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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생각한다]‘감금 쇼’를 벌이는 인권위원
[오늘을 생각한다]‘감금 쇼’를 벌이는 인권위원(2023. 11. 15 07:00)
2023. 11. 15 07:00 사회
2022년 7월 1일, 국가인권위원회에 군인권보호관이 설치됐다. 군인권보호관 출범식에는 군에서 자녀를 잃은 유가족이 여럿 자리했다. 군에서 발생한 숱한 사망 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진 기구였기 때문이다. 2014년 윤 일병 사건 이후 10여 년간 유가족들이 국회와 거리를 다니며 입법을 촉구한 결과이기도 했다. 출범식에 참석한 유가족들은 저마다 눈물을 닦았다. ‘이런 제도가 좀더 빨리 생겼더라면’ 그런 무망한 회한으로. 인권위 역시 이들의 아픔을 잊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유가족과 함께 인권위 건물 10층에 ‘군인권보호관’ 현판을 걸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지금, 현판식 기념사진에 담긴 유가족은 전부 군인권보호관으로부터 수사 의뢰된 상태다. 윤석열 대통령이 임명한 김용원 군인권보호관은 지난 10월 18일 유가족들이 자기 사무실에 난입해 자신을 감금하고 공무집행을 방해했다며 이들을 모조리 경찰에 넘겼다. 하지만 현장에 있었던 이들과 당시 상황을 촬영한 영상에 따르면 유가족들은 김 보호관 사무실에 들어가기는커녕 문조차 열어보지 않았다. 이날 유가족들이 찾아갔던 사람은 김 보호관과 같은 층에서 집무를 보는 송두환 인권위원장이었다. 이들은 군인권보호관이 정파적 이해관계에 매여 군 인권침해 피해자들을 외면하고, 고(故) 윤 일병 사망 사건 조사를 중단·각하시킨 상황에 대해 기관장인 위원장의 해법을 듣고자 인권위를 찾았다. 아무도 자기 방에 들어오지도, 문을 막지도 않았건만 김 보호관 스스로 밖에 나오지 않았던 것뿐이다. 그런데 유가족들이 위원장을 만나고 돌아간 뒤, 마치 여러 사람이 자신에게 위력을 행사하며 가둬둔 양 일방적 언론플레이를 하며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올해 들어 인권위는 하루도 조용할 날 없이 엉망진창이다. 지난 11월 8일, 국회 운영위원회에서 국가인권위원회 국정감사가 열렸다. 증인석에는 장관급 위원장과 차관급 상임위원들이 나란히 앉았다. 보통 국감에서는 의원과 감사 대상 기관 간에 공수 관계가 형성되는데 이날 감사에서는 위원장과 김 보호관이 여야 의원의 입을 빌려 서로 다투는 씁쓸한 싸움판이 벌어졌다. 여의도 정쟁의 대리전이 인권위에서 벌어진 셈이었다. 그뿐인가. 요즘 김 보호관은 마음대로 기관 엠블럼을 걸고 출입기자들에게 공식 보도자료인 양 자기 입장문을 배포하고 위원장을 비방한다. 마치 대법관들이 대법원장의 재가도 받지 않고 대법원 명의로 현안에 대한 개별 입장을 발표하는 격이다. 세상 어느 국가기관에서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일부 인권위원들의 패악은 이제 인권위를 찾은 피해자와 유가족들에게까지 번지고 있다. 금도를 넘었다. 지금의 패악을 막지 못한다면 앞으로의 인권위는 언제나 지금과 같은 난장판일 것이고, 그렇게 점차로 무력해질 것이다. 도와달라고 했더니 수사를 의뢰하는데 이제 어느 피해자가 인권위를 찾아가겠는가. 인권위 스스로 이 기막힌 수사 의뢰부터 철회시켜야 한다.
오늘을 생각한다
[신간]말의 세계에 감금된 것들 外(2020. 08. 21 15:20)
2020. 08. 21 15:20 문화/과학
ㆍ여성 서사로 본 국가보안법 <말의 세계에 감금된 것들> 홍세미 외 지음·정택용 사진 오월의봄·1만8000원 아직도 남아 있는 국가보안법이 어떤 역사를 만들어 왔는지를, 여성들의 경험에 귀 기울여 기록했다. ‘국가보안법을 박물관으로’라는 시민운동을 기획한 저자들이 국가보안법이 폐지된 이후 국가보안법 박물관이 만들어질 때를 상정해 국가보안법과 관련된 목소리들을 기록하고 보존해 둬야겠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프로젝트다. 오랫동안 한국사회의 현장에서 기록 활동을 펼쳤던 이들은 그동안 주목받지 않았던 ‘여성 서사로 본 국가보안법’ 문제와 직면해 이야기를 풀어간다. 책에 담긴 목소리의 주인공들은 1970년대 대학생이었던 이들부터 이제 막 40대에 이른 이들까지 다양하다. 1980년대 ‘5공’ 시절부터 최근 10년도 안 된 사건의 피해 당사자이거나 관계자들이다. 국가보안법 투쟁의 산증인으로 언제나 최전선에 섰던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어머니들부터 탈북민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를 망라한다. 국가보안법과 맞닥뜨렸을 때 보통의 어머니, 아내, 대학생, 시의원, 탈북민이었던 이들은 피해자에서 정치적 행동에 앞장서는 새로운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부터 중앙합동신문센터까지 자신이 고문의 당사자가 되거나 가족이 처참하게 체포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고통은 시대를 넘어 국보법이 있는 한 계속돼왔다. 그럼에도 이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성 중심의 투쟁 서사에서 한발짝 넘게 밀려나 있었다. 그렇기에 책은 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려면 새로운 기준과 시각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물음은 국가보안법만이 아니라 국가체제 자체가 여성을 어떤 위치에 놓고 역사의 바깥으로 내몰았는지로 이어진다. 체제의 안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음지에서 권력을 작동시킬 빌미를 만드는 국가에 누구보다 당당하게 맞선 여성들을 증언한 책이다. ▲오후의 이자벨 |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밝은세상·1만5000원 삶에서 만나는 사랑에 대해 솔직하고 파격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소설이다. 번역 일을 하는 프랑스의 기혼 여성 이자벨이 로스쿨 입학을 앞두고 파리에 여행 온 샘을 만나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오랜 세월 동안 어떻게 사랑을 이어가는지를 그린다. ▲비혁명의 시대 | 김정한 지음·빨간소금·2만원 연이은 분신정국으로 불붙은 ‘1991년 5월 투쟁’은 군사독재의 잔재를 몰아내려는 제2의 6월항쟁이었지만 갑자기 소멸하고 말았다. 1991년 5월 이후를 비혁명의 시대라 부르는 저자는 그때의 실패를 통해 다른 미래를 여는 열쇠를 발견하기를 기대한다. ▲숫자에 약한 사람들을 위한 통계학 수업 | 데이비드 스피겔할터 지음·권혜승 외 옮김 웅진지식하우스·2만2000원 빅데이터의 시대에 가장 각광받는 학문 영역 중 하나가 바로 통계학이다. 데이터에서 의미 있는 패턴과 관계를 연구하는 통계학을 통해 일상의 소소한 호기심부터 사회·경제·과학·의학 분야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유용한 도구를 활용할 방법을 배운다.
신간
[원희복의 인물탐구] 장애와인권 발바닥행동 활동가 여준민 “감금의 야만을 끊어라”(2018. 06. 19 15:40)
2018. 06. 19 15:40 사회
인간의 삶이 가장 참혹하고 피폐해지는 곳을 꼽으라면 단연 ‘수용소’일 것이다. 특히 본인 의사나 범죄 여부와 상관없이 끌려가는 강제수용소는 최악이다. 영화 <도가니>의 배경이 된 광주 인화학교, 부랑아 수용소였던 부산 형제복지원, 일제강점기 선감학원 등 수용소의 역사는 곧 처참한 인권유린의 역사이기도 하다. 돈 주고 하라고 해도 고개를 가로 저을 그런 참혹한 곳만 찾아다니며 기록하고, 회상하고, 저항하는 사람이 있다.  장애·인권단체 ‘장애와인권 발바닥행동’(발바닥행동)에서 일하는 활동가 여준민씨(44)다. 2005년 만들어진 발바닥행동은 바로 그 비인권적 수용시설의 역사와 부조리 문제를 제기하고 탈(脫)시설운동을 전개하는 시민단체다. 발바닥행동은 지금까지 했던 시혜적 장애운동이 아닌 적극적 권리를 찾자는 진보적 장애운동단체다. 단체의 회장이나 대표도 없이 그저 수평적 ‘활동가’로 운영된다. 그는 오래전부터 문제가 된 부산 형제복지원 문제에 아직도 매달리고 있다. 그는 형제복지원이 “다 끝난 문제가 아니다”라며 이렇게 말했다.  탈시설운동 전개하는 시민단체 “1987년 이 사건이 알려지면서 설립자가 구속되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부산시가 형제복지원 법인을 해산했지만 설립자가 불복해 오랜 소송이 진행된 끝에 법인이 완전히 해체된 것은 불과 2015년이다. 형제복지원은 국가가 필요해 만든 시설로 국가가 사과하고 배상해야 한다. 수용돼 있던 사람 중 의문사한 사람은 그 진실을 가리고, 후유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정신적 치료도 해야 한다.” -공권력에 의한 감금과 배제는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서양에서 근대까지 일반화됐던 일종의 국가시책 아닐까. 국가는 ‘사회적 안녕을 위해’라는 명분으로 그들을 배제하고 감금했다. 아마 당시에는 희생이라고 인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 국가는 형제복지원 같은 시설이 필요했다. 군부독재 시절 내무부령으로 부랑인이나 껌팔이, 구두 닦는 아이를 모두 잡아 가두고, 자치단체는 지원했다. 그것을 당연시했다. 형제복지원도 재판에서 최종적으로 감금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국가는 부랑인을 보호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들이 아닌 사회를 보호한 것이다. 부랑인은 잠재적 범죄자 내지는 쓰레기 같은 존재라는 인식을 깔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에 의한 집단수용은 일제강점기 아니, 그 이전 조선시대에도 있었을 것이다. 발바닥행동에서 다루는 집단수용 역사는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일제강점기부터 다룬다. 1941년 일제는 경기도 안산 제부도 옆의 섬 선감도(현재는 육지화됨)에 부랑아들을 모아 선감학원을 만들었다. 아이들을 잡아다 군사훈련을 시켜 학도병으로 전쟁터에 보내려 했던 것이다.” 최근 배제와 감금 사례를 보면 80년대 초법적인 삼청교육대도 있지만 윤락여성을 영장도 없이 강제로 1년간 구금할 수 있는 ‘윤락행위 등 방지법’이 90년대 초반까지 존재했다. 법에는 ‘윤락행위를 할 우려가 있는 여성’이라고 애매하게 돼 있어 멀쩡한 여성도 마구 끌고가 강제수용했다. 소위 문민정부 시대 국회에서 통과된 합법적인 법이 이 정도였고, 헌법재판소도 이런 법의 위헌성에 눈을 감았다. 게다가 이를 운영하는 종교복지법인은 ‘종교적 사명감으로 윤락녀를 교화시킨다’고 주장했다. 법과 종교의 이름으로 인권유린이 마구 자행된 것이다. 지금도 집단수용시설에서 인권유린은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다. 과거 수용소·기술원에서 복지원으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여씨는 “우리가 국가인권위 연구용역을 받아 장애인 시설 45곳, 정신요양시설 30곳의 실태조사를 했다”면서 “수용돼 있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니 그게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럴 것이다. 이런 수용시설은 수용된 장애인 당사자보다 가족이나 보호자 편의를 위해 만들었기 때문이다. 여전한 집단수용시설 인권유린 그는 “한국에서 1961년 생활보호법·아동복지법, 1971년 사회복지법이 만들어졌다”면서 “60~70년대 복지란 국가가 어떤 시설을 만들어 어떻게 수용하느냐에만 관심을 가졌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가출청소년, 노숙자, 장애인, 치매노인 등에 대한 복지는 어떻게 한 곳에 모아, 좋은 시설에서, 효율적으로 관리하느냐에 매달리고 있는 ‘야만적 사회’라고 분노한다. -그나마 운영되는 복지법인 대부분이 사회에 봉사한다는 종교재단에 위탁돼 운영된다. 그런데도 인권유린 문제가 끊이질 않는 이유는 뭔가. “복지법인의 90%가 종교재단이다. 종교의 선한 의지가 돈맛을 봤기 때문인가… 시설에 수용된 사람들의 수가 돈이다. 그러니 복지재단은 들어온 수익으로 시설을 늘려 또 지원을 받는 악순환을 계속하고 있다. 한 불교복지법인은 따로 들어오는 후원금만 100억원이나 된다고 한다. 우리 사회복지법인 수가 1600개가 넘고 기본자산이 10조원이 넘는다. 그것도 오래된 통계다.” -2001년 국가인권위원회를 만든 취지가 이런 수용시설에서 일어나는 인권유린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인권위 설립 17년이 됐는데 인권위가 제 기능을 못하고 있는 것 아닐까. 시설에 수용됐던 사례를 폭로·고발하는 각종 보고서와 책자. “인권위 기능이 약하다. 적은 인력으로 조사하기 어렵고… 그냥 권고만 할 따름이다.” -그렇지만 인권위 권고는 상당히 수용률이 높다. 인권위가 복지부나 자치단체에 권고하면 대부분 이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인권위 권고수준이 약하다. 시설 폐쇄를 명령하기보다 가해자 처벌 중심으로 이뤄진다. 시설과 복지부는 오랜 유착관계, 이를테면 ‘복지마피아’가 있다. 게다가 복지시설은 지역에서 일종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다. 시설 운영자인 복지재단 이사장은 지역 유지로 자치단체장과 유착되고, 지역 복지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시설을 폐쇄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렇다면 시설에서 인권유린을 막을 수 있는 근본적 방법은 뭔가. “시설이라는 곳은 구조적으로 보호가 아니라 학대가 일상적으로 벌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예 탈시설을 요구하는 것이다.” 대담한 주장이다. 발바닥행동은 2005년부터 미신고시설 인권상황 실태를 조사했다. 거주인의 욕구를 직접 듣고, 시설 안에서 벌어지는 감금·폭행·횡령 등 인권유린과 법인의 비리와 싸웠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광주 인화학교 사건, 서울 인강원 사건, 인천 해바라기 사건, 남원 평화의집 사건,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등이다. 여기에 인권활동가와 교수·변호사·의사가 함께 하면서 법과 제도를 개선시키는 운동을 했다. 이를 인정받아 2013년 호루라기 인권상, 2014년 서울시 복지대상 최우수상, 2015년 한국장애인인권 대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시설에서 인권유린은 좀처럼 근절되지 않고 있다. 결국 발바닥행동은 ‘복지’라는 가면 뒤에서 자행되는 인권유린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모든 수용시설을 폐지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발바닥행동은 2012년부터 광화문 지하도에서 무려 1823일간 농성을 지속했다. 요구는 세 가지, 수용시설 폐지, 부양의무제 폐지, 장애등급제 폐지였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지난해 9월 복지부 장관이 직접 와서 요구조건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해 농성을 풀었다. 여씨는 “이 요구사항 이행을 위한 민·관 협의체를 구성했는데 실무회의가 지지부진하다”고 한탄했다. 그 이유는 복지부 공무원들은 여전히 수용시설을 인권이 아닌, 시혜적 관점으로 보기 때문이란다. 사실 모든 시설을 없애라는 이들의 주장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장애인이나 정신질환자, 치매노인 시설을 폐쇄하면 이 모든 환자를 가족이 직접 돌봐야 한다는 얘기다. 치매·장애노인 모두 ‘평소 살던 집에서 자식들에게 둘러싸여 죽고 싶다’는 소망을 왜 자식들이 모르겠나.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지금까지 국가는 시설수용 서비스밖에 선택할 수 없게 만들어서 그렇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강요”라며 “방문케어를 강화하는 등 국가가 다양한 서비스를 마련해 가족이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복지’라는 가면 뒤에서의 인권유린 그는 “탈시설운동은 우리나라 복지 전달체계를 뒤집어엎는 운동”이라며 “복지에 쓰이는 돈과 사람이 시설의 안이 아닌 밖으로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발바닥행동은 ‘탈시설 자립생활 권리’를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다. △나는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권리가 있다 △나는 살고 싶은 곳에서 살 권리가 있다 △나는 시설에서 나와 지역에서 가족과 함께 살아갈 권리가 있다 △나는 원하는 삶을 위해 저항할 권리가 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사람과 교제하고 가정을 이룰 권리가 있다 △나는 자유롭고 존엄한 시민으로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필요한 사회보장과 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있다. 그는 “지금까지 이런 시설이 왜 생겼는지에 대한 역사를 정리한 적도, 고민한 적도 없어 탈시설운동이 어렵다”고 말했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발바닥행동은 우리 현대사에서 ‘빈민 청소’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시설 수용의 역사를 연구·발표하는 강좌와 그 현장을 둘러보는 인권기행도 계획하고 있다. 그 대상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감화원과 한국전쟁기의 전쟁고아 보육원, 난민 및 부랑인 수용시설, 도시빈민 수용과정에서 불거진 광주대단지 사건, 한센병 환자를 수용한 소록도 등이다. 여준민씨는 1974년 원주 태생으로 92년 대학(상지대)에 입학, 총학생회에서 활동했다. 남매가 총학생회에서 통일운동을 하다 오빠만 구속됐다. 대학원(성공회대)에서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97년부터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 일하다 2005년 동료 5명과 함께 발바닥행동을 만들었다. 발바닥행동은 회원 960명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국가나 기업 후원을 받지 않는다.(후원:국민은행 752601-04-199710 장애와인권 발바닥행동) 그는 “활동가들이 최저임금도 못 받다가 그나마 문재인 정부에서 최저임금을 받는다”고 말했다. 그는 문재인 정부가 지난 대선 때 내세운 ‘탈시설 지원센터 지역별 건립’ 공약도 지켜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민주화운동하던 사람들은 장애인·복지 문제에 감수성이 뛰어나지 않은 것 같다”면서 “그들은 여전히 운영자 입장에서, 시혜적 관점에서 복지를 본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그와 함께 학생운동을 하다 구속됐던 오빠는 지금 문재인 정부 청와대에서 근무하고 있다.
원희복의 인물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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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본 세상]-감금된 사람, 하루 동안의 자유가 생긴다면(2017. 12. 04 16:53)
2017. 12. 04 16:53 문화/과학
오오츠키는 다르다. 그는 담배를 한 대 피우면서 공원에 앉아 잡지를 읽거나 낮잠을 자기도 하고, 옷에 묻은 보풀을 꼼꼼히 떼어내기도 한다. 소중한 시간을 저렇게 보내도 되나, 하고 답답할 지경이다. 서른다섯이 되도록 아직 여행을 가본 일이 거의 없다. 여행이란 나에게 잘 버티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것, 그 이상의 무엇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이 여행을 가자고 말하면 “그 돈으로 집에서 짜장면 시켜 먹어요”라고 말했다고 하고, 학생시절에 수련회나 MT를 가면서는 버스에서 2박3일 동안 내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기도하기도 했다. 대학원생이 되어 독립하고서도 여행은 여전히 삶의 선택지가 아니었다. 공부하느라 바빴다고 하면 민망한 핑계가 될 테고, 길에 돈을 버리는 의미 없는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가서도 ‘집엔 언제 가지…’ 하는 심정이었다. 그런 종류의 인간이었으니, 삶을 여행한다는 감각 비슷한 것조차도 별로 없었다. 「일일외출록 반장」(국내 미발매)의 원작 단행본 표지./일본 講談社바깥 세계로 24시간 외출할 수 있는 권한 만화 의 주인공 오오츠키는 나와는 다른 태도로 삶을 살아간다. 그는 ‘생활여행자’로 명명될 만하다. 우선 오오츠키라고 하면 생소하고, 에 등장하는 ‘E반 반장’이라고 하면 기억할 만한 이들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카이지가 도박 빚을 변제하기 위해 지하의 강제노동시설에 들어갔을 때 만나서 도박을 벌이는 인물이 바로 오오츠키다. 만화에서는 카이지가 오오츠키를 파산(파멸)시키는 것으로 종결되지만 에서는 카이지를 만나기 이전의 오오츠키의 삶을 조명한다. 말하자면 스핀오프작, 기존의 작품에서 등장인물이나 설정을 그대로 가져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이다. ‘악마적 재미’, ‘압도적 유쾌함’ 등으로 평가 받고 있는 이 작품의 재미는 그 주인공 오오츠키가 거의 홀로 견인해 낸다. 오오츠키 역시 빚을 변제하기 위해 강제노동시설에 감금된 처지이지만, 그 안에서 반장이라는 직책을 맡았다. 말하자면 노동자들을 관리하는 ‘중간관리자’ 정도 되는 역할이다. 그래서 각종 특혜를 누리는 것은 물론 여러 이권에도 개입한다. 특히 일주일에 한 번 주사위 도박장을 열 권한도 가지고 있는데, 사기도박을 벌여서 지하시설의 돈을 긁어모은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그는 ‘노동장려옵션, 일일외출권’을 산다. 바깥 세계로 24시간 동안 외출할 수 있는 권한을 50만 페리카(지하 노동자의 몇 달치 월급에 해당하는 돈)를 내고 사는 것이다. 은 오오츠키의 일일 외출에 대한 기록이다. 감금되어 노동하던 사람에게 하루 동안의 자유가 주어진다면, 그것은 엄청난 해방감으로 다가올 것이다. 외출자를 감시하는 ‘검은 양복’들은 그들을 두고 “대부분이 약간에 불과한 시간마저 허비하고 싶지 않아 허둥지둥거리다가 질주. 파친코나 캬바클럽, 술, 고기, 여자!”라고 그 일반적인 모습을 표현한다. 단순히 비교해서는 안 되겠지만, 나는 군복무 시절에 주어진 3박4일의 첫 휴가를 잊을 수 없다. 부대를 빠져나오자마자 터미널로 갔고,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를 3개나 사서 그 자리에서 다 먹었다. 곧 PC방에 가서 가장 편한 자세로 앉아서 입대 전부터 하던 ‘프리스타일’이라는 농구게임을 했고 저녁에는 오랜 친구와 단골술집에 가서 스페셜 튀김 안주를 시켜놓고는 양껏 먹었다. 그렇게 먹고, 게임하고, 술을 마시는 데 꼬박 시간을 보냈다. 복귀하는 날에 찾아온 우울감은 글을 써서 밥을 먹고 살게 된 지금도 표현해 낼 길이 별로 없다. 검은 양복들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시간 종료를 알리면 떼를 쓰며 마구 소리를 지르기까지… 흡사 어린애를 보는 것 같더군요” 하고 말한다. 누구나 감금된 삶을 원하지 않고, 어쩌다가 시간제 자유가 주어지면 그 안에서 욕망을 발산시키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오오츠키는 다르다. 그는 담배를 한 대 피우면서 공원에 앉아 잡지를 읽거나 낮잠을 자기도 하고, 옷에 묻은 보풀을 꼼꼼히 떼어내기도 한다. 소중한 시간을 저렇게 보내도 되나, 하고 답답할 지경이다. 함께 외출을 나온 동료 누마카와가 어서 움직이자고 조급해하자 오오츠키는 벤치에 놓여 있던 잡지를 내밀면서 “일일외출을 만끽하려면 먼저 조급해하지 말 것, 마음의 여유를 가지는 게 가장 중요해” 하고 말한다. 둘은 1시간 넘게 잡지를 탐독하고는 정답게 웃으며 만화 얘기를 나눈다. 해가 지고서야 식당으로 자리를 옮긴 둘은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고, 누마카와가 “모처럼이니 제일 비싼 생선회 모듬을…” 하고 제안한다. 그러나 오오츠키는 그에게 어설프다면서 “지금 넌 밖에 나온 흥분으로 진짜 먹고 싶은 걸 놓치고 있어…. 네 고향은 규슈의 미야자키니까 네가 먹고 싶은 건 바로 치킨 난반이야” 하고 말한다. 오오츠키는 지하에서든 지상에서든 ‘오오츠키로서’ 살아간다. 그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일상을 여행한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묻고, 치열하게 고민하고,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한다. 타인이나 공간의 분위기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경험과 분석에 따라 움직인다. 그래서 그의 일일외출은 마치 일상처럼 잔잔하지만 본인에게는 최대의 만족을 주는 것으로 귀결된다. 지하로 돌아가서도 그는 그러한 태도를 견지하는데, 마치 지하로 일일외출을 나온 것처럼도 보인다. 그런 그의 모습에는 그를 감시하던 검은 양복들조차 매료된다. 일일외출을 나와서도 여전한 여유와 자신의 품격을 유지해 나가는 모습에 감탄하고, 그와 함께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시며 즐기기도 한다. 현재를 여행하고 즐기는 사람 한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하자면, 외출을 나온 오오츠키는 좋은 양복을 한 벌 구입한다. 검은 양복들은 그가 번듯한 모습이 아니면 못 들어갈 만한 고급 음식점에서의 한 끼를 노리고 있다고 짐작한다. 그러나 그는 ‘서서 먹는 소바집’, 샐러리맨이 애용하는 평범한 가게에 들어간다. 거기는 마치 전쟁터와 같아서, 모두가 서서 급히 소바를 먹는 가운데 주문을 받는 주인도 정신없이 바쁘다. 오오츠키는 비어 있는 테이블에 느긋하게 앉아서 고로케와 야채튀김과 새우튀김을 시키고, 시금치에 반숙을 올려줄 수 있는지 묻는다. 그런 여유를 보이는 그에게 몇몇의 이목이 집중된다. 오오츠키는 그런 그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생맥주를 한 잔 추가하고, 생맥주가 큰 잔에 담겨 나오자 재킷을 벗고는 그것을 정말 맛있게 마신다. 주변의 모두가 그를 보며 침을 삼킨다. 누군가가 참지 못하고 “나도 생맥주 하나…” 하고 말하자 옆에서 그의 상사가 “멍청아! 아직 남았어 외근!” 하고 그에게 면박을 준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오오츠키는 “생맥주 큰 잔으로 한 잔 더!” 하고 외친다. 모두는 “크윽…” 하는 신음소리를 내며 자신들의 소바를 먹는다. 양복을 입은 그는 대낮부터 술을 마셔도 되는 회사의 중역처럼 보이고, 순식간에 그 가게의 왕으로 군림하게 되는 것이다. 오오츠키가 지하에서 모은 돈으로 빚을 갚지 않고 그처럼 외출권을 사는 이유는 아마도 지하와 지상을 오가는 그 생활이 만족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지하에서 그는 꽤 괜찮은 권력을 가지고 있고 거기에 머무르는 편이 굳이 지상에서 다시 밑바닥 삶을 사는 것보다 나을지 모른다. 동료들을 기만하는 그의 삶은 사실 제대로 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지하에서든 지상에서든 온전한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지내는, 특히 일상을 여행하는 그의 태도만큼은 배워야 할 가치가 있다. 나는 얼마 전 일본으로 가기 위한 비행기표를 예약했다. 첫 해외여행으로 일본을 선택한 데는 오오츠키의 영향도 조금 있을지 모르겠다. 일본의 어느 작은 술집에 들어가서 그가 먹던 방어회라든가 치킨 난반을 생맥주와 함께 먹고 싶다. 왠지 메뉴판을 보고 있자면 오오츠키가 옆에 앉아서 “네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마음을 가라앉히고 스스로에게 물어봐. 정답이 나올 거야” 하고 예의 그 악마적인 미소를 보낼 것만 같다.
만화로 본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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