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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총 100 건 검색)

일제가 갈라놓았던 창경궁과 종묘, 이젠 서로 오가며 관람한다
일제가 갈라놓았던 창경궁과 종묘, 이젠 서로 오가며 관람한다
2024. 10. 08 14:43문화
... 곳이다. 조선 왕조의 으뜸궁궐(정궁)인 경복궁과 함께 세워질 정도로 신성한 제례공간이기도 했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함께 경복궁의 동쪽에 있는 궁궐이라는 뜻에서 동궐로 불렸다. 창경궁과 종묘가 연결돼...
종묘창경궁율곡로연결
[책과 삶] 창경궁 서양식 온실 속…100년 걸쳐 열매 맺은 이야기꽃
[책과 삶] 창경궁 서양식 온실 속…100년 걸쳐 열매 맺은 이야기꽃
2024. 10. 03 20:03문화
... 수없이 많은 삶과 이야기가 숨어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대온실 수리 보고서>는 창경궁 대온실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역사 소설이다. 소설은 30대 여성 ‘영두’가 창경궁 대온실...
책과 삶
“남산·홍릉·선릉·창경궁 등 서울 4개 숲, 탄소흡수능력 실시간 측정”
“남산·홍릉·선릉·창경궁 등 서울 4개 숲, 탄소흡수능력 실시간 측정”
2024. 09. 24 10:54지역
... 중요한 기반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산림과학원은 이번에 남산과 홍릉숲, 선릉숲, 창경궁숲 등 서울지역 4곳에 관측 탄소 시스템을 구축했으며, 향후 제주와 강원 등에도 시스템을 추가...
창경궁 명정전 내부 특별 개방, 조선왕릉서는 음악회 등 열려
창경궁 명정전 내부 특별 개방, 조선왕릉서는 음악회 등 열려
2024. 09. 06 11:40문화
... 오는 26일부터 11월 3일까지 매주 목~일요일에 창경궁 명정전 내부 특별 관람을 실시한다. 창경궁 명정전은 현존하는 궁궐들의 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창경궁의...
창경궁조선왕릉음악회국가유산청

스포츠경향(총 21 건 검색)

서울 종로 ‘힐스테이트 창경궁’ 본격 분양 시작
서울 종로 ‘힐스테이트 창경궁’ 본격 분양 시작
2019. 10. 30 15:45 생활
서울 종로에 들어서는 15층 규모의 힐스테이트 창경궁이 견본주택을 열고 본격적인 분양에 나선다. 현대건설은 30일 이 같이 밝히며 힐스테이트 라는 브랜드 가치와 전 세대 9억 이하 분양가로 중도금 대출규제가 적용되지 않는 아파트로 공급된다고 설명했다. 힐스테이트 창경궁은 서울시 종로구 충신동 60번지 일원에 위치할 예정인 지하 5층~지상 15층, 1개 동, 총 181세대 규모의 아파트로 이 가운데 일반에게는 159세대가 공급되며, 분양 면적은 전용기준으로 63㎡ 15세대와 76㎡ 41세대, 84㎡ 103세대 등 선호도 높은 중·소형 타입으로만 구성된 것이 특징이다. 힐스테이트 창경궁. 현대건설 제공이번 힐스테이트 창경궁의 키워드는 단연 도심 인프라와 교통 중심지, 명문 교육환경, 희소성 높은 궁세권 등 3가지다. 먼저 경희궁 롯데캐슬(일반분양 116세대)이후, 종로 일대에 3년 만에 공급되는 새 아파트다. 종로구 소재 아파트의 입주년도를 살펴보면 절반 가까운 45% 정도가 입주 20년 이상 됐으며 15년 이상과 10년 이상 된 아파트도 각각 12%와 24%에 달한다. 결국 종로구 아파트 10채 가운데 8채 이상이 10년 이상으로 노후된 아파트다. 또한 시청, 광화문을 잇는 종로 중심업무지구와 인접해 뛰어난 직주근접 환경을 갖췄다. 서울 지하철 1호선 종로5가역과 동대문역, 4호선 동대문역 및 혜화역 등 지하철역과 가깝다. 마지막으로 힐스테이트 창경궁은 약 1㎞ 이내에 창경궁, 창덕궁, 종묘 등 세계 문화 유산인 고궁과 인접해 있으며, 인근으로 낙산공원과 마로니에 공원 등도 위치해 궁세권과 공세권 모두를 누릴 수 있는 단지다. 힐스테이트 창경궁은 다음달 4일 특별공급 청약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분양이 시작되며 1순위 청약은 5일, 해당지역을 시작으로 1순위 기타지역은 6일 청약할 수 있다. 당첨자는 13일 발표 예정. 견본주택은 종로구 보령약국 인근 한일빌딩 3층(종로구 종로 199)에 마련됐다.
현대건설
경복궁·창경궁 야간 특별관람, 8일부터 예매…어디서?
경복궁·창경궁 야간 특별관람, 8일부터 예매…어디서?
2018. 06. 05 11:21 생활
문화재청은 6월 경복궁·창경궁 야간 특별관람 예매를 8일 오후 2시에 시작한다고 5일 밝혔다. 야간 특별관람은 17∼30일 오후 7시 30분부터 10시까지 진행된다. 1일 최대 관람 인원은 경복궁 4천500명, 창경궁 3천500명이다. 위에서부터 경복궁과 창경궁의 모습이다. 경향DB 연합뉴스에 따르면 일반인은 인터파크티켓과 옥션티켓 누리집에서만 예매할 수 있고, 만 65세 이상 어르신과 외국인은 현장에서 입장권을 구매할 수 있다. 관람료는 경복궁 3000원, 창경궁 1000원이다. 평소 무료입장이 허용되는 한복 착용자도 야간 특별관람을 하려면 사전에 반드시 예약해야 한다. 관람권 유료 예매는 1인당 4매, 한복 착용자 무료 예약은 1인당 2매까지 가능하다. 문화재청은 7월 22일부터 8월 4일까지도 경복궁과 창경궁 야간 특별관람을 진행한다. 7월 관람 예약은 다음달 13일 오후 2시부터 할 수 있다. 자세한 정보는 경복궁 누리집과 창경궁 누리집에서 볼 수 있다.
[간밤TV] ‘어서와’ 페터 “日, 창경궁을 동물원으로? 韓 멸시하려 했을 것”
[간밤TV] ‘어서와’ 페터 “日, 창경궁을 동물원으로? 韓 멸시하려 했을 것”
2018. 02. 09 07:59 연예
두 번째로 한국을 찾은 페터가 창경궁에 들렀다. 일제강점기 시절 아픈 역사에 가슴 아파했다. 8일 방송된 MBC 에브리원 예능 프로그램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 에서는 페터가 ‘혼자 여행’을 즐기게 됐다. 일행 다니엘이 여권을 집에 두고 와 페터 혼자 출발했기 때문이다. 한국에 도착한 페터는 창경궁으로 향했다. 페터는 준비성을 발휘하며 안내 책자를 챙겼고, 책자에 있는 설명을 읽었다. 독일 페터가 창경궁을 찾았다. 일제강점기 시절 역사에 가슴 아파했다. / MBC 에브리원 예능 프로그램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 창경궁은 성종 14년(1483) 세조비 정희왕후, 예종비 안순왕후, 덕종비 소혜왕후를 모시기 위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시절 동물원으로 사용된 아픈 역사도 있다. 창경궁에 대한 설명을 읽은 페터는 “여기가 동물원의 일부분이었다니 믿기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일본인이 궁을 동물원으로 만든 이유로 “한국인을 멸시하려고 그랬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페터는 또 “이러한 역사적인 건물을 재건하려면 정말 많은 노력을 했겠다. 이곳에 동물 우리를 만들었다는 건 정말 전혀 상상할 수가 없다”라고 감탄했다. 페터는 창경궁 안을 걸으며 “명상하기 좋은 분위기다. 궁이 도시 한 가운데 있다는 걸 상상해본 적이 없다”라며 “서울에 거대한 궁을 유지하고 있는 건 좋은 일이다. 한국인들이 역사에 깨어있는 걸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간밤TV창경궁동물원MBC 에브리원일제강점기간밤TV
경복궁·창경궁 야간 개장 예매가 오늘부터 시작, 각 오픈마켓 매진 ‘뜨거운 관심’
경복궁·창경궁 야간 개장 예매가 오늘부터 시작, 각 오픈마켓 매진 ‘뜨거운 관심’
2017. 04. 07 15:20 생활
경복궁·창경궁 야간 개장 예매가 오늘부터 시작된다. 문화재청은 7일, 4월에서 9월까지 매월 2주간(3~4번째 주)씩 개최한다고 밝혔다. 구매는 옥션티켓·인터파크티켓 사이트에서 할 수 있다. 이어 2017년 첫 고궁 야간 특별관람은 4월 16일부터 27일(경복궁 화요일 휴무, 창경궁 월요일 휴무)까지 각 10일간 진행한다. 경복궁과 창경궁의 야간 특별관람 시간은 오후 7시부터 오후 9시 30분까지(입장마감 오후 8시 30분까지)이며, 야간 특별관람 기간 중에는 경복궁 내에 있는 국립고궁박물관도 경복궁 야간 특별관람 기간에 맞춰 오후 9시 30분까지 같이 연장 운영한다.(경복궁 휴무일인 화요일은 제외) 경복궁·창경궁 야간 개장 예매가 7일부터 시작된다. 예매자는 관람 당일 매표소에서 예매자 본인 신분 확인 후 관람권을 배부받아 입장할 수 있다. 한복 착용자는 별도 관람권을 구매하지 않고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한편 경복궁 야간개장 티켓이 오픈 30분만에 매진돼 네티즌들의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옥션티켓은 7일 오후 2시부터 경복궁 야간개장 티켓을 판매 시작했다. 하지만 해당 티켓은 판매 30분도 안 되어서 모두 매진됐다. 특히 이번 야간개장은 1인 5만원으로 높은 가격이었지만, 특별한 이벤트에 참여하고 싶은 네티즌들의 관심은 곧 치열한 티켓팅으로 이뤄졌다.

주간경향(총 2 건 검색)

[이기환의 Hi-story](85)창경궁에 동물원을 세운 이토 히로부미(2023. 05. 26 11:00)
2023. 05. 26 11:00 문화/과학
창경궁 전경. 창경궁은 성종 연간인 1480년대에 대비전 세 어른인 할머니 정희왕후 윤씨(세조비)와 친어머니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추존왕 덕종비), 양어머니 안순왕후 한씨(예종비)를 위해 조성한 궁궐이다.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제공 최근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가 ‘창경궁 명칭 환원 30주년’을 맞아 올 연말까지 다채로운 행사를 벌인다고 발표했습니다. 아마도 50대 이상의 세대에게는 이 소식이 색다른 감회로 다가왔을 겁니다. 저만 해도 20대 초반까지는 ‘창경원’이었고요.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들고 소풍 가서 사자·호랑이 같은 진귀한 동물을 봤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다가 1983년 12월 비로소 ‘창경궁’의 명칭을 되찾게 됐죠. 원래는 ‘궁’이었는데, 일제강점기인 1911년부터 ‘원(苑)’으로 명칭이 바뀌었죠. 해방 이후 40년 가까이 ‘창경원’ 이름을 답습했다는 사실 자체도 기막힌 일입니다. 창경궁에 웬 작은 아방궁?  창경궁은 1418년 세종(재위 1418~1450)이 상왕인 태종(재위 1400~1418)을 위해 조성한 궁궐(수강궁)이었습니다. 그러다 성종(재위 1469~1494) 때 대비전의 세 어른을 모시려고 제대로 수리해 ‘창경궁’이라 했는데요. 대비전 세 어른은 할머니인 정희왕후 윤씨(세조비·1418~1483)와 친어머니인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추존왕 덕종비·1437~1504), 양어머니인 안순왕후 한씨(예종비·1445~1499)였습니다. 이렇게 성종의 효심이 깃든 창경궁은 연산군 시대에 들어 ‘작은 아방궁’으로 전락하는데요. 1506년(연산군 12) 1월 21일자 <연산군일기>에 심상치 않은 기사가 보입니다. “창경궁에 돌로 대(臺)를 만들고 용을 새긴 난간을 만들었다. 1000명은 앉을 만하고 높이가 10길이나 됐다. 이름을 서총대(瑞?臺)’라 했다. 그 앞에 큰 못을 팠는데… 밤낮으로 인부 수만명이 ‘호야(呼耶)!’ 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무리한 토목공사에 따른 후유증이 극심했습니다. 공사 강행을 위해 아직 출사하지 못한 진사·생원 중 100명을 뽑아 이른바 가부장(임시부장)직을 맡겨 인부들을 감독하게 했습니다.(<연산군일기> 1505년 12월 30일) ‘완장을 찬’ 가부장들이 인부들에게 얼마나 ‘갑질’을 해댔는지 원성이 자자했답니다. “가부장들이 툭하면 곤장을 때리고 벌금을 물렸다. 가진 돈을 다 날린 인부들이 입고 있던 바지의 헌솜까지 빼내서 면포를 만들어 변상했다. 그렇게 만든 무명 빛깔은 질이 좋지 않았다. 지금도 품질 나쁜 베를 ‘서총대포’라 한다.”(<연산군일기> 1506년 2월 3일) 그렇지만 연산군은 ‘작은 아방궁’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전국에서 차출된 인부들이 제때 도착하지 못했답니다. 결국 공사를 마무리 짓지도 못한 채 중종반정(9월 2일)이 일어났습니다. 연산군의 폐위와 함께 서총대 공사도 중단됩니다(1507년 윤1월 5일). 완전히 철거되지는 않았습니다. 명종(1560년 9월)과 정조(1795년 3월) 등이 이곳에서 연회를 벌이고, 활쏘기 대회를 열었다는 기사가 보입니다.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는 “경성 박물관 및 동·식물원은 이토 히로부미가 왕가의 오락을 겸하고 공중의 관람에 이바지할 목적으로 계획했다”고 설명했다.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창경궁은 임금(중종·환경전)과 왕비(명종비 인순왕후·통명전)가 승하하거나 즉위(인종·명정전)한 곳이기도 했습니다. 매국노 형제와 일본인 차관의 수상한 대화  세월이 흘러 국운이 급격히 쇠하던 1908년 11월 4일이었습니다. 매국 내각의 총리대신인 이완용(1858~1926)·궁내부 대신 이윤용(1854~1939) 형제가 궁내부 차관 겸 제실재산정리국장이던 일본인 고미야 미호마쓰(小宮三保松·1859~1935)와 수상한 대화를 합니다. “혼자 떨어진 황제(순종)에게 소일거리가 없을까요.”(이완용·이윤용 형제) 불과 이틀 뒤 고미야가 명쾌한 해답을 들고 옵니다. “창경궁 안에 동물원과 식물원, 박물관을 조성하면 어떻습니까.”(고미야) 이상하죠. 왜 일본인이 대한제국 황실의 재산관리를 담당하는 궁내부 차관을 맡게 된 걸까요. 여기에는 뼈아픈 사연이 담겨 있죠. 1907년 일제는 헤이그 밀사 사건을 트집 잡아 ‘정미 7조약’을 체결합니다. 조약의 핵심은 조선통감이 대한제국의 입법·사법·행정 전반에 걸쳐 통치권을 발휘한다는 것이었죠. 이에 따라 초대통감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가 대한제국의 각부 차관을 일본인으로 임명했습니다. 이때 이토의 측근인 고미야가 대한제국 황실 재산의 관리를 겸한 궁내부 차관이 된 겁니다. 법률가로 대심원 검사 출신이었던 고미야는 이토 히로부미의 신임을 한몸에 받았던 인물입니다. 고미야의 장인이 이토와 같은 조슈번(長州藩·야마구치 지역을 통치한 영지) 출신이었다네요. 명종 때(1555년 이전) 창경궁 서총대에서 벌어진 문무시예 행사를 그린 그림. 서총대에서 문무 신료들에게 행했던 활쏘기와 제술(시와 문장) 양시에서 모두 으뜸으로 뽑힌 양응운에게 말 두 필을 하사한 기념으로 그렸다. /국립문화재연구원 제공 ‘순종의 소일거리를 만든다?’  매국노 이완용·이윤용 형제와 고미야 간 ‘수상한 대화’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이미 1905년부터 통감정치를 밀어붙인 일제는 황제권을 축소하는 조치를 합니다. 급기야 1907년 7월 “궁궐이 무질서하다”는 이유로 궁궐 출입을 제한하는 ‘궁금령(宮禁令)’을 내립니다. 궁중에 출입하려면 일본 경무고문부의 허가증을 얻어야 했습니다. 게다가 궁궐 내 인원을 1만명이나 삭감했답니다. 여기에 일제는 헤이그 밀사 사건 이후 강제 퇴위한 고종을 덕수궁에 머물게 하죠. 새로 즉위한 순종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도록 합니다. 고종과 순종은 연금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순종의 새로운 거처로 낙점된 창덕궁은 수리공사에 들어갔고요. 당시 공사 총책임자가 궁내부 차관인 고미야였습니다. 이때 이완용 형제가 순종의 소일거리를 마련해주자고 제안한 거고요. 그 말을 들은 고미야가 이틀 만인 1907년 11월 6일 ‘창경궁 동·식물원 및 박물관 설립계획’으로 맞장구를 친 겁니다. “창경원은 이토 히로부미의 작품”  이 무렵 궁내부에 근무했던 일본인 곤도 시로스케(權藤四郞介)는 다른 증언을 합니다. 당시 5~20원에 거래되던 고려청자는 창경궁 박물관이 시장에 나서자 천정부지로 솟았다. ‘청자 포도 동자 무늬 표주박 모양 주전자 및 받침대’는 950원(10억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구입했다.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가 궁내부 대신(장관)인 민병석(1858~1940)과 차관인 고미야에게 ‘박물관과 동·식물원의 설립’ 등을 명했다는 겁니다(곤도의 <이왕궁 비사>·1926). 하기야 그런 거창한 계획은 고미야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을 겁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주도한 계획을 이완용 형제가 제안하는 형식을 취했을 가능성이 짙습니다. 아니면 원래 계획하고 있던 와중에 이완용 형제가 “황제의 소일거리” 운운하니까 ‘옳다구나’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로써 창경궁 내 박물관 및 동·식물원 설립 계획은 일사천리로 추진됩니다. 1908년 봄부터 경성에서 사립동물원을 경영하고 있던 유한성이라는 인물을 스카우트했고요. 유한성이 보유 중이던 곰·원숭이·낙타 등의 동물을 구입해 동물원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인이 주동이 돼 식물원도 조성했습니다. 창경궁 내의 경춘전, 통명전, 명정전, 양화당 등의 각 전각을 수리해 박물관 진열관으로 사용했습니다. 진열품 수집도 시작됐는데요. 이게 큰 문제였습니다. 19세기 말부터 한반도 전역에 일본인 도굴꾼이 득세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일본인들은 개성과 강화도 등 고려 왕·귀족의 무덤을 마구 파헤쳐 고려자기를 수중에 넣었는데요. 바로 이러한 도굴품들을 막 문을 연 창경궁 박물관이 사들인 겁니다. 당시 고려자기 값은 대략 5~20원 사이였는데요. 박물관 측은 그러나 ‘청자 포도 동자 무늬 표주박 모양 병’의 경우 골동품업자로부터 950원이라는 고가에 구입했어요. 지금 돈으로 10억원가량 된다고 합니다. 옛 절터에서 무단 반출된 불상 등도 마찬가지였죠. 1912년 당시 돈 2600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돈을 주고 사들인 국보 반가사유상(옛 83호)이 있습니다. 출처가 불분명한 도굴품을 왕립박물관이 세탁해준 셈입니다. “순종을 투명그릇에 가둬 전시했다”  그렇게 궁궐이었던 ‘창경궁’은 박물관 및 동·식물원이 조성된 ‘창경원’으로 격하됐는데요. ‘궁’ 명칭이 공식적으로 ‘원’이 된 것은 1911년 4월 26일입니다(<순종실록> 부록). 순종은 “진기한 동·식물과 문화 유물을 백성과 함께 즐기고 싶다”면서 ‘창경원’의 대중관람을 지시했답니다.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조성하겠다는 계획은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의 작품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토는 궁내부 대신(장관)인 민병석과 차관인 고미야에게 ‘박물관과 동·식물원의 설립’ 등을 명했다는 것이다.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그러나 일제강점기의 경성 안내서는 “경성 박물관 및 동·식물원은 이토 히로부미가 왕가의 오락을 겸하고 공중의 관람에 이바지할 목적으로 계획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일제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대한제국과 황실의 위상이 추락하고 황제가 더 이상 존경과 위엄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창경궁에 동·식물원과 박물관을 조성·개방한 겁니다. ‘원(苑)’ 자의 본뜻이 “울타리를 쳐서 짐승과 나무를 키우는 곳”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창경원 조성을 기획한 고미야가 평소 소름 끼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조선병합 이후 외국에서 일본이 이왕가를 후히 대우하고 있음을 알게 하는 게 중요하다. 실정을 알려야 한다. 따라서 창덕궁(창경궁 포함)은 ‘투명한 유리그릇에 넣은 물체’처럼 명백하게 보이는 것이 좋다.”(<이왕궁 비사>) 대체 이게 무슨 소린가요? ‘순종을 창경원의 유리그릇(사육장)에 넣은 물체(동·식물)’로 취급했다는 것이 아닌가요. 반대의 목소리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유서 깊은 궁전에 불상과 고기물, 시체를 넣었던 관곽마저 진열하고 일반인들이 흙 묻은 발(土足)로 출입게 하는 일이 말이 되냐”는 여론이 있었죠. 하지만 그와 같은 여론은 일축됐습니다. 밤벚꽃놀이, 일탈의 장소로 전락한 ‘창경원’  그렇게 개방된 창경원은 갈수록 태산이 됐습니다. 1918년 무렵부터는 그 유명한 벚꽃놀이가 ‘창경원’에서 시작됩니다. 창경원 설립을 두고 반대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유서 깊은 궁전 건물을 박물관으로 조성해 불상과 고기물, 시체를 넣었던 관곽마저 진열하고 일반인들이 흙 묻은 발(土足)로 출입게 하는 일이 말이 되냐”는 여론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그와 같은 여론을 일축했다.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서울에 머물던 일본인이 1908년 무렵 창경궁 등에 심은 벚나무가 화려한 꽃을 피운 겁니다(1939년 4월 16일 매일신보). 창경궁은 해마다 4월이 되면 ‘놀이동산’으로 전락합니다. 1924년 봄부터는 ‘창경원 밤벚꽃놀이(야앵·夜櫻)’가 시작되고요. “창경원 동물원의 울타리를 이룬 벚꽃 가지에… 꽃봉오리가 맺기 시작… 해마다 꽃이 필 때마다 밤에도 열어달라는 여론이 많았다…. 금년 봄 벚꽃이 만발하는 2~3주일간 야간개장하고 수천 개의 전등을 장식할 계획….”(동아일보 1924년 3월 11일) “모두 마음이 들떠서 야앵! 야앵! 말하느니 야앵이요, 가느니 야앵이라. 분을 한껏 바르고 향수를 뿌린 모던 걸에게 장난을 걸 때 양복 친구들의 시선은 으슥한 곳으로 혹은 젊은 여자들의 다리로 꽂혔다.”(<별건곤> 1930년 5월) 창경원은 그렇게 일탈의 장소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창경원과 청와대?  어떻습니까. ‘창경궁’ 명칭 회복 30주년 기념행사를 계기로 ‘창경궁(원)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살펴보았는데요. 지난해인가요. 일반에 개방된 청와대에서 패션잡지의 화보 촬영 소식이 전해지자 ‘창경원’이 소환됐죠.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전락시킨 일제강점기가 연상된다는 비판이 일었죠. 저는 이러쿵저러쿵 평가하지 않겠습니다. 본래 역사는 받아들이는 자의 몫이니까요. 주어진 팩트를 토대로 독자 여러분이 나름의 평가를 하면 됩니다. 다만 살펴보았듯이 창경궁에 600년의 파란만장한 역사가 담겨 있죠. 지금의 청와대에는 그보다 더 오래된 1000년의 역사가 깃들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됩니다. 1101~1104년에 조성된 고려 제3의 도읍인 남경터가 자리 잡고 있었고, 조선시대 내내 국왕을 위해 충성을 맹세한 장소인 ‘회맹단’이 존재했으며, 경복궁 중건(1865~1868)과 함께 궁궐의 후원이 됐고, 그 후에는 조선총독의 관저로 기능했죠. 해방 이후 역대 대통령의 공간으로 존재한 것은 1000년 중 80년도 채 안 된 짧은 기간에 지나지 않죠. 어떤 경우든 청와대의 공간과 관련된 역사성을 제대로 연구·공부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고고학과 역사를 공부하는 연구자들도 선뜻 나서는 이들이 별로 많지 않은 것 같아서요. 제2의 창경원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말입니다. 창경원, 창경궁 이야기하면서 불쑥 청와대 이야기를 꺼낸 이유입니다.
이기환의 Hi-story
[이기환의 Hi-story](30)“창경궁이 ‘벚꽃놀이 최대명소’ 됐던 사연(2022. 04. 18 13:32)
2022. 04. 18 13:32 문화/과학
지난 4월 7~8일 답사차 경북 경주에 다녀왔는데요. 깜짝 놀랐습니다. 신라의 천년고도인 경주가 온통 벚꽃 천지더군요. 김유신장군묘 주변이나 보문단지 같은 곳은 물론이고요. 다른 곳도 온 길가에 벚꽃으로 터널을 이루고 있고,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비가 장관을 이루더라고요. 1955년 봄 벚꽃이 활짝 핀 창경궁의 전경 / 경향신문 자료사진 서울로 돌아오니 이번에는 여의도 윤중로 벚꽃이 탐스럽게 피었더라고요. 제가 사는 경기도 파주의 길가 곳곳에도 막 꽃봉오리를 터뜨리기 시작했고요. 요즘 사람들은 반짝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시드는 벚꽃길을 따라 북상(혹은 등산)한다는군요. ‘벚꽃 엔딩’을 즐기며 흐드러진 봄날을 만끽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벚꽃에 열광하는 요즘 세태에서 한가지 잊었던 기억이 떠오르더군요. 바로 ‘창경궁(원) 벚꽃놀이’였습니다. 그리 먼 이야기도 아닙니다. 1980년대 초까지 ‘창경궁’이 ‘벚꽃놀이의 성지’였으니까요. 여기서 한가지 걸리는 게 있죠. 창경궁이라면 조선의 5대 궁궐 중 하나인데 왜 그곳이 ‘벚꽃놀이의 최대명소’가 됐을까요. 진달래야말로 조선의 대표 명화 우선 전제해야 할 게 있는데요. 벚꽃놀이가 한국 고유의 전통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수필가·시인인 차상찬(1887~1946)이 대중잡지인 ‘별건곤’ 1929년 4월호에 기고한 글을 볼까요. “무궁화를 조선의 명화(名花)라 하지만 실은 진달래(杜鵑花)가 조선을 대표하는 꽃이다…. 색태가 미려하고 향취가 좋으며, 조선 어느 곳에서도 핀다…. 조선인이 외국에서… 진달래를 본다면… 마치 고국에 돌아온 것과 같이 반가운 생각이 난다. 일본 사람의 사쿠라 애착심 못지않다.” 조선에서 벚나무는 화살제조용으로 쓰였지, 감상용으로 여기지 않았답니다. 때문에 일본처럼 많은 벚꽃 명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일본 국화인 벚꽃이 다른 곳도 아닌 조선의 궁궐에 대량으로 심어졌을까요. 원래 서울의 벚꽃놀이 원조 명소는 창경궁이 아니었답니다. 1910년대에는 우이동 계곡이었다는데요. “4000~5000명의 내선인(일본인·조선인)이… 우이동 사쿠라꽃(벚꽃)을 보러 와서… 춤추는 일본 기생 옆에서 술판을 벌이고 맥주병으로 나발을 불고 있던 사람은 ‘좋다! 잘 춘다’고 한다….”(매일신보 1913년 4월 22일) 그런데 점차 벚꽃을 즐기는 상춘객들의 행렬이 창경궁으로 모여듭니다. 이 대목에서 또 한 번 궁금증이 들죠. 왜 하필 조선의 궁궐이었던 창경궁이었을까요. 창경궁은 세종(재위 1418~1450)이 상왕인 태종(재위 1400~1418)을 위해 조성한 궁궐이었습니다. 성종(재위 1469~1494) 때는 대비전의 세 어른, 즉 세조(재위 1455~1468)의 정비인 정희왕후(1418~1483), 덕종비인 소혜왕후(인수대비·1437~1504), 예종의 계비인 안순왕후(1445~1499)를 모시려고 수리했습니다. 이후에도 국왕과 왕가의 출입이 잦았는데요. 그런 신성한 궁궐이 벚꽃놀이터가 된 겁니다. 거기에는 망국의 슬픈 사연이 담겨 있습니다. 우이동에서 창경궁으로 1907년 고종(재위 1863~1907)이 헤이그 밀사 사건 때문에 강제 퇴위되고 순종(재위 1907~1910)이 즉위하죠. 순종은 고종과 함께 머물고 있던 덕수궁에서 나와 홀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깁니다(1908년 11월). 이 무렵 대한제국은 ‘정미7조약’에 따라 각 부처에 일본인 차관을 두게 되는데요. 이때 궁내부 차관으로 임명된 자가 고미야 미호마쓰(小宮三保松·1859~1935)였습니다. 매국노 형제인 이완용(1858~1926·총리대신)·이윤용(1854~1939·궁내부 대신)이 고미야를 만납니다. 일제가 심은 벚나무를 없앤 창경궁. 잠깐 화려한 꽃을 피우는 벚꽃 대신 사철 다양한 모습으로 자라는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제공 “순종이 부왕(고종)과 떨어져 살아야 할 운명이어서 매우 우울해하고 있으니 소일거리를 찾아주면 어떠냐”고 운을 뗀 겁니다. 고미야는 “그러면 창경궁 안에 동물원과 식물원, 박물관을 조성하면 어떠냐”고 제안했는데요. 이후 일사천리로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이 들어서는 작업이 마무리되었고요. 순종은 “진기한 동식물과 문화유물을 백성과 함께 즐기고 싶다”고 개방을 선언했고요. (<순종실록> 1909년 11월 1일) 이어 1911년 4월 26일부터는 ‘창경궁’이 아니라 ‘창경원’으로 일컬어집니다. 사쿠라가 너무 그리워서… 그사이 일제가 한술 더 뜬 게 있었는데요. 창경궁(원)에 벚꽃을 심은 거죠(1907~1909). 그럴 이유가 있었습니다. 한반도로 건너온 일본인 수가 급증했거든요. 1900년에 1만6000여명에서 1910년에는 17만명을 넘겼습니다. 그러다 보니 해마다 봄만 되면 일본에서 즐겼던 벚꽃놀이 생각이 간절했던 건데요. 1939년 4월 16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기사를 볼까요. “30여년 전(1908~1909) 구한국(대한제국)에 머물던 내지인(일본인)들이 일본 국화(國花)인 사쿠라(벚꽃)를 그리워했다. 이때 창경원, 창덕궁, 경복궁 등에 5~6년 된 사쿠라나무를 내지(일본)에서 갖다가 심은 것이 조선 사쿠라의 시초다.” 이때 일본에서 가져온 벚꽃나무가 ‘소메이요시노(染井吉野)’ 300그루였습니다. 이후 매년 보·증식을 계속해 2000그루 이상이 됐다네요. 창경궁은 1908~1909년 사이에 심은 벚꽃이 10년 정도 자란 1918년부터 ‘놀이동산’으로 전락하게 된 겁니다. 1924년 봄부터는 ‘창경원 밤벚꽃놀이(야앵·夜櫻)’가 시작됩니다. “창경원 동물원의 울타리를 이룬 벚꽃 가지에… 꽃봉오리가 맺기 시작… 해마다 꽃이 필 때마다 밤에도 열어달라는 여론이 많았다…. 금년 봄 벚꽃이 만발하는 2~3주 야간개장하고 수천개의 전등을 장식할 계획….”(동아일보 1924년 3월 11일) 특히 요즘의 여의도 윤중로 조명발이 부럽지 않을 정도였답니다. “경기도 수원의 전체 수요전등이 18만와트라는데… 창경원에 20만와트 조명이 불야성을 이뤘다…. 춘당지 연못가의 네온탑은 오색찬란한데 연못 가운데 장치한 분수는 하늘 높이… 네온 위로 안개같이 내려 몽환경을 이뤄….”(매일신보 1936년 4월 29일) 일본은 벚꽃이 자국의 용사를 상징한다고 여겼다. 태평양전쟁 와중에 자살특공대인 가미카제(神風)의 출격 때 벚꽃가지를 흔들며 전송했다(왼쪽). 오른쪽은 만 18세인 가미카제 특공대원이 출전 직전 사쿠라(벚꽃)가지를 꽂고 찍은 사진이다. / 오오누키 에미코 지음 밤벚꽃놀이가 일탈의 장으로 그러나 야간개장을 허용하자 숱한 부작용이 연출됩니다. “장안의 사람이라 생긴 사람은… 모두 마음이 들떠서 야앵! 야앵! 말하느니 야앵이요, 가느니 야앵이라.”(‘별건곤’·박우석) 또 “분을 한껏 바르고 향수를 뿌린 모던 걸에게 양복 친구들이 장난을 걸 때 남성들의 시선은 으슥한 곳으로 혹은 젊은 여자들의 다리로 꽂혔다”는 기사도 보입니다.(‘별건곤’ 1930년 5월) “창경원의 ‘밤벚꽃’은 꽃구경보다 사람구경이요…. 창경원을 휩쓸고 다니다가 좀 인적이 드문 데서 여자만 만나면 그저 ‘히야까시’(희롱)이다.”(동아일보 1935년 4월 20일) 밤벚꽃놀이가 일탈의 무대로 전락하고 만 겁니다. “밤벚꽃의 짧은 시간을 흥에 겨워 뛰놀자는 풍류객(?)들이 삐루(맥주)와 월계관(정종)을 몰래 들여와 ‘부어라 먹자’ 하며 창경원이 좁다 하고 떠든다….”(동아일보 1935년 4월 12일) 창경원 벚꽃놀이를 즐기는 자들의 반 이상이 일본인들이라는 기사도 보이네요. “…이게 웬일인가? 창경원이면 조선 창경원일 텐데… 아무리 봐도 조선 같지 않아! 그도 그렇겠지. 입장자의 반 이상은 게다(일본인) 친구요, 나머지 반 중 반은 조선사람, 그 나머지는 양복 신사인가.”(‘별건곤’ 1930년 5월) “술에 취한 게다(ゲタ·일본인) 친구들이 ‘꽃은 사쿠라, 사람은 무사(花は櫻 人は武士)’를 외치며 돌아다닌다. 칼이 없어서 그렇지 혹여 ‘기리스테(キリステ·무사에게 무례한 짓을 한 평민을 칼로 쳐 죽이던 일)’가 나오지 않을지….”(‘별건곤’ 1930년 5월) 벚꽃잎처럼 떨어지는 창경원 야간 벚꽃놀이는 만주사변(1931)-중일전쟁(1937)-태평양전쟁(1941)을 거치며 전시체제에 돌입한 와중에도 중단되지 않습니다. 일제는 오히려 ‘한송이 두송이 연연하게 피는 벚꽃은… 우리 일선의 용사”(매일신보 1942년 4월 19일)라고 선전했는데요. 벚꽃잎처럼 화려하게 폈다가 단번에 떨어지는 벚꽃의 이미지를 사무라이 정신에 대입시킨 겁니다. ‘떨어지는 벚꽃잎’을 일왕과 국가를 위한 희생으로 여긴 겁니다. 밤벚꽃놀이가 전쟁 부상병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펼쳐지는데요. “용산 육군병원에서 입원 중인 용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비원(창덕궁 후원)에서 다과를 베푼 뒤 창경원 밤벚꽃놀이 행사를 벌였다”(매일신보 1941년 4월 23일)고 했습니다. 벚나무가 웬만큼 자란 1918년부터 창경원은 벚꽃명소가 됐다. 교통이 불편한 우의동을 대신한 것으로 1924년 벚꽃철부터는 해마다 야간에도 개장했다. / 서울역사박물관 더욱이 이런 행사는 “잠시나마 위안할 기회를 만들어주라 하시는 이왕 전하(영친왕)의 황송하신 분부를 받자와 해마다 진행됐다”(조선일보 1939년 4월 21일)고 했습니다. 이왕가가 태평양전쟁을 지지하고 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겁니다. 심지어 “(전쟁 동맹국인) 이탈리아 사절단도 벚꽃을 구경한 뒤 ‘교태 많은’ 기생들의 접대를 받으며 조선요리를 먹고, 하룻밤을 즐겼다”는 기사까지 등장합니다.(매일신보 1938년 4월 24일) 사쿠라로 창씨개명된 벚꽃 물론 벚꽃의 원산지가 한반도, 그것도 제주도산이라는 게 일제강점기에 연구·발표됐습니다. 즉 1932년 고이즈미 겐이치(小泉源一·1883~1953) 일본 교토대(京都大) 교수가 한라산의 해발고도 약 600m 되는 곳에서 왕벚나무의 자생지를 발견한 건데요. 일제강점기에 경성사범 생물교사였던 우에다 츠네카즈(上田常一)의 경성일보 기고문(1933년 4월 27일)에 나옵니다. “경성에 심은 벚나무는 일본 묘목을 이식한 것이다. 원래 그 원산지는 제주도인데 그 옛날 물고기를 잡으러온 어부 등이 일본으로 전파했을 것이다. 이것이 온난한 일본에서 엄청난 기세로 번식해 그 자손이 조선땅을 다시 밟은 것….” 또 시인·수필가인 차상찬은 조선일보 1933년 5월 2일자에 비슷한 이야기를 꺼냅니다. “사쿠라라 하면 흔히 일본에서 온 것으로만 알고 재래 조선에도 많이 있다는 것을 잘 모른다. 근래 각 도시에 새로 이식한 벚나무는 일본산이지만 각 지방의 산지에 있는 꽃은 재래 조선 것이다. 어떤 식물학자는 일본의 사쿠라도 조선(특히 제주지방)에서 이식한 것이라 했다. 그러고 보면 일본 사쿠라가 조선에 온 것은 마치 시집간 딸이 친정에 온 격이다.” 차상찬은 “이렇게 당당한 이름(벚꽃)이 있는데 사쿠라로 일컫는 것은 ‘김서방’을 ‘김태랑(金太郞)’으로, 명동을 ‘명치정(明治町)’으로 각각 개명한 것이나 다름없다”(‘별건곤’ 1929년 4월호)고 개탄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창씨개명’이 1940년 초부터 본격 시행됐지만, 벚꽃의 경우엔 이미 최소한 1920년대부터 조선인도 모르는 사이에 ‘사쿠라’로 개명됐다는 뜻이 아닌가요. 일제에 의해 이식된 문화 이후 창경원 벚꽃놀이는 봄을 알리는 전령사의 동원령이 돼 조선인들의 마음을 마비시켰습니다. “서울 사람들은 창경원에 꽃소동이 나야 봄을 깨닫고 봄에 취하는 버릇이 있다”(조선일보 1938년 4월 7일)든가, “시민들의 발길이 절로 반응하니 벚꽃은 마음의 흥분제냐, 마취제냐”(동아일보 1940년 4월 12일)라든가 하는 이야기가 있죠. 일제는 어쩌면 1년 365일 가운데 벚꽃이 피었다 지는 그 며칠만 식민지 백성들에게 마음껏 놀 자리를 제공했던 게 아닐까요. 그 기간에 새로운 통치자인 일본의 아량을 베풀면서 말입니다. 그사이 우리는 창경원이 한때는 궁궐이었다는 사실도, 벚꽃놀이 문화가 일제에 의해 이식된 문화라는 사실도 잊어버렸고요. 그랬으니 제가 20대가 될 때까지인 1983년까지 창경원 벚꽃놀이가 꾸준히 이어진 거죠. ‘창경원’의 벚꽃놀이 문화는 ‘창경궁’이라는 이름을 회복하면서 사라졌죠. ‘사쿠라(櫻)’라는 이름도 완전히 떨쳐버리고 ‘벚꽃’이라는 멋진 이름도 되찾았고요. 지금은 창경원 벚꽃놀이와는 전혀 다른 벚꽃 문화를 누리고 있답니다. 어떤 연구자는 그것을 한국식 벚꽃 문화라 하더군요. 그럼에도 지금 우리가 해마다 즐기고 있는 벚꽃 문화가 어떤 과정을 거쳐 이식·변모했고, 결국은 사라지게 됐는지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새삼 벚꽃 이야기를 들추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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