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총 2,425 건 검색)
- 희생자 다수는 광주·전남인데 무안이 특별재난지역···‘사회재난관리법’ 필요한 이유
- 2025. 01. 15 17:03사회
- ... 참사 유가족 일부가 고인의 지인에게 부고를 알리고 장례절차를 원활히 진행하려는 목적에서 희생자 휴대전화에 저장된 지인의 연락처를 요청했는데, 관련 법령이 없어서 어려움이 있었다. 또한...
-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 제주항공 참사 희생자의 ‘마지막 고향사랑’…유가족, 500만원 기부
- 2025. 01. 15 16:29사회
- ... 기부금을 마련해 고인 이름으로 전남 영암군에 전달했다. 영암군은 15일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희생자 천병일씨(50)의 형과 동생이 고인 이름으로 500만원을 고향사랑기부금으로 기탁했다”고 밝혔다....
- 기부참사제주항공고향희생자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 [현장 화보]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희생자 대부분 발인 마쳐…일부 유가족 공항 복귀
- 2025. 01. 08 18:33사회
- ... 희생자 179명 중 177명이 발인을 마쳤다. 무안공항에 설치된 텐트로 다시 돌아오겠다고 밝힌 희생자 가족은 111가족이다. 희생자 유가족들은 오는 11일 공항에서 회의를 열고 향후 대책 등을 논의한다....
- 현장 화보무안군무안국제공항제주항공여객기참사
-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희생자 177명 영면···남은 2명은 9일 발인
- 2025. 01. 08 14:28지역
- .... 발인은 지난 3일 10명, 4일 12명, 5일 22명, 6일 37명, 7일 80명, 이날 16명이 진행했다. 남은 희생자 2명의 발인은 오는 9일 치러질 예정이다. 무안공항은 현재 장례를 치른 뒤 다시 이곳을 찾을...
-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스포츠경향(총 557 건 검색)
- [스경X분석] 신태용 인도네시아 감독 사실상 경질 왜?···토히르 회장의 커진 욕심과 야망 희생양 지적
- 2025. 01. 06 15:13 축구
- 신태용 인도네시아 축구대표팀 감독. Getty Images코리아 신태용 감독(55)이 인도네시아 축구대표팀과 동행을 마쳤다. 재계약을 한지 6개월도 되지 않아 사실상 경질되면서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에릭 토히르 인도네시아축구협회 회장의 욕심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인도네시아축구협회(PSSI)는 6일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신태용 감독과 성인 대표팀 및 U-23(23세 이하) 대표팀 감독직 계약 해지를 알린다”고 발표했다. PSSI는 “이번 결정은 인도네시아축구협회가 대표팀의 성과, 대표팀이 달성해야 할 장기적 목표에 관해 오랫동안 신중하게 검토하고 평가한 결과를 바탕으로 내려진 결정”이라고 밝혔다. 새해 들어서 갑자기 신 감독의 경질론이 불거지더니 실제 계약해지로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최근 이탈리아 매체 투토스포르트는 “전 인터밀란 구단주이자 PSSI 회장인 에릭 토히르는 2026월드컵 본선 출전권을 얻고 싶어한다”며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인도네시아 혈통 선수를 꾸준히 찾고 있고, 제이 이즈스(베네치아) 등을 찾는 데 성공했다”고 전했다. 이어 “체력과 스피드에 집중하는 신태용 감독은 더 이상 인도네시아에 만족스럽지 않다. 질적 도약을 위해 벤치에서의 변화도 고려 중이다. 새 감독은 유럽 출신일 수 있다”고 전했다. 에릭 토히르 인도네시아 축구협회장이 지난해 6월 북중미월드컵 아시아 2차예선에서 필리핀을 꺾은 뒤 박수를 치고 있다. Getty Images코리아 이 보도 이후 인도네시아 현지에서도 신 감독의 입지가 불안하다는 소식이 전해지더니 이날 전격적인 계약해지로 이어졌다. PSSI는 지난해 6월 신태용 감독과 2027년까지 계약을 연장했다고 발표했으나 불과 6개월 만에 계약을 종료하는 이해하기 어려운 태도를 보였다. 최근 끝난 ‘동남아 월드컵’ 미쓰비시컵에서 4강에 오르지 못한 게 이유가 아니냐는 해석도 있지만, 현지에서는 22세 이하 선수들로 팀을 꾸려 미래를 내다본 이번 대표팀의 경기력이 나쁘지 않았다는 분석이 많았다. 결국 칼자루를 쥔 토히르 회장의 욕심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그는 최근 로이터 통신과 인터뷰에서 2026 월드컵 본선 진출과 2045년까지 FIFA 랭킹 50위 진입 등 청사진을 제시하면서 큰 야망을 드러냈다. 특히 인도네시아가 2026월드컵 아시아 3차예선까지 올라가 일본, 호주, 사우디, 바레인, 중국 등과 속한 C조에서 예상과 달리 3위에 오르며 좋은 성적을 내자 눈앞의 성과를 내야겠다는 욕심이 커진 것으로 보인다. ‘유럽 출신’의 빅네임 감독이라는 조건이 언론에서 나온 것도 그의 의지가 전해진 것이라는 분석이다. 인도네시아 선수들이 지난해 11월 북중미월드컵 아시아 3차예선 사우디아라비아전에서 골을 넣은 뒤 기뻐하고 있다. AP연합뉴스 갑작스레 팀을 떠나게 됐지만 신태용 감독은 의연하게 받아들였다. CNN 인도네시아는 “신태용 감독은 팀 매니저 수마르지를 통해 약 5년 동안 자신에게 주어진 신뢰에 감사해 했다. 인도네시아가 2026 북중미월드컵에 진출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 스경X분석
- ‘오늘 계약 종료’ 프로미스나인 백지헌, 참사 희생자 추모
- 2024. 12. 31 17:09 연예
- 백지헌 SNS 캡쳐. 걸그룹 프로미스나인 멤버 백지헌이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31일 백지헌은 개인 인스타그램을 통해 한 장의 이미지를 게재했다. 이미지에는 국화꽃 한 송이와 함께 “깊은 위로와 애도를 표합니다. 항공사고 희생자를 추모합니다”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앞서 지난 29일 오전 9시 5분 무안국제공항에서는 태국 방콕발 제주항공 7C2216편 항공기가 착륙 중 활주로 외벽에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181명의 탑승자 중 승무원 2명을 제외한 179명이 사망했다. 많은 연예계 종사자들이 자신의 개인 소셜미디어 계정을 통해 애도를 표하고 기부금을 전달하는 등 희생자를 추모하는 마음을 나누고 있다. 방송사 역시 예능 및 연말 시상식을 결방하는 등 추모 분위기를 이어가고 있다. 백지헌 SNS 캡쳐. 한편 프로미스나인은 이날을 끝으로 플레디스엔터테인먼트와의 전속 계약이 종료된다. 향후 활동에 대해선 아직 알려진 바 없다.
- [전문] 알리, 제주항공 참사에 광주 공연 취소→희생자 분향소 찾는다
- 2024. 12. 31 15:49 연예
- 가수 알리. 연합뉴스 가수 알리가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에 대한 애도의 뜻으로 공연을 잠정 연기한 가운데, 광주 분향소를 찾는다. 알리는 31일 자신의 SNS에 “저는 가족들과 함께 광주 분향소로 간다”며 “원래 계획은 광주에서 12월 31일 공연 후 하룻밤을 자고 1월 1일 가족들과 엄마 고향을 둘러보고 서울로 올라오는 일정이었다. 40년동안 한 번도 함께 내려와 본 적 없어서 이번 기회에 자리를 만들어 보았었다”고 밝혔다. 이어 “그러나 국가애도기간이기에 공연을 취소하였고 서울에 있을까 싶었으나, 우리 가족이 서로에게 또 언제 이런 기회가 허락될까 점점 세월을 먹어가는 부모님 생각에 미루고 싶지 않아 고심 끝에 내려가기로 결정했다”며 “또한 그 곳에서 공연을 하려고 했던 사람으로서 의미를 되새기며 마무리를 하려 한다”고 했다. 알리는 “아마 비행기에 오르셨던 분들 또한 가족들과의 추억이 필요한, 어렵게 시간 내어 여행길에 오른 분들이실 것”이라며 “그리고 저의 공연에 오시려 했던 관객 분들 또한 어렵게 시간 맞추어 잡으셨으리라 생각이 든다”고 전했다. 끝으로 알리는 “일부 장례가 시작된다고 한다. 공연 시작인 7시 반에 희생자 분들과 유족들을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기도하자”고 덧붙였다. 한편 지난 29일 오전 9시 3분께 태국 방콕발 제주항공 7C2216편 여객기가 무안공항 활주로로 착륙을 시도하던 중 추락해 활주로 외벽과 충돌했다. 이번 사고로 탑승객 181명 중 2명이 구조됐으며, 사망자는 179명이다. 정부는 무안군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하고, 1월 4일까지를 국가애도기간으로 지정했다. 이하 알리 SNS 글 전문 저는 가족들과 함께 광주 분향소로 갑니다. 원래 계획은 광주에서 12월 31일 공연 후 하룻밤을 자고 1월 1일 가족들과 엄마 고향을 둘러보고 서울로 올라오는 일정이었거든요. 40년동안 한 번도 함께 내려와 본 적 없어서 이번 기회에 자리를 만들어 보았었어요. 그러나 국가애도기간이기에 공연을 취소하였고 서울에 있을까 싶었으나, 우리 가족이 서로에게 또 언제 이런 기회가 허락될까 점점 세월을 먹어가는 부모님 생각에 미루고 싶지 않아 고심 끝에 내려가기로 결정했습니다. (공연은 취소되었습니다) 또한 그 곳에서 공연을 하려고 했던 사람으로서 의미를 되새기며 마무리를 하려 합니다. 아마 비행기에 오르셨던 분들 또한 가족들과의 추억이 필요한, 어렵게 시간 내어 여행길에 오른 분들이시겠지요.. 그리고 저의 공연에 오시려 했던 관객 분들 또한 어렵게 시간 맞추어 잡으셨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아, 목울대가 갈피를 못잡네요. 우리 알리사랑이 오늘을 위해 준비한 이 간식들과 마카롱은 광주에서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던 스텝들에게 잘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가족들과 함께 나누겠습니다. 일부 장례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공연 시작인 7시 반에 희생자 분들과 유족들을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기도합시다.
- 안영미, 21년생 아기 희생자에 울었다 “나도 엄마라…” (두데)
- 2024. 12. 30 17:28 연예
- 안영미 SNS 화면 캡처. 코미디언 안영미가 라디오 생방송 중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희생자를 애도하며 눈물을 흘렸다. 안영미는 30일 방송한 MBC FM4U ‘두시의 데이트 안영미입니다’에서 “사람이든 일이든 때를 놓치지 말고 사랑한다, 고맙다 말해야 한다. 후회 없이 매일을 살아가는 것이 남은 우리가 하는 최선일 거다”라며 울먹였다. 이어 안영미는 21년생인 사고 희생자를 언급하며 슬퍼하는 한 청취자에게 “저도 그 뉴스를 보고 너무 가슴이 아팠다”라고 공감했다. 눈물과 함께 애도를 표한 안영미도 23년생인 아들이 있다. 안영미는 “여러분께 죄송하다. 여러분들도 힘이 안 나실 거라, 제가 힘을 드려야하는 위치인데 저도 아이의 엄마다 보니 뉴스를 보는데 너무 가슴이 아팠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여러분들께 힘을 못 드려서 너무 죄송하다”라며 사과했다. 그러면서 “세상을 떠난 분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고통 속에 계실 유가족분들께도 애도의 마음을 전한다. 당분간은 웃음보다 음악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달랠 수 있을 것 같다. 오늘은 좀 더 많은 사연과 음악으로 함께하겠다”라고 말했다. 한편 지난 29일 오전 9시 3분께 태국 방콕발 제주항공 7C2216편 여객기가 무안공항 활주로로 착륙을 시도하던 중 추락해 활주로 외벽과 충돌했다. 이번 사고로 탑승객 181명 중 2명이 구조됐으며, 사망자는 179명이다. 정부는 무안군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하고, 1월 4일까지를 국가애도기간으로 지정했다.
주간경향(총 43 건 검색)
- 세수가 줄어드니, 지방만 희생양(2024. 09. 16 06:00)
- 2024. 09. 16 06:00 정치
- 세수 펑크 부담 오롯이 지방 전가…국회 예산심의권 무시 논란 “지방 균형 발전 위해 조세제도 전면적인 개편 필요” 목소리도 지난 9월 2일 국회에서 2023 회계연도 결산심사를 위한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가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올해 총 32조원 규모의 세수 펑크가 발생할 수 있나.”(김영환 더불어민주당 의원), “이대로 가면 그렇다.”(최상묵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지난 9월 2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예결특위)에서 오간 문답이다. 지난해 ‘세수 펑크(세수결손)’ 56조원보다는 조금 줄었지만 2년째 엄청난 세수결손이 발생하는 셈이다. 윤석열 정부 들어 법인세, 양도소득세 등에서 세수결손이 급증하면서 생겨난 현상이다. 불용통보, 지자체에 카톡 메시지로 보내 세수 펑크로 인한 재정 부담은 고스란히 지방정부로 떠넘겨졌다. 국회에서 2023년 예산을 결산하는 과정에서 기재부가 국세수입과 연동되는 보통교부세와 지방교육재정교부금 등 18조6000억원을 불용 처리했다는 사실이 지적됐다. 예산 관련 결정은 당연히 국회의 승인을 받아야 하나, 재정당국은 이 절차를 거치지 않고 지자체에 불용통보만 했다. 심지어 지자체에 카카오톡 문자메시지로 보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국가재정법을 어기고, 헌법상 국회의 예산심의권을 무시했다는 논란까지 제기된 만큼 야당 의원들의 질책이 이어졌다. 최기상 민주당 의원은 지난 8월 말 국회 기재위에서 “세수결손 대응방안으로 지방교부세 미지급으로 대응하자고 의견을 낸 곳이 기재부의 어느 국인가”라고 질의시간 7분 내내 똑같은 질문만 던졌다. 임미애 민주당 의원은 지난 9월 2일 국회 예결특위에서 “국회가 의결한 예산에 기준해 전 17개 시·도와 228개 시·군·구에서 예산을 편성하고 집행해서 그다음 해에 예산을 쓰고 있는데 9월에 교부금을 내려보내지 않은 것”이라며 “행정부가 무슨 권한으로 불용결정을 한 것인가”라고 따져 물었다. 한 해 전에 국회에서 결정된 예산이 그해에 중앙에서 내려오지 않자 지방정부는 각종 사업 진행에 중대한 차질을 빚었다. 하승수 세금도둑잡아라 공동대표는 “예산이 잡혀 있는데 중앙정부에서 마음대로 주지 않는 것은 지방자치에 어긋난 행위”라고 지적했다. 지방교부세법에 따라 지방정부가 안정적으로 예산을 운용하도록 해야 하는데 교부세부터 먼저 건드리는 불용처리는 옳지 않다는 것이다. 내년도 예산에서도 세수 펑크의 부담은 오롯이 지방에 전가될 것으로 보인다. 국세를 제대로 거두지 못하고, 법인세 등을 완화하면서 생긴 결손이, 그리고 세수를 정확하게 예상하지 못한 재정당국의 무능력이 지방재정의 부담으로 전가된 것이다. 내년도 예산안을 놓고 지방 지자체가 지역 국회의원은 물론 온갖 인맥을 동원해야 할 지경이다. 그렇지만 수도권에 비해 숫자가 적은 비수도권 의원들은 예산확보전에서도 밀리게 된다. 기초지자체·광역지자체 의원을 거친 임미애 민주당 의원은 “올해 이미 지방정부는 긴축재정에 들어갔고, 많은 사업이 축소되거나 주민 숙원사업이 없어졌다”면서 “더 심각한 사실은 내년에도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약 고리인 지방재정부터 위험에 빠뜨려 윤석열 정부의 소극적 재정정책과 감세정책은 가장 약한 고리인 지방정부의 재정부터 위험에 빠뜨리게 할 수 있다. 서울시를 비롯한 수도권 지자체는 재정자립도가 높지만, 지방에는 자립도가 10% 미만인 지자체도 많다. 법인세, 양도소득세, 종합부동산세 등의 의도적인 감세로 중앙정부의 재정이 악화하면, 재정자립도가 낮은 지자체부터 도미노식으로 불경기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는 격이다. 임미애 의원은 “지방에서는 가장 큰 돈줄이 중앙에서 내려오는 예산인데, 이를 깎아버리면 이중삼중으로 지방경제가 더 어려워진다”면서 “정부가 재정정책 기조를 바꾸지 않으면 지방은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고 경고했다. 지금은 정부가 재정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쳐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야당에서도 2026년 지방선거와 2027년 대선을 앞두고 종부세, 금투세, 상속세 완화 주장이 솔솔 나오고 있다. 국세인 종부세가 완화되면 중앙에서 내려가는 지방 지원 예산이 자연적으로 줄어들게 된다. 민주당에서는 이재명 대표가 완화를 주장하고 있고, 진성준 정책위 의장이 반대를 주장하고 있어 당 내부에서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종부세 폐지를 주장해온 최병천 신성장경제연구소장은 “금투세나 상속세 완화로 재정수입의 총 파이가 줄어들면 지방 예산 역시 n분의 1로 줄어들 수 있으나 이런 식이라면 모든 세금을 올려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면서 “하지만 종부세는 그 세목이 합리적인지를 따져 물어야 하는 또 다른 토론의 영역”이라고 말했다. 누군가에게 부당하게 세금을 거두면 안 된다는 게 종부세 폐지 주장의 밑바탕이라는 것이다. 지방으로서는 종부세 완화 또는 폐지가 재정에 큰 위험을 가져올 수 있다. 지방세인 재산세로만 재정을 꾸려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최병천 소장은 “지금 국민의힘 소속 오세훈 서울시장이 2008년 강남 지역 등의 재산세 50%를 해당 지역에서 사용하고 나머지는 서울 전역에서 나눠 쓸 수 있게 한 사례를 곰곰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면서 “종부세를 폐지하고 지방세인 재산세를 ‘오세훈식 공동과세’로 전국에서 사용하는 방안도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지방 균형 발전을 위해 조세제도의 전면적인 개편을 시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하승수 공동대표는 “지방분권의 가장 근본적인 토대는 재정 뒷받침”이라면서 “지방재정의 총량도 중요하지만 지방의 재정 자율권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앙정부의 재정 통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하 공동대표는 “국가재정과 지방재정의 조세 재정정책을 전면적으로 재설계해 지방 균형 발전을 위한 종합적인 밑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 [시네프리뷰] 존 오브 인터레스트-중산층 가족의 삶 떠받치는 투명인간들의 희생(2024. 06. 05 06:00)
- 2024. 06. 05 06:00 연예
- 공포 영화는 아니지만 기괴한 으스스함을 안긴다. 이즈음에서 떠오르는 게 고 노회찬 의원이 언급했던 ‘6411번 버스로 새벽 출근하는 청소노동자들’ 이야기다. 그들도 ‘투명인간’ 취급을 받았다. 영화가 21세기의 현재와 연결되는 지점이다. /찬란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볼 때 각오는 했다. 조너선 글레이저 감독의 전작 <언더 더 스킨>(2013)은 난해했다. <어벤져스> 시리즈의 주요 등장인물 블랙 위도로 유명한 배우 스칼렛 요한슨의 전신 누드 연기를 볼 수 있다는 것이 당시 홍보 포인트인 듯한데 그 또는 그의 희생자 ‘피부밑’에 뭐가 있었는지는 영화의 끝 무렵에 가서야 알 수 있다. 분명 영화는 자기 완결적 텍스트다. 그럼에도 난해한 이유는 그 존재의 의미가 모호하고 중의적이었기 때문이다. ‘외계에서 온 포식자’라는 설정은 감독이 그렇다고 하니 ‘아 예, 그런가 봅니다’라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감독이 10년 만에 내놓은 작품이다. 상도 받았다. 무려 지난해 칸 그랑프리와 사운드트랙 수상작이다. 올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장편 국제영화상, 음향상을 수상했다. 10년 만에 돌아온 조너선 글레이저 감독의 신작 다행히도 영화를 두 번 볼 기회가 있었다. 처음 영화를 본 뒤 며칠 동안 몇몇 장면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감독이 왜 그런 장면을 삽입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면 관객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 아닌가. ‘역시 불친절한 감독이군’, 그렇게 생각했는데 두 번째 보면서 장면들이 꽤 유기적으로 배치된 걸 발견했다. 역시 잘 만든 영화는 한 번만 보고 ‘땡’ 칠 일이 아니다. 정말이다. 영화의 시작. 암전이 너무 길다. 두 번째로 영화를 볼 때 시간을 재보니 첫 시퀀스인 가족 피크닉 장면이 나올 때까지 3분 39초 동안 그냥 검은 화면만 보여주고 있다. 끝 장면도 그렇다. 주인공이 불을 끄고 건물을 나서는 장면에서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시간을 재보니 6분가량이다. 어느 강가로 피크닉을 나간 가족들. 독일어를 쓰고 있는데 그들이 걸치고 있는 수영복이 너무 구식이다. 아하, 이건 요즘 이야기가 아니다. 20세기 초중반에 찍힌 낡은 흑백사진 속에서나 볼 법한 차림이다. 남편 회스는 부인 헤트비히의 뒷말에 따르면 일 중독자다(회스의 이름과 중령이란 직위는 영화가 시작하고 38분이 지난 뒤에야 나온다). 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사령관이다. 부부는 수용소에 붙어 있는 관사에 산다. 헤트비히는 정원 가꾸기에 열심이다. 부인의 주장에 따르면 아이들은 ‘밝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라고’ 있다. 얼핏 보면 자기 생활에 충실한 평범한 중산층 가족이다. 헤트비히 집으로 온 어머니, 그러니까 회스의 장모는 에스더 실버만이라는 여성의 집을 청소하던 사람이었다. 딸이 잘살게 된 것을 기뻐하던 어머니는 혹시 ‘에스더도 저 담벼락 너머에 있을지’ 묻는다. 그러니까 자신이 하녀로 일하던 집주인은 유대인이었고, 나치 집권 이후 처지가 달라진 것이다. 회스 가족의 평온한 일상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수용소에서 발탁된 유대인 집사와 하녀들의 노동이다. 어머니가 일하는 사람들이 혹시 유대인이냐고 묻는다. 헤트비히는 “유대인은 저 담벼락 건너편에 있어요. 그들은 동네 여자예요”라고 답한다. 거짓말이다. 잠 못 이루던 어머니가 편지를 남기고 떠나자 아침을 먹던 헤트비히는 집에서 일하던 하녀에게 짜증을 내며 덧붙인다. “내가 남편에게 말 한마디만 하면 너는 재가 되는 거야.” 회스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넘어 전체 유대인수용소를 총괄하는 자리를 맡는다. 성실한 회스는 자기에게 주어진 ‘보다 효율적으로 유대인 수용자들을 처리하는 일’에 골몰한다. 심지어 파티에 초대돼서도 천장이 너무 높아서 가스 주입으로 이 사람들을 처리하는 건 쉽지 않겠군, 이런 생각에 잠겨 있다. 정원 가꾸기에 열심인 헤트비히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생활은 집사와 하녀로 빼돌린 유대인과 수용소에 끌려온 사람에게 강탈한 고급품으로 영위된다. 유대인은 유령 같은 존재다. 화면 밖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학살 아우슈비츠에서 벌어진 잔악한 학살은 모두 스크린밖에서 벌어진 것으로 처리돼 있다. 회스는 아들을 데리고 사냥을 나가 아들에게 소리로 새를 구분하는 법을 알려준다. 영화엔 수용소 안에서 벌어지는 잔학행위를 암시하는 소리가 마치 ASMR(백색소음)처럼 깔려 있지만,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거의 신경 쓰지 않는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공포 영화는 아니지만, 기괴한 으스스함을 안긴다. 이즈음에서 떠오르는 게 고 노회찬 의원이 언급했던 ‘6411번 버스로 새벽 출근하는 청소노동자들’ 이야기다. 그들도 ‘투명인간’ 취급을 받았다. 영화가 21세기의 현재와 연결되는 지점이다. 수작이다. 추천한다. 제목: 존 오브 인터레스트(The Zone of Interest) 제작연도: 2024 제작국: 영국, 폴란드, 미국 상영시간: 105분 장르: 드라마 감독: 조너선 글레이저 출연: 크리스티안 프리델, 산드라 휠러, 랄프 헤르포트 개봉: 2024년 6월 5일 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수입: 찬란 배급: TCO㈜더콘텐츠온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의 마지막은 /waralbum.ru “이 영화는 허구적으로 창작된 것이며, 만약 실재 인물이나 사건, 역사적 사실들과 일치하는 것이 있다면 전적으로 우연입니다.” 엔딩크레딧 끝에 덧붙여 있는 흔한 설명 문구다. 법적 소송 등을 방지하기 위한 고지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실제로 루돌프 회스가 있었고, ‘아우슈비츠의 여왕’이라고 불렸던 헤트비히가 있었다는 사실을. 조너선 글레이저 감독 인터뷰를 찾아보면 실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회스 가족의 관사가 붙어 있었고, 그곳을 수리해 영화를 찍을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촬영은 계획대로 되지 않았고, 대신 수용소에서 70m쯤 떨어진 다른 건물을 개조해 회스의 집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영화를 보면 회스의 집 지하실로부터 수용소에 이르는 비밀통로가 나오는데 이 통로는 실제로 존재했고, 지금도 그대로라고 한다. 이 장면은 실제 비밀통로에서 찍었다. 전쟁이 끝난 후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회스는 어떻게 됐을까. 회스는 ‘최후의 나치’로 네오나치들이 숭배한 SS친위대장 루돌프 헤스와 다른 인물이다. 영화에서 아내와 통화하던 회스는 게슈타포 수장 힘러가 작전에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고 기뻐한다. 그 ‘회스 작전’이 43만 명의 헝가리 유대인을 수용소로 보내는 작전이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회스는 연합군이 아우슈비츠를 점령하기 전 독일해군 복장을 하고 탈출했고, 프란츠 랑이라는 가명으로 정원사가 됐다. 헤트비히를 체포한 영국정보부는 남편의 소재를 밝히지 않으면 아들을 소련 쪽에 포로로 넘기겠다고 협박해 1946년 회스 체포에 성공한다. 폴란드 최고국가법원은 그를 반인륜범죄를 저지른 전범으로 기소해 1946년 4월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회부했다. 1947년 4월 16일 아우슈비츠 앞에 회스 처형만을 위해 만들어진 특설 교수대에서 사형이 집행됐다. 향년 45세. 결국 회스는 아우슈비츠 최후의 처형자가 됐다.
- 시네프리뷰
- [렌즈로 본 세상]화마 덮친 성탄…가족 살린 희생(2024. 01. 01 07:00)
- 2024. 01. 01 07:00 사회
- 성탄절에 서울 도봉구 한 아파트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주민 대부분이 잠들었을 오전 4시 57분쯤 시작된 불은 순식간에 3층에서 15층까지 번졌다. 불은 4시간 만인 오전 8시 40분에 진압됐지만, 2명의 사망자를 포함한 32명의 사상자를 냈다. 10층 거주자 임모씨는 최초 화재 신고자다. 임씨는 부모님과 동생을 먼저 대피시킨 뒤 불을 피하려 했으나 11층 계단에서 연기 흡입으로 질식사한 상태로 발견됐다. 4층 거주민인 박모씨는 생후 7개월 아이를 끌어안은 채 재활용 쓰레기 포대 더미 위로 뛰어내렸다. 아내와 아이는 무사했으나 추락 직후 심정지 상태로 발견된 박씨는 끝내 숨을 거뒀다. 이 불로 이재민 9세대 25명이 인근 모텔에서 임시 거주 중이다. 12월 26일 경찰과 소방 당국, 한국전기안전공사의 합동 현장 감식 결과 담배꽁초로 인한 실화가 유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 렌즈로 본 세상
- [편집실에서]다수를 위한 희생(2021. 12. 17 13:24)
- 2021. 12. 17 13:24 오피니언
- 12월 18일부터 강화된 거리 두기가 적용되면서 11월 1일 시작된 단계적 일상회복(위드 코로나)이 일시 중단됐습니다. 47일간의 실험결과는 참담해보입니다. 일일확진자 수는 7000명을 넘어섰고, 위중증환자 수도 900명을 넘어섰습니다. 한때는 하루 사망자 수가 90명을 넘어서기도 했습니다. 언제까지나 강화된 거리 두기를 할 수는 없었겠지요. 그간 방역에 협조적이었던 국민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것도 정부는 고려했을 겁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정부가 빗장을 풀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는 소상공인들의 반발이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기 힘듭니다. 한국사회는 위기에 빠지면 힘을 합쳐 극복하는 아름다운 전통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다수를 위해 소수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경향이 있다는 겁니다. 외환위기 당시 직장을 잃었던 많은 가장이 사회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번 팬데믹에서는 소상공인들이 ‘희생하는 소수’가 됐습니다. 팬데믹 초기 소상공인들은 적극적으로 방역에 협조했지만, 이로 인해 발생한 손실은 오롯이 그들의 책임으로 돌아왔습니다. 정부의 지원이 없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저런 조건을 붙였고, 결국 손에 쥐는 것은 쥐꼬리에 불과했습니다. 막대한 지원금을 퍼부으며 소상공인 살리기에 나섰던 미국, 일본 등 주요국가들과 달랐습니다. 위드 코로나로 소상공인은 달랬지만 또 다른 ‘희생하는 소수’가 생겼습니다. 코로나19 사망자들입니다. 위중증환자가 급증하면서 하루평균 20~30명에 불과하던 사망자 수가 100명에 육박했습니다. 방역을 강화했더라면 죽지 않아도 될 시민들일지도 모릅니다. 사망자 1명은 숫자로는 1에 불과하지만, 여기에 담겨 있는 눈물은 계량하기 힘듭니다. 제대로 된 장례조차 지낼 수 없는 코로나19 사망은 유가족들에게 형언하기 힘든 고통과 아픔을 남깁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내가 당선되면’ 소상공인 지원을 위해 50조원에서 100조원을 쓰겠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집권당은 권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곳간을 열지 못했고, 거대야당은 ‘나라 거덜낸다’며 재정지출 확대를 맹비난해왔습니다. 지금도 하지 못하는 정책을 무슨 묘수가 있어 당선되면 하겠다는 것일까요. 사실 소상공인 지원은 여야가 뜻만 모은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실행할 수 있습니다. 대형 산불이 났는데, 물 쓰는 것을 아까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다 산언저리에 있는 집을 홀라당 태울 수 있습니다. 소방당국이 소방수를 아낀 만큼 피해자들은 피눈물을 흘리게 될지 모릅니다. 팬데믹 상황에서 그 피해자는 소상공인이거나 코로나19 사망자가 될 수 있습니다. 다수를 위한 ‘당연한 희생’이란 없습니다.
- 편집실에서
레이디경향(총 7 건 검색)
- [우리는 피임을 모른다] 페루 강제 불임수술이 만든 '조용한 희생자'
- 2020. 05. 27 14:36 건강
- 1990년대 페루에서는 끔찍한 일들이 일어났다. 1990년부터 10년간 집권한 알베르토 후지모리 정부는 30만 명의 여성과 2만 명의 남성에게 강제로 불임수술을 시켰다. 빈곤을 해결하기 위한 가족계획 사업의 일환이었고, 이 잔인한 피임의 대상은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후지모리 정부의 ‘생식건강과 가족계획 프로그램’은 원래 빈곤층에 혜택을 주는 자발적인 프로그램이었다. 국제기구와 원조기구에서도 캠페인에 자금을 지원했다. 그러나 ‘자발적인 불임수술’은 없었다. 각종 거짓말과 위협, 때로는 무차별적인 힘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불임수술을 받았다. 예를 들어 출산하고 얼마 후면 보건 공무원이 집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여성을 데리고 가서 수술을 시키는 것이었다. 제대로 된 마취나 수술 후 관리도 없었고, 심지어 수술 전 병원 청소를 시키기까지 했다. 만약 응하지 않으면 신생아를 등록해 주지 않거나 자녀를 더 낳으면 감옥에 보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수술을 받았지만 무슨 수술을 받았는지, 이후 몸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낙태수술도 예외는 아니었고, 출산 후 아기를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주로 외딴 고지대와 열대우림 지역에 사는 20~40세의 문맹 여성들을 대상으로 골랐는데, 피해자의 95%에 해당하는 약 30만 명이 케추아어를 사용하는 농촌 여성이었다. 최소 18명의 여성이 불임수술이 직접적 원인이 돼 사망했으며, 수천 명의 사람이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수술을 받은 탓에 합병증으로 고생했다. 페루의 토착 여성들은 ‘조용한 희생자’였다고 말한다. 이들은 국가로부터 차별을 받았고, 가부장적 사회에서 아이를 가질 수 없었으며, 아이를 가질 수 없었기에 쓸모없다고 간주됐다. 1997년이 돼서야 여성들은 입을 열기 시작했고, 사회활동가이자 인권변호사인 길리아 타마이의 노력으로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타마이 변호사는 1998년 국제사회에 페루의 강제 불임수술 만행을 알린 보고서를 발표했고, 후지모리 정부로부터 여러 차례 죽음의 위협을 받다가 스페인으로 망명했다. 타마이의 보고서에 의하면 자발적으로 불임수술을 받은 사람은 전체의 10%뿐이었고, 수술비용을 절약하고자 동물용 마취제가 사용됐다. 또한 의대생들이나 간호사들이 불임수술을 시술하기도 했다고 한다. 매월 불임수술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직원은 위협을 받았으며, 후지모리 대통령은 매월 보건부 장관을 통해 불임수술 현황에 관한 개별 브리핑을 받았다고 한다. 보고서 발표 직후 조사가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페루의 가족계획 프로그램을 지원하던 미국은 모든 지원 자금을 끊었다. 후지모리 정부는 불임수술의 사실관계와 책임을 부인했지만 자금 부족으로 가족계획 프로그램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후지모리의 불임수술 정책으로 1990년 여성 1명당 3.7명이던 출산율이 10년 뒤인 2000년에는 2.7명으로 감소했다. 후지모리가 저지른 만행의 공식적 피해자만 7000여 명에 이르고, 피해자들에 대한 법적 조치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김선형은 누구? 간호학을 전공하고 임상 간호사로 일하며 수많은 여성, 특히 일하는 여성들을 만났다. 그들이 처한 현실과 다양한 삶의 고충을 마주하면서 여성을 병들게 하는 것, 여성의 건강이 그들의 삶과 가정 그리고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갖게 됐다. 지금은 여성 건강과 인권에 관한 주제로 번역과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우리는 피임을 모른다’(도서출판 파람)가 있다.
- 우리는 피임을 모른다
- 감초 배우 김미경 “엄마라고 무조건 희생적일 수만은 없죠”
- 2010. 01. 06 15:06 연예
- 김미경은 숨쉬듯 연기하는 배우다. 이 성격 좋고 털털하고 바른 말 하기 좋아하는 배우는 작품 속에서도 자신과 꼭 닮은 인물들을 그려왔다. 캐릭터와 배우 사이의 벽을 허무는 연기력, 배우로 산 24년의 시간 동안 얻어진 것만은 아니다. 고생한 만큼 애틋한 ‘탐나는도다’ 배우 김미경의 첫 TV 출연작은 1999년 방영된 드라마 ‘카이스트’다. 일부 학생들은 그녀가 연기한 ‘석학의 집’ 주인 김미순을 보고 대학 매점 주인들은 다 그런 줄 알았다고 한다. 겉으론 까칠하지만 속으론 정 많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해 괜히 고민을 털어놓게 되는 큰언니 같은 조언자. 씩씩한 어머니 혹은 깐깐한 노처녀 역으로 친숙한 만큼 이제껏 그녀가 보여준 캐릭터의 공통분모는 ‘강한 여성’이었다. 지난여름 방영됐던 드라마 ‘탐나는도다’에서 역시 해녀들의 우두머리 대상군 ‘최잠녀’ 역으로 장군 같은 카리스마를 선보였다. “대본을 보니 고생길이 훤했어요. 제주도에 가서 직접 물질도 해야 하고 로케이션이기 때문에 서울에서 포기해야 할 것도 많았죠. 윤상호 감독님과는 드라마 ‘태왕사신기’에 이어 두 번째 함께한 작품이에요. ‘태왕사신기’ 촬영 때도 대장장이 ‘바손’ 역을 하면서 엄청 고생했거든요. 처음 출연 요청이 왔을 때 윤 감독님과의 의리도 있고, ‘태왕사신기’ 때는 한여름에 가죽옷 입고 불 앞에서 담금질도 해봤는데 이걸 못할까 싶어서 하기로 했죠. 그래서 용감하게 시작했는데 안 했으면 억울할 뻔했어요.” 사전제작으로 재작년 8월 8일에 첫 촬영을 하고 작년 8월 8일에 첫 방송을 했다. 편성 문제로 중간에 몇 개월 촬영을 중단하기도 했고 조기종영의 아픔도 겪었지만 그간의 우여곡절만큼 정도 듬뿍 든 작품이다. “작품을 하면서 짧게는 2박 3일, 길게는 일주일 정도 제주도와 서울을 오갔어요. 아예 제주도에 살림을 차리는 사람도 있었는데 저는 중학생 딸이 있어서 틈만 나면 올라와 아이를 챙겼죠. 바닷속 장면은 제주도와 완도, 6m 깊이의 수조를 번갈아 가며 찍은 거예요. 다른 해녀 역 배우들은 3개월 정도 잠수하는 법을 배웠어요. 전 다른 스케줄이 있어서 이틀 정도밖에 연습을 못하고 합류했는데 ‘설마 빠져 죽기야 하겠어’ 하는 심정이었죠(웃음).” 한여름 제주의 뜨거운 햇볕은 최대의 적이었다. 배우들과 스태프들 모두 온몸에 화상을 입은 건 기본, 특히 쪽진 머리의 가르마를 따라 물집이 생겨 머리 감는 것이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몸에는 선크림이라도 바르지만 귀 뒤쪽이랑 가르마는 어쩌질 못하니까 화상을 입었죠. 화상 때문에 생긴 물집이 터졌을 때는 어찌나 쓰라리던지…. 제 딸내미 ‘버진’ 역을 맡은 서우는 온몸에 2, 3도 화상을 입어 손도 못 댈 지경이었어요. 너무 힘드니까 엉엉 울고 와서 또다시 촬영하고, 감독님도 마음은 아프지만 그렇다고 안 찍을 순 없잖아요. 모두 그런 고생은 난생처음 해봤을 거예요.” 더위가 조금만 가셔도 살겠다 싶었는데 날이 쌀쌀해지니 물 속에 들어가는 게 더 고역이었다. 특히 마지막 장면은 물 온도가 10℃ 가까이 떨어졌을 때 찍었다. “물에 들어가는 순간 살이 찢어지고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이야기할 때는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그렇게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 끝날 때는 스태프와 배우들 모두 참 많이 울었단다. “드라마 촬영하면서 너무 힘드니까 ‘제주도에 유배 온 것 같다’는 후배들도 있었어요. 저도 처음엔 너무 힘들었죠. 해녀복 입는 것도 민망했어요. 근데 그렇게 제주에서 해녀로 살다 보니 정이 들어버렸어요. 전에도 제주도로 여행을 많이 갔지만 그때는 호텔에서 자고 차를 렌트해서 다녔거든요. 정말 ‘제주스러운’ 걸 느낄 겨를이 없었는데 원시의 제주를 경험하고 나니 ‘아, 해녀 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바다에 들어갔다 나와 다음 촬영을 기다리고 있으면 1분 만에 몸이 마른다. 해녀복 위로 느껴졌던 나른한 햇살의 감촉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지난여름의 추억이다. ‘여명의 눈동자’로 시작된 제주와의 인연 만화가 정혜나의 동명 만화를 드라마화한 ‘탐나는도다’가 독특한 이야기만큼이나 눈길을 끌었던 것이 있다. 바로 제주 방언을 해석한 자막이었다. 마치 의학드라마에서 의학용어를 설명하듯, 제주 방언으로 이루어진 대사들은 자막이 없으면 이해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제주도에 관한 이야기인 만큼 최대한 비슷하게 언어 구사를 하는 것이 작품의 리얼리티뿐만 아니라 그곳에 계시는 분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어요. 제주 토박이 선배가 하나 있는데 대본 나올 때마다 제가 무지하게 괴롭혔죠(웃음). 제주 말이 어려워요. 특히 억양이 굉장히 미묘해서 아무리 열심히 해도 토박이만큼은 절대로 안 되더라고요. 제 딴에는 열심히 했는데 강원도 사투리다, 이북 사투리다, 이런저런 말도 많이 들었어요.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고 그냥 서울말로 해달라던 의견도 있었고요.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지 하는 게 연기자의 몫이죠.” 1회, 딸 버진이를 혼내는 장면에서 “입 다물어, 조용히 해!”라는 대사가 있었다. 아무리 봐도 제주 말은 아니었고 현장에서 받은 대본이라 미리 물어볼 겨를도 없었다. 급한 마음에 지나가는 해녀 아주머니를 붙잡고 “아즈망, 이거 뭐라 함수까”라고 물으니 “속씀허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모르는 건 현장에서 배우면서 찍었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그렇게 몇 개월을 하다 보니 말에 속도도 붙고 슬슬 다른 배우들도 그녀에게 대사를 물어오기 시작했다. 지난여름 그녀가 경험한 제주 방언 체험담이다. “해녀 아주머니 두 분이 대화를 하시면 처음에는 정말 한 마디도 못 알아들었어요. 근데 슬슬 말이 들리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분들께 ‘이제 제주 사람 다 됐수다’라는 말까지 듣고 어쩌다 보니 돌팔이 사투리 선생님도 됐으니 제주도에서 어학연수 하나는 확실하게 한 셈이에요(웃음).” 사실 제주도는 그녀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곳이다.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의 스크립터로 활동했던 그녀는 드라마를 준비하던 1980년대 후반 송지나 작가와 제주도를 찾은 적이 있다. “자료 조사차 제주도에 갔는데 ‘섭지코지’라는 재밌는 이름의 장소가 있더라고요. 당시에는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정말 시간이 멈춰버린 곳이었어요. 저 멀리 말 두 마리가 풀을 뜯고 있고 그 밑에 파도가 넘실대는데 한눈에 반해버려 ‘여명의 눈동자’에 썼죠. 작품이 끝나고 결혼을 해서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갔는데 이미 장사꾼들이며 관광객들로 너무 많이 망가진 상태였어요. ‘여명의 눈동자 촬영지’라는 팻말이 꽂혀 있는 걸 보고, ‘우리 때문에 섭지코지가 이 지경이 됐구나’ 싶어 마음이 아팠죠. 지금도 제주도는 참 애틋해요.” 그래서인지 감성이 풍부하고 섬세한 스타일이 아닌데도 제주 바다를 보면 눈물이 왈칵 쏟아지곤 한다고. 예전 제주가 그저 경치 좋은 곳, 편안한 곳, 쉴 수 있는 곳이었다면 이제는 제2의 고향처럼 언제나 생각나고 가고 싶은 곳이 되었다. ‘제주가 세계적으로 더 유명한 관광지가 될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차라리 알려지지 않았으면 하는 복잡한 심정이다. 그만큼 제주도를 아끼는 애틋한 마음이 큰 그녀다. “‘태왕사신기’도 그렇고, ‘탐나는도다’도 그렇고 정말 고생하며 찍은 작품이에요. 찍는 순간은 힘들지만 연기자라는 직업이 아니면 하기 힘든 경험이잖아요. 제가 언제 말을 타고, 언제 전력질주를 하고, 언제 바다에 들어가 물질을 해보겠어요. 무척 신나고 항상 다음 역할이 기대돼요. 이런 맛 때문에 제가 평생 연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 같아요.” 동지이자 친구인 가족에 대하여 딸만 넷인 딸 부잣집 셋째로 태어난 그녀는 어려서부터 무용과 운동, 그림 등 여러 방면에 끼가 많은 아이였다. 여성스러웠던 자매들과는 달리 유난히 활동적이었던 어린 시절, 그녀의 꿈은 수영선수였다. 좋아하기도 했고 재능도 있었다. 운동을 좋아했던 아이가 선화예중에 진학한 건 단발머리가 싫어서였다. 귀밑 1cm로 똑같은 헤어스타일을 한 언니들이 너무 웃겼다고. 중학교 땐 무용을 했는데 북 치고 장구 치는 사물놀이를 더 좋아했다. 북 소리, 꽹과리 소리만 들으면 시쳇말로 ‘미쳤다’고 한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재주가 많으셨어요. 라디오 방송 대본도 쓰셨고 바이올린도 켜셨고, 그림도 잘 그리셨고, 노래도 잘 부르셨어요. 그 끼를 자매들이 물려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아버지를 가장 많이 빼닮은 게 저예요.” 넘치는 끼에 진로를 고민하다 우연히 알게 된 선배 손에 이끌려 찾아간 곳이 극단 연우무대였다. 1985년 봄 입단해 처음 만난 작품이 문성근, 양희은 등이 출연한 ‘한씨 연대기’. 극장 앞에서 표 팔고 포스터 붙이느라 정작 공연은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매일 귀로 듣다 보니 대본이 저절로 외워졌다. 어느 날 갑자기 극에서 하차한 배우를 대신할 오디션에 덜컥 합격해 연극판에 뛰어든 지 어느덧 20년이 넘었다. 연기는 그녀에게 평생을 바쳐도 모자랄 열정과 행복, 그리고 가족을 선물해주었다. 1991년 연극 ‘동승’에서 만난 연출가 박근원씨와 1994년 결혼한 그녀는 현재 중학교 1학년인 딸을 두었다. “아이를 갖고 한동안 일을 쉬었어요.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이 아이를 두고 일을 하랴 싶어 들어오는 일 다 거절하고 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갈 때까지 매일 옆에 끼고 살았어요. 그렇게 몇 년 지내다 보니 점점 바보가 되어가는 느낌이었어요. 그러던 중에 (송)지나 언니가 젊은 배우들과 연기하면서 감각을 잃지 말라며 준 배역이 드라마 ‘카이스트’의 ‘석학의 집’ 주인 김미순이에요. 매일 소극장에서 관객들 얼굴 마주하며 울고 웃던 사람이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려니 참 어색하더라고요. 얼마간의 적응기간을 거치고 그 다음 출연한 작품이 김종학 감독님의 ‘대망’이었어요.” 주인공 이요원의 몸종 ‘시월’ 역을 맡아 ‘실력 발휘’를 하자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배우냐’며 금세 소문이 났다. 자연스럽게 캐스팅 제의가 밀려들었다. 그 뒤 ‘드라마시티’를 비롯해 ‘상두야 학교가자’, ‘봄의 왈츠’, ‘열아홉 순정’, 영화 ‘궁녀’, 현재 출연 중인 아침드라마 ‘다 줄 거야’까지 다양한 작품에서 톡톡히 감초 역할을 하고 있다. 일단 배역을 맡으면 무섭도록 몰입하지만 한 가지 원칙이 있다. 바로 가족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연극을 정말 하고 싶은데 적어도 2, 3달은 연습을 해야 해요. 공연 끝나고 밤늦게 집에 오면 아이를 챙길 시간이 없어요. 드라마는 그보다는 효율적으로 시간을 조율할 수 있죠. 지방 촬영 가면 아이를 데려갈 수도 있고요. ‘탐나는도다’ 때도 방학 때 아이와 남편이 제주도로 와서 저 촬영하는 동안 김녕 바닷가에서 놀았어요. 우리 딸내미도 엄마 덕분에 여기저기 구경 많이 다녔죠. 가화만사성이라는 말이 정말 맞는 말이에요. 가정이 편안하지 않으면 사람이 까칠해져요.” 그녀는 가족을 ‘동지’라 부른다. 열두 살 딸과는 친구 같은 사이다. 행여나 딸이 공부에 지칠까 딸보다 더 노심초사 하는 엄마다. ‘세상에는 공부 말고도 할 것이 너무 많다’는 게 부부의 교육관이다. 이처럼 틀에 얽매이지 않은 그녀의 성격은 연기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그녀가 그리는 엄마가 전형적이지 않은 이유다. “TV에 나오는 엄마들의 모습은 딱 두 가지예요. 화려하고 못되거나, 지고지순하고 희생적인 엄마. 에이, 그런 엄마가 어디 있어요. 엄마도 사람이잖아요. 가끔은 화도 나고 욕심도 있고…. 그게 지극히 솔직한 제 모습이자 앞으로 배우로서 보여드리고 싶은 모습이에요.”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안진형(프리랜서) ■장소 협찬 / 커피프린스 홍대점(02-335-4510)
- 연인이 있어 더 행복한 이범수 “결혼은 희생과 배려”
- 2009. 12. 21 16:53 연예
- 최근 열애 중임을 당당히 밝힌 영화배우 이범수는 결혼을 “희생과 배려”라고 말했다. 그는 열애 소식이 전해지기 전 인터뷰에서 “결혼은 ○○○이다”라는 질문에 이 같이 답했다. “결혼은 희생과 배려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해야 가능하다”고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이범수와의 인터뷰. 열세 살 연하 지성미 물씬 풍기는 연인 깜짝 공개 열애 소식이 전해지기 전 진행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범수는 열애설에 대해 부인했다. 하지만 지난 11월 초 이범수는 자신의 영어 선생이자 영어 칼럼니스트, OBS 아나운서로 활동하고 있는 열세 살 연하의 이윤진씨와 교제 중임을 깜짝 발표해 화제를 모았다. 이범수는 영화 ‘홍길동의 후예’에서 낮에는 고등학교 음악교사로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보내지만 밤이 되면 홍길동의 후예답게 의적 활동을 펼치는 홍무 역을 연기한다. 이미 오래전부터 꾸준히 해온 운동 덕분에 체지방률이 한 자릿수인 이범수는 영화 개봉을 앞두고 최근 공개된 화보를 통해 명실상부한 몸짱 배우로 거듭났다. “운동을 시작한 지는 오래됐고, 1년 반 전부터 식이요법을 병행하고 있어요. 운동선수들이 체중 감량하는 것처럼 직업이 배우이기 때문에 사적인 욕심을 배제하고 프로의식을 가지고 몸 관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비(정지훈), 이병헌과 비교요? 평소 좋아하는 이들과 비교된다면 기분 좋은 일이죠(웃음).” 오랜 무명 시절을 거쳐 이제 어엿한 주연배우로 자리매김했지만 ‘상복 없는 배우’로 불렸다. 하지만 전작 ‘킹콩을 들다’로 모든 한을 풀었다. ‘킹콩을 들다’는 국내 흥행은 물론 해외 영화제에 초청됐고, 이 영화로 이범수는 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상을 받게 돼 감사하다면서도 자신에게 과분한 것 같다고 겸손해하기도 했다. 특히 영화가 화려함으로 포장되지 않고 따뜻하고 진솔한 이야기로 진정성이 전달됐다는 점을 더욱 자랑스러워했다. “연기는 단순히 직업이나 일이 아니라 내게는 취미이자, 스포츠, 놀이, 게임이라서 신이 나죠. 하지만 프로의식과 책임감이 강해 촬영장에서는 진지해요. 신조가 ‘일을 즐겁게 하자’인데 그래야 배우로서 제 역할을 할 때 희열을 느낄 수 있고 팀워크도 좋아지죠. 또 관객들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범수는 자신을 특정하게 규정짓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이범수다운 것’이란 현재에 안주하거나 정체되지 않고 늘 실험과 도전을 좋아하는 것이다. 진취적인 도전정신으로 망설이지 않고 실천하는 것이 이범수를 지금의 자리에 있게 한 자산이자 원동력이다. “드라마 출연이요? 매력적인 작품이라면 언제든지 할 생각이에요. 시간이 흐르고 활동 영역이 넓어질수록 인접 분야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져요. 음반을 발매하고 노래를 부를 수도, 전시를 할 수도 있으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바람이 있기도 해요. 특히 독립영화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건강한 후배들과 함께 하고픈데 아직은 함께하자고 하는 이들이 없네요.” ■글 / 박준범(스포츠칸 문화연예부 기자)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
- 노래인생 50년 하춘화 “아버지의 사랑과 희생이 저를 만들었습니다”
- 2009. 10. 05 13:49 연예
- 만 여섯 살 나이에 첫 음반을 내고 가수의 길로 접어든 지 벌써 48년. 하춘화의 노래 인생은 곧 50년, 반세기를 눈앞에 두고 있다. 그녀를 가수로 이끈 아버지가 없었다면, 그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하춘화’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그녀가 말하는 50년 노래 인생과 아버지 이야기. 존재만으로도 빛나는 선물, 아버지 하춘화(54)가 노래 인생 50년을 이야기한다. 무엇보다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그녀의 아버지다. 전남 영암 출신의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그는 ‘연예인은 모두 딴따라’로 폄하하던 시절, 남다른 혜안을 갖고 있었던 걸까. 그녀의 아버지는 자식의 숨은 재능을 발견하고 딸을 뒷바라지하며 가수로 살아갈 수 있도록 옆에서 이끌었다. 이미 아버지 하종오옹(89)은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반평생 가까운 날들을 딸, 하춘화를 위해 희생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격려를 아끼지 않은 사람도 아버지지만 아무도 하지 못했던 뼈아픈 충고 역시 언제나 아버지 몫이었어요. 대중 예술인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서 가수 생활과 공부를 철저히 병행시키셨죠. 밤이면 과외 선생님과 공부를 했고 낮이면 전국 각지를 누비며 순회공연을 다녔어요.” 하춘화는 이번에 아버지를 위해 특별한 선물을 마련했다. 가요 인생 48주년을 기념해 책을 발간한 것이다. 제목은 「아버지의 선물」이다. “남들은 자서전이라고 하지만 진짜 자서전은 80주년 공연쯤 돼야 낼 수 있는 거구요. 이번 책은 제 노래 인생 50주년을 정리하고 간접적으로는 1960, 70년대 가요사를 엿볼 수 있는 수필집 같은 것입니다. 가장 큰 목적은 저를 가수로 만들고 키워준 아버지에게 바치는 선물이고요.” 이 책은 욕심이나 욕망으로 아이를 키우려다 진정한 행복과 점점 거리가 멀어져가는 요즘 부모들에게 주고 싶은 삶의 지침서이기도 하다. “자식을 키우는 과정은 끊임없는 선택과 고민의 연속일 겁니다.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그 선택이 올바른지 의문이 들 거예요. 그런 분들에게 교육의 기본 메시지를 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녀가 가수를 시작했던 당시에는 대중 예술에 대한 폄하가 굉장히 심했다. 때로는 그녀의 아버지를 여섯 살 딸을 앞세워 재주놀음이나 시키는 몰상식한 사람으로 몰기도 했다. “그때 생각하면 어제 일처럼 생생해요. 처음 제 노래가 라디오 전파를 탄 때였죠. 그날 집안 식구들은 기뻐하며 모두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어요. 그러나 곧 ‘이렇게 어린아이까지 노래를 시키다니 참 한심한 세상입니다’라는 아나운서의 한마디가 온 가족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죠.” 당시 어린이 가수의 등장은 큰 화제와 더불어 사회적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보수적인 시대였던 만큼 그녀도 비난 여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저야 어려서 잘 몰랐지만 부모님은 알게 모르게 이런 비난과 야유를 숱하게 들었을 거예요. 중학교 때도 ‘어린 나이에 무슨 가요냐’는 소리에 늘 머리를 숙여야 했으니까요. 피아노, 바이올린, 미술을 잘하는 아이는 신동이지만 대중가요를 부르는 전 비난의 대상일 뿐이었죠.” 그녀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아버지에게 그동안의 힘든 세월을 어떻게 견뎠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새삼스레 물어보냐며 말을 아꼈지만 결국 짧게 말문을 열었다. “그땐 누가 뭐라 해도 안 들리고, 안 보이더라. 아무래도 그때 내가 뭔가 씌었었나 보다(웃음).” 그것은 섣부른 오만이 아니었다. 자식을 좋아하고 자식이 가진 재능을 키워줘야 한다는 아버지의 신념이자, 철학이었을 것이다. 기록의 여왕이 되다 50년 가까이 가수 활동을 한 하춘화에게는 ‘기록’이 많다. 그녀의 기록들을 보면 마치 살아 있는 한국 대중 예술의 역사를 보는 듯하다. 만 6세 최연소 음반 출시, 개인 공연 최다 횟수 등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됐고 최초의 평양 공연, 최연소 옥관 문화훈장 수상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첫 번째 기록을 세운 때는 세 살 때라고 말할 수 있어요. 라디오에 나오는 가요를 듣고 따라 하기 시작했고 전 3백여 곡의 레퍼토리를 가진 꼬마가 돼 있었죠.” 말도 제대로 못하고 엄마 무릎에서 떨어지기 싫어할 어린 나이에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랫소리가 좋아 한 번 듣고도 금세 따라 했었다. 아마 평생 노래로 살아가라는 운명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다들 아시다시피 세계적으로 최연소 가수 데뷔를 해 기네스북에 올랐죠. 당시 일본, 미국 등에서 기자들이 인터뷰를 하러 찾아올 정도로 화제가 됐어요. 그리고 지난 1991년 5월에는 1261일이라는 기록으로 ‘개인 공연 최다 횟수’를 달성했어요.” 하춘화는 곧 국내 최연소 음반사 전속 가수가 됐다. 첫 음반을 낸 후 가장 어린 가수라는 특징 외엔 히트곡도 인기도 없었던 그녀에게 미도파레코드(현 지구레코드)의 대표가 5년 전속 가수 계약을 제의했다. 아직 어리지만 앞으로 7년 안에 하춘화가 가요계를 제패할 것이라는 가능성을 보고 투자한 것이다. “당시 대졸 신입사원 월급이 3만원이었어요. 저는 1년에 3만원이라는 계약금을 받고 전속 가수가 됐죠.” 가수가 된 지 6년 만에 ‘물새 한 마리’라는 곡이 히트를 쳤다. 그녀를 사람들에게 알린 곡이기 때문에 지금도 가장 애착이 가고 무대에서 부르면 뭉클해지는 곡이다. 더불어 그녀의 기록은 점점 늘어났다. 1971년 8월 잡지기자협회로부터 받은 ‘핑크 리본상’을 시작으로 수백여 개의 상을 받았다. 1971~1977년 MBC 10대 가수상을 연속 수상했고 TBC 방송가요 대상 4회 연속 수상, TBC 7대 가수상 연속 7회 수상을 했다. “특히 TBC 방송가요 대상은 동일인이 4회 연속 수상할 수 없다는 규정을 깨고 수상해 더 특별히 기억이 남네요. 그렇지만 인기가 많으면 시기 질투가 많은 법, 안 좋은 기억도 많아요.” 1 1975년, 일본 도쿄에서 아버지 하종오옹과 함께. 2 아버지를 모시고 떠난 유럽 여행. 3 1991년 아버지 칠순 잔치에서 이주일·이상용씨가 사회를 보는 모습. 4 1960년, 부산 송도에서 즐거운 한때. 5 여섯 살에 데뷔한 꼬마 가수 하춘화. 6·7 가족사진. 8 1972년, TBC 방송가요 대상 시상식. 그녀가 활동했던 1970년대 최고 남자 가수라면 단연 남진과 나훈아였다. 두 사람의 광적인 인기는 함께 활동하던 하춘화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여자 가수로서는 제가 독보적이었고 두 사람의 인기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했던지라 여기서는 남진씨와 저기서는 나훈아씨와, 이렇게 번갈아 함께 수상한 적이 많았어요. 그러자 일부 열성 팬들의 항의가 이어졌죠.” ‘왜 네가 남진과 그 상을 받느냐?’ ‘왜 나훈아와 같이 받느냐’ 등의 항의에 시달렸던 것. 왜곡된 팬덤 문화는 요즘에 와서야 생겨난 것이 아니라 당시에도 존재했던 모양이다. 대중문화가 뜨겁게 성장하던 시절의 한가운데 그녀가 있었다. 어린 나이에 걸맞지 않게 성숙한 가요를 불러 힘들었던 적도 많았다. 가장 곤란했던 때는 민요풍 가요 ‘잘했군, 잘했어’를 불렀을 때다. “‘영감~, 왜 불러. 뒤뜰에 매어놓은…’ 하는 노래 있잖아요. 제가 열여섯 살 때쯤 녹음했던 노래예요. 상대 역할을 하던 남자 가수가 제 부모님 또래인 고봉산 선배님이었어요. 도저히 ‘영감~’ 하고 입이 안 떨어지더라고요.” 제작자는 이런 연기도 못하면 진정한 가수가 될 수 없다며 호되게 야단을 쳤다. 억지로 했지만 감정이 실리지 않았다고 프로듀서에게 또 혼이 났다. “무서워서 울다시피 하며 노래 녹음을 마쳤어요. 타이틀곡이 아니라 앨범 제일 밑에 편집된 곡이었는데 레코드 발매가 된 후에 무슨 일인지, 앨범 수록곡 중에 ‘잘했군, 잘했어’만 호응이 있는 거예요. 결국 맨 위로 재편집하고 레코드를 다시 냈죠. 그런데 그때 안 좋은 기억 때문인지 요즘도 무대에서 잘 안 불러요(웃음).” 전직 대통령들과의 크고 작은 인연 하춘화에게 1970년대는 최고의 황금기였다. 청와대에서 외빈들을 위한 만찬이 열리면 자연스럽게 한국 대표 가수로 노래를 부르는 일이 잦았다. 이후 대부분의 국가 행사에 초청을 받아왔기 때문에 그녀는 전직 대통령들과의 숨은 인연들이 많다. “육영수 여사께서는 노인들을 위한 잔치를 많이 여셨어요. 그럴 때면 아랫사람을 시키지 않고 직접 전화해서 ‘하양, 나 좀 도와줘’라고 말씀하셨죠. 그러면 만사 제쳐놓고 달려가 어르신들 앞에서 열창을 했어요. 너무나 인자했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해요.” 육영수 여사 별세 후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대신할 때도 여전히 자선 공연을 도왔다. 그 때문에 박 전 대통령은 그녀를 곧잘 격려했다. “‘너도 아버지와 같이 다닌다며? 우리 근혜랑 같구나. 요즘 아버지 잘 계시냐?’라며 안부를 물으셨죠. 어쩌다 피곤이 겹쳐 입술이 부르튼 채로 공연을 하러 가면 어깨를 토닥이며 ‘왜 입술이 이 모양이 됐지? 요즘 고단했구나?’라며 딸처럼 살갑게 대해주셨지요.”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이어 집권한 전두환 전 대통령과의 인연도 깊다. 재임 시절 남북 분단 40주년을 기념하는 ‘남북 예술인 교환 공연’이 평양에서 개최됐다. 분단 후 처음으로 열리는 평양 공연에 남자 가수 대표로는 나훈아가, 여자 가수 대표로는 그녀가 지목된 것이다. 이는 ‘하춘화는 꼭 가야 한다’라고 못 박은 대통령의 말 한 마디가 작용한 결과였다. 난생 처음 평양 땅을 밟고 북한 동포들이 지켜보는 무대에 선 것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이후 전 대통령을 만날 때마다 평양 공연은 대화에서 빠지지 않는 단골 소재가 됐어요. 사실 저의 오랜 팬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재임 시절부터 ‘무죄’와 ‘영암 아리랑’을 가장 좋아하는 노래로 꼽으신, 제 공연의 단골손님이시죠. 때로는 30~50명 참모들까지 동원해서 공연장을 찾으셨어요.” 그런가 하면 ‘베사메무초’를 가장 좋아했던 노태우 전 대통령과는 본인의 제안으로 청와대 공연 때 듀엣을 하기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통령 신분이 아니었던 때 그녀의 공연장을 찾아 ‘목포의 눈물’을 신청했었다. “비록 제 노래는 아니었지만 고향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담아 애절하게 불렀어요. 그날 공연 덕분인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수차례에 걸쳐 청와대 공연에 불러주셨어요. 제 40주년, 50주년 공연에도 이희호 여사와 함께 오셔서 보고 가셨어요.” 이명박 대통령과의 인연도 있다. 이 대통령이 서울 시장으로 재임하던 시절 ‘환경미화원 돕기’를 주제로 45주년 공연을 열 때의 일이다. 공연을 앞두고 직접 서울의 모든 구청을 돌며 도움을 구했던 하춘화의 모습은 당시 이 시장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단다. “비서진을 통해 들은 바에 의하면 간부회의 때마다 당시 이 시장은 ‘하춘화 마인드’를 예로 들며 공직자의 바람직한 자세를 강조하셨다고 해요. 그래서였는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열린 ‘이명박 출판기념회’에 초대되기도 했어요. 이명박 정부 초창기에 ‘하춘화가 국회의원이 된다더라’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답니다.” 각 시대를 대표하는 대통령들과 크고 작은 인연을 맺어온 하춘화. 그녀가 느낀 점은 한 나라의 지도자라 하더라도 결국 보통 감성을 지닌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비록 겉으로는 냉철하고 강직해 보여도 노래를 좋아하고 노래를 통해 희로애락을 느끼고 있었다. 업적과 시대적 평가를 떠나 그녀가 전직 대통령들과 따스한 정서적 교감을 느낀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대통령의 제1 의무가 ‘국민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대중 예술인도 대통령 못지않은 역할을 해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대중에게 때로는 기쁨을 주고, 때로는 슬픔을 위로했던 가수 하춘화는 꿈이 하나 있다. 대중가요의 발자취와 가치를 엿볼 수 있는 기념관을 설립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자식 사랑에서 출발한 그 꿈은 50년 세월을 함께해왔고 점점 커지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될 꿈이 있어 그녀의 인생은 행복하다. ■글 / 이유진 기자 ■사진 / 이성훈 ■자료 제공 / 「아버지의 선물」(중앙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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