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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총 52 건 검색)

이효리, 비행기서 만난 희귀병 유튜버 채널 출연…“믿기지 않아”
이효리, 비행기서 만난 희귀병 유튜버 채널 출연…“믿기지 않아”
2023. 12. 20 15:05문화
해당 유튜브 채널 캡처 ‘희귀 피부병 투병’ 유튜버 사연 공개 제주도행 비행기 옆자리에 탄 이효리 먼저 말 걸고 유튜브 영상 촬영 제안 가수 이효리가 깜짝 유튜브 출연으로 미담을 추가했다. 최근 희귀...
매일유업, 희귀병 앓는 환아들 위해 ‘따뜻한 기부 이벤트’
매일유업, 희귀병 앓는 환아들 위해 ‘따뜻한 기부 이벤트’
2022. 12. 28 20:23 보도자료
매일유업은 담요 등 하트밀 굿즈를 판매하고 수익금 전액으로 하트밀 박스를 구성해 100여명의 선천성대사이상 어린이들에게 선물한다. 매일유업(대표 김선희)의 유아식 전문 브랜드 앱솔루트가 국내 5만명 중...
매일유업
저소득 어르신·어린이·장애인에 의약품 “도움 주면 누군가 희귀병 내 딸을 돕겠죠”
저소득 어르신·어린이·장애인에 의약품 “도움 주면 누군가 희귀병 내 딸을 돕겠죠”
2021. 05. 12 21:55인물
... 효주양은 ‘피트 홉킨스 증후군’을 갖고 태어났다. 국내에 환자 수가 극히 적고 치료약이 없는 희귀병이다. 정씨는 식당을 나온 뒤 곧장 딸을 데리고 백화점으로 향했다고 한다. 장애가 있으니 비싸고...
수능 1주일 앞두고 희귀병 진단…병원에서 수능 본다
수능 1주일 앞두고 희귀병 진단…병원에서 수능 본다
2020. 12. 03 09:58사회
2021학년도 대입 수학능력시험날인 3일 경기 동두천 보영여자고등학교에 마련된 경기도교육청 46지구 제 7시험장 입구에서 8시10분이 되자 감독관이 정문을 닫고있다.| 이준헌 기자수능을 일주일 앞두고...

스포츠경향(총 66 건 검색)

류현진 재단 ‘희귀병 사랑이’에 특별 후원금
류현진 재단 ‘희귀병 사랑이’에 특별 후원금
2025. 01. 31 17:22 야구
(재)류현진재단은 31일 희귀난치병을 앓고 있는 사랑이에게 특별 후원금을 전달했다. 31일 (재)류현진재단은 희귀난치병을 앓고 있는 사랑이에게 특별 후원금을 전달했다. 사랑이는 지난해 갑작스러운 팔다리 통증으로 병원을 찾은 후 ‘듀센근이영양증’이라는 희귀 질환을 확진 받았다. 이 질환은 여아의 경우 국내 사례가 없을 정도로 희귀하며, 현재 치료제는 미국에서만 유일하게 공급되고 있다. 하지만 치료제 ‘엘레디비스’의 가격은 46억 원에 달한다. 사랑이의 아버지는 치료비 마련을 위해 지난 11월 5일부터 부산에서 서울 광화문까지 국토대장정을 시작했다. ‘46만 명의 1만 원 기적’을 목표로 한 이 도전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며 13만 명의 후원자가 17억 원을 기부하는 뜻깊은 성과를 거뒀다. 이후 충북모금회와 협력해 모금을 진행한 결과, 지난해 12월 31일까지 23억 원의 후원금이 모였다. 그러나 여전히 치료비 마련에는 부족한 상황이다. (재)류현진재단은 31일 희귀난치병을 앓고 있는 사랑이에게 특별 후원금을 전달했다. 류현진재단 이사장 류현진은 사랑이의 안타까운 사연을 접하고 후원금을 전달하며 힘을보태기로 결정했다. 팀 전지훈련 일정으로 참석하지 못한 류현진 이사장을 대신해 배우자인 배지현 아나운서가 사랑이를 만나 직접 후원금을 전달했다. 배지현 아나운서는 “사랑이의 사연을 접했을 때, 류현진 이사장과 어떻게든 힘을 보태고 싶었다”고 말하며, “듀센근이영양증을 앓고 있는 사랑이가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고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의 관심과 따뜻한 응원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고 전했다. 류현진재단은 2023년 9월 설립 이후 ▲희귀난치병 환아 장학금 지급 ▲야구용품 지원 사업 ▲자선 골프대회 개최 ▲유소년 야구캠프 등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2025년에는 나눔 활동을 더욱 확대하고 다양한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종합] 이름도 생소하다…한기범→남우현·이홍기, 희귀병 투병 ★들
[종합] 이름도 생소하다…한기범→남우현·이홍기, 희귀병 투병 ★들
2024. 09. 23 18:37 연예
한기범·남우현·이홍기. 연합뉴스·FNC엔터테인먼트 ‘희귀’한 만큼 병명도 생소하다. 최근 방송을 통해 희귀병 투병 소식과 근황을 알려 안타까움을 자아낸 스타들이 있다. 지난 18일, 농구선수 출신 한기범은 유튜브 채널 ‘정호근쌤의 인생신당’에 출연해 자신의 인생담을 털어놓았다. 영상에서 그는 “아버지와 남동생이 같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40대, 남동생도 40대에 일찍 하늘나라에 갔다”고 밝혀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한기범. 연합뉴스 특히 그의 남동생은 회사에서 심장마비로 급사했다고 한다. 이후 한기범은 유전병을 의심해 검사를 했고, 의사로부터 ‘100% 죽는다’는 말을 들었다고 밝혔다. 그가 앓은 ‘마르판 증후군’은 눈, 골격, 가슴 등 다양하게 나타나는 질병이다. 링컨 대통령 역시 이 증후군을 투병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병명을 알게된 한기범은 “그 자리에서 바로 수술해서 저는 살았다. 남동생 덕에 산 것”이라며 심장 수술을 2번 받았다고 고백했다. 남우현. 연합뉴스 그룹 인피니트의 남우현은 희귀암을 투병했다는 소식을 알린 바 있다. 그는 지난해 11월 첫 번째 솔로 앨범 발매를 앞두고 진행된 인터뷰에서 암 투병 사실을 고백해 화제를 모았다. 지난해 4월 말 즈음 수술을 받은 남우현은 “100만명 중 1명 걸릴까 말까 한다고 하더라”라며 기스트암 판정을 받은 당시를 회상했다. 그가 투병한 기스트암은 식도에서 항문까지 위장관 내에 발생하는 암으로 점막 등에 생기는 일반 암과는 달리 근육층에 발생한다. 이후 남우현은 한 웹예능에 출연해 투병 심경에 대해 전하기도 했다. 그는 “아픈 것보다 정신적으로 괴로웠다. 진짜 수술하고 일주일은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밝히면서도 “최근까지 굉장히 힘들었다가 지금은 회복이 많이 돼서 축구도 하고 앨범도 냈다”며 건강해진 근황을 알렸다. 이홍기. FNC엔터테인먼트 제공 또 가수 이홍기 역시 희귀질환을 앓은 후의 근황을 전했다. 지난 7월, 이홍기는 코미디언 송은이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건강 상태를 알렸다. 영상에서 송은이는 이홍기의 엉덩이 상태를 물으며 “우리 홍기가 종기로 유명하다”고 입을 열었다. 앞서 이홍기는 ‘화농성 한선염’이라는 질환을 오랜 시간 앓았던 것. 그는 지난해 12월 ‘화농성 한선염에 빛을 비추다’ 채널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가 투병한 화농성 한선염은 진단 받는 데에 시간이 걸리고, 통증과 잦은 수술이 동반되며 일상생활에 방해가 되는 질환으로 알려져 있다. 중학교 때부터 해당 질환을 가지고 있었던 이홍기는 “세상에 모든 돌덩이가 제 엉덩이에 있는 거 같다”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이홍기는 예방을 잘한 덕에 증상이 덜하다는 근황도 전하면서도 “내 엉덩이에 지금도 다 상처, 수술 자국밖에 없다. 다 죽은 살들”이라고 해 걱정을 자아냈다.
강성진, 딸 희귀병 고백 “4살 때 하반신 마비…대소변 조절도 어려워” (4인용식탁)
강성진, 딸 희귀병 고백 “4살 때 하반신 마비…대소변 조절도 어려워” (4인용식탁)
2024. 03. 12 11:44 연예
강성진 “속이 타다 못해 오그라들었다” 채널A ‘절친 토큐멘터리 4인용 식탁’ 방송화면 캡처 배우 강성진이 딸의 희귀병을 고백하면서 안타까운 소식을 전했다. 11일 방송한 채널 A ‘절친 토큐멘터리-4인용 식탁’에서는 강성진이 출연해 “둘째 딸이 길랭-바레 증후군을 앓았다”고 털어놓았다. 이 증후군은 바이러스가 들어왔을 때 저항력이 너무 세서 싸우다가 신경세포가 마비 되어 가는 희귀병이자 근육 쇠약을 유발하는 다발신경병증으로 말초·뇌신경을 포함해 나타난다. 강성진은 “우리 딸의 경우 다리에서 시작되서 위로 올라와서 전신으로 퍼졌다”며 “위험한건 심장으로 왔을 때 심장 마비 위험이 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채널A ‘절친 토큐멘터리 4인용 식탁’ 방송화면 캡처 강성진은 “딸이 4살 때 하반신 마비 증상이 나타났다”며 “걸음걸이가 어색해진 걸 캐치한 아내가 병원에 데려갔다”고 말했다. 이어 “딸이 하반신에 마비 증상이 오니까 대소변이 어려워졌고 절망의 끝까지 갔다”며 “속이 타다 못해 오그라들었다”고 당시 앓던 심정을 토로했다. 그러면서 강성진은 “딸이 대학병원에서 척수 검사를 받았는데, 전신 마취하고 눈꺼풀이 감길 때 눈이 마주쳤고 그때부터 눈물이 쏟아졌다”고 고백했다. 채널A ‘절친 토큐멘터리 4인용 식탁’ 방송화면 캡처 강성진은 “당시 내가 유행성 눈병을 앓고 있어서 안대를 착용했었는데, 깊은 곳에서 눈물이 너무 많이 나와 눈병이 다 나을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딸은 현재 중학교 2학년에 키 172㎝의 건강한 소녀로 완쾌한 상태다. 강성진은 완치 소식을 전하면서 “딸이 11살 때부터 현대 무용을 배웠다”며 “각종 대회에 나가서 상을 휩쓸고 있고 모든 게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웃음을 지었다. 한편 강성진은 2005년 그룹 ‘에스’ 출신 이현영과 결혼했다. 슬하에 1남 2녀를 뒀다. 채널A ‘절친 토큐멘터리 4인용 식탁’ 방송화면 캡처
전종서, 태도 논란 6년 만에 해명···父 희귀병 앓아
전종서, 태도 논란 6년 만에 해명···父 희귀병 앓아
2024. 02. 27 06:31 연예
유튜브 채널 ‘짠한형’ 배우 전종서가 가정사를 밝혔다. 26일 유튜브 채널 ‘짠한형’에는 ‘신비한 에너지, 왜 이렇게 매력적이야? 전종서에 취할 시간’이라는 영상이 공개됐다. 영상 속 신동엽은 “주변 사람들에게 전종서가 ‘굉장히 솔직하다’고 들었다. 멋있다고 알고 있다. 근데 (예전에) ‘표정이 왜 저래?’라면서 잠깐 구설에 올랐다고 하더라”라며 운을 뗐다. 유튜브 채널 ‘짠한형’ 이어 “그때가 (전종서) 아버지가 좀 편찮으실 때라고 들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건너 들었다”고 덧붙였다. 이에 전종서는 “아버지가 희귀병 진단을 받았을 때 데뷔하게 됐다. 연기하면서도 한쪽은 썩어가는데 이쪽은 잘 되는 걸 느꼈다. 각자만의 사정이 있고 하는 거니까 오해가 있건 루머가 어떻건 해명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유튜브 채널 ‘짠한형’ 신동엽은 “나도 데뷔해서 잘 되고 있을 때 어머니가 암 선고를 받았다. 92년도에 받으시고 95년도에 돌아가셨다”고 말했고, 전종서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은 같이 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전종서는 2018년 5월 데뷔작 ‘버닝’으로 칸 국제영화제에 참석했다. 칸 출국길, 인천국제공항에 등장한 전종서가 카메라를 회피하고, 우울한 표정을 짓는 모습이 포착돼 태도 논란이 불거진 바 있다. 한편, 전종서는 tvN 월·화 드라마 ‘웨딩임파서블’에 출연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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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릭,해외인물]희귀병 걸린 베트남 가족
[클릭,해외인물]희귀병 걸린 베트남 가족(2007. 07. 31)
2007. 07. 31 국제
원인 모를 얼굴 종양이 행복 앗아가 6명의 자녀를 둔 록 반 콴씨(47·베트남)는 아이들을 대할 때마다 마음이 쓰리다. 커다란 ‘혹’이 예쁜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다. 1명도 아닌 5명이 정체를 알 수 없는 혹 때문에 바깥 출입을 꺼리고 있다. 태어날 때는 모두 정상이었지만 7~8살이 되자 안면에 종양이 생기더니 시간이 흐를수록 사라지기는커녕 부풀기만 했다. 다이구옌의 산악지역에 사는 록씨 부부는 되도록 자녀들을 외부 사람과 접촉하지 않게 하려고 애써 왔다. 10여 년간 남몰래 병원이라는 병원은 다 다녀봤지만 허사였다. 의사들은 병명도 원인도 밝혀내지 못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항생제를 처방하는 정도였다. 절망에 빠진 록씨 부부에게도 작은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최근 하노이에 적을 둔 의사들이 종양절제 수술을 하기로 결정한 것. 우선 5명 가운데 종양 크기가 제일 작은 막내아들 린(11)이 수술대에 오른다. 린의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다른 4명의 자매도 수술할 계획이다. 하지만 수술 성공 여부는 의사들도 장담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맏딸 모이(28)는 이목구비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종양이 얼굴 대부분을 덮고 있어, 수술을 받기 위한 준비기간만 수개월이 걸린다고 의사들은 내다봤다. 아이들과 달리 록씨 부부의 얼굴은 깨끗하다. 이를 두고 한 의사는 “유전자 변이 때문에 생긴 희귀병”이라며 “부모 세대에 없던 유전자가 자식 세대에서 발현하는 특이한 사례”라고 진단했다. 이 의사는 록씨 자녀들처럼 4세 무렵부터 팔·다리에 마비가 오더니 결국엔 전신 마비에 이른 형제들이 있었으나 치료 효과를 봤다며 기대를 나타냈다. 하지만 안면 종양의 ‘완치’ 문제는 의사들 대부분이 고개를 젓고 있다. 한 의사는 “얼굴은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겠지만 병 자체를 고치기 위한 과정은 긴 여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고영득 ydko@khan.co.kr
클릭, 해외인물

레이디경향(총 3 건 검색)

희귀병 앓는 이동우 위해 5년 만에 재결성한 틴틴파이브
희귀병 앓는 이동우 위해 5년 만에 재결성한 틴틴파이브
2010. 02. 01 16:46 연예
남자들의 의리란 이런 걸까. 그룹 ‘틴틴파이브’가 멤버이자 동료 개그맨 이동우를 위해 새 음반을 내놓았다. 함께한 오랜 시간만큼이나 켜켜이 쌓였을 다섯 남자의 우정과 사랑이 담긴 앨범 타이틀은 ‘다섯 남자의 다섯 번째 이야기’다. 가요계에 잔잔한 감동을 준 다섯 남자의 의리 홍록기, 김경식, 이동우, 표인봉, 이웅호 개그맨 5명으로 구성된 그룹 ‘틴틴파이브’가 돌아왔다. 이들이 다시 뭉친 이유는 멤버 이동우를 격려하기 위해서다. 다섯 멤버의 색깔이 고루 담긴 총 5곡이 수록된 앨범 「다섯 남자의 다섯 번째 이야기」가 지금 가요계에 잔잔한 감동을 뿌리고 있다. 현재 이동우는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희귀 질병을 앓고 있다. 정확한 원인이 규명되지 않은 망막색소변성증은 야맹증에서 시작돼 나이가 들수록 ‘터널 시야’ 혹은 실명에까지 이를 수 있는 병이다. 이동우는 지난 1월호 「레이디경향」과의 인터뷰를 통해 지난 5년간 자신의 병을 숨기며 라디오를 중심으로 활동해온 사연을 들려줬다. 원고가 흐릿하게 보이자 “오늘은 안경을 못 쓰고 왔네요”라고 둘러대며 제작진에게 글자를 키워달라는 부탁을 하곤 했다는 것. 때문에 맛깔 나는 진행이 우선인 라디오에서 자신감을 잃어 괴로웠다는 심경을 털어놓았다. 음반 관계자는 “멤버들이 이동우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기 위한 취지로 이번에 음반을 준비한 것”이라며 “힘든 시간을 보냈던 이동우도 최근의 음반 작업을 통해 모처럼 밝은 표정을 보였다”고 말했다. 이번 음반은 이동우의 병세가 더 이상 악화되기 전에 추억의 무대를 남기자는 취지도 겸한 것으로 전해진다. 5명의 멤버들은 다양한 방송활동을 계획하고 있다.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우정을 과시할 생각이며, 가능하면 이동우와 함께 가요 무대에도 출연할 생각이다. 나아가 시각 장애인들을 위한 각종 행사와 봉사활동에도 적극 나설 예정이다. 이번 앨범에서는 탤런트 겸 가수 안재욱이 내레이션을 도왔으며, 힙합 비트의 감성적인 멜로디가 곁들여진 타이틀곡 ‘청춘’ 등이 수록된다. 이동우가 멤버들에게 들려주고픈 메시지를 담은 솔로곡도 앨범을 장식한다. 1994년 결성된 ‘틴틴파이브’는 ‘머리 치워 머리’ 등의 히트곡을 내고 큰 인기를 누렸다. ■글 / 강수진(스포츠칸 문화연예부 기자)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
희귀병 ‘척수염’ 이겨내고 활동 재개한 타이거JK의 소망
희귀병 ‘척수염’ 이겨내고 활동 재개한 타이거JK의 소망
2007. 02. 14 연예
힙합계의 맏형 타이거JK. 그가 희귀병인 척수염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많은 팬들이 그를 걱정하고 있다. 완치 여부도 불분명하고, 더 나빠지게 될지 좋아지게 될지도 모르는 상태다. 하지만 그는 음악 때문에 다시 일어났고, 앞으로도 음악과 함께 살 것이라며 맑게 웃는다. 디스크로 오인받은 희귀병 ‘척수염’ 에픽하이, 윤미래, 리쌍, 바비 킴, 양동근, 드렁큰 타이거 등 이름만으로 무게감이 느껴지는 힙합 뮤지션들이다. 이들은 기획사는 서로 다르지만, ‘무브먼트 크루’라는 이름으로 식구처럼 활동하고 있다. 각양각색의 힙합 가수를 한 곳에 모을 수 있었던 것은 타이거JK(34, 본명 서정권) 덕분이다. 지난해 5월 무브먼트 크루의 콘서트장에 타이거JK가 퉁퉁 부은 얼굴로 출연하면서 팬들 사이에서 “무슨 일 있는 것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많은 사람이 그의 근황을 궁금해했지만, 직접 자신의 병에 대해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아 궁금증은 더해만갔다. 기자가 타이거JK를 인터뷰한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괜찮은 것 같은데, 정말 아픈 거야?”라는 질문을 많이 던졌다. 그를 만났을 때도 겉보기에는 아픈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예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큰 고통을 받고 있다. ‘척수염’은 일반적으로 바이러스 감염으로 척수에 염증을 일으키는 질환이라고 알려져 있다. 척수는 뇌의 연수로부터 척추로 뻗어 있는 주요 신경로다. 쉽게 말하면 뇌에서 신호를 보내면 몸의 각 기관에서 응답을 해야 하는데, 신경다발에 염증이 생겨서 뇌의 신호를 몸에서 받지 못하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걷는 것도 힘들고 몸이 이상해서 병원에 갔더니 디스크래요. 1년 동안 병원에서 디스크 치료를 받았는데, 효과가 별로 없었죠. 그런데 어느 날 다리에 감각이 없어지고 일어나지도 못하겠는 거예요. 그래서 큰 병원에 갔더니 척수염이라는 진단을 받았죠. 희귀한 병으로 전문의도 몇 분 안 계신데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였다. 태권도로 단련된 몸에 운동도 좋아해서 건강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몸은 의지와 상관없이 더욱 나빠지기만 했다. 배 밑으로 마비가 오기 시작한 것이다. 일어서지도 걷지도 못했다. 소변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고, 병원에서 의료 기구의 도움을 받아 소변 보는 게 빼내야만 했다. 소변이 신경 쓰여서 물도 제대로 먹지 못했고, 밤에는 너무 고통스러워 잠을 잘 수도 없었다. 매니저는 매니저대로 ‘난리’가 났다. 용하다는 점쟁이나 의사들을 찾아서 전국 방방곡곡을 다녀야만 했다. 좋다는 음식이나 약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어디든지 가서 구해왔다. 매일 밤마다 힘들다고 전화하는 타이거JK와 몇 시간 동안 통화하면서 진정시키는 것도 매니저의 몫이었다. 하지만 병세는 그다지 좋아지지 않았다. “병원 치료로 신경다발에 있는 염증을 줄였지만, 완치 여부는 아무도 몰라요. 자료를 찾아봤는데, 19년 만에 척수염을 치료한 환자도 있더라구요. 계속 나빠지는 경우도 있고, 지금처럼 일상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지내는 경우도 있고. 지금은 1주일에 한 번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고, 약을 먹고 있습니다.” 척수염을 치료하는 약은 없고, 대신 스테로이드제 복용을 해야만 했다. 메이저리거 선수들이 근육을 키우기 위해 먹는다는 그 약이다. 하지만 타이거JK는 스테로이드제를 복용하면서 부작용이 생겼다. 바로 몸이 퉁퉁 붓기 시작한 것. 얼마나 부었는지 가족들조차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가 됐다. 얼굴과 몸이 부어 있을 때, 의사의 만류에도 그는 무브먼트 크루의 콘서트에 참가했고, 이는 팬들에게도 병세를 알리는 계기가 됐다. 요즘은 치료를 위해 변비약과 신경안정제 등을 복용 중이다. 결혼은 1년 후, 윤미래와는 친구 사이 병원에서는 ‘활동을 쉬어라’ ‘무리한 운동을 삼가라’ 했다. 하지만 그는 집 안에서 가만히 쉴 수만은 없었다. 척수염 진단을 받은 뒤 2개월 만에 생각을 고쳐먹었다. ‘어차피 못 고치는 거 하고 싶은 일이라도 마음껏 하자’라는 생각에 벌떡 일어났다. 그동안 못했던 운동도 하고, 음악 작업도 다시 시작했다. 남들은 다 말렸지만 그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기적처럼 그는 일어섰다. “제 컨디션에 따라 몸의 상태도 달라져요. 어떤 때는 내가 언제 아팠는지 모를 정도로 몸이 가뿐하지만, 컨디션이 나빠지면 소변도 나오질 않고 다리에 마비도 와요. 갑자기 쓰러질 때도 있어서 요즘은 지팡이를 짚고 다녀요. 후유증으로 다리 감각이 이상해져서 온도를 반대로 느끼죠. 찬물은 뜨거운 물로 느끼고, 뜨거운 물은 찬물로 느끼고 있어요.” 지난해 아버지 서병후씨의 뒤를 이어서 대학가요제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고, 지난 12월에 열린 골든디스크 시상식에서는 직접 노래도 불렀다. 그리고 루게릭병으로 고통받는 전 기아자동차 농구코치 박승일씨를 위해 무보수로 곡을 만들기도 했다. 박승일씨가 직접 쓴 진솔한 글을 랩으로 만든 곡 ‘나는 다시 살아났죠’와 ‘행복의 조건’은 다큐멘터리 배경음악으로 쓰이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 노래를 다시 들을 수 없냐?’는 사람들의 요청으로 디지털 싱글음반으로 만들었고, 이 수익금은 모두 루게릭병을 앓고 있는 환자를 위한 요양소 건립에 사용하기로 했다. 그리고 싸이, 비, 에픽하이, 리쌍의 앨범 피처링에도 참여했다. ‘One Summer Night’을 부른 가수 진추하는 타이거JK에게 노래를 리메이크해달라는 요청을 해와 준비 중이다. 어린이 드라마 ‘외계인 샘’의 주제가를 만들기도 했다. 심지어 힙합 가수로는 처음으로 KBS ‘낭독의 발견’에 나가서 책을 읽기도 했다. 요즘은 윤미래의 음반 프로듀싱을 도와주고 있다. 그리고 얼마 전 몸담고 있던 소속사를 나와 가까운 동료들과 함께 정글엔터테인먼트라는 작은 레이블 회사를 차리기도 했다. 그의 활동을 보면 누구라도 아프다는 것을 눈치채기 힘들다. “주위 도움이 컸죠. 어머니와 할머니도 많이 아프신데, 저 때문에 아프다는 이야기도 안 하세요. 어머니는 제가 아픈 것이 당신 탓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고. 동료들과 가족들이 없었으면 저는 못 일어나지 못했을 거예요. 너무나 고마워요.” 그에게 결혼 계획과 윤미래와의 열애설도 물어봤다. “결혼은 준비가 되면 하고 싶어요. 지금은 돈이 없어요(웃음). 한국에 돌아와서 노력한 만큼 벌었는데, 부모님과 제 병원비로 많이 써버렸거든요. 경제력이 되는 대로 결혼하고 싶네요. (윤)미래요? (웃음) 결혼에 대해서 이야기해본 적도 없고, 그저 친구일 뿐이에요.”LA 흑인폭동 때 힙합 페스티벌에서 래퍼로 데뷔 타이거JK는 초등학교 다닐 때 미국 마이애미로 건너갔다. 가족 중에 아버지를 제외하고 남자가 타이거JK 혼자였기 때문에, 여자처럼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아버지의 ‘고육지책’(?)이었다. 마이애미에는 그의 삼촌이 유일한 한국인이었고, 태권도 도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 땅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타이거JK 역시 친구들과 수없이 싸우면서 자라야 했다. 다행히 태권도를 배운 탓에 미국 아이들에게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생활할 수 있었다. 공부보다는 음악과 태권도를 더 좋아했다. 음악을 좋아했지만, 래퍼가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운명을 뒤바꾼 사건이 터졌다. 바로 1992년 LA 흑인폭동 사건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아이스큐브가 ‘Black Korea’라는 노래로 한국인을 비하했는데, 너무 분했죠. 그래서 역사시간에 논문을 발표해야 했는데, 대신 음악을 틀고 그 노래 가사를 반박하는 랩을 했죠. 의미가 있었는지, 학교에서 상을 받았어요. 그게 소문이 났나 봐요. LA에서 흑인폭동이 터졌는데, 힙합 페스티벌에 초대된 거예요. 당시 한국인에 대한 감정이 상당히 안 좋았어요. 사람들이 거기에 가면 다친다고 다들 말렸죠. 저를 초대한 것도 ‘한번 당해봐라’였던 것 같아요. 거기에서 ‘Call Me Tiger’라는 노래로 즉흥 랩 부문 상을 받았어요.” 그 대회에서 드렁큰타이거 멤버 DJ샤인도 만나게 됐다. 랩의 힘을 그때 느꼈다. 그리고 흑인 친구와 함께 힙합 앨범 한 장을 만들어 한국에 들어왔다. 한국어는 서툴렀지만, 힙합 문화를 한국에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한국 사회는 그리 여유롭지 않았다. 방송국 PD나 음반 관계자들은 ‘검둥이와 함께 뭘 하느냐!’면서 문전박대했다. “미국에서 당했던 인종차별을 제가 한국에서 목격하고 너무 놀랐어요. 저보고 ‘한국말도 못하는 놈이 뭘 한다고’ ‘너는 눈이 찢어져서 안 된다’ ‘안무가 없어서 안 된다’ ‘소음이다’ 등등 별의별 욕을 다 들어봤어요. 방송국의 어떤 PD는 ‘힙합은 이런 거’라면서 룰라의 노래를 틀어줄 정도로 힙합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어요. 다시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울면서 떠났는데(웃음).” 미국에 돌아가서도 힙합에 빠져 지내던 타이거JK는 가족에게 골칫거리(?)였다. 함께 살던 두 여동생은 “제발 정신 좀 차려라”면서 울면서 하소연하기도 했다.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서 세 사람이 스스로 생활비와 등록금을 벌어야 했는데, 랩을 한다고 돌아다니는 오빠의 모습을 동생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왔던 아버지는 지인들에게 “자식이 미국에 가서 양아치가 됐다”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정도다. 그의 아버지는 한국 최초의 팝칼럼니스트 서병후씨다. 가족들의 아픔을 보면서 타이거JK는 대학에 가기로 마음을 잡고 UCLA를 목표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누구도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는 해냈다. UCLA에 입학하기 위해 ‘내가 왜 UCLA에 다녀야 하나!’라는 장문의 편지를 학교에 보내기도 했다. 대학에 떨어졌다면 아마도 태권도에 인생을 걸었을 것이다. “전공은 고등학교 때 은혜를 입은 선생님 때문에 ‘Creative Vriting’을 선택했어요. 입학해서는 노자와 장자의 철학과 문학에 빠져들었죠. 그때는 조용한 곳에서 글이나 쓰면서 지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한국에 있던 힙합 동호회에서 축제에 저를 초대한 거예요.”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초청에 응해 다시 한국에 들어온 것이 1997년이었다. 그런데 고등학생 시절과는 다른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길거리에서 공연도 하고, 미사리 카페나 양로원을 찾아가서 힙합 공연을 하기도 했다. 사람들의 ‘황당한’ 반응 자체가 즐거웠다. 그리고 타이거JK는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1999년 드렁큰 타이거의 1집 앨범 「Year of The Tiger」를 시작으로 「위대한 탄생」(2집, 2000), 「The Legend of …」(3집, 2001), 「뿌리」(4집, 2003년), 「One is Not a Lonely Word」(5집, 2004년), 「1945 해방」(6집, 2005년)까지 여섯 장의 앨범을 내게 된다. 그의 앨범은 힙합 장르에서는 드물게 수십만 장 씩 팔려 대박을 터뜨렸다. “한국에서 힙합을 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에요. 처음 활동할 때는 케이블TV PD를 찾아가서 공연 좀 하겠다고 조른 적도 있어요. 아이돌스타 팬들 앞에서 랩을 할 때 썰렁한 분위기가 창피해서 눈을 감고 랩을 하기도 했고. 그래도 그때는 정말 자신감이 많았죠. 그렇게 활동하면서 좋은 친구들을 만나게 됐고, 무브먼트 크루가 만들어지게 된거죠.” 그는 아직 졸업을 하지 못했다. 대학에서 입학금을 빌려서 돈을 갚기 전에는 제적당하지도 못하는 ‘웃기는’ 상황이다. 타이거JK는 언젠가는 대학으로 돌아가 공부를 마치고 싶다. 하지만 아직은 한국에서 할 일이 남아 있다. 남들은 그를 힙합계를 이끌어가는 리더라고 부르지만, 그는 손사래를 친다. 그냥 음악이 좋은 것뿐이라고. 그의 목표는 명예나 돈이 아닌 평생 음악과 함께 사는 것이다. “저는 특별한 음악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단지 음악 없이는 못사니까, 이렇게 노력하는 거죠. 특별한 계획도 없어요. 지금처럼 음악을 하고 있을 것이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것이 제 꿈이죠. 힙합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면 그냥 가사라도 한번 읽어보세요.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거예요.”■글 / 최영진 기자 ■사진 / 안진형(프리랜서)·경향신문 포토뱅크
희귀병 아내의 손발이 되어 산 안상수 인천시장의 순애보
2005. 11. 01 화제
“아내의 눈썹에 쌓인 먼지 보며 가슴 아팠던 기억이 오늘의 저를 바로세웁니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한 편의 드라마다. 결혼 1년 만에 갑자기 쓰러진 아내. 하루에 두세 번씩 병원과 회사를 오가며 지극 정성으로 아내를 간호한 남편. 또다시 시작된 불행. 식물인간 상태로 5년 동안 누워 있던 아내가 1년 전 드디어 눈을 떴다. 이 드라마 같은 순애보의 주인공은 바로 안상수 인천시장. 병약한 아내를 위해 아기까지 포기한 안상수 인천시장의 눈물… 그리고 희망! ‘워커홀릭’ 시장님의 알려지지 않은 속사정 “결혼한 지 1년 만에 갑자기 쓰러진 아내…” 인천을 대표하는 얼굴 안상수 인천시장(59). 안 시장의 하루는 새벽 5시면 어김없이 시작된다. 그 어떤 직원보다 일찍 시청 본관에 나와 주요 일간지를 챙겨본다. 보좌관의 어깨너머로 안 시장의 스케줄을 훔쳐보니 10분 단위로 깨알 같은 글씨가 빼곡하다. 하루 세끼 바깥 식사는 기본에 주말 출근도 예삿일. 안 시장은 안팎에서 ‘워커홀릭’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것도 그냥 워커홀릭이 아닌 중증 환자(?)다. “일 말고 다른 관심사는 없느냐” 물으니 “시민의 출산·육아 문제가 시급하다”며 또다시 일 얘기로 화제를 돌린다. 나랏일에 이렇게까지 열심인 공무원이 있다는 건 분명 든든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반면 ‘아내까지 있는 남자가 이렇게 심각한 일중독자라면 문제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할 것이다. 혹자는 ‘와이프가 누군지 거 참 불쌍하다’며 혀를 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안 시장의 알려지지 않은 속사정을 듣고 나면 생각은 또 달라진다. 그가 개인적인 일로 자리를 비우는 경우는 딱 한 가지밖에 없다. 병든 아내 간병을 위해 병원을 찾는 일. 안 시장의 아내 정경임씨(52)는 현재 뇌졸중의 일종인 ‘모야모야병’에 맞서 투병중이다. 모야모야병은 뇌혈관이 좁아지거나 막히면서 생기는 희귀 질환. 뇌경색, 뇌출혈, 간질 등을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내의 몸에서 모야모야병이 발견된 건 결혼한 지 꼭 1년 만인 1984년의 일. 어느 날 갑자기 아내는 맥 없이 쓰러졌다. 불행은 언제나 그렇듯 예고 없이 찾아온다. 안 시장에게도 불행의 그림자는 준비 없이 찾아들었다. 그것도 한창 깨가 쏟아질 신혼에 말이다. “병명이 뭐라구요? 모야모야가 뭔데요?” 의사에게 따지듯 물었다. 그런데 돌아온 의사의 말에 더욱 기가 찼다. 한번 발명하면 사망하거나, 운이 좋아 산다 해도 불구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악성 희귀병. 혈관의 모양이 보통 사람과 달리 연기 처럼 생겼다고 해서 ‘모야모야’(일본말로 연기를 뜻함)라 부른다. 숨이 턱 하고 막혀 왔다. “‘하늘이 나를 이렇게 버리는구나’라는 생각밖에 안 들더군요. 사람에게는 저마다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 있는 건가 싶은 게 암담하기도 했구요. 가정의 불행이 내 숙명인 것처럼 다가왔죠.” 막내가 사고로 죽으면서 오랫동안 식물인간 상태로 병상에만 누워 계시다 돌아가신 어머니, 조업을 나갔다 어선이 전복돼 어부 두 사람을 잃고 가산을 완전히 날린 아버지, 밑으로 동생 여섯을 먹여살리기 위해 혼자서 발버둥치던 자신의 청년기까지 겪은 아픔이 기억에서 채 사라지기도 전이었다. 어렵사리 취직을 했고, 지금의 아내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려보리라 다짐하기 무섭게 또다시 찾아든 시련. 하지만 어떻게 꾸린 가정인데… 포기가 쉽지 않았다. “뇌출혈이 생겼는데 병원에서 수술을 하겠냐 물었어요. 처가 식구들은 섣불리 수술했다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냐며 수술하지 말자고 했죠. 하지만 그렇다고 평생을 누운 채로 살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제가 고집을 부려 수술을 받게 했는데 4, 5개월 동안 깨어나지 않더군요. 그러다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어요. 아내가 눈을 뜨고 차츰 말을 하기 시작하더니, 나중엔 완전히 정상인의 몸으로 회복한 거예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소리가 절로 나오더군요.” 안 시장의 말처럼 기적은 기적이다. 정경임씨의 수술을 집도한 서울대병원 노재규 박사는 “아내를 향한 사랑의 힘이 기적을 일으켰다”며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노 박사의 말에 따르면 당시 안 시장은 “하루에도 두세 번씩 병원과 회사를 오가며 그렇게 지극 정성으로 아내를 보살피더라”는 것. 노 박사는 또 “식물인간으로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계시던 어머니를 간병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환자 다루는 솜씨도 남달랐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전했다. 사랑의 힘이 낳은 또 하나의 기적!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 있던 아내와 요즘은 전화 통화도 해요” 아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던 것은 순전히 남편 안 시장의 보살핌 덕분이다. 그러나 아내를 다시 얻는 대신 안 시장은 가슴 아픈 대가도 치러야 했다. 의사에게 아내가 몸이 허약해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를 들은 것. 병약한 산모의 힘으로는 건강한 아이를 출산하지 못할 뿐 아니라, 아기를 낳을 경우 산모에게도 위험하다는 의사의 진단은 그를 한없이 나약하게 만들었다. 아기를 포기한다는 건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리하게 아기를 가져 아내에게 치명적인 부담과 고통을 안겨줄 수도 없었다. 안 시장은 의사의 진단 이후 2세 계획을 과감히 접었다. ‘더 열심히 살자. 아내를 더 사랑하자. 태어나지 않은 자식의 몫까지 더 열심히…’ 가슴속으로 수없이 되뇌고 또 되뇌면서. “아내는 면학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여자였어요. 경기여고와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의류직물학 분야의 전통 있는 일본 오차노미쯔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할 정도로 학업에 대한 열의가 대단했죠. 다시 찾은 인생에서도 아내의 꿈을 향한 질주는 멈출 줄 몰랐습니다. 2년간 꾸준한 치료로 건강을 되찾은 아내는 대학으로 돌아가 강단에도 서며 성실하게 생활했는데… 좋아하는 일에 매달리는 아내가 행복해 보였습니다. 무리하면 안 된다는 걸 잘 알았지만 좋아서 하는 일 말렸다가 더 큰 병날까 싶어 묵묵히 지켜만 봤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후회가 돼요. 그냥 집에서 쉬게 할 것을….” 아내가 건강을 되찾았을 때 안 시장은 사실 ‘불행 끝 행복 시작’이라 생각했단다. 하지만 ‘불행’의 불씨는 여전히 아내의 몸속에 남아 불씨를 키울 ‘때’를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지금부터 6년 전인 지난 1999년 8월, 또다시 쓰러진 정경임씨. 이번엔 수술도 소용없었다. 안 시장은 어떻게든 아내를 살려보겠다고 병원을 다섯 곳이나 옮겼다. 하지만 아내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옮긴 병원마다 ‘식물인간’ 상태로 소생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절망적인 진단을 했다. “어느 날 아내의 눈썹에 쌓인 먼지를 봤어요. 늘 불꽃 같은 의지를 불태우던 사람이었는데… 자기 눈썹에 먼지 쌓이는 줄도 모르고 누워 있는 모습을 보니 인생, 거 참 허망하더군요. 아내를 볼 때마다 얼마나 안쓰럽고 마음이 아픈지 모르겠어요.” 아내는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밥을 먹거나 대화를 하거나 거동을 하거나 배설을 하기는커녕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누워만 있었다. 안 시장의 눈물 어린 아내 간병기는 그렇게 다시 시작됐다. 요즘 정경임씨는 시청에서 30여 분 떨어진 한방병원에서 요양중이다. 긴 병에 장사 없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안 시장은 6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아내의 병간호를 도맡으면서도 한결같다. 시정 활동으로 바쁜 날에도 일주일에 세 번은 꼭 병원을 방문한다는 게 보좌관의 설명. 시간이 빠듯한 날은 2~3분 잠깐 얼굴만 보고 돌아오는 게 고작일 때도 있다. “어차피 얼굴만 보고 나오는 건데, 이젠 좀 뜸해도 사모님께서 이해하시지 않겠냐” 했더니 돌아온 안 시장의 대답이 퍽이나 인상적이다. “저 혼자만의 생각이겠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데요. 자기랑 가장 가까운 사람이 차츰 모습을 감추면 공포스러울 거고, 그러다 보면 살겠다는 희망마저 버릴지 모른다는. 그리고 보호자가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간병인들도 환자를 등한시하게 마련이에요. 지금까지 간병인을 열 번 정도 바꾼 것 같은데, 한번은 옆방 환자한테 이런 얘기도 들었어요. ‘지금 일하는 그 아줌마 못 쓰겠더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대체 나 없는 사이에 아내에게 무슨 짓을 했기에’ 싶어 억장이 무너지더군요. 느낌에 막 때린 것 같기도 하고 말이죠. 맥 놓고 누워 있는 아내 모습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지는데 그런 얘기까지 들으면 정말 ….” 그래도 죽으란 법은 없는 모양이다. 병원에서조차 포기한 환자였다. 안 시장의 끔찍한 아내 사랑에 하늘도 탄복한 걸까? 정경임씨에게서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한 건 1년 전. 얼굴에 표정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이내 가족과 가까운 지인을 알아보고 이름까지 또렷이 기억해냈다. 더 나아가서는 자기 감정의 일부를 표현하기까지. 안 시장은 “요즘은 자신이 좋아하던 노래 ‘아침이슬’도 흥얼거린다”며 대견하다는 듯 아내의 손을 어루만졌다. 사실 5년을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 있던 사람이 말을 하기 시작한다는 건 우리나라 의료 사상 거의 전무후무한 일. 이 마술과도 같도 같은 변화를 가까이에서 눈으로 지켜본 인천 길병원의 이길여 회장은 정경임씨의 병세 호전을 두고 “사랑의 기적”이라 표현했다. “안 시장은 해외 출장 갔을 때를 제외하곤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부인을 찾아와요. 병실에서 부인과 ‘응답 없는 대화’를 나누고, 곳곳을 주무르며 스킨십을 계속해 ‘남편의 사랑’을 여과 없이 보여주지요. 이것이 그 어떤 치료제보다 큰 효과를 낳지 않았나 생각해요. 이제 우리 병원에서 ‘안 시장의 애틋한 사랑 얘기’는 유명한 일화가 되었답니다.”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게 마련! “‘굴비 시장’이 청백리의 대명사로 불릴 날, 반드시 올 겁니다” 가정에서의 행복. 남들에겐 쉬워 보일지 몰라도 이 기본적인 일이 안 시장에겐 가장 어렵고 난감한 과제다. 의지만으로 되는 일 같았으면 이렇게까지 끔찍하지도 않았을 게다. 마치 덫에 걸린 듯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불행은 그를 더욱 세게 옥죄어왔다. 어머니의 오랜 투병 생활, 식물인간으로 살아가야 하는 아내의 비운을 보면서 안 시장도 인간인데 왜 신을 원망하지 않았을까? 더구나 정치인에게 아내의 역할은 두말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CEO 출신으로 정계에 입문, 두 차례 큰 선거를 치르면서 아내의 빈자리는 더욱 크게만 느껴졌을 터.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아내가 쓰러져 식물인간 상태로 병실에 누워 있을 때였는데, 상대 진영에서 상상도 하지 못할 흑색 선전을 퍼부었다. 내용인즉슨 “안상수가 첩이 네 명인데, 이것을 안 아내가 화가 나서 선거운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혹자는 “안상수는 이혼남”이라며 말을 지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안 시장은 일일이 해명하지 않는다. 몸이 아파 움직이지 못하는 아내의 얘기를 하면 할수록 의지가 약해지고, 힘이 빠지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명한들 또 무엇 하랴? 나만 떳떳하면 그만인 것을. 이제 시장 임기도 8개월가량 남겨두고 있다. 인천시민 복지를 위해 해야 할 일이 쌓여 있으니 시장으로서 하루하루가 소중하기만 하다. ‘굴비 시장’이란 오명을 쓰고 살아야 한 지난 1년. 1, 2심에서 모두 무죄 판결이 내려진 ‘굴비 사건’은 현재 대법원 판결만을 남겨두고 있다. 하지만 안 시장은 무죄를 자신한다. 다만, 대법원 판결이 남은 상황에서 법원에 대한 예의는 지켜야 할 것 같아 억울하지만 함구하는 것일 뿐.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게 마련이다. 안 시장은 믿는다. 진실의 힘을…. “혹시 압니까? ‘굴비 시장’ 타이틀이 청백리의 대명사처럼 불릴 날이 올지!” 글 / 최은영 기자 사진 / 안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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