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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총 139 건 검색)

“김건희 여사 ‘종묘 휴관일 차담회’는 국가유산 사적 사용 맞다”
“김건희 여사 ‘종묘 휴관일 차담회’는 국가유산 사적 사용 맞다”
2024. 12. 20 19:47문화
... 임 의원의 재차 추궁하자 결국 “사적 사용이 맞다”고 인정했다. 논란은 지난 9월 3일 서울 종묘 망묘루에서 김 여사가 외부인들과 차담회를 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불거졌다. 일반인은 관람할 수 없는...
일제가 갈라놓았던 창경궁과 종묘, 이젠 서로 오가며 관람한다
일제가 갈라놓았던 창경궁과 종묘, 이젠 서로 오가며 관람한다
2024. 10. 08 14:43문화
... 했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함께 경복궁의 동쪽에 있는 궁궐이라는 뜻에서 동궐로 불렸다. 창경궁과 종묘가 연결돼 오갈 수 있게 됐다. 사진은 창경궁 전경(왼쪽)과 종묘의 정전(국보). 국가유산청 제공...
종묘창경궁율곡로연결
[포토뉴스] 종묘 망묘루 특별개방 기념 ‘인증샷 찰칵’
[포토뉴스] 종묘 망묘루 특별개방 기념 ‘인증샷 찰칵’
2024. 05. 16 21:26사회
... 특별개방 행사가 열린 서울 종묘의 망묘루에서 시민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망묘루는 조선시대 종묘 관리를 담당한 관서인 종묘서가 있던 건물이다. 6월30일까지 내부를 개방한다.
종묘의 망묘루, 한시적 최초 개방…향대청 전시관도 재개관
종묘의 망묘루, 한시적 최초 개방…향대청 전시관도 재개관
2024. 05. 16 16:56문화
... 모셔 보관하고, 제례를 진행하는 제관들이 대기하던 곳이다. 망묘루는 종묘 관리를 담당한 관서인 종묘서(宗廟署)가 있던 건물이다. 제례를 지내러 온 국왕이 이곳에서 선왕을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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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경향(총 4 건 검색)

[간밤TV]‘선녀들’ 전광렬, 사극으로 마스터한 ‘종묘와 동의보감’ 역사 클래스
[간밤TV]‘선녀들’ 전광렬, 사극으로 마스터한 ‘종묘와 동의보감’ 역사 클래스
2020. 06. 08 08:27 연예
‘선을 넘는 녀석들’. MBC 제공‘선을 넘는 녀석들’ 허준 전광렬이 진짜 허준을 만나는 역사 탐사가 펼쳐졌다. 6월 7일(일) 방송된 MBC ‘선을 넘는 녀석들-리턴즈’ 41회에서는 유네스코 가입 70주년을 맞아, 세계가 인정한 한국의 자랑스러운 유산들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중에서도 ‘선녀들’은 조선의 역대 왕들이 잠들어 있는 ‘종묘’와 허준이 쓴 의학서 ‘동의보감’을 탐사하며, 이에 얽힌 다양한 역사 이야기들을 대방출했다. 특히 이날 탐사에는 ‘동의보감’과 관련된 스페셜 게스트 ‘영원한 허준’ 전광렬이 함께해 재미를 높였다는 반응. 전광렬이 출연한 드라마 ‘허준’은 당시 최고 시청률 64.8%를 기록한 ‘국민 드라마’로, 이라크에도 수출돼 최고 시청률 80%를 기록하는 등 큰 인기를 누렸다. 전광렬은 20년 전 허준 시절을 소환,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는 허준의 대사, 지식들을 풀어내며 활약을 펼쳤다. 이날 ‘선녀들’이 첫 번째로 간 곳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종묘’였다. 종묘는 조선의 역대 왕, 왕비들의 신주를 모신 곳. 설민석은 중건이 된 경복궁과 달리, 종묘는 완전성, 진정성이 훼손되지 않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종묘에서는 매년 조선시대 때와 똑같이 제례를 올리는 등 조선왕조 500년 역사를 그대로 지켜나가고 있다고. 뿐만 아니라 선조가 임진왜란 당시 피난을 갈 때 가장 먼저 챙긴 것이 선왕들의 신주였을 정도로, 종묘는 조선왕조에 큰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종묘에 모든 왕들의 신주를 모실 수 있던 것은 아니라고. 종묘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연산군과 광해군의 뒷이야기는 흥미로움을 더했다. 종묘에 이어 ‘선녀들’은 의학서적 최초로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허준의 ‘동의보감’ 탐사를 시작했다. 무엇보다 ‘허준 박물관’에서 진짜 허준과 상봉한 전광렬의 모습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전광렬은 허준의 초상화를 보며 “허준 선생님, 잘 계셨습니까? 제가 왔습니다”라고 인사를 건넸고, ‘선녀들’은 묘하게 닮은 두 허준의 얼굴을 비교하며 웃음을 안겼다. 이러한 허준 전광렬과 함께하는 역사 속 허준의 이야기는 흥미진진했다. ‘동의보감’의 저자이자 조선 최고 명의로 알려진 허준은 역사 속 실존 인물이지만, 30세 이전의 역사 기록은 없어 미스터리함을 남겼다. ‘선녀들’은 유희춘의 ‘미암일기’에 최초로 언급된 허준의 기록을 통해 허준이 파격적인 인사로 내의원으로 들어오게 된 배경 등을 추리했다. 또한 천연두에 걸린 어린 광해군을 돼지 꼬리 피와 약재를 사용해 치료한 허준의 이야기와 이로 인해 초고속 승진을 한 출세 배경, 임진왜란 때 선조의 주치의로 활약한 허준의 인생역전 스토리를 이어나갔다. 전광렬은 ‘우리 땅에서 나는 약재를 우리말로 써라’라는 선조의 명으로 동의보감을 쓰게 된 허준의 이야기를 듣고 “그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말하며, 의학의 대중화에 힘쓴 허준과 동의보감의 의미를 강조해 눈길을 끌었다. ‘영원한 허준’ 전광렬이 이야기해 더 의미 있고 재밌었던 탐사였다는 반응이다. 한편 다음 주 예고 영상에서는 방송 최초로 세계기록유산 ‘동의보감’ 초판을 접하는 전광렬과 ‘선녀들’의 모습이 예고됐다. 이와 함께 6.25 전쟁 70주년을 맞아 서울 곳곳에 숨겨진 6.25 전쟁의 상흔들을 탐사하는 ‘선녀들’과 배우 성유리의 모습이 예고돼 뜨거운 관심을 모으고 있다. MBC ‘선을 넘는 녀석들-리턴즈’는 매주 일요일 밤 9시 10분 방송된다.
간밤TV
개천절, 월요일이지만…“고궁·종묘·조선왕릉 개방해요”
개천절, 월요일이지만…“고궁·종묘·조선왕릉 개방해요”
2016. 10. 02 15:58 생활
문화재청은 개천절인 10월 3일에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조선왕릉, 아산 현충사, 금산 칠백의총, 남원 만인의총을 개방한다고 28일 밝혔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이들 유적은 월요일이 휴무일이지만, 국경일인 개천절을 맞아 특별히 관람이 허용된다. 휴무일이 화요일인 경복궁과 종묘도 정상 운영된다. 사진|문화재청 제공 문화재청 관계자는 “단군이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을 건국한 것을 기념하는 날인 개천절에 우리 궁과 왕릉을 방문해 문화유산을 경험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개천절
종묘공원은 ‘성병 사각지대’
2009. 09. 28 21:21 생활
ㆍ조선족까지 성매매 가세…노인 100명중 8명꼴 감염 종묘공원이 어르신들의 성 해방구로 등장하면서 성병관리의 사각지대에 상당부분 놓인 것으로 드러났다. 28일 서울 혜화경찰서는 종묘공원을 이용하는 노인 100명 가운데 8명꼴로 성병에 걸린 것으로 판명났다고 밝혔다. 혜화경찰서와 종로보건소가 지난달 25일 종묘공원에서 ‘기초질서 지키기’ 캠페인을 벌이며 노인 320명을 대상으로 건강검진을 펼친 결과다. 경찰은 “60대 노인 한 명은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에 감염된 상태였으며 다른 27명도 임질 등 성병을 앓고 있었다”고 전했다. 보건소 관계자는 “이들은 대부분 새로 병을 얻은 것이 아니라 예전부터 보건소 측에서 관리해 오던 환자들”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경찰 관계자는 “종묘공원에서 노인들을 대상으로 소위 ‘박카스 아줌마’ 등이 무분별하게 성매매에 나서면서 성병문제가 날로 심각해지는 상황이다”면서 “경찰은 성병예방 캠페인 등 지속적인 홍보활동과 단속을 통해 성매매 근절에 힘쓸 것”이라고 밝혔다. 경찰과 공원관리사무소 등에 따르면 노인들이 날씨 좋은 날에는 2000여명까지 모여드는 종묘공원 일대에서 성매매에 나서는 여성은 200명 내외로 추산되고 있다. 연령대도 젊은 여성부터 할머니까지 다양하며 ‘박카스 아줌마’뿐 아니라 중국 동포여성, 노숙인 등까지 가세하고 있다.
종묘 지키려면 종묘를 훼손하라? 문화재청, 5대 궁궐 소방로 마련 고심
종묘 지키려면 종묘를 훼손하라? 문화재청, 5대 궁궐 소방로 마련 고심
2008. 02. 29 21:46 생활
ㆍ담장에 구멍내야 진화 가능 “소방로 확보는 꼭 필요하다.” “문화재를 훼손할 수는 없다.” 숭례문 화재사고로 문화재 관리에 비상이 걸리면서 종묘·경복궁·창경궁 등 다른 문화재를 화마로부터 구하는 방법을 놓고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숭례문 방화용의자 최모씨는 경찰조사에서 “당초 종묘를 범행 대상으로 삼았으나 경비가 삼엄해 포기하고 숭례문을 택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종묘와 경복궁 근정전, 창경궁 인정전 등이 숭례문에 비해 더욱 큰 화재 위험에 노출돼 있다. 이들 문화재는 소방차가 접근할 수 없는 구조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종묘는 사방이 문화재인 데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일부인 담장으로 둘러쳐져 있다. 이곳에서 불이 날 경우 현재로서는 소방차가 진입할 도로를 확보하기 위해 상당한 시간을 허비할 수밖에 없다. 소방로 진입시설이 없는 것은 경복궁·창덕궁·창경궁·덕수궁 등도 마찬가지다. 이로 인해 만약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화재로부터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문화재의 일부를 훼손하더라도 소방로를 확보하는 일이 시급하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그러나 만약을 위해 멀쩡한 문화재를 일부러 훼손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문화재청은 현재 소방방재청과 함께 종묘를 포함한 5대 궁궐 건축물의 소방로 확보와 제반 방재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그중 종묘의 경우 담장 일부분을 훼손해서라도 소방로를 마련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윤대헌기자 〉

주간경향(총 1 건 검색)

[길에서 만난 사람]민족문화의 신성한 성지 종묘(2014. 02. 18 16:50)
2014. 02. 18 16:50 문화/과학
조선왕조 오백년 역사의 뿌리이자 정신적 근간이 바로 돌아간 왕들의 신위를 모신 종묘이다. 음력 정월 보름 즈음에 연 이틀 남짓 푸지게 눈발이 날렸다. 우리 민족에게 정월의 눈은 풍요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눈이 내린 날, 조선 500년 유교 역사의 정점이자 민족의 신성한 공간이라 일컬어지는 종묘를 찾았다. 우리 민족에게 음력 정월은 신성한 시간으로 존재한다. 특히 정월 초하루부터 보름까지의 시기는 신적 영역에 대한 존엄과 성스러움으로 각별한 시한을 의미했다.  한 해가 시작되는 뜻에서 모든 일에 조심스럽게 첫발을 내디딤이다. 이러한 신성의 의미는 민중의 민심과 정서에도 깊이 자리해 민중은 그저 아무 탈 없이 한 해를 지낼 수 있게 해주기를 소망했다. 때문에 정월 내내 몸을 정결히 하고 정신을 맑게 하였다. 특히 기운이 꽉 차는 정월 보름이면 달맞이를 하며 부럼을 깨기도 하고, 풍년을 기원하며 지신밟기를 하기도 했다.  소복하게 눈이 내린 종묘. 또 동리마다 서낭당에 머리를 조아리고, 한 해 동안의 무사를 기원하며 정성을 다했다. 우리 민족의 심성은 늘 그랬다. 하늘과 바다와 땅에 빌고, 살아 있는 것과 돌아간 역사의 시간을 가벼이 여기지 않고 마음을 기원했다. 살아가는 자와 돌아간 자가 만나는 공간 국가를 통치하던 위정자들 역시 다르지 않았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의 뿌리이자 정신적 근간이 바로 돌아간 왕들의 신위를 모신 종묘이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제일 먼저 세운 것이 바로 종묘(1395년)다.  조선을 개국하며 북한산을 조산으로 삼아 인왕산과 낙산을 좌우로 위시하여, 오른편에는 사직단을, 왼쪽에는 종묘를 먼저 세우고, 북악산 아래 경복궁을 비롯해 창덕궁·경희궁·창경궁·덕수궁 등 궁궐을 지었다. 유교의 예법에 따라 국가의 도읍지에 반드시 세 곳의 공간을 마련해야 했다. 세 곳이란 왕이 머무르는 궁궐과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는 종묘, 그리고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을 일컫는다.  이는 중국 주나라의 도성제도에 근거하고 있다. ‘주례’(周禮)에 ‘종묘는 도성 내 왼쪽인 동쪽, 사직은 오른쪽인 서쪽에 둔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태조는 지금의 서울 종로의 도심 한가운데인 훈정동에 종묘를 모신다. 사람 키보다 두어 발치는 높게 둘러싸인 담장 위로 미처 떠나지 못한 구름이 머물러 있다.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것만큼 지난 199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후, 종묘를 선선히 찾아가는 것은 쉽지 않게 되었다. 입장 시간을 기다려 한 시간 남짓 해설사를 따라야만 종묘의 관람이 가능하다. “태조 3년에 착공해 이듬해 완공 당시에는 정전(正殿)과 공신당(功臣堂) 등만 있어서 비교적 작은 규모였습니다. 이후 태조는 종묘 남쪽에 인공으로 산을 만들어 허한 곳을 보완했고, 이후 후대인 태종에 이르러서 별묘의 형식으로 영녕전을 짓고 공신당을 정전 담장 안 동쪽 계단 아래로 옮기는 등 종묘의 전체적인 기틀을 다지기도 했습니다. 또 150년이 지난 명종 때 대대적인 확장공사를 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광해군 즉위년(1608년)에 중건을 했습니다. 그 후 몇 차례 개수와 증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성지, 종묘 순례 종묘는 우리 역사의 뿌리인 정신문화의 중심이자 근본으로, 조선왕조의 역대 왕과 왕비, 추존왕 및 왕비, 조선시대 공신들의 신주와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조선왕조는 유교를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이념이자, 국가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기본 뿌리로 삼았다. 종묘는 시간제로 관람이 가능한데, 토요일에는 자유관람을 할 수 있다. 때문에 종묘는 국가의 존엄과 왕권 위에 자리하며 선대의 선험적 잣대, 후대에 대한 교훈적인 범주로 신성한 성역으로 존재했다. 때문에 조선의 왕들은 삼가 종묘사직에 고하지 않고서는 아무 일도 결정할 수 없었다. 이른바 종묘와 사직은 왕조의 권위를 튼튼히 뒷받침하는 정신적 지주였던 것이다. “종묘사직이란 말 자주 들어보셨지요? 선대왕의 신위를 모신 공간인 ‘종묘’와 토지의 신 ‘사(社)’와 곡식의 신 ‘직(稷)’에게 제사 지내는 ‘사직단’을 함께 부르는 말입니다. 왕의 정통성을 조상신과 자연신으로부터 부여받았기에 종묘와 사직단은 매우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유교를 기본 이념으로 삼았던 나라들은 대부분 종묘제도를 채택했는데, 지금까지 종묘에서 지내는 제사 의식을 이어오고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가 유일합니다. 때문에 유네스코는 종묘와 ‘종묘 제례’, ‘종묘 제례악’을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습니다.” 왕들의 영혼이 자리한 성역을 찾은 이들이 마치 옛 사람들처럼 정숙하고 고요하게 걸음을 옮긴다. 새하얗게 눈이 내린 신성의 공간은 고즈넉하지만 적막하지는 않다. 순례자를 맞이하는 널찍한 터에는 근엄하고 당당한 신성의 기운이 가득하다. 신성의 영역에서 들리는 소리는 순례자처럼 고요히 걷는 관람객들의 발자국 소리와 앞을 이끄는 해설사의 나지막한 목소리뿐이다. 어릴 적부터 친구인 (왼쪽부터)김지윤·이정향씨는 새해를 맞이하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종묘를 찾았다. “이곳 종묘는 본래 창덕궁, 창경궁과 한 영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조선총독부가 조선왕조의 맥을 끊기 위하여 궁궐과 종묘 사이에 큰 길을 내서 현재는 궁궐과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인들조차 종묘의 위엄에 감탄하며 감히 범접하지는 못했다고 전해집니다.” 정적에 감싸인 종묘의 모습은 신성함 그 자체로 위엄이 가득하다. 장엄함과 절제의 미를 동시에 갖추고 있는 것이다. 부지런한 채비로 나선 몇몇 관람객들이 부지런히 해설사의 뒤를 따른다. 종묘의 중심인 정전(正殿)과 영녕전(永寧殿)을 위시해 모든 건물은 고요한 경관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정전은 우리나라 목조건축물 중 가장 긴 건물로 맞배지붕을 올려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총 35칸의 규모에 19개의 방이 있는데, 그 안에 49위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왕과 왕비의 위패가 늘어나 정전 안에 다 모실 수 없게 되자, 영녕전 16개 방에 34신위를 모시었다. 종묘를 대표하는 건물인 정전은 조선시대 건축물 가운데 가장 정제되고 장엄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종묘는 화려하지 않으며 지극히 단순하고 절제돼 있다. 신문으로 들어서니 정전 앞 동서 109m, 남북 69m의 넓은 월대가 펼쳐진다. 제관들이 제사를 드릴 때 의식을 행하며 대기하는 공간이다. 월대의 중앙에는 신의 길인 신로가 상월대 아래까지 나 있다. 잠시 숙연한 기운이 감돈다. 특히 땅 끝까지 펼쳐지는 듯한 월대는 안정을, 무한히 반복되는 듯한 기둥의 배열은 세세연년 끊이지 않을 영속을 의미한다. 하늘과 땅, 생과 사가 상통하는 합일의 경지다. 수평으로 펼쳐진 지붕 위 푸른 하늘 위로 맑은 구름이 머무르는 순간, 일상적 삶의 흐름을 초월하여 돌아간 자와 살아가는 자 사이에 영적인 소통이 이루어지는 듯하다.
길에서 만난 사람

레이디경향(총 2 건 검색)

추석 연휴엔 궁 나들이, 4대 궁·종묘 무료 개방
추석 연휴엔 궁 나들이, 4대 궁·종묘 무료 개방
2023. 09. 20 06:48 레저/여행
창덕궁의 가을. 문화재청 제공 추석을 맞아 연휴 기간에 4대 고궁과 종묘, 조선왕릉이 무료 개방(창덕궁 후원 제외)된다. 문화재청은 28일부터 10월 3일까지 이어지는 연휴을 앞두고 경복궁·창덕궁·덕수궁·창경궁 등 4대 궁과 종묘, 조선왕릉을 무료로 개방한다고 19일 밝혔다. 종묘는 평소 예약제로 운영되지만, 이 기간에는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다. 조선시대 왕실 호위 문화를 보여주는 경복궁 수문장 교대 의식도 그대로 진행된다. 궁과 왕릉의 경우 매주 월요일이나 화요일에 휴관하나, 이번 연휴에는 모두 문을 연 뒤 4일에 휴관한다. 추석 연휴 전날인 27일부터 10월 31일까지는 ‘2023 가을 궁중문화축전’(10월 13~18일)의 대표 온라인 프로그램인 ‘모두의 풍속도’가 사전 운영된다. ‘모두의 풍속도’는 누리집(pungsokdo.com)에서 나만의 조선시대 캐릭터를 만드는 참여형 프로그램으로, 올해는 외국인을 위한 영문판도 처음 선보인다. 지역 곳곳의 문화기관에서도 추석을 맞아 다양한 체험·문화 행사가 열린다. 전북 전주 국립무형유산원은 30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활쏘기, 투호, 딱지 등 다양한 민속놀이를 경험할 수 있는 ‘무형유산 민속 놀이터’를 운영한다. 27일까지 예약하면 국가무형문화재 이수자와 함께 부채, 잔 받침 등도 만들 수 있다. 재료비를 포함한 참가비는 모두 무료다. 국립청주박물관은 28일에 상설전시관 앞마당에서 사물놀이, 서커스 공연을 선보인다. 국립대구박물관은 30일부터 10월 3일까지 활쏘기, 널뛰기, 윷놀이, 제기차기 등의 민속놀이 체험 공간을 운영한다.
노인위한 종묘공연 1주년…랩으로 찬불가 부르는 능인 스님
노인위한 종묘공연 1주년…랩으로 찬불가 부르는 능인 스님
2006. 11. 01 화제
태고종 종단에서 톡톡 튀는 스님으로 통하는 능인 스님. 랩과 디스코, 트로트로 찬불가를 부르는 독특한 포교 활동으로 세인의 관심을 끌고 있다. ‘행복사’라는 포교원을 열면서 시작한 종묘 공연이 벌써 1주년을 맞이했다. 힘닿는 데까지 공연을 계속할 것이라는 능인 스님의 꿈은 복지 사찰 건립이다. 가난한 동네에 자리한 ‘행복사’ 미아동은 두 개의 얼굴을 지녔다. 각양각색의 아파트가 길게 늘어선 도시를 상징하는 아파트 단지와 아파트 단지 내의 작은 길로 내려가 큰 길 하나를 건너면 숨 쉴 틈 없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낮은 담벼락의 궁핍한 집들이 모여 있는 동네가 나온다. 아직도 이런 집들이 있나 싶을 정도로 초라해 순간 움찔하지만, 이곳 역시 사람들이 모여서 그네들 삶을 사는 곳이다. ‘행복사’라는 정감 어린 이름의 포교원이 지난해 3월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행복사는 동네 분위기와 어울리게(?) 6~7평 정도로 작은 사찰이다. 별다른 시설 없이 작은 부엌과 화장실, 관음지장이 있는 법당이 전부다. 눈에 띄는 것은 포교원 한켠에 있는 키보드다. 사찰은 눈여겨보지 않으면 그냥 스쳐 지나갈 정도로 별다른 치장을 하지 않았다. 4~5개의 연등과 행복사라는 문패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여느 동네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인 줄 알았을 거다. 행복사를 운영하는 스님은 디스코와 랩, 트로트로 찬불가를 부르는 능인 스님(53, 속명 노신배)이다. 서울 둔촌동에 있는 백운사에서 나와서 미아동에 새롭게 터를 잡은 곳이다. 노래 공연, 위문 공연 등의 바쁜 일정 탓에 법회는 한 달에 두 번밖에 하지 못한다. 능인 스님은 여전히 노래 포교에 더 관심을 쏟고 있다. “행복사라는 이름은 전국에서 유일한 이름입니다. 종파가 다르건 종교가 다르건 목표는 사람들의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에게나 행복을 주는 사찰이라는 뜻으로 행복사라고 이름을 지었죠. 아직은 포교 활동을 활발하게 하지 않아서 교인은 별로 없어요. 60명 정도 되는데, 이곳 신도들도 가난한 사람이 많아서 서로 도와가면서 살고 있습니다.” 능인스님의 포교원 행복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에 마련되어 있다. 현재 신도는 약 60명으로 아직은 소규모로 운영된다.(사진 위) 종묘공원 공연에서 노래를 부르는 능인스님.능인 스님이 백운사를 나오게 된 것은 유명세 때문이었다. 능인 스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방송과 잡지기자들 때문에 눈치를 봐야 했고 사찰에서도 스님의 활동을 좋게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흔여섯 살에 출가해 한국불교금강선원에서 교육을 받은 뒤 스님이 되어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이 백운사였다. 그런 곳에서 나와야 했기에 마음과 몸이 힘들었지만 그때도 노래와 찬불가가 스님을 다잡아줬다. 그때의 어려움을 노래에 담아서 3집 앨범을 발표했다. 능인 스님은 포교원을 연 뒤 노래 포교를 더욱 열심히 했다. 앰프와 모니터도 주변의 도움으로 마련했고, 본격적인 노래 수업을 위해 키보드도 장만했다. 그동안 해보고 싶던 지하철 공연도 1년에 4번 정도 참여했다. 그리고 교도소 위문 공연, 산사음악회 등 도움 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갔다. 무엇보다 가장 공을 들인 것은 노인들이 많이 찾는 종묘에서 연 문화공연이다. 지난해 10월부터 시작했고, 지난 10월 15일 종묘 공연 1주년 기념공연을 열기도 했다. 스님은 이 공연에서 키보드를 직접 연주하면서 찬불가와 대중가요 10여 곡을 불렀다. 그리고 이 공연에 무료로 봉사활동을 하는 가수와 국악인 등의 연주와 노래로 3시간 공연을 무사히 끝마쳤다. “처음 시작할 때는 고생도 많았어요. 원래는 심장병 어린이 돕기 기금 마련 공연을 생각했어요. 그런데 구청에서 성복을 입고 기금 마련 공연을 하면 불법이라고 해서 공연을 못하게 해요. 구청 직원에게 공연을 통해 마련된 기금을 구청이 직접 관리하면 되지 않느냐고 해도 자신들은 기금을 관리하지 못한다고. 그래서 종묘공원에 있는 어르신들을 위해 공연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구청이 원하는 서류를 매달 제출한 뒤 공연을 하고 있어요.” 키보드를 치고 노래를 부를 때 가장 행복하다는 능인 스님.처음 종묘에서 공연할 때 황당한 경우도 많이 당했다. ‘불당에서 목탁이나 치지 왜 이런 곳에 와서 노래를 부르느냐?’ ‘처음 이렇게 시작한 사람들도 나중에는 요구하는 게 있다’ 등 욕도 많이 먹었다. 노래를 불러도 반응이 없었다. 함께 무대에 선 자원봉사자 가수들도 그런 분위기 때문에 많이 힘들었다. 하지만 4번 정도 공연을 하고 난 뒤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함께 어울려 노래를 부르는 분도 생겼고, 여기저기서 박수도 터지기 시작했다. 능인 스님이 무대에서 내려와 노래를 부르면 함께 어울려 춤추는 어른도 생기기 시작했다. 좋은 일 한다고 해도 불신하던 사람들도 스님의 그런 모습을 보고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여섯 번째 공연을 한 날 가슴 뭉클한 경험을 했어요. 공연이 끝났는데, 한 할아버지가 저를 안고 펑펑 우는 거예요. 사업을 하다가 망해서 집을 나온 지 10년이 넘었다고 하시더군요. 제 공연을 보고 힘을 얻었다고, 이제는 집에 간다면서 고맙다고 우시는 겁니다. 정말 기뻤어요. 종묘 공연은 제가 힘이 닿는 한 평생 할 예정입니다.”모든 사람을 위한 복지 사찰 건립이 마지막 꿈 종묘 공연이 어른들을 위한 것이라면 젊은이들과 소통하기 위해서 계획하고 있는 것이 대학로 마로니에 공연이다. 10월 29일 처음 공연을 올렸다. 젊은이들에게 어른들의 모습을 알려주고 싶어서 계획했다. 대학로 공연을 마친 뒤에도 스님의 공연 스케줄은 빡빡하게 채워져 있다. 11월 3일 충주교도소 공연, 11월 13일 천안개방교도소 공연, 12월 1일 천안 소년교도소 공연, 12월 15일 홍성교도소 공연 등이 잡혀 있다. “포교원 운영도 중요하죠. 사찰이 크지 않아서 사람들이 많이 들어오지 못하니 아쉬운 것도 많아요. 노래 공연 때문에 법회도 자주 열지 못하고. 하지만 제 활동의 목적은 어르신들의 복지 사찰을 만드는 것입니다. 양로원과 요양원이 있는 사찰을 만들고 싶어요. 뜻을 함께하는 독지가도 몇 명 있지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네요. 그래도 꿈은 이뤄지지 않겠습니까(웃음).” 전문적으로 작곡 교육을 배워본 적은 없지만, 입에서 흥얼거리는 음악을 악보에 옮겨놓으면 그것이 노래가 된다.1953년 경북 김천에서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다. 시의원이던 아버지는 5.16 사건으로 모든 것을 잃게 된다. 모아놓은 재산은 빚보증으로 모두 날려버렸고, 화병으로 아버지는 능인 스님이 열두 살 때 돌아가셨다. 그때부터 밥을 굶는 것이 일상이 됐고, 능인 스님은 초등학교 6학년 1학기만 마치고 학교를 그만뒀다. 정규교육이라고는 초등학교 중퇴가 전부다. 그 후부터 식당 웨이터, 막노동, 자동차 정비공 등 먹고살기 위해서 닥치는 대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능인 스님을 지탱해준 것은 불교 경전이었고, 언젠가는 불교에 귀의하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스물여섯 살에 결혼해 스물일곱에 첫딸을 낳았다. 음악 교육이라고는 전혀 받아보지 않았지만 노래와 인연이 닿은 계기가 있었다. 20대 후반 정비공으로 일하고 있을 때 꿈을 꿨는데, 자신이 노래를 만들고 있던 것. 비몽사몽 잠에서 깨어난 뒤 꿈에서 부를 노래를 적어 놓았다. 작곡 교육은 전혀 받지 못했지만, 그때부터 입에서 흘러나오는 리듬을 오선지에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족의 반대 없이 마흔여섯 살에 불교에 귀의했다. 태고종 승단이었기에 결혼의 유무는 큰 결점이 되지 않았다. 그 후 능인 스님은 입으로 흥얼거리는 노랫가락에 경전 구절을 얹어 찬불가를 만들기 시작했고, 랩과 디스코로 찬불가를 부르는 스님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한 것. 노래로 포교 활동을 하는 이유는 복지 사찰 건립을 위해서다. 돈도 되지 않고 몸과 마음도 피곤하지만 자신의 노래를 듣는 사람들이 행복해진다면 노래 포교는 멈출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면 언젠가는 복지 사찰 건립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 글 / 최영진 기자 ■ 사진 / 원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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