 “사람의 가치가 부와 지위, 성과 인종에 따라 달라질 수 없다. 살면서 상처를 받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 상처에 소금을 뿌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책은 관계 속에서 상처받은 나와 너의 어깨를 토닥인다. 세상을 보는 작가의 독특한 관찰력을 음미하며 가볍게 보아도 좋은 책이다.
- ‘고요의 바다’ 공유, “처음부터 호불호 예상…인간 존엄에 대한 드라마, ”
- 2022. 01. 03 13:32 연예
- 공유. 사진 넷플릭스 제공배우 공유는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 당연히 딸도 없다. 그런 그가 부성애를 표현하는데 탁월하다. 영화 ‘용의자’의 지동철이 그렇고 ‘부산행’의 서석우가 그렇다. 넷플릭스 ‘고요의 바다’에서 딸을 살리기 위해 달로 떠나는 탐사 대장 한윤재 또한 그렇다. 황폐해진 근미래의 지구를 배경으로 특수 임무를 받고 달에 버려진 연구기지로 떠난 정예 대원들의 이야기를 담은 ‘고요의 바다’에서 열연한 공유를 최근 온라인 비대면으로 만났다. 지동철은 딸의 복수를 위해 처절한 몸부림을 하고, 서석우는 이혼한 아내에게 딸을 데려다주기 위해 부산행 열차에 몸을 싣는다. 딸은 지동철과 서석우에게 있어서 삶의 동기다. ‘고요의 바다’에서도 그렇다. 윤재는 아픈 딸의 치료를 위해 달로 떠난다. 부성애를 표현하는 장면은 짧은 순간이다. 하지만 없어서는 안될 장면이다. 병상에 누운 딸을 보며 절제된 감정으로 부성애를 관객에게 전달한다. 딸을 위해 그 어떤 것이라도 할 수 있지만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다. 공유는 “내가 윤재라면 베니핏이 있다면 간다. 베니핏이 없으면 고민할 것이다. 확실한 베니핏이 있다면 내 자식을 살리기 위해 가야할 것 같다. 윤재처럼”이라고 말했다. ‘고요의 바다’는 근미래 지구의 디스토피아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파괴된 환경으로 인해 물을 등급제로 배급한다. 물을 물쓰듯하는 세상은 끝이 났다. 윤재의 미션은 달에 있는 발해기지에서 나라를, 더 나아가 인류를 구원할 물질 샘플을 가져오는 것이다. 겉으로는 SF장르를 차용했지만 환경과 인간에 대한 물음을 던진 작품이다. 환경 파괴로 인해 생존마저 위협받는 인간, 그 위기를 타계하기 위해 인간의 존엄마저 무시해도 되는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러한 이유로 ‘고요의 바다’의 평가가 엇갈린다. 공유는 “장르때문에 이 작품을 시작하면서부터 호불호가 갈릴 거라 생각했다. SF장르라는 것 때문에 다양한 관점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광활한 우주를 배경을 다이내믹한 장면을 기대했던 사람들이 다소 부정적인 관점으로 보는 것을 이해한다. 하지만 ‘고요의 바다’는 애초부터 그런 작품이 아니었다. 공상과학물이지만 철학과 신념에 관한 인문학적인 작품이다. ‘고요의 바다’는 SF장르의 발전 가능성을 열어줬고, 의미있는 첫 걸음이라고 생각한다. 작품에 참여한 입장에서 보면 아쉬움이 안 남으면 거짓말이다. 개인적으로 만족하는 부분도 있다. 어떻게 보면 불모지나 다름 없었던 한국의 SF장르에 있어서(우리의)시도는 훌륭한 첫걸음이었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관점으로 봐주는데 그만큼 관심도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감사하게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공유. 사진 넷플릭스 제공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은 더 나은 삶을 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과학의 발전으로 환경이 파괴되면서 인간의 삶은 더 피폐해지고 있다. ‘고요의 바다’는 파괴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른 인간을 희생해도 되는가라는 원초적인 질문을 던진다. 인간의 윤리는 인간이 만들어내고 지켜야할 선을 만들었다. 그 선을 지키고자하는 자와 넘으려는 자의 갈등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공유는 “환경에 대한 생각은 확실히 경각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됐다. 아이러니하게도 기술과 과학의 발달이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 같다. 어떤 것은 인류의 희망이 될 수도 있고 금단의 열매가 될 수도 있다. 양면적인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인류 희망이고 미래일 수 있지만 금단의 열매일 수도 있다는 모호한 지점이 매력적인 작품”이라고 말했다. 공유는 작품에 참여한 뒤 느낀 점을 솔직히 밝혔다. “개인적으로 필요한 건 ‘어떤 자세로 삶을 살아가야 할지’예요. 불특정 다수가 맞다고 하는 것에 우르르 몰려다니는 것보다 개인의 확실한 철학과 신념을 갖고 살아야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송지안 박사와 한윤재가 부딪치는 게 선과 악이 아니예요. 그래서 가슴 아픈 거죠. 선과 선의 대결이 더 가슴 아프지만 끊임없이 그런 갈등과 함께 나아가야 한다 생각해요. 개인적으로는 그런 고민을 해봅니다”
- 공유
- [신간] 아직도 ‘王’ 점 보세요?…‘위인’ 통해본 ‘내’ 존엄함 ‘MBTI 철학자’
- 2021. 10. 21 15:59 생활
- “내가 세상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전형적인 패턴을 알게 된다면….” MBTI(Myers-Briggs-Type Indicator, 마이어스-브릭스 유형 지표)는 이사벨 브릭스 마이어스(Isabel B. Myers)와 그의 어머니 캐서린 쿡 브릭스(Katharine C. Briggs)가 융의 분석심리학을 근거로 개발한 성격 유형 선호 지표이다. 여러 성격 유형 검사 중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지표 가운데 하나로 흥미 위주의 성격 테스트와 인간관계에서의 선호성, 진로 선택을 위한 인성 검사 등에 자주 쓰인다. MBTI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최근 ‘자신의 유일무이함과 그에 따른 삶의 목적과 의미를 발견했던 거장들의 삶을 MBTI 성격 유형으로 분석한 책이 나와 화제다. ‘MBTI 철학자’(이요철 지음, 쏭북스 펴냄, 값 1만7000원)가 바로 그것. 동서양 철학과 MBTI 성격 유형론을 연구하며, 그 결과를 현장에 접목하고 있는 철학자 이요철은 “앞선 세대의 위인들 중에서 자신의 유일무이함과 그에 따른 삶의 목적과 의미를 발견했던 롤 모델은 없을까”를 고민했다. 온전히 자기실현을 이루고 개성화를 성취하기 위해 몸부림친 위인들의 삶은 분명 우리에게 훌륭한 나침반이 될 것이라고 여긴 것. 철학자들의 삶 자체가 융이 말하는 ’‘자기실현’의 성취였기 때문이다. 이에 저자 이요철은 지난 몇 년간 수많은 고민과 연구 끝에 동서양 사상가 중 아리스토텔레스, 공자, 도산 안창호, 마키아벨리, 소크라테스 다섯 명을 MBTI 유형으로 분석했다. 저자는 지난 세기 철학자들을 성격 유형으로 분류한 것은 문헌에 근거한 추정 작업이므로 실제와 다를 수 있지만, 비교적 객관적인 자료가 남아 있어 어느 정도 신뢰성 있게 유형을 분석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우리와 무엇이 달랐을까?’저자는 그 답을 바로 사색과 성찰의 힘에서 찾는다. 그들은 우리보다 조금 더 좋은 판단을 내릴 역량을 갖췄을 것이다. 또 자기 안에 자리한 편견과 오만을 또렷하게 인식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은 가만히 멈춰 서서 사색에 골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철학하는 힘을 가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강조한다. 이 책에서 소개되는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공자 같은 고대 철학자들은 자신의 전공 영역을 ‘철학’으로 한정한 적이 없다고 말이다. 저자에 의하면 ‘철학함’이란 단 하나의 지식이나 정보도 달리 보게 만드는 일깨움을 말한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박식함’에 있지 않고 ‘일깨움’에 있다. 그것은 우리 삶에서 불가능과 무능력, 궁핍과 빈곤을 양산하고 규정하는 모든 조건에 맞서 분투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철학은 다르게 느끼는 것이고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며 결국 다르게 사는 것이다. 철학은 지옥에서 도망치지 않고 또 주저앉아 낙담하지 않고, 지옥을 생존 조건으로 삼아 거기서도 좋은 삶을 누리려는 자의 것이다. 이들이 몸담았던 시대와 환경은 어쩌면 지금보다 더 분노하고 절망해야 마땅했다. 눈앞의 상황 때문에 주변을 제대로 파악하는 능력이 저하될 수밖에 없는 좁은 시야(Tunnel vision)에 갇혀버리게 되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이후 모든 세대의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추앙받는 거장이 되었다. 저자 이요철은 바로 이 점에 주목했다. 이 책을 통해 거장들의 인생 여정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들이 겪었던 상실과 배신, 불행, 분노 등으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었는지, 개인에게 불편과 불안을 야기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취약한 기능을 어떻게 승화시키고 초월할 수 있었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누구나 고난과 위기가 던지는 인생의 질문을 안고 살아가는 시대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불확실성의 시대, 그래서 철학이 더 필요하다. 우리는 누구나 철학을 통해 ‘삶이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가’라는 문제에 스스로 답을 하는 철학자여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상황과 환경에 놓여있더라도 스스로 탁월하게 살 수 있다. 여기에 MBTI가 더해지면 각자 타고난 재능은 살리고, 약점은 보완하여 최선의 인생을 만들어 갈 수 있다. 나의 성격 유형을 제대로 안다는 것은 개개인마다 다른 우월하거나 열등한 기능을 잘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격 유형을 알면 내가 세상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전형적 패턴을 파악할 수 있다. 열등 기능을 알아차림으로써 무의식 속에서 어떤 감정이 솟아오르는 순간, 나를 먼저 살핌으로써 즉각적으로 반응해 만드는 실수를 줄일 수 있다. 지금은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을 응시해야 할 때다. 삶이 불현듯 들이미는 위협과 좌절에 대해 가장 자기다운 해답을 찾아야 한다. 인생의 혼란스러운 소용돌이 속에서 답을 주는 응답자 역시 나 자신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그 누구도 대신 읽어 줄 수 없는 ‘나’와 ‘내 인생’에 관한 전문가, 더 나아가 타인의 삶까지 해석해 줄 수 있는 ‘MBTI 철학자’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MBTI 성격 유형으로 분석한 5명의 거장 ESTJ(내향적 감각을 지닌 외향적 사고) 아리스토텔레스=‘왜 나는 이런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하는가?’ 묻고 싶다면? 지옥 같은 인생길을 걷고 있더라도 ‘지금 여기’를 변화시킬 수 있는 법을 배우다 ESFP(내향적 감정을 지닌 외향적 감각) 공자=‘편법과 반칙이 횡행하는 시대, 어떤 기준으로 살 것인가?’ 묻는 당신에게 자기연민의 유혹을 뒤로 하고 궁지에 빠진 것에 압도당하지 않는 법을 배우다. ENFP(내향적 감정을 지닌 외향적 직관) 도산 안창호=더 큰 선을 위해 어떻게 이끌 것인가? 지식보다 긍휼이 중요한 시대, 최선을 다하고 힘써 행해 성숙한 정신적 인프라를 만드는 법을 배우다 INTJ(외향적 사고를 지닌 내향적 직관) 마키아벨리=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서는 힘을 얻으려면 역사는 울보나 분노한 자에게 맡겨지지 않는다. ‘개성화’로 온전한 나를 완성하는 길을 배우다. INFP(외향적 직관을 지닌 내향적 감정) 소크라테스=아레테, 진정한 아름다움과 용기를 위하여 눈앞의 현실이 캄캄한 위기의 시대, 진짜 ‘잘 사는 법’을 배우다. 지은이 이요철 ㈜아레테교육연구소 소장은 동서양 철학과 MBTI 성격 유형론을 연구하며, 그 결과를 현장에 접목하고 있다. 한국 MBTI연구소에서 일반 강사 과정, ㈜어세스타에서 STRONG 진로 상담 전문가 과정을 이수하고 진로 및 심리 상담 전문가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현재 각급 학교, 시민대학, 기업 등을 대상으로 특강과 공무원 및 사회복지 직무연수 등 다양한 형태의 강의와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 2018년 세종도서 교양 부문에 선정된 ‘철학하는 인간의 힘’, ‘다시 쓰는 희망의 교육’, ‘EBS커리어 꿈길진로독서’, ‘EBS커리어 명저탐구토론’ 등이 있다. 저자는 “철학이란 다르게 느끼는 것이고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며 결국 다르게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철학하는 사람은 ‘지옥에서 도망치지 않고 또 주저앉아 낙담하지 않고, 지옥을 생존 조건으로 삼아 거기서도 좋은 삶을 누릴 수’ 있다. 이 책에서 소개한 다섯 명의 현자들은 스스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해낸 사람들이다. 그들 모두 ‘통로가 없는’, ‘길이 없는’ 시대를 살았다. 문제는 있으나 답이 없는 시대, 그 위기의 시간 속에서도 그들은 인간답게 사는 법을 포기하지 않았다. 열등 기능을 발견하고, 더 나아가 유일무이함으로 자신만의 목적과 의미를 찾는 ‘개성화’에 이르렀다. 그들이 타고난 열등 기능을 어떻게 승화시켰는지, 그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신간] 아직도 ‘王’ 점 보세요?…‘위인’ 통해본 ‘내’ 존엄함 ‘MBTI 철학자’
- ‘뉴스토리’ 코로나 시대와 존엄사
- 2021. 03. 12 12:05 연예
- ‘뉴스토리’ SBS 제공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는 존엄사법이 시행된 지 3년이 지났다. 연명의료란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에게 생명 연장만을 위해 시행되는 의료 행위를 일컫는다. 존엄사법 시행 이후 3년 동안 연명의료를 받지 않겠다고 미리 약속하는 사전 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한 사람이 80만 명을 넘었다. 국립 연명의료관리기관이 임종을 앞둔 환자와 가족들을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70%가 연명의료 중단을 선택한 이유로 마지막 고통을 줄이고 삶을 마무리하는 기회를 얻기 위해서라 답했다. 존엄사법 시행 3년을 맞아 삶의 마지막 순간을 보내는 환자와 가족들을 취재했다. 취재진은 호스피스 병원에서 가족과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환자들을 만났다. 한 말기 암 환자의 딸들은 어머니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려주고 옛 사진을 보여주는 작은 이벤트를 가지면서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가족과의 대화를 촬영하고, 오랜 친구들과 만나는 등 주변을 정리하면서 편안하고 인간답게 삶을 마무리한 사례도 취재했다. 그러나 코로나19 사태로 존엄사와 거리가 먼 임종이 늘고 있다. 지난 9일부터 요양병원이 면회를 재개했지만, 요양병원 입원 환자의 가족 가운데 면회를 못 하고, 임종도 지키지 못한 사례가 적잖다. 일반 병원에서도 중환자실 면회 금지와 병실 면회 제한 등으로 가족과 작별 인사조차 못 하고 삶을 마무리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남은 가족이 임종 과정에서 정신적 불안이나 우울 증세를 느끼면 트라우마로 남을 수도 있다. 이번 주 SBS ‘뉴스토리’는 존엄사법 시행 3년을 계기로 존엄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사연을 소개하고, 코로나 탓에 가족과 단절된 채 최후를 맞는 임종의 현실을 조명한다.
- 코로나19
주간경향(총 12 건 검색)
- [편집실에서] 모든 죽음에 존엄한 장례를(2024. 11. 06 06:00)
- 2024. 11. 06 06:00 오피니언
- 홍진수 편집장 “2024년 10월 28일(월) ○○○ 님, △△△ 님의 장례가 서울시립승화원에서 있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영결식에 참여 부탁드립니다. (중략) ○○○(남) 님은 1961년생으로 2024년 9월 13일 사망하셨습니다. 마지막 주소지는 서울시 중구입니다. ○○○ 님의 유골은 화장 후 분골하여 무연고 추모의 집에 봉안될 예정입니다. △△△(남) 님은 1988년생으로 2024년 9월 10일 사망하셨습니다. 마지막 주소지는 서울시 동작구입니다. △△△ 님의 유골은 화장 후 분골하여 무연고 추모의 집에 봉안될 예정입니다.” 무연고 사망자와 저소득층의 장례를 지원하는 단체 ‘나눔과나눔’의 홈페이지에 공지된 장례 일정 중 일부입니다. 올해 10월 일정을 보니 단 하루도 비는 날 없이 장례 일정이 있습니다. 다른 달도 일정이 빡빡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명절 등 며칠을 제외하고는 매일 적게는 2건에서 많게는 4건의 장례를 치릅니다. 망자 이름에 외국인이 올라가 있기도 합니다. 태어났으면 언젠가는 모두 죽습니다.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니 100개의 탄생이 있다면 100개의 죽음이 따릅니다. 모든 삶이 순탄하지는 않듯이 죽음도 그렇습니다. 어떤 이는 당연히 여길 장례를, 어떤 이는 기대할 수조차 없습니다. 지난해 한국의 ‘무연고 사망자’는 5415명이라고 합니다. 2020년(3136명)보다 72.7% 늘었습니다. ‘1인 가구’의 증가추세를 보면 무연고 사망자 역시 앞으로 더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는 ‘왜 그들의 장례를 굳이 치러줘야 하냐’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냥 시신을 ‘처리’해 주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장례와 애도는 살아 있는 사람에게 더 필요한 의식입니다. 무연고자라고 해도 사회와 연결이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닙니다. 법적인 관계는 없지만, 인연이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주변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망자를 보내는 시간과 절차가 필요합니다. 또 내가 죽은 뒤 누군가 나의 장례를 치르고 애도할 것이라는 믿음이 살아가는데 큰 위안이 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인간의 삶만큼 죽음도 존엄해야 합니다. 주간경향 이번 호 표지 이야기는 ‘무연고자 공영장례 현장에서 바라본 한국사회’입니다. 한해 무연고 사망자 5000명이라는 통계는 현재 한국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지표 중 하나입니다. 피할 수 없는 ‘대세’의 일부이기도 하고, 연대가 끊어지고 ‘각자도생’으로 내몰린 한국인들의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공영장례를 치르는 사람들을 만나고 장례 현장도 다녀왔습니다. 또 무연고 사망이 계속 늘어나는 상황에서 법적 결혼과 혈연을 넘어선 장례를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도 알아봤습니다.
- 편집실에서편집실에서
- [간호사가 보고 있다](7)인간은 존엄하다(2019. 04. 16 09:32)
- 2019. 04. 16 09:32 사회
- ㆍ환자들은 인간이길 포기한 것이 아니다 환자에게 바지를 꼭 입히고, 사방에 커튼이나 칸막이를 쳐 프라이버시를 보호하고, 상태가 양호한 환자가 화장실을 가기를 원하면 이동형 모니터링 기계를 달고 간호사 동반하에 화장실을 갈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가? 서울 한 대형병원 중환자실. (위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계없음)/김창길 기자 ‘존엄’은 감히 범할 수 없을 정도로 높고 엄숙하다는 의미다. 인간은 스스로를 존엄한 존재로 보고, 다른 동식물들보다 자신의 생명을 좀 더 특별하게 여긴다. 그래서 병원에서는 그 ‘인간’의 생명을 가장 우선시해야 할 가치로 보고 생명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생명이 너무나도 소중해서 지켜야 하기 때문에 바로 그 ‘존엄성’을 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일부 중환자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중환자실 환자들은 바지를 입지 않는다. ‘바지를 입지 않는다면 외국처럼 치마형 환자복을 입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냥 바지를 벗겨놓는 것뿐이다. 마치 곰돌이 푸우처럼. 중환자실 환자는 대부분 의식이 없거나 의식이 있다 해도 중요한 장치가 많이 달려 있어서 화장실에 갈 수가 없다. 침대 위에서 대소변을 봐야 한다. 기저귀 교체하던 중에 회진 진행 누워 있는 환자의 바지를 입히는 것도, 벗기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그래서 기저귀를 교체해줘야 할 때마다 바지를 아예 벗겨놓고 작은 시트로 덮어둔다. 그 시트는 가로세로 길이가 1m 남짓이기 때문에 환자가 무릎을 세우거나 다리를 조금만 움직이면 주요 부위가 다 드러나곤 했다. 그래서 신규간호사 때 교육받은 한 가지가 바로 ‘바지’였다. “중환자실 밖을 나갈 때 바지를 꼭 입혀라.” 아픈 사람과 아프지 않은 사람, 환자와 나. 그 차이는 무엇일까. 환자가 되는 순간, 수치심과 존엄성이 사라지기라도 하는 걸까? 병원 치료만 받을 수 있다면 어떤 대접을 받든지 감내해야 하는 걸까. 의식이 없는 환자라 해도 신체가 노출되는 등의 프라이버시 침해에서 지켜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의식이 있는 환자에게서도 지켜지지 않는 것을 보고 대부분의 의료진은 포기하게 된다. 실제 의식이 있는 중환자가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것 중 하나가 여러 사람들이 있는 공간에서 대변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변을 치워달라고 요청을 하고 항문과 성기를 드러내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의학적인 사유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력이 충분하다면 의료인과 함께 화장실을 갈 수 있는 상태의 환자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병원에는 늘 시간과 인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환자는 맨정신으로 침대에 누워서 기저귀에 대변을 본다. 이런 상황을 반쯤 포기하고 있던 어느 날, 이런 고민이 내가 예민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어느 환자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의식은 매우 또렷했지만 기관절개술을 받아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장기간 입원으로 근육이 거의 소실되어 팔다리를 거의 움직이지 못해 의사를 표현하기 힘든 상태였다. 환자는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기저귀에 대변을 봤고 간호사들이 기저귀를 교체해주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환자의 담당교수님이 한 무리의 의사들과 함께 회진을 왔다. 의사들이 침대를 에워싸다시피 하자 자연스럽게 간호사들은 잠시 자리를 비키게 되었다. 문제는 기저귀를 교체하던 중이라서 환자의 아랫도리가 벗겨진 상태였다는 것이다. 교수님은 매우 친근하고 정중하게 치료 경과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설명했고 전공의와 의대생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를 열심히 받아 적었다. 꽤 오랜 시간 설명이 이어졌다. 아랫도리가 벗겨진 채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환자를 보고 있자니 나는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의사들 사이를 헤집고 시트라도 대충 덮어줘야 하나.’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무렵, 환자의 손이 미미하게 움직였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향하는 곳이 어딘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환자의 손이 조금씩 조금씩 움직여서 자신의 성기를 반쯤 가리게 되자 아차 싶었던지 전공의 중 한 명이 황급히 환자의 아랫도리를 시트로 덮어주었다. ‘아…’ 하는 작은 탄식과 민망함을 담은 헛웃음이 몇 초간 지나갔다. 환자는 아랫도리에 시트가 덮여지기 전, 그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을까. 프라이버시 보호에 무뎌져가는 의료인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다. 커튼도 치지 않고 여자 환자의 가슴을 드러내놓고 심장 초음파를 보고 검사가 끝나면 앞섶을 다 풀어헤쳐둔 채 그대로 가버린다. 심전도를 찍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의식이 없거나 스스로 움직이기 힘든 환자들은 누군가 단추를 여며주기 전에는 젖가슴을 드러내놓고 있는 경우도 많다. 한숨이 절로 나오지만 간호사와 인턴의사, 전공의, 전문의들이 왜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지 이해한다. 의사들은 공식적으로만 주 88시간을 근무한다. 그러나 퇴근 후 비공식적 연장근무가 끝없이 이어진다. 또한 중환자실엔 늘 생명이 오고가는 문제들, 그러니까 먼저 처리해야 할 것들이 쌓여 있다. 그래서 의료인들은 서로 그런 것들에 무뎌져가고 있었다. ‘그래 사람 살리는 게 우선이지’,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데서 한가하게 프라이버시 타령이야.’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간호사들은 저마다 나름 꽂히는(?) 데가 있다. 어떤 간호사는 환자에게 이걸 꼭 해주려 하고, 또 다른 간호사는 아무리 바빠도 저것만은 꼭 지키려 한다. 달라 보여도 모두가 한결같이 ‘인간은 이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적어도 지금 상태가 인간이 받아 마땅한 대접은 아닐 거라고,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거라고, 나는 내가 환자가 되었을 때 이런 일을 당하고 싶지 않다고. 그동안 이런 문제제기를 쉽게 하지 못했던 이유는 병원의 반응이 뻔했기 때문이다. 환자에게 바지를 꼭 입히고, 사방에 커튼이나 칸막이를 쳐 프라이버시를 보호하고, 상태가 양호한 환자가 화장실을 가기를 원하면 이동형 모니터링 기계와 약물주입펌프 등을 달고 의사나 담당간호사 동반하에 화장실을 갈 수 있도록 도와주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지침을 제대로 지키기 위한 추가 인력은 주지 않을 것이다. 맞는 말이 적힌 종이 한 장을 부서마다 돌리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실행은 힘든 일이다. 나는 동료들의 업무를 가중시키는 역적이 되고, 환자는 프라이버시를 얻는 대신 다른 어떤 것을 내놔야 할지도 모른다. 사람이 일을 할 수 있는 물리력에는 한계가 있다. 새로운 것을 손에 쥐기 위해서는 기존에 쥐고 있던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법이다. 그럼에도 연재 마지막에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인간은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환자들이 이 모든 것을 참고 견디는 것은 그들이 인간이길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저 어쩔 수 없이 그런 상황에 처해진 것이다. 인간은 존엄하다. 그리고 환자는 단지 몸이 아픈 ‘인간’일 뿐이다. ‘간호사가 보고 있다’는 이번 호 연재를 끝으로 마무리됩니다.
- 간호사가 보고 있다
- [내 인생의 노래]브루스 스프링스틴의 ‘스트리트 오브 필라델피아’-존엄성을 지켜주지 않은 사회(2017. 09. 25 17:49)
- 2017. 09. 25 17:49 문화/과학
- 영화주제가는 가사의 뜻을 몰라도 대강 어떤 내용인지 짐작할 수 있다. 에서 울려 퍼지는 ‘Eye of the Tiger’가 승리를 위해 다부진 노력을 해야 한다는 느낌이라는 건 영어를 전혀 몰라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실제 가사가 뒷골목으로 다시 돌아온 한때 최고였던 남자가 호랑이의 눈으로 열정을 영광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내용임을 확인하면 아드레날린이 치솟는다. 운동할 때 들으면 팔굽혀펴기 한 개를 기어코 더 하게 하는 노래다. 노래의 풍(風)만으로도 감정이 동요되는 노래가 또 있다. 그런데 이 노래를 들으면 아드레날린 증가가 아니라 세로토닌이 쭉 빠지는 느낌이다. 영화 의 오프닝곡인 ‘스트리트 오브 필라델피아·Streets of Philadelphia’는 어둡고 칙칙한 반주에 가수는 허스키보이스로 중얼중얼 알아듣지 못할 가사를 내뱉는다. 하지만 영화의 이미지와 결합하며 이 노래는 암울의 가장 깊은 곳으로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끌고 간다. 미국 헌법이 탄생한 도시 필라델피아, 겉으로는 사람들이 각자 맡은 일에 충실하면서 마냥 행복해 보이지만, 그 뒤에는 오래된 고정관념이 떠다니고 약자들은 여전히 차별 받는다. 세상은 공정하다고? 개가 웃을 일이다. 열심히만 살면 행복할 수 있다고? 소가 웃을 일이다. 사회라는 견고한 벽은 개인이 팔굽혀펴기 한 개 더 한다고 깨지지 않는다. 바로 그곳에서 거대 로펌의 촉망받는 변호사였던 앤드류 베킷(톰 행크스 분)은 자신을 동성애자이자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환자라는 이유로 해고한 회사를 상대로 승산 없는 소송을 진행한다. 베킷의 변호사 밀러(덴젤 워싱턴 분)는 재판의 본질이 동성애자들에 대한 대중들의 혐오, 미움, 그리고 두려움이 어떻게 해고라는 차별로 이어졌는지 직시하자고 말한다. 그러자 판사는 “이 법정에서 정의는 인종, 종교, 피부색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성적 기호도 마찬가지”라면서 재판이 사회적 고정관념에 상관없이 공정할 거라고 선언하지만 밀러는 이렇게 되묻는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우리는 이 법정처럼 살지 않습니다. 그렇죠?” 맞다. 우리들의 ‘거리’에는 ‘그래도 된다’는 폭력이 무수하다. 오히려 현실을 법정이라 착각하고 고정관념에서 빠져나오길 거부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러니 오판은 비일비재요, 각성은 지난할 수밖에 없다. 오답도 우기면 정답이다. 교과서에서 배운 ‘정의로운 행동’은 온데간데없다. 누가 떨떠름한 눈빛으로 ‘그래도 이러면 안 되잖아요’라는 신호를 보내도 답은 간단명료하다. “그래도 된다.” ‘스트리트 오브 필라델피아’는 법정 밖에서 거적때기가 된 사람의 노래다. 그 거리에서 열정, 희망, 기쁨을 찾는 건 기만이다. 자신의 혈액이 검은 빗물처럼 흐르는 느낌을 아는 사람은 천사가 자신을 맞이할 거라는 기대가 없다. 그리고 이제 사라질 운명 앞에서 우리에게 묻는다. ‘무정한 입맞춤’(faithless kiss)이라도 좋으니 제발 자신을 감싸안아 달라고. 나는 이 솔직함이 너무 좋다. 나의 존엄성을 지켜주지 않은 사회에 책임을 묻는 저 뻔뻔함, 이건 우리의 미래를 행복하게 하는 철학이다. 어설픈 희망에 집착하여 몇 명 ‘더’ 행복해지자는 주술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구체적인 절망을 파괴하기 위해 객관적인 노력을 하는 사회에서 ‘나도’ 행복해지는 건 당연하다. 이를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현실 직시다. 가끔,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몽롱한 정신에 빠져들 때마다 나는 이 노래를 듣는다. 그 덕에 ‘읽을수록 우울해지는 책’을 계속 쓰고 있다. 나는 상처 받았고 내가 무엇을 느끼는지도 말할 수 없네. 내 자신조차 알아볼 수 없는 걸. 창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아도 내 원래 얼굴이 기억조차 나질 않아. 오 형제여, 나를 버리고 떠날 건가. 이 필라델피아 거리에서.
- 내 인생의 노래
- [표지이야기]아직도 시민의 생명은 존엄하지 않다(2017. 01. 10 14:24)
- 2017. 01. 10 14:24 사회
- ㆍ‘세월호 1000일’ 맞아 생명 지키는 의무 다하지 못하는 정부와 기업에 확실한 책임 물어야 2016년 5월 28일, 구의역에서 한 노동자가 숨졌다. 나이는 열아홉 살, 세월호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과 같은 나이였다. 공고를 다니다 서울메트로 하청업체에서 현장실습을 하고 졸업과 동시에 그 하청업체에 정식 입사한 그 노동자는 스크린도어를 홀로 수리하다 달려오는 열차에 치여 숨졌다. 그 노동자는 죽어가는 순간 무엇을 생각했을까? 꿈도 많았고 의지도 굳세어서 매달 100만원씩 저축을 하던 이 젊은 노동자의 생명은 그렇게 쉽게 스러져갈 것이 아니었다. 지금도 죽지 않아도 될 생명이 한 해에 2400명이나 사라진다. 열심히 일만 해왔던 이들이 일터에서 죽어간다. 아직도 노동자의 생명은 존엄하지 않다. 생명과 안전을 자신의 역할로 여기지 않는 정부 그 생명이 존엄함을 인정받은 것은 시민들의 눈물이 땅을 적셨을 때였다. 시민들은 구의역 스크린도어에 국화꽃을 바치고 포스트잇을 붙였다.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했다. 사람의 생명이 기업의 이윤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 눈물과 공감 앞에서 ‘작업자 과실’이라던 서울메트로의 주장은 힘을 잃었다. 서울메트로는 결국 유가족에게 사과하고 진상조사를 약속했다. 진상조사 결과 생명·안전업무를 무분별하게 외주화했고, 같은 사고가 두 번이나 있었는데도 제대로 대책을 마련하지 않은 것이 문제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결국 서울시는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는 노동자들 및 다른 안전업무 노동자들을 무기계약으로 전환시켰다. 많은 이들이 청년의 영전에 국화꽃을 바치고 포스트잇으로 자신의 뜻을 전한 이유는 무엇일까? 왜 시민들은 이 죽음을 자신의 고통으로 여겼을까? 이 청년의 모습 속에서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노동자의 생명을 우습게 여기는 사회에서 아등바등 살지만, 안전장치 하나 없는 위험한 일터로 내몰리고, 운이 나빠 다치거나 죽으면 모두 개인의 책임이 되고, 결국 최선을 다한 나의 노동이 죽음으로 끝나는 게 나의 삶일 수도 있다는 자각이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시민들은 ‘작업자 과실’이라는 서울메트로의 주장을 거부하고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이야기하며 ‘가만히 있지 않았던 것’이다. 지난해 5월 스크린어 사고가 발생한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 9-4 승강장에 추모 쪽지와 국화꽃이 매달려 있다. 이곳에서 작업하다 사망한 19세 비정규직 청년을 추모하는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 김창길 기자 ‘가만히 있지 않음’은 또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이 청년을 위해 흘린 눈물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하루에 7명씩 죽어나가는 산재는 흔하디흔한 것이 되었지만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죽음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정말 죽을 수밖에 없는 죽음이었을까 하고 말이다. 그것은 세월호 참사로부터 시작된 질문이다. 누구라도 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자각, 죄 없는 이들이 돈만 생각하는 기업과 정부 때문에 죽음에 내몰릴 수 있다는 자각, 사람이 죽는 것이 운이 나빠서가 아니라 정치적 선택의 결과물일 수도 있다는 자각이 세월호 참사로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 구해야 했던 의무를 가진 자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국민의 죽음을 방기하는 현실을 이대로 둘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의 의식은 바뀌는데 정부는 변하지 않았다. 진실을 가로막기 위해 특조위를 해산하고, 언론을 통제하며, 법원에까지 압력을 행사한 이 정부는 세월호 참사 1000일이 다 되도록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사람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후안무치함은 이 정권의 정책을 가로지르는 정서이며, 책임자들에게 각인된 행동지침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것을 정상적인 업무라고 주장할 수 있는 뻔뻔함은 이 정부 책임자들의 머릿속에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이 정부의 의무라는 인식이 아예 없음을 보여준다.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을 정부의 역할로 생각하지 않으니, 공공기관인 코레일도 승객의 생명을 우습게 여긴다. 2015년 대법원은 KTX 승무원들이 낸 근로자 지위 확인소송에서 승무원들은 코레일의 직원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KTX 승무원들이 안전업무를 하지 않는다’는 코레일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1000명이 타고 있는 고속열차의 승무원이 안전업무를 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안전교육도 받지 않고 응급처치도 할 수 없다면, 도대체 승객의 안전은 누가 보장하는가. 철도공사는 승무원을 비정규직으로 계속 사용하기 위해 이런 억지를 부렸다. 승객들의 생명과 노동자의 권리는 철도공사의 이윤논리 뒤로 밀렸다. 안전에 대한 정부의 관리·감독은 늘 허술하다. 2016년 1월 삼성전자의 휴대전화 부품을 만들던 20대 파견노동자 5명이 메탄올에 중독돼 이 가운데 4명이 실명했다. 노동건강단체들이 또 다른 피해자가 있는지 확인하라고 강력하게 주장하자 고용노동부는 전수조사를 하고는 ‘추가 피해자는 없다’고 확인했다. 그러나 이러한 고용노동부의 주장이 무색하게 그해 10월에 2명의 추가 피해가 확인됐다. 이미 고용노동부가 전수조사를 했다던 사업장 노동자들이었다. 고용노동부가 제대로 관리·감독을 했다면 막을 수 있었을 사고였지만, 고용노동부의 허술한 감독은 20대 노동자들의 소중한 빛을 빼앗아갔다. 삼성전자 휴대전화 부품 생산공장에서 일하다 메탄올 중독으로 실명한 파견 노동자들이 지난해 10월 국회에서 산재 신청 기자회견을 열었다. 확인된 실명 피해자만 현재까지 6명이다. / 이준헌 기자 정부는 안전과 생명을 돈벌이 대상으로 만들었다.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이후 정부가 내놓은 대책 중 가장 문제가 된 것이 ‘안전산업 발전대책’이었다. ‘안전산업 박람회’를 하고 ‘안전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펀드를 조성하고, 안전상품의 해외진출을 돕는 내용이다. 이때 안전산업의 사례로 든 것이 ‘의료민영화’인 원격의료산업이다. 생명과 안전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심지어 안전을 파괴하며 돈벌이의 수단으로 만드는 것이다. 정부의 인식이 이 수준이니 중대재해가 발생해도 처벌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난 6일 수백명의 사상자를 낸 ‘가습기 살균제 참사’ 제조·판매 책임자들은 최고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고, 존 리 전 대표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피해자 가족들은 ‘이 나라에 정의가 있느냐’고 울부짖었다. 노동자의 목숨값으로 이윤을 더하는 기업들 정부가 변하지 않으니 기업들도 변하지 않는다. 기업들은 안전을 ‘비용’으로 여겨 아끼려고만 하는데, 가장 많이 활용하는 것이 ‘외주화’다. 2015년 30대 기업 산재 사망 노동자의 95%가 하청노동자다. 경주 지진으로 KTX가 연착했을 때 선로를 유지·보수하던 하청노동자들은 사고를 피하기 위해 자갈이 든 손수레를 밀어넘기고 열차에 치여 숨졌다. 이 노동자들은 열차 연착 정보를 알지 못했다. 현대중공업과 현대제철 하청노동자들도 한 해 10명 가까이 떨어져 죽고, 압착으로 죽고, 지게차에 치여 죽는다. 핵발전소 하청 정비노동자의 피폭선량은 정규직의 18.9배이다. 기업들이 절감한 ‘비용’은 노동자들의 목숨값이다. 노동자들에게 권한이 없으면 위험은 더 커진다. 경주 강진이 발생했을 때 고용노동부는 경주 인근 사업장에 작업 중지를 지시하지 않았다. 그러니 기업들은 노동자들을 계속 작업시켰다. 현대자동차만이 노조의 요청으로 긴급하게 작업을 중단했다. 만약 이 지진으로 건물이 무너졌다면 노동자들이 가장 많이 사망했을 것이다. 2012년 구미에서 불산이 누출됐을 때에도 인접 산업단지 노동자들은 가장 늦게 대피통보를 받았고, 지난해 세종의 한 렌즈회사에서 유해물질이 누출됐을 때에도 노동자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2시간이 넘도록 작업을 계속해야만 했다. 위험을 알고 대응할 권리가 노동자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노동자들을 위험으로 내몰고, 죽거나 다치는 책임을 노동자들에게 떠넘긴다. 삼성반도체는 200명 가까운 노동자들이 직업병으로 고통을 당하거나 죽었는데도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았다. 피해소송 증거채택을 위해 자료제출을 요구했으나 ‘영업비밀’이라면서 자료를 공개하지 않았다. 2013년 삼성공장 불산누출 사고 때도 당국에 신고하지 않고 은폐를 시도했다. 이때도 삼성반도체 공장 안전보건 종합진단 보고서는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공개되지 않았다. 유성기업에서는 한 노동자가 민주노조를 탈퇴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했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노조 탄압을 기획한 원청 현대자동차도, 부품업체인 유성기업도 모두 사과 한마디 하지 않고 책임을 회피한다. 기업이 아직도 노동자의 죽음을 개인 책임으로 떠넘긴다. 2015년 말 현대건설의 대구 현장에 배치된 안전간판에는 ‘안전수칙을 지킵시다. 사고가 나면 당신의 부인 옆에 다른 남자가 자고 있고, 그 놈이 아이를 두드려 패며, 당신의 사고보상금을 없애는 꼴을 보게 될 것입니다’라고 돼 있었다. 현대건설은 노동자들이 안전모를 착용하지 않았다거나 산재를 요구했다는 이유로 블랙리스트를 작성했으며, 지난 10년간 무려 110명의 노동자가 사망한 최악의 살인기업이다. 최저낙찰제로 하청에 재하청을 반복해서 위험을 만들어놓고는 산재 책임을 노동자에게 떠넘기며, 노동자 가족에 대한 폄훼로 일관하고 있다. 기업들이 생명을 존중하도록 만드는 것은 법적·사회적 통제뿐이다. 지난해 4월 28일 '세계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을 맞아 노동자들이 산업재해 희생자의 영정을 들고 거리행진을 했다. / 서성일 기자 인간의 존엄과 생명이 가장 중요한 가치가 돼야 박근혜의 탄핵 사유에 ‘생명권 침해’가 포함돼 있다. ‘생명권’이 탄핵 사유로 인용되는 것은 정부가 시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존재할 가치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박근혜가 꼭 탄핵돼야 하는 이유다. 그동안 기업의 이윤논리 아래에서 ‘생명권’은 중요한 권리로 제기되지 못했다. 하지만 세월호 1000일을 맞은 지금, 인간의 존엄과 생명이 사회의 가장 중요한 가치가 돼야 한다는 깨달음이 점점 커지고 있다. 이 가치 위에 서 있을 때 안전을 ‘비용’으로 생각하지 않게 되고, 생명을 지키는 의무를 다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처벌방안이 제대로 마련될 수 있다. 생명을 지키는 것이 우리 사회의 중요한 가치로 인정되기 위해서라도 생명·안전업무를 하는 노동자들에게 권리가 부여돼야 한다. 비정규직인 노동자들이 승객들의 안전을 제대로 담보할 수 없고, 짧게 일하는 노동자들이 시민의 안전을 위한 훈련을 할 수는 없다. 노동자들에게 권리가 부여돼야 위험에 대해 사회에 알리고, 그 위험을 예방하기 위해 기업에 문제제기를 할 수 있다. 또한 생명과 안전을 우리 사회의 가치로 만들기 위해 ‘위험의 외주화’를 중단시켜야 하고, 안전장치를 제대로 하지 않는 기업을 강하게 처벌해야 한다. 노동자의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 한 기업의 이윤도 없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이제 노동자와 시민은 변화하고 있다. 위험에 처했을 때 징계와 손배를 무릅쓰고 작업중지권을 행사한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있다.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지진대응 매뉴얼을 만들어서 배포하고 있다. 구의역에서 홀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사망한 노동자를 기억하며, 노동자와 시민의 안전할 권리를 위해 노조와 회사, 서울시와 시민들이 지하철 안전을 논의하는 협의체를 구성하도록 요구하기도 한다. 지역사회와 힘을 합해서 ‘유해화학물질에 대한 알권리 조례’를 제정하기도 한다. 전국 곳곳에서 알권리 조례가 만들어지고 이것이 ‘알권리법 제정운동’으로 나아가고 있다. 또한 노동자와 시민을 위험에 빠뜨린 기업과 최고책임자를 처벌하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에 힘을 모으기도 한다. 세월호 1000일이 돼 가도 지금 정부와 기업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이런 정부와 기업을 시민들이 제대로 통제하기 위해서는 힘을 가져야 한다. 기업에 유해위험정보를 내놓으라고 요구해야 하고, 지역사회가 함께 안전 거버넌스를 구축해야 한다. 세월호의 진실이 밝혀지더라도 그것에서 그치지 않고 생명의 존엄성이 보장되는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나가기 위해서 지역마다 기업과 지역 행정기관을 통제하는 안전지킴이를 구성해야 한다. 촛불광장에서 우리가 정치의 주체로 서 나가듯이 우리의 일상에서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주체로서 정부와 기업의 책임을 묻고 확실하게 통제하겠다는 선언을 해야 할 때다.
- 표지 이야기
레이디경향(총 1 건 검색)
- [Well-dying]존엄사에 대한 궁금증 AtoZ
- 2009. 08. 05 16:55 화제
- 지난 6월 23일 대법원의 존엄사 허용 결정에 따라 김 할머니의 무의미한 연명치료가 중단됐다. 이에 따라 생존의 희망 없이 고통받아오던 환자와 가족들의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 요구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대상 및 연명치료 범위 규정을 비롯해 법제화 과정에서 사회적 합의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이어지며 논란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5월 대법원은 존엄사가 오남용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허용 기준을 제시했다.존엄사 3단계 가이드라인 1단계 뇌사 환자와 장기가 손상돼 죽음이 임박한 상태의 환자 2단계 식물인간 상태로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살아가고 있는 환자 3단계 식물인간 상태이지만 호흡이 스스로 가능한 환자 환자가 ‘회복 불가능한 사망의 단계’에 진입한 경우에만 존엄사를 허용할 수 있다. (이 같은 판단은 전문의들로 구성된 위원회의 판단에 따라 매우 엄격한 요건을 충족한 경우에만 허용).회복 불가능한 사망 단계 진입 1. 의식의 회복 가능성이 없을 것. 2. 생명과 관련된 중요한 생체 기능을 상실한 상태에서 회복할 수 없을 것. 3. 환자의 신체 상태에 비춰 짧은 시간 내에 사망에 이를 수 있음이 명백할 것.앞의 3가지 조건에 모두 해당해야 ‘회복 불가능한 사망 단계’라고 규정할 수 없다. 대법원은 김 할머니 존엄사 시행 판결 당시 앞의 두 조건에 대해서는 대체로 공감했으나 마지막 조건인 짧은 시간 내에 사망에 이를 수 있음이 명백할 것에는 심한 의견 차이를 보였다. 정신과 뇌의 기능은 의학적으로만 판단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어 곧 사망할 것이라는 판단 아래 인공호흡기를 제거했던 환자가 수년간 더 산 사례가 있다는 것. 실제로 미국에서는 1976년 혼수상태에 빠진 여성 환자 카렌이 재판을 통해 인공호흡기를 떼어냈으나 10년이 넘은 1986년에야 숨진 사례가 있다. 이런 의견은 대법원 판결에서 소수에 그쳤지만 김 할머니의 인공호흡기를 제거한 뒤 다시 주목받게 됐다. 존엄사 허용 조치가 논란인 가운데 서울대병원은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진료권고안’을 의결, 최종 확정했다. 권고안에 따르면 연명치료 중단은 환자의 질환 상태, 환자 본인의 의사결정능력 등을 고려해 결정된다. 병원은 연명치료 중단이 가능한 상황을 사전의료지시서에 근거해 진료현장에서 결정이 가능한 상황, 환자의 추정적 의사를 판단해 진료현장에서 결정이 가능한 상황, 병원 의료윤리위원회의 의학적 판단에 따라야 하는 경우, 법원의 결정에 따라야 하는 경우 등으로 세분화했다. 특히 환자의 평소 가치관이나 신념 등에 비추어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것이 최선의 이익에 부합된다고 판단되고, 환자에게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연명치료 중단을 희망할 것이라고 여겨지는 경우엔 환자의 대리인이 사전의료지시서에 서명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사전의료지시서 사전의료지시서란 암의 진행 및 합병증으로 인해 향후 생명 연장과 증상 완화를 위해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혈액 투석 치료를 받을 수 있음을 말기 암 환자에게 사전에 알려주고, 앞으로 행해질 치료를 받을지 여부를 미리 의사 결정하는 서식이다. 이 지시서 또한 유언장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증인의 성명 혹은 공증을 받아야 효력이 발생한다. 해외에서는 존엄사가 어떻게 시행되고 있을까 미국 의사의 도움을 받아 죽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는 ‘자발적 존엄사’ 논란을 불러온 캐런 앤 퀸런 사건을 계기로 존엄사를 허용하는 추세다. 1975년 퀸런은 친구의 생일파티에서 술을 마시고 혼수상태에 빠진 뒤 6개월간 뉴저지주 샌클라라 병원에 입원해 산소호흡기로 연명하는 처지에 놓였다. 의사가 소생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내리자 그녀의 부모는 산소호흡기를 제거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의사는 산소호흡기를 제거할 권한이 없다며 거부했다. 퀸런의 부모는 법정에 소송을 제기했고 지방법원은 산소호흡기 제거가 ‘살인행위’에 해당한다며 기각했으나 뉴저지주 대법원이 의사와 병원 당국의 동의를 전제로 산소호흡기 제거를 허락했다.일본 안락사가 형법상 살인이라고 규정하고 있으나 존엄사와 소극적 안락사는 대체로 용인하는 분위기다. 일본 도카이대학 사건에서 다발성 골수종으로 입원, 혼수상태가 지속된 환자에 대해 가족들이 강력한 치료 중단을 요청하자 의사가 염화칼륨 등을 주사, 사망케 해 1995년 법원으로부터 형법상 살인죄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2년의 유죄판결을 받았다. 네덜란드 이미 1973년부터 ‘편안하게 생을 마감할 수 있는 권리를 달라는 운동’이 시작되면서 세계에서 처음으로 안락사가 합법화되었다. 그러나 안락사를 ‘환자의 요청에 의해 제3자가 의도적으로 생명을 박탈하는 것’으로 정의함으로써 혼수상태나 뇌사상태 등 육체적·정신적으로 무능력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경우는 안락사에 해당하지 않는다. 영국·프랑스 영국은 3년 이상 식물인간일 경우 판례와 사회적 분위기로 존엄사를 용인하고 프랑스도 제한적으로 존엄사를 허용하고 있다. 하지만 안락사는 여전히 불법이고 ‘죽을 권리’에 대한 논란은 여전하다. 스위스 극심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의 경우도 육체적 질병과 마찬가지로 의사의 도움을 받아 안락사를 선택할 수 있다는 판결을 내려 정신질환자에 대한 안락사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불치병 등으로 고통받는 외국인들이 자살을 위한 도움을 받기 위해 스위스를 찾고 있다. 죽음의 관광으로 인해 스위스의 대외 이미지가 점차 나빠지자 스위스 연방정부는 이에 대한 규제를 추진하고 있는 상태다.독일 존엄사와 안락사를 폭넓게 인정하면서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중시한다. 1981년 일어난 ‘비티히 사건’의 경우 남편을 먼저 잃은 76세의 할머니는 심한 동맥경화와 관절염으로 고생을 하면서 가정의에게 죽고 싶다는 표현을 여러 차례 했다. 의사가 그해 11월 28일 할머니 집을 방문했을 때 그녀는 다량의 진통제와 수면제를 복용한 채 침대에 누워 있었고 손에는 의사에게 쓴 ‘병원으로 옮기지 말아달라’는 편지를 쥐고 있었다. 의사는 맥박과 호흡을 점검한 결과 환자를 구조하더라도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릴 것이 명백하다고 판단해 환자의 죽음이 확인될 때까지 그냥 지켜봤다. 법원은 이 사건의 경우 “피고인은 환자가 혐오하는 집중치료를 통해 환자의 생명을 구하더라도 회복불능의 중대한 손상이 필연적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이런 한계상황에서 생명보호 의무와 자기결정권 존중 사이에서 갈등할 때 환자의 인격을 존중한 의사로서의 양심적인 결단을 법적으로 옹호하지 않을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브라질 대체적으로 존엄사를 허용하는 분위기의 나라와는 달리 가톨릭, 법률단체를 중심으로 강력한 사회적 저항에 부딪히고 있어 존엄사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기획 / 노정연 기자 ■글 / 김이슬(대학생 인턴 기자) ■사진 / 이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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