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총 379 건 검색)
- 동해 산란계 농장서 조류인플루엔자 감염 의심 닭 폐사···강원도 차단 방역 총력
- 2024. 10. 30 14:34사회
- ... 제공 강원 동해시의 산란계 농장에서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에 걸린 것으로 의심되는 닭이 폐사해 가축 방역 당국이 긴급 방역 활동에 돌입했다. 강원도는 지난 29일 오전 9시쯤 동해시의 한 산란계...
- 농장강원도산란계조류인플루엔자동해시
- ‘웃는 고래’ 상괭이 등 해양보호생물, 불법 포획 등으로 5년간 5000여마리 폐사
- 2024. 10. 02 09:22경제
- ... 할 가치가 높은 해양생물을 해양보호생물로 지정해 포획과 유통 등을 제한하고 있다. 이 중 가장 많이 폐사한 생물은 ‘웃는 고래’로 불리는 토종 돌고래 상괭이다. 지난 5년간 폐사한 개체는 3839마리로...
- 해양보호생물폐사상괭이고래
- [르포]“대목은 무슨, 매출이 절반도 안 돼유”…추석 앞두고 폭염·어류 집단 폐사에 상인들 ‘발동동’
- 2024. 09. 12 14:23경제
- ... 방문객들의 발길이 끊겨 한산하다. 강정의 기자 올 여름 고수온 현상으로 양식 어류가 집단 폐사하고 폭염이 오래 지속되면서 추석을 앞둔 수산시장 상인들의 근심은 깊어지고 있다. 수요에 못 미치는...
- 추석폐사대목가격폭염전어어류집단
- “어류 638만여마리 폐사”…충남, ‘특별재난지역 선포’ 촉구
- 2024. 09. 10 21:46경제
- ... 말한다. 고수온이 지속될 경우 어류는 산소부족과 수온쇼크, 생리기능 저하, 면역력 약화 등으로 폐사하게 된다. 충남도에 따르면 지난 5일까지 태안과 보령, 서산 등 도내 어가에서 키우던 조피볼락...
- 충남피해촉구폐사역대어류
스포츠경향(총 32 건 검색)
- [종합] 아웃사이더, 천만원대 악어 방치·폐사 의혹에 사과 “관리의 부족함…분양자에 사과”
- 2020. 09. 10 10:07 연예
- 아웃사이더 SNS래퍼 아웃사이더가 분양 받은 악어의 방치 및 폐사 의혹에 인정하며 사과했다. 10일 아웃사이더는 자신의 SNS를 통해 “수년간 양서파충류 협회 홍보대사로 활동하면서 더 많은 분들에게 파충류를 알리는 역할을 해온 제가, 관리의 부족함으로 인해 소중한 생명을 떠나보낸 사실에 대해서 책임을 통감합니다”라며 자신이 분양 받은 악어 ‘가또’의 폐사에 사과문을 게재했다. 그는 악어를 분양해준 유명 파충류 유튜버 ‘다흑님’에 대해서는 “좋은 환경에서 키워달라고 믿고 가또를 무료 분양해주신 다흑님께도 직접 찾아뵙고 진심어린 사과의 말씀을 드렸습니다”라고 전했다. 이어 “저 역시 너무 슬프고 안타까웠지만, 직접 찾아뵙고 말씀을 전달했어야 했는데 갑자기 닥친 코로나로 인해 저희 매장이 한 달 이상의 영업 중단과 직원의 대폭 축소 등 여러 힘든 상황이 맞물리면서 그러하지 못한 점 또한 제 큰 불찰임을 인정합니다”라며 분양자에게 빠르게 연락하지 못한 점에 대해 사과했다. 아웃사이더가 분양 받은 악어 ‘가또’. 아웃사이더 인스타그램앞서 파충류 유튜버 ‘다흑님’은 자신의 SNS를 통해 “아웃사이더 대표님께 공동소유로 사육을 부탁드렸으나 개체가 폐사하였고 관련하여 연락을 못받았던것이 논쟁의 이유였습니다”라며 악어 가또의 분양 상황을 설명하는 글을 게재했다. 다흑님은 “가장 논란이된 제가 맡겼던 악어의 폐사와 관련하여 원인을묻자 ‘거북이가 먹었는데요?’ 라는 말은 아웃사이더 본인이 아닌 직원분께서 말씀주신 내용이었다”면서 “실제로 먹힌 것은 잘못된거고 먹힌건 아니었다고합니다”라고 아웃사이더가 자신의 거북이와 악어를 합사시켜 폐사에 이렀다는 점에 해명했다. 이에 아웃사이더는 다흑님과 직접 만나 사과를 전했으며 “더 이상의 억측과 무분별한 비방의 글들이 양산되는 것은 무엇보다 가또와 서로에게 다시 한 번 더 큰 상처가 됨을 인지하고 가또를 좋은 곳으로 떠나보내주기로 이야기했습니다”고 덧붙였다. 한편 아웃사이더는 방송 프로그램에서 파충류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드러내며 ‘파충류 매니아’로 알려졌다. 현재 그는 파충류 홍보대사를 활동하고 있다.
- 제주 양돈장에서 불, 돼지 수천마리 폐사…샌드위치 패널 화재 키워
- 2020. 05. 05 08:55 사회
- 4일 오후 제주 서귀포시에 있는 한 양돈장에서 불이 나 서귀포소방서 등 소방당국이 진화하고 있다. 연합뉴스제주도의 한 양돈장에서 불이 나 소방 당국이 9시간 가까이 진화작업을 벌였다. 돈사 내 돼지 수천 마리가 폐사하는 피해가 발생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불은 4일 오후 8시 30분께 제주 서귀포시 대포동에 있는 한 양돈장에서 발생했다. 서귀포소방서는 대응 1단계를 발령해 화재 진압에 나서 오후 11시 31분께 초진이 이뤄졌다. 불은 자정을 넘겨 최초 신고 시각 이후 8시간 40여분이 지난 5일 오전 5시 11분께 모두 꺼졌다. 서귀포소방서는 소방과 경찰, 의소대 등 총 165명과 장비 24대를 동원해 진화작업을 벌였다. 이 화재로 다행히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양돈장 돈사 1개 동 복층 구조의 상층부가 전소했다. 이 양돈장은 3400㎡ 규모의 돈사 2개 동이 복층으로 있어 구조가 복잡하고 샌드위치 패널로 돼 화재 피해가 커진 것으로 소방 당국은 추정했다. 불이 난 돈사에서는 총 6000여 마리의 돼지를 사육하고 있다. 소방 당국은 수천 마리가 폐사하는 등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보고 정확한 시설 피해 및 돼지 폐사 피해를 조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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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천 야생멧돼지 폐사체 1개체서 ASF 바이러스…총 390건
- 2020. 03. 18 20:20 생활
- 지난해 경기도 연천군 내 비무장지대(DMZ)에서 발견된 야생멧돼지 폐사체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ASF) 바이러스가 검출됐다. 환경부 제공.환경부 소속 국립환경과학원은 경기 연천군 왕징면 민간인 출입통제선 안에서 발견된 멧돼지 폐사체 1개체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ASF) 바이러스가 검출됐다고 18일 밝혔다. 야생 멧돼지 ASF 확진은 이로써 390건으로 늘었다. 연천에서는 138건이 됐다. 양성 폐사체는 17일 확진된 폐사체 발견 지점에서 30m 떨어진 곳에서 나왔다. 환경과학원 관계자는 “인근 지역에 감염 폐사체가 더 나올 수 있어 수색을 강화하겠다”고 전했다.
- 연천 야생멧돼지 폐사체서 ASF 1건 추가 확진…총 229건
- 2020. 02. 19 20:59 생활
- 멧돼지 폐사체 모습을 담은 자료사진. 환경부 제공.환경부 소속 국립환경과학원은 경기 연천군 왕징면의 민간인 출입통제선(민통선) 안에서 발견된 야생멧돼지 폐사체 1개체로부터 아프리카돼지열병(ASF) 바이러스가 검출됐다고 19일 밝혔다. 야생멧돼지에서의 ASF 확진은 이로써 229건으로 늘었다. 연천에선 68건째다. 이 폐사체는 2차 울타리 내에서 발견됐다. 환경과학원 관계자는 “이 지역에서 감염 폐사체가 더 나올 수 있어 철저히 수색하겠다”고 밝혔다.
주간경향(총 2 건 검색)
- [여행]폐사지 기행 1번지 남한강가의 빈 절터들(2007. 11. 13)
- 2007. 11. 13 문화/과학
- 충주에서 여주를 거쳐 흐르는 남한강변에는 우리의 발길을 기다리는 옛 절터가 있다. 고달사지(高達寺址), 흥법사지(興法寺址), 법천사지(法泉寺址), 거돈사지(居頓寺址)…. 지금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쓸쓸한 폐사지로 남아 있지만 한때 남한강의 화려했던 세월을 간직한 영광의 흔적들이다. 나라의 부를 실어 나르던 비단길처럼 수운(水運)이 번창했을 때 그 풍요로운 물길에 뿌리를 내린 것이 이들 옛 절터의 찬란했던 역사다. -이형권 ‘국토는 향기롭다’ 중에서 높으니 외롭구나 고달사지 가을, 고달사 터에 산수유 열매가 붉디붉다. 모든 것이 누렇게 변해만 가는 가을이 남겨놓은 마지막 빛이다. 혜목산(慧目山) 고달사터를 고른 안목도 보통은 아니다. 시원스레 트인 앞면을 제하고는 삼면이 야트막한 산봉우리에 둘러싸여 아늑하고 포근하다. 수행처로 최상이니 그 지향이 드높을 수밖에 없다. 도의 경지를 통달한다는 고달사. 한때 사방 30리가 모두 절땅이었고 수백의 비구들이 도량에 넘쳐났다는데, 지금은 그윽하던 향화(香火)도 멈춘 지 오래고 호젓한 절터에 방초(芳草)만 무성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는 석불대좌(보물 제8호) 하며, 역시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부도 가운데 가장 크고 높다는 부도(국보 제4호)가 우뚝하나 찾는 이 드무니 홀로 외롭다. 고달사지 여주의 고달사지는 신라 경덕왕 23년(764)에 창건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 위세를 한껏 드높인 것은 고려시대 때다. 통일신라시대의 화려했던 불교미술이 고려시대에 접어들면서 괴량감에 치우쳐 그 세련미를 상실해가던 시기였다고는 하지만, 고달사지에 남아 있는 석물들은 결코 절정기의 솜씨에 뒤처지지 않는다. 특히 고달사지 부도는 그 장중함과 호방함에서 신라시대의 석물들을 단연 압도하고도 남는다. 이 부도는 신라 말 구산선문 중 봉림산문을 이끈 심회선사의 스승인 원감국사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 고달사지 부도와 함께 남아 있는 또 하나의 부도가 바로 심회선사에게서 법통을 이어받은 원종대사의 부도다. 원종대사 부도는 고달사지 부도를 본떠 만든 것인데 그 솜씨와 공력에서 앞의 부도에 미치지 못한다. 남아 있는 유물들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고달사가 일세를 풍미한 사찰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신라시대 때부터 시작된 수운 개척의 역사를 그 배경으로 삼는다. 그 바탕 위에서 고려 태종 이후 광종 때까지 역대 왕실의 돈독한 비호를 받은 원종대사가 고달사의 주지로 머물면서 전국 제일의 사찰로 면모를 갖출 수 있었던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고달사의 석조물들은 고달이란 석공의 넋이 스민 작품이라고 한다. 불사에만 몰두한 나머지 가족이 굶어죽은 줄도 몰랐던 고달은 스스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고, 훗날 큰 도인이 되었으니 절 이름도 고달사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달사지가 있는 여주군 북내면과 이웃한 대신면 옥촌리에는 한얼테마박물관이 있다. 폐교를 개조해 만든 이 박물관은 의료기기를 중심으로 한 과학기구와 고문서·전적들을 전시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로 운행되었다는 전동객차를 활용한 전시실이 이채롭지만 방대한 소장품들을 예산 부족 등의 이유로 체계적으로 관리하지 못하는 아쉬움도 있다. 남한강을 가로지르는 이포대교의 여주 쪽 자락인 천서리에는 막국수촌을 방불케 할 정도로 막국수집들이 몰려 있다. 그 중 이포대교가 들어서기 전부터 메밀국수를 직접 뽑아서 막국수를 만들어온 봉진막국수집이 유명하다. 휴일이면 번호표를 받아들고 자리가 날 때까지 기다려야 할 정도지만 시원한 막국수를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그 수고로움은 금방 잊힌다. 흥함도 망함도 모두 법이니 흥법사지 고달사지를 빠져나오면 길은 잠시 양평을 거쳐 이내 원주로 접어들고 물은 문득 섬강으로 거슬러 오른다. 선이 있을 턱이 없지만 지정면 경계를 넘어서면 산봉우리 하나가 불쑥 얼굴을 내민다. 지도상에는 수리봉으로 나와 있지만 이곳 사람들은 ‘욕바위산’이라 부른다. 양평에서 원주로 넘어가는 지름길에 위치해 있고 남한강으로 이어지는 섬강 상류의 안창진 나루가 지척이니, 원주 감영의 감사나 목사들이 재임기간이 끝나면 으레 이곳에서 뱃길에 오르거나 대송치 고갯길을 쉬어 넘어갔다. 그때 선정을 베풀지 못한 나리라면 욕바위에 오른 주민들의 욕 세례를 피할 길이 없었다. 그러니 이 산은 목민의 길을 깨우치는 훈계였다. 흥법사지 흥법사지에서 정면으로 마주보이는 산봉우리의 이름은 건등산(健登山)이다. 본래 기린산이었는데 왕건이 올랐다 하여 건등산이 되었고, 그 맞은편에는 견훤산성이 있다. 후삼국시대 패권을 다투던 왕건과 견훤이 이곳에서 남한강 일대와 중원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고, 거기서 승리한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의 태조로 등극하는 영광을 누렸다. 흥법사는 그 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던 절로 통일신라의 말기에서 고려의 초기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당시 절터만도 3만3000㎡에 이르던 거찰로, 고달사와 마찬가지로 구산선문 중 봉림산파에 속하는 진공대사가 주석한 선종사찰이었다. 진공대사는 계림의 귀족 출신으로 극심한 혼란에 빠졌던 신라 말기에 출가하여 다시 분열과 대립이 한창이던 후삼국시대를 거쳐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직후 세상을 마친다. 신라 출신인 진공대사가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자 태조 왕건은 그를 왕사로 맞이하고 흥법사를 중건해 주석토록 한다. 그렇게 흥성의 길을 달리던 흥법사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폐사의 길을 걷는다. 지금 흥법사의 너른 절터는 모두 밭으로 변했고, 가을걷이가 끝난 후 남은 풀빛들 위로는 하얗게 서리가 내렸다. 진공대사 부도비의 귀부와 이수, 삼층석탑 1기만 흩어진 석물 부재들 사이에 쓸쓸히 서 있는 흥법사지에 흥성했던 법문의 영화는 이제 자취를 찾기 어렵다. 진공대사 부도비와 짝을 이루는 진공대사 부도(보물 제365호)는 옛 국립중앙박물관의 마당으로 자리를 옮긴 지 오래고,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부도로서 한때 흥법사의 성가를 드높여준 염거화상의 부도 역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지만, 지금은 그 부도가 과연 흥법사에서 옮겨진 것인지 확신할 길이 없어 ‘전(傳) 흥법사지 부도’로 불려질 뿐이다. 어쩌면 법문의 영화가 스러지고 푸성귀들이 자라나는 지금의 흥법사터가 진짜 흥법사일지도 모른다. 샘물은 마르고 법천사지 흥법사지를 돌아 섬강 줄기를 따라가면 물은 문막 들판을 적셔 흥호리에서 남한강과 하나가 된다. 흥호리(興湖里)는 강을 사이에 두고 경기도와 강원도가 마주하고 있으며, 남쪽으로 조금만 발을 내딛으면 곧바로 충청도 땅이 시작되는 이른바 삼도(三道)의 접경지대다. 촌로들에 의하면 겨울철 강물이 얼면 담배 한 대참에 삼도를 다 밟아볼 수 있으니 삼합지점이라고도 하고, 또 삼도의 물이 한 데로 모인다 하여 합수머리라고 한다. 그런데 모여지는 것은 물만이 아니었다. 삼도의 물산과 세미들이 모두 이곳으로 모여들었으니 고려 개국과 함께 흥성했던 흥원창(興原倉)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법천사지 법천사는 여기에 법의 물을 더한다. 진리(法)가 샘물처럼 솟는다는 법천사. 지금은 절은 없어지고 너른 절터에 마을이 들어서 있는데, 그마저 폐가된 농가가 군데군데 섞여 있어 심란하기만 하다. 폐가와 폐사의 운명은 이처럼 같은 무게로 스산하게만 다가오는 것이다. 마을 이름인 법천리가 절 이름에서 유래되었을 만큼 거찰이었을 법천사는 도량의 규모조차 짐작키 어려웠는데, 최근 발굴조사로 그 전모를 더듬어가고 있다. 하지만 발굴조사로 여기저기 파헤치는 바람에 가뜩이나 스산하던 절터는 더욱 어수선해지고 말았다. 법천리 원촌마을은 법은 몰라도 집집마다 절의 은혜 하나쯤 입지 않은 곳이 없다. 어느 집은 석탑의 탑신부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돌에 홈을 파내어 절구통으로 사용하고, 마을 물도랑에는 석탑 지붕돌이 거꾸로 쳐박혀 수로를 만드는 데 한몫하고 있었다. 무너진 절의 석물들은 그렇게 세간의 살림으로 베풀어지고 있으니 이 또한 법력이런가. 법천사는 통일신라 성덕왕 때 창건되어 고려시대에 이르러 당대의 정신적 지주였던 고승 지광국사가 출가하고 열반에 든 절로서, 그 흔적이 지광국사 부도비로 남아 있다. 지광국사가 어릴 적 출가하여 관웅대사(觀雄大師) 밑으로 들 때만 해도 절 이름은 법고사(法皐寺)였으며, 큰 그릇이 될 것이 확실했던 아이의 속명은 수몽(水夢)이었다. 조선 초기 유방선이 법천사에 머물면서 유교를 가르쳤는데, 이때 배운 제자가 한명회·서거정·권람 등이었다. 숙종 때는 정시한이 이곳에 머물면서 강학을 했고, 훗날 그를 추모하는 광암사란 사당을 세우기도 했으니 마을 이름이 ‘원촌(院村)’이 된 것도 서원이 있던 마을이라 하여 그리 된 것이다. 법천사가 폐사된 것은 임진왜란 때 전소된 뒤 중창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사당터 역시 지금은 찾을 길이 없다. 페르시아풍의 부도탑을 역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보내고 겉으로만 당당한 당간지주 한 채와 함께 절터를 외롭게 지키고 있는 지광국사 부도비는 ‘지광국사 현묘탑’이라고도 불리는데, 11세기의 대표적인 걸작으로 꼽힐 만큼 그 조각이 정교하고 화려하다. 부도비 주변에 모아놓은 깨어진 석조물들 역시 그 조각 솜씨가 뛰어나 아깝기 그지없다. 활짝 핀 연꽃 등이 새겨진 석조물들은 특별한 보호조치 없이 여기저기 놓여져 가끔씩 저러다가 도난이라도 당하지 않을지 걱정을 불러일으켰다. 하기야 진리의 샘물이 말랐으니 진흙탕 속에서 피는 연꽃 또한 언제 질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 않겠는가. 무엇이 머물러 있는가 거돈사지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 입구에서 시골길을 따라 한참을 가다 보면 작은 내를 곁에 두고 잘 다듬어진 석축 위에 터 잡은 거돈사지가 나온다. 석축보다 먼저 눈에 띄는 게 거대한 느티나무인데, 거돈사지를 지켜온 1000년 수령에 7m가 넘는 몸둘레를 자랑하며 마치 당간지주인 양 서 있다. 남한강변에 터만 남은 대부분 절이 그러하듯 거돈사도 신라 말기에 창건되어 고려시대에 이르러 화려한 꽃을 피웠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그 빛을 잃고, 마침내 임진왜란 때에 이르러 전화를 입고 폐사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약 2500㎡에 이르는 절터는 삼면이 낮은 야산에 둘러싸인 채 아늑하게 들어앉아 있고, 내를 낀 앞쪽은 시원스레 트였다. 그 아늑함은 행자에게 포근하다 못해 나른함까지 안겨준다. 거돈사지 거돈사터에 들어서면 맨 먼저 시선을 붙잡는 게 삼층석탑이다. 빈 절터에 멀쩡하게 남아 있는 유물이라고는 삼층석탑 한 기뿐인 탓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금당터 앞에 놓인 이 탑의 아담한 균형이 주변 환경과 그림같이 어울리기 때문이다. 그 그림 속에 가끔 흰 구름도 머물다 가고 이름 모를 산새도 머물다 간다. 그 사이 풀꽃들은 소리 없이 피고 진다. 한때 거돈사지에도 민가들이 들어차 황망하기 그지없었다 한다. 민가들은 발굴조사가 시작되면서 모두 철거되었고, 흙 속에 묻혀 있던 역사의 잔해들이 하나둘 몸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쩌면 그 잔해들은 그대로 흙 속에 파묻힌 채 사람의 삶을 이고 있었던 것이 더 나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거돈사는 원공국사의 열반지다. 원공국사는 고려 초기의 천태학승으로 법명은 지종이었고 전주 출신이었다. 여덟 살 때 불교에 심취하여 개경 사나사에 머물고 있던 인도승 삼장 밑에서 출가했고, 삼장이 인도로 돌아간 후 광화사의 경철 스님 밑에서 수행을 거듭하여 스승보다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스물아홉 살 때 고달선원에 머물고 있던 증진대사로부터 더 넓은 세상에 나가 안목을 넓히라는 가르침을 받고 중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먼저 영명사의 연수선사를 찾아갔는데, 연수선사가 온 세상에 법이 두루 퍼져 있거늘 무엇 때문에 수고롭게 바다를 건너왔느냐고 묻자 이미 사방에 두루 있으니 건너온들 안 될 건 또 뭐 있느냐고 대답하여 심인(心印)을 받았다. 거돈사터 한켠에는 원공국사 부도비가 서 있는데, 마을 주민의 말에 따르면 이 부도비는 원래 현재의 위치가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고 한다. 언제 이곳으로 옮겨졌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함께 있었던 부도는 옛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갔고 지금은 용두화된 머리 앙쪽 귀 뒤에 지느러미가 달린 거북 등에 얹혀 잠깐인 듯 머물러 있다. 행자 역시 잠시만 이곳에 머무를 뿐, 충주 목계나루 가까이의 옛 청룡사지를 찾아 바람처럼 떠나야 한다. 흥법사지를 돌아 원주 남한강 가의 절터들을 찾으려면 간현을 거쳐야 한다. 섬강이 휘돌아가는 곳에 위치한 간현은 여름철이면 강수욕을 겸한 천렵을 즐길 수 있는 곳이지만,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고요만 감돈다. 잠시 철교 위를 지나는 기차의 궤적을 지켜보며 발품을 쉬어가거나, 아예 원주로 빠져 유명한 원주 추어탕이나 맛볼 일이다. 원주고등학교 앞의 복추어탕집은 된장을 넣고 끓인 구수한 맛으로 남원의 새집과 함께 남한의 2대 추어탕집으로 부를 만하다. 참고 및 인용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 이형권 ‘국토는 향기롭다’
- [여행]권역별 가볼 만한 폐사지(2007. 11. 13)
- 2007. 11. 13 문화/과학
- 강원 선림원지 강원 양양군 서면 황이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옛 절터. 동국대학교 발굴조사단이 1985년 7월부터 1년 이상 걸쳐 조사한 결과 순응법사 등이 창건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광복 직후 출토된 신라 범종의 명문에 따르면 이 종을 만들 무렵인 804년께 해인사 등 화엄종 계통에 의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발굴 당시 출토된 초창기 때의 기와로 보아 적어도 9세기 초에 창건한 것으로 보이나 이후 대량 출토된 기와나 삼층석탑, 석등, 한석 귀부 등 오늘날 남아 있는 대부분 유물이 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여 이 무렵 대대적으로 중창한 것으로 추측된다. 절의 가람배치는 삼층석탑 뒤에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 금당건물로 되어 있다. 주춧돌이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어 오른쪽에 금당과 잇대어 또 하나의 건물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서편 언덕의 석등 북쪽에서도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지가 발굴되었다. 중요문화재로는 선림원지 삼층석탑(보물 444)·석등(보물 445)·부도(보물 447), 흥각선사탑비 귀부 및 이수(보물 446) 등이 있다. 경기 회암사지 고려 말~조선 초에 경기 양주시 회암동 천보산에 있던 사찰터. 1964년 사적 제128호로 지정되었다. 1328년(충숙왕 15) 원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온 인도의 승려 지공이 인도의 아라난타사를 본떠 창건한 266칸의 대규모 사찰이었다. 1376년(우왕 2) 나옹이 중건하고 조선왕조에 들어와 세조비 정희왕후의 명으로 재중창했는데, 명종 때 보우가 실각한 후 쇠퇴하기 시작하여 19세기 초에는 거의 폐허가 되었다. 절터는 남쪽 기슭 경사진 대지에 있으며, 계단상으로 8단의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여러 건물을 세웠던 흔적만 남아 있다. 북쪽 구릉의 능선에는 지공·나옹·무학의 부도(보물 388) 및 비, 선각왕사비(보물 387), 쌍사자석등(보물 389) 등이 있으며, 오른쪽 골짜기에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인 현 회암사가 있다. 충청 성주사지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성주산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절터. 1984년 사적 제307호로 지정되었다. 성주산을 등에 지고 남향으로 면적 2만9084㎡의 평탄한 지대를 점유하고 있다. 1960년대에 발견되어 모으기 시작한 비석의 파편을 통해 원래 백제 법왕의 명에 따라 616년 오합사라는 국찰이 창건되었음을 알게 되었고, 이 오합사가 성주사이며 신라 문성왕 때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을 맞아 더욱 크게 중창된 사실도 밝혀졌다. 절터 입구로 보이는 곳에 계단석이 있고, 그 뒤쪽에 석등과 오층석탑 1기, 다시 그 뒤쪽에 금당터인 듯한 단이 있으며, 그 뒤에 최치원이 찬하고 최인연이 글씨를 쓴 국보 제8호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등이 있다. 호남 만복사지 전북 남원시 왕정동에 있는 통일신라~조선시대의 절터. 사적 제349호, 지정면적 4만86㎡. 기린산을 북쪽에 두고 남쪽은 넓은 평야를 앞에 둔 동산에 있다. ‘용성지’에 따르면 통일신라 후기에 도선이 창건했다고 기록되었으나, 현존하는 유구는 고려 문종 이후의 것이며 1979 ~1985년 전북대박물관 조사팀이 발굴 조사했다. 가람의 배치는 1탑3금당식으로 본탑을 중심으로 북·동·서에 각각 금당이 있고, 그 북쪽과 남쪽에 강당·중문이 있다. 이런 배치는 고구려의 1탑3금당식과는 다른 차이점을 보이는데, 즉 서쪽 금당터가 북·동 금당터보다 규모가 크다. 특히 이 절터는 고려 문종 때 창건된 동탑서전(東塔西殿) 가람배치와 조선시대의 1탑3금당 가람배치가 중복되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는 만복사에 대한 ‘동국여지승람’ 등의 문헌상 기록과도 일치해 가람배치 연구에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만복사지 오층석탑(보물 30)과 통일신라 후기~고려 전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만복사지 석불입상(보물 43)·석좌(보물 31)·당간지주(보물 32), 길가에 머리만 내민 채 묻혀 있는 석인상 등이 보존되어 있다. 영남 영암사지 경남 합천군 가회면 둔내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사찰터. 사적 제131호, 1964년 지정, 면적 3.812㎡. 경남 서부의 가야산과 지리산을 연결하는 중간지점의 황매산 남쪽 기슭에 있으며, 영암사라는 이름도 후인들 사이에서 구전되어 오지만, 자세한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서울대도서관에 탁본으로 남아 전하는 ‘적연국사자광탑비’의 비문을 통하여 고려시대 때 이곳에 영암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절터에는 금당지·서금당지·중문지·회랑지 등의 건물터와 삼층석탑·쌍사자석등·귀부·석조·기단·계단 등의 석조물이 남아 있다. 1984년 발굴조사 당시에는 통일신라 때부터 고려시대까지의 각종 와편과 토기편, 금동여래입상 등이 발견되었다. 현존하는 유물과 유구로 보아 경남지방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유서 깊은 대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늦어도 9세기 중엽에 창건되어 고려 말까지 존속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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