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총 4,299 건 검색)
- ‘교제 살인’ 20대 의대생, 1심 징역 26년···“무방비한 피해자 살인”
- 2024. 12. 20 10:31 사회|사회
- ... 상당히 신뢰하고 의지했던 것으로 보이고, 피고인은 무방비한 상태의 피해자를 살인했다”며 “피해자의 지인들은 이 사건 범행으로 피해자를 다시는 볼 수 없게 됐고, 상실감과 충격감, 정신적 고통의...
- 교제살인의대생
- 전세사기 피해자 910명 추가 인정···누적 2만5578명
- 2024. 12. 20 07:17 경제|경제
- ... 받아 보증금을 전액 돌려받을 수 있는 220건은 피해 인정 대상에서 제외됐다. 앞선 심의에서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해 이의신청을 낸 사람 중 77명은 피해자 요건을 충족한다는 사실이 확인돼 이번에...
- 전세사기 피해
- 황의조, 선고 앞 2억 기습 공탁…피해자 “합의 생각 없다” 거부
- 2024. 12. 17 20:55 사회
- ... 영상을 유포하고 협박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형수 A씨에 대한 1심 선고를 하루 앞두고도 A씨 대신 피해자에 대한 공탁금 2000만원을 냈다. 당시 피해자는 “누구와도 합의할 생각이 없고 공탁금을 받을...
- ‘불법촬영’ 황의조, ‘피해자 거부’에도 2억원 ‘기습 공탁’ [플랫]
- 2024. 12. 17 15:26 사회|사회
- ... 경우 합의금 등을 법원에 맡기는 제도다. 피해 회복 취지에서 도입됐다. 그러나 도입 취지와 달리 피해자 의사와 무관하게 일방적으로 법원에 공탁금을 맡겨 피고인의 양형에 유리한 사유로 반영되는 점이...
- 플랫
스포츠경향(총 1,204 건 검색)
- 아크링크, 의뢰 즉시 몸캠피싱 피해자 낙인 해소하는 혁신 솔루션 개발
- 2024. 12. 20 15:54 생활
- 24시간 내 구제 완료, 기술과 심리적 지원으로 완전한 회복 지원 아크링크는 최근 기술 업데이트를 통해 의뢰 즉시 몸캠피싱 피해자의 이미지를 보호하고, 사회적 낙인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혁신적인 솔루션을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기존 24시간 소요되던 구제 프로세스는 대폭 단축되었으며, 초기 단계에서부터 피해자가 불필요한 의심이나 부정적인 시선을 피할 수 있도록 돕는다. 특히, 아크링크는 현재 특허 출원 중인 ‘이미지 지문을 활용한 피해 데이터 추적 기술’을 솔루션에 적용했다. 간단한 과정으로 피해 구제에 적용 가능한 이 기술은 피해자들이 보다 빠르고 효과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아크링크는 여기서 더 나아가, 단순히 기술적 지원에 머무르지 않고 몸캠피싱 피해자들이 완전히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돕는 다각적인 사회심리학적 솔루션을 개발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솔루션은 심리적 회복을 위한 상담 지원, 피해자와 가족 간의 관계 회복을 돕는 프로그램, 피해 극복을 위한 맞춤형 가이드 등을 포함한다. 박민재 대표는 “몸캠피싱 피해는 단순히 기술적인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삶과 심리에 큰 영향을 미치는 만큼 종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며, “피해자 분들이 빠르게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심리적, 사회적 지원을 강화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혁신적인 솔루션은 이미 많은 피해자들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으며, 아크링크는 이를 기반으로 국내외 시장에서 더 많은 피해자를 돕기 위한 확장을 계획하고 있다.
- 정지선, 과거 폭행 피해자였다…“국자·뚜껑으로 맞았다” (비보티비)
- 2024. 12. 19 15:48 연예|연예
- ‘비보티비’. 캡처 ‘흑백요리사’에 출연해 화제를 모았던 정지선 셰프가 주방에서 폭행을 당한 적이 있다고 고백을 했다. 지난 17일 유튜브 채널 ‘비보티비’에는 ““나 셰프해도 될까?” 송쎄오 인생 첫 전을 맛 본 정지선의 반응은?”라는 제목의 영상이 올라왔다. 이날 송은이와 정지선 셰프는 시청자들과 Q&A 시간을 가졌다. 작성자 A는 “정지선 셰프님을 뒤이어 중식계의 New 여신이 되고 싶은 셰프 지망생이다. 여전히 웍질은 무겁고, 서툴고 저 말고는 다 남자 셰프님들이다. 다들 친절하지만 잘 섞이지 못하는 것 같아 고민이다. 중식 셰프로서 갖춰야 할 덕목과 힘들었던 순간을 어떻게 이겨냈는지 조언해달라”고 적었다. 이에 정지선 셰프는 “저도 그랬다. 섞이지가 않더라”라며 공감을 표했다. 이후 “중식 군기가 그렇게 세다고 하던데”라고 송은이가 운을 떼자 정지선 셰프는 “때리기도 하신다”라고 털어놨다. “맞았냐”는 송은이의 질문에 “당연하다. 저는 국자로도 맞고, 뚜껑으로도 맞아봤다”라고 답했다. 이어 그는 “한 번은 그걸 봤다. 주방님이 막 웍을 돌리다가 화가 나서 그 웍을 집어 던졌다. 그만큼 되게 무서웠다. 주방이. 저는 진짜 그걸 보면서, 와 진짜 무섭다”라고 당시의 상황을 전했다. 그러면서 “‘진짜 (요리) 공부를 많이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남자 셰프들에 비해 여자 셰프가 너무 없다 보니까 내가 뭔가 요리를 더 잘하던가 그들보다는 유식해져야 된다”라며 작성자를 향해 조언을 건넸다.
- ‘페이스미’ 이민기X한지현, 7년 전 사건 피해자 사진 들이밀며 사실 적시
- 2024. 12. 12 19:59 연예|연예
- 웨스트월드스토리 이민기와 한지현이 마지막 승부수를 띄운다. 12일 오후 9시 50분 방송되는 KBS2 수목드라마 ‘페이스미’(연출 조록환/ 극본 황예진/ 제작 웨스트월드스토리) 최종회에서는 차정우(이민기 분)와 이민형(한지현 분)이 7년 전 발생한 살인 사건 진실 추적에 종지부를 찍는다. 앞서 11회 방송에서 정우와 우진이 쓰러진 윤서희(양소민 분) 그리고 7년 전 발생한 윤혜진(하영 분)의 사건을 두고 한계에 다다른 분노를 표출하는 장면은 3.4%(전국 가구 기준, 닐슨 코리아 제공)까지 치솟으며 안방극장에 매서운 기류를 맴돌게 했다. 방송에서는 7년 전 발생한 정우의 여자친구 혜진 살인사건과 관련 모든 정황을 파헤친 정우와 민형이 정공법을 택한다. 정우는 한우진(이이경 분)을 찾아가 우연히 머리를 다친 것은 맞지만 혜진의 사인이 단순 사고사가 아니었다고 밀어붙인다. 또한 우진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로 흥분하게 만드는데. 민형은 당시 수사를 맡았던 최형일 팀장(이재하 분)에게 국과수 서류를 내밀며 진석이 검찰에 송치됐을 때 해당 서류가 빠져 당시 수사에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진과 최 팀장은 증거를 내밀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안에 대해 강하게 부정한다. 그런가 하면 민형의 친오빠이자 7년 전 혜진 살인 사건의 진범으로 지목됐던 이진석(윤정일 분)의 재심 공판이 열린다. 해당 공판의 변호사인 박채경(강다현 분)은 우진의 DNA 감정 결과서를 제출하며 무죄를 주장한다. 판사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이목이 집중되는 가운데, 과연 민형과 어머니의 바람대로 진석이 억울한 누명을 벗을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공판이 끝난 후 그를 기다리고 있던 정우는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조심스럽게 입을 뗀다. 그리고 정우는 진심을 담은 사과를 해 진석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천적이었던 두 사람 사이에 오고 간 대화와 이로 인해 관계가 어떻게 변화할지 마지막 방송에 대한 기대감이 솟구친다. 수목드라마 ‘페이스미’ 최종회는 12일 밤 9시 50분 안방극장에 배달된다.
- 유인나, ‘로맨스 피싱’ 피해자였다…“사진 도용→200만 원 빌려”
- 2024. 12. 11 15:56 연예|연예
- 유인나. ENA 제공 배우 유인나가 ‘로맨스피싱’의 피해자였다고 고백했다. 지난 10일 유튜브 채널 ‘유인라디오’에는 “[사랑인나]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아요? | 이달의 남주 박정민”라는 제목의 영상이 올라왔다. 이날 라디오에는 배우 박정민이 게스트로 출연했다. 유인나는 “저는 되게 신기한 일이 있었다. 정말 오래 전이다. 20대 초반에 제가 카페에서 알바를 하고 있는데 어떤 남자 분이 오더니 ‘혜영아’라고 하더라. 저는 혜영이가 아니라고 했는데도 혜영이 맞다고 하더라”라고 운을 뗐다. 이어 그는 “무서웠다. 저는 ‘인나’라고 그랬는데 그 남자가 한숨을 쉬더니 폴더폰을 꺼내 내 사진들을 다 보여줬다. 다 내 사진들이었다. 그래서 이게 무슨 일인가 했더니 어떤 여자 분이 싸이월드에서 내 사진을 다 퍼다가 이 남자한테 내 사진에 대한 사연까지 설명했다더라”라고 말했다. ‘유인라디오’. 캡처 유인나는 이후 ‘로맨스피싱’인 걸 깨달았다. 유인나는 “돈 까지 빌려갔다. 100만 원인가 200만 원인가. 그 당시에 내가 들었을 땐 너무 큰 돈이고 ‘이건 제가 아니다. 제 싸이월드 들어가 보셔라’ 이렇게 해서 그 혜영 씨한테 ‘너 내가 진짜 이 사진 속 사람 만났고 경찰에 신고한다’고 하자 그제야 연락이 와서 돈을 갚았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유인나는 “물론 나쁜 일이었지만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내 인생의 에피소드다! 이렇게 남아있다”고 전했다. 한편 유인라디오 속 코너 ‘사랑인나’는 매주 화요일 저녁 7시 ‘유인라디오’에서 시청 가능하다.
주간경향(총 92 건 검색)
- [취재 후] 성폭력 피해자들은 더 많이 말해야 한다(2024. 07. 10 06:00)
- 2024. 07. 10 06:00 사회
- 이혜리 기자 성폭력 피해자를 취재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어떤 독자들은 성폭력 피해자의 이야기를 다룬 기사가 피해자 관점에 지나치게 치우친 것 아니냐 할지 모른다. 실제론 그렇지 않다. 최대한 사실에 부합하는 기사를 쓰기 위해 기자는 피해자에게 피해 본 과정을 세밀하게 묻고, 또 묻는다. 각종 자료를 확인하고, 필요하면 교차 검증도 한다. 피해자로서는 고통스러운 순간을 되뇌어야 하고, 2차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취재에 응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성폭력 피해자의 이야기는 숨겨지지 말아야 한다는 게 2018년 미투(#MeToo·나는 고발한다) 운동의 취지였다. 이는 각자의 마음속에 담아뒀던 성폭력 피해를 세상으로 끄집어내고 공적인 공간에서 말하면서 함께 해결을 도모하자는 것이었다. 주축은 여성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해 대검찰청 통계 기준 성폭력 범죄자의 96.5%는 남성, 피해자의 87.5%는 여성이었다. 여전히 피해는 피해로 다뤄지지 못한다. “검찰은 무리한 기소를 했어요. 제가 아무리 설명을 해도 ‘피해자는 이럴 것’이라는 범위에서 조금 벗어나니까 꽃뱀을 보는 시각으로 ‘그게 말이 돼요?’라고 묻는 거예요. 말이 안 될 이유는 무엇인가요? 제가 정말로 겪은 것인데요.” 교제폭력(데이트폭력)을 신고했는데 검찰이 무고죄로 기소했고 최근 법원에서 무죄를 확정받은 A씨의 말이다. 피해자 진술 신빙성을 판단할 때 이른바 ‘피해자다움’의 편견을 가져선 안 된다는 대법원 판례가 나온 지 6년이 됐지만, 성폭력 피해자들은 가해자에게 역고소를 당하거나 무고죄로 수사받을 수 있다는 부담에 시달리고 있다. 기자가 만나본 그 어떤 판사도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 피해자의 진술을 믿는다”고 한 사람은 없지만, 편견을 배제하려는 노력조차 흔히 피해자 관점에 지나치게 치우친 것 아니냐는 반론에 부딪힌다. 급기야는 ‘피해의 경쟁’도 벌어진다. 여러 독자가 교제폭력 문제를 다룬 기사에 “남성 피해는 왜 외면하느냐”, “데이트 꽃뱀이 더 위험하다”고 댓글을 썼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그 성별이 무엇이든 성폭력 피해를 본 사람은 보호받아야 한다. 타인을 무고한 사람은 마땅한 책임을 져야 한다. 동시에 어떤 맥락에서 성폭력이 발생하고 처리되는지, 본질이 무엇인지도 같이 고민해야 한다. 피해는 모두 피해다.
- 취재 후
- [취재 후] 피해자를 괴롭히지 않았기를(2024. 07. 03 06:00)
- 2024. 07. 03 06:00 사회
- 김찬호 기자 ‘사적 제재’를 적었다, 지우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현상을 멀리서 보는 것과 가까이서 하나하나 뜯어볼 때 생기는 괴리감이 문제였습니다. 사회적 분노가 들끓고 있는 상황에서 가장 쉬운 방법은 ‘동조’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적 제재가 괜히 나오겠나. 가해자 처벌하라’는 논리에 편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위해선 눈 감아야 하는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유튜버의 폭로에 불안한 ‘피해자의 목소리’였습니다. 사회적 ‘분노’의 힘은 대단했습니다. 수십 년 전 사건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데 이어 직·간접적으로 엮인 사건 주체들이 속속 사과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 결과를 자꾸만 돌아보게 되는 것은 ‘이 분노가 누굴 위한 것인지, 그 결과는 무엇을 파괴하고 만든 것인지’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유튜버의 가해자 공개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과거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과정에서 피해 사실이 나오게 됩니다. 사람들의 호기심은 선의로만 작동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사건을 찾고, 또 다른 누군가는 이를 돈벌이 기회로 여깁니다. 그렇게 50만 유튜버, 300만~400만 조회수의 영상이 탄생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의 의견’은 끼어들 자리가 없었습니다. 가해자가 모두 공개되고, 관계자들이 대국민 사과를 하면 속이 시원한 것이 사건을 까맣게 잊고 살아온 ‘나’인지, 긴 시간을 고통 속에 산 ‘피해자’인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전문가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는 유명 사건 피해자의 ‘일상’에 관해 설명하며 “긴 시간 동안 조금씩 조금씩 봉합돼 가던 상처가 이런 일 한 번으로 다시 터져버린다. 그리고 피해자는 ‘그때 그 사건 걔’로 사람들 기억 속에 남는 것에 괴로워한다”고 말했습니다. 감히 ‘사적 제재’의 기화가 된 사건이 무엇인지 정확히 지칭하지 못하겠다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기사에 쓴 문장 한 줄, 사용한 단어 하나가 혹시라도 피해자를 괴롭히지 않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 취재 후
- “사람 죽었는데 벌금형? 피해자 탓하는 사측과 끝까지 싸울 것”(2024. 07. 01 06:00)
- 2024. 07. 01 06:00 사회
- ‘5년의 투쟁’ 고 정순규씨 아들 정석채씨 인터뷰 경동건설 산재사고 사망자 고 정순규씨의 아들 석채씨가 지난 6월 25일 주간경향과 인터뷰하고 있다. 정지윤 선임기자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은 후 ‘불과 먼지’라는 단편소설을 썼던 이창동 영화감독은 오래전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그 소설을 썼을 때는 뭔가 남겨놓아야 하겠다는 생각이었어요. 흔적이 없다는 게 제일 견디기 어려웠거든. 사람의 죽음에는 남이 기억하고 이야기하는 죽음이 있어요. 예를 들어 5·18의 죽음이 그렇죠. 하지만 어떤 죽음은 아무도 말하지 않아요. 놀랍지 않아요? 나는 놀라웠어요. 인간의 삶이 그럴 수 있다는 것이.” (2007년 3월, 씨네21 ‘끈질긴 이야기꾼의 도돌이표, 영화감독 이창동’) 우리는 어떤 죽음은 오래도록 얘기하지만 어떤 죽음엔 침묵한다. 2019년 10월 건설현장 산재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정석채씨(39)는 이런 차별에 몸서리치며 5년의 세월을 보냈다. “처음 1년여간은 그 누구도 손잡아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의 아버지 고 정순규씨는 부산의 한 아파트 공사현장 임시가설물(비계)에서 추락사했다. 사망에 이른 사실관계에 대해 사측인 경동건설과 하청업체는 고인 책임을 주장했는데 초동조사에 이 입장이 일부 반영됐다. 이어진 재판에서 사측은 안전조치 미비에 대해 유죄 판단(업무상과실치사죄·산업안전보건법 위반)을 받았지만, 형량은 집행유예와 벌금형으로 가벼웠다. 아들 석채씨는 아버지 시신의 상태로 미루어볼 때 사측 주장이 사리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재조사를 위해 처절하게 싸웠지만, 이상하게도 사회적 주목은 받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사측 관계자는 고인 장례식장에서 폭행·감금·협박 피해를 입었다며 유족을 고소한 뒤 “사건을 종결하면 고소를 취하해주겠다는 압박까지 했다”고 한다. “사회적 관심 받지 못했던 처절한 싸움··· 청년 노동자였다면 분위기 달랐을 것. 중년 노동자의 죽음도 똑같이 억울하다는 것 말하고 싶어. 다큐 영화로라도 이 억울함 끝내 알릴 것.” 산재사망률이 경제협력개발국가(OECD) 최상위권인 ‘산재국가 한국’. 일하다 죽지 않을 권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져 중대재해처벌법이 제정되는 등의 성과가 있었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산재 유족들이 진상규명을 위해 거리에서 싸우고 있다. 특히 석채씨처럼 대중의 관심을 얻지 못한 유족들의 싸움은 더욱 처절하다. 지난 6월 25일 경향신문사에서 석채씨를 만나 아버지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싸운 지난 5년에 관해 들었다. -아버지인 고 정순규씨의 죽음의 진상이 밝혀졌다고 보나. “사측은 사고 직후부터 책임을 면하기 위해 재해자 과실로 인한 사망으로 몰아갔다. 아버지가 임시가설물(비계)에 부착된 사다리를 위험하게 이용하다가 추락사했다는 주장이었다. 첫 단추인 노동청의 재해조사에 사측 주장이 그대로 반영됐고, 노동청으로부터 사건을 송치받은 검찰은 재해조사대로 기소했다. 당시 경찰 판단은 달랐다. 경찰은 아버지가 비계 위에서 작업하던 중에 옹벽과 비계 틈 사이로 여러 차례 튕기면서 추락했을 것으로 봤다. 시신에 수많은 골절이 있었고, 작업복은 갈기갈기 찢겨 있었기 때문에 경찰 추정이 맞았다고 본다.” -항소심에서도 집행유예 선고는 뒤집히지 않았다. “사고현장이 사라진 상태에서 노동청 재해조사 결과를 뒤집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저희에게 유리한 진술을 해주셨던 아버지 동료가 계셨는데 정작 수사기관에선 말씀을 바꾸셨다. 사람이 일하다 죽었는데 벌금 2000만원에 끝나버렸다. 설사 실수가 있었더라도 죽지는 않게 안전조치를 해놓았어야 하는 거 아닌가.” -최근 하청업체 소장을 ‘사문서 위조’로 고소했고, 소장에게는 벌금 500만원이 선고됐다. “피해자 과실로 몰아가는 사측 행태를 어떻게든 밝혀내 세상에 보여주고 싶었다. 재판기록에서 아버지가 당시 현장의 안전관리 담당자였다는 사측 제출 서류를 봤다. 아버지가 안전관리자였기 때문에 안전조치 미비에 대해 아버지 책임도 있다고 주장하려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제가 아는 아버지 필체가 아니었다. 필적 감정을 의뢰해 위조 사실을 확인했다. 검찰이 하청업체만 약식기소했는데, 원청인 경동건설의 개입을 밝혀내지 못한 것이 아쉽다.” 건설현장 산재사망에서 사측이 ‘피해자 과실’을 주장하는 사례는 흔하다. 2019년 4월 경기도 수원의 한 건설현장 엘리베이터에서 추락사한 청년노동자 고 김태규씨의 사건에서도 사측은 고인이 발을 헛디뎌 사망했다는 주장을 펼쳤다. 다만 김씨의 사건에선 재판부가 사측의 주장을 거의 받아들이지 않았다. 안전수칙 위반 등을 엄중하게 따져, 사측 관계자들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고 정순규씨의 사건 항소심을 담당했던 이주희 변호사는 “건설현장의 산재는 녹화 영상도 없고, 그 순간을 정확히 목격한 사람을 찾기도 어렵다는 특성이 있다”면서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원칙을 따르는 형사법정에선 사고경위 부정확성이 사측의 책임을 덜어주는 결과로 종종 이어져 답답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산재사망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졌지만, 고 정순규님의 사건은 사회적 주목을 많이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사건 초기 공론화가 이뤄져 사망 원인만 바로잡았어도 사측의 책임을 제대로 물을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별 관심을 얻지 못했다. 1년이 흘러 2020년 가을 강은미 정의당 의원이 국정감사에서 다뤄주면서 ‘중대재해 없는 세상만들기 부산 운동본부’와 천주교의 도움을 받게 됐다. 솔직히 청년 노동자의 이야기였다면 분위기는 달랐을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중년 건설노동자의 산재사망도 똑같이 억울한 죽음이다. 우리 같은 유가족의 얘기도 많이 들어줬으면 좋겠다.” -사측이 유족을 되레 고소한 적도 있다고 들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틀 뒤 빈소에 하청업체 관계자 두 사람만 찾아왔다. 유족과 친지, 지인들이 ‘왜 경동건설은 오지 않고 너희만 오느냐’며 화를 냈다. 누군가는 그들 멱살을 잡기도 했는데, 이것을 가지고 하청업체가 유족을 감금·폭행·협박으로 고소했다. 그러고는 ‘고소 취하해줄 테니 여기서 끝내자’라고 제안하더라. 나중에 수사기관이 ‘혐의없음’으로 종결하자, 항고해 제 친구 두 명이 벌금형을 받았다. 아버지 사망 직후엔 ‘술 먹고 일하다 그렇게 됐다’는 등의 명예훼손성 댓글이 붙었고(구급대가 혈중알코올농도를 측정했지만, 음주 상태가 아니었다) 지금도 관련 기사에 저를 조롱하는 댓글들이 붙는다. ‘정석채 XX, 네가 돈이 끝까지 필요 없는지 두고 보자’ 하는 식이다.” -아버지의 사건에 대해선 형사 처벌이 완료됐다. 그럼에도 산재 관련 집회 등에서 계속 싸우고 있다. “제발 좀 그만 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저희같이 관심 못 받는 산재 유족에게 힘을 보태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올해 1월 서울 마포구의 건설현장 비계 위에서 노동자가 떨어져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 70세의 고 문유식님이다. 안전수칙을 어긴, 매우 위험한 비계였는데 저희 때와 마찬가지로 사측이 고인 과실을 주장하며 장례식장에도 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사건 역시 다들 별 관심이 없다. 저라도 돕고 싶어서 얼마 전 기자회견 자리를 만들었다.” -유명 연예인들의 스타일리스트로 일하다 생업을 접고 싸워왔다. 앞으로 계획은. “계속 말하고 쓰지 않으면 잊히는 것 같다고 생각해왔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세상에 남기기 위해서 다큐영화를 준비 중이다. 최근 한 단편영화제에 시나리오를 출품했다가 기획상도 받은 만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저에겐 저만의 투쟁이 아직 남아 있다. 영화 <다음 소희>, <한공주>를 보고 같이 분노하는 이들이 많이 생겨난 것처럼, 언젠가 제 영화도 산재 피해자들에게 그런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
- “묻고 싶다, 피해자에게 미칠 영향 고민한 적 있나”(2024. 06. 24 06:00)
- 2024. 06. 24 06:00 사회
-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인터뷰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이 지난 6월 18일 서울 마포구 사무실에서 주간경향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이겨내 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잊지 않고 관심 가져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지난 6월 13일 한국성폭력상담소가 공개한 밀양 성폭력 사건 피해자의 편지 속 내용이다. 사건이 알려진 지 이미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럼에도 해당 편지 속 피해자는 ‘여전히 가끔 죽고 싶거나 우울증이 심하게 와서 멍하니 누워만 있을 때도 있다’고 일상을 설명했다. 그에게 지난 시간은 ‘끊이지 않고 이어져 온 상처의 연속’이었던 셈이다. 피해자의 편지는 지난 한 달, 밀양 성폭력 사건이 재공론화된 과정을 돌아보게 한다. 가해자를 처벌한다는 ‘미명’ 아래 사건은 다시 헤집어졌고, 피해자의 목소리까지 공개됐다. 모든 과정에서 피해자의 동의는 없었다. 문제 제기가 있자 이번에는 “정의를 위한 것이니 피해자는 가만있어라, 협조하라”는 요구까지 나왔다. 어느 날 갑자기 20년 전 사건을 떠올린 이들이 20년을 고통받아온 이에게 던지는 충고, 비난은 대체 ‘정의’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한다. 지난 6월 18일 밀양 사건 피해자를 지원해온 한국성폭력상담소를 방문해 김혜정 소장을 만났다. 김 소장은 사건에 대한 사회적 분노부터 피해자가 받을지 모르는 상처까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의 말속에는 “우리 사회가 피해자를 다시 고통으로 내몰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근원적 물음이 담겨 있었다. -밀양 성폭력 사건이 피해자 의사와 무관히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보나. “우리는 피해자 말고도 생존자라는 용어를 쓴다. 피해 이후에도 삶을 살아가는 존재라는 뜻이다. ‘역사적인 사건’의 피해자들도 마찬가지다. 살아남아 꿋꿋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 ‘끔찍하다’고 여겨지는 사건들이 종종 영상으로 만들어진다. 기성 언론을 포함해 유튜버까지 과거 사건을 꺼내 콘텐츠로 만든다. 공익목적으로 제작되는 경우라도, 사건 당사자인 피해자들은 트라우마가 자극되고 일상 안정이 깨지게 된다. 묻고 싶다. 영상을 제작할 때 ‘피해자에게 어떤 영향이 있을지 고민한 적 있나’, ‘자극적으로 조회수를 늘리는 데만 집중한 것은 아닌가’. 가해자를 고발하고 사건을 ‘끌올’해 정의를 구현하겠다면 그 영상으로 인해 피해자가 짊어져야 할 짐까지 함께 나눠질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어떤 ‘분노’든 피해자의 일상회복과 삶을 고려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게 정의야’라고 말하기 전에 평등하게 연대하는 사람이 많아질 때 정의는 가능해진다.” -유튜버가 ‘미뤄진 정의’를 실현하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국가도, 기성 언론도 못 하는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대중적 분노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밀양 성폭력 사건 가해자 공개 과정을 보면 피해자와 가족들이 영상을 내려 달라고 호소해야 했고, 사실관계를 다퉈야 했고, 유튜버를 옹호하는 사람들로부터 비난까지 받았다. 또 가해자 신상 공개를 하거나 판결문을 공개할 때는 피해자 동의가 있었거나 뜻인 것처럼 말했다. 적어도 공개한 사람이 따로 있는데, 그 후 발생하는 문제의 책임은 피해자에게 귀결되면 안 되는 것 아닌가.” -가해자 폭로를 하는 대표적인 유튜버는 여전히 ‘정확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피해자의 일부 가족으로부터 공론화시키는 쪽이 맞다고 들었다’고 밝혔다. “기자회견 등을 통해 이미 밝혔다. 왜 피해자 가족들과의 연락 중 일부만을 발췌해 소통이 끝났고, 모두 동의했다고 주장하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유튜버의 개인적 주장이 반영된 선택적 편집이다. 피해자는 동의한 바 없다. 이런 상황이 만드는 모순은 피해자들이 유튜브 계정 주인들과 ‘위험한 소통’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언제 영상을 내려줄지 몰라 계속 기다리고 전전긍긍하며 부탁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왜 피해자가 이들의 시혜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 내몰려야 하나.” -밀양 사건이 다시 주목받으니 ‘잘된 것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피해자가 내일은 또 어느 방송, 유튜버가 사건을 공개할지 불안에 떨어야 하는 상황이 정말 잘된 것이라고 할 수 있나. 이 사건을 둘러싼 여론을 보면 네 가지 스펙트럼이 있다. 우선 ‘피해자는 빠져라. 우리는 가해자를 나락 보내는 것이 목표다’라는 분들이다. 이들은 국민 알권리를 내세우며 피해자의 평온할 권리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와 정반대로 ‘피해자가 원하지 않는다면 나도 공론화 영상을 보지 않겠다’는 분들이 있다. 이들 사이에는 ‘힘들다는 것은 알겠는데 피해자가 공론화에 나서 달라’고 요구하는 분들, ‘가해자가 처벌받지 않은 현실은 분노스럽다. 그럼 무엇을 해야 하느냐’ 고민하는 분들이 있다. 어떤 ‘분노’든 피해자의 일상회복과 삶을 고려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게 정의야’라고 말하기 전에 평등하게 연대하는 사람이 많아질 때 정의는 가능해진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이 지난 6월 18일 서울 마포구 사무실에서 주간경향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서성일 선임기자 -피해자 입장을 고려해 달라고 하면, ‘도와주려고 했더니 관심 끄겠다. 알아서 하라’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도 있다. “밀양 사건 피해자는 경찰 조사만 8~9번을 받았다. 사건의 실체가 알려진 것은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운 피해자의 용기 덕분이었다. 숨죽이고 아무것도 못 한 채 살아온 사람이 아닌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한 사람이란 것이다. 밀양 성폭력 사건이 ‘끌올’될 때마다 피해자는 2004년 열다섯 살 당시로 되돌아가야 한다. 동시에 완전히 무력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전형적 피해자로 묘사된다. 피해자의 주체성이 사라지는 것이다. 생존자와 같은 입장에서 상처를 극복할 수 있게 동료가 돼 달란 것이지, ‘너는 가만히 있어, 내 방식대로 해결해 줄게’라고 요청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가해자를 응징해야 한다는 의견도 여전히 많다. “가해자 신상 공개만이 미뤄진 정의를 바로잡는 것인가. 피해자가 우리 사회에서 잘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 역시 ‘정의를 바로 잡는 것’이다. 또 성폭력 공소시효 폐지, 피해자 의료, 법률, 주거 지원 예산확충 등 사람들의 관심, 노력이 필요한 곳이 많다. 이러한 부분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는 것 역시 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사적 제재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나. “밀양 사건 재점화 과정이 피해자가 답답하고 무력감을 느끼는 시간이 되면 안 된다. 그렇기에 피해자가 ‘내 뜻이 아니다’라고 하면 존중하고 반영했으면 좋겠다. 피해자가 일상을 회복하는 것 역시 중요한 정의라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삶의 여정을 이해하고 깊이 지지하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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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원 살인사건 그 후 14년…피해자 어머니 이복수씨 인터뷰
- 2011. 10. 28 16:32 화제
- 지난 10월 10일, 일명 ‘이태원 살인사건’의 유력 용의자인 아서 패터슨이 미국에서 붙잡혀 한국 송환 여부에 대한 인도재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1997년 4월 일어난 한 대학생의 죽음은 피해자와 용의자는 있으나 범인은 밝혀지지 않은 미해결사건으로 남아버렸고, 그렇게 14년이 흐른 지금 다시 한번 세상의 눈과 귀를 집중시키고 있다. 그리고 아직도 아들 생각에 밤잠을 설친다는 어머니는 이번에는 반드시 아들의 한을 풀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사건의 전모 아직도 많은 이들이 1997년 발생한 ‘이태원 살인사건’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사건의 자세한 전말은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아무도 죗값을 치르지 않은 ‘이상한’ 사건으로 남았다는 것 정도는 세간에 잘 알려져 있다. 1997년 4월 3일 밤 10시께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의 한 햄버거 가게 화장실에서 홍익대 휴학생이던 조중필씨(당시 23세)가 휴대용 주머니칼에 찔려 숨진 채 발견됐다. 당시 피투성이인 채로 소변기 옆 귀퉁이에 쓰러져 있던 중필씨는 오른쪽 목 부위 세 곳, 가슴 부위 두 곳, 왼쪽 목 부위 네 곳, 무려 아홉 곳이 칼에 찔려 있었다. 급히 도착한 119구조대가 상태를 살폈을 때 이미 그는 사망한 상태였다. 용의자로 지목된 사람은 두 사람이었다. 당시 같은 가게에서 햄버거를 먹다가 중필씨가 있는 화장실에 들어간 아서 패터슨(당시 18세)과 에드워드 리(당시 17세). 두 사람은 모두 미국 국적 소지자로 리는 미국에서 태어난 재미교포였고,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패터슨은 주한미군인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 와 있는 상황이었다. 수사당국은 이튿날 패터슨을 검거했고, 리를 쫓기 시작했으나 리는 4월 8일 검찰에 자수했다. 두 사람은 각각 살인죄와 증거 인멸 등의 혐의로 기소됐다.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됐다. 당시 검찰은 리를 살인범으로 판단하고 수사를 진행했다. 근거는 부검 결과와 주변인들의 진술 그리고 거짓말탐지기 결과였다. 부검의의 소견에 따르면 가해자는 피해자보다 키나 덩치가 크고 힘이 센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수사가 진행될 당시 패터슨의 키는 170cm에 못 미쳤던 반면 리는 키가 180cm가 넘고 몸무게가 100kg 가까이 나가는 체격이었다. 거짓말탐지기 또한 리는 거짓을 말하는 것으로 판독되면서 리가 범인일 가능성에 좀 더 무게가 실렸다. 결국 살인죄로 기소된 리는 1997년 10월 서울지방법원과 1998년 1월 서울고등법원에서 징역 20년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다시 항소한 1998년 4월 대법원은 ‘단독 범행을 단정하기 어렵다’라는 이유로 무죄 취지의 판결을 내리며 다시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이후 서울고등법원은 리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1999년 9월 열린 재상고심에서 대법원은 무죄 확정 판결을 내렸다. 그 사이 패터슨은 1998년 1월 서울고등법원에서 증거 인멸 등의 혐의에 대해 징역 장기 1년 6월, 단기 1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하던 중 그해 8·15 특사로 풀려났다. 피해자 가족은 리가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난 데 대해 항의하며 정황상 범인으로 판단되는 패터슨을 살인 혐의로 고소했고 검찰은 재수사를 발표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알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출국금지 상태에서 패터슨을 수사하던 검찰이 출국금지 연장을 제때 하지 않는 바람에 그 틈을 탄 패터슨이 미국으로 출국해버렸고 사실상 수사는 중단되고 만 것이다. 한 남자의 억울한 죽음에 얽힌 전모를 살펴보면 대강 이렇다. 그리고 2011년 10월 그동안 행적을 알 수 없던 용의자 패터슨이 지난 8월 미국 LA 현지 사법당국에 체포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사건이 발생한 지 14년 만이다. 살인죄 공소시효는 15년. 이제 6개월도 채 남지 않은 시간이다. 하지만 범죄인 인도 결정에 관련한 재판은 대개 길게는 3, 4년씩 걸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다양한 방안을 강구해봐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인생의 전부였던 아들, 암흑 같던 14년의 시간 지금 이 순간 패터슨의 송환 결정을 누구보다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아마 피해자 고(故) 조중필씨의 가족일 것이다. 1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는 어머니 이복수씨(69)는 하루 빨리 패터슨이 한국으로 송환돼 법의 심판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죄를 저지른 사람이 벌을 받아야 (사건이) 끝나는 거죠. 패터슨이 미국에서 체포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번에는 정말 억울하게 하늘나라로 간 우리 중필이 한을 풀어주고, 14년을 울면서 살아온 우리도 한을 풀게 되나보다 했더니 일단 그쪽에서 재판이 끝나봐야 안다고 하네요. 재판이 1년이 될지 그보다 더 길어질지도 알 수 없는데 그저 답답하기만 해요. 나는 점점 늙어가는데 결국 범인은 잡지도 못하고 가버리면 중필이 얼굴을 어찌 보나 싶고…. 아직까지 죽은 아들 붙잡고 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범인이 잡히지 않았으니 끝이 난 게 아니잖아요.” 애지중지 키우던 아들을 황망하게 잃은 뒤, 어머니는 하루도 마음 편히 누워본 적이 없다. 게다가 범인을 눈앞에서 놓치고, 풀어주고, 결국에는 아무도 죗값을 치르지 않았다는 사실이 어머니를 더욱 분하고 서럽게 만들었다. “지금도 그 이야기를 꺼내기만 해도 온몸이 덜덜 떨려요. 분하고 억울하고 속상하고 서럽고, 어떤 말로도 제 마음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거예요. 가슴에 굉장히 무거운 덩어리를 얹어놓고 사는 기분이었어요. 요즘도 자주 아들의 마지막 모습을 생각하곤 해요.” 사건이 있었던 1997년 4월 3일 밤, 그 시간부터 어머니의 세상은 암흑이 되었다. 아들이 병원에 있다는 경찰의 전화가 걸려왔을 때까지만 해도 그저 교통사고가 나서 입원을 했나보다 생각했었다. 급히 달려간 순천향대병원에서 아들의 얼굴을 보러 들어가려는 자신을 막아선 사람들이 “칼에 찔린 상태다”라고 이야기하기에 “우리 아들은 싸움은커녕 생전 욕 한 번 안 하던 아이인데, 다른 사람에게 잘못 연락한 거 아니냐”라고 물었던 어머니였다. 언제나 순하고 착했던 아들이 한밤중에 칼에 찔려 영안실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결코 믿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 이복수씨는 앨범 속 아들의 모습을 가만가만 손으로 쓰다듬었다. “참 훤칠했네요”라는 기자의 말에 “어릴 때부터 키가 컸어요. 초등학교 입학 때도 맨 뒤에 섰는걸요. 팔 다리가 길고 몸이 날씬해서 양복 입으면 모델같이 멋있었어요. 주변 사람들도 멋지다고 그랬어요. 중필이가 아주 미남은 아니지만 호감 가는 얼굴이거든요”라며 오랫동안 혼자서 속으로만 생각했던 아들의 이야기를 이것저것 꺼내놓았다. “당시에 저는 제대로 중필이를 보지도 못했어요. 사람들이 아버지만 들어가서 보고 저는 가지 말라고 하도 말려서요. 아홉 곳이나 칼에 찔렸다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처참했으면 다들 못 보게 했겠어요. 사실 제 눈으로 확인하면 믿고 싶지 않아도 사실이 될까봐 겁이 나기도 했어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때 얼굴이라도 만져볼 걸 그랬다는 생각에 후회가 돼요.” 위로 세 딸을 낳고 뒤늦게 얻은 귀한 아들이었다. 아들인데도 막내라 그런지 살가운 성격이었던 중필씨는 엄마를 자상하게 챙겼다. 공부도 잘하고 바른 성격이라 학교 선생님들이나 동네 어른들께도 늘 칭찬만 받았었다. “저는 제 인생에서 중필이를 전부로 생각하고 살아왔어요. 그때만해도 딸을 낳으면 죄인 취급받던 분위기였는데, 딸 셋을 낳고 중필이를 얻었으니 얼마나 소중했겠어요.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쁜 마음으로 애지중지 키웠던 아이예요. 그런데다 크면서 말썽 한 번 부린 적 없고, 딸들보다 저한테 더 살갑게 구는 정말 ‘엄마라면 껌뻑 죽는’ 그런 아들이었어요. 아버지도 그래서 중필이를 아꼈고, 누나들도 싹싹한 동생을 예뻐했고요.” 이 세상 어느 누가 제 자식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있겠냐마는 중필씨는 그렇게 어머니에게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존재였다. 가족 사이에서도 늘 웃을 일을 만드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중필씨가 하루아침에 사라졌고 그때부터 가족은 눈물로 남은 세월을 살아왔다. “집에 ‘웃음’이란 게 없어졌어요. 중필이 생각이 나도 남편이나 딸들 모두 힘든 거 아니까 이야기도 못 꺼냈어요. 다들 만날 울면서 지냈어요. 남편은 한때 저를 무척 원망하기도 했었어요. 그때 중필이가 군대에서 다쳐서 의가사제대를 하고 지내던 상태였는데 만약에 그냥 군대에 있었으면 이런 일은 없지 않았겠냐는 거죠. 남편은 그냥 있으라고 했는데 제가 의가사제대를 고집했거든요.” 다시는 볼 수 없는 아들을 생각하면 지나간 모든 일이 후회스럽고 아쉽지만, 특히 틈만 나면 “가족끼리 같이 여행 한 번 가자”라고 말하던 아들의 그 바람을 들어주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아프게 마음에 남아 있다. “중필이가 대학생이 되고 그렇게 클 때까지, 한 번도 가족 여행을 못 갔어요. 2006년이었나, 군대 가기 전 시간이 있을 때 진해군항제에 벚꽃 구경 가려고 했는데 제가 허리가 너무 아파서 결국 떠나질 못했어요. 그 다음해 봄에는 통증이 더 심해져서 또 못 가고요. 그 일이 있기 얼마 전에 가까운 데라도 다녀오자는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렇게 되고 만 거죠.” 죽지 않고 살았더라면 이제 서른여덟. 한창 왕성하게 사회생활도 하고 바쁘게 살아갈 시기다. 아마도 마음 따뜻한 좋은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주말이면 올망졸망 귀여운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아빠가 되어 있을 것이다. “14년 동안 매일 ‘중필이가 살아 있었다면’을 그려왔던 것 같아요. 이것도 했겠지, 저것도 겪었겠지, 이런 모습이 되었겠지, 저런 일도 있었겠지, 하면서요. 늘 사무치게 보고 싶지만 추석이나 설날 같은 때는 그리움이 더해요. 식구들 웃음소리가 새어나오는 다른 집을 보면 아들 생각이 더 많이 나기도 하고, 분한 마음이 다시 치밀어 오르기도 하고 그래요.” ‘잘못한 사람이 벌을 받는’ 상식이 이루어지는 사회 어머니 이복수씨를 비롯한 가족은 지난 14년 동안 조중필씨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기울여왔다. 도움이 될만한 시민단체를 찾아다니고 검찰, 국회 등의 권력기관에도 적극적인 해결을 촉구했다. 패터슨의 한국 송환과 재수사를 요구하는 집회를 하고, 시민들을 상대로 일일이 서명을 받으러 다녔다. 석연치 않았던 부실한 검찰 수사에 대해서는 대법원까지 가는 법정 투쟁을 벌여 2006년에 배상금 3천400만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아들이 세상에 없는데, 그리고 그 아들을 죽인 이들이 아무런 벌도 받지 않고 버젓이 살아가고 있는데, 돈이 무슨 소용이겠으며 어떻게 단념하고 조용히 살 수 있었겠는가. 어느 날 갑자기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故 조중필씨. 그는 누구보다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사진은 사건이 일어나기 얼마 전 조카와 함께 올림픽 공원으로 나들이를 나섰을 때와 대학 시절의 조중필씨 모습. 그는 지금 하늘나라에서 어떤 모습으로 이곳을 내려다보고 있을까. “얼마 전에 신문 보도를 보니 미국에서 잡힌 패터슨이 ‘한국에서는 나를 절대 못 데려 간다’라고 조롱했다면서요. 너무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더라고요. 사건 직후 재판받을 때도 그랬어요. 두 사람 모두 우리한테 미안한 기색 하나 없었어요. 그 사람들 부모들도 사과 한 번 없었고요. 그리고 저는 살인범이 내 자식을 죽여놓고 어떻게 그렇게 편하게 지낼 수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시비가 붙었던 것도 아니고, 재미로 찔렀다고 했다잖아요. 기가 막힐 뿐이었죠.” 지금도 법정에서 봤던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몸서리가 처질 정도로 소름이 돋는다는 이복수씨는 이번만큼은 꼭 용의자를 데려와 한국 재판정에 세우고 범인을 명확히 밝혀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단순한 분노나 복수심을 넘어 그렇게 되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14년 전 대한민국의 법과 권위를 믿고 아들의 사건을 맡겼던 어머니는 앞으로도 끝까지 대한민국 정부와 법을 원망하고 불신하며 살고 싶지 않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 나라 국민이 아무 이유 없이 이 땅에서 목숨을 잃은 거잖아요. 적어도 내 나라 국민만큼은 지켜주는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선량한 우리 국민은 지키지 못하고, 살인범은 두둔해서 이제껏 잘 살게 내버려둔 걸 생각하면 분해서 몸이 덜덜 떨리지만 그래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이번만큼은 제발 잘 해결해주길 부탁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이복수씨는 최근 잇따라 발생하고 있는 미군 성범죄사건 등을 바라보면 마음이 더 무거워진다고 했다. 그리고 아들의 사건을 꼭 해결해야겠다는 각오를 더욱 다지게 된다고. 높은 자리에 있고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들이 좀 더 책임감과 의무감을 갖고 적극적으로 노력해주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한편으로는 가족만큼은 아니겠지만 국민들도 중필씨 사건을 잊지 말고 힘을 실어주었으면 하는 생각도 해본다. 마지막으로 “배운 것 없고, 아는 것 없다”라고 말씀하시고는 어머니가 기자에게 물었다. “그런데 잘못한 일을 저지른 사람한테 잘못한 만큼 벌을 받게 하는 게 그렇게 어렵고 복잡한 일인가요?”라고. “상식적으로 잘못을 했다면 뉘우치고 사과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라고. 그의 물음이 끝까지 의문으로 남지 않도록 이제는 모든 진실이 명확히 밝혀지고 상식적인 판결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바란다. <■글 / 이연우 기자 ■사진 / 이성원>
- ‘만삭 부인 살해 사건’ 피해자 아버지 심경 인터뷰
- 2011. 09. 28 17:28 화제
- ㆍ“지켜주지 못해 미안한 딸, 이제 좋은 곳으로 가 편히 쉬었으면…” 8개월 동안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며 이목을 집중시킨 만삭 부인 살해사건에 대한 법원의 판결이 내려졌다. 법원은 만삭인 아내를 목 졸라 숨지게 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남편 백씨(31)에게 징역 20년형을 선고했다. 지난 9월 15일, 만삭의 부인을 목 졸라 살해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의사 남편에게 법원이 유죄를 선고했다. 남편 백씨는 징역 20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남편 백씨는 자신의 아이를 임신해 출산을 한 달 남긴 아내를 목 졸라 태아까지 사망에 이르게 해 비난의 가능성이 매우 크다”라며 “사건 직후 현장을 떠나 적극적으로 알리바이를 만들려 했고 피해자와 태아에 대한 애도 또한 보이지 않았다”라고 밝혔다. 덧붙여 백씨가 예민한 상태에서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이고 형사처벌 전력이 없는 점을 고려했다고 양형의 이유를 설명했다. 지난 1월 4일 만삭의 박 모씨(29)가 자택 욕조에 목이 꺾인 자세로 사망한 사건에 대해 검찰은 목 눌림에 의한 질식사를, 남편 측은 이상 자세에 의한 질식사를 주장하며 치열한 법정공방을 벌여왔다. 이로써 사건 발생 후 8개월 가까이 끌어온 이 사건은 법원이 의사 남편의 살해 혐의를 인정하며 일단락됐다. 현재 검찰과 백씨 측 모두 항소한 상태다. 1심 공판에서 검찰은 무기징역을, 백씨의 변호인 측은 “무죄가 아니면 사형을 선고해달라”라며 무죄를 주장했었다. 양쪽 모두 항소함에 따라 지루한 법정 공방은 한동안 계속될 것으로 보이지만 진실이 밝혀지길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피 말리는 심정으로 지내온 피해자 가족에게는 희망적인 소식이 아닐 수가 없다. 떠났지만 보내지 못한 눈물의 8개월 판결이 내려지고 나흘 뒤인 19일, 피해자의 아버지 박창옥씨(58)와 전화 인터뷰를 통해 그간의 마음고생과 재판 결과에 대한 심경을 들을 수 있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동시에 말할 수 없는 허망함이 묻어났다. 안부를 묻는 질문에 “식음을 전폐하고 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딸을 떠나보낸 지 8개월, 떠났지만 보내지 못한 그 시간 동안 속은 이미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진실이 밝혀지기 전까지 슬픔도 사치라 생각하며 참아왔던 눈물은 재판 결과를 듣는 순간 터져 나왔다. 지금은 다시 냉정을 되찾으려 노력하는 중인 듯했다. “재판 결과에 대해서는 사법부의 판단이기 때문에 제가 왈가왈부하지는 않으려고 해요. 20년형이라는 형량이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법원에서 진실을 가려줬다는 것에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합니다.” 식음을 전폐하고 있다는 말에 건강 상태를 물으니 “다른 사람들에게 걱정 끼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라며 “앞으로 끝까지 진실을 밝히려면 건강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라고 덧붙였다. 박씨를 포함한 가족에게 지난 8개월은 슬픔과 불안의 나날이었다. 사건 당일 딸의 시신을 보고 타살을 직감했지만 진실은 쉽사리 밝혀지지 않았다. 치과 의사 모녀 살해사건과 비교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도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이번 사건은 대학병원 의사가 만삭의 아내를 살해했다는 혐의로 수사를 받게 되며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1995년에 발생했던 치과 의사 모녀 살해사건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당시 범인으로 지목됐던 외과 의사 이 모씨는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고 사건은 결국 진범을 밝혀내지 못한 채 미제 사건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사위 쪽이 공판에서 캐나다 토론토대 법의학센터장을 증인으로 세웠을 때 치과 의사 모녀 살해사건을 벤치마킹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당시에도 무죄 판결을 받는 데 해외 법의학자가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국내에도 믿을 만한 법의학자 분들이 계신데 그렇게까지 하는 걸 보고 사위 쪽이 치과 의사 모녀사건을 벤치마킹해서 분위기를 몰고 가려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사람 마음이라는 게 어느 한 군데 초점이 맞춰지면 계속해서 그 쪽으로만 생각하게 되잖아요. 진실을 밝혀준 검찰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장례는 9월 중 불교식으로 치를 예정 재판 과정 중에 사위 측에서 합의나 연락을 취해온 적이 있는지 묻자 그는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그럴 사람들도 못 된다”라고 말했다. “연락 한 번 없었어요. 그간의 마음고생이야 이루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그 쪽 가족에게 마음의 상처를 많이 입었어요. 사위야 구속되어 있으니 직접적으로 부딪힐 일이 없었지만 그 쪽 가족은….” 그는 한숨을 쉬며 말을 줄였다. 사건 직후 사위가 바로 용서를 구했다면 모든 걸 덮어줄 마음도 있었지만 이제는 모든 게 소용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자기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쳤을 때 용서라는 것이 가능하잖아요, 제가 한 인터뷰 기사에 ‘사위가 건강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한 것으로 나갔는데 그건 정신적으로 건강했으면 좋겠다는 말이었어요. 지금은 용서를 하고 싶어도 용서를 할 대상이 없습니다.” 27년을 애지중지 키운 딸이었다. 딸은 시집을 가면 집을 떠나야 하는 출가외인이라, 그는 아들보다 딸을 더 애틋하게 키웠다. 사위와 6년간의 연애 끝에 결혼했을 때만 해도 이런 비극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딸이었어요. 모든 부모가 그렇듯 저도 그렇게 딸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현재 가족과 딸의 장례를 준비하고 있다. 딸의 죽음을 밝히지 못한 상황에서 장례가 치러지면 진실도 함께 땅에 묻힐까봐 여태 장례도 치르지 못했다. 2백80일 동안 차디찬 냉동고에 갇혀 있던 딸을 이제는 보내줄 수 있을 것 같다. 딸의 장례는 9월 넷째 주 중 불교식으로 치를 예정이다. 그는 “20년 이상 키워온 아비로서 딸에겐 지켜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뿐입니다다”라며 “이제 좋은 곳으로 가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애틋한 마음을 드러냈다. 그리고 관심을 갖고 사건을 지켜봐준 이들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했다. “다들 누군가의 부모고 자식이기 때문에 남 일 같지 않게 느껴주신 게 아닌가 합니다. 관심 가져주신 분들께 감사해요.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는 끝으로 “부모님께 잘하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힘든 상황이었지만 그는 침착하고 성의 있게 인터뷰에 임했다. 때때로 감정이 복받칠 때도 평정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에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자식과 손주를 가슴에 묻은 아버지의 마음을 무슨 말로 위로할 수 있을까. 가족의 상처가 하루빨리 아물기를 바라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
- 27년만에 간첩누명 벗은 ‘송씨 일가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 송기복씨
- 2009. 11. 09 15:26 화제
- ㆍ“그래도 나는 행복한 피해자… ㆍ여전히 숨어 사는 다른 피해자들에게 힘이 돼주고 싶어요” 여름이 깊어가던 지난 8월의 어느 날 서울고등법원의 한 법정, 선고가 끝났지만 송기복씨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27년 동안 자신과 가족을 옥죄여 온 간첩 누명을 벗는 순간, 그저 눈물도 나오지 않고 가슴이 뻥 뚫렸을 뿐이다. 27년 전 멈춰진 시간, 그녀는 2009년 서른아홉의 가을을 맞고 있다. 1982년 멈춰버린 그녀의 봄 1982년 월북자를 가족으로 둔 송씨 일가 친·인척 28명에게 간첩 누명을 씌운 ‘송씨 일가 간첩단 사건’에 대해 지난 8월 28일 무죄판결이 내려졌다. 국가가 27년 만에 법정에서 공식적으로 사건의 조작을 인정하는 순간이었다. 판결이 내려지고 두 달 후, 사건의 피해자 송기복씨(67)를 서울 신림동 자택에서 만났다. 하얀 얼굴에 또렷한 음성, 밝게 웃으며 기자를 맞이하는 그녀에게서 억울하게 죄인으로 살았던 지난 30여 년의 세월을 찾아볼 수 없었다.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고운 피부 탓일까. 겉모습은 고생 없이 산 여느 60대 여성이지만 가슴속은 누명을 쓰고 산 천년 같은 세월에 까맣게 타들어간 지 이미 오래다. 신광여중에서 미술을 가르치던 그녀에게 안기부 직원들이 찾아온 건 1982년 봄이었다. “새학기 첫날 3교시 수업 중이었어요. 교장실에 손님이 왔다는 호출을 받고 갔더니 검은색 점퍼를 입은 남자 두 명이 앉아 있었어요. 친정아버지에 대해 물어볼 것이 있다며 함께 가자고 하더라고요. 사색이 되어 계신 교장선생님의 표정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죠.” 당시 그녀의 남편 송영섭씨는 공군 중령으로 공군본부작전상황실에 근무 중이었다. 상황을 남편에게 알렸고 남편이 안기부 직원들에게 영장을 요구했지만 그들은 “간단하게 몇 가지만 물어보고 오늘 내로 돌려보내겠다”라는 말을 남기고 그녀를 어디론가 데려갔다. 지옥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그로부터 116일 동안 안기부 조사실에 불법 구금된 채 온갖 고문과 협박을 당해야 했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온 그녀는 “북한에 다녀온 것을 불라”며 시작된 모진 매질에 결국 “다녀왔다”고 거짓 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입에서 6·25때 월북한 아버지 ‘송창섭’이라는 이름이 나온 것은 매질을 견디던 어느 날이었다. 그해 9월, 안기부는 그녀를 포함한 송씨 일가 28명이, 북한에 체류 중인 ‘송창섭’을 정점으로 간첩 활동에 가담했다고 발표했다. ‘송충건’이라는 가명을 쓰는 이가 남파되었다는 한 전향 간첩의 진술에, 국가가 이들 가족을 전대미문의 가족 간첩단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간첩이라면 전염병 환자 보듯 했던 시절, 그녀는 주위의 차가운 눈초리와 간첩이라는 멍에를 쓴 채 사반세기를 견뎌야 했다. 고통의 순간 그녀를 지탱해준 남편의 사랑 신광여중 교사 재직 시절 학생들과 함께.서른아홉 청춘이었던 그녀는 이제 예순일곱의 노인이 되었다. 잃어버린 30년의 세월을 누가 보상해줄까.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를 ‘행복한 피해자’라고 말한다. 한 줄기 희망도 보이지 않던 절망의 순간 크고 작은 빛이 되어준 좋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고생한 거에 비해 곱게 나이 들었다고 하셨죠? 안기부에 끌려가 100일이 넘는 시간 동안 죽지 않을 만큼 고문을 당했어요. 그 후 누명 쓰고 살아야 했던 세월도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고요. 어떻게 곱게 늙을 수가 있겠어요. 그래도 지금 이렇게 천진하게 웃을 수 있는 건 다 남편 덕분이에요.” 그녀의 남편 송영섭씨는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한때 대통령 전용기를 몰던 전도유망한 공군 중령이었다. 하루아침에 간첩의 남편이 되어 강제로 예편당하고 안기부에 끌려가야 했지만 단 한 번도 원망이나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실이 밝혀질 날이 반드시 올 거라며 그녀와 가족을 위로한 사람이었다. “남편은 애국자였어요. 제가 교도소에 있을 때 면회를 와서 저에게 큰절을 하더라고요. 국민을 대표해서 당신에게 사과를 한다고. 자기는 내가 죄 없는 거 안다면서요. 제가 교도소에 있었던 116일 동안 딱 하루 빼고 매일 면회를 왔어요. 오죽했으면 교도관들이 제 사건을 ‘춘향이 사건’이라고 불렀겠어요. 그렇게 저에게 용기를 준 사람이에요. 그런 남편이 있었기에 고통스럽고 힘들었던 시간을 보낼 수 있었어요.” 그녀가 고문 후유증으로 교도소에 있을 때보다 더 괴로운 시간을 보낼 때에도 남편은 꿋꿋이 그녀 옆을 지켰다. “제가 안기부라는 지옥을 나와 집에 돌아왔을 때에는 가족들이 지옥이었어요. 고문 후유증 때문에 집안이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죠. 주변에서 다 이혼하라고 했어요. 너무 괴로워서 저조차도 남편한테 이혼하자고 했을 정도예요. 그래도 남편은 끝까지 제 곁을 지켜줬어요. 간첩 누명까지 썼던 제가 ‘복 많은 여자’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건 남편 덕분이에요.” 안기부에서는 그녀가 엘리트 장교라는 이유로 남편에게 접근했다고 모함했지만 두 사람은 같은 고향 출신이다. 충북 음성에서 함께 학교를 다닌 두 사람은 한국전쟁 때 헤어졌다 성인이 된 뒤 다시 만났고 사랑하는 사이가 됐다. 월북자를 아버지로 뒀다는 이유로 어렸을 때부터 손가락질을 당해야 했던 그녀를 지켜준 것이 남편이었다. “한국전쟁 직후 국시(國是)가 반공이던 시절이었어요. 학교에서도 ‘빨갱이 자식’이라 손가락질 받기 일쑤였죠. 항상 혼자 담벼락에 숨어 울고 있으면 남편이 저를 데리고 가 놀아줬어요. 그때가 일고여덟 살 아주 어렸을 때였는데 그때 남편이 저를 보고 ‘이 사람은 내가 지켜줘야겠다’고 생각했다고 그러더군요.” 빨갱이 자식이 빨갱이 가족을 만드는 게 싫어 그녀는 수녀가 되고 싶었다. 게다가 두 사람은 동성동본이었다.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두 사람이 결혼에 성공할 수 있었던 건 남편의 절대적인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일평생 사랑을 주기만 했던 남편은 끝내 그녀가 누명을 벗는 걸 보지 못하고 2002년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지난 7월, 그녀는 법정 최후 진술에서 남편의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적셨다. “눈감는 날까지 저에게 용기를 잃지 말고 진실을 밝히라고 격려했던 남편, 이 자리를 그 누구보다도 기뻐할 남편의 무덤에 무죄라고 적힌 판결문을 바치고 싶습니다.” 생명의 은인 황인철 변호사 그녀는 지난 1993년 세상을 떠난 고(故) 황인철 변호사와도 인연이 깊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 1978년 동일방직 노동사건, 박종철 손해배상 청구 등 남들이 꺼려하는 시국사건 변론을 마다하지 않았던 황인철 변호사는 그녀를 누명의 굴레를 벗겨준 은인이다. 그녀가 처음 황 변호사를 만난 건 1982년 1심에서 간첩죄로 10년 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고등법원에서 간첩방조죄로 2년으로 형량이 낮춰져 수감 중이었던 서대문구치소에서였다. “수감자 운동시간이 돼서 하얀 담벼락에 기대선 채 물끄러미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한 무리의 여수인(女囚人)들이 제 이름을, 세례명을 부르고 뛰어가더라고요. 데모하다가 집시법 위반으로 잡혀온 학생들인 것 같았는데 교도관 몰래 한 명씩 와서 저에게 암호 같은 말을 하고 가는 거예요.” 한 명이 와서 “아줌마가 율리아(송기복씨의 본명)씨예요?”라고 묻고 가면 또 한 명이 와서 “아줌마 가족을 만나고 싶어 하는 변호사가 있어요”라고 했다. 다음 학생이 와서 “그분이 황인철 변호사예요”라고 말하는 순간 그녀는 표현할 수 없는 긴장감과 함께 어렴풋이 빛이 보이는 걸 느꼈다. 혹시나 그 이름을 잊을까 방으로 돌아와 수없이 되뇌이고 또 되뇌었다. “어떤 변호사이기에 문둥병 환자보다 못하다는 간첩단 사건의 피의자 가족을 만나고 싶어 할까 싶었죠. 안기부만 나오면 법정에서 나의 모든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는 믿음은 산산이 깨져버린 지 오래였고 나는 이렇게 간첩이 되는가 보다 하고 자포자기한 상태였어요. 우리 가족을 만나고 싶어 하는 변호사가 있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누구인지는 몰라도 내 누명을 벗겨줄 변호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온갖 상념이 교차되던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렇게 학생들로부터 황 변호사의 뜻을 전해 듣고 이번에는 남편에게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한 ‘007 작전’이 펼쳐졌다. 남편이 면회를 오면 입회 교도관이 대화 내용을 기록하지 않는 틈을 타 한마디, 한마디씩 남편에게 말을 전했다. 남편이 황인철 변호사가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아채기까지 몇 날 며칠이 걸렸다. 후에 남편으로부터 들은 얘기가 “이 여자가 죽도록 고문을 받았다더니 이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구나” 하고 기막혀했다고 한다. “사건이 있기 전까지 전 간첩행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조차 몰랐던 평범한 교사였어요. 간첩 피의자가 되고 나서 변호사 선임을 위해 간첩 같은 짓을 하는 걸 보고 쓴웃음이 나왔죠.”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맨 처음 황 변호사를 만났을 때 그가 했던 말이 “율리아씨는 정말 행복한 분입니다”였다. 보통 부부 중에 어느 한쪽이 간첩죄의 피의자가 될 경우 거의 예외 없이 다른 한쪽도 간첩 피의자가 되는데 그녀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첫 번째, 지극정성으로 아내와 아이들을 돌보며 아내의 구명운동을 위해 노력하는 남편이 있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그리고 머지않아 세상이 이번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될 것이고 누명을 벗을 것이라는 것이 세 번째 이유였다. 1984년 이들 사건이 재재파기환송심에서 최종 유죄판결이 내려지기까지 무려 7차례나 재판이 진행될 정도로 사법 사상 유례 없는 ‘핑퐁재판’을 벌이긴 했지만 그때 황 변호사의 말대로 이제 국가가 그녀의 무죄를 인정하고 세상이 그녀의 결백을 알았다. 누명을 벗은 이 순간을 그들과 함께 나누지 못하는 것은 한이 되지만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삶을 밝혀준 좋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여생을 보낼 생각이다. 그녀는 요즘 민주화 관련 NGO단체들과 함께 여러 활동에 참여 중이다. 얼마 전에는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의 요청으로 대학 강단에 서기도 했다. “저는 그래도 행복한 피해자예요. 저를 도와주시는 분들이 많았고 그나마 글이라도 배워서 억울함을 외칠 수 있었지만 아직도 사회의 시선 속에 숨죽여 사는 분들이 많아요. 그분들을 생각하면 너무나 죄송한 마음입니다. 제가 도움을 받았던 만큼 저도 그분들께 힘을 보태며 남은 인생을 보내고 싶습니다.” ■글 / 노정연 기자 ■ 사진&사진 제공 / 원상희, 송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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