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총 65 건 검색)
- 1500년 전 신라·가야의 ‘특별한 토기’…산 자들의 염원을 담아내다
- 2024. 05. 22 15:16문화
- ... 여느 토기들과 달리 죽은 자를 향한 산 자들의 추모와 애도, 공경의 마음이 스며들어 있다. 의례용 토기들에서 우리는 당대 사람들의 조형감각, 죽음이나 사후세계에 대한 가치관, 장례문화 등을 엿볼 수...
- 호림박물관토기신라가야특별전
- 죽은 자를 위한 신라·가야인들의 마지막 선물···온갖 모양의 토기·토우
- 2023. 06. 07 16:01문화
- ... 출토된 ‘말 탄 사람 토기’(국보), 거북 모양 몸체에 용의 머리·꼬리를 한 ‘상서로운 동물모양 토기’(보물) 등이 대표적이다. 일제강점기에 경주 황남동 유적에서 수많은 조각으로 수습된 것을 복원한...
- 상형토기토우국립중앙박물관신라가야특별전죽음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빗살무늬토기는 왜 '뾰족'할까…실용성 갖춘 신석기시대 걸작 디자인
- 2023. 01. 31 05:00문화
- ... 나타났다고 사라지는 것도 흥미롭다. 무엇보다 이 조기 청동기문화층에서 출토된 도기들이 빗살무늬 토기류와는 사뭇 달랐다. 우선 재료로 쓰인 흙의 입자가 굵고 거칠어졌다. 작은 입자의 모래가 섞인 고운...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 눈일까, 코일까···‘신라시대 토기’가 이리 귀여울 줄
- 2023. 01. 21 13:37사회
- ... 했다. 문화재청, 경산토기 이모티콘 23종 공개 문화재청이 지난 15일까지 진행한 ‘가장 귀여운 경산토기 투표’에서 무료 배포된 이모티콘 23종 중 1등을 한 ‘출토경토’ 이모티콘. 문화재청 제공...
- 달고나서선진
스포츠경향(총 1 건 검색)
- 산 채로 토기에 넣어 매장된 인도 女兒 신생아…죽은딸 묻으러 온 주민이 발견
- 2019. 10. 15 14:34 생활
- 남아 선호가 강한 인도에서 희생되는 여아들을 의미하는 일러스트. 경향신문 자료사진.인도에서 산 채로 매장된 신생 여아가 극적으로 구조됐다. 15일 AFP통신과 인도 ANI통신 등에 따르면 지난 12일 인도 우타르프라데시주의 남성 히테시 시로히가 마을 묘지에서 토기에 들어있는 갓 태어난 여아를 발견했다고 연합뉴스가 보도했다. 당시 시로히는 출생 후 몇 분 만에 사망한 자신의 딸을 묻으려고 현장을 찾았다. 그는 땅을 파기 시작했다가 삽에 토기가 부딪치자 지하 90㎝ 깊이에서 토기를 파냈고 그 안에서 울고 있는 갓난아기를 발견했다. 시로히는 “울음소리를 듣고 순간 내 아기가 되살아난 것으로 알았다. 하지만 그 소리는 토기 안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곧바로 아기를 구조한 뒤 경찰에 신고했다. 아기는 현지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회복 중이다. 관련 소식을 들은 지역 정치인이 치료비를 냈다. 현지 경찰은 이 신생아의 부모를 찾는 등 수사에 나섰다. 지난 1월에도 서부 라자스탄주에서 3주가량 된 여아가 산 채로 묻혔다가 발견됐지만 몇 주 만에 숨지기도 했다. 남아를 선호하는 인도에서는 특히 시골을 중심으로 불법 낙태와 여아 살해 등이 만연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집을 보낼 때 엄청난 지참금을 내야 하는 관습 때문에 여아를 기피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여아가 태어날 경우 아예 호적 신고를 안 하는 경우도 많다. AP통신이 지난해 초 인도 정부의 통계를 인용해 보도한 바에 따르면 인도에 호적이 없는 여성의 수는 6300만명에 달한다. 이런 이유 등으로 인해 2015∼2017년 기준 인도 남자 1000명당 여자의 비율은 896명에 불과한 것으로 집계됐다. 지난 7월에는 북부 우타라칸드주 우타르카시 지역의 132개 마을에서 3개월간 남자 아기 216명만 출생 등록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주간경향(총 2 건 검색)
- [특별기획]한반도·만주 빗살무늬토기 동시 유행(2008. 01. 22)
- 2008. 01. 22 문화/과학
- ‘코리안 루트’ 1만km 대장정 대릉하 유역 ‘사해·흥륭와’ 유적지서 출토… “신석기시대 두 지역은 동일한 문화권” 8000년 전 주거지인 사해 유적에서 발굴된 용 형상의 돌무더기. 중국을 통틀어 가장 이른 시기의 용의 형상에 해당한다. 신석기시대는 인류의 발달사에서 가장 중요한 창조적 발명을 한 시기다. 그것이 바로 토기의 발명이다. 토기의 발명은 인류 최초의 혁명이다. 곧 토기에 물을 담아 집 안에서도 물을 이용하게 된 시기를 신석기시대라 하여, 석기만 사용하던 구석기시대와 구분한다. 지금으로부터 1만 년쯤 전에는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발해연안(渤海沿岸)에는 강이 생기고 물이 모여들여 발해가 생기고 한반도 양쪽에는 서해와 동해가 생겨 오늘날과 비슷한 지형이 형성되었다. 이 시기에 우리 인류는 흙을 빚어 토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 토기를 만들어 쓰다가 어린이가 흙장난을 하듯이 토기 표면에 흙을 찍어 붙이거나 띠를 만드는 따위의 덧대는 행위를 하고, 차츰 토기의 겉면에 금을 그어 문양을 장식하는 데까지 발전했다. 발해연안에서 이 시기가 대체로 지금으로부터 8000년 쯤 전이다. 중국 ‘사해·흥륭와’도 발해문명권 발해연안에서는 지금으로부터 8000년 전(BC 6000년)쯤의 빗살무늬 토기가 발견되었다. 발해연안에서 이른 시기의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는 유적으로는 요하 하류의 발해연안 서부, 즉 황하 하류의 자산(磁山)·배리강(裴李崗) 문화, 북부의 대릉하(大凌河) 상류의 사해(査海)·흥륭와(興隆窪) 문화 그리고 신락문화, 광록도 소주산(小珠山) 하층문화, 요동반도 압록강 하류 후와(後窪) 문화가 있다. 한반도에는 대동강 유역의 궁산·남경유적, 재령강 유역의 지탑리유적, 한강 유역의 암사동유적, 한반도 동북부의 서포항유적, 그리고 동해안의 양양 오산리유적, 남해안의 부산 동삼동유적 등이 있다. 이들 토기의 편년은 대체로 기원전 6000~4000년쯤이다. 그러나 우리 학계에서는 지금까지 한반도에는 구석기시대의 인류가 어디론가 밀려가고, 기원전 4000년 전부터 시베리아·몽골지역에서 ‘빗살무늬토기 제작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믿었다. 경향신문은 이를 규명하기 위해 ‘코리안 루트를 찾아서’라는 기치 아래 탐사를 떠났다. 필자가 합류한 첫날 답사는 중국 요녕성 부신(阜新)시 사해(査海)와 내몽골 적봉시 흥륭와(興隆窪)의 신석기시대 초기 유적을 취재하는 것이었다. 이 지역의 문화를 중국에서는 ‘요하문명(遼河文明)’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매우 국부적인 개념이다. 이들 문화는 요하뿐 아니라 대릉하 유역과 요동반도의 발해연안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사해·흥륭와도 대릉하 상류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필자는 발해문명권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해는 지금부터 8000년 전의 유적이다. 1982년 중국 정부가 전국적으로 지표조사를 실시했는데 그때 발견되었다. 흥륭와는 지금은 내몽골이지만 1979년 재편되기 전까지만 해도 적봉도 요녕성이었다. 용 형상 “중원문화의 시작은 동방” 사해유지발문관에 전시된 빗살무늬토기와 옥귀고리. 한반도의 토기·옥 문화와 직접 연결된다. 사해와 흥륭와 문화는 황하 하류 이른 시기의 문화와 비슷한 시기에 나타난다. 황하 하류의 자산·배리강 문화는 지금으로부터 8000~7000년 전의 것으로 조사되었다. 사해·흥륭와지역은 1994년 전국 단위의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중국 고대 문명은 황하문명이라 부르는데, 더 넓게 보면 장강(長江) 하류, 광동성 주강(朱江) 유역, 신강성(서부) 일대, 황하 유역, 요하 유역 문명권으로 나눈다. 필자는 황하 하류와 요하 유역, 한반도의 발해연안을 포괄하여 발해문명권으로 보고자 한다. 사해 유적은 신석기시대 대표적인 문화 가운데 하나로 빗살무늬토기가 특징이다. 그 전에는 자산·배리강의 빗살무늬토기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았는데, 사해와 흥륭와에서도 이른 시기의 빗살무늬토기가 나왔다. 두 번째는 옥기(玉器)였다. 중국은 옥문화가 발달했는데, 이곳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귀고리 장식품인 옥결( 玉 )이 나왔다. 우리나라 강원 고성군 문암리에서 발굴된 옥결이 이와 똑같다(지금으로부터 7000년 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극동박물관에도 지금으로부터 6000년 전의 옥결이 전시되어 있다. 이런 옥결은 일본에서도 나왔다. 세 번째는 용이다. 중국은 용 토템이고 동이족은 새 토템이다. 중국에서는 중원에서 용 신앙이 있었는데 요녕에서 용이 나왔다. 만리장성은 중화민족의 마지노선이었는데 연산산맥(만리장성) 넘어 사해에서 용이 나와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사실 명나라까지는 만리장성 이동은 동이(東夷)라고 했다. 그런데 가장 이른 시기의 용의 형상이 사해에서 나오면서 이곳이 동양문명의 시발점이 된 것이다. 사해 유적은 요녕성 부신시 대릉하 상류 사해촌에 위치해 있다. 입구에 여신상이 세워져 있고, ‘중화제일촌(中華第一村 )’이라고 씌어 있다. 이곳을 중화제일촌이라고 명명한 것은 중국 최초의 용이 나왔기 때문이다. 사해 유적은 주거유적 60여 기가 도시계획된 것처럼 배열되어 있는데 아주 규격화되어 있다. 방형주거지 사이에 주먹만한 할석(割石)으로 덮은 19.7m에 이르는 용의 형상이 발견되었다. 이 용의 형상은 지하 1.2m 밑에 있었던 것을 그대로 들어올려 지상에 같은 모양으로 복원해놓은 것이다. 사해 유적의 용 형상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중원 문화의 시작이 중원이 아니라 동방에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사해는 농업 생산 위주의 씨족 부락이었다. 용은 농경문화에서 숭배의 대상이다. 사해 유적에서 이런 용 신앙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킨 최초의 사람이 동이인(東夷人)이다. 흥륭와 유적은 행정상으로 내몽골자치구 적봉시 오한기(敖漢旗) 보국토향(寶國吐鄕) 흥륭와(興隆窪)촌이다. 지리상으로는 발해연안 북부 대릉하 지류인 망우하 상류에 위치하고 있다. 1982년 중국 사회과학원의 지표조사 때 발견된 유적으로, 1983년 발굴조사 시 170여 기의 반지하식 집자리로 구성된 대규모 취락지가 발굴되었다. 흥륭와문화 농업경제 중심 사회 지금으로부터 8000년 전의 것으로 확인된 이곳에서 많은 토기와 석기, 옥기가 발굴되었다. 밑바닥이 없는 토기인 통형도관(筒形陶罐)도 나왔는데, 이는 무덤 주위를 두르는 장식으로 일종의 종교시설로 추정된다. 이와 더불어 나온 옥결, 돌보습 등이 특징이다. 이 유적은 중국 고고학계에서는 10대 고고학 발견의 하나로 20세기 중국 고고학의 대발견이고, 중화 시조의 취락이라고 불린다. 그래서 이곳을 ‘화하제일촌(華夏第一村)’이라고 부르고 있다. 경향신문 답사단의 일원으로 흥륭와 유적을 찾아 감회가 새로웠다. 흥륭와는 필자가 이제까지 3번 답사를 시도했는데 두 번 실패하고 이번에 비로소 성공했다. 직접 실사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흥륭와는 사해 유적으로부터 100㎞ 북쪽에 위치해 있는데, 사해와 흥륭와는 대릉하 상류다. 문화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흥륭와 유적은 간혹 홍산문화의 유존이 흥륭와 문화층을 파괴하고 있다. 그래서 흥륭와 문화와 홍산문화의 선후관계를 알 수 있는 좋은 근거가 되고 있다. 흥륭와 유적에서는 주로 빗살무늬토기가 많이 출토되고 있는데, 채색토기는 보이지 않는다. 이 유적에서 출토되고 있는 토기는 주로 빗살무늬 계통으로 지(之) 자형 빗살무늬와 인(人) 자형 빗살무늬, 그리고 사선 빗살무늬 및 교차형 빗살무늬 등이 보이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무늬는 지(之) 자형 빗살무늬다. 교차형 빗살무늬는 삿자리를 짜듯이 교차하면서 베푼 삿자리형 빗살무늬로, 한반도에서도 출토되고 있는 심선문(深線紋) 빗살무늬와 매우 유사하다. 흥륭와 유적 출토의 빗살무늬토기는 대부분이 가는 모래가 섞인 표면이 거친 붉은색 혹은 갈색계의 토기로, 그릇 모양은 주로 큰 독(罐)류와 단지(鉢)류 등이다. 그리고 이들 토기의 소성(燒成) 온도는 그리 높지 않고, 모두 수제다. 흥륭와 유적에서는 빗살무늬토기 이외에 소량의 석편석기와 타제석기 및 마제석기류의 석마봉, 석마반, 반상기 등 곡식 가공 도구가 출토되고 있다. 이밖에 낚시 바늘, 골추(骨錐) 등 어로기구가 출토되고 있다. 이로 미루어보아 흥륭와 문화는 발해연안 서남부의 자산·배리강 문화와 마찬가지로 농업 경제 생활을 위주로 하면서 수렵 생활을 겸하는 사회로 추정된다. 국내 언론에서 처음으로 답사에 성공한 흥륭와 유적에서. 필자(오른쪽에서 네 번째)는 두번의 실패 끝에 이번에 탐사취재단의 일원으로 비로소 이 유적을 찾게 됐다. 흥륭와 유적의 집자리에서 출토된 목탄을 이용한 C¹⁴측정 연대(미작수륜교정)는 5290±95 BC로 나왔다. 이의 나이테(수륜) 교정 연대는 기원전 6000~5000년으로 편년되었다. 이는 신석기시대 초기에 해당하는 연대로 발해연안 서남부 지역의 자산·배리강 문화 연대와 같은 시기다. 지금까지 알려진 발해연안 북부의 신석기시대 문화 가운데 사해 문화와 함께 가장 이른 시기의 문화다. 따라서 흥륭와 유적은 사해 유적과 함께 발해연안의 빗살무늬토기의 기원을 찾는 데 매우 귀중한 유적이다. 발해연안의 빗살무늬토기의 발생은 대략 기원전 6000년에서 5000년쯤으로, 이 시기는 기원전 5000년에서 4000년쯤에 출현하는 동유럽이나 시베리아의 빗살무늬토기보다 무려 1000년 이상이나 앞선다. 그뿐 아니라 시베리아의 빗살무늬토기는 무늬를 새기는 방법이나 그릇 모양이 발해연안의 빗살무늬토기와는 계통이 서로 다르다. 동북아시아 신석기시대의 문화 유형인 빗살무늬토기 문화가 만주지방과 한반도에서 오랫동안(기원전 6000년쯤부터 2000년쯤까지) 유행했다는 사실은 적어도 두 지역이 동일한 문화영역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문화의 동질성은 민족의 동질성과도 통한다.
- 코리안 루트를 찾아서
- [로컬즈]백제 토기 재현의 꿈(2007. 09. 25)
- 2007. 09. 25 사회
- 부여 백제요 신승복 대표 토기는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이던 전통그릇이다. 특히 백제의 토기는 질박하면서도 실용적이고 해학적인 멋으로, 고려청자나 이조자기와는 또 다른 전통공예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백제의 부여지방에 토기공예가 번창했던 까닭은 금강을 끼고 있어 수운(水運)이 용이했고, 구룡지역을 중심으로 출토되는 흙들이 그릇 재료로서 우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거기에 백제 장인의 솜씨와 혼이 가미되어 질 좋고 아름다운 백제 토기를 탄생시켰다. 백제 토기의 뚜렷한 특징은 유약을 바르지 않고 화목 가마로 그릇을 굽기 때문에 가장 무공해한 그릇이라는 점이다. 3개월 이상 물을 담아놓아도 쉬 썩지 않으며, 과일의 보관 신선도도 다른 그릇의 5배에 달한다고 한다. 백제 토기의 맥을 잇고 있는 부여의 백제요(041-836-0300) 신승복 대표(44·충남공예협동조합 이사장)는 전혀 생각지도 않은 계기로 백제 토기를 빗는 도공이 되었다. 부여 장암 출신인 그는 행정학을 전공한 후 서울로 올라가 직장생활을 했다. 그러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지인의 소개로 1992년 초부터 백제요에서 사무원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2002년 무렵 그동안 근근이 명맥을 이어오던 백제요가 심각한 경영난에 처하자 부득이 공장을 내놓게 되었는데, 이를 인수하려는 사람들이 공장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굳은 결심을 하게 되었지요.” 신 대표는 ‘백제 토기와 백제요는 우리 지역에 꼭 살아남아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사재를 털어 백제요를 인수했다. 그는 쓰러져가던 백제요를 다시 일으키는 한편, 본격적인 도공의 길로 나서기 위해 뒤늦게 도예 공부를 시작했고, 2003년에는 목원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까지 받았다. 전반적인 불황에다 중국산의 저가 공세로 경영상의 어려움은 여전하지만 백제 토기를 세계적인 명품의 반열에 올려놓고 말겠다는 신 대표의 의지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백제 토기의 재현과 계승은 단지 공예뿐 아니라 백제문화의 부흥에 다름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생각은 일본 구마모토현과 교류하면서 더욱 굳어졌다. “도자기 문화가 가장 화려하게 꽃을 피우고 있다는 일본에서도 백제 토기를 보고는 깜짝 놀라더라고요. 자기들 자기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그릇문화의 원형’이라면서 감탄을 금치 못하더군요.” 백제요는 오래전부터 토기 제작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해오고 있다. 부여군과 연계해 개인 과 기업체를 대상으로 연 2만5000명에 달하는 체험 참가자들을 맞고 있으며, 연 5000명에 이르는 내·외국인 관광객들도 이곳을 찾고 있다. 이번 백제 문화제 기간에는 전국 대학생 물레경연대회를 열 예정이며, 구드레공원에 재래식 가마를 설치하고 시연도 할 계획이다. 또 이 기간에 부여를 찾는 관광객들을 위해 백제 토기 특별할인 판매행사도 연다고 한다. 앞으로 한·일 공예품 전시회를 열어 양국의 생활문화를 비교 체험할 수 있게 한다는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더 많은 사람이 일상생활 속에서 실용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가격을 낮추는 것도 그가 안고 있는 과제다. 백제 토기를 바라보는 그의 눈매가 식지 않는 꿈으로 그윽하다.
레이디경향(총 1 건 검색)
- [옛것을 만지다](5) 화려한 흙, 토기
- 2014. 05. 12 16:02 문화/생활
- 2천 년 전 태초의 흙과 불로 그릇을 만드는 영민함은 누구에게서 나온 걸까? 토기는 한반도 신석기시대에 처음 만들어졌다. 그리고 여유롭게, 본격적으로 장식을 더하기 시작한 때가 삼국시대부터다. 특히 신라와 가야시대의 토기는 부드러운 곡선의 미에 섬세한 조각으로 예술성의 극치를 보여준다. 5, 6세기 가야시대의 차륜식 토기. 이상문 소장품.그것은 마치 기적처럼 토기는 청자나 백자에 비해 수집가들로부터 외면받고 있는 기물이다. 외형이 투박하고 거칠다는 이유에서 또 재질이 약해 보존하기 힘들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토기는 과연 외면받아 마땅한 기물일까? 나뭇잎이나 나무 그릇에 음식을 담아 먹던 구석기시대를 지나 인간은 마침내 그릇을 발명한다. 진흙과 불이 만나면 단단한 물질로 변한다는 것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음식은 물론 깨끗한 물을 담아 어느 정도 보존할 수 있게 되기도 했다. 그렇게 인간은 거대한 도구의 역사를 써내려간 것이다. 이런 토기가 1천 년, 2천 년의 세월을 견뎌 어느 한 곳 깨진 데 없이 고스란히 우리 곁에 있다면, 그것은 기적이 아닐까? 그 세월의 무게는 값으로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고귀한 것이다. 그렇다고 토기가 오래된 유물로 역사 속에 묻혀 있는 것도 아니다. 토기는 유약을 바르지 않아 ‘흙이 숨을 쉰다’ 하여 일반 자기보다 음식의 신선도를 오래 유지해준다고 한다. 여전히 음식을 건강하게 담아내는 웰빙 그릇으로 우리 곁에 존재한다. 차륜식(수레바퀴) 토기란? 가야시대에 제작된 수레바퀴가 붙은 이형 토기다. 구멍이 뚫린 굽다리 위에 유려한 곡선이 인상적인 U자처럼 생긴 원통형이 얹혀 있다. 그 좌우 측면에는 정교하게 만든 수레바퀴가 하나씩 붙어 있다. 고사리 모양의 돌기물은 가는 흙줄을 양쪽으로 말린 특이한 모습으로 화려함을 더한다. 이러한 차륜식 토기의 존재는 예술품인 동시에 당시 사람들이 이미 소나 말이 모는 마차를 사용했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다. U자형의 잔은 물을 담을 수 있는 기능이 있지만 실제로 물잔으로 썼는지 용도는 명확하지 않다. 주로 무덤에서 출토됐기 때문에 영혼을 나르는 의미로서 제사 등의 의례시 사용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상문의 고미술품 올바로 보기 깨진 도자기 수리하기 문화재나 고미술품의 수리나 보수는 꼭 필요한 걸까? 사실 고미술품은 보수를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현재보다 더 파손의 우려가 있는 경우, 또 실생활에 사용해야 할 경우에는 해야 한다. 또 수리를 할 때 파손된 부분을 무조건 원래의 색대로 해야 하는 것이 제일인 줄 아는 사람도 많은데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본체와 똑같은 색으로 수리한다는 것은 남의 눈에 깨지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일종의 눈속임이다. 특히 요즘은 수리 기술이 발달해 그것이 범죄나 속임수의 방법으로 악용될 수도 있다. 다른 나라의 경우는 금이나 은을 이용해 수리한다. 그래서 어느 부분을 수리했는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고 오히려 기물이 귀하고 좋아 보이는 효과도 누릴 수 있다.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찻잔이나 백자 술잔, 술병 종류는 금으로 수리하는 것이 보기 좋다. 단 상처가 큰 것을 금으로 수리하면 오히려 시각적으로 좀 천해 보이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우에는 오히려 은으로 수리해야 산뜻하고 은의 색이 자연스럽게 검게 변하면 귀티가 난다. 또 청자나 분청 계통의 금이 간 부분도 은으로 메우면 보기가 좋다. <■글 / 이유진 기자 ■사진 / 원상희(Aye Studio) ■도움말 / 이상문(고미술품 감정사)>
- 옛것을 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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