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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총 43 건 검색)

한국 유엔대사, 안보리서 탈북 여성 인권 문제 처음 제기…북한 인권 악화 우려도
2022. 10. 21 08:07정치
...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공개 토의에서 탈북 여성 인권 문제를 처음 제기하고 나섰다. 황준국... 열린 안보리 회의에서 “이번 기회에 탈북 여성들이 직면한 수많은 고난에 대해 주목하길...
탈북 60대 여성 파주서 월북 시도하다 붙잡혀
2021. 09. 23 19:57사회
... 탈북 여성이 경기 파주시 접경지역에서 월북을 시도하다가 붙잡힌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23일 경기북부경찰청... 경찰관에게 신병을 인계했다. A씨는 탈북 뒤 한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탈북월북
검찰, 탈북여성 성폭행 혐의 경찰관 불기소
2021. 05. 27 10:45사회
... 북한이탈주민 신변보호 업무를 담당하다 탈북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혐의를 받은 경찰관을... 처분했다. 27일 검찰 등에 따르면 서울동부지검 여성아동범죄조사부(부장검사 박현주)는 강간,...
탈북 그리고 그 후, 다섯 여성의 ‘절박한 삶’ 이야기[플랫]
2021. 02. 02 09:55문화
... 못 놓겠더라고요.” <절박한 삶>은 탈북 여성 5명의 생애사를 기록한 책이다. 그들이... 새삼 생각하게 된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탈북 여성 이수린씨(56·가명)는 1998년 중국으로...
플랫탈북여성북한

스포츠경향(총 5 건 검색)

강지섭, 가상 부부 탈북 여성 언급에 누리꾼 “예의 없다”
2018. 02. 12 19:05 연예
배우 강지섭이 인터뷰에서 예능 프로그램에서 가상 부부 생활을 했던 상대 탈북자와 관련해 언급해 눈길을 끌었다. 일부 누리꾼들은 강지섭의 발언에 불편함을 표했다. 강지섭은 bnt가 12일 공개한 인터뷰에서 TV조선 예능 프로그램 <애정통일 남남북녀 시즌2>(남남북녀2)에 출연 당시 커플로 출연한 탈북자에게 무뚝뚝했던 이유와 관련해 “사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초반에 말도 별로 안 했다”고 말했다. 강지섭은 <남남북녀2>에서 강원도 원산 출신으로 응원단을 한 정하교씨와 가상부부 생활을 했다. TV조선 ‘애정통일 남남북녀 시즌2’ 방송 화면 캡처 실제 강지섭은 <남남북녀2> 출연 당시 무뚝뚝했던 모습을 자주 보여 왔다. 반면 정하교씨는 강지섭에게 적극적으로 호감을 보여왔다. 프로그램 말미에는 강지섭 또한 마음을 연 듯 연인인 듯, 다정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정하교씨는 ‘드레스를 입고 왔으면 좋겠다’는 강지섭의 편지에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등장하는가 하면, 직접 민소매 셔츠를 만들어 강지섭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또한 강지섭을 위해 정성스럽게 아침을 준비해줬다. 이들의 이별 모습은 애잔함을 불러 모았다. 정하교는 <남남북녀2> 하차 소식을 알리며 “내가 나가서 연애를 하면 엄마가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져, 일부러 연애를 미뤄왔다”며 “아버지가 안 계셔서 그간 힘들어도 강한 척 애왔는데 오빠(강지섭)을 만나 좋았다”고 말했다. 이에 강지섭은 “유일하게 힐링하는 시간이 너와 함께하는 시간이었다”며 “뭔가 더 많이 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아쉽다”고 말했다. 한편, 누리꾼들은 강지섭의 인터뷰에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있다. 일부 누리꾼들은 ‘오랜만에 보는 무개념 인터뷰다’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없다’ ‘수많은 연예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은 처음 본다’ ‘솔직해 보이지도 않고, 프로답지 않아 보인다’ ‘인성이 바닥 같아 보인다’ 등 대체로 함께 호흡을 맞췄던 상대역에 대한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고 평가하면서 강지섭을 비판했다.
탈북 여성 12명, 메콩강 건너다 2명 익사
2018. 01. 13 20:51 생활
한국으로 향하던 탈북 여성 12명이 라오스·태국 국경의 메콩강을 건너다가 배가 뒤집혀 2명이 익사했다. 13일 연합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이들은 4일 중국 산동성에 집결해 한국행을 위해 출발했으며, 베트남과 라오스를 거쳐 태국을 경유해 국내로 들어 오려다 사고를 당했다. 이 같은 사실을 알린 대북인권단체 관계자는 “원래 10명 정도가 타는 쪽배에 인원을 초과해 태운 것이 사고의 원인”이라며 “10명은 라오스 쪽으로 다시 헤험쳐 돌아갔다가 다른 배를 타고 태국에 도착해 태국 경찰이 이들의 신병을 확보했다”고 말했다. 메콩강. 경향신문 자료이미지 이들 탈북 여성 대부분은 인신 매매로 중국에 팔려간 사람들이라고 이 관계자는 덧붙였다. 사망자 가운데 20대 여성의 시신을 발견됐으나, 50대 여성의 시신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탈북 여성들, 신은미·황선에 공개토론 제안 “간첩으로 볼 수 밖에 없다”
2014. 12. 04 15:54 생활
탈북 여성들이 ‘종북콘서트’ 논란을 빚은 신은미· 황선씨를 상대로 끝장토론을 제안했다. 종북 토크 쇼와 인터뷰를 잇따라 한 재미교포 신은미 씨가 ‘종북 발언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자 탈북 여성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4일 정치범 수용소 탈북자인 강철환·정광일·김혜숙·김동남 씨는 새누리당 하태경 의원과 함께 국회 정론관서 기자회견을 갖고 “지난 2005년 평양에서 출산을 했던 전 민주노동당 부대변인 출신의 황선 씨와 미국에서 북한으로 수차례 여행을 다녀온 재미동포 신은미 씨가 최근 토크 콘서트에서 한 발언으로 종북 논란에 휩싸여 있다”고 밝혔다. 탈북 여성들, 신은미와 황선 상대로 공개토론 제안이어 “종북 문제로 통합진보당 해산에 관한 헌법재판소 판결이 임박한 가운데 이들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국민은 거의 없어 보인다”며 “북한을 수차례 방문했을 뿐인데 북한이 보여준 거짓 실상을 언급하는 재미동포에 대한 국민적 의심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또 이들은 “우리는 황선·신은미 씨를 간첩으로 볼 수 밖에 없다”며 “공개토론에서 종북에 대한 확실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 공개토론을 제안했다.
탈북 여성 6인조그룹 “반갑습네다. 동포 여러분~”
2006. 06. 28 22:32 연예
탈북한 여성 6인으로 구성된 그룹 ‘달래음악단’(가명)이 첫 선을 보인다. 탈북자 출신 여성그룹이 결성된 것은 ‘달래음악단’이 처음이다. 이 그룹은 한옥정(28) 허수향(22) 강유은(19) 임유경(19) 등 북한의 선전단·예술단에서 활동하거나 대학에서 성악·기악·무용 등을 전공한 실력파들로 구성돼 있다. 이들은 탈북 후 모두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다. 이들 중 강유은의 경우 지난 1월 KBS1 ‘피플 세상 속으로’의 ‘반갑습네다. 남한!’ 편에서 소개된 적이 있다. 이들은 오는 8월께 첫 정규 음반을 발표할 예정이다. 금사향의 ‘홍콩아가씨’를 리메이크한 타이틀곡을 비롯해 북한 가요와 국내 유명 트로트 작곡가가 쓴 신곡 등을 선보일 계획이다. ‘달래음악단’을 탄생시킨 오렌지엔터프라이즈는 “영화 ‘간 큰 가족’을 보고 기획했다”며 “멤버 각각의 가족을 만나 취지를 설명하는 등 발품을 팔아 팀을 꾸릴 수 있었다”고 밝혔다. “실향민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주고, 젊은 세대에게 북한의 대중음악과 문화를 체험하는 계기를 만들어주고 싶다”고 설명했다. ‘달래음악단’은 오는 7월 1일부터 매일 오전 10시부터 4시간씩 본격적인 연습 및 녹음 작업에 들어간다. 이들의 면면은 이 과정에 공개될 예정이다. 〈강석봉기자〉

주간경향(총 2 건 검색)

여성 탈북자의 파란만장한 (2019. 10. 07 14:27)
2019. 10. 07 14:27 사회
ㆍ1998년 북한 탈출 중국 거쳐 한국행… 자신이 겪은 기구한 삶 책으로 펴내 황선희씨(가명)가 지난 10월 1일 한 교회 예배당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다. 김창길 기자 그의 삶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북한 교화소(우리나라의 ‘교도소’에 해당)에서 온갖 병을 짊어지고 돌아온 아버지와 두 살 터울의 여동생을 먹여살리기 위해 그는 1998년 중국 국경을 넘었다. 그리고 한 중국인 가정집에 팔려 강제결혼을 했다. 여러 차례 탈출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좌절된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 그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중국 공안에 잡혀 북송될 위기에 처했다. 그의 시부모는 집안의 모든 재산을 끌어모으고, 주변에 빚을 져 그를 감옥에서 빼냈다. 비록 돈을 주고 그를 산 사람들이었지만 그에게는 또 다른 의미의 은인이 됐다. 적어도 북송돼 정치범수용소에 갇히고, 남아있던 가족이 처벌받을 위험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5년만 죽어라 일해서 이 돈을 갚고 집을 나가자.’ 그는 다짐했다. 그리고 아이를 갖기로 했다. 노예처럼 결혼생활을 이어온 지 5년 만에 그에게 예쁜 딸 은희(가명)가 찾아왔다. 빚은 이자에 이자를 낳았다. 5년이면 청산할 줄 알았던 빚은 점점 불어났다. 그는 1년 365일 밤낮없이 일했다. 밤 11~12시까지 일하고 집에 들어와 쓰러져 잠들었다가 눈뜨면 세수만 하고 출근하는 일상을 반복했다. 빚은 13년 만에 한푼도 남지 않았다. 그리고 한국으로 향했다. 탈북자 황선희씨(가명·45)는 “삶이 참 가혹했다”고 말했다. 엘리트 집안에 찾아온 불행 그는 소위 말하는 ‘엘리트 집안’에서 나고 자랐다. 할아버지는 한의사였고, 할머니도 의사였다. 그의 어머니 역시 의사로 일하며 마을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기자 또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의 꿈을 이루는 데 장애는 없었다. 불행은 그러나 한꺼번에 찾아왔다. 당에서 갑자기 ‘평양에는 불구자가 없어야 한다’며 장애인 가정을 모두 평양 밖으로 내보냈다. 그의 가족도 쫓겨났다. 태어날 때부터 뇌전증을 앓아온 고모 때문이었다. 하루새 평안북도로 이사했다. 충격을 받은 그의 할머니가 쓰러지고, 어머니는 간호를 위해 병원을 그만둬야만 했다. 그의 아버지마저 설상가상으로 교통사고를 냈다. 아버지는 8년형을 선고받고 교화소에 갇혔다. 남편이 교화소에 갇히면 부인이 정상적인 직업활동을 할 수 없다. 몸이 약했던 그의 어머니는 탐사대(땅속 광물을 찾는 일을 하는 곳) 건설중대에서 남자들과 함께 벽돌을 찍고, 지게로 나르고, 집을 짓는 일을 했다. 어머니의 몸은 급속도로 약해졌다. 아버지가 모범수로 2년 8개월 만에 출소했지만 아버지에게 생계를 맡길 수도 없었다.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1994년 북한에서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다. 선희씨는 고난의 행군이 이어진 그 4년을 “지옥과도 같았다”고 했다. 사람이 쉴새없이 죽어나갔다. 먹을 것을 구하러 떠난 사람들이 죽어서 돌아왔다. 예뻤던 동무가 꽃거지가 돼 있었다. 그의 집도 무너져갔다. 어머니는 47세가 되던 해 결국 눈을 감았다. 아픈 아버지와 여동생이 그의 몫으로 남았다. 선희씨는 작가가 될 수 없었다. 대신 지리 탐사대에 들어가 지도를 그렸다. 그 일이 돈이 될 리가 없었다. 아픈 아버지를 위한 수입 의약품은 너무 비쌌다. 한 번에 사나흘씩 집을 비워 먹을 것을 구하고, 아버지의 약을 구했다. 동생은 떡과 빵을 만들어 팔았다. 항상 돈이 부족했다. 사나흘씩 신의주 등지로 나가 벌어들인 돈으로는 약값과 생활비를 모두 감당할 수 없었다. 1998년 2월, 그는 중국으로 가서 돈을 벌어오기로 결심했다. 아픈 아버지를 혼자 두고 갈 수는 없었다. 동생에게 “아버지를 잘 모시고 있어라. 신의주에서 한 달만 일해서 돈 많이 벌어서 오겠다”고 했다.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넘어간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동생은 “언니 빨리 와야 돼. 돈 못벌어와도 좋으니까 빨리 와야 돼”라고 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한 달이면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지만 어느새 21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동생을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울었다. “화물차 타러 가는 길에 동생한테 떡이라도 사서 먹이고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여비가 여의치 않아 고구마만 사다 먹인 게 한이 된다”고 했다. 그는 지금 동생을 만나도 “미안해”라는 말밖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압록강을 넘어 중국땅을 밟은 그는 중국인들에게 손발을 써가며 “일을 달라”고 했다. 중국어는 한마디도 할 줄 몰랐다. 그 사이 한 중국인이 그를 자신의 친척집에 팔아넘겼다. 그의 몸값은 4000위안(약 70만원)이었다. 인신매매 전문 브로커에게 잡히지 않은 것을 불행 중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그가 팔려간 집은 ‘찢어지게’ 가난한 집이었다. 남편은 배우지 못한 사람이었다. 시어머니는 눈이 멀어가고 있었다. 그는 소처럼 일했다. 밤낮없이 일하고 또 일했다. 일을 아무리 해도 돈은 모이지 않았다. 황선희씨가 써낸 책 표지. 지식인 하우스 신분증이 없으니 당연히 정상적인 직장을 구할 수도 없었다. 일을 하면서도 북한사람이라는 이유로 언제든 공안에 잡혀갈 수 있다는 두려움에 떨었다. 닥치는대로 일을 했다. 비닐하우스용 비닐 제작공장에서 일하고, 사과 분류작업을 했다. 석탄을 캐서 다듬고, 밭에서 김을 맸다. 당시 중국은 재건축 붐이 일어 벽돌이 귀했다. 허물어놓은 집에서 멀쩡한 벽돌을 찾아 다듬어 팔고, 실어나르는 일도 했다. 노예처럼 일을 했지만 아이는 낳지 않았다. 남편과의 부부관계는 그의 입을 빌리면 ‘강간’이었다. 일부러 임신이 되지 않게 했다. 한 차례 임신을 했지만 고된 노동 때문에 뱃속의 아이를 잃었다. 수없이 도망쳤지만 도망갈 수 없었다. 그가 잡혀들어간 마을은 삼면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 마을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산과 산 사이에 한 줄로 길게 난 길을 따라가야 했다. 나가는 길도 그 길이 유일했다. 도망쳐도 금방 잡혔다. 잡혀오면 두들겨 맞았다. 산으로도 도망쳐 봤다. 하지만 그가 쉽게 넘을 수 있는 산이 아니었다. 사흘간 산길을 헤매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그는 그곳에서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 그 마저도 실패했다. 그는 중국에서 6번의 자살 시도를 했다. 중국인 시댁에 빚 갚느라 소처럼 일해 어느 날 중국 공안국에서 탈북여성들을 죄다 잡아갔다. 황씨도 끌려갔다. 교도소 안에서 단식을 하며 풀어달라고 사정했다. 이대로 북송되면 그도, 그의 북한 가족들도 모두 죽은 목숨이었다. 그의 시부모가 전재산을 털고, 빚을 져서 1만4000위안(약 236만원)을 만들어 그를 감옥에서 꺼냈다. 그 돈은 곧 그가 앞으로 갚아야 할 돈이기도 했다. 그제서야 그는 탈출을 포기했다. 아이를 갖고 정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포자기였든, 스스로의 선택이었든 그는 강제결혼을 한 지 5년 만에 딸 은희를 낳았다. 은희는 그가 살아남아야 할 이유가 됐다. 탈북자가 운영하는 식당일을 하며 밤낮없이 돈을 벌었다. 5년 만에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던 1만4000위안을 다 갚는데는 꼬박 13년이 걸렸다. 선희씨는 “아무리 갚아보려 해도 원금에 리에리(이자)가 붙고 리에리가 붙었다”고 했다. 조금 살 만해졌다 싶었을 때 불행은 또다시 그를 흔들었다.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가 부러졌다. 가해자는 무일푼이었다. 차는 폐차 직전의 차였다. 두 차례에 걸친 남편 수술비와 치료비가 고스란히 그의 부담으로 돌아왔다. 빚을 갚고 모아뒀던 돈을 모두 병원비에 쏟고도 돈이 모자랐다. 이리저리 돈을 꿨다. 남편 몫까지 돈을 벌어야 했다. 아이를 키우고, 빚을 갚고, 간병을 했다. 그의 2년이 그렇게 또 흘러갔다. 그와 함께 식당일을 하다 갑자기 사라진 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인 역시 탈북민이었다. 그는 지금 한국이라고 했다. “한국에 들어올 생각이 있느냐”고 했다. 그는 “왜 이제야 전화를 주느냐”고 원망 섞인 화를 냈다. 그때 한국행이라는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탈출을 도와줄 선교사와 연락이 닿았다. 선교사는 “지금부터 이틀 뒤에 바로 떠나라”고 했다. 주변을 정리하고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그의 말에 선교사는 “준비하려다 보면 못떠난다. 당장 칭다오까지 갈 버스비만 마련해서 이틀 뒤 떠나라”고 했다. 죽을 수도 있는 탈출길에 아이를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출발 당일 그는 여느 날과 다를 것 없이 은희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작별인사를 했다. “학교 잘 다녀와.” “엄마 안녕.” 그의 목숨을 건 28일간의 탈북일정이 시작됐다. 몇 차례의 위기를 겪으면서 중국 국경을 넘어 계속 이동했다. 태국에 도착해 경찰에 붙잡힌 그는 수용소 생활을 하던 중 한국대사관의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로 “잘 오셨습니다”라는 한국말이 들렸다. 그는 그 말이 가장 따뜻했다고 떠올렸다. 황선희씨(가명)의 모습. 신변보호를 위해 얼굴은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김창길 기자 중국에 있던 딸 데려와 새로운 꿈 대한민국 사회는 그러나 북한과 달랐다. 중국과도 달랐다. 무작정 열심히 한다고 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직장을 구할 때마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경력을 요구했다. 그에게 그런 경력이 있을 리 없었다. “시켜만 주시면 열심히 최선을 다하겠다”고 해도 선뜻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기초생활수급자로 살고 싶지는 않았다. 자격증 공부를 하고, 처음부터 배워나갔다. 그의 손을 잡아준 곳은 한 사회적 기업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운영하는 매장 내 판매일을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말투를 듣고 출신지역을 묻는 손님들께 “평양에서 왔습니다”라고 거리낌없이 말한다. 그는 말의 이음과 이음 사이에 “고조~”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사용했다. 그는 47세까지 사는 것이 꿈이었다. 도망칠 수도 없고 삶의 의미도 없는 중국땅에서 그가 가진 유일한 바람이었다. 나무지게를 짊어지고 다닌 후유증으로 무릎 연골이 닳아버렸다. 걸을 때마다 고통스러웠다. 한 번 찾아온 두통은 잦아들지 않았다. 머리를 벽에 수없이 박아댔다. 성한 곳이 없었다. 온몸이 죽어간다는 것을 그 스스로 느꼈다. 그래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나이, 그리고 은희가 어느 정도 제 앞가림을 할 나이가 될 47세까지만 살다 죽는 게 그의 소원이었다. 한국에서 보낸 지난 2년 사이 그는 자신의 목표를 60세로 늘렸다. 머리를 부수는 듯한 두통도 여전히 찾아오고, 한때 위출혈로 응급실을 찾기도 했지만 그는 “더 살고 싶어졌다”고 했다. 그의 딸도 한국으로 왔다. 이곳에서 학교도 다닌다. “중국에서는 단 한 번도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지 않던 아이가 이곳에서는 ‘무엇이 되고 싶다’는 말을 처음 했다”고 말했다. 그가 처음으로 환하게 웃었다. 그의 마지막 바람은 북한에 두고 온 동생을 찾는 일이다. 브로커는 북한으로 들어가 동생을 찾아내 전화 한 통 하는 데 1000만원이 든다고 했다. 그에게 그만한 돈이 있을 리 없었다. 선희씨는 대신 자신의 이야기를 써서 한 권의 책을 만들었다. 책의 제목은 <19년>이다. 그는 자신의 책이 많이 알려지길 바랐다. 그래서 아직 찾지 못한 남한의 사촌과 미국의 친척이 자신을 찾아주길 바랐다. 미국의 친척을 통해 아버지의 생사라도, 여동생의 생사라도 알고 싶다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그의 딸이 언젠가 이 책을 읽어주길 바란다. 이야기는 딸에게 건네는 편지 형식으로 시작한다. “딸아, 오늘도 너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았다.”
[표지 이야기]중국 경유 -거주 탈북여성 수난사(2019. 08. 23 16:04)
2019. 08. 23 16:04 사회
ㆍ국내 들어온 10명 중 7명은 중국 브로커에 의해 인신매매로 팔려가 “당신은 북한이탈주민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고 있나.” 만약 탈북 모자 아사(餓死)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이런 질문 자체가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탈북민들은 대한민국 국민이지만 여전히 낯선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지난 2018년 9월 11일 한복을 차려입은 북한여성들이 평양 외곽에서 열린 ‘조선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국제 행군’에 참여하고 있다. / AFP·Getty image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이 지난 2월 발표한 ‘2018년도 북한이탈주민 정착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북한이탈주민은 3만2476명인 것으로 집계됐다. 그러나 정확한 숫자는 아니다. 비보호 탈북민들은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보호 탈북자란 중국 등지에서 불법행위를 저지르다 국내로 들어온 탈북민을 가리킨다. 이들은 정부가 제공하는 각종 정착지원금 등 혜택을 받지 못한다. 일부는 난민신청을 하기도 하지만 받아들여지는 사례는 거의 없다. 중국 체류 짧게는 몇 년, 길게는 몇십 년 비공식 집계에 따르면 현재까지 대략 3만4000명 정도의 탈북민이 국내로 들어왔다. 그 중 3000명가량이 중국 등 제3국으로 떠났다. 탈북민의 대다수는 여성이다. 남성 대 여성 탈북민 비율은 2대 8에서 3대 7 수준이다.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들 중 북한에서 곧바로 한국으로 들어오는 탈북민은 극히 일부다. 이른바 ‘직송 탈북민’은 북한에서도 상위계층인 경우가 많다. 돈이 있어야 제3국을 거치지 않고 한국으로 곧바로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유입경로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1인당 적게는 1500만원에서 많게는 3000만원까지 브로커 비용을 들여야 가능하다. 대부분은 중국을 거쳐 베트남, 태국 등의 경로를 통해 들어온다. 그런데 탈북여성의 대다수는 중국에 일시적으로 체류하는 것이 아니라 짧게는 몇 년, 길게는 몇십 년을 살다가 한국으로 들어온다. 강동완 동아대 교수(전 부산 하나센터장)는 “탈북 후 한국으로 들어오기 위해 일시적으로 체류하는 것이 아닌 ‘거주’를 하다가 국내로 들어오는 탈북여성은 전체 탈북여성의 약 70%를 차지한다”고 했다. 왜 그들은 한국에 들어오기 전 중국에서 장기간 거주하는 것일까. 이유는 슬프지만 단순하다. 대부분의 탈북여성들이 중국 브로커에게 잡혀 팔려간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 브로커들에게 탈북여성은 ‘돈’이다. 탈북여성은 중국 시장에서 연령이나 외모에 따라 차등적으로 값이 매겨진다. 젊고 예쁠수록 비싼 값에 성매매업소 등으로 팔려가고, 나머지도 나이 든 중국인 남성이나 장애를 가진 중국 남성 등에게 팔려간다. 국내에 들어온 10명의 탈북여성 중 7명은 중국 인신매매의 피해자인 셈이다. 한 북한이탈주민은 “중국에 인신매매로 팔려가 거주하고 있는 탈북여성들도 언젠가는 한국에 들어온다”면서 “그들의 문제는 곧 대한민국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와 유사한 내용의 보고서가 지난 5월 20일 한 단체를 통해 발표된 적이 있다. 영국 런던에 위치한 비영리단체인 ‘한국미래계획(KFI)’은 A4용지 48장 분량의 보고서를 통해 “희생자(탈북여성)들은 대부분 12살부터 29살 사이로 중국에서 억압, 매매, 납치됐거나 북한으로부터 직접 불법거래됐다. 희생자들은 고향(북한)을 떠난 후 1년 안에 어떤 형태로든 성노예생활을 강요당하고, 많은 경우 1년에 한 번 이상 팔려다닌다”고 폭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성매매로 팔려가는 탈북여성들의 나이는 15~25세가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많은 북한 여성들이 매매혼으로 팔려가 중국인 남편에게 착취당하고, 노예생활을 강요당한다고 밝혔다. 소수의 단체와 기독교 선교사들이 구출을 위해 노력하지만 많은 희생자들이 중국에서 비명횡사하고 있다고 보고서는 적고 있다. 주목할 부분은 ‘남한 정부와 국제 공동체는 중국 내의 북한 난민들에 대하여 신체적 보호를 제공하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the Government of South Korea and the international community will not undertake)’는 대목이다. 보고서는 중국의 지하시장에서 북한 여성을 착취하는 연간 매출규모를 1억500만 달러(약 1263억원)로 추정했다. 탈북여성들은 30위안(약 5000원)에 성매매를 하고, 1000위안(약 17만원)에 중국인 가정으로 팔려가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했다. KFI는 위험에 처한 북한 난민을 구출하고, 탈북자 인권유린 실태에 대한 보고서를 발간하는 사업을 하는 비영리단체로 2009년부터 북한 인권 관련 활동을 하고 있다. 외국 언론은 보도하지만 국내는 외면 외신은 이 같은 내용을 여러 차례 보도했지만 국내 주요 언론은 이 문제를 다루지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가 중국에 팔려다니는 탈북여성의 인권문제에 대해 언급한 전례 역시 없다. 김용화 탈북난민인권연합 대표는 지난 8월 20일 인터뷰에서 “대한민국 정부는 중국에 대해 여전히 식민지 외교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10대 후반 북한 여성들이 중국에서 팔려다니고 있다. 그 아이들은 최소한으로 잡아서 4만5000명 수준이다. 죽은 한성옥이도 20대 초반에 인신매매로 팔려갔던 사람이다.” 중국인 브로커 사이에서 인신매매로 거래되는 비용은 KFI의 발표와 다소 차이가 났다. 20대는 우리돈으로 250만원, 30대는 200만원, 그 안에서 인물에 따라 가격이 달라진다는 것이 김 대표의 설명이다. 그들은 영문도 모른 채 팔려간 뒤 하루 24시간 발가벗고 웹캠을 찍으며 남성을 상대하는 일을 하거나 성노예로 살아간다고 했다. 그는 “내가 (여기 기자분이 여성이지만) 발가벗고 마약에 취해 있는 탈북여성들을 내 옷으로 덮어서 많이 구출하고 다녔다. 그렇게 처참할 수가 없다”고 했다. 대부분 중국 현지 조직폭력배와 연계돼 있다. 그들은 탈북여성들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지속적으로 마약을 주입한다고 했다. 김 대표는 마약에 중독돼 있는 탈북여성을 구출하려다 여러차례 실패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과거 대한민국 정부에 “도와달라”는 요청을 했지만 돌아온 답변은 ‘(중국에 있는 탈북여성들은) 우리 국민이 아니다’였다고 했다. 문제는 이 일을 단순히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북한 주민에 대한 인권침해 실태로만 바라볼 수 없다는 점이다. 이들 중 대부분은 국내로 들어온다. 인신매매를 겪은 탈북여성들은 중국에 머물면서 얻은 각종 질병을 치료하지 못한 채 한국에 들어온다. 결국 한국의 문제가 되는 셈이다. 지난해 12월까지 부산하나센터장을 맡아온 강동완 교수는 중국 현지에서 100명의 탈북여성을 만나 일대 일 심층면접을 벌였다. 그리고 <엄마의 엄마>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했다. 강 교수는 책에서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탈북여성들의 삶에 대한 조명은 국내에 들어온 탈북여성들의 안정적 정착을 위한 배경적 자료로 활용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고 적었다. 국내 입국한 탈북여성들의 문화적 배경은 북한과 중국에서의 생활상이 접목된 형태라는 것이 강 교수의 설명이다. 중국에서 겪은 일들을 빼놓고 그들이 한국에서 겪는 갈등을 설명할 수 없다는 얘기다. 탈북여성 100명과 면접 <엄마의 엄마> 심층면접은 2016년 9월부터 2017년 5월까지 약 9개월간 중국 현지에서 진행됐다. 인터뷰를 진행한 탈북여성들의 당시 나이는 10대가 13명, 20대가 57명, 30대 27명, 40대 3명으로 20대가 과반수였다. 중국에 체류하게 된 기간은 1~5년 이내가 9명, 6~10년 이내 19명, 11~15년 이내 46명, 16~20년 이내 25명, 21년 이상 1명으로 조사됐다. 북한에서의 직업은 노동자가 35명, 상인 31명, 농장원 18명, 교사 6명, 학생 4명, 예술단원 3명, 군인과 의사가 각각 2명, 1명이었다. 이들은 아이를 낳지 못한 8명을 제외하고 전부 중국에서 결혼생활을 하며 아이를 출산했다. 자녀가 1명인 여성은 45명, 2자녀 40명, 3자녀 7명이다. 그들은 인신매매 과정에서 여러 집으로 팔려다니며 여러 명의 남편을 만나기도 했다. 낳은 아이가 전부 아버지가 각기 다른 여성도 있었다. 중국에 비자발적으로 온 탈북여성은 77명, 자발적으로 온 여성은 23명이었다. 강 교수는 “자발적으로 왔다고 이야기하지만 중국행 외에는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서 그들의 선택이 과연 자발적이라고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고 했다. 2003년 탈북한 여성은 19살 나이에 북한에서 낳은 아이를 굶겨 죽였다. 낙태를 하면 병원비로 한 달 식량값이 들었다. 돈이 없어 낳았고, 돈이 없어 굶겨 죽였다. 그는 “아버지가 ‘너까지 영양실조 걸리면 우리 가족을 부양할 사람이 없다. 아이에게 젖을 먹이지 말라’고 했다”고 전했다. 그는 강 교수와의 인터뷰에서 “아이가 3일을 울었어요. 그 다음에 울지도 못하고 결국 말려 죽였단 말입니다”라고 했다. 남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중국으로 갔던 그는 북한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한국으로 가지도 못한 채 13년째 중국에 머물고 있었다. 그 역시 중국 브로커에 의해 인신매매를 당한 뒤 1만6000위안에 팔린 희생자였다. 북한을 탈출한 여성들이 꿈꾼 삶이 ‘인신매매 희생자’일 수는 없다. 그들은 중국과 북한을 오가며 장사를 해 번 돈으로 북한의 가족들을 부양할 목적으로 국경을 넘었다. 또는 자유를 꿈꾸며 한국으로 가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인신매매의 희생자로 살아가고 있었다. “○○에 지금 살고 있는 (탈북)여성은 나이가 19살인데, 14살에 인신매매당해서 15살에 첫째를 낳고, 17살에 둘째를 낳고, 19살에 셋째를 가지니 그제야 중국인 남편이 다리에 채워둔 족쇄를 풀어주더랍니다. 그 자리에서 도망쳐 한국으로 왔지. 그들이 겪었을 고통이 상상이나 갑니까. 그들도 한 민족이고, 대한민국 국민인데 왜 정부는 이 상황을 알려고조차 하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표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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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여성, 인신매매로 중국 남자들의 성노리개로 전락
2006. 06. 01 재테크
미국이 탈북자들에 대해 난민 수용을 허용했다. 그 첫 번째 케이스로 6명의 탈북자가 미국땅을 밟자 전세계인들은 그들의 입을 통해 탈북 여성들의 인권 유린 실태를 듣게 됐다. 인신매매로 인해 성적 노리개로 전락하기 일쑤인 탈북 여성들의 인권 유린 실태를 담았다. 10대 소녀가 40대 노총각에게 팔려가기도 기본적인 삶조차 보장받을 수 없는 생지옥과도 같아 “한창 커야 할 16~17세 여자 아이들이 남자들의 성 노리개가 되고, 또 정신질환자나 노총각의 여자가 되어야 하나요? 발이 묶이고, 달아날까봐 옷도 못 걸치게 하질 않나 혹시 달아나다 붙잡히면 오토바이에 손을 묶어 개처럼 질질 끌고 온 동네를 다닙니다. 지금도 중국에서 그렇게 살고 있을 탈북자들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쳐 잠들 수가 없습니다.” 지난 3월 23일 유럽의회 탈북자 청문회에서 증언한 탈북자 이신씨(여·28)의 항변이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탈북 여성은 인간 이하의 삶을 살고 있다. 어렵게 탈북해 중국 등지에 머물며 한국을 비롯한 제3국으로의 망명을 꿈꾸는 탈북 여성의 대다수가 이 같은 삶을 살고 있다니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지속적인 탈북자 지원 활동을 펼치고 있는 두리하나선교원의 천기원 목사 역시 “탈북 여성들의 인권 유린 실태가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80~90%가량의 탈북 여성들이 인신매매, 강간 등 성적 인권 유린에 노출되어 있지만 불법체류자이기 때문에 최소한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상황이다”라며 탈북자 문제에 대한 여론 환기를 강조했다. 두리하나선교원 측이 제공한 현지 조선족과의 인터뷰 자료에 따르면 헤이룽장성의 한 시골마을의 경우 15가구 가운데 12가구의 노총각이 탈북 여성을 ‘돈을 주고 사서’ 살고 있다고 한다. 탈북자 이씨의 이야기처럼 탈북 여성들의 상당수가 중국 현지 인신매매 조직에 의해 농촌 지역의 노총각이나 정신질환자 등 정상적으로 결혼하기 어려운 이들에게 팔려가고 있다. 심지어 한족의 성적 노리개나 매춘 시장으로 팔려가는 여성도 있을 정도. 이것이 2006년 탈북 여성들의 실상이다. 두리하나선교원을 비롯해 탈북자동지회 등 여러 탈북 관련 단체에서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이러한 실상을 한국 사회에 알리며 탈북자 지원에 대한 여론 환기에 앞장섰다. 하지만 한국 사회가 이런 현실을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미국으로 망명하는 데 성공한 탈북자들의 사연이 알려지면서 탈북 여성의 실상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최근 탈북자 6명이 미국 정부로부터 난민 신분을 얻어 미국에 입국했다. 미국 의회에서 북한 인권법안이 통과된 2004년 이래 탈북자가 미국으로부터 정식으로 난민 신분를 인정받은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다. 따라서 이번 사안은 탈북자 미국행의 기폭제가 될 전망이다. 미국 입국에 성공한 6명의 탈북자 가운데 4명은 여성이다. 이들의 미국행을 도운 두리하나선교원이 공개한 이들의 편지는 하나같이 가슴 아픈 사연으로 채워져있다. 우선 가장 나이가 어린 신찬미씨(가명·여·20)는 스무 살의 나이에 벌써 네 번의 결혼 이력이 있다. 신씨는 여러 번의 인신매매로 산둥 지역으로 팔려갔으나 다행히 오빠 신요셉씨(가명·32)를 만나 함께 미국행에 올랐다. 현재 중국에서 들끓고 있는 중국 인신매매 조직은 가만히 앉아 탈북 여성을 기다릴뿐 아니라 간혹 북한으로 들어와 북한 여성들을 속여 중국으로 데려가기도 한다. 또 다른 탈북자 데보라씨(가명·여·25)는 북한에 들어온 중국 브로커의 말만 믿고 탈북을 했지만 유부남, 그것도 15세 연상의 남자에게 팔려간 경우다. 같이 미국에 도착한 탈북자 나오미씨(가명·여·34) 역시 비슷한 상황. 북한에서의 어려운 삶에 지쳐 탈북해 중국에 살고 있는 친척집으로 가고자 한 나씨는 자신이 일하던 담뱃가게에서 만난 한 중국인에게 친척들을 만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했지만 그가 바로 인신매매범이었다는 것을 탈북한 후에 알게 됐다. 나씨는 엄청난 고생을 감수해야 했고 또다시 목숨을 건 탈북을 시도해 결국 미국으로 향하게 됐다. 두리하나선교원의 이경희 간사는 “성적 학대도 문제지만 거듭된 가정의 해체가 더욱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한다. 인신매매 등으로 인한 성적 학대가 탈북 여성의 육체와 정신을 피폐하게 만든다고 강조했다. 요즘 탈북자는 대부분 힘겨운 탈북 과정을 헤쳐 나갈 수 있는 건강한 20~40대이다. 우선 이들은 탈북하는 순간 성장기를 함께 보낸 북한 가정과 결별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첫 번째 가정의 해체이다. 중국에 도착한 이후에는 상황이 더 어려워진다. 인신매매 일당에 의해 이리저리 팔려 다니나 보니 그때마다 새로운 가정을 만들고 또 해체되는 과정을 반복하게 되는 것. 어차피 돈을 주고 탈북 여성을 산 남성에게 가족관계를 느끼는 것은 어렵겠지만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에 대한 모정은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남기게 된다. 이는 이번에 탈북한 이들 가운데 최고령자인 한나씨(가명·여·36)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다. 북한에서 인민학교 교사이던 한나는 애초부터 탈북을 생각한 것은 아니다. 다만 딸의 운동복 살 돈이 필요해 중국에 장사하러 갔다가 인신매매 일당에게 붙잡힌 것. 딸을 위해 국경을 넘었지만 결국 다시는 딸을 보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인신매매 일당에 의해 중국 남성에게 팔려간 한나는 그곳에서 아이를 낳게 된다. 계속되는 중국인 남성의 구타가 힘겨웠지만 아이를 위해 버티려 하던 한나는 결국 그 집을 탈출해야 했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수준의 구타가 반복되었기에 그녀는 아이마저 포기하게 된 것. 다행히 한나는 천 목사의 도움을 받아 미국으로 탈출했지만 이미 그는 북한과 중국에서 낳은 두 명의 아이를 모두 잃고 말았다. 다음은 미국에 입국한 6명의 탈북자들이 두리하나선교원 측에 보낸 편지들 중 세 명의 것을 발췌한 것이다. 암흑과도 같은 삶을 살아가던 탈북자들의 삶과 그곳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들의 간절함이 묻어나는 사연들이다. 성명 : 신찬미(가명) 나이 : 20세 고향 : 함경북도 회령시 저는 2002년 10월 23일 조선으로 넘어갔다가 10월 27일 다시 중국으로 탈북했고 3일 후인 10월 30일에 셋째 오빠와 사촌언니가 두 살 난 아기를 등에 업고 넘어왔습니다. 그러나 저와 오빠 그리고 사촌 언니와 아기는 어디에도 갈 곳이 없는 처지였습니다. 바깥 날씨는 너무 추웠고 하늘에서는 눈이 펑펑 쏟아져내려 역 안으로 들어가 있는 것이 편안할 것 같아 들어갔는데 갑자기 아기가 울자 한 노인이 공안에 신고를 하는 바람에 잡혔습니다. 그후 북송된 저는 2002년 12월에 또다시 중국으로 탈북해 무사히 강을 넘었고 친척을 찾아가는 큰길에서 나이 50세나 되는 조선족을 만났는데 그는 제 옷차림으로 조선인이라고 짐작하고 자기를 따라오지 않으면 공안에 신고하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두려워서 그 사람을 따라갔습니다. 그 집 창고에서 7일간 먹고 자고 하면서 숨어 지내다가 남자 2명과 함께 연길 시내에 도착했습니다. 그때 저를 데리러온 사람 중에 서른 살쯤 된 총각이 있었는데 그가 저를 목욕탕에 데리고 가서 그는 밖에서 기다리고 저는 목욕을 마치고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그날 밤 그 남자에게 강간을 당했습니다. 다음날 그 남자는 친구들에게 제가 처녀였다고 했습니다. 저는 어린 나이에 억울하게 타국에서 봉변을 당했습니다. 그 사람은 제게 남자 하나 소개해줄 테니 시집가서 돈 많이 벌어서 엄마도 도와주라고 했습니다. 제가 거절했더니 그 사람은 공안에 전화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결국 저는 그 사람의 소개로 2003년 1월 17일 한 이북 아주머니를 만났습니다. 아주머니가 한 남자를 소개시켜주었고 저는 중국 돈 5천원에 팔려갔습니다. 저는 죽어도 그와 살지 못할거라는 생각에 나무를 하다가 도망 쳐서 한 노인의 도움으로 저를 팔아먹은 북한 아주머니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저번보다 더 좋은 남자가 있으니까 시집을 또 가라고 했습니다. 제가 거절하자 또 공안을 부르겠다고 협박하고는 저를 산동성에 있는 서른일곱 살 먹은 한족 남자에게 팔았습니다. 그 남자에게 집으로 보내달라고 사정을 하자 그 사람은 저를 청도에까지 데려다주었습니다. 저는 제가 있던 교회로 갔는데 그곳에는 저를 도와주던 한국 분들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나를 팔아먹은 그 여자에게 전화를 해 또다시 그녀에 의해 흑룡강성의 회족 남자에게 세 번째 시집을 갔다가 어렵게 셋째 오빠와 전화 통화가 되어 목단강을 건너 심양교회에서 오빠를 만났습니다. 그곳에서 오빠는 북경 대사관을 거쳐 한국으로 가려고 시도하다가 그만 체포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에도 저는 서너 번의 교화소 이동을 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가슴 터지는 장면들을 많이 목격했습니다.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너무나 배가 고파 더는 참을 수 없어서 길 옆에 심은 생강냉이 한 이삭을 훔쳐 먹었다는 죄로 오른손 넷째 손가락의 뼈가 다 부러지도록 맞아 지금도 뼈가 부러졌고 발을 내밀라고 해서 발을 내밀었더니 구둣발로 발을 사정없이 밟는 치욕스러운 일을 경험했습니다. 지금도 저의 왼쪽 엄지발톱은 시퍼런 멍이 들고 발톱이 모두 빠졌습니다. 그리고 강냉이 한 이삭을 입에 넣고 하루 종일 무릎을 꿇고 손으로 뒷머리를 지고 앉아 있게 하고 회초리로는 다리를 사정없이 때려서 다리와 발등에 상처가 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그 교화소에서는 하루 세 끼 통 강냉이 쌀에 겨가 절반이나 섞인 밥에 두부콩을 50알 정도 넣고 밥 찌는 손기계로 하나하나 찍어놓고 교화인들에게 배식을 합니다. 반찬은 없고 국이 있는데 말풀을 뜯어다가 대충 물에 헹군 다음 그것으로 국을 끓여줍니다. 그곳에서는 벼농사를 짓는데 교화인들이 너무나도 배가 고파서 개구리를 잡아 산 채로 껍질을 벗겨서 펄펄 끓는 물에 넣고 숟가락 뒤로 개구리 머리를 누르고 있다가 죽으면 그것을 씹어서 먹습니다. 저희 집은 온 가족이 탈북하고 사회적으로 문란한 집이라고 하면서 국가에서 무상 몰수하라고 하여 돈 한 푼 못 받고 국가에 바쳐야 했습니다. 결국 거리에 나앉게 된 어머니는 큰어머니 댁으로 가시고 저는 2006년 1월 23일 다시 중국으로 탈북했습니다. 그러나 저를 중국으로 데려다준 사람은 룡정시 조선족에게 중국 돈 4천원을 받고 저를 넘겨주었고 3월 2일 산동으로 팔려가 살다가 청도에 있는 오빠와 연락이 되어 천 목사님을 만나 이렇게 자유를 찾았습니다. 성명 : 데보라(가명) 나이 : 25세 고향 : 함경북도 청진시 제가 북한에 있을 때는 키도 크고(171cm) 얼굴도 예쁘게 생겼다고 해서 인민무력부 5과라는데 뽑혀서 평양에 올라가 조선인민무력부 대장들인 현철해와 박재경도 만나보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과오를 범하고 출당된 아버지의 과거 때문에 끝내는 다시 돌아오게 됐습니다. 저는 좋은 곳으로 시집보내준다는 중국 브로커의 말만 믿고 중국으로 왔다가 저보다 나이가 열다섯 살이나 많은 유부남의 여자가 됐습니다. 그는 아내가 돈이 많아서 일도 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었어요. 내 인생의 첫 남자가 이런 협잡꾼이라는 게 너무도 억울해서 저는 며칠 동안 엄마를 부르며 눈물로 세월을 보냈어요. 그 사람은 내가 도망갈까봐 외출도 못하게 하고 매일 시시각각 집으로 전화를 해서 내가 집에 있는지를 확인하고 어쩌다 전화를 안 받으면 그 즉시로 달려와서 따지고 야단치고 했어요. 그리고 자기한테는 경찰 친구가 아주 많고 또 직접 대면한 적도 있어요. 만일 내가 달아나면 잡아내는데 한 시간도 안 걸린다면서 잡히는 날에는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했어요. 저는 말도 통하지 않아 벙어리로, 그냥 그 사람의 심심풀이로 힘겨운 날을 보내야 했어요. 목사님 어떻게 저를 도와줄 수 없을까요. 제발 저를 좀 도와주세요. 저 같은 사람이 많다는 건 알고 있지만 성공해서 자유를 찾은 사람들을 보면 부럽고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에 눈물만 나네요. 목사님이 도와주시면 은혜 잊지 않고 꼭 보답할게요. 기회만 주신다면 목사님 실망시켜드리지 않을게요. 정말 하늘에 대고 맹세합니다. 성명 : 나오미(가명) 나이 : 34세 고향 : 함경북도 청진시 저는 1979년 OO인민학교에 입학하고 4년 교육을 받았으며 그 뒤로 6년제 고등중학교 교육을 받았고 1989년 ○○여자 고등중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졸업 후에는 회령 구두공장에서 재봉공으로 일했고 1995년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공장을 그만두고 장사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중국에서 왔다는 한 손님을 음식 가게에서 담배를 팔며 알게 되었고 그에게 “친척을 찾으려 하는데 대가는 후하게 주겠다”라며 도움을 청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의 도움으로 탈북한 후에야 그가 인신매매범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흑룡강성 오상시의 룡봉산향이라고 불리는 산골마을의 조선족 집에 돈 4천원에 팔렸습니다. 그런데 제가 시집간 집은 빚이 어마어마했습니다. 그나마도 인정이 너무 박하고 저를 4천원이라는 인민폐에 데려왔다는 이유로 고된 농사일로 인해 얻은 병도 치료해주지 않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이라는 사람은 병이 들어 아이를 가질 수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급기야 저는 집을 나왔고 어렵게 찾은 친척들의 도움으로 지금의 남편을 만나 혼례를 치렀습니다. 그리고 새 생명을 잉태해 8개월이 지났는데 어느날 밤 갑자기 공안들이 들이닥쳤습니다. 그들은 제가 거짓 증언을 한다며 위협하고 배를 걷어차며 심문했습니다. 저는 배 안에 있는 생명을 봐서라도 1년만 견지해달라고 호소해 4천원의 벌금을 내고 1년이 되면 다시 송환하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태어난 지 6개월이 채 되기도 전에 경찰이 들이닥쳐 아들을 안아보지도 못하고 끌려갔습니다. 파출소에서 한족 여 검사에게 떠밀리어 화장실에서 몸수색을 받았습니다.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에서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몸 구석구석까지 훑었으며 심지어는 생식기 검사까지 했습니다. 아마도 인민폐를 감추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후 교도소로 이송됐는데 그 감방 안에는 스무 명이 넘는 여인이 갇혀 있었고 감방에 들어온 시간은 12시도 훨씬 지났는데 밤새도록 계속 잡혀 들어오고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끝없이 행렬이 이어졌습니다. 결국 저는 북송되었고 보위부에 들어가자 또 몸수색을 했습니다. 옷을 전부 벗기고 겨드랑이며 입 안이며 콧구멍, 귀안, 머릿속과 발바닥 심지어는 벽을 마주한 채 손을 뒷짐지고 일어섰다 앉았다를 30번이나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인민폐를 감추었다면 스스로 내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후 감방으로 갔는데 그곳에는 이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어 가까스로 비집고 앉을 수가 있었습니다. 하루 일과는 아침 5시에 기상 나팔 소리가 들리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두 다리를 포개고 포갠 다리 무릎에 두 손을 올려놓고 하루 종일 앉아있는 것입니다. 또 행동이 조금이라도 늦거나 보고를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은 나무 몽둥이 아니면 쇠관으로 된 몽둥이로 맞았습니다. 감방에는 다섯 살 난 어린아이들부터 여든의 노인도 있었지만 모두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습니다. 노인들은 몸이 불편해 행동이 굼뜨거나 어디가 아파 움직이지 못해도 꾀를 부린다고 하여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신병 간수들의 발에 차이고 몽둥이로 얻어맞곤 했습니다. 감방 안에서 주는 식사란 새까맣게 타 붙은 통 강냉이 누룽지를 소금물에 말아 세 숟가락 정도나 되게 얼구어서 주었고 밤에 잠을 잘 때에는 모기소리 만큼이라도 코고는 소리가 들리면 기상을 해야 함으로 단 하루도 편하게 잠든 날이 없었습니다. 그후 저는 천신만고 끝에 중국으로 왔습니다. 하루하루를 쫓기며 살아도 중국이라는 사회에서는 도무지 삶의 기회를 주지 않을 뿐더러 살아갈 의미마저 없게 만들었습니다. 후대를 위해서도 열심히 일하고 노력의 대가를 받고 싶지만 이 소박한 꿈마저도 이 사회에서는 이룰 수 없습니다. 오직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말입니다. 이 꿈을 하느님께서 꼭 이루어주실 거라고 마음속으로 믿으며 끝없이 기도를 드립니다. 글 / 신민섭(일요신문사)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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