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총 5,417 건 검색)
- 노벨 평화상 유사프자이, 탈레반 여성 탄압에 “무슬림이 맞서야”
- 2025. 01. 13 20:42국제
- ... 국제 학술대회서 촉구…아프간 탈레반, 초청받고 불참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여성 교육 운동가 말랄라 유사프자이(28·사진)가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의 여성 탄압을 규탄하며 “무슬림이 탈레반에...
- 탈레반말랄라유사프자이
- [단독]특전사 국제평화유지 병력까지 계엄군으로 투입하려 했다
- 2025. 01. 13 17:22사회
- ... 투입했다. 3공수여단과 9공수여단 병력 역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보낸 것으로 확인됐다. 국제평화지원단은 국군이 국제평화유지 활동에 참여하기 위해 2010년 창설한 부대다. 필요한 경우 해외로...
- 尹 탄핵심판 시작
- ‘노벨평화상’ 말랄라 유사프자이 “무슬림이 탈레반에 맞서야”
- 2025. 01. 13 14:10국제
- ... 국제 컨퍼런스 ‘무슬림 공동체의 여성 교육: 과제와 기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여성 교육 운동가 말랄라 유사프자이(28)가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의 여성 탄압을 규탄하며...
- 탈레반말랄라유사프자이
- 혁신당 “평화의 소녀상 모욕 극우집회 손 들어준 김용원 인권위, 제정신인가”
- 2025. 01. 09 11:17정치
- ... 판단한 국가인권위원회의 결정을 비판했다. 황명필 혁신당 최고위원은 이날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평화의 소녀상을 ‘매춘부상’이라고 모욕하는 극우 집회에 대해 김용원 인권위 (상임위)원이란 자가 장소...
스포츠경향(총 598 건 검색)
- ‘수상한 그녀’ 인교진, 평화 수호자 200%
- 2025. 01. 10 09:06 연예
- KBS2 ‘수상한 그녀’ 배우 인교진이 KBS2 수목드라마 ‘수상한 그녀’(연출 박용순/ 극본 허승민/ 제작 스튜디오브이플러스, 아이디어팩토리, 하이그라운드, 예인플러스)에서 처가 갈등에 전방위로 활약하며 극에 따뜻함과 유쾌함을 불어넣고 있다. 이번 주 방송된 ‘수상한 그녀’ 7, 8회에서는 자넷(김해숙 분)을 장모님으로 착각한 최민석(인교진 분)이 ‘기브 앤 테이크’를 선언한 자넷과의 거래를 통해 아내 반지숙(서영희 분)의 비밀을 파헤치는 모습이 그려졌다. 민석은 자신이 가장 노릇을 하기 위해 자존심을 접고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지를 자넷에게 하소연했다. 하지만 자넷은 부부 일은 알아서 하라며, 오히려 지숙과 틀어진 관계를 두고만 볼 거냐고 반문했다. 민석은 정글 사자와 뱅갈 호랑이의 싸움에 코알라가 끼어들 수는 없다며 주저했으나, 월세 빚을 건 자넷의 제안에 지숙의 흉내까지 내가며 급격하게 태세를 전환했다. 민석은 자신이 통신병 출신이라 도청, 감청에 일가견이 있다며 한 차례 너스레를 떨고는 자넷에게 지숙이 60대 이상의 여사님과 연락한 후부터 태도가 변화했다는 정보를 전달했다. 이어 지숙의 핸드폰을 몰래 보기로 결심한 민석은 메시지를 통해 ‘병원’이라는 단서를 찾아냈고, 죽은 줄로만 알았던 지숙의 아버지가 살아있으며 위독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인교진은 인물 간의 이야기가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수상한 그녀’에서 주위를 세심하게 살피고 각 인물을 다정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극의 힐링을 책임지고 있다. 인교진은 장모-아내-딸까지 3대에 걸친 갈등 속 처가살이로 눈칫밥을 먹기 일쑤인 최민석을 따뜻한 눈빛과 특유의 능청스러운 연기를 기반으로 온화하게 풀어내며 친화력 좋은 사위 캐릭터로서 드라마판 ‘수상한 그녀’에 새로운 색을 입히고 있다. 또한, 말순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지숙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건넬 때는 순간 표정을 바꿔 진지한 ‘어른 남자’의 매력까지 선보이며 처가댁 ‘평화 수호자’ 역할을 200% 맛깔나게 소화해 내고 있다. 한편, KBS2 ‘수상한 그녀’는 매주 수, 목 밤 9시 50분에 방송된다.
- ‘이름을 모르는 먼 곳의 그대에게’ 평화 노래한 음악가들 여정, 아카이브 웹사이트 다시 만난다
- 2024. 12. 02 05:51 연예
- ‘이름을 모르는 먼 곳의 그대에게’ 평화를 향한 음악가들의 목소리를 담은 ‘이름을 모르는 먼 곳의 그대에’ 프로젝트의 아카이브 웹사이트 가 공개되었다. 이 웹사이트는 12팀 뮤지션들이 참여한 평화 음반 프로젝트의 전 과정을 담고 있다. 포크, 블루스, 재즈, 월드뮤직 등 다양한 장르의 뮤지션들이 각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평화의 메시지와 음반 제작 과정, 서울과 제주에서 진행된 공연의 순간들을 상세히 기록했다. “이름을 모르는 먼 곳의 그대에게”라는 앨범 타이틀처럼, 이 프로젝트는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 등 전쟁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향한 연대의 마음을 음악으로 표현했다. 소성리 평화운동가이자 뮤지션인 정진석의 “이 땅이 니 땅이가”, 전쟁 속 어린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자이(Jai)와 HANASH의 “분홍색 패딩 소녀” 등 평화를 향한 다양한 시선과 목소리를 담아냈다. 크라우드 펀딩으로 제작된 CD 음반은 많은 관심 속에 출시 직후 매진되어 현재 절판된 상태다. 프로젝트 참여 뮤지션들의 곡들은 현재 싱글로 순차 발매되고 있으며, 1월 말에는 전체 수록곡이 주요 음원 포털을 통해 디지털 앨범으로도 만나볼 수 있을 예정이다. 프로젝트를 기획한 예술해방전선 황경하 디렉터는 “음악은 언어와 국경을 넘어 평화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강력한 매개체”라며 “이 아카이브 웹사이트가 평화를 향한 우리의 작은 발걸음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플랫폼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웹사이트에서는 프로젝트에 참여한 12팀의 뮤지션 소개와 각 음악가들이 전하는 평화 메시지를 만나볼 수 있다. 특히 제주 강정마을에서 결성된 포크듀오 모레도토요일, 네팔 출신 시타리스트 리테스 마하르잔이 참여한 Project Around Surround 등 다채로운 음악가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지난 10월 제주 강정평화센터와 11월 서울 홍대 공연을 통해 관객들과 만난 이 프로젝트는 앞으로도 음악을 통한 평화 메시지 전파를 이어갈 예정이다.
- 로리 매킬로이 “트럼프가 골프계에 평화를 줄 수 있을 것”… PGA-LIV 합병에 일론 머스크 역할도 기대
- 2024. 11. 07 12:16 스포츠종합
- 로리 매킬로이가 7일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 야스 링크스에서 DP월드투어 아부다비 HSBC 챔피언십 개막을 하루 앞두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남자골프 세계 3위 로리 매킬로이(북아일랜드)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골프계에 평화를 줄 것으로 기대했다. 매킬로이는 7일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 야스 링크스에서 이번주 열리는 유럽프로골프 DP월드투어 아부다비 HSBC 챔피언십 개막 하루전 기자회견에서 트럼프와 관련한 질문에 “(PGA투어와 LIV골프의 협상에서) 길이 명확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 매킬로이는 트럼프가 지난주 한 팟캐스트에 출연해 “내전은 종식돼야 한다. 내가 나서면 양측 협상을 15분만에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 말을 두고 “그가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내 생각에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인 일론 머스크를 옆에 두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LIV골프를 지원하는) 사우디 아라비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골프를 사랑한다”며 트럼프가 문제 해결에 앞장서는 과정에서 머스크가 중요한 역할을 해줄 수도 있다고 기대했다. 트럼프는 최근 팟 캐스트에서 “투어는 하나가 돼야 하고, 그 안에서 최고선수들이 함께 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트럼프는 열렬한 골프광으로 잭 니클라우스, 타이거 우즈(이상 미국), 매킬로이 등 세계적인 스타들과 자주 동반 라운드를 했고 사적인 관계도 유지하고 있다. 지난 7월에는 올해 US오픈 챔피언 브라이슨 디섐보(미국)와 18홀 라운드를 돌았고, 이 영상은 1100만뷰를 기록하며 25만 달러(약 3억 4000만원)를 모아 상이군인 돕기에 기부했다. 그가 소유한 골프장에서는 PGA 챔피언십과 US여자오픈 등 남녀 메이저 대회가 열린 바 있다. 트럼프는 지난 6일 제47대 미국 대통령선거 승리 선언 기자회견에서 디섐보를 단상에 올려 골프계에 관심을 표현했다. 트럼프는 “그는 위대한 US오픈 챔피언이다. 나보다 아주 약간 더 길게 샷을 날린다”고 허풍 섞인 농담도 했다.
- 신현준♥12세 연하 아내 “평화로운 오후가 이상해” 불안하더니… (꽃중년)
- 2024. 10. 02 09:12 연예
- 채널A ‘아빠는 꽃중년’ ‘아빠는 꽃중년’의 신현준이 ‘베짱이 남편’에서 ‘개미 현준’으로 대변신하지만, 아이들의 입단속까지 동원한 ‘작당모의’가 들통 나 아내 김경미를 극대노하게 만든다. 3일 방송하는 채널A ‘아빠는 꽃중년’ 23회에서는 ‘57세 꽃중년’ 신현준이 아내 모르게 새로운 사고를 쳐서, 집안을 또 한 번 쑥대밭으로 만들어놓는 ‘대환장’ 하루가 공개된다. 이날 신현준은 주말을 맞아 성북동 집을 찾는 아내 김경미와 세 자녀 민준, 예준, 민서를 위해 열심히 식사 준비를 한다. 또한 아내의 차가 들어올 때 즈음, ‘칼각 대기를 하다가 ‘거수경례’까지 해 아내를 빵 터지게 만든다. 나아가 신현준은 차에서 내리는 아내에게 “오늘 예쁘네?”라고 플러팅까지 한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 신현준은 미리 싹 청소해 놓은 집을 아내에게 보여주고, 이에 놀란 김경미는 “적응이 안 된다”라며 불안한 미소를 짓는다. 채널A ‘아빠는 꽃중년’ 채널A ‘아빠는 꽃중년’ 채널A ‘아빠는 꽃중년’ 잠시 후, 다섯 식구는 맛있게 식사를 하고, 아내는 강아지 산책을 위해 잠시 집을 비운다. 그러자, 신현준은 아이들을 다급하게 집합시킨 뒤, “지난번에 너희들이 뭘 하고 싶어 했지?”라면서 의문의 ‘검은 박스’를 꺼내 보여준다. 이를 확인한 아이들은 대환호하고, 신현준은 “아내의 허락을 받고는 도저히 우리 집에 올 수 없는 물건”이라면서 아이들 입단속을 한다. 얼마 후, 강아지와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김경미는 남편과 아이들의 수상한 낌새를 느끼더니 “오늘처럼 평화로운 오후가 이상해”라면서 곧장 수색에 나선다. 결국 막내딸 민서의 자백(?)으로 ‘검은 박스’를 찾아낸 김경미는 박스를 열어본 뒤,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면서, “사람이 바뀐 줄 알았는데, 정말 제대로 속았네…”라며 남편을 부른다. 신현준은 심각한 분위기 속 아내의 추궁에도 대책 없는 답변을 내놓고, 이에 김경미는 “일이 이렇게 많은데 또 하나를 더 만들어!”라며 버럭한다. 아내와 아이들의 ‘극과 극’ 반응을 자아낸 ‘검은 박스’의 정체가 무엇일지, 신현준 가족의 ‘단짠단짠’한 하루는 3일 오후 9시 30분 방송하는 ‘아빠는 꽃중년’ 23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주간경향(총 160 건 검색)
- 하나님의교회, 노벨사이언스상 세계평화봉사대상 수상(2025. 01. 14 10:31)
- 2025. 01. 14 10:31 사회
- 김주철 하나님의교회 총회장이 지난해 12월 27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호암교수회관에서 열린 제8회 대한민국노벨사이언스 대상 시상식에서 세계평화봉사대상을 수상한 뒤 참석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하나님의교회 제공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이하 하나님의교회)가 제8회 대한민국 노벨사이언스상 대상 시상식에서 세계평화봉사대상을 수상했다. 한국노벨사이언스위원회는 지난해 12월 27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호암교수회관에서 제8회 대한민국 노벨사이언스 대상 시상식 및 노벨사이언스 포럼을 열었다. 한국노벨사이언스위원회는 ‘노벨과학상을 받을 수 있는 인재 양성’을 목표로 과학계 원로들이 모여 설립한 단체다. 이날 행사에서는 과학자에게 수여하는 과학대상, 기업인에게 수여하는 과학기술대상, 과학기술공로상 등 다양한 부문에서 시상이 진행됐다. 하나님의교회는 이 중 세계평화봉사대상을 수상했다. 하나님의교회는 “지난 60년간 기후변화 대응, 빈곤과 기아해소, 교육지원 및 국제협력을 통해 전 세계에 생명 존중과 인류 평화를 실천하며 공동 연대로 지속할 수 있는 평화 확산에 기여했고 특히 세계 각국 청년들과 함께하며 화합과 연대를 실천해 세계의 변화를 끌어낸다는 점이 높이 평가받았다”고 밝혔다. 이도수 노벨사이언스 회장은 환영사를 통해 “노벨사이언스가 소통을 넘어 연대로 새로운 역사를 기록해 나갈 것”이라며 “함께라면 어떤 한계든 뛰어넘을 수 있다”고 말했다. 조완규 한국노벨사이언스위원회 명예고문(전 서울대학교 총장)은 격려사에서 “노벨사이언스가 과학인들의 중지를 모으는 장으로서의 역할도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나님의교회 총회장 김주철 목사는 “175개국 370만 성도들이 ‘어머니 사랑으로 지구촌 가족들에게 희망과 행복을 전하자’는 한마음으로 나눔과 봉사를 실천한 결과로 받게 된 상이라 더욱더 값지게 느껴진다. 이웃들의 고단한 삶을 보듬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며 숨 가쁘게 달려온 2024년을 보내고, 새해를 시작하는 때 이번 상이 성도들에게 뜻깊은 선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이주영의 연뮤덕질기](35) 평화를 향한 초국가적 연대(2024. 11. 08 16:00)
- 2024. 11. 08 16:00 문화/과학
- 연극 <퉁소소리>·<햄릿>, 뮤지컬 <조로: 액터뮤지션> 등 연극 <햄릿> 공연 장면. 예술의전당 제공 인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다. 전쟁이나 재난으로 고향을 떠나 타지를 떠도는 이들을 흔히 난민(難民·refugee), 이로 인해 타지에 정착하는 경우 ‘이주 난민’ 혹은 ‘디아스포라(Diaspora)’, 이중 정치적인 견해나 태도를 고수하며 중립에 있는 이들은 ‘경계인(境界人·liminality)’이라고 칭한다. 따라서 인간의 역사는 디아스포라의 역사이기도 하다.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장기전에 접어들고 북한 파병 문제가 국제적으로 대두되면서 일상을 돌아보고 반전운동을 각성하게 만드는 작품들이 상연되고 있다. 창작 초연 연극 <퉁소소리>(고선웅 각색·연출, 김대한 무대, 장태평 음악, 김시화 안무)는 임진왜란으로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이 30여 년간 동북아시아를 떠돌다 해후하는 대서사시다. 개막을 앞두고 있어 연습실에 찾아가 보니 동아시아 각국의 언어가 종횡무진이다. 한·중·일 언어는 기본이고 베트남어까지 대사로, 각국 전통 음률로 쏟아진다. 한국 공연인데 외국어 대사와 외국 전통 음악이 쏠쏠하다. 전쟁통에 가족들과 뿔뿔이 흩어져 타국으로 흘러 들어가 겪는 사연들이라 언어와 무관하게 모두 이해된다. 원작은 조선 중기 문신 조위한의 소설 <최척전>(1621)이다. 1막은 임진왜란(1592)과 정유재란(1597)으로 아내와 아들을 잃고 명나라에서 난민으로 살아가는 최척(박영민 분) 이야기가 중심이다. 옥영(정새별 분) 역시 남장을 한 채 남편을 찾아 헤매다 아이와 부모도 잃고 일본으로 떠밀려 간다. 서로를 그리워하며 연명하던 최척과 옥영은 상단을 따라 안남(베트남)까지 흘러갔다가 기적처럼 해후한다. 사연 마디마디를 구수하게 풀어내는 극 중 화자, 노인 최척(이호재 분)의 추임새가 한국적 풍취를 더한다. 한·중·일 언어에 능통한 이주 난민들 디아스포라에서 생존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외국어 실력이다. 최척과 옥영은 뛰어난 외국어 실력과 타국 문화에 대한 해박함으로 전쟁통에서도 자신을 지키고 가족을 찾아 꿈을 이룰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도 마찬가지다. 연극 <최후의 분대장: 제1부 조선의용군>(김재엽 작·연출, 장호 무대, 한재권 음악)은 평생 경계인으로 살아온 독립운동가이자 소설가 김학철(1916~2001)의 삶을 통해 독립운동사에서 강제로 삭제됐던 ‘조선의용군’의 미시사를 생생하게 재현한다. 1940년 전후부터 해방기까지 중국 화북지역에서 활약한 조선의용군은 한·중·일 3개 국어에 능통한 청년 엘리트들이다. 중·일 전쟁기 자주독립을 목표로 일본군을 섬멸하기 위한 소수 정예부대로서 외국어에 능통해야 했다. 덕분에 위기를 기회로 삼아 승승장구하던 조선의용군은 마지막 전투인 중국 태항산 호가장 전선에서 대부분 전사한다. 다리 하나를 잃고 끝까지 생존한 김학철은 그가 보고 들은 모든 것, 밀정의 관여까지 그대로 문학작품에 남긴다. 대표적인 기록문학이다. <최후의 분대장>은 10대의 김학철(김시유 분)과 20대 이후의 김학철(김세환 분), 노년의 김학철(남명렬 분) 등 나이대별 3명의 김학철이 무대 위를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며 경계인으로서의 삶과 잊힌 역사를 증언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시공간을 넘나들며 11명의 출연진이 한 번의 암전도 없이 180여 분간 일사불란하게 뛰어다닌다. 독립군가를 합창하는 최후의 결전 장면에서는 천장에서 내려온 여러 개의 작은 스크린에 기록영상과 가사가 영사돼 관객들도 손뼉을 치며 제창하게 된다. 잊힌 그들을 기억하고 전쟁의 냉혹함을 되새기게 하는 체험 장치들이다. 연극 <퉁소소리> 연습실 모습. 서울시극단 제공 위정자 각성에 좌우되는 민초의 삶 디아스포라의 초국적 연대는 문학을 바탕으로 한 작품에서도 다양하게 다뤄진다. 연극 <햄릿>(신유청 연출·강태경 번역·황정은 각색·이태섭 무대)은 노르웨이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권력의 정점에서 동생에게 독살당한 선황의 사연을 알게 된 덴마크 왕자 햄릿의 각성을 다루었다. 셰익스피어 원작에서는 아버지를 독살한 숙부와 결혼한 친어머니에 대한 원망으로 광기와 우유부단함이 교차하는 햄릿이다. 신유청이 연출하고 조승우가 연기하는 햄릿은 국제정세 속에서 부도덕한 위정자 클로디어스(박성근 분)가 자멸한 후 벌어질 연쇄 비극에 대해 냉철히 대비하는 모습을 다룬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춘 ‘이성적인 광기’의 <햄릿>이라고 할 수 있다. 2막 마지막, 모두의 죽음을 맞이한 후 자신도 죽어가는 순간 후회하는 햄릿(조승우 분)에게 친우 호레이쇼(김영민 분)는 “어긋난 시간을 바로잡고 계십니다”라고 응원한다. 햄릿의 죽음과 함께 위태롭게 기울어져 있는 무대 위 기둥 중 하나는 완전히 스러지고, 연이어 햄릿의 유언에 따라 노르웨이의 왕자 포틴브라스(송서유 분)가 등장해 수습에 나선다. 전쟁 없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민생을 추스를 것으로 상상되는 정황이다. 뮤지컬 <조로: 액터뮤지션>(이사벨 아옌데 원작·크리스티안 더램 연출·홍승희 공동연출)은 19세기 초 스페인 식민지인 캘리포니아를 폭정으로 난도질한 친형 라몬(김승대·최세용 분)에 대항하는 동생 디에고(최민우·MJ·민규 분)의 이야기다. 권력욕이 없어 집시들과 어울리며 유유자적하던 디에고는 마스크를 쓰고 조로로 분해 폭군을 물리치고 민생을 되살린다. 전쟁과 폭력을 막으려면 강력하고 선한 위정자가 필요충분조건이라는 동화다. 액션과 플라멩코 군무가 인상적인 이 작품은 출연진이 모두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군무·액션을 소화한다. 폭정에 시달리는 민초의 억울한 삶은 디에고의 친우들인 집시 무리가 이주해 오면서 흥과 저항으로 대체된다. 악기를 들고 군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은 그간 상연된, 배우들이 연주자를 겸하는 액터뮤지션 작품들과도 차별화되는 본격 기예의 현장이다. 공연이 임박해 객석에 들어서면 출연진들이 관객과 소통하며 객석 앞에서 연주하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다. 위정자들의 희생양인 민초가 풀뿌리 운동으로 살아남는 비법은 초국적 연대 속에서 목소리 내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라는 상징 같기도 하다. <햄릿>의 극중극 장면에서 햄릿은 “배우란 각 시대를 보여주는 연대기와 같다”고 강조한다.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은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을 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을 하라”고 유언했다. <퉁소소리>에서 옥영은 “하늘은 언제나 무심했지만 살아날 바늘구멍도 만들어 주었단다”라며 분연히 일어나 항해 준비를 하고 흩어진 가족들을 찾아 나섰다. 고선웅 연출은 라이브 국악 연주와 동아시아 각국의 민초가 국가를 초월해 서로 돕고 응원하는 초국가적 연대의 군무를 장면화한 것이다. 서로에 대한 연민과 사랑,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잃지만 않으면 언젠가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가족애와 인류애에 대한 작품들이다. <최후의 분대장>은 상연이 끝났다. <햄릿>과 <조로: 액터뮤지션>은 11월 17일까지, <퉁소소리>는 11월 27일까지 상연한다.
- 이주영의 연뮤 덕질기
- [이주영의 연뮤덕질기](30) ‘서로 인정하며 평화롭게 살기’ 가능할까(2024. 08. 09 16:00)
- 2024. 08. 09 16:00 문화/과학
- 뮤지컬 <영웅>·<빨래>·<접변> 뮤지컬 <영웅> 공연 장면 / 에이콤. 매일 서울 대학로에서 공연을 관람하다 보면 아시아 속의 한국을 실감한다. 일본과 중국, 홍콩, 대만계 관객들을 매일 접하기 때문이다. 휴가철에는 단체 관람객이 급증해 색다른 경험도 한다. 대학로 유니플렉스 2관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빨래>(추민주 작·작사·연출, 민찬홍 작곡, 서정선 안무, 여신동 무대)가 그러했다. 중국, 대만, 일본 관광객들 사이에서 필자를 비롯한 한국인 관객은 소수였다. 한국인지, 홍콩인지, 대만인지 혼돈이었으나 그래서 더 흥미로웠다. 2005년 초연된 뮤지컬 <빨래>는 한국을 대표하는 창작 뮤지컬이다. 타지에서 모여든 서민들이 ‘만만치 않은 서울살이’의 애환을 안고 서울 외곽 낡은 다세대 주택에 모여 살며 겪는 군상극(하나의 주제를 여러 등장인물이 각자의 시선으로 풀어나가는 형태)이다. 지방에서 올라온 나영과 몽골 출신 솔롱고가 부르는 ‘참 예뻐요’는 아시아 가요로 통할 정도로 유명하다. “한국인의 ‘정’, 아시아 정서로 확대” 중국과 일본 등에서 여러 번 라이센스 공연됐고, 한국어 교재로 사용돼 해외에서 더 유명한 작품이다. 한국에 오면 오리지널 공연을 봐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어 <빨래> 공연장은 늘 아시아인들로 붐비지만 정작 내용은 지극히 한국적인 ‘정’을 다룬다. 타향살이에 지친 사회적 약자들의 설움과 그 속에서도 피어나는 연민과 연대가 매 순간 코끝을 찡하게 한다. ‘서울살이 몇 해인가요?’, ‘비 오는 날이면’ 등의 유명한 넘버들은 폭소와 오열을 오가며 마음 근육을 다지게 돕는다. 몽골인 솔롱고, 필리핀인 마이클을 비롯해 다양한 국적과 다양한 지역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낡은 주택은 타향살이를 넘어선 이민자들의 터전이다. 국적 불문 인간 대 인간으로 서로를 보듬고 다독이며 사는 이야기 구조 속에 한국적인 ‘정’이 갈등의 해결책으로 등장한다. 놀라운 것은 아시아 각국에서 온 관객들이 그 복잡한 정서를 정확히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사실이다. 필자가 관람한 회차에는 홍콩에서 온 단체 관람객과 대만 관객이 많았다. 청장년이 섞인 이 관람객 중에는 커튼콜이 끝나고 나서도 오랫동안 멈춰 서서 무대를 바라보며 탄사를 거듭하는 이도 있었다. 작품의 여운을 만끽하는 자세가 아름다워 필자도 함께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한국적 정서가 아시아의 정서로 확대되는 순간이었다. 문화예술을 통한 아시아 연대를 전략적으로 풀어낸 공연은 올해 15주년, 열 번째 시즌을 맞이한 창작 뮤지컬 <영웅>(한아름 작·작사, 김민영 연출, 오상준 작곡, 이란영 안무, 박동우 무대)이다.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전후 1년여 시간을 다루는 <영웅>은 윤제균 감독의 뮤지컬 영화 <영웅>(2022)을 통해 빠르게 대중화됐다. ‘장부가’와 ‘누가 죄인인가’ 등 대표 넘버들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다. 안중근 의사의 구국 결의와 당시 일제강점의 부당함을 세계만방에 알린 재판 항쟁이 생생한 넘버들이다. 뮤지컬 <영웅>이 여느 독립운동가 서사와 다른 것은 안중근 의사의 국제 정치 감각을 담은 미래지향적 넘버 ‘동양평화’ 때문이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후 일본인들로만 구성된 재판장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대한제국 의용군 참모중장으로서 적군의 장수를 죽인 것이니 전쟁포로로서 군사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국가 대 국가로서 자국을 지키기 위한 행위였음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것이다. 또 그는 “간절히 원하는 것은 한·중·일 삼국이 서로를 침범하지 않고 인정하며 평화롭게 사는 동양평화”라고 역설했다. 동아시아가 서구식민주의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방향성이라는 것이다. <영웅>은 프로덕션 과정에서 작은 ‘동양평화’를 실천하고 있다. 하얼빈 의거 직전 중국인 조력자로 안중근을 보호하다 사망하는 가상 인물 왕웨이와 안중근 사형집행 과정을 지켜본 실존 인물 치바 도시치 역으로 실제 화교 배우 왕시명과 일본 배우 노지마 나오토를 캐스팅했다. 노지마 나오토는 윤제균 감독의 영화 <영웅>에서 같은 역할로 열연한 바 있어 화제가 됐다. 안중근의 뤼순 감옥 구금 당시 간수였던 치바 도시치는 안중근을 흠모해 고뇌했고, 안중근은 사형집행 전 유묵(생전에 남긴 글이나 그림)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다)’을 남겨 그를 다독였다고 전해진다. 실제 치바 도시치는 안중근 순국 후 유묵과 함께 제를 지내고 자신의 사후에도 이어지도록 유언했다고 한다. 더블 캐스트인 왕웨이 역과 달리 치바 역은 원 캐스트이다. 배우 노지마 나오토는 공연이 올라가는 3개월 가까운 시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안중근의 순국 장면을 보필하고 끝까지 지켜보는 치바 연기를 반복한다. 안중근 역할의 세 배우들(정성화·양준모·민우혁)과 함께하는 치바의 ‘동양평화’ 이중창과 연이은 감정선을 볼 때마다 필자는 가슴이 벅차오른다. 매일 치바로 살아가는 노지마 나오토 배우와 뮤지컬 <영웅>의 창작·출연진들, 그리고 이를 마주하며 매일 공연장을 찾는 관객들의 존재 자체가 소소한 ‘동양평화’의 순간들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안중근 소원, 대학로에서 실현” 국내 첫 중국 창작 라이센스 뮤지컬인 <접변>(이기쁨 연출, 한재은 윤색, 이진욱 편곡·음악, 신선호 안무)은 아시아 문화예술계의 화합과 연대를 통해 제작된 작품이다. 중국 제작사인 포커스테이지 첫 한국 진출작으로 국내 중견 제작사 네버엔딩플레이와 협력해 대학로에 연착륙한 웰메이드 작품이다. 1930년대 말 중화민국 시대 상해를 배경으로 홍콩과 만주를 넘나드는 밀정을 통해 일제강점기 동아시아의 정세를 스릴러 형식으로 담아낸 여성 중심 서사다. 당시 시대상을 그대로 재현한 프로덕션 디자인과 중국풍의 넘버들이 밀도 높은 서사로 전개된다. 포커스테이지는 이를 위해 한국에 지사를 설립하고 네버엔딩플레이 등 한국 제작사들과 협력을 확대해 범아시아 콘텐츠 창작에 주력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안중근은 순국 직전까지 “나의 행위는 동양평화를 위해서다. 한·일 국민이 협력하고 평화를 도모하기를 희망한다”고 유언했다. 그의 유일한 소원은 2024년 한국 대학로를 비롯한 공연장에서 아시아 각국의 작품과 창작진, 관객들의 화합과 참여로 소소하게 실현되는 중이다. 뮤지컬 <영웅>은 8월 11일, <접변>은 9월 22일, <빨래>는 12월 29일까지 상연한다. 뮤지컬 <영웅> 공연실황 영화도 전국 메가박스에서 오는 8월 21일 개봉한다.
- 이주영의 연뮤 덕질기
- 세계평화연합, 2024 국제지도자회의 개최(2024. 05. 08 06:00)
- 2024. 05. 08 06:00 사회
- 종교지도자 등 참석 세계평화와 한반도 통일 논의 세계평화연합은 지난 4월 22일 경기도 가평 청심국제청소년수련원에서 ‘2024 국제지도자회의’를 열었다. 세계평화연합제공 세계평화연합(Universal Peace Federation)은 지난 4월 22일 경기도 가평군 청심국제청소년수련원에서 ‘종교화합과 한반도 평화통일’을 주제로 ‘2024 국제지도자회의’를 개최했다고 밝혔다. 세계평화연합은 세계평화가정연합 문선명·한학자 총재가 2005년 창설한 비정부기구(NGO)다. 올해 국제지도자회의(International Leadership Conference)에서는 각국 종교 지도자와 전문가들이 모여 세계평화, 한반도 통일 문제를 논의했다. 양창식 UPF 세계의장, 에드워드 바넷 미국 대은혜가정사역교회(Greater Grace Family Ministries Church) 주교, 요하네스 은당가 짐바브웨 사도기독교평의회(ACCZ) 대주교, 한국불교태고종 총무원장 상진 스님, 문연아 선학학원 이사장, 송용천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세계회장, 황선조 남북통일운동국민연합 의장, 에크낫 다칼 네팔 연방의회 하원의원 등 700여명이 참석했다. 이날 행사는 문상필 UPF 신통일정책연구소장의 사회로 개회선언, 양창식 의장의 대회사, 바넷 주교·상진 스님·송용천 회장·데미안 던클리 가정연합 미국회장의 축사, 은당가 대주교·다칼 의원·황선조 의장의 기조연설, 통일의 노래 순으로 진행됐다. 양 의장은 대회사에서 “내년이면 한반도는 광복 80주년을 맞지만, 광복과 해방의 진정한 완성은 평화로운 통일을 이루는 그날”이라며 “과거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에 주요 종단 지도자들이 하나 돼 앞장섰던 것처럼 통일운동의 선두에도 초종교적으로 영적 지도자들이 앞장서 달라”고 말했다. 이어 “항구적 평화 세계로서 신 통일세계의 출발점은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 있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부터”라며 “한반도에서부터 제시된 상생과 공존, 화합과 번영의 참된 평화 비전이 사회통합과 한반도 통일은 물론 장차 평화 세계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바넷 주교는 축사에서 “우리는 영적인 지도자로서 난국을 해결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으며, 우리의 목표는 전 세계를 바꾸는 것이며, 바로 이 순간부터 함께 바꾸는 것”이라면서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평화의 메시지를 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상진 스님은 “불교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모든 존재가 하나라는 깊은 교훈을 받아 결국 궁극으로 통하는 길은 한 길이고, 모든 종교가 나가는 길도 한 길”이라면서 “이 길은 어렵고 길지만, 우리 종교인들이 함께 걸어가며 한반도의 미래를 밝힐 것”이라고 말했다. 송용천 회장은 “앞으로 더 나은 평화로운 미래와 한반도 평화를 열어 갈 수 있도록 여러분의 경험과 통찰력과 깊이 있는 조언을 부탁드린다”라면서 “진심으로 본 대회가 전 세계 인류가 염원하는 평화 세계를 향한 비전을 제시하는 빛과 소금이 되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은당가 대주교는 기조연설에서 “비록 종교들이 신에 대한 다른 이름과 다른 방식으로 신을 섬긴다 해도 각 종교의 중심 존재는 오직 한 분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목적은 언제나 온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지 특정 인종, 국가, 교단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어 “종교화합이 세계평화를 위한 필수적인 조건임을 인정하고, 종교라는 이름으로 더 이상의 범죄가 일어나지 않게 하자”면서 “폭력과 가난, 부도덕, 가정의 붕괴를 끝내고, 모든 인류를 위해 지속적인 평화의 세계를 건설하자”라고 말했다. 황선조 의장은 “지속가능한 세계평화는 인간의 힘이 아닌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가능하며, 지속가능한 평화의 비전은 세계시민 행복공동체”라면서 “구체적인 성과를 만들 수 있는 전략으로는 하나님주의 가치관, 자연과의 지속가능한 평화공존, 인공지능 AI와 사람의 공생공존 파트너십, 남북통일을 통한 신통일한국 건설 그리고 글로벌 거버넌스로서 세계시민이 하나님주의를 바탕으로 평화운동을 실천해 ‘세계시민 행복공동체’의 비전이 꿈이 아닌 현실로 이루어지길 기원한다”고 말했다.
레이디경향(총 11 건 검색)
- 평화의 소녀상, 언제나 그 자리에
- 2016. 01. 28 16:43 화제
- 지난해 말 한·일 양국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최종 합의하면서 소녀상 이전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소녀상이 세워진 지도 어느덧 5년째. 소녀상이 갖는 의미를 다시 한번 돌아본다. 위안부 협상이 불러온 문제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공관의 안녕·위엄의 유지라는 관점에서 우려하고 있는 점을 인지하고, 한국 정부로서도 가능한 대응 방향에 대해 관련 단체와 협의 등을 통해 적절히 해결되도록 노력한다.” 한·일 양국 정부는 지난해 12월 28일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과 관련해 이렇게 합의했다. 이 과정에서 위안부 피해 당사자들에게 이해를 구하지도 않았고,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 문제도 논의되지 않아 거센 비판 여론이 형성됐다.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는 이날 열린 기자회견에서 “도쿄 한복판에 소녀상을 세워도, ‘저희가 잘못했습니다’라고 해도 시원찮을 텐데 건방지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동안 일본 정부는 소녀상을 철거할 것을 꾸준히 한국 정부에 요구해왔다. 한국 정부는 이런 요구에 대해 ‘소녀상은 민간이 자발적으로 설치한 것이다’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하지만 정작 합의문에는 소녀상 문제가 언급됐다. 일본 측은 소녀상 이전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은 협상을 타결한 뒤 일본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소녀상에 대해 “적절히 이전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현재 일본 정부는 ‘불가역적’, ‘최종적’이라는 표현이 담긴 한·일 외교 장관 합의문을 방패 삼아 더 이상의 사죄와 반성은 필요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이 같은 상황에서도 합의문에 있는 내용이 전부라는 해명만 되풀이하고 있다. 1 2011. 12. 15. 수요집회 1,000회를 맞아 평화의 소녀상이 설치된 지 하루가 지난 날. 누군가가 목도리로 맨발을 감싸놓았다. 2 2011. 12. 26. 전국 곳곳에 한파 경보가 발령된 이날 소녀상도 털모자, 목도리, 담요로 중무장했다. 3 2012. 2. 13. 1970~80년대 청계천과 경기도 화성 등지에서 빈민 구제 활동을 벌였던 일본인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가 소녀상 앞에서 ‘울 밑에 선 봉선화’를 연주하고 있다. 4 2012. 1. 4. 2012년 첫 번째 집회에 나온 길원옥 할머니가 생각에 잠긴 채 소녀상을 바라보고 있다. 5 2012. 8. 29 경술국치일 102주년. 경찰관들이 일본의 우익 테러에 대비해 경계 근무를 서고 있다. 앞선 2012년 6월 일본 극우 정치인 스즈키 노부유키는 위안부 소녀상에 ‘말뚝테러’를 가했다. 당시 그는 소녀상에 ‘다케시마는 일본 영토’라고 적은 말뚝을 묶어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6 2013. 1. 2. 새해를 맞아 한복을 곱게 차려입었다. 7 2013. 9. 25. 수요집회에 참여한 학생들이 빈 의자 위에 올려놓은 화분.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 평화의 소녀상은 수요집회 1,000번째를 맞이한 2011년 12월 14일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건너편에 세워졌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이 계획했고, 김운성·김서경 작가 부부가 소녀상을 공동 작업했다. 소녀상 옆 돌바닥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다. “1992년 1월 8일부터 이곳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 시위가 2011년 12월 14일 1,000번째를 맞이함에 그 숭고한 정신과 역사를 잇고자 이 평화비를 세우다.”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의 과거사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수요집회가 열린다. 치마저고리를 입은 짧은 단발머리 소녀는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주먹을 움켜쥔 채 일본대사관을 바라보고 있다. 시민들은 날씨가 추워지면 소녀상에 목도리를 둘러주고, 비가 오면 우비를 입혀준다. 혹시나 손발이 시릴까 봐 핫팩이나 장갑, 신발을 갖다놓기도 한다. 이렇게 시민들의 각별한 애정을 받고 있는 소녀상은 높이 130cm로 생각보다 작다. 수요집회 현장에서는 많은 인파에 둘러싸여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이 작은 동상이 갖는 의미는 거대하다. 맨발 차림은 일본군 위안부들의 고단했던 생활을 보여준다. 발꿈치가 들려 있는 모습에는 고향에 돌아와서도 편히 정착하지 못한 할머니들의 설움이 담겼다. 소녀의 단발머리는 일본군이 댕기머리였던 위안부들의 머리를 강제로 잘라낸 것을 표현하고 있다. 거칠게 잘린 머리카락은 부모와 고향으로부터 강제로 단절됨을 상징한다. 꽉 쥔 주먹은 일본 정부의 진심 어린 사과를 받아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1 2013. 3. 2. 1066차 정기 수요집회가 열린 날. 비가 온 탓에 노란 우비를 입었다. 2 2014. 5. 7. 어버이날 하루 전. 소녀상의 두 손 위에 놓인 카네이션. 3 2015. 7. 9. 소녀상 아래 놓인 꽃신. 이날 열린 1186차 정기 수요집회는 고 최금선 할머니의 영정과 함께였다. 2016년 1월 현재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38명 가운데 생존자는 46명뿐이다. 4 2016. 1. 14.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한·일 협상안 폐기 대학생 대책위원회’ 소속 학생들이 한·일 위안부 협상을 규탄하는 문화제를 열고 밤샘 농성을 하고 있다. 왼쪽 어깨에 앉아 있는 작은 새는 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상징물이다. 세상을 떠난 할머니들과 현재의 우리를 이어주는 연결고리이기도 하다. 소녀 옆에 놓인 빈 의자는 돌아가신 할머니들의 의자이며 동시에 우리가 앉아 그들의 아픔을 공감하는 자리다. 소녀상의 그림자는 할머니의 형상을 띠고 있는데, 이는 오랜 시간 풀리지 않는 한을 뜻한다. 그림자 안의 하얀 나비에는 돌아가신 할머니들이 다시 태어나 한을 풀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 있다. 소녀상 제작자인 김운성 작가는 소녀상 이전 문제가 불거진 데 대해 “(일본이) 타 국가의 조각품을 협상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것 자체가 이해되지 않는다”라며 “‘불가역적’이라고 표현하며 다시는 위안부 문제를 언급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소녀상 철거를 요구하는 것은 진정한 사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진심으로 사죄한다면 소녀상을 그대로 두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글 / 노도현 기자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
- [일본 통신원 김민정이 만난 열두 명의 아이코]무대 위에서 비차별과 평화를 연기하는 연극배우 사사키 아이
- 2013. 12. 02 15:39 화제
- ‘아이코 시리즈’는 옆 나라 일본에 살고 있는 아이코(愛子)란 이름을 가진 여성들을 인터뷰하며 ‘여성이란, 여성의 삶이란 무엇인가’의 의미를 찾는 기획 기사다. 일본의 다양한 세대와 계층의 삶을 따라가보며 한국과의 차이와 공통점을 발견하고 그들을 통해 나의 삶을 되돌아본다. 이번 호에는 무대 위에서 늘 사회적 약자들을 대변해온 일본 연극배우 사사키 아이씨를 만났다. 늘 버려지고 핍박받는 사람들을 연기한 사사키 아이 지난 11월 초, 가네시로 가즈키의 자전적 소설 「GO」가 연극 무대에 올랐다. 극단 분카자(도쿄 기타구)의 사사키 아이(70) 대표는 “이 작품을 통해 재일동포를 생각하는 계기를 갖고 싶었다”라고 밝혔다. 극단 분카자는 1942년 사사키 대표의 양친인 연출가 고 사사키 다카시와 여배우 고 스즈키 미쓰에가 결성한, 무려 71년이나 된 원로 극단이다. 분카자는 오키나와와 홋카이도의 소수 민족이 겪는 불평등한 현실을 무대에 올려왔다. 일본 사회에서 잊힌 사람의 삶을 조명해온 극단이다. 극단 대표 사사키 아이는 NHK영화상 최우수 여우주연상, 일본 문화청 예술상 우수상, 홋카이도 구라시키 시민극장 여배우상, 기노구니야 연극상 등을 수상한 유명배우다. 무대 위에서 그녀는 가난한 농부의 딸, 짝사랑하던 청년을 전쟁으로 잃은 여인, 부족에게 버려진 노파 등 가난하고 힘없는 여성들을 대변하는 역을 연기해왔다. 무려 50여 년간 이 세상의 ‘약자’를 연기해온 배우의 속내를 살짝 들여다보았다. 부끄러움 많던 소녀, 배우가 되기까지 어릴 적 꿈이 배우였나요? 아니요. 의사가 되고 싶었어요. 부모님이 극단을 하고 계셔서 감히 제가 그 무대에 서리라곤 상상도 못했어요.. 초등학생 시절에 발레를 배웠어요. 발레 공연은 해봤는데, 연극 무대는 쑥스러웠어요. 어떻게 배우가 됐나요? 고등학교를 마치고 우연히 주변에서 연기 한번 해보라는 얘기를 듣고 시작했어요. 그런데 실제로 해보니까 정말 재미있었어요. 완벽한 무대를 만들기 위해 의기투합해 성실하게 노력하는 모습이 참 좋아 보였고, 그런 모습을 보면서 크게 감동을 받았죠. 처음엔 힘들었는데, 이런 고생이라면 사서라도 해야겠단 생각이 들 정도로 연극 무대의 매력에 푹 빠졌지요. 그 후 계속 연기를 해온 건가요? 네, 연극의 매력에 압도됐어요. 수많은 사람이 힘을 모아 감동을 생산하는 일이에요. 지금까지 맡은 배역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배역은 어떤 것인가요? 모두 기억에 생생히 남아요.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땅’이란 연극이었어요. 연극과 함께 TV 드라마로도 방영된 작품이에요. 메이지 시대의 가난한 소작농 가족 이야기로 1962년 작품이에요. 저는 소작농의 큰딸 역을 연기했어요. 열심히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차별을 받는 상황을 그렸죠. 당시에 인기가 굉장했지요? 네, 그 연극과 드라마를 본 뒤 팬이 돼주신 분들이 계세요. 그때 그분들이 계속 제 연극을 관람해주고 계시죠. 화려함은 전혀 없는 매우 소박한 연극이었는데, 박수가 끊이지 않을 정도로 반응이 좋았어요. 그때는 왜 그렇게 인기가 많은지 저는 잘 이해하지 못했죠. 당시 일본은 고도 경제성장기였어요. 그렇지만 여전히 못사는 사람도 많은 시절이었어요. 민주주의, 자본주의라고는 하지만 그 은혜를 입은 사람은 일부일 뿐이에요. 그 뒷면에 봉건주의가 자리해 있죠. 연극은 메이지 시대 이야기지만 그 연극을 보고, 당시 고도 경제성장기 일본의 단면으로 받아들인 관객이 많았던 거예요. 지금과 같은 상황이군요. 네, 안타깝게도. 늘 사회에서 배척당하는 약자를 연기해오셨는데, 어떤 이유에서인가요? 부모님이 1942년에 극단을 결성하신 뒤 일본 내 활동이 어려워져서 만주로 가셨어요. 이후 일본에 돌아온 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년이 지나서였어요. 전쟁이 끝나고 모든 가치관이 바뀐 현실을 눈앞에 두고 부모님은 보편적인 인생의 가치를 생각하신 거죠. 그러다 보니 사회의 약자에 관심을 갖게 됐고 연극을 통해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기 시작했어요. 그런 부모님의 영향으로 저도 사회의 저변에 있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펼쳐가게 된 거예요. 1943년 사사키 아이 대표가 태어난 해, 일본은 이미 패전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해 1월 뉴기니 섬에서 일본군은 전멸당했고, 과달카날 섬, 키스카 섬에서 차례차례 철수했으며, 미국의 공습은 점점 강도를 더해왔다. 그해 9월 우에노 동물원은 폭격으로 동물원으로서 제구실을 못하게 됐고 도망간 동물들이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칠까봐 맹수와 독사를 독살하고 위령제를 지냈다. 전쟁은 이미 끝을 보이고 있었다. 연극을 통해 한국과 두 손을 맞잡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패배로 끝난 뒤, 전쟁의 가해자였던 일본은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신이었던 일왕이 인간임을 인정했고, 적이었던 미국이 동맹국이 됐다. 아시아만 바라보던 일본이 미국을, 유럽을 동경하기 시작했다. 어제와는 다른 오늘이 펼쳐지는 가운데 극단 분카자는 급변하는 정세와 민심에 위화감과 괴리감을 느낀다. 일본 사회의 밑바닥을 사는 서민들을 주인공으로 사회의 현실을 조명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만주에 억류됐던 경험을 통해 전쟁을 주제로 한 연극도 적극적으로 상연했다. 1947년에는 우리 판소리 문학인 「춘향전」을 무대에 올렸다. 춘향 역은 분카자를 대표하는 배우이자 사사키 아이의 어머니인 스즈키 미쓰에가 맡았다. 사사키 아이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침략 전쟁에 대한 반성도 없고 만연하는 구미 문화 풍조를 걱정하던 아버지가 한국을 생각해 ‘춘향전’을 상연했다.” 아버지의 조수 중에 재일동포가 있었던 것도 ‘춘향전’을 택하는 계기가 됐다. 1947년에 어머니가 연기했던 춘향 역을 1972년에 맡으셨는데, 극단 30주년 창립행사로 ‘춘향전’을 상연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때는 일본이 한국을 잘 모르던 시기였어요. 한국을 제대로 소개하기 위해 ‘춘향전’을 상연하게 됐죠. 한국에 훌륭한 러브 스토리인 「춘향전」이 있음을 알리고 싶었고, 열녀의 이야기인 동시에 민중의 저항정신을 그리고 있다는 점도 어필하고 싶었어요. 변학도와 춘향의 대립은 탐관오리와 민중의 저항으로 읽을 수 있죠. 그 후 한국 관련 연극은 상연하지 않았는데, 오랜만에 올해 재일동포의 정체성을 그린 ‘GO’를 상연했습니다. 이번에 작품을 무대에 올린 소감은? 일본인들은 재일동포에 대해서 잘 모른 채 살고 있어요. 「GO」를 처음 읽었을 때 신세대 재일동포 소년의 삶을 이해하기 쉽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한국과 관련된 작품을 하고 싶었는데, ‘춘향전’ 이후로 못하다가 오랜만에 이 작품을 올렸죠. 관객 중에 “그동안 재일동포의 현실을 전혀 몰랐다”라는 분들이 많았어요. 그런 분들에게 재일동포에 대해 알릴 수 있어서 반가웠어요. ‘GO’의 주인공은 자신이 재일동포란 사실을 여자친구에게 밝히기를 꺼리는데, 재일동포가 자신의 민족정체성을 숨기고 살아야 하는 현실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일본인이 많이 미안해해야 합니다. 정치가가 전쟁의 책임을 지지 않고 사죄도 하지 않고 있어요. 그리고 한일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반한 시위며, 한국 차별 시위를 벌이고 있지요. ‘무지’는 차별의 근원입니다. 사사키 아이의 연극 스틸 사진들 오키나와 전투에 참여한 홋카이도의 소수 민족 아이누의 이야기를 그린 ‘은방울 떨어지는 주변에서-슈리 1945’. 눈먼 길거리 가수 이야기를 그린 ‘떠돌이 악사가 오지 않아’. 부족에게 버림받은 노파를 연기한 ‘두 명의 노파’. 춘향을 연기하는 사사키 아이. 1972년. ‘빨간 입술 지워지기 전에’의 한 장면. 지난 3월부터 8월까지 일본에서 무려 1백60건의 반한 시위가 있었다고 합니다. 또 일본 여당이 평화헌법을 개헌하려 하고 있으며 자위대 법안도 개정될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움직임은 어떻게 보시나요? 한마디로 걱정이에요. 제가 고등학생 시절에 일본은 ‘60년 안보투쟁’을 했고, 그 후 ‘70년 안보투쟁’도 있었어요. 젊은이들이 미일조약에 반대한 움직임이었지요. 일본이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변화해야 하는지 누구나가 토론을 하던 시절이었어요. 시위를 통해 정부에 반대를 하던 시절이었죠. 그런데 지금 일본의 평화헌법이 개정될지도 모르는데, 분위기가 무척 냉랭해요. 다시는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깨려고 하는데, 아무도 뜨거운 논쟁을 하지 않는 현실이 걱정이에요.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식민지로 삼았던 일본의 전쟁사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요? 반성하고 사죄해야 합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힘들고 피곤한 건 바로 우리 자신이에요. 그럼에도 그런 점을 가르치지 않았어요. 일왕에게 반대하면 벌을 받는다는 하나의 가치관만 강조해왔죠. 지금과 같은 시대에 일본이 다시 전쟁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발상입니다, 요즘 한일 관계가 썩 좋지 않은데 개선될 방법이 있을까요? 저는 젊었을 때 ‘한국’ 하면 김대중 납치사건부터 떠올렸어요. 그만큼 무서운 나라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실제로 가보고 나서 이미지가 크게 바뀌었죠. 되도록이면 서로가 친하게 지내고, 잘 모르는 부분을 이해하며, 마음을 전달해나가도록 노력해야죠. 사사키 아이란 인물을 통해 한국인이 일본인에 대해 갖고 있는 편견도 버릴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습니다. 전쟁 직후의 피폐함을 직접 체험했으며, 고도 경제성장과 1960, 70년대의 뜨거운 학생운동도 겪고 자란 일본 역사의 ‘산증인’ 사사키 아이는 과거 전쟁을 미화하고, 헌법을 개헌하려는 일본의 움직임에 따끔한 일침을 놓는다. 하지만 정치와는 별개로 양국의 교류는 계속돼야 한다는 게 그녀의 입장이다. “예술가라면 다른 예술가가 가진 좋은 점을 존중하고 본받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정치적으로 한일 관계가 악화되더라도 교류는 계속해야죠. 작은 터널을 뚫어서라도 교류합시다. 작은 힘이 모이면 큰 힘이 될 테니까요.” 두 아이의 엄마이자 배우로서의 삶 거의 50년이나 배우로 살아왔는데, 배우를 계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연극 자체의 매력이지요. 연극은 배움의 산물입니다. 하나의 역이 주어지면 그 역할을 위해 공부해야 할 것이 무척이나 많아요. 시대적 배경이나 인물의 직업에 따라 견학할 곳도 많고 취재도 해야 하고, 책도 읽어야 하지요. 그런 과정이 매우 즐거워요. 배우이자 극단의 대표인데, 두 가지 일을 병행하는 데 어려움은 없나요? 별로요. 극단의 일은 분업으로 하고 있어서 큰 어려움은 없어요. 저는 배우 일을 더 좋아하지만요. 배우를 하듯 경영을 했다면 저희 분카자가 더 부자 극단이 됐을 텐데 말이죠(웃음). 두 아이를 키우셨는데, 그러면서도 일을 놓지 않으셨죠? 임신 6개월까지는 일을 했고 출산 후 3개월 만에 무대로 돌아갔어요. 그렇게 키운 아이들이 이제는 성인이 됐고, 손주도 셋이나 된답니다. 육아와 자녀교육에 대한 노하우가 있다면요? 제가 춘향 역을 연기할 때 재일동포 선생님에게 한국무용을 배웠어요. 그분이 무용을 가르치러 오실 때 젖먹이 아이를 데려오셔서는 강습전에 우아하게 수유를 하셨어요. 강습 중에도 아이가 울면 “잠시 기다려요”라고 말씀하시고는 매우 자연스럽게 수유를 하셨어요. 그런데 그 선생님의 그런 자태가 아주 곱고 우아하고 당당했어요. 그분한테 배운 건 춤사위뿐만이 아니었어요. 아이를 키울 때 엄마들은 아이가 울까 주눅이 드는 경우가 많아요. 무엇보다 당당하게 아이를 키워야겠단 생각이 번득 들었어요. 어깨를 펴세요. 엄마란 이유로 주눅 들 필요는 없어요. 무려 70년 이상 된 원로 극단의 70세 현역 원로배우 사사키 아이 대표는 솔직하고 담백하게 그리고 현명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오키나와 사람들, 홋카이도 소수민족 아이누, 재일동포 등 비주류·소수의 이야기를 무대에 올려 관객들에게 생각할 기회를 주는 것이 그녀의 ‘업’이다. 일본이 잊어버렸거나 뚜껑을 덮어버린 과거의 침략 전쟁을 아파하고 미안해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더불어 전하고 싶어 한다. 양심과 의식을 가진 ‘어른’으로 꿋꿋하게 서 있는 사사키 대표를 보니, 마음이 훈훈하고 든든해진다. 독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지난 한 해 동안 귀중한 지면을 빌려 일본에 살고 있는 여인들의 이야기를 전해왔습니다. ‘사랑’이라는 뜻의 ‘아이코’ 혹은 ‘아이’란 이름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대학생도 있었고, 나이가 지긋한 화가에 동일본 대지진으로 남편을 잃고도 지진 피해자를 위해 고군분투한 간호사도 있었습니다. 각자의 삶에 최선을 다해 임하는 태도는 일본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습니다. ‘일본’이란 전제가 있었지만, 인터뷰를 통해 만나온 여성들의 삶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은 보편적인 삶이었습니다. 한일에 대해 이야기하면 ‘차이’부터 찾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차이’ 비교는 비교문화 연구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공통점’에도 눈을 돌려야 합니다. 모두가 제각각 각자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단 사실 말입니다. 취재에 응해준 12명의 모든 ‘아이코’에게 감사드리며, 극단 분카자의 지난여름 상연작 ‘은방울 떨어지는 주변에서-슈리 1945’의 팸플릿에 실린 아이누 인권운동가 와시야 사토의 시로 연재를 마무리합니다. 감사합니다. <■기획 / 이유진 기자 ■글 / 김민정(일본 통신원)>
- 김민정이 만난 열두 명의 아이코
- 제1세대 여성운동가 김정례 “제 생애 마지막 꿈은 남북 평화통일입니다”
- 2012. 12. 05 19:59 화제
- 여성에 대한 차별과 인권 신장은 여전히 여성계의 최대 화두다. 그만큼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인 분위기에 익숙해진 우리 사회에서 여성 인권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 그런데 1940년대부터 여성 계몽과 인권 신장을 위해 노력해온 사람이 있다. 최근 그 공로를 인정받으며 비추미여성대상 대상인 ‘해리상’을 수상한 김정례 한국여성유권자연맹 고문을 만났다. 비추미여성대상 해리상 수상 지난 10월 31일, 제12회 비추미여성대상 시상식이 열렸다. 비추미여성대상은 삼성생명공익재단이 주관하며 여성가족부가 후원하는 권위 있는 여성상으로, 여성의 사회적 역할 증진과 여성 문화 창달에 기여한 인사를 선발하고 격려하기 위해 제정된 상이다. 여기서 ‘비추미’는 해, 달, 별의 통칭으로 사회를 밝고 건강하게 비추는 사람을 의미한다. 수상자는 국내외 주요 기관과 전문 인사들로부터 후보자를 추천받아 별도의 심사위원회가 2개월에 걸쳐 현장 실사 등을 통해 결정된다. 올해 수상자는 해리상에 김정례 한국여성유권자연맹 고문, 달리상에 홀트일산복지타운 조병국 의사, 별리상에 노정혜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특별상에 서혜경 경희대 음악대학 교수이며, 각 부문별로 상금 3천만원과 상패가 수여됐다. 해리상을 수상한 김정례(85) 한국여성유권자연맹 고문은 이날 시상식에서 “이 상을 받게 돼서 영광스럽다”라면서 “상금은 평화통일을 위한 시금석으로 사용하겠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해리상은 여성의 지위 향상과 권익 신장에 기여한 사람에게 주어지는데, 김 고문은 제11대·12대 국회의원, 제20대 보건사회부 장관, 국무총리실 직속 여성정책심의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여성 차별 조항 개선에 노력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받았다. 시상식이 끝난 직후인 11월 초,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 위치한 김 고문의 자택을 찾았다. 잔디가 깔린 정원에 석류나무와 감나무를 심고, 다양한 종류의 장이 담긴 장독대를 손수 관리하며 여성계의 대모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김 고문. 그의 명륜동 집은 여성계 인사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아지트 같은 장소다. 김 고문은 자택을 방문한 기자에게 “비 오는 날에 찾아오느라 고생했다”라고 반갑게 웃으며 따뜻한 차 한 잔을 건넸다. 비추미여성대상 해리상 수상 축하 인사를 전하자 김 고문은 “영광스럽고 감사하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큰 상을 받은 것 같다”라면서 “앞으로도 다른 사람들에게 빛이 되라고 준 것 같아서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라고 겸손한 소감을 밝혔다. 차를 마시며 담소를 이어가던 김 고문은 담담하고 차분하게, 때론 진지하게 대한민국 1세대 여성운동가로서 녹록지 않았던 삶의 여정을 전했다. 법적으로 여성 차별 조항 개선에 앞장서 김 고문은 전라남도 담양의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났다. 집은 가난했지만 공부에 대한 욕심도 많았고, 성격 역시 매사에 도전적이고 진취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농촌에 있는 여성들은 대부분 못 배우고 가난해서 한평생 고생만 하는 것 같아 보였다. “제가 스무 살 초반이었으니까 광복 직후였어요. 제 눈에는 농촌 여성들이 힘들게 일하는 모습이 무척 안타깝고 불쌍하게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밤마다 여성들을 모아놓고 한글을 가르쳐주기 시작했죠. 무지했던 여성들이 한글을 익혀가는 모습을 보면서 뿌듯했고 보람을 느꼈어요. 그 일이 제가 여성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였어요.” 그는 그 후로 1년 동안 농촌 여성들의 계몽운동을 계속 이어갔다. 또 그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입바른 소리를 자주 해서 경찰서에 드나드는 일도 잦았다. 집에서 아버지는 “여자가 밖으로만 나돈다”라며 노발대발했고, 결국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로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일도 생겼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김 고문을 둘러싸고 “담양에 여장군이 한 명 나왔다”라는 소문이 돌면서 아버지의 화는 누그러졌고, 담양군 관계자들은 김 고문을 두고 “앞으로 담양을 대표하는 여성 지도자가 될것”이라며 옹호하기도 했다. 실제로 얼마 뒤 조선민족청년단(청년들의 수련을 위해 결성된 청년운동단체)에서 ‘교육을 받으러 왔으면 좋겠다’라는 제의를 받았다. “조선민족청년단의 슬로건이 마음에 들었어요. 국가지상, 민족지상, 비정치, 비군사, 비종교였거든요. 좌익과 우익을 따지지 않고, 서로 비판도 하지 않았죠. 이 나라 청년은 조국을 재건하기 위해 대한민국의 지도자로 성장을 해야 한다는 내용의 훈련이었어요. 당시 3백여 명의 여성들과 함께 훈련을 받았는데, 저희가 여성 1기였습니다.” 훈련을 마치고 담양으로 돌아온 그는 조선민족청년단 담양 지부를 결성하고, 담양군단부 여성 부장으로 활동했다. 이후 서울중앙단부 여성부 지방조직책을 맡았으나 1년 뒤 여자 청년단이 통합되면서 그 진행 과정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김 고문은 여자청년운동의 기틀을 확고히 했고, 국립여학도 중앙훈련소를 신설해 여군 창설의 기반도 다졌다. 또 1960년에는 국내 최초의 여성 주간지를 발행하는 여성주보사를 창설하고, 1969년에는 한국여성유권자연맹을 창립해 초대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여성의 정치 참여를 확대시키기 위해 주력했다. “처음에 한국여성유권자연맹을 창립했을 때의 취지는 여성의 참정권 행사를 제대로 하자는 것이었어요. 나라가 잘되기 위해서는 유권자가 깨어 있어야 한다는 계몽운동에 주안점을 뒀죠. 지금도 정치는 우리의 생활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한국여성유권자연맹은 여전히 사회정의를 바로 세우고, 올바른 국회의원을 뽑도록 계몽하고 지도하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여성유권자연맹은 여성들의 사회 진출을 돕는데도 큰 역할을 해왔다. 김 고문은 “한국여성유권자연맹에서 배출한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해 사회 곳곳에서 많이 노력하고 있다”라며 “그동안 장관 4명, 국회의원 6명, 대학총장 3명, 한국여성개발원장(현 한국여성정책연구원) 2명 등을 배출했다”라고 밝혔다. 김 고문은 민정당 소속으로 제11대·12대 국회의원과 국무위원 및 제20대 보건사회부 장관도 역임했다. 또 국무총리실 직속의 여성정책심의위원회 부위원장을 비롯해 1991년에는 한국여성정치연맹을 창립하고 1, 2대 총재를 지냈다. 현재는 한국여성유권자연맹 고문, 한국여성정치연맹 명예총재로 활동 중이다. 1 (사)한국여성유권자연맹 주최 남녀모두행복한세상만들기 행사. 2 취로사업장에 나온 할머니를 위로하는 김정례 여사. 3 1983년 4월 한국여성개발원 현판식 하는 날. 4 김정례 선거대책본부에 격려차 방문한 윤보선 전 대통령. 김 고문의 이 같은 활발한 정치활동은 여성이 정당한 발언권을 가지고 국정에서 주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이끌었고, 여성의 올바른 참정권 행사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 한국여성유권자연맹을 통해 여성 정치 지도자를 발굴·육성하며 여성의 정치의식을 향상시키도 했다. 김 고문의 가장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국회의원과 장관을 거치면서 법적, 제도적 분야부터 여성 차별 조항을 고쳐나가는 데 앞장섰다는 것이다. 우선 1980년 헌법시안에 ‘여성평등조항’을 삽입하는 데 큰 기여를 했고, 부모평등·부부평등·남녀평등 이념이 실현될 수 있도록 ‘가족법’ 개정 운동에 선봉으로 활동했다. 특히 보건사회부 장관 시절, 남녀차별 조항 개선, 근로환경 개선, 여성의 재취업을 위한 ‘재취업 특별법’도 추진하는 등 여성의 사회 진출 기반을 마련했다. 1983년에는 여성계의 오랜 염원이었던 한국여성개발원을 설립하고 청사를 마련해 오늘날의 한국여성정책연구원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기여했다. “제 인생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여성운동가의 모습이 아닌, 아내와 엄마로서 김정례 여사는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20대 초반부터 여성운동에 빠져 살아왔던 김 고문은 아예 결혼 생각이 없었다. 워낙 외부활동이 많은 터라 결혼한 뒤 가정에 소홀하게 될까봐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고향 사람이었던 남편이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김 고문에게 반해 “인생을 함께하고 싶다”라며 손을 내밀었다. “남편은 결혼 생각이 없던 저를 10년 동안 말없이 지켜줬어요. 그래서 결혼했는데, 하고 보니 잘한 것 같아요(웃음). 가정을 갖고 엄마가 돼보니, 여성의 입장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됐거든요.” 남편은 결혼 전부터 일본에서 사업을 해왔다. 때문에 결혼 뒤에도 어쩔 수 없이 일본에서 머무는 시간이 많았다. 그렇게 한평생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김 고문과 아들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뒷바라지를 해준 남편 故 윤재수씨. 일과 가정밖에 모르던 남편은 19년 전, 지병이 악화되면서 세상을 떠났다. 남편은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지금의 명륜동 자택을 직접 지었다고 한다. 현재 47세인 아들은 안정된 직장을 다니다가 그만두고 사업을 준비 중이다. 김 고문은 어떤 공식석상이든 한복을 즐겨 입는 것으로 유명하다. 20대 초반에는 활동성 때문에 바지를 자주 입었는데, 약혼식 때 우연히 한복을 입어본 뒤 한복의 아름다움에 반해 그 뒤로는 거의 한복을 입는 편이다. “남자든 여자든 한복을 입으면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한국적인 정서도 느껴지고요. 그래서 공식석상에서는 무조건 한복을 입으려고 노력합니다. 여성계 인사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한복을 즐겨 입어서 한국의 미를 알리는 데 앞장섰으면 좋겠어요.” 김 고문을 포함해 국내외 여성계 인사들이 오랫동안 여성의 권익을 위해 노력해온 덕분에 지금은 여성의 정치 참여도와 의식수준이 매우 높아졌다. 김 고문 역시 그렇게 느끼고 있을까. “제가 여성운동을 시작했던 건 시대적인 분위기도 강하게 작용했어요. 오랜 시간 여성의 정치의식과 사회의식을 높이고, 모든 분야에 주인의식을 가지고 참여하도록 계몽하는 데 많은 역할을 했다고 자부합니다. 물론 다른 여성단체들도 많은 활동을 해왔습니다. 지금은 여성의 지위가 많이 향상됐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김 고문은 “앞으로가 더욱 중요하다”라고 강조한다. 정보화 시대에는 여성의 역할이 지식이나 수준이 높아졌다고 해서 그걸로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21세기는 남녀가 함께 사회 참여에 앞장서고,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돼야 합니다. 여성이 주최자가 된 만큼 사회와 국가 발전은 물론 경제 발전에도 실질적인 역할을 해야 합니다.” 김 고문이 생각하는 여성의 남다른 경쟁력은 바로 ‘모성애’다. 모성애를 바탕으로 한 여성 특유의 친화력과 부드러운 정서는 남성에게 없는 여성만이 가진 장점이기 때문이다. 그는 여성의 이런 장점이 인류의 평화를 이룩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현재 여성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바로 여성의 높아진 의식수준에 발맞춰 과거보다 더욱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 “과거에는 남성들에게 가려져 기를 못 펴고 여성운동을 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여성들이 가진 자질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돼 있고, 또 여성의 지식수준도 매우 높아져 충분히 자질을 갖췄어요. 때문에 여성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적극적으로 여성의 사회 참여를 이끌어야 하고, 성 차별 없이 사회의 일꾼을 선발해야 된다는 것을 주장해야 합니다.” 올해 85세인 김 고문의 꿈은 ‘남북 평화통일’이다. 젊었을 때는 살아 있는 동안에 통일 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도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으니 답답할 뿐이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김 고문이 직접 ‘통일’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다고 한다. “비추미여성대상을 받고 제가 달라진 점이 있어요. 해리상이 저에게 세상에 도움이 되라고 채찍질을 하는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죽을 날만 기다리지는 않을 작정입니다. 비추미여성대상의 상금 3천만원 역시 저의 염원인 통일운동을 하는 데 가치 있게 쓰고 싶어요. 제 인생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글 / 김민주 기자 ■사진 / 원상희 ■사진 제공 / 김정례>
- [길 떠나는 길]에게 블루에 뜬 평화와 낭만 ‘그리스 산토리니’
- 2008. 03. 07 재테크
- 요즘 여행 잡지마다 다루는 곳이 있습니다. 절벽 위 하얀 교회 너머로 푸른 바다가 펼쳐지는 곳, 바로 그리스 산토리니죠. 사진만 봐도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산토리니는 세계적으로 이름난 허니문 여행지입니다. 사실 국내에 소개된 지도 꽤 오래전이죠. 포카리스웨트 광고의 배경이 됐던 하얀 마을 기억하시죠? 바로 산토리니의 이아 마을입니다. 이아 마을에서의 허니문 산토리니는 겨울 여행지로는 ‘꽝’입니다. 지중해의 겨울 날씨는 변덕스럽죠. 바람이 불고, 폭풍우도 잦습니다. 산토리니는 겨울에 가봐야 아무런 묘미도 느끼지 못해요. 산토리니 사람들도 겨울엔 상가 문을 닫고 휴가를 떠나버립니다. 결국 가장 좋은 시기는 5월에서 10월까지죠. 이때는 비도 오지 않고 쾌청하죠. 바다는 하늘처럼 맑고, 하늘은 바다처럼 푸릅니다. 지금부터 예약을 준비해야 산토리니에 방을 잡을 수 있습니다. 허니문 시즌을 앞두고 어딜 갈까 고민하는 여행자라면 절대 후회 안 합니다. 산토리니 앞바다를 에게해라고 합니다. 에게해는 문명의 바다죠. 수많은 문명들이 에게해에서 탄생했습니다. 이오니아인, 그리스인, 시실리아인, 미노스인 등이 바닷가와 섬에 도시를 세우고 수천 년 역사를 이어왔습니다. 일본의 저널리스트 다치바나 다카시는 에게해를 다녀온 뒤 「에게해 영원회귀의 바다」란 책까지 썼습니다. 서두가 길었죠. 그럼 에게해의 산토리니로 날아가 봅시다. 그리스 아테네에서 비행기로 가는 방법과 배로 가는 방법 두 가지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신혼 여행객들은 한나절 이상 걸리는 유람선보다 비행기가 낫겠다 싶군요. 비행시간은 딱 50분입니다. 아테네 공항에서 받은 티켓을 보니 산토리니를 가겠다고 했는데 목적지가 티라(Thira)라고 돼 있습니다. 처음엔 잘못됐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산토리니의 옛 이름이자 정식 명칭이랍니다. 산토리니에서 가장 번화한 곳은 피라 마을인데 운치는 이아 마을이 좋습니다. 신혼여행이라면 이아 마을로 갈 것을 강추합니다. 놀기 좋아한다면 피라 마을도 좋죠. 카티키에스 호텔에 묵었습니다. 스몰 럭셔리 클럽의 호텔로 최고급이죠. 호텔 객실 문을 열면 절벽 앞에 수영장이 있고, 그 너머로 에게해가 내려다보이는 호텔이죠. 호텔은 게스트가 아닌 사람들은 출입 금지입니다. 산토리니의 호텔들은 절벽에 있고, 굴을 뚫어 만들었기 때문에 호화스럽지는 않지만 묘한 아늑함이 있습니다. 어떤 객실은 과거의 마구간을 개조했고, 어떤 객실은 창고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창이 작지만 토굴 같아서 여름에도 시원합니다. 이튿날 아침부터 카메라 하나 들쳐 메고 마을로 나갔습니다. 마을은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로 아침부터 붐빕니다. 오전 10시엔 지중해 크루즈가 여행객들을 또다시 부려놓습니다. 이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시간은 얼추 점심 무렵이죠. 푸른 바다와 하얀 집에 마음을 맡기고 여행 코스는 어디로 잡느냐구요? 그저 골목길을 헤집고 다니는 게 투어입니다. 아침 해에 비친 마을은 환상적입니다. 세상에…, 흰색이 그렇게 매력적일 수 있을까요? 지중해의 햇살이 하얀 집에 부서져 눈이 부십니다. 이아 마을 서너 번째 골목길 귀퉁이에서 자그마한 교회가 보였죠. 산토리니 포스터에 단골로 등장하는 바로 그 교회와 닮은…. 사실 포스터에 나온 교회가 어디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순 없습니다. 걸어서 20분 거리인 길쭉한 이아 마을에 교회만 79개나 되니까요. 절벽에 집을 짓다 보니 땅이 부족하고, 큰 교회도 세울 수 없었답니다. 대신 작은 교회가 여러 개 생긴 거죠. 심지어는 방 한 칸 크기의 작은 교회까지 있다네요. 산토리니에선 교회와 하얀 집뿐 아니라 대문도 아름답습니다. 바다로 향하는 절벽에 달랑 대문 하나만 달려 있는 집을 보면 가슴이 쿵쾅쿵쾅 뜁니다. 그저 하얀 집들과 푸른 바다가 좋습니다. 산토리니를 색으로 표현하면 블루와 화이트. 바다는 푸르고, 집은 하얗습니다. 바다는 에게 블루(Aegean Blue). 에게해 바다 빛은 다른 바다보다 더 짙푸릅니다. 검정이 배여 무거운 청색이 아니라, 깊고 짙되 반짝거리는 가벼운 청색입니다. 먹물 낀 푸른 바다는 무섭고 섬뜩하지만 에게 블루는 따뜻하고 화사합니다. 작은 카페에 들어가 앉았습니다. 느린 템포로 편곡된 ‘Lean on Me’가 흘러나오는 카페에선, 연인들이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물론 거리에서도 연인들의 웃음소리는 좁은 골목길을 굴러다닙니다. 길에서 만난 여인은 대뜸 “여자친구는 어디 있느냐”고 물었죠. 거리에서 만난 미국인 커플은 ‘허니무닝’이라고 했고, 지중해 유람선이 부려놓은 관광객들도 죄다 커플이었죠. 산토리니 관광객은 연인이나 부부들이 대부분입니다. 타히티의 보라보라 섬과 비슷하죠. 혼자 가면 외롭습니다. 카페 주인에게 물었죠. “왜 절벽에다 집을 지었을까요?`” “옛날 해적들이 많이 출몰했어요. 적이 오는지 빨리 알아차리려면 산꼭대기에 집이 있는 게 나았나 봅니다.” 그래서 산토리니 피라 마을은 부두에서 마을까지 5백66계단, 이아 마을은 2백14계단 혹은 2백86계단을 올라야 합니다. 여행자를 위한 노새를 타고 마을에 오르는 투어 코스가 있습니다. “왜 집들이 하얀색이죠?” “법적으로 하얀색을 칠해야 해요.” “지중해가 덥잖아요. 빛을 흡수하는 검은색은 더 힘들 거예요.” “터키가 강제 점령했을 때 저항의 의미로 하얀색 십자가를 그렸거든요….” 마을 주민들의 설명은 제각각이었지만 수천 년을 이어온 전통이라고 합니다.산토리니의 석양에 사랑의 맹세 낮 12시쯤이면 관광객들이 일부 빠집니다. 유람선을 타고 온 관광객들이 배로 돌아가거나 피라 마을로 건너가면 이아 마을은 조금 한가해지죠. 이때는 바에서 맥주도 한 잔 하고, 기념품도 사러 다닐 수 있습니다. 잘 만든 마리오네트 인형도 귀엽습니다. 마을 중간쯤에 있는 반지하 서점 ‘아틀란티스’에도 꼭 가보세요. 딱 하나뿐인 서점이니 금방 눈에 띌 겁니다. 토굴 같은 책방에는 산토리니의 옛 모습을 볼 수 있는 사진집이 있죠. 1930년대의 흑백사진을 구경해도 재밌죠. 벽에 선반을 달아 책을 전시해놓았으니 단박에 알아보실 겁니다. 사람들이 뜸해지면 개나 고양이와 놀아도 됩니다. 순하디순한 개들은 관광객을 쫓아다니며 놀아달라고 장난질을 해댑니다. 어떤 놈은 지붕 위에 올라가 낮잠을 잡니다. 산토리니의 오전 여행에 제목을 붙인다면 ‘평화’ 정도로 해놓으면 딱입니다. 오후 5시쯤이면 이아 마을은 다시 북적입니다. 이번엔 피라 마을의 여행자들이 이아 마을로 노을 구경을 옵니다. 사실 노을보다 노을에 비낀 마을이 화려합니다. 수많은 여행자들이 지붕 위에, 난간 위에, 절벽 위에, 카페에 앉아서 에게해로 떨어지는 햇덩이에게 말을 겁니다. “오늘 이 여자와, 이 남자와 평생을 이어가게 해주세요.” 이런 사랑의 주문을 왼다고 상상해보세요. 그리고 연인과 가벼운 키스…, 로맨틱하지 않을까요. 해가 저물면 전등에 반사된 하얀 집과 교회가 파스텔 그림처럼 은은합니다. 집들이 하얀색이다 보니 연한 불빛에도 마치 파스텔톤으로 빛을 반사합니다. 그래서 더욱 묘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피라 마을도 독특한 매력이 있습니다. 피라 마을은 번화가라고 보면 됩니다. 골목골목마다 크고 작은 숍들이 가득하죠. 쇼핑하기엔 딱입니다. 피라 마을도 절벽 위에 호텔들이 붙어 있고, 식당은 훨씬 더 많습니다. 바다를 보면서 식사를 할 수 있는 매력적인 곳이죠. 피라 마을을 계속 거슬러 올라가봤습니다. 에게해를 바라보고 있는 단독주택 모양의 집도 많고 작고 예쁜 호텔들도 꽤 됩니다. 다만 차들이 다닐 수 없는 길이 대부분이죠. 물론 뒷길이 있긴 하지만 제법 돌아야 하는 모양입니다. 피라 마을은 바 순례를 해도 될 듯합니다. 이아 마을보다 더 떠들썩해서 외국에서 온 친구들과 사귀기에도 좋겠죠. 아니면 유람선을 타고 한나절 화산섬을 돌아도 될 듯합니다. 아 참, 고대의 산토리니는 지금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바로 잃어버린 아틀란티스의 전설이 깃든 곳이죠. 산토리니는 BC 3500년 화산 폭발로 섬 가운데가 물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BC 1500년 화산 폭발 때는 파도 높이가 210m. 아프리카 해안까지 파도가 휩쓸었답니다. 말하자면, 거대한 쓰나미가 도시를 없애버린 거죠. 한때는 원형 섬이었는데 초승달 모양으로 변했습니다. 잘려나간 절벽 위에 하얀 집들이 서 있죠. 20세기 초에도 대지진이 일어나 3분의 1 정도가 파괴됐답니다. 산토리니는 에게해에 떠 있는 사랑의 유람선입니다. 연인들의 섬이기도 하죠. 수천 년 역사를 지닌 이 섬에 찾아온 전 세계 각국의 연인들이 사랑의 맹세를 합니다. 만년을 이어온 저 푸른 바다처럼 변치 말자고, 저 하얀 집들처럼 맑고 깨끗하게 살자고 말입니다. ▶여행 길잡이예약을 서두르는 게 좋습니다. 산토리니는 ‘무조건’ 햇살 좋을 때 가야 합니다. 5∼10월까지가 성수기. 직항 편은 없죠. 유럽(프랑크푸르트, 암스테르담, 파리, 로마, 이스탄불)을 거치거나 두바이 등을 거쳐서 갑니다. 아테네공항에서 산토리니까지는 비행기로 50분, 쾌속선으로도 최소 4시간 이상 걸립니다. 산토리니 포인트는 크게 두 곳. 포카리스웨트 CF로 유명한 이아 마을이 사진 찍기 좋습니다. 일몰 포인트로도 유명합니다. 도심인 피라 마을은 골목을 누비며 쇼핑하기 좋습니다. 두 마을 중 하나에 숙소를 잡고 하루는 이아 마을, 하루는 피라 마을을 샅샅이 훑는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화산섬 한나절 투어는 25유로 정도. 현지 버스비는 3∼5유로. 버스가 많지 않습니다. 스쿠터를 하루 빌리는 데는 15∼25유로. 렌터카는 35유로(비수기)∼55유로. 렌터카는 대부분 수동입니다. 택시는 공항∼피라 마을(6㎞)이 10∼15유로로 비싼 편이죠. 이오스여행사(02-511-1584)가 산토리니 관광청을 대행하고 있습니다. 산토리니에만 연간 1천5백∼2천 명을 보내는 최다 송출 여행사랍니다. 이 밖에 대형 여행사에서도 산토리니 상품을 판매합니다. ■ 글&사진 / 최병준 기자(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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