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총 116 건 검색)
- 다쳐서 산재신청하니 “너 프리랜서잖아”···유튜버 매니저 노동자 인정
- 2024. 08. 18 15:36 사회|사회
- ... 생방송을 돕다가 산재를 당한 매니저가 산재와 노동자성을 함께 인정받았다. 유튜버 매니저가 프리랜서가 아닌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된 첫 사례다. 18일 샛별노무사사무소 등 설명을 종합하면,...
- ‘한강 뷰’ 로망 가진 프리랜서 1인 가구
- 2024. 06. 26 20:27 문화
- ... <구해줘! 홈즈>에서는 한강 뷰에 살고 싶은 1인 가구가 의뢰인으로 나온다. 의뢰인은 프리랜서 프로그램 개발자 겸 주식 트레이너로 일하고 있다. 그는 직업 특성상 집에서 컴퓨터 모니터를 보는...
- [세상 읽기]플랫폼노동·프리랜서, 육아돌봄 권리 찾기
- 2024. 05. 23 21:06 오피니언
- ..., 캐나다 등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다수는 육아급여의 수급조건 편차는 있으나 자영업과 프리랜서까지 포괄한다. 나라별 제도와 운영의 차이도 있다. 다수는 육아급여는 일반재정이나...
- 세상읽기김종진
- 프리랜서 계약 맺었지만…“데이터 라벨러는 노동자” 첫 인정
- 2024. 05. 14 06:00 사회
- ... 곳에 책임도 지운다. 크라우드웍스는 데이터 라벨링 노동으로부터 이윤을 얻고 있지만 ‘무늬만 프리랜서’ 계약을 맺어 노동법상 책임을 회피하려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데이터 라벨링 종사자뿐 아니라...
스포츠경향(총 71 건 검색)
- 프리랜서 새출발 이광용 아나 “나와서도 주종목은 스포츠 중계”
- 2024. 09. 11 05:00 연예
- 이광용 전 KBS 아나운서가 5일 스포츠경향과 인터뷰하면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정지윤 선임기자 중계권 문제도 생기고 카타르 시청률 꼴찌 부채도… 축구·야구 섭렵한 ‘도우미형’ 좋은 콘텐츠의 힘 믿으면서 실력 재입증 해보고파 “정말 많은 시사·교양 프로그램을 진행할 기회도 받고, 예능도 경험했는데 다 해보니까 결국 제가 제일 즐겁게 잘할 수 있는 건 스포츠더라고요.” KBS 스포츠 중계의 간판이었던 이광용 아나운서가 21년 넘게 몸담았던 회사를 떠나 프리랜서로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이번에도 주 종목은 스포츠다. 이광용 아나운서는 2003년 KBS에 입사한 이후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다채로운 경력을 쌓았다. 그는 스포츠 토크쇼 <이광용의 옐로카드>를 비롯해 여행 교양 프로그램 <걸어서 세계 속으로>의 내레이션을 책임졌다. 가장 최근에는 시사 예능 <더라이브>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활약했지만, 그가 가장 애정을 가지고 집중한 분야는 스포츠다. 지난 5일 서울 중구 정동 경향신문에서 그를 만나 숨겨왔던 ‘스포츠 본능’과 앞으로의 계획을 들었다. 우선 KBS를 떠나게 된 배경에는 스포츠 중계권 문제가 있었다. 그는 “저는 KBS에서 두 대회 연속 월드컵 메인 캐스터를 했었기 때문에 축구라는 종목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자부심도 있고 애정도 그 누구보다 크다고 자부하는 사람인데, 월드컵 중계권도 지금 JTBC가 가져간 상황이고 또 K리그도 지상파에서 중계하고 있지 않아요. 그리고 유럽 주요 리그도 쿠팡 플레이, SPOTV 이런 다른 채널들에 다 가 있잖아요. 축구 중계를 다시 재밌게 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여의도를 떠나야 되겠다는 결론밖엔 없는 거죠”라고 말했다. 2022 카타르 월드컵 중계 당시 시청률 부진으로 인한 부담감도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카타르 월드컵이 방송적으로는 실패를 했어요. 한국 대표팀이 16강에 올라갔지만, 저는 시청률 경쟁에서 꼴찌를 했기 때문에 그거에 대한 어떤 부채 의식이라고 그래야 하나. 회사에 다시 기회를 달라고 하기가 KBS 내에서는 조금 애매한 것도 있었고요”라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그러면서 “승리를 통해서는 조금 배울 수 있지만 패배를 통해서는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는 메이저리그 전설 크리스티 매튜슨의 말을 곱씹었다. 프리랜서로도 성공해 과거의 성공이 운이 아니라 실력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어했다. 이광용 아나운서는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는 이영표 해설위원과 함께 메인 캐스터로 활약하며 시청률 1위를 기록하는 등 큰 성공을 거뒀다. 스포츠 전문 아나운서 중에서는 드물게 야구까지 섭렵한 것도 그의 자랑거리다. 물론 앞서 SBS를 떠나 자리 잡은 배성재 아나운서 등과의 경쟁을 이겨내야 한다. 엔터테이너형 아나운서들도 많고, 짧고 자극적인 영상에 길들여진 시청자들의 눈길도 사로잡아야 한다. 이광용 아나운서는 자신을 “프로그램을 빛나게 하는 도우미형 아나운서”로 정의하면서 차별화 요소로 꼽았다. 그는 “저는 캐스터가 잘나려고 하면 방송이 못나진다는 생각을 해요. 그리고 제가 아니라 제 파트너 해설자, 경기 선수들이 빛나면 저는 그냥 그 빛을 받으면 된다는 생각을 하고요. 그리고 저는 좋은 콘텐츠의 힘을 믿습니다”라고 말했다.
- ‘스포츠 본능’ 이광용, KBS 떠나 프리랜서 도전…“영원히 100점 못 맞는 시험, 그래도 중계석에 있을 때 제일 행복해”
- 2024. 09. 10 15:50 야구|축구|스포츠종합|연예
- 이광용 전 KBS 아나운서가 5일 경향신문과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4.9.5. 정지윤 선임기자 “정말 많은 시사·교양 프로그램을 진행할 기회도 받고, 예능도 경험했는데 다 해보니까 결국 제가 제일 즐겁게 잘할 수 있는 건 스포츠더라고요.” KBS 스포츠 중계의 간판이었던 이광용 아나운서가 21년 넘게 몸담았던 회사를 떠나 프리랜서로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이번에도 주 종목은 스포츠다. 이광용 아나운서는 2003년 KBS에 입사한 이후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다채로운 경력을 쌓았다. 그는 스포츠 토크쇼 <이광용의 옐로카드>를 비롯해 여행 교양 프로그램 <걸어서 세계 속으로>의 내레이션을 책임졌다. 가장 최근에는 시사 예능 <더라이브>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활약했지만, 그가 가장 애정을 가지고 집중한 분야는 스포츠다. 지난 5일 서울 중구 정동 경향신문에서 그를 만나 숨겨왔던 ‘스포츠 본능’과 앞으로의 계획을 들었다. 우선 KBS를 떠나게 된 배경에는 스포츠 중계권 문제가 있었다. 그는 “저는 KBS에서 두 대회 연속 월드컵 메인 캐스터를 했었기 때문에 축구라는 종목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자부심도 있고 애정도 그 누구보다 크다고 자부하는 사람인데, 월드컵 중계권도 지금 JTBC가 가져간 상황이고 또 K리그도 지상파에서 중계하고 있지 않아요. 그리고 유럽 주요 리그도 쿠팡 플레이, SPOTV 이런 다른 채널들에 다 가 있잖아요. 축구 중계를 다시 재밌게 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여의도를 떠나야 되겠다는 결론밖엔 없는 거죠”라고 말했다. 2022 카타르 월드컵 중계 당시 시청률 부진으로 인한 부담감도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카타르 월드컵이 방송적으로는 실패를 했어요. 한국 대표팀이 16강에 올라갔지만, 저는 시청률 경쟁에서 꼴찌를 했기 때문에 그거에 대한 어떤 부채 의식이라고 그래야 하나. 회사에 다시 기회를 달라고 하기가 KBS 내에서는 조금 애매한 것도 있었고요”라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그러면서 “승리를 통해서는 조금 배울 수 있지만 패배를 통해서는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는 메이저리그 전설 크리스티 매튜슨의 말을 곱씹었다. 프리랜서로도 성공해 과거의 성공이 운이 아니라 실력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어했다. 이광용 전 KBS 아나운서가 5일 경향신문과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4.9.5. 정지윤 선임기자 이광용 아나운서는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는 이영표 해설위원과 함께 메인 캐스터로 활약하며 시청률 1위를 기록하는 등 큰 성공을 거뒀다. 스포츠 전문 아나운서 중에서는 드물게 야구까지 섭렵한 것도 그의 자랑거리다. 2018년 자카르타 아시안게임에서는 갑작스럽게 야구 중계를 맡아 두 종목을 넘나드는 능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는 “예전부터 월드컵 한국 경기와 KBO 리그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중계를 하고 싶었어요. 둘 중의 하나만 해도 성공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둘 다 했더라고요. 그리고 이게 대한민국에는 저밖에 없어요”라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물론 앞서 SBS를 떠나 자리 잡은 배성재 아나운서 등과의 경쟁을 이겨내야 한다. 엔터테이너형 아나운서들도 많고, 짧고 자극적인 영상에 길들여진 시청자들의 눈길도 사로잡아야 한다. 이광용 아나운서는 자신을 “프로그램을 빛나게 하는 도우미형 아나운서”로 정의하면서 차별화 요소로 꼽았다. 그는 “저는 캐스터가 잘나려고 하면 방송이 못나진다는 생각을 해요. 그리고 제가 아니라 제 파트너 해설자, 경기 선수들이 빛나면 저는 그냥 그 빛을 받으면 된다는 생각을 하고요. 그리고 저는 좋은 콘텐츠의 힘을 믿습니다”라고 말했다. 친근한 목소리도 강력한 무기다. 2005년 시작한 <걸어서 세계 속으로>는 햇수로 벌써 19년째 된 장수 프로그램이다. 이광용 아나운서는 퇴사하기 직전까지 프로그램 역사의 거의 절반인 9년 동안 내레이션을 책임졌다. 그는 “여러 채널에서 재방송되는데 두 개 중 한 개는 제 목소리인 셈이죠”라며 웃었다. 이광용 전 KBS 아나운서가 5일 경향신문과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4.9.5. 정지윤 선임기자 이광용 아나운서의 끈기는 중계 전 루틴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밥을 먹지 않아요. 밥을 먹으면 물을 마셔야 하고요. 물을 마시면 경기 중간에 화장실을 가야 하거든요”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2018년 한국시리즈 마지막 경기 당시에는 오프닝부터 시상식까지 7시간 동안 한자리에 있었다. 그런 끈기로 스포츠 토크쇼나 테니스 중계 등 새로운 분야에도 도전하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다. “스포츠 중계는 범위는 무한대이고 항상 100점은 못 맞는 시험 같아요. 하지만 그래도 현장에서, 중계석에 앉아 있을 때 제일 행복해서 계속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아요.” 그가 웃었다.
- [직격인터뷰] 프리랜서 선언 김선신 아나운서 “행복했던 13년, ‘죽어도 여한 없을 만큼’ 끼 보여드릴래요”
- 2024. 08. 25 12:30 연예
- MBC스포츠플러스 아나운서로는 마지막으로 진행한 잠실 한화-두산전 리포팅에 앞서 포즈를 취한 김선신 아나운서. 사진 김선신 아나운서 제공 MBC스포츠플러스의 간판 스포츠 아나운서인 김선신 아나운서(37)가 퇴사한다. ‘스포츠경향’의 취재 결과 김선신 아나운서는 최근 회사에 퇴사 의사를 전하고 25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리는 한화-두산전을 마지막으로 MBC스포츠플러스의 마이크를 내려놓는다. ‘스포츠경향’과 최근 전화 인터뷰에 나선 김선신 아나운서는 13년 동안 MBC스포츠플러스에서 스포츠아나운서의 여정을 걸은 소감과 고마웠던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을 풀어놨다. 이하 김선신 아나운서와의 일문일답. - 퇴사를 결심한 이유가 궁금하다. “다른 직장인처럼 회사가 싫다거나 지긋지긋했던 건 아니었어요.(웃음) 너무 감사하게도 회사에는 지난해 스프링캠프 때 이야기를 했는데 새로운 모습을 보여드리고 도전을 하고 싶다는 열망이 컸던 것 같아요. 제게 ‘베이스볼 투나잇’은 좋은 자리였지만 틀에 갇히기도 하고 제가 생각했던 부분을 못 보여드리는 부분이 있었죠. 늦긴 했지만, 용기를 내서 힘들게 결정했습니다.” 25일 잠실 한화-두산전을 마지막으로 MBC스포츠플러스를 퇴사하는 김선신 아나운서. 사진 스포츠경향DB - 스포츠 아나운서로서의 13년은 짧지 않은 세월이었다. “저때만 해도, 여자 스포츠 아나운서가 이렇게 수명이 길게 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저도 사실 서른 살까지만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거든요. 결혼도 하고 출산까지 했습니다. 회사에서는 불안과 걱정을 배제하고 제게 기회를 주셨던 것 같아요. 이전에 하셨던 김민아 선배처럼 오래 해주시는 선배들도 계셔서 감사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 감사하고 싶은 분들이 많을 것 같다. “우선 아나운서팀 선배님들께 감사해요. 퇴사하겠다고 했을 때 붙잡아주셨거든요. 그리고 많은 회사 선후배분들, 그리고 올해 현장을 가겠다고 했을 때 현장에서 만난 감독님, 코치님, 선수분들 그리고 구단 관계자분들께서 다 반겨주셨어요. 그런 모습을 보면 참으로 감사한 13년이었다고 느낍니다.” - 가족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이 클 듯하다. “이렇게 제가 스포츠 아나운서로서 길게 이어간 것은 저희 가족들의 도움이었죠. 남편의 도움도 있었고 친정 부모님과 시부모님 그리고 동네 어머님들의 도움이 있었어요. 저희 아이가 이제 내년에는 학교에 갑니다. 어느 정도 컸는데, 그렇게 주변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어요.” - 앞으로 어떤 방송을 해보고 싶나. “일단 후회없는 방송을 해보고 싶어요. 항상 저를 제한된 틀에 가두기보다는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제가 가진 끼를 표출해보고 싶어요. 보통 ‘나이가 몇인데 이걸 해야 하나’ 이런 생각들이 많은데 철이 없다고 하더라도 저 자신에 대해 탐구하고 싶어요. 자유롭게 즐기며 갇히지 않은 도전을 해보고 싶어요.” 25일 잠실 한화-두산전을 마지막으로 MBC스포츠플러스에서 퇴사하는 김선신 아나운서. 사진 스포츠경향DB - 박지영, 김희연 아나운서 등 후배 아나운서들에게도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후배 아나운서뿐 아니라 SBS와 KBSN의 아나운서들도 모두 동반자의 개념이 큽니다. 타사 아나운서니까 라이벌이 아니냐고들 하시지만, 인원도 많지 않고 업무강도도 세서 SBS 진달래 아나운서나 김세연 아나운서, KBSN 오효주, 조은지 아나운서들도 모두 열심히 하는 것 같아요. 저보다 더 오래오래 이곳에서 사랑받으며 스포츠 아나운서로 이름을 날리면 좋겠습니다.” - 시청자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2011년 처음 MBC스포츠플러스에 입사한 저는 안타와 홈런만 겨우 분간하던 한심하기 짝이 없는 아나운서였어요. 베이징올림픽을 보면서 꿈꿨던 일에 ‘덕업일체’를 이뤘죠. 수없이 많은 기회도 받으면서 스포츠 아나운서가 아니라면 해보지 못할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야구를 좋아하시는 분들과 팬분들이 좋게 봐주시고, 사랑해주시는 덕분에 매일 같이 13년을 함께 했습니다. 길거리, 야구장에서 응원해주신 분들 한 분 한 분이 다 떠오르고요. ‘베이스볼 투나잇’의 아나운서로 기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해주시는 만큼 앞으로 더 다양한 모습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했습니다.”
- 직격인터뷰
- [단독] 엠스플 김선신 아나운서, 잠실 한화-두산전 마지막으로 퇴사…프리랜서 선언
- 2024. 08. 25 12:00 연예|야구|연예
- 프리랜서를 선언하는 MBC스포츠플러스 김선신 아나운서. 사진 스포츠경향DB MBC스포츠플러스에서 스포츠 아나운서로 활약 중인 김선신 아나운서가 퇴사한다. 김선신 아나운서는 최근 입사 13년 만에 퇴사를 결정하고 프리랜서를 선언하기로 했다. ‘스포츠경향’의 취재 결과 김선신 아나운서는 최근 회사에 프리랜서 선언 결심을 밝히고 퇴사 의사를 전했다. 그의 마지막 현장 리포트는 25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리는 2024시즌 프로야구 KBO리그 한화와 두산의 시즌 15차전이다. 김선신 아나운서는 이 경기의 현장 리포트를 마치면서 MBC스포츠플러스 아나운서로서의 여정을 마칠 계획이다. MBC스포츠플러스 김선신 아나운서의 프리랜서 선언 전 마지막 리포팅이 된 잠실 한화-두산전 리포팅 모습. 사진 MBC스포츠플러스 방송화면 캡쳐 경인교육대학교에서 초등교육학을 전공해 ‘경인교대 김태희’라는 별명으로 화제를 모았던 김선신 아나운서는 2011년 MBC스포츠플러스에 입사해 주로 야구와 배구 시즌 방송에 참여하며 경력을 쌓았다. 그는 2017년 동종업계 PD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2018년 3월 임신소식을 전했다. 2018년 6월에는 만삭의 몸으로 ‘메이저리그 투나잇’을 진행하며 화제가 됐다. 그는 육아휴직을 내고 2019년 2월 복귀했는데, 스포츠아나운서로서 출산을 하고 육아휴직 후 복귀하는 경우는 그가 처음이었다. 2024시즌부터는 후배인 김희연 아나운서와 자리를 바꿔 MBC스포츠플러스의 ‘베이스볼 투나잇’에서 12년 만에 하차했고, 지난해부터 방송된 ‘야구중심’에서도 올해 ‘비야인드’로 개편돼 박소영 아나운서로 진행자로 바뀌어 하차했다. 프리랜서를 선언한 김선신 아나운서는 휴식을 취한 후 본격적인 프리랜서 아나운서로서의 활동을 시작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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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혜미의 스타트업 카페](19)프리랜서는 프리랜서로 대우하라(2021. 11. 05 14:49)
- 2021. 11. 05 14:49 경제
- A스타트업은 회사의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블로그 등에 게시할 콘텐츠를 제작하는 프리랜서 디자이너가 필요해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1건당 ○원으로 콘텐츠 제작이 필요할 때마다 일하는 방식으로 디자이너 B와 계약합니다. 그렇게 1년 넘게 일을 하던 중 디자이너는 개인 사정으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다면서 퇴직금과 연차수당 총 500만원을 지급하라고 요구합니다. A스타트업은 프리랜서이므로 퇴직금과 연차수당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코리아스타트업포럼’ 주최로 10월 13일 서울 서초구 드림플러스에서 혁신 스타트업 활성화를 위한 정부 초청 간담회가 열리고 있다 최근 이처럼 근로계약을 체결하지 않고 배민 커넥트, 쿠팡 플렉스, 카카오T, 크몽, 숨고 등 온라인 플랫폼 등을 통해 비정규직으로, 프리랜서로 일하는 경우가 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긱 이코노미(Gig Economy)’라 하는데, 1920년대 미국 재즈클럽 공연에서 단기적으로 섭외한 연주자를 긱(Gig)이라 부른 데서 유래한 것입니다. 해외에서는 긱 이코노미가 일반적인 기업문화로 인식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최근 플랫폼 비즈니스가 급성장하면서 점차 기업문화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프리랜서로 근무하는 방식이 보편화하면서 법적인 문제도 종종 발생합니다.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는 최저임금, 퇴직금, 연차휴가, 4대 보험 등에서 법적 보호를 받으며, 해고도 제한됩니다. 반면 프리랜서는 원칙적으로 이러한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프리랜서를 법에서 정의하는 바는 없으며, 일반적으로 일정한 회사에 전속되지 않고 근무 장소나 시간 등에 있어서 자유롭게 일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근로자는 근로기준법상 정의를 하는데, 직업의 종류와 관계없이 임금을 목적으로 사업이나 사업장에 근로를 제공하는 자입니다. 법적으로 프리랜서인지 근로자인지가 항상 명확한 것은 아닙니다. 법상 프리랜서인지 근로자인지 여부는 구체적인 사실관계에 따라 “업무수행에 사용자로부터 상당한 지휘, 감독을 받는지”를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노동청이나 법원에서 근로자성 여부를 판단할 때는 형식적인 면(계약서 형태, 사업소득세징수, 4대 보험 미가입 등)보다는 사실관계를 중시하기 때문에 아무리 형식적인 부분에서 프리랜서의 성격을 갖췄더라도 실제 업무수행에서 근로자성이 인정된다면 근로자로 판단합니다. 근로자가 아니라 프리랜서로 인정되려면 ①특정한 조직이나 사업장에 전속되지 않아야 하고 ②구체적으로 업무지시를 하지 않아야 하며 ③출퇴근 시간 및 소정 근로일이 특정돼 있지 않아야 하고 ④취업규칙 등 회사 내부 규정이 적용되지 않아야 합니다. 반대로 ①회사가 정해준 업무 일정표에 따라 정해진 시간 내에 업무를 수행하게 하거나 ②업무수행 과정에서 회사에 상시 보고를 하게 하거나 ③특정 장소에 매일 출근의 의무를 부여하거나 ④근태를 관리하거나, 근태 불량 시 계약을 해지한다고 하는 등 해당 프리랜서들을 마치 근로계약을 체결한 근로자처럼 관리하는 경우 근로자로 판단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프리랜서로 인한 법적 분쟁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실질에 따라 그에 맞게 계약서를 명확하게 작성하고 실질에 따라 근로자는 근로자로, 프리랜서는 프리랜서로 대우해야 합니다.
- 강혜미의 스타트업 카페
- [주목! 이 사람]「동네 의사와 기본소득」 책 출간한 프리랜서 의사 정상훈씨 “기본소득, 삶을 다채롭게 한다”(2020. 11. 13 15:09)
- 2020. 11. 13 15:09 사회
- 최근 <동네 의사와 기본소득>이라는 책을 출간한 정상훈씨(49). 지난해까지 네팔에서 의료 구호활동을 하다 돌아와 지금 프리랜서 의사로 일하고 있다. 동네 의원의 의사들이 휴가를 간 사이 대신 진료를 봐준다. 코로나19로 일거리가 줄었지만 지금도 한달에 며칠씩은 의뢰가 온다. 그렇게 일하면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한달 월급 정도를 받는다. 정씨는 이 보수를 ‘기본소득’ 삼아 책을 쓸 수 있었다. 「동네 의사와 기본소득」의 저자 정상훈씨가 11월 9일 주간경향과 인터뷰하고 있다. 권호욱 선임기자 처음에는 그도 기본소득 회의론자였다. 대체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소득을 준다니 황당할 뿐이었다. 하지만 10년 사이 생각이 바뀌었고, 지금은 국민 모두에게 월 60만원의 기본소득 지급을 주장하는 열렬한 지지자가 됐다. 계기가 있었다. 국제구호단체인 ‘국경없는의사회’ 활동을 하면서다. 아르메니아와 레바논 등지에서 의료구호활동을 하면서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을 많이 봤다. 한국의 진료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기본소득으로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받을 수 있다면 고통을 감내하면서 생계 때문에 치료를 미룰 필요가 없을 터였다. 그는 지난 11월 9일 주간경향과 만나 “의사면허 덕에 삶에 닥친 사고와 우연성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는 것엔 감사하지만 이는 우리 사회에서 소수에 불과하다”면서 “삶의 불안정성이 높아지는 지금 기본소득은 사고나 우연이 가족과 생명을 포기하는 극단의 상황으로 가는 걸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책에서 진료하면서 만났던 이들의 이야기를 담아 기본소득의 구체성을 더했다. 비정규직 노동자, 장애인, 취업난에 시달리는 청년 등 소수자와 취약계층의 삶에 주목했다. 성소수자는 코로나19보다 경제적 고립에 의한 ‘사회적 죽음’에 더 고통스러울 수 있다. 기본소득은 이들이 차별과 혐오에도 생존을 포기하지 않도록 도와줄 수 있다. 기본소득은 다른 복지제도와 달리 “상상력을 자극하는 힘이 있다”고 강조했다. 일을 적게 하면서도 생활하기 충분한 소득이 있다면, 돈으로 평가받지 못한 일들을 과감하게 시도할 수 있다. 마을 가꾸기나 정치활동, 해외구호활동은 물론 소소한 창작활동도 시작할 수 있다. 삶은 훨씬 느긋해지고, 다채로워진다. 기본소득 재원은 시민배당과 토지배당, 탄소배당, 데이터배당으로 마련하자고 제안했다. 시민배당은 모든 시민이 소득의 15%를 ‘시민재분배기여금’으로 낸 후 돌려받는 것이다. 탄소배당은 탄소 1톤당 10만원의 탄소세를 부과해 재분배하는 것이다. 그는 “기후위기라는 명분이 있어서 탄소배당이 가장 설득력 있지만 사회의 공통부에 기반해 모두가 자신의 능력에 따라 참여해 분배받는다는 점에서 시민배당이 기본소득의 정신을 명확히 보여준다”고 말했다. 기본소득이 있다면 코로나19로 감염 확산의 위험이 있는데도 억지로 일터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 다음이 보장되지 않은 재난기본소득보다 훨씬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정씨는 “코로나19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면 나 혼자 잘한다고 안전할 수 없다는 것”이라면서 “감염병 위기가 자주 돌아올 것이 예상되는 지금 불안감과 공포는 모두의 연대로 극복할 수 있고, 그 계기가 기본소득일 수 있다”고 말했다.
- 주목! 이 사람
- [재무설계]프리랜서 부자되기(2007. 08. 21)
- 2007. 08. 21 경제
- 프리랜서 수가 크게 늘고 있다. 아직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특수고용 형태 근로자를 중심으로 적어도 20만 명가량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현대카드 직원이 현대카드의 CMA 체크카드를 선보이고 있다. 프리랜서는 자영업자나 일반 근로자에 비해 장점이 많은 편이다. 실력만 있다면 고소득을 보장받을 수 있거나 출·퇴근 시간도 자유로워 고용에 따른 각종 제약에서 벗어나 있다. 하지만 위험부담 역시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 고용 및 소득 창출 여건이 늘 불안하다. 20대 후반의 미혼 여성 ㅅ씨는 웹디자이너로 전형적인 프리랜서다. 그녀 역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반 직장을 다니다가 프리랜서로 방향을 바꿨다. 직장을 다닐 때는 고정 수입이 정해져 있어 지출관리도 잘 되고 나름대로 저축도 했지만, 지금의 처지는 그렇지 못하다. 어떤 달은 500만 원 이상 벌지만, 또 어떤 달에는 아예 수입이 없어 생활고에 시달릴 때도 있다. 필자는 우선 그의 월평균 수입 규모를 살펴보았다. 그동안의 수입구조를 살펴보니 월 300만 원 정도의 수입이 평균적으로 발생했고, 지출 역시 300만 원 수준에 맞춰져 있었다. 필자는 그와 협의해 가장 먼저 식비나 의복비 등 소비성 지출을 줄이게 한 뒤, 몇 가지 개선 방안을 찾기로 했다. 첫째, 불안정한 연간 소득을 평균으로 나눈 뒤, 그에 맞춰 수입과 지출의 균형을 꾀하는 것이다. 일단, 수입통장에서 매월 평균 급여를 정해 지출 통장으로 이체해서 마치 급여를 받는 것처럼 만들어 지출을 통제하기로 했다. 물론 통장은 CMA 계좌를 활용하기로 했다. 둘째, 씀씀이를 줄여 금융상품에 투자함으로써 미래를 대비하는 것이다. 물론 미혼 여성이다 보니 잘 먹고, 잘 입고, 아름답게 살아가고픈 욕망이 앞서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나름대로 인생 목표를 세우고, 적절한 투자 계획을 짜나가기로 했다. 우선, 내 집 마련을 위해 청약저축에 가입한 뒤, 매월 10만 원씩 불입하기로 했다. 그리고 1~2년 정도만 이용할 수 있는 자금은 복리가 적용되는 5% 이상의 상호저축은행 적금을 활용하고, 3~5년 정도 굴릴 수 있는 자금은 적립식 펀드에 투자하기로 했다. 특히 적립식 펀드는 안정적인 수익을 낼 수 있는 주력 펀드와 공격적으로 투자해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위성 펀드로 분산하도록 했다. 이외에 10년 뒤를 염두에 두고 현재 불입하고 있는 변액유니버셜보험은 장기목적 자금용으로 처리하고, 월생활비를 고려한 장기저축은 변액연금에 가입한다. 마지막 남은 과제는 불확실한 수입 상태를 고려한 ‘지출 관리’다. 그녀는 그동안 수입이 일정치 않아 일종의 보상심리가 작용해 수입보다 지출이 2배 이상 늘어나는 일이 잦았다. 그래서 이런 습관을 없애기 위해 ‘지출일기’를 쓰고, 체크카드를 사용해 지출처를 명확히 가려냄으로써 불필요한 소비 습관을 없애고, 좀 더 절제된 지출관리를 할 수 있도록 했다. ㅅ씨의 사례에서 보듯 프리랜서는 수입이 불안정하다는 점이 가장 큰 취약점이다. 이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수입과 지출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지출관리를 엄격히 하고, 저축 금액을 최대한 늘려 안정적인 투자를 선행해야 한다. 윤대관 컨설팅 문의 (02)6933-1255
- 재무설계
- [영남]“난 대한민국 프리랜서 통일부 장관”(2006. 07. 18)
- 2006. 07. 18 영남
- 前 통일부 장관 박재규 경남대학교 총장… 쓰러지는 대학 맡아 지방 최고 사학으로 박 총장은 남북관계가 호전되기 위해서는 남북 모두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내용들이 적절한 시기에 논의되고 실행에 옮겨져야 한다는 뜻을 밝혔다. 국민의 정부 시절 통일부 장관으로서 ‘남북정상회담 추진위원장’이라는 중책을 맡으며 성공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낸 박재규 경남대학교 총장(61). 그는 최근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관련하여 “북한의 도발적 행동에 대해 결코 수수방관해서는 안 될 것”이라며 “그렇다고 강경하게만 대응할 수도 없어 딜레마에 빠진 상황”이라고 전했다. 물론 정부가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에 대해 분명하고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 박 총장의 견해다. 지난 7월 3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극동문제연구소 집무실에서 만난 박 총장은 세계 최초로 ‘북한학’이라는 학문을 만들어 평생을 남북교류의 역사적 현장을 지켜온 ‘역사교과서’라 할 수 있다. 올해로 개교 60주년을 맞이한 경남대학교의 바쁜 행사 일정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에 대한 강의요청이 잇따라 국내외 쉴틈없는 행보를 보인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안보문제, 남북관계의 전망, 한·미관계가 특강의 주된 내용이다. 박 총장은 현재 북한대학원대학교 총장으로도 재직하고 있다. 북한대학원대학교는 1972년 설립한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를 모태로 한다. 이곳은 대북관계와 통일연구의 세계적인 메카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미국과 일본, 중국 등지의 학자들은 물론 연구 대상자인 북한의 주목도 함께 받고 있다. “북한 미사일 발사 강하게 따져야” “항상 회담 내용은 좋은데, 이러한 내용들을 적용하는 시기가 적절하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고 말하는 박 총장은 남북관계가 호전되기 위해서는 남북 모두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내용들이 적절한 시기에 논의되고 실행에 옮겨져야 한다는 뜻을 밝혔다. 2000년 6월 한반도를 뜨겁게 달궜던 역사적인 현장에서 이뤄진 ‘6·15 공동선언’ 역시 남북간 긴장완화와 화해, 협력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긴장완화의 약속이행은 미흡하다. “‘6·15 공동선언’을 통해 한반도 평화통일의 방향이 어느 정도 세워진 것은 사실이다. 평화협력과 평화공존, 평화통일이 그것이다. 지난 6년간 남북은 화해와 협력의 활성화를 위해 나름대로 노력해왔지만, 한반도에는 여전히 냉전기류가 감돌고 있다. 미완의 평화상태가 지속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남북한 모두에게 한층 배가된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박 총장이 1972년 대한민국 수도 서울 한복판에 ‘극동문제연구소’ 간판을 내걸었을 때 주변의 시선은 냉담했다. “지방대학으로서 쟁쟁한 수도권 대학들과 경쟁하기도 어려운 판국에 무슨 북한 연구소냐”고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도 들렸지만 이러한 분위기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던 그는 극동문제연구소를 동북아와 한반도 통일문제를 다루는 세계 최고 권위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1998년 3월에는 북한대학원을 개원하면서 연구소의 연구기능과 교육기능을 유기적으로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활발한 학술교류와 출판·교육활동을 통해 국내 제1의 대학연구소로 자리매김하면서 이른바 남북관계와 통일연구의 요람으로 새롭게 도약하게 된 것이다. 연구소의 권위는 지금까지 54차례의 국제학술회의와 91차례의 해외학자 초청 세미나의 질과 내용에 잘 나타나 있다.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의 연구축적과 북한대학원의 교육내용을 축으로 하여 2005년에는 국내 최초의 북한전문대학원인 북한대학원대학교가 태어났고, 북한대학원대학교는 북한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그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35년 세월을 경남대학교에 ‘올인’ 동북아와 한반도 통일문제를 다루는 국내 최고의 권위자로 자리매김한 박 총장은 2002년 6월 김대중 당시 대통령으로부터 대한민국 청조근정 훈장을 받았다. 스스로를 ‘프리랜서 통일부 장관’이라 칭하는 그는 20대부터 지난 35년의 세월을 경남대학교 발전에 ‘올인’ 해왔다. 사람의 나이로 치면 회갑을 앞두고 있는 경남대학교가 지금의 궤도에 오르기까지는 박 총장의 노력을 빼놓을 수 없다. 광복 직후 국가발전에 필요한 인재양성과 교육정책에 맞춰 서울에 5~6개의 대학과 함께 인가가 났을 무렵, 당시 신익희 선생이 서울에 ‘국민학관’을 설립하고 초대 이사장과 학장에 취임했다. 6·25전쟁으로 부산으로 옮겨진 ‘국민학관’은 줄곧 ‘보따리 신세’로 전전긍긍하기만 했다고 한다. 1952년에는 해인사재단으로 넘겨지면서 ‘해인대학’으로 바뀌고, 대학 캠퍼스도 진주로 옮겨졌다. 급기야 1961년 마산으로 학교가 옮겨지면서 ‘마산대학’으로 학명이 바뀌었고 재단의 재정난은 계속 어려워져만 갔다. 박 총장은 이 무렵 미국 유학길에서 돌아와 지금의 경남대학교를 살려보라는 주변의 권유를 받게 됐다. 그는 당시 20대 후반의 나이였고, 1년만 열심히 뛰어보자는 뜻을 지니고 덤벼들었다. 고작 100여 명이 조금 넘는 학생수를 1만5000명에 이르는 종합대학의 모습으로 거듭나게 한 그는 남다른 추진력과 리더십으로 경남대학교를 영남 최고의 사립대학으로 만들어 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 60년 가운데 앞선 25년은 대학으로서 틀을 갖추기 위한 시간이었으며, 그 뒤 나와 함께 해온 35년은 이러한 틀 속에 양질의 알맹이를 채워가는 시간이었다”고 회고하는 박 총장. 입학생 부족으로 지방 사립대들의 위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경남대학교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건 마찬가지. 정원의 80%밖에 채우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는 등 그 심각성을 인지한 박 총장은 대학 경쟁력을 제고시키기 위한 방안에 고심했다. 2001년 봄까지 통일부 장관을 지내고, 2년 후 경남대학교 총장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대학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가장 먼저 대학 구조조정을 시작했다. 불필요하거나 경쟁력이 떨어지는 학과를 폐지하고, 기존 학과나 학부를 통합하는 방안을 추진함으로써 점차적으로 대학을 안정적 궤도에 올려놓았다. 고교 졸업생이 매년 줄어드는데 대학 정원을 묶어놓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그는 장관직을 그만두고 학교로 돌아온 후 가장 먼저 했던 일이 바로 ‘이공계열 야간학과 폐지’였다. 물론 실직을 우려하는 교수들의 반발도 뒤따랐지만 학교를 살리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결국 지금은 모집정원이 줄었지만 새롭고 경쟁력을 지닌 학과를 신설하면서 명문사학으로서의 자리매김을 더욱 확고히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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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인혜의 SNS 톡톡] 코로나19 이후, 프리랜서로 살아남는 생존전략
- 2020. 06. 05 17:13 문화/생활
- 코로나19로 인해 우리 삶에 다양한 변화와 경험하지 못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여러 요소들이 있겠지만 경제적인 양극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SNS를 보면 개개인들의 사는 모습들 속에서 시대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최근 가장 많이 보이는 포스팅은 “먹고살기 힘들다”이다. 자영업자는 말할 것도 없고, 문 닫는 회사도 부지기수이며, 잘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되는 경우, 강의를 메인으로 하던 전문 강사들도 줄줄이 강의 취소로 생활고를 겪고 있다. 반면 누군가는 ‘위기 속에 기회가 있다’고 온라인 직종이나 마케팅을 어떻게 펼치냐에 따라 매출이 몇 배 상승하는 경우도 많다. 이러한 양극화 현상을 보면서 앞으로 살아남기 위해 어떤 생존전략을 펼쳐야 할지 연구해 보고, 변화를 시도해 볼 필요가 있다. 요즘 가장 흔히 들을 수 있는 말 가운데 하나는 ‘비대면’이다. ‘비대면 교육’ ‘비대면 주문’ ‘비대면 진료’ ‘비대면 업무’ 등 전반적으로 적용되면서 라이프 스타일도 변화하고 있다. 재택근무가 활성화되고, 직장이 어려워지다 보니 월급이 줄어들게 돼 투잡족도 많아졌다. 코로나19가 끝이 아니라 다음에 또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또 다른 준비를 하는 사람들도 많아진 것이다. 필자의 이야기를 잠시 꺼내자면, 10년 정도의 직장생활 끝에 프리랜서로 활동한 지 5년 이상 됐다. 무식이 용감하다고 처음에는 아무 준비도 되지 않은 채 단순히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생각 하나로 사표를 던지고 나왔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보다 몇 배는 더 많은 사람을 만났고, 너무 많은 사람을 단기간에 만나다 보니 어느 책에서 말하는 ‘인간 알레르기’ 같은 느낌도 겪었다. 경제적으로는 들쑥날쑥 불안정하다 보니 카드값 결제일이 되면 스트레스에 시달리기도 했고, ‘앞으로 방향성을 어떻게 해야 하지?’에 대한 고민으로 머리는 늘 물음표의 연속이었다. 그러한 날것의 시행착오들이 축적되면서 2019년부터 조금씩 안정화되기 시작했다. 그 바탕에는 여러 회사와 연간계약을 통해 기본급을 깔아둔 것이 큰 힘이 됐다. 회사들과 계약조건은 금액을 조금 낮추는 대신 출퇴근 없이 내 시간을 자유롭게 쓰면서 일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SNS 마케터라는 직업은 굳이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다고 되는 직종도 아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연결되는 강의를 통해 플러스알파의 수입을 창출하고 있다. 코로나19로 힘든 시기에 오히려 일이 계속 늘어나고 수입도 늘어나 프리랜서로서 만족한 삶을 살고 있다. ‘디지털 노마드(nomads)’를 많은 사람이 희망한다. ‘노마드’는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바꾸어 나가며 창조적으로 사는 인간형을 뜻한다. 쉽게 말해 노트북 하나 들고 내가 원하는 시간에 내가 원하는 장소에 가서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것. 참으로 아름다운 말이다. 그러나 보기와 다르게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수많은 능력자가 넘쳐나는 경쟁사회에서 디지털 노마드로 살아남고 싶다면 그에 걸맞은 내가 돼야 한다.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퍼스널 브랜딩’이다. 노마드 프리랜서는 내가 기업이고 브랜드이기 때문에 ‘나’라는 사람들 널리 알려야 한다. SNS를 통해 일상을 자유롭게 올리는 것도 좋지만, 먹방이나 육아 등 너무 개인적인 일상보다는 비즈니스도 일상처럼 녹여야 한다. 내가 추구하는 가치, 자기계발, 내가 하는 일, 성과 낸 스토리, 사람들과의 관계 등등 끊임없이 나를 어필하는 것은 필수요건이다. 처음에는 사람들을 만나고 비즈니스를 만들어 보고자 발로 뛰어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페이스북을 통해 ‘백인혜’라는 사람을 만들어 나간 결과 페이스북 친구를 통해 일이 연결되고 강의 의뢰가 들어왔다. 의뢰한 분들의 SNS에 ‘나’라는 사람이 언급되다 보니 또 다른 일로 이어지고 지속해서 시너지가 되고 있다. 지금은 별도의 영업이 필요 없이 원하는 사람을 골라서 만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퍼스널 브랜딩의 힘이다. 두 번째로 해야 할 일은 수입이 들어오는 창구를 여럿 만드는 것이다. ‘사람 일은 모른다’고 혹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어디서 문제가 생겨 일이 끊겨도 다른 곳에서 수입이 있으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줄일 수 있다. 특히 당장 먹고 사는 것에 집중 하다 보면 크게 살펴보기 어렵고 시야가 좁아진다. 기본을 바탕으로 깔아두고 돈과 상관없이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만들어 가야 시너지를 일으키고 긍정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세 번째로 해야 할 일은 끊임없는 자기계발과 관계 형성이다. 안정적인 프리랜서가 물 위의 백조처럼 자유로워 보이겠지만, 사실 그도 물밑에서는 끊임없이 헤엄을 치고 있다. 직장 다닐 때는 퇴근 후 아무 걱정 없이 주말까지 쉴 수 있지만 1인 기업은 다르다. 여러 회사를 관리하다 보면 주말에도 일을 해야 하고, 빠르게 변화하는 트렌드도 알아야 하기 때문에 지속적인 공부도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관계 형성’이다. ‘사람이 우선이다’라거나 ‘사람의 힘’ 같은 말처럼 ‘비즈니스보다 사람’을 중요시해야 한다. 인복을 타고난 사람도 있겠지만, 대다수 성공한 프리랜서는 노력으로 주변 환경을 바꾸고 인복을 만든 이들이다.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은 없다. 또 뻔한 사실이지만 노력하지 않으면 도태되기 십상이다. 모두가 아는 얘기다. 알면서도 실행은 하지 않고 앉아서 코로나19만 탓 하면 성공할 수가 없다. 지금 내가 처한 환경에서 시대의 흐름에 맞게 어떤 변화를 줄 수 있을지 정비해 보고 실행해야 한다. 소소한 시작이지만 작은 변화들이 축적되면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백인혜는 누구? 백인혜는 10년 넘게 직장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다 문득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사표를 던졌다. 프리랜서로 제2의 삶을 선택한 그는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SNS를 통한 기업 마케팅 업무에 뛰어들었다. 지금은 ㈜네트론 마케팅 이사 외에 웅진씽크빅을 비롯한 여러 회사의 SNS 마케터로 활동 중이다. 인플루언서 양성을 위한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 ‘프리랜서’ 선언 후 첫 MC 나들이 김경란
- 2013. 03. 27 16:28 연예
- 지난해 9월, 프리랜서 선언과 함께 KBS를 떠난 김경란 전 아나운서가 쇼핑 정보 프로그램 MC로 방송에 복귀했다. 뉴스에서 패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으로 분야를 옮겨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그녀의 변신이 궁금하다. 시스루 블랙 레이스 원피스에 과감한 메이크업, 화이트 재킷을 어깨에 걸친 그녀의 모습은 분명 이제까지 알던 아나운서 김경란(36)과는 180° 다른 모습이다. 한결같이 단아한 모습으로 뉴스를 진행하던 그녀는 이제 최신 쇼핑 정보를 전하는 MC로 시청자들을 만난다. 프리랜서 선언 후 6개월, 복귀작으로 스토리온 채널의 장수 프로그램 ‘토크&시티’를 택했다. “지금까지 보여드리지 못했던 저만의 색깔을 보여드릴 예정이에요. 더 많은 사람, 더 다양한 세계를 경험해보며 새롭게 배워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사실 그녀는 KBS 퇴사 당시 봉사하는 삶을 살기 위해 프리랜서 활동을 결정하게 됐다고 밝힌 바 있다. 패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을 복귀작으로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는 “앞으로 제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를 고민하다가 스스로 생각하기에 가치 있는 삶으로 채워가고 싶었다”라며 말문을 열었다. “사람마다 각기 가진 재능이 있다고 생각해요. 슈바이처나 테레사 수녀처럼 평생을 헌신하는 분들도 있고 NGO 단체에서 일하는 분들도 계시고요. 그분들에게는 저에게 없는 특별한 달란트가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가진 달란트는 한국어로 진행하는 거예요. 제가 제 일에 충실할 때 많은 분들이 저를 기억해주시고, 또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에 있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전할 때 더 많은 분들이 귀를 기울여주시지 않을까 싶어요. 앞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소통하며 변함없이 방송인으로 남을 생각입니다.” 쇼핑 프로그램 MC를 맡으며 가장 달라진 점은 역시 패션 스타일이다. 단정한 정장이 주를 이뤘던 ‘아나운서 패션’에서 벗어나 트렌드를 주도하는 패셔니스타로서 발전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그녀의 도전 과제.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방송에 참여하며 패션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다. 방송 녹화 후에는 그날 배운 것을 바로 다음날 복습한다고. 몰랐던 것들을 배워가며 요즘 옷 입는 재미에 푹 빠져 지낸단다. “예전에는 재킷은 반드시 팔을 끼어 입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방송 첫 회에서 어깨에 걸치는 스타일을 배웠어요. 막상 입어보니 팔도 자유롭고 편하더라고요. 어깨가 좁은 것이 콤플렉스였는데 단점도 커버되고요. 그동안 관심은 있었지만 시도할 생각을 못했는데 하나하나 배워가며 시청자들과 함께 공감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어요.” ‘토크&시티’는 2007년부터 패션과 트렌드, 뷰티, 인테리어 노하우 등을 전해온 장수 프로그램이다. 김경란은 시즌7의 메인 MC로 개그맨 김효진, 탤런트 정애연, 패션 PR 디렉터 변성용과 호흡을 맞춘다. “12년 동안 KBS에 몸담고 있을 때 방송은 항상 대본과 함께였어요. 아나운서는 진행을 하고 정보를 전달해야 하는 사람이기에 본인을 드러낼 기회가 없었다면, 이번 프로그램에서는 자신의 색깔을 완전히 드러낼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죠. 엄청나게 긴 녹화 시간도 다르고요. 뉴스는 정해진 시간을 넘기면 사고거든요. 아침부터 밤까지 녹화가 진행되는데, 정말 다행인 것이 함께하는 4명의 조합이 정말 좋아요. 하루 종일 붙어 있어도 지루하거나 힘들지 않을 정도로 즐겁게 촬영하고 있어요.” 프랑스의 대표 패셔니스타인 ‘샤를로트 갱스부르’를 롤모델로 꼽은 그녀. 한 회 한 회 거듭할수록 어떠한 모습을 보여줄지 김경란의 즐거운 변신을 기대해보자.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제공 / CJ E&M>
- 프리랜서 선언하고 다시 황야로 아나운서 신영일
- 2007. 12. 20 연예
- 사표는 지난 11월 12일 수리됐다. 인터넷 언론은 앞 다퉈 그의 거취를 보도했다. 신영일 아나운서는 인터넷에서 기사를 본 지인의 전화를 받고서야 사표가 수리됐다는 것을 알았다.전화기 한 대만 놓여 있던 빈 책상 KBS-1TV ‘퀴즈대한민국’은 여러모로 반가운 프로그램이다. 교양 프로그램, 오락 프로그램 할 것 없이 시시한 웃음을 좇는 데 혈안인 분위기 속에서 ‘정통’으로 승부를 걸었다. ‘쇼’에 지친 사람들이 ‘퀴즈대한민국’을 선택하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출연자들의 어색하지만 진지한 ‘파이팅’과 긴장은 전파를 타고 안방 깊숙이 자리 잡았다. 그 중심에는 신영일 전 KBS 아나운서(34)가 있었다. “어젯밤에 회사에 다녀왔어요. 사물함, 책상을 정리하고… 짐이 꽤 많았어요. 두 번에 날랐죠. 마지막 짐을 가지고 나오려다 책상을 봤어요. 전화기 한 대만 놓여 있는데, 그래도 뭔가 놓고 나온 느낌이 들더라고요.” 사표를 낸 직후에는 10년차 휴가를 썼다. 사표가 수리되던 날은 휴가가 끝나는 날이었다. 휴가 기간에는 미리 녹화해둔 방송이 꾸준히 전파를 탔다.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하지만 ‘사표가 수리됐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가슴이 뚫렸다. “이제 ‘전(前) KBS 직원’이 됐구나, 직장이 없구나”라고 생각했다. 입사 초기 작성한 프로필에는 ‘시간 외 근무’와 ‘타 방송 모니터’가 취미라고 적어놓을 만큼 사랑했던 직장이었다. “KBS에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10년 10개월 동안 근무했죠. 청춘을 바쳤는데, 조직에서 벗어나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습니다.” 아나운서들의 잇따른 프리랜서 선언은 대중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다. 그들의 고민과 선택에 대한 공감보다 대형 소속사와 고액의 연봉, 외제차에 관심이 쏠렸다. 신영일 아나운서의 거취는 결정된 바가 없다. 안정적인 직장을 나와 스스로 벌판에 선 것은 ‘방송을 계속하고 싶어서’라는 원론적인 바람 때문이었다. “방송을 하지 않아도 월급을 받고 회사를 다닐 수는 있겠지만, 제 목표는 방송을 오래 하는 겁니다. 임성훈 선배를 모델로 생각하고 있지만 쉽지 않겠죠. 지금은 시대가 다르니까요. ‘방송을 오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고민했고, 조직 안에서는 힘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KBS 본사에는 90여 명의 아나운서가 있지만 모두 방송에 출연하는 것은 아니다. 10년 10개월째, 신영일 아나운서는 “프로그램을 새로 맡을 수 있는 시기는 지났다”고 생각했다. 정점에 달했다고 판단한 그의 이력은 평행선을 그리고 있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다는 명제는 평범하지만 냉정한 진실이다. “조직 안에 있는 것이 ‘방송 기회’를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제게 계속해서 기회가 주어지리라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라고 느꼈어요. 하지만 방송을 오래 하고 싶고, 그렇다면 제 살길은 제가 알아봐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 거죠. 당장은 힘들더라도, 새로운 도전을 하기로 한 거예요.”다섯 살 된 자식을 놓고 가는 기분, ‘퀴즈대한민국’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지만, 아쉬움이 감춰지진 않았다. ‘퀴즈대한민국’에 대한 특별한 애착도 숨기지 않았다. 2002년 가을 1회부터 지금까지 햇수로 6년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진행했다. 유난히 우여곡절이 많았던 프로그램, 2백50회를 녹화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러브인아시아’와 ‘무한지대 큐’ 역시 1회부터 한 회도 거르지 않았지만 ‘퀴즈대한민국’에 대한 애착은 각별하다. “시작은 수원 KBS였어요. 2년 반 정도 수원을 왔다 갔다 하면서 녹화를 했죠. 한번은 녹화를 마치고 고속도로를 타고 올라오다가 앞차를 받았어요. 범퍼가 내려앉는 정도의 사고였지만 ‘이러다 MC 잡겠다’고 생각한 부장님이 서울 스튜디오로 녹화를 옮겨주셨죠(웃음).” 마침 토요일 스튜디오가 비어 있었다. 스튜디오의 녹화 스케줄은 평일부터 찬다. 주말에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이렇게 신영일 아나운서는 ‘간신히’ 서울에서 녹화를 시작했다. 주말마다 일해야 했지만 서울로 왔다는 것이 위안이었다. 그렇게 1년, 프로그램이 자리를 잡아가자 다시 평일 스튜디오로 옮길 수 있었다. 지금은 화요일에 녹화하고 있다. “시작부터 지금까지 자리를 잡아놓은 것도 기분 좋은 일이고, 저한테는 자식 같은 프로그램이에요. 만 다섯 살까지 길러놓고 떠나보낸.” 퀴즈 프로그램은 대본이 없다.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기 때문이다. 진행자의 역량에 따라 망가지기도 쉽고, ‘산으로 갈 수도 있는’ 것이 퀴즈 프로그램이다. 진행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클 수밖에 없고, 퀴즈로 실력을 인정받은 MC의 생명력은 길다. “아쉬움을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죠. 말을 길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요. 지금은 각각 다른 아나운서가 진행하게 됐어요. 이제는 시청자 입장에서 열심히 봐야죠. ‘진행하던 프로그램을 다른 사람이 맡게 되면 다시 보기 힘들다’는 사람도 있지만, 전 잘 볼 것 같아요.”흔들림 없는 아내와 부모님의 믿음 신영일 아나운서는 아내, 아들과 함께였다. 아내 지영선(32)씨도 얼마 전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부부가 실직했다고 주변에서 걱정이 많다”며 웃었지만, 아내는 걱정보다는 믿음을 주는 든든한 동반자다. “아내가 제가 하는 일에 대해서 반대하지는 않아요. 방송을 잘 모르지만, 오래 고민한 결과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 고맙죠. 안타까운 분들은 부모님이세요. 처음 KBS 들어갔을 때 얼마나 좋아하셨는데요.” 2년 전 강수정, 김병찬 전 KBS 아나운서가 프리랜서 선언을 한 당시, 신영일 아나운서도 고민이 많았다. 주변에서는 만류했고, 조직 내의 인간적인 관계도 무시할 수 없었다. 신영일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방송을 보는 것이 낙이었던 부모님께는 “시행착오가 있겠지만 방송을 오래 하기 위해 겪어야 하는 과정”이라고 말씀드렸다. 지금까지 어떤 결정을 해도 마냥 믿어주셨던 부모님은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항상 제 선택을 믿어주셨죠. 사실 아나운서 시험 본다고 했을 때도 말리셨거나, 회의적이셨을 것 같은데, 그때도 밀어주셨어요. 제가 방송을 하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요.” 학창 시절 신영일 아나운서는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때 손도 못 드는 내성적인 아이였다. 소변을 참다가 신장염에 걸려 일주일 동안 입원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부모님은 몸도 약하고 숫기도 없는 아들이 뭘 해서 먹고살지를 걱정했다. “몸이 약해서 학교생활을 잘 못했어요. 어머니가 와서 제가 할 청소를 대신 하기도 하시고, 선생님 도시락도 싸가지고 오곤 하셨죠. 제가 고등학교라도 마칠 수 있을까 걱정하며 울곤 하셨어요.” 어머니의 무릎에는 아직도 거뭇거뭇한 상처가 남아 있다. 신장염에 걸렸을 때 신영일 아나운서를 엎고 병원으로 뛰다 흙길에 넘어진 흉터다. 상처 안에 남은 흙 위로 새살이 돋았고, 지금은 거뭇거뭇한 흔적만 남았지만 기억은 생생하다. “그런 학창 시절을 보냈어요. 그러니 누가 ‘방송’을 하리라고 예상했겠어요. 대학 4학년 때 어학연수를 다녀와서 갑자기 ‘아나운서가 되겠다’고 결심했죠.” 아나운서가 되면 지금까지 살아온 것과 전혀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실패하더라도, ‘나를 표현하는 과정’을 연습하는 아나운서 시험 준비 과정이 인생에 도움이 되리라고 판단했다. 신영일 아나운서가 입사하던 1996년에는 유난히 많은 사람을 뽑았다. 지금은 공중파 세 곳을 합쳐도 한 해 공채 아나운서가 열 명이 채 안 되지만, 신영일 아나운서의 동기는 열두 명이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단 두 명의 아나운서만 선발됐다. “절묘한 타이밍이었다고 생각해요(웃음). 친구들은 다 놀랐죠. 초등학교 동창들은 제가 방송하는 모습을 보고 ‘얼굴은 닮았는데 영일이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대요. 한 선배는 당연히 행정직으로 입사한 줄 알던데요. 제가 행정학 전공이거든요.” 의외의 선택에 대한 부모님의 지지는 흔들림이 없었다. 학원비가 필요하다고, 옷을 사야 하니 돈이 필요하다고 해도 아들의 선택에 대한 회의는 내비치지 않았다. “네가 하고 싶은 일이니까, 후회 없이 한번 해보라”는 말씀이 전부였다. “그렇게 입사한 직장을 그만둔다고 했을 때도 걱정은 많이 하셨죠. 저보다 더. 하지만 별다른 내색은 하지 않으셨어요. ‘잘하리라 믿는다’고 하셨죠. 그 말씀을 듣고 ‘빨리 방송을 해야겠다’고 다시 다짐했어요. 제 방송 보는 것이 낙이셨으니까….”다시 황야로 걸어가는 발걸음의 무게 아나운서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뉴스는 기자가 진행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개그맨 출신 MC들의 영역은 점점 넓어지고 있다. 역량이 있는 아나운서라면, 방송국을 벗어나 새로운 도전을 모색하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다. “애매하고 현실적인 문제죠. 나가는 사람이 나쁘다고 할 수도, 안에 있는 사람이 배타적이라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해요.” KBS는 ‘2년간 출연금지’라는 내부 규정으로 엄포를 놓았다. 후임자 결정은 신속했다. 연출자가 방송국을 떠나 프리랜서를 선언할 때는 이 정도로 가혹하지 않다. 예능 전문 진행자가 된 강수정 아나운서와 기획사 소속이 된 김성주 아나운서의 사례 때 프리랜서 아나운서에 대한 대중의 반감은 극에 달했다. 그들에게 유난히 가혹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신영일 아나운서는 조급하지 않으려고 마음을 다잡는다. “제가 가수가 되거나 연기를 하려고 사표를 낸 것은 아닙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영역을 잘 알고 있어요. KBS를 등진 것도 아니고, 2년은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선배들이 조언을 많이 해주세요. 조급해하지 말고, 눈에 힘도 좀 빼고 편안해지라고(웃음).” 큰 무대가 아니더라도 괜찮다. 10년 10개월 동안 방송의 매력에 중독된 채 느꼈던 즐거움을 다시 느낄 수 있는 곳이라면 거리낄 이유도 없다. KBS가 기회를 제공했고, 그는 아나운서로서 성장을 거듭했지만 한 조직에서 ‘정년’을 맞이하는 것이 고마운 마음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퀴즈 프로그램’은 누구보다 잘할 자신이 있어요. 다른 무대에 서더라도 지금까지 해왔던 방송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겁니다. 조급한 느낌이 사라지지는 않지만, (스스로) 연출을 해서라도 여유를 찾으려고 해요.”마주 앉은 카페에서 멀리 팔각정이 보였다. “좋네요, 처음 와보는 곳인데. 다음에는 가족들이랑 한 번 더 와야겠어요.” ‘일중독’이어서 행복했던 지난 10년 10개월. 알토란 같은 프로그램들을 진행하며 바쁘게 실력을 쌓는 동안 잊었던 것은 여유다. “예쁜 아빠 입 어딨어요?” 하고 물으면 꼭 닮은 미소를 지으며 신영일 아나운서의 입을 짚는 세 살배기 아들 한빈이. 그리고 속 깊은 아내와 다시 걷기 시작하는 발걸음의 무게는 전과 다르지 않다. ■ 글 / 정우성 기자 ■사진 / 민영주 ■장소 협찬 / 평창동 키미아트(Kimi Art)
- 동원호 단독취재한 분쟁지역 전문 프리랜서 PD 김영미
- 2006. 09. 01 화제
- “이혼 후 카메라를 들게 된 것은 저에게 큰 행운이죠. 제가 이렇게 변할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지난 7월 18일 한국 언론 사상 최초로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가던 동원호와 선원들의 모습을 안방에 생생하게 전달한 김영미 PD. ‘현모양처’를 꿈꾸던 주부였지만, 이혼 후 우연한 계기로 카메라 하나 들고 동티모르로 떠나면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그녀는 한국과 일본에서 분쟁 지역 전문 프리랜서 PD로 인정받고 있다. 동원호 선원만 남겨두고 떠나온 기억 고통스러워 지난 8월 9일 오후 4시, 인천공항 귀국장에서 수많은 취재진과 사람들이 한 비행기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동원호 선원 7명을 태운 비행기다. 비행기의 도착과 함께 입국장으로 들어오는 7명의 선원. 오랫동안 억류돼서 생활한 탓에 몹시 지쳐 보였지만, 고단한 얼굴엔 자유를 찾았다는 안도감이 가득했다. 선원들은 “정말 힘들었다” “지난 일은 더 이상 생각하기 싫다”는 고백으로 소말리아 해적에게 납치된 1백17일간의 악몽을 전했다. 이들의 귀국 소식을 듣고 선원들의 가족처럼 뛸 듯이 기뻐한 사람이 있다. TV 뉴스를 통해 동원호 선원들의 가슴 뭉클한 귀국 장면을 보고 그의 얼굴에 함박 웃음이 퍼졌다. 소말리아 현지에서 선원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돌아온 프리랜서 PD 김영미씨(36·크릭앤리버 코리아). 선원들만 놔두고 동원호에서 빠져나올 때의 그들 눈빛을 잊을 수 없어서 고통스러웠다는 그녀. 그들에게 가지고 있던 마음의 빚은 귀국과 함께 홀가분하게 벗어버렸다. 사실 ‘1백17일’은 생각하기도 끔찍한 시간들이었다. 지난 4월 4일 소말리아 인근 해역에서 참치잡이 조업 중이던 원양어선 동원호는 총을 난사하면서 접근해온 해적에게 피랍됐다. 당초 일찍 풀려날 것이라 예상한 동원호 선원들은 소말리아의 복잡한 정치 상황 때문에 무려 1백17일간을 꼼짝없이 잡혀 있었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가던 동원호와 선원들은 김영미 PD를 통해 다시 사람들의 시야로 들어왔다. 위험하다는 소말리아로 직접 건너가 선원들을 촬영하고 돌아와 지난 7월 25일 MBC-TV ‘PD수첩’에 출연했다. 동원호 납치 1백일을 맞아 방영된 이 프로그램에서 김 PD가 전한 선원의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옷과 음식을 해적들에게 빼앗겨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걸레로 사용하기 위해 가져간 낡은 옷을 입은 선원들의 탄식은 충격 그 이상이었다. 신경을 너무 많이 써서 머리가 하얗게 샌 선원의 모습도 생생하게 화면을 탔다. 방송을 본 시청자들은 정부 외교력의 무능을 질타했다. 방송의 힘이었을까? 아니면 정부와 동원수산의 협상이 잘 이루어진 것일까? 지난 8월 9일 오후 납치된 지 1백27일 만에 그들은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동원호 선원들의 충격적인 상황이 방송을 타자, 김영미 PD가 누구냐는 관심도 높아졌다. 누구도 해내지 못한 것을 여성 PD가 해냈기에, 그에 대한 호기심은 더욱 커졌다. 사실 그녀는 이번 동원호 사건뿐만 아니라 동티모르,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 분쟁 지역 전문 프리랜서 PD로 이름을 높이고 있다. ‘현모양처’를 꿈꾸며 행복한 가정주부로 살았지만, 이혼 후 그녀는 프리랜서 PD로 제2의 멋진 인생을 살고 있다. “방송이 이렇게 큰 이슈가 될 줄 몰랐어요. 외신은 벌써부터 동원호 사건에 대해 모두 취재를 했거든요. 외신 기자 친구들이 제가 동원호를 취재한다니까 놀릴 정도였어요(웃음). 소말리아 지역 방송국에서 우리 선원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도 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곳으로 떠났어요.” 김 PD가 동원호를 취재한 날은 6월 15일부터 17일까지, 2박 3일이었지만 준비 기간은 훨씬 길었다. 소말리아의 내부 상황은 그녀가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난해했다. 오랜 내전 끝에 과도정부가 수립됐지만, 해적들에게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전화도 안 되는 곳에서 그녀는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해적과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선택한 것은 전화가 아니라 무선 햄이었다. ‘절대 불가’라는 해적을 어르고 달래는 것도 그녀의 몫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동원호에 올라갔지만, 선원들은 그녀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믿지 못했다. 특히나 원양어선에 여성이 탄다는 것은 선원들에게는 충격이었다. 동원호 선원들은 그녀를 친절하게 받아줬고, 그들의 육성과 모습을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선원만 남겨놓고 떠나올 때 너무 힘들었어요. 그분들이 돌아왔으니까, 그들과의 약속을 지켜야죠. 풀려나면 만나서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자고 했는데, 제가 부산으로 내려가서 만나려고 합니다. 선원들 만난 뒤에는 일본으로 돌아가 또 일을 해야죠.” 음식 솜씨 좋던 ‘새댁’, 이혼 후 프리랜서 PD로 몸무게 50kg도 안 되는 갸날픈 몸매, 얼굴에는 항상 웃음을 머금고 있다. ‘대체 저런 사람이 어떻게 전장의 한복판으로 들어가 혼자 카메라를 메고 다닐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절로 든다. 김영미 PD가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녀의 대답은 “나도 잘 모르겠다”이다. 예전에는 상상도 못하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김영미 PD는 열한 살 된 아들과 단둘이 살아가는 싱글맘이다. 대학에서 행정학과 사진학을 복수 전공한 뒤 선택한 것은 사회생활이 아닌 가정주부였다. 열두 살 연상의 남편 지갑을 찾아준 것을 인연으로 만난 지 몇 달 만에 결혼했다. 사회생활을 하는 것보다는 ‘현모양처’가 꿈이었기에 그녀의 결혼 생활은 행복했다.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인정받는 음식 솜씨, 인테리어 잡지를 보면서 집 안 꾸미는 것도 곧잘 했다. 그녀의 집은 동네 아줌마들의 아지트였다. 아이 키우는 일도 힘들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아들이 네 살 되던 해 그녀는 이혼을 결심했다. “시간이 갈수록 남편과의 생각 차이가 깊어만 갔어요. 남편이 저에게 바라는 것과 제가 남편에게 바라는 것이 달랐죠. 당시에는 아들만 제가 키우면 된다는 마음뿐이었어요. 위자료나 재산 분할 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구요. 네 살 된 아들만 데리고 나와서 7백만원짜리 단칸방에서 살았죠.” 그때는 이혼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녀를 주눅들게 했다. 아들을 데리고 이혼녀로 살아가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던 가정주부 김영미는 점점 웃음을 잃어갔다. 우울증은 갈수록 심해졌고, 살아서 뭐하나 싶은 날의 연속이었다. 그녀는 이혼 후 세상의 밑바닥까지 떨어진 것이다. 아이만 없었으면 극한 선택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한 신문기사에 나온 동티모르 분쟁 소식이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을까? 전쟁으로 고통받는 여성들의 모습이 마치 자신의 모습처럼 보였다. 7백만원의 보증금을 빼낸 뒤 카메라와 비행기표를 구입해 동티모르로 날아갔다. 아이는 친정어머니에게 맡겼다. 전쟁의 한복판에 간다는 것이 두렵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두려움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이혼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가 1999년. PD가 무엇인지, 저널리스트가 무엇인지 관심도 없던 때였다. 서울 여의도에 방송국이 있다는 것만 알던 주부 김영미는 동티모르에서 저널리스트로 거듭나게 된다. “카메라를 들게 된 것은 저에게 큰 행운이에요. 이혼 후 세상살이가 막막하던 때 저를 일으켜 세운 것이 바로 카메라죠. 어떤 계기가 있다기보다는 그냥 파도에 휩쓸려서 여기까지 온 것 같습니다. 저도 제가 이렇게 될 줄 전혀 몰랐어요(웃음).” 그녀는 당시 취재 노하우를 아는 것도 아니고, 기자 인맥도 없었다. 취재를 위해 카메라를 들이대기 전에 그녀는 사람들과 친해지려는 노력부터 했다. 15일간 카메라를 들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러자 동티모르의 여성들은 자신들을 내보이기 시작했다. 김영미 PD는 동티모르 여성들과 함께 웃고 울 수 있는 친구가 됐다. 그때부터 카메라에 동티모르 여성들을 담기 시작했다. 그녀는 99년 8월부터 2000년 10월까지 동티모르에 머물렀다. “놀랍게도 촬영을 하면서 우울증이 사라졌어요. 동티모르 여성의 모습이 바로 제 모습이었거든요. 그녀들과 함께 웃고, 울고, 춤추면서 제 상처가 치유된 거죠. 동티모르 사람들이 카메라를 메고 다니니까 저를 저널리스트라고 불렀죠.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녀의 작품은 한 방송사를 통해 ‘동티모르의 푸른 전사’라는 다큐멘터리로 방송됐다. 이것을 계기로 그녀는 아침 프로그램 PD를 맡게 됐다. 처음으로 월급을 받으면서 일을 한 것이다.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이었기에 자신과도 너무 잘 맞았다. 하지만 1년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월급쟁이 PD로 살기보다 그녀의 생각대로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었다. 그녀는 다시 짐을 꾸려 아프가니스탄으로 떠났다. 가족뿐만 아니라 동료들도 다 말리던 일이었다. 일본 방송국에서 제2의 날갯짓 “아는 선배에게 1천만원을 빌려서 아프가니스탄으로 떠났어요. 가장 큰 제작비를 가지고 떠난다면서 웃었죠. 전쟁으로 고통받는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을 만나고 싶었죠. 특히 부르카 속에 숨어 있는 여성을 만나고 싶었어요. 그녀들도 화장은 하는지? 눈 색깔은 어떤지? 궁금했거든요(웃음).” 그녀가 아프간에 들어갔을 때는 수많은 외신 기자가 활동하고 있었다. 그녀는 정치나 사회적인 이슈보다는 부르카를 쓰고 있는 여성들의 모습을 찍고 싶었다. 부르카는 아프간 여성들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리는 천으로 남 앞에서 부르카를 벗는다는 것은 아프간 여성들에게 절대 금기시되는 일이었다. 어느 외신 기자도 부르카를 벗은 아프간의 여인들을 찍는다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김영미 PD는 해냈다. 김영미 PD는 아프간 여성들을 상대로 여자 대 여자로 만나기 시작했다. 이혼 후 삶의 밑바닥까지 떨어진 자신과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아프간 여성들과는 동병상련이기에 통하고도 남았다. 서로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아프간 여인들은 그녀 앞에서 부르카를 벗었다. 남자와 여자가 한 공간에 존재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 영어를 할 줄 아는 남자 통역원은 벽 밖에서 통역을 해주고, 김영미 PD는 여자들과 안에서 이야기를 주고받아야만 했다. 그렇게 그녀는 세계 최초로 부르카를 벗은 여인들의 모습을 촬영했다. “이 작품은 2002년에 ‘부르카를 벗는 여인들’이라는 다큐멘터리로 방송됐어요. 하지만 이 작품과 제 노력에 대한 보상과 인식은 너무 형편없었죠. 그래서 방송 다음날 일본으로 건너갔어요. 그냥 부딪쳐 본 거죠.” 처음 간 곳은 일본의 대표적인 NHK 방송국. 하지만 그녀의 경력과 작품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방송국에서 그녀와 작품에 대해서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 그녀는 조용히 짐을 싸서 나왔다. 오기가 생겼다. 일본의 채널 순서대로 방송국을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그 다음 찾아간 곳이 ch4의 니혼 TV였다. 니혼 TV는 그녀의 작품을 인정했고,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대우로 계약을 맺었다. 방송국은 프로그램 1분당 2백만원의 제작비를 주기로 했다. 24시간 일본어 통역을 붙여줬고, 일본에 머무는 기간 동안 편집실과 호텔을 제공받았다. “제 작품을 보고 사람들은 ‘우연히 찍었네’ ‘조작됐다’ 등의 이야기를 했어요. 제 피와 땀으로 촬영한 작품을 보고 무시를 한 거죠. 그런데 니혼 TV는 별 경력도 없는 저의 가능성을 높이 샀어요. 전세계 외신 기자들이 아프간에서 취재를 했지만, 부르카 뒤에 숨은 여성들을 취재한 기자는 아무도 없었거든요. 제가 최초로 해냈다는 것을 인정받은 거죠. 그 다큐멘터리가 일본 방송국에서 방영됐을 때 시청률도 꽤 높았어요. 일본과 우리나라의 정서가 통할지 걱정했는데, 휴머니즘은 전세계의 공통 언어라는 것을 그때 확인할 수 있었죠.” 녀의 후속작은 ‘루비나의 편지’라는 작품이었다. 일본 초등학생이 아프간으로 보낸 구호품을 받은 난민 캠프의 소녀들의 모습을 담았다. 이 작품 역시 큰 화제를 모았고, 방송이 나간 뒤 아프간으로 보내달라는 학용품이 트럭째 방송국으로 오기도 했다. 이제 일본에서도 이름을 알리게 됐고, 2004년에는 니혼 TV의 ‘10대 디렉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생과 사를 넘나들던 이라크는 제2의 고향 지금까지 그녀가 다녀온 나라는 30여 개국이나 된다. 그중 가장 좋아하는 나라는 이라크다. 이라크가 ‘제2의 고향’이라고 선뜻 말할 정도다. 60세가 되면 이라크로 넘어가서 살 계획도 세웠다. “아프간에 있을 때 외신 기자들로부터 이라크가 몰락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때는 믿지 않았죠. 아프간에서 카슈미르를 거쳐 이라크에 들어갔어요.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거든요. 혹시라도 전쟁이 난다면 전쟁 전의 모습을 기록하고 싶었죠. 그 인연으로 정말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어요. 언제라도 이라크에 들어가서 촬영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됐습니다.” 외신 기자와 승부를 하기 위해서 위험하다고 소문난 이라크 북부를 이 잡듯이 샅샅이 뒤졌다. 한때는 바그다드 은행에서 돈을 훔쳐나오는 사람들을 쫓아가 촬영하다 총으로 위협당하기도 했다. 생과 사의 갈림길을 경험한 것이다. 하지만 이틀 만에 그녀는 충격을 이겨내고 다시 카메라를 들었다. 촬영 중 학교가 폭파되는 현장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렇게 그녀는 이라크에서 수많은 위험을 경험했고, 또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이라크인들은 그녀를 친구로 인정했고, 그녀의 촬영이라면 모든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이라크 친구들은 그녀를 ‘레일라’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그녀가 한국인 최초로 자이툰 부대를 촬영할 수 있었던 것도 이라크를 가장 잘 아는 PD였기 때문이다. 당시 자이툰 부대가 이라크에 들어갔을 때 그녀는 아르빌에 터를 잡고 있었다. 국방부와 수많은 교섭 과정을 거쳐 유일하게 그녀만이 자이툰 부대를 촬영하게 됐고, ‘파병, 100일간의 기록 자이툰 부대’라는 다큐멘터리가 탄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분간 그녀는 이라크에 공식적(?)으로는 들어가지 못한다. 한국 정부가 그녀의 이라크행을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당분간 이라크에 들어가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이라크에 있는 친구들과는 연락하고 지낸다. 그녀는 작품 준비를 위해 곧 일본으로 떠난다. 방송국과 에이전시의 협의가 끝나는 대로 소재를 확정할 것이고, 또 짐을 꾸려 제3의 나라로 떠나게 될 것이다. “제 관심은 분쟁 지역뿐만 아니라 환경, 장애인, 여성 등 다양해요. 오늘 결심하면 내일이라도 떠날 수 있어요. 제가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어요.” 그녀의 꿈은 세계적인 저널리스트가 되는 것이다. 현재 일본과 한국을 오가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지만, 곧 미국에서도 활동할 계획이다. 그녀의 작품은 이미 유럽과 영국 방송국에서도 방영된 적이 있다. 김영미 PD의 시선과 발걸음은 이제 전세계로 뻗어 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저널리스트 김영미’라는 외신 기사가 한국으로 전해져오는 날이 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긴다. 그녀의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글 / 최영진 기자 ■사진 / 원상희·김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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