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총 3,297 건 검색)
- 경남 출신·활동 독립운동가 12명 서훈 신청
- 2024. 12. 19 11:16 사회|지역
- ... 일제 식민지, 제국주의 현실을 참고 견디자’는 글을 지어 동급생들에게 낭독했다. 경남 함양군 출신 김병용 선생은 1932년 전남 보성군에서 동료들과 항일격문 700매를 인쇄·배포해 징역 10월,...
- 윤 대통령, 탄핵 가결 전 채명성 법률비서관 임명…박근혜 탄핵 심판 대리인단 출신
- 2024. 12. 17 17:22 정치|정치
-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또 인사권 행사 용산 대통령실 청사 전경. 대통령실 제공 윤석열 대통령이 국회 탄핵소추안 가결 전 대통령실 인사를 단행한 것으로 17일 알려졌다. 여권 고위 관계자는 윤 대통령이...
- 윤석열 탄핵 정국
- ‘반군 행정부’ 출신 총리, 테러단체 낙인 벗고 시리아 안정시킬까
- 2024. 12. 11 20:30 국제
- 과도정부 이끌 알바시르 내년 3월1일까지 운영 임무 미 “새 정부 인정·전적 지원” 혼란 수습 안 돼 미래 불투명 시리아 과도정부 총리로 반군 행정조직을 거친 무함마드 알바시르(41·사진)가 추대됐다....
- 시리아중동 전운 고조
- 시리아 과도정부 총리에 반군 행정부 출신 알바시르…‘테러단체’ 딱지 뗄까
- 2024. 12. 11 15:26 국제
- 시리아 과도정부 총리로 추대된 무함마드 알바시르(41). AFP연합뉴스 시리아 과도정부 총리로 반군 행정 조직을 거친 무함마드 알바시르(41)가 추대됐다. 국제사회는 과도정부를 환영하는 한편, 반군이...
- 시리아
스포츠경향(총 4,214 건 검색)
- ‘모모랜드’ 출신 주이, 유튜브 토크쇼 론칭···‘주주네일’서 네일아트+토크 케미
- 2024. 12. 21 16:06 연예|연예
- ‘주주네일’ 에피소드 0 영상 캡처 그룹 모모랜드 출신 주이가 유튜브 토크쇼 ‘주주네일’로 활동 기지개를 켠다. 주이는 21일 오후 4시 유튜브 채널 ‘주이 JooE’를 통해 토크쇼 ‘주주네일’ 에피소드 0 영상을 공개, 첫 자체 콘텐츠 오픈을 공식화했다. 토크쇼 ‘주주네일’은 주이가 게스트들의 네일을 꾸며주며 이야기를 나누는 콘텐츠로, 주이의 숨겨둔 네일아트 실력과 토크 케미를 확인할 수 있다. ‘주주네일’ 에피소드 0 영상에서는 주이의 근황과 우주소녀 다영, 하이키 휘서 등 게스트 라인업이 예고됐다. 오랜만에 카메라 앞에 선 주이는 “공백기 때 Mnet ‘퀸덤퍼즐’을 하고 있다가 지금의 회사를 만나 이렇게 네일샵을 차렸습니다”라며 토크쇼 ‘주주네일’을 소개했다. 근황 큐앤에이(Q&A)에 답하던 주이는 과거 대히트를 쳤던 트로피카나 댄스를 안무가와 직접 만들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주이는 “안무 선생님과 제가 과일 별로 안무를 짰다. 6시간을 안 쉬고 찍었는데, 힘들었지만 촬영은 너무 재밌었다. 그게 첫 광고였다”라며 활동 일화를 전했다. 앞서 주이는 지난 2016년 그룹 모모랜드 멤버로 데뷔해 상큼하면서도 밝은 캐릭터로 대중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후 오늘엔터테인먼트와 전속계약을 맺으며 새 출발을 알렸던 주이는 유튜브 토크쇼 ‘주주네일’로 매주 팬들을 찾아올 예정이다. 주이의 토크쇼 ‘주주네일’은 매주 화요일 오후 7시 유튜브 채널 ‘주이 JooE’를 통해 새로운 에피소드를 공개한다.
- 걸그룹 멜로디데이 출신 여은, 22일 새 싱글 ‘아프잖아 너 때문에’ 전격 발매
- 2024. 12. 20 12:00 연예|연예
- 지니록스 가수 여은이 가슴 시린 이별 발라드 신곡으로 겨울 감성을 흔든다. 오는 22일 오후 6시 각종 온라인 음원사이트에서 여은의 새 디지털 싱글 ‘아프잖아 너 때문에’가 발매된다. ‘아프잖아 너 때문에’는 마지막 사랑이라고 믿었지만 거짓말처럼 한순간에 사라져버린 모진 현실에 대한 아픔과 슬픔을 담은 이별 발라드 곡이다. 애절한 멜로디에 ‘보이지도 않고 볼 수도 없는 상처로 남아 이따금씩 날 아프게 해 견뎌낼 수가 없어/얼마나 지나야 아물거니 언제쯤 무뎌지니 끝이 없는 아픔에 자꾸 눈물이 나’와 같이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노랫말이 더해져 감정을 고조시킨다. 여은 특유의 감성 깊은 보이스와 섬세한 완급 조절, 폭발적인 고음으로 또 하나의 명품 이별 신곡을 탄생시킬 계획이다. 이 곡은 다양한 장르의 앨범과 OST를 만든 필승불패W, 리디아(Lydia), 장석원이 힘을 합쳐 완성도를 높였다. 여은은 걸그룹 멜로디데이 출신으로, ‘후회한다고 말해’, ‘늦은 밤 잠들어 있을 너에게’, ‘우리 헤어지자’, ‘너무 힘들잖아’, ‘이별하는 중’, ‘그래도 이젠 보내줄래’, ‘마지막 사랑’, ‘미워도 사랑해요’ 등 여은 만의 색깔이 담긴 앨범을 선보이며 꾸준한 음악 활동을 펼치고 있다. 여은의 신곡 ‘아프잖아 너 때문에’는 오는 22일 오후 6시 각종 온라인 음원사이트에서 발매될 예정이다.
- 엠넷 ‘아이랜드’ 출신 세온, 크리스마스 맞아 신곡 ‘With You’ 발매
- 2024. 12. 20 11:05 연예|연예
- JMG(더블엑스엔터테인먼트) Mnet ‘I-LAND’(아이랜드) 출신 세온(SÉON)이 추위를 잊게 할 크리스마스 곡을 내놓는다. 20일 정오 각종 음원사이트를 통해 세온의 새 디지털 싱글 ‘With You’(위드 유)가 베일을 벗는다. ‘With You’는 세온이 크리스마스를 맞아 선보이는 곡으로, 세온의 따뜻한 음색 위에 싱어송라이터 프리다앤의 피처링이 더해져 겨울의 감성적인 분위기를 물씬 느끼게 한다. 더불어 부드럽게 연주되는 어쿠스틱 악기들은 몽글몽글한 느낌을 증폭시킨다. 세온이 작곡, 작사에 참여한 ‘With You’에는 크리스마스를 너와 함께 보내고 싶다는 메시지가 담겨 리스너들의 상상력을 더욱 자극한다. 특별한 크리스마스를 기대하게 만드는 세온의 ‘With You’에 팬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세온은 일본 오사카 추가 공연 ‘CHOI SEON JAPAN LIVE 2024’(최세온 일본 라이브 2024)를 성황리에 마친 바 있다. 감미로우면서도 세련된 곡들로 일본 팬들을 사로잡은 세온이 이번에는 크리스마스 곡으로 다시 찾아온 만큼, 국내 팬들 기대가 커지고 있다. 프로듀서이자 솔로 아티스트로 활동 중인 세온은 앞서 Mnet ‘I-LAND’(아이랜드)에 참가하며 국내외 팬들에게 이름을 알렸다. 세온의 새 디지털 싱글 ‘With You’는 20일 정오 각종 음원사이트를 통해 공개가 된다.
- 결국 컵스를 떠나는 ‘신인왕·MVP 출신’···양키스, 트레이드로 컵스에서 벨린저 영입
- 2024. 12. 18 07:13 야구
- 코디 벨린저. 게티이미지코리아 결국 코디 벨린저가 시카고 컵스를 떠나게 됐다. 그의 새 행선지는 다름 아닌 뉴욕 양키스다. 미국 스포츠전문매체 ESPN의 제프 파산은 18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벨린저가 양키스로 트레이드됐다는 소식을 알렸다. YES 네트워크의 잭 커리는 양키스가 벨린저를 영입하는 대가로 컵스에 오른손 투수 코디 포팃을 주기로 했다고 전했다. 이와 함께 컵스로부터 연봉 보조를 500만 달러 받는다고 덧붙였다. 벨린저의 2025년 연봉은 2750만 달러이며, 2026년에는 2500만 달러에 달하는 옵션이 있다. USA투데이의 밥 나이팅게일은 “벨린저가 양키스에서 중견수로 뛰고 싶다고 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코디 벨린저. 게티이미지코리아 양키스는 후안 소토가 뉴욕 메츠로 떠나면서 외야수 한 자리 보강이 절실했다. 이에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카일 터커를 노리고 있었으나, 양키스에 앞서 컵스가 터커를 트레이드로 영입하면서 무산됐다. 이에 다른 선택이 필요했는데, 마침 터커 영입으로 외야진 정리가 필요했던 컵스와 의견 일치가 됐다. 벨린저는 컵스가 터커를 영입하면서 스즈키 세이야와 함께 트레이드 후보 중 하나로 꼽혔다. 타격 능력은 인정받는 스즈키는 수비가 불안하다는 것이 약점이었고, 벨린저의 경우 계약 첫 해 하향세를 보였다는 점이 불안요소였다. 컵스는 고민 끝에 스즈키를 남기고 벨린저를 떠나보내는 쪽을 선택했다. LA 다저스에서 뛰던 2017년 내셔널리그 신인왕을 수상하고 2019년에는 MVP까지 받았던 벨린저는 이후 급격한 하향세를 타다가 2022시즌 후 FA가 돼 컵스와 1년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2023시즌 타율 0.307 26홈런 97타점으로 반등에 성공한 뒤 컵스와 3년 8000만 달러에 계약했다. 하지만 올해 130경기에서 타율 0.266, 18홈런, 78타점, 72득점에 그쳤다. 코디 벨린저.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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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사 출신 의원들, 의료대란 진단과 처방 왜 다를까(2024. 09. 30 06:00)
- 2024. 09. 30 06:00 정치
- 안철수·이주영 적극적…대부분 초선이라 제대로 못 나서 지난해 말 국회 의원회관에서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과 인요한 혁신위원장이 면담을 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결국 의료시스템이 붕괴되는 길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의사 출신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 9월 19일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진단한 현재 의료계 상황이다. 컴퓨터 바이러스 전문가로 널리 알려졌지만, 안 의원은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단국대 의대 교수로 활동했다. 안 의원은 “대통령이 의과대학 교육이 뭔지도 모르면서 자신 있게 이야기한다”라고 비판했다. 4선 안 의원의 처방은 비관적 진단에서 나오는 만큼 극단적이다. 내년인 2025학년도 의대 입학 정원까지 논의 대상에 포함해야 전공의들이 돌아오고, 의료시스템이 정상화된다고 보고 있다. 이미 진행 중인 내년 대입 수시 입학 절차까지 재검토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안 의원 측은 “안 의원은 오래전부터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대책을 촉구해왔으나, 주변에서는 그의 주장을 비현실적이라고 무시해왔다”며 “최근 그의 말이 옳았음이 입증되고 있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한 대표의 ‘심각’ 인식 배경엔 한지아 의원 같은 여당이면서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 출신인 인요한 의원의 처방은 다르다. 최고위원이기도 한 인 의원은 지난 9월 9일 최고위원 회의에서 의료계에 정치권과의 협상을 호소했다. 의료위기를 겨우 넘긴 추석 이후에는 최고위원 회의에서 더 이상 의·정갈등을 언급하지 않았다. 친윤(친윤석열)계로 분류되는 인 의원은 정부의 2000명 의대 증원 강행에 보폭을 맞춰왔다. 진단과 처방 역시 ‘의료개혁 추진’이라는 정부·여당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앞서 인 의원은 지난 9월 5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휴대전화를 보다가 ‘수술 청탁성 메시지’를 받은 사실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신뢰도가 떨어져 버렸다. 대표적인 친한(친한동훈)계 인사인 한지아 의원은 을지대병원 재활의학과 교수 출신이다. 한동훈 대표가 의료대란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인식하는 배경에는 한 의원의 조언이 있다. 한 대표는 여·야·의·정 협의체를 제안하며 2026학년도 의대 증원이 논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며 정부보다는 훨씬 더 유연한 입장을 보여왔다. 추석 이후인 지난 9월 19일 한 대표는 “여·야·의·정 협의체가 아니면 이 문제를 풀기 위한 출발이 어렵다”며 “골든타임이 지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의료위기가 없었다’는 여당 원내 지도부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를 낸 것이다. 국민의힘의 한 관계자는 “한 대표가 지금 의료대란의 심각한 양상을 정확히 알고 있는 듯하다”면서 “여기에는 한지아 의원이 큰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국회 보건복지위에서도 활약하는 한 의원은 최근 국민의힘과 의료계 대화 시도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한 의원은 지난 9월 26일 당대표실 앞에서 기자들에게 의료계와의 대화 상황을 설명하며 “의협에서 2025학년도 의대 증원 입장을 내달라고 하므로 어려운 상황”이라며 “내년 의대 증원이 가장 큰 문제”라고 말했다. 한 대표의 처방은 윤석열 대통령과의 독대 시도 실패에서 드러나듯이 한계에 부딪혀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여당 내 의사 출신 의원들도 친윤(인요한)-비윤(안철수)-친한(한지아)으로 나뉘면서 의료대란에 대해 공통된 하나의 해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야당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의료대란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의사 출신 정치인은 이주영 개혁신당 의원이다. 이 의원은 순천향대 천안병원의 소아전문응급센터에서 오랫동안 전문의로 근무했다. 얼마 전까지 현장에서 일해 의료계 문제점을 가장 정확히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의원은 지난 6월 말 국회 보건복지위 청문회에서 슬라이드를 동원해 정부의 일방적인 의료개혁이 향후 10년간 의료시스템을 뒤흔들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전공의들이 결코 현장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과 그것이 어떤 문제를 일으킬지를 정확하게 진단한 것이다. 국회 보건복지위의 한 관계자는 “이 의원이 지금 의료계로부터 가장 신망을 얻는 의사 출신 의원”이라고 평가했다. 의사 출신 의원 해법 근원적 비판도 제기 22대 국회에 들어온 의사 출신 의원은 모두 8명이다. 국민의힘에서 안철수·인요한·한지아·서명옥 의원이, 더불어민주당에서는 차지호·김윤 의원이, 개혁신당에서 이주영 의원, 조국혁신당에서는 김선민 의원이 있다. 이중 한지아·서명옥·김윤·이주영·김선민 의원 등 5명의 의원이 보건복지위에서 활동하고 있다. 안철수·인요한·차지호 의원은 국회 외교통일위에 속해 있다. 서울대 의대 교수 출신인 김윤 의원은 지난 9월 12일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한덕수 총리를 향해 의료대란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다. 사실 김 의원은 오래전부터 의사 증원의 필요성을 역설해왔다. 이 때문에 진작부터 의료계로부터 불신을 받고 있기도 하다. 정부가 의료개혁을 하는 발단을 제공했다는 오해도 받는다. 민주당 한 관계자는 “민주당으로서는 지금 김 의원을 전면에 내세울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민주당은 의사 출신은 아니지만 복지위에서 박주민 위원장과 강선우 간사를 내세워 정부의 2000명 증원 강행을 비판하고 있다. 의사 출신 의원들은 대부분 초선이다. 그 때문에 의료대란이라는 정국 최대 현안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목소리가 당론에 크게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 민주당 관계자는 “의사 출신인 김윤 의원의 해법이 그대로 당에서 수용되기에는 아직 그의 정무 능력이 뒷받침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의사 출신 의원들은 지금 사태의 원인을 가장 정확히 알고 있을 것”이라면서도 “하지만 각 당에서 자신의 입지 때문에 제대로 나서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페이스북을 통해 정부의 의료개혁 강행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이상돈 전 국민의당 의원(중앙대 명예교수)은 “의사 출신 여당 의원들이 정부에 각을 세우고 쓴소리를 했어야 했다”면서 “지금으로서는 다 늦었고, 상황은 모두 끝났다”고 말했다. 이 전 의원은 “의사 출신뿐만 아니라 모든 직역 출신 의원들이 자신이 바로 헌법기관이라는 소신을 갖고 정치를 해야 하는데 국회에 들어간 후 정당의 목소리에 파묻혀 버렸다”고 비판했다. 의사 출신 의원의 의료계 해법에 대해서는 근원적인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민주당 관계자는 “의사 증원 문제를 공급자의 시각에서만 보게 되면 지금 문제가 비록 해결되더라도 이른바 빅5 병원(5대 대형병원) 중심의 왜곡된 형태로 나갈 수밖에 없다”면서 “의료개혁은 철저히 수요자인 국민을 중심에 두고 바라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의료계 출신 의원이 의료개혁을 공급자 문제로만 다루게 되면 그것 역시 또 다른 문제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 [시사 2판4판]검찰 출신 ‘방탄 민정수석’?(2024. 05. 13 06:00)
- 2024. 05. 13 06:00 정치
- 시사 2판4판
- “나는 치타공 언덕 출신 한국인입니다”(2023. 12. 05 07:00)
- 2023. 12. 05 07:00 사회
- 방글라데시 줌머족 선주민 이야기 책으로 펴낸 로넬 차크마 나니씨 난민 인권운동가 로렐 차크마 나니씨가 11월 22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경향신문사 위치 압니다. 이전에도 가본 적 있어요.” 인터뷰 요청을 받은 로넬 차크마 나니씨의 말이다. 그를 추천한 이는 최영일 김포 외국인주민지원센터장이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 이민 개혁 기사를 쓸 때 최 센터장 도움을 받았다. 이주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최 센터장은 “대한민국에 정착한 난민공동체 혹은 들어오는 이민자들의 역사 측면에서 중요한 책 한 권이 발간을 앞두고 있다”며 로넬씨의 책 <치타공 언덕 바르기, 한국을 날다>를 소개했다. 책을 읽어봤다. 흥미로웠다. 1971년 파키스탄에서 벵골 민족이 다수를 차지하는 방글라데시가 독립하면서 치타공 산악지대 역시 방글라데시 영토로 들어갔다. 치타공 산악지대에 살던 선주민 13개 소수민족을 통틀어 일컫는 이름이 줌머족이다. ‘줌머’의 뜻은 화전민(火田民)이다. 그러니까 화전 방식으로 삶을 이어가던 소수민족들이다. 방글라데시 다수를 차지하는 벵골족 정부는 이들을 탄압했다. 인구수만 놓고 보면 압도적이다. 벵골족이 1억6000만명인 반면 13개 줌머족은 통틀어 75만명이었다. 줌머족 사람들은 빼앗긴 자유를 되찾기 위해 싸움에 나섰지만 중과부적이었다. 많은 사람이 삶의 터전이던 치타공 산악지대(언덕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힐트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래에서는 로넬씨의 책 제목에 따라 치타공 언덕으로 표기한다)를 떠나 망명했다. 접경하고 있는 인도나 미얀마를 택한 사람도 있고, 프랑스나 일본, 호주로 건너간 사람도 있다. 이방인으로 전 세계를 떠돌고 있지만, 그들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치타공 언덕을 잊지 못한다. 지금도 방글라데시 정부의 박해·학살 사건이 일어나면 주재국 대사관 앞에 모여 규탄시위를 한다. 로넬씨가 낸 책 제목에 등장하는 ‘바르기’는 그가 속한 줌머 소수민족 차크마족 전설에 등장하는 새다. 바르기는 아이를 재울 때 불러주는 동요에도 등장한다. 전설은 바르기가 나타나면 평화 시대가 온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책 제목에 등장한 치타공 언덕과 한국의 하늘을 나는 ‘바르기’는 평화와 희망의 상징인 셈이다. 지난 11월 22일 경향신문사에서 로넬씨를 만났다. -책을 처음 소개받았을 때는 텀블벅에서 책 펀딩이 진행 중이었어요. 100만원이 펀딩목표 금액이었는데 모두 28명이 참여했더군요. 책을 보면 줌머족 사람들이 서로 돕는, 한국식으로 말하면 상부상조 정도의 의미인 ‘말레야 정신’이라는 것을 거론하던데 한국에 있는 줌머족 분들도 많이 도우셨나요. “네. 10월 7일에 출판기념회 형식으로 토크콘서트를 했는데 그 행사를 줌머족 분들이 준비해주었어요. 그리고 줌머분들이 그 후에도 책을 많이 사주었습니다. 그중에는 한글을 못 읽는 분도 많은데 그래도 사주었어요. 저도 100권 정도 사서 증정했고요. 줌머분들도 그 책을 개인적으로 소장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찾아오거나 그럴 때 알리기 위해 사용할 겁니다.” -재미있게 읽기도 했지만 아주 소중한 기록이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책에 언급된 줌머족 학살사건은 어떻게 보면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5·18보다 더 많은 사람이 희생됐죠. 그런데도 거의 국제적으로 알려지지도 않았어요. 책에 따르면 일본에서 줌머족과 연대하는 활동가들이 현지에 들어가 활동했고, 한국도 국제협력개발기구(코이카)에서 2명이 들어가 활동하려 했는데 방글라데시 정부가 못 들어가게 막았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까. “외국인의 출입은 1997년 평화협정 이후 잠깐 허용될 때가 있었어요. 그러다 나중에 사이사이에 많은 문제가 발생하면서 또 원점으로 돌아간 거죠. 현재 저는 한국 국적인데도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신고를 해서 허가를 받아야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방글라데시 현 집권당은 2009년 이후 선거마다 부정선거를 통해 재집권했습니다. 민주주의 자체가 없어졌어요. 그러니 방글라데시 시민사회에서도 ‘줌머족 박해 문제’에 대한 관심을 못 기울입니다. 줌머족 내 갈등도 있었고요.” -허락을 안 해주는 경우도 있나요. “한때는 아예 방글라데시 입국 허가가 안 났습니다. 특히 줌머 관련 유명 외국인 활동가들은 입국을 거부당했죠. 설령 입국하더라도 여러 제재가 있었어요. 그와 비교하면 그래도 지금은 신청하면 거의 허가가 떨어진다고 하니까 많이 나아진 거죠. 예전에는 방글라데시 수도인 다카의 내무부 허락이 필요했는데, 지금은 대사관에서 신청할 수 있게 된 것도 조금은 개선된 부분이긴 합니다.” -체류계획 같은 것을 제출하고 거기서 누구를 만날지도 사전에 알려야 하나 보죠. “네. 초청장도 필요합니다.” -왜 중국이나 지금은 여행금지가 됐지만 미국 사람들이 북한 여행을 가면 항상 안내원이라는 이름의 감시자가 붙잖아요. 거기도 그렇습니까. “똑같습니다. 거기서는 보호 목적이라는 명분을 붙입니다. 방글라데시 정부 입장에서 우리는 귀화 외국인인데 오리지널 외국인들에 대한 감시가 더 많아요. 혹시 납치당할 수도 있다는 것인데, 실제 내부에 극단주의적인 단체들이 없지는 않습니다. 실제 그런 사건이 과거 있기도 했고요. 보다 본질적인 것은 인권문제 등이 외부에 알려지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에 있는 줌머족 출신들이 ‘재한줌머인연대’라는 단체를 만들고 있잖습니까. 그분들은 현지 가족들과 자유롭게 의사소통이 됩니까. “전보다 조금 쉬워진 것 같긴 합니다. 우리 치타공 언덕 지역에 인터넷이 허용된 게 얼마 안 됐어요. 2010년 전후일 겁니다. 휴대전화도 다른 방글라데시 전 지역에 터지는데, 치타공 언덕 지역에 허용된 건 역시 10여 년 전입니다. 인터넷도 되고 휴대전화도 되니 이제 예전보다 접촉이 쉬워진 건 맞아요.” -1997년 평화협정이 큰 전환점이 됐을 텐데 줌머족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있었을 듯해요. 진짜 평화가 왔냐, 기만이 아니냐는 분들도 있을 텐데. “맞습니다.” -그 뒤에 학살사건이나 박해는 없었습니까. “2008년, 2010년 그리고 2017년까지 세 차례 대규모 방화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벵골인 정착민이 일으킨 건가요. “네. 정부군 비호 아래 벌어진 일입니다. 2010년과 2017년은 큰 사건이고, 그 뒤에도 작은 사건들이 항상 있었습니다. 20번 이상 발생했다는 보고가 나와 있습니다.” -그런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재한줌머인연대 사람들이나 전 세계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사람은 각국 방글라데시 대사관 앞에 가서 항의 시위를 하는 식이었고요. “맞습니다.” 로넬씨의 말에 따르면 줌머 문제에 대한 관심은 날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고 했다. 왜일까. “방글라데시 내부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이에요. 언론 보도를 보면 알겠지만 방글라데시 총선이 내년 1월입니다. 현 집권당이 2009년부터 집권해왔는데 선거마다 부정선거를 통해 재집권을 해왔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옛날로 돌아간 거예요. 민주주의가 사라진 겁니다. 민주주의 자체가 없어졌어요. 그러다 보니 방글라데시 시민사회에서도 ‘줌머 문제’에 대한 관심을 못 기울입니다. 네트워크가 현지의 동참과 지원 없이 우리끼리만 존재하면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우리 내부 갈등 문제도 있습니다. 줌머족이 13개 소수민족이었는데 현재는 11개만 남았어요. 줌머족 정당이 하나만 있었는데 평화협상을 하면서 둘로 나뉘었고, 그 당들이 또 쪼개졌습니다. 분리된 당들끼리도 싸우는데 선거나 정책으로 싸우는 게 아니라 폭력이 난무합니다. 그러다 보니 외부의 활동가들도 어느 한쪽 편을 들기 어려워 애매해지는 거죠.” 책에는 그가 한국에 오기 전 고등학교 시절, 줌머족의 자유를 위해 산티바히니 평화군에 들어가서 싸우다 체포돼 3년 감옥살이를 하는 과정이 나온다. 어떻게 보면 파란만장한 인생이다. 로넬씨는 1994년, 그리고 2002년 한국에 들어와 일하다 2004년 난민 인정을 받았다. 2011년에는 한국 국적을 취득해 현재 난민과 이주민을 위한 상담과 통역, 난민인권강사로 활동 중이다. -책을 보면 재한줌머인연대 회원이 180명이 된다고 썼습니다. 그 180명에는 한국에서 태어난 2세도 포함돼 있습니까. 치타공 언덕 출신으로 줌머인인데 단체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도 있나요. “180명이 거의 다 줌머연대의 구성원이라고 보면 됩니다. 물론 적극적 활동가냐 그냥 구성원이냐의 차이는 있지만요. 어떤 비자로 들어왔든 줌머연대의 회원으로 인정받습니다. 고용비자로 들어온 분도 몇 있어요.” “난민 인정이 돼도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한국 국적이고 이씨로 개명했지만, 진짜 이씨가 될 수는 없어요. 차라리 ‘당신은 당신대로 한국인이고, 나는 나처럼 한국인이다’ 이런 평화를 만드는 것도 방법이 아닌가 싶어요.” -E-9비자로? 방글라데시 정부가 그걸 허락해줍니까. “네. E-9비자로요. 예전에는 아예 없었는데 이제는 벵골인들과 경쟁해서 오는 거죠. 한국에 있는 우리도 다양한 정보를 줍니다. E-9비자로 들어오기도 하고 일부는 한국에 있는 분들과 가족결합 형태로 들어오기도 합니다. 한국은 거의 전부가 줌머인연대에 참여하고 있지만, 미국 같은 데는 아무런 네트워크 없이 나가 있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게 가능한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한국의 행정, 노동부나 출입국관리 사무소가 약간 다른 나라보다 까다롭기도 하고 잘 관리되잖아요.” -그래서 김포지역에 거의 다 모여 사는 건가요. “이런 문제는 서로서로 돕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연대가 잘됩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로넬씨처럼 귀화한 다른 줌머인 가족도 있습니까. “아이와 가족 포함하면 한 50여명 됩니다.” -책에 따르면 로넬씨는 김포 이씨로 해서 ‘이나니’라는 이름을 지었는데 다른 분도 김포 이씨입니까 아니면 따로 성씨를 갖게 된 겁니까. “예를 들어 11개 소수민족 중 ‘턴천가’가 있는데 그 턴천가 중 한 가족이 귀화하면서 가정법원에서 단씨로 바뀌었어요. 그래서 김포 단씨가 된 거죠.” -단씨가 흔한 성씨가 아니긴 합니다. 하하. 사실 한국의 이민정책이 강한 동화주의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그 정책이 유도하는 것에 따라 2세나 3세의 경우 줌머정체성을 잃는 문제가 있을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제 아들은 세 살 때 한국에 왔는데 그때는 줌머인 친구가 없어서 어렸을 때부터 한국 친구들이랑 어울려 자랐어요. 고향 말도 못 배웠습니다. 그래서 주변의 내국인(그도 귀화 후 한국 사람이지만, 주변 사람들을 내국인으로 지칭했다)들로부터 ‘아들에게 자기 민족 언어나 문화 가르쳐야지’ 그런 잔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가르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뭔가 사회 분위기가 있어야 합니다. 현재 장교로 군 복무 중 인 우리 아들 말고 지금 줌머인 2세 중 제일 나이 많은 축이 중학교 3학년이 됐는데 자기들끼리 이야기할 때는 한국어로 합니다. 집에서 부모들이랑은 모어(母語)를 쓰는데 그게 그래도 그런 교육이 가능한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앞으로 한국사회도 점점 변할 것이기 때문에 그게 굉장히 중요한 경쟁력이 될 겁니다. 이중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 “그렇죠. 그래도 한국 아이들이랑 있을 때는 모어를 쓰지 않는 게 이해가 되긴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학교에 가서 우리끼리 말을 하면 벵골족 아이들이 우리를 놀렸어요. 농담이라고 하지만 소수자에 대한 사회문화적 압박은 항상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서성일 선임기자 -귀화를 결심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그리고 귀화 몇 년 후에 개명한 것도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었나, 이건 진짜로 그런 불편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를 것 같긴 합니다. “그렇죠. 제가 난민 인정자잖아요. 제가 난민 인정을 받을 때는 미얀마 분들을 포함해 11명밖에 없었는데 그때와 지금은 물론 다릅니다. 난민 인정받은 다음해인가 다다음해인가 초등학교 입학하는데 애가 그때 닌텐도 오락기를 하려는데 컴퓨터 게임을 하게 하려면 주민등록번호가 필요하더라고요. 외국인 등록번호로도 접속이 안 됩니다. 학교를 입학할 때 어떤 안내도 없었죠. 지금도 스스로 찾아가 물어봐야 하긴 하는데 난민인정이 돼도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어요.” -난민인정자의 경우도 그랬다는 말이죠. “네. 일반 외국인도 마찬가지인데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습니다. 장사도 할 수 없었어요. 그 당시는 장사도 내국인과 결혼하거나 그런 사람들을 제외하면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조금 미안한 이야기지만 술집이나 노래방이나 그런 영업소를 가도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아요.” -들어오지 말라고 하는 겁니까. “그런 건 아니고 약간 반말을 하는 그런 분위기가 있어요. 물건을 팔아주니 감사해야 하는데 ‘돈 벌러 왔는데 왜 돈을 써’ 하는 말도 듣고. 제 이름도 제대로 부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보통 어떻게 불렀습니까. “이름이 기니까 다 부르기 힘들죠. 또 어떤 게 성인지도 잘 모르고요. 그러니까 한국 사람은 그것을 알 이유도 없잖아요. 사실 헷갈리죠. 외국이름인데. 어떤 사람은 제가 차크마이기 때문에 ‘샤’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고, ‘차’ 또는 ‘구마’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어요. 구마라고 부를 때는 약간 놀리는 말로 들렸습니다. 지금도 제 이름(나니)을 난희라고 알아듣거나 부르는 사람이 많아요. 로넬이라는 이름을 ‘노래’로 부르는 사람도 있고, 그런 불편함이 어딜 가나 항상 있어요. 제가 불편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불편해합니다. 어디 가도 이름을 대는 것이 한 번에 끝나지 않습니다. 병원에 가도 마찬가지고요.” -책에서 제일 인상적인 부분이 디아스포라적인 삶을 담은 대목이었습니다. ‘신분증을 보여주기 전까지 나는 외국인이 된다’, ‘지금 내가 선 자리는 한국사회의 규범이 지배하는 울타리의 경계다. 한발 밖으로 나가면 혐오와 배제를 피할 수 없고, 한발 안으로 다가가면 날카로운 화살은 피할 수 있다’, ‘나는 난민인정자이면서 그 말에 갇힌다. 나는 나로 온전히 존중받기 어렵다’와 같은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너와 우리는 다르다는 차별적 시선, 직접 당해보지 않으면 알기 힘들거든요. 결국 해법은 차별하는 쪽의 감수성을 높여야 하는데 그게 차별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가진 사람들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요. “학자들은 어떤 해법을 제시하는지 모르겠지만 저도 그렇고 한국 국적을 취득한 주변분들 다 그렇습니다. 한국 국적을 취득했는데도 한국인으로 취급받지 못한 외국인입니다. 저도 뭐 여전히 난민이죠. 제가 한국인이라는 것은 민족으로 봐야 하나, 아니면 국민으로 봐야 하나 이런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아무리 이씨가 됐다고 해서 제가 진짜 이씨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한국인이 되는 노력을 하지만 또 한계가 있으니까요. 또 아무리 한국인이 됐다 해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포기하면 안 되는 것들도 있고요.” -한국도 이제 ‘나는 치타공 언덕 줌머족 출신 한국인이다’, 이런 자긍심을 내보이고 다른 사람도 받아들이는 일이 가능한 사회가 돼야 할 텐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때도 있었어요. 최대한 외국인임을 숨기고 싶었는데 그게 어려워요. 불가능합니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모를 수도 있지만, 말을 꺼내면 다르다는 걸 압니다. 차라리 당신은 당신대로 한국인이고 나는 나처럼 한국인이다, 이런 식으로 평화를 만들어가는 것도 하나의 해결방법이 아닐까 싶어요.”
- [주한 미 평화봉사단 이야기](5)주한 미군 출신 ‘한국학 시조새’의 대를 잇다(2023. 10. 20 10:44)
- 2023. 10. 20 10:44 사회
- (제임스 버나드 팔레·2008) / 산처럼 비교적 최근에는 한류의 유행으로 한국학을 전공하고자 하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다. 한국의 드라마, 영화, 아이돌 등을 좋아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어를 익히고 한국의 사회나 역사나 문학 등에 관심을 가지는 듯하다. 그런데 한국이 개발도상국이던 시절에 이미 한국의 역사나 문학을 공부한 사람들을 보면 신기하고 궁금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 문화가 해외에 잘 알려진 것도 아니고, 심지어 한국이 잘사는 나라도 아닌데 무엇이 그들에게 한국을 공부하도록 이끌었을까?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해외(주로 미국)에서 한국학을 연구한 사람들은 대부분 주한 미군을 배경으로 한다. 주한 미군 근무를 통해 한국을 알게 됐고 이를 계기로 한국의 역사, 철학, 문학, 사회 등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한국학자의 ‘시조새’라고 할 수 있는 에드워드 와그너(Edward W. Wagner·1924~2001)도 하버드대학교 재학 중이던 1943년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휴학하고 미 육군으로 입대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1946년부터 1948년까지 한국의 미 군정에서 외교업무를 담당하는 군무원으로 근무했다. 한국 근무를 하면서 한국학에 관심을 가지게 돼 미국으로 돌아간 이후 동 대학원에서 동아시아 지역학으로 조선시대 역사를 전공한 끝에 1959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35년 넘게 하버드대학교에서 한국학을 가르쳤고, 한국학연구소를 세웠으며, 많은 후학을 양성했다. (데이비드 맥캔, 존 미들턴, 에드워드 슐츠·1979) / 하와이대학교 한국학센터 한국학자의 또 다른 시조새인 제임스 팔레(James B. Palais·1934~2006)는 미 육군 외국어학교(Army Language School in Monterey) 출신이다. 재미있는 것은 팔레가 애초에 러시아어를 공부하기를 희망했으나 그 강좌에서 밀려나는 바람에 한국어를 배우게 됐다는 점이다. 그 덕에 그는 한국과 한국의 역사에 흥미를 가져 조선시대의 유학을 연구했고, 마침내 예일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훗날 그는 워싱턴대학교에서 30년 이상 근무하며 많은 한국학자를 배출했다. 저서 <한미관계 20년사>(U.S.-Korea Relations from Liberation to Self-Reliance)로 한국현대사 연구자들에게 유명한 도널드 S. 맥도널드(Donald S. McDonald·1919~1993) 역시 주한 미군사령부에서 장교로 근무한 바 있다. 미국의 한국학 연구자들을 세대로 나눌 수 있다면 이처럼 1세대는 냉전 시대의 초입 시기 주한 미군에서 일하며 한·미관계를 담당했던 게 계기가 됐다. 한국학자의 등용문, 주한 미 평화봉사단 주한 미 평화봉사단 또한 미국 내 한국학자의 등용문(登龍門) 역할을 했다. 등용문이란 <후한서>에 처음 등장한 표현으로, 전설 속의 잉어가 통과해 용이 되는 문을 일컫는다. 한국사회에서 등용문이란 입신양명이나 출세의 관문을 뜻한다. 뚜렷한 학문적 성취를 이뤄도 등용문이라는 말을 쓴다. 평화봉사단은 단원들이 2년의 복무 기간 동안 초청국 사람들(한국 사람들)이 미국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목표로 했다. 복무 후 미국으로 돌아가서는 미국인들이 한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야 했다. 가족이나 주변 이웃들을 상대로 한국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애써 한국에서 습득한 한국어와 한껏 고취된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을 그 정도 수준에서 그치기엔 아까웠던 봉사단원들은 한국을 좀더 공부하기로 한다. 1966년 주한 미 평화봉사단 첫 기수인 K-1 단원 중 상당수는 1968년 미국으로 돌아가 한국학을 공부할 수 있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이들의 대학원 진학 행보는 모쪼록 주목할 만하다. 선배 기수인 K-1이 대학원이라는 진로를 닦아놓음으로써 후배 기수들도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었으니 말이다. <표 1>은 K-1의 한국학 관련 대학원 석·박사과정 진학 현황이다. 98명의 단원 중 약 12%에 해당하는 12명이 대학원에서 한국학을 전공하거나 한국을 주제로 연구했다. 1968년 당시만 해도 미국에서 한국학을 공부할 수 있는 대학원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한국은 경제적으로는 미국과 비교가 안 되는 개발도상국에 지나지 않았다. 한국에는 그러나 200여 년에 그치지 않는 미국의 역사와 비교했을 때 확실한 비교우위를 가진 유구한 역사가 있었다. 오랜 세월 이어져온 전통과 문명을 엿본 미국 청년들은 한국의 신비와 매력에서 좀처럼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한국 공부에 뛰어든 배경이다. 에드워드 베이커(Edward J. Baker)는 주한 미 평화봉사단 합류 시점에 이미 석사과정으로 예일대학교 로스쿨 재학생이었다. 미국으로 돌아가서는 로스쿨을 마치고 하버드대학교 박사과정에서 한국사를 공부했다. 다른 단원들도 일부는 박사과정까지 진학했고, 이윽고 한국학 전공 학자가 됐다. 대학원에 진학한 K-1 단원들이 주축이 돼 1977년 1월 서울에서 ‘전환기의 한국학(Studies on Korea in Transition)’이라는 주제의 학술대회를 열기도 했다. 하와이대학교 출판부는 그 내용을 10개의 챕터로 나눠 책으로 출판했다. 책의 주제는 <표 2>와 같다. 한국이 어디인지도 잘 모르던 미국 청년들이 1966년 봄 주한 미 평화봉사단에 합류해 더듬더듬 한국어를 배웠는데, 그 단원들이 11년 만에 한국학자가 돼 전문적인 주제의 학술대회까지 열었으니, 실로 놀라운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왼쪽부터) (브루스 커밍스·2023), (돈(도널드) 베이커·2012), (카터 에커트·2008) / 글항아리 / 푸른역사 한국학의 발전을 이끈 냉전 시대 장학금 K-1 선배들이 잘 닦아놓은 길을 따라 주한 미 평화봉사단 복무 후 대학원에 진학한 사람들도 상당했다. 이때 주류가 된 대학은 3개(하버드대학교·워싱턴대학교·하와이대학교)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하버드대학교와 워싱턴대학교에서 한국학을 가르쳤던 교수들은 주한 미군과 인연이 있지만, 그 이후의 대학원생들은 주로 주한 미 평화봉사단과 관련이 있었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 경험자들을 한국학 대학원 진학으로 이끈 또 다른 배경이 있다면, 그건 바로 장학금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선 지역학(area studies)이라는 학문 분야가 부상했다. 한국학 역시 지역학의 한 분과로 역할을 했다. 미국은 냉전 상황에서 전략적으로 해외 지역의 정보를 필요로 했다. 하지만 해당 지역의 문화와 언어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가진 전문가는 턱없이 부족했다. 미국의 사회과학연구협의회(Social Science Research Council)가 이런 미 연방정부의 요구에 부응해 지역학 발전의 거점이 됐다. 해외 지역학을 지원하고, 지역학을 공부하는 대학원생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했다. 아이젠하워 시절의 미 연방정부는 소련의 스푸트니크호 발사에 대한 충격으로 1958년 국가 방위를 강화하고 중요한 국가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확대하고 증진하는 국가방위교육법(National Defense Education Act)을 제정했다. 이 법령 제6조에 의해 외국어 연구와 지역학 연구센터, 언어교육원에 연구비가 책정됐다. 미 연방정부는 연구비뿐 아니라 대학 내 지역학 연구소 설치를 직접 지원함으로써 보다 직접적이고 광범위한 지역학 제도화의 기반을 마련했다. 역대 주한 미 평화봉사단원이 대학원에서 한국학을 전공해 연구자가 될 수 있었던 이면에는 한국에 대한 이들의 학문적 호기심 외에도 지역학으로서 한국학이라는 학문이 공식 프로그램이 됐다는 점과 연구비 수령이 용이하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국가방위교육법 내 외국어교육법 덕분에 아시아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장학금을 받고 공부할 수 있었다. (왼쪽부터) (로렐 켄달·2016), (에드워드 슐츠·2014), (김승경, 마이클 로빈슨·2020) / 일조각 / 글항아리 / 워싱턴대학교 한국학센터 2세대 한국학자, 주한 미 평화봉사단 그렇게 양성된 주한 미 평화봉사단 출신 한국학자들은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해외 한국학을 이끌었다. 최근 새롭게 번역된 <한국전쟁의 기원>의 저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나 <한국인의 영성>의 도널드 베이커(Donald Baker), <제국의 후예>를 쓴 카터 에커드(Carter Eckert), <무당, 여성, 신령들>의 로렐 켄달(Laurel Kendall), <무신과 문신>의 에드워드 슐츠(Edward Shultz) 등 미국의 한국학 관련 연구자 중에서 평화봉사단 출신을 쉽게 찾을 수 있다. 2세대 한국학자로, 미국에서 한국학 연구를 이끌었던 이들 주한 미 평화봉사단 출신 연구자들은 1940~1950년대생이 많다. 이미 학계에서 은퇴했거나 은퇴를 앞두고 있지만, 지금까지도 이들의 영향력은 건재하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이 한국에서 철수한 지 4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신냉전 시대가 도래했다는 분석이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미국과 소련이 과거와 같은 수위로 체제 대결을 벌이는 상황까지는 아니다. 냉전 전략으로서 지역학의 의미도 퇴색한 지 오래다. 시대 변화에 발맞춰 한국학도 애초의 모습과는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역대 주한 미 평화봉사단 출신 연구자들의 한국학 박사학위 논문 주제를 살펴보면 한국 역사, 문학, 사회학, 지리학, 인류학, 법학, 교육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다양한 변주를 보여준다. 이를테면 한국 오일장의 경로 선택(노바코브스키), 한국 시조 운율 구조(맥캔), 18세기 한국 유교와 천주교의 만남(베이커), 고려시대 무신정권 최씨 일가(슐츠) 등의 주제는 냉전 전략과는 요원해 보인다. 순수학문으로서 한국학을 발전시킨 셈이다. 이는 평화봉사단 창설 과정에서도, 지역학 지원 시점에서도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전(前) 미국 평화봉사단원들의 조직인 프렌즈 오브 코리아(Friends of Korea)와 미 한국경제연구소(Korea Economic Institute of America), 워싱턴대학교 한국학센터 및 인디애나대학교 한국학연구소가 공동으로 2020년 12월 발간 기념 세미나를 열었다. 코로나19가 ‘심각’ 단계인 시기여서 참석자들은 줌(Zoom)과 유튜브로 만났다. 온라인 세미나에서 그 시절 한국에서의 생활과 일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 저자들의 모습.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Donald Baker, Edward Shultz, Clark Sorensen, Katheleen Stepnens, 문옥표, Laurel Kendall / 미 한국경제연구소(KEI) Youtube 채널 캡처 전(前) 미국 평화봉사단원들의 조직인 프렌즈 오브 코리아(Friends of Korea)와 미 한국경제연구소(Korea Economic Institute of America), 워싱턴대학교 한국학센터 및 인디애나대학교 한국학연구소가 공동으로 2020년 12월 발간 기념 세미나를 열었다. 코로나19가 ‘심각’ 단계인 시기여서 참석자들은 줌(Zoom)과 유튜브로 만났다. 온라인 세미나에서 그 시절 한국에서의 생활과 일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 저자들의 모습.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Michael Robinson, Bruce Fulton, Donald Clark, Edward Baker, Linda Lewis / 미 한국경제연구소(KEI) Youtube 채널 캡처 평화봉사단과 미국에서 한국학 만들기 2020년 8월, 주한 미 평화봉사단 출신 한국학자들(도널드 베이커·에드 베이커·도널드 클락·카터 에커트·브루스 풀턴·로렐 켄달·린다 루이스·에드워드 슐츠)과 사회학자 김승경, 인류학자 문옥표, 한국학자 클락 소렌슨, 평화봉사단 출신 전 주미대사 캐서린 스티븐스 등 모두 12명이 모여 <평화봉사단과 미국에서 한국학 만들기>(Peace Corps Volunteers and the Making of Korean Studies in the United States)라는 책을 출간했다. 은퇴했거나 은퇴를 앞둔 학자들이 그동안의 성과를 정리하고 미래에 한국학이 나아갈 방향을 조망한 책이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의 활동 시작 50주년을 기념하는 2016년, 주한 미 평화봉사단 출신 한국학자들이 미 인디애나대학교에 모여 평화봉사단이 자신들의 삶과 연구에 미친 영향에 대해 동명의 콘퍼런스를 열고 논의한 내용을 정리했다. 젊은 봉사단원들이 한국에서 ‘개고생’한 에피소드 대목에선 깔깔 웃음이 터져나왔고, 한국 민주화를 위해 애쓴 이들의 회고를 읽으면서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 책에 대해 할 말이 훨씬 많지만, 50여 년간 한국학 분야를 연구한 슐츠 교수의 조언으로 글을 마치려고 한다. 현재 해외에서 한국학은 한류의 확산으로 유례없는 인기몰이 중이다. 반짝인기가 아닌 지속가능한 한국학의 발전을 위해 슐츠 교수는 지켜져야 할 내용을 6가지로 정리했다. ①고급 한국어를 연수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라. ②한국학을 공부하는 학부생들이 1년간 해외(한국)를 경험할 수 있는 컨소시엄을 구축하라. ③한국의 전(前)근대를 공부하는 학생들을 양성하고, 이들이 고전 한문의 문리를 틀 수 있도록 훈련하고 독려하라. ④성별 균형을 염두에 두라. ⑤학제 간의 다양성을 고려하라. ⑥박사 논문 연구 지원을 확대하라. 점점 위축되고 있는 한국의 인문·사회과학 분야 전체에도 해당하는 조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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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어 교가·은행원 출신 감독…교토국제고의 기적
- 2024. 08. 23 13:27 화제
- 한국어 교가가 일본 전역에 울려 퍼졌다. 재일 한국계 민족학교인 교토국제고가 ‘여름 고시엔(甲子園)’으로 불리는 제106회 일본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고시엔)에서 첫 우승을 거머쥐며 감동의 순간을 연출했다. 교토국제고는 23일 효고현 니시노미야시 소재 한신고시엔구장에서 열린 고시엔 본선 결승전에서 도쿄도 대표 간토다이이치고에 연장 접전 끝에 2-1로 승리했다. 제 106회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고시엔) 교토국제고 우승의 순간. X 캡처 연장전까지 이어진 경기의 최종 스코어 2-1. 양 팀이 좀처럼 득점을 내지 못하는 팽팽한 투수전 양상으로 흘러갔다. 교토국제고와 간토다이이치고는 마지막 정규 이닝인 9회에 각각 선두 타자가 출루하며 득점을 노렸으나, 모두 점수를 올리는 데 실패했다. 교토국제고는 이어진 연장 10회 초 무사 1, 2루에 주자를 두고 공격하는 승부치기에서 안타와 볼넷, 외야 뜬공 등을 묶어 2점을 냈다. 결국 10회 말 간토다이이치고에 1점만 내주면서 승리를 확정했다. 교토국제고의 고시엔 우승은 마치 스포츠 성장 영화처럼 여러 감동 요소가 들어있다. 먼저 교내 밴드부가 없는 교토국제고 학생들은 주변 학교 밴드부의 도움을 받아 응원가를 연주했지만 열정만큼은 경쟁 학교에 뒤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또한 교토국제고 선수들이 승리 직후 “동해 바다”로 시작되는 “야마도(大和·야마토) 땅은 거룩한 우리 조상 옛적 꿈자리”라는 한국어 교가를 부르는 모습이 공영방송 NHK를 통해 일본 전국에 생중계됐다. 단, 교가 제창 중 한국어 가사로 ‘한국의 학원’이란 부분에서 일본어 번역으로는 ‘한일의 배움터’라는 자막으로 대체되어 국내 누리꾼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고시엔에서 우승한 교토국제고를 두고 ‘재일 한국계 학교 지우기’가 아니냐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교가 제창 중 한국어 가사로 ‘한국의 학원’이란 부분이 ‘한일의 배움터’라는 자막으로 대체됐다. NHK 캡처 교토국제고의 우승 뒤에는 고마키 노리쓰구(41) 감독이 있었다. 그는 평범한 은행원으로 재직하다 고등학교 1학년 시절 내야수로 활약했던 이력 하나로 “주말만 연습을 봐달라”는 지인의 요청을 받아 야구부 감독직을 맡았다. 2006년부터는 은행을 그만두고 본격적인 교토국제고 감독으로 지냈다. 고마키 감독 체제에서 교토국제고는 지난 5년 연속 프로 선수를 배출하기 시작했고 ‘야구 잘하는 학교’로 성장했다. 그는 교토국제고 고시엔 첫 우승 후 현지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마냥 감탄했다. 아이들은 여기서만큼은 무조건 지면 안 된다는 다 같은 마음을 담아서 싸워줬다. 정말 대단한 아이들이라고 생각한다”라는 소감을 전했다. 또한 선수들에게는 “대회 전에 하루라도 너희들과 야구를 하고 싶다는 말을 아이들에게 전했는데 설마 여기까지 올 줄 몰랐다. 이런 아저씨한테 멋진 여름을 보내게 해줘 고맙다고 한마디 하고 싶다”고 전했다.
- 한인 입양아 출신…아시아계 최초 뉴욕주 연방 판사로 임명
- 2024. 08. 06 11:35 화제
- 메러디스 바카 먼로 카운티 법원 판사가 최초의 유색 인종 여성이자 최초의 아시아계 미국인으로 뉴욕 서부 연방 판사로 임명됐다. Meredith Vacca 링크드인 캡처 생후 6개월 때 미국으로 입양된 한인 메러디스 바카(43)가 뉴욕 서부 연방 판사로 임명됐다. 그는 최초의 유색인종 여성이자 아시아계 미국인으로 뉴욕주 판사로 최종 인준됐다. 지난달 31일(현지시각) 뉴욕 상원 다수당 대표인 척 슈머는 바카의 인준 소식을 ‘역사적인 순간’이라고 전하면서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그는 모든 사람을 위한 평등한 정의에 대한 독특한 관점과 깊은 헌신을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생후 6개월 때 한국에서 뉴욕주 로체스터의 변호사 가문으로 입양된 바카 연방판사는 버팔로 대학교 법학대학원을 졸업한 후 2020년 먼로 카운티 판사 선거에 출마하기 전까지 10년간 검사로 일했다. 그는 검사 시절 심각한 아동 학대 및 가정 폭력 사건을 전담 처리하는 검사로 활약했다. 뉴욕주 판사로 최종 인준된 그는 앞으로 17개 카운티 서부 연방 법원 관할 구역에서 근무하게 된다.
- ‘국대 출신’ 30%, 강력해진 <피지컬: 100>가 돌아온다
- 2024. 02. 26 11:17 화제|문화/생활
- 넷플릭스 제공 한국 예능 사상 최초로 넷플릭스 글로벌 TOP 10 TV쇼(비영어) 부문 1위에 올랐던 <피지컬: 100>이 더욱 강력해진 참가자와 퀘스트로 컴백 소식을 알렸다. 가장 완벽한 피지컬을 가진 최고의 ‘몸’을 찾기 위해, 최강 피지컬이라 자부하는 100인이 벌이는 극강의 서바이벌 게임 예능 <피지컬: 100>이 시즌2 공개 일정과 함께 26일 100인의 참가자의 면면을 알렸다. < 피지컬: 100 시즌2 - 언더그라운드>에는 한국인 최초 UFC 진출자이자 한국인 최다승 보유자인 김동현, ‘한판승의 사나이’ 유도 국가대표 금메달리스트 이원희, 레슬링 국가대표 금메달리스트 정지현 등 스포츠맨이 대거 합류한다. 여기에 한국 최초 스피드 스케이팅 국가대표 금메달리스트 모태범, 98년 만에 럭비 국제 스포츠 경기 진출을 이끈 국가대표 안드레진, 압도적인 피지컬의 수영 국가대표 정유인, 도전의 아이콘이자 리듬체조 국가대표 신수지, 핸드볼 간판 박하얀 등 전현직 국가대표 비중이 무려 30%에 달한다. 그 외 탄탄한 체격의 배우 이재윤, 운동하는 아이돌 골든차일드 이장준을 비롯해 FBI 외교관, 경찰, 군인, 마샬아츠 트릭커, 아보리스트 등 다채로운 직업군이 총출동한다. 또한 시즌1에 이어 재도전하는 아시아 최초 세계소방관대회 우승자 홍범석이 이름을 올렸다. 장호기 PD는 “시즌1을 흥미롭게 시청한 많은 전현직 국가대표 선수들이 참가하게 됐다”며 “실제 국제 스포츠 경기를 하는 것 같다고 하시거나, 국제 스포츠 경기 때보다 훨씬 더 긴장된다고 말씀하셨을 정도였다. 그래서 훨씬 더 살벌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출연자들도 서로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강렬한 경쟁이 펼쳐졌다”라고 말했다. 지하광산이라는 새로운 세계관을 배경으로 진화한 퀘스트로 치열한 승부를 펼치는 <피지컬: 100 시즌2 – 언더그라운드>는 오는 3월 19일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에 공개된다.
- 걸그룹 출신 허유정의 작심 발언 “병들지 않은 아이돌이 없다”[아이돌 그 후]
- 2023. 11. 22 06:58 화제
- 걸그룹 ‘단발머리’의 멤버 허유정은 중앙대 대학원 문화예술경영학과에서 콘텐츠 전공을 하는 동시에 전시 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다. 걸그룹 단발머리 활동 시절(오른쪽) 그룹 크레용팝의 동생 그룹 ‘단발머리’ 멤버로 활동했던 허유정. 그는 YG 연습생으로 블랙핑크 멤버들과 합숙 생활을 해봤고 실제 걸그룹으로 데뷔도 해본 터라 누구보다 깊숙한 아이돌 실상을 알고 있다. 중앙대 대학원 문화예술경영학과에서 콘텐츠를 전공하고 있으며 <K팝 아이돌 연습생의 연습 환경 개선 방안 연구> 논문을 위해 300명의 아이돌과 연습생을 조사했다. ■ 아이돌 육성 시스템, 아이들을 병들게 한다 허유정은 연구를 위해 한 기획사 신인 개발팀에 들어가 아이돌 육성 시스템을 연구하기도 했다. 그는 아이돌을 그만두었지만 누구보다 아이돌에 진심인 콘텐츠 전문가다. “우리나라 엔터 시스템은 갑질 시스템입니다. 아이돌은 어린 청소년기에 너무 취약한 상황에 놓여있어요. 기획사에 밉보이면 계약을 풀어주지 않으니 갑질이나 성추행 같은 부당한 취급을 당해도 쉽게 반박하지 못해요.” 그는 회사가 갑이고 아이돌은 전적으로 을이 될 수밖에 없는 아이돌 계약은 노예 계약이나 다름없다고 힘주어 말한다. “연습생 생활이 필수인 우리나라에서 생긴 어쩔 수 없는 계약이지만 아이돌 계약은 보통 7년이에요. 사실 아이돌 수명은 짧잖아요. 이 황금 같은 시기에 계약서 한 장으로 한 회사에 올인하며 메어있어야 해요. 부당한 대우를 참고 견뎌야 하죠.” 전시 기획자로도 활동하고 있는 허유정. 아이돌은 무조건 말라야 하고 핸드폰이 없어야 하고 밤새도록 연습해야 성공한다. 인권을 담보로 한 성공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허유정은 한때 신인 개발팀에 자진 입사해 아이돌 육성을 현장에서 지켜봤다. “신인 개발팀은 무조건 아이돌에게 살 빼라고 압박을 하죠. 이미 마른 친구들한테 빼라고 하니 무리한 다이어트를 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렇다고 다이어트 식단을 짜주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굶겨요. 제가 인터뷰했던 아이돌 중에는 위염은 기본이고 원형 탈모,생리불순, 골다공증, 피부묘기증… 병이 없는 아이돌이 없었어요.” 치열하게 연습해야 BTS, 블랙핑크처럼 성공할 수 있다. 사실이다. 그러나 청소년기 아이들이 꿈을 향해 열심히 가겠다는 의지로 인해 인권 유린의 현장이 정당화될 수 없다. “보통 연습실은 지하에 있다 보니 성장기 아이들이 햇볕을 못 받아요. 뼈 나이 측정해보면 노인 수준이에요. 제가 신인 개발팀에 있을 때 아이들에게 밥 먹고 나면 햇볕 아래에서 산책 좀 하자고 늘 잔소리를 했지만 시스템이 바뀌지 않는 이상 아무 소용이 없더라고요.” 그는 아이돌 그룹을 육성하면서 기본적인 생활과 체계적인 교육을 뒷받침하지 못하는 회사는 아이돌을 키울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허유정은 전시 기획자로도 활동 중이다. 최근에는 LG 사이언스 파크 컬처 위크 전시를 담당했다. 허유정 제공 ■ 다시 돌아가도 아이돌은 되지 않겠다 2014년 허유정은 걸그룹 단발머리로 데뷔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활동 8개월 만에 해체를 겪어야 했다. 앨범을 낼 수도 없고 또 계약으로 인해 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되자, 그는 공부로 눈을 돌렸다. “남들보다 늦게 공부를 시작하다 보니 간절함이 남달랐던 것 같아요. 다행히 성적이 좋아 전액 장학금을 받았고 조기 졸업했기 때문에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지 않고 공부할 수 있었죠.” 대학원 학비 역시 학과 조교 업무를 보는 것으로 등록금을 충당하고 있다. 그는 지난해 가수 태연의 3집 프로모션 전시를 공동 기획했다. 이를 계기로 ‘소우주 컴퍼니’라는 회사를 차려 대표 겸 디렉터로 야무지게 활동 중이다. 최근에는 LG 사이언스 파크 컬처 위크 전시를 담당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면 아이돌을 하겠냐고 물었다. 그는 [아이돌 그 후] 인터뷰이 중 가장 단호하게 “하지 않을 것”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다시 돌아가면 안 해요. 저는 슈퍼스타의 그릇이 아니었나 봐요. 열심히 했기에 후회는 없고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허유정은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건강한 아이돌 육성 시스템을 위한 정책을 만드는 연구원이 되고 싶다. 그는 아이돌에 대한 미련은 없으나 건강한 육성 시스템 만들기에는 미련이 아직 남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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