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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총 215 건 검색)

‘734고지 전투’ 산화, 오두용 하사 유해 73년 만에 유족 품에
2024. 12. 30 20:34정치
... 진행된 ‘안동지구 공비토벌작전’, 5월에 진행된 ‘청계산·백운산 진격전’에 투입됐다. 오 하사는 그해 8월3일 ‘734고지 전투’에서 전사했다. 해당 전투는 철원군 일대 주요 지역인 734고지를...
[NGO 발언대]변희수 하사가 대전현충원으로 가던 날
[NGO 발언대]변희수 하사가 대전현충원으로 가던 날
2024. 07. 07 20:30오피니언
... 수정하지 않았었다. 오후 1시가 지나자, 변 하사의 유골함이 아버지 품에 안겼고, 군복을 입은 변 하사는 영정 속에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이곳과 이별을 하고 계룡대 육군본부로...
NGO 발언대정민석
변희수 하사, 숨진 지 3년 만에 현충원에 눕다
변희수 하사, 숨진 지 3년 만에 현충원에 눕다
2024. 06. 24 20:52사회
... 유족들과 군인권센터, 변희수재단 준비위원회 등은 차례로 헌화에 나서 고인의 넋을 기렸다. 변 하사는 2019년 성확정(성전환) 수술을 받은 뒤 군으로부터 강제 전역 조치를 당하고 2021년 3월3일 숨진 채...
하사변희수안장현충원군인발언안장식국립대전현충원
“갖가지 혐오 발언 견디며 긴 시간 돌아왔다”…고 변희수 하사 안장식
“갖가지 혐오 발언 견디며 긴 시간 돌아왔다”…고 변희수 하사 안장식
2024. 06. 24 17:08사회
... 할 유족들에게 작은 위안이 됐으면 하는 바람 뿐”이라며 “긴 시간을 돌고 돌아 오늘에서야 변 하사가 이곳 순국 선열들이 계신 곳에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고 추모사를 낭독했다. 카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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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경향(총 76 건 검색)

‘육군 김태희’ 신예 한윤지, 국군교향악단 순회연주회 메인 MC 발탁…돌아온 백하사님
‘육군 김태희’ 신예 한윤지, 국군교향악단 순회연주회 메인 MC 발탁…돌아온 백하사
2022. 07. 29 17:23 연예
배우 한윤지. 국엔터테인먼트 제공 ‘육군 김태희’로 불리는 신예 한윤지가 국군교향악단 순회연주회 메인 MC로 발탁, 열일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고 소속사가 29일 전했다. 국군교향악단 순회연주회 사회자로 발탁된 한윤지가 국군장병들과 특별한 시간을 가지며, ‘백송이 하사’의 인기를 다시 한번 입증했다. 한윤지는 2017년 국군에서 제작한 웹드라마 ‘백발백중 시즌2’에서 백송이 하사로 데뷔했다. 화사한 미소와 비주얼로 단숨에 국군장병들의 ‘육군 김태희’로 등극한 한윤지. 시즌 2부터 시즌 4까지 활약하며 눈도장을 찍은 한윤지는 육군의 각종 보직을 홍보, 군과 관련한 인식을 개선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쳐 주목 받았다. ‘백발백중’에서 백송이 하사로 변신한 한윤지는 청순한 비주얼을 자랑하는 동시에 군복을 완벽하게 소화하며, 반전 매력을 뽐내기도. 러블리한 분위기를 발산한 한윤지는 싱그럽고, 상큼한 매력을 선보이며, 신선한 에너지로 대중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배우 한윤지. 국엔터테인먼트 제공 ‘육군 김태희’ 라는 수식어로 육군 장병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한윤지는 지난 5월13일 ‘특수전사령부와 함께하는 국군교향악단 순회연주회’, 6월 28일 ‘육군 제8군단과 함께하는 국군교향악단 순회연주회’ 메인 MC로 참여해 군대와 특별한 인연을 이어 나갔다. 한윤지는 첫 MC 도전임에도 불구하고, 능숙한 진행 실력을 선보여 국군장병들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또, 한윤지는 특유의 밝은 에너지를 뽐내며, 긍정적인 힘을 선사하기도. 또한, 한윤지는 유튜브 채널 ‘국방 NEWS’ ‘[그날 군대이야기] 워커 장군을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이유’, ‘JSA 공동경비구역 북한군의 선 넘은 도발’ 편에 초대 손님으로 출연해 통통 튀는 매력과 리액션으로 활력을 불어넣었다. 웹드라마 ‘사랑은 영화 같지 않더라’, ‘썸 끓는 시간 시즌2’, ‘RE:START’,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 출연하며, 신인답지 않은 안정적인 톤과 연기력으로 주목을 받은 한윤지는 자신만의 필모그래피를 차근차근 쌓고 있다. 한윤지가 ‘군통령’을 넘어 차세대 라이징 스타로 등극할 수 있을지 기대된다 한윤지는 올해 국군교향악단 순회연주회 메인 MC로 앞으로도 국군장병들과 만날 예정이다. 배우 한윤지. 국엔터테인먼트 제공
허지웅 “여자양궁 9연패 비결?…하느님이 보우하사”
허지웅 “여자양궁 9연패 비결?…하느님이 보우하사
2021. 07. 27 10:07 연예
허지웅이 한국 여자 양궁의 올림픽 9연패를 축하하며 후성유전학을 언급해 눈길을 끌었다.칼럼니스트 허지웅이 한국 여자양궁의 올림픽 9연패를 축하했다. 허지웅은 27일 인스타그램에 “9회 연속으로 한 국가가 특정 종목 금메달을 독식한 건 한국 여자양궁이 3번째”라면서 “동북아 3개국 가운데서도 화기와 활처럼 쏘아 맞추는 것에 특출난 민족이라 대체 이런 성향이 어디에서 어떻게 유래된 것인지 매번 궁금했다”고 적었다. 이어 “독려된 솜씨라는 것이 유전될 리 없다는 생각도 들지만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실 DNA 본체뿐만 아니라 후천적으로 획득한 형질 또한 유전된다고 한다”며 “이를 후성유전학이라고 하는데 쉽게 말해 특정한 조건 안에서는 경험도 유전이 된다는 것”이라고 했다. 허지웅은 “타도난 것뿐만 아니라 내가 어떻게 사느냐가 자식에게 유전된다는 사실이 누군가에겐 공포를, 또 누군가에게는 큰 위로를 줄 것 같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연구가 충분히 더 진전되기 전까지는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애국가의 가사처럼 하느님이 보우를 하사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제일 명쾌할 것 같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앞으로 남은 경기에서 우리 선수들의 선전을, 그리고 안전을 기대한다”고 했다.
홍석천, 故 변희수 전 하사 추모 “많이 미안”
홍석천, 故 변희수 전 하사 추모 “많이 미안”
2021. 03. 11 16:47 연예
유튜브 채널 ‘홍석천T방송인 홍석천이 故 변희수 전 육군 하사를 추모했다. 홍석천은 10일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마음속 이야기(위로)’라는 제목의 영상을 게재했다. 홍석천은 “제가 어쩔 수 없이 우리나라 성 소수자들의 대표 얼굴이기도 하고 제가 커밍아웃한 지 21년이 됐다”며 말문을 열었다. 홍석천은 “제가 커밍아웃한 후에도 공개적으로 커밍아웃하신 분들이 계신데 그 중 한 분이 어제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소식을 뉴스를 통해 들었다”며 故 변희수 전 하사를 언급했다. 그는 “지난해 고인의 소식을 뉴스로 접하고 나보다 더 힘든 길을 가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군대라는 정말 특수한 조직에서 저렇게 용기를 낸다는 것은 정말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홍석천은 “그의 선택에 응원을 보냈습니다만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을 해보면서 굉장히 미안하기도 하다”며 “제가 먼저 ‘봅시다’라고 했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그런가 하면 홍석천은 커밍아웃 당시를 회상하기도 했다. 그는 “제가 2000년도 가을 커밍아웃할 때에도 사실은 죽기를 각오했다”며 “몇번 쯤은 너무 힘들고 외로운 시간이 많으니까 정말 죽고 싶을 때도 있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런 소식을 더 이상 안 듣는 세상이 왔으면 하는 바람”이라며 “행복해지고 싶어하는 멋지고 당당하고 용감한 고 변희수 전 하사의 명복을 빈다”고 애도의 뜻을 전했다. 한편 故 변희수 전 하사는 2019년 휴가 중 성전환 수술을 받고 복귀했지만, 군은 성전환 수술을 한 변 전 하사에 대해 심신장애 전역 대상자로 판단해 지난해 1월22일 강제전역 처분을 내렸다. 이후 故 변희수 전 하사는 지난해 8월 대전지법에 전역처분 취소 행정소송을 제기했지만, 3일 오후 충북 청주시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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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리수, 故 변희수 전 하사 추모
하리수, 故 변희수 전 하사 추모
2021. 03. 04 13:00 연예
하리수 인스타그램가수 겸 방송인 하리수가 변희수 전 하사의 사망 소식에 추모 글을 남겼다. 하리수는 4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故 변희수 전 하사의 사진과 함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글을 남겼다. 변희수 전 하사는 3일 오후 5시 49분쯤 충북 청주 상당구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앞서 고인은 2019년 휴가 중 외국서 성전환 수술을 받고 귀국한 뒤 군 복무 의사를 밝혔으나 군에서 심신장애 3급 판정을 받고 1월 강제 전역조치를 받았다. 이후 고인은 지난 2월 육군본부에 재심사 인사 요청을 제기했으나 육군은 규정된 기준과 절차에 따라 적법하게 이뤄졌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변희수 전 하사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김웅 국민의힘 의원 등 정계 인사들도 고인에 대한 애도를 표했다. 한편 하리수는 2001년 CF 모델로 데뷔해‘대한민국 1호 트랜스젠더 연예인’으로 이름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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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총 2 건 검색)

[한국군 코멘터리]대위 출신이 하사관 지원 이유 ‘니들이 알아?’(2014. 04. 21 16:11)
2014. 04. 21 16:11 정치
국방부는 직업 군인의 정년을 최대 3년까지 연장하기로 최근 결정했다. 직업 군인의 정년이 연장되면 장교와 같은 군인의 길을 가려는 자원은 상대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2000년대 초반 장교로 전역한 후 부사관으로 다시 입대한 군인들이 언론의 주목을 받은 시절이 있었다. 육군 대위로 군복무를 마치고 나서 계급을 낮춰 하사 계급장을 다는 모습을 보면 신기하기도 했다. 언론도 “국가와 군을 너무 사랑해 다시 유니폼을 입었다”는 당사자의 인터뷰를 크게 실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군번이 2개인 사례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더니, 급기야 군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일이 돼버렸다. 어떤 경우에는 병사로 제대한 후 장교, 이어 부사관으로 다시 임관하기도 했다. 지난 2012년 12월 31일 경기 광주 특전교육단에서 교육 중인 부사관 훈련생들이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국회사진기자단 군인연금 받는 ‘20년 이상 복무’ 충족 국방부도 예비역 대위 출신들의 부사관 지망률이 갈수록 증가하자 이들의 전문성을 감안한다는 명목으로 ‘군인사법 시행규칙’을 개정해 2007년 2월부터 초임 계급으로 중사를 달아주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장교가 전역 후 부사관으로 다시 군복을 입는 실제 이유는 무엇일까. 그 해답은 ‘군인 연금’에 있다. 대위로 전역하면 군인 연금을 받지 못하지만, 부사관으로 다시 임관한 후 추가로 군복무를 하면 군인 연금 혜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군인에게 복무기간 20년은 매우 중요하다. 군생활 20년을 넘기면 군인 연금 수혜자가 된다. 또 국립묘지에 안장될 자격이 주어진다. 한마디로 죽을 때까지 연금을 매달 받을 수 있고, 사후에는 국립묘지에서 지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963년 도입된 군인 연금은 군인의 퇴직, 사망, 요양 시 본인이나 그 가족의 생활 안정과 복리 향상에 기여하기 위한 제도다. 군인 연금은 군 복무기간 중 납부한 기여금을 토대로 지급된다. 공무 중 질병 또는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경우에는 그 유족에게 지급한다. 소위로 임관해 군생활 21년째면 통상 중령 12호봉으로 매달 360여만원의 월급을 받는다. 각종 수당까지 더하면 중령 12호봉의 연봉은 6500만∼7000만원쯤 된다. 전역을 하게 되면 매달 202만원 정도의 연금을 받게 된다. 공무원 연금보다도 높은 수준이다. 국방부는 임무수행의 특수성은 물론 격오지 근무에 따른 열악한 조건 등을 고려하면 군인 연금의 수준이 공무원 연금보다 높아야 하는 게 당연하다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 군인의 경우 계급정년의 제한을 받게 되면 다른 직업군에 비해 이른 정년을 맞이하고 재취업의 어려움이 크다는 점 등도 든다. 국방부는 “군인 연금 대상자의 48%가 전방지역 등에서 근무하고 상당수가 45∼56세에 정년을 맞는다”고 밝히고 있다. 국방부는 직업군인들의 이런 어려움을 해결하겠다면서 직업군인의 정년을 최대 3년까지 연장하기로 최근 결정했다. 장교의 계급정년을 대위의 경우 43세에서 45세, 소령 45세에서 48세, 중령 53세에서 55세, 대령 56세에서 57세로 각각 연장하겠다는 것이다. 부사관인 원사와 준사관인 준위도 55세에서 57세로 계급정년이 늘어난다. 이렇게 되면 직업군인들은 사실상 누구나 20년 이상 복무를 보장받게 된다. 대위로 전역했다가 다시 중사로 임관하는 사례도 사라지게 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돈’이다. 정부는 1963년 군인 연금을 설립했지만 그 기금은 이미 1973년에 고갈됐다. 이후 운용 재원의 부족분은 정부가 부담하고 있다. 지난 5년간 군인 연금 국가보전금을 살펴보면 2009년 9409억원, 2010년 1조566억원, 2011년 1조2266억원이다. 2012년에는 군인 연금법이 일부 개정돼 국가보조금이 1조1503억원으로 줄었지만 2013년에는 1조3131억원으로 다시 늘었다. 2014년 한 해 적자 보전금만 1조3446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연히 군인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일반 국민의 군인 연금에 대한 시각은 그리 곱지 않다. 이런 점을 감안해 국방부도 지난해 7월 군인 연금법을 개정해 군인들의 기여금 납부비율을 기준 월소득액의 5.5%에서 7%로 인상했다. 대학 취업률 높이고, 군은 예비역 재취업 군인의 정년 연장에 대해서는 다른 차원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정년이 보장될 경우 소위 ‘소포대’(소령 진급을 포기한 대위) ‘중포소’(중령 진급을 포기한 소령) ‘대포중’(대령 진급을 포기한 중령) 군인에 대한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차기 진급을 포기하는 경우 아무래도 임무에 소홀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그나저나 직업군인의 정년이 연장되면 장교와 같은 군인의 길을 가려는 자원은 상대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에서 장교가 될 수 있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다. 육·해·공군 사관학교에 입교하는 외에도 일반 대학의 학군장교(ROTC)로 임관하거나, 군사학과에 진학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군사학과에 입학을 하게 되면 군장학생 신분으로 장학금을 받으며 4년간 대학생활을 할 수 있다. 졸업 후에는 소위로 임관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군사학과는 6~7년 이상 근무할 장교를 양성할 목적으로 대학들과 육군본부가 협약을 맺어 2011년 처음으로 문을 열었다. 교수진들은 군 당국의 추천을 받은 예비역 장교들로 채워진다. 최근 대학가에서는 군사학과 붐이 일고 있다. 군사학과의 경우 재학생들이 졸업 후 임관을 하면서 소속 대학의 취업률을 높인다는 점이 한몫을 했다. 또 직업군인과 같은 안정된 직업을 원하는 지원자가 계속 늘어나고 있는 것도 한 이유다. 군사학과를 보유하고 있는 대학으로는 건양대, 대전대, 청주대, 용인대, 영남대, 경남대, 원광대, 조선대 등이 대표적이다. 군사학과 설치 붐은 군과 대학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측면이 있다. 군에서는 예비역 고급 장교들을 군사학과 교수진으로 재취업시킬 수 있고, 대학에서는 졸업 후 취업이 보장되는 인기학과를 개설할 수 있어서다. 군사학과의 인기가 높아지다 보니 여학생들의 지원도 많다. 여학생들도 여군 장교로 합격할 경우 장교로 임관할 수 있다. 만약 장기복무를 원치 않으면 군무원이나 국방공무원 등을 지원할 수 있다. 물론 군사학과 출신이라는 혜택은 없지만 면접에서는 유리한 측면이 있다. 그러다 보니 해병대 장교를 양성화하기 위한 해병군사학과까지 단국대학에서 창설됐다. 일부 대학에서는 특전 부사관을 양성하는 학과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병영국가도 아닌 대한민국에서 대학들이 안보 강화 기조에 편승하거나 취업률을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군사 실무인력 양성에 나서는 데 대한 비판도 있다. 게다가 장교의 자질을 갖춘 자원은 한정됐는데도 불구하고 무턱대고 정원을 늘리면서 일부 대학에서는 군사학과의 부실화가 우려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졸업생들이 소위 임관 평가에서 탈락할 경우 갈 곳이 마땅치 않은 것도 문제다.
한국군 코멘터리
[세계]부탄, 민주주의를 ‘하사’ 받다(2008. 04. 03)
2008. 04. 03 국제
100년 왕정 종지부 찍고 사상 첫 총선… 국왕 주도로 국민 설득 선거 치러 지난 24일 부탄 수도 팀부의 한 투표소에서 유권자들이 줄지어 서서 투표를 기다리고 있다. 여성과 남성이 따로 줄을 선 게 이채롭다. 현재 유엔 가입국은 192개 나라다. 이들 나라에서는 매일같이 뉴스가 쏟아진다. 전쟁, 사건사고, 정상회담, 대선 등이 끝없이 이어진다. 그러다 보니 웬만한 일은 뉴스가 되지 못한다. 뉴스는 대부분 강대국 소식을 중심으로, 그리고 보도하는 나라의 이해관계에 따라 채워지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지난주에는 부탄 왕국의 소식이 대서특필됐다. 신문 국제면의 톱기사를 차지하는 것은 물론 일부 신문에서는 1면에 사진과 함께 소개되기도 했다. 그것도 하루도 아니고 2,3일에 걸쳐 보도됐다. 히말라야의 은둔 왕국 세계 지도를 보면 부탄은 인도와 중국 사이에 끼여 있는 작은 나라다. 땅덩이는 3만8000㎢. 남한의 절반이 채 되지 않는다. 인구는 65만8000명. 서울 한 구(區)의 인구 수다. 이곳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뉴스는 부탄에서 총선을 실시한다는 내용이다. 오늘날 선거란 5일장처럼 흔한 것이어서 그 나라 국민이 아니면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100년 이상 끌어온 왕정의 종지부를 찍고 정권을 민간에 이양한다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히말라야 산맥에 부족 연합체로 흩어져 있던 부탄이 통일 왕조를 이룬 것은 1907년이다. 이후 왕의 세습을 거쳐 현재 5대 국왕인 지그메 케사르 남미엘 왕추크(28·사진)에 이르렀다. 제국의 침략을 받거나 식민지를 경험한 여느 제3세계 국가와 달리 부탄 왕국은 지난 1세기 동안 큰 어려움이 없었다. 문을 걸어잠그고 철저히 자급자족하는 체제를 유지해왔다. 서구화·근대화의 물결 속에도 오랫동안 근대 문명을 거부해왔다. 이 나라에 텔레비전과 인터넷이 들어간 것은 1999년이었다. 지구 상에서 가장 최근까지 지속된 ‘은둔 왕국’이었다. 1960년대만 해도 부탄은 전형적인 중세 사회였다. 포장도로도 전기도 병원도 없었다. 화폐 거래보다 물물교환 경제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티베트와 같은 히말라야의 불교 왕국들이 하나둘 강대국의 지배에 놓이자, 중국과 인도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인 부탄도 생존하기 위해 변화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정보화·세계화의 거센 물결도 큰 부담이 됐다. 위로부터의 개혁 부탄의 변화와 개혁은 위로부터 시작됐다. 2005년 4대 국왕 지그메 신계 왕추크는 2008년 민주적인 선거를 치른 뒤 하야하겠다고 선포했다. 그러나 그는 예정보다 앞서 2006년 아들 남미엘 왕추크에게 왕위를 건네주고 물러났다. 지난주 선거는 선왕의 유지가 실현된 것이지만, 5대 왕 남미엘 왕추크의 민주화에 대한 의지가 크게 반영됐다. 남미엘 왕추크는 미국과 영국에서 유학하고 옥스퍼드대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받은 엘리트다. 그는 부친의 근대화 정책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의 정치 철학은 부탄의 역사 전통과 환경을 보전하면서 제한적으로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는, 이른바 ‘국민총행복’을 높이는 것으로 요약된다. 불교 세례를 받고 자란 왕추크는 “진정한 행복은 물질적인 부에 있지 않다”고 강조해왔다. 왕 자신이 대대로 내려오던 궁궐을 버리고 작은 통나무집에서 살 정도로 검약을 실천하고 있다. 국민들도 국왕의 방침을 따르고 있다. 전 국토의 60%를 차지하는 산림을 보호하기 위해 등산은 엄격히 금지된다. 공적인 모임에 참여할 때는 부탄의 전통의상을 입어야 한다. 외국 관광객들은 부탄에서 하루 200달러 이상을 써서는 안 된다. 부탄은 1인당 GNP가 1000달러도 되지 않은 빈국이다. 그러나 정신적으로는 부국이다. 부탄은 지난해 영국 레스터대가 선정한 ‘세계 행복지수’ 순위에서 8위를 차지했다. 희한한 선거 역사상 처음 도입한 직접선거지만, 부탄 국민들의 선거를 대하는 태도는 심드렁하기만 하다. 그들에게 선거는 직접정치의 수단도, 민주주의를 만들어가는 축제도 아니었다. 유권자나 출마자 어느 누구도 원치 않은 선거였다. 그들이 선거에 참여한 것은 오로지 국왕의 ‘권유’ 때문이었다. 국회의원에 입후보한 예스 짐바는 “선거를 원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국왕이 우리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고 말했다. 유권자들도 되묻는다. “왜 우리가 변해야 하나”라고. 외신들은 “부탄 국민들은 내켜 하지 않으면서 어쩔 수 없이 민주주의를 수용했다”고 전했다. 투표가 끝난 뒤 부탄 국민들은 저마다 깜짝 놀랐다. 민주주의를 하자는 선거였지만, 결과는 왕당파 정당에 표를 몰아주었기 때문이다. 47명의 의원을 뽑는 이번 선거에서 왕당파인 부탄통일당이 44석을 차지하고, 국민민주당(PDP)은 3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형식은 왕정을 종식하자는 선거지만, 내용은 달라진 게 없었다. 지난주 총선으로 부탄은 ‘세계에서 가장 새로운 민주주의’를 받아들이게 됐다. 이번 선거로 한 세기 이상 지속해온 부탄의 왕정 통치는 선거로 종지부를 찍는다. 부탄의 총선은 1960년대 세계에 문을 연 부탄이 취한 마지막 개혁이다. 부탄 왕국의 국민들은 한 개명군주에 의해 처음으로 민주주의라는 것을 맛보았다. 그러나 서구와 같은 민주정치로 가는 길은 더디고 힘겨워 보인다. 국민행복을 위한 정치 민주주의 교육을 받지 못한 부탄 국민에게 갑작스러운 정치 환경 변화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번 총선은 외견상 성공적이었다. 투표율이 80%에 달했고, 어떤 나라의 투표보다 질서정연했고 평화로웠다. 그러나 그들의 투표는 대다수가 국왕의 지휘 방침에 따른 맹목적인 행위였다. 국민 대다수는 여전히 왕정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그들로서는 ‘민주주의’라는 좌표 없는 정치의 바다에 뛰어들기를 주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당정치가 실현되고 입헌군주제가 자리를 잡아도 당분간 국민총행복을 높이려는 국정 철학은 고수될 것으로 보인다. 카르마 티템 부탄 국민총행복위원회 위원장은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하든, 어떤 제도를 도입하든 전통과 문화, 환경의 조화를 꾀하는 우리의 입장은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번 선거로 부탄은 왕정에서 입헌군주제로 새로운 정치 실험을 했다. 그러나 투쟁으로 ‘얻은’ 민주주의가 아닌 ‘주어진’ 민주주의 실험이기에 여전히 군주인 국왕에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어 보인다.

레이디경향(총 2 건 검색)

[콩콩이는 여행 중](14) 일본 북규슈 하사미&사세보
2014. 10. 31 11:02 레저/여행
ㆍ“누가 누가 더 웃기나” 여행지보다 여행을 하는 주인공이 더 궁금해지는 이상한 여행기. 콩콩이는 ‘같은 산후조리원 출신’ 절친 호새와 함께 가을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일본 북규슈로 여행을 떠났다. 동갑내기 엄마들에게도 좋은 추억을 남긴 두 가족의 여정을 따라가본다. # Prologue 지난여름, ‘글램핑’으로 함께하는 여행의 맛을 본 꼬마 둘이 의기투합했다. 아이끼리 호흡이 좋으면서 엄마들까지 찰떡궁합이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내 아이가 좋아해도 남의 아이는 내 아이에게 별 관심이 없을 수도 있고, 아이들끼리는 죽고 못 사는 지경이라도 엄마들까지 그러기는 쉽지가 않다. 이상하게도 어른이 되면 배려도 양보도 이해도 할 수 있는데, 그런 걸 할 줄 모르는 아이보다 친구 사귀기가 쉽지 않다. 아이끼리는 ‘단짝 친구’인데 엄마들은 웃는 얼굴로 뒤돌아서서는 질시와 반목이 이어진다면 유아를 포함한 어린 시절 아이의 친구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그런 맥락에서 콩콩이는 매우 운이 좋은 아이다. 43개월 아이의 월령만큼 숙성된 친구 관계가 있다. 콩콩이는 같은 산후조리원에서 바로 옆 바구니에 누웠던 호새와 네 살 가을, 국경을 넘어 단풍놀이를 떠났다. 동갑내기 친구의 첫 해외여행 호새와 콩콩이는 모두 노산으로 아이를 낳은 동갑내기 엄마를 두었다. 두 아이들의 엄마는 키도, 염색 주기도, 밥 자주 많이 먹는 것도, 지은 죄 없이 남편 어려워하는 것도 닮았다. 감추는 것도, 부러 내놓는 것도 없이 가까워진 엄마들은 아이들을 더욱 친하게 만들었다. 이마에 땀이 맺히도록 놀다가 해가 지면 함께 더 놀고 싶다고 울던 아이들은 함께 잘 수 있다는 말에 환호했다. 여행지를 고르며 엄마들이 더 신이 났다. 비행시간이 짧을 것, 다양한 놀거리가 있을 것 정도를 염두에 두고 목적지를 물색해갔다. 물론 바다 탐험대 옥토넛에 열광하고 있는 호새에게는 수족관을, 키티는 물론이고 키티와 스탬프 빌리지에 사는 모든 친구들과 놀고 싶다는 콩콩이에게는 산리오 캐릭터 테마파크를 우선순위에 두었다. 도시에 사는 아이들이니 맘껏 뛰어놀 수 있는 산과 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인파로 붐비지 않는 놀이공원도 좋을 것 같았다. 기구를 타기보다는 엄마와 자전거라도 함께 타며 처음 보는 길을 돌아보는 재미는 엄마들에게 더욱 달콤한 추억이 될 것이다. 몇 달 전 침대에서 떨어져 빗장뼈에 금이 갔던 호새를 생각하니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침대보다는 바닥에서 뒹굴며 자게 하는 것이 안전하겠다는 것도 염두에 두었다. 1시간 남짓의 비행시간, 편안한 기차 연결, 시골, 다다미방, 수족관, 테마파크, 밥과 국이 있는 식사 등을 모두 만족시키는 북규슈로 결정하고 지역을 좁혀나갔다. 몇 년간 JR 규슈가 발행하는 가이드북과 매거진을 만드느라 북규슈 지역을 한 달이 멀다 하고 출장을 나갔던 터라 잘 아는 곳이라는 것도 큰 이유가 됐다. 함정이라면 그것이 거의 6,7년 전이라는 것이지만. 유명한 도자기 마을 아리타 옆 작은 동네인 하사미를 첫 여정지로 삼았다. 아이들은 공항에서부터 신이 날 대로 나 있었다. 맞춰 입힌 것도 아닌데 묘하게 커플 룩이 된 아이들을 어른들은 귀여워해주었다. 스타들의 공항 패션 단골 배경인 출국장 앞 횡단보도에서 아이들은 손을 잡고 나머지 손은 번쩍 들어 길을 건너는 어린이임을 천명했다. 연휴도 끝난, 아무날도 아닌 평일의 후쿠오카행 비행기는 아주 작았다. 호새 엄마는 3.3좌석의 비행기를 처음 탄다고 했다. 엄마, 아들, 딸, 엄마 이렇게 나란히 앉히는 게 이들을 위해 가장 좋은 배열이었으나 생각과 달리 아이들은 서로 창가에 앉겠다고 첫 싸움을 시작했다. 선점하는 사람이 무조건 이권을 취득한다고 생각하는 콩콩이와 더 갖고 싶은 사람이 이권을 양도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호새의 대립이었다. 이미 엉덩이를 넣은 콩콩이는 호새의 완력에 굴하지 않았고, 긴 힘겨루기 끝에 호새의 양보로 일단락됐다. 이런 형태의 싸움은 여행 내내 하루에 한 번씩은 일어났고, 아들을 신사로 키우는 호새 엄마는 “호새야, 여자친구는 보호해주는 거랬지?”라는 말로 분쟁의 불씨를 전소했다. 그럴 때마다 신사가 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남자 됨이 억울하고 꿋꿋하게 힘으로 버티는 여자친구 콩콩이에게 섭섭해 눈물범벅이 되는 호새. 그런 아이를 보면 친구 엄마인 내가, 엄마 친구인 내가 백 배는 미안해졌다. 얄밉게도 콩콩이는 “그래 호새야, 이제 여기 앉아. 우리 재미있게 놀자!” 한다. 내가 호새 엄마였다면 제 엄마 모르게 콩콩이를 몇 번은 쥐어박았을 것 같았다. 맛으로, 멋으로 만난 일본 공항에서 나와 아이들이 있으니 바로 택시에 올랐다. 어렵지 않게 버스를 타고 갈 수 있는 하카타 역이었지만 이동의 편리를 위해 여행의 필수 동반자인 유모차도 가지고 오지 않은 일정이었다. 천둥벌거숭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네 살 아이 둘과 작지 않은 트렁크 하나, 어깨에 멘 가방 하나씩을 끌고 메고 갈아타는 것 자체가 해서는 안 되는 일 같았다. 택시를 타고 하카타 역에 내려 3일간 북규슈 지역의 기차를 무제한으로 탈 수 있는 북규슈레일 교환권을 레일패스로 바꾸었다. 아이들은 내년 생일까지는 무료였다. 현지에서는 구입할 수 없고 한국에서 미리 구매한 뒤 바꾸는 것으로, 많은 여행사가 약간의 할인까지 해서 판매하고 있다. 성인 1인당 6만7천원 정도는, 웬만한 특급열차가 편도만으로도 5만원을 훌쩍 뛰어넘는 일본에서 매우 싼 값이다. 지정석을 예약하고 약간의 시간이 남는 동안 아이들은 하카타 역을 즐겼다. 그 위치를 정확하게 몰라도 맛있는 냄새를 따라가기만 하면 긴 줄이 늘 늘어서 있는 빵집이 보인다. 달콤하고 진한 버터 냄새가 진동하는 줄에 서서 1개에 평균 5백원 정도 하는 크루아상을 종류별로 샀다. 그리고 2층으로 올라가 하카타 라멘 집에 들러 명란젓이 올라간 밥과 함께 나오는 라면 세트를 시켜 먹었다. 조금 짜다 싶었지만 꼬불거리지 않는 라면이 신기한 아이들은 맛있게 먹었다. 이후 하카타 역에서 2시간 남짓한 거리에 있는 아리타 역에 내렸다. 좀 예쁜 그릇이다 싶으면 그릇의 바닥을 보던 버릇이 있던 시절, 일식집에 가 마음에 들었다 하면 바닥에 써 있던 ‘有田’. 아리타에 와서야 그 그릇들의 고향을 알 수 있었다. 특급호텔 마케팅 담당이었고, JR 규슈 일을 할 때는 중요 교섭자였으며, 현재는 하사미에서 ‘은야’라는 식당을 하고 있는 김은형 이사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건강한 한국 요리 쿠킹 클래스를 절찬리에 진행 중인 그녀가 우리를 위해 일본의 저녁을 내주었다. 손맛 좋은 그녀가 내준 음식은 꿀맛이었다. 오쿠라, 브로콜리, 병아리콩, 아보카도 등이 든 샐러드, 무와 곤약이 어묵보다 더 맛있던 어묵탕, 밥보다 해물이 많아 보이던 짜지 않은 파에야, 녹말을 묻혀 쌀겨기름에 튀겨낸 닭날개 등은 우리를 라면을 먹은 적 없는 것 같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아이들은 도자기의 고장에 온 것처럼 다양한 젓가락 받침을 장난감 삼아 놀았다. 산속의 밤은 일찍 찾아왔다. 저녁 7시가 되자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북구의 겨울로 여행을 가겠다는 생각은 그날 사라졌다. 거한 식사를 마치고 일본의 일반 가정에서 하루를 지내보게 하겠다는 마음으로 노부부가 계시는 곳으로 향했다. 하다나카상의 민박은 정말 남는 방 하나를 비워 잠과 식사가 가능하게 한 곳이었는데, 도자기 축제를 할 때를 빼고는 개점휴업을 하는 곳과 다름없었다. 장성한 손주가 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네 살짜리 아이들의 등장에 환호하셨다. 아이들은 다다미방에 깔려 있는 이불을 보자마자 기성을 질렀다. 이불에 몸을 던지고는 물색없이 웃기 시작했다. 일본식 방은 추웠다. 온돌 시스템 없이 공기만 데우는 코타츠와 두꺼운 옷으로 겨울을 나는 일본 시골의 방은 누우면 코가 시린 밤을 선사했다. 아이들은 아랑곳없이 신이 났다. 호새 엄마는 자꾸만 ‘1박 2일’의 야영이 생각난다며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비행기에 기차까지 타느라 힘이 들었던 아이들은 금세 잠이 들었고, 아이들이 감기에 들까 봐 걱정하던 엄마들도 잠든 순간은 기억이 나지 않은 채로 아침을 맞이했다. 그렇게 추웠던 방에서 아이들은 땀을 흘리며 잤고 콧물을 흘리며 일본에 왔던 콩콩이는 괜찮아졌다. 정말 발은 따뜻하게 머리는 차갑게 해야 건강해지는 걸까? 도자기 마을의 가을 하사미는 가을의 문턱을 넘어가고 있었다. 아이들은 산책에 나섰다. 한국어로 된 지도 한 장을 콩콩이와 호새는 보물 지도라며 거꾸로 들고 골목골목을 헤집고 다녔다. 작은 도자기 마을인 하사미는 한 집 건너 하나씩 도자기 가게들이다. 1890년에 건축됐다는 아카이쿠라라는 갤러리 앞에서 우리의 산책을 도와주던 관광협회 사람은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아이들은 그 얘기를 알아들었다는 듯이 좋아했다. 그러나 정작 아이들이 좋아한 이유는 핼러윈을 맞이해 호박 모자를 쓴 고양이 입상 때문이었다. 마을의 곳곳은 도자기로 꾸며져 있었다. 아이들은 그것마저도 큰 관심이 없었고 낙엽 던지기, 도토리 뚜껑 따서 자기들 머리 위에 모자로 얹기 놀이 등으로 하루를 보냈다. 엄마가 역작으로 기획했던 것은 우리에게 하룻밤을 내주었던 하다나카상이 운영하고 있는 ‘시키샤’에서 도자기 가마에 넣어 굽는 피자를 만드는 것. 그러나 시키샤는 하필 그날 다른 큰 행사로 아이들의 피자 만들기 체험을 할 수가 없었다. 거푸 미안하다 허리를 굽히는 하다나카상에게 손을 흔들며 아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총총히 떠나왔다. 도자기 마을에 왔으니 도자기 만드는 것도 한 번은 보여줘야겠다 싶어 관광교류센터 2층에 있는 전시장에 들렀다. 흙을 채취하는 것부터 가마에서 꺼내는 것까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해놓은 전시물에 아이들은 무척 즐거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피규어만 한 인형에 전동으로 움직이는 도자기 장인까지 쉽고 편하게 그릇을 만드는 과정을 알 수 있게 해둔 곳이었다. 하사미의 명소는 도자기 공방을 새로 꾸며 쓰고 있는 니시노하라. 아이들도 그곳을 좋아했다. 다른 공방도 도쿄에서부터 온 멋쟁이들로 가득했다. 그중에서 아이들의 시선을 빼앗은 것은 레트로풍의 카페도, 아기자기한 소품 가게도, 특급호텔 주방장이 와서 하고 있던 무료 프렌치 쿠킹 클래스도 아닌 물고기였다. 입구 우물에서 키우고 있는 알록달록한 잉어 종류들이었는데, 아이들이 와서 그랬는지 상냥한 주인은 밥을 주라고 했고, 아이들은 도자기 종지 하나씩 사료를 받아들고 작은 엄지, 검지를 비벼 ‘한 꼬집’씩 사료를 던져주었다. 그런데 주인을 알아보는지 물고기들은 오지 않았다. 주인이 지나가며 박수를 몇 번 치자 그제야 물고기들은 거의 파도를 만들며 모여들었다. 호새는 “콩콩아, 내가 박수를 칠 테니 네가 밥을 줘. 알았지?” 했다. 콩콩이는 박수도 치고 싶고 먹이도 주고 싶은지 잠깐 고민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호새는 손바닥이 빨개질 때까지 박수를 쳤고, 수면에 떠 있는 수많은 먹이가 모두 사라질 때까지 콩콩이는 소리를 질러 물고기들을 불러댔다. 그 소리보다 훨씬 더 큰 소리로 아이들을 돌려세울 수 있었지만 엄마들은 정말 꾹 참았다. 네덜란드를 옮겨놓은 하우스텐보스 아리타 역에서 아이들은 서로 ‘누가 더 웃기나’를 내기하며 이상한 외계어를 하기 시작했다. 음 소거를 하고 보면 무척 재미있는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들어보면 이상한 분절음들의 향연. 외국이어서 다행이었다. 기차에 올라 20여 분을 달리니 하우스텐보스 역이 나타났다. 물감 한 겹을 더 칠한 것처럼 채도가 진했던 일본색의 시골을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유럽이 나타난 것이었다. 아이와 함께 오니 역에서부터 단숨에 도착했던 호텔까지의 거리가 참 길기도 길었다. 오쿠라 하우스텐보스 호텔. 콩콩이는 공주홀릭답게 어떤 공주가 사는 성이냐고 했고, 호새는 큰 관심이 없어 보였다. 하우스텐보스는 작정하면 2박 3일도 아쉽고 또 핫 스폿만 보자 치면 반나절 만에도 둘러볼 수 있는 곳이다. 리조트 내에도 호텔이 있었는데 일찌감치 예약이 끝나 역과 리조트 사이에 있는 대형 호텔인 오쿠라를 선택했는데, 결과적으로는 나쁘지 않았다. 당일 내에는 재입장이 얼마든지 가능했고 다음날은 할인을 받을 수 있었다. 서울에서 미리 사간 원데이패스는 어른 1명에 5만9천원 정도로 저렴했다. 역시 아이들은 올해까지는 무료였다. 아이 둘을 데리고 샅샅이 이 잡듯 가이드북 만들 듯 할 수는 없는 노릇. 게다가 두 아이의 낮잠 시간이 달랐다. 생체 활력 징후도 다른 것 같았다. 밖에서 졸리기 시작하면 집에 가고 싶다고 징징대는 콩콩이와 짜증의 빈도가 잦아지는 호새가 같이 졸려도 잠들기까지는 엄마들이 커플로 죽을 노릇. 또 순차적으로 그 잠투정이 오면 그 시간의 합만큼은 뭔가를 도모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할 것 많고 탈 것 많은 곳에 들어가 눈이 휘둥그레진 호새와 달리 콩콩이는 인형 탈을 쓴 ‘튤리’를 사달라는 것으로 시작된 잠투정이 “엄마 대한민국에 가고 싶어. 대한민구우욱!”으로 정점을 찍었다. 콩콩이는 식당에서 잠이 들었고 호새는 엄마와 둘이 신나게 가을 하우스텐보스를 즐겼다. 콩콩이가 일어났을 때는 저녁이 오후를 밀어내고 있는 시점. 이미 조금 돌아보고 온 호새가 로봇이 아이스크림을 만들어준다며 콩콩이의 손을 잡아당겼다. 아이 둘은 아이스크림 2개를 들고 맥주 축제장 앞에서 아코디언과 클라리넷으로 연주하는 독일 민요를 즐겼다. 네덜란드를 옮겨놓은 곳답게 미피가 키티나 미키만큼이나 중요한 곳이었는데, 미피를 아는 호새와 콩콩이는 그곳에서 오래 놀았다. 둘이 번갈아 유치원 선생님이 돼 조르르 앉혀놓은 미피들을 교육하고 또 보육했다. 밤이 되면 하우스텐보스는 더욱 화려해진다. 불꽃놀이와 일루미네이션이 아이들의 눈을 크게 만들었다. 가면무도회장 앞에서 아이들은 가면보다 그 주변에 가득한 코스모스에 집중했다. 콩콩이는 “빨개졌대요. 물가의 코스모스 얼굴, 해님이 살짝 입 맞췄더니 빨개졌대요~”를 불렀고 호새는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 있는 길, 향기로운 가을 길을 걸어갑니다~”를 했다. 둘이 누가 무슨 노래를 부르는지는 관심도 없는 채 심취해 부르는 모습에 국적 상관없이 엄마들은 모두 웃음으로 화답해주었다. 네온으로 반짝이는 풍차가 느긋하게 돌고 있는 밤의 꽃밭을 지나며 엄마들의 낭만적인 심상과 달리 아이들은 개구리를 봤다고 꽃밭 앞에 주저앉아 눈을 밝혔다. 오쿠라 호텔의 훌륭한 식사로 정평이 난 철판구이 식당 ‘오무라완’에서 아이들은 자신들의 스테이크를 받아먹으며 그 밤을 즐겼다. 맛있는 고기는 아이에게 먹여보면 된다는 우스갯소리를 아이들은 또 입증했다. 질기거나 냄새가 조금이라도 나면 아이들은 잘 먹지 않는다. 콩콩이와 호새는 꽤 먹는 것으로 레스토랑의 명성을 확인해주었다. Tip ●하사미 관광교류센터 1층에서는 하사미의 특산품과 하사미 도자기들을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고 있고 2층은 전시실이다. 하사미 자기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곳. 광장 건너편의 ‘은야’도 좋은 선택. 재료 선택에 엄격한 한국 엄마가 오너 셰프로 있는 식당이다. 영업시간 오전 9시~오후 5시 주소 나가사키 히가시 소노기군 하사미초 이세키고 2255-2 ●하우스텐보스 모나코공국만 한 면적에 17세기 네덜란드를 재현한 나가사키 사세보의 리조트. 특히 봄의 튤립 축제, 겨울의 세계 제일의 일루미네이션 축제는 가볼 만하다. 문의 Korean.huistebbosch.co.jp # Epilogue 아침이 밝았고 테라스에서 보이는 하우스텐보스의 전경에 아이들은 깜짝 놀랐다. 집도 작고 풍차도 작고 꽃밭, 배도 작아 보인다고 좋아했다. 그리고 이불 구름이 있다며 하늘에도 한참이나 눈을 두었다. 여유만이 아이와의 여행에서 살 길이라고 함께 주창하는 엄마들은 아이들을 또 풀어두었다. “나 잡아봐라.” “너 거기 못 서.” 아이들은 달리다가 방향을 바꾸기도 하며 뛸 만큼 뛰었다. 이렇게 뛰고 기차에서는 숙면을 취하고 개운하게 낮잠에서 깨어나면 또 신나게 노는 일정. 아이들만큼이나 엄마들이 좋은 일정이라며 호새 엄마와 나는 소리 안 나는 하이파이브를 했다. profile 콩콩이는… 2011년생. 말 잘하고 밥 잘 안 먹는 여자아이. 잡지사 편집장 엄마에게서 태어난 덕과 탓에 생후 6개월부터 뉴욕행 비행기를 타기 시작해 현지의 시차와 상관없이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눕는 여행형 어린이로 성장 중. profile 콩콩이 엄마는… 「GQ」, 「W」의 피처 디렉터, 「Off」, 「magazine C」, 「RAUME」의 편집장으로 일했다. 한 끼의 식사가 지닌 의미와 그 사이의 감정들을 두루 쓴 「더 테이블」을 펴내기도 했다. 이따금 텔레비전과 라디오에도 나왔지만 지금은 잡지 「ojo」와 「magazine K」의 편집장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는 중이다. <■글&사진 / 조경아>
콩콩이는 여행 중
해병대 사상 첫 여성 교관탄생 이미희 중위와 이지애 하사
2005. 02. 01 화제
“여군은 훈련도 다르지 않냐구요? 천만에요! ‘귀신 잡는’ 해병대는 남녀가 똑같습니다!” 해병대 창설 이후 처음으로 여성 교관 2명이 탄생했다. 포항 해병대 교육단 소속인 이미희 중위와 이지애 하사가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소대장 교육과 훈련교관반 교육 과정을 수료한 것이다. 이들은 남자들도 선뜻 도전하지 못하는 해병대에 지원해서 눈길을 끌고 있다. 계급을 따지자면 꽤 차이가 나지만 동갑내기 두 여성 교관의 대화는 무척 자연스러웠다.    포항에 있는 해병대 교육관을 방문했을 때 이미희 중위(26)와 이지애 하사(26)는 커피를 마시며 지나온 시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교육 훈련 과정중 벌어졌던 에피소드를 떠올리며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당시엔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돌아보면 자신이 대견하다는 생각이 든다는 이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사적인 대화를 나눌 때도 어김없이 ‘~습니다’로 음는다. 훈련병에게 모범이 돼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얼굴 표정부터 자세까지 뭐 하나 흐트러짐 없는 모습이다.  이미희 중위(이하 중위) 계급 사회에선 계급이 우선이지. 나한테 존댓말 하는 게 어색하진 않았나? 이지애 하사(이하 하사) 아닙니다. 오히려 중위님과 가까이 지낼 수 있다는 것이 큰 도움이 됩니다. 계급 조직에선 중위와 하사가 같이 만나 일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데 중위님 덕분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중위 일반인이었으면 친구 삼아도 됐을 텐데… 난 어릴 때부터 군인이 되고 싶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해병대 제복에 대한 환상이라고 할까. 아빠가 해병대 소속 군인이거든. 지금도 연평대 부대에서 근무하고 계시지. 계명대학교 회계학과 4학년 가을 무렵, 우연히 해병대에서 첫 여군을 뽑는다는 기사를 봤다. 그 순간 머릿속이 멍해지는 걸 느꼈지. 바로 엄마와 상의했는데 적극 찬성하시더라고. 하지만 아빠가 반대하셨지. 군대 생활이 힘들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그러셨을거야. 하사 그러셨습니까. 저도 가족들이 심하게 반대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무척 대견스러워하십니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운동을 좋아하던 저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사이클을 시작했습니다. 공을 가지고 하는 운동이라면 절대 지지 않았는데, 하루는 체육 선생님이 사이클을 타보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선수들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시작한 운동인데 전 너무 늦지 않느냐는 반문에도 아랑곳없이 사이클을 시작하라고 권하셨습니다. 그래서 운동을 시작했죠. 한번 ‘필’이 꽂히면 한눈 팔지 않고 정신없이 밀어붙이는 근성 때문에 뒤늦게 시작한 운동이지만 남들보다 빨리 정상의 수준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영산포여자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인 운동에 돌입했죠. 고등학교 1학년 10월, 전국체전에서 사이클부문 3등에 입상했습니다. 운동을 시작한 지 불과 1년 만에 거둔 성과였습니다. 동신대학교 체육학과에 진학해서 운동은 제 삶의 목표가 됐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킬레스건에 염증이 생겨서 운동을 계속하면 위험하다는 진단을 받았죠. 그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하늘이 무너지는 듯합니다. 꿈이 사라지는 순간이었으니까요. 그때부터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이클은 그만두더라도 체육 교사에 대한 꿈은 저버릴 수 없었습니다. 체육 교사가 되기 위해선 교육대학원에 가야 했지만 집안 사정 때문에 그것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꾸준히 공부하며 생활체육지도자 자격증도 땄습니다. 스포츠센터에서 일해 동생들 학비도 보태주고 생활도 꾸려가면서 성실하게 살았죠. 스포츠센터에서 일한지 1년 만에 팀장이 됐습니다. 생활은 안정이 됐지만 정신적으로 무척 공허했습니다. 스포츠센터 팀장직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표현은 절대 아닙니다. 도전할 꿈이 없다는 것이 답답했죠. 그러던 어느 날 경찰 시험을 준비하던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에 해병대 1기생을 뽑는다는 공고를 봤습니다. 2003년 7월이었죠. 혹독하다는 해병대 훈련을 받고 나면 뭔가 정신적으로 완전 무장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남자들이 자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중위 하사는 군인이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다.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완전 무장된 상태거든. 꾸준히 운동을 했으니 체력도 거의 남자들 수준과 맞먹겠는 걸. 하사 고맙습니다. 3년 동안 해병대에 다녀오면 진로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윤곽이 드러날 것 같은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입대지원서를 작성했습니다. 중위 나는 1차 서류 심사를 거친 후 국어, 국사, 영어, 전공 과목을 치렀지. 하사 저도 그랬습니다. 중위 하사도 네 과목을 치렀나. 하사 네, 그렇습니다. 시험 수준만 다를 겁니다. 중위 합격 발표 날 제일 먼저 연평부대에 계신 아버지께 전화를 했지. 그때는 무척 좋아하시더군. 친구들도 하나같이 합격을 예상했다는 분위기였지. 하사 저는 합격통지서를 받은 날 전라도에 계신 어머님께 전화를 걸었습니다. 걸쭉한 사투리로 그러시더군요. 해병대에 가겠다는 소리에 ‘드디어 일 저질렀구나’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중위 (웃음) 양쪽 집안 분위기가 거의 비슷했군. 앱대 전날 머리를 자르기 위해 미장원을 갔는데 진짜 눈물이 나더군. 아무리 손으로 닦아도 저절로 주르르 흐르던걸. 남자들이 입대할 때 눈물을 흘리잖아. 그 기분을 알 것 같더라니까. 긴 생머리를 자르고 숏커트 하는데 그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 그때 사귀던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같이 미장원에 갔거든. 뒤에서 내 모습을 보더니 같이 눈물을 흘리는 거야. 여자친구 군대 보내는 사람은 자기밖에 없을 거라면서 훌쩍대거리걸.    하사 그분이 아주 특이한 경험을 하셨군요. 그 남자친구 분 아직도 만나십니까? 중위 고무신 거꾸로 신는다거나 군화 거꾸로 신는다는 표현 있잖아. 그거 딱 맞더라고. 입대한 연인을 기다리기엔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하잖아. 자연스럽게 헤어졌지. 갑자기 입대일이 생각난다. 그날 부모님도 함께 오셨는데 얼마나 눈물을 흘리시던지… 물론 나도 그랬지만. 부모님과 헤어지고 난 뒤 가족들이 안 보이는 곳에 도착하면 전체 분위기가 확 달라지잖아. 군대 갔다온 남자들이 하는 말 있잖아. 코너 돌면 분위기 확 바뀐다는 말. 그 말 맞더라고. 존댓말은 사라지고 일단 소대장의 목소리 톤부터 확 달라지잖아. 군인이 되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에 더욱 긴장하는 것 같아. 사복은 입대일 밤에 벗어서 차곡차곡 정리한 뒤 군복으로 갈아입잖아. 주머니 속 소지품까지 다 꺼내는 소리를 듣고 내가 질문을 했었지. 눈썹 그리는 펜슬은 가지고 들어가도 되냐고. 그때 교관의 눈빛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 아무 답변도 하지 않던 교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땐 알 수 없었어. 근데 시간이 지나고 지금 생각해보니 참 한심한 행동을 한 거야. 난 그때까지 군인이 되겠다는 준비가 덜됐던 거지. 그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하사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누구나 시행착오는 겪는 것 아니겠습니까? 중위 내가 이래서 하사를 좋아한다니까. 서로 의지도 되고 말이지. 입대 하자마자 일주일 동안 교육 기간인데 새벽 5시 45분에 기상해서 6시부터 연병장을 2km 뛰지. 거의 30분 정도 소요되는 거리를 뛰고 나면 땀으로 뒤범벅이 되고 아침밥도 꿀맛이야. 건강은 훨씬 좋아지지 않았나? 하사 네, 그렇습니다. 입대하고 군살은 쏙 빠지고 건강을 찾았습니다. 중위 그날 기억나나? 추운 겨울 야외에서 텐트 치고 자던 날 말이야. 하사 그날은 잊을 수 없습니다. 12월 초로 기억됩니다. 보통 군인들은 25kg 정도 되는 배낭을 메고 훈련을 가지만 여군들은 그 무게의 70% 정도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야외 훈련 장소는 사격장이었습니다. 그곳으로 가는 데 3시간 정도 걸렸습니다. 도착해서 텐트를 치는데 중위님과 한 텐트에서 잠을 잔다는 건 상상하기 힘든 일이잖습니까. 교육단 소속 여군이 둘뿐이니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제겐 잊을 수 없는 날이었죠. 도착해서 저녁을 먹기 위해 함구에 쌀을 씻어 넣는데 매스컴을 통해서 보던 일을 제가 직접 하고 있다는 생각에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중위 ‘함구’라고 하면 일반인들은 잘 모를 거야. ‘짬통’이라고 하면 남자들은 알아들을 것 같군.(웃음) 땅을 파서 고체 연료를 넣고 밥과 국을 끓였지. 주먹만한 고체 연료를 나도 처음 봤으니까. 무척 신기했어. 그건 절대 꺼지지 않더라고. 음식을 다 만든 후에 흙으로 덮어야 확실히 꺼지지. 차가운 바닥에서 침낭 속에 들어가고 잠을 청하는데 정말 춥더라고. 하사 부모님의 소중함이 느껴지는 날이었습니다. 따뜻한 방에서 맛있는 밥 챙겨주는 엄마가 너무 그립더라고. 그래서 군대 오면 철든다고 하는가 봅니다. 중위 군인들이 민간인만 보면 난리라는 말 많이 들었지. 나도 그렇게 되더라고. 교육 기간 동안 군대 안에서 생활할 뿐만 아니라 밖을 볼 수도 없잖아. 일주일 지난 시점인가? 여군들은 산부인과 진단을 받기 위해 군대 밖으로 나가지. 차를 타고 밖에 나가는데 눈을 감게 하잖아. 아무래도 심리적인 동요를 막기 위해 그런 듯싶어. 근데 계속 눈을 감고 있진 않잖아. 자꾸 보고 싶은 충동이 생기게 마련이니까. 실눈을 뜨고 밖을 보는데 얼마나 반갑던지. 평상복 입은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안정되더라고. 알록달록한 간판 색깔을 보는데 이건 ‘별천지’가 따로 없는 느낌이었어. 환경이란 게 무서운 거야. 하사 군대 간 남자친구들이 ‘초코파이’가 무척 먹고 싶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도 초코파이가 얼마나 먹고 싶던지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군대 가기 전에도 주말이면 교회에 다니곤 했는데 입대한 후 일요일이면 꼭 교회 행사에 참석했습니다. 초코파이를 나눠주는 시간을 정말 눈물 나게 기다렸으니까요.(웃음) 중위 맞아. 나도 그랬으니까. 하사 어디선가 동료가 구한 건빵 두 봉지를 열 명이 나눠 먹은 적도 있습니다. 봉지를 뜯지 않은 채로 잘게 부숴 나눠 먹었습니다. 배가 고팠던 건 아닌데 군것질을 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으니까요. 중위 군대에서 먹는 건빵만큼 맛있는 것도 없지. 하사 군대에 와서 오히려 식사시간에 육류는 자주 먹습니다. 한 끼도 빠지지 않고 나오니까요. 엄마가 해주는 반찬보다 맛있다고 농담을 했더니 섭섭해하시더라고요.(웃음) 중위 예전과 많이 달라졌지. 군대도 상황이 많이 좋아졌어. 아빠한테 듣던 예전 모습과는 많이 다르니까. 세상이 변하니까 군대도 현대식으로 점차 변하면서 좋아진 거지. 하사 요즘엔 친구들 만나면 저만 왕따 당하는 기분이 듭니다. 전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가 더 재미있는데 그들은 드라마 이야기, 남자친구 이야기, 쇼핑한 물건들을 꺼내놓고 자랑하느라 정신없습니다. 중위 (웃음) 나도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가 더 재미있지. 자꾸 군대 생활 이야기를 꺼내니까 친구들이 만나자는 말을 뜸하게 하더라고. 하사는 축구를 무척 좋아하기도 하고 잘하잖아. 많이 부러워. 남자 군인들과 겨뤄도 절대 지지 않잖아. 체력이 놀랍다니까. 하사 전 공을 가지고 하는 운동이 제일 재미있습니다. 달리는 것도 즐겁습니다. 중위 지난번 80명이 달리기 했을 때도 그때 2등 했지? 하사 네. 중위 여군은 하사 한명뿐이었잖아. 하사 네, 맞습니다. 중위 하사가 뛸 때 뒷모습을 보면 솔직히 남자 군인과 구분이 안 가.(웃음) 머리도 짧고 키도 그다지 작지 않아서 말이지. 자네 키가 거의 170cm 정도 되잖아.    하사 네, 그런 말 많이 듣습니다. 중위님은 카리스마가 대단합니다. 중위 자네의 카리스마도 대단하지. 소대장 교육과 훈련교관(DI)반 교육 과정이 사람을 많이 변하게 한다. 50명이 넘는 신병들을 교육하는데 첫 수업에 떨릴 것 같지만 그런 긴장감은 하나도 없었지. 오히려 교육 기간이 더 긴장되지 않았나? 하사 네, 맞습니다. 그렇게 긴장하면서 배웠기 때문에 한 치의 실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중위 교관되기 전에 ‘훈육관’으로 여러 번 훈련병 앞에 섰기 때문에 동생들 다루듯이 자연스럽고 절도 있게 행동할 수 있는 듯해. 자그마한 실수가 커다란 사고로 번질 수 있기 때문에 까다롭고 형식적인 절차를 안 할 수 없는 거지. 일반인들에겐 불필요해 보이는 일도 말야. 남자 군인들과 함께 여군으로서 충분한 역할을 해내면 된다고 생각해.  하사 훈련중 여자이기 때문에 ‘열외’라는 말은 절대 들을 필요도 없고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열외’이길 바란다면 군대에 오지 말았어야죠. 그렇다고 남자 군인들과 싸워 이기고 싶다는 게 아닙니다. 육군, 해군, 공군 중 해병대 여군들이 역시 대단하다는 말을 듣고 싶다는 표현이 더 솔직할 것 같습니다. 남자 해병대 군인들이 대단한 실력을 보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남자 군인들이 하는 스타일과 차별할 수 있는 교관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중위 인격적인 교관이 되겠다는 포부로 들리는군. 하사 네. 처음 해병대를 지원할 땐 의무 기간만 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 곳에서 생활하면서 해병대에 남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더욱 노력해서 선배들의 뒤를 이어 절대 부족함이 없는 성실한 교관이 되겠습니다. 이들은 교육 기간 도중 하루에 세 번 ‘구령법’을 익혔다. 대부분 식사를 마친 후 곧바로 10여 분 동안 구령 연습을 했다. 쉴 새 없는 연습에 목소리는 점점 허스키해지고 어느새 교관의 낮은 저음으로 변했다. 작은 실수가 큰 사고로 번질 수 있다는 긴장감 때문에 눈매는 더욱 날카로워졌다. 항상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도 이들의 경험담을 듣는 데 성공했다. 솔직한 심정 속에 군인으로서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멘트도 빠지지 않았다. 이들을 통해 훈련받을 훈련병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여군으로서 장점을 더욱 살려 확실한 교관이 되겠다는 이들의 포부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  글 / 강수정 기자  사진 / 백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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