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총 147 건 검색)
- 평화의 소녀상 모욕한 미국 유튜버, 편의점 난동 부려 검찰 송치
- 2024. 11. 11 11:29사회
- ... 조니 소말리(24) 유튜브 영상 갈무리 ‘평화의 소녀상’에 입을 맞추는 등 각종 기행으로 논란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평화의 소녀상에 입을 맞추거나 외설적인 춤을 추는 등...
- ‘평화의 소녀상’ 지자체가 직접 관리…전남도의회 조례 추진
- 2024. 11. 05 15:01사회
- ... 옛 일본대사관 앞에 14일 건립 10주년을 맞은 평화의 소녀상에 목도리가 둘러져 있다. 한수빈 기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평화의 소녀상’을 지방자치단체장이 직접 관리하도록...
- 전남조례평화소녀
- [포토뉴스] “평화의 소녀상 철거 안 돼”
- 2024. 09. 24 21:18사회
- 24일 서울 중구 주한독일대사관 앞에서 열린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 철거 반대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소녀상에 나비를 전달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독일 베를린 미테 구청은 설치 허용 기한이...
- ‘평화의 소녀상’ 잇단 테러 막을 방법이 없다
- 2024. 09. 23 08:53사회
- ... 지난 8월14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 소녀상이 경찰 펜스에 둘러싸여 있다. 김창길 기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평화의 소녀상’ 전국 10개 가운데 7개 이상은 관련 조례나 관리...
- 일본군'위안부'평화의소녀상일본군성노예제
스포츠경향(총 12 건 검색)
- ‘평화의 소녀상’, 캐릭터 상품되어 우리 곁으로
- 2021. 11. 22 14:44 생활
- 평화의 소녀상이 우리 생활 속으로 들어온다. 오는 12월14일은 평화의 소녀상이 이 세상에 나온 지 1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 날을 기해 평화의 소녀상 캐릭터 상품을 올 연말 출시 예정으로 준비에 들어갔다. 제작비는 시민 펀딩 방식으로 조성될 예정이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20년간의 긴 투쟁 끝에 나온 산물인 평화의 소녀상은 할머님들에겐 자부심을 되었고, 국민들에겐 역사 문제 해결을 위한 연대의 표상이 됐다. 평화의 소녀상을 만든 김운성 작가는 “소녀상은 단순한 조형물이 아니다. 할머님들의 투쟁 역사가 예술적 상징으로 승화되면서 과거사 문제를 비롯한 평화, 인권을 의제화한 공공예술이자, 소통의 매개가 됐다”며 “세계 곳곳으로 활동을 넓혀 나갔고, 이를 통해 진실을 알리게 되는 사회적 역할을 하면서, 일본 정부와의 마찰도 잦았다”고 그간의 경과를 설명했다. 일본 정부는 평화의 소녀상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다. 역사 왜곡을 통해 전쟁 범죄를 지우려는 일본 정부에게 소녀상은 방해가 되는 걸림돌, 사라져야 할 상징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급기야 친일극우 세력이 일본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수요집회와 평화의 소녀상을 진흙탕으로, 대결의 장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이 속에 평화의 소녀상 캐릭터 상품 출시에 대한 깊은 함의가 담겨 있다. 김 작가는 “우리는 새로운 모색의 길을 찾아야만 했다. 얼룩진 상처, 수모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더 이상 대결의 장에 갇히지 않기 위해서, 그들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길, 유쾌하고도 통쾌한 반격의 길. 그 길을 개척하려 한다”고 캐릭터 상품 출시의 의미를 밝혔다. 평화의 소녀상 캐릭터 상품은 2002년 ’동이’ 달력부터 ‘브론즈로 만든 12㎝ 캐릭터 - 평화 동이’ 등이 있다. 이와 더불어 김학순 할머님의 증언한 날인 1991년 8월 14일을 기억하고자 그 날을 기리는 숫자인 814로 814점의 브론즈 캐릭터를 한정판으로 제작·출시한다. 이번 평화의 소녀상 캐릭터 상품은 김운성·김서경 작가를 비롯해 일러스트 박찬우 작가와 디자이너 윤승찬씨가 참여했다.
- ‘평화의 소녀상’캐릭터 상품되어 우리 곁으로
- 표현의 자유 지키자고 기획한 日국제예술제서 ‘평화의 소녀상’ 전시 중단
- 2019. 08. 04 00:00 생활
- 지난 1일부터 ‘아이치 트리엔날레 2019’에 전시되고 있는 ‘평화의 소녀상’. 나고야/김진우특파원지난 1일 일본 아이치(愛知)현 일대에서 개막한 ‘아이치 트리엔날레 2019’에 전시되고 있는 ‘평화의 소녀상’을 둘러싸고 주최 측이 3일을 끝으로 전시를 중지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이번 전시를 준비한 기획자들과 작가들은 “역사적 폭거”라며 강력 반발했다. 경향신문에 따르면 ‘아이치 트리엔날레’ 실행위원회 회장인 오무라 히데아키 아이치현 지사는 3일 NHK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생중계된 기자회견에서 “테러 예고나 협박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전화나 메일이 와서 안전한 운영이 우려된다”면서 “오늘을 끝으로 (소녀상이 전시되고 있는) ‘표현의 부자유전·그후’ 전시를 중지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실행위원회 측은 4일부터 ‘아이치예술문화센터’ 8층에 자리한 ‘표현의 부자유·그후’ 전시장 바깥에 경비 인력을 배치해 전시를 폐쇄할 것으로 알려졌다. 오무라 지사는 특히 “어제는 ‘철거하지 않으면 가솔린통을 들고 미술관을 방해하겠다’는 팩스도 도착했다”고 했다. 그는 지난달 19일 발생해 34명이 사망한 교토 애니메이션 방화 사건을 연상했다고 언급하면서 “앞으로 예측하지 못한 사태가 있으면 곤란하다. 트리엔날레를 즐기고 있는 많은 분들이 안전하고 안심하게 감상하는 것을 제일로 생각해 이런 판단을 내렸다”고 밝혔다. 오무라 지사는 지난 1일 이번 전시와 관련해 철거를 요구하는 등 비판적 전화가 약 200건, 이메일 500건 등이 왔으며 2일에도 거의 비슷한 정도의 전화와 이메일이 왔다고밝혔다. 쓰다 다이스케 ‘아이치 트리엔날레’ 예술감독’은 “전시 대책을 최우선으로 진행해왔지만 당초 예상을 뛰어넘는 사태가 되고 말았다”면서 “(전시기간) 3일이라는 형태로 전시를 단념하는 것에 대해 애끓는 심정이다. 정말 죄송하다”고 말했다. 이날 중단 통보를 받은 전시 준비 측과 참여 작가들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이와사키 사다아키·오카모토 유카·오구라 도시마루 전시 실행위원은 이날 저녁 아이치현문화예술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외압으로 눈앞에서 사라진 표현을 모아 현대 일본의 ‘표현의 부자유’ 상황을 생각하자는 기획을 전시 주최자가 스스로 탄압하는 것은 역사적 폭거”라면서 “전후 일본 최대의 검열 사건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전시가) 사흘 만에 중단된 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라면서 “또 (실행위 측이) 전시 중단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라고 분노했다. 이들은 “전시회를 끝까지 계속할 것을 강하게 희망한다”라면서 “일방적인 전시 중지 결정에 법적 대응도 검토하고 있다”라고 강조했다. ‘아이치 트리엔날레’는 2010년부터 3년에 한 번 열리고 있으며, 4회째인 올해는 30개국의 아티스트 90여개 팀이 참가하고 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기리는 ‘평화의 소녀상’은 아이치현 나고야(名古屋)시 아이치예술문화센터의 ‘표현의 부자유전·그후’에 전시됐다. 일본의 공공미술관에서 평화의 소녀상이 온전한 형태로 전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소녀상 전시 소식이 알려진 뒤 예술제 사무국인 아이치현 측과 아이치예술문화센터 측에 항의 의견이 잇달았다. 일본 정부로부터 전시회 측에 대한 압박도 이어졌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은 지난 2일 “보조금 교부 결정에 대해선 사실관계를 확인해 정밀히 조사한 뒤 적절히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가 열리고 있는 나고야시의 가와무라 다카시 시장도 지난 2일 전시 현장을 시찰한 뒤 소녀상 전시를 중지하도록 오무라 지사에게 요구했다. 다카시 시장은 “아무리 생각해도 일본 국민의 마음을 짓밟는 것”이라면서 “세금을 써서 해야하는 게 아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사실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망언도 했다. 소녀상에 대한 일본 우익들의 방해와 조롱도 이어졌다. 해당 전시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사진 작품을 전시 중인 안세홍 작가는 2일 오전 페이스북에 “미술관에 우익들의 항의 전화가 빗발치고, 어제 오후에는 4명의 우익이 찾아와 소녀상 주변을 맴돌며 머리를 때리는 포즈 등 이상한 행동으로 사진을 찍었다”고 전했다. 3일에도 우익으로 보이는 이가 소녀상에 종이봉지를 씌우고 사진을 찍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쓰다 예술감독은 “해당 인물이 3회나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면서 “일본인으로 매우 악질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번 ‘표현의 부자유전·그 후’는 창작 작품이 ‘정치적인 이유’로 일본의 공공미술관에서 전시되지 못하는 현상이 확산되고 있는 점에 주목한 기획전이다. 소녀상을 비롯해 전시를 거부당하거나 전시 중 철거당한 작품 17점을 모았다. 아이치 트리엔날레는 60만명 안팎이 관람하는 일본 최대규모의 국제예술제다. 항의 전화가 쇄도하는 데 대한 대응 곤란을 이유로 주최 측이 전시를 중지하면서 ‘표현의 부자유’를 그대로 보여준 것이라는 지적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 [채널예약]‘궁금한 이야기 Y’ 평화의 소녀상에 침을 뱉은 4명의 청년, 그들의 정체와 의도는?
- 2019. 07. 19 09:46 연예
- 소녀상 모욕 사건을 벌인 남성들의 정체와 진짜 의도를 밝힌다. 사진 | SBS ‘궁금한 이야기 Y’19일, ‘궁금한 이야기Y’에서는 소녀상 모욕 사건을 벌인 남성들의 정체를 추적하고, 그들이 왜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그들의 진짜 의도를 밝힌다. 아물지 않은 아픈 기억에 또다시 잔인한 상처가 남겨졌다. 지난 6일(토) 자정을 넘긴 시각, 안산시 상록수역 광장에 자리한 평화의 소녀상에 20~30대로 보이는 4명의 남성이 차례대로 침을 뱉고, 엉덩이까지 흔들며 모욕을 했다. 실제 현장을 목격한 시민들에 따르면 침을 뱉은 남자들이 “조센징”이라는 욕을 했을 뿐만 아니라, 일왕을 칭송하는 구호를 일본어로 외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경찰 수사 결과소녀상에 침을 뱉은 남성들이 바로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세상을 한번 더 놀라게 했다. 일본군 위안부에 끌려간 할머님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소녀상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한국인이 왜 이런 짓을 벌인 걸까? 대체 그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경찰 조사에 의하면, 청년들은 소녀상에 침을 뱉은 행동이 술에 취해 우발적으로 벌인 일이며, 자신들의 행동이 잘못된 일임을 인정 했다고 한다. 나눔의 집 할머니들 역시 이들이 진심어린 사과를 한다면 법적 처벌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힌 상태. 하지만 사건이 일어난 지 열흘이 넘도록 이들의 사과는 없다. 우리는 이들이 왜 아직도 사과하지 않는지, 이들이 그날 벌인 행동이 정말 술에 취해 우발적으로 벌인 일인지 확인하기 위해 4명의 청년을 추적했다. 그런데, SNS에 남겨진 이들의 행적은 눈을 의심하게 했다. 한 명은 경찰 조서 작성 후 손목에 묻은 인주 사진을 자랑스럽게 올려놓고 있었고, 또 한 명의 SNS에서는 이번 사건이 있기 한참 전에 소녀상을 향해 모욕적인 손가락질을 하는 사진이 발견됐다. 각각 일베 사이트와 극우 성향의 단체 활동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들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이들의 그 날 행동은 우발적이었던 걸까 아니면 다른 목적을 가지고 한 고의적인 행동일까. 추적 끝에 제작진은 4명의 청년 중 3명을 찾아내 만날 수 있었다. 너무 괴롭고 두려웠다는 말로 말문을 연 그들은 그동안 자신들의 신상이 알려지고 비난받을 게 두려워 사과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위안부 할머니를 모욕할 의도는 전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곧이어 청년들의 입에서 나온 얘기들은 우리를 무척이나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SBS ‘궁금한 이야기 Y’는 7월 19일 금요일 저녁 8시 50분에 방송된다.
- 미국 소도시 글렌데일에 ‘평화의 소녀상’이 있는 이유를 알려주는 ‘기억 전쟁’
- 2019. 01. 30 15:19 생활
-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북쪽에 있는 작은 도시 글렌데일은 인구가 약 20만명에 불과하지만 2013년 한국 이외 지역 중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상징하는 ‘평화의 소녀상’이 들어섰다. 많은 외국 도시 가운데 한국과 특별한 인연도 없는 글렌데일에 ‘평화의 소녀상’이 설치된 사연을 담은 책 ‘기억 전쟁’(임지현 저·휴머니스트 펴냄)이 출간이 됐다. 저자는 ‘평화의 소녀상’이 이 곳에 있게 된 이유를 글렌데일 민족 구성을 통해 설명해 준다. 글렌데일에는 해외에서 가장 큰 아르메니아인 공동체가 있다. 주민 중 40%가 아르메니아계로 알려졌다. 이들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집단학살을 당한 ‘기억’을 공유한 사람들이다.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 때 아르메니아 집단학살 생존자 후손이자 글렌데일 시의회 의원인 자레 시나얀은 “갈등을 해소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최선의 방법은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라며 “오늘날까지 (가해자들)사과가 없고 사실을 제대로 인정하지도 않기 때문에 상처는 깊고 또 곪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저자는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에 대한 기억이 글렌데일의 아르메니아인들로 하여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통에 예민하게 반응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라며 “강력한 아르메니아 공동체가 지지하지 않았다면 글렌데일에 소녀상을 세우기는 힘들었을 것”이라고 풀이했다. 저자는 “역사가 공식적 대화라면 기억은 친밀한 대화”라며 “역사학 방법론이 문서 기록을 근거로 산 자가 죽은 자를 심문하고 재단하는 데 치우쳐 있다면, 기억 연구는 산 자가 죽은 자의 목소리에 응답해서 그들의 원통함을 달래는 데 힘을 쏟는다”고 설명한다. ‘사실’에 근거한 실증주의 연구 방법론을 채택한다면 사료가 중요할 수 있지만, 과거에 벌어진 복잡한 양상을 추적하려면 기억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역사학에서 중국 난징 대학살 희생자 수는 ‘30만명’이 정설이다. 저자는 중국이 30만명 희생을 못 박은 데에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 피해자보다 많아야 한다는 강박감이 작용했을 것으로 봤다. 저자는 역사에서 숫자는 ‘누가 희생자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할 때 하나의 근거가 된다고 지적한다. 우리 민족이 더 많이 죽었기에 가해 민족 혹은 국가에 대해 역사적 우위에 있다는 시각은 수치 중심적 사관이 빚은 결과다. 하지만 역사는 단순하지 않다. 20세기 초반 역사에서 한국인과 유대인은 피해자, 일본인과 독일인은 가해자라는 도식적인 견해는 자칫 개인을 매몰시킬 우려도 있다. 저자는 한나 아렌트가 ‘집합적 유죄’라는 개념에 반대했다며 “죄의 유무는 그가 속한 집단이 아니라 인간 개인이 저지른 일의 내용과 결과에 따라 판정해야 한다는 아렌트의 주장은 극히 상식적”이라고 말한다. 이는 정치나 기계만으로 사람들을 학살할 수는 없고 결국 사람만이 사람을 학살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책의 부제는 ‘가해자는 어떻게 희생자가 되었는가’다.
주간경향(총 2 건 검색)
- [렌즈로 본 세상]‘상념’에 빠진 평화의 소녀상(2020. 05. 22 14:42)
- 2020. 05. 22 14:42 사회
- 정의기억연대(정의연)의 후원금 횡령 의혹과 윤미향 전 정의연 이사장의 안성쉼터 매입·매각 의혹 등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시민단체의 고발이 잇따르고, 검찰도 수사에 착수했다. 정의연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철저한 진상 규명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우세하다. 한편에서는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이 위축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나온다. 폄훼·왜곡될 것에 대한 염려다. ‘위안부 활동이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동안 응원해온 시민의 바람이다. 할머니들의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생존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는 겨우 18명뿐이다. 세찬 비가 내린 지난 5월 19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건너편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의 모습이 빗방울 속에 맺혀 있다.
- 렌즈로 본 세상
- [원희복의 인물탐구]평화의 소녀상 조각가 김서경·김운성 “통일 상징물은 꼭 만들고 싶다”(2016. 08. 22 17:53)
- 2016. 08. 22 17:53 사회
- 조각 하면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이 떠오른다. 이 조각은 원래 단테의 에 나오는 ‘지옥의 문’ 앞에서 고뇌하는 한 시인의 모습이다. 이 로뎅의 조각품에 대해서는 다양한 철학적 평론과 해석이 있지만 기자가 볼 때는 매우 단순하다. 쭈그리고 바닥을 보면서 잘못을 반성하고 있는 모습이다. 왜냐고? 만약 그가 좋은 시(글)를 썼다면 애당초 지옥에 오지 않고 천국에 갔을 것이며, 좋은 시를 썼는데도 지옥에 왔다면 억울해 하거나 항의했을 것이다. 당연히 로뎅은 하늘을 향해 손을 치켜든 모습을 조각했을 것이다. 누구도 유추할 수 있는 간단한 이치 아닐까. 민족 자존심 걸린 외교 상징이 된 소녀상 이에 비해 ‘평화의 소녀상’은 훨씬 의미가 깊다. 빈 의자를 옆에 두고 앉은 소녀의 모습이 시사하는 것은 복합적이다. 거칠게 잘린 머리카락은 본인의 의사와 무관한 인연을, 왼쪽 어깨에 앉은 새는 하늘과 교감하는 영매다. 뒤꿈치를 내리지 못한 발은 늘 불안했던 소녀의 힘든 삶이다. 소녀상에는 이런 함축적 상징이 12개나 된다. 를 쓴 박유하는 이 소녀상에 대해 “소녀상은 성 노동을 강요당한 ‘위안부’를 상정하는 상일 텐데, 성적 이미지와는 무관해 보이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다”(204쪽) “조선인 위안부는 ‘국가’를 위해 동원되었고 일본군과 함께 전쟁에 이기고자 그들을 보살피고 사기를 진작한 이들이기도 했다. 대사관 앞 소녀상은 그녀들의 그런 모습을 은폐한다”(205쪽) “소녀상은 ‘그 때의 조선인 위안부’라기보다는 ‘20여년의 데모’와 운동가가 된 위안부이다”라고 말했다. 박유하가 예술작품에 자신만의 느낌을 갖는 것은 자유다. 이에 김서경은 “그러면 소녀상을 매춘부 이미지로 만들라는 것인가”라며 “피해자 마음에서 소녀상을 바라보는 마음이 전혀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박유하의 소녀상 느낌에 기자는 “강자를 옹호하는 것은 ‘아부’이고, 약자를 비난하는 것은 ‘폭력’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어쨌든 소녀상에 대해 180도 다른 감정을 느끼는 것은 작품이 복합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미 소녀상은 단순한 청동 금속의 존재를 뛰어넘었다. 추울까봐 목도리를 둘러주고, 비가 오면 우산을 씌워준다. 이렇게 인간적 정서를 동일시하는 조각품이 또 있을까. 과문하지만 벌거벗은 로뎅의 조각품이 추워보여 옷을 입혀줬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박유하는 이런 국민들의 자발적인 행동에 뭘 느낄까. 이제 소녀상은 민족적 자존심이 걸린 외교적 상징이 됐다. 정부 차원에서 ‘철거하기로 약속됐다’ ‘그런 약속 한 적 없다’는 외교적 논란을 일으키면서 학생들이 소녀상을 지키겠다고 한겨울 같이 노숙했다. 게다가 소녀상은 시간이 갈수록 세우려는 곳이 늘어나고 있다. 그것도 대부분 국민의 자발적 성금으로 이뤄지고 있다. 그 평화의 소녀상 조각가 김서경·김운성 부부를 만났다. 7월 22일부터 3일간 서울 시청앞에서 열었던 ‘전쟁 없는 세상을 위한 프로젝트전’라는 전시회가 너무 좋아 인사동에서 연장 실내 전시가 마련된 것이다. 부부는 주한미군이 사격장으로 쓴 경기도 매향리에서 구해 온 포탄과 탄피에 철골을 붙이고, 꽃을 새겨 평화의 작품을 만들었다. 물론 이 전시 외에도 그의 상징작 평화의 소녀상도 전시하고 있다. 여리지만 당당하고 순수한 소녀 표현 위안부 문제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는 일본대사관 앞 수요시위 1000회를 기념해 2011년 12월 14일 세운 첫 ‘평화의 소녀상’ 이후 소녀상은 전국, 전 세계로 늘어나고 있다. 그래서 요즘 부부는 매우 바쁘다. 전시도 많지만 소녀상 제막식이 지방과 해외에서도 열리기 때문이다. 부부를 한 곳에 모아 얘기를 듣는 것도 빠듯했다. “지금까지(8월 12일) 우리나라에 29점을 세웠고, 해외에도 4점이 있다. 제막식까지 마친 것만 그렇다. 그런데 요청이 들어오는 곳도 많고 또 당장 내일 제막식 하는 것도 있다.” 원래 비석 형태에서 시작한 디자인은 일본 정부의 반대에 분노, 할머니 형상으로 바뀌었다. 김서경은 “고민을 거듭한 끝에 처참한 상처를 받았던 당시 나이대의 소녀상으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김서경은 원래 소녀상을 제작하기 전 ‘소녀의 꿈’이라는 작품을 만든 적이 있었다. 꿈 많은 소녀가 봄의 향기를 맡으며 예쁜 미소를 짓는 모습이었다. 여기서 착안해 할머니들이 끌려가기 전 소녀의 모습을 형상화하기로 한 것이다. 소녀상의 바탕이 된 흙 붙임 작업은 김서경 혼자했다. 위안부 할머니의 소녀상에 남자 손이 닿는 것이 싫어서였다고 한다. 최근 김서경·김윤성 부부가 출간한 처음 만든 소녀상 미니어처(모형)를 보면 매우 토속적이고, 또 소박한 느낌이다. 그러나 실제 만들어진 소녀상은 조금 세련된 미인이다. “하하. 그런가? 토속적으로 만들었는데. 소녀상 얼굴은 소박한 조선의 소녀여야 하고, 또 얼굴이 밉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만들었다.” 소녀상에서 잘린 머리카락, 새, 빈 의자 등 12가지 강조 포인트가 있다. 그 중 가장 역점을 둔 대목은 어디인가. “역시 소녀의 얼굴 표정이다. 제일 신경 쓴 것은 어리지만 어리지 않게, 여리지만 당당한 의지를 표현하고, 순수한 소녀지만 살아온 역사와 미래를 보이는 그런 얼굴을 나타내려 했다. 얼굴만 백 번 정도 고쳤다.” 김서경(1965년 서울생) 김운성(1964년 춘천생) 부부는 대학(중앙대학교 예술대학 84학번)에서 만났다. 남편 김운성은 예술대 총학생회장이었고, 부인 김서경은 본인 말대로 ‘회장 밑에서 열심히 도와주던 사람’이었다. 사실 공과대학이나 예술대 학생들은 시국문제에 그리 예민하지 않은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에 김운성은 “우리 예술대학은 사진과·문예창작과도 그랬지만 풍토가 달랐다”면서 “우리들은 역사적·사회적으로 남들이 비켜가는 것에 대해 우리까지 비켜서지 말자는 생각을 가졌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암울했던 1980년대 민주·통일을 형상화하는 민중미술운동을 같이 했다. 두 사람은 199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민중미술 15년’ 전시에 같이 출품하는 등 꾸준히 작품을 이어오고 있다. 결혼한 두 사람은 3년간 미술학원을 운영했지만 ‘추구했던 가치가 맞질 않아’ 그만두고 작품 작업에만 몰두했다.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그렇지만 작품활동만으로는 생활하기 어렵다. 김운성은 “가난은 어쩔 수 없는 건데, 그래도 전시를 하면 아내 작품이 많이 팔렸다”고 말했다. 김서경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 궁핍함은 느끼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는 하고 싶은 것을 하니까 없어도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회화와 달리 조각은 브론즈 등 재료 값이 너무 많이 들어가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브론즈가 비싸, 플라스틱으로 먼저 만들어 작품이 팔리면 브론즈로 다시 만들어 전달한다, 돈을 아끼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귀띔한다. 아직 형편이 안 돼 작품과 도구를 한 곳에 두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한 비닐하우스를 작업실로 쓰고 있다. 소녀상도 이곳에서 만들었다. 최근 함께 작업하는 ‘베트남 피에타’ 열중 두 사람은 동학 100주년 무명 농민군 추모비(1994년), 민족시인 채광석 시비 조형물(2000년), 미선·효선 추모비(2012년), 독립운동가 조문기 선생 기념비(2014년) 등 정치·사회·역사적으로 ‘의식화’된 작품을 많이 만들었다. 하지만 서울역사박물관 앞 전차에 만든 ‘전차와 지각생’(2010)과 같이 서민의 토속적 삶도 형상화하기를 좋아한다. 두 사람은 각자 작품도 하고, 공동 작품도 한다. 남편 김운성이 개구쟁이, 말뚝박기 등 토속적 한국미를 추구한다면, 오히려 부인 김서경이 더 사회참여적이라는 느낌이다. 김서경의 대학 졸업 작품이 ‘통일이 오면’이다. 서울 인사동에 열린 ‘전쟁 없는 세상을 위한 프로젝트전’에서는 포탄과 탄피로 평화의 작품을 만들었다. 서로의 예술적 감각은 어떻게 평가하나. 김서경- “남편은 은유적 방법을 많이 쓰고, 나는 직설적인 표현을 많이 쓴다. 나는 사람에게 관심이 있어 사람의 표정과 삶을 그대로 표현한다면, 남편은 그런 얘기를 한 번 뒤집어 생각할 수 있는 작업을 한다.” 그런가. 오히려 남녀의 스타일이 뒤바뀐 것 같다. 김운성- “그건 철학의 차이일 뿐이다.(허허)” 김서경·김운성 부부는 최근 소녀상의 제작 과정을 기록한 책 (도서출판 말)을 펴냈다. ‘평화의 소녀상 작가 노트’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소녀상을 제작한 계기에서부터 제작과정, 건립 일화 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김서경이 직접 단 책 제목에서 빈 의자는 돌아가신 할머니를 의미한다. 김서경은 이 빈 자리를 “할머니가 앉았던 곳, 그리고 우리가 함께 해야 할 빈 자리, 우리 아이들의 평화로운 미래를 위해 앉아야 할 약속의 자리”라고 설명했다. 미술평론가 김준기(예술과학연구소장)는 이 책에서 “평화의 소녀상은 사회적 소통과정을 거쳐 예술적 소통을 매개하는 점에서 사회예술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면서 “과거사 문제의 의제화에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두 사람은 요즘 ‘베트남 피에타’ 제작에 열중하고 있다. 월남전에서 한국군에 학살된 베트남 피해자를 위로하는 상징물로, 어머니가 죽은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이다. 지난 4월 한베평화재단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 노화욱)가 만들어져 올해 안에 한국과 베트남에 ‘베트남 피에타’를 동시에 세우기로 했다. 월남전 참전단체에서 반대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제주 강정마을에 세우기로 했다. 베트남에서는 우리 정부의 눈치를 보는 것 같다고 한다. 두 사람은 앞으로 하고 싶은 작품에 대해 “평화와 인권에 대한 주제는 계속 가져가야 할 것 같다”면서 “그래도 재미있고, 사랑스러운 작품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전쟁을 기념하는 아수라 같은 여건이지만, 통일에 대한 상징물만큼은 꼭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 원희복의 인물탐구
레이디경향(총 1 건 검색)
- 평화의 소녀상, 언제나 그 자리에
- 2016. 01. 28 16:43 화제
- 지난해 말 한·일 양국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최종 합의하면서 소녀상 이전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소녀상이 세워진 지도 어느덧 5년째. 소녀상이 갖는 의미를 다시 한번 돌아본다. 위안부 협상이 불러온 문제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공관의 안녕·위엄의 유지라는 관점에서 우려하고 있는 점을 인지하고, 한국 정부로서도 가능한 대응 방향에 대해 관련 단체와 협의 등을 통해 적절히 해결되도록 노력한다.” 한·일 양국 정부는 지난해 12월 28일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과 관련해 이렇게 합의했다. 이 과정에서 위안부 피해 당사자들에게 이해를 구하지도 않았고,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 문제도 논의되지 않아 거센 비판 여론이 형성됐다.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는 이날 열린 기자회견에서 “도쿄 한복판에 소녀상을 세워도, ‘저희가 잘못했습니다’라고 해도 시원찮을 텐데 건방지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동안 일본 정부는 소녀상을 철거할 것을 꾸준히 한국 정부에 요구해왔다. 한국 정부는 이런 요구에 대해 ‘소녀상은 민간이 자발적으로 설치한 것이다’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하지만 정작 합의문에는 소녀상 문제가 언급됐다. 일본 측은 소녀상 이전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은 협상을 타결한 뒤 일본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소녀상에 대해 “적절히 이전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현재 일본 정부는 ‘불가역적’, ‘최종적’이라는 표현이 담긴 한·일 외교 장관 합의문을 방패 삼아 더 이상의 사죄와 반성은 필요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이 같은 상황에서도 합의문에 있는 내용이 전부라는 해명만 되풀이하고 있다. 1 2011. 12. 15. 수요집회 1,000회를 맞아 평화의 소녀상이 설치된 지 하루가 지난 날. 누군가가 목도리로 맨발을 감싸놓았다. 2 2011. 12. 26. 전국 곳곳에 한파 경보가 발령된 이날 소녀상도 털모자, 목도리, 담요로 중무장했다. 3 2012. 2. 13. 1970~80년대 청계천과 경기도 화성 등지에서 빈민 구제 활동을 벌였던 일본인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가 소녀상 앞에서 ‘울 밑에 선 봉선화’를 연주하고 있다. 4 2012. 1. 4. 2012년 첫 번째 집회에 나온 길원옥 할머니가 생각에 잠긴 채 소녀상을 바라보고 있다. 5 2012. 8. 29 경술국치일 102주년. 경찰관들이 일본의 우익 테러에 대비해 경계 근무를 서고 있다. 앞선 2012년 6월 일본 극우 정치인 스즈키 노부유키는 위안부 소녀상에 ‘말뚝테러’를 가했다. 당시 그는 소녀상에 ‘다케시마는 일본 영토’라고 적은 말뚝을 묶어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6 2013. 1. 2. 새해를 맞아 한복을 곱게 차려입었다. 7 2013. 9. 25. 수요집회에 참여한 학생들이 빈 의자 위에 올려놓은 화분.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 평화의 소녀상은 수요집회 1,000번째를 맞이한 2011년 12월 14일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건너편에 세워졌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이 계획했고, 김운성·김서경 작가 부부가 소녀상을 공동 작업했다. 소녀상 옆 돌바닥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다. “1992년 1월 8일부터 이곳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 시위가 2011년 12월 14일 1,000번째를 맞이함에 그 숭고한 정신과 역사를 잇고자 이 평화비를 세우다.”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의 과거사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수요집회가 열린다. 치마저고리를 입은 짧은 단발머리 소녀는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주먹을 움켜쥔 채 일본대사관을 바라보고 있다. 시민들은 날씨가 추워지면 소녀상에 목도리를 둘러주고, 비가 오면 우비를 입혀준다. 혹시나 손발이 시릴까 봐 핫팩이나 장갑, 신발을 갖다놓기도 한다. 이렇게 시민들의 각별한 애정을 받고 있는 소녀상은 높이 130cm로 생각보다 작다. 수요집회 현장에서는 많은 인파에 둘러싸여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이 작은 동상이 갖는 의미는 거대하다. 맨발 차림은 일본군 위안부들의 고단했던 생활을 보여준다. 발꿈치가 들려 있는 모습에는 고향에 돌아와서도 편히 정착하지 못한 할머니들의 설움이 담겼다. 소녀의 단발머리는 일본군이 댕기머리였던 위안부들의 머리를 강제로 잘라낸 것을 표현하고 있다. 거칠게 잘린 머리카락은 부모와 고향으로부터 강제로 단절됨을 상징한다. 꽉 쥔 주먹은 일본 정부의 진심 어린 사과를 받아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1 2013. 3. 2. 1066차 정기 수요집회가 열린 날. 비가 온 탓에 노란 우비를 입었다. 2 2014. 5. 7. 어버이날 하루 전. 소녀상의 두 손 위에 놓인 카네이션. 3 2015. 7. 9. 소녀상 아래 놓인 꽃신. 이날 열린 1186차 정기 수요집회는 고 최금선 할머니의 영정과 함께였다. 2016년 1월 현재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38명 가운데 생존자는 46명뿐이다. 4 2016. 1. 14.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한·일 협상안 폐기 대학생 대책위원회’ 소속 학생들이 한·일 위안부 협상을 규탄하는 문화제를 열고 밤샘 농성을 하고 있다. 왼쪽 어깨에 앉아 있는 작은 새는 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상징물이다. 세상을 떠난 할머니들과 현재의 우리를 이어주는 연결고리이기도 하다. 소녀 옆에 놓인 빈 의자는 돌아가신 할머니들의 의자이며 동시에 우리가 앉아 그들의 아픔을 공감하는 자리다. 소녀상의 그림자는 할머니의 형상을 띠고 있는데, 이는 오랜 시간 풀리지 않는 한을 뜻한다. 그림자 안의 하얀 나비에는 돌아가신 할머니들이 다시 태어나 한을 풀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 있다. 소녀상 제작자인 김운성 작가는 소녀상 이전 문제가 불거진 데 대해 “(일본이) 타 국가의 조각품을 협상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것 자체가 이해되지 않는다”라며 “‘불가역적’이라고 표현하며 다시는 위안부 문제를 언급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소녀상 철거를 요구하는 것은 진정한 사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진심으로 사죄한다면 소녀상을 그대로 두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글 / 노도현 기자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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