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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총 311 건 검색)

중국 국경절 흥행 1위는 한국전쟁 영화 ‘존망의 전투’
2024. 10. 04 15:56 국제
... 찾는 듯했던 군인 아버지와 오누이가 명령·의용군 지원 등으로 다시 각자 전쟁터로 갔다가 한국전쟁 철원 전장에서 만난다는 설정으로 가족애를 강조했다. 한국전쟁 배경에 대한 설명은 거의 없었다....
한국전쟁 호주 참전용사를 기리며…추모공연장 건립
2024. 09. 25 20:20 보도자료
... 한국전쟁 당시 호주 참전용사들의 헌신을 기리기 위한 추모공연장 준공식이 열렸다. 포스코그룹이 한국전쟁 당시 호주 참전용사들의 헌신을 기리는 추모공연장을 서호주에 완공했다. 장인화 포스코그룹...
포스코그룹
진실화해위, 한국전쟁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 6건 진실규명
2024. 09. 25 12:00 사회|사회
... 희생당한 민간인들로 보이는 유해 40구가량을 발견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제공. 한국전쟁 당시 경찰이나 치안대, 적대 세력에게 목숨을 잃은 전국 각지의 희생자들이 진실규명 결정을...
16세에 입대해 전쟁 끝나니 20대···한국전쟁 소년병 등 ‘진실규명’
2024. 07. 10 12:00 사회
...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판단이 나왔다. 진실화해위는 지난 9일 제82차 위원회에서 ‘한국전쟁 중 소년병 참전 사건’에 진실규명 결정을 내리며 이같이 권고했다. 이는 과거사정리법 제2조 중...

스포츠경향(총 46 건 검색)

‘The Globalists’ 윤오순 대표 “한국전쟁 참전으로 시작된 한-에티오피아의 오랜 인연, 커피로 잇다”
2024. 07. 17 01:14 연예
아리랑TV 17일 수요일 오후 5시 아리랑TV 특별기획 프로그램 ‘The Globalists’ 94회에 세계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각계 오피니언 리더들을 만나고 있는 아리랑TV의 대표 대담 프로그램 ‘The Globalists’에 윤오순 벨레투 대표가 출연했다. 윤오순 대표는 에티오피아 커피 투어리즘으로 일본과 영국에서 석-박사 학위를 땄으며, 현재 한국에서 에티오피아 커피 문화를 알리고 있다. 손지애 교수가 한국에서 에티오피아 원두만 취급하는 ‘벨레투 에티오피아 커피클럽’을 운영하게 된 배경을 물었는데, 윤오순 대표는 “에티오피아는 아라비카 커피의 발상지이고, 오랜 세월 커피를 즐겨온 유서 깊은 문화가 있다”면서 “그동안 에티오피아를 오가며 커피를 연구하고 학생들을 가르쳐왔지만, 펜데믹 기간 에티오피아를 자주 갈 수 없게 되자,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보자고 생각해서 시작하게 됐다”고 답했다. “한국에서도 에티오피아 커피를 좋아하는 분들이 많다”고 손 교수가 말하자, 윤오순 대표는 “한국에서 맛있는 커피를 먹어봤다고 한다면 분명 에티오피아 커피일 것”이라고 자부했다. 윤 대표는 또 “에티오피아 커피는 사실 50%가 내수용으로 소비될 정도로 에티오피아 자국민들이 커피를 매우 사랑하는데, 커피뿐만 아니라 커피나무, 잎까지도 모두 식용으로 소비될 정도로 커피에 진심인 나라”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역사적으로도 에티오피아는 한국 전쟁을 도운 인연이 있는데, 그때의 인연이 사실 지금도 커피를 통해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아리랑TV 에티오피아에 대한 관심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해 윤오순 대표는 “과거 한국의 NGO 봉사 활동으로 에티오피아에서 온 편지들을 번역하다가 관심이 생겼다”면서 “이후 직접 찾아가 본 에티오피아는 우리가 알던 부정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더욱 알고 싶은 나라였고, 이후 커피로 에티오피아의 매력을 알리는 ‘커피투어리즘’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답했는데, “일 년에 절반 정도는 에티오피아에 머물기 때문에, 에티오피아는 나에게 제2의 고향”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손 교수가 강원도 화천산천어축제의 세계적 흥행에 공헌했던 윤오순 대표의 경력을 언급하며 에티오피아의 커피 투어리즘은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할지 묻자, 윤오순 대표는 “요가에 대해 알고 싶다면 인도를 방문하는 것처럼, 커피 하면 에티오피아를 떠올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면서 “커피 투어리즘은 단순히 카페에 들러 맛있는 커피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커피 원두가 완성되기까지의 배경을 보고, 만드는 사람들의 노력을 알게 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아리랑TV 더불어 윤오순 대표는 “커피 투어리즘은 커피를 문화적 자원으로 볼 수 있게 하는 요소”라고 하며 “에티오피아에서 이러한 내부적 잠재력을 깨닫고 활용한다면, 외부의 지원 없이도 커피 투어리즘과 같은 관광 산업을 완성하고 경제적인 독립을 이룰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에티오피아 커피에 진심인 커피 박사, 윤오순 대표와의 대담은 17일 수요일 저녁 5시, ‘The Globalists’ 방송에서 확인할 수 있다.
[줌 인 MLB] 한국전쟁, 그리고 메이저리거들의 숭고했던 희생
2024. 06. 25 18:36 야구
2002년 7월23일 펜웨이파크에서 진행된 테드 윌리엄스를 기리기 위한 행사에서 담장에 게시된 윌리엄스의 한국전쟁 참전 시절 사진 게티이미지코리아 1950년 6월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은 1953년 7월27일 정전 협정이 맺어지기까지 3년 동안 한반도에 엄청난 피해를 남겼다. 무수한 사람들이 죽었고, 도저히 회복 불가능할 것처럼 보인 재정적 타격을 입었다. 한국전쟁은 미국에도 깊은 의미로 남아있다. 자유주의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미군이 투입됐고, 3만70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군들 가운데는 한창 활약하거나, 꽃을 피우려던 메이저리그 선수들도 있었다. 한국전쟁 74주년을 맞아, 참전했던 주요 선수들의 행적을 밟는 것으로 그들의 희생을 추모한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메이저리거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선수를 꼽으라면 단연 ‘타격의 신’ 테드 윌리엄스다. 윌리엄스는 1952년 참전해 1953년 7월까지 약 1년 반을 복무했다. 윌리엄스는 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했다. 1943년부터 1945년까지 3년을 해군에서 콜세어기 비행교관으로 복무했다. 다만, 전장 투입을 위해 진주만에 대기하고 있던 도중 일본이 항복해 전쟁이 끝났다. 윌리엄스는 한국전쟁에서는 전투기 조종사로 복무하며 38번의 출격을 했다. 그 과정에서 적의 대공포에 비행기 동체가 맞아 긴급 착륙하는 아찔한 일도 있었다. 다음은 윌리엄스의 ‘메이데이’ 콜을 들었던, 지금은 세상을 떠난 또 다른 메이저리거 참전용사 제리 콜먼과 바비 브라운이 2013년 USA투데이와 인터뷰에서 회상한 당시 상황이다. 2010년 양키스타디움에서 열린 올드타이머 데이에서 팬들에게 인사하는 제리 콜먼. 게티이미지코리아 2009년 양키스타디움에서 진행된 올드타이머 데이에서 조 지라디 감독과 악수하는 바비 브라운. 게티이미지코리아 “우린 당시 한국 깊숙한 곳에 있었다. 어느날 긴박한 메이데이 콜을 받았다. 어떤 남자가 북한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그는 K-55 부대에 있었는데, 바퀴도 펴지 않고 비행기를 착륙시켰다고 했다. 현장에 가보니 비행기가 불에 타고 있었다. 그 비행기 조종사가 윌리엄스였다.”(콜먼) “당시 그는 매우 심한 화상을 입었다. 그리고 한 달이나 병원에 머물렀다. 다행히 그는 살아남았다. 매우 운이 좋았다.”(브라운) 윌리엄스는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합쳐 약 5년 정도의 커리어를 손해봤다. 그것도 모두 전성기 때였다. 통산 타율 0.344, 521홈런, 1839타점, 출루율 0.482, 장타율 0.634의 엄청난 기록을 남긴 윌리엄스가 만약 전쟁에 나서지 않았다면, 베이브 루스의 홈런 기록을 가장 먼저 넘어선 선수는 행크 애런이 아니었을 수 있다. 콜먼 역시 윌리엄스처럼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 모두 참전했다. 그는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모두에서 직접 전투를 수행했던 유일한 메이저리거였다. 미 해병대에서 복무했던 그는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합쳐 도합 120회의 임무를 수행했고, 2개의 수훈 비행 십자장(Distinguished Flying Crosses), 13개의 에어 메달(Air Medal), 2개의 해군 공로 메달(Navy Citation)을 받았다.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던 뉴욕 양키스에서 뛰었던 덕분에 월드시리즈 우승반지도 5개나 얻었다. 하지만 콜먼은 전쟁에서 겪었던 경험을 외부에 얘기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너무 끔찍했던 기억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콜먼은 한국전쟁 당시 전투기를 타고 함께 출격했던 동료가 적의 포화에 맞아 머리를 떨구는 것을 본 적도 있었다. 콜먼은 “전쟁이 끝나고 몇 년 후 양키스에서 나를 위한 행사를 연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날 아침 7시에 전사한 그 동료의 처남이 ‘그의 부인이 남편의 행방을 알고 싶어 한다’고 전화를 했다”며 “당시 많은 미군이 전쟁 포로로 붙잡혀 송환되지 않은 경우가 있었고, 부인도 그러길 바라고 있었다. 5명의 아이를 둔 그 부인에게 남편이 전사했다고 말해야했던 건 바로 나였다”고 했다. 100명이 넘는 메이저리거가 참전했던 한국전쟁에서 유일하게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선수는 로버트 ‘밥’ 네이버스다. 1939년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에서 데뷔한 네이버스는 2차 세계대전 기간 미 공군에 입대해 캔자스주에 있는 항공 운송 훈련장에서 일했다. 하지만 군복무가 마음에 들었는지, 종전 후에도 메이저리그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군에 남았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곧바로 전장으로 투입됐다. B-26 전술 폭격기를 조종했던 네이버스는 한국전쟁에서 수많은 폭격 임무를 수행했으나 1952년 8월 적의 대공포에 피격, 실종됐고 이후 사망이 최종 확인됐다. 한국전쟁 중 유일하게 사망한 메이저리거인 로버트 ‘밥’ 네이버스. 위키피디아 버드 셀릭 전 MLB 커미셔너는 2000년 6월15일 알링턴 국립 묘지의 무명용사의 묘에서 진행된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을 기리기 위한 기념식에서 공군 장교로 복무하던 네이버스의 아들을 향해 “네이버스 소령은 국가에 대한 봉사라는 존경할 만한 윤리를 구현했다.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가 나라를 위해 해준 모든 일에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월드시리즈 최다승 투수 화이티 포드, 얼마전 세상을 떠난 역대 최고의 외야수 윌리 메이스, 최초의 사이영상 수상자 돈 뉴컴, ‘미스터 컵스’ 어니 뱅크스도 한국전쟁 시절 군에서 복무한 위대한 선수들이다. 다만, 이들은 전쟁에 직접 투입되지는 않고 미국에서 대기했다. 하지만 전쟁 상황이 심각해지면 언제든 투입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콜먼이 생전에 “(전쟁 후에도) 저 사람들을 봤지만, 난 그것에 대해 한 번도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고 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들 역시 전쟁으로 인해 커리어에 적잖은 손해를 봤다. 초 단위로 생사가 엇갈리는 전장. 그것도 낯선 타지의 한가운데에서도 그들이 생전 처음보는 한국 군인들과 힘을 합쳐 싸웠던 이유는 ‘자유와 평화’라는 가장 중요한 가치 때문이었다. 콜먼과 브라운은 생전 전쟁에 참전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어떤 전쟁도 즐겁지 않다. 하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내가 사랑하고, 또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둘째는 내 조국이다. 만약 당신이 조국을 위해 싸울 수 있다면, 그것은 당신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명예다.”(콜먼) “아무도 한국전쟁에 대해 묻지 않는다. 아무도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래도 괜찮다. 사람들이 나를 필요로 할 때, 내가 그곳에 있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브라운)
‘너도 나도 디플로맷’, 페르디난트 티탈렙타(Ferdinand Titalepta) 네덜란드 한국전쟁 참전용사 안장식
2024. 06. 24 18:36 연예
아리랑TV 24일 오후 10시 30분 방송이 될 아리랑TV ‘위 아 디플로맷(We are Diplomats)–너도 나도 디플로맷’은 나누리 피디 진행으로 네덜란드 한국전쟁 참전용사 페르디난트 티탈렙타 안장식 소식을 전하고 한국전쟁이 한국과 네덜란드 관계에 미친 영향을 알아본다. 지난 5월 2일, 네덜란드의 한국전쟁 참전용사인 고 페르디난트 티탈렙타(Ferdinand Titalepta)씨의 유해가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됐다. 1953년 4월, 21살의 나이로 네덜란드 반호이츠 부대 소속 이병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티탈렙타 씨는 1년 동안 한국에 머물며 한국의 평화와 자유를 지키는 데에 힘썼다. 티탈렙타 씨의 아내 마리아나(Mariana Roelofsma Titalepta)씨는 나누리 피디와의 인터뷰에서 “부산에 안장되는 것이 남편의 소원이었다”라고 말했다. 아리랑TV “남편은 우리에게 죽고 나면 항상 부산에 묻히고 싶다고 말했다”면서 안장식을 치르러 가는 길에 기분이 어떻냐는 나누리 피디의 질문에 “남편이 자랑스럽다”고 소감을 밝혔다. 티탈렙타 씨의 손녀 나타샤 티엔(Natasja Thien) 씨는 “할아버지의 유해가 한국에 묻히는 걸 가족들 모두 찬성했다”면서 “할아버지는 생전에 저희와 함께 하셨고, 여기 한국에서는 동료들과 함께 지냈다. 항상 한국이 너무 아름답고 사람들이 친절하다고 말씀하셨다. 한국인들이 본인을 존경한다고도 이야기하셨다. 그러면서 한국에 묻히고 싶어하셨다. 이제 여기 계실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네덜란드의 군사력은 미약한 편이었고 대부분 병력마저도 인도네시아에 주둔한 상태였다. 또 네덜란드는 한국과 수교를 맺은 상태도 아니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내에서 파병을 촉구하는 여론이 매우 강하게 형성됐고 네덜란드 정부는 지원병을 모집한 후 네덜란드 대대를 창설했다. 페터르 반 데르 플리트(Peter van der Vliet) 주한 네덜란드 대사. 아리랑TV 그 해 11월 23일, 부산에 도착한 네덜란드 대대는 횡성전투를 비롯해 대우산 전투, 별고지 전투 등 수많은 전투를 치러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네덜란드 군인의 수는 연인원 5,322명에 달하는데 이 중 120명이 목숨을 잃었고 645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3명이 포로가 됐다. 페터르 반 데르 플리트(Peter van der Vliet) 주한 네덜란드 대사에게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네덜란드에서 파병 찬성 여론이 강하게 형성됐던 이유를 묻자 “한국전쟁이 북한의 불법 남침으로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 운을 떼면서 “이는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었기 때문에 네덜란드 내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한국이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도록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네덜란드 정부는 자원병 모집 공고를 냈다. 처음 열흘 동안에만 1,200명이 한국으로 가겠다고 지원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한국전쟁에 전투 병력을 파견한 16개국 중 하나인 네덜란드는 한국의 혈맹이자 국제 무대에서 한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우방국이다. 2022년 11월, 한국과 네덜란드는 양국 관계를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하는 데 합의했다. 전쟁 후 7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국은 전쟁의 상흔을 씻고 사회·경제적으로 눈부신 성장을 거듭해 왔지만 한국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전 세계적으로 유례 없이 긴 휴전 상태가 이어지고 있는 곳이 바로 한반도다. 아리랑TV 리오 스넬(Leo Snel) 네덜란드 대사관 국방 무관은 평화를 지키기 위한 노력으로 ‘소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가장 중요한 것은 소통 창구를 계속 열어두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북 간에 직접적인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 상당히 문제라고 생각한다. 잠재적 갈등이나 실제 갈등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소통이 중요하다. 우리는 외교, 군사, 인도주의 등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기여할 수 있다”고 본인의 의견을 밝혔다. 반 데르 플리트 대사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국제 사회가 정의롭고 공정한 규칙에 기반해 작동할 수 있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모든 국가가 공정하고 정의로운 국제 질서를 따르며 각국이 서로를 존중하며 평화로운 국제 사회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아리랑TV 마지막으로 티탈렙타 씨의 손녀 나타샤 티엔 씨는 “지금껏 한국인들이 참전용사들에게 존경과 경의를 표한 것처럼 내 할아버지를 기억해 주길 바란다”는 심경을 전했다. 그러면서 할아버지의 안장식에 대해 “매우 인상적이었고 할아버지가 이곳에 묻힌 것이 감격스럽다. 할아버지가 더 이상 네덜란드에 있지 않지만 괜찮다. 이제 이곳도 할아버지의 집이다”라며 나누리 피디에게 “혹시 이 근처에 들를 일이 있다면 꽃과 함께 할아버지 무덤을 꼭 방문해 주길 바란다”는 말을 덧붙였다. 외교 전문 피디 나누리 피디가 네덜란드 참전용사의 안장식에 참석하고, 한국전쟁이 한-네덜란드 관계에 끼친 영향에 대해 생각해보는 ‘위 아 디플로맷(We are Diplomats)–너도 나도 디플로맷’ 한국전쟁 특집 편은 24일 월요일 오후 10시 30분에 아리랑 TV를 통해 전 세계에 방송된다. 이번 에피소드의 한국어판은 유튜브를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아리랑TV
아리랑TV ‘1Day 1Korea’ 유일 생존한 96세 한국전쟁 종군기자의 증언
2024. 06. 23 02:27 연예
아리랑TV “나 같은 ‘종군 기자’ 앞으론 없어야, 다시는 전쟁 없어야 해“ 아리랑TV 데일리 문화정보프로그램 ‘1Day 1Korea’가 오는 25일 오전 7시 30분 한국전쟁 발발 74주년을 맞아 한국전쟁을 지근거리에서 목격하고 보도한 종군기자 한영섭 씨의 생생한 증언을 전한다. 올해로 96세인 한영섭 기자는 KBS의 전신인 서울 중앙방송국 소속 방송기자로 한국전쟁 발발 소식을 최초로 보도했던 장본인이자, 한국전쟁 당시 활동한 종군기자 중 유일하게 남은 생존자다. “아직도 6월이 되면, 그때 그 고통스러웠던 일들이 다시 되새겨 진다”고 말문을 뗀 한 기자는 “1950년 6월 25일 새벽, 출근 준비를 하던 중 방송국의 연락을 받고 전쟁이 났구나”를 직감했고, “오전 6시 40분에 임시 방송을 했는데, 그것이 한국에서 전쟁을 알리는 첫 뉴스”였다고 회상했다. 아리랑TV 이후 UN군 참전과 1.4 후퇴, 흥남철수, 인천상륙작전 등 밀고 밀리는 전투가 이어지는 전쟁의 과정을 목격하고 보도했던 한영섭 기자. “고지 탈환 혈투가 이어지면서 그 여름, 인민군과 국군 전사자들의 시체가 부패하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면서 당시의 참상을 전했는데, 특히 “유엔군 4만 명이 낯선 한국 땅에 와서 자유를 지키기 위해 전사를 했는데 이분들에 대한 고마움을 우리는 절대 잊으면 안 된다”고 당부했다. 아리랑TV 그러면서 종군기자 활동 당시 목격한 “내 또래의 병사가 옆에서 인민군 총격을 당해서 목숨을 잃은 모습, 흥남철수 때 가족들이 서로 헤어지면서 울부짖던 장면을 평생 잊지 못한다. 요즘도 꿈에서 본다”며 지금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전쟁 경험의 고통을 털어놓았다. 74년 전 벌어진 한국 전쟁의 산증인인 한영섭 기자의 마지막 바람은 무엇일까? 그는 “내가 한국전쟁 내내 종군기자를 했지만, 앞으로 종군기자는 없어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라면서 “전쟁의 참화를 우리는 다시 겪지 말아야 하고,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한다”는 묵직한 한마디를 남겼다. 아리랑TV 유일 생존자인 한영섭 한국전쟁 종군 기자의 생생한 증언은 한국전쟁 발발일인 25일 오전 7시 30분에 만나볼 수 있다. 이밖에도 ‘1Day 1Korea’는 한국전쟁 발발 74주년을 맞이해 전쟁의 아픔을 되새기며 평화의 가치를 전할 내용을 24일 월요일부터 6월 28일 금요일까지 매일 오전 7시 30분에 방송할 예정이다. 아리랑TV

주간경향(총 18 건 검색)

[오늘을 생각한다]이제 한국전쟁을 끝내자!(2023. 05. 19 11:24)
2023. 05. 19 11:24 오피니언
나는 전쟁 중에 태어났다. 전쟁 중에 딸을 낳았고, 오늘도 전쟁 속에 살아가고 있다. 1950년 이후 태어난 한국 사람 모두 비슷한 처지다. 2023년 4월 기준 총인구의 88%가 여기 해당한다. 역설적으로 정전협정 이후 70년이 흐르는 동안 자연스럽게 한국전쟁은 모두에게 잊혔다. 2021년 7월 국무총리 산하 통일연구원이 발표한 <KINU 통일의식조사 2021>에 따르면, 밀레니얼 세대의 74.1%, IMF 세대의 68.3%가 북한에 무관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중장년층은 청년층보다 상대적으로 북한에 대한 관심도가 높았으나, 전쟁 세대의 52.9%, 즉 절반 이상이 북한에 무관심하다고 응답했다. 북한의 7차 핵실험이 임박했다느니, 김정은씨가 군사정찰위성을 대륙간탄도미사일에 탑재해 발사하겠다느니 뉴스가 나와도 무감각하다. 오래된 전쟁은 말 그대로 우리 삶의 일부가 돼버렸다. 한국전쟁 때문에 53만명(징집병 약 30만명)의 군인이 복무 중이다. 국방 예산으로 한 해 57조원(복지예산 109조원)을 쓴다. 전체 국가재정의 9%에 달하는 액수로, 하루에 1561억원씩 전쟁 비용으로 쏟아붓는 꼴이다. 전 국민을 대학교까지 무상교육 하고도 남는 돈이다. 이게 다 삶의 일부라니 끔찍하지 않은가? 초등학생 시절 전두환 군사정권은 북한이 금강산댐을 만들어 물 공격을 하면 63빌딩이 반쯤 잠길 것이므로, 평화의 댐을 지어서 방어해야 한다며 전 국민을 상대로 돈을 걷었다. 어린이도 예외는 아니라서 전교생이 성금을 모아 보냈다. 수년이 지나 북한의 물 공격이 허구이며 정권의 조작이었단 사실이 밝혀졌지만, 그 일로 누가 사과하거나 처벌을 받는 건 보지 못했다. 물론 돈을 돌려받은 사람도 없다. 선거철마다 북한의 도발과 위협을 선거 전략으로 삼는 소위 ‘북풍’이 얼마나 불어댔는지, 생소한 분들은 총풍 사건·북풍 사건을 검색해 보시라. 2011년부터 제주 강정마을의 ‘평화 활동가’가 됐다. 그전에는 나도 전쟁에 무관심했다. 하지만 강정에서 전쟁을 구실로 국가가 한 마을을 어떻게 짓밟는지 똑똑히 보았다. 나는 수갑 한번 못 차봤지만, 누구보다 선량한 활동가들이 범죄자가 돼 줄줄이 끌려 들어가는 걸 보면서 속수무책의 슬픔에 가라앉았다. 반면 국가는 온갖 법을 어겨도 처벌받지 않았다. 그것이 국가 폭력의 실체다. 전쟁은 (국가) 폭력을 정당화한다. 국가가 주관하는 ‘6·25 행사’를 보면 안보와 보훈만 떠들고 전쟁의 실체는 은폐한다. 전쟁은 그러나 결코 전혀 멋지지 않다. 전쟁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하고 비참하고 슬픈 짓이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 아니라 반전평화의 달이 돼야 한다. 5850일째 싸우고 있는 강정 지킴이들이 완공된 제주해군기지 앞에서 매일 전쟁 반대와 해군기지 폐쇄를 외치고 있다. 정전 70주년이다. “이제 한국전쟁을 끝내자!”라고 함께 외칠 분들은 6월 10일 제주 강정으로 오시라!
오늘을 생각한다
[이기환의 Hi-story](40)한국전쟁 때 극비 유물피란작전을 아십니까?(2022. 07. 01 14:51)
2022. 07. 01 14:51 문화/과학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7월 25일이었습니다. 북한군의 공세에 낙동강 전선까지 위협받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습니다. 이때 국립박물관 경주분관(현 국립경주박물관)에 국방부 제3국장 김일환 대령(1914~2001)이 찾아옵니다. “경주 분관 소장 유물을 소개(疏開·분산 이동)하라는 대통령의 긴급 지령으로 왔습니다.” 북한군이 이미 국립박물관 서울본관은 물론 개성·부여·공주분관까지 접수했거든요. 남은 곳은 경주분관뿐이었습니다. 박물관 측은 즉시 유물 선별작업에 들어갔습니다. 1950년 7월 25일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에 국방부 제3국장 김일환 대령이 찾아와 “경주분관 소장 유물들을 소개(疏開), 즉 분산 이동시키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을 전했다. 한국전쟁 당시 해외(미국) 피란유물로 선정된 국립박물관 경주분관 국보급 유물들. 금관총 금관과 허리띠 등 139점이 낙점되었다. /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미국으로 피란 간 국보급 유물 금관과 금제 허리띠를 비롯한 금관총 출토품(1921) 등 국보급 유물 총 139점이 낙점됐습니다. 선택된 유물들은 대구 한국은행으로 이송됐습니다. 당시 대구에는 한국은행 소장 금괴가 피란하고 있었는데요. 이 두가지 보물(문화유산+금괴)은 미국 샌프란시스코 ‘뱅크 오브 아메리카(Bank of America)’로 긴급 공수됩니다. 미국 피란 유물의 소식은 전쟁이 끝난 뒤인 1955년 4월 무렵 일반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피란길에 오른 유물 등을 포함해 한국문화유산의 ‘미국전시’가 추진된 겁니다. 마침내 1957~1958년 미국 8개 도시를 순회하며 열린 최초의 해외전시(<한국국보전>)가 열리고요. 그런 뒤 미국 피란 유물 139점은 다른 전시품과 함께 9년(1959) 만에 귀환합니다. 그럼 국립박물관 서울본관의 사정은 어땠을까요. 당시 초대 박물관장이던 김재원 박사 등 박물관 직원들은 전원 잔류하고 있다가 북한군을 맞이했답니다. 6월 29일쯤 북한 내각 직속인 ‘조선 물질문화 유물조사보존위원회’ 소속인 김용태가 국립박물관을 장악했습니다. 목숨을 건 지연작전 3개월 천하였습니다. 전세는 인천상륙작전(9월 15일)으로 역전됩니다. 다급해진 북한 측은 국립박물관과 덕수궁미술관의 유물 그리고 간송 전형필(1906~1962)의 소장품 등을 모두 포장하라고 지시합니다. 무엇보다 “국보급 유물을 선별해 시 외곽으로 분산하라”고 지시했는데요. 이때부터 유물을 지키겠다는 박물관 직원들의 암묵적인 지연작전이 펼쳐집니다. 이들은 “종묘가 가장 안전한 장소다. 그 안에 방공 지하실을 구축해 특급 유물들을 보관하자”고 주장합니다. 지하실을 구축할 시간을 벌자는 것이었습니다. 도자기를 포장하면서 “아차! 크기를 재지 않았다”라고 다시 풀었다가 다시 싸는 일은 기본이었고요. “그림은 습기가 들면 큰일이다”, “불상은 머리 부분이 약하다”, “유물을 넣을 궤짝의 판자를 구해야 한다, 목수를 불러야 한다, 못을 사와야 한다”는 등의 갖가지 핑계를 댔습니다. 결국 9월 24일 미군의 포격과 공습에 놀란 북한 측 보존위원회 요원들이 도주하고 말았습니다. 유물을 지켜낸 박물관 직원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답니다. 한국전쟁 발발 한 달 만인 1950년 7월 25일 국보급 유물의 미국 피란 계획에 따라 샌프란시스코 ‘뱅크 오브 아메리카’로 건너간 국립박물관 경주분관 소장유물들. 1921년 조사된 금관총 출토유물과 1942년 경주 황복사터 삼층석탑 사리함에서 발견된 금제여래좌상과 금제여래입상 등 국보 유물이 선택됐다. /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경복궁에 터진 6발의 포탄 기쁨도 잠시였습니다. 북한군이 도주한 바로 그날(24일) 연희고지 능선(안산과 연희동 104고지 사이)을 점령한 아군이 도심탈환을 위해 화력을 집중합니다. 1963년 국립박물관이 작성한 문건(‘첩보조사지시보고’)은 “1950년 9월 24일 경복궁 경내에 6발 이상의 폭탄이 공중에서 투하됐다”고 기록했습니다. 이 포격(혹은 공습)으로 경복궁 경내에 있던 지광국사 현묘탑(국보)이 무려 1만2000여편으로 조각났고요. 각종 유물이 보관돼 있던 만춘전은 직격탄을 맞아 괴멸됐습니다. 활자와 각종 무기를 보관하던 만춘전 회랑도 대파됐습니다. 또 도자기와 나무공예품을 보관하던 사정전(편전)과 각종 귀중품과 발굴품이 있던 사정전 회랑, 발굴품과 접수품을 넣어뒀던 자경전(대비전)과 신창고 및 본관 창고 등도 크게 부서졌습니다. 그렇게 파괴된 유물 정리 작업은 휴전(1953년 7월) 후 10년 이상 계속됐답니다. 최종 집계된 ‘전쟁으로 사라진 국립박물관 소장품’은 7109점에 달합니다.(‘첩보조사지시보고’) 기막힌 일이 있습니다. 국보급 핵심유물을 시 외곽으로 분산하라는 북한 측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덕수궁미술관 지하창고로 옮긴 박물관원들의 판단이 ‘신의 한수’가 됐다는 겁니다. 덕수궁 석조전 역시 피격했지만 미술관 지하창고는 멀쩡했던 겁니다. 만약 서봉총·금령총 금관과 2구의 국보 반가사유상 등 같은 국보 유물을 옮기지 않았다면 어찌 됐겠습니까. 모골이 송연하죠. 어느 미국인의 귀띔 그런 우여곡절을 겪은 문화유산은 10월 중국군이 개입하면서 또다시 고비를 맞게 됩니다. 11월 말이 되자 김재원 관장은 주한 미국대사관의 부산 공보원장을 맡고 있던 유진 크네즈(1916~2010)에게서 “박물관 소장품들을 옮기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김 관장은 당시 백낙준 문교부 장관(1895~1985)을 찾아가 “유물의 부산 피란을 허용해달라”고 요청합니다. 마침내 대통령의 재가를 얻게 되는데요. 이 유물수송은 정식공문이 아니라 문교부 장관이 박물관장에게 보내는 영문 편지 형식으로 승인됩니다. 차관도 몰랐는데요. 정식공문이 문교부 관리들을 통해 내려가면 어찌 되겠습니까. 정부 차원에서 박물관 유물을 몽땅 피란시킨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시민들이 또 한 번 충격과 공포에 빠지겠죠. 그렇게 유물의 피란 계획을 세웠지만 큰 난관이 봉착하게 되죠. 유물을 무엇으로 수송한단 말입니까. 발을 동동 구르던 김 관장은 중국군의 개입 사실을 알려준 크네즈 미 공보원장을 찾았습니다. 미군의 공습을 받아 1만2000여 편으로 산산조각 난 지광국사 현묘탑(국보). 오른쪽은 복원된 모습 /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파고다맨’의 선의 크네즈야말로 해방 후 한국 문화유산의 조사와 보존, 수호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크네즈는 해방 후 미군정청의 교화국장(역사 문화유산 담당)으로 근무한 미군 대위였는데요. 교화국장 시절 해방 후 한국인의 손으로 처음 조사한 호우총 발굴을 위해 발 벗고 나섰습니다. 미군정청의 본부가 있는 도쿄(東京) 맥아더 사령부의 허가를 받아냈고요. 발굴비용까지 확보해주었답니다. 덕분에 ‘을묘년 국강상 광개토지호태왕 호우십(乙卯年 國岡上 廣開土地好太王 壺?十)’의 명문이 새겨진 청동그릇을 발굴했습니다. 경주 신라무덤에서 고구려 정복왕이었던 광개토대왕의 유물이 발견된 겁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크네즈가 1946년 2월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을 지나가다가 탑신의 윗부분 3층이 해체돼 땅 위에 방치돼 있던 탑(원각사 10층 석탑)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임진왜란 때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1562~1611)가 일본 반출을 위해 뜯었다가 무위에 그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졌죠. 크네즈는 곧바로 미 공병대를 투입, 원래대로 복원해놓았는데요. 그는 “복원한 이 탑을 우호의 의미로 한국인들에게 선물하고 싶었다”고 회고했습니다. 크네즈에게 ‘파고다맨’이라는 애칭이 붙었습니다. 부산행 빈 열차를 구하라! 이런 인물이었기에 김재원 관장이 다시 한 번 손을 내민 겁니다. 크네즈는 퇴역 후 주한 미국대사관 문화담당직원을 거쳐 부산의 미 문화공보원장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돕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만약 미국대사관 인사가 한국유물의 피란에 관여한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서울이 공산군에게 재함락될 것이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셈이 되겠죠. 크네즈는 망설인 끝에 김 관장의 요청을 수락합니다. 만약 다시 공산 치하에 들어간다면 더는 유물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고, 박물관 직원들의 지연작전도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운송수단도 해결합니다. 군용열차가 서울에 군수품을 실어나른 뒤 부산까지 빈 차로 돌아간다는 사실에 주목한 겁니다. 크네즈는 담당 미군 장교에게 부산행 열차편을 요청했습니다. 또 미군 수송부를 설득해 덕수궁미술관~서울역 사이를 오가며 소장품을 옮길 트럭도 마련했습니다. 크네즈는 트럭의 조수석에 앉아 서울 시내의 검문검색을 해결해줬습니다. 또 하나의 아이러니는 이 유물들을 따로 포장할 필요가 없었다는 겁니다. 유물들이 적 치하에서 북한의 명령을 받고 포장해놓은 채 보관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려준 이는 주한 미공보원장인 유진 크네즈(왼쪽)였다. 크네즈는 김재원 국립박물관장에게 “아무래도 박물관 소장품을 피란시키는 게 좋겠다”고 귀띔해준다. /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4일간의 극비 유물수송작전 이런 우여곡절 끝에 1950년 12월 7일부터 서울역에서 부산행 극비 유물수송작전이 본격적으로 펼쳐졌습니다. 국립박물관 소장품 83상자와 덕수궁미술관 소장품 155상자, 그리고 서울대도서관 소장 <승정원일기> 3045책 등 규장각 도서가 함께 실려 있었습니다. 유물을 실은 열차는 10일 부산에 도착했는데요. 이 과정도 순탄치 않았습니다. 중요 임무를 수행하는 다른 열차에 수시로 길을 양보해야 했고, 공산군의 공격이 염려될 때는 몇시간씩 멈춰서곤 했습니다. 이때 크네즈가 혁혁한 공을 세웁니다. 크네즈는 모든 검문소마다 전화를 걸어 유물열차의 통과를 알림으로써 안전이동을 확인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직접 군용기를 타고 부산까지 내려와 유물의 무사 도착을 두 눈으로 지켜보았답니다. 유물은 일단 부산 미국공보원(현 부산근대역사관 청사)의 창고에 임시보관했고요. 이후 부산 광복동의 경남도청 관재국 건물로 무사히 옮겼답니다. “유물 1만8883점, 무사히 도착!”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서울의 국립박물관에 아직 남아 있는 중요유물이 더 있었는데요. 바로 일본인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1876~1948)가 중앙아시아에서 수집·약탈한 360여건 1500여점의 유물이었습니다. 말이 좋아 ‘오타니 컬렉션’이라 하지만 ‘오타니 약탈품’이라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이 중앙아시아 유물의 핵심은 60여점에 달하는 벽화였는데요. 1차 수송 때는 가져올 엄두도 내지 못했죠. 수백에서 1000년 이상 흙벽 위에 그린 그림이잖아요. 트럭 및 열차 수송 중 충격을 받는다면 파손될 위험이 농후했죠. 김재원 관장의 뇌리에는 두고 온 중앙아시아 유물들의 잔상이 계속 떠올랐습니다. 국립박물관(현 국립중앙박물관)이 1950년 10월 5일 김재원 관장 명의로 경무대 경찰서장에게 보낸 ‘박물관 소장 진열품 수호 보관에 관한 문건’. 북한 치하에서 박물관 요원들이 “박물관 유물을 모두 포장하라” “중요유물은 외곽으로 소개하라”는 북한 물질문화보존연구위원회의 지시를 갖가지 이유로 지연시킨 사연을 구체적으로 보고했다. /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김 관장은 결국 박물관 직원인 최순우(1916~1984·훗날 국립중앙박물관장)와 덕수궁미술관장인 이규필 등을 서울로 보냈습니다. 두 사람은 1951년 1·14 후퇴 후에도 박물관에 남아 있던 수위 문억석과 함께 4주에 걸쳐 벽화를 뜯어 포장했습니다. 크네즈는 이때의 유물수송에도 간여했는데요. 서울에 있던 동료인 찰스 먼스키 대령(1897~1985)에게 “유물 포장과 수송을 맡아달라”고 신신당부했답니다. 덕분에 공산군의 서울 재점령 위험에 처한 그 급박한 시기에도 미군 트럭 3대가 제공됐습니다. 마침내 4월 25일 잘 포장된 중앙아시아 유물 등이 화물열차를 통해 부산에 도착하는데요. 이런 극비 유물수송작전을 통해 서울의 국립박물관과 덕수궁미술관에 보관돼 있던 430상자분 1만8883점이 무사히 피란하게 된 겁니다. “미국 침략자들이 한국유물을 감쪽같이 약탈했다” 얼마 후 동독 동베를린의 영화관에서 방영된 구소련 측 뉴스는 경복궁 내 국립박물관 진열실의 텅 빈 모습을 보여주면서 “미국의 침략자들이 한국의 국보 유물을 송두리째 약탈했다”고 맹비난했습니다. 그만큼 유물수송작전이 감쪽같고 완벽했다는 얘기죠. 김재원 관장은 훗날 “내 일생에서 가장 자랑할 만한 일이 있다면 우리 직원들과 함께 동산 문화재 거의 전부를 전쟁의 와중에서 무사히 보관할 수 있었다는 것”이라고 회고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포격과 폭격이 난무하는 와중에도 박물관원들은 몸과 마음이 먼저 반응했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유물을 포장했고, 땀을 비 오듯 흘리며 트럭에 열차에 실었습니다. 뭐 그분들은 한국인이라 그렇다 칩시다. 미국인 크네즈는 또 어떻습니까. “유물수송에 문제가 생기면 심각한 징계 조치를 당할 판이었지만 비밀리에 도와주기로 했다…. 비행기로 부산에 가서 유물이 무사히 도착한 사실을 확인하고서야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남의 나라 일인데, 제집 일인 양 처음부터 끝까지 처리한 뒤 확인작업까지 마치고 안도했답니다. 세상에 이런 외국인도 있었습니다.
이기환의 Hi-story
미·중 한국전쟁 논쟁, 한국의 전략적 선택은(2020. 10. 30 15:40)
2020. 10. 30 15:40 국제
한국전쟁을 둘러싼 논쟁이 뜨겁다. 70년 전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을 두고 미국과 중국이 맞붙은 형국이다. 발단은 지난 10월 23일 한국전 참전 기념행사에서 나온 중국 시진핑 주석의 발언이다. 이날 시 주석은 “한국전쟁은 미국 제국주의에 맞선 위대한 승리”라고 말했다. 다음날 미 국무부의 모건 오테이거스 대변인은 “한국전쟁은 북한의 남침”이라며 맞불을 놓았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연합뉴스 표면적으로 보면 ‘누가 침략했느냐’를 놓고 벌이는 갈등이다. 그러나 톺아보면 미·중 패권 경쟁에 한국전쟁이 이용되고 있다. ‘미국 제국주의의 침략’, ‘중국 공산당이 불러온 참화’ 등의 날 선 발언은 양국이 단순히 역사 논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중국 외교부가 미국의 한국전쟁 발언을 비난하면서도 “한·중 관계가 더욱 발전하기 원한다”는 입장을 내놓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결국 어려운 것은 한국의 대응이다. 전쟁의 당사자인 만큼 본질이 미·중 갈등임을 알고도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지난 26일 외교부 국정감사에서 국민의힘 의원들을 중심으로 “중국에 보다 강력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요구가 쏟아졌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여러 사항을 고려했을 때 원칙적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는 입장을 밝혔다. 강 장관의 원론적 답변은 미·중 갈등이 실존적 딜레마로 작용하는 한국 외교의 어려움을 보여준다. 동시에 미·중 사이에 전략적 모호함을 선택해 정쟁의 구실을 제공한 것이기도 하다. 벌써 이번 사태를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응하는 정부의 태도와 비교하는 분석까지 나온다. 어떤 전략이 최선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과거 미국과 중국이 한국전쟁으로 얻은 것을 통해 오늘의 의도를 유추해볼 수는 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군의 모습 / 경향신문 자료사진 중국의 발언은 어디까지 사실인가?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발발 3개월 만인 1950년 9월 27일 중대한 변화를 맞는다. 김일성은 북한주재 중국대사 니즈량에게 “38선 및 그 이북지역을 방어할 능력이 없다”고 호소했다. 북한은 이틀 뒤 소련에 지원을 요청했고, 10월 1일에는 중국의 개입도 요청했다. 이에 마오쩌둥은 10월 2일 열린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한국전 참전 의사를 밝힌다. 중국 인민해방군을 ‘항미원조 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파병하는 구체적 계획까지 이날 결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예정된 출병일은 10월 15일이었다. 하지만 소련이 공군 지원을 거절하며 문제가 생겼다. 마오쩌둥은 출병을 보류하고 10월 13일 다시 중앙정치국 확대회의를 열었다. 결과적으로 중국은 불리한 정황을 재확인하고도 참전을 결정했다. 이는 중국이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지키고 ‘제국주의 침략’에 맞섰다고 선전하는 근거가 된다. 문제는 선전처럼 중국의 참전이 공산혁명을 추구한 북한과의 유대에 근거하느냐는 점이다. 마오쩌둥은 참전을 결정한 직후 저우언라이에게 편지를 보내 “참전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크고, 참전하지 않음으로써 받는 손실은 엄중하다”고 했다. 미군이 북한지역에 주둔해 직접 대치하는 상황을 우려한 것이다. 이는 중국의 참전이 수동적인 대응이자 지정학적 위험을 고려한 전략적 선택임을 보여준다. 능동적 개입을 통해 이익을 얻고자 한 정황도 발견된다. 한국전쟁 연구의 권위자인 화둥사범대학 션즈화 교수는 “유엔군의 38선 돌파 이전에 중국의 능동적 참전 의사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1950년 7월 19일 김일성은 북한주재 소련대사 슈티코프에게 “마오쩌둥으로부터 중국이 자국 군대를 파견할 수 있으며, 이미 4개 군단 32만명이 준비되어 있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이 시기는 인천상륙작전이 있기 약 두달 전으로 전황은 북한에 유리했다. 중국 외교부의 “내전이었던 한국전쟁이 미국의 개입으로 성질이 변했다”는 주장도 일방적인 의견이다. 한반도에서 외국 군대가 격돌하는 국제전 양상과 동북아지역으로의 전선 확대는 중국 참전 이후에 나타났다. 중국에 한국전쟁은 한반도를 넘어 동북아지역까지 영향력을 확대하는 발판이 됐다. 결과적으로 중국의 한반도 전략은 국익을 위해 계산된 성격이 강하다.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무엇을 얻었나? 미국에 한국전쟁은 일본을 동반자로 한 동아시아 질서의 시작점이다. 미국은 1947년부터 일본과의 평화조약 체결을 추진했다. 하지만 당시 소련과 중국이 반대하면서 일본을 아시아의 공장으로 재건하려던 미국의 계획이 차질을 빚었다. 교착상태에 빠진 대일평화조약은 한국전쟁의 발발로 해결됐다. 특히 중국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일본의 중요성과 조기강화의 필요성은 급부상했다. 결국 한국전쟁 중인 1951년 9월 미국은 일본과 이른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이 조약은 일본의 전쟁 책임을 사실상 면제해 향후 일본과 주변국 사이의 역사문제, 영토문제를 야기했다. 당시 한국은 조약 서명국 지위에 포함되지 못했지만 조약이 만든 질서에는 구속됐다. 그 대표적인 것이 미국을 정점으로 한 양자적 동맹관계와 미군기지 네트워크다. 일본의 국제사회 복귀에 대해 주변국들은 반발했다. 이 때문에 미국은 동아시아에 일본을 포함한 집단안전보장체제를 도입하지 못했다. 대신 양자 동맹을 바탕으로 각국에 미군이 주둔하는 기지를 만들고 공산권을 봉쇄하는 군사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각국은 미국이 필요한 안보 전략을 수립하며 이에 부응했다. 즉 미국의 동맹국들은 동아시아의 안보를 분업하고 있지만, 이는 제도화된 집단안전보장체제와는 다른 구조가 됐다. 미군이 오랜 기간 주둔한 곳이 한국, 대만, 일본이다. 현재 대만은 미국 첨단 무기 수입으로 중국과 갈등을 빚고 있고, 일본은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 열도)에서 중국과 갈등을 빚고 있다. 한국을 제외하면 미국은 관계국들을 패권 경쟁에 깊숙이 연루시키고 있다. 한국은 미국의 동맹이지만 중국을 견제하는 ‘쿼드’와 같은 안보협력체 참여는 고려하지 않고 있다. 미국과 중국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행보는 한국전쟁과 그 이후 형성된 질서가 남긴 교훈이다. 미국과 중국은 한국전쟁을 이용해 서로의 체제와 행보를 비난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전쟁의 본질에서 벗어난 소모적 다툼까지 한국이 개입할 필요가 있을까. 국제외교전문가들도 속 시원한 답은 내놓지 못하고 있다.
[렌즈로 본 세상]한국전쟁 70주년, 전쟁의 상처는 아물었을까?(2020. 06. 26 15:29)
2020. 06. 26 15:29 사회
이념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거듭되는 심문과 재판 그리고 폭력도 그것의 실체를 오롯이 밝혀낼 수 없었다. 남은 것은 곰보같이 파인 전쟁의 상처뿐. 총과 포탄과 전차의 무한궤도에 짓밟힌 철원 노동당사는 밤하늘의 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사상이 다르다고 사람을 감금하고 고문했던 곳이었다니…. 고통받았던 것은 이념이 아니라 사람 몸뚱이였구나! 남한의 보수단체는 5년 전 이곳에서 전단이 담긴 풍선을 북쪽 하늘로 띄웠다. 60년 전 한 사회학자가 예고했던 ‘이데올로기의 종언’은 아직 한반도에 찾아오지 않았다. 전쟁을 견뎌냈던 내 아버지의 육체만이 쇠잔해지고 있다. 한국전쟁 70주년이다. 전쟁의 상처는 아물고, 새살은 다시 돋아나리라.
렌즈로 본 세상

레이디경향(총 1 건 검색)

91세 한국전쟁 美 참전용사, 70년 전 첫사랑 찾는다
2022. 05. 10 16:01 화제
1953년 한국전쟁 참전용사였던 듀안 만이 70여 년 전 일본에서 만난 첫사랑을 찾아나섰다. 넥스트샤크 제공 올해로 91세가 된 한국전쟁 미국인 참전용사가 70년 전 첫사랑을 찾아 나선 한 편의 영화 같은 이야기를 현지 매체가 주목했다. 미국 매체 넥스트샤크(NextShark)는 한국전쟁 당시 해군 2급 하사관으로 참전했던 미국인 듀안 만(91)이 ‘자신의 첫사랑을 찾고 있다’고 소개하며 한 동양인 여성의 모습이 담긴 한 장의 낡은 사진을 사회관계망서비스에 공개했다. 듀안 만이 작성한 글에 따르면 그가 찾고 있는 사람은 페기 야마구치라는 이름의 일본인 여성이다. 듀안 만은 1953년부터 1954년까지 23세의 나이로 일본에 주둔하던 중 공군 NCO 클럽에서 야마구치를 만났다고 말했다. 당시 야마구치는 ‘모자 체크 걸(Hat check girl, 손님의 모자나 코트를 보관하는 직원)으로 일했다. 그는 “그와 함께 춤을 추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서로 만난 지 6개월도 되지 않은 시점에 사랑에 빠지고 연인이 됐다”고 회상했다. 두 사람은 당시 3개월 내에 결혼할 계획이었지만 만이 예정보다 두 달 일찍 제대하고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면서 야마구치를 두고 떠날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당시 야마구치는 임신 중이었다. 91세 듀안 만이 70년 전 첫사랑, 일본인 여성 페기 야마구치를 찾기 위해 SNS에 글과 사진을 게재했다. SNS 캡처 1954년 미국으로 귀국한 듀안 만은 연인 야마구치를 미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모아놓은 저축을 그의 아버지가 모두 써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난관에 부딪힌다. 결국 3개월 후 그는 야마구치가 아기를 잃고 위스콘신 출신 한 공군 남성과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듀안 만은 “지난 70년 동안 페기를 찾기 위해 세월을 보냈다. 잊을 수 없는 이유는 내가 페기를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91세까지 살면서 죄책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고 항상 무거운 마음이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페기 야마구치의 일본 이름이나 (현재 이름을 유추할 수 있는) 남편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나의 글과 사진으로 누군가가 페기를 알아봐줬으면 좋겠다”며 “페기의 가족이나 연결될 수 있는 범위까지 이 글이 공유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며 마지막 희망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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