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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총 151 건 검색)

[단독]사라졌던 홍범도 장군 묘비, 40여년 만에 찾았다
2024. 10. 10 17:30 정치
.... 하지만 이내 무덤이 꺼지는 문제가 생겼다. 이를 안타까워한 고려인들이 홍 장군 서거 8주기에 ‘홍범도장군 분묘수리위원회’를 만들고, 묘를 단장한다. 이번에 발견된 묘비는 이때 세운 것이다. 홍 장군...
[경향의 눈]홍범도 장군을 뵙고 왔습니다
2024. 09. 04 20:44 오피니언
... 역사와 문화를 전하고 있다. 그 한가운데 ‘큰어른’ 홍범도 장군이 있었다. 크질오르다 시내에는 홍범도, 계봉우(이상 독립운동가), 김만삼, 채정학(이상 사회주의 노력영웅), 예브게니 하리토노비치...
경향의 눈홍범도 장군역사 퇴행독립기념관장고려 동포 강제이주
홍범도 후예들이 굽는 ‘레표시카’ 맛보세요
2024. 07. 11 06:00 지역
... 공원을 찾아 흉상을 둘러본 뒤 헌화하고 한참 동안 고개 숙여 묵념했다. 봉오동 전투의 주역인 홍범도 장군 흉상은 장군이 묻혀 있던 카자흐스탄 홍범도 공원 흉상을 본떠 만들어졌다. 항일운동 역사를...
<민족의 영웅, 홍범도와 함께 걷다> 중앙아시아 답사 모집 안내
2024. 06. 18 11:40 오피니언
... 역사학 박사 - 저서: <러시아지역 해외한인연구>, <현대고려인 인물연구> 등. <홍범도의 중앙아시아에서 의 생활>, <1937년 러시아 극동지역 한인 강제이주 결정과 집행> 등...

스포츠경향(총 14 건 검색)

시민단체 ‘추석 맞아 무후광복군 17위, 홍범도장군 참배’
2024. 09. 14 06:58 생활
연 2회 무후광복군 차례 올린 ‘순국선열 숭모회’, “어느덧 30회 기록…” 지난해 홍범도 장군 참배한 ‘공익감시 민권회의’ 등, “년 1회 개최할 것!” ‘개헌개혁행동마당’ 등 시민단체들이 9월12일(목) 국립대전현충원 제7묘역 무후광복군 17위 합동묘소에서 “한반도 평화만세!” 등을 외치고 있다. 12일 아침부터 긴 시간 동안 내린 비와 교통체증 등으로 원래 약속한 시간보다 약 30분 뒤인 낮 1시쯤부터 국립대전현충원 제7묘역 무후광복군 17위 합동묘소에서 우렁찬 ‘신 대한국 독립군에 백만 용사야!“라는 독립군가가 4절까지 울려 퍼진 가운데 ‘대한민국 순국선열숭모회’(상임대표 전대열)와 ‘개헌개혁행동마당’(상임마당쇠 송운학) 등이 주최하고, ‘글로벌 에코넷’, ‘공익감시 민권회의’ 등이 주관한 무후광복군 17위 추모제와 제30회 추석 합동차례를 광주광역시 등 전국 각지에서 모인 시민 약 20명이 엄숙하게 개최했다. 송운학 ‘공익감시 민권회의’ 의장은 ‘인사말’에서 “어제(9.11)는 상해통합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5년이 되는 날이며, 올해 추석은 광복군이 창건된 지 84년이 되는 날이다. 각각 따로따로 기념해야 할 아주 중요한 역사적 의미가 있는 날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상 후손 없는 광복군, 즉 무후광복군 17위 선열님들과 홍범도장군님을 추모하는 2024추석맞이 국립대전현충원 참배로 이를 대신하게 되었다”고 행사취지를 설명했다. 이어서 송운학 의장은 “이곳에 모셔져 있는 무후광복군, 즉 후손 없는 광복군은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모든 것을 우리 겨레 자주독립을 위해 바친 선열님들이시자, 사상과 이념의 차이를 뛰어넘어 대동단결하셨던 분들”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송운학 의장은 “광복군은 우리나라 헌법 전문(前文)에서 그 법통을 이어받는다고 명시한 상해임시정부가 1940년 9월 17일 창설한 공식무장조직이다. 국군의 날을 10월 1일이 아니라 9월 17일을 변경해야 한다.”고 역설한 뒤 “선열님들의 뜻을 이어받을 수 있도록 시민사회 의견을 가능한 한 빨리 수렴하여 조만간 한반도 평화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특별제안을 발표하겠다.”고 약속했다. 김선홍 ‘글로벌 에코넷’ 상임회장(대한민국 ‘순국선열숭모회’ 상임공동대표)은 ‘경과보고’에서 “지난 2022년 8월 14일 서울 도봉구 수유리 합동 묘소에서 대전국립현충원으로 무후광복군 17위 선열님들은 모셔왔지만, 크게 달라진 것은 별로 없다. 추석과 설날에 송편 하나, 떡국 한 그릇, 술 한 잔을 올리는 후손이 없다. 이에 시민단체와 시민들이 추도식과 합동 차례를 개최해 왔다. 어느덧 30회째를 기록하고 있다.”면서 “다 함께 꽃다운 나이로 후손도 남기지 못하고 산화한 광복군의 넋을 위로하고, 그 유지를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가자!”고 강조했다. 특히, 김선홍 회장은 “요즘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일제 강점기 당시 우리 국민의 국적이 일본이었다고 답변하며, 일본의 식민지배를 사실상 인정하는 발언이 TV 통해 생방송 되는 등 역사 왜곡이 있다면서, 항일독립선열님과 여기 잠들어 계신 무후 광복군 17위께서 이런 조국을 만들려고 풍찬노숙하시고, 청춘과 목숨까지 남김없이 바친 것이 아니다”라면서 “하늘에서 통곡하실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동섭 독립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추모사’에서 “정말로 선열님들께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 우리나라 현실이 부끄럽다. 매월 2∼3회 국립대전현충원을 찾아와 이곳과 홍범도 장군 묘역 등을 참배하면서, 진정한 자주독립과 민주공화국이라는 국가정체성에 대해 숙고하고 그 뜻을 이어받고자 노력하고 있다.” 소회를 밝혔다. 이어서 표옥란 ‘촛불계승연대천만행동’ 공동대표와 한옥순 ‘나누고 베풀고 봉사하는 그룹’ 회장이 광복군동지회가 지은 아래와 같은 광복군 추모시를 낭송하여 분위기를 더욱더 숙연하게 만들었다. “비바람도 찼어라. 나라 잃은 나그네야. 바친 길 비록 광복군이었으나 가시밭길 더욱 한이었다. 순국하고도 못 잊었을 조국이여! 여기 꽃동산에 뼈나마 묻히었으니 동지들아 편히 잠 드시라!” 그 뒤, 진은자 ‘KOK 피해자비상대책위원회’ 대표와 박철연 ‘고백고 통일연구소’ 소장 및 한일영 ‘선감학원 진상규명대책위원회’ 회장이 두 주먹을 굳게 쥐고 대한독립 만세, 한반도평화 만세,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만세삼창을 힘차게 외쳤다. 제30회 추석 합동 차례는 정성껏 마련한 제물로 송운학 의장, 김동섭 이사장, 임양길 ‘촛불계승연대천만행동’ 상임운영위원의 헌작 및 이보영 ‘인천서구 단체총연합회’ 회장의 독축 등으로 진행됐다. 그밖에도 이날 추모행사는 개혁연대민생행동, 국민주권개헌행동, 행·의정 감시네트워크 중앙회, 인천 행·의정 감시네트워크, 인천서구 환경단체협의회, 수도권 매립지 연장 반대 범시민 단체협의회 등 시민사회단체 대표와 시민들이 함께 했다. 또, (사)공정산업경제포럼 및 강순금 글로벌 에코넷 여성회장 등이 후원하고, 해창주조장 오병인 대표가 국내 최고 막걸리를 후원해 헌작했다. 특히, 약자와의 동행TV가 생중계했다. ‘개헌개혁행동마당’ 등 시민단체들이 9.12(목) 국립대전현충원 제3묘역 홍범도장군 묘소에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만세!” 등을 외치고 있다. 이들은 무후광복군 17위 추모제와 추석 합동 차례를 마치고 국립대전현충원 제3묘역에 안장되신 독립영웅 홍범도장군 묘소에 2024 추석맞이 참배 및 차례도 함께 올렸다. 이 자리에서 송운학 ‘개헌개혁행동마당’ 상임마당쇠는 “홍범도 장군님은 우리가 조금 전 참배한 무후광복군, 즉 후손 없는 광복군 17위 선열님들은 물론 광복군 등 모든 항일무장투사 선열님들 및 모든 독립투사선열들이 꿈꾸던 로망이자 롤(role) 모델이었다. 잔혹한 일제군대 등에 큰 타격을 주고 큰 승리를 거둔 얼마 안 되는 지도자 중 한 분이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송운학 상임마당쇠는 “윤석열 정부가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독립영웅을 홀대하고 이른바 ‘뉴 라이트’를 중용하는 등 지나치게 국가정체성을 뒤흔들고 있다. 개헌개혁행동마당은 도를 넘는 이러한 정책이 지속되지 않도록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다 함께 힘을 모아 달라!”고 호소했다. 참고로, 조국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으나 20대 꽃다운 나이에 중국지역에서 일제에 항거하다 순국하신 뒤 1965년 서울 강북구 수유리 외진 골짜기에 잠들어 계시던 무후광복군들 가운데 직계 가족이 없어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못했던 17위 선열님들은 국가보훈처가 <2022년 다시, 대한민국! 영웅을 모십니다.>는 사업으로 77년 만에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즉, 지난 2022년 8월 11일 국립대전현충원 제7묘역에 묘소를 개장한 뒤 유해를 수습해 국방부 의장대가 수유리에서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운구하여 임시 안치했다가 광복절 전날인 2022년 8월 14일 윤석열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 육, 해, 공군 참모총장, 한국광복군기념사업회, 대한민국 순열선열숭모회, 시민들의 봉송을 받으며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했다.
‘1Day 1Korea’ 삼일절 특집···홍범도 장군·태극기 제작·독립군·‘일 테노레’ 등 소개
2024. 02. 24 02:54 연예
아리랑TV 오는 26일, 27일, 3월 1일 오전 7시 30분에 방송이 될 아리랑TV 데일리 문화정보프로그램 ‘1Day 1Korea’가 제105주년 삼일절(3.1절, 이하 삼일절)을 맞아 특집 방송을 준비했다. 먼저 ‘K-NOW’에서는 실물 태극기 수요가 줄어드는 가운데 여전히 태극기를 만들고 있는 업체를 찾아가 태극기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살펴보고 이 작업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봤다. 과거 한국의 가정집이나 길가에는 삼일절을 비롯해 국경일마다 실물 태극기를 게양하는 게 일반적인 모습이었지만 최근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SNS를 통해 태극기를 기리는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서울 종로의 한 공장에서는 대형 인쇄기로 태극기가 그려진 원단을 출력한 뒤, 200도 이상의 고온 열처리를 통해 선명하고 변색이 적은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 뒤 단단한 마감처리를 위해 재단과 박음질을 수작업으로 진행했는데, 최동희 사장은 “태극기만큼은 우리 손으로 작업해야 뿌듯하다”라고 태극기를 만드는 긍지를 밝혔다. 아리랑TV 완성된 태극기는 경기도 남양주의 작은 창고에 도착해 조립 과정을 거쳐 기성품으로 완성된다. 태극기를 깃대와 연결해 완성하는 과정은 모두 7개의 부품의 조립을 거치는데, 이 모든 과정은 수작업으로 진행된다. 어떤 바람에도 “엉키지 않는 태극기”를 완성한 양동렬, 박영숙 두 사장은 “태극기는 전 세계에서 보는 우리의 얼굴“이라면서 ”일할 수 있을 때까지 좋은 태극기를 보급할 수 있게 노력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K-PEOPLE’에서는 ‘백두산 호랑이’로 불린 홍범도 장군의 생애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이름도 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독립군의 가슴 저린 삶을 복원한 역사소설 “범도”의 작가 방현석을 만나본다. 방현석 작가는 10년 동안 방대한 자료를 조사하고 3년간 집필에 매진하여 선조들의 항일무장독립운동의 역사를 우리와 마주하게 생생하게 그려냈다. 방 작가는 ”이 소설을 쓰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범도 루트를 답사하면서였다“고 설명하며 ”만주 땅과 연해주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핏자국에 쓰여 있는 눈물겨운 이야기들, 감동적인 인간들의 이야기를 누군가는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라고 밝혔다. 항일 무장 투쟁사의 현장을 돌아보는 역사 여행, ‘범도 루트’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방 작가는 “‘남 탓’을 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한 것 등 홍범도 장군이 가졌던 삶의 중요한 태도를 소설을 통해 2024년을 살아가는 지금의 사람들이 읽어낼 수 있길 바란다”고 전했다. 아리랑TV 마지막으로 3.1절 당일 방송되는 ‘K-STAGE’에서는 일제강점기의 경성을 배경으로 한 뮤지컬 ”일 테노레“를 소개한다. 조선 최초의 오페라 테너를 꿈꾸는 윤이선의 인생을 담은 초연 창작 뮤지컬로, 일제강점기 당시 의사이자 밀라노에서 유학한 첫 한국인 테너 이인선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윤이선’과 오페라 공연을 함께 준비하는 독립운동가 ‘서진연’과 ‘이수한’의 삶을 통해 비극적이고 어두운 시대 속에서도 꿈을 향해 달려가는 청춘들의 이야기를 펼쳐냈다. ‘일 테노레’는 관객과 평단의 호평을 받으며 최근 연장 공연을 확정했다. 윤이선 역을 맡은 서경수 배우는 “현재 자유롭게 꿈꾸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 자체가 선조들의 희생 덕분인데, 그분들이 가졌던 뜻과 이념이 훼손되지 않게끔 진실 되게 연기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고 작품에 임하는 소감을 밝혔다. 삼일절 특집으로 준비된 위의 방송 내용은 26일, 27일, 3월 1일 오전 7시 30분에 아리랑TV ‘1Day 1Korea’를 통해 만나볼 수 있다.
조진웅, 홍범도 장군 순국 80주기 추모식 참석
2023. 10. 25 16:20 연예
홍범도 장군 순국 80주기 추모 및 청산리전투 전승 103주년 기념식이 열린 25일 오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3묘역에서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홍보대사인 배우 조진웅이 참석자들과 헌화하고 있다. 조태형 기자 배우 조진웅이 홍범도 장군 순국 80주기 추모식에 참석했다. 조진웅은 25일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진행된 홍범도 장군 순국 제80주기 추모식에 참석했다. 조진웅은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다. 조진웅을 비롯해 더불어민주당 우원식 의원, 이용빈 민주당 의원, 정용래 대전 유성구청장, 독립유공자 유족, 독립운동 관련 단체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조진웅은 이날 참석자들과 함께 홍범도 장군의 영정을 향해 묵념했다. 홍범도장군 순국 80주기 추모 및 청산리전투 전승 103주년 기념식이 열린 25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참가자들이 헌화를 준비하고 있다. 조태형 기자 조진웅은 2021년 8월 국민특사 자격으로 카자흐스탄을 방문해 홍범도 장군의 유해봉환식에 함께했다. 당시 그는 카자흐스탄 현지의 홍범도 장군의 이름이 담긴 거리, 장군이 마지막을 보냈던 고려극장 등을 탐방하기도 했다. 당시 홍범도 장군 유해를 모신 조진웅은 “면목이 없고 많이 늦었다고 생각되는데 그래도 이렇게 모실 수 있게 돼 기쁘고 영광이다”며 “잘 모셔오겠다”고 말했다. 조진웅은 영화 ‘대장 김창수’ ‘암살’ 등에서 독립투사 인물을 연기했다.
추석연휴, 홍범도장군 등 독립유공자 참배행렬 이어져
2023. 10. 03 16:15 생활
“국군뿌리는 독립군과 광복군, 군인본분과 핵심가치는 자주독립” 2023 추석기념, 독립영웅 홍범도장군 참배자들이 국립대전현충원 제3묘역 홍범도장군 묘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올해 유난히도 길게 이어진 추석연휴 등을 이용하여 홍범도장군 등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셔진 독립유공자를 찾는 발걸음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 개인자격으로 ‘나 홀로’인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가족단위 또는 친지단위로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묘지를 찾아 참배하면서 군인본분과 핵심가치 등을 되새겼다. 이들 행렬 가운데 지난 일요일(10월1일) 오전 11시부터 낮 1시까지 ‘국민제안경연잔치 공동개최추진회의’와 ‘행·의정감시네트워크 중앙회’ 등 약 15개 시민단체 회원 등 약 20여명이 참석한 ‘2023 추석기념, 홍범도장군과 후손 없는 광복군(이하 무후(無後)광복군) 17위 참배’ 행사가 눈길을 끌었다. 추석연휴 한허리를 베어내는 어려운 일이었지만, 이 행사에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했던 이들은 오전 11시부터 정오까지 ‘국립대전현충원’ 제3묘역에 모셔진 홍범도장군 참배와 추석차례를 마치고, 제7묘역으로 이동해 정오부터 1시까지 진행된 무후(無後)광복군 17위 추모제와 추석합동차례에 동참했다. 참석자들은 30여명이 넘었고, 송운학 ‘공익감시 민권회의’ 대표는 ‘추모사’에서 “국군의 뿌리는 독립군과 광복군이며, 군인본분과 핵심가치는 자주독립”이라고 역설했다. 주최단체 중 하나인 ‘글로벌 에코넷’ 김선홍 상임회장은 “연 2회 개최원칙 등 이번 행사로 어느덧 28회째가 되었다”고 설명했다. 한편, 이들은 ‘홍범도장군 약력 및 참배행사 경과보고’(별지2 참조)에서 지난 8월 25일 육군사관학교가 “2018년 생도학습건물(충무관) 중앙현관 앞에 설치된 홍범도·지청천·이회영·이범석·김좌진 등 독립운동가 5인의 흉상을 교내 다른 장소나 교외로 이전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혀 시작된 논란에 대해서도 분명한 입장을 발표했다. 위 보고에 따르면, 홍범도장군은 “일제강점기 항일무장투쟁군인으로서 경술국치(1910년) 후 만주에서 독립군을 이끌며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등에서 대승을 일궈낸 독립영웅”이다. 다만, 위 보고는 일제가 이들 전투에 대한 보복으로 저지른 잔인한 간도참변(間島慘變) 및 그 뒤 소련에서 벌어진 자유시 참변 등 시대적 배경을 간단하게 요약하여 압축적으로 설명한 뒤 “당시 홍범도장군은 소련(적군)과의 협조에 찬성했고 조건부로 무장해제도 찬성했다. 자유시 참변 이후 포로로 잡힌 대한의용군 독립군에 대한 군사재판에서 고려혁명 군사법원 재판관을 지내기도 했다”고 인정했다. 심지어는 “러시아에 남아 소련 시민으로서 삶을 시작했고 1927년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다”는 사실도 인정했다. 2023 추석기념, 무후(無後)광복군 17위 참배자들이 국립대전현충원 제7묘역 무후(無後)광복군 17위 묘에서 애국가와 독립군가를 부르고 있다. 특히, 위 보고는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고 쿠데타를 감행한 박정희도 이러한 사실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대한민국 대통령권한대행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육군대장 자격으로 1962년 10월 25일 홍범도장군에게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추서했다”면서 그 이유 등을 “깊게 성찰하고자 홍범도장군과 후손 없는 광복군, 즉 무후(無後) 광복군 17위를 참배하게 되었다”고 강조하고 있다.

주간경향(총 3 건 검색)

[단독] 홍범도 장군 묘비, 40여 년 만에 찾았다(2024. 10. 10 17:24)
2024. 10. 10 17:24 정치
1951년 세워진 독립군 홍범도 장군의 묘비. 1983~1984년 쯤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으나 40여년 만에 실물이 확인됐다./김동우 작가 제공 사라진 줄 알았던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의 묘비가 실물로 확인됐다. 변변한 묘비도 없이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시에 묻혀 있던 홍 장군을 기념하기 위해 1951년 고려인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세운 최초의 묘비다. 묵직한 철로 제작한 묘비의 크기는 세로 44㎝, 가로30㎝다. 이번에 발견된 것은 전체 묘비의 앞 부분으로 한글로 ‘저명한 조선빨찌산대장 홍범도 묘’라고 쓰여 있다. 홍범도 장군 묘비는 홍 장군의 삶 만큼 곡절이 많았다. 홍 장군은 1943년 10월 25일 카자흐스탄에서 사망했다. 당시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기 때문에 홍 장군 집 근처에 임시로 묘지를 만들었다가 종전 후 크질오르다시 중앙공동묘지로 이장했다. 하지만 이내 무덤이 꺼지는 문제가 생겼다. 이를 안타까워한 고려인들이 홍 장군 서거 8주기에 ‘홍범도장군 분묘수리위원회’를 만들고, 묘를 단장한다. 이번에 발견된 묘비는 이때 세운 것이다. 홍 장군 서거 40주기를 한 해 앞둔 1982년, 고려인들을 중심으로 묘역을 본래의 구석진 곳에서 조금 더 앞쪽으로 옮기는 이장 작업이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새롭게 흉상 및 추모비 등이 건립됐는데 1951년에 세웠던 묘비가 갈 곳이 없어졌다. 이를 안타까워한 당시 ‘카자흐스탄 홍범도 기념사업회’ 회장 김 레프 니콜라예비치씨가 묘비를 받아 자신의 집에 보관했다. 이후 묘비의 존재는 까맣게 잊혔다. 2000년대 이후부터 홍 장군 유해 송환 추진 등 기념사업이 활발히 진행됐고 2021년 광복절에 홍 장군 유해가 봉환돼 대전 현충원에 안장됐다. 카자흐스탄 현지 묘역에는 기념관이 세워졌다. 이 과정에서 숱한 정부 관계자, 정치인, 기자들이 카자흐스탄 현지를 찾아 홍 장군 관련 행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김 레프 씨는 “한국에서 많은 사람이 왔지만 정작 홍 장군을 기린 묘비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더라”고 말했다. 40여년 만에 김 레프씨를 찾아 묘비의 행방을 물은 것은 국외 독립운동사적지를 찾고, 사진으로 기록하고 있는 김동우 작가였다. 한글날이었던 지난 10월 9일 김 작가는 김 레프씨를 만나 홍 장군의 묘비를 확인했다. 김 작가는 “오래된 흑백사진으로 된 홍범도 장군의 묘비를 본 적 있는데, 거기 쓰여 있는 글귀가 너무 강렬했다. 묘비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니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며 “이 묘비가 다시 세상 빛을 보게 하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묘비 행방에 대한 단서를 잡아갔다. 그러다 이번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 작업에서 운명처럼 묘비를 찾게 됐다. 묵직한 묘비를 들어 올리는데 손이 떨리고 가슴이 쿵쾅거리더라”고 말했다. 사라질 뻔한 홍범도 장군 묘비를 보관한 ‘카자흐스탄 홍범도 기념사업회’ 전 회장 김 레프 니콜라예비치씨/김동우 작가 제공 홍 장군의 묘비가 발견됐지만 완전한 형태는 아니다. 홍 장군 묘비는 원래 돌로 만든 기둥 앞면과 뒷면에 각각 철재로 만든 비문을 붙였다. 묘비의 앞부분은 이번에 발견됐지만 쪼개진 뒷부분은 여전히 행방을 알 수 없다. 국내 홍범도 연구의 권위자인 반병률 한국외대 사학과 명예교수에 따르면 묘비 뒷부분에는 “조선의 자유독립을 위하여 제국주의 일본을 반대한 투쟁에 헌신한 조선 빨찌산 대장 홍범도의 일흠(이름)은 천추만대에 길이길이 전하여지리라”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개인이 묘비의 앞부분을 찾아낸 만큼 국가보훈부가 관심만 둔다면 뒷부분도 반드시 찾아 온전한 형태를 볼 수 있을 것이란 기대도 나온다. 하지만 독립운동 역사를 발굴하는 것은 여전히 정부의 관심사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민병덕 의원은 “올해 국내외 독립 유공자 묘소 단장 지원 예산은 3980만원에 불과했고, 내년은 동결됐다. 독립기념관이 국외 사적지를 조사한 것도 2021년이 마지막이었다”라며 “개인도 찾을 수 있었던 홍 장군의 묘비를 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이 그동안 발견 못 했다는 것은 직무 유기”라고 지적했다. 지난해 홍 장군은 정부가 주도한 이념 논쟁의 한복판에 서야 했다. 항일 운동은 했지만 공산주의자라는 것이다. 해당 논리대로면 묘비에 적힌 ‘조선빨찌산대장’ 역시 홍 장군을 왜곡하는 증거로 쓰일 수 있다. 시대·장소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 만든 참사다. 반 명예교수는 “파르티잔(빨찌산)의 원뜻은 ‘자발적으로 참가한’, ‘의용병’, ‘의병’ 등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며 “1951년 당시 고려인들이 의병, 독립군 등을 표현할 때 자신들에게 익숙한 ‘빨찌산’이란 말로 표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만약 그들이 공산주의 등의 이념적 용어로 ‘빨찌산’을 사용할 것이었다면 ‘붉은’과 같은 수식어를 앞에 붙여 표현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시대·장소에 맞게 해당 글귀를 다시 적으면 다음과 같다. ‘저명한 조선독립군대장 홍범도 묘’.
[렌즈로 본 세상]홍범도 장군의 좌표는 어디일까?(2023. 09. 01 10:57)
2023. 09. 01 10:57 정치
툭 튀어나온 광대뼈와 굳게 다문 입, 정갈한 콧수염, 다정하면서도 엄격해 보이는 눈매. 한 단어로 적어야 한다면 ‘옹골참’. 장군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본 적이 있었던가? 대통령실에 취재를 갔다가 점심을 먹을 때면 주로 국방부 청사 후문으로 나간다. 원래 이 길목에 홍범도(1868~1943) 장군의 흉상이 있었다고 한다. 대통령실이 들어오면서 위치가 바뀌었다. 이 얘기를 듣고, 썩 유쾌하지 않았다. 사진을 찍은 지난 8월 28일, 공기는 눅눅했고, 하늘은 종종 신경질적으로 비를 퍼부었다. 독립운동의 공적보다는 이념에 대한 의구심이 더 커진 분위기는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과 무관하지 않다. 같은 날 국민의힘 연찬회에 참석한 윤 대통령이 주먹을 불끈 쥐며 연설했다. “국가에 정치적 지향점과 국가가 지향해야 할 가치는 또 어떠냐, 제일 중요한 것이 이념입니다. 철 지난 이념이 아니라 나라를 제대로 끌고 갈 수 있는 그런 철학이 바로 이념입니다.” 연찬회장에 박수가 울려퍼졌다. “어느 방향으로 우리가 갈 것인지를 우리가 명확하게 방향 설정을 하고, 우리 현재 좌표가 어디인지를 분명히 인식해야 우리가 제대로 갈 수가 있습니다.” 또다시 박수, 우레와 같은. 홍범도 장군의 좌표는 어디일까? 지난해 대통령실 옆으로 밀려난 국방부 청사 앞으로 이전된 흉상 13기의 주인공은 다음과 같다. 윤봉길, 이봉창, 안중근, 박승환, 강우규, 이순신, 강감찬, 을지문덕, 김좌진, 신돌석, 이강년, 유인석 그리고 홍범도. 좌우에 강우규 의사, 박승환 대한제국 육군 참령과 어깨를 나란히 한 장군은 남쪽의 연병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렌즈로 본 세상
[우정이야기]잊혀진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 탄생 150주년(2018. 10. 22 14:15)
2018. 10. 22 14:15 경제
1920년 벌어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는 항일 무쟁투쟁의 최대 전과로 꼽힌다. 1920년 벌어진 봉오동 전투는 항일 무장투쟁에서 거둔 첫 승리였다. 3·1운동의 애국 열기를 재촉발시킨 의미 있는 대사건이었다. 청산리 전투는 항일 무장투쟁 사상 가장 빛나는 전과를 올린 싸움이었다. 독립신문은 1921년 2월 25일자에 상하이 임시정부 발표를 인용한 청산리 전투의 일본 측 피해가 전사자 1200여명, 부상자 200여명이라고 보도했다. 김좌진 장군부대(북로군정서)를 포위한 일본군을 급습해 거둔 성과였다. 청산리 전투 당시 일본군 지휘관이었던 야스카와는 ‘훈련이 잘 되어 있고 지형지물을 잘 이용하는 독립군 부대를 막기에 어려웠다’는 기록을 남겼다. 홍범도 장군 탄생 150주년을 기념한 우표.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중심에는 홍범도 장군이 있다. 그의 활약상은 그의 별명에서도 알 수 있다. ‘나는 장군’, ‘축지법을 구사하는 장군’, ‘총알로 바늘귀도 뚫는 사람’ 등 수없이 많았다. 이 같은 별명은 1919년 홍범도 장군이 대한국민회의 후원을 받아 창설한 대한독립군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홍범도 장군(대한독립군 총사령관)은 주로 ‘국내 진공작전’을 폈다. 국내 진공작전이란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면서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부대를 습격하는 유격전 전술이다. 대한독립군은 300명이 채 되지 않았다. 한반도에 2개 사단이 주둔하는 일본군과 대적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홍 대장이 가는 길에는 일월이 명랑한데 왜적 군대 가는 길에는 비가 내린다.(1절) 홍범도 장군님은 동산리에서 왜적수사대 열한 놈 몰살시켰소.(4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일 독립운동사에서 기념비적 전투였던 청산리 전투에서 홍범도 장군의 공로가 한동안 소거되고 없었다. 신백주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는 2016년 홍범도 장군 항일 무장투쟁을 다룬 한 TV프로그램에 출연, “역사학계에서 홍범도 장군을 중심으로 한 청산리 전투를 언급한 게 1980년대 후반”이라면서 “홍범도의 봉오동 전투, 김좌진의 청산리 대첩으로 규정된 이유”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항일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전투를 이끈 영웅의 행적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청산리 전투 이후 연해주로 간 뒤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은 게 원인일지 모른다. 물론 그는 연해주에서도 집단농장을 운영하며 한인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등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홍범도 장군의 업적을 기억할 가족이 없었던 것도 그를 잊게 한 이유였다. 부인 이옥녀는 홍범도 장군를 체포하기 위한 일본군 회유와 압력의 희생양이 됐다. 고문으로 옥사했다. 큰아들 양순은 바베기 전투에서 전사했다. 둘째아들 용환은 아버지 얼굴도 못본 채 병사했다. 거기다가 권위주의 시대에 판치던 ‘이념의 색안경’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22년 진보적 민족주의자였던 여운형 등과 함께 코민테른집행위원회(위원장 레닌)가 주최한 극동민족대회에 조선인민대표단 일원으로 참여했다. 사상과 이념을 넘는 독립운동의 일환이었다. 기록 없는 역사는 기억되지 않았다. 그를 기억한 것은 문학계였다. 20여년 동안 홍범도 장군의 행적을 추적한 이동순 영남대 교수(국어국문학)가 그의 일대기를 서사시로 정리하면서부터였다. 독립운동가 찾기를 평생의 업으로 여긴 곽영숙 여사의 노력도 한몫했다. 홍범도 장군 탄생 150주년을 맞아 우정사업본부가 그를 다시 찾았다. 홍범도 장군 사진과 홍 장군이 이끌어 대승을 거둔 봉오동·청산리 전투 승리를 기념한 봉오동 전투 전적비와 청산리 항일대첩기념비를 담은 기념우표를 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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