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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총 1,904 건 검색)

대통령실 앞 ‘탄핵 반대’ 화환 행렬에 용산 주민들 “쓰레기 무단 투기” 민원
2024. 12. 11 20:58 사회
... 11일 압수수색을 시도한 대통령실 앞은 지지자들의 화환이 줄지어 있었다. 주민들은 ‘쓰레기 무단 투기’라며 용산구청에 민원을 넣었다. 이날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앞은 윤석열 대통령 지지자들이 주문한...
화환대통령실지지자
[금요일의 문장]장밋빛 약속을 동력 삼는 ‘투기 자본주의’
2024. 12. 05 20:06 문화
... 것이다.” <투기 자본주의>(민음사) 피에르이브 고메즈 EM리옹 경영대학원 교수의 저서 <투기 자본주의>에 따르면 ‘투기’는 자본주의의 예외적 일탈 현상이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의 본질이자...
금요일의 문장
상법 개정하면 해외 투기자본 기승? “기껏해야 견제 역할”[팩트체크]
2024. 11. 27 07:00 경제
... 하락도 우려한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주장이 ‘공포 마케팅’에 가깝다고 반박했다. ①해외 투기자본의 놀이터 된다? 민주당 안은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회사와 주주’로 확대하고,...
주주상법이사행동주의
제주 제2공항 수천 필지 들여다보니…짙게 드리워진 투기의 그림자
2024. 11. 17 09:00 사회|사회
.... 홍 대표 “그 이후 대책들이 나오긴 했는데, 시늉만 했다고 본다. 일례로 2016년 2월에 부동산 투기 방지를 위한 토지 분할 업무처리 지침이 나왔는데, 이전에 분할된 땅은 예외로 규정했다. 제2공항...

스포츠경향(총 121 건 검색)

‘전참시’ 7년만 연극 컴백 ‘러블리 본업 천재’ 안은진, 배우 美 폭발→자칭 ‘프로 집중러’ 최다니엘 ‘산만 대회’ 참가 고군분투기!
2024. 11. 18 07:29 연예|연예
MBC 방송화면 캡처 ‘전참시’가 오랜만에 돌아온 배우 안은진과 ‘최저씨’ 최다니엘의 특별한 일상을 공개하며 토요일 밤 꿀잼을 안겼다. 지난 16일에 방송이 된 MBC 예능 프로그램 ‘전지적 참견 시점’(기획 강영선 / 연출 김윤집, 전재욱, 이경순, 정동식, 이다운 / 작가 여현전 / 이하 ‘전참시’) 322회에서는 ‘러블리 안’ 안은진과 ‘2024 최고 무해남’ 최다니엘의 슬기로운 하루가 그려졌다. 이날 방송에서 1년 반 만에 ‘전참시’를 찾은 안은진의 인간미 넘치는 일상이 공개됐다. 안은진은 매니저 없이 스스로 운전해 연극 연습실로 향했다. 매니저 대신 한아정 연극 조연출이 등장해 이목을 사로잡았다. 이는 긴 연습 시간 동안 대기해야 하는 매니저를 위한 안은진의 배려였던 것. 이에 ‘전참시’ 최초 ‘조연출 시점’으로 안은진의 초밀착 일상이 펼쳐져 색다른 재미를 선사했다. ‘사일런트 스카이’라는 작품으로 7년 만에 연극 무대에 서게 된 안은진은 연습 일정을 꼼꼼히 체크하는 파워 J(계획형) 면모로 눈길을 끌었다. 연습이 시작되자 안은진은 180도 돌변, 극 중 천문학자 역할에 완벽히 녹아들었고 짙은 감정 연기를 선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참견인들 역시 숨죽이며 몰입했다. 오전 연습 종료 후 배우 모드를 해제한 안은진은 직접 만든 제육볶음을 동료들과 함께 나눠 먹는가 하면 정기적인 회식 자리를 마련하는 등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장르 구분 없이 덕질 매니아로 알려진 안은진은 최근 우주 덕질까지 시작했다고. 특히 그녀는 역할 이해를 높이기 위해 진행된 우주 전문 크리에이터 ‘우주먼지’의 강의에 남다른 열의를 보이는가 하면, 우주에 대한 폭풍 질문을 쏟아내며 궁금증을 해결했다. 그런가 하면 안은진은 전설의 한예종 10학번 동기, 배우 이기현, 전재희, 이휘종을 만나 추억 여행을 떠났다. 안은진은 자신이 인기가 많았다는 소문(?)에 “배우 김고은과 이유영이 아우라가 있었다”고 언급하며 대학 시절을 회상했다. 스튜디오에서 그녀는 “말이 적어야 돼요”라며 인기녀가 되는 꿀팁을 대방출하기도. 또한, 안은진은 대학 동기인 배우 이상이와 전화 통화를 이어가며 찐친 케미를 발산했다. 다음으로 예능 보석 최다니엘의 하루가 공개됐다. 최근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 단독 MC로 데뷔한 최다니엘은 김지훈 매니저와 촬영장으로 이동했다. 그는 토크쇼 게스트가 걸그룹 피프티 피프티(FIFTY FIFTY)라는 소식에 그룹에 대한 정보를 터득하며 만반의 준비에 나섰다. 촬영이 시작됐고 최다니엘은 멤버들의 이름을 한 명씩 호명하며 MC로서 현장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매끄러운 진행 실력을 뽐내던 그는 이내 피프티 피프티에게 유행 포즈와 앞니 플러팅 등 MZ 정보를 배우며 촬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다음 날, 최다니엘은 산만하다는 누명을 벗고자 집중력이 필요한 활동을 수행하는 ‘산만 대회’ 출전을 예고했다. 자신의 이미지에 대한 억울함(?)을 호소한 최다니엘은 진지한 태도로 대회 준비에 나섰다. 그는 떨어지는 메모지 잡기, 병에 물 따르기, 두뇌 체조 등 각종 집중력 강화 훈련을 하면서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아 웃음을 유발했다. ‘산만 대회’ 출전일이 다가왔고, 그는 주어진 글에 특정 단어가 몇 번 들어가 있는지 정확히 세는 게임을 시작으로 걷기 지옥, 구슬 지옥 등을 치르며 대회에 임했다. 사회자의 각종 방해에도 최다니엘이 크게 흔들리지 않자, 매니저는 “대회에 진심이었다”며 달라진 그의 모습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기도. ‘산만 대회’ 결과 최다니엘은 217명 중 35등을 차지했고 일생 최대 집중력을 발휘한 최다니엘의 모습이 마지막까지 즐거움을 선사했다. 다음 주 방송에서는 2024 최고의 아이돌 투어스(TWS)가 6인 6색 숙소 생활을 방송 최초 공개한다. 매니저도 감당 못 하는 청량 소년들의 축제 스케줄 현장을 비롯해 개인기까지 대방출할 예정이다. 또 ‘구라걸즈’가 신기루의 생일을 맞아 한 자리에 모여 공주 파티를 벌인다. 특히 ‘흑백요리사’ 출전 셰프였던 평가절하까지 출격, 산해진미 잔칫상을 선사한다고 해 기대가 모인다. 예능 프로그램 ‘전지적 참견 시점’은 매주 토요일 밤 11시 10분 방송된다.
‘강매강’ 서현우, 무릎까지 꿇은 딸바보의 웃픈 고군분투기
2024. 09. 19 19:41 연예|연예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강매강’ 서현우가 코믹 포텐을 제대로 터트렸다. OTT 디즈니+의 오리지널 시리즈 ‘강매강’에 서현우가 등장만 해도 초대형 재미가 뒤따라온다. 온몸에 코믹 본능을 장착한 그의 색다른 연기 변신이 매 순간 참을 수 없는 폭소를 유발하고 있기 때문. 극 중 서현우는 가늘고 길게 가는 것이 목표인 생계형 형사 정정환 역으로 활약하고 있다. 지난 18일에 공개가 된 ‘강매강’ 5-6회에서 서현우는 정정환 캐릭터에 완벽하게 빙의, 웃음과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딸바보 아빠의 고군분투를 맛깔나게 담아냈다. 정정환(서현우 분)에게 크나큰 위기가 찾아와 구독자들의 시선이 화면에 집중됐다. 바로 딸들이 갖고 싶어 한 공룡 피규어 티렉스가 동구(김라온 분)의 손에 들어간 것. 설상가상으로 티렉스는 이미 단종돼 어디에서도 구매할 수 없었기에 그의 시름은 점점 깊어갔다. 정정환의 티렉스 사수기는 웃픔 그 자체였다. 동구를 만나고자 오랫동안 놀이터에서 기다리는 것은 기본, 동구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무릎을 꿇은 채 사정하는 그의 모습은 애달프기까지 해 다음 스토리를 더욱 궁금케 했다. 이후 정정환의 반전 모먼트는 재미를 배가시켰다. 티렉스를 따라 해보라는 동구의 말에 ‘인간 공룡’으로 변신, 디테일을 섬세하게 살린 행동 모사로 보는 이들을 웃음바다에 빠지게 만들다가도, 전 국가 대표다운 사격 실력을 발휘해 카리스마를 뿜어냈다. 딸들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정정환의 부성애는 애틋함을, 이를 행동으로 옮긴 엄청난 추진력은 웃음을 선사했다. 특히 열정을 불사른 서현우의 호연 덕분에 이야기는 더욱 쾌활하고 생동감 넘치게 전개됐다는 반응이 쏟아져 나왔다. 전작 ‘킬러들의 쇼핑몰’에서는 한없이 잔혹한 스나이퍼로, ‘삼식이 삼촌’에서는 야망을 품은 엘리트 군인으로 묵직한 존재감을 보여준 서현우. 그는 ‘강매강’을 통해 매력적인 새 얼굴을 꺼내 들었다. 특히 코미디 장르도 섭렵한 그의 만능 연기력이 빛을 발하며 캐릭터와 높은 싱크로율을 이루고 있기도. 믿고 보는 저력을 마음껏 뿜어내고 있는 서현우가 앞으로 그려 나갈 또 다른 하드캐리에도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서현우가 출연 중인 디즈니+의 오리지널 시리즈 ‘강매강’은 매주 수요일마다 2개의 에피소드가 공개된다.
양궁에서만 금메달 28개에 펜싱·사격도 강세, 투기 종목 금메달은 모두 37개··· 숫자로 돌아보는 올림픽 금메달 100개
2024. 07. 29 18:47 스포츠종합
사격 대표 반효진이 29일(현지시간) 프랑스 샤토루 슈팅 센터에서 열린 2024 파리올림픽 사격 공기소총 10m 여자 결선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뒤 시상대에서 기뻐하고 있다. 연합뉴스 펜싱 오상욱이 27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 에서 열린 2024 파리 올림픽 남자 사브르 개인 결승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뒤 시상식에서 메달에 입맞춤하고 있다.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파리 올림픽 초반 양궁과 사격, 펜싱 등 ‘활·총·칼’ 종목에서 잇따라 금메달 낭보가 울리며 ‘전투민족 대한민국’이란 오랜 농담이 다시 유행하고 있다. 펜싱에서 오상욱이 남자 사브르 개인전에서 대표팀 첫 금메달을 수확했고, 사격 여자 공기권총 10m 결선에서 오예진이 같은 대표팀 김예지를 제치고 올림픽 신기록으로 2번째 금메달을 따냈다. 여자 양궁은 단체전에서 올림픽 10연패 신화를 썼다. 29일(한국시간) 고교 2년생 반효진이 여자 공기소총 10m 결선에서 우승하며 이번 대회 4번째 금메달이자 한국의 하계올림픽 100번째 금메달이라는 이정표까지 세웠다. 1976 몬트리올 대회 레슬링 양정모부터 2024 파리 대회 사격의 반효진까지, 대한민국의 올림픽 금메달 역사를 돌아봐도 ‘전투민족’ 농담이 어색하지 않다. ‘활·총·칼’은 물론 태권도와 유도, 레슬링 등 투기종목에서도 고루 강세를 보였다. 한국이 올림픽에서 가장 강세를 보인 건 역시 양궁이다. 금메달 100개 중 28개가 양궁 한 종목에서 나왔다. 전날 여자 단체전에서 올림픽 10연패 신화를 쓸 만큼 한국 양궁은 전 세계 적수를 찾기 힘들 만큼 압도적인 위용을 뽐냈다. 양궁에 이어 태권도에서 금메달 12개, 유도와 레슬링에서 각각 금메달 11개씩을 수확했다. 복싱 금메달 3개를 포함하면 투기 종목에서만 금메달 37개가 나온 셈. 은메달, 동메달을 포함한 전체 메달로 따지면 유도가 46개로 하계 대회 최다다. 양궁이 44개로 그 다음이다. 사격 오예진(오른쪽)과 김예지가 28일(현지시간) 프랑스 샤토루 슈팅 센터에서 열린 2024 파리 올림픽 사격 공기권총 10m 여자 결선에서 각각 금·은메달을 수확한 뒤 메달을 깨물며 기뻐하고 있다. 연합뉴스 양궁 임시현이 28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레쟁발리드에 마련된 양궁 경기장에서 열린 2024 파리올림픽 양궁 여자단체전 결승전에서 금메달을 확정짓는 마지막 한 발을 쏘고 있다. 연합뉴스 유도·레슬링 다음으로 사격에서 금메달이 9개, 펜싱은 이번 대회 오상욱까지 6개다. 양궁의 28개를 더해 ‘활·총·칼’에서 금메달 43개를 따냈다. 배드민턴에서 사격과 같은 금메달 6개가 나왔고, 역도에서 금메달 3개를 수확했다. 핸드볼과 기계체조 금메달은 각각 2개씩이다. 그외 육상과 수영, 야구, 골프에서 각각 금메달 1개씩 나왔다. 모두 16개 종목에서 금메달 100개가 나왔다. 동계 올림픽으로 범위를 넓히면 쇼트트랙에서 금메달 26개를 따냈다. 동·하계를 통틀어 양궁 다음이다. 메달 전체로 따지면 53개로 유도보다 더 많은 전체 1위다. 한국은 스피드스케이팅과 피겨스케이팅까지 더해 빙상 종목에서 금메달 32개를 차지했다. 한국 대표팀 통산 하계올림픽 금메달 종목별 집계
결별 두달···“백점 엄마” 고은아의 육아 분투기 (고딩엄빠4)
2024. 05. 09 07:56 연예
MBN ‘고딩엄빠4’ ‘청소년 엄마’ 고은아가 헤어진 남자친구를 그리워하는 아들에 대한 미안함으로 눈물을 쏟았으나, 주위의 조언과 격려로 용기내 아들에게 이별 사실을 밝힌 뒤, “앞으로 둘이서 행복하게 살자”고 약속했다. 8일 방송된 MBN ‘어른들은 모르는 고딩엄빠4(이하 ‘고딩엄빠4’)’ 40회에서는 싱글맘 고은아가 출연해, 네 살 아들의 육아는 물론 ‘투잡’까지 씩씩하게 해내는 ‘백점 엄마’ 면모로 시청자들의 따뜻한 박수를 받았다. 특히 고은아는 “두 달 전 헤어진 남자친구를 여전히 가족으로 생각하는 아들에게 너무 미안하다”는 고민을 털어놓았으나, 아들에게 현명하게 상황을 설명한 뒤 오히려 아들의 위로를 받아 안방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이날 방송은 닐슨코리아 집계 결과 2.5%의 시청률을 기록, ‘고군분투 엄마’ 고은아를 향한 시청자들의 진심 어린 응원을 반영했다. 먼저 고은아가 청소년 엄마가 된 사연이 재연드라마를 통해 펼쳐졌다. 제천에서 ‘설현 닮은꼴’로 유명했던 고은아는 부모님의 이혼 후 고등학교 시절부터 친구들과 자취를 했으며, 연기 학원을 다니면서 배우의 꿈을 꿨다. 그러다 성인이 된 고은아는 2년 전 관심이 있던 동네 오빠와 우연히 술자리에서 합석해 하룻밤을 보냈고, 곧장 연인이 됐다. 하지만, 고은아는 “남자친구의 집착과 의심, 폭언이 갈수록 심해졌다”며 “임신 사실을 알렸음에도 ‘내 아이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과 막말을 일삼아 헤어지게 됐다”고 털어놨다. 그럼에도 고은아는 “남자친구가 다시 찾아와 ‘아이를 책임지겠다’고 해, 순간 판단력이 흐려져 재결합했고, 결혼을 했다”고 밝혀 스튜디오 출연진들의 걱정을 자아냈다. 게다가 고은아는 “출산 후에도 남편이 막말은 물론, 아이 앞에서 폭력까지 휘둘러 집을 나왔다. 이후 이혼을 요구했으나 남편이 ‘절대로 이혼해주지 않겠다’고 해 너무 힘들었다”라고 토로해 충격을 안겼다. 막장 드라마 같은 사연에 모두가 분노한 가운데, 고은아가 홀로 스튜디오에 등장했다. ‘제천 설현’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고은아는 연예인급 미모로 시선을 사로잡았으며, 박미선-서장훈-인교진 등 스튜디오 출연진들과 인사를 나눴다. 이어 “재연드라마 속 사연 후, 이혼을 완료했다”는 근황을 밝혔다. 그러면서 고은아는 “현재 아이를 홀로 키우고 있는데, 내가 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고민을 털어놓은 뒤, 네 살 아들과의 일상을 공개했다. 고은아는 깨끗하게 잘 정돈된 집에서 아침 7시, 아들 시안이의 애교 공격으로 눈을 떴다. ‘하이 텐션’으로 엄마를 깨운 시안이는 등원 준비를 마치자, “차를 타지 말고 뛰어서 가자”라며 도보 10분 거리에 위치한 어린이집을 냅다 뛰어서 등원했다. 고은아는 그런 아들을 헉헉 거리며 뒤쫓았고, 시안이를 등원시킨 뒤 회사로 출근해 경리 업무를 봤다. 이후, 하원 시간에 맞춰 아들을 픽업을 한 뒤, 인근 폐비행장에서 저녁 때까지 아들과 놀아줬다. 다행히(?) “쉬가 마렵다”는 아들의 말에 겨우 귀가한 고은아는 아이를 씻기고 직접 저녁 식사를 요리하는 등 1초도 편히 쉬지 않았다. 이윽고 밤이 되자, 고은아는 돌봄선생님에게 시안이를 맡겨 놓은 뒤, 호프집으로 심야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다. 낮에는 경리 업무, 밤에는 홀서빙 일을 하느라 주3일을 새벽 2시에 귀가하고 있지만, 고은아는 주말에도 아침부터 움직여 아들과 ‘워터파크 나들이’를 떠났다. 그러나 ‘워터파크’ 여자 탈의실 앞에서 고은아는 ‘만 4세 이상 혼욕 금지’라는 안내문을 보고 당황했고, 워터파크에 함께 온 친구의 남편에게 S.O.S를 보내 겨우 시안이를 수영장에 입장시켰다. 수영장 안에서도 고은아는 20kg에 달하는 아들을 계속해 들어 올리며 물놀이를 해줬다. 그러다 ‘친구 남편 찬스’로 겨우 휴식 시간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고은아는 친구들에게 “아들이 두 달 전 헤어진 남자친구를 자꾸 찾아서 혼란스럽고 미안하다”는 고민을 밝혔다. 이어 “남자친구와 결혼에 대한 입장차로 이별하게 됐는데, 시안이가 이로 인해 상처를 받을까 봐 걱정된다”면서 눈물을 펑펑 쏟았다. 실제로 시안이는 돌봄선생님과 단 둘이 있을 때, ‘가족 그림’을 그렸는데 여기엔 엄마와, 전 남자친구인 ‘파파’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이를 보고 고민에 빠진 고은아는 친오빠를 불러 상담을 했다. 친오빠는 “아이를 위해서라도 확실하게 (전 남자친구와의) 관계를 끊어내는 것이 좋지 않을까?”라고 조언했고, 얼마 후 고은아는 시안이에게 조심스레 ‘파파’ 이야기를 꺼냈다. 고은아는 “요즘 ‘파파’가 안 와서 보고 싶다”는 시안이의 말에 잠시 눈물을 글썽이다가 “엄마와 파파가 앞으로 안 만나기로 했다”고 설명한 뒤, “이제부터 엄마와 단둘이 행복하게 살아도 괜찮을까?”라고 물었다. 시안이는 “네”라며 덤덤히 답한 뒤, 조용히 엄마를 끌어안으며 “사랑해요”라고 말했다. 또한 ‘위로의 뽀뽀’까지 해주며 의젓한 모습을 보여 고은아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두 모자의 애틋한 모습을 지켜본 박미선은 “모든 엄마들이 자식에게 잘 해준 건 생각하지 않고, 못 해준 것만 기억하는 것 같다”며 고은아의 입장에 공감하면서도 “아들에게 너무 미안해하다 보니 본인이 지쳐가는 걸 잘 모르는 것 같다”며 걱정했다. 그러면서, “앞으로는 본인의 행복을 위해 살면서 페이스 조절을 해나가면 좋을 것 같다”,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해진다”라며 진심 어린 조언을 건넸다. 어린 나이에 부모가 된 ‘고딩엄빠’와 ‘청소년 부모’들이 한층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MBN ‘고딩엄빠4’는 매주 수요일 밤 오후 10시 20분 방송된다.

주간경향(총 31 건 검색)

제주 제2공항 수천 필지 뜯어보니…역시나, 투기의 그림자(2024. 11. 18 06:00)
2024. 11. 18 06:00 사회
제주참여환경연대 조사…“부지 선정 발표 직전 거래 폭증” 땅 소유자 60% 이상이 외지인…사전 정보 유출 가능성도 지난 10월 27일 촬영된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 일대의 제주 제2공항 예정지. 무가 듬성듬성 심겨 있지만 관리가 되지 않아 잡초가 무성하다. 제주참여환경연대 제공 “제2의 하와이보다는 우리의 삶의 터전으로서, 생활의 보금자리로서의 제주도를 원한다.” 지난 11월 11일 찾은 제주시 이도2동 제주시청 앞 도로에는 1991년 11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청년 양용찬의 33주기를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양용찬은 제주 관광 개발의 절차를 간소화하는 제주도개발특별법이 1991년 국회에 상정되자 분신했다. 그는 특별법이 제주 주민들의 삶의 터전을 위협하고 주민들을 소외시킨다고 봤다. 끝내 특별법은 국회를 통과했고 이후 33년간 제주도는 개발에 개발을 거듭했으며, 현재도 개발이 진행 중이다. 그 상징 중 하나가 제주 제2공항이다. 계속된 개발로 관광객이 늘자 누군가는 제주도에 공항을 하나 더 지어야 한다고 했고, 10년의 찬반 논란 끝에 국토교통부는 지난 9월 제주 제2공항 건설 계획을 고시했다. 제주의 두 번째 공항 건설은 이제 기정사실이 됐다. 제주 제2공항을 바라보는 제주도민들의 시선은 복잡하다. 제주도 밖의 뭍 사람들이 제주공항 이용에 불편함을 느끼고 막연히 공항 하나 더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제주도민 절반은 제2공항을 통해 더 많은 관광객이 들어올 때 숙박·렌터카 업체는 물론 도내 건설업 등에도 미칠 긍정적인 영향에 주목한다. 나머지 절반은 또 다른 공항 건설로 인해 관광객이 더 늘어나면 지하수가 줄고, 이미 포화 상태인 하수·쓰레기 처리가 전보다 곤란해질 것을 우려한다. ‘제주도를 하와이로 보느냐, 삶의 터전으로 보느냐’ 양용찬은 여전히 질문을 던지고 있다. 시민단체 제주참여환경연대는 국토부가 제주 제2공항 건설 계획을 고시하자, 공항 부지로 편입된 2840필지가 그간 누구의 손을 거쳐 누구의 소유가 됐는지를 토지대장 등을 통해 일일이 조사했다. ‘보라! 제주땅의 실상을’이라고 이름 붙은 이 보고서가 드러낸 것은 세 가지다. ‘땅 소유자의 60% 이상이 외지인이었다’는 점, ‘제2공항 부지 선정이 발표되기 직전 부동산 거래량이 폭증했고, 그중 상당수는 기획부동산 업체들의 투기성 거래’였다는 점, 끝으로 ‘부지 선정 이전에 사전 정보가 유출됐을 가능성이 작지 않다’는 점이다. 이 단체의 2명뿐인 상근자로 광범위한 조사를 진행한 홍영철 공동대표, 박유라 사무국장을 지난 11월 11일 제주시 이도2동 제주참여환경연대 사무실에서 만났다. 소문으로만 떠돌던 제주 제2공항 부지를 둘러싼 투기가 실제 어떤 식으로 이뤄졌는지, 이 개발 사업의 이익은 누구에게 돌아갈 가능성이 큰지, 사업 계획을 재검토할 필요성은 없는지를 물었다. 부지 발표 전 거래량 폭증 제주참여환경연대 홍영철 공동대표(왼쪽)와 박유라 사무국장이 지난 11월 11일 제주참여환경연대 사무실에서 제주 제2공항 부지 토지 소유 실태 조사 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박유라 사무국장은 추석 연휴도 반납하고 두 달간 조사에 매진했다. 그는 일을 계속하는 동기에 대해 “분노다. 행정이 주민들을 현란한 말로 기만하는 것을 보면 분노가 치민다. 분노가 힘이다”라고 했다. 이효상 기자 -수천 필지를 조사하는 것이라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을 텐데 어떻게 조사하게 됐나. 홍영철 제주참여환경연대 공동대표(이하 홍 대표) “제주 제2공항 부지에 대한 투기 의혹이 해소되지 않고 남아 있었다. 제주 제2공항 부지 선정 결과가 발표된 건 2015년 11월 10일인데, 며칠 뒤 도의회에서 법무사 출신의 한 도의원이 ‘제주도민만 몰랐지, 이미 정보 유출이 다 됐다’는 얘기를 공개적으로 했다. 2021년에는 제주 지역 언론에서 국토교통부 직원이 제2공항 부지 사전 정보로 친인척에게 투자를 권유한 것으로 보이는 카카오톡 메시지가 보도되기도 했다. 우리 단체도 참여하는 제주제2공항강행저지비상도민회의에서 해당 직원을 경찰에 고발도 했는데 고발인 조사도 이뤄지지 않았다. 국토부가 지난 9월 6일 제2공항 관련 고시를 하면서 필지가 공개됐는데, 나온 김에 다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여다보자, 해서 조사를 하게 됐다.” 조사 결과는 예상을 뛰어넘는다. 제2공항 부지는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난산리·수산리·신산리·온평리 일대 2840필지인데, 부지 선정 결과가 발표된 2015년 11월 이전에 토지 거래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예컨대 2010~2014년 5년간 이 일대 땅의 토지 거래 건수는 평균 132.4건이었다. 그런데 2015년에는 439건으로 3배 이상 거래됐다. 특히 부지로 선정된 2015년 11월에는 한 달 동안 2014년 전체의 거래 건수(154건)보다 많은 172건의 거래가 이뤄졌다. 부지 선정 직후 이 일대 땅이 지가 상승을 막기 위한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지정돼 토지 거래가 제한된 점을 고려하면 부지 발표 직전 비정상적으로 거래가 폭발했다는 얘기가 된다. 개별 필지의 소유권 변동 현황을 보면 2015년 무렵 소수의 부동산개발업체, 농업회사법인들이 여러 필지를 사들여 지번을 쪼갠 후 부지 발표 전 매각한 흔적이 나타난다. 이른바 ‘기획부동산’의 유입이다. 2015년 1월 만들어진 울산의 한 부동산 회사는 그해 3월부터 이 일대 땅 14필지를 사들여 23필지로 쪼갠 후 대부분의 필지를 같은 해 8월 이전에 매각했다. 이 일대 땅 91필지를 거래한 A개발업체는 2015년 11월까지 필지를 모두 매각하고는 그해 12월 법인을 해산했다. 부지 발표 전 매입과 필지 분할, 매각을 통해 이익을 극대화하고, 부지 발표 직후 해산하는 기획부동산의 전형이다. 땅을 사들인 건 외지인들이었다. 이 일대 토지 소유자 2108명 중 60.2%(1270명)는 제주도 밖에 주소지를 두고 있었고, 제주도 거주자는 39.8%(838명)에 그쳤다. 한때 A업체에서 부회장을 지낸 것으로 알려진 인물은 주간경향에 “이런 업체들은 순간에 했다가 없어지는 거다. 그렇다고 무슨 책임이 있는 건 아니지 않느냐”고 했다. 투기와 투자는 법적으로 뚜렷이 구분되지 않는다. 부지 정보가 사전 유출된 정황이 없는 한 그렇다. -부지 정보가 사전 유출됐다고 보나. 홍 대표 “부지 선정 전 매매 건수가 늘어난 걸 보면 다른 해석이 불가능하다. 제주 부동산에 2013년부터 중국 자본이 들어오기 시작해서 2015년까지 제주 전역에서 부동산 거래가 늘고 부동산 가격이 오른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지역은 2013년부터 거래량이 쭉 올라가는 흐름을 보이지 않다가 2015년, 특히 그해 11월에 갑자기 늘었다. 이 지역은 애초에 중국 자본이 들어올 만한 곳이 아니었다. 해안지역이 아닌 중산간 지역 농지였고, 소규모 필지가 많아 대규모로 개발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정보를 가지고 거래가 이뤄진 것이 아니라면 다른 이유를 찾기 힘들다.” 사전 유출 의혹은 진즉 제기됐다. 제주 지역방송 JIBS가 2021년 보도한 내용을 보면 국토부 직원은 친인척에게 ‘막내야, ○○리 공항 신도시 자리야. 혼자만 조용히 투자하길 바란다. 이거 들키면 오빠 잘린다’고 했다. 그러나 이후 이렇다 할 후속조치는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조사에서도 사전 유출을 의심할 만한 정황이 더러 발견됐다. 국토부 산하 한국공항공사의 전 직원 B씨는 2015년 3월 제2공항 부지로 편입되는 땅 2필지를 경매로 매입했다. 해당 필지는 길이 연결되지 않은 맹지였다. B씨는 “농사를 지으려고 샀다. 맹지지만 차가 들어갈 수 있게끔 돼 있다. 공사 직원들과 친하게 지내지 않았고, 들은 이야기도 없고 현재도 연락 안 한다”고 했다. 국토부는 2021년 사전 유출 의혹이 제기되자 “제2공항 관련 입지 정보 사전 유출은 없었다”고 했다. -2015년 11월 원희룡 당시 제주지사가 “(부지 일대의) 토지 보유 동기를 정확히 따지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후속 대책은 없었나. 홍 대표 “그 이후 대책들이 나오긴 했는데, 시늉만 했다고 본다. 일례로 2016년 2월에 부동산 투기 방지를 위한 토지 분할 업무처리 지침이 나왔는데, 이전에 분할된 땅은 예외로 규정했다. 제2공항 부지는 분할이 다 끝났는데 건드리지 않고 넘어갔다.” 투기 흔적 모르쇠, 사업 강행 -왜 바로잡지 않을까. 홍 대표 “국책사업에서 투기는 불공정일 뿐 아니라 국가나 국민을 가장 힘들게 하는 문제다. 투기가 있는지 확인해서 투기가 발견되면 사업 자체가 오염됐으니 중단하고 재검토해야 한다. 그런데 사업 자체에 영향을 줄 정도가 되면 권력을 쥔 사람들이 막아버린다. 정치인들은 대규모 사업이 업적이 된다. 행정은 거래가 늘고 땅값이 오르면 양도세·취득세 등 세수가 는다.” -외지인들에게 팔린 땅들은 현재 어떻게 관리되고 있나. 홍 대표 “한 번 돌아봤다. 전혀 관리되지 않고 있다. 어떤 데는 감귤나무 죽은 것을 심어놨다. 나무를 심어서 보상을 극대화하려는 거다. 또 다른 특징은 밭 면적을 늘리는 것이다. 튜물러스라고 해서 용암이 쌓인 돌무더기 지형이 있는데, 이걸 긁어냈다. 긁어내 봐야 아래도 돌이라서 식물을 재배할 수가 없는데 경작 면적을 늘리려는 것이다.” -투기 단절을 위해 사업 자체를 재검토할 가능성은 있다고 보나. 홍 대표 “쉽지 않아 보인다. 오영훈 제주지사도 후보 시절에는 갈등이 큰 제2공항 사업을 주민이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현재는 차라리 주민투표를 하자는 도민들 요구에도 불구하고 국토부 장관에게 주민투표를 요구하지 않고 있다.” 서로 신공항을 유치하려는 다른 지역들과 달리, 제주도는 주민들의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다. 제주도와 제주도의회의 합의로 2021년 2월 진행된 두 차례의 공론형 여론조사는 두 건 모두 반대 의견이 높게 나타났다. 단 공항이 들어서는 성산읍에서는 찬성 의견이 높게 나타났고, 이를 근거로 원희룡 당시 지사는 사업을 계속 추진했다. 문재인 정부 때는 2021년 7월 환경부가 제2공항 전략환경영향평가를 반려하면서 사실상 사업에 제동이 걸렸지만, 윤석열 대통령이 후보 시절 제2공항을 다시 공약하고 원희룡 지사가 국토부 장관이 되면서 사업은 부활했다. 절차상 국토부 고시 이후에는 사업을 재검토할 기회 자체가 많지 않다. 오영훈 지사는 앞으로 진행될 환경영향평가의 심의 권한이 제주도에 있다는 점에서 “제주도의 시간이 될 것”이라고 강조해 왔지만, 제주도는 지난 9월 24일 국토교통부에 제2공항 건설사업에 제주지역 업체를 참여하게 해달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 이미 제2공항 건설을 기정사실로 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대목이다. -다른 지역과 달리 제2공항에 대한 반대 여론이 적잖게 나타난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나. 홍 대표 “처음에 부지 발표가 됐을 때만 해도 여론조사에서 찬성한다는 응답이 70%까지 나왔다. 그런데 2016년부터 제주도의 하수처리장 대부분이 포화상태에 이르렀다는 사실이 알려진다. 제주도는 지하수 의존도가 몹시 높은데 2017년부터는 지하수 고갈 신호가 나타났다. 그 무렵에 전 세계적으로도 오버투어리즘 문제가 대두됐다. 이런 걸 고려한 계획이어야 한다는데 공감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또 초기 예측과 달리 현재는 2055년 제주도의 공항 이용객 수요가 연간 3970만명으로 줄었다. 현재 제주공항이 연간 3300만명을 감당할 수 있다. 연간 600만명의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제주공항보다 1.5배나 큰 공항을 하나 더 지을 필요가 있느냐.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번 조사 결과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박유라 사무국장 “땅은 지문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개발이나 이권의 흐름을 보여준다. 이번 보고서로 누가 이득을 보고 누가 손해를 봤는지가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홍 대표 “땅은 주권과 같다. 하와이 원주민들이 좋아서 원주민이 된 게 아니듯이, 땅 뺏기고 나면 주인이 아니라 거기 얹혀 사는 존재가 된다. 제주참여환경연대는 1991년 제주도개발특별법저지를 위해 결성된 범도민회(제주도개발특별법반대를위한 범도민회)의 후신이다. 범도민회는 특별법 통과 이후에 급속히 외지인들이 제주땅을 사들이고 있음을 1993년 제주지역 전수 조사를 통해 보여줬다. 그때 땅을 잃어버렸다면, 지금 제주도민들은 제주도의 미래라든지, 삶의 터전에 대한 결정력을 잃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특집
[이기환의 Hi-story](29)“꺾이면 안 돼” 초대 주미 외교관들의 분투기(2022. 04. 08 14:53)
2022. 04. 08 14:53 문화/과학
얼마 전 독립운동가 월남 이상재 선생(1850~1927)의 서거 95주기(3월 29일)를 맞아 색다른 자료가 공개됐습니다. 선생이 한성감옥에 투옥(1902)된 뒤 감옥 도서실의 대출내역을 정리한 장부(‘한성감옥 도서대출대장’)입니다. 선생의 가문이 올 초 독립기념관에 기증한 자료인데요. 대출대장에는 선생뿐 아니라 훗날 독립운동가로 활약할 이승만(1875~1965), 정순만(1873~1911), 박용만(1881~1928), 이준(1859~1907), 이종일(1858~1925), 이동녕(1869~1940) 선생 등의 이름도 보인답니다. 1883년 9월 18일 미국 워싱턴을 방문한 보빙사가 체스터 아서 미국 대통령(재임 1881~1885)에게 큰절을 올리고 있는 모습(왼쪽). 1888년 1월 17일 워싱턴 상주를 위해 스티븐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재임 1885~1889, 1893~1897)에게 신임장을 제출하려고 백악관을 찾은 초대 주미공사 일행의 모습(오른쪽).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저 여인들은 기생들이냐” 이상재 선생 자료를 보면서 문득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선생은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1841~1905)을 모시고 워싱턴 외교무대를 개척한 분입니다. 조선의 초창기 대미외교를 상징하는 몇가지 에피소드가 있죠. 첫 번째는 1883년 조미 수교 1주년을 맞아 미국을 방문한 민영익(1860~1914) 등 보빙사(조선 사절단)가 당시 체스터 아서 미국 대통령(재임 1881~1885)에게 큰절을 올리는 장면이고요. 두 번째부터 이상재 선생과 관련이 있는 에피소드죠. 바로 서구열강 중 처음 개설된 주미공사관원들의 워싱턴 데뷔기(1888년 1월)입니다. 초대 공사는 박정양이고요. 이상재 선생(서기관)은 참찬관 이완용(1858~1926), 서기관 이하영(1858 ~1919), 번역관 이채연(1861~1900), 미국인 의사 출신인 참찬관 호러스 앨런(1858~1932) 등과 함께 파견됐습니다. 1888년 1월 17일 박정양 공사 일행이 미국의 스티븐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재임 1885~1889, 1893~1897)에게 신임장을 제정(提呈·파견국의 국가 원수가 대사에게 수여한 신임장을 주재국 국가 원수에게 전달)하는데요. 이때 해프닝이 일어납니다. 일행은 관복인 흑단령을 입고 백악관 접견길에서 대통령을 기다립니다. 잠시 후 클리블랜드 대통령이 집무실을 나와 신임장을 받으려고 접견실 중앙에 섰는데요. 공사 일행은 멀뚱멀뚱 서 있었습니다. 그럴 만도 했습니다. 일행은 조선 국왕의 곤룡포 같은 특별한 관복을 입은 대통령을 기다린 거죠. 대통령이 다른 관리들처럼 양복을 입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한 겁니다. 양복을 입은 이가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린 일행이 황급히 큰절을 올리려 했습니다. 그러자 미국 측에서 “그럴 필요 없다”고 정중히 만류합니다. 5년 전 보빙사의 해프닝을 미국 측에서 기억하고 있었던 겁니다. 우여곡절 끝에 업무를 시작한 초대 공사 일행은 워싱턴 정가를 발칵 뒤집어 놓았답니다. 걸을 때마다 사각사각 소리가 나는 풍성한 도포 자락과 말총으로 만든 모자(갓)를 쓴 조선외교관들의 모습(‘하퍼스 위클리’ 1888년 1월 28일자)이 화제를 뿌렸습니다. 워싱턴 사교계 데뷔기도 흥밋거리입니다. 박정양 공사가 파티에 모인 여인들을 보고 “저 여인들은 기생들이냐”고 물었답니다. 수행한 앨런이 큰일 날 소리라는 듯 “저 여인들은 미국에서 가장 저명한 부인들이자 딸들”이라고 손사래를 쳤다는군요. 그런 낯선 환경 속에서도 공사 일행은 우아하고 평온한 미소와 함께 사뿐사뿐 걸었답니다.(‘하퍼스 위클리’) 그러나 박정양 공사는 1888년 2월 7일 열린 미국 법무부 장관의 연회를 두고 ‘아찔한 경험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술과 안주가 낭자하고…. 남녀가 서로 껴안고 춤추고 심지어 저고리를 벗어 맨살을 드러내고… 속적삼을 뚫고 머리를 산발하고 가발을 뒤로 늘어뜨리고…. 어지럽고 아찔하다.”(<미행일기>) 청나라 허락하에 미 대통령 만나야 했지만 그러나 이런 애로는 양념에 불과했습니다. 이상재 선생 가문이 2019년 국립고궁박물관에 기증한 자료를 볼까요. 선생이 10개월 동안(1888년 1~11월) 주미공사관 서기관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작성한 업무편람(<미국공사왕복수록(隨錄)>)과 선생이 주고받은 편지모음집(<미국서간>) 등입니다. 초대 주미조선공사관은 1888년 1월 18일 워싱턴 시내의 일명 ‘피셔옥’을 임대했다. 그날부터 업무에 들어간 공관원들은 공사관 건물에 태극기를 꽂았다. 공관은 워싱턴 북서쪽 로건 서클 15번지 건물을 임대했고, 2년 뒤인 1891년 고종의 내탕금 2만5000달러를 들여 구입했다. 이 문건 등을 보면 초대 주미공사관의 첫 번째 임무는 바로 ‘영약삼단’(?約三端)’을 거스르는 것이었습니다. ‘영약삼단’은 ‘별도의 약속’을 뜻하는 ‘영약(?約)’과 ‘세가지 조건(三端)’을 합한 말입니다. 그 세가지 조건을 볼까요. “첫째, 조선 사절이 주재국에 도착하면 먼저 중국공사관으로 가서 보고한다. 둘째, 모든 행사에는 늘 중국 사신의 뒤를 따른다. 셋째, 중요 교섭 내용은 먼저 은밀하게 중국 공관의 지침을 받는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입니까. 해외 주재 조선 외교관이 청국공사의 허락을 받아야 외교활동을 벌일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닙니까. 주권국의 외교관에게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조건이 붙었다는 말입니까. 기막힌 히스토리가 있습니다. 당시만 해도 조선은 서구열강 가운데 가장 먼저 외교관계를 맺은 미국을 ‘대인배의 나라’로 여겼답니다. 1882년 체결한 조·미 통상조약의 제1조를 볼까요. “제3국이 한쪽 정부에게 부당하게, 또는 억압적으로 행동할 때는 다른 한쪽 정부가 원만한 타결을 위해 주선한다.” ‘거중조정’ 조항이라 하는데요. 고종은 그런 미국의 중재자 역할에 큰 기대를 걸고 워싱턴에 해외상주공사관을 두겠다고 한 겁니다(1887). 그러나 곧 난관에 봉착합니다.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1823~1901)이 위안스카이(袁世凱·1859~1916)를 통해 반대 입장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청나라는 “청국의 속방인 조선이 각국에 사절을 파견하려면 먼저 (종주국인) 중국의 인준을 받아야 한다”고 고집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이 그런 조건을 받아들였겠습니까. 공관 설립 자체를 반대할 수는 없었죠. 초대 주미공사관원 일행. 앞줄 왼쪽부터 이상재, 이완용, 박정양, 이하영, 이채연. 뒷줄 왼쪽부터 김노미, 이헌용, 강진희, 이종하, 허용업 등 수행원과 하인들도 함께 찍었다. / 한국이민사박물관 소장 그때 청나라가 마지못해 내건 허락의 조건이 바로 ‘영약삼단’이었던 겁니다. 하지만 1888년 1월 워싱턴에 도착한 박정양·이상재 등 초대 주미공사 일행은 처음부터 이 영약삼단을 지키지 않습니다. 이상재 선생의 문건 중에 ‘송미국외부조회(送美國外部照會)’(1888년 1월 10일)가 눈길을 끕니다. 즉 초대 주미공사관이 ‘영약삼단’을 무시하고 청국공사 장음환(張蔭桓·1837 ~1900)을 찾아보지 않은 채 “토마스 베이야드(1828~1898) 미국 국무장관을 방문하겠다”고 국무부에 보낸 문서입니다. 이때 실무교섭을 담당한 앨런은 미국 측과 이 문제를 논의한 결과 “외교관례에 어긋나는 얼토당토않은 행위”라는 결론에 도달했다는군요. ‘주권국의 자존심을 지키다’ 박정양 공사 일행은 마침내 ‘청나라의 간섭을 받지 않고’ 대통령 면담일정을 조율한 뒤 클리블랜드 대통령을 접견하고 신임장을 제출(17일)한 겁니다. 박정양 공사는 고종에게 전보를 보내 “불가피하게 영약삼단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고했습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아차린 청국공사 장음환은 “영약삼단을 왜 지키지 않았느냐”고 앙앙불락합니다. 이때 박정양 공사는 “급히 출발하느라 청나라가 보낸 전보를 전달받지 못했다”면서 “우리 정부의 정식공문을 받지 못했는데 어찌하느냐”고 둘러댔습니다. 정식공문을 받지 못했다는데 어쩌겠습니까. 청나라 측은 일단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미공사 일행은 워싱턴의 일명 피셔옥(皮瑞屋·Fisher House)을 임대해 공사관으로 썼습니다. 이상재 선생은 “공관 건물 맨 꼭대기 층의 전면에 깃대를 세우고 태극기를 높이 게양했다”(<별건곤> 1926)고 회고했습니다. 워싱턴에 태극기를 꽂은 첫 번째 기록입니다. 그러나 조선 외교관들의 행보는 처음부터 가시밭길이었습니다. 청나라가 끈질기게 ‘영약삼단’ 문제를 거론하면서 주미공사관은 물론 본국 정부까지 괴롭혔습니다. 이상재 선생이 주고받은 편지(38통)에 조선 외교관들의 분투가 녹아 있습니다. “중국 공사가 예절(영약삼단) 문제로 매번 트집을 잡아 정말 소위 진퇴유곡의 처지다.”(1888년 2월 12일) “중국 공사가 양보하지 않고 고집부리는(相持) 것이 가장 참기 어렵다. 그러나 서로 부딪치면 우리나라가 중국으로부터 곤란을 당할까 두렵다. 그렇다고 명령을 들으면 외양의 기품을 면하기 어렵다. 중도를 취하기 어렵다.”(1888년 3월 2일) “중국 공사는 매번 우리나라 공사의 위에 서고자 하고, 우리 공사 역시 그 밑에 있지 않으려고 한다. …이 나라에 주재하는 각국 공사(30여개국)는 모두 부강한 나라이고, 오직 우리나라만 빈약하다. 그러나 각국 공사와 서로 맞서 지지 않으려고 한다. 만약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꺾이면 국가의 수치이고 사명을 욕보이는 것이다.”(1888년 5월 23일) 초대 주미조선공사 서기관이었던 이상재 선생의 편지(1888년 5월 23일) / 국립고궁박물관 소장·한철호 동국대 교수 번역 ‘구악 청나라와 신악 미국’ 낯선 환경과 부족한 예산도 걸림돌이었습니다. “우리 돈 10이 100금인즉 연봉 1000원으로는 역부족인데 어떻게 지내야 할지 모르겠다”(1888년 1월 20일)고 했고, “아침·저녁을 쌀과 고기를 사서 관내에서 밥을 지어 먹는데 물가가 너무 높다”(1888년 2월 12일)고 하소연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외교관들은 조선을 위해 열과 성을 다했습니다. 이상재 선생의 소장 문건 중에 1888년 11월 13일 미국인 ‘딸능돈(달링턴 혹은 탈링턴)’ 등이 설립한 회사가 ‘철도(경인선) 설치’를 제안한 문건과 계약서 초안이 수록돼 있는데요. “경성~제물포 노선 철도’를 건설하는 계약기간은 15년이며, 15년 후 재약정 여부를 가린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철도부설권을 미국에 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호러스 앨런은 “이 규약의 초안은 매우 좋다. 정부는 돈 한푼 내지 않지만 이 약정에 따라 시행하면 경성이 번화스럽기가 세계 각국과 같게 된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는데요. 그러나 박정양 공사는 “철도부설권을 미국에 준다 해서 미국이 조선을 보호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니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고 보고하면서 무산되고 맙니다. 박정양 공사는 청나라의 끈질긴 경질 압력 때문에 부임 10개월 남짓 만에 경질되고 맙니다. “병환 중인 박정양이 귀국하므로 서기관 이하영을 대리공사로 임명한다”고 미국 정부에 통보한 문건(1888년 11월 16일)이 보입니다. 박정양 공사와 이상재 선생 등이 귀국하게 되죠.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말도 통하지 않은 외교무대에서 그래도 기죽지 않고 고개를 세우려 했던 조선 외교관의 분투를 엿볼 수 있었죠. ‘영약삼단’이라는 해괴한 조건을 내세워 괴롭힌 청나라의 방해를 뚫고 말입니다. 그렇다고 미국은 문자 그대로 아름다운 ‘미(美)’자 미국이었을까요. 서구열강 중 첫 번째로 국교를 수립했고, 서구열강 중 처음으로 주재공사관을 두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수호조약 제1조의 조항에서 약속했듯이 미국의 거중조정에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이 얼마나 순진한 생각이었는지 훗날 밝혀지죠. 미국은 그저 조선을 문호개방을 통해 이익만 챙겨가면 되는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막상 수호조약을 맺고 보니 “조선에서 수출 가능한 물품은 소가죽과 쌀, 머리털, 전복껍데기뿐”(루시어스 푸트 초대 주한 미국공사의 보고서)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결국 1905년 7월 일본의 조선 지배권과 미국의 필리핀 지배권을 인정해주는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조약을 미국-일본 간 맺게 되죠. 미국은 을사늑약 후(1905년 11월 17일) 가장 먼저 주한공사관을 철수한 국가가 됐습니다. 특사 자격으로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밝힌 고종의 친서를 들고 미국을 방문한 호머 헐버트(1863~1949)라는 분 있죠. 그러나 미국 정부로부터 홀대만 받았죠. 헐버트는 “미국은 한국이 어려움에 닥쳤을 때 제일 먼저 한국을 저버렸다. 그것도 가장 모욕적인 방법으로 인사말도 없이…”라고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얼토당토않은 영약삼단의 조건을 내건 청나라나, 을사늑약 후 가장 먼저 배신한 미국이나…. 외교란 자국의 이익만 챙기면 그뿐이었죠. 청나라가 ‘구악’이었다면 미국은 그저 ‘신악’이었을 뿐입니다. 국제정세는 예나 지금이나 냉혹할 뿐이죠. 철도부설권의 양도를 두고 “미국이 조선을 보호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니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던 박정양 공사의 한마디가 떠오르네요. “만약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꺾이면 국가의 수치이고 사명을 욕보이는 것”이라며 파이팅을 외친 이상재 선생의 다짐도 여운을 남깁니다.
이기환의 Hi-story
[렌즈로 본 세상]“청년들은 월세 전전, LH는 투기 전전”(2021. 03. 12 16:11)
2021. 03. 12 16:11 사회
한국토지주택공사(LH) 전·현 직원들의 땅투기 의혹이 공분을 사고 있습다. 내 집 마련도 요원한 청년들의 절망과 박탈감도 말할 수 없이 커졌습니다. 지난 3월 9일 청년진보당 소속 청년들이 LH 서울지역본부에서 기습시위를 벌였습니다. 청년들은 “땅투기 집단 LH 가족, 차명 모두 처벌하라”, “지금 필요한 건 몰수와 처벌”, “LH 직원, 땅 내놓고 감옥으로” 등의 글이 적힌 손 현수막을 펼쳐 들고 구호를 외치며 건물 출입문으로 들어섰습니다. 본부장과의 항의성 면담을 신청했고, ‘업무 방해’라며 막는 직원들과 잠시 승강이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오영오 본부장이 내려와 출입문 앞에 선 채로 면담이 이뤄졌습니다. 오 본부장은 “최대한 조사가 빨리 이뤄지도록 협조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기습시위는 청년들의 자조와 분노의 한마디가 담긴 스티커를 출입문에 붙이면서 마무리됐습니다. “청년들은 월세 전전, LH는 투기 전전”, “월세 내려고 50만원 벌 때 LH는 묘목 심고 수십억 꿀꺽!”
렌즈로 본 세상
[표지 이야기]주택공급 확대보다 투기수요 차단이 우선(2020. 07. 24 16:03)
2020. 07. 24 16:03 경제
ㆍ그린벨트 해제는 집값 상승만 부추겨… 장기공공임태주택 늘려야 숫자를 세기도 어려울 정도로 부동산 대책을 남발한 정부는 신뢰를 잃었다. 정부 대책을 비웃듯 집값 상승세가 멈추지 않자 대통령까지 나서서 공급 확대를 독려했다. 정부는 수도권 주택공급 확대를 위해 서울 강남권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 해제까지 검토했지만 결국 물러섰다. 그린벨트 개발로 집값을 잡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과 해제에 부정적인 여론 때문이었다. 정부는 주택 공급확대 방안의 하나로 태릉골프장과 인접한 육군사관학교 등 군 시설과 잠실 유수지 등 공공 유휴부지를 택지로 개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사진은 서울 노원구 육군사관학교 일대 부지 / 연합뉴스 그린벨트 해제 카드가 사라지면서 태릉골프장 등 군 시설과 잠실 유수지 등 공공 유휴부지를 택지로 개발하는 방안, 용적률 상향과 고밀도 개발이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부동산 업계를 중심으로 이 기회에 재건축·재개발을 완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하지만 부동산 개발의 공공성을 강조해온 전문가들은 집값 상승만 부추길 수 있는 공급 대책보다 투기수요 차단이 우선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투기수요 차단 없으면 ‘밑 빠진 독 물 붓기’ 그린벨트 해제 논란은 손쉽게 부동산 공급을 늘리기 위한 대안이었다. 하지만 지금 부동산 수요는 투기수요가 실수요를 압도하는 형국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공급을 해도 수요를 맞추기 어렵다. 전강수 대구가톨릭대 교수는 “공급 대책을 이야기할 때는 실수요를 갖고 따져야 한다”며 “실수요를 파악하려면 우선 투기수요를 잠재우는 것이 급선무”라고 말했다. 전 교수는 부동산 가격 상승을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프레임 자체가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투기수요를 없애는 정공법으로 부동산 보유세(종합부동산세·재산세)를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의 부동산 보유세 실효세율인 1%까지는 아니라도 현재 0.16% 수준에서 적어도 0.5% 수준으로는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전 교수는 “정부는 지금 핀셋 방식으로 종부세에 미세한 조정만 하고 있다”면서 “조세저항이 심해서 굉장히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그걸 해내지 않으면 변죽만 울리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남기업 토지+자유연구소 소장은 “보유세가 가장 중요한 수단인데 한 번에 높일 수 없기 때문에 장기 로드맵을 내놓고 시장 참여자가 앞으로 수익률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상황을 알게 만들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지난 7월 22일 발표한 세법개정안에서 종부세 대상자인 고가 1주택 보유 고령자 세액공제율 및 합산공제율 한도를 각각 10%씩 상향 조정했다. 부동산 가격 상승에 비해 세부담이 적어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지적이다. 이 때문에 세부담 자체를 완화하기보다 과세이연제도 등 부동산을 처리하거나 상속·증여할 때 납부하는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는 제안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주택 공급을 한다면 개발로 더 이상 이득을 누릴 수 없는 방식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간 정부는 ‘교차보조’ 방식을 택해 그린벨트를 수용해 얻은 땅을 민간에 비싸게 팔아 얻은 돈으로 임대주택을 공급했다. 하지만 공사가 적자를 보전하는 방식으로 땅장사를 한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민간 건설시장의 가격 상승을 부추긴다는 지적도 있었다. 세종시의 임대료와 집값이 비싼 것도 이런 방식으로 택지개발 과정에서 땅값이 비싸졌기 때문이다. 대안으로 택지개발을 위해 땅을 수용할 경우 이를 다시 민간에 매각하지 않고 건물만 분양하는 방식으로 주택을 공급하는 ‘토지임대부’ 방식이 거론된다. 땅값이 빠지는 만큼 분양가가 낮아진다. 이명박 정부 시절 서울 강남구 세곡동의 보금자리주택 중 일부가 이런 토지임대부 방식으로 공급됐다. 하지만 이런 아파트단지는 매달 부담하는 토지임대료를 감안한 정도만 가격에서 빠질 뿐 시세는 주변 아파트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택지를 개발하면서 얻은 이익이 보금자리주택을 분양받은 소수에게 고스란히 돌아갔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이 제도를 재도입한다면 싸게 분양받아 큰 차익을 누리는 ‘로또 아파트’가 나올 수 없도록 매매 시 공공에 환매의무 등 이익을 환수하는 장치를 더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은영 도시연구소 소장은 “토지임대 방식은 환매의무가 없으면 큰 의미가 없다”며 “투기 상황에서는 무엇보다 개발이익을 환수하려는 공공개발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토지임대 방식으로 공급해야 투기수요를 해소하고 공급을 늘리는 대책으로 역세권 등 목 좋은 곳을 공공개발해 분양 주택이 아닌 장기공공임대주택을 지어야 한다는 제안도 있다. 실제 경기주택도시공사는 무주택자 누구나 30년 이상 장기거주가 가능한 ‘기본주택’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토지는 공공이 소유하고 건축물은 비영리법인, 공익법인, 협동조합, 사회적기업, 마을기업 등 사회적경제주체가 소유하는 장기임대주택이다. 소득·자산에 상관없이 살 수 있도록 해 임대주택을 저소득층의 주거지로 보는 ‘낙인효과’를 없앤 것이 특징이다. 공급대책의 하나로 거론되는 재건축·재개발 완화는 투기 수요만 자극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최은영 소장은 “그간의 공급대책에 더해 유휴부지를 활용한 공급 효과와 분양가 상한제, 초과이익환수제와 같은 규제 효과가 점차 나타날 것으로 본다”면서 “재건축·재개발은 초고가 아파트를 만드는 방식이라 주택 가격을 인상하는 요인이 된다는 점에서 규제 완화는 불붙은 시장에 기름을 붓는 실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재개발과 고밀도 개발을 도시 공간의 재구성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유현준 홍익대 건축도시대학 교수는 “은평뉴타운처럼 골목길을 다 때려부수는 방식으로 짓는 것이 아니라 보존할 곳은 보존하면서 부분적으로 밀도를 높여 상업성을 만들고, 동시에 경의선 숲길처럼 동네를 연결하는 공원을 만들어 걷고 싶은 도시를 만드는 건축적 의미의 재건축·재개발은 시도할 만하다”고 말했다. 여권은 최근 청와대와 국회를 비롯한 공공기관의 세종시 이전을 추진하자고 제안했다. 참여정부의 균형발전 의제를 부동산 안정을 위한 대책의 하나로 꺼낸 모양새다. 하지만 혁신도시 등 그간의 균형발전 정책이 수도권 인구를 분산하는 효과는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실효성이 있을지 의문이다. 유현준 교수는 “KTX 같은 교통이 발달할수록 중력처럼 중심부인 수도권으로 쏠리게 된다”며 “오히려 세종시나 혁신도시가 인접 도시의 인구를 빼와 지방 구도심의 공동화 현상을 낳는 부작용이 크다”고 지적했다.
표지 이야기

레이디경향(총 4 건 검색)

“편견으로 보지 말아주세요” 두 장애인의 결혼 분투기
2013. 02. 06 15:35 화제
‘결혼 소식’은 반갑게 전해질 때가 많다. 결혼을 당연시하는 사람들이 줄어드는 추세지만 두 사람이 힘을 합해 한 가정을 꾸리기로 선택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한 사람이 장애인의 경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게다가 장애인끼리의 결혼이라면 더더욱.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데, 어떻게 배우자나 가족을 돌볼 수 있을까. 얄팍한 전제들을 뒤집어보면 사실 장애인끼리의 결혼이야말로 ‘사랑과 신뢰’ 없이는 유지되기 힘든 관계임을 알게 된다. 적어도 영화 ‘나비와 바다’로 엿본 우영씨와 재년씨의 결혼 이야기는 그랬다. 2년에 걸쳐 이 커플이 만나 사랑하고 결혼에 골인하는 장면을 다큐멘터리 영화 ‘나비와 바다’에 담은 박배일 감독은 두 사람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고 했다. 그럼에도 장애인의 사랑과 결혼에 대해 알리고 싶은 마음이 컸기에 영화를 완성할 수 있었다. “우영이 형과 같이 다큐멘터리를 공부했는데 둘 다 장애인에 관한 내용을 찍고 싶어 했어요. 당시 형을 재년 누나와 5년 넘게 사귀고 있었는데 왜 그녀를 집에 데려다주지 못하는지에 대한 영화를 만들었어요. 그 후 놀이공원에 가서 프러포즈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결혼하는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한 거죠.” 장애인에게도 쟁취해야 할 권리가 있다면 원하는 곳으로 자유롭게 이동할 권리와 성별을 막론하고 성적인 존재로서 자신을 인정받을 권리가 아닐까. 장애인들에게 결혼은 그 의미만큼이나 부담도 크다. 결혼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반려자가 생기고 자신의 삶과 더불어 누군가의 삶을 계획하는 데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통계상 인구의 10%가량이 장애인이라고 한다. 하지만 독립적으로 경제활동을 하다가 연애와 결혼에 이르는 장애인은 극소수이다. 거동이 불편하거나 지적장애가 있으면 더욱 그렇다. 길에서 장애인과 일상적으로 마주치지 않는 것은 그들 대다수가 집에서 생활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장애 아동을 둔 어머니는 ‘죄인’이 되고, 성인이 되도록 늘 자녀를 돌봐야 하며 자신보다 자녀가 먼저 죽는 것이 차라리 맘이 편하다고 말한다. 장애인의 이동과 사회활동을 돕는 활동보조인 등의 제도가 있지만 제한적이며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장애인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장애 자체가 아니다. 장애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편견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감옥이다. 장애인에게도 보통 사람들과 똑같은 욕구가 있고 사랑도 할 수 있는데 이를 범죄라도 되는 양 싸늘하게 보는 이들도 많다. 8년 차 커플 우영씨와 재년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 달에 한 번 어렵게 만나 카페에서 데이트라도 할라치면 그들에게 어김없이 불편한 시선이 쏟아졌다. 갇힌 공간을 박차고 나온 두 사람은 탁 트인 놀이공원, 산책로, 복지관 등에서 데이트를 했다. 연애 기간이 길어지자 각자 집으로 돌아갈 걱정 없이 마음 놓고 함께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우영씨가 결혼에 대한 강력한 의지와 끈기로 망설이는 재년씨를 설득했다. 우리, 이렇게 결혼했어요 놀이공원에 가서 도시락을 나눠 먹는 등 두 사람의 데이트는 여느 커플과 다를 바 없이 로맨틱하다. 의사 표현은 우영씨가 훨씬 적극적으로 하는 편이지만, 말이 별로 없는 재년씨도 곧잘 애교를 표현한다. 휠체어를 탄 우영씨와 똑바로 걷기 힘든 재년씨. 두 사람이 서로의 속도에 맞춰 느리게 걸어가는 뒷모습이 불편해 보이기보다는 아름다운 까닭이다. 물론 연애하는 데도 불편함은 많았다. 데이트를 앞두고 도와줄 사람이 없으면 우영씨는 혼자 밥을 차려 먹고, 샤워를 하고, 옷을 입는 과정이 힘겹다. 우영씨는 전형적인 ‘부산 사나이’다. 프러포즈도, 청혼도 사람들 앞에서 화통하게 하고 “넌 나 없으면 결혼도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재년씨가 자신에게 올 것임을 확신했다. 재년씨는 오래도록 답을 하지 않았다. 왜냐고 이유를 물어도 별반 대답을 하지 않던 그녀의 속내는 결혼에 대해 고민해본 여성이라면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건강한 몸으로도 시댁에서 살림하기가 쉽지 않은데 장애가 있는 몸이니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댁 식구들에게 부담을 지울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랜 침묵 끝에 재년씨가 결혼을 승낙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결혼을 받아들인 이후부터는 재년씨에게 아무런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가을에 결혼하고 싶다”라고 해도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우영씨의 어머니는 “몸은 좀 건강했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하면서도 재년씨를 며느리로 맞아들였다. 결혼식을 앞둔 재년씨는 장애인 성교육 비디오를 보았다. 전문가라는 사람이 나와서 “테크닉보다는 서로의 사랑이 중요하다”라며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이른바 ‘결혼 적령기’에 들어선 이들이 실질적인 성에 관련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통로가 많지 않듯이 성은 아직 ‘드러내 말하기 힘든’ 부분이다. 하물며 장애인의 성은 오죽할까. 재년씨는 말없이 화면만 바라보았다. 마침내 결혼식 날이 밝았다. 곱게 화장을 하고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재년씨는 우영씨의 손을 맞잡고 환하게 웃었다. 그런데 아뿔싸, 주례사가 압권이다. “성경에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라’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다음에 또 성경에서 명명하기를 ‘복종하라’라는 단어도 많이 나옵니다. 무조건 따라가야 하는 것이 ‘복종’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경외하라’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공경하고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요즘 드라마에 보면 아내가 남편에게 베개를 집어 던지고 어떤 경우엔 남편의 뺨을 치기도 하는데, 이건 아주 좋지 못한 것입니다. 남편을, 즉 주인으로서 공경하고 존경하고 두려워해야 하는데….” 아무리 보수적인 교회에서도 이런 말을 대놓고 하지는 않는다. 수천 년 전의 경전을 문자 그대로 적용한다는 게 곤란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요즘은 듣기 힘든 일방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주례사였다. 공식적으로 ‘기혼녀’가 된 재년씨의 실망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자그마치 첫날밤에 남편이 한다는 말인즉슨 “아줌마가 뭐냐고? 남편과 시어머니가 있고, 시댁 식구들의 눈치를 봐야 하고, 남편한테 밥을 해줘야 하고, 남편이 일하러 가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며, 남편 걱정을 해야 하는 그런 게 바로 아줌마다. 다른 건 몰라도 오빠한테 온 것 후회하지 않게 해줄게”였다. 영화 ‘나비와 바다’는 여기에서 끝나버린다. 관객들은 졸지에 재년씨가 처한 현실에 마음을 졸이며 그녀의 삶을 걱정하게 됐다. 그리고 2년이 지났다 두 사람이 결혼에 이르는 과정은 영화 ‘나비와 바다’에 담겼고 결혼이라는 과정의 이면에 숨겨진 불합리함을 드러내며 호평을 받았다. 그렇게 2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부산에서 만들어진 영화로는 이례적으로 전국 개봉까지 하게 됐다. 그간 부부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기자가 구구절절 질문을 써서 보냈고, ‘나비와 바다’를 만든 박배일 감독이 재년·우영씨 부부를 찾아가 직접 인터뷰했다. 재년씨는 의사소통이 쉽지 않아 박 감독이 질문을 하면 우영씨가 다시 설명해주고 들은 내용을 다시 확인받는 식으로 진행했다. 연애 시절 데이트하는 모습에서 설렘이 무척이나 잘 느껴졌는데 후반으로 갈수록 말도 웃음도 잃어가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결혼 앞에서 망설이는 심정, 짐작할 수 있었고요. 결혼 앞에서 누구라도 계산기를 두드리게 될 텐데 재년씨로서는 얻을 것이 ‘사랑’밖에 없었잖아요. 조금이라도 재년씨의 삶이 행복해졌다면 다행이겠지만요. 요즘 어떠세요? 재년 지금은 전업주부예요. 결혼 전에 무궁애원(장애인복지시설)에서 일할 때가 좋았어요.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직접 돈을 번다는 게 좋았고 아침저녁으로 일을 다니면서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어울릴 수도 있었거든요. 지금은 제가 집안일을 잘 못해서 대부분 어머님이 해주시니까 미안한 마음이 커요. 가끔씩 오빠가 미울 때(말을 얄밉게 할 때)가 있지만 나를 아끼고 좋아해줘서 고마워요. 영화가 완성되고 시일이 꽤 지났는데, 봤을 때 어떤 마음이 드셨어요? 재년 저는 ‘나비와 바다’보다 ‘내 사랑 제제(박배일 감독의 단편영화)’가 더 좋았어요. 이유는 ‘내 사랑 제제’에서 제가 더 예뻐 보였거든요. 영화 안에서 갈등하는 저의 모습을 보고 ‘내가 진짜 저때 저랬을까?’ 생각했어요. 하지만 만약 그때 갈등을 하지 않았더라면 후회했을 것 같아요. 갈등한 이유는 결혼 이후의 제 모습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거든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듯한데, 결혼하고 나니 좀 편해졌지요? 우영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지 않습니까!(웃음) 그 정도로 자신이 있었습니다. 제제가 날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결혼할 거라 믿고 있었죠. 단지 결혼이라는 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고 제제나 제가 장애가 있어 걸리는 부분도 있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조금 겁나서 피했던 것뿐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었어요. 오히려 지금이 많이 두렵습니다(한숨).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 늙고, 늙으면 죽는데 그것까지 생각하다 보니까…. 솔직히 제가 제제를 챙길 때가 많거든요. 지금처럼 (인터뷰에) 의사소통이 힘들 땐 제가 나서야 하고 나이 차가 많아서 어린 제제에게 맞추다 보니 사람들에게 나잇값 못한다는 소리도 많이 들어요. 나중에 제제가 혼자 됐을 때 어떻게 살아갈까, 그런 걱정도 가끔 듭니다. 결혼 전보다 결혼 후에 둘이 있을 때 사소한 걱정들이 많아지고 두려워져요.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 안 좋은 소리를 듣지는 않을까, 걱정 안 했나요? 우영 장애인이 자신과 같은 장애인과 결혼을 한다는 내용의 영화를 비장애인들이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요? 막말로 ‘병신’ 어쩌고 그러지 않을까요? 사회의 시선이 곱지 않으니까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결혼을 하면 헌신이라는 관점에서 좋은 영화나 미담거리가 될 것 같은데, 장애인들끼리의 결혼을 과연 좋은 시선으로 볼까, 하고 걱정했어요. 무궁애원에서 열심히 일하는 제제의 가슴에 공연히 불을 질러서 데리고 오는 나쁜 놈으로 보지는 않을지 두렵기도 했고요. 사회의 시선이 예전보다는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까지도 장애인이라 하면 좀 그렇게 보니까요. 어머니와의 가사 분담은 어떤 식으로 이뤄지고 있나요? 우영 가사 분담이라 말하긴 좀 그렇고요. 거의 어머니가 하세요. 어머니가 가사를 안 보시면 일이 안 돌아가니깐. 예를 들어 10개의 일이 있다 하면 9개의 일은 어머니가 하고 1개의 일은 제제가 한다고나 할까요? 재년씨를 인생의 파트너로 점찍은 이유나 계기는 무엇인가요? 우영 내가 눈이 삐었지(웃음). (재년씨도 옆에서 마찬가지라고 했다) 만날 맞고 살아요(웃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잖아요. 제가 휠체어를 타니깐 아내는 걸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욕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물론 직업학교에는 제제보다 몸이 더 건강한 친구들도 많았지만, 결국 제제를 파트너로 점찍은 이유는 정말 착하기 때문이죠. 이후 영화 계획은요? 우영 제가 촬영하던 작품이 있었는데 더 진행하기가 힘들어졌어요. 끝까지 완성을 해보고 싶어요. 직장에 다니면서 영화를 제작하는 게 힘들지만 계속하고 싶네요. 작품의 수준을 떠나서 끝까지 제 손으로 장편영화를 완성하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등장인물 1 결혼하고 싶은 남자_우영 돌이 지날 무렵 앓은 뇌성마비로 목발에 의지하게 됐다. 도전을 좋아하는 성격의 소유자로 연극 활동에 매진하던 중 스물여덟 살에 사고로 머리를 다치고 휠체어에 의존하게 된 뒤 공부해 고입·대입 검정고시 패스는 물론 정보처리산업기사 자격증까지 취득했다. 이후 다큐멘터리 제작에 흥미를 느껴 촬영 작업에 열심이다. ‘장애인이 직접 장애인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진실된 것’이라는 믿음으로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 활동에 몰두하고 있으며, 8년간 사랑을 키워온 재년씨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제제에게 가는 길’(박배일·강우영 공동 연출. 제제는 우영씨가 재년씨를 부르는 애칭이다)을 만들었다. 재년과의 사랑은 2003년에 시작됐다. 장애인직업전문학교에서 공부를 지도하다가 사랑의 감정이 싹텄다. 띠동갑이라는 나이 차와 휠체어에 의존해야 하는 몸 상태를 극복하고 알콩달콩 사랑을 키우면서 그녀와 함께라면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생겼다. 한 달에 한 번, 한정된 곳에서만 만나야 하는 데이트를 얼른 끝내고 언제나 함께 있고 싶은 열망으로 시작된 프러포즈. 마흔이라는 나이와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녀의 답은 들을 수 없었지만 프러포즈는 계속됐다. “오빠가 다 책임질게”, “너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게”, “나만 믿어라”라고 몇 번이고 외쳤다. 그에게 결혼은 ‘행복한 미래’이자, ‘(부모의 그늘을 벗어나)홀로서기를 위한 필연적 과정’이었다. 등장인물 2 결혼을 망설이는 여자_재년 뇌병변 1급 장애가 있다. 내성적이지만 명랑함을 잃지 않는 성격. 데이트하는 날이면 아침 일찍 일어나 화장을 하고, 도시락을 싸는 등 부지런을 떨었다. 스물셋이 되던 해에 처음으로 들어간 직업학교에서 만난 우영은 든든했다. 때론 오빠처럼, 때론 아빠처럼 이것저것 챙겨주는 그의 친절함이 좋았다. 그렇게 서로 의지하며 평생을 함께해도 좋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프러포즈를 받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결혼이 현실로 다가오자 핑크빛 환상이 걷히고 두려움이 밀려왔다. 결혼은 낭만적인 이벤트가 아니었다. 둘이서 알콩달콩 꾸릴 가정에 대한 설렘도 잠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야 하는 현실 앞에서 ‘아내’와 ‘며느리’라는 역할에 부담이 느껴졌다. 장애인 부부의 삶을 걱정하는 주변의 우려 섞인 시선도 자꾸만 의식됐다. 자신도 잘 가누지 못하는 몸으로 결혼생활을 잘 해나갈 수 있을지 겁이 났다. 그래서 좀처럼 답을 주지 못했다. 결국 저돌적인 구애에 못 이겨 결혼을 결정했지만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재년에게 결혼은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는 삶’인 동시에 ‘헤쳐나가야 할 또 하나의 두려움’이었다. Mini Interview ‘나비와 바다’를 만든 박배일 감독 Q 지방에서 영화를 만드는 것만 해도 쉽지 않은데, 전국 개봉에 해외 상영까지 좋은 성과를 내신 듯해요. 장애인의 삶과 가부장적 결혼제도의 문제는 독립영화에서는 해묵은 주제지만 함께 토론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서 불편한 현실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편집했어요. 다큐멘터리가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하는 거니까, 지역에서도 할 이야기가 많아서 큰 어려움은 없어요. 단지 관객들이 이 현실을 어떻게 봐줄지 설레고, 두렵습니다. 대만에서도 상영했는데 영화를 보고 많은 분들이 장애인이 살아가는 모습 자체를 내밀하게 보여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시더라고요. Q 영화를 만들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요? 카메라 때문에 더욱더 시선을 받게 되면서 이를 불편해하는 재년씨와 우영씨를 2년간 지켜보는 것이 정말 힘들었어요. 그들은 비장애인과는 달리 태어날 때부터 몸이 비틀리고 다리에 장애가 있어 휠체어로 이동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면서 살아왔어요. 비장애인의 경우 지나다가 다른 사람의 시선을 받으면 기분이 나쁘다며 싸움이 일어나기도 하잖아요. 그만큼 남의 시선은 그 자체로 폭력이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런 폭력을 평생 당해온 이들이 카메라 때문에 더 많은 시선을 받게 되는 상황이 되자, 저 역시 고통스러웠어요.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통해 제가 말하려 했던 의도를 이해하고, 자신의 삶이 변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뿌듯하죠. Q 영화를 통해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은 무엇인가요? 우리 사회가 비장애인만을 위한 환경으로 만들어져 있잖아요. 장애인이 가족이란 울타리에서 벗어나 우리와 함께 부대끼며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려면 어떤 것이 필요한지 이야기해야 합니다. 아버지가 가족 부양의 역할을 수행하고 어머니가 가사와 양육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에도 문제를 제기하고 싶어요. 누구나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계획하고 실천으로 옮기고 싶은 욕망이 있죠. 아내들도 “나도 하고 싶은 게 있단 말이야. 그러니 내 욕망도, 네 욕망도 실현시킬 수 있는 우리 가족의 모습을 상상해보자”라고 당당하게 외쳐야 합니다. 당연한 것을 요구해야 하는 현실이니까요. 설령 ‘정상’에서 벗어났다 해도 각자 나름의 모양과 가치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주셨으면 해요. <■글 / 위성은(객원기자) ■사진 제공 / 시네마달 ■취재 협조 / 오지필름>
휠체어 탄 ‘미모의 여의사’ 류미씨의 좌충우돌 분투기
2011. 10. 07 11:33 화제
세상에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에 선 사람들이 있다. 겉보기에는 아무 이상 없어 보이지만 신체적(때론 정신적) 기능과 능력이 평범한 사람들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을 뜻한다. 10분 이상 서 있을 수 없고, 30분 이상 걷지 못하는 의사 류미씨도 여기에 속한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중간에 선 그녀의 고군분투 의사 도전기를 공개한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날, 인터뷰를 위해 찾은 종로구 부암동의 한적한 골목에 위치한 초콜릿 전문점은 류미씨(37)의 단골 카페다. 이곳은 주차를 한 후에 골목길을 여러 번 돌아와야 하기에, 다리가 불편한 류미씨가 자주 찾기에는 마땅치 않아 보였다. 그런데 창문 너머로 인적 드문 골목에서 짐을 잔뜩 짊어진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추석을 맞아 현재 근무지인 경남 창녕에서 인천의 부모님 댁으로 가기 위해 짐을 바리바리 싸서 올라온 듯 보였다. 차에서 내려 카페로 들어서는 그녀는 휠체어를 타거나 목발을 짚지도 않았고 절뚝거리지도 않았다. 남들처럼 서 있고, 걸을 수 있는, 겉보기엔 너무도 평범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여기까지는 어머니가 태워다주셨어요. 인터뷰가 끝나면 친구가 데리러 오기로 했고요. 워낙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어떻게든 이동 수단이 마련되더라고요. 너무 걱정 마세요(웃음).” 경남 창녕에 위치한 국립부곡병원에서 신경정신과 의사로 근무하고 있는 류미씨는 경상도 생활 1년 반 만에 유창한 사투리 실력을 자랑할 정도가 됐다. 이제는 표준어가 더 어색하다며 웃는 그녀는 경상도 억양과 표준어가 어색하게 섞인, 어눌한 듯 정감 넘치는 어투로 기자와 첫인사를 나눴다. 그렇게 구김 없이 편안한 인상의 그녀가 대학에 세 번 입학했고, 의사가 되기 위해 많은 길을 돌아와야 했던, 남들보다 더 할 말 많은 인생에 대해 담담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사고, 예기치 못한 통증 사건의 발달은 1991년 고등학교 3학년 때 학교에서 사고를 당하면서 시작됐다. 유명 특목고등학교에 다니며 중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던 그녀는 입시를 코앞에 두고 사고를 당해 한 달간 등교하지 못했다. 그녀는 아직도 그때의 사고에 대해 쉽게 털어놓지 않는다. 남들은 겪지 않는 특별한 사건이었고, 이를 다른 방법을 통해 세상에 알리고 싶은 마음도 있기 때문이다. “그다지 긴 이야기는 아니지만, 누군가에는 아주 특별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아직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구체적으로 생각한 것은 없지만 언젠가는 꼭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사건의 경위야 어찌 됐건 그 당시에는 어떻게 해서든 입시를 치러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성적은 이미 곤두박질친 상태였지만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는 부담감에 떠밀려 연세대학교 의생활학과를 선택했다. 두 발에 깁스를 한 채 휠체어를 타고 대입 시험을 치렀다. 결과는 합격. 목발을 짚고 버스와 택시로 등하교를 하며 시작한 대학생활은 몸이 불편한 신입생에게는 듣던 것처럼 낭만적이지도, 여유롭지도 않았다. 한 학기가 지나도록 목발을 뗄 수 없었고 불편한 몸으로 원하지 않는 공부를 하는 것도 곤혹스러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제 상태가 정확히 어떤지 몰랐어요. 의사들 말로는 저와 비슷한 상태인 환자들이 각기 다른 증상을 보인다고 했어요. 전혀 통증을 못 느끼는 사람이 있는 반면, 아파서 걷지도 못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죠. 극과 극의 상황에서 제가 어느 정도의 통증을 느끼게 될지 의사도, 저도 전혀 예측할 수가 없었어요.” 목발을 떼고 나서 처음 지하철을 탔을 때 그녀는 자신의 상황과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예전처럼 무심히 지하철을 탔지만 몸은 이미 예전의 몸이 아니었다. 10분이 지나도 자리가 나지 않자, 견딜 수 없는 통증이 밀려왔다. 전혀 아프지 않은 사람과 아파서 걷지 못하는 사람 중에 그녀는 중간쯤이라고 해야 할까. 류미씨는 10분 이상 서 있을 수 없었고 30분 이상 걷지 못했다. 그 시간이 지나면 아파서 걸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그녀의 병명은 ‘박리성 골연골염’으로 무척 낯설다. 사고로 연골과 뼈가 망가져 완쾌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 ‘아플 수도 있고, 아프지 않을 수도 있는 병’이다 보니 아무리 아파도 ‘장애등급’을 받을 수 없었다. 그녀가 겪는 통증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지도 않고 수치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서 객관적으로 증명해낼 길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두 다리 멀쩡한 젊은 여자가 엄살떠는 것처럼 보이기 십상이었다. 통증의 속성상 아무리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일지라도 당사자가 아니면 그 고통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소견이었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는 외로움.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통증에 대해 쉽게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다. “슬퍼할 새도 없었고 좌절할 새도 없었죠. 슬픔보다 늘 통증이 앞섰거든요. 마음은 모호하고 육체는 명료해요. 슬픔 이전의 통증은 언제나 급박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를 만들어주었죠.” 한 학기 만에 휴학계를 낸 그녀는 마음을 추스르고 이과에서 문과로 진로를 바꿔 이듬해 서울대학교 불어불문과에 진학했다. 입학 시험 당시 휠체어를 탄 그녀의 모습을 모두가 기억하고 있었던 연세대학교 의생활학과와는 달리 서울대 불문과에서는 4년간의 대학생활 동안 그녀의 신체적 비밀을 알고 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버지가 외과 의사셨어요. 그럼에도 부모님께조차 제 상황을 정확히 알리지 못했어요. 대학교에 진학한 후부터 인천 집을 떠나 서울에서 혼자 생활했고, 가끔 만나는 부모님께 짐을 안겨드리고 싶지 않아서 말씀드리지 않았죠. 스무 살의 어린 나이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그 심정이 오죽했겠어요.” 아픈 발목이 인생의 발목을 잡다 일상적으로 생각하기엔 살면서 10분 동안 서 있고, 30분 동안 걸을 일이 그렇게 많은가라고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우리는 무심코 해왔던 일이기에 기억조차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늘 일어나는 일이다. 류미씨는 살면서 불편한 발목 때문에 난감하고 힘든 상황에 늘 노출되어 있다. 일단 버스, 지하철을 탔을 때 10분 만에 자리가 나지 않으면 난감해진다. 깁스를 한 것도 아니라 자리를 양보해주는 사람은 없다. 늦은 밤까지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도 못하는 일 중에 하나가 됐다. 그렇잖아도 택시 잡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10분 만에 택시를 탈 수 있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MT에 참가할 수도 없었고, 가족과 마트에서 장을 보는 것도 그녀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친구들과 팔짱 끼고 번화가를 거닐거나,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는 것도 꿈꿀 수 없었다. 류미씨는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나눠 인생을 리모델링해 살았다. 이렇게 구별을 짓고 나니 남들보다 활동 반경이 줄어들기는 했어도 생활하는 데는 크게 지장이 없었다. 친구들을 만나도 주로 영화를 보거나 커피를 마시는 등 활동성 없는 일을 주로 했다. 쇼핑도 인터넷으로 해결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아픈 발목이 끝내 그녀 인생의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졸업을 앞두고 언론사 입사 시험을 치를 때였어요. 1차 작문 시험을 통과한 후 현장 취재와 기사 작성으로 치러진 2차 시험도 무난히 해냈는데, 마지막 3차 관문을 통과하지 못했어요. 1박 2일로 진행된 합숙 중 등산을 끝까지 마치지 못했거든요.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오래 걷지 못한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던 무모함이 만들어낸, 인생의 첫 탈락이었죠.” 그럼에도 이를 발판 삼아, 기자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재차 도전해 결국 「경향신문」에 입사했다. 그 후 3년간 편집기자로 활동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몸이 불편하다 보니 조직 생활에서도 자꾸만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게 됐다. 더구나 활달한 에너지가 많은 그녀에게 내근직인 편집 업무는 무난하지만 오래하고 싶은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자격증을 따서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결심은 그녀에게 본격적인 제2의 인생 서막을 열어주었다. 진통제 50알로도 지울 수 없는 통증 “의대에 가겠다고 결심하고 나니, 주변에서 ‘붙기만 하면 길이 열릴 거다’라며 응원해주셨어요. 그중에는 의사도 많이 계셨지만 막상 제 상황을 정확히 모르셨기 때문에 저에게 꼭 필요한 조언을 해주지는 못하셨어요. 아버지도 ‘개업의는 힘들다’라고만 말씀하셨을 뿐이에요. 저 또한 실습이나 인턴, 레지던트 생활을 실감하지 못했던 터라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 짐작만 하는 마음으로 의대 진학을 준비했죠.” 그녀는 이과에서 문과로, 다시 문과에서 이과로 진로를 바꿔 27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 가톨릭대 편입에 성공했다. 덕분에 예과 2년은 건너뛰고 본과 공부부터 시작됐는데, 문제는 본과 3학년 2학기 때부터 1년간 진행되는 병원 실습에서 불거져 나왔다. 실습은 말 그대로 병원 생활을 그대로 체험하는 것이기에, 회진을 돌고 수술방에서 참관을 하거나 스크럽(보조)을 선다. 각 과마다 사정은 달랐지만 보통 회진은 30분 이상이 기본이고 수술실에서 반나절 이상 서 있는 경우도 흔했다. 건강한 체력을 가진 젊은 학생들에게도 힘들고 고된 작업이었다. 때문에 류미씨에게 병원 실습은 ‘서기’와 ‘걷기’의 반복이었고, 통증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생활하는 데 불편하기는 해도, 견딜 수 없는 정도는 아니었어요. 하지만 병원 생활이 시작되면서 큰 벽에 부딪치기 시작한 거죠. 겉보기에는 멀쩡하니까 사람들이 저를 이해해주지 못했어요. 그때 처음으로 이럴 바에야 누가 봐도 몸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장애가 오히려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그렇다면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는 외로움은 없을 테니까요.” 실제 실습 도중 흉부외과 수술방에서 주임교수에게 “너보다 외팔이가 더 낫다”는 말을 들으며 쫓겨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상황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동기들 덕분에 불가능해 보였던 실습 과정을 어렵사리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더 거대한 산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99%의 합격률을 자랑하던 모교 인턴 모집에서 떨어지게 된 것이다. 몸이 불편하다는 진실, 거기에 당당할 수 없었던 그녀는 면접관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고시를 치르면 의사 면허가 주어진다. 진료 행위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개업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특별한 전공과목이 없던 터라, 의사 면허만 가지고 개업한들 성공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대부분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거치는 수련의를 끝내고 ‘전문의’가 되는 것이 수순이다. 하지만 그녀는 번듯한 의사 자격증을 가지고도 취업을 할 수 없었다. 모교 인턴 모집에서 떨어진 후 다른 병원에 인턴으로 입사했지만 그마저도 녹록지 않았다. 그녀를 이해하고 도움을 주고자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았다. “어떤 레지던트는 ‘이거 먹고도 못 서 있느냐’리며 진통제 한 움큼을 들이밀기도 했어요. 통증과 제일 가까이에 있는 의사조차 제 통증을 이해할 수 없었던 거죠. ‘그걸 한꺼번에 다 먹어버릴까’ 그 순간에는 그런 마음도 들었죠. 하지만 제 통증은 진통제를 아무리 먹어도 진정될 수 없는 거예요. 전혀 소용이 없거든요. 그러니 그걸 누가 이해할 수 있겠어요.” 힘들게 시작한 인턴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또다시 도전했다. 이번에는 오래 서 있고 걷는 대신 앉아서 이동할 수 있는 ‘휠체어’로 병원을 활보했다. 하반신 마비가 더 낫겠다고 할 정도로 절망했던 그녀는 외려 ‘휠체어’에 앉으니 못할 것이 없었다. 회진은 물론, 수술방 참관도 어렵지 않았고 각종 처치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턴 생활 중 깨달은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한 발자국이라도 걸을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휠체어로 이동한 후 필요에 따라 서서 하는 의료적 행위도 할 수 있다. 막상 ‘휠체어’를 타고 보니 잠시라도 서 있고, 잠시라도 걸을 수 있다는 것이 그토록 고마울 수가 없었다. 우리는 모두가 ‘도전자’ 류미씨는 전쟁 같았던 인턴 과정과 레지던트 1년 차를 마치고 이제 ‘당직에서 자유로운’ 레지던트 2년 차에 들어섰다. 최근에는 한 언론사에서 진행한 원고 공모에서 우수상을 받고 「도전받은 곳에서 시작하라-휠체어 탄 의사 분투기」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하지만 이 책은 역경과 고난을 이겨낸 성공 스토리가 아니다. 그녀는 “앉아 있을 때는 통증이 전혀 없기 때문에 내가 다리가 아프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할 때가 많다”라며 “지금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라고 한다. 그녀의 말처럼 책 속의 류미씨는 고난을 만나 좌절하기도 하고, 역경을 재치 있게 뛰어넘기도 한다. 그리고 때론 함정 속에 퐁당 빠지기도 한다. 구구절절한 감정적 호소 없이, 유쾌하고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그녀는 비단 신체적 통증이 아니더라도 이 시대 누구나 아픔을 가지고 있고, 여러 가지 통증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이 모든 것을 극복해 나가는 ‘도전자’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한다. 류미씨는 ‘전문의’가 되는 단기간의 목표 외에 작가로서의 의욕도 감추지 않았다. 책은 물론 인터뷰 내내 함구했던 고3 시절 당한 사고에 대한 이야기는 ‘또 다른 이야기의 중요한 소스가 될 것이다’라며 끝까지 말을 아꼈다. 한편으로는 다양한 인생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정신과 의사로서의 생활도 글로 옮겨 놓고 싶다. 인터뷰를 하다보니 그녀에게 궁금한 것이 생겼다. 세상에는 하루 종일 의자에만 앉아 있는 직업도 많은데 그녀는 왜 굳이 기자나 의사와 같이 활동성 많은 직업을 선택한 것일까? “주변에서는 ‘네가 몸이 불편하니까 이 정도 하고 산다’라고들 해요. 불편하지 않았으면 더 많이 돌아다니며 살았을 거라는 거예요. 주변 반응이 그 정도니, 마음껏 돌아다니지 못하는 저는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편집기자나 정신과 의사를 선택한 것도 제 몸 상태를 어느 정도 감안한 거죠.” 인터뷰를 마치며 편집기자로 3년 동안 근무했던 경험을 살려 자신의 기사에 어울릴 만한 제목으로 어떤 게 좋겠냐고 물었다. “뭐, 특별한 게 있겠어요? ‘미녀 의사’ 정도가 좋겠네요. 아, 이건 정말 농담입니다(웃음).” 아닌 게 아니라, 그녀는 예뻤다. 큰 눈에 하얀 피부도 그랬지만, 오랜 시간 아픔과 함께하면서도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지 않았던, 긍정적인 마음이 그녀를 더 맑고 예쁘게 빛내주고 있었다. 장애는 Disable 아닌 Challenged이다 “장애인은 영어 ‘Disable’를 번역한 말이다. 지금 영미 지역에서는 이 말을 쓰는 사람을 미개인 취급한다. 장애인은 뭔가를 ‘할 수 없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쓰기 시작한 용어는 ‘Challenged’이다. 그들은 할 수 없는 게 아니라 ‘도전받은’ 것이다. ‘도전받았다’고 생각하면 용기가 생긴다. 어떤 경지에 이르면 용기를 넘어서 의욕 같은 것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런데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면 의욕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도전 받은 자’가 희망을 바라보는 말이라면 ‘할 수 없는 사람’ 은 절망을 내재하는 말이다. 이렇게 볼 때 내 상황에 적당한 단어를 찾자면 ‘중간 도전인’ 정도가 될 것이다. 책 「도전받은 곳에서 시작하라 - 휠체어 탄 의사 분투기」 중 <■글 / 진혜린(객원기자) ■사진 / 이성원 ■장소협찬 / MONOS(02-391-1109)>
122kg에서 95kg으로, 신용칠씨의 눈물겨운 다이어트 사투기
2011. 02. 28 15:55 화제
ㆍ“20년 동안 방 안에서만 살았는데…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느낌이에요” 122kg의 엄마가 침대에서 좀처럼 내려오질 않는다. 밥도 침대에서 먹는다. 거실까지 걸어서 나오는 건 1년에 한 번 있는 연중행사다. 곧 있을 딸의 상견례에는 큰어머니나 이모를 대신 참석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런 엄마를 보다 못한, 딸은 ‘초고도비만 엄마’를 세상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굳은 결심을 하게 됐다. 딸이 보낸 눈물의 편지가 만들어낸 기적 약 3개월전, 122kg의 초고도비만 엄마 신용칠씨(55)를 세상 밖으로 끌어내야겠다는 생각을 한 사람은, 둘째 딸 유소영씨(29)다. 올 5, 6월께 오랫동안 교제해온 남자친구 부모님과의 상견례를 앞두고 있는 그녀. 하지만 엄마는 혼자서 열 발자국도 걷기 힘든 초고도비만 환자다. 하루 종일 침대에만 누워 있으며, 밥도 침대에서 먹는다. 방 안에 있는 화장실만 겨우 다닐 뿐, 혼자서 방 밖으로 나오는 일은 드물다. 엄마는 그렇게 무려 20년이나 살아왔다. 때문에 엄마는 조만간 있을 소영씨 남자친구 부모님을 만나는 자리에 큰어머니나 이모를 대신 참석하게 할 참이다. 이런 엄마를 보고 있던 소영씨는 참을 수 없는 짜증과 우울함을 느껴 눈물을 흘리며 방송국에 편지를 썼다. “저에게 엄마가 없는 것도 아닌데 남들한테 비웃음 받기 싫고, 창피하다고 큰어머니께 상견례를 대신 가라니요. 이런 현실이 정말 짜증이 나서 울면서 방송국에 사연을 보냈죠.” 사연을 접수한 MBC-TV ‘기분 좋은날’ 제작팀은 신용칠씨와 가족에게 “트레이너와 함께 계획적인 다이어트를 해보자”고 제안했고, 가족은 뜻밖의 선물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문제는 ‘엄마가 과연 이 도전을 해낼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신용칠씨는 “딸이 방송국에 사연을 보내서 전문 트레이너께 운동을 배울 수 있게 됐다고 하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죠. 딸들의 성화에 하는 수 없이 따라나서기는 했는데, 몇 번을 포기하려고 했어요. 너무 힘들어서 매일 아이처럼 큰 소리로 울었어요.” 육중한 몸으로 스스로 열 발자국도 걸은 적이 없는 신용칠씨. 처음 운동을 시작하고는 걸음마부터 배워야 했다. 처음에는 세 발자국을 떼고는 힘들어서 주저앉기 일쑤였다. 하지만 트레이너와 주변 사람들의 끊임없는 격려 덕분에 일어나서 걸었다. 이런 엄마를 보며 딸들은 엄마가 운동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122kg일 때 둘째 딸이 찍어준 사진(왼쪽). 결혼 초의 날씬했던 모습. 큰딸 유영주씨(31)는 “속으로는 ‘설마, 엄마가 끝까지 할 수 있겠어’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며 “하지만 그래도 엄마한테 ‘두 딸들 시집갈 때 결혼식장에는 가봐야지’라고 격려를 하면서 엄마에게 파이팅을 외쳤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정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운동 시작 후 7주 만에 무려 23kg을 감량한 것. 그리고 처음과는 달리 이제는 웃으면서 걸어 다닐 수 있게 됐다. 딸이 눈물로 쓴 편지가 만들어낸, 기적 같은 일이었다. “방송 후, 많은 사람들이 절 알아보시는 거예요. 시장이나 마트에 가면 모르는 사람들이 저를 알아보시고는 ‘살이 많이 빠졌다. 열심히 하라’고 격려도 해주시고, 칭찬도 해주세요. 20년 동안 방 안에만 갇혀서 세상과 단절된 채 혼자 살아왔던 저를 ‘스타’처럼 알아봐주시니 정말 기분이 좋은 거예요. 그동안은 우울증까지 겹쳐서 잔뜩 인상을 쓰고 살았는데, 이제는 그 우울증도 싹 없어졌어요.” 가족간에 웃음과 대화가 생겼다 방송에 출연하고 살이 빠진 뒤 많은 것들이 변했다. 일단 고질적으로 그녀를 괴롭히던 ‘통증’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동안 통증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고 살았던 20년의 세월이 아깝기만 하다. 신용칠씨가 처음 살이 찌기 시작한 건, 20년 전이다. 척추와 자궁이 좋지 않아 수술을 한 후 그동안 해오던 음식 장사 때문에 제대로 운동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가게에 앉아 있었던 게 화근이었다. 수술 후에도 계속 통증에 시달렸는데, 운동을 하지 않고 약만 먹으면서 참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 뼈가 으스러지는 것 같은 통증이 찾아왔다. 정말 참기 힘들었다. 그 통증 때문에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침대에 누워 있는 생활이 시작됐고, 유일한 낙인 먹는 걸로 세월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인터뷰를 위해 스튜디오를 찾은 신용칠·유재완 부부와 두딸 유영주·유소영씨의 즐거웠던 사진촬영 모습. “제 키가 153cm인데, 가장 심할 때는 140kg까지 나간 적이 있어요. 그때는 거의 인생을 포기했었고, 너무 아파서 죽으려고 몇 번이나 결심을 했는지 몰라요. 그런데 신기한 건 살이 빠지니까 그 지독했던 통증이 사라졌다는 거예요. 통증이 없으니까 이제야 사는 것 같아요. 살이 더 빠지면 지금보다 더 괜찮아질 거라니까 열심히 더 빼야죠.” 방송에 출연하기 전까지는 가족 중 아무도 신씨에게 ‘운동’을 권유할 생각을 못했다. 체중이 너무 많이 나갔고, 아예 걷는 것조차 불가능했기 때문에 운동을 통해서 살을 뺀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던 것이다. 유소영씨는 “방송국에 사연을 보낼 때도 ‘지방 흡입으로 살을 빼면 어떨까요’라고 제안했다”며 “하지만 방송국에서 여러 방면으로 알아본 결과 운동으로 살을 빼는 게 가장 효과가 좋다고 권유해, 그때서야 운동이 가능하다는 걸 알았다”고 말했다. 다이어트를 하고 난 뒤 신용칠씨에게 달라진 두 번째 변화는 ‘삶에 열정이 생겼다는 것’이다. 건조했던 부부 사이에도 열정이 생겼고, 단절됐던 가족간에도 대화를 하게 됐다. 그 전보다 서로 모여서 이야기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웃는 시간도 많아졌다. 신용칠씨는 “요즘은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느낌”이라고 표현했다. “딸의 상견례와 결혼식, 꼭 참석하겠다!” 20년 동안 침대에만 누워 생활한 아내를 대신해 모든 집안 살림과 병 수발을 해온 남편 유재완씨(58)의 고충은 이루 말하기 힘들 정도다. 어릴 때부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봐온 유영주, 유소영 자매는 “아빠가 집안일을 하고, 학교 행사에 참석하는 게 당연한 줄 알았다”고 말했다. “다른 집들과는 완전히 달랐죠. 아빠가 엄마 역할을 대신했으니까요. 딸들 운동회나 졸업식에 꼭 오셨어요. 어릴 때는 친구들이 너희는 ‘엄마가 없냐’고 물어보기도 해서 상처를 받기도 했고, 엄마의 역할이 절실했던 청소년기에는 속상한 마음에 엄마를 원망한 적이 많았죠.” 공무원인 유재완씨는 딸들이 보기에도 대단할 정도로 가정에 충실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청소하고 빨래를 한 뒤 저녁 식사를 만들었다. 그리고 아픈 아내를 위해 침대까지 밥을 가져다주고, 아내가 비타민을 먹어야 한다며 매일 과일을 사다놓았다. 또 거동이 불편한 아내의 목욕과 기타 수발은 모두 남편인 유재완씨의 몫이었다. “아내가 아픈데 어떻게 하겠어요. 내가 해야지”라고 말하는 참 착한 남편이자 아버지다. 하지만 아내가 아파서 침대 생활을 시작할 무렵, 유재완씨도 중풍으로 하반신에 마비가 오면서 가족 전체에 위기가 오기도 했다. “당시에는 병원비가 한 달에 1백50만원씩 들어갔고, 그로 인해 생활비가 부족해서 고생을 많이 했어요. 오죽하면 ‘가족이 모두 죽어버릴까’라는 생각을 했겠어요.” 다행히 유재완씨의 중풍은 기적처럼 3개월 만에 나았고, 지금은 99% 정상인과 똑같은 상태다. 유재완씨는 “아내가 다시 일어서다니 꿈만 같고 20년 동안 고생한 보람이 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가족이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다”라며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지었다. 유소영씨는 무엇보다 아빠가 행복해져서 기쁘다. “평소 언니와 아빠에 대해 많은 대화를 했어요. 아빠가 언제까지 저렇게 엄마의 수발을 들으면서 살아야 하는지 안타까웠거든요. 아빠가 당신 생활을 포기하면서 사는 게 무척 속상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아빠도 자신의 인생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유재완씨는 “결혼해서 아내와 신혼여행을 못 갔다는데 소원이 있다면 아내의 몸이 좀 더 좋아져 신혼여행을 가는 것”이라고 밝혔다. 신용칠씨는 “지난 20년 동안 못해본 많은 것들을 해보고 싶다. 예쁜 옷을 사 입고 자신 있게 돌아다니고 싶고, 자신이 받은 관심과 격려를 다른 사람에게도 꼭 전해주고 싶다”며 운동 전도사로 나설 계획임을 밝혔다. 유소영, 유영주 자매는 “지금처럼 엄마가 열심히 운동을 하고, 마음도 강해져서 두 딸이 시집갈 때 꼭 예쁜 한복을 입고, 엄마의 자리에 앉아 계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딸의 이 같은 바람에 신용칠씨는 “조만간 있을 작은딸의 상견례에는 꼭 가겠다”면서 “지금보다 더 날씬해진 모습으로 나가서 우리 딸의 기를 확 살려줄 테니, 기대해도 좋다”고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었다. 방송 이후 계속 다이어트를 해온 신용칠씨의 현재 몸무게는 95kg이다. 하지만 앞으로 80kg까지 빼는 게 첫 번째 목표고, 최종 목표는 60kg까지 빼는 것이다. 시작이 반이라고, 다이어트에 성공했더니 이제는 살 빼는 게 두렵지가 않다는 신용칠씨. 가족의 노력으로 20년 만에 다시 찾은 이들의 행복한 웃음소리가 스튜디오가 떠나갈 듯 유쾌하기만 하다. 초고도비만 신용칠씨의 다이어트 비법 (1)가족이 함께 운동을 시작했다 초고도비만 환자는 운동을 권해도 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가족이 말만 할 것이 아니라 함께해줘야 한다. 함께 걷거나 윗몸일으키기부터 하면 차츰 스스로 혼자 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신용칠씨는 집에서도 늘 남편, 딸들과 함께 윗몸일으키기를 했다. (2)가족이 꾸준히 칭찬을 했다 혼자 운동을 하는 건 정말 지겹고 힘든 일이다. 특히 초고도비만 환자라면 정도가 더 심할 수 있다. 이럴 경우 가족이 항상 전화를 걸어 따뜻한 격려의 말이나 칭찬을 해주고, 혼자 힘들게 운동하는 것이 아님을 느끼게 해준다. (3)무조건 강요하지 않았다 환자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채 무조건 운동을 강요하는 것은 역효과를 내기 쉽다. 그런 경우 오히려 “운동 힘들면 그만하자”, “그냥 옛날처럼 다시 초고도비만 환자로 방에서만 살자”고 강하게 나간다. 그럼, 다시 운동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낄 수 있다. (4)남편과 자식의 애정 표현이 중요하다 가족에게 버림받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아무것도 할 힘이 생기지 않는다. 스킨십과 “사랑해”라는 애정 표현은 초고도비만 환자에게도 무척 힘이 되는 말이다. (5)하루에 6시간씩 운동했다 신용칠씨는 오전에 3시간, 오후에 3시간 총 하루에 6시간을 운동했다. 걷기, 조깅, 윗몸일으키기, 웨이트트레이닝, 스트레칭 등을 꾸준히 반복했다. (6)식이요법을 철저하게 했다 과거에는 하루 종일 밥 한 솥을 다 먹어치웠던 신용칠씨. 하지만 운동을 시작하면서 샐러드와 닭가슴살로 먹는 양을 대폭 줄였다. 살이 빠지는 게 눈에 보였기 때문에 먹는 것도 즐겁게 줄일 수 있었다. 다행히 채소와 닭가슴살이 입맛에 잘 맞았다. 이와 함께 하루에 물 2L도 챙겨 먹었다. <■글 / 김민주 기자 ■사진 / 이성원>
[재테크 지상특강]서점을 점령한 부동산 열풍과 ‘투기’의 허무함
2008. 06. 24 재테크
지난달의 피로는 수익률이 씻어줬다. 완벽하게 회복한 건 아니지만 속속 플러스로 돌아서는 중이다. 코스피 지수도 순항 중이다. 낙관적인 전망이 흘러나온다. 그러나 공부나 한번 해볼 생각으로 들른 서점에서 구입한 부동산 관련 서적에는 영 손이 가지 않는다.부동산 책 하나, 시집 하나 과연, 대형 서점에는 부동산 투자 관련 서적이 쌓여 있었다. 하나같이 ‘부동산 투자로 부자 되라’고 말하고 있었다. ‘부동산으로 돈 번 사람들이 책 팔아서 또 돈 버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속표지에는 저자의 동영상 강의 CD도 붙어 있었다. ‘책 쓴 사람들이 강의로 또 돈을 버는구나’ 계속 배알이 꼴렸다. 그래도 이명박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분석해 적절한 투자법을 알려주겠다고 장담하는 책을 한 권 샀다. ‘10년을 준비하는 부동산 투자가 당신을 성공으로 이끌 것이다!’ 의심이 가시지 않았지만 어쨌든 샀다. 그리고 시집도 한 권 빼들었다. 정서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얄팍한 자기 위안으로써. “지금 난리죠. 저도 남는 시간엔 서점에 가요. 일주일에 한 번은 대형 서점에 가죠. 트렌드를 읽을 수 있으니까요. 굳이 사야 한다기보다는, 그냥 서서 20, 30분 정도만 읽어도 많이 볼 수 있어요.” 대개 이런 책의 수명은 길지 않다. 출판사는 ‘부동산 투자의 정석’을 알려주려고 책을 만드는 게 아니다. 시류에 맞는 내용에 ‘섹시’한 제목을 달아 단기간에 팔아치운다. 오늘 진열된 책이 2주 후엔 자취를 감추는 경우도 적지 않다. “책은 두 부류가 있다고 봐요. 기본적인 컨셉트를 정리하는 책이 있는가 하면, 당시에 화두가 되는 내용을 판촉용으로 쓴 책도 있습니다. 빨리 써서 단기간에 파는 거죠. 그런 책은 고수나 전문가가 쓰는 책이라기보다는 ‘짜깁기’한 책이 많아요. 전문가의 입장에서, 썩 도움이 되는 책은 아니죠. 오히려 안쪽 서고에 가보면, 과거에 발행된 책 중에 괜찮은 책들이 많아요.” 처음 사본 부동산 투자 지침서는 아직 공들여 읽지 않았다. ‘강북을 주목하라’ ‘한강을 따라 투자하라’는 소제목들은 왠지 내 얘기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복잡한 부동산 정책들을 공부하는 데 바쁜 시간을 쪼개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어떤 책이든, 대략의 컨셉트를 잡는 데는 도움이 될 겁니다. 인터넷 서점을 통해 부동산 투자 부문 베스트셀러부터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기껏 구입한 책을 아직도 읽지 않고 있는 건, 아직 관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한 달에 70만원씩 하는 펀드 투자가 이제 약 7개월에 접어드는데, 종자돈이 모였을 리 만무하다. 속속 플러스로 접어드는 수익률에 가슴 쓸어내리며 소소한 재미를 느끼는 정도니까. ‘관심’은 지금부터다. “부동산 투자는 자금 규모가 크죠. 억 단위 이상의 투자가 주를 이루니까요. 기간도 오래 걸리고, 환금성과 유동성도 펀드에 비해 떨어지죠. 매물이 큰 경우에는 대출을 끼고 투자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이자 비용도 생각해야 하고, 매도했을 경우에는 양도세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자 비용까지 계산했을 때 수지타산이 맞는지까지 생각해야 하니까, 우성씨의 부동산 투자는 여유를 갖고 생각해보세요. 일단 종자돈부터 차분하게 마련하시고요(웃음).” 좋든 싫든 한국에서 부동산 투자를 무시할 수는 없다. 게다가 이건 ‘내집 마련 성공기’니까, 투자가치가 있는 집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공부부터 해야 하니까. 하지만 당장은 투자할 여력도, 지식도 없다. 수익률 체크합니다 지난달엔 질렸더랬다. 매일 요동치는 코스피 지수를 검색하는 것도, 환율이니 뉴욕 증시니 신경 쓰는 것도 다 귀찮았더랬다. “세계 증시의 흐름에 동참하는 기분도 쏠쏠하다”고 썼던 게 언젠가 싶었다. 정성기 매니저는 “그게 바로 주식 투자의 피로감”이며, “주가는 그럴 때, 자포자기 했을 때 오른다”고 말했다. 진짜 그랬다. “우성씨 수익률 어때요? 저는 원금 회복했던 걸요? 남미가 효자예요. 거의 다 올라왔어요. 거의 회복했고, 중국하고 인도는 아직 회복을 못하고 있네요.” 정성기 매니저는 포트폴리오를 공개했다. 중국에 투자하는 펀드만 -13.74%일 뿐,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투자하는 펀드가 11.54%, 남미는 20%를 넘었다. 정성기 매니저의 포트폴리오는 나와 다르지 않다. 중국과 인도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종목의 펀드가 플러스로 돌아섰다. 남미의 약진은 주목할 만했다. 17% 정도의 수익률을 기록했다. 현재 투자하고 있는 일곱 개 종목의 펀드 중 7개월 동안 17%의 수익률을 낸 것은 남미가 처음이었다. 정성기 매니저의 20%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것은 가입 시기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지난 5월 9일 코스피는 1,823.70으로 마감했다. 1,500선까지 하락했던 증시가 서서히 회복되고 있는 추세다. 마이너스 일색이었던 포트폴리오의 수익률이 속속 플러스로 들어서고 있는 것은 국내 증시의 호조 탓도 무시할 수 없다. 실제로 지금 투자 중인 미래에셋의 국내 주식형 펀드는 -20% 가까이 떨어졌다가 3% 정도로 회복됐다. 출시 당시 시장 자금을 모두 흡수하는 괴력을 보였던 ‘인사이트 펀드’의 수익률 회복은 그에 못 미쳤다. 정성기 매니저는 “인사이트 펀드는 중국 투자 비중이 높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올해 말까지의 주가지수 상승을 2,100~2,300 정도로 예측하되, 1,850~1,950 선에서는 한동안 횡보할 것”이라는 분석도 맞아 들어가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은밀한 움직임. “지금 증권사에는 신규 채용이 많아요. 미래에셋 증권에서도 소매 영업하는 분들이 많이 늘어나고, 신규 인원 채용을 공격적으로 늘리고 있어요. 이것은 회사가 ‘2차 자금 대이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움직임은 시장으로 몰리는 자금을 모두 소화하겠다는 증권사의 의지로 풀이할 수 있다. 지난 10월의 ‘중국펀드 열풍’ 때 인원이 모자라 시장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던 증권사들이 이번엔 미리 준비하고 있다는 뜻이다. 증권사로 돈이 몰린다는 건, 투자자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큰 장이 곧 들어선다는 뜻이기도 하다. 부동산 전망은 조금 다르다. “부동산이 많이 떴다는 말이 들리는데, 특별히 호재가 있었던 지역의 얘깁니다. 강북의 일부 저평가 지역, 즉 노원, 도봉의 경우죠. 그 지역은 작년 말 대비 1억 가까이 올랐어요. 작게는 5천에서 1억5천까지 올랐죠. 이런 상황에서 다시 부동산으로 돈이 몰릴 것 같지는 않아요.” 6월 1일부터 실시되는 종합부동산세 부담은 ‘버블세븐’ 지역 고가 주택들의 매매 기류를 냉각시켰다. 참여정부가 실시한 8.31 부동산 정책의 효과가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부동산은 이런 상황, 주식 시장은 활황을 예측하는 사람이 많다. 자금이 어디로 흘러들어갈지를 예측하는 것은 개인의 몫이다. 사회 현상의 이면을 주목하세요 “아파트로 돈 버는 분들은 아파트로, 토지로 버는 사람은 토지로, 재개발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재개발로 벌죠. 지금은 아파트도, 재개발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에요. 하지만 하나의 트렌드를 말씀드릴 수는 있습니다.” 정성기 매니저는 FTA(한미자유무역협정) 체결 이후의 상황을 가정하고 말을 이었다. “FTA는 한국 경제를 수출 지향적으로 이끌어가겠다는 뜻입니다. 대신 농업을 일정 부분 포기하겠다는 거죠. 그렇다면 경작률이 줄어들고, 축산업도 쇠퇴할 가능성이 있어요. 시장을 내줬으니까,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죠. 그렇다면 이런 부분의 개발을 유도하는 정책이 나올 수 있어요. 까다로웠던 농지 취득 요건이 완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거죠.” 이건 시장에서 접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다. 핵심은 ‘농지에 투자하라’가 아니다. 한국에서 투자로 돈을 벌고 싶다면 ‘사회 현상’에 주목하라는 얘기다. “미국 남북전쟁 이후 서부 개척시대를 생각해보세요. 금광을 찾아서 떠나는 사람이 많아 ‘골드러시(Gold Rush)’라는 말도 생겼죠. 그때 돈을 번 사람들은 금광으로 떠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청바지 장사였죠. 어떤 현상이 벌어지면, 그 이면에서 법은 어떤 방향으로 바뀌고 또 돈은 어디로 흘러가느냐를 고민해야 합니다.” 질기고 때가 타지 않는 청바지는 광부의 작업복이었다. 광산을 향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작업복 수요가 늘어나는 것은 뻔한 일이지만, 남들이 다 광산 갈 때 청바지를 만들어 파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시각의 차이다. 현상을 좇는 사람과 이면에 주목하는 사람의 돈은 다른 방향으로 흐르게 마련이다. “반사이득을 취할 수 있는 업종을 봐야 합니다. 남들이 다 펀드로 갈 때 같이 펀드에 투자해서 돈을 버는 것은 쉽지 않아요. FTA가 체결되면 당장 수출 기업들이 수혜를 보겠지만, 도시인에게는 농지를 개발할 수 있는 정부의 후속 조치가 뒤따를 것이라는 것도 예측할 수 있죠.” 재개발 열풍도 마찬가지다. 이미 시장을 휩쓸었다. 지분 가치 자체가 상승했기 때문에, 시세 차익은 줄어들었다. 투자 대비 비용을 고려하면, ‘썩 나이스한 투자는 아니다’ 라는 게 정성기 매니저의 분석이다. “농지 취득 자유화랄지, 이런 얘기들이 흘러나오고 있어요. 시대 환경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예측이 가능한 상황이죠. 관심을 가져야 해요. 관심이 없는데 갑자기 부자가 되는 경우는 없거든요. 부동산도 포트폴리오의 일부로 생각하고 장기투자 하셔야죠. 단기 시세차익을 볼 수 있는 부동산은 어디에도 없습니다.”“그래서 어디가 좋으냐”고 묻는 말에 대하여 부동산, 혹은 펀드로 돈을 벌고 싶다. 여유 자금도 있다. 그러나 공부하긴 싫다. 이런 경우는 대개 “그래서 어디가 좋으냐”고 묻는다. 고수익이 보장된 나라는 어디냐, 재개발 호재가 예상되는 곳은 어디냐. 콕 집어주는 게 속 시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이 얘기는 주식 투자보다 펀드 투자가 안전한 이유에 대해 설명했던 ‘정우성 기자의 내집 마련 성공기’ 2회 때 이미 언급한 원리다. 핵심은 정보다. “일반인들이 접하는 정보, 전문가들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정보에 빠른 사람들은 이미 투자가 끝난 상황에서 일반인들에게 흘러가는 거죠. 개발 호재가 있다고 해도, 전문가들이 이미 이익을 보고 떠난 땅에 일반인들이 몰리게 돼 있습니다.” ‘효율적 시장 이론’은 정보가 시장에서 가장 빠르게 전파된다는 가설이다. 정보는 이미 예측치까지 시장에 반영된 이후에 일반에 전달된다는 뜻이다. 오를 만큼 오른 땅을, 오를 만큼 오른 종목을 전문가가 매도할 때 일반인이 산다. “내가 알았을 때는 이미 시세차익을 낼 수 없다는 겁니다. 2의 100제곱 정도를 거치고 난 뒤에야 정보가 시장에 나온다는 거죠. 책이나 언론, 미디어에 공개되는 정보들이 그렇습니다. 언론의 정보를 접하고 일반인들이 투자를 준비할 때, 전문가들은 이미 시세차익을 다 누리고 빠져나올 궁리를 하고 있는 거죠. 정보가 다 맞는 것도 아닙니다. 기획 부동산은 거짓 정보를 흘리기도 하죠.” 펀드도 마찬가지다. 코스피 지수가 1500대 중반에 머물러 있을 때, 정성기 매니저는 “지금 시장에 들어가시는 것도 괜찮다”고 누누이 말했다. 지난 5월 9일의 종합주가지수 1,823.70을 생각해봐도, 충분히 수익을 낼 수 있는 구간이었다. “전문가들, 펀드매니저들은 이미 매수 움직임에 들어가 있는 종목들에 실적이 반영되면 주가가 오르는 겁니다. 개미 투자자는 그때 움직입니다. 주가가 오르는 것을 보고, 더 오를 것을 기대하고 시장에 들어가는 거죠. 이번에도 보세요, 1,900선 넘어가면 시장으로 자금이 몰릴 겁니다.”‘투기’의 허무함에 대하여 그렇다면, 부동산과 주식으로 돈을 벌고 싶은 사람은 전문가가 되라는 얘긴가. 낡은 정보에 일희일비하는 ‘일반인’은 허무하다. “그래서 어떤 종목을 언제 사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자산 배분의 원칙에서 보면, 타이밍이나 종목은 중요하지 않아요. 수익의 3% 정도를 좌우할 뿐이죠. 그보다는 자산 배분을 어떻게 하느냐, 포트폴리오를 어떻게 짜느냐가 97%의 수익을 좌우합니다. 그래서 ‘지금 어디가 좋으냐’고 묻는 말은 ‘투기를 한번 해보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습니다. 부동산이나 주식이나, 장기투자 하셔야죠(웃음).” 여유 자금을 더 불리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성급해선 안 된다. 펀드 투자의 포트폴리오를 구성할 때와 마찬가지로 접근해야 한다. 중국펀드 열풍이 불었을 때도 중국펀드의 편입 비율은 20% 정도로 제한했던 것처럼, 부동산도 다양한 종목을 고려해야 한다. “부동산과 펀드의 편입 비율을 어떻게 할 것인가. 부동산 안에도 토지, 상가, 아파트 등이 있는데, 어떤 분야에 투자할 것인가를 생각하시는 게 첫걸음이 돼야 합니다. 저 같은 경우 보세요. 작년에 8천 하던 아파트가 2년 만에 2억이 됐습니다. 펀드나 변액 보험도 수익을 많이 내지는 못했지만 1년 반 정도에 20~30%의 수익을 냈어요. 부동산에 올인하지도, 펀드에 올인하지도 않았습니다. 부동산에서 수익이 나기도 하고, 많지는 않지만 펀드가 수익을 내주기도 하는 거죠.” 소액투자를 시작하는 입장이라면 주식보다는 펀드가, 부동산으로 투자할 여력이 있는 경우는 ‘내집’ 혹은 3억 이하의 작은 토지 정도로 분배하는 게 좋다. 단기 시세차익을 노리고 ‘대형투기집단’의 일원이 될 필요는 없다. 자칫, 몸과 마음이 상할 수도 있다.■글 / 정우성 기자 ■ 사진 / 이주석, 이성훈, 경향신문 포토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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