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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도오딧세이]간도에는 조선족이 살고 있다(2009. 11. 25 18:55)
- 2009. 11. 25 18:55 문화/과학
- 조선족이 많이 이용하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한 시장.백산학회가 지난 11월18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간도 및 재중국 조선족 문제에 대한 학술대회’를 열었다. 북방 문제를 주로 다루는 백산학회에서 간도협약 100주년을 맞아 연 학술대회였다. 발표 내용의 절반은 간도 영토 문제, 나머지 절반은 조선족 문제를 다뤘다. 이날 학술대회에서 토론자로 참석한 이석우 인하대 교수(국제법 전공)는 “간도영유권에 있어 핵심적 문제는 간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강조했다. 흔히 간도영유권을 이야기하면 땅덩어리에만 집중한다. 언제부터 우리나라 땅이고, 언제 청나라와 국경회담을 했고, 그 기준에 의하면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우리나라 땅이라는 식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해는 쉽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간과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간도에 살고 있는 조선족은 우리의 말과 문화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중국인이지만 이들의 모국은 한국이다. 이들이 없다면 간도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모래성을 쌓는 것과 마찬가지다. 땅 중심이 아니라 간도에 살고 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영유권 문제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발해가 망한 후에 간도에는 말갈족-여진족-만주족으로 이름이 바뀐 부족이 자리잡았다. 이들 부족은 청나라를 세우고 1644년 수도를 심양에서 북경으로 옮기면서 간도 지역을 떠났다. 사실상 무인지대가 된 것이다. 이때 조선에서는 백성들이 몰래 이곳에 산삼을 캐러 다녔다. 청에서는 만주족의 발상지인 이 지역을 봉금지역으로 설정해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다. 17세기 이후 실질적으로 영토 점유 1860년대에는 함경도 지역에 큰 흉년이 들자 조선 백성이 대거 간도로 이주했다. 1880년대 들어 청나라는 청 전통의 머리와 옷 차림을 하지 않을 경우 쫓아내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1885년과 1887년 양국이 국경협상을 벌였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대한제국 시기인 1902년 우리나라에서는 간도 주민을 보호하기 위해 이범윤을 간도시찰사로 임명해 파견했다. 그러나 1909년 간도협약으로 이곳에 살고 있는 조선 백성들은 졸지에 남의 나라 땅에 사는 이방인이 됐다. 1945년 일제가 망했으나 간도 땅의 백성들은 그대로 남아 있다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지면서 중국 백성이 됐다. 그러나 중국 내에서 이들은 1952년 조선족 자치주를 세워 우리나라 글과 문화를 이어왔다. 간도영유권에 대해 조선족 학자들은 입을 다물고 있다.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어떤 학자들은 중국의 논리를 대변하기도 한다. 물론 그들의 입장에 대해 이해는 할 수 있지만 그들의 논리가 옳다고 할 수는 없다. 17세기 이후 텅 빈 간도를 개척하고 대거 이주해 실질적으로 영토를 점유한 것은 조선 백성들이고 바로 이들이 조선족의 조상이다. 이들의 조상은 새로운 땅을 찾아 무인지대에서 농토를 개간한 것이지 청의 영토 안에서 몰래 일한 것이 아니다. 1992년 한·중 수교로 조선족은 우리와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됐다. 수많은 조선족이 한국 땅에 일을 하러 왔다. 또한 많은 한국인이 연변 조선족자치주를 방문했다. 여러가지 문화 교류도 이뤄졌다. 뿌리가 같음을 확인하는 행사도 있었다. 간도영유권은 과거 문제이자 앞으로 통일 이후 닥칠 미래 문제이다. 여기에는 항상 조선족 문제가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땅만 생각하면 큰 것을 잃을 우려가 있다. 땅은 어쩌면 차후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이곳에 뿌리 내린 간도의 역사, 간도에 살고 있는 조선족의 문제가 땅 문제보다 더 중요하다. 이번 호를 끝으로 간도오딧세이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많은 관심을 표해 준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 간도오딧세이
- [간도오딧세이]간도가 살아 숨쉬고 있네!(2009. 11. 18 16:40)
- 2009. 11. 18 16:40 문화/과학
- 때로는 아마추어의 노력이 빛날 때도 있다. <어! 발해가 살아 숨쉬고 있네?>(아이필드)라는 책을 읽고 난 뒤 느낌이다. 저자인 서울외고 박은선 교사는 사회생활학과를 졸업했고, 역사를 복수 전공했다. 현재 서울외고에서 사회 담당으로 정치와 법·사회 등을 가르치고 있다. 박 교사는 2005년 한햇동안 중국 연변의 한국학교에서 초빙교사로 근무했다. 이 기간에 발해와 간도의 현장을 직접 답사한 것을 책으로 묶었다. 이 책은 1부에서 발해, 2부에서 간도, 3부에서 용정에 대한 이야기를 각각 담고 있다. 제목은 발해에 초점이 맞춰 있지만 간도 관련 책으로서는 아주 훌륭하다는 평가를 내릴 만하다. 2부는 현장을 답사해 직접 역사의 미스터리를 해결해 나가는 방식으로 서술해 현장감이 생생하다. 예를 들면 ‘토문강은 대체 어디?’라는 제목을 통해 토문강의 현재 위치를 추적해 나간다. 미션 임파서블- 토문강을 찾아라 토문강은 백두산에서 흘러 나가기 때문에 상류쪽 물줄기는 북한 쪽 영토에 있다. 이 강은 북한과 중국의 국경을 넘어 중국 땅으로 흘러 들어간다. 박 교사가 추적한 것은 중국쪽에서다. 박 교사는 이를 ‘미션 임파서블-토문강을 찾아라’라고 붙였다. 시행착오를 겪은 부분까지 낱낱이 기록했다. ‘보물찾기 그 첫 번째 시도, 보물찾기 그 두 번째 시도, 보물찾기 굳히기 판’이라는 표현 만큼이나 내용은 흥미롭다. 박 교사는 토문강의 어원이 되는 흙문, 즉 토문을 찾아내 사진에 담았다. 역사적인 기록이 있지만 눈으로 볼 수 없었던 토문의 존재를 살려 낸 것이다. 이 책의 또 다른 미덕은 간도의 역사가 압축됐을 뿐 아니라 저자의 객관적 시각이 잘 드러나 있다는 것이다. 간도 전문가들이 알고 있지만 쉽게 이야기할 수 없는 사실들이 여기에는 서슴없이 적혀 있다. “많은 한국 학자들은 토문과 두만이 다른 강임을 두 나라 모두 알고 있었고, ‘동위토문’에서 가리킨 강은 두만강과 별개인 송화강의 지류 토문강이라고 반박한다. 과연 무엇이 맞을까? 나는 이 점에 있어서는 중국 학자들의 주장이 보다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목극등은 두만강을 염두에 두고 ‘동위토문’이라 적어 놓았지만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착각한 채 정계비를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오해한 것은 청의 중대한 실수였다. 이 뿐만 아니라 이후 200여 년 동안이나 석퇴와 토퇴가 어디에 놓여 있는지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조선이 토문강을 경계로 인식하도록 한 것 역시 큰 실수였다. 하지만 아무리 실수였다 하더라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 그것은 청의 실수이지 조선의 실수는 아니기 때문에, 만일 토문의 무효를 뒷받침하고자 한다면 국제법상으로 볼 때 중국의 몫일 뿐 한국의 몫이 아닌 것이다.” “이중하가 정해담판에서 국경으로 정하고자 애쓴 것은 토문강이 아닌 ‘홍토수’였다. 결국 이중하는 두만강을 국경으로 인정해버린 것이다.” 일부분을 발췌한 것으로 전체 문맥을 오해할 수 있지만 박은선 교사는 이 책에서 사실관계를 명료하게 써 놓았다. 그러면서 전체적으로 객관적인 시각도 유지하고 있다. 박 교사는 “역사를 바라볼 때 감정적 민족주의는 문제가 될 수 있다”면서 “간도는 현실적으로 중국 영토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과거의 역사가 어떠했다 라는 것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박 교사는 간도협약은 무효이지만 북한과 중국이 맺은 조·중변계조약은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현실적으로 북한이란 국가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정도쯤이면 박 교사에게 간도에 관해서는 전문가란 호칭을 붙이고 싶다. 누구나 간도 전문가가 될 수 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그만큼 역사 분야에서 간도 전문가가 드물다는 사실이 서글프다. 박 교사의 책에 새로운 이름을 붙이고 싶다. ‘어, 간도가 살아 숨쉬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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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도오딧세이]토문은 어디에 있을까(2009. 11. 12 11:42)
- 2009. 11. 12 11:42 문화/과학
- 토문강의 어원이 되는 흙문이 절벽처럼 돼 있다. <박은선 교사 제공> 토문강은 두만이라는 이름에서 나온 것일까, 아니면 흙으로 된 문을 의미하는 토문(土門)에서 나온 것일까. 1712년 백두산 정계비에 토문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이후로 이 논쟁은 300년 동안 지속됐다. 중국 측은 ‘토문강=도문강=두만강’으로 모든 이름이 비슷하지만 같은 줄기에서 나왔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반면에 한국 측은 토문강은 두만강과 다른 이름으로, 토문강 물줄기는 흙으로 된 문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했다. 한국 측 주장대로라면 토문강의 진위는 정계비 인근에서 연결된 물줄기에 토문이 존재하는가 여부로 알 수 있다. 이 토문은 일제가 1907년 간도 용정에 통감부 파출소를 설치한 이후 토문강을 답사하면서 쓴 답사보고서에 나타난다. 당시 파출소장인 사이토 스에지로(齋藤季治郞)가 10월18일 통감공작인 이토 히로부미에게 보낸 토문강 답사보고서는 1975년 국회도서관에서 발행한 ‘간도영유권 관계 발췌문서’에 번역돼 실려 있다. 석퇴와 토문 본 사람은 많지 않아 그 (석퇴의) 종말점에 양쪽 높이 약 100m의 단애가 있는데 소위 토문이라 칭하는 것이 이것인 것 같다. 하천의 형상을 따라 울창한 대삼림 속으로 달려 약 4리 더 가니 방향을 북으로 돌린다. 토문에서 약 3리 사이는 큰 돌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조약돌 내이며, 거기서부터는 사천(沙川)이 된다. (중략) 방향을 북으로 돌리고 나서는 약 18리 지나 곧 낭낭고(일명 연일고) 부근에 이르러 다시 방향을 서(西)로 돌려 소사하를 거쳐 드디어 송화강으로 들어간다. 백두산 정계비-석퇴(돌무더기)-토문-송화강으로 이어지는 곳을 직접 답사한 보고서다. 정계비(터)를 본 사람은 많지만 석퇴와 토문을 본 사람은 많지 않다. 북한이나 중국에서 이곳에 접근하는 것이 힘들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발행한 <백두산 총서-기상수문편>에는 중국에서 오도백하로 불리는 토문강이 사도백하로 나타나 있다. 사도백하에 대한 설명에서 “대각봉계선의 해발 높이 2100~2120m에는 웃면이 열린 조면암의 자연갱도가 72m 길이로 발달돼 있다”라고 적혀 있다. 흙으로 된 문인 토문을 말하는 것이다. 2005년에 중국 연변의 한국학교에서 초빙교사로 일한 박은선 교사가 중국쪽을 통해 토문강의 토문을 찾아 사진으로 남겼다. 그가 쓴 <어! 발해가 살아 숨쉬고 있네?>(아이필드)에는 이렇게 나타나 있다. 신기한 지형이었다. 이런 지형이 또 어디에 있을까. 예상치 못한 장관에 역사 답사를 왔다는 사실마저 잊었다. <지오그래픽>의 사진 한 장을 보고 있는 듯했다. 오른쪽, 왼쪽 순서를 바꾸어 병풍처럼 펼쳐진 검은 흙벽. 더 깊숙이 들어가자 아예 양옆으로 흙벽이 높게 세워져 있었다. 흙벽의 높이는 무려 우리 키의 네 배를 넘었다. 박 교사는 “북한쪽이나 중국쪽 모두 이런 벽이 있었고, 절벽처럼 보이지만 흙벽이었다”고 말했다. 박 교사가 토문을 발견한 곳은 북한과 중국의 9호와 10호 국경비 사이다. 토문강이라는 이름의 유래인 토문은 수천년 동안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사실만 보더라도 역사적 사실은 얼마든지 왜곡할 수 있지만 지리적 사실은 왜곡할 수 없음을 잘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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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도오딧세이]돌무더기는 어디로 향했을까(2009. 11. 04 16:28)
- 2009. 11. 04 16:28 문화/과학
- 대동여지도에서 백두산 인근 지역의 부분. 홍양호의 <백두산고>에는 정계비 인근에 있는 돌무더기(석퇴)에 대한 생생한 표현들이 나타나 있다. 산에 마른 도랑이 있는데 도랑 남쪽 언덕에 돌덩어리들이 쌓여 있다. 혹 10무(1무는 반걸음)에 한 무지가 있거나 혹은 20무에 한 무지씩 있다. 이것이 국경을 정할 때 표식으로 쌓은 돌이라고 한다. 도랑을 따라 서쪽으로 수십무 가고 평지를 따라 꺾어들어 북쪽으로 50~60무 올라가면 도랑이 끝나면서 비석이 있다. (중략) 비석에서 뒤로 돌아 수십무 가면 동서에 또 각기 마른 도랑이 있는데 서쪽은 도탄이라 하여 압록강에 들어가고 동쪽은 토문이라 하여 두만강과 더불어 선성에서 모인다. 목극등이 돌아간 후 문서를 띄우기를 “비석을 세운 다음 토문의 원류를 따라 살피건대 수십리를 가도록 물흔적이 보이지 않고 돌을 따라 더듬어 가서 백리쯤 되여 드디여 큰 강이 드러난다. 여기는 물이 없는 곳이니 어찌 남들이 변방 경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감히 서로 침범하지 못하게 하겠는가. 우리나라가 토문 원류가 끊긴 곳에 흙을 쌓거나 돌을 모아 놓고 목책을 세워서 하류 경계에 정해 놓았다” 등등 하였다. 비석을 세운 곳에서 동쪽으로 30리 떨어져 목책과 흙 둔덕을 설치했다. 홍양호는 1724년에 태어나 1802년에 세상을 떠났다. 1712년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진 뒤 얼마 안 된 시기에 그는 백두산을 찾았다. 그는 1777년 함경도 경흥 부사로 좌천됐으며, 이때 북쪽 변방을 답사했다. 그의 기록을 보면 돌무더기는 5~10m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흔히 정계비에서 돌무더기를 따라 토문강 하류쪽으로 내려가지만 홍양호는 거꾸로 돌무더기에서 정계비쪽을 올라갔다. 목극등 지정한 것보다 남쪽에 있는 물줄기 선택 돌무더기는 <백두산고>에 나타난 것처럼 청나라의 관리인 목극등의 요청으로 쌓았다. 정계비를 세운 목극등은 마른 도랑의 경계가 끝내 못미더웠던 것이다. 그러나 이 도랑은 두만강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토문강은 북쪽으로 계속 흘러 송화강으로 합류했다. 홍양호 역시 토문강이 두만강으로 합류하는 것으로 알아 <백두산고>에서 두만강으로 흘러간다고 밝혀 놓았다. 17세기 후반의 지리적 정보로는 토문강이 어디로 흘러 나가는지 제대로 밝힐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1712년 당시 돌무더기를 쌓을 때 조정에 올린 보고를 보면 토문강이 송화강으로 흐르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초 목극등이 지정한 곳의 물줄기가 송화강에 합류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관리들은 고민했다. 수많은 인력을 동원해 백두산 정계비까기 올라갔는데 빈손으로 내려갈 수도 없었다. 목극등이 지정한 곳에 돌무더기를 쌓을 경우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차선이었다. 목극등이 지정한 물줄기보다 남쪽에 있는 물줄기를 택해 그 주위에 돌무더기를 쌓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 물줄기 역시 송화강으로 흘렀다. ‘정계비-돌무더기-두만강’이라고 오류를 범한 대표적인 것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이다. 대동여지도를 보면 정계비에서 석퇴(돌무더기)와 목책이 분계강 상류로 이어져 결국에는 두만강에 합류하고 있다. 이 부분이 잘못됐다는 것은 20세기 초반의 근대 지도에서 밝혀지기 시작했다. 근대지도에서 돌무더기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정계비 인근에 위치한 물줄기는 모두 송화강으로 향했다.
- 간도오딧세이
- [간도오딧세이]백두산의 역사적 수수께끼…(2009. 10. 29 14:36)
- 2009. 10. 29 14:36 문화/과학
- 1940년대 일본인의 사진집에 나타난 돌무더기(석퇴). 백두산에는 아직 풀리지 않은 역사적 숙제 2개가 있다. 이 가운데 하나가 백두산 정계비가 과연 어디로 사라졌느냐 하는 점이다. 지금 그 자리에는 정계비를 세웠던 주춧돌만 남아 있다. 정계비는 1931년 7월28일에 없어졌다. 만주사변(1931년 9월)이 발발하기 직전의 일이다. 시노다 지사쿠가 쓴 <백두산 정계비>의 서문에 이 내용이 잘 나타나 있다. 시노다의 지인이 이때 백두산에 올랐다가 이튿날 아침 그곳에 정계비가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는 시노다에게 알린 것이다. 이 지인에 따르면 7월28일 그곳에는 일본 국경수비대 100여 명과 일반 등산인 56명이 있었다. 시노다의 글투로 볼 때 일본 국경수비대가 정계비를 없앴을 가능성이 높다. 정계비와 돌무더기는 어디로 갔을까 문제는 이 정계비를 어디에 버렸느냐는 점이다. 일제의 의도대로라면 정계비를 들고 내려가는 것보다 그냥 산 속에 버리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백두산 어딘가에 정계비가 숨겨져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언젠가 백두산 정계비가 다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는 기대를 할 만하다. 또 하나의 풀리지 않는 숙제는 정계비에서 토문강까지 이어져 있던 돌무더기가 지금 그대로 존재하고 있나 하는 점이다. 돌무더기는 돌을 모아서 조선과 청의 국경선을 구분하던 역사적 흔적이다. 십수 개의 큰 돌을 모아 돌무더기를 이루고 10여 m 떨어진 곳에 다시 돌무더기를 만들어 멀리서 보면 띠를 만든 형식이었다. 1712년 백두산 정계비를 세운 뒤 물이 흐르지 않는 곳의 경계를 분명히 하기 위해 돌무더기띠를 만들었다. <숙종실록>에는 25리(10㎞)에 걸쳐 목책 또는 돌무더기가 있었고, 다시 25리에는 물 흔적이 있었으며, 나머니 40여 리에는 울타리가 있다고 기록했다. 1885년 국경회담에서 이중하가 그곳에 갔을 때 보고에 따르면 흙무더기와 돌무더기가 연달아 쌓여 있는 것이 90여 리 가량이었다. 이 무더기 위에 나무가 자란 것도 있었다고 전했다. 시노다가 1938년에 쓴 책 <백두산 정계비>에는 이 돌무더기 사진이 실려 있다. 이보다 더 상세한 사진은 1940년대 일본인의 사진집 <백두산 등행>에 나타나 있다. 일본인 탐험대가 기념사진 형식으로 찍은 이 사진에는 몇 개의 돌무더기가 연결돼 있음을 보여 준다. 최근에 조선일보 1936년 기사에서 이 돌무더기 사진이 실린 것을 찾아냈다. 이 사진은 당해 9월15일과 9월19일 두 차례 실렸다. 돌무더기가 마지막으로 기록된 것은 1948년 북한의 청진교원대학 ‘백두산탐사대’가 그곳을 방문해 돌무더기를 조사한 것이다. 북한의 민속학자인 황철산 교수는 1957년 <문화유산> 잡지에 이때의 탐사 결과를 실었다. 여기에서 황 교수는 “돌각담의 총수는 106개이고, 돌각담이 처음 있는 지점부터 끝나는 곳까지의 거리는 5391m에 달하는 것이었다”고 기록했다. 이때 이후 벌써 60년이 흘렀다. 깊은 산속에 있는 106개의 돌무더기는 어디로 갔을까. 이후의 기록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북한 땅을 밟아 백두산에 오른 이들의 증언에도 이 돌무더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누가 일부러 돌무더기를 없애기에는 너무 많은 숫자다. 이 돌무더기는 과연 어떤 형태로 남아 있을까. <Weekly 경향>은 2005년 위성사진 전문가의 도움을 얻어 위성사진을 판독한 결과 1.5㎞에 걸쳐 인공적인 돌무더기띠가 있다고 추정했다. 한국과 중국의 국경선이라고 할 수 있는 돌무더기띠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가 지금으로서는 수수께끼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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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도오딧세이]1885년 10월 19일 백두산에서는…(2009. 10. 22 13:33)
- 2009. 10. 22 13:33 문화/과학
- 1909년 5월 상순에 일본인들이 백두산 정계비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1885년 10월 이중하와 김우식이 이곳을 찾은지 불과 23년 후의 모습이다.1880년대 북간도에는 조선 백성이 대거 정착했다. 대기근으로 고생한 함경도 백성들이 떼를 지어 두만강을 건넜다. 그리고 간도에 농경지를 일궜다. 겨우 살 만해졌을 때 청국은 치발역복을 강요했다. 만주족의 옷과 머리 형태를 갖추기를 요구한 것이다. 만주족으로 귀화하지 않으면 애써 일군 땅을 빼앗길 지경에 처했다. 이때 조선에서는 백두산 정계비의 존재를 새롭게 확인했다. 정계비에 나타난 토문강이 두만강과 달리 북쪽으로 흘러 간도 이주민이 살고 있는 땅이 조선 땅이라는 것이었다. 1885년 청국은 조선과 국경회담을 요구했다. 양국의 대표는 9월 말에 만났다. 백두산의 정계비를 확인하기에는 이미 늦은 계절이었다. 북한의 <백두산고전작품선집>에 수록된 김우식의 ‘백두산 정계비 탐방록 및 감계수행일기’ 국역본에는 당시 양국에서 백두산 정계비 확인을 꺼렸음을 알 수 있다. 1712년에 백두산 정계비를 세운 것은 5월이다. 당시에는 기온이 올라가고 눈이 녹는 5월부터 8월까지만 백두산에 오를 수 있었다. 정계비 답사 “간도는 조선땅” 확인 다음 날 관청에 모여 필담으로 국경문제를 론하는데 당시 절기가 추운지라 피차간에 속으로는 비석이 있는 곳까지 가지 않고 락착 지었으면 하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의견이 제각기 고르롭지 않아 부득불 한 번 가서 정계비석을 조사하기로 하였다. 양국 간 의견 차가 워낙 커서 결국 백두산 정계비를 확인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말한 것이다. 이때 백두산 정계비로 올라간 상황은 이중하의 <백두산 일기>에서도 잘 나타난다. 두 기록은 해당 날짜의 일까지 상세하게 서술해 비교할 만하다. 10월15일 백두산에 오르기에 앞서 제사를 지낸 것과 17일 큰눈이 내려 산에 오르지 못한 것이 두 기록에서 일치하고 있다. 당시 양국 일행은 3개 조로 나눠 활동했다. 감계사인 이중하는 백두산 정계비로 직접 올라간 반면에 화원으로 그림을 그리는 임무를 맡은 김우식은 홍단수로 갔다. 그러나 김우식은 백두산 정계비로 간 다른 수행원의 입을 빌려 당시 정계비에 이른 상황을 기록했다. 양측 일행이 정계비에 다다른 것은 10월19일 아침이었다. 눈보라로 지척도 분간할 수 없었지만 갑자기 해가 나타나 정계비에 이를 수 있었다는 사실이 두 기록에서 나타난다. 잠간 사이에 비문 2장을 새기고 량측에서 하나씩 가진 후에 저쪽 사람들에게 “이만하면 됐으니 또 조사할 것이 있는가요?”라고 물었다. 가원이 말하기를 “정계비석은 여기에 있고 조선백성들의 경작개간지는 도문강 북쪽 언덕이니 혹 이상하지 않는가. 심하도다. 옛 사람들이 지형을 잘못 살펴보고 여기에 정했다”라고 하였다. 김우식의 <백두산 정계비 탐방록 및 감계수행일기> 비석 동쪽가의 계곡을 따라 둔덕을 쌓았는데 돌로 쌓기도 하고 흙으로 쌓기도 하여 삼포까지 90리에 끊이지 않았으니, 생각건대 옛 사람이 힘쓴 것이 매우 크다고 하겠다. 비석의 표면은 얼음이 얼어 붙어 있어 깎아도 떨어지지 않아 불을 때서 녹여 세 장을 인출하여 한 장은 진영에게 주고 두 장은 품 안에 넣었다. 이중하의 <백두산 일기> 두 기록에서는 탁본한 뒤 날씨가 다시 나빠져 고생한 장면까지 서술돼 있다. 이 기록은 국경회담에서 양측의 날카로운 신경전을 생생하게 그렸다. 수백 명의 양측 인원이 죽을 고생을 했지만 성과는 조선 측에만 있었다. 정계비대로라면 간도는 조선 땅이라는 것을 1885년 10월19일의 정계비 답사가 확인시켜 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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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도오딧세이]북한서도 간도문제에 관심?(2009. 10. 15 15:34)
- 2009. 10. 15 15:34 문화/과학
- 간도 문제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는 북한에서도 백두산은 가끔 등장했다. 스스로 민족의 성산이라고 떠받드는 백두산에 대한 자존심 문제 때문으로 해석된다. 1962년 북한과 중국 간에 조중변계조약으로 영토를 확정하는 시기에 북한이 김일성 주석의 백두산 장군봉에 오른 사진을 공개함으로써 남한에서는 미묘한 해석을 낳았다. 조중변계조약이 맺어진 것이 2000년에 겨우 알려진 만큼 당시로서는 북한과 중국 간에 백두산 천지를 놓고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졌을 것이라는 짐작만 쏟아져 나왔다. 2004년에 북한에서는 <백두산 고전작품선집>이라는 책이 발간됐다. 고려시대 정몽주·이색에서 시작해 남구만·박제가 등 조선 후기 인물에 이르기까지의 시와 산문을 국역해 놓았다. 북한의 사회과학원 주체문학연구소 고대중세문학연구실에서 백두산을 다룬 시와 산문을 알기 쉽게 한글로 풀어 놓은 것이다. 이 책에서 눈에 띄는 작품은 단연 산문이다. 간도 문제와 얽혀 백두산 정계비를 다룰 때면 언급되는 홍세태의 <백두산기>, 박종의 <백두산 기행>, 서명응의 <백두산 유람기>, 홍양호의 <백두산고>가 실렸다. 백두산 정계비에 대한 이야기며 정계비가 세워진 과정이 낱낱이 실려 있다. 간도에 대한 영토 문제가 ‘백두산’에다 ‘고전 작품’이라는 외피로 은근슬쩍 드러나게 된 셈이다. 이들 산문의 내용은 이미 남한에서 많이 알려졌다. 1998년에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백두산 답사기>(도서출판 혜안)라는 이름으로 출간됐다. 이 책에는 백두산 정계비를 건립할 당시의 인물들이 직접 또는 구술 형태로 쓴 김지남의 <북정록>, 홍세태의 <백두산기>, 박권의 <북정일기>와 이후의 선비들이 백두산에 올라가 쓴 이의철의 <백두산기>, 박종의 <백두산 유록>, 서명응의 <유백두산기>, 이중하의 <백두산 일기>가 실려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백두산 답사기 김우식의 <백두산 정계비 탐방록 및 감계수행 일기>는 <백두산 답사기>에 실린 이중하의 <백두산 일기>와 비교할 만하다. 김우식은 1885년 을유감계회담에 감계사 이중하와 함께 백두산에 올랐다. 이중하가 기록을 남기고 밑에서 일한 김우식이 또 다른 기록을 남긴 셈이다. 김우식의 기록은 1885년 국경회담이 있기 이전에 백두산 정계비를 답사한 대목이 있어 흥미롭다. 김우식은 함경도 종성에 살고 있었다. 1883년 서북경략사 어윤중이 회령에 도착했다는 말을 들은 후 인근 지역 백성 100여 명과 함께 간도 지방의 농사문제를 아뢰었다. 백두산 정계비에 나타난 대로라면 간도는 우리 땅이라는 주장이었다. 어윤중은 공문을 만들어 김우식을 백두산 정계비에까지 가도록 했다. 5월15일 김우식은 백두산 정계비에 이르렀다. 비문을 베껴 쓴 후 경원에 되돌아왔다. 어윤중은 다시 가서 비문을 본뜨되 주변 지역까지 살피라고 명령했다. 김우식은 6월 종성사람 오원정과 다시 백두산 정계비로 찾아갔다. 18일 날이 개자 비석이 있는 곳에 올라가 28장이나 새겼다. 이종려가 보고문을 작성해 경략사에게 보냈다. 짐을 지고 간 군사와 일행 5명이 비석 둔덕 아래로 내려가 200여 리 떨어진 언덕 입구에 이르렀다. 토문강은 물이 깊고 길림의 변경으로 들어갔으므로 이를 단념하고 북증산에서부터 하반령에 이르러 예부터 분계강이라고 부르는 강을 살펴보니 시원이 하반령에서 나와 두만강과 합쳐지며 온성의 무연한 땅에 도달하는데 일명 발가토강이라고도 한다. 백두산 인근에 사는 일개 백성으로서 김우식이 한 행동은 놀라울 정도이다. 간도 지역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백성들을 위해 백두산 정계비의 비문을 탁본해 오는가 하면 이를 관리에게 보고하고, 이 사실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 기록이 준 놀라움은 이 산문을 북한에서 국역해 발간했다는 것이다. 북한이 중국과의 민감한 영토 문제임을 뻔히 알고도 이런 기록을 국역 출간했는지 궁금하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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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도오딧세이]미스터리한 토문강(2009. 10. 07 11:03)
- 2009. 10. 07 11:03 문화/과학
- 백두산 천지 부근의 지도. 토문강으로 표기된 강은 중국에서 오도백하, 북한에서 백두천(사도백하)으로 각각 나타난다. 백두산 정계비에 기록된 토문강은 중국 지도에서는 오도백하로 나타난다. 이도백하가 천지에서 바로 북쪽으로 흘러 송화강으로 흘러들어가고 삼도백하, 사도백하, 오도백하 순으로 송화강으로 흘러들어간다. 북한에서는 토문강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1992년 북한은 백두산 총서를 편찬했다. 이 총서의 ‘기상수문’편에는 압록강과 두만강에 이어 ‘중국 송화강의 상류 하천’이라는 대목이 나타난다. 여기에는 삼도백하와 백두천(사도백하), 그리고 오도백하에 해당하는 얼도강이 조사돼 있다. 삼도백하는 향도역 부근에서 시작해 북쪽으로 흐르는데 여러 곳에 깊고 좁은 상자형 곡지들이 형성돼 있으며, 곡지 사면은 절벽으로 돼 있다고 자료집은 보고했다. 길이는 9.2km다. 사도백하일까, 오도백하일까 사도백하는 대연지봉의 북사면에서 시작해 백두다리를 지나 북쪽으로 흐른다고 나타나 있다. 12.7km의 길이로, 이곳에 물이 흐르는 시기는 6월부터 9월까지다. 사도백하의 절벽에 대해서는 “대각봉계선의 해발 높이 2100~2120m에는 웃면이 열린 조면암의 자연갱도가 72m 길이로 발달돼 있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 절벽이 마치 흙으로 만든 문처럼 보인다는 토문(土門)을 말한다. 토문강은 여기에서 유래됐다. 오도백하에 해당하는 얼도강은 대각봉의 남사면 기슭에서 시작해 쌍두봉을 거쳐 북쪽으로 흘러간다. 실제로 중국의 지도를 보면 토문강은 오도백하라고 할 수 있다. 정계비 인근에서 백두다리를 거쳐 북쪽으로 흐를 만한 강은 오도백하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사도백하인 백두천이 바로 문제의 토문강이라고 볼 수 있다. 대연지봉의 북사면에서 시작해 백두다리를 지난다는 점, 절벽이 마치 자연갱도처럼 발달해 있다는 점을 볼 때 그렇다. 가령 얼도강을 토문강으로 추정하고자 한다면 대각봉의 남사면 기슭에서 시작한다는 점이 토문강의 특징과 맞지 않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토문강은 중국에서는 오도백하, 북한에서는 사도백하로 각각 불리는 강이다. 이렇게 강 이름을 헷갈리게 만들어 놓은 것은 하나의 음모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수많은 물줄기로 인해 명칭이 다를 수 있지만 큰 물줄기를 일부러 헷갈리게 만들어 놓음으로써 토문강의 존재를 없애려 했다는 것이다. 음모는 음모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헷갈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았다. 북한은 중국과의 영토 문제 때문에 토문강에 대해 일절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중국은 중국대로 토문강의 존재를 부정해 왔다. 남한은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북한쪽에서의 접근도, 중국쪽에서의 접근도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게다가 이 물줄기들은 대부분 건천으로, 평소에는 물이 말라 있다가 여름철 한때 눈이 녹아내린 물로 물줄기의 형상을 갖췄다. 이런 점이 1712년 중국의 관리들을 헷갈리게 했다. 위성사진 기술이 발달해 1m에 이르는 물체조차 식별하는 세상에 토문강이 사도백하인지 오도백하인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이렇게 보면 토문강은 정말이지 미스터리한 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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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도오딧세이]“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2009. 09. 24 13:42)
- 2009. 09. 24 13:42 문화/과학
- <백두산 국경연구>를 펴낸 서길수 서경대 교수.신문의 칼럼에서 자주 인용되는 묘비명이 있다. 유명한 극작가인 버너드 쇼의 묘비명이다.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간도협약 100주년을 지나면서 정부가 보인 반응을 본다면 이 묘비명이 정확한 표현이 된다. 정부는 간도협약 100주년을 지나면서 간도영유권이나 협약에 대한 입장을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국가 예산을 쓰고 있는 동북아역사재단 역시 마찬가지다. 100주년 기념 학술 세미나는 시민단체인 간도되찾기운동본부에서 회원들이 한 푼 두 푼 낸 돈으로 마련됐다. 모든 것이 민간인들이 알아서 해야 할 몫으로 남았다. 고구려 역사 전문가인 서길수 서경대 교수가 올해 5월에 펴낸 <백두산국경연구>(여유당 출판사)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맨 마지막에 등장한다. 단락의 제목은 ‘한국의 국경문제 의식과 대응전략’이다. 우리도 국경문제 용의주도하게 대처해야 이런 비사를 이야기하는 것은 막대한 국가 예산을 쓰고 있는 관련 단체에서 바로 역사적 영토에 관한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연구를 해야 하지만 여기에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예산이 많기 때문에 엄청난 데이터를 쏟아내고 있지만 중국의 역사적 영토에 대한 연구에 대응할 만한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소프트웨어가 없기 때문이다. 당시 이 논문의 주제가 되는 조·중 국경 문제에 대해서도 공동 연구를 제안했다. 그러나 한마디로 “우리가 이미 하고 있다”며 거절했다. 그러나 3년이 다 돼 가는 현 시점까지도 연구 결과는 발표되지 않고 있다. 이처럼 전문가와 전문 단체를 철저히 외면하면서 중국의 용의주도한 국경문제에 대처할 수 있을지 참으로 걱정된다. 그동안 동북아역사재단이 고구려와 조·중 국경 문제에 대해 중국의 서적을 많이 번역해 소개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 책만 번역할 뿐 한·중 국경 문제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와 대책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몇 년 전 한 간도 연구가로부터 하소연을 들은 적이 있다. 고려시대의 공험진·선춘령에 대한 글을 쓴 한 노학자가 잠을 못 이뤘다는 것이다. 노학자의 글을 반박한 중국 학자의 책을 읽고 나서였다. 한국어로 번역한 이 책에는 중국 학자의 주장을 번역해 놓았을 뿐 노학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글이 없었다. 번역서이기에 당연한 결과를 낳았겠지만 국가의 세금을 받고 운영하는 연구기관에서 중국 학자의 논리를 소개하는 데 주력하고, 한국 학자의 논리는 반박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한국 측에서 종합적인 연구와 대책을 내놓지 않은 채 중국의 책만 열심히 번역하다 보면 이런 결과는 계속 양산될 것이다. 정부와 정부 기관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연구와 논리 개발을 미루고 학자들이 알아서 연구해 주길 바란다면 어떻게 될까. 그저 그들이 열심히 해 주기를 기대해야 할까. <백두산 국경연구>의 책머리 마지막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1990년에 백두산을 처음 접하고 이제 20년이 된다. 그동안 백두산을 30번쯤 올라 다니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수차례 다니면서 언젠가 그 결과를 책으로 내려는 결심을 했는데, 비로소 첫 책을 내게 되었다. 원래는 백두산과 압록강·두만강에 대한 책을 내려고 참 많은 자료를 수집했는데 이 정도에서 그만 접으려고 한다. 금년 정년퇴직과 함께 새로운 길을 가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을 바탕으로 해서 앞으로 많은 학자들이 더 좋은 연구 결과를 내 주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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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도오딧세이]간도는 영토분쟁지역(2009. 09. 17 14:08)
- 2009. 09. 17 14:08 국제
- 8월25일 간도협약 100주년 학술대회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렸다. 2009년 9월4일 간도협약을 맺은지 100년이 되는 날이 스쳐 지나갔다. 100주년을 보내면서 얻은 성과는 두 가지다. 하나는 민간단체인 간도되찾기운동본부가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사법재판소에 간도의 영유권이 한국에 있음을 주장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간도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고조됐다는 점이다. 간도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고조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3년 중국의 동북공정 추진이 알려진 후 동북공정이 간도의 영유권을 공고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자 간도에 대한 관심이 처음으로 높아졌다. 이때 민간단체인 간도되찾기운동본부가 꾸려졌다. 그러나 이때의 계기가 곧바로 간도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거나 간도 정책이 적극적으로 모색되거나 하는 대응책으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이번 역시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일시적으로 세간의 관심을 끌다가 아무런 성과없이 사그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100주년을 맞아 어떤 공식적인 견해도 밝히지 않았다. 정부 차원에서 간도에 대한 정책은 여전히 없다는 것을 확인했을 뿐 아니라 정부가 앞으로 전향적인 정책을 마련할 가능성조차 보이지 않았다. 100주년을 맞아 간도되찾기운동본부가 마련한 8월25일 학술대회에서 국제법 전문가이자 간도 전문가인 인천대 노영돈 교수는 “간도협약이 무효라는 것은 간도가 영토분쟁지역이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간도협약 무효가 곧바로 ‘간도가 우리 땅’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간도는 대다수의 국민들이 잘 모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알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간도는 우리 땅”, “간도는 중국 땅”이라는 견해로 갈라졌다. 그렇다면 간도는 영토분쟁지역이라고 하면 어떨까. 간도를 모르고 있는 사람이나 간도가 중국 땅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두만강과 압록강이 우리의 북방경계선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간도협약이 무효라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의 북방경계선이 두만강과 압록강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두만강과 압록강 너머 간도는 한국과 중국의 영토분쟁 지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간도협약 무효 주장이 전쟁 일으키지 않아” 이날 학술대회에서 연세대 김우준 교수는 간도 관련 논쟁에 핵심을 찌르는 발언을 했다. 김 교수는 “간도협약 무효를 주장한다고 해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영토 주장이 반드시 전쟁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영토 주장은 말 그대로 자국의 영토가 어디까지라는 견해를 밝히는 것이며, 양국의 견해가 다르다고 해서 해결 방식이 전쟁밖에 있다는 것은 아니다. 양국의 대화도, 협상도, 타협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막연히 ‘간도는 우리 땅’이라는 주장이 한국과 중국 간에 외교적 갈등만 일으켜 전쟁을 일으킬지 모른다고 불안해 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본다면 간도협약 100주년 이후 간도 연구와 정책이 나가야 할 방향은 뚜렷하게 보인다. 간도의 역사에 대한 치밀한 연구와 간도에 대한 뜨거운 관심이 선행돼야 한다. 그리고 간도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간도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한국에도 도움이 될 뿐더러 나아가 중국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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