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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총 1,126 건 검색)

야스쿠니 참배 비판…일본 언론인 와타나베 타계
2024. 12. 19 20:17 국제
... 지목해 성사시켰다. 고인은 또 정치인이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에서 공식 참배하는 것을 비판했다. 그는 2006년 한 대담에서 “군국주의를 부채질하고 예찬하는 전시품을 늘어놓은...
조촐하게 지난 김정일 사망 13주기 참배…녹록치 않은 북한 상황 반영한 듯
2024. 12. 18 14:45 정치
... 13주기를 맞아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했다. 대내·외적으로 녹록지 않은 북한 상황을 고려해 이번 참배는 비교적 조촐하게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 조선중앙통신과 노동신문은 지난 17일 “김정은...
김정은, 김정일 13주기 맞아 금수산태양궁전 참배
2024. 12. 18 07:29 정치|정치
... 찾으신 김정은 동지께서는 장군님의 영생을 기원하시며 삼가 인사를 드리시였다”고 했다. 이날 참배에는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과 김덕훈 내각 총리, 조용원 당 비서, 최룡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일본 정부 “교도통신, 야스쿠니 참배 ‘오보’로 사도광산 추도식 혼란 초래”
2024. 11. 26 14:11 국제
... 하고 있다”며 “매우 유감”이라고 했다. 앞서 교도통신은 2022년 이쿠이나 정무관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보도가 오보로 판단된다는 내용의 정정 보도를 내보냈다. 극우 산케이신문 “한국 ‘반일병’...
추도식사도광산한일관계

스포츠경향(총 50 건 검색)

시민단체 ‘추석 맞아 무후광복군 17위, 홍범도장군 참배
2024. 09. 14 06:58 생활
연 2회 무후광복군 차례 올린 ‘순국선열 숭모회’, “어느덧 30회 기록…” 지난해 홍범도 장군 참배한 ‘공익감시 민권회의’ 등, “년 1회 개최할 것!” ‘개헌개혁행동마당’ 등 시민단체들이 9월12일(목) 국립대전현충원 제7묘역 무후광복군 17위 합동묘소에서 “한반도 평화만세!” 등을 외치고 있다. 12일 아침부터 긴 시간 동안 내린 비와 교통체증 등으로 원래 약속한 시간보다 약 30분 뒤인 낮 1시쯤부터 국립대전현충원 제7묘역 무후광복군 17위 합동묘소에서 우렁찬 ‘신 대한국 독립군에 백만 용사야!“라는 독립군가가 4절까지 울려 퍼진 가운데 ‘대한민국 순국선열숭모회’(상임대표 전대열)와 ‘개헌개혁행동마당’(상임마당쇠 송운학) 등이 주최하고, ‘글로벌 에코넷’, ‘공익감시 민권회의’ 등이 주관한 무후광복군 17위 추모제와 제30회 추석 합동차례를 광주광역시 등 전국 각지에서 모인 시민 약 20명이 엄숙하게 개최했다. 송운학 ‘공익감시 민권회의’ 의장은 ‘인사말’에서 “어제(9.11)는 상해통합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5년이 되는 날이며, 올해 추석은 광복군이 창건된 지 84년이 되는 날이다. 각각 따로따로 기념해야 할 아주 중요한 역사적 의미가 있는 날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상 후손 없는 광복군, 즉 무후광복군 17위 선열님들과 홍범도장군님을 추모하는 2024추석맞이 국립대전현충원 참배로 이를 대신하게 되었다”고 행사취지를 설명했다. 이어서 송운학 의장은 “이곳에 모셔져 있는 무후광복군, 즉 후손 없는 광복군은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모든 것을 우리 겨레 자주독립을 위해 바친 선열님들이시자, 사상과 이념의 차이를 뛰어넘어 대동단결하셨던 분들”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송운학 의장은 “광복군은 우리나라 헌법 전문(前文)에서 그 법통을 이어받는다고 명시한 상해임시정부가 1940년 9월 17일 창설한 공식무장조직이다. 국군의 날을 10월 1일이 아니라 9월 17일을 변경해야 한다.”고 역설한 뒤 “선열님들의 뜻을 이어받을 수 있도록 시민사회 의견을 가능한 한 빨리 수렴하여 조만간 한반도 평화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특별제안을 발표하겠다.”고 약속했다. 김선홍 ‘글로벌 에코넷’ 상임회장(대한민국 ‘순국선열숭모회’ 상임공동대표)은 ‘경과보고’에서 “지난 2022년 8월 14일 서울 도봉구 수유리 합동 묘소에서 대전국립현충원으로 무후광복군 17위 선열님들은 모셔왔지만, 크게 달라진 것은 별로 없다. 추석과 설날에 송편 하나, 떡국 한 그릇, 술 한 잔을 올리는 후손이 없다. 이에 시민단체와 시민들이 추도식과 합동 차례를 개최해 왔다. 어느덧 30회째를 기록하고 있다.”면서 “다 함께 꽃다운 나이로 후손도 남기지 못하고 산화한 광복군의 넋을 위로하고, 그 유지를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가자!”고 강조했다. 특히, 김선홍 회장은 “요즘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일제 강점기 당시 우리 국민의 국적이 일본이었다고 답변하며, 일본의 식민지배를 사실상 인정하는 발언이 TV 통해 생방송 되는 등 역사 왜곡이 있다면서, 항일독립선열님과 여기 잠들어 계신 무후 광복군 17위께서 이런 조국을 만들려고 풍찬노숙하시고, 청춘과 목숨까지 남김없이 바친 것이 아니다”라면서 “하늘에서 통곡하실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동섭 독립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추모사’에서 “정말로 선열님들께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 우리나라 현실이 부끄럽다. 매월 2∼3회 국립대전현충원을 찾아와 이곳과 홍범도 장군 묘역 등을 참배하면서, 진정한 자주독립과 민주공화국이라는 국가정체성에 대해 숙고하고 그 뜻을 이어받고자 노력하고 있다.” 소회를 밝혔다. 이어서 표옥란 ‘촛불계승연대천만행동’ 공동대표와 한옥순 ‘나누고 베풀고 봉사하는 그룹’ 회장이 광복군동지회가 지은 아래와 같은 광복군 추모시를 낭송하여 분위기를 더욱더 숙연하게 만들었다. “비바람도 찼어라. 나라 잃은 나그네야. 바친 길 비록 광복군이었으나 가시밭길 더욱 한이었다. 순국하고도 못 잊었을 조국이여! 여기 꽃동산에 뼈나마 묻히었으니 동지들아 편히 잠 드시라!” 그 뒤, 진은자 ‘KOK 피해자비상대책위원회’ 대표와 박철연 ‘고백고 통일연구소’ 소장 및 한일영 ‘선감학원 진상규명대책위원회’ 회장이 두 주먹을 굳게 쥐고 대한독립 만세, 한반도평화 만세,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만세삼창을 힘차게 외쳤다. 제30회 추석 합동 차례는 정성껏 마련한 제물로 송운학 의장, 김동섭 이사장, 임양길 ‘촛불계승연대천만행동’ 상임운영위원의 헌작 및 이보영 ‘인천서구 단체총연합회’ 회장의 독축 등으로 진행됐다. 그밖에도 이날 추모행사는 개혁연대민생행동, 국민주권개헌행동, 행·의정 감시네트워크 중앙회, 인천 행·의정 감시네트워크, 인천서구 환경단체협의회, 수도권 매립지 연장 반대 범시민 단체협의회 등 시민사회단체 대표와 시민들이 함께 했다. 또, (사)공정산업경제포럼 및 강순금 글로벌 에코넷 여성회장 등이 후원하고, 해창주조장 오병인 대표가 국내 최고 막걸리를 후원해 헌작했다. 특히, 약자와의 동행TV가 생중계했다. ‘개헌개혁행동마당’ 등 시민단체들이 9.12(목) 국립대전현충원 제3묘역 홍범도장군 묘소에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만세!” 등을 외치고 있다. 이들은 무후광복군 17위 추모제와 추석 합동 차례를 마치고 국립대전현충원 제3묘역에 안장되신 독립영웅 홍범도장군 묘소에 2024 추석맞이 참배 및 차례도 함께 올렸다. 이 자리에서 송운학 ‘개헌개혁행동마당’ 상임마당쇠는 “홍범도 장군님은 우리가 조금 전 참배한 무후광복군, 즉 후손 없는 광복군 17위 선열님들은 물론 광복군 등 모든 항일무장투사 선열님들 및 모든 독립투사선열들이 꿈꾸던 로망이자 롤(role) 모델이었다. 잔혹한 일제군대 등에 큰 타격을 주고 큰 승리를 거둔 얼마 안 되는 지도자 중 한 분이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송운학 상임마당쇠는 “윤석열 정부가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독립영웅을 홀대하고 이른바 ‘뉴 라이트’를 중용하는 등 지나치게 국가정체성을 뒤흔들고 있다. 개헌개혁행동마당은 도를 넘는 이러한 정책이 지속되지 않도록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다 함께 힘을 모아 달라!”고 호소했다. 참고로, 조국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으나 20대 꽃다운 나이에 중국지역에서 일제에 항거하다 순국하신 뒤 1965년 서울 강북구 수유리 외진 골짜기에 잠들어 계시던 무후광복군들 가운데 직계 가족이 없어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못했던 17위 선열님들은 국가보훈처가 <2022년 다시, 대한민국! 영웅을 모십니다.>는 사업으로 77년 만에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즉, 지난 2022년 8월 11일 국립대전현충원 제7묘역에 묘소를 개장한 뒤 유해를 수습해 국방부 의장대가 수유리에서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운구하여 임시 안치했다가 광복절 전날인 2022년 8월 14일 윤석열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 육, 해, 공군 참모총장, 한국광복군기념사업회, 대한민국 순열선열숭모회, 시민들의 봉송을 받으며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했다.
영화 ‘부활’ 구수환 감독, 이태석 신부 묘소 참배…“스웨덴 5선 올레토럴 의원도 함께”
2023. 11. 03 08:14 생활
사진제공|이태석재단 영화 ‘부활’의 구수환감독이 스웨덴 올레토럴의원의 이태석신부 묘지 참배소식을 지난 2일 자신의 SNS에 공개했다. 올레토럴의원은 5선으로 스웨덴의회 외교상임위 소속의 외교전문가다. 이태석 신부와의 인연은 올 6월 문을 연 이태석리더십학교(대표 구진성) 수업에 참여하면서다. 이태석 리더십 아카데미(대표 구진성)에서 운영하는 이태석 리더십 학교는 청소년 들이 올바른 리더로 성장하도록 돕기 위해 지난 6월 문을 열었는데, 올레의원은 1기에 이어 2기에도 교수로 참여하고 있다. 올레 의원이 이태석신부를 알게 된 것은 영화 ‘부활’ 때문이다. 그는 “이태석 신부의 숭고한 사랑과 의사가 된 제자들의 모습에 크게 감동했다”며 “행복하고 존경받는 삶의 의미를 실천으로 보여준 분이라서 꼭 만나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진 이태석 신부와 스웨덴 5선의원의 만남, 구수환 감독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만남이었다는 표현으로 분위기를 전했다. 올레의원은 무릎 통증으로 고생하고 있는데 묘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인사를 하는 등 예를 갖추었다. 그리고 한국의 청소년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매년 찾아와 강연을 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구진성 대표는 “처음에는 의례적인 인사인줄 알았는데 그의 약속은 진심이었다”고 말했다. 지난 1일과 2일 양일간 진행된 전북익산 함열여고, 전남담양 한빛고, 대구 대륜중 강연에서 올레의원은 자신을 ‘이태석재단 상임고문’이라고 소개하고 서번트(섬김)리더십을 자세히 설명하며 이태석의 정신을 알렸다. 북유럽 정치지도자가 지방까지 찾아와 용기와 희망을 갖도록 도움을 주고 이태석재단의 임원이라는 소개에 학생, 교사 모두가 열광했다. 올레의원은 한국도착 후 나흘 동안 서울 익산 광주 담양 대구에서 중고등학생, 대학생, 일반인을 대상으로 7차례의 강연을 했다. 시차적응도 없이 펼친 강행군이지만 항상 웃고 친절하게 진심을 다했다. 재단이사장인 구수환 감독은 “든든한 동지가 생겼다”며 “올레의원은 이태석신부가 내려준 선물”이라며 고마워했다. 올레의원은 11월4일(토) 이태석재단에서 두 번째 수업을 하고 스웨덴으로 떠난다. 강연에 참여를 원할 경우 이태석재단에 문의하면 된다.
추석연휴, 홍범도장군 등 독립유공자 참배행렬 이어져
2023. 10. 03 16:15 생활
“국군뿌리는 독립군과 광복군, 군인본분과 핵심가치는 자주독립” 2023 추석기념, 독립영웅 홍범도장군 참배자들이 국립대전현충원 제3묘역 홍범도장군 묘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올해 유난히도 길게 이어진 추석연휴 등을 이용하여 홍범도장군 등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셔진 독립유공자를 찾는 발걸음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 개인자격으로 ‘나 홀로’인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가족단위 또는 친지단위로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묘지를 찾아 참배하면서 군인본분과 핵심가치 등을 되새겼다. 이들 행렬 가운데 지난 일요일(10월1일) 오전 11시부터 낮 1시까지 ‘국민제안경연잔치 공동개최추진회의’와 ‘행·의정감시네트워크 중앙회’ 등 약 15개 시민단체 회원 등 약 20여명이 참석한 ‘2023 추석기념, 홍범도장군과 후손 없는 광복군(이하 무후(無後)광복군) 17위 참배’ 행사가 눈길을 끌었다. 추석연휴 한허리를 베어내는 어려운 일이었지만, 이 행사에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했던 이들은 오전 11시부터 정오까지 ‘국립대전현충원’ 제3묘역에 모셔진 홍범도장군 참배와 추석차례를 마치고, 제7묘역으로 이동해 정오부터 1시까지 진행된 무후(無後)광복군 17위 추모제와 추석합동차례에 동참했다. 참석자들은 30여명이 넘었고, 송운학 ‘공익감시 민권회의’ 대표는 ‘추모사’에서 “국군의 뿌리는 독립군과 광복군이며, 군인본분과 핵심가치는 자주독립”이라고 역설했다. 주최단체 중 하나인 ‘글로벌 에코넷’ 김선홍 상임회장은 “연 2회 개최원칙 등 이번 행사로 어느덧 28회째가 되었다”고 설명했다. 한편, 이들은 ‘홍범도장군 약력 및 참배행사 경과보고’(별지2 참조)에서 지난 8월 25일 육군사관학교가 “2018년 생도학습건물(충무관) 중앙현관 앞에 설치된 홍범도·지청천·이회영·이범석·김좌진 등 독립운동가 5인의 흉상을 교내 다른 장소나 교외로 이전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혀 시작된 논란에 대해서도 분명한 입장을 발표했다. 위 보고에 따르면, 홍범도장군은 “일제강점기 항일무장투쟁군인으로서 경술국치(1910년) 후 만주에서 독립군을 이끌며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등에서 대승을 일궈낸 독립영웅”이다. 다만, 위 보고는 일제가 이들 전투에 대한 보복으로 저지른 잔인한 간도참변(間島慘變) 및 그 뒤 소련에서 벌어진 자유시 참변 등 시대적 배경을 간단하게 요약하여 압축적으로 설명한 뒤 “당시 홍범도장군은 소련(적군)과의 협조에 찬성했고 조건부로 무장해제도 찬성했다. 자유시 참변 이후 포로로 잡힌 대한의용군 독립군에 대한 군사재판에서 고려혁명 군사법원 재판관을 지내기도 했다”고 인정했다. 심지어는 “러시아에 남아 소련 시민으로서 삶을 시작했고 1927년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다”는 사실도 인정했다. 2023 추석기념, 무후(無後)광복군 17위 참배자들이 국립대전현충원 제7묘역 무후(無後)광복군 17위 묘에서 애국가와 독립군가를 부르고 있다. 특히, 위 보고는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고 쿠데타를 감행한 박정희도 이러한 사실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대한민국 대통령권한대행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육군대장 자격으로 1962년 10월 25일 홍범도장군에게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추서했다”면서 그 이유 등을 “깊게 성찰하고자 홍범도장군과 후손 없는 광복군, 즉 무후(無後) 광복군 17위를 참배하게 되었다”고 강조하고 있다.
홍준표 대구시장, 5·18 민주묘지 참배 취소
2022. 11. 24 22:31 생활|생활|생활
연합뉴스 홍준표 대구시장이 과거 ‘5·18 유공자 명단 공개’를 언급한 것을 두고 5·18 단체가 공개 사과를 요구했다. 홍 시장은 광주시와 ‘달빛 동맹’을 위해 광주를 방문해 5·18 민주묘지를 참배할 예정이었으나 5월 단체들이 “사과하지 않으면 참배를 막겠다”고 경고하자 참배 계획을 취소했다. 홍준표 시장은 공항 관련 특별법 연내 제정 등 지역 핵심 현안을 놓고 광주시와 대구시가 협력하는 ‘달빛 동맹’을 맺기 위해 오는 25일 광주를 방문할 예정이다. 5·18 기념재단과 5월 3단체(유족회·부상자회·공로자회)는 24일 성명을 내고 “홍 시장은 지난 6월 TV토론에 함께 출연한 강기정 광주시장에게 유공자 명단 공개 발언을 했다”며 “5월 단체는 이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으나 홍 시장이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또 “이런 상황에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달빛동맹’이라는 이름으로 묘지를 참배하는 것은 그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5월 단체들은 “우리는 홍 시장의 진심 어린 사과를 요구한다”며 “사과 없는 보여주기식 묘지 참배를 반대한다”고 강조했다. 황일봉 5·18 부상자회장은 “유공자 명단 공개 주장은 극우단체가 5·18을 흠집 내기 위한 구호로 시작됐다”며 “참배 전까지 사과하지 않는다면 5·18 회원들의 강한 제지를 받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5·18단체가 반발하고 나서자 홍 시장도 묘지 참배를 하지 않기로 했다. 강기정 광주시장은 이날 SNS에 “오시는 길에 저와 함께 5·18묘역을 참배키로 했지만, 오월 단체가 반대하여 참배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강 시장은 “내일은 ‘하늘길, 철길, 물길’을 여는 것에 함께 하겠다”고 덧붙였다.

주간경향(총 2 건 검색)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난징]주원장이 묻힌 효릉, ‘참배정치’ 성지되다(2016. 06. 20 16:47)
2016. 06. 20 16:47 사회
1912년 2월 15일, 쑨원은 임시정부 관료들을 대동하고 효릉을 참배했다. 당시 쑨원은 국민을 대표하는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의 자격으로 주원장의 영령 앞에서 청나라가 무너졌음을 고했다. 난징에 있는 명나라 황제의 능은 단 하나, 바로 주원장이 묻힌 ‘효릉(孝陵)’이다. 홍무(洪武) 15년(1382), 마황후가 세상을 뜨고 이곳에 묻혔다. 16년 뒤, 주원장도 세상을 뜨고 이곳에 묻혔다. 효릉은 마황후의 시호 ‘효자(孝慈)’에서 비롯된 명칭이다. 이 명칭은 ‘효’로 천하를 다스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주원장이 세상을 떴을 때 그의 아들은 모두 장례에 참석하지 못했다. “다들 임지에 그대로 머물고 수도로 오지 말라”는 주원장의 뜻이었다. 일찍이 주원장은 명나라를 세운 뒤 자신의 여러 아들을 번왕(藩王)에 봉하여 각지를 지키도록 했다. 주원장은 생전에 26명의 아들을 두었다. 주원장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은 첫째·둘째·셋째를 포함해 모두 7명, 그가 사망할 당시 19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모두 장례에 참석하지 못했다. ‘효’를 그토록 중시했던 주원장이 이런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건 자신의 아들들이 제위에 오를 손자 주윤문에게 위협이 될 것을 우려해서였다. 효릉의 ‘치륭당송비’ 한족 지도자들 찾아와 이민족 퇴치 다짐 하지만 1402년, 주원장의 넷째아들 주체가 결국 난징을 함락하고 황제의 자리를 차지한다. 효릉의 ‘대명효릉신공성덕비(大明孝陵神功聖德碑)’는 주체가 세운 것으로, 비문의 2746자는 주원장의 일생을 담고 있다. 이 비석이 세워진 1413년은 바로 효릉의 공사가 완전히 마무리된 해이기도 하다. 효릉은 명나라의 뿌리를 상징하는 장소로서 명나라 내내 존중을 받았다.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들어선 청나라 역시 효릉을 중시했다. 효릉의 ‘치륭당송비(治隆唐宋碑)’는 주원장이 당시 어떤 지위를 누렸는지 잘 말해준다. ‘치륭당송’이란, 명 태조 주원장의 다스림이 당 태종 이세민과 송 태조 조광윤보다 뛰어나다는 의미다. 치륭당송비를 세운 사람은 강희제다. 그는 여섯 차례 강남 지역을 순시했는데, 그 중 다섯 번이나 효릉을 참배했다. 게다가 신하가 황제에게 행하는 ‘삼궤구고’의 예를 올렸다. 강희제가 주원장을 이토록 받든 이유는 명확하다. 만주족 출신 황제로서 절대다수의 한족을 통치하려면, 고압적 정책만으로는 부족하고 그들의 마음을 얻어야 했다. 한족의 왕조를 세웠던 주원장을 적대시하는 것보다는 끌어안는 게 이득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효릉은 역대로 ‘참배 정치’의 장이었다. 이민족의 원나라를 무너뜨리고 한족의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이기에, 그가 묻힌 이곳은 한족 지도자에게 더더욱 중요한 곳이었다. 만주족 왕조를 악마로 규정했던 태평천국의 홍수전은 효릉에 지어 올린 제문(‘祭明太祖陵寢文’)에서 자신을 ‘불초한 자손’이라고 표현했다. 그의 제문에 의하면, 중국은 ‘한족’의 것인데 이민족이 중국을 차지함으로써 종족이 멸망의 위기에 빠졌다. 홍수전은 주원장의 영령 앞에서 “이민족을 몰아내고 우리의 신주(神州, 중국)를 되찾겠다”고 다짐한다. 태평천국은 만주족 왕조를 무너뜨리지 못한 채 멸망한다. 하지만 그로부터 불과 50년이 되기도 전에 청나라 역시 멸망한다.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진 이듬해인 1912년 2월 12일,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이가 퇴위를 선포한다. 사흘 뒤인 2월 15일, 쑨원은 임시정부 관료들을 대동하고 효릉을 참배했다. 당시 쑨원은 국민을 대표하는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의 자격으로 주원장의 영령 앞에서 청나라가 무너졌음을 고했다. 이날 효릉에 지어 올린 제문(‘祭明陵文’)에서 쑨원은 “중화민국의 완전한 통일”을 강조했다. 일찍이 그는 1912년 1월 1일에 발표한 ‘임시대총통선언서’에서 한족·만주족·몽골족·회족·티베트족의 통합을 주장하는 ‘오족공화론(五族共和論)’을 발표한 바 있다. 청나라가 무너진 상황에서 ‘한족’만의 중국을 주장하는 것은 결국 중국이 차지하고 있는 영토의 분할을 초래할 터, 쑨원은 발 빠르게 기존의 배만(排滿)에서 오족공화로 급선회했다. 하지만 기존의 배만 의식과 한족주의는 한순간에 떨쳐버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효릉에 지어 올린 제문에서 쑨원은 청나라가 지배한 268년을 원통한 시간으로 규정했다. 또한 그는 주원장이 몽골족을 물리치고 명나라를 건국한 것을 해와 달이 다시 밝아진 광복에 빗대었다. 그의 논리에 따르자면, 주원장이 원나라를 무너뜨린 것은 청나라를 무너뜨린 신해혁명의 선구였던 셈이다. ‘박애(博愛)’라고 적힌 중산릉 패방. 쑨원이 효릉을 참배한 날은 그가 임시대총통 자리를 내놓기 직전이었다. 이날 난징에서는 중화민국 임시대총통 선거가 열렸다. 여기서 위안스카이가 임시대총통으로 선출된다. 3월 10일, 위안스카이는 베이징에서 임시대총통에 취임한다. 이후 위안스카이는 공화제에 대한 약속을 저버린다. 쑨원은 위안스카이에 맞서야 했고, 이어서 여러 군벌을 상대해야 했다. 결국 그는 뜻을 이루지 못한 채 1925년 3월 12일, 베이징에서 간암으로 사망한다.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못했으니, 동지들은 계속 노력하라”는 유언을 남긴 채. 베이징 벽운사(碧雲寺)에 임시로 안치되어 있던 쑨원의 유해가 난징으로 옮겨져 묻힌 건 1929년 6월 1일이다. 쑨원이 잠들어 있는 곳을 ‘중산릉’이라고 한다. 일찍이 쑨원은 일본 망명시절에 중산초(中山樵)라는 가명을 썼는데, 이후 ‘중산’은 그의 여러 이름 중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었다. 중산릉은 쑨원이 생전에 자신이 죽은 뒤 묻히길 바랐던 장소다. 광둥에서 태어나 베이징에서 사망한 그가 왜 난징에 묻힌 것일까? 임시대총통에서 사임한 1912년 어느 봄날, 쑨원은 이곳에 사냥을 하러 왔다가 사방을 둘러본 뒤 훗날 자신이 죽으면 이 땅에 안장해 달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쑨원이 난징에서 머문 기간은 오래지 않지만 그에게 난징은 어느 곳보다 의미 있는 곳이었으리라.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던 곳, 신해혁명의 의미를 상기시키는 곳이 바로 난징 아닌가. 베이징에서 죽은 쑨원도 중산릉에 묻혀 중산릉은 쑨원이 서거한 지 1주년이 되는 해(1926)에 기공식을 거행한 이래 1929년 봄이 되어서야 준공되었다. 쑨원의 유해를 맞이하기 위해서 이 해에 난징에는 첫 번째 아스팔트 도로인 ‘중산로’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또한 명나라 때의 동쪽 성문인 조양문을 개축하고 ‘중산문’이라 개칭했다. 중산릉은 중국 전통의 건축 구조를 따르고 있는데, 가운데 중심선을 따라서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일직선상에 주요 건축이 자리한다. 중산릉은 산세에 의지해서 조성되었기 때문에 패방·묘도·능문·비정·제당·묘실로 가는 길이 조금씩 높아진다. 또한 공중에서 내려다보면 중산릉의 전체 모양은 마치 ‘종’과 같다. 이를 두고 ‘자유의 종’이라고도 하고, 세상을 일깨우는 ‘경세종(警世鐘)’이라고도 한다. 중산릉의 패방부터 묘실까지 모든 것에 쑨원의 정신, 그리고 그를 존경하는 중국인의 마음이 담겨 있다. 패방에 적힌 ‘박애(博愛)’라는 글자는 쑨원의 일생을 개괄하는 의미를 담은 것이라고 한다. 패방을 지나 설송(雪松)과 향나무가 늘어선 400m가 넘는 묘도가 끝나는 자리에 ‘능문’이 자리하고 있다. 능문의 위쪽에 적힌 글자는 ‘천하위공(天下爲公)’이다. 천하는 모두의 것이라는 의미다. 이는 쑨원이 평생 분투했던 이상이기도 하다. 능문을 지나면 비정이다. 비정 안의 9m나 되는 커다란 비석에는 다음 24개의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다. ‘중국국민당이 총리 쑨 선생을 이곳에 안장하다, 중화민국 18년 6월 1일(中國國民黨葬總理孫先生於此, 中華民國十八年六月一日)’. 원래는 쑨원의 공적을 담은 비문을 새길 계획이었지만 결국엔 이렇게만 새겼다. 그의 공적을 비문에 제대로 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비정을 지나면 제당까지 이어진 돌계단이다. 비정에서 제당까지 돌계단의 개수는 339개, 당시 국민당 의원의 수를 상징한다. 패방부터 제당까지 돌계단의 개수는 392개, 당시 중국의 인구 3억9200만명을 상징한다. 쑨원에 대한 중국인 모두의 존경을 담은 돌계단이 끝나는 곳에 제당이 있다. 제당 입구의 문미에는 ‘민족(民族), 민생(民生), 민권(民權)’이라고 적혀 있다. 쑨원의 삼민주의를 표현한 것이다. 제당에는 2.1m 높이의 기단 위에 4.6m에 달하는 쑨원의 좌상이 놓여 있다. 제당 뒤편 묘실에는 묘혈 위로 쑨원의 와상이 놓여 있다. 쑨원의 모습을 일대 일 비율 그대로 재현한 이 와상 아래 5m 지점에 쑨원의 관이 안치되어 있다. 제당의 좌상과 묘실의 와상 모두 흰색 대리석 조각이다. 그런데 제당의 쑨원은 중국 전통의 마고자 차림인데, 묘실의 쑨원은 중산복 차림이다. 이는 국민당 우파와 좌파의 갈등 때문에 빚어진 결과다. 쑨원의 조각상에 대해 국민당 우파는 전통 복장을 주장한 반면 국민당 좌파는 중산복을 주장했다. 결국 양측은 합의를 보지 못했고, 쑨원의 좌상과 와상의 차림새가 제각각이 된 것이다. 중산릉 제당으로 향하는 쑨원의 운구 행렬. 쑨원의 유해를 중산릉에 안장하는 ‘봉안대전(奉安大典)’이 거행된 1929년 6월 1일, 정오를 기해 전국의 교통이 3분 동안 멈추었고 전 국민이 3분 동안 애도를 표했다. 국부(國父)에 대한 최고의 예를 표한 것이다. 이후 수많은 이들이 사후에 중산릉 곁에 묻히길 바랐다. 장제스 역시 중산릉 서쪽에 자신의 묏자리를 봐둔 적이 있다. 만약 훗날에 벌어졌던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승리했다면 장제스는 바로 그곳에 묻혔을 것이다. 쑨원의 부인과 장제스와의 대립 1929년 6월 1일, 이날의 주인공은 단연코 장제스였다. 바로 전해에 그는 북벌을 완수하고 군벌 세력을 잠재웠다. 국민정부의 지도자로서 장제스는 쑨원의 이장과 관련된 모든 것을 주관했다. 장제스는 국가 수장이자 쑨원의 동서였으며, 쑨원의 후계자였다. 그런데 봉안대전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는 장제스를 쑨원의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쑨원의 부인 쑹칭링이다. 쑨원이 세상을 떠난 뒤 쑹칭링은 장제스와 대립하며 국민당 좌파를 지지했다. 그녀는 장제스가 쑨원과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권력을 차지하려는 것에 반대하며 중국을 떠나 모스크바로 갔다가 나중에는 베를린에서 지냈다. ‘봉안대전’에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은 쑹칭링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그녀의 귀국은 자칫 장제스를 쑨원의 명실상부한 ‘후계자’로 인정하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쑨원의 아내로서 봉안대전에 참석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그녀는 귀국을 결정하는 한편 성명서를 발표한다. 중앙집행위원회의 정책과 활동은 반혁명적이기에 국민당의 일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겠다는 기존의 입장을 거듭 강조하면서, 자신이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이 결코 기존의 입장에 변화가 있는 게 아님을 밝혔다. 봉안대전이 거행된 당일 저녁, 쑹칭링은 난징을 떠나 상하이로 갔다. 장제스는 그녀가 묵을 곳을 마련해 놓았고, 쑹메이링은 그녀에게 남아 있길 간청했음에도. 장제스가 자신을 이용할 그 어떤 빌미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장제스 앞에는 해결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었다. 복잡한 당내 분쟁, 여전히 딴마음을 품고 있는 군벌, 중국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열강, 게다가 눈엣가시인 공산당. 이런 상황에서 쑨원은 그에게 ‘정통성’을 보장해주는 버팀목과 같았다. 그가 봉안대전에 온갖 심혈을 기울인 것도 당연한 일이다. 쑹칭링과 장제스, 두 사람은 쑨원으로 인해 서로 대립하면서도 쑨원으로 인해 그날 한 장소에 모였다. 훗날 쑹칭링은 중국 대륙에 남고 장제스는 타이완으로 쫓겨 간다. 이후 중산릉은 중화인민공화국 주요 인사들의 참배 장소가 되었음은 물론, 2005년에 타이완의 국민당 주석 롄잔(連戰)이 참배한 것을 필두로 타이완 주요 인사들의 참배 장소가 되었다. 올해 타이완에서는 민진당 주석 차이잉원(蔡英文)이 총통에 취임했다. 그녀는 5월 20일, 타이베이 총통부에 걸린 쑨원의 초상화 앞에서 취임선서를 했다. 차이잉원은 역대 그 누구보다 탈중국화와 타이완 정체성을 강조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중국이 내세우는 ‘하나의 중국’이라는 원칙은 매우 견고해 보인다. 쑨원의 유해가 안치된 자동관(紫銅棺)은 시멘트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 일찍이 항일전쟁 시기에 국민당 정부는 쑨원의 유해를 충칭으로 옮기려 한 적이 있다. 하지만 묘혈을 폭파할 경우 유해가 손상되기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장제스가 쑨원의 유해를 타이완으로 옮겨가지 못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먼 훗날 타이완 총통이 쑨원의 초상화 앞에서 취임선서를 하지 않게 되는 날이 올는지 사뭇 궁금하다.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
[절집 둘러보기]사찰 참배의 예절(2007. 05. 29)
2007. 05. 29 문화/과학
절에 갈 때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은 단정한 복장과 자세를 갖추는 것이다. 이는 불자와 비불자,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지켜야 할 상식이다. 특히 여성의 경우에 너무 짧은 치마를 입거나 노출이 심한 옷을 입는 것은 자제해야 하며, 맨발로 법당에 들어가는 일이 없도록 양말을 갖추어 신어야 한다. 일주문에 도착하면 먼저 자신의 외양뿐 아니라 마음까지도 잘 살펴서 성스러운 도량을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유의해야 한다. 또한 우연히 절에 가게 되었을지라도 손을 깨끗이 씻고 참배를 올려야 하며, 경내에서는 술을 비롯하여 금지된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된다. ● 법당의 출입 예절 경내에 들어간 뒤, 법당을 출입할 때에는 전면에 있는 문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일반적으로 법당 건물의 좌우에 나 있는 문을 이용하는 것이 원칙이다. 만약 건물의 좌우에 문이 없고 전면에만 문이 있는 경우에는 중앙에 있는 문을 피해야 하며, 가능한 한 양쪽 끝에 있는 문을 사용하는 것이 합당하다. 전면 중앙에 있는 문은 어간문(御間門)이라 하며, 그 절의 조실(祖室), 주지, 원로스님 등이 출입하는 문이다. 어간문은 부처님이 앉아 있는 주좌(主座)에서 정면으로 나 있는 문이다. 따라서 어간문을 지날 때에는 부처님 앞을 지나는 것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항상 차수(叉手)하거나 합장을 해야 하며, 공경하는 마음가짐으로 지나다녀야 한다. ● 법당 안의 예절 법당에 들어가서는 소리 나지 않게 문을 닫은 후 단정히 선 채로 먼저 부처님을 향하여 합장하고 반배, 즉 허리를 반쯤 숙여서 인사한다. 그러고 나서 부처님 앞으로 나아가 다시 합장 반배를 한 뒤에 촛불을 켠다. 이때 촛불이 켜 있으면 자신이 초를 준비했을지라도 그대로 탁자 앞에 놓고 향을 사른다. 향을 사를 때에는 한 개만 촛불에 붙여서 그대로 향로에 꽂는다. 향을 올린 뒤에는 다기(茶器)에 맑은 물을 담아서 올리고 준비한 과일 등을 깨끗이 씻어서 불단에 올린다. ● 사찰 경내의 예절 사찰 경내에서는 단정한 몸가짐으로 엄숙하게 정진해야 한다. 신을 꺾어 신거나 소리를 내어 끌지 않도록 주의하며, 항상 조용히 다녀야 한다. 경내에서는 음주, 식육, 흡연, 고성방가를 해서는 안 된다. 가래침을 뱉거나 코를 풀어서도 안 되며, 함부로 휴지나 쓰레기를 버려서도 안 된다. 세속적인 화제로 신성한 도량을 시끄럽게 하거나 소란을 피우면 안 된다. 스님 또는 불자를 만났을 경우에 합장하여 인사한다. 종을 쳐 본다거나 북을 두드려서는 안 된다. 사찰에 있는 모든 물건은 삼보의 귀중한 공용물이므로 소중히 여기며, 항상 제자리에 놓아 두어야 한다. 식사는 언제나 평등하게 나눠 먹어야 하며, 많을 경우에는 미리 덜어내어 결코 남기거나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한다. 마루에 걸터앉거나 불전을 등지고 서 있지 않도록 한다. ● 스님에게 예배할 때 스님을 만나면 반드시 합장하고 절을 올린다. 밖에서 만났을 때에는 그대로 서서 합장 반배를 해도 좋지만, 방안에 들어가면 다시 합장하고 오체투지의 큰절을 올린다. 만약 밖에서 인사를 했다고 할지라도 스님이 자리에 좌정하면, 다시 큰절을 하는 것이 예의다. 또한 법문을 청할 때에는 큰절로 3배를 올리며, 법문이 끝나거나 법회가 끝났을 때에도 감사하는 예를 드려야 한다. 스님을 만나더라도 예배하지 않아야 할 때가 있다. 스님이 좌선 중일 때, 식사 중일 때, 설법할 때, 세수하고 양치할 때, 목욕하거나 누워서 쉴 때, 화장실에서 만났을 때에는 절을 하지 않는다. 다만, 공손한 태도로 가볍게 목례만 한다. ● 법회의 예절 법회는 부처님의 정법을 배우기 위한 모임으로서, 참석자는 독실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법회에 임해야 한다. 법회에 참석할 때는 항상 법회 의식집과 필기도구를 준비한다. 단정한 몸가짐으로 20∼30분 전에 먼저 와 자리를 정돈하고 마음을 가다듬어야 하며, 자리에 앉을 때는 앞에서부터 순서대로 앉는다. 하지만 맨 앞줄의 스님들 자리와 집전하는 법사의 자리에 앉아서는 안 된다. 신발은 차례로 정리하여 벗어 놓으며, 신발의 앞부분이 바깥쪽을 향하도록 한다. 맨 나중에 들어오는 불자는 다시 한 번 신발을 정리하고 들어온다. 먼저 법당에 도착한 법우는 법회에 필요한 의식집이나 좌복 등을 깔아 놓아 법회 준비를 한다. 소지품은 지정된 장소에 가지런히 놓고, 법회시간 10분 전에는 모든 준비를 마치고, 설법 장소에 모여 법회가 시작될 때까지 조용히 앉아 기다린다. 법문을 들을 때에는 단정한 자세로 허리를 곧게 펴고 들어야 한다. 두 눈은 스님을 응시하되, 공손한 자세로 정면에서 약간 아래쪽에 두는 것이 무난하다. 설법은 부처님을 대신해서 법사가 설하는 것이므로 경솔한 마음으로 들어서는 안 된다. 법회란 단지 설법을 듣는 것만이 아니고 바로 자신의 신행생활이기 때문에 정해진 법회는 빠지지 않고 참석하여야 한다. 혹시 법회에 갔을 때 늦게 참석하여 이미 법회가 시작하였으면 다른 사람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살며시 자리를 잡고 앉아야 한다. 이때에는 향을 사르거나 촛불을 켜거나 또 큰절을 한다 하여 앞에 나가 번잡하게 해서는 안 되며, 합장 반배한 뒤 가만히 참석하였다가 법회가 끝난 뒤에 하는 것이 좋다. 또한 설법 도중에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나가는 것은 큰 실례이며, 불가피한 일이 있을 때는 미리 맨 뒷자리에 앉아 있다가 다른 사람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살며시 일어나야 한다. - 발췌인용 ‘사찰넷’(www.sacha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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