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총 2,113 건 검색)
- 박지원, 여야 예산 강경대치에 “DJ는 이럴 때···”
- 2024. 12. 03 07:59정치
- ...DJ는 당시 여야 대표에 전화·청와대서 설명 윤 대통령은 트럼프를 위해 골프 연습하나” 박지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6월14일 법사위 전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박지원...
- ‘자본주의 이행’ 고민한 ‘DJ의 친구’ 나종일 교수 별세
- 2024. 11. 22 11:04문화
- ... 근대사 분야 개척자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 국내 소개 정년퇴임식에 DJ 참석하기도 나종일 교수. 연합뉴스 ‘중세에서 근대 자본주의로의 이행’ 문제를 연구하는 서양 근대사 분야 개척자 나종일...
- 마포구, 서울시에 ‘DJ 사저’ 국가유산 등록 신청서 제출
- 2024. 11. 14 13:52지역
- 서울 마포구 동교동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사저. 연합뉴스 서울 마포구는 14일 고 김대중 대통령의 동교동 사저를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등록해달라는 신청서를 서울시 문화유산보존과에 지난 12일 제출했다고...
- 마포구동교동서울시신청서국가등록문화유산
- [서울25]마포구, 권노갑·문희상 등 ‘동교동계’ 만나 DJ 사저 보존 논의
- 2024. 11. 12 11:35지역
- 박강수 서울 마포구청장(왼쪽에서 두번째)이 지난 11일 마포구청에서 권노갑 김대중재단 이사장(세번째)과 문희상 부이사장(오른쪽)과 만나 기념촬영하고 있다. 마포구 제공 박강수 서울 마포구청장이...
- 서울25
스포츠경향(총 1,323 건 검색)
- 봉태규 “칠순잔치하면서 그만둘 것”···SBS ‘연예대상’ 라디오 DJ상 수상
- 2025. 01. 29 22:51 연예
- SBS ‘연예대상’ 방송화면 캡처 배우 봉태규가 ‘SBS 연예대상’에서 라디오 DJ상을 수상했다. 봉태규는 29일 방송된 ‘SBS 연예대상’에서 라디오 DJ상을 수상했다. 이날 수상자로 호명돼 무대에 오른 봉태규는 “보석 같은 일상을 저에게 공유해 준다는 게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쉽지 않은 일을 해주는 청취자 분들께 감사의 뜻을 전한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가족과 제작진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 봉태규는 “열심히 해서 칠순잔치하면서 그만두도록 하겠다”라고 덧붙여 웃음과 감동을 모두 선사했다. 봉태규는 작년 3월 18일부터 매일 오전 9시 SBS 파워FM ‘아름다운 이 아침, 봉태규입니다’(아침봉)로 청취자를 만나고 있다. 청취 대상이 누구든 부담 없이 들을 수 있는 라디오라는 소개처럼, 전 세대 청취자에게 사랑받으면서 전국의 아침을 깨우고 있다. 봉태규는 앞서 SBS에서는 지난 2008년 연기대상에서는 프로듀서상을, 2018년에는 캐릭터 연기상을, 2020년에는 중장편 드라마 부문 남자 우수연기상을 수상한 바 있다. 이번에 라디오 DJ상까지 수상하면서 연예대상에서까지 트로피를 추가하며 SBS에서만 네 번째 트로피를 품에 안게 됐다.
- ‘완벽한 하루’ 이상순 “♥이효리, 라디오 DJ 발탁 너무 좋아해”
- 2025. 01. 13 14:50 연예
- 이상순. MBC 제공 싱어송라이터 이상순이 라디오 DJ 발탁 후 아내의 반응을 전했다. 13일 오후 서울시 마포구 MBC M라운지에서 MBC 신규 라디오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신규 라디오 진행자 윤상, 이상순, 이현을 비롯해 각 프로그램의 연출을 맡은 송명석 PD, 황종현PD, 최지민PD가 참석했다. 이상순은 과거 밴드 롤러코스터 멤버들과 진행한 라디오, EBS ‘세계음악기행’ 이후 ‘완벽한 하루 이상순입니다’에서 단독 DJ를 맡았다. 이상순은 홀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고민하는 시간도 많았고, 많은 분들이 들어주셨으면 하는 바람에 열심히 해야겠다는 책임감이 있다”고 말했다. 또 이상순은 라디오 DJ 발탁 후 아내 이효리의 반응에 대해 “배철수 DJ가 휴가 갔을 때 스페셜로 서울에 올 때가 있었는데 그걸 듣고 아내가 ‘너무 좋으니까 기회가 되면 당신은 꼭 DJ가 되면 좋겠다’고 했다”며 “이런 기회가 생겨서 너무 좋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상순은 “제가 DJ하는 동안 (아내가) 집에서 밥을 해야 한다는 것에 굉장한 부담감을 가지고 있다”고 덧붙여 웃음을 자아냈다. ‘완벽한 하루 이상순입니다’는 매일 오후 4시부터 6시, MBC FM4U에서 방송된다.
- [종합]‘육각형 연예인’ 주현영, 2025년에도 열일···라디오 DJ 수상+영화+유튜브 활약
- 2025. 01. 09 13:57 연예
- 주현영. AIMC 제공 배우 주현영이 2025년 시작과 함께 라디오 DJ로 의미있는 상을 받았다. 수상 소식과 함께 영화와 유튜브 콘텐츠 등 다양한 방면에서 변함없는 활약을 예고했다. SBS 파워FM ‘12시엔 주현영’의 DJ 주현영이 7일 국내 최대 규모 브랜드 어워즈 ‘2025 대한민국 퍼스트브랜드 대상’에서 라디오 DJ 여자 부문 수상자로 선정됐다. 주현영은 지난해 11월11일부터 24일까지 대국민 소비자 조사 결과에서 무엇이든 다 잘하는 ‘만능 육각형’다운 존재감을 다시금 뽐냈다. 프로그램을 탁월하게 끌어가는 안정적인 진행 실력을 또 한 번 인정받은 것은 물론, 대중을 사로잡은 대세 DJ로 우뚝 섰음을 보여줬다. 주현영은 수상 후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라디오 DJ가 되고 많은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누게 됐습니다. 하루하루 말 한마디의 큰 힘을 느끼며 성장해 나가는 과정에 있는데요”라며 말문을 열었다. 이어 “가능성을 봐주시고 소중한 가치를 부여해 주신 퍼스트브랜드 대상과 이러한 환경을 마련해주시고 지지해 주시는 ‘12시엔 주현영’ 제작진께도 정말 감사해요”라며 감사한 마음을 표했다. 그는 “고단한 일상에서 사랑이 피어나는 순간들과 자랑스럽고 뿌듯한 마음, 포근하게 위로받는 마음을 더 만끽하실 수 있도록 또 오래오래 기억하며 추억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누군가의 딸로서, 친구로서, 언니로서, 동생으로서 그리고 동료로서 꼭 함께 할게요”라는 진심이 담긴 목표도 말해 눈길을 모았다. 주현영. AIMC 제공 주현영은 2024년 8월 첫 방송을 시작으로 매일 오후를 책임지고 있다. 주현영만의 밝고 건강한 에너지는 듣는 이들에게 활기를 북돋아주고, 통통 튀는 입담과 비타민 같은 매력은 웃음을 안겨주는 등 청취자들에게 유쾌한 2시간을 선물하고 있다. 주현영은 2024년 4라운드 라디오 청취율 조사에서 동시간대 지상파 라디오 청취율 1위를 기록하며 청취자들의 사랑을 인정받았다. 주현영의 거침없는 질주는 을사년에도 계속된다. 주현영은 영화 주연작 ‘괴기열차’, ‘단골식당’, ‘악마가 이사왔다’로 스크린 출격을 앞두고 있는가 하면, 최근에는 개인 유튜브 채널 ‘주혀녕이’를 개설해 작품 속에서 볼 수 없던 색다른 매력을 선보이고 있다. 한편, 매일 낮 12시부터 2시까지 방송되는 SBS 파워FM ‘12시엔 주현영’은 107.7MHz에서 청취할 수 있고, SBS 고릴라 앱을 통해 보는 라디오로도 만날 수 있다.
- 주현영 ‘2025 대한민국 퍼스트브랜드 대상’ 라디오 DJ 부문 수상
- 2025. 01. 09 13:53 연예
- AIMC 배우 주현영의 종횡무진 활약은 해가 바뀌어도 현재 진행형이다. SBS 파워FM ‘12시엔 주현영’의 사랑스러운 주디(주현영의 DJ 애칭), 주현영이 국내 최대 규모 브랜드 어워즈 ‘2025 대한민국 퍼스트브랜드 대상’에서 라디오 DJ 여자 부문 수상자로 선정돼 무엇이든 다 잘하는 ‘만능 육각형’다운 존재감을 다시금 뽐냈다. 주현영의 이번 수상은 지난해 11월 11일부터 24일까지 진행된 대국민 소비자 조사에 따른 결과다. 이를 통해 프로그램을 탁월하게 끌어가는 안정적인 진행 실력을 또 한 번 인정받은 것은 물론, 대중을 사로잡은 대세 DJ로 우뚝 섰음을 보여줬다. 주현영은 수상 후 개인 SNS 계정에 “라디오 DJ가 되고 많은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누게 됐습니다. 하루하루 말 한마디의 큰 힘을 느끼며 성장해 나가는 과정에 있는데요”라는 말로 서두를 시작, “가능성을 봐주시고 소중한 가치를 부여해 주신 퍼스트브랜드 대상과 이러한 환경을 마련해주시고 지지해 주시는 ‘12시엔 주현영’ 제작진께도 정말 감사해요”라며 감사한 마음을 표했다. 이어 그는 “고단한 일상에서 사랑이 피어나는 순간들과 자랑스럽고 뿌듯한 마음, 포근하게 위로받는 마음을 더 만끽하실 수 있도록 또 오래오래 기억하며 추억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누군가의 딸로서, 친구로서, 언니로서, 동생으로서 그리고 동료로서 꼭 함께 할게요”라는 진심이 담긴 목표도 말해 눈길을 모았다. 주현영. AIMC ‘12시엔 주현영’과 DJ 주현영은 2024년 8월 첫 방송을 시작으로 매일 오후를 책임지고 있다. 특히 라디오 너머로 전해지는 주현영만의 밝고 건강한 에너지는 듣는 이들에게 활기를 북돋아주고, 통통 튀는 입담과 비타민 같은 매력은 웃음을 안겨주는 등 청취자들에게 유쾌한 2시간을 선물하고 있는 것. 이러한 주현영의 활약에 힘입어 ‘12시엔 주현영’은 2024년 4라운드 라디오 청취율 조사에서 동시간대 지상파 라디오 청취율 1위를 기록, 의미 깊은 결실을 맺기도. 이처럼 작품 활동에 이어 라디오에서도 다재다능한 면모를 비치고 있는 주현영. 그의 거침없는 질주는 을사년에도 계속된다. 주현영은 영화 주연작 ‘괴기열차’, ‘단골식당’, ‘악마가 이사왔다’로 스크린 출격을 앞두고 있는가 하면, 최근에는 개인 유튜브 채널 ‘주혀녕이’를 개설해 작품 속에서 볼 수 없던 색다른 매력을 선보이고 있다. 이에 주현영이 올해에는 어떤 활동으로 우리에게 웃음과 감동을 안겨줄지 귀추가 주목된다. 한편, 매일 낮 12시부터 2시까지 방송되는 SBS 파워FM ‘12시엔 주현영’은 107.7MHz에서 청취할 수 있고, SBS 고릴라 앱을 통해 보는 라디오로도 만날 수 있다.
주간경향(총 31 건 검색)
- [언더그라운드 넷]DJ·YS, 경부고속도로 반대 시위 사진? 조작!(2021. 11. 26 20:57)
- 2021. 11. 26 20:57 사회
- “귀한 사진 한장 구경하세요.” 지난해 6월 한 지역 인터넷신문이 게시한 사진이다. 제목은 이렇다. ‘경부고속도로 개설을 반대하던 김영삼과 김대중의 시위 사진’, 글엔 이렇게 부연이 돼 있다. “정치한다는 자들은 이처럼 귀한 사진을 교과서에 싣자는 소리 한마디 없는가. 유치원부터 노인대학 교재에까지 싣고 가가호호 벽에 붙여 길이길이 후손에게 물려줘야 하지 않겠는가.” 사진은 인터넷에서 꽤 유명한 사진이다. / 뉴시스 기자는 지난 2010년 경부고속도로를 둘러싼 논란을 다룬 연중기획 시리즈 글에서 이 사진의 진위를 검증했고, 다시 2015년 한 주간지의 연재기사가 같은 주장을 내놓자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 비서 역할을 했던 권노갑 김대중기념사업회 이사장의 증언 등을 통해 김대중 전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건설 반대 시위를 한 적이 없음을 이 코너에서 밝혔다. 그런데 팩트체크가 완전할 수 없었던 것은 조작 사진의 원본을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 2018년 오마이뉴스는 기자의 기사를 인용하는 한편, 사진 속 등장하는 굴착기의 위험경고 표지나 유압배열을 보면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의 굴착기가 아니라 2000년 전후에 두산에서 출시된 140W 모델에 가깝다”고 주장했다. 생각보다 그리 오래된 사진이 아닐 수도 있다는 추론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실체가 밝혀졌다. 국제뉴스통신사 AFP가 운영하는 팩트체크의 아시아태평양판에서 지난 4월 27일 이 사진의 실체를 다뤘다. AFP 팩트체크에 따르면 원본은 뉴시스가 2007년 10월 24일 보도한 사진이라는 것이다. 사실일까. 실제 AFP가 제시한 링크를 통해 원본사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매립 절대 안 돼!’라는 제목의 뉴시스 2007년 10월 24일자 보도다. 보도에 따르면 이 사진은 충북 진천·음성군의 폐기물종합처리장 추가시설 조성에 반대해 맹동면 통동리 등 인근 주민들이 굴착기를 동원해 매립장 설치 반대 시위 사흘째를 담은 것이다. “저희가 통신 기사를 송고할 때 1메가 이하로 화소수를 낮춰 보냅니다. 원본파일이었다면 피켓 내용만 봐도 사실이 아닌 것을 알 텐데….” 11월 24일 기자와 통화한 당시 해당기사를 쓴 연종영 기자의 말이다. 그는 현재 뉴시스 충북본부 본부장을 맡고 있다. 자신이 찍은 사진이 10년 넘도록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반대한 DJ·YS의 연좌시위’ 가짜뉴스에 동원됐다는 것은 몰랐다고 덧붙였다. 이튿날 음성군청 측에 확인한 연 본부장이 DJ·YS로 지목된 두 사람의 인적사항에 대한 추가정보를 알려왔다. “상의 흰색을 입은 분은 김찬O씨이고, 손을 치켜든 분은 김선O씨라고 합니다. 두분 모두 지금은 작고하셨고요.” 기자와 통화한 음성군청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두분 다 통동리 분들인데, 그 동네가 경주김씨 집성촌이거든요. 동네 사람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물어봤어요. 뭣 때문인지는 이야기 안 했습니다. 사실 누워계시는 분 중 한분이 제 동창 아버지인데….”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가짜뉴스라는 게 이렇게 나오는 거군요.” 사실 11년 전 첫 팩트체크를 했지만 조작된 사진의 생명력은 끈질겼다. 지금도 포털 검색엔진에 ‘김대중’, ‘경부고속도로’라는 검색어를 넣고 검색하면 흑백으로 변조하고 피켓 내용을 지워 ‘고속도로 반대’를 조잡하게 써놓은 위 조작 사진이 최근까지도 역사적 사실을 담은 사진처럼 유통되고 있다. 정리하자.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막기 위해 DJ·YS가 연좌시위를 하고 있는 장면을 찍었다는 사진은 조작된 것이다. 원본은 2007년 10월 24일 충북 음성군 맹동면 통동리 주민들이 폐기물종합처리장 추가시설 조성에 반대해 벌인 시위 3일차에 찍은 사진으로 최종확인됐다. 11년 전 시작한 사진 진위에 대한 팩트체크는 이걸로 진짜 마무리.
- 언더그라운드 넷
- “DJ의 다수파 전략 리더십 배워야”(2021. 06. 04 15:43)
- 2021. 06. 04 15:43 정치
- ㆍ 펴낸 ㆍ연세대 김대중도서관 장신기 사료연구담당관 한 1년쯤 됐다. 장신기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사료연구담당관으로부터 ‘DJ의 활동과 현대사에 미친 영향’에 대한 책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게. 6월 1일 동교동 김대중도서관에서 만난 장신기 박사는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 책 제목의 ‘성공한 대통령’을 강조했다. 아래에 붙어 있는 부제는 ‘김대중 재평가’다. “대통령을 수식하는 말로 ‘실패한’, ‘무능’ 같은 단어가 일종의 유행어처럼 쓰이고 있어요. 난 그게 정치혐오 역사비평의 귀결이라고 봅니다. 다른 대통령에 대한 평가에 도매금처럼 묻어가는 면이 있는데 집권기 DJ의 성과를 하나하나 보면 모두 대단한 업적이거든요. 남북관계뿐 아니라 베트남, 일본과 관계개선도 있죠. 동아시아 질서에서 영향력 확대에서 ‘한류’라는 문화적 측면이 어마어마한데 그것도 DJ 때였거든요. 한국이 제국주의 국가는 아니지만, 베트남 파병과 정반대의 측면에 동티모르 평화유지군 파병도 김대중 집권기에 결정됩니다. 50년 넘게 금기사항이었던 제주 4·3 문제해결의 물꼬를 튼 것도 그렇고…. 하나하나 업적을 두고 전문가들에게 물어보면 100명 중 99명은 성공했다는 평가가 나올 겁니다. 우리나라 정치가 중에 그런 사람이 또 어디 있겠어요.” 6월 1일 서울 동교동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만난 를 펴낸 장신기 박사 / 이준헌 기자 -한국 정치·사회적 발전에 대한 김대중의 기여, 그 가치가 아직 다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보는 듯합니다. 앞으로 평가가 극적으로 달라지는 계기가 있을까요. “알 수 없죠. 남북관계, 한반도를 둘러싼 지형에 큰 변화가 생긴다면, 대통령마다 기여한 바는 있겠지만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으로 6·15선언을 이끌어낸 김대중의 기여가 가장 큰 것은 사실이니까요. 남북관계가 잘 풀려 평화공존으로 나아가게 되고 정책대로 발전하면 그 부분은 평가될 것이고요. 나머지 여러 업적은 그 영역 내에서 꾸준히 평가되고 재발견되면서 다시 평가받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30권짜리 <김대중 전집>에서 많이 인용하고 있는데, 전집에 실리지 않은 메모·초고 같은 것 중에 앞으로도 발굴해야 하는 것이 있나요.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에서 자료를 모았는데, 전집에 수록되는 콘텐츠를 기준으로 쓰고 말한 것 중에서 완결된 텍스트에 한정했습니다. 일단 공개된 1974~1975년 일기는 다 포함했습니다. 대통령 퇴임한 후 일기 텍스트는 수록 안 했어요. 그러고 보니 아예 없지는 않지만 빠진 자료도 있네요.” -이번에 낸 책에서 최초로 밝힌 사실관계는 무엇입니까. “사실적 측면에서 보면 <대중경제론>이 어떻게 나오게 됐나 그 과정을 밝혀낸 일입니다. 보수 쪽에서 돌아간 김일영 교수나 진보 쪽 모두 DJ의 대중경제론은 민족경제론의 저자 박현채의 작품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김일영 교수는 1980~1990년대 DJ는 개방주의 입장을 받아들이면서 박정희 노선으로 투항했다고 봅니다. 진보적 시각으로는 배신한 거죠. 그래서 진보 입장에서는 결국 DJ가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외세에 종속시켜 불평등을 강화시켰다는 논지를 펴죠. 제가 보기에는 둘다 잘못됐습니다. 김대중 연구가 체계화되기 전에 만들어진 착시효과라고 봅니다. 이분들이 동일하게 참조한 텍스트가 1971년 대중경제연구소가 펴낸 <대중경제 100문 100답>이라는 책인데, 이 책은 DJ뿐 아니라 박현채씨를 위시해 김경만 비서 등이 참여한 집단저작물입니다. 저간의 사정은 나중에 돌아가신 임동규씨의 증언을 통해 밝혀집니다. 박현채씨는 자립적 발전가능성을 모색하는 <민족경제론>의 저자로 유명한데, 사실 <대중경제론>은 박현채의 주장과 수출주도형 경제를 주장했던 박정희의 중간쯤 주장이고, 대외개방을 필요악으로 봅니다. 실제 1960년대 DJ가 쓴 글이나 국회 연설 등을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대중경제론과 완전히 다릅니다. 외국자본과 시장개방에 적극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어요.” / 시대의 창 -책 후반부에 바이든과 부시의 일화가 언급됩니다. 바이든 미 대통령이 DJ를 실제로 존경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한국의 문재인 정부, 그리고 바이든과 짝을 맞춰야 하는 차기 정부가 이 관계를 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을까요. “워싱턴 정가에서 민주당 주요 리더들의 김대중에 대한 존경심은 아주 큽니다. 차기에 어떤 정권이 들어서든 이것을 잘 활용했으면 합니다. 미국에서는 DJ를 ‘아시아의 만델라’라고 하는데, 미국으로선 인종주의가 아픈 고리입니다. 만델라와 같은 흑인 인권지도자에 대한 존경표시를 통해 자신의 과거를 용서하고 탈색하고 싶어하는 거예요. 실제로 클린턴이나 고어 전 부통령, 기후위기 대응에 앞장서는 존 케리 상원의원 같은 중요인사들이 1980년대부터 DJ와 한국 민주화운동 관련으로 이름을 올려놓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국내 정치적 관점에서는 이런저런 평가가 있겠지만 해외에서는 그런 평가에 의해 좌우될 겁니다. 일본에서의 활동도 마찬가지고요.” -한일관계에서 김대중은 반일민족주의를 이용하지 않았고, 민주주의와 평화 입장을 일관되게 보였다는 평가를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일본 아베 정권 당시 수출규제와 현 정부에서 일어난 일본상품 불매운동이 떠오를 수밖에 없는데요. 지난해 ‘다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당당한 대한민국’이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워딩도 떠오릅니다. DJ라면 어떻게 대응했을까요. “가정해 말하기는 어렵지만, 확실한 것은 일본과의 관계를 악화시키지는 않았을 거예요. 일본은 한반도 관계를 푸는 데 있어 일이 되게는 아니더라도 안 풀리게 훼방을 놓을 수는 있거든요. 미국의 시각에서 보면 동북아시아 제1동맹은 미일동맹입니다. 유럽에서는 영국, 동북아시아에서는 일본이지요. 북미회담과 관련해 공개된 회고록 등을 보면 일본이 어떻게 깽판을 놓는가가 생생하게 증언이 돼 있죠. 일본을 주요플레이어로 인식하는 것은 외교적으로 필요할 텐데 과거사와 연동되는 바람에 이 관계가 방치돼버렸어요. 그게 제일 아쉬운 부분입니다.” -후대에 결과적으로 평가한다면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며 진영을 넘나든 YS(김영삼)의 길이 있을 것이고, 회고록에서 밝힌 것처럼 ‘평생을 한 진영에서 정치한 일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DJ의 길이 있을 것 같습니다. “현실정치인이니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죠. YS는 그 결과를 달성하기 위해서 수단과 과정의 합리성을 훼손했다면 DJ 역시 결과를 중시했지만 과정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어요. DJP연합을 통해 정권을 창출했는데, 본인이 중심이 돼 한 것이거든요. 자기세력을 끌고 투항한 것이 아니라 끌어들인 것이니까. 둘다 결과를 중시한 것은 당연한데,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민주당 주류와는 안 맞는 것 같아요.” -그렇게 보는 까닭은요. “자기 정치의 한계에 갇혀 있다는 생각입니다. 정치라는 것이 한편으로는 인내가 필요한 측면도 있고, 속에 없는 말을 해야 할 때도 있어요. 지금의 민주당뿐 아니라 정치권의 전반적인 태도를 보면, 코어 지지층의 정서를 그대로 대변하는, 대리하는, 이런 것을 참여민주주의로 오해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듭니다. DJ의 정치활동을 보면 1960년대 중반부터 한일협정에 원칙적으로 찬성했고, 광주민주화항쟁 해결에서도 사법적인 처벌에서 인적 처벌은 처음부터 반대했습니다. 당시 상황만 놓고 보면 전혀 먹힐 이야기가 아니었어요. 물론 5·18의 경우 DJ 본인이 피해당사자이고 피해자들과 어떻게 보면 통할 수 있는 것이 있어 그렇게 한 것인데, 그게 이해받기 쉽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당시에 강경노선을 취했다면 김대중 본인도 생명을 유지하기 힘들었을 것이고, 민주화운동도 초토화됐을 것입니다. 중산층의 협조도 이끌어낼 수 없었을 것이고요. 또한 김영삼과 재야사회운동도 분리됐을 것이고, 미국은 전두환이 생각하던 무늬만 내각제·간선제를 지지했을 겁니다. DJ는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 것인가를 보면서 거기에 따라 전략을 고민하고, 그것을 구현해나갈 방법을 냉철하게 고민한 것이죠. 지금에 와서 보면 그런 DJ의 노선이 항상 대중정서에 부합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대중과 괴리돼선 안 되고 앞서나간다는 전제가 필요하겠죠. 지금의 주요정치인, 대권주자 리더들을 보면 그 측면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비전 제시가 아니라 대중들의 정서를 본인이 가지고 있는 지위로 반복해 전달한다는 느낌이랄까요. 원인은 정치를 쉽게 하려 한다는 것도 있을 것인데, 결국 본인의 철학에 기반을 둔 운신이 명확하지 않은 거죠. 결과적으로 참여민주주의를 곡해한다는 생각입니다. 의사결정과정이나 행정집행과정에서 국민의 의사가 반영될 통로를 열어두는 것이 참여민주주의의 구현인데, 그러한 민의에 기반을 둔 정치적 에너지를 가지고 집행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리더의 독립적인 역할이거든요. 여야를 막론하고 내년 대선에 나서려는 주자들은 이런 DJ의 리더십을 배워야 합니다.” -극단주의를 배격하고 최대연합을 취하는 정치는 지금도 유효하다고 보십니까. 집권 전인 1990년대 초반부터 민주 대 반민주의 대립구도는 끝났다며 ‘3김 청산’이라는 구호 아래 DJ를 배격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았습니다. “1997년 대선 직후 DJ는 ‘인기 있는 대통령보다 능력 있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을 합니다. 개인적으로 그 대목에서 전율이 왔습니다. 집권 후 김대중을 열성적으로 지지한 사람들은 많이 흩어졌어요. 본인의 정치력을 그런 쪽으로 전환시키는 것 같습니다. 이분이 소수 쪽이었기 때문에 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상대를 적대화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세력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다수파 전략이죠. 현 정부는 다수파에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수세에 몰려 있죠. 애당초 출발점이 위에 있든 아래에 있든 모든 정치는 다수파 전략을 취해야 합니다. 부정적인 혐오정치는 씨앗 자체를 만들지 않는 게 필요합니다. 거기에서 김대중은 철저하게 성공했어요. 지금의 정치권이 배워야 할 자세이고, 전략이라고 생각합니다.”
- [특집-여성, 광장에서 목소리 내다]“DJ DOC 비판은 검열이 아니다”(2016. 12. 06 18:11)
- 2016. 12. 06 18:11 사회
- ㆍ표현의 자유 침해 논란… “시민사회 새로운 의사소통 윤리 만드는 작업” 2002년 미군 장갑차에 두 여중생이 압사당한 사건이 발단이 된 ‘주한미군 지위에 관한 한·미 행정협정(SOFA) 개정 요구 시위’에서는 때때로 “미국을 강간하자”는 구호가 터져나왔다. 집회에 사용된 윤민혁씨의 노래 ‘Fucking USA’의 어원을 따지자면 뜻이 그러했다. ‘SOFA 개정하여 우리 처녀 지켜내자’는 낙서도 볼 수 있었다. 여성계에서는 진보적 사회단체들이 반미(反美)라는 대의를 내세워 성폭력을 도구화하고 여성들을 배제시킨다고 비판했다. 2016년 11월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집회를 준비하는 시민사회단체들은 DJ DOC를 공연 무대에 초청했다가 취소했다. 이들이 부를 예정이던 ‘수취인분명’에 여성혐오를 드러내는 표현이 담겨 있다는 지적을 받아들였다. 비판도 있다. DJ DOC의 표현의 자유가 침해당했다는 것이다. ‘미스 박’ 정도의 표현으로 문제를 못 느꼈다는 주장과 DJ DOC의 음악을 들을 권리를 배제하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나온다. DJ DOC 집회무대 공연 취소를 요구하는 것은 곧 검열일까. 더 나은 토론을 위해 사실관계와 쟁점을 짚어봤다. 1.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11월 25일 오후 3시 무렵 가수 DJ DOC의 신곡 ‘수취인분명’의 음원이 인터넷에 무료 공개됐다. “미스박 YOU/ 노답, 노다웃, 나잇값 못하는 어버이연합/ 아들뻘 우리들이 볼 땐 꼴값처럼 보인답니다. 노답/ 아 좀 꺼줘 촛불은 안 꺼져.” 부다레코드는 DJ DOC가 26일 열리는 4차 촛불집회 무대에 선다는 사실도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알렸다. ‘DJ DOC 시국비판 가수 대열에 합류’, ‘DJ DOC 시국비판곡, 사이다 가사’ 등의 기사가 쏟아졌다. 팬들에게도 비교적 잘 만든 곡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박 대통령의 미용시술 의혹은 11월 16일 언론 보도를 통해 불거졌는데, 가사에 담긴 것을 보면 일주일여 만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비판도 쏟아졌다. ‘미스 박’이라는 표현과 “역대급 삥땅, 멘붕, 세뇨리땅/ 하도 찔러대서 얼굴이 빵빵/ 빽차 뽑았다 널 데리러 가 빵빵” 등의 구절이 문제가 됐다. 여성주의자 행동그룹을 표방하는 ‘페미당당’ 등은 온라인 페이스북 페이지 등을 통해 ‘수취인분명’이 박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시민들의 주장을 담는 대표곡으로 적절치 않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박근혜 퇴진을 위한 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은 26일 DJ DOC가 무대 공연자 명단에서 빠졌음을 알렸다. 이하늘씨(45) 등 DJ DOC 그룹 멤버는 이날 집회에 개인 자격으로 참석했다. 박진 퇴진행동 공동상황실장(다산인권센터 활동가)은 “집회 열흘 전에 공연을 부탁했고, 집회에서 부를 곡은 하루 전날인 25일 오후에 확인했다. 논란이 격렬하게 있었고, 내부에서도 많은 회의를 했다. 논쟁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지만 이렇게 논란이 많은 상황에서 해당 가수를 무대에 세우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박근혜정권 퇴진을 위한 5차 촛불집회가 열린 11월 2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한 가족이 촛불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서성일 기자 2. DJ DOC의 표현의 자유는 침해됐는가 논쟁 과정에서 DJ DOC가 과거 여성 그룹 베이비복스를 상대로 한 성적 비하 사실이 다시 도마에 올랐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검열적 발상’이라고 지적했다. DJ DOC는 2000년 발표곡 ‘포조리’에서 경찰을 ‘짭새’라 부르는 등 강도 높은 비난 가사를 담았다 하여 해당 곡이 담긴 음반 전체가 영상물등급심의위원회로부터 청소년 판매 불가 판정을 받았다. 일종의 ‘검열’의 피해자다. 반면 논쟁은 철저히 시민사회 내에서 벌여졌다. 헌법재판소는 2001년 영등위의 활동을 규정한 영화진흥법 제21조 제4항 위헌제청 소송에서 ‘검열’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행정권이 주체가 되어 사상이나 의견 등이 발표되기 이전에 예방적 조치로서 그 내용을 심사·선별하여 발표를 사전에 억제하는, 즉 허가받지 아니한 것의 발표를 금지하는 제도.’ 행정권력이 개입해 예술·출판물의 내용을 ‘사전’에 심사해 세상에 나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검열이다. 헌재는 “사전검열은 법률로써도 불가능한 것으로서 절대적으로 금지된다”며 영화진흥법 제21조 4항을 위헌 판결했다. 헌법학자인 남경국 박사(전 쾰른대 법정책연구소 연구원·연세대 강사)는 “검열은 국가권력이 시민의 활동에 직접 개입하는 것을 뜻한다. 이번 논란은 시민권적 차원에서의 ‘표현의 자유’ 문제가 아니라, 시민사회 내 표현의 자유 간 충돌한 사례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권김현영 성공회대 외래교수는 “‘표현의 자유는 무제한’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떠한 표현이건 간에 국가권력이 개입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무제한’이라는 의미다. 이 사례는 (국가의 개입 없이 세상에 나온) 표현의 비판과 해석을 둘러싸고 공론장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말했다. 즉 페미니스트들의 요구는 검열이 아니다. 3. 공론장에서 표현의 내용을 두고 충돌한다면 DJ DOC의 래퍼 이하늘씨는 이명박 전 대통령 시절이던 2008년 한 공중파 방송 프로그램에서 ‘쥐를 잡자’는 문구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나와 논란이 됐다. 유사한 일이 1970년대 미국에서 있었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무렵 미국에서 폴 코언이라는 젊은이가 법원 복도에서 체포됐다. ‘“씨XX의 징병제(Fuck the Draft)’라는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소란을 피운 혐의였다. 다른 사람에게 성적인 불쾌감을 줬다는 이유로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1971년 미 연방대법원은 코언에게 무죄를 선고하며 다음과 같이 밝혔다. “표현은 생각뿐 아니라 감정도 전달한다. 어떤 감정은 반드시 특정한 표현을 해야 전달된다. 그러므로 어떤 표현이 불쾌하다고 해서 쓰지 말라는 것은 그 감정을 표현하지 말라는 사상통제이다.”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감정도 표현할 권리가 있다는 의미다. ‘수취인분명’에서 드러난 ‘미스 박’이나 ‘볼이 빵빵’ 등의 구절이 여성혐오에 해당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여성혐오에 해당하더라도 DJ DOC는 음원을 출시할 권리가 있다. 남 박사는 “DJ DOC가 (논란에도 불구하고) 박 대통령을 ‘미스 박’이라고 비판하고 싶어서 ‘미스 박’이라 비판하는 음원을 낼 권리와 마찬가지로, 페미니스들에게도 또한 비판할 권리가 있다. 또한 집회에서 듣고 싶지 않다면 ‘듣고 싶지 않다’고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공론장에서 표현의 자유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무대의 공연에 섭외됐다 취소된 것은 헌법상의 표현의 자유 문제가 아니라 공연의 주체인 퇴진행동과 DJ DOC 간의 계약 문제라는 것이 남 박사의 설명이다. DJ DOC는 1997년 음반사가 수록곡 ‘삐걱삐걱’의 사회비판적 가사를 파기하자 이 곡을 빼고 음반을 발매한 뒤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반대로 공연 취소 역시 주최 측의 권리다. 무대를 마련한 주최 측 역시 스스로가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위해 계약을 맺거나 파기할 수 있다. 계약을 파기하는 데서 오는 부담을 감당하면 된다. 박진 퇴진행동 상황실장은 “배제되는 사람 없이 인권의 원칙을 지키는 집회를 해 나가자고 계속 강조해 온 상황에서 주최 측으로서의 책임 있는 결정이었다”며 “논란의 책임은 모두 주최 측에 있다”고 말했다. 이하늘씨는 26일 와의 인터뷰에서 “(곡에 대한 관심은) 감사하다. 일단 저희가 전하고자 했던 뜻은 충분히 전달된 것 같다. 지금은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다. 내 적의 원수는 나의 친구”라며 “내가 할 수 있는 위치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했을 뿐이다. 우리가 무대를 서고 안 서고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다우뮤지션은 과의 통화에서 “논란이 일 것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았다. 일방적 주장으로 인한 논란거리로 청와대와 국회로 향해 있는 시민들의 시선을 흐트러뜨리고 싶지 않다”고 밝혔다. 11월 26일 서울 도심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요구 집회에서 두 여성이 촛불 가면을 쓰고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이석우 기자 4. 여성주의자들은 왜 ‘수취인분명’ 가사를 비판했나 여성주의자 활동그룹 ‘페미당당’의 심민섭씨(25)는 DJ DOC의 집회 공연 반대의사를 밝힌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DJ DOC가 무대에 오르기로 예정됐던 집회 일주일 전(11월 19일)에 열린 4차 집회에서 어떤 분이 발언대에 올라 ‘미스 박, 당신은 프레지던트(대통령)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1차 집회 때부터 (아녀자 등) 박 대통령을 비판할 때 여성이라는 사실을 공격하는 이들이 계속 있어 여성주의자 그룹은 ‘혐오발언은 비판이 아닙니다. 발언을 멈추세요’라는 구호를 외칠 예정이었다. 그런데 사회자가 먼저 나서서 ‘미스 박’이라는 표현은 부적절하다고 지적했고, 해당 발언자 분께서 사과했다. 여성주의자 그룹의 문제제기가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일주일 만에 무대에서 다시 ‘미스 박’이 울려퍼지는 상황이 됐다.” DJ DOC의 집회 공연 무산 소식이 전해지자 ‘미스 박’ 구절을 빼고 가사를 바꿔 부르는 방법 등의 아이디어가 제시됐다. 여성주의자 그룹 입장에서는 ‘미스 박’이라는 표현 자체가 부적절하다는 합의를 3주에 거쳐 쌓아놨는데, 도로 원점이 되는 상황에서 ‘미스 박’은 부적절하다는 의견 자체를 피력해야 했다는 의미다. ‘미스 박’만 문제 삼은 것은 아니었다. 심씨는 “가수 측이 박근혜 대통령을 비판할 목적으로 ‘미스 박’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미스’가 미혼 여성에 대한 멸칭으로 여성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는 표현이고, ‘볼이 빵빵’, ‘빽차 뽑았다’ 등은 외모만 가꾸고 남자에게 기대는 여성이라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보이는 모습의 전형에 의존한다”고 말했다. 페미당당 외 강남역 10번출구, 불꽃페미액션, 정의당 여성주의자 모임 저스트 페미니스트, 노동당 여성위원회, 우리는 서로의 용기당, 박하여행(박근혜 하야를 만드는 여성주의자 행동),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정의당 이화여대 학생위원회 등은 집회에서 ‘페미존’을 구성해 여성의 참여 권리와 여성혐오로부터 자유로울 권리 등을 논의하고 있다. ‘페미당당’ 페이스북 페이지는 지난 일주일 동안 1500개가 넘는 악플에 시달렸다. 대부분 ‘메갈년’, ‘페미나치’ 등의 욕설이다. 심민섭씨는 “많은 활동가들이 상처를 받았고 그것으로 활동 동력이 어느 정도 꺾인 것은 사실이다. 대신 많은 사람들이 옹호하는 것도 확인했다. 문제제기와 논쟁과 해결이 동시적으로 일어난 사례라 놀랍기도 하다”고 말했다. 권김현영 교수는 “표현의 자유로서 발언이 보호돼야 한다는 것은 말을 통해 드러나는 사회 운영의 원리를 ‘국가가 독점하지 말라는 것’이다. 공론장에서는 활발한 비판이 가능해야 다양한 발언이 가능해지고,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지점에서 ‘여성혐오적 언어’는 손쉽게 여성을 향해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무기로 돌변해 공론장에서 여성의 표현의 자유를 억제한다. 5. 검열과 비판을 혼동하는 까닭은 26일 광화문 집회에서 ‘수취인분명’의 공연을 반대하는 여성주의자 그룹에는 ‘DJ DOC 검열’의 혐의가 씌워졌다. 권 교수는 “국가로부터 독립된 개인을 상상하는 데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김자연 성우의 메갈리아 티셔츠 논란과 관련해서 문제됐던 것은 예스 컷(cut·독자가 나서서 메갈리아를 이용하는 만화가들을 걸러내겠다) 운동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자신과 국가를 동일시하고 검열권력을 대행하려는 것이다. 한편으로 여성의 문제제기를 쉽게 검열이라 보는 것은 시민으로서의 여성을 상상하지 못하고, 여성과 여성가족부를 동일한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손쉽게 ‘정부에 의한 검열’이라는 상상력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상대방을 동등한 시민으로 인정하는 인식이 필요하고 이런 인식은 “공론장에서의 경험을 계속 쌓는 것”으로만 해결할 수 있다고 권 교수는 설명했다. ‘미국을 강간하자’던 광장이 ‘미스 박’에도 문제를 느끼는 광장으로 변모했다. DJ DOC를 옹호하는 주장을 포함해 각자의 주장의 정당하다는 근거로 ‘개인의 권리’를 앞세우는 흐름이 발견된다. 12년 동안 끊임없이 벌어진 의사 표현과 논쟁의 결과다. 공론장을 향한 검열은 막고, 공론장 안에서의 비판이 자유로워야 하는 이유다. 권명아 동아대 국문과 교수는 “광장은 일종의 ‘성토 공간’으로, 시민사회 내에서 새로운 의사소통의 윤리를 만들어나가는 시험대”라며 “이 관점에서 ‘수취인분명’에 대한 문제제기는 새로운 의사소통의 윤리를 만드는 매개체로서 ‘미스 박’ 등의 용어가 적절한가에 대한 물음”이라고 말했다.
- 특집
- [신간 탐색]DJ가 남긴 고뇌의 어록들(2016. 04. 05 13:36)
- 2016. 04. 05 13:36 문화/과학
- 기적은 기적처럼 오지 않는다 김택근 지음·메디치·1만3800원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마지막 말이다. 그의 삶을 안다면 그저 낙관적인 유언으로만 읽을 수는 없다. “어쩌면 그 유언은 당신 없는 세상이 어떻게 굴러갈지 미리 짚어보고 남아 있는 우리에게 주는 격려인지도 모른다. 힘들어도 힘내라고, 더 나빠질 수 있으나 그렇게 만들지 말라고.” 민주주의, 서민경제, 남북관계. 지은이는 이 모두가 ‘김대중 시대’ 이전으로 퇴행했다고 진단한다. 김대중 대통령이 남긴 말들을 모은 책이다. 그가 남긴 말들을 통해 그의 삶과 고민을 다시 짐작해볼 수 있다. “국민은 나를 버려도 나는 국민을 버릴 수 없다. 국민은 나의 근원이요, 삶의 이유이기 때문이다.” 1993년 2월 28일의 메모다.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세 번째 낙선한 그는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 케임브리지로 떠났다. 세 번째 낙선 이후 그의 고통이 당시의 메모들에 남겨져 있다. 지은이는 당시 그의 고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눈을 감으면 선거운동 장면이 떠올랐다. 그렇게 준비했건만 선택을 받지 못했다. 지역감정에 좌우되고, 김대중을 공산주의 추종자로 덧씌우는 정권의 선전을 그대로 믿는 국민이 야속했다. 그때 심경을 적은 육필 메모는 보는 사람도 아플 정도이다.” 그러나 고통을 적었던 메모의 끝자락엔 이를 털고 다시 ‘국민’을 떠올리는 그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국민은 언제나 현명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민심은 마지막에는 가장 현명합니다. 국민은 언제나 승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마지막 승리자는 국민입니다.” 2005년 그가 자서전에 남긴 말에도 국민에 대한 그의 신뢰가 담겨져 있다. 지은이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인연은 각별하다. 신문사 기자였던 지은이는 퇴임한 김 전 대통령의 자서전 집필작업에 참여하고, 평전을 썼다. 김 전 대통령의 말은 지금도 종종 SNS에 회자된다. 지은이의 말이다. “김대중 없는 세상에 김대중이 남긴 말들이 부쩍 많이 나돌고 있다. 사람들이 김대중을 떠올리는 것은 그가 있었던 지난날에는 적어도 모든 것이 무력하게 무너지지는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토록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김대중이 언제 어디서 무엇 때문에 그 말들을 했는지 그 불멸의 유산을 들려주고 싶었다.”
- 신간 탐색
레이디경향(총 14 건 검색)
- “유일무이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DJ로 변신한 효연 [화보]
- 2024. 07. 28 12:00 연예
- 화보 속 효연은 탄탄한 근육과 강렬한 눈빛, 시시각각 변하는 포즈로 특유의 매력을 뽐냈다. 패션·라이프스타일 매거진 ‘얼루어 코리아’가 소녀시대 효연의 화보를 공개했다. 화보 속 효연은 탄탄한 근육과 강렬한 눈빛, 시시각각 변하는 포즈로 특유의 매력을 뽐냈다. 지난 6월 서머페스트를 시작으로 디제잉 투어에 한창인 효연은 촬영 후 이어진 인터뷰에서 디제이로 무대에 오르는 소감을 허심탄회하게 들려줬다. 그는 “아직 무대를 100% 즐기는 건 힘들지만 ‘효(HYO) 무대 진짜 재미있었다”라며 “오래전부터 유일무이한 사람이 되고 싶은 욕심이 있다. 그룹을 했으니 솔로 가수가 하고 싶었고 좋아하는 분야를 찾다 보니 춤, 페스티벌로 방향이 정해지더라”라고 말했다. 효연은 “오래전부터 유일무이한 사람이 되고 싶은 욕심이 있다. 그룹을 했으니 솔로 가수가 하고 싶었고 좋아하는 분야를 찾다 보니 춤, 페스티벌로 방향이 정해지더라”고 DJ 도전 이유를 전했다. 최근 삶의 화두를 ‘나’로 꼽은 효연은 “연습은 늘 하는 거고 요즘은 한 사람으로서 하루하루 뭘 하고 사는지에 의미를 두려고 한다”라고 말했다. 일과 삶에 대한 자신만의 소신도 들려줬다. 최근 삶의 화두를 ‘나’로 꼽은 그는 “연습은 늘 하는 거고 요즘은 한 사람으로서 하루하루 뭘 하고 사는지에 의미를 두려고 한다”라며 “누구를 만나고 뭘 먹는지 일상에서 평범을 찾으려는 것이다. 그간 사람들의 시선을 크게 의식하고 살았는데 저 자신에게 집중하려 한다”라고 답했다. 삶이 끝나는 시간까지 붙잡고 싶은 순간에는 ‘소녀시대 활동 기간 전부’를 꼽았다. 그는 “원래 연습생 기간에 큰 의미 부여를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단체 활동이 지금의 저를 만든 것 같다는 생각이 짙어진다”라고 말했다. 또한 “가장 바빴고 가장 예뻤고 가장 치열하게 살며 사람으로서 가질 수 있는 다양한 감정을 다 느끼고 이룰 수 있는 모든 걸 성취해본 시절이 있다는 게 자랑스럽다. 무엇보다 모든 추억을 공유하는 친구들이 있다는 게 의미가 크다”라고 전했다. 효연의 화보와 인터뷰는 얼루어 8월호와 홈페이지에서 만날 수 있다. 한편 효연은 현재 유튜브 채널 ‘효연의 레벨업’을 통해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글로벌 DJ로 변신한 나인뮤지스 라나 “탈퇴…1년간 히키코모리였다”[아이돌 그 후]
- 2023. 12. 22 16:18 연예
- 나인뮤지스 출신 라나는 DJ로 해외투어를 돌며 제2의 아티스트 인생을 걷고 있다. 본인 제공 ‘글로벌 스타’ ‘명품 앰배서더’ ‘영앤리치’… K팝 아이돌의 수식어는 화려하지만 그 이면은 어떨까? 만인의 우상이라 할지라도 아이돌의 생명력은 길어야 7년. 아이돌을 그만두어도 이들의 삶은 계속되나 우리는 이후 이야기는 크게 주목하지 않는다. [아이돌 그 후]는 인생 두 번째 챕터를 열심히 써 내려가고 있는 전직 아이돌들에 대한 조명이다. 이번 주인공은 DJ로 해외무대를 누비는 나인뮤지스 라나다. 걸그룹 나인뮤지스 출신 라나(김라나)와 만났다. 그는 이날 두바이 DJ 클럽과 공연 계약 도장을 찍었고 계약금도 두둑이 받았다고 말했다. 라나는 국내 투어보다는 해외 순회를 다닌다. 2023년 한 해는 글로벌 톱 100에 드는 대만 클럽에서 매달 공연했다. 그는 K팝 걸그룹 출신 경력을 십분 이용해 DJ 파트 중 ‘K팝 파티’를 만들었다. 디제잉과 더불어 K팝 퍼포먼스까지 선보이니 차별화될 수밖에 없다. 라나 DJ, K팝으로 차별화 라나는 아이돌 출신 최초의 DJ로 벌써 10년 차다. 자신의 공연뿐 아니라 Team XX-RATED의 수장으로 마치 아이돌을 키우듯 ‘K팝 DJ’ 인재를 양성 중이다. “잠깐 하고 그만두는 분들이 많지 저처럼 10년 넘게 현역으로 DJ하는 분들은 없어요. 지명도를 이용해 돈이 잘 될 것 같다고 접근하면 금방 지칠 거예요. 생각보다 돈이 안 되거든요(웃음).” 국내에서 한창 DJ붐이 일던 몇 해 전에는 유명 모델이나 레이싱걸 출신에게 디제잉을 가르쳐 무대에 올리는 전문 회사도 많았다. 붐이 가라앉으며 결국 버티지 못하고 사라졌다. 라나는 디제잉은 본인이 즐겨야 오래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대만에서 K팝 파티를 만들고 흥행하자, 타이베이에만 저희 콘셉트를 따라 하는 곳이 다섯 곳으로 늘었어요. 디제잉 퍼포먼스도 마치 K팝 퍼포먼스처럼 화려하고 다양해졌죠. 처음에는 ‘과연 EDM팬들이 1시간 내내 나오는 K팝을 좋아할까?’ 걱정했지만 끝까지 따라부르며 즐겨요.” 이렇다 보니 라나는 자신의 팀에 들어온 이들에게 K팝 연습생 스타일로 수업을 따로 받게 한다. K팝의 기본 바운스만 익혀도 기존 DJ와 차별화된 무대를 꾸밀 수 있다. K팝 퍼포먼스와 디제잉을 결합한 DJ라나의 공연. 관객의 반응은 폭발적이다. 본인 제공 “저희 팀 DJ들은 헤어·메이크업 받고 무대 의상까지 입고 가요. 액세서리 하나까지 제가 챙기죠. 이제 DJ는 음악 프로듀스와 믹싱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무대 위에서 자신만의 콘셉트를 갖춘 아티스트가 되어야 해요.” 두바이, 홍콩, 인도네시아, 대만 그리고 중국까지 디제잉 문화를 즐기는 나라에서 라나의 팀을 찾는 이유다. 아이돌 음악은 퍼포먼스에서 무대 연출까지 엔터테인먼트의 모든 것이 녹아있는 장르다. 라나가 1시간짜리 공연의 흐름을 짜는 것도 남다른 이유다. “디제잉 무대에서 K팝 퍼포먼스의 분위기를 내는 것이 정통성을 해치는 일이라고 혐오하는 부류도 있어요. 그러나 K팝은 글로벌 장르가 됐어요. 다른 나라 프로모터에게 K팝 파티를 알리고 계속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K팝만 스테이지에 올리는 특화된 클럽이 생길 때까지 열심히 할 거예요.” 라나는 볼거리, 들을 거리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K팝 파티가 디제잉 마니아와 K팝 마니아를 융합시키고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 나인뮤지스 출신 라나. DJ 업계에서는 ‘K팝 파티’ 여제로 인정받고 있다. 본인 제공 걸그룹을 그만둔 후 ‘히키코모리’가 됐다 라나는 2008년 슈퍼모델 선발대회 1위를 차지했다. 당시 대회를 지켜본 소속사의 제안으로 모델 같은 걸그룹 ‘나인뮤지스’에 합류했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그룹 데뷔라는 것이 다른 사람은 하고 싶어도 쉽지 않은 거잖아요? 모델에서 아이돌 그리고 다른 아이돌은 은퇴할 나이에 DJ 활동까지… 참 신기해요.” 그는 2011년 짧은 걸그룹 활동을 마치고 탈퇴했다. 이제야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구성원 간 불화였다. 그는 한 멤버에게 일방적으로 불링을 당해왔다고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지금은 활동하지 않는 멤버 중 한 명이 유독 저를 겨냥한 비난을 쏟아냈어요. 멤버들끼리 있을 때는 물론 다른 업계 사람들 앞에서도 ‘실력도 없는 것이 무슨 리더냐’는 식으로 저를 함부로 비난했죠.” 라나의 말에 따르면 분란이 계속되자 소속사는 해당 멤버를 ‘활동 중지’시켜 그룹에서 제외하려 했다. 그러자 그 멤버는 라나에게 눈물로 용서를 구했다. “울면서 용서를 구하는 모습에 제가 뭐라고 ‘한 사람의 꿈을 망치나’라는 생각이 들어 용서를 해줬어요. 그러자 다시 불링이 시작되더라고요. 제가 견딜 수 없어 2011년에 팀을 탈퇴했죠.” 탈퇴 후에도 좀처럼 정신적 치유가 되지 않았다. 그는 1년간 그 누구와도 만나지 않은 채 방에서 나오지 않는 생활을 이어갔다. “엄마가 매 끼니 방에 음식을 넣어줄 정도로 밖에 나가기 싫었어요. 걸그룹 활동이 즐거운 경험이고 큰 도움이 됐지만 씻기 힘든 상처를 주기도 했죠. 예쁘고 실력도 좋았던 그 친구가 왜 그랬는지 지금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어요. 얼마 전 사석에서 그를 우연히 만났는데 ‘자신이 어린 시절 너무 철이 없었다’라며 용서를 구했어요. 근데 용서를 하기엔 제 상처가 너무 컸더라고요.” DJ 라나의 무대 모습. 그는 제2의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우연히 접한 디제잉이 그를 치유하고 제2의 삶을 꿈꾸게 했다. 순간순간 생활 속에서 행복을 느낀다. “아이돌 무대 활동은 참 재밌었기에 후회는 없어요. 그렇지만 행복을 느끼는 건 지금이에요. 눈을 떠 고양이를 보면서, 맛있는 과일을 먹으며 ‘날씨가 좋네’하고 읊조리면서 그걸로 행복감을 느껴요.” 라나는 DJ 전문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운영하며 자신의 뒤를 이을 인재를 키우려 한다. 그 꿈은 이미 눈앞에 있다.
- 시각장애인 DJ 이영호, 보이지 않는 눈으로 더 넓은 세상을 보다
- 2013. 03. 27 16:35 화제
- 또렷한 음성과 멋진 목소리,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청바지를 멋지게 소화해내는 이영호씨는 국내 유일의 시각장애인 전문 라디오 프로그램 ‘우리는 한가족’의 진행자다. 다양한 인생 경험과 통찰력으로 누구보다 밝고 넓게 세상을 살아가는 그는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라는 오래된 격언을 곱씹어보게 하는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시각장애인 이영호였습니다” DJ의 마지막 멘트와 함께 클로징 시그널이 흘러나오고 빨간색 On Air(생방송 중) 표시등에 불이 꺼진다. 한 시간 동안의 긴장됐던 생방송이 끝나고 이영호씨(61)가 담당 방송작가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라디오 부스를 빠져나왔다. 매일 오후 1시부터 2시, KBS 3라디오 ‘우리는 한가족’의 DJ로 청취자들을 만나온 지 어느덧 3년째다. 방송국 출퇴근도, 정신없는 생방송도 이제는 익숙한 일상이 됐다. 유쾌한 목소리로 제작진들과 인사를 나눈 그가 “근처에 커피 맛있는 집이 있다”라며 기자를 앞세운다. 멋진 청바지는 아내와 아들이 골라준 거란다.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어느 봄날, 멋진 미소를 가진 그와 즐거운 데이트가 시작됐다. 1975년 형 이장호 감독의 영화 ‘어제 내린 비’로 데뷔한 그는 귀공자풍 외모에 연기력까지 겸비한 청춘스타였다. 홍익대학교에서 조소를 전공하는 예술학도였던 그가 영화배우가 된 데는 재미난 사연이 있다. “당시 장호 형이 조감독 시절이었는데 제 대학 등록금을 최인호씨 소설 「별들의 고향」의 원작료를 주는 데 썼어요. 원래 저는 불문과 지망생이었거든요. 등록금이 없어지는 바람에 이참에 잘됐다, 하는 심정으로 학교를 그만뒀죠. 그 일이 늘 마음에 걸렸나 봐요. ‘별들의 고향’이 대히트를 친 후 ‘어제 내린 비’를 준비하면서 “연기 한번 해볼래?” 하더라고요. 그냥 해본 말일 수도 있는데 제가 덥석 하겠다고 했어요. 다행히 연기도 꽤 자연스러웠고요. 그렇게 해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거예요. 돈 벌어서 프랑스로 유학 가야지 했죠(웃음).” 그 후 ‘너 또한 별이 되어’, ‘그래그래 지금은 안녕’ 등 출연한 작품들이 연달아 히트하며 영화배우로서 승승장구하던 그는 이청준 선생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낮은 데로 임하소서’를 끝으로 1983년 가족과 함께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오랫동안 꿈꿔온 영화 공부를 하기 위해서였다. 뉴욕의 명문학교 SVA(School of Visual Arts)에서 필름프로덕션을 공부하고 뉴욕주립대로 진학해 영화미학을 배우며 영화 프로듀서와 비평가에 대한 열정을 키워나가던 그는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시력을 잃게 된 것이다. 그의 나이 마흔이었다. 장애는 절망이 아닌 작은 불편일 뿐 그가 망막색소변성증 판정을 받은 것은 여덟 살 때의 일이었다. 망막에 색소가 쌓이면서 서서히 망막 기능이 소실되는 유전성질환으로 시야가 좁아지다가 결국 시력을 잃게 되는 병이다. 1만 명 중에 1명꼴로 나타나는데 현재 우리나라에만 5천여 명, 전 세계적으로 1백35만여 명이 이 병을 앓고 있다. 사람들에게 개그맨 이동우가 앓고 있는 병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어렸을 때부터 눈이 나빠 안경을 쓰고도 교정시력이 0.5를 넘지 못했어요. 칠판 글씨도 보이지 않아 학창 시절엔 항상 친구들 노트를 베껴가며 공부를 했고요. 야맹증이 심해서 밤에는 그야말로 눈뜬장님이었지만 조금 불편했을 뿐 대수롭지 않게 여겼어요. 어머니께서도 저에게 병에 대해 말씀해주지 않으셨고요.” 스스로 병을 알게 된 건 군 입대 신체검사를 받으러 가서였다. 병명을 알고 의학사전을 뒤져보고 나서야 심각한 병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냥 어두운 데서 좀 못 보고 살면 될 줄 알았는데 아예 앞을 못 보게 되다니 충격이었죠. 그런데 젊음이라는 게 참 무서워요. 처음에는 방황했지만 이내 적응했어요. 할 일이 무척 많았거든요. 당장 실명을 하는 게 아니고 서서히 시력이 나빠지는 것이라 견딜 만하기도 했고요. 그래도 저는 운이 좋은 케이스예요. 마흔 살까지는 봤으니까요. 나중에 어머니께 들어보니 당시 의사가 ‘이 애는 열다섯 살이 되기 전에 실명합니다’라고 했다더군요.” 앞이 잘 안 보이는 게 꼭 나쁜 일만은 아니라기에 무슨 말인가 했더니, 처음 만난 여자도 쉽게 팔을 빌려주더란다. 나이트클럽에 갔다가 파트너가 아닌 엉뚱한 여자를 붙잡고 나오기도 했다며 웃지 못할 에피소드를 전하는 그의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하다. 시종일관 재치와 유머로 상대방을 즐겁게 하는 그에게서 장애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명석한 머리와 낙천적인 성격을 가진 그에게 장애는 인생을 잠식시키는 절망이 아닌 일상에 동반되는 작은 불편함일 뿐이다. “눈이 안 좋아지니 다른 감각들이 발달해요. 청력이 예민해지고 웬만한 건 한번 들으면 외워버리죠. 배우를 할 때도 시력이 상당히 안 좋았는데 대본을 오래 볼 수 없으니 한번 쭉 읽고 외웠어요. 이렇게 카페에 앉아 얘기를 할 때도 옆 테이블에서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다 들려요. 가끔 주위 사람들이 깜짝깜짝 놀라요. 아무리 작은 소리도 듣게 되니까 함부로 제 뒷담화를 못하죠(웃음).” 하지만 그 역시 깊은 정말에 빠진 순간이 있었다. 완전히 시력을 잃어버린 순간이었다. “미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석사 준비를 하던 즈음 급격히 시력이 떨어졌어요. 이러다 공부를 마치기도 전에 눈이 멀겠구나 싶어 급한 마음에 매일 밤을 새며 석사학위를 3학기 만에 끝냈죠. 그러다 어느 날 눈앞이 하얘지면서 거짓말처럼 글자들이 보이지 않더군요. 그땐 정말 힘들었어요.” 답답한 마음에 술도 마셔보고 방황도 했다. 대낮에 술집에서 웃통을 다 벗고 울부짖었던 일은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에야 “아들내미가 아직도 그때 얘기를 한다”라며 웃어넘기지만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아마 평생 모를 것이다. 더 이상 공부를 지속할 수가 없어 결국 박사학위를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 1989년이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고국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장애에 대한 편견과 벽이었다. “대학에 강의를 나가려고 했는데 눈 때문에 임용이 안 됐어요. 최고의 지성인들에게조차 받아들여지지 않는게 현실이었죠. 한동안 무기력한 일상을 보내다 문득 학창 시절 심취했던 실존주의 철학을 떠올렸어요. 어차피 모든 사람들의 삶은 죽음으로 향해가고 있는데 보이지 않는 것이 무슨 대수일까, 하는 생각이었죠. 그렇게 생각하니 정신이 좀 들더라고요. 내가 지금 절망에만 빠져 있을 때가 아니구나 싶었어요.” 비장애인들은 보지 못하는 더 넓은 시계(視界)를 가지다 생각을 바꾸니 길이 열렸다. 1991년 서울예대 영화과에서 강의를 맡으며 같은 해 망막색소변성증 환자들을 위한 협회를 만들었다. 시각장애인들로 구성된 극단 ‘소리’를 창단해 최초의 시각장애인 연극을 선보이기도 했다. 첫 작품인 ‘금관의 예수’를 시작으로 약 8년 동안 일곱 편의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그에게 가슴 울컥한 기억을 많이 남긴 경험이다. “당시 극단을 운영하고 있던 김민기씨한테 부탁해 조명과 음향 등 기술 지원을 받고 보통 극장들이 쉬는 월요일에 대학로 인켈아트홀을 빌려 첫 공연을 했어요.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무대에 올라 연기를 한다는 게 쉽지 않았죠. 배우들끼리 부딪히고 무대 위에서 떨어지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그러면서도 끝까지 해냈어요. 끝나고 나서는 다들 감격해서 눈물을 흘렸죠.” 당시 무대에 함께 오른 시각장애인들은 지금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그 후로 EBS 라디오의 장애인 프로그램 ‘사랑의 한가족’을 진행하며 장애인들을 위한 활동을 이어가던 그는 2000년 홀연히 통영으로 떠난다. 인생을 다시 살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특별한 연고가 있었던 곳은 아니었고 단지 서울에서 가장 먼 곳으로 가고 싶었어요. 심적으로 많이 지쳐 있던 상태였죠. 내려가서 조그만 어선을 하나 사 기타 치고 낚시하며 살았어요. 당시 통영에서 ‘서울서 온 장님인데 낚시하는 사람’으로 할머니들한테 인기도 많았어요(웃음).” 시력을 잃은 후 책과 기타는 언제나 그의 가장 가까운 벗이었다. 한동안 밖에도 나오지 않고 책만 읽으며 지내기도 했다. 학창 시절부터 책 욕심이 많았던 그답게 많이 읽을 땐 1주일에 세 권도 족히 읽었다. 글자를 읽어주는 프로그램 ‘스크린 리더’를 사용하게 되면서 그 수는 더욱 늘어났다. “전에는 시각장애인들이 점자 책이나 사람이 읽어서 녹음해준 책만 들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스크린 리더로 어떤 텍스트든 읽을 수 있게 됐어요. 이러한 기술의 발달로 장애인과 비장애인들 간의 정보 불평등이 해소되고 있는 거죠. 이제 시각장애인들도 비장애인들과 비교해 정보 문제에 있어 크게 손해를 안 보는 시대예요.” 스크린 리더는 그가 방송을 하는 데도 없어서는 안 될 유용한 프로그램이다. 대본을 보지 못하는 그는 스크린 리더를 통해 귀로 대본을 전달받는다. 일반 속도보다 3배속으로 빠르게 대본을 읽어주면 그것을 듣고 멘트를 해나가는 방식이다. 쉽게 말해 ‘들으며 말하기’인데 실제로 읽어주는 소리를 들어보니 테이프를 빨리 감아놓은 듯 알아듣기가 쉽지 않다. 자연스러워지기 위해선 오랜 숙련과 연습이 필요하다. 컴퓨터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그에게 눈이 보이지 않아 할 수 없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끝없는 독서와 지적 탐구로 비장애인들은 보지 못하는 더 넓은 시계(視界)를 가졌다. “얼마 전 드라마에서 시각장애인 역할을 맡은 여배우가 하이힐을 신고 나와 논란이 된 적이 있었죠. 저를 보면 이해가 되실 거예요. 저도 보통 사람들처럼 여행도 가고 술도 마시고 쇼핑도 다녀요. 시각장애인 여성들도 하이힐 신고 화장하고 꾸미고 다니고요. 요즘 기술이 얼마나 좋아졌는데요. 눈이 안 보여서 하지 못하는 일은 거의 없어요. 장애를 가졌기 때문에 못할 거라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에요.” 시각장애인은 ‘잡히는 사람’이 아니라 ‘잡는 사람’ 아직 우리나라에는 장애인을 대하는 데 여전히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 보통 그를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다.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몰라 허둥대거나 무작정 팔을 잡거나. 시각장애인은 ‘잡히는 사람’이 아니라 ‘잡는 사람’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의 경우 누군가에게 자신의 신체 일부를 잡히면 순간적으로 공포를 느낄 수 있다. “시각장애인을 도와주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해요.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라고 묻거나 자신의 팔꿈치를 잡게 하면 돼요. 팔꿈치를 잡으면 거기서 방향, 높낮이, 속도까지 움직임이 전해지거든요.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먼저 잡아끌면 놀랄 수 있으니 기억하세요.” 그는 더 많은 장애인들이 밖으로 나와 비장애인들과의 접촉면을 늘려야 한다고 말한다. 자꾸 만나고 익숙해져야 벽을 허물 수 있다. “얼마 전 미국에서 망막색소변성증 환자들을 위한 인공 망막이 개발됐어요. 수술을 하면 흑백으로는 볼 수 있다고 하더군요. 예전 같았으면 당장 미국으로 가서 수술을 받았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시각장애인으로 살며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또 다른 세상을 볼 수 있거든요. 보는 세상 그리고 안 보이는 세상, 인생을 두 번 살았다고 생각해요. 눈앞에 보이는 것들은 이미 본 것이고 저에게는 이제 큰 의미가 없어요. 가끔 젊은 환자들 중에 공부를 더 하고 싶은데 눈 때문에 고민이라며 상담을 요청해오는 경우가 있어요. 눈은 언젠가는 멀게 되지만 지식은 죽을 때까지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이니 할 수 있을 때까지 해보라고 조언해줘요. 보이냐 안 보이느냐가 문제가 아니에요. 멈춰 있느냐, 나아가느냐가 관건이에요.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는 한 길은 생기게 마련이에요.”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안진형(프리랜서)>
- ‘SBS 러브FM 국민 DJ 오디션’ 은상…구혜정의 희망 바이러스
- 2012. 05. 04 17:50 화제
- ㆍ“진심을 담은 목소리로 따뜻한 감동 전하고 싶어요” 세상은 그녀의 인생이 ‘신파극’이 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그건 섣부른 판단이었다. 매우 호탕하게 웃는 사람이라는 것, 듣는 사람을 기분좋게 만드는 목소리와 유머를 가졌다는 것, 그리고 누구보다 즐거운 삶을 살고 있다는 것. 그녀와 단 5분만 이야기를 나누면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아름다운 그녀의 특별한 도전. 국민 DJ 구혜정이 전하는 행복 메시지. 장애 딛고 이룬 도전, 값지고 뿌듯한 3등 지난 3월 7일, SBS 사옥에서 열린 SBS 러브FM ‘라디오 오디션, 국민 DJ를 찾습니다(이하 국민 DJ 오디션)’의 마지막 미션 현장. 씩씩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마음을 움직이는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흘러나왔다. “넌 어릴 적부터 사람 좋아하고 친구들 사이에서 유쾌한 아이로 통했지. 그런 기대감에 부응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밝은 모습만 보이려 애썼던 것 같구나. 참 기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쓰러웠어….” 촉촉이 물기 머금은 목소리로 ‘자신에게 쓰는 편지’를 읽어내려간 주인공은 1급 지체장애의 몸으로 오디션에 참가한 구혜정씨. 방송 경험이라고는 다니던 회사의 사내 방송 DJ가 전부였던 그녀는 쟁쟁한 참가자들을 물리치고 은상을 수상하는 기쁨을 안았다. 대상과 금상에 이은 3등이다. “꼭 1등을 해서 국민 DJ가 되겠다는 욕심은 없었어요. 우연한 기회에 오디션 공고를 보고 도전했는데 운이 좋아서 수상까지 하게 됐네요. 사실 예선을 통과할 때마다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몰라요. 방송 사고라도 내면 어쩌나 걱정도 많이 했고요. 1등도, 2등도 아닌 3등을 해서 정말 좋아요.” 이왕 도전을 했으니 아무렴 대상이 더 좋지 않을까 싶은데, 1등은 기쁘겠지만 그만큼 부담이 클 것 같고 2등은 1등을 하지 못한 안타까움이 클 것 같단다. 3등을 한 자기가 가장 행복하지 않을까 싶다는 그녀의 얼굴엔 홀가분함과 뿌듯함이 가득하다. 금방이라도 까르르 웃음이 쏟아져 나올 듯한 표정. 목소리도 목소리지만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에너지가 느껴지는 사람이다. 청중과 심사위원의 마음을 움직인 건 듣는 이를 기분 좋게 만드는 그녀의 유쾌함과 진솔함이었다. “실력으로 봤을 때는 다른 참가자들보다 한참 모자랐을 거예요. 순발력이 뛰어난 편이 아니어서 매번 미션 때마다 하늘에 맡겼죠. DJ 멘트 때 제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그게 청중의 마음에 닿았던 것 같아요.” 그녀는 하반신을 쓸 수 없는 1급 지체장애인이다. 지난 2000년, 뮤지컬 배우를 꿈꾸던 스물여섯 살 청춘은 예기치 못한 교통사고로 일시 정지를 해야 했다. 중환자실에서도 가망이 없다고 할 정도로 큰 사고였다. “그때는 정말 정신이 없었어요. 움직일 수 없으니 여간 답답한 게 아니더라고요. 하지만 그렇게 큰 사고를 당하고도 살아 있으니 감사한 마음이었죠.” 누군가에게 힘들었던 기억을 묻는 일은 언제나 조심스럽다. 당사자가 겪은 고통과 어려움을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물며 건강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휠체어를 타게 된 심정은 어땠을까. 하지만 조심스러운 물음에 돌아온 대답은 마치 어린 시절 자전거를 타다 넘어졌던 경험을 이야기하듯 어떠한 절망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릴 때부터 친구들 사이에서 분위기 메이커였어요. 저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중환자실에 붕대를 친친 감고 누워 있을 때도 친구들이 오면 그렇게 농담을 했대요. 본능이었던 것 같아요. 의사선생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상처 아무는 속도가 정말 빠르다고요. 입원한 지 4개월 만에 퇴원을 했어요.” 뮤지컬 배우를 꿈꿨을 정도로 끼 많고 활기 넘치는 그녀의 에너지는 병상에서도 이어졌다. 부지런히 재활치료를 받고 시간이 날 때마다 다른 환자들과 어울리며 활기를 얻었다. 언제나 주위를 밝게 만드는 그녀는 환자와 간호사들 사이에서도 인기인이었다. 우울함은 ‘즐거웠던 병원 생활’을 마친 후에야 찾아왔다. “퇴원을 하고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니 저의 상황이 너무나 명확하게 느껴졌어요. 화장실에 가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이 막막했죠. 어떠한 상황에서도 무한 긍정을 자신하던 저였는데, 그래서 더욱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어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과 무기력의 날들이 계속되던 중 알게 된 것이 인터넷 장애인 커뮤니티였다. “그곳의 운영자분이 전신마비 장애를 갖고 계셨는데 마우스 스틱 하나로 커뮤니티를 운영하고 강의나 봉사활동까지 활발히 하시더라고요. 그분을 보고 ‘장애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나도 뭐든지 할 수 있구나’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때부터 가족과 주위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동안 나만 힘들다고, 나만 생각하고 살았더라고요.” 일시 정지됐던 인생에 재생 버튼이 눌린 순간이었다. 재활원에 들어가 다시 재활운동을 시작하고 같은 해 콜센터 상담원으로 취직도 했다. 재활원에서는 지금의 남편을 만나 행복한 가정도 꾸렸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삶의 희망을 얻어본 사람은 알 거예요. 누군가는 쉽게 지나칠 수 있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게는 삶을 다시 시작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걸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얼까 고민하다가 우연히 지금 다니는 회사의 사내 방송을 맡게 됐어요. 회사 동료들이 제 목소리를 듣고 아침을 활기차게 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그 작은 시작이 여기까지 이어지게 됐어요. 저에겐 꿈같은 시간이었어요.”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된 오디션 도전, 희망의 목소리 전해주고파 “예쁜 목소리가 아니다”라며 한사코 겸손을 내비치는 그녀지만 잠시라도 그녀와 이야기를 나눈 사람이라면 알 수 있다. 그녀의 목소리가 듣는 사람을 얼마나 기분 좋게 만드는지 말이다. 맨 처음 ‘국민 DJ 오디션’ 참가를 권유한 것도 곁에서 그녀를 보아온 회사 동료들이었다. 연습은 주로 출·퇴근길에 했다. 사내 방송 대본도 더 꼼꼼히 보고 손에 잡히는 대로 소리 내어 읽으며 발음 연습도 했다. 아나운서처럼 하겠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편안한 목소리로, 누구에게나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진행을 하자고 다짐했다. “보면서 듣는 것과 듣기만 하는 건 정말 달라요. 똑같은 말도 TV를 통해 듣는 것과 라디오를 통해 듣는 건 다르잖아요. 저 역시 청취자의 입장에서 진심이 전해지는 말을 들으면 마음에 꽂히더라고요. 제가 라디오를 진행하게 된다면 정말 진심으로 다가가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방송을 통해 오디션을 보는 동안 제 목소리와 열심히 하는 모습에 힘을 얻었다는 말씀을 많이 들었어요. 그런 말을 들으니 저 역시 무척 힘이 나더라고요. 저로 인해 단 한 분이라도 희망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제가 병원에 있을 때 웃으며 병이 나았던 것처럼, 누군가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휠체어 생활이 12년째, 이제는 한몸 같은 휠체어다. 가끔은 그녀도, 그녀의 주변 사람들도 그녀가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잊고 살았는데 이번 오디션을 계기로 장애는 그녀 인생에 또 다른 시작을 만들어줬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다치고 난 뒤 삶을 더 구체적으로 살게 됐어요. 무엇이든 더 열심히 하게 됐고요. 이렇게 오디션에 도전도 하게 됐잖아요. 마지막 미션 때 허수경 심사위원님이 해주신 말이 기억에 남아요. ‘힘내라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구혜정씨의 힘내라는 말은 더욱 진심 어리게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갈 수 있다’라고요. 누군가에게 힘을 줄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서야겠다, 꼭 방송이 아니더라도 장애인들을 위한 활동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어요. 오디션 도전은 제 인생에 터닝 포인트를 만들어준 소중한 경험이에요.” 인터뷰를 마무리 지으며 사람들에게 해주고픈 한마디를 부탁했다. 아직 미션이 남아 있는 거냐며 웃음을 터뜨린 그녀는 5분의 시간을 요구했다. 다음은 국민 DJ 구혜정이 「레이디경향」 독자들에게 전하는 응원의 메시지다. “‘힘들고 지칠 때,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다고 느낄 때, 그곳이 진정한 바닥이 아니더라고요. 나라는 사람은 살려고 하는, 다시 일어나려고 하는 마지막 힘이 더 남아 있어요. 주위를 한번 돌아보시고 그 마지막 남은 힘을 뽑아내세요. 한 명이라도 다시 일어나기를 응원하며, 파이팅!’라디오에서도 이렇게 생각할 시간을 줬으면 좋겠어요(웃음).”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박동민>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