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옵션
닫기
범위
전체
제목
본문
기자명
연재명
이슈명
태그
기간
전체
최근 1일
최근 1주
최근 1개월
최근 1년
직접입력
~
정렬
정확도순
최신순
오래된순

경향신문(총 504 건 검색)

휠체어’ 탄 3명까지 한번에 탑승 장애인콜택시 나온다
2024. 12. 17 20:51사회
... 공포·시행한다고 17일 밝혔다. 우선 ‘특별교통수단 휠체어 고정설비 안전기준’을 개정해 휠체어 이용자 2~3명이 함께 탑승할 수 있는 다인승 특별교통수단 차량 도입 근거를 마련했다. 장시간 앉아...
장애인교통택시
‘휠체어’ 탄 3명까지 탑승 가능한 장애인 콜택시 나온다
휠체어’ 탄 3명까지 탑승 가능한 장애인 콜택시 나온다
2024. 12. 17 08:32사회
... 공포·시행한다고 17일 밝혔다. 우선 ‘특별교통수단 휠체어 고정설비 안전기준’을 개정해 휠체어 이용자 2~3명이 함께 탑승할 수 있는 다인승 특별교통수단 차량 도입근거를 마련했다. 장시간...
장애인교통택시
장애 어린이 휠체어 탑승 편안하게…차량·카시트 기증
장애 어린이 휠체어 탑승 편안하게…차량·카시트 기증
2024. 11. 27 20:06 보도자료
... 이동권 향상에 나선다. 현대차는 지난 11일 초록우산 한사랑마을(경기 광주시)에서 스타리아 휠체어 리프트, 스타리아 킨더 차량 2대와 어린이 카시트 기증식을 열었다. 이번 기증은 현대차가 이동...
현대자동차
전동휠체어 타던 80대 차량에 치여 숨져
전동휠체어 타던 80대 차량에 치여 숨져
2024. 11. 10 10:49지역
... 따르면 지난 9일 오후 2시 48분쯤 장성군 황룡면 한 도로에서 A씨가 몰던 승용차가 전동휠체어를 추돌했다. 이 사고로 휠체어에 타고 있던 80대 B씨가 크게 다쳐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끝내 숨졌다....

스포츠경향(총 114 건 검색)

스포츠토토 휠체어테니스팀 임호원, 2024 파리 패럴림픽 메달 정조준
스포츠토토 휠체어테니스팀 임호원, 2024 파리 패럴림픽 메달 정조준
2024. 08. 29 17:03 생활
스포츠토토 휠체어테니스팀의 임호원 선수가 서브를 넣고 있다. 스포츠토토코리아 제공 스포츠토토코리아(대표 송영웅)가 운영하는 스포츠토토휠체어테니스팀의 임호원 선수가 2024년 파리 패럴림픽에 출전한다. 임 선수는 이번 대회에서 메달 획득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임호원 선수는 주득환 코치와 함께 대회에 참가한다. 주득환 코치는 대한민국 휠체어테니스 국가대표팀 감독으로도 활동할 예정이다. 임 선수는 복식 종목에서 한성봉(대구달성군청)과 팀을 이뤄 준결승 진출 및 메달 획득을 목표로 하고 있다. 대회 준비를 위해 임호원 선수는 주득환 코치와 함께 8월 14일부터 24일까지 약 10일간 사전 캠프에 참가해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휠체어테니스 종목은 8월 30일(금)부터 9월 7일(토)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임호원 선수는 최근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며 이번 대회 메달 기대감을 높였다. 그는 2023년 항저우 아시안패러게임에서 남자 종목 최초로 복식 금메달을 획득했다. 또한 올해 2월 영국에서 열린 Bolton Indoor ITF3 대회에서 단식과 복식 모두 우승을 차지했고, 5월 스페인 XII Torneo Fundacion Emilio Sanchez Vicario 대회와 7월 독일 German Open 대회에서도 복식 우승을 거머쥐며 실력을 입증했다. 임호원 선수는 “패럴림픽에 세 번째 출전하는 것이지만, 이번 대회는 메달을 목표로 출전하기 때문에 더욱 특별하다. 주변의 기대도 크지만, 나 스스로도 큰 기대와 자신감을 갖고 있다. 성장한 나를 보여줄 수 있는 중요한 기회라고 생각하며, 메달 획득을 목표로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있기 때문에 목표를 달성하고 돌아오겠다”며 각오를 다졌다. 스포츠토토코리아 제공
세계최초 AI 전동 휠체어, 오늘 패럴림픽 무대에 선다
세계최초 AI 전동 휠체어, 오늘 패럴림픽 무대에 선다
2024. 08. 28 09:45 스포츠종합
사진제공|파리시민의 하이코어 AI 전동 휠체어 체험 2024 파리 올림픽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던 대한민국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 보다도 뜨거운 지금, 또 하나의 올림픽, 제17회 파리 패럴림픽에서 대한민국의 국격을 보여주겠다는 포부를 가진 기업이 있다. 바로 AI Mobility 전문기업인 ㈜하이코어이다. 세계최초 AI 전동 휠체어를 개발한 ㈜하이코어는 개막식에서 대한민국의 기수단과 함께 입장한다. 이번 개막식에서 선보이는 AI 전동 휠체어는 바퀴에 대한민국 고유의 태극 문양 컬러로 디자인 되어 시선이 집중 될 것으로 보인다. 이후 코리아 하우스 및 경기장 등 파리 곳곳을 누비며 대한민국 선수단을 응원하며 전 세계인과 함께 할 것이다. 사진제공|파리에서의 하이코어 AI 전동 휠체어 하이코어는 이미 현대자동차 같은 국내 대표 대기업과 함께 퍼스널모빌리티를 개발해오는 등 국내외에서 기술력으로 입증 받아 왔고, 자율주행 휠체어 최상위 기업 중 하나로 꼽힌다. 하이코어는 이런 기술력을 인정받아 이번 2024 파리 패럴림픽에는 대한민국 국가대표 선수단과 함께 입장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박동현 하이코어 대표는 “저 역시도 지체장애를 겪고 있는 장애인의 한 사람으로써, 이런 국제적인 대회에 함께 할 수 있는 사실이 너무나 감격스럽습니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겪을 노후와 불편함에 대해 다 같이 생각해보고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대한민국 국가대표 선수들 모두 힘냅시다!!” 라고 말했다. 한편 이번 2024 파리 패럴림픽에 선보이는 AI Mobility는 올해 말 새로 증축되는 인천국제공항 제2청사의 확장구간에서도 일반인들과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자율주행 휠체어로도 선보인다고 하며, 인천국제공항과 현대자동차, 하이코어는 지난 달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하이코어가 K-Tech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알리고 2024 파리 패럴림픽을 빛내기를 기대해 본다. 사진제공|개막식에 입장할 하이코어 AI 전동 휠체어
[공식] 박성연, KWBL 휠체어농구리그 홍보대사
[공식] 박성연, KWBL 휠체어농구리그 홍보대사
2024. 07. 01 07:20 스포츠종합
박성연. 더블비코리아, P&B엔터테인먼트 가수 박성연이 2024 KWBL 휠체어농구리그 홍보대사로 낙점됐다. 박성연은 지난달 28일 오후 서울 송파구 잠실학생체육관에서 열린 제10회 2024 KWBL 휠체어농구리그 개막식에 참석했다. 이날 박성연은 2024 KWBL 휠체어농구리그 홍보대사 자격으로 참석해 위촉식과 축하 공연을 진행했다. 박성연은 축하 공연으로 자신의 곡 ‘사랑의 세탁기’를 열창, 폭발적인 에너지와 흔들림 없는 가창력, 화려한 퍼포먼스로 현장의 열기를 뜨겁게 달궜다. 박성연. 더블비코리아, P&B엔터테인먼트 박성연은 “2024 KWBL 휠체어농구리그 홍보대사로 활동하게 돼 영광이다. 좋은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고, 홍보대사로서 긍정적인 시너지를 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소감을 전했다. 박성연은 지난 2018년 첫 싱글 ‘PEACH(피치)’로 정식 데뷔했으며, TV조선 ‘내일은 미스트롯’에서 독특한 콘셉트와 퍼포먼스 역량으로 ‘탬버린 여신’이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최근 MBN ‘현역가왕’에 출연해 반전 매력을 보여주며 업그레이드된 음악성을 입증했다. 한편 박성연은 다양한 방송 및 행사에서 팬들과 소통할 예정이다.
KWBL 휠체어농구리그, 28일 잠실학생체육관에서 시작
KWBL 휠체어농구리그, 28일 잠실학생체육관에서 시작
2024. 06. 27 06:45 스포츠종합
‘2024 KWBL 휠체어농구리그’가 오는 28일 잠실학생체육관에서 개회식을 시작으로 6개월 대장정에 돌입한다. 이번 시즌은 작년과 동일하게 6개 구단이 참가해 정규리그를 거쳐 플레이오프 및 챔피언결정전을 치른다. 이번 시즌은 10회째다. 초대 우승한 제주삼다수가 4회(2015~2018시즌), 코웨이블루휠스(전 서울시청 포함)가 4회(2019~2022시즌), 창단 3년만에 2023시즌 처음으로 우승한 춘천타이거즈가 역대 우승팀이다. 이번 시즌에도 역시 이 3개 구단이 우승을 다투리라 예상된다. 제주삼다수와 춘천타이거즈는 외국인 선수를 영입해 전력을 강화했다. 제주삼다수는 일본 국가대표에서 주축 선수로 활약하고 있는 코자이 렌시(2.5포인트)를 데려왔다. 코웨이블루휠스는 국가대표팀 주장 김상열(4.0포인트)를 영입했다. 대구광역시청은 신인 선수를 영입하여 주축 선수들의 체력 저하 문제를 보완했다. 무궁화전자와 고양홀트 구단은 멤버에 큰 변화가 없다. 한국휠체어농구연맹 최욱철 총재는 “파리패럴림픽 지역 예선전 분패로 본선에 진출하지 못해 아쉬움이 크다”며 “휠체어농구리그를 통해 경기력을 끌어올려 차기 패럴림픽 본선 진출과 아시아 정상 탈환이라는 목표를 이뤄내겠다”고 다짐했다. 이번 시즌 개회식 식전공연에는 코웨이블루휠스 물빛소리 합창단과 미스트롯의 ‘박성연’, 아이돌 그룹 ‘트라이비’의 축하공연과 이화선 작가의 갤리그라피 작품을이 선보인다. 전경기 유튜브 ‘한국휠체어농구연맹 TV’채널에서 생중계가 된다.

주간경향(총 7 건 검색)

[우정 이야기] 투지와 열정…우정사업본부 휠체어농구대회
[우정 이야기] 투지와 열정…우정사업본부 휠체어농구대회(2024. 06. 12 06:00)
2024. 06. 12 06:00 경제
제20회 우정사업본부장배 전국 휠체어 농구대회 포스터 / 우정사업본부 제공 1945년 영국 스토크 맨데빌 병원장이었던 루드윅 구트만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부상자들에게 휠체어를 타고 농구를 해보라고 권했다. 백보드 없는 상대편 골대로 2명의 선수가 패스를 주고받으며 공을 옮겨서 전·후반 각 15분 동안 더 많은 득점을 하는 팀이 이기는 방식이었다. 드리블도 없고 타임-아웃, 트래블링, 5초·8초 규정 등 기본 농구 규칙은 적용하지 않았다. 구트만의 이런 생각은 처음에는 환영받지 못했다고 한다. 재활 프로그램을 하다가 다른 부상이나 장애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컸다. 그러나 프로그램을 하고 사회로 복귀하는 장애인이 나타나면서 인식이 달라졌고, 1948년에는 ‘스토크 맨데빌’ 경기가 열리기도 했다. 구트만이 환자 재활을 위해 생각했던 ‘휠체어농구’는 이후 휠체어 스포츠 중 가장 인기 있는 종목이 됐다. 1946년 미국 휠체어농구협회(NWBA)가 창설됐고, 1964년 도쿄패럴림픽에서는 휠체어농구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다. 장애인스포츠 중 몇 안 되는 단체경기다. 최근에는 장애가 없는 사람들의 참여도 늘어 현재 유럽을 중심으로 세계 97개국이 하고 있다. 한국휠체어농구연맹(KWBL)에 따르면 국내 휠체어농구는 1984년 삼육재활원 휠체어농구팀이 창단하면서 시작됐다. 1985년 제5회 전국장애인체육대회에서 국내 최초의 공식 경기가 열렸다. 한국은 1988년 서울패럴림픽에 출전해 16개국 중 13위를 했고, 2014년 인천 장애인아시안게임에서는 금메달을 획득했다. 현재 휠체어농구 규칙은 비장애인이 하는 농구와 비슷하다. 예컨대 볼을 가진 채 3회 이상 휠체어를 밀고 가면 트래블링 반칙이다. 득점은 1·2·3점이 있고, 공격자는 제한구역 안에 3초 이상 머무를 수 없다. 공격 제한시간은 24초다. KWBL이 주최하는 2024 휠체어농구리그는 오는 6월 28일부터 11월 24일까지 서울, 대구, 제주, 강원 춘천, 경기 광주·용인·고양 등에서 개최된다. 리그에 앞서 우정사업본부장배 전국 휠체어농구대회가 6월 6일부터 10일까지 서울시교육청 학생체육관(옛 잠실학생체육관)에서 열렸다. 우정사업본부장배 휠체어농구대회는 2002년 처음 개최돼 올해로 20회를 맞았다. 1회 대회부터 현재까지 1·2부리그와 여성부 등 모든 팀이 참가할 수 있는 최대규모의 국내 대회다. 올해는 남자 1부(실업팀) 6팀, 남자 2부(일반팀) 9팀, 여자부(일반팀) 3팀 등 총 18개팀 선수단 250명이 참가했다. ‘연세이글스’와 ‘고양파이브휠스’의 개막전부터 총 28경기가 펼쳐졌다. 무료 관람으로, 관람 인증 이벤트로 BTS 우표 등도 제공했다. 우승팀, 대회 MVP, 베스트5에게는 총상금 1990만원과 트로피를 줬다. 조해근 우정사업본부장은 “이번 대회가 대중의 장애인 스포츠에 대한 인식과 선수들의 자긍심을 높이는 계기가 됐길 바란다”고 말했다. ※참고문헌: 임찬규·박병도·박승재, ‘외국과 우리나라의 휠체어농구 역사 재조명’
우정이야기
[법률 프리즘]휠체어가 탈 수 있는 고속버스는 왜 없나(2018. 09. 17 14:23)
2018. 09. 17 14:23 사회
장애인단체들은 2014년부터 설과 추석이 돌아오면 ‘장애인도 버스 타고 고향 가고 싶다’는 구호 아래 장애인 버스 타기 행사를 진행해 왔다. 올해도 어김없이 한가위 명절이 돌아왔다. ‘민족의 대이동’, 많은 사람들이 기차와 고속버스를 타고 고향으로 간다. 그런데 고속버스를 타고 고향에 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들이다. 이들은 왜 고속버스를 타고 고향에 가지 못하는 것일까? 휠체어를 태울 수 있는 고속버스가 한 대도 없기 때문이다. 2017년 9월 서울고속버스터미널 승차장에서 장애인단체 회원들이 장애인도 탈 수 있는 저상 고속버스 도입을 요구하며 농성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휠체어를 태울 수 있는 버스를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그래?” 하고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언제부터인가 주변에서 휠체어를 태울 수 있는 버스가 다니고 있었다. 계단이 없고 버스 바닥의 높이와 보도의 높이가 거의 같은 버스, 저상버스라고 부르는 버스들이다. 도심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이런 버스들은 모두 시내버스다. 하지만 고속버스는 다르다. 지금 고속버스를 타려면 2~3개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 휠체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아직 시내버스만 탈 수 있는 셈이다. 2017년 6월 말 기준, 시외를 오가는 버스 중 휠체어 탑승 편의시설이 갖춰진 버스는 경기도에서 운행 중인 2층 버스 33대가 전부였다. 그러면 왜 휠체어를 태울 수 있는 고속버스는 없는 것일까? 관련 법이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교통약자의 이동편의증진법’(이하 교통약자법)은 장애인과 같이 일상생활에서 이동에 불편을 느끼는 사람들이 안전하고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교통수단, 여객시설 및 도로에 이동편의시설을 확충하는 내용을 규정하고 있다. 시내버스와 시외버스를 구분하지 않고 모든 버스에 설치되어야 하는 이동편의시설의 종류로 ‘휠체어 승강설비’를 포함하고 있다. 법에서는 이동편의시설의 설치 주체를 버스회사와 같은 ‘교통사업자’로 정하고 있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는 정책을 수립하고, 버스회사가 장애인 등이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는 구조를 가진 버스를 도입하는 경우 재정을 지원할 의무도 부여하고 있다. 이렇듯 교통약자법이 2005년부터 시행되었지만, 후속조치가 집행되지 않아 실효성이 없었던 것이다. 장애인단체들은 2014년부터 설과 추석이 돌아오면 ‘장애인도 버스 타고 고향 가고 싶다’는 구호 아래 장애인 버스 타기 행사를 진행해 왔다. 그러면서 버스회사에는 휠체어를 태울 수 있는 버스 도입을, 국가에는 재정지원을 촉구하였다. 이 와중에 2015년 12월 국토교통부는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 시행령과 시행규칙 개정에 맞춰 항공기 일등석처럼 개인 편의시설을 확충한 ‘프리미엄 버스’ 도입을 선언했고, 2016년 11월부터 운행되기 시작했다. 휠체어를 태울 수 있는 버스 개발과 도입은 예산이 없다는 이유로 미루어졌다. 장애인의 기본적 권리인 이동권이 장애가 없는 사람들에 대한 버스 서비스 개선보다 앞서지 못한 것이다. 다행히도 2019년에는 국토교통부 예산으로 13억원이 휠체어 탑승이 가능한 고속·시외버스에 대한 내용으로 신설되었다. 이 버스가 상용화되어 장애인이 휠체어를 타고 고속버스에 타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정부 부처가 장애인에 대한 정책을 마련하려는 의지를 갖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지 않기를 바란다. 생각은 바로 바꿀 수 있다.
법률 프리즘
[우정이야기]소통과 화합의 대축제, 휠체어 농구대회(2017. 06. 20 09:54)
2017. 06. 20 09:54 경제
휠체어 농구는 그 자체가 ‘휠체어로 꿈꾸는 세상’이다. 휠체어 농구는 장애인 스포츠 중 가장 격렬하고 치열한 운동이다. 볼 다툼 과정에서 휠체어의 충돌은 피할 수 없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오뚝이처럼 일어나야 한다. 물샐 틈 없는 수비를 뚫기 위해 급하게 휠체어를 방향전환하기도 한다. 순간적으로 골밑으로 파고들어 골을 터뜨린다. 동작 하나 하나가 역동적이다. 탁구, 양궁, 테니스, 수영, 육상 등 수많은 장애인 경기가 있지만 휠체어 농구만큼 박진감 넘치고 짜릿한 스포츠는 없다. 그래서 휠체어 농구를 장애인 체육의 꽃이라고 한다. 하지만 휠체어 농구를 즐기는 이에게 숨겨진 상처를 어느 누가 감히 짐작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갑작스런 사고,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수술, 눈물로 이겨낸 힘겨운 재활, 그리고 출구가 보이지 않는 터널에 갇혀 지낸 좌절과 실의의 시간…. 거기에 끝나지 않는다. 기업과 고향을 대표하는 유니폼을 입고 농구코트에 서기까지 지독한 훈련을 이겨냈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농구코트를 누비며 서로를 격려하는 파이팅 소리, 골을 넣은 손을 들어 환호하는 팔뚝에 흐르는 땀방울, 굴러가는 휠체어 바퀴 소리, 어느 하나도 놓칠 수 없는 감동이다. 지난 6월 12일 잠실 서울시학생체육관에서 열린 제16회 우정사업본부장배 전국 휠체어 농구대회 결승전에서 맞붙은 제주도와 고양홀트 선수들이 볼다툼을 벌이고 있다. ‘제16회 우정사업본부장배 전국 휠체어 농구대회’가 지난 6월 8일 개막경기를 시작으로 12일까지 잠실 서울시학생체육관에서 열렸다. 뭐니뭐니해도 이 대회의 하이라이트는 제주도, 서울시청, 수원무궁화전자, 고양홀트, 대구시청 등이 참가한 남자 1부팀의 경기다. 제주도가 결승전에서 지난 대회 우승팀인 고양홀트를 81대 71로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2년 만의 왕좌 탈환이다. 12일 결승전에서 맞붙은 두 팀은 1·2쿼터에서 일진일퇴하며 역전과 재역전을 거듭하는 접전을 벌였다. 불과 2점 차이였다. 그러나 3·4쿼터에서 대회 MVP를 수상한 제주 김동현 선수를 비롯, 김호용·송창헌·황우성 선수가 고르게 득점을 올렸다. 결국 10점 차의 낙승을 거뒀다. 이번 대회에는 전국 26개팀(남자 1부 5팀, 남자 2부 9팀, 비장애인 8팀, 여자 4팀) 400여명의 선수들이 참가했다. 이번에 참가한 팀은 현재 활동하고 있는 모든 팀이 망라됐다. 휠체어농구는 장애인 팀과 비장애인 팀이 구분돼 있다고 해서 반드시 따로 경기를 갖는 것은 아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묶어 하나의 팀으로 만들 수도 있다. 남성과 여성이 혼성 팀을 이루는 것도 가능하다. 함께 땀으로 소통하고 즐거움을 나누고 서로 이해하는 데 의미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휠체어 농구 규칙은 보통의 비장애인 농구와 전혀 다르지 않다. 경기 인원과 시간, 경기장 규격, 골대 규정 등 모든 게 동일하다. 다만 휠체어를 선수의 일부로 간주하는 것이 차이다. 이 때문에 일반 경기에서 가장 흔한 파울인 더블 드리블은 없다. 장애 정도가 출전 제한을 받는 것도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중증 장애인과 경증 장애인이 함께 어울리는 경기이기 때문이다. 장애가 심할수록 ‘선수 포인트’가 낮다. 중증 장애인은 1.0~2.5, 경증 장애인은 3.0~4.0이다. 출전 선수 5명의 합계가 14포인트를 넘을 수 없다. 김기덕 우정사업본부장은 “전국 휠체어 농구대회가 앞으로도 장애인 스포츠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과 인식 변화를 통해 모두가 어우러지는 소통과 화합의 대축제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우정이야기
[우정(郵政)이야기]휠체어 농구대회 열어 사회공헌(2016. 06. 14 10:51)
2016. 06. 14 10:51 경제
6월 7일 오후 1시30분, 서울시학생체육관에서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휘슬이 울렸다. 한 손으로 휠체어 바퀴를 돌리며 다른 한 손으로 농구공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휠체어 농구의 진수가 펼쳐졌다. 제15회 우정사업본부장배 전국휠체어농구대회 결승전에서 서울시청과 고양시 홀트가 맞붙었다. 정규 경기에서는 61대 61로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연장전으로 이어졌다. 일진일퇴 공방전은 끝날 줄 몰랐다. 두 팀은 엎치락뒤치락했다. 해결사는 서울시청의 김상열 선수였다. 경기 막판, 바스켓카운트(득점인정 반칙) 2개를 얻어낸 게 결정적이었다. 결국 서울시청이 74대 70으로 승리했다. 이로써 6월 3일부터 7일까지 5일 동안 잠실 서울시학생체육관에서 전국 29개팀, 400여명의 선수가 참가한 제15회 우정사업본부장배 전국휠체어농구대회는 막을 내렸다. 이 대회에서는 장애인 1(우승팀=서울시청)·2부(아산헬스파워), 비장애인부(한국체대), 여성부(고양시 레드폭스휠) 등 4개 부문에서 진검승부가 벌어졌다. 6월 3일 오후 서울시학생체육관에서 열린 ‘제15회 우정사업본부장배 전국 휠체어농구대회’ 개막전에서 제주특별자치도와 서울시청 선수들이 공을 다투고 있다. / 우정사업본부 제공 우정사업본부는 장애인 체육 활성화를 통해 재활의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고 사회 소외계층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높이기 위해 2002년부터 전국 휠체어농구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휠체어농구와 우정은 ‘사회공익’으로 연결되어 있는 셈이다. 휠체어농구가 우정사업본부가 지향하는 보편적 서비스와 공익, 사회공헌활동과 접점이 많기 때문이다. 그것은 휠체어농구의 연원과 유사하다. 휠체어농구의 유래는 제2차 세계대전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유태계 독일인 출신의 영국 신경과 의사인 루트비히 구트만(Ludwig Guttmann·1899~1980) 박사가 척수손상 치료 수단으로 1944년 고안한 휠체어네트볼이 시초다. 그는 환자에게 치료 못지않게 중요한 게 재활이라는 점을 뼈저리게 느꼈다. 환자들의 가장 큰 문제는 육체적 마비를 통해 얻게 되는 정신적 피폐, 즉 우울증과 분노였다. 이를 극복하는 도구로 운동을, 그 중에서도 박진감 넘치는 농구를 통해 환자에게 자신감을 불러넣으려고 했던 것이다. 휠체어농구는 1949년 미국에서 전미휠체어농구협회가 설립되면서 정식 스포츠로 자리를 잡았다. 유럽을 중심으로 세계 80여개국에 보급됐다. 한국에는 1984년 삼육재활원이 팀을 창단하면서 처음 소개됐다. 현재 장애인 17개 팀, 비장애인 6개 팀, 지적장애인 농구팀 등 28개 팀이 활동하고 있다. 휠체어농구는 장애인 팀과 비장애인 팀이 구분돼 있다고 해서 반드시 따로 경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묶어 하나의 팀으로 만들 수도 있다. 남성과 여성이 혼성 팀을 이루는 것도 가능하다. 함께 땀으로 소통하고 즐거움을 나누며 서로 이해하는 데 의미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경기방식도 크게 다르지 않다. 경기 인원과 시간, 골대 규정 등 거의 모든 조건이 농구와 동일하다. 다만 휠체어가 선수의 일부분으로 간주된다. 더블드리블(드리블을 하다가 두 손으로 잡는 행위)은 반칙이 아니다. 또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워킹바이얼레이션 정도다. 농구에서 공을 들고 세 발자국 이상 뛰면 반칙인 것처럼 세 차례 이상 휠체어 바퀴를 돌리면 파울이다. 또 휠체어 바퀴가 3점슛 선에 닿아도 3점이 인정된다. 이 정도만 알면 휠체어농구를 즐기거나 관전하는 데 큰 애로가 없다. 김기덕 우정사업본부장은 “희망과 도전, 열정이 넘치는 휠체어농구대회가 장애를 뛰어넘어 모두가 어우러지는 소통과 화합의 장이 되기를 바란다”며 “우정사업본부는 앞으로도 우리 사회의 소외되기 쉬운 이웃을 위해 사회공헌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더불어 살아가는 따뜻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우정이야기

레이디경향(총 5 건 검색)

해발 1천m 산 정상, 휠체어로 올라 여행한다!
해발 1천m 산 정상, 휠체어로 올라 여행한다!
2022. 05. 06 09:32 레저/여행
대구 비슬산 군립공원 휠체어 전용 데크. 한국관광공사 제공 장애인, 영유아, 고령자 등 이동약자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무장애 열린관광지’가 문을 연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는 지난 4일 대구광역시 달성군 비슬산 군립공원에서 열린관광지 준공식을 진행했다. 열린관광지란 보행로, 장애인 화장실, 점자 표식 등 시설 개·보수를 통한 물리적 장벽 제거, 무장애 안내체계 정비 및 인적서비스 환경 개선을 통한 무장애 관광환경 생태계 조성을 위해 문체부와 공사가 2015년부터 주관·시행 중인 사업이다. 현재 전국 112개소 관광지가 선정 및 조성 중이다. 진달래 군락지로 유명한 비슬산 군립공원은 2021년 열린관광지 조성사업 대상지로 선정됐다. 이에 따라 지난 1년간 산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는 휠체어 리프트가 탑재된 전용 차량과 정상의 참꽃 군락지까지 휠체어로 이동 가능한 전용 데크가 설치돼 국내 최초로 휠체어 이용자가 해발 1천 미터 산 정상에서 여행할 수 있는 열린관광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박인식 관광복지센터장은 “이번 비슬산 열린관광지 조성을 통해 이동약자들의 평생의 소원인 산 정상 등반까지도 현실로 가능하게 됐다. 앞으로 열린관광지를 보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이용할 수 있도록 무장애 여행코스를 포함한 다양한 콘텐츠 개발과 홍보에 주력할 것”이라 밝혔다.
여행
휠체어 탄 ‘미모의 여의사’ 류미씨의 좌충우돌 분투기
2011. 10. 07 11:33 화제
세상에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에 선 사람들이 있다. 겉보기에는 아무 이상 없어 보이지만 신체적(때론 정신적) 기능과 능력이 평범한 사람들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을 뜻한다. 10분 이상 서 있을 수 없고, 30분 이상 걷지 못하는 의사 류미씨도 여기에 속한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중간에 선 그녀의 고군분투 의사 도전기를 공개한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날, 인터뷰를 위해 찾은 종로구 부암동의 한적한 골목에 위치한 초콜릿 전문점은 류미씨(37)의 단골 카페다. 이곳은 주차를 한 후에 골목길을 여러 번 돌아와야 하기에, 다리가 불편한 류미씨가 자주 찾기에는 마땅치 않아 보였다. 그런데 창문 너머로 인적 드문 골목에서 짐을 잔뜩 짊어진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추석을 맞아 현재 근무지인 경남 창녕에서 인천의 부모님 댁으로 가기 위해 짐을 바리바리 싸서 올라온 듯 보였다. 차에서 내려 카페로 들어서는 그녀는 휠체어를 타거나 목발을 짚지도 않았고 절뚝거리지도 않았다. 남들처럼 서 있고, 걸을 수 있는, 겉보기엔 너무도 평범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여기까지는 어머니가 태워다주셨어요. 인터뷰가 끝나면 친구가 데리러 오기로 했고요. 워낙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어떻게든 이동 수단이 마련되더라고요. 너무 걱정 마세요(웃음).” 경남 창녕에 위치한 국립부곡병원에서 신경정신과 의사로 근무하고 있는 류미씨는 경상도 생활 1년 반 만에 유창한 사투리 실력을 자랑할 정도가 됐다. 이제는 표준어가 더 어색하다며 웃는 그녀는 경상도 억양과 표준어가 어색하게 섞인, 어눌한 듯 정감 넘치는 어투로 기자와 첫인사를 나눴다. 그렇게 구김 없이 편안한 인상의 그녀가 대학에 세 번 입학했고, 의사가 되기 위해 많은 길을 돌아와야 했던, 남들보다 더 할 말 많은 인생에 대해 담담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사고, 예기치 못한 통증 사건의 발달은 1991년 고등학교 3학년 때 학교에서 사고를 당하면서 시작됐다. 유명 특목고등학교에 다니며 중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던 그녀는 입시를 코앞에 두고 사고를 당해 한 달간 등교하지 못했다. 그녀는 아직도 그때의 사고에 대해 쉽게 털어놓지 않는다. 남들은 겪지 않는 특별한 사건이었고, 이를 다른 방법을 통해 세상에 알리고 싶은 마음도 있기 때문이다. “그다지 긴 이야기는 아니지만, 누군가에는 아주 특별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아직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구체적으로 생각한 것은 없지만 언젠가는 꼭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사건의 경위야 어찌 됐건 그 당시에는 어떻게 해서든 입시를 치러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성적은 이미 곤두박질친 상태였지만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는 부담감에 떠밀려 연세대학교 의생활학과를 선택했다. 두 발에 깁스를 한 채 휠체어를 타고 대입 시험을 치렀다. 결과는 합격. 목발을 짚고 버스와 택시로 등하교를 하며 시작한 대학생활은 몸이 불편한 신입생에게는 듣던 것처럼 낭만적이지도, 여유롭지도 않았다. 한 학기가 지나도록 목발을 뗄 수 없었고 불편한 몸으로 원하지 않는 공부를 하는 것도 곤혹스러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제 상태가 정확히 어떤지 몰랐어요. 의사들 말로는 저와 비슷한 상태인 환자들이 각기 다른 증상을 보인다고 했어요. 전혀 통증을 못 느끼는 사람이 있는 반면, 아파서 걷지도 못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죠. 극과 극의 상황에서 제가 어느 정도의 통증을 느끼게 될지 의사도, 저도 전혀 예측할 수가 없었어요.” 목발을 떼고 나서 처음 지하철을 탔을 때 그녀는 자신의 상황과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예전처럼 무심히 지하철을 탔지만 몸은 이미 예전의 몸이 아니었다. 10분이 지나도 자리가 나지 않자, 견딜 수 없는 통증이 밀려왔다. 전혀 아프지 않은 사람과 아파서 걷지 못하는 사람 중에 그녀는 중간쯤이라고 해야 할까. 류미씨는 10분 이상 서 있을 수 없었고 30분 이상 걷지 못했다. 그 시간이 지나면 아파서 걸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그녀의 병명은 ‘박리성 골연골염’으로 무척 낯설다. 사고로 연골과 뼈가 망가져 완쾌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 ‘아플 수도 있고, 아프지 않을 수도 있는 병’이다 보니 아무리 아파도 ‘장애등급’을 받을 수 없었다. 그녀가 겪는 통증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지도 않고 수치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서 객관적으로 증명해낼 길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두 다리 멀쩡한 젊은 여자가 엄살떠는 것처럼 보이기 십상이었다. 통증의 속성상 아무리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일지라도 당사자가 아니면 그 고통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소견이었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는 외로움.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통증에 대해 쉽게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다. “슬퍼할 새도 없었고 좌절할 새도 없었죠. 슬픔보다 늘 통증이 앞섰거든요. 마음은 모호하고 육체는 명료해요. 슬픔 이전의 통증은 언제나 급박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를 만들어주었죠.” 한 학기 만에 휴학계를 낸 그녀는 마음을 추스르고 이과에서 문과로 진로를 바꿔 이듬해 서울대학교 불어불문과에 진학했다. 입학 시험 당시 휠체어를 탄 그녀의 모습을 모두가 기억하고 있었던 연세대학교 의생활학과와는 달리 서울대 불문과에서는 4년간의 대학생활 동안 그녀의 신체적 비밀을 알고 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버지가 외과 의사셨어요. 그럼에도 부모님께조차 제 상황을 정확히 알리지 못했어요. 대학교에 진학한 후부터 인천 집을 떠나 서울에서 혼자 생활했고, 가끔 만나는 부모님께 짐을 안겨드리고 싶지 않아서 말씀드리지 않았죠. 스무 살의 어린 나이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그 심정이 오죽했겠어요.” 아픈 발목이 인생의 발목을 잡다 일상적으로 생각하기엔 살면서 10분 동안 서 있고, 30분 동안 걸을 일이 그렇게 많은가라고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우리는 무심코 해왔던 일이기에 기억조차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늘 일어나는 일이다. 류미씨는 살면서 불편한 발목 때문에 난감하고 힘든 상황에 늘 노출되어 있다. 일단 버스, 지하철을 탔을 때 10분 만에 자리가 나지 않으면 난감해진다. 깁스를 한 것도 아니라 자리를 양보해주는 사람은 없다. 늦은 밤까지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도 못하는 일 중에 하나가 됐다. 그렇잖아도 택시 잡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10분 만에 택시를 탈 수 있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MT에 참가할 수도 없었고, 가족과 마트에서 장을 보는 것도 그녀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친구들과 팔짱 끼고 번화가를 거닐거나,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는 것도 꿈꿀 수 없었다. 류미씨는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나눠 인생을 리모델링해 살았다. 이렇게 구별을 짓고 나니 남들보다 활동 반경이 줄어들기는 했어도 생활하는 데는 크게 지장이 없었다. 친구들을 만나도 주로 영화를 보거나 커피를 마시는 등 활동성 없는 일을 주로 했다. 쇼핑도 인터넷으로 해결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아픈 발목이 끝내 그녀 인생의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졸업을 앞두고 언론사 입사 시험을 치를 때였어요. 1차 작문 시험을 통과한 후 현장 취재와 기사 작성으로 치러진 2차 시험도 무난히 해냈는데, 마지막 3차 관문을 통과하지 못했어요. 1박 2일로 진행된 합숙 중 등산을 끝까지 마치지 못했거든요.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오래 걷지 못한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던 무모함이 만들어낸, 인생의 첫 탈락이었죠.” 그럼에도 이를 발판 삼아, 기자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재차 도전해 결국 「경향신문」에 입사했다. 그 후 3년간 편집기자로 활동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몸이 불편하다 보니 조직 생활에서도 자꾸만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게 됐다. 더구나 활달한 에너지가 많은 그녀에게 내근직인 편집 업무는 무난하지만 오래하고 싶은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자격증을 따서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결심은 그녀에게 본격적인 제2의 인생 서막을 열어주었다. 진통제 50알로도 지울 수 없는 통증 “의대에 가겠다고 결심하고 나니, 주변에서 ‘붙기만 하면 길이 열릴 거다’라며 응원해주셨어요. 그중에는 의사도 많이 계셨지만 막상 제 상황을 정확히 모르셨기 때문에 저에게 꼭 필요한 조언을 해주지는 못하셨어요. 아버지도 ‘개업의는 힘들다’라고만 말씀하셨을 뿐이에요. 저 또한 실습이나 인턴, 레지던트 생활을 실감하지 못했던 터라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 짐작만 하는 마음으로 의대 진학을 준비했죠.” 그녀는 이과에서 문과로, 다시 문과에서 이과로 진로를 바꿔 27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 가톨릭대 편입에 성공했다. 덕분에 예과 2년은 건너뛰고 본과 공부부터 시작됐는데, 문제는 본과 3학년 2학기 때부터 1년간 진행되는 병원 실습에서 불거져 나왔다. 실습은 말 그대로 병원 생활을 그대로 체험하는 것이기에, 회진을 돌고 수술방에서 참관을 하거나 스크럽(보조)을 선다. 각 과마다 사정은 달랐지만 보통 회진은 30분 이상이 기본이고 수술실에서 반나절 이상 서 있는 경우도 흔했다. 건강한 체력을 가진 젊은 학생들에게도 힘들고 고된 작업이었다. 때문에 류미씨에게 병원 실습은 ‘서기’와 ‘걷기’의 반복이었고, 통증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생활하는 데 불편하기는 해도, 견딜 수 없는 정도는 아니었어요. 하지만 병원 생활이 시작되면서 큰 벽에 부딪치기 시작한 거죠. 겉보기에는 멀쩡하니까 사람들이 저를 이해해주지 못했어요. 그때 처음으로 이럴 바에야 누가 봐도 몸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장애가 오히려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그렇다면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는 외로움은 없을 테니까요.” 실제 실습 도중 흉부외과 수술방에서 주임교수에게 “너보다 외팔이가 더 낫다”는 말을 들으며 쫓겨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상황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동기들 덕분에 불가능해 보였던 실습 과정을 어렵사리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더 거대한 산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99%의 합격률을 자랑하던 모교 인턴 모집에서 떨어지게 된 것이다. 몸이 불편하다는 진실, 거기에 당당할 수 없었던 그녀는 면접관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고시를 치르면 의사 면허가 주어진다. 진료 행위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개업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특별한 전공과목이 없던 터라, 의사 면허만 가지고 개업한들 성공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대부분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거치는 수련의를 끝내고 ‘전문의’가 되는 것이 수순이다. 하지만 그녀는 번듯한 의사 자격증을 가지고도 취업을 할 수 없었다. 모교 인턴 모집에서 떨어진 후 다른 병원에 인턴으로 입사했지만 그마저도 녹록지 않았다. 그녀를 이해하고 도움을 주고자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았다. “어떤 레지던트는 ‘이거 먹고도 못 서 있느냐’리며 진통제 한 움큼을 들이밀기도 했어요. 통증과 제일 가까이에 있는 의사조차 제 통증을 이해할 수 없었던 거죠. ‘그걸 한꺼번에 다 먹어버릴까’ 그 순간에는 그런 마음도 들었죠. 하지만 제 통증은 진통제를 아무리 먹어도 진정될 수 없는 거예요. 전혀 소용이 없거든요. 그러니 그걸 누가 이해할 수 있겠어요.” 힘들게 시작한 인턴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또다시 도전했다. 이번에는 오래 서 있고 걷는 대신 앉아서 이동할 수 있는 ‘휠체어’로 병원을 활보했다. 하반신 마비가 더 낫겠다고 할 정도로 절망했던 그녀는 외려 ‘휠체어’에 앉으니 못할 것이 없었다. 회진은 물론, 수술방 참관도 어렵지 않았고 각종 처치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턴 생활 중 깨달은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한 발자국이라도 걸을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휠체어로 이동한 후 필요에 따라 서서 하는 의료적 행위도 할 수 있다. 막상 ‘휠체어’를 타고 보니 잠시라도 서 있고, 잠시라도 걸을 수 있다는 것이 그토록 고마울 수가 없었다. 우리는 모두가 ‘도전자’ 류미씨는 전쟁 같았던 인턴 과정과 레지던트 1년 차를 마치고 이제 ‘당직에서 자유로운’ 레지던트 2년 차에 들어섰다. 최근에는 한 언론사에서 진행한 원고 공모에서 우수상을 받고 「도전받은 곳에서 시작하라-휠체어 탄 의사 분투기」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하지만 이 책은 역경과 고난을 이겨낸 성공 스토리가 아니다. 그녀는 “앉아 있을 때는 통증이 전혀 없기 때문에 내가 다리가 아프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할 때가 많다”라며 “지금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라고 한다. 그녀의 말처럼 책 속의 류미씨는 고난을 만나 좌절하기도 하고, 역경을 재치 있게 뛰어넘기도 한다. 그리고 때론 함정 속에 퐁당 빠지기도 한다. 구구절절한 감정적 호소 없이, 유쾌하고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그녀는 비단 신체적 통증이 아니더라도 이 시대 누구나 아픔을 가지고 있고, 여러 가지 통증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이 모든 것을 극복해 나가는 ‘도전자’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한다. 류미씨는 ‘전문의’가 되는 단기간의 목표 외에 작가로서의 의욕도 감추지 않았다. 책은 물론 인터뷰 내내 함구했던 고3 시절 당한 사고에 대한 이야기는 ‘또 다른 이야기의 중요한 소스가 될 것이다’라며 끝까지 말을 아꼈다. 한편으로는 다양한 인생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정신과 의사로서의 생활도 글로 옮겨 놓고 싶다. 인터뷰를 하다보니 그녀에게 궁금한 것이 생겼다. 세상에는 하루 종일 의자에만 앉아 있는 직업도 많은데 그녀는 왜 굳이 기자나 의사와 같이 활동성 많은 직업을 선택한 것일까? “주변에서는 ‘네가 몸이 불편하니까 이 정도 하고 산다’라고들 해요. 불편하지 않았으면 더 많이 돌아다니며 살았을 거라는 거예요. 주변 반응이 그 정도니, 마음껏 돌아다니지 못하는 저는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편집기자나 정신과 의사를 선택한 것도 제 몸 상태를 어느 정도 감안한 거죠.” 인터뷰를 마치며 편집기자로 3년 동안 근무했던 경험을 살려 자신의 기사에 어울릴 만한 제목으로 어떤 게 좋겠냐고 물었다. “뭐, 특별한 게 있겠어요? ‘미녀 의사’ 정도가 좋겠네요. 아, 이건 정말 농담입니다(웃음).” 아닌 게 아니라, 그녀는 예뻤다. 큰 눈에 하얀 피부도 그랬지만, 오랜 시간 아픔과 함께하면서도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지 않았던, 긍정적인 마음이 그녀를 더 맑고 예쁘게 빛내주고 있었다. 장애는 Disable 아닌 Challenged이다 “장애인은 영어 ‘Disable’를 번역한 말이다. 지금 영미 지역에서는 이 말을 쓰는 사람을 미개인 취급한다. 장애인은 뭔가를 ‘할 수 없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쓰기 시작한 용어는 ‘Challenged’이다. 그들은 할 수 없는 게 아니라 ‘도전받은’ 것이다. ‘도전받았다’고 생각하면 용기가 생긴다. 어떤 경지에 이르면 용기를 넘어서 의욕 같은 것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런데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면 의욕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도전 받은 자’가 희망을 바라보는 말이라면 ‘할 수 없는 사람’ 은 절망을 내재하는 말이다. 이렇게 볼 때 내 상황에 적당한 단어를 찾자면 ‘중간 도전인’ 정도가 될 것이다. 책 「도전받은 곳에서 시작하라 - 휠체어 탄 의사 분투기」 중 <■글 / 진혜린(객원기자) ■사진 / 이성원 ■장소협찬 / MONOS(02-391-1109)>
휠체어에서 누구보다 아름다운 춤을 추는 샬롬선교발레단 김수미
2005. 11. 01 화제
“장애인이라고 실망해서 그냥 돌아가셔도 전 원망하지 않았어요” 지젤을 꿈꾸던 스물두 살의 발레리나가 불의의 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되었다. ‘그녀는 더이상 무대 위에서 춤을 출 수 없게 되었다.’ 영화 같은 이야기다. 그러나 김수미 단장을 직접 만났을 때 이 문구는 감상에 젖은 타령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씩씩한 생활인이었다. 사고 후, 절망은 잠시 미루고 장애우로 살아갈 미래를 준비했다. 김수미 단장은 가녀린 발레리나보다 훨씬 아름다운 장애우 발레 선생님이다. 무용 유학 준비중에 닥친 불의의 사고 “제가 하반신 마비가 된 걸 가족들은 차마 제게 말하지 못했어요” 유학을 준비하던 스물두 살 김수미(34)는 유학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발레학원 강사를 했다. 연습실 청소를 하려고 창틀에 올라갔다가 고인 빗물에 미끄러지면서 4층 건물 아래로 떨어졌다. 1층 가게 간판에 허리를 부딪힌 뒤 승합차 앞 유리에 이마를 부딪혔다. 그녀는 병원 중환자실에서 깨어났지만 숟가락조차 들 수 없었다. “사고가 일어난 지 3주 만에 수술을 했어요. 말이 3주지 손가락 하나만 움직여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뼈를 깎는 고통이 엄습했어요. 하루가 1년 같았죠. 수술은 했지만 결국 하반신 마비라는 선고를 받았어요. 가족들은 무용을 하던 제가 충격을 감당 못 할 거란 생각에 그 사실을 한 달 뒤에나 알려줬지요.” 그러나 김수미씨는 강한 사람이었다. 무용을 할 수 없어서 슬프다는 생각은 그야말로 사치. 모든 것이 달라졌고 그녀는 새로 태어난 것과 다름없었다. 밥을 떠 먹는 일조차 남에게 의지해야 했다.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단 한 가지도 없었다. “빨리 지금 상황에 적응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우울해하거나 절망에 빠질 시간조차 없었어요. 수술 직후에는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기 힘들었으니까요. 처지를 한탄할 겨를도 없이 재활 치료에만 전념했죠.” 우울하게 살면 그 모습을 보는 가족이나 주위 사람들이 더욱 불행하다. 그녀는 무엇보다 자신이 남에게 불쌍하게 보이는 것이 가장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제가 누구한테 단돈 만원을 못꿔요. 선교단을 시작하고 나서 밥 한 끼도 못 사 먹을 정도로 어려운 때도 있었죠. 그렇지만 싫은 소리를 못 하는 성격이에요. 모르는 사람은 제가 풍족한 사람인 줄 알아요. 돈이 남아서 선교단을 운영하는 줄 알지만, 절대 그렇지 않거든요.” 물론 장애우가 되어 겪어야 하는 힘든 부분이 많다. 그렇지만 일할 때만큼은 그런 점을 배제하고 일반인과 똑같이 해야 한다. 공연을 한 번 하려면 그 장소에 장애우 화장실이 없는 상황까지 대비해야 한다. 배변 감각은 없지만 훈련을 통해 어느 정도 조절이 가능해졌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비장애우가 상상도 하지 못할 피 나는 노력이 있었다. 그녀는 일주일에 한 번씩 제주도 지부에서 수업을 하고, 공연을 위해 해외에도 자주 나간다. 당연히 도와줄 사람과 함께 갈 거라 추측했다. 그러나 모든 일은 그녀 혼자만의 몫이었다. 믿기지 않을 정도다. 공연 연출부터 아이들 분장까지 전부 혼자 해낸다. 7명의 학생과 집 마루에서 시작한 발레 교습 “안산, 제주도, 대치동 발레선교단에 이어 러시아 지부까지” “손에 뭘 쥐라고 했지? 달걀이야. 달걀이 떨어지지 않게… 목은 기린처럼 쭉 빼고! 발은 엄마의 뾰족구두 신은 것처럼 예쁘게!” 우렁찬 목소리로 지도하는 데 여념이 없는 김수미 단장. 스스로 알아서 자세를 잡을 수 있게 물건을 이용해 상상하도록 한다. 휠체어에 앉은 김수미 단장만의 교수법이다. “선교단의 첫 제자들은 매우 혹독하게 가르쳤어요. 이제 시작이니 어설프게 할 수 없었죠. 그 아이들이 벌써 고3이 되었어요. 처음에 선생님이 너무 무서웠다고 하더라구요. 하지만 엉성하게 시작하면 아무것도 안 될 것 같아 악바리처럼 달려들었어요.” 그리고 확실하게 뭔가 해야겠다는 열정이 생길 때 일을 추진했다. 일부러 최악의 상황까지 생각해놓았다. 찾아온 사람들이 그녀를 보고 장애우라고 실망해서 그냥 돌아가는 경우까지 각오했다. 결국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예상한 일이니까 괜찮다’며 마음을 다스렸다. “기분 좋을 리가 없죠. 저도 누구보다 잘나가던 때가 있었는데…(웃음) 그래서 이 일을 시작할 때 특히 아버지가 반대했어요. 그냥 조용히 살기 바라셨죠. 일부러 당하지 않아도 될 일을 당하고 만약 잘 안 됐을 때 제가 받을 좌절감과 상실감을 걱정하신 거죠.” 그러나 예상외로 아이들이 몰려왔다. 처음에는 그녀의 집 마루에서 7명이 교습을 시작했지만 10명이 넘으니 공간이 좁아 더이상 마루에서 연습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때 반대하시던 아버지가 적금을 깨서 안산 연습실을 마련해주셨다. “저희 가족이 저 때문에 희생을 많이 했어요. 동생도 피해를 많이 입었구요. 대학도 저 때문에 늦게 들어가고 가장 예민한 시기에 어머니를 저한테 빼앗기는 바람에 많이 서운했을 거예요.” 그렇게 마련된 첫 연습실은 가족들이 직접 재료 사다가 어설프지만 꼬박 한 달을 걸려 뚝딱뚝딱 마루를 깔았다. 예쁜 커튼도 직접 달았다. 필요한 의자들은 안 쓰는 것들을 받았다. 하나하나 가족들의 정성으로 완성된 연습실은 아담했지만 그때만큼 예쁜 연습실은 없었다. 그날의 감동이 떠올랐는지 이야기 도중 눈가에 촉촉이 물기가 어리는 김수미 단장. 그녀가 운영하는 안산 연습실 이후, 2001년에는 샬롬발레선교단의 제주지부가, 올해 초에는 서울 대치동 지부가 생겼다. 정기 공연을 하면서 인원이 40~50명으로 늘었다. 공개 모집을 하지도 않았는데 입소문으로 모인 단원이 총 85명. 2007년에는 러시아에서도 공연을 할 예정이다. “러시아에 가서 지부를 낼 생각이에요. 공연도 하고 그곳으로 유학 가는 애들도 돌봐줄 수 있잖아요. 제자들을 빨리 키워서 국내 선교단을 맡길 거구요. 고맙게도 선생님에게 값 없이 가르침을 받았으니 자기들도 당연히 봉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공부하는 중에도 시간을 쪼개서 봉사하러 오는 아이들도 있고, 해외 지부 맡겠다는 아이들도 있어요. 참 뜨거워요.” 그녀는 예술의 힘을 믿는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 그것은 한마디 설교보다 설득력 있고 따끔한 가르침보다 강하다. 오늘도 빠르게 내달리는 그녀의 휠체어 바퀴 소리에는 행복의 가속이 붙는다. 글 / 이유진 기자 사진 / 원상희 장소 협조 / 대치동교회
5년만에 컴백해 휠체어댄스 선보이는 영원한 댄스가수 클론
2005. 08. 01 연예
“타이틀곡이 ‘내 사랑 송이’가 아니었으면 했어요. 우리의 컴백이 상업적으로 비치는 게 싫었거든요” ‘꿍따리 샤바라’로 대한민국을 강타한 클론. 지난 2000년 강원래가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후 클론의 컴백은 마냥 요원해 보였다. 그로부터 5년, 휠체어 댄스를 선보이며 다시 무대에 선 그들은 “다신 멈추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강원래가 구준엽에게 휠체어를 타보라고 권한 건 1년 전 클론의 컴백 소식은 예상 밖의 일이다. 지난 2000년 교통사고로 폐를 다치고 하반신이 마비된 강원래(36)가 댄스 가수로 컴백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단짝 구준엽(36)은 “강원래와 함께 하지 않는 클론은 있을 수 없다”며 방송 활동을 접은 뒤 동대문 의류 사업에만 전념했기 때문에 두 사람의 결합은 어려워 보였다. 불후의 댄스곡 ‘꿍따리 샤바라’와 함께 과거의 영예만을 안은 채 클론이라는 댄스 가수의 이름은 그렇게 점점 팬들의 기억 속에서 멀어져가는 듯했다. 그러나 사고 5년 만에 클론은 휠체어를 타고 무대에 섰고, 파워풀한 휠체어 댄스를 선보인다. “준엽이에게 제가 휠체어를 타보라고 권한 건 1년 전이에요. 우리는 언젠가 컴백할 거라고 생각했고, 만약 무대에 다시 선다면 저랑 준엽이가 휠체어를 타야 하는데, 그때 준엽이가 저보다 멋진 모습을 보여줘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준엽이에게 ‘너도 타봐라’ 그러면서 제 휠체어를 빌려줬죠. 준엽이가 가져가서 또 타더라구요. 준엽이는 엄마가 밥 먹어라 하면 휠체어 타고 식탁으로 가고, 자기 책상 의자도 치워버리고 휠체어에 앉아 일을 봤어요. 그러면서 우리의 머릿속에 휠체어 댄스에 대한 그림들이 하나씩 그려진 거죠.” 그러나 가슴 아래가 마비된 강원래에겐 휠체어 댄스조차 쉽지 않은 일이다. 일반인의 눈에는 쉬워 보여도 강원래는 무척 힘겹게 해내는 동작들이 많다. 안무 중 휠체어에 앉아 가슴을 숙인 상태에서 서서히 일어나는 동작이 있는데 강원래에겐 가슴을 숙이는 일조차 무척 어렵다. 중심을 잡지 못해 그대로 고꾸라질 수 있는 동작을 안무로 보여준 것. 구준엽이 일단 안무를 짠 상태에서 “원래야, 이 동작은 어떤 것 같애? 넌 할 수 있을 것 같애?”라고 물어보고 확인하는 과정을 통해 안무가 완성됐다고 한다. 무대에서 강원래는 자신의 실력을 50%만 발휘한다. 무대에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다. 영화 ‘슈퍼맨’의 주인공 크리스토퍼 리브를 보면서 재활 의지를 불태워온 강원래는 그의 죽음을 보면서 느낀 점이 많다. 특히 무리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폐에 구멍이 있는 강원래는 폐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최대 폐활량의 50%만 사용해야 한다. 이에 구준엽은 “원래가 춤을 추다가 중심을 못 잡을 때는 몸을 못 써서, 목소리가 떨리는 건 폐활량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므로 이해해달라”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우리가 일부러 바라던 건 아니지만 휠체어 댄스를 통해 사람들이 휠체어를 더욱 친숙하게 느끼지 않을까 싶어요. 휠체어가 막연히 환자나 장애의 상징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휠체어 댄스를 연습하면 주위에서 구경하는 사람이나 저희 취재하러 온 분들이 한 번만 타보면 안 되겠냐고 그래요. 타보고 넘어지고, 그러면서 재미를 느끼는 분들이 많아요. 그게 좋은 것 같아요.”(강원래) 타이틀곡으로 원하지 않은 ‘내 사랑 송이’ 이번 앨범의 타이틀곡은 ‘내 사랑 송이’다. 제목에서 짐작되듯이 강원래의 아내 김송에게 전하는 이야기로, 그간 강원래가 표현하지 못한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담고 있다. ‘내 사랑 송이’는 군 시절 강원래가 김송에게 편지를 쓸 때 항상 사용하던 문구였다고. “개인적으로 이 곡이 타이틀이 안 됐으면 했어요. 낯 뜨거워서요. 태진아가 ‘옥경이’ 하니까 강원래는 송이냐는 식의 글까지 나오던데…(웃음) 상업적으로 비치기 싫었거든요.”(강원래) “연애하고 싸우기도 하고 결혼해서 지금까지, 제가 두 사람을 옆에서 계속 지켜봤잖아요. 원래는 개인적인 얘기라고 생각하지만 전 정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진정한 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송이에게 이제껏 해오지 못한 얘기를 원래가 해줬으면 했어요. 저 또한 노래를 통해 송이에게 지켜봐줘서 정말 고맙다고 얘기할 수 있구요.”(구준엽) 김송에 대한 구준엽의 믿음과 신뢰는 “송이만큼 의리 있는 여자를 만나 결혼하고 싶다”고 밝힐 정도로 깊다. 사고 후 5년, 그간 강원래는 긍정적이고 느리게 사는 법을 배웠다. 그는 산다는 것이 그렇게 힘들지 않다는 생각을 했고, 자신보다 힘든 사람이 많다는 것도 알았다. “여태까지 내가 너무 고집을 많이 피우면서 살지 않았나… 손해 보면서 사는 것도 괜찮은 것 같고, 서로 이해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많이 들어요. 그런데 아직까지도 옛날 성격이 좀 있어서 화를 내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그래요.(웃음)” 클론은 이번 음반은 딱 한 번밖에 나올 수 없는 앨범이라고 한다. 이전처럼 막연한 사랑 얘기나 ‘마냥 즐겁게’라는 식의 댄스곡이 아니라 강원래의 병상 일지에서 장애인 이동권 등 살아 숨쉬는 삶, 인생의 이야기까지 모두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자신들에게 뜻 있는 앨범인 만큼 팬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클론은 한류 스타의 원조인만큼 대만 팬들과의 만남도 무척 기대된다고. 5년 넘게 연락도, 소식도 전하지 못했는데‘배신하지 않고’ 지금까지 꾸준히 메일과 사진을 보내오는 대만 팬들에 대한 클론의 고마움은 각별하다. 반드시 대만에 가서 “다시 한번 뒤집어줘야 하지 않을까” 한다고. 인기보다 인정받았으면 한다는 구준엽의 이야기에 강원래는 “빠른 시일 내 1위 해야 한다”고 웃음 지으며 말한다. V자를 그려 보이며 “서른여섯 살, 클론은 댄스 가수”라고 이야기하며 컴백 첫 리허설 무대에 오르는 그들의 모습이 잔잔한 여운을 준다.    글 / 신현화 기자  사진 / 지호영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