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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24) 나마스테, 네팔!
- 2014. 11. 25 15:12 육아/교육
- 아이들을 두고 여행을 다녀왔다. 목적지는 네팔. 그곳의 어머니를, 그곳의 딸들을 만나면서 잠시 아이들 걱정은 접어두기로 했다. 열흘 만에 다시 만난 아이들. 은산이와 은설이는 떨어져 있는 동안 부쩍 성장해 있었다. 때때로 떨어짐은 내 아이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닫게 하고, 엄마 역시 성장하게 한다. 엎친 데 덮친 격 “네팔에 가서 열흘 정도 촬영해야 하는데 괜찮으세요?” “저야 당연히 좋죠!” 섭외를 위해 걸려온 작가의 전화에 워낙 여행을 좋아하는지라 앞뒤 잴 것도 없이 일단 흔쾌히 수락했다. 게다가 남편과 함께 가는 촬영이라고 하니 금상첨화가 아닌가! 호시탐탐 어느 나라를 갈까 궁리하는 내게 해외 촬영 제안은 육아휴직 후 받는 선물이나 다름없었다. 얼굴은 싱글벙글, 벌어진 입은 다물어지지 않고 이미 마음은 인천공항에서 이륙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룰루랄라 하다가 아뿔싸! 아이들 생각이 났다. 세 돌이 얼마 남지 않은 첫째 녀석은 요새 한창 엄마한테 온갖 사랑을 쏟고 있는데 과연 떨어질 수 있을까? 기껏해야 하루 정도 할머니, 할아버지랑 자본 것이 전부인데…. 어디 그뿐인가? 이제 겨우 7개월을 넘긴 둘째 녀석. 이유식을 하루에 두 번 먹긴 하지만 여전히 모유 수유 중인데다 엄마, 아빠랑 단 한순간도 떨어져본 적이 없는데 불안해하지는 않을까? 여러 방법을 고민해봤지만 기댈 곳은 부모님뿐. 결국 양가 부모님께 도움을 요청했고, 당신들은 자식들의 일을 위해 열흘간의 고생을 기꺼이 해주기로 하셨다. 가장 큰 문제가 해결됐으니 ‘이젠 여행 가방만 싸면 되겠지?’ 했다. 그런데 웬걸? 출국 날짜는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가방은커녕 애들 보낼 짐도 챙기지 못했다. 게다가 한 달째 감기를 달고 있던 설이가 고열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폐렴 전 단계까지 갔다는 의사의 진단이었다. “아마 지난주에 고열이 났던 게 폐렴이 살짝 지나갔던 것 같아요. 아이가 아주 강한데요? 보통 아이들 같으면 입원했을 텐데 장하네요. 그래도 고비가 지났을 뿐이지 당분간은 치료를 받아야 해요.” 출국을 4일 앞둔 날이었다. 촬영을 취소할 수도 없고 진퇴양난이었다. 게다가 이유식을 아침, 저녁으로 두 번 먹고 나머지는 모유 수유를 하던 설이. 신생아 때 젖이 돌지 않아 분유를 먹어본 경험이 있어 분유도 당연히 잘 먹겠거니 했는데, 먹지를 않는다. 혹시 맛이 없어서 그런 건가 싶어 다른 종류의 분유를 사다 날랐고, 혹시나 애 엄마인 친구들은 알까 싶어 여기저기 물어보기도 했지만 이런저런 방법을 시도해보기엔 내게 시간이 없었다. 결국 떠나기 전날까지도 설이는 분유를 거부했다. 설상가상 산이는 감기에 중이염까지 겹쳤다. 아이들에게 중이염은 흔한 병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산이가 열흘 동안 지내야 할 곳은 소아과 하나 없는 시골 동네다. 만일 열이라도 나면 응급실이 있는 시내까지 1시간은 가야 하는 곳 말이다. 육아에 대한 정답지까지는 아니어도 참고서쯤은 써서 시부모님께 전달할 생각이었는데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산이는 갈수록 엄마에 대한 사랑이 넘쳐 잘 때도, 일어날 때도 “엄마 사랑해”라고 속삭인다. 내가 없는 동안 매일 밤 엄마에 대한 배신감에 눈물로 베개를 적시면 어쩌나 또 걱정이다. 결국 일어나지도 않은 걱정들에 짓눌려 출국 전날까지 마음속 갈등은 정리되지 않았다. 시간에 떠밀려 출국 전날에야 둘째 설이를 애들 외할머니께, 남편은 첫째 산이를 애들 친할머니께 맡기고 돌아왔다. 집이 무척이나 적막했다. 마음이 물 먹은 솜뭉치처럼 무거웠다. “아까 당신이 산이 데리고 기차역으로 가는 뒷모습을 보는데 울컥하더라고. 꼭 영영 못 볼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결국 운전하면서 한참 울었어. 엉엉거리면서. 설이도 친정집에 데려다주고 나오는데 다행히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랑 잘 놀더라고. 내가 간다고 울지도 않고. 오히려 내 발걸음이 안 떨어지더라고. 당신 올라올 때 은산이는 어땠어?” “할아버지 집에서 열 밤 자면 만날 수 있다고 얘기했더니 알겠다고 하던데? 역시 쿨해. 그런데 이상하게 내 마음은 좀 무지근하더라고.” 우린 그렇게 텅 비어버린 집에서 아이들 얘기로 시간을 채우며 밤을 지새웠다. 그곳에서 만난 어머니 6시간이 걸려 도착한 네팔 카트만두 공항. 히말라야 산맥이 그림처럼 걸려 있는 곳이었다. 시골 간이역 분위기의 공항을 빠져나오면서 아이들 걱정은 내려놓기로 했다. 네팔에서도 마음이 한국에 가 있다면 촬영이 안 되는 것은 물론이고, 오랜만에 얻은 열흘이 허망하게 흘러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이번 촬영은 ‘리얼 체험 세상을 품다’라는 프로그램 촬영차 간 것이었는데, 기본적인 컨셉트는 부부의 배낭여행이다. 거기에 적십자의 초청을 받아 몇몇 마을에서 봉사도 진행하기로 했다. 가장 먼저 간 곳은 카트만두 도심에 위치한 한 빈민가. 그저 얇은 판자로 세운 집들은 비를 겨우 피할 수 있을 정도였고, 전깃불도 없는 집 안은 한낮인데도 어두컴컴했다. 각 집마다 사연 없는 집이 어디 있겠냐마는 그곳 빈민촌의 사연은 과거형이 아닌 현재형이라는 점에서 절망 그 자체였다. 난 그중 남편의 외도로 집과 논밭을 잃고 이곳까지 떠밀려온 한 여인을 만났다. 아픈 시어머니와 딸들을 부양해야 하는 그녀는 눈이 무척 크고 예뻤다. 처음엔 우리의 방문을 웃음으로 맞아줘 마음이 가벼웠는데, 속사정을 이야기하며 이내 눈물을 보여 우리 모두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원망과 그리움, 배신감과 끝이 보이지 않는 가난의 굴레까지 그 모든 것을 한 줄기의 눈물이 말해주는 듯했다. 착잡한 마음으로 그 집을 나서는데 한편에서 남편이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촬영 팀에게 물어보니 아마 아이들 때문에 그런 것 같다고 한다. 둘러보니 집앞 마당에서 한 아기가 흙투성이가 된 채로 앉아 있었다. 나이를 물어보니 설이랑 똑같은 7개월이었다. 그리고 아기의 엄마, 아빠는 이제 갓 스무 살쯤 돼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그들도 역시 이곳 빈민가에서 살아왔고, 아이도 이곳 천막 아래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마실 물조차 마땅히 없는 그곳에서 사는 아이의 건강이 걱정됐고, 서울에 있는 설이의 얼굴이 겹쳐 보이며 괜한 미안함마저 들었다. 신이 계시다면 이곳에 있는 아이들에게 더 많은 축복을 내려주시길,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해주시길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반면 아이들에게 더 나은 삶을 선물하기 위해 중국으로, 사우디아라비아로 돈을 벌러 간 사이에 아이들만 두고 온 집이 산사태로 인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한 한 어미의 눈물도 봐야만 했다. 단 열흘 헤어져 있는 건데도 그리움에 눈물을 쏟았던 나인데, 하물며 몇 년씩 떨어져 있어야 했던 그 부모들의 마음은 오죽했을까. 생살을 베어내는 아픔으로 비행기를 탔을 텐데, 잠시의 이별이 가족에게 더 큰 안락함과 아이들의 밝은 미래를 보장해준다면 이쯤이야 하면서 이를 악물었을 텐데 그들에게 돌아온 건 아이들의 사망통지서 한 장. 산사태로 한 마을이 폐허가 돼 인근 군부대에서 생활하고 있는 재난 지역에서였다. 그녀에게 남겨진 건 공동묘지가 돼버린 고향 마을과 초점을 잃은 퀭한 눈빛이었다. 도저히 그녀에게 이것저것 물어볼 수가 없어 난 멀찌감치 떨어져 서 있었다. 그러곤 죄어오는 가슴을 손으로 세게 두드려가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슬픔과 괴로움이라는 단어로는 미처 설명이 다 되지 않을 끔찍한 고통이, 더 흘릴 눈물마저 사라져버렸을 어미의 마음이 내게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이다. 네팔 소녀, 타미 그렇다고 네팔이 구호단체에서 하는 캠페인 광고처럼 항상 빈곤과 슬픔만 넘쳐흐르는 곳은 절대 아니다. 이번 여행 기간 동안 가장 오래 머물렀던 수수빠체마와티라는 마을은 달랐다. 그곳 역시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지만 웃음과 여유, 행복과 포근함이 가득한 곳이었다. 산이 전 국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지라 상당수의 논밭은 계단식인 다랑논이었다. 우리는 마을로 가기 위해선 등산을 하거나 지프차로 곡예를 하며 올라가야 했다. 추수가 한창이어서인지 온 집안사람들이 다 모여 벼를 베고 이삭을 줍고 새참을 먹는 모습들이 곳곳에서 보였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나마스테” 하고 먼저 인사를 건네면 모두들 밝게 웃으며 “나마스테”로 화답을 해주었다. 마을에 수로를 놓기 위해 여자들은 흙을 나르고 남자들은 돌을 부수고 옮긴다. 갓난아이는 바구니에 담겨 일하는 엄마 옆에 누워 쌔근쌔근 잠들어 있고, 여인들이 모인 곳에선 여지없이 웃음과 수다가 경쾌하게 울려 퍼진다. 학교에선 국어시간인지 저학년 아이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운동장까지 새어 나오고, 좀 더 큰 남학생들은 흙먼지를 날리며 규칙도 없어 보이는 축구를 하느라 열심이다. 구멍가게에선 시간이 멈춘 듯 주인 할아버지가 꾸벅꾸벅 졸고 계시고, 가게 앞 한쪽에서는 연신 닭이 울어댄다. 그야말로 평화가 깃든 동네다. 며칠 머무는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내 마음을 사로잡은 건 단연 아이들이었다. 우리가 방문했다고 마을 주민들은 성대한 잔치를 벌여주었다. 이슬이 채 떨어지지 않은 싱싱한 금잔화를 하나하나 실에 엮어 우리들 목에 걸어주었다. 대표로 누군가 한 사람이 걸어주는 것이 아니라 일일이 모두 걸어주니 수십 개는 목에 건 듯하다. 나중엔 꽃목걸이의 무게에 못 이겨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러곤 이어지는 각종 공연. 그중 열세 살 타미라는 소녀가 그들의 전통춤을 보여주었는데 몸동작이 예사롭지 않았다. 태생적으로 리듬이 몸에 익은 듯한 춤사위랄까? 덕분에 우린 조금 친해졌고 같이 산길을 오르내리기도 했다. 나이상으론 우리가 아줌마, 아저씨로 불려야 마땅하나 난 언니, 오빠라는 단어를 가르쳐줬다. 그랬더니 우리가 떠나는 날에도 언니, 오빠를 크게 외치며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다. 우리가 언제 또 언니, 오빠 대접을 받을 수 있을까! 그리고 또 한 명의 타미가 있었는데 그녀는 열여덟 살 여고생이었다. 수로 만드는 공사장에서 처음 만났는데, 어느 정도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해 함께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친해졌다. 나보다 한참 어린데도 되레 내 걱정을 해주었다. 큰 돌은 무겁다며 작은 돌만 갖다 주고, 자신은 슬리퍼를 신었으면서 등산화 신은 내가 미끄러질까 노심초사했다. 그녀의 눈빛, 몸짓, 손길 하나하나에는 배려의 마음이 그득했다. 그러던 어느 날 타미가 잘 있는지 궁금해 집으로 놀러 갔다가 다친 손을 보게 됐다. 전날 낫으로 벼를 베다가 다쳤다고 했다. 별다른 의약품이 없는지라 그저 천으로 동여맸을 뿐이었다. 난 약이라도 발라줘야겠다는 생각에 헝겊을 풀고 한국에서 가져온 밴드를 붙였는데 생각보다 상처가 깊어 피가 밴드를 빨갛게 물들였다. 그때부터였다. 손을 치료해주겠다고 오래 쭈그리고 앉아 있었던데다, 며칠간의 피로 누적 그리고 엉겨 붙은 피를 보고 쇼크를 받았나 보다. 지금도 내 증상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응급 상황이었다. 갑자기 내가 쓰러져버린 것이다. 피가 쏠리면서 심한 현기증이 나더니 급기야는 서 있을 수 없을 정도였고 손발이 심하게 떨려왔다. 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날 정도로 심하게 떨렸고 열 손가락이 곱아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배 속 내장까지 저려오고 굳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스태프뿐만 아니라 온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 모든 일이 순식간이었다. 남편은 연신 뜨거운 물로 손을 녹여주었고, 난 정신을 놓지 않기 위해 라마즈 호흡을 계속했다. 출산할 때 하던 호흡법이 이런 응급 상황에서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스태프는 자신들이 입고 있던 겉옷을 모두 벗어 내게 덮어주었고, 동네 주민들은 전기 포트는커녕 가스레인지조차 없어 장작불로 물을 끓여 날라주었다. 작은 보건소라도 가려면 1시간에 걸쳐 험한 산길을 내려가야 하는 산골 마을이었기에 앰뷸런스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스태프는 헬기로 이송해야 한다며 서울과 카트만두 등 비상망을 가동했고, 난 이를 악물며 고통을 견뎌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굳었던 손가락이 펴지기 시작하더니 점점 호흡이 편안해졌고 체온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때 끝까지 내 곁을 지켰던 사람이 바로 열여덟 살 타미였다. 혹시 자신의 상처 때문에 내가 쓰러진 건 아닌지, 만일 잘못되면 어쩌나 하고 계속 걱정하며 내 곁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마치 잘 짜인 영화처럼 타미가 나와 똑같은 증상을 보이며 쓰러진 것이다. 1년에 한두 번 있는 의료봉사진이 와서 낫에 베인 상처를 치료받으러 갔는데, 피를 많이 흘리지 않았는데도 심하게 떨며 호흡곤란 증상을 보이는 것이었다. 아마도 극심한 통증으로 인한 쇼크가 아니었을까. 이번엔 내가 그녀의 곁을 지켰다. 그러면서 우리는 서로 마음을 나눈 사이가 됐다. 지금도 내 손엔 그녀가 준 반지가 끼워져 있다. 그 마을을 떠나는 마지막 날 난 내가 입고 갔던 후드 티셔츠를 선물로 줬다. 나를 기억할 수 있는 내 물건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옷 한 벌 살 수 없는 가난한 살림일 텐데도 자신의 손에 있던 은반지를 기꺼이 내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아마 나와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그렇게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없음을 알기에 더욱 아쉬운 헤어짐을 해야만 했다. 다시 고마운 일상으로 열흘간의 일정을 끝내고 드디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할머니들은 손주 한 명씩을 집으로 데려다 주셨다. 집 현관을 열자마자 “엄마” 하고 달려와 내 품에 안기며 다시는 가지 말라고 울부짖을 것이라 생각했다. 우리 애들이 남다른 건지, 내가 너무 영화를 많이 봐서 그런 건지 울기는커녕 한 번씩 깊게 포옹을 하고는 끝이다. 한마디로 ‘분리불안’ 같은 건 없구나 하면서 안심이 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무척 쿨한 녀석들의 반응에 살짝 서운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마음도 잠시. 부쩍 자란 아이들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분유를 안 먹었던 설이는 하루에 이유식을 세 번이나 먹고도 분유를 200ml씩 벌컥벌컥 마신단다. 감기도 다 나아 약을 안 먹는 건 물론이고 잘 웃던 녀석이 아프면서 웃음이 줄어 신경이 쓰였는데, 이젠 눈만 마주치면 방긋방긋 함박웃음을 짓는다. 산이는 노인 회관 어르신들께 꼬박꼬박 존댓말을 써가며 온갖 사랑을 독차지했단다. 할머니가 해주신 밥도 척척 잘 먹고, 자기 전에 엄마가 보고 싶다고 몇 번 말하긴 했지만 울거나 그러진 않았다고. 지금도 가끔 시골 할머니 집에 갈까 하고 물어보면 냉큼 그러겠다고 말하는 걸 보면 진심으로 잘 지내고 온 것 같다. 여행은 떠나기 전 자료를 찾으며 한 달은 들뜬 기분으로 지낼 수 있어 좋다. 현지에선 낯선 사람들, 낯선 풍경이 주는 느낌이 신선해서 좋다. 다녀와선 내가 살고 있는 집도, 지루하게 여겼던 일상도 또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어 좋다. 설이 이유식을 먹이고 있다 보면 아기바구니에 누워 나와 눈을 마주치던 네팔의 아기가 생각난다. 잠자리에 들려고 이불 속으로 들어갈 때면 열여덟 살 타미 손은 다 나았는지, 추위 때문에 더 고생하는 건 아닌지 자꾸 떠오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아이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달은 건 물론이고, 더 나아가 자신만을 생각하는 아이들이 아닌 어려운 나라에 있는 또래의 친구들과도 함께 살아가야 함을 아는 아이들로 자라주길 희망하게 됐다. 그렇게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네팔은 날 한 뼘 더 자라게 해주었고 내게 풍요로운 마음을 선물했다. Profile 고민정은 … KBS 30기 공채 아나운서. 대학 선배이자 열한 살 연상인 시인 조기영과 결혼해 6년 만에 아들 은산이가 태어났고 지난 3월, 둘째 딸 은설이를 만났다. 저서로는 「샹그릴라는 거기 없었다」, 「그 사람 더 사랑해서 미안해」가 있다. *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는 이달을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기획 / 김지윤 기자 ■글&사진 / 고민정>
-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
-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22) 엄마의 보물찾기
- 2014. 11. 03 11:45 육아/교육
- 잘한다, 잘한다. 오늘도 아이는 엄마의 칭찬으로 자란다. 작은 단점보다 꼭꼭 숨어 있는 아이의 장점을 발견해 크게 키우는 능력, 오직 엄마만이 할 수 있는 보물찾기다. 은산이는 소심하지만, 세심하고 부끄러움이 많지만 집중력이 강하다. 그리고 누구보다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다. 소심해도 괜찮아 얼마 전부터 주말마다 첫째 은산이를 데리고 동네 문화센터에 다니고 있다. 하루 종일 뭘 하고 놀아줘야 하는지에 대한 부담도 덜고, 아이가 좋아하는 놀이도 찾을 겸 시작한 주말 나들이다. 우리가 간 곳은 은산이 또래의 아이들이 모여 그저 춤추고 뛰어노는 신체 놀이 프로그램이 주를 이뤘는데, 과정을 등록하면서 은산이가 마음껏 뛰어노는 모습을 상상했다. 난 역시 멋진 엄마라는 자부심과 함께 말이다. “어린이 여러분, 안녕하세요! 선생님하고 파이팅할까요? 이리 나오세요.” 기대감으로 가득했던 첫 번째 시간. 30개월 안팎의 아이들은 해맑은 모습으로 선생님께 달려가 손뼉을 부딪치고 안기는 등 활기가 넘쳤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은산이는 내게 엉덩이를 붙인 채 꼼짝하지 않는 것이다. “은산아, 너도 가서 파이팅하고 와.” 엉덩이에 접착제라도 붙여놓은 건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어나라고 밀어내는 내 손을 온몸으로 저항한다. 음악을 틀어놓고 폴짝폴짝 뛰며 율동을 하는 시간에도 녀석은 그저 다른 친구들을 쳐다만 볼 뿐 일어서지 않는다. 이런 아이의 모습이 걱정스러웠는지 수업이 끝나자 선생님께서 내게 오셨다. “다른 아이들은 이미 몇 달 동안 저랑 이 프로그램을 해와서 친숙한 거예요. 은산이도 조금만 지나면 익숙해져서 괜찮을 거예요. 그러니 걱정 마세요.” 정말 선생님 말씀대로 두 번째, 세 번째 시간이 되자 조금씩 엉덩이를 떼더니 지금은 제법 방방 뛰며 논다. 물론 아직 두 눈엔 수줍음, 몸짓엔 쑥스러움이 가득 차 있지만 말이다. 아이의 숫기 없는 모습을 본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쇼핑을 하다 가게 점원이 예쁘다고 말을 걸면 내 치마 뒤로 숨어버리곤 했다. 그리고 그 가게를 나올 때쯤 돼서야 방긋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요즘은 어린이집 선생님 앞에서도 뭐가 그리 쑥스러운지 내 뒤로 숨는 일이 종종 있다. 배시시 웃으면서 말이다. 그런 아이의 모습에서 초등학교 1학년 때 무척 쑥스러운 몸짓으로 선생님 손을 잡고 있던 사진 속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어릴 적 내성적이었던 난 외향적인 아이들이 참 부러웠다. 그보다 먼저 억지로 뭔가를 시키려는 어른들이 참 미웠다. 노래해봐라, 춤춰봐라, 넌 왜 이렇게 조용하니 등등. 나도 무대에 올라가 노래도 잘 불러보고 싶었고, 좌중을 압도할 만큼 재미난 이야기로 친구를 웃겨보고도 싶었다. 하지만 내 입에서 나간 노래는 평범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상하게 똑같은 이야기도 내가 하면 재미가 없었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더더욱 움츠러들고 소심해졌다. 수업 첫 시간에 장기자랑이라도 하라고 하면 고개를 책상에 푹 처박고 있었고, 발표는 선생님이 시켜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때만 하는 일이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아나운서가 됐는지 가끔은 내가 봐도 신기하다. 하지만 이렇듯 철저한 ‘소심녀’도 여러 사람의 격려와 칭찬, 관심으로 지금 이렇게 무대에 설 수 있게 됐다. 날 일으킨 칭찬의 힘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유일하게 결혼하지 않은 젊은 여선생님이 우리 반 담임이셨다. 도회적으로 생긴 이목구비 때문에 때론 차갑게 보이기도 했지만 5학년인 우리들에게 젊고 예쁜 선생님은 우리의 자랑이었다. 어느 날 음악 시간. 노래에 별다른 소질이 없는데다 그날 역시 혹시 날 시키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책상만 보고 있는데 나를 지목하셨다. “고민정, 도라지 타령 한 번 불러볼까?” 소심한 아이들의 공통점 중 하나가 시키면 요령 피우지 않고 열심히 한다는 것이다. 난 조그마한 목소리로 최선을 다했다. “박수! 민정이가 노래를 아주 잘하는데?” 당시 선생님께서는 별 뜻 없이 으레 한 말일 수도 있다. 자라나는 새싹에게 그것도 성악을 전공하는 아이도 아닌 그냥 일반적인 아이에게 굳이 타박을 늘어놓을 이유는 없었을 테다. 하지만 선생님의 그 말 한마디는 내게 큰 용기가 됐고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한 장면으로 내 머릿속에 저장돼 있다. 그림에 얽힌 사연도 있다. 난 왜 이리도 예체능에 소질이 없는지…. 음악, 미술, 체육 뭐 하나 잘하는 게 없었다. 다른 아이들은 예체능 시간을 놀이 시간으로 간주해 기다리곤 했지만 난 차라리 국어, 영어, 수학 시간이 더 좋았다. 뭘 하든 잘하지를 못하니 재미가 없고 재미가 없으니 더욱 흥미가 떨어지고, 악순환이 따로 없었다. 그때 이런 나를 미술학원에라도 보냈더라면 흥미라도 끌어낼 수 있었을 텐데 부모님 두 분 다 직장일로 바쁘신데다 셋째 딸이니 그런 세심한 부분까지는 신경 쓰지 못하셨을 거다. 그렇게 일상이 지속되던 어느 날 중학교 미술 시간이었다. 수채화를 그리면 매번 스케치북이 물의 과다한 사용으로 울룩불룩해지곤 했는데 이번엔 유화를 그린단다. 그것도 명화 따라 그리기. 초등학생의 그림 실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난 다른 건 몰라도 그대로 보고 따라 하는 건 곧잘 했다. 게다가 잘못되면 다시 덧칠하면 되니 금상첨화가 따로 없었다. 난 또 성실하게,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 내 그림이 우수상을 타게 된 것이다. 그림으로 많은 상을 타본 사람들에게 우수상은 그저 참가상과 같을 테지만, 그림으로 단 한 번도 상이라곤 타보지 못한 내게 그 상은 전국대회 대상 못지않았다. 내 그림은 학교 복도에 턱하니 걸렸고 그 이후 수많은 이사 속에서도 버려지지 않고 지금까지 우리 집에 잘 ‘모셔놓았다’. 물론 그때 그 상을 받은 이후로 다시는 상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지만, 그 일은 내게 그림 그리는 솜씨가 아예 없는 건 아니라고 스스로 자부하는 계기가 됐다. 한 사람의 작은 칭찬, 작은 상은 내 인생에 큰 전환점까진 아니더라도 용기가 되고 긍정의 힘이 됐다. 움츠린 가슴을 펴게 해주었고, 열심히 하면 나도 할 수 있구나, 라는 걸 스스로 느끼게 해줬다. 만일 누군가 내 소심한 노래를 듣고 목소리가 왜 이렇게 기어 들어가느냐는 둥 그것밖에 못하느냐는 둥 이런 말을 했더라면, 내 그림을 보고 넌 왜 이렇게 표현을 못하느냐는 둥 창의력이 그게 다냐는 둥 이런 말을 했더라면 난 더 안으로 침잠했을 것이다. 더불어 나의 쑥스러움 많은 성격을 미워하며 자책했을 게 뻔하다. 끝으로 난 초·중·고, 대학까지 16년 동안 글로 칭찬받아본 적도 한 번 없었다. 글이라고 해봤자 일기나 독후감 정도였지만 언제나 글쓰기는 귀찮은 일이었다. 일기는 개학하기 하루 이틀 전에 몽땅 몰아서 썼고, 독후감은 위인전 제일 뒤에 나오는 요약 글을 짜깁기해서 써가곤 했다. 남편과 연애 시절 썼던 편지를 보면 유치하기 이를 데가 없다. 그 정도로 글쓰기에 전혀 소질이 없었는데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 책을 읽기 시작하고 한 문장, 두 문장 조금씩 글을 써 버릇하자 어느새 짧았던 글들은 두 권의 책이 됐고, 지금은 이렇듯 지면에 글을 연재하게 됐다. 내겐 천지가 개벽할 만한 일들의 연속이다. 남편이 끊임없이 용기를 북돋워주고 못난 내 글에 살뜰한 관심을 가져줬기에 가능한 일이다. 있는 그대로 사랑해 이런 경험들 때문인지 난 아이가 자신 없어 하고 쑥스러워하더라도 왜 그러냐고 타박하기보다 기다려주고 한 번이라도 더 칭찬해주곤 한다. “은산아, 쑥스러워서 그래? 그럼 엄마랑 같이 일어나서 율동하자.” “괜찮아. 안 해도 돼. 다음에 하면 되지.” 소심한 엄마가 이럴 땐 도움이 된다. 은산이의 마음을 깊이 공감하기에 억지로 끌어내지 않는다. 세상엔 다양한 사람들이 있듯 성격 또한 제각각이다. 예쁜 얼굴, 못생긴 얼굴은 있을지 몰라도 좋은 얼굴, 나쁜 얼굴은 없듯 모든 성격 또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조금만 건드려도 울음을 터트리는 성격, 한 가지에 몰두해 ‘오타쿠’ 기질이 있는 성격, 혼자 있는 시간이 제일 행복한 성격, 사람들을 웃기지 않으면 못 참는 성격,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는 성격 등 사람 수만큼 성격의 종류도 수억 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대개는 리더십이 있고 유머 감각도 있으며 명랑한 성격을 기준으로 삼는다. 마치 드라마 속 만들어진 캐릭터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리네 삶은 누군가 쓴 각본이 아니다. 대범한 사람이 있으면 소심한 사람도 있어야 하고, 유머가 넘치는 사람이 있으면 진지한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숫기가 없는 은산이는 대신 세심한 성격을 가진 아이다.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꼼꼼히 관찰한다. 책 속 캐릭터들도 두어 번만 보면 다 기억해내고, 집 안에 있는 물건들도 평소와 다른 곳에 위치해 있으면 이게 왜 여기 있느냐며 내게 묻곤 한다. 나도 발견하지 못한 것들까지도 말이다. 그런 점들이 특히 더 발휘되는 놀이가 퍼즐이다. 아직 세 돌도 안 된 녀석이 80개짜리 퍼즐도 두어 번만 해보면 혼자서도 척척 해낸다. 그러곤 퍼즐 속 작은 그림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관심을 보인다. 또 무척 조심성이 많은 녀석이다. 자석으로 된 놀이기구인 ‘맥포머스’로 자동차를 만들어주면 다른 아이들은 금세 손으로 팍 눌러 부수기 일쑤지만 은산이는 끝까지 잘 가지고 논다. 소꿉놀이 음료 병도 가벼운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입으로 후 하고 불기만 해도 툭툭 쓰러지는데, 은산이는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좋아한다. 오히려 옆에서 지켜보는 내가 신경 쓰여 원목으로 된 튼튼한 걸로 바꿔줄까 고민한다. 또 7개월 동생이 신기해 보이는 구멍마다 손가락을 넣어볼 만도 한데 조심스럽게 토닥거리며 살살 어루만져준다. 무언가에 집중하는 시간이 꽤 길다. 책은 주로 엄마나 아빠에게 읽어달라고 하지만 하루에 한 번씩은 꼭 혼자서 책을 본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것도 앉은 자리에서 수십 권의 책을 꼼짝도 않고 읽어내려간다. 그때는 아무리 밥 먹는 게 급해도, 자야 할 시간이어도 간섭하지 않고 집중할 수 있도록 내버려둔다. 그러면 대략 30~40분은 소리 내어 읽기도 했다가, 눈으로만 보기도 했다가 하면서 자신만의 시간을 즐긴다. 퍼즐도 10개가 넘는 종류들을 앉은 자리에서 다 완성될 때까지 집중한다. 아이가 수줍음이 많다는 것에만 신경 썼다면 아이의 이런 보물 같은 장점들을 짚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스스로에 대해 아는 일은 참 힘들다. 그래서 우리는 성인이 돼서도 ‘내 꿈이 뭐지? 내가 잘하는 게 뭐지?’ 하며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묻는다. 하지만 옆에 있는 사람은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알 수 있다. 내성적인 내게서 아나운서의 기질을 발견하고 글 쓰는 소질을 끄집어낸 내 남편처럼 말이다. 엄마로서 나의 역할이 아이의 장단점을 찾아내 알려주는 데 있다면, 아이는 자신의 기질, 성격을 정확히 파악함과 동시에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다. 스스로를 귀히 여기는 것과 남을 귀히 여기는 것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스케줄로 녹초가 돼 집에 들어온 날이었다. 안 자고 밖으로 나왔다고 아빠한테 혼날 것 같았는지 문틈으로 고개를 빠끔히 내민다. 괜찮으니 이리 나오라고 하자 내게 쪼르르 달려와 안기는 은산이. 그러면서 마치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엄마 예쁘다.” 이어서 힘들어 한숨을 푹 쉬는 내 모습을 놓치지 않고 내 볼에 쪽 하고 뽀뽀를 한다. 그러곤 이렇게 말한다. “엄마 이제 기분 좋아?” 난 이렇게 매일 아들에게서 세심한 배려로 치유받는다. profile 고민정은 … KBS 30기 공채 아나운서. 대학 선배이자 열한 살 연상인 시인 조기영과 결혼해 6년 만에 아들 은산이가 태어났고 지난 3월, 둘째 딸 은설이를 만났다. 저서로는 「샹그릴라는 거기 없었다」, 「그 사람 더 사랑해서 미안해」가 있다. <■기획 / 김지윤 기자 ■글 / 고민정 ■사진 / 박재찬 ■의상 협찬 / 모이몰른(02-3215-0017)>
-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
-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22) 여행은, 엄마의 환상이다
- 2014. 09. 29 11:15 육아/교육
- 부푼 기대를 안고 1년 만에 다시 찾은 제주도. 이번 가족 여행은 정말이지 잊지 못할 추억을 남겼다. 아들과의 오붓한 물놀이를 꿈꾸며 수영을 배운 엄마의 노력은 파도와 함께 물거품이 됐고, 연신 옹알이를 하는 딸 덕에 당분간 외식은 금기 사항이 됐다. 개구쟁이가 된 은산이, 돌고래가 된 은설이. 이들 가족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다시 만난 제주도 1년 전쯤 이 지면에 제주 여행을 다녀오고 쓴 글이 생각난다. 돌이 갓 지난 은산이와 함께 떠난 가족 여행에서 난 걱정했던 것에 비해 큰 문제없이 집으로 돌아왔고 그에 감동해 글을 써내려갔다. 처음 타는 비행기에 겁먹지 않을까, 하루 종일 돌아다니며 여행한다는 게 아이에겐 정신적, 육체적으로 스트레스가 되지 않을까 등등의 걱정을 했지만 녀석은 매번 내 걱정을 파도가 모래 위 낙서를 지우듯 말끔히 지워버리곤 했다. 그런 녀석을 보며 남편과 나는 아이가 잠든 밤이면 뿌듯한 미소와 함께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 기억으로 인해 기대치가 높아졌던 것일까. 아니면 내가 갖고 있는 일명 ‘지랄 총량’ 가운데 일부를 소비한 것일까. 단정 지을 순 없지만 제주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마지막 날 난 나름 결론을 내렸다. 아이와의 여행은 환상을 깨는 여행이라고. 난 그야말로 서울 토박이다. KBS 입사 후 지역 순환 근무 때 빼고는 서울에서 벗어나 살아본 적이 없다. 태어날 때부터 아스팔트를 밟으며 걸었고, 바다는 가끔 떠나는 여름휴가 때나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난 농촌에서 나고 자란 남편이 꽃과 나무 이름을 읊으며 그에 얽힌 추억을 되새기는 모습을 보면 부러웠다. 바닷가에서 자란 화가의 그림 속에서 풍기는 바다 냄새를 보고 맡으며 그러한 풍부한 색감을 온몸으로 체득하고 있음에 내 자신이 작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릴 적부터 내가 그린 그림의 바다는 그저 파란색일 뿐이었으니까. 이렇듯 시골에서의 삶을 꿈꾸던 내게 남편이 그랬다. “어쩌면 당신 같은 도시 태생들이 오히려 더 시골을 동경하는 것 같아. 나도 물론 도시보다 시골에서 살고 싶긴 하지만 적어도 그곳이 가끔 휴가 때 가서 느끼는 낙원은 아니라는 건 알거든. 나 같은 시골 태생들에게 자연은 끝없이 노동해야 하는 삶의 현장이거든. 그래서 나도 어렸을 땐 도시로 가고자 하는 욕망이 컸고. 일단 당신은 바퀴벌레만 봐도 기겁을 하잖아. 귀뚜라미를 보고 바퀴벌레 같다고 했지? 나로선 상상이 안 가는 발상이라고. 그저 글이나 그림 속에 나오는 풍경의 시골만 생각하다간 실패하기 쉽지.” 하긴 아프리카에서의 삶을 꿈꾸다가 다양한 곤충에 관한 얘기를 듣고 심하게 흔들렸던 나이다. 하지만 인간이란 모름지기 다 닥치면 하지 않을까? 4년 전 중국 소수민족들의 마을로 배낭여행을 다녀온 후로 생긴 막연한 자신감이다. 검정 때가 꼬질꼬질 낀 손으로 빚은 만두도 척척 잘 먹었고, 허름한 게스트 하우스의 시커멓게 전 이불 위에서도 잘 잤으니까. 어쨌든 도시를 벗어난 삶을 완전히 져버릴 순 없었다. 그런 내게 제주도는 살고 싶은 지역 중 한 곳이다. “우리 제주도에서 살까? 아이들이 항상 바다를 보며 느낄 수 있다는 건 정말 축복이잖아. 10분만 달리면 바다고, 또 10분만 달리면 산이고. 집 앞 놀이터에서만 놀던 아이보단 바다에서 놀던 아이들의 정서가 더 풍요롭지 않을까?” 여행 가방을 싸면서도 만일 은산이가 바다를 정말 좋아한다면 그냥 눌러앉을까? 경제활동은 어디에서 할 수 있을까? 학교는 어디로 가는 게 좋을까? 등등 구체적인 생각들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조각난 엄마의 꿈 제주에 도착한 첫날, 우리는 해수욕장 인근에 위치한 게스트 하우스에 짐을 풀었다.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추의 작은집’이라는 곳이었는데 오픈한 지 얼마 안 돼 깨끗한데다 수심이 얕아 아이들이 물놀이하기 좋은 금능 해수욕장과 가까워 이것저것 따져보지도 않고 정한 숙소였다. 그곳에서 거의 1주일을 머물면서 우린 여러 번 바닷가에서 하루 온종일을 허비했다. 1 나는야, 모래성 쌓는 은산 왕자! 2 은산아, 은설아…, 엄마, 아빠는 어디서 자라고? 3 힘들었지만 그래도 기념사진은 필수! 아이를 갖기로 마음먹었을 때쯤 혹시나 아이가 물에 빠졌을 때 구하러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수영을 배우기 시작했다. 띄엄띄엄 배워 멋진 자세와 날렵한 몸놀림은 아니지만 아무런 장비 없이도 물 위에 뜬다는 사실, 느리긴 하지만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은 내게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15년 동안 단 한 번도 수영장에 가지 않았고, 해외 배낭여행 중에 만난 멋진 계곡에선 남들 다 수영할 때 난 그저 물 밖에서 구경만 했다. 그런 내가 수영을 배웠으니 어깨에 얼마나 힘이 들어갔겠는가. 제주 바다에 가면 쪽빛 바다에서 멋들어지게 수영을 해볼 참으로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은산이를 튜브에 태우고, 난 그걸 잡고 헤엄쳐 나가면 은산이가 신기해하겠지? 진짜 좋아할 거야.’ 에메랄드빛 바다에서 배영을 하고 바다 밑으로 잠수해 들어가 조개를 주워오는 상상을 했던 건 무리였던 걸까? 나의 기대는 단번에 무너져버렸다. “은산아! 바다야! 우와. 파도가 밀려오네. 우리 파도타기 할까?” 바다를 보자마자 물에 뛰어들 거라 생각하고 아예 수영복을 입혀 왔는데 은산이는 모래사장에 우두커니 선 채 물에 들어오지 않았다. 평소에 감탄사를 잘 연발하는 아이인데 드넓은 바다 앞에선 그저 무덤덤하다. “이리 와봐.” “나 모래놀이 할 거야!” 아프리카 여행을 위해 아들을 낳고 싶다던 내게 누군가 그랬다. 여행을 싫어하고 곤충을 무지 무서워하는 아들이 태어날 수도 있다고. 날파리만 봐도 기겁을 하는 아들이 태어났다. 바다에서 노는 걸 무척 좋아해서 자꾸 바다 가자고 하면 어쩌지, 하던 내 말에 또 누군가 그랬다. 물을 무서워할 수도 있다고. 1주일 동안 바닷물에 발목만 담근 아들이 태어났다. 누가 그랬나! 아이들은 다 물을 좋아한다고. 은산이는 평소에도 깔끔한 녀석이다. 밥풀이 손가락에 묻으면 꼭 떼어달라고 했고, 머리카락이며 먼지를 내 눈엔 잘 보이지도 않는데 꼭 집어서 버려달라고 내게 주곤 했다. 그런데 그 ‘깔끔’을 제주 바다에서 떨고 있는 게 아닌가. 어쩌다 파도가 크게 쳐 바지에 튀면 마치 구정물이라도 튀어 옷이 더러워진 아이처럼 잔뜩 찡그렸다. 그래도 집에서 목욕할 땐 첨벙첨벙하며 곧잘 노는 편이라 좋아할 줄 알았는데 반전이다. 예상치 못한 은산이의 반응에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데 남편이 그런다. “나도 그랬어. 바닷물이 몸에 묻으면 끈적끈적하기도 하지만 그냥 왠지 온몸에 묻히고 싶진 않았거든.” 어쩜 저런 것까지 아빠를 닮았을까. 그래, 누군가 그랬지. 원래 자식은 안 닮았으면 하는 것만 꼭 골라서 닮는다고. 결국 제주의 바다를 눈앞에 두고 그저 백사장 위에서 장난감 그릇들로 상을 폈다 접었다만을 반복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은 온몸에 모래를 묻혀가며 철퍼덕 앉아 노는데 은산이는 모래 묻는다며 끝까지 쪼그려 앉아서 놀았다. 난 그날로 제주를 비롯한 바닷가 인근에서 사는 꿈은 접기로 했다. 정말 오랫동안 꿔온 꿈이었는데 이렇게 한순간에 정리되다니…. ‘설핀’ 은설이 난 굳이 출산을 장려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출산과 육아는 분명 어려운 일이고 많은 걸 포기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누구에게도 쉽게 애 낳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 또한 아이가 없던 시절 아이를 왜 낳지 않느냐는 말에 언어폭력이란 이런 것이구나, 라고 느꼈기에 더더욱 그렇다. 난 그저 보여주고 싶었다. 아이와 사는 모습, 아이로 인해 생기는 추억들, 아이와 함께여서 더 풍성해지는 내 삶이라는 스케치북의 그림들을 말이다. 그리고 그 모습이 아름다워 보인다면 아이를 낳을 테고 그렇지 않다면 낳지 않을 테고. 선택은 온전히 그들에게 맡기고 싶다. 어쩌면 이 지면에 아이와 가족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 이유도 내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고 선택하게 하고 싶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름 이런 심오한 개똥철학을 가지고 있는데 녀석들이 영 도와주질 않는다. 아이와 함께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 입도 입인지라 일단 맛집을 찾긴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개구쟁이 31개월 아들이랑 뒤집기와 옹알이를 시작했지만 아직 혼자 앉아 있지도 못하는 6개월 딸을 대동해야 하니 따져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일단 유모차가 들어갈 수 있는 넓은 곳이거나 아기가 누울 수 있는 마루가 있는 곳이어야 한다. 요즘은 맛집들이 소규모가 많아 유모차 부대들에겐 그림의 떡이다. 뭔가를 구워 먹는 집도 우리에겐 굉장한 모험이 필요한 곳이다. 연기가 아이들에게 안 좋은 건 물론이고 가끔씩 기름이 튀기 때문에 여간 위험한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제주에 있을 때 이 집에서만큼은 꼭 먹어봐야 한다고 해서 갔다가 핼쑥해진 얼굴로 나온 일도 있었다. 남편과 둘이었지만 은산이 먹이랴, 고기 구우랴, 연기 쫓으랴, 우는 은설이 안아주랴…. 뭘 먹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 밖에도 너무 조용하면 우리가 방해될까 봐 안 되고, 아이도 먹어야 하니 매운 음식만 있는 집도 안 된다. 그래도 아이를 키운 햇수가 늘수록 요령도 생겨 나름 이 집 저 집을 다니며 먹는 욕구를 해소해왔다. 하지만 이것도 이젠 과거 일. 제주 여행을 기점으로 당분간은 다 함께하는 외식은 자제하기로 했다. 그 이유는 얼마 전부터 옹알이를 시작한 은설이가 마치 득음이라도 하려는 건지 엄청나게 소리를 질러대기 때문이다. 그래서 별명도 붙였다. ‘설핀’. 발음은 ‘썰퓐’. 마치 돌고래 소리처럼 고음의 소리를 내기에 은설+돌핀=설핀. 은산이가 말이 많은 거야 아나운서 엄마를 둬서 그렇다 치자. 마치 확성기로 소리를 내는 듯 높게 찌르는 은설이의 목소리는 식당에 있는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처음엔 머리숱이 많네요, 애기가 정말 순하네요, 어쩜 이렇게 귀여워요, 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그날 이후 요즘엔 목청이 정말 좋네요, 라는 말을 참 많이 듣는다. 그래서 남편과 난 옆자리 손님들에게 끼치는 민폐를 최소화하기 위해 밥을 먹는 게 아니라 초고속으로 음식을 입에 들이붓고 쫓기듯 빠져나왔다. 우리를 보며 아이를 낳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 하는데 이건 오히려 반대일 것이다. 아…, 개똥철학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워서야. 드라마에서 보듯 네 식구가 화목한 모습으로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며 식사를 하는 때는 과연 언제쯤 올까. 아이들과의 외식은 그야말로 전쟁이 따로 없다. 여행의 재발견 아이들과의 여행, 그것도 환상의 섬 제주도 여행은 날 환상 속에서 끄집어내 현실로 끌어내린 여행이었다. 바닷가에서 살겠다는 엄마의 꿈을 깔끔하게 정리해준 은산이, 가는 식당마다 득음의 경지를 보여준 은설이. 깨물어주고 싶은 내 자식들이다. 이 두 녀석의 일화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분명 집에 있을 땐 밤에 8시간쯤은 쭉 자서 새벽에 깨본 적이 없어 숙소 주인에게도 우리 애가 새벽에 울 일은 없을 거라고 호언장담을 했건만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새벽마다 돌고래 소리로 울어댔다. 아기 변기가 있을 리 만무한 여행지에서 은산이는 마지막 날 결혼 안 한 주인 이모에게 마치 강아지처럼 마당에 종이 깔고 응가 하는 모습을 보이는가 하면, 은설이는 김포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등까지 적실만큼 엄청난 양의 응가를 방출해 화장실 세면대에서 거의 목욕을 하는 기염을 내뿜었다. 난 그때 이상한 눈빛으로 날 힐끔 쳐다보던 외국인을 잊을 수가 없다. 정말이지 출발하는 날부터 도착하는 날까지 깨알 같은 추억을 안겨준 내 자식들이다. 친한 친구에게 기나긴 이야기들을 요약해 ‘아이와의 여행은 환상을 깨는 여행’이라고 문자를 보냈더니 이런 답장이 왔다. ‘아이들과의 여행은 그냥 여행지에서 애 보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명언이다. profile 고민정은 … KBS 30기 공채 아나운서. 대학 선배이자 열한 살 연상인 시인 조기영과 결혼해 6년 만에 아들 은산이가 태어났고 지난 3월, 둘째 딸 은설이를 만났다. 저서로는 「샹그릴라는 거기 없었다」, 「그 사람 더 사랑해서 미안해」가 있다. <■기획 / 김지윤 기자 ■글 / 고민정 ■사진 / 박재찬 ■사진 제공 / 고민정 ■의상 협찬 / 모이몰른(02-3215-0017)>
-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
-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21) 내 마음에 사랑이 싹트네요
- 2014. 08. 27 11:52 육아/교육
- 가끔씩 상상해본다. 아이가 어른이 되면 어떤 모습일까? 나아가 그림을 더 그려본다. 아이가 사랑하게 될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나를 꼭 닮은 사람일까, 아니면 나와 정반대의 사람일까? 두근두근 고백을 앞두고 떨리던 바로 그 순간처럼 궁금하고 기대된다. 아마도 부모란, 평생 아이를 짝사랑하는 존재인가 보다. 애교쟁이 은산이 산이는 엄마, 아빠를 닮아서인지 아침잠이 많은 편이다. 그래서 평소에는 아침 먹을 시간도 없이 어린이집 가자고 어르다 보면 이미 등원 시간을 훌쩍 넘기곤 했다. 그런데 그날 아침은 평소보다 일찌감치 눈을 뜨더니 엄마, 아빠까지 다 깨웠고, 아침을 먹었는데도 아직 여유가 있었다. 이것저것 책을 읽어주고 있었는데 문득 이러다간 집에서 계속 놀겠다며 어린이집 등원을 거부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에 시간 상관없이 나갈 채비를 했다. 그러곤 조금 이르긴 했지만 어린이집에 보냈다. “산이 오늘 일찍 왔네?” 평소 은산이가 천사 같다며 잘 따르던 선생님이 계시는데 그날 역시 그 선생님이 반갑게 맞아주셨다. 그런데 은산이가 대뜸 엄마가 시킨 것도 아닌데 이러는 것이다. “선생님 보려고 일찍 왔잖아요.” 그 옛날 남편도 내게 자주 들려주지 않던 말을 녀석이 하는 것이다. 선생님의 얼굴엔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사람들한테 하는 걸 보면 참 다정다감하다. 하루가 다 지나고 오후가 돼 하원시키러 갔더니 이번엔 복도에서 선생님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넘쳐났다. “은산아 너, 여자 여럿 울리겠다. 아무한테나 하면 안 돼.” 녀석이 선생님들에게 윙크를 날리고 있었던 것이다. 누가 보면 애굣덩어리인 줄 알겠다. 산이는 옹알이를 하던 갓난아이 때부터 웃음을 잘 보여주는 아기가 아니었다. 동생 설이가 태어나 엄마, 아빠 눈만 마주쳐도 방긋방긋 웃는 걸 보고 나서야 산이가 마냥 잘 웃어주는 아기는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산이만 키웠을 때는 원래 아기 웃기는 게 무척 힘든 일이라고만 생각했을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시크한 녀석인데 자기 맘에 쏙 드는 사람이 있거나 기분이 무척 좋을 때는 저런 애교를 떤다. 게다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쪽 눈 윙크가 안 돼 양쪽 눈을 다 질끈 감아야 했는데 이젠 완벽히 한쪽 눈만 찡긋하는 게 되던 참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어머니, 오전에 산책을 하는데 은산이가 글쎄 민들레꽃을 한 송이 딱 꺾더니 저한테 주는 거 있죠?”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거다. 지금으로부터 십수 년 전 남편은 장미꽃으로 화관을 만들어 머리에 씌워주며 나의 성년의 날을 축하해줬다. 탐스러운 장미꽃 스무 송이로 만든 화관이었는데 적어도 그 순간 나는 영화 속 여주인공이 부럽지 않았다. 만들어진 화관을 받았어도 좋았을 텐데 한 송이 한 송이 직접 엮은 화관이라니…. 그날 밤 그 화관을 조심스럽게 집으로 가져와 내 방에 걸어두었다. 그 후로도 화관은 먼지 쌓인다고 버리라는 엄마의 성화에도 몇 년 동안 계속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화관 말고도 내 방에 걸려 있던 게 또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하얀 조개껍데기로 엮은 목걸이였다. 인사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메이드 인 차이나’가 아닌 ‘메이드 인 조기영’인 핸드메이드 목걸이. 서로의 마음을 정확히 가늠하지 못하고 있던 때 바람 쐬러 우리는 인천에서 가까운 용유도에 갔다. 하얗게 부서지던 파도, 새끼손톱만 한 소라껍데기, 바닷물에 바스락거리는 모래알갱이까지 내 감성을 자극하던 날이었다. 저 사람이 날 사랑하는 걸까? 두근두근대며 궁금했지만 물어볼 수 없어 애가 타던 때 그 사람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노끈에 주위에 하얗게 널려 있는 조개껍데기들을 엮어 내 목에 걸어주었다.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없었다면 아마 그 목걸이를 내 목에 걸어보지도 않았으려니와 집에 들어가기 전에 바로 쓰레기통에 버렸을 것이다. 난 유난히도 이성에게 받은 물건에 민감하다. 나름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그냥 쓸 법도 한데 왠지 몸에 지니고 있으면 내가 그 사람의 마음을 받아준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상대방에게 쓸데없는 여지를 남겨두는 것 같아 아예 집 안에 들이지 않는다. 약간 오버인 듯싶지만 어쨌든 내 몸에 밴 습성 중 하나다. 이런 나인데도 그때 난 마치 값비싼 목걸이인 것처럼 조금이라도 부서질까 봐 조심스럽게 집으로 가져와 내 방 한쪽에 걸어두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사람은 그때에도 내게 최선을 다했고, 내게 최상의 존재였다. 방 안 가득 촛불을 밝혀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는가 하면, 멀리 떨어져 있을 땐 노트 한 권을 그리움과 사랑의 편지로 가득 채워 보내주기도 했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값비싼 명품은 한 번도 선물하지 않았지만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모두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나만이 차지할 수 있는 선물들이었으니까. 이런 남편의 행동들로 미뤄보건대 산이가 선생님께 사랑을 표현하는 건 어찌 보면 참 당연한 결과다. 그 유전자가 어디 가겠는가. 사랑하는 여인을 대하는 다정다감함은 세월이 흘러도, 세대가 바뀌어도 대물림되며 변함없이 이어져간다. 단, 그 사랑을 받아온 나의 입장만 달라졌을 뿐. 남편에게서 그런 대접을 받을 땐 호사를 누린다며 좋아했는데 이젠 거꾸로 그런 대접을 받는 다른 여자를 봐야 하는 입장이 되다니…. 사뭇 시어머니께서도 지금 나와 비슷한 심정이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에 죄송한 마음이 살짝 든다. 작업의 정석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적어도 한 번쯤은 다양한 종류의 ‘작업’을 걸고 받고 했을 것이다. 꼬마 시절 옆집 오빠에게 받은 ‘작업’부터 결혼에 골인하기 전까지 받은 ‘작업’까지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하면 한두 시간 쯤은 훌쩍 지나가지 않을까? 스물한 살 때 열한 살 연상의 남자에게 푹 빠져 꽃 같은 20대를 온통 한 남자에게 바쳤으니 다양한 연애 경험을 갖고 있지는 못하지만 나도 한때는 이러저러한 ‘작업’이란 걸 받아본 ‘여자’였다. 정확히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이었다. 같이 몰려다녔던 친구들은 학교 다닐 때에도 가끔 나이트클럽을 들락날락거렸다. 그에 비해 좀 고지식했던 나는 나이트클럽은 스무 살이 되면 가겠다고 선포하고 친구들의 모임에 빠지곤 했다. 아마 그때 같이 몰려다녔더라면 영화 ‘써니’에서처럼 친구들과 진한 추억을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긴 하지만 소심한 내가 어디 가겠나. 시간을 돌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게 고등학교 3년을 보내고 스무 살이 되던 1월 1일, 드디어 나이트클럽에 갔다. 통조림 과일과 우유, 얼음이 적당히 섞인 안주에 병맥주를 마시며 춤 잘 추던 친구들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가끔 웨이터의 강제 연행에 이끌려 처음 보는 남자 옆에 앉아 이야기를 나눠보기도 했지만 할 말도 딱히 없고 쑥스럽기도 해 1분도 채 안 돼 제자리로 돌아오곤 했다. 결국 난 음악에 몸을 제대로 실어보지도 못한 채 귀를 때리는 음악과 현란한 조명 그리고 내가 봐도 예뻤던 친구들의 몸짓을 보는 데 시간을 다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한 장의 종이와 함께. 춤이라고 할 순 없고 친구들의 성화에 못 이겨 몸을 흐느적거리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스케치북 한 장을 손에 쥐어주고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내 모습이 스케치돼 있었다. 당시엔 휴대전화 대신 대부분 삐삐를 가지고 다녔는데 그 삐삐 번호조차 없이 그저 내 그림과 잘 기억나진 않지만 ‘그녀를 그리며’와 같은 짧은 글이 적혀 있을 뿐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 괜찮은 ‘작업’이고 장면인데 난 받으면 안 될 그림을 받은 사람처럼 그 그림을 경계했다. 그마저도 난 나이트클럽에 그냥 두고 오려는 걸 친구들이 기념으로라도 가져가라고 해서 억지로 들고 나왔고, 결국 집 앞 쓰레기통에 버렸다. 액자까지 할 건 아니지만 어디 책꽂이 귀퉁이에라도 꽂아두었더라면 애 둘 낳고 아줌마가 된 지금 꺼내 보면서 나의 ‘한때’를 흐뭇하게 회상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금할 수가 없다. 이렇듯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으로 작업을 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애장품으로 작업을 걸어온 이도 있었다. 대학에 갓 입학한 난 햇병아리처럼 삐약삐약대며 교정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다른 단과대는 물론 동아리 중에서 조금이라도 끈이 있는 곳이라면 내 취향과 관계없이 고개를 들이밀곤 했다. 그중 어느 동아리에 있던 1년 선배였다. 스포츠를 전공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으레 떠올리게 되는 모습과 참 잘 들어맞는 사람이었다. 겉으론 강해 보이지만 속은 은근 여리고 단순한 만큼 뒤끝이 없는 그런 사람 말이다. 그런데 내가 그 동아리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내게 고백을 해오는 것이었다. “민정아, 이거 받아줄래?” 그 선배가 내게 건넨 건 축구 유니폼과 옥반지였다. “이 옷은 내가 아끼는 유니폼이고 이 반지는 어머니가 물려주신 거야. 좋아하는 여자 생기면 주라고 그러셨거든. 물론 네가 지금 당장 내 마음을 안 받아줄 수도 있겠지. 나도 곧 군대 가야 하고. 그냥 네가 잘 간직하고 있다가 나중에 제대하고 나서 마음이 있다면 그때 대답해줬으면 좋겠어. 물론 내 마음을 제대하고 나서 털어놔도 되지만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때 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No’. 일단 나이 차 많은 오빠 둘이 있어서 그런지 웬만큼 나이가 많지 않고서는 별로 오빠라고 느끼지 못하던 나였다. 게다가 내가 원하던 사람은 나보다 세상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는 사람인데 아쉽게도 그는 책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쨌든 내 마음과 상관없이 일단 보관하고 있어달라고 하니 집에 가져오기는 했는데 참 처치 곤란이었다. 나름 그 사람에게는 소중한 물건인데 함부로 버릴 수도 없고…. 결국 내 옷장 깊숙한 곳에 꽤나 오랫동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가 졸업할 때쯤 처리했던 걸로 기억한다. 제대하고 가져가면 좋으련만 그때는 또 일단 내가 가지고 갔으니 그냥 가지란다. 이렇게 무책임할 수가! 아무튼 난 그 선배에게 정말로 다른 좋아하는 여자가 생기면 전해줄 생각에 가지고 있긴 했으나 결국 제 주인을 찾지 못했다. 이런 작업들 외에도 이메일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사람도 있었고, 후배 시켜 내 휴대전화 번호를 알아오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이는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적극적이지 않아 미적지근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너무 들이대 부담스러웠다. 이랬던 내게 지금의 남편은 미지근하지도 뜨겁지도 않게 서서히 다가왔고 결국 한 여자의 20대를 그리고 인생 전체를 차지했다. 멋진 글씨와 글솜씨라는 재능으로 1차 작업을 했고 적당히 완급 조절을 하며 내게 다가왔다. 그 사람은 나름 많은 나이 때문에 천천히 다가왔던 건데 난 그 조심스러움이 날 소중히 여겨주는 것 같아 좋았다. 날 일방적으로 끌고 가지도, 그렇다고 무작정 기다리지도 않았던 그는 의도치 않게 ‘밀당’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애장품을 줄 때도 어디선가 본 듯한 뻔한 물건들이 아닌 정말 자신의 손때가 묻은 것들을 건네주었다. 자신이 재미있게 봤던 책이나 직접 써내려간 엽서 한 장 등등. 때론 영화 시작을 기다리면서 티켓에 시를 한 편 써주기도 했는데 그 티켓은 아직도 잘 보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살며시 내 어깨에 올라온 손은 내 가슴을 떨리게 했고, 날 안아주던 품은 사랑의 감정 그 이상을 느끼게 했다. 누구를 닮았을까? 우리 딸 설이는 어떤 작업을 받게 될까? 어떤 남자에게 자신의 인생을 함께하자고 말할까? 아니 그 이전에 어떤 남자친구들을 만날까? 아들 산이는 어떤 여자에게 매력을 느낄까? 엄마인 날 닮은 사람을 좋아할까, 반대로 나에게 없는 걸 가진 여자를 좋아할까? 어떤 방식으로 사랑하는 이에게 작업을 걸까? 첫 데이트를 기다리는 심정만큼이나 궁금하고 기대된다. ‘은산이가 날 잘 따르는 걸 보면 날 닮은 여자를 만나지 않을까? 아니지, 엄마만 한 여자는 없다고 그러는 건 아닐까?’ 혼자 상상하며 킥킥대고 있는데 거실에서 은산이의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싹트네, 싹터요. 내 마음에 사랑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내 마음에 사랑이….” profile 고민정은 … KBS 30기 공채 아나운서. 대학 선배이자 열한 살 연상인 시인 조기영과 결혼해 6년 만에 아들 은산이가 태어났고 지난 3월, 둘째 딸 은설이를 만났다. 저서로는 「샹그릴라는 거기 없었다」, 「그 사람 더 사랑해서 미안해」가 있다. <■기획 / 김지윤 기자 ■글 / 고민정 ■사진&장소 협찬 / 서주성, 박소현, 정상진(스튜디오 숲 홍대점, 02-334-9598, www.soopstudio.co.kr) ■의상 협찬 / 게스 키즈(02-516-5611),트라이 크리켓(02-3485-6052)>
-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
-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20) 개구리 엄마, 올챙이 적 떠올리며
- 2014. 07. 28 16:33 육아/교육
- 아이를 키우면서 가슴을 쓸어내릴 일이 어디 한두 번이겠는가. 이 고비를 넘기면 기다렸다는 듯이 툭툭 튀어나오는 예상치 못한 난관들에 초보 엄마들은 불안하고 또 불안할 뿐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늘 제자리걸음은 아니라는 것. 보다 지혜롭게 대처하는, 함께 성장하는 엄마의 마음을 아이도 언젠가는 알아주겠지? 삐뽀삐뽀 비상, 비상! ‘우리 아이 얼굴 좀 봐주세요. 얼굴에 오돌토돌한 게 하나둘 나기 시작하더니 온몸이 다 그래요. 모유만 먹는 아기인데 제가 뭘 잘못 먹어서 그런 걸까요? 혹시 이게 아토피인가요? 이제 세상에 태어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 못난 엄마 만나서 고생하는 울 아가. 그저 미안하기만 하네요. 지금도 이 글 쓰면서 자꾸만 눈물이 나요. 어떻게 하면 좋을지 선배 엄마들의 조언을 구합니다.’ 그냥 보통 태열이구만. 목욕 깨끗이 씻겨서 로션만 듬뿍 발라주고 조금만 기다리면 금세 좋아질 텐데 너무 오버하네. 이것저것 웹서핑을 하던 중에 만난 아무개 엄마의 글을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경험해본 자의 여유라고 해야 하나? 사실 저렇게 걱정하는 엄마의 글은 비단 특정 1인의 이야기가 아니다. 상당히 많은 엄마들이 아기 피부에 민감해하고 혹시나 아토피로 가지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이런 엄마들을 보며 난 별것도 아닌 걸로 유난을 떤다며 코웃음을 쳤던 것이다. 하지만 이내 자기 코 고는 소리에 놀라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사람처럼 스스로 깜짝 놀랐다. 내가 코웃음 짓던 그들은, 별것 아닌 일로 유난을 떨었던 2년 전 내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은산이 얼굴이 왜 이러지? 어제는 얼굴만 그러더니 이젠 온몸이 다 오돌토돌하잖아. 어떡해, 나 때문인가?” 은산이와 조리원에서 퇴원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러니까 생후 1개월 때쯤으로 기억한다. 처음 키워보는 아기인데다 당시 살던 집은 한겨울 외풍이 워낙 세서 친정집에서 산후조리를 했다. 아무래도 아이를 셋이나 키운 친정 엄마가 옆에 있으면 소아과 선생님 안 부러울 거란 생각에 택한 길이기도 했다. 덕분에 은산이는 자신 한 명에 엄마인 나랑 아빠인 남편 그리고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까지 어른 4명의 호위를 받으며 생을 시작했다. 그런데 친정집에서 생활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은산이의 피부가 온통 뒤집히기 시작한 것이다. 온 가족이 비상이었다. “엄마, 얘 왜 이런 거야? 나도 이랬어? 애기들은 보통 이런 거야?” “그러게, 왜 그러지? 혹시 내가 끓여준 미역국이 잘못된 건 아니니?” 아이 낳고 1년만 지나도 어떻게 키웠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하물며 30년이 지난 엄마는 두말해 무엇하랴. 의사 선생님 만큼의 수준을 기대한 내가 어리석었다. 그날부터 친정 엄마는 안절부절못하셨다. 딸 살찔까 봐 쇠고기 대신 굴과 조개로 미역국을 끓여주셨는데, 혹시 그 해산물이 아기한테 안 맞은 건 아닌가 하시며 들통으로 끓여놓은 굴 미역국은 다른 식구들에게 억지로 떠넘기고 산모용은 아무것도 넣지 않은 순수 미역국으로 다시 한 통을 끓이셨다. 혹시 집 안에 있는 먼지 때문인가 하며 청소를 열심히 하셨고, 보일러로 인해 공기가 건조해진 건가 하며 숯을 한 상자 사오시기도 했다. 그것도 숯가마에서 직접 구운 진짜배기 참숯을 구하기 위해 산골짜기까지 다녀오셨다. 그뿐이 아니었다. 달맞이꽃 기름이 좋다는 얘기를 들으시곤 마침 작년에 직접 재배해 짜놓은 기름이 한 병 있다며 그걸 아기 온몸에 발라보라고 하셨다. 고소한 냄새를 폴폴 풍기는 기름을 발라 코는 호사를 누렸지만 이런 민간요법을 신생아에게 적용해도 되는 건지 불안해 찝찝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도 엄마가 좋다며 해보라고 하시는데 딱 잘라 거절하기 어려워 발라봤지만 역시 큰 차도는 없었다. 그러자 엄마는 걱정, 근심에다 미안함까지 가득한 표정으로 나와 아기를 바라보셨다. “너 산후조리를 내가 잘 못 시켜줘서 그런가 보다. 어떻게 하면 좋니.”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그때 엄마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리실 것만 같았다. 하나밖에 없는 딸 산후조리 시켜주겠다고 집으로 데려오긴 했는데 아기 피부가 보드랍기는커녕 수세미처럼 거칠어졌으니 모든 게 다 당신 탓이라고 생각하셨던 거다. 그리고 중간중간 갑자기 젖 양이 줄어들었을 땐 돼지 족을 끓여 그 물을 마시면 좋다면서 경동시장까지 가서 생족을 사오시기도 했다. 그때도 역시 당신이 산모 음식을 제대로 못 챙겨줘서 그런 것 아니냐는 걱정과 함께 말이다. 그래, 그땐 그랬지 친정 엄마가 이렇게 발을 동동 구르며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니실 무렵 나와 남편은 눈에 불을 켜고 웹서핑을 시작했다. 원인이 무엇일까, 어떤 방법을 써야 하나, 이런 경우가 많은가. 우선 은산이와 비슷한 증상을 가진 아기들이 많았다. 더불어 그에 대한 엄마들의 경험담도 넘쳐났다. 애가 아픈데 어쩌면 저렇게 꼼꼼하게 사진을 찍어 블로그에 올려놓을 정신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런 엄마들의 수고 덕분에 나 같은 초보 엄마들이 큰 힘을 얻었으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좋아진다는 혹은 좋아졌다는 10개의 글보다는 부정적인 1개의 글이 더 신뢰가 가는 이유는 뭘까. 결국 아토피로 발전한 아이 엄마의 글을 더 열심히 보게 됐고 내 머릿속은 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아토피에 걸리면 피부가 거칠어지는 건 둘째치고 아기가 많이 예민해진다던데. 부모도 밤새 잠도 못 자고 아이의 가려운 곳을 긁어줘야 해서 같이 피곤한 건 물론이고. 아토피가 유전인가? 애 아빠가 어렸을 때 피부병이 있었다던데. 내가 임신했을 때 빵을 많이 먹긴 했는데 그것 때문인가? 조금만 더 참을 걸. 그럼 앞으로 음식은 다 유기농으로 먹어야 하나? 빵도 끊고? 빵은 내가 무척 좋아하는데…. 그래도 아기가 아픈 것보다는 내가 참는 게 낫겠지.” 이미 마음속으로는 아토피라고 단정을 지었던 것 같다. 그러곤 아이 아토피로 고생했다던 언니한테 전화로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다. 게다가 특정 종교를 갖고 있지 않아 삼천기도 같은 건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내가 아는 모든 신에게 부탁하고 또 부탁했던 기억이 난다. 엄마들이 아이를 위해 백일기도를 드리고 삼천 배를 하는 이유를 알겠다. 어쨌든 내가 아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본 뒤 마지막 방법으로 병원을 택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어리석었다. 인터넷이네, 민간요법이네 할 것 없이 일단 병원부터 갔으면 괜한 고생 안 해도 되는데, 병원 안 가고 해결해보겠다는 생각이 오히려 더 많은 고생으로 이어진 셈이다. 잔뜩 긴장한 우리 부부는 병원 의자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됐다. “갓난아기네요. 어디가 아파서 오셨어요?” “아기 온몸에 이런 오돌토돌한 게 올라와서요. 처음엔 얼굴에만 그러더니 지금은 온몸이 다 그래요. 모유 수유 중인데 제가 뭘 잘못 먹어서 그런 건가요? 이게 바로 아토피라는 건가요?” “어디 보자. 음… 이건 태열인 것 같네요. 일단 로션을 듬뿍 발라주세요.” “네? 피부에 뭐가 났는데 로션을 발라요? 그럼 더 덧나는 거 아닌가요?” 신생아 때는 로션을 바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있어 그때까지도 물로 목욕만 시키고 로션을 발라주지 않았다. 아기 몸에 트러블이 나면서부터는 내 얼굴에 뾰루지 났을 때처럼 더더욱 아무것도 바르지 않았다. “계속 양수라는 물속에 있다가 세상에 나온 거라 피부가 많이 건조해요. 그래서 신생아 때 이런 경우가 많아요. 대개는 보습만 잘해줘도 좋아져요. 그런데 지금 관리를 제대로 해주지 않으면 아토피로 번질 수도 있으니 신경 써주세요.” 잔뜩 긴장하고 갔는데 그저 로션 하나 사서 바르라는 처방이었다. 내 얼굴에 금세 화색이 돌았다. 난 그날부터 바로 보습력이 좋다는 크림을 하나 사 수시로 발라주었다. 목욕하고 나서는 물론이고 좀 건조해졌다 싶으면 가제수건으로 살짝 이물질만 닦아주고 덧발랐다. 크림을 바르고 바로 다음날부터 피부 상태가 호전되기 시작했고, 얼마 가지 않아 그야말로 아기 같은 피부가 됐다. 더불어 우리 부부와 친정 엄마의 마음도 괜한 죄책감에서 벗어나 편안해질 수 있었다. 더 강해진 엄마 둘째 설이가 태어나고 역시나 조리원에서 퇴원한 뒤부터 피부에 오돌토돌한 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아직 목을 가누지도, 앉아 있지도 못해 목의 피부가 항상 접혀 있다 보니 목에서 자꾸 진물이 났다. 아마 초보 엄마였다면 당연히 흥분했을 사안이다. “은산이 때도 이랬잖아. 로션 잘 발라주고, 목은 당분간 계속 이럴 테니 자주 씻기고 잘 말려주자.” 첫째 은산이 때와는 다르게 친정 엄마도 무척 여유로워진 모습이다. “설이 목에서 진물이 나네? 괜찮아. 아기 때는 다 이래.” 아이가 고열이어도 이젠 침착하게 대처한다. 예전에는 38℃만 돼도 잔뜩 이마를 찌푸리며 밤새 안절부절못했는데 지금은 39℃가 넘어가도 응급실로 뛰어가진 않는다. 몇 도가 됐든 일단 아기가 축 처지지 않는다면 해열제를 먹이거나 물수건으로 계속 닦아주며 체온 확인을 한다. 그러고는 아침에 일어나 가까운 병원을 간다. 열이 떨어졌어도 고열이 난 정확한 원인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확인 차원에서라도 꼭 거르지 않는다. 물론 나보다 더 아이를 많이 키운 엄마들 눈엔 지금의 내 모습도 귀여워 보일 것이다. 마치 초등학교 1학년생이 유치원생에게 너도 학교 다녀보면 알 거라고 얘기하는 모습일 테다. 그야말로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하는 꼴이다. 언젠가 중학생 아이를 둔 엄마가 은산이에 대한 이러저러한 내 얘기를 다 듣더니 이런 말을 했다. “그래도 지금이 편한 거야. 아기 때는 아픈 것만 조심하면 되고 설령 아파도 먹는 걸 엄마가 통제라도 할 수 있지. 커봐. 통제가 안 되는 건 물론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 건강까지 신경 써야 하니 보통 어려운 게 아니야. 학교 공부에 친구들 문제까지, 차라리 어렸을 때 병원 뛰어다니는 게 낫다니까.” 이제 겨우 만 2세. 겪어보지 않은 일들이 더 많을 것이다. 앞으로 또 몇 번쯤은 호들갑을 떨 테고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이 세상 모든 엄마들은 첫째에겐 항상 초보 엄마다. 아이가 아무리 커도, 심지어 어른이 된다 해도 엄마들에겐 다 처음 겪는 일들일 테니 말이다. 백일의 기적도, 돌잔치를 치러내는 일도, 기저귀를 떼는 일도 어느 것 하나 새롭지 않은 일이 없을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학부모가 되는 일, 성적표를 받아왔을 때의 당혹감, 이성친구와 교제를 한다는 걸 알았을 때의 서운함 등 모두 나열하기도 힘들 정도다. 둘째에겐 베테랑 엄마지만 첫째에겐 언제나 초보인 셈이다. 그래서일까? 첫째 때는 그래도 백일 전까지는 꽤 힘들었던지 백일의 기적을 무척 애타게 기다렸는데 둘째 때는 백일이 언제 지났는지도 모르게 휙 지나가버렸다. 지금도 둘째 설이는 그저 먹고 자고 웃어주고 이 일들만 무한 반복하고 있다. 그야말로 알아서 저절로 커가는 느낌이다. 워낙 순둥이여서 그런 건지, 베테랑 엄마가 돼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 애를 넷, 다섯씩 낳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조금 전에도 백일 된 아기 엄마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그때는 원래 다 그래. 호들갑은(웃음).” Profile 고민정은 … KBS 30기 공채 아나운서. 대학 선배이자 열한 살 연상인 시인 조기영과 결혼해 6년 만에 아들 은산이가 태어났고 지난 3월, 둘째 딸 은설이를 만났다. 저서로는 「샹그릴라는 거기 없었다」, 「그 사람 더 사랑해서 미안해」가 있다. <■기획 / 김지윤 기자 ■글 / 고민정 ■사진&장소 협찬 / 서주성, 박소현, 정상진(스튜디오 숲 홍대점, 02-334-9598, www.soopstudio.co.kr)>
-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
-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19)“나 어린이집 안 가! 으앙!”
- 2014. 06. 30 19:10 육아/교육
- 이제 막 말을 시작한 아이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 한참 동안 물어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그저 눈물뿐. 돌연 어린이집 등원을 거부하는 은산이에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침마다 눈물 바람 15개월 때부터 어린이집을 다닌 은산이는 적응을 잘하는 편이었다. 처음 등원했을 때도 다른 아이들은 엄마와 떨어지며 눈물 바람을 일으켰지만 은산이는 ‘왜 울지?’라는 표정으로 선생님께 안기곤 했다. 나이를 한 살 더 먹으면서 선생님, 교실이 모두 바뀌는 상황에서도 처음 며칠만 조금 어색해할 뿐이었다. 동생 은설이 출산으로 엄마랑 떨어져 있던 2주 동안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며 의연히, 아니 내가 보기엔 오히려 더 신나게 어린이집을 다녔다. 그랬던 녀석이 반을 옮긴 지 석 달, 동생을 본 지 두 달이 된 요즘 갑자기 어느 날부터 등원을 거부하는 것이다. 처음 이틀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반은 끌려 들어가더니 3일째 되는 날 결국엔 통곡의 눈물을 흘렸다. 아빠랑 가는 날엔 아빠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놓지 않는가 하면, 나랑 갔을 땐 내 목을 부둥켜안은 채 고목에 붙은 매미처럼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이렇게 가기 싫어한다고 안 보내기 시작하면 오히려 은산이도, 나도 악순환이 반복될 것 같아 억지로 선생님께 떠넘겼는데 그때부터 통곡이 시작됐다.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엄마를 부르짖는데 마치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가슴 아픈 이별을 하는 ‘여명의 눈동자’의 채시라, 최재성이 따로 없었다. 교실에 들어가서도 창문으로 다시 고개를 내민 은산이는 여전히 눈물을 흘리며 엄마를 애타게 찾았다. 그날부터 고민이 시작됐다. 남편과 나는 시간 날 때마다 각자가 생각하는 이유들을 대며 추론해봤고, 은산이가 눈치 채지 않는 선에서 모르는 척하며 이유를 물었다. 하지만 이제 30개월 된 아이가 마음에 있는 속내를 솔직히 털어놓을 리 만무했다. 그렇다고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도 없고 해서 결국 난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해봤다. 그중 하나는 집에서 놀고 싶은 생각에 어린이집이 그냥 가기 싫은 건 아닐까. 마치 학교를 단 하루만이라도 빠지고 싶어 좀 아파봤으면, 하고 기도하던 학생 때의 나처럼 말이다. 싫어! 안 해! 우리 부부는 은산이를 좀 이른 나이에 어린이집에 보낸 대신 감기라도 걸리면 말끔히 나을 때까지 푹 쉬게 하고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았다. 안 그래도 어린 나이에 단체생활을 억지로 하게 된 건데 아플 때만큼은 하루 종일 엄마, 아빠랑 살을 부대끼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리고 몸이 완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보내면 그 약한 틈으로 또 다른 감기 균이 침투해 더 긴 시간 약을 먹어야 했기에 한 번 쉴 때 화끈하게 쉬는 걸 택해왔다. 얼마 전에도 감기로 1주일 정도 등원을 못했다. 백일 된 아기와 에너지 넘치는 아들 녀석까지 함께 하루 종일 지내는 일은 꽤나 힘든 일이었다. 아이의 몸은 회복돼갔지만 내 몸은 거꾸로 녹초가 돼갔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조금만 참으면 어린이집에 보낼 수 있다는 생각에 하루하루를 버텼고 1주일 만에 의사 선생님의 완치 사인을 받고 어린이집에 보냈다. 그런데 그때부터 등원을 거부하는 것이다. 어른들도 연휴가 길수록 회사 나가기가 어렵듯이 집에서 쉰 시간이 길어 어린이집 가기가 싫은 걸까? 아침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 밖을 나서던 아이가 어린이집 앞에만 가면 강한 거부 의사를 표시하니 난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은산아, 왜 그래? 어린이집에 왜 가기 싫은 건데? 천천히 말해봐.” “싫어! 으앙!” 물론 아무리 좋은 시설을 갖춘 최고급 어린이집이라고 해도 집보다 나을 수는 없다. 당연히 자기에게만 집중해주는 엄마가 있고 독차지해도 되는 온갖 물건들이 주위에 넘치는 집이 더 편하겠지. 하지만 우리 집엔 다른 아이들 집만큼 장난감이 많지도 않다. 그렇다고 엄마의 재주가 뛰어나 대단히 재미있게 해주는 것도 아니다. 그저 책 읽어주고 차려주는 소꿉장난 밥을 먹어주는 정도다. 반면 어린이집엔 장난감도 수두룩하고 같이 놀아주는 친구, 선생님들도 많고 혼나는 일도 거의 없을 텐데 왜 싫어하는 걸까? 그런데 그때 퍼뜩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얼마 전에 내가 참관수업 갔잖아. 그런데 한 반에 스무 명이나 있다 보니 무척 시끄럽더라고. 은산이랑 말하려면 거의 소리를 지르다시피 해야 들리고. 혹시 그런 환경이 은산이한테 불편함을 준 건 아닐까?” 아직 대화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한 반에 스무 명이나 된다. 물론 선생님들이 계시긴 하지만 정해진 공간 안에 많은 아이들이 함께 있다 보니 북새통이 따로 없다. 그 속에서 내가 느낀 건 산만함과 이율배반적이지만 외로움이었다. 아이의 감정과 나의 느낌이 완전히 일치할 순 없겠지만 아이의 불편한 마음의 원인을 찾아야 하는 나로선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했다. 사람 많고 시끄러운 곳에서의 산만함이란 누구나 추측할 수 있는 것일 테고, 외로움은 뭐지 싶을 거다. 군중 속 고독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려나. 친구들이 북적대지만 나와 함께 끝까지 놀아주는 친구는 없고, 내가 하는 놀이에 엄마처럼 온전히 보조를 맞춰주고 기다려주는 친구도 없다. 그저 모두 누군가 내게 맞춰주기만을 기다리며 각자 놀고 있을 뿐이다. 언젠가 쏟아지는 빗속을 운전해 가다가 유리창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며 너도 참 외로워 보이는구나,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바깥에서 보기엔 비슷하게 생긴 빗방울들이 한데 쏟아져 내리니 외롭진 않겠구나, 생각할 수 있겠지만 빗방울 하나하나는 결국 낱낱일 뿐이니까. 깨끗한 계곡의 물, 나뭇잎에 맺힌 싱그러운 이슬, 썩어가는 하천의 물, 나의 눈물. 사람의 눈엔 그저 비에 불과하지만 그들도 이렇듯 각자 다른 곳으로부터 와 각자 다른 사연으로 유리창을 때리고 있는 외로운 존재들이란 말이다. 이런 빗방울들처럼 어쩌면 아이들도 각자는 무척이나 외롭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짠하다. 난 유독 ‘외로움’이라는 단어를 자주 입에 올린다. 지금까지 써왔던 글에서도 그랬고 누군가의 고민을 들어줄 때도 연결고리로 종종 떠올리는 단어다. 오빠가 둘이나 있는 집에 막내딸로 태어났으니 무늬만 봤을 땐 외로움과는 거리가 멀어야 하지만 난 어릴 적부터 외로움을 잘 탔다. 가족은 하나같이 말했다. “그래도 네가 제일 많은 혜택을 받았지. 사랑도 받았고. 아빠가 네 말이라면 뭐든 다 들어줬잖아.” 그러나 정작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장난감만 사주면 그만인가요. 예쁜 옷만 입혀주면 그만인가요. 어른들은 몰라요’라는 ‘어른들은 몰라요’ 동요 가사를 알고나 하는 소리인지…. 부모님은 오매불망 기다리던 딸이 느지막이 태어났으니 예쁘긴 하셨겠지만 두 분 다 바쁘셔서 내 옆엔 늘 부모님 대신 인형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가물가물한 유년 시절 기억을 떠올려보면 약국 아저씨한테 받은 비타민 음료 상자 안에 종이 인형을 넣어 다니거나 집 안에 있는 각종 잡동사니들로 인형의 집을 만들곤 했다. 엄마, 아빠와 놀았던 기억은 아쉽지만 거의 없다. 사진을 보면 여기저기 놀러 다니기는 한 것 같은데 도통 생각나지 않는다. 게다가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오빠들은 자기 친구들과 노느라 나랑은 상대해주지 않았고, 굳이 떠올리자면 못살게 굴고 괴롭힌 기억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남편을 만났을 때 세대 차보다는 날 늘 보살펴주고 지켜봐준다는 편안함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풍족한 돈보다 나에게만 집중된 풍족한 사랑이 내 외로운 마음의 갈증을 해소시켜주기엔 더 절실했던 것 같다. 동생아, 동생아 남은 또 하나의 경우는 핏줄이고 뭐고 간에 어느 날 불쑥 나타난 동생의 등장 때문에 어린이집 등원을 거부하는 건 아닐까. 첫째에게 동생이 생긴다는 건 자기 애인이 눈앞에서 다른 사람이랑 사랑하는 모습을 보는 기분이라는데 난 동생도 없는 데다 내가 은산이가 아니니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풍문으로 시나리오를 써본다. “엄마 앞에서는 동생한테 못된 짓 안 하지. 엄마 안 보일 때 하지. 눈을 쿡 찌른다든지 꼬집는다든지.” 그래서 몰래 지켜봤다. 어느 날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은산이가 조용한 것이다. 보통 아이들이 조용하면 사고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기에 후다닥 찾아봤다. 이 방 저 방 둘러보다 보니 동생이 누워 있는 침대 위에 올라가 동생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 만일 은산이가 동생을 한 대 때리면 그야말로 현장 검거다!’ 숨죽여 지켜봤다. 그런데 이 녀석 때리기는커녕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동생의 얼굴을 여기저기 훑어본다. 그러고는 배를 토닥토닥 두드려주는가 하면 나긋나긋하게 동생의 이름을 부른다. 사실 은산이도 처음엔 “동생 젖 주지 말고 나만 안아줘. 동생 내려놓아”라고 떼를 썼다. 그러나 몇 번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줬더니 이제는 자기 한 번 안아주고 그 다음에 동생 젖 주라고 한다. 그리곤 젖을 다 먹을 때까지 내 주위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며 기다린다. 또 하원할 때 어린이집에 데리러 가면 동생은 왔냐면서 카시트를 꼭 확인한다.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을 때도 우리 가족에 동생을 꼭 포함시킨다. 이런 모든 걸 종합해봤을 때 동생이 무작정 싫은 건 아닌 것 같은데, 아닌가? 혹시 천사표 어린이로 철저하게 코스프레하고 있는 건 아닌가? 갈수록 물음표만 늘어난다. 하긴 30여 년이 흘렀어도 나도 내 마음을 몰라 허우적대는데 하물며 은산이 마음을 어찌 알까 싶다. 내가 너무 과한 욕심을 부렸나, 하는 생각이 밀려든다. 엄마도 모르겠어… 정말이지 명확한 답을 찾을 수가 없다. 어린이집이 무작정 재미없어서인가, 라는 결론을 내릴라치면 친구들이랑 선생님 보고 싶다고 뜬금포를 날린다. 그러면 동생에 대한 경계심 때문인가, 하고 무게중심을 그쪽에 맞추면 나 보고 동생을 안아주라든지 동생아, 하고 사랑스럽게 부른다. 학창시절 내내 정답만 고르는 일을 반복해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자꾸만 있지도 않은 정답을 스스로에게 강요한다. 돌이켜보니 아이 옷을 살 때도 매번 어려웠다. 치수가 2T라고 쓰여 있으면 만 2세가 입을 수 있는 옷이란 뜻인데 두 살 반쯤 된 아이는 뭘 입혀야 할지 매번 갈등한다. 결국 치수와 상관없이 눈대중으로 아이에게 맞을 만한 옷을 고르게 되는데, 그게 실제 나이보다 어린 아이들 치수라고 쓰여 있으면 괜스레 혼자 속상해한다. 병원에서도 비슷하다. 어느 병원에나 가면 아이들의 체중과 신장을 개월별로 평균치를 내놓은 기준표가 있다. 육아 서적에도 필수적으로 붙어 있는 것이기도 한데, 그걸 보면 내 아이가 또래 아이들과 비교해 평균치를 따라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다 성장한 이후에는 표준체중과 신장이라는 게 별 의미가 없지만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은 비만이나 저체중아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기준표에서 아이의 위치를 수시로 확인해야 한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나는 또 고민한다. 항목에 2년 6개월과 3년이 있는데 은산이가 2년 9개월일 땐 어느 쪽에 맞춰야 하지? 그뿐이 아니다. 아이의 발달 정도를 확인시키는 차원에서 육아 서적에는 옹알이를 하고 목을 가누고 밤낮을 가리는 등의 과정을 생후 개월 수와 함께 기입해놓는다. 당연히 머리로는 사람이 기계가 아닌 이상 책에 적힌 대로 크지 않음을 안다. 하지만 책에 나온 개월 수에 해당되는 항목을 내 아이가 하지 못하면 호들갑스러울 정도는 아니지만 조금은 걱정스러운 게 사실이다. 수업 시간에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는 토론수업을 받아보지 못한 폐해가, 오지선다 중 하나의 정답을 골라야 하는 객관식 교육을 받은 부작용이 아이 엄마가 돼서도 나타나는 것 같아 씁쓸하다. 벗어나고 싶고 얽매이지 말자고 그토록 다짐하면서도 정답 고르기 습관은 쉽사리 없어지지 않는다. 오늘도 은산이는 집에선 신나는 얼굴로 어린이집으로 향했지만 어린이집 문 앞에선 아빠와 떨어지고 싶지 않아 잔뜩 찡그린 얼굴을 한 채 억지로 들어갔다고 한다. 아이의 이런 행동이 하나의 원인으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상황과 이유가 복합적으로 뒤섞여 있음을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은 자꾸만 하나의 답만을 찾으려 헤맨다. 깊은 잠에 빠진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아이가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것 같다. ‘엄마, 원래 세상엔 정답이 없는 거야.’ Profile 고민정은 … KBS 30기 공채 아나운서. 대학 선배이자 열한 살 연상인 시인 조기영과 결혼해 6년 만에 아들 은산이가 태어났고 지난 3월, 둘째 딸 은설이를 만났다. 저서로는 「샹그릴라는 거기 없었다」, 「그 사람 더 사랑해서 미안해」가 있다. <■기획 / 김지윤 기자 ■글 / 고민정 ■사진&장소 협찬 / 서주성, 박소현, 정상진(스튜디오 숲 홍대점, 02-334-9598, www.soopstudio.co.kr) ■의상 협찬 / 트라이 크리켓(02-3485-6052, www.sbw.co.kr)>
-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
-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은산이 눈 작아졌다. 화났나 봐”
- 2014. 05. 27 15:49 육아/교육
- 제법 말이 많아진 은산이와 대화하랴, 시시때때로 표정이 달라지는 은설이를 지켜보랴, 조금은 정신이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두 아이가 주는 기쁨만큼 더욱 풍성해진 미소가 그녀의 행복 척도를 가늠케 한다. 눈빛으로 대화하는 아이 제 새끼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프고, 못생겼어도 세상에서 제일 미남, 미녀라더니 내가 딱 그런 꼴이다. 기분이 좋아지면 동그랗게 뜨며 깜빡이는 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당당히 윤곽을 드러냈던 오뚝한 코, 뽀뽀를 부르는 도톰한 앵두 입술, 굵게 자리 잡은 가지런한 눈썹까지 내 눈에 은산이의 이목구비 하나하나는 완벽에 가깝다. 목욕시키고 얼굴에 로션을 바를 때면, 팔베개를 하고 내 품에서 재울 때면, 앵두 입술을 오물거리며 밥 먹는 모습을 지켜볼 때면 절로 감탄을 하곤 하는데, 이런 날 보며 남편은 또 시작이라면서 옆구리를 찌른다. 물론 지극히 객관적이지 못한 고슴도치 엄마의 시선으로 보자면 그렇다는 거다. 이 녀석은 눈웃음은 물론이고 눈빛으로 참 많은 말을 건넨다. 상대방의 의사는 귀로만 듣고도 전달이 되는데 녀석은 꼭 얼굴을 쳐다보게 만든다. “잘 잤어? 엄마?” 늦잠 자는 엄마를 위해 아빠와 거실에서 한참 놀다 내가 일어나는 소리가 들리면 쪼르르 달려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아침 인사를 건넨다. 혹 내가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 내 턱을 잡아당겨서라도 자기 눈을 보게 만든다. 그러고는 고갯짓까지 곁들여 말을 하니 녀석의 두 눈에 집중하지 않을 수가 없다. 또 엄마는 잘 주지 않는, 하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싶을 때면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얼굴에 환한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말한다. 주로 군것질거리를 얻어내고자 할 때 그런다. “우리 사탕 먹을까? 한 개만!” 아이들이 먹는 영양제라고 해서 주고 있기는 한데, 어쨌든 밥맛을 없애는 달디단 사탕이기에 칭찬받을 일을 했을 때만, 그것도 하루에 딱 한 번만 준다. 일명 토끼까까. 그걸 ‘득템’하기 위해 아이는 자신이 알고 있는 최상의 애교를 부린다. 마치 영화 ‘슈렉’에 나오는 장화 신은 고양이처럼 눈을 있는 힘껏 예쁘게, 그리고 크게 뜨고선 간절한 표정을 짓는다. 고사리 같은 손가락으로 1을 만들어 입 앞에 모으고 고개는 15도 정도 살짝 기울인 채 한 개만 달라고 온몸으로 표현한다. 바쁜 엄마와 놀고 싶을 때도, TV 만화를 보고 싶을 때도 은산이의 주특기는 여지없이 발휘된다.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려는 인간의 끈질긴 노력 중 가장 본능에 충실한 방법이 바로 애교라는 걸 새삼 깨닫는 요즘이다. 사실 누군가로부터 애교라는 걸 받아본 게 언제인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내 꽃 같은 20대를 온통 지금의 남편하고만 지낸 데다, 워낙 연애를 오래해서 지금은 이 사람이 나한테 어떻게 사랑의 화살을 날렸는지 가물가물하다. 이렇듯 메말라 있는 내게 온 마음으로 사랑을 보내는 은산이란 이름의 한 꼬맹이가 있으니 마음이 녹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런 하트 눈빛을 보내는 것도 자기 기분이 좋아야 한다. 뭔가 뜻하는 대로 일이 풀리지 않거나 엄마가 자기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빗방울처럼 촉촉하던 그 커다란 눈망울이 바늘구멍만큼 작아진다. “은산이 눈 작아졌다. 화났나 봐.” 자기 기준에 이유 없이 혼난다 싶을 때면 꼭 내 눈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나도 사람인지라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가끔은 내 기분에 따라 그렇게 혼낼 일이 아닌데도 언성을 높일 때가 있다. 그러면 은산이는 여지없이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뜨끔! 몰래 커닝을 하다가 선생님하고 눈이 딱 마주친 기분이다. 이미 상황은 벌어졌고 엄마로서의 위엄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에 끝까지 훈육 모드로 몰아간다. 그러면 아이의 눈은 처음엔 내가 왜 혼나나, 하는 마음에 당황한 눈빛을 보이다가 그래도 엄마가 계속 무섭게 쳐다보니 억울한 마음에 화난 눈빛으로 변한다. 그러고는 사랑하는 이로부터 예고 없는 이별 통보를 받은 사람처럼 서운하고 처연한 눈빛을 보이며 눈물방울을 뚝 흘린다. 난 흥분한 나머지 마음에도 없는 헤어지자는 말을 하는 철없는 여자가 되고, 아이는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정말로 이별을 준비하는 그런 남자가 된다. 짧은 순간이지만 녀석은 눈빛으로 말로는 전할 수 없는 많은 이야기를 건넨다. 오해 그리고 화해 눈빛이란 건 참 묘하면서도 강한 매력을 지녔다. 누군가의 눈을 1분만 사랑스럽게 바라보자. 아마도 그런 눈빛을 받은 사람들 대부분은 최소한 심장이 두근거리거나 얼굴이 빨개지는 걸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찡그리거나 화난 눈빛은 말로 하는 싸움 못지않게 상대의 기분을 많이 상하게 한다. 바로 얼마 전에 내게 있었던 일처럼 말이다. “남편 눈을 바라보고 싶지 않다는 거, 그냥 넘어갈 일 아니지 않아?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는 사이가 무슨 부부야?” 6년이란 긴 연애 기간 동안 지금은 남편이 된, 당시 남자친구의 눈빛은 항상 따뜻했다. 살짝 처진 눈꼬리는 더없이 너그럽게 느껴졌고, 깊은 눈매에는 거짓이란 그림자가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결혼 후에도 그 눈빛은 변함이 없었고 사회생활에서 지친 내 두 눈은 그 사람의 눈빛 속에서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으나 찡그리면서 말하는 그의 눈이 자꾸만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분명 화내면서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얼굴을 찡그리니 마음이 불편했다. 나한테 짜증을 내는 것 같아 괜히 내 말투도 곱지 않게 나갔고 그러다 보면 별일 아닌 일로 싸움이 일어났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난 자꾸만 그의 눈을 쳐다보지 않고 대화하게 됐고 그러다 결국 폭발하고 만 것이다. “내가 언제 짜증냈다고 그래? 난 화난 게 아니었는데 당신은 자꾸 내 표정 가지고 뭐라고 하더라?” “당신이 하루 종일 얼마나 자주 찡그리는지 알아? 내가 동영상으로 찍어주고 싶다니까? 나랑 같이 있는 게 그렇게 싫어?” 올해로 만난 지 꼭 15년이 됐지만 여전히 싸울 땐 원초적이다. 열한 살이란 나이 차이 때문에 싸우지도 않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나이는 물리적 숫자일 뿐이다. 난 여전히 별것 아닌 일에도 어린애처럼 펑펑 울면서 싸우고, 남편 역시 별것 아닌 일에도 대화하기 싫어하는 사춘기 학생처럼 입을 꾹 다문다. 그날도 역시 그렇게 유치하게 싸우다가 잠시 소강 상태를 맞이할 때쯤이었다. 갑자기 남편이 말했다. “내가 정말 많이 찡그리고 말하는구나. 의식적으로 휴대전화 화면에 비친 내 얼굴을 봤는데 계속 찡그리고 있네. 이건 화나서 그런 게 아니라 잘 안 보여서 그런 건데….” 이런 웃기면서도 슬픈 일이! 나한테 짜증나는 일이 있어 얼굴을 찡그린 줄로만 알았는데 그 원인은 바로 노안이었다. 나이 마흔을 넘기면 누구에게나 찾아온다지만 ‘노안’이라는 저 두 글자가 주는 애처로움은 그 시기를 겪은 자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남편은 평생 안경 한 번 안 쓸 정도로 시력이 좋았는데 4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슬슬 노안이 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책이든 휴대전화는 자주 무언가를 읽는 사람이다 보니 아무래도 찡그리고 있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나처럼 시력이 좋지 않은 사람은 조금만 시야가 흐려져도 비타민 A를 섭취해야 한다며 호들갑을 떨지만 남편의 시력은 워낙 좋았기 때문에 눈에 대해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런 그에게 예고도 없이 스리슬쩍 노안이 찾아온 것이다. 애들 커가는 것만 신경 썼지 남편 나이 들어가는 것에 대해선 무심했다. 그렇게 그날 싸움의 끝은 우리도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씁쓸하면서도 고요하게 평화를 맞이하게 됐다. 맑고 정직하게 세상 바라보기 난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 그 사람으로부터 풍겨져 나오는 느낌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리고 그 느낌은 그 사람의 눈빛에 의해 크게 좌우한다. 100% 일치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은 눈빛에서 그 사람의 인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인지, 이해득실을 따져 일을 진행하는 사람인지, 열정을 다해 자신의 일을 추진하는 사람인지 등등 짧은 시간에 그 사람을 파악하는 데 눈빛만큼 중요한 요소는 없다. 이렇게 눈빛을 중요하게 여기다 보니 누군가가 무심결에 보낸 눈빛 하나에 쉽게 상처받기도 하고, 거꾸로 내가 보낸 눈빛에 혹시 누군가가 상처받진 않을까 싶어 땅만 보고 다닐 때도 많다. 나란 사람은 그야말로 눈빛 하나에 울고 웃는 소심한 인간이다. 거울을 들여다본다. 남편과 연애하던 시절의 잡티 하나 없던 두 볼엔 숫자를 세어보기도 민망할 만큼의 잡티가 자리를 잡고 있다. 입 주변으론 그랜드캐니언 같은 주름이 팔자 모양으로 깊게 패어 있고, 탄력 있게 올라가던 눈꼬리는 중력의 힘을 거스르지 못하고 아래로 아래로만 내려가고 있다. 이와 같은 노화의 현장 속에 하얗고 까만 두 눈동자가 거울에 반사된다. 그 어떤 의술의 힘으로도 고칠 수 없는 눈빛이 나를 바라본다. 별일 없다면 이제 겨우 인생의 3분의 1정도 산 셈인데 아직까진 마음에 든다. 인생의 우여곡절을 논할 만큼 연륜이 묻어 있는 건 아니지만 비겁하지도 않다. 맑고 순수하다고까지 말할 순 없지만 탁한 기운이 느껴지진 않는다. 참 다행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눈빛도 다 이와 비슷한 것 같다. 예쁘고 밉고를 떠나 모두 정직한 눈빛을 갖고 있다. 아니 정직하지 못한 세상에서 정직함을 지키고자 노력해온 흔적이 보인다. 결국엔 거울 속 내 눈빛을 닮은 사람들이 내 주위에 하나둘 모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모든 아이들의 눈빛은 맑고 영롱하다. 태어날 때부터 탁한 눈빛은 단 한 명도 없다. 그 눈빛을 뿌옇게 만드는 세상과 자신도 한때는 맑은 눈빛을 지녔던 어른들이 있을 뿐이다. 난 우리 아이들이 지금의 그 눈빛을 지켰으면 좋겠다.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상대방을 사르르 녹게 만드는, 거짓말을 한 엄마를 오히려 머쓱해지게 만드는 그런 눈빛 말이다. 그러곤 그 눈빛으로 상대방이 무엇을 속이고 있는지 가늠하기보다는 믿음을 먼저 보여줌으로써 신뢰의 눈빛을 지닌 한 사람을 얻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물론 1백 명의 사람을 만났다고 그 1백 명이 다 내 사람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자신의 눈빛이 맑으면 맑을수록 그러한 눈빛을 지닌 이들을 내 주위에 가득 채울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그래서 부모인 내가 더 이상 울타리가 돼줄 수 없을 때 자신을 닮은 사람들과 함께 어려운 시기를 이겨나가길 바란다. 그렇게 삶을 아름답게 채색하기를. profile 고민정은 … KBS 30기 공채 아나운서로 입사했다. 대학 선배이자 열한 살 연상인 시인 조기영과 결혼해 6년 만에 아들 은산이를 만났고 지난 3월, 둘째 딸 은설이가 태어났다. 저서로는 「샹그릴라는 거기 없었다」, 「그 사람 더 사랑해서 미안해」가 있다. <■기획 / 김지윤 기자 ■글 / 고민정 ■사진&장소 협찬 / 서주성, 박소현, 정상진(스튜디오 숲 홍대점, 02-334-9598, www.soopstudio.co.kr) ■의상 협찬 / 게스 키즈(02-516-5611)>
-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
-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딸의 엄마가 된다는 것은…
- 2014. 05. 02 18:21 육아/교육
- 배시시 웃는 아이의 미소에 천근만근의 피로가 스르르 녹아버린다. 도무지 까닭을 알 수 없는 울음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아이를 바라보며 함께 울고 싶을 때마다 내 어머니에 대한 뒤늦은 고마움과 애절한 그리움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부모가 된다는 건 그런 거다. 은산아, 엄마 잘해낼게 2014년 3월 6일 오후 12시 47분. 하얀 눈과 함께 은설이가 우리 품으로 왔다. 둘째 아이의 출산은 내게 상당한 긴장감을 안겨줬다. 출산 예정일 한 달 전부터 꿈자리도 뒤숭숭했고, 차라리 빨리 낳았으면 했다가도 눈만 감으면 손에 잡힐 듯한 통증의 공포 때문에 날짜 가는 게 두려웠다. 모르면 용감하다고 첫째를 임신했을 때는 태어날 아이에 대한 기대감이 대부분이었는데, 둘째 때는 잠시 잊고 있었던 출산의 아픔이 자꾸 떠올라 두려움이 마음을 가득 채우곤 했다. 전날 밤부터 배를 콕콕 찌르는 듯, 싸하게 배 전체가 아파오면서 진통은 시작됐다. 진통이 시작되고 12시간 정도는 농담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아프진 않았다. 그런데 아침 8시 무렵이 되면서 본격적인 진통이 몰려왔고, 나도 모르게 신음이 새어 나왔으며 눈에는 자꾸 눈물이 맺혔다. 그때마다 고통을 잊기 위해 떠올렸던 건 옆에 있는 남편이 아닌 첫째 아이의 자지러지게 웃는 모습이었다. 묘하게도 녀석의 웃음소리, 웃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 넣자 잠시나마 고통이 지워졌다. 감각을 앗아버리는 마취제만큼이나 강력했다. “은산아, 엄마 잘해낼게. 보고 싶다.” 반복적으로 통증이 찾아올 때마다 저절로 눈이 감겼다. 그럴 때면 반사적으로 은산이의 노래 부르는 모습, 뛰어다니며 깔깔거리는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고 그 상상은 통증을 버텨내게 도와줬다. 그리고 몇 시간이 지났을까. 끝나가는 겨울이 아쉬운지 하얀 눈은 마치 꽃처럼 하늘에서 나풀거리며 내렸고, 은빛 눈(雪)이란 뜻을 지닌 ‘은설’이가 눈(目)을 꼭 감은 채로 내 품에 안겼다. 하늘이 내려준 선물, 은설 남들은 첫째가 아들이고 둘째가 딸이라고 하면 딸이어서 다행이라며 많은 말들을 했다. 둘 다 아들이었으면 어쩔 뻔했어, 엄마한테 딸은 있어야 해, 나도 딸이라는 확신만 있으면 임신할 텐데…. 남아 선호는 이미 구시대의 구호라는 걸 아이를 임신할 때마다 절감했다. 내 주위 대부분의 젊은 엄마, 아빠는 아들의 유무와 상관없이 무조건 딸을 원했다. 10명 중 1, 2명 정도만 아들을 원할 뿐 대부분은 딸을 선호했다. 하지만 난 달랐다. 첫째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둘째도 아들이길 바랐다. 몇 년 전 ‘특명 공개수배’라는 범죄자 관련 방송을 진행했다. 원한으로 사람을 헤치는 이들도 있었지만 우리가 다뤘던 아이템은 상당수가 일명 ‘묻지 마’ 범죄였다. 피해자는 그야말로 자다가 날벼락을 맞은 셈이다. 누군가를 헤치지도, 누군가에게 분노를 심어주지도 않았는데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한 것이다. 그 방송을 하면서 세상이 무서웠다. 언제 나도 그 표적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딸보다는 아들을 낳고 싶었던 것이. 아들은 그 녀석만 올바른 사고를 하게 키우면 큰 무리 없이 살 수 있지만 딸은 늑대 같은 남자들에게 언제 힘으로 제압당할지 모르니 자나 깨나 걱정이었다. 성폭행 혹은 성추행 사건이 일어나도 사람들은 가해자인 남성을 일벌백계하는 것이 아니라 혹시 여성의 행실이 바르지 않았던 건 아니냐며 피해자인 여성에게 눈을 흘긴다. 여기에 대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게 오늘을 사는 우리의 현실이니까. 또 남녀평등이 이뤄졌다, 오히려 남성들이 역차별을 당하고 있다고들 하지만 내 눈엔 아직도 여자에게 세상은 불평등하기만 하다. 소위 말하는 고소득, 고위직에 분포하는 남성의 비율이 높은 만큼 저소득 직종엔 여성의 비율이 높게 나타난다. 물론 예전에 비하면 많이 달라졌지만 여기에서 만족하기엔 기대에 못 미치는 수준이다. 끝으로 둘째도 아들이길 원했던 또 하나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첫째 은산이에게 동성의 친구를 만들어주고 싶어서였다. 어려선 24시간 함께 뛰어놀고, 부모인 우리가 죽은 뒤엔 외롭지 않고, 이성(異姓)은 이해하지 못하는 동성(同姓)만이 나눌 수 있는 공감대를 만들어주기 위해서 말이다. 동생을 만나 기쁜 은산이.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 모든 건 부모의 착각 혹은 헛된 바람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누구를 위해서 혹은 누구를 대신해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당위성으로 세상에 태어난다. 그러하기에 누구를 위해 살아갈 필요도,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살아갈 필요도 없다. 세상과 조우하며 만나게 되는 수많은 사람과 수많은 상황 속에서 나름의 목적을 만들고, 나름의 의미를 가슴에 품으면 된다. 마치 내가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은설이가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없이 하늘이 우리에게 내려준 선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첫째 은산이는 원하고 원해서 얻은 아이라면, 은설이는 잘한 것도 없는 우리 부부에게 하늘이 주신 선물 말이다. 그래서 꽃길을 따라 꽃을 뿌리기 전에 잠시였지만 깜짝 선물과 같은 하얀 눈을 함께 뿌려주신 게 아니었을까. 딸에게 엄마가 가장 힘들어한다는 한 달이 지났지만 이렇게 편해도 되나 하는 마음이 들만큼 힘들지가 않다. 밤낮없이 울어대는 아이 때문에 잠과의 전쟁이 제일 심할 시기인데, 둘째 은설이는 어찌된 일인지 낮에는 시도 때도 없이 젖을 먹으면서 해만 저물면 기본 4~5시간씩은 쭉 이어서 잔다. 더구나 오빠인 은산이가 어린이집에서 돌아올 시간쯤 되면 깊은 잠에 빠져 한참을 자고 은산이가 잠들고 나면 일어나 젖을 달라고 엄마를 부른다. 두 녀석이 동시에 날 찾으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가 큰 고민 중 하나였는데, 고맙게도 은설이 덕분에 큰 무리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은설이가 잠든 사이 나와 남편은 첫째 은산이가 엄마, 아빠를 동생에게 빼앗겼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더 많은 스킨십을 나누고 함께 책도 읽고 목욕도 한다. 그러면서 엄마, 아빠의 사랑은 동생이 생겼다고 해서 나눠지는 게 아니라 그만큼의 사랑이 더 생겨난다는 걸 느끼도록 몸의 언어로 계속 말을 건다. 그래서인지 말로만 듣던 첫째 아이의 타오르는 질투심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이렇듯 온 가족의 협동으로 육아에 대한 큰 스트레스가 없다 보니 모유도 잘 돌고 몸도 생각보다 가뿐하다. 잠깐이긴 했지만 내심 아들이길 바랐던 내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지고, 특히나 은설이에게 그런 마음을 가졌다는 점이 미안하다. 안녕하세요, 제가 조은설이랍니다. 딸이 태어나면서 느끼는 새로운 감정들이 참 많다. 목젖이 보이도록 울다가도 엄마 젖을 물기만 하면 쌕쌕 숨소리를 내며 열심히 먹는데, 그 모습이 참 어여쁘다. 예쁘다는 단어보다는 어여쁘다는 단어가 더 적합하겠다. 아들인 은산이보다 출생 몸무게도 더 나가고 현재 발육 상태도 더 좋지만 왠지 가녀린 아기 사슴 같아 꼭 안으면 부서질 것 같고 끝까지 내 품에서 보호해줘야 할 것 같은 강한 모성 본능을 불러일으킨다. 아들을 낳았을 땐 갓난아기를 보면서도 왠지 모르게 듬직했는데 딸은 또 다르다는 걸 많이 느끼는 요즘이다. 어느 날은 넋을 놓고 은설이가 젖 먹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너도 어른이 되면 엄마처럼 이런 고통을 겪으며 아이를 낳겠구나. 대부분의 여자들이 다 겪는 일이라고 치부하기엔 그 아픔이 무척이나 크다. 당사자만이 알 수 있는 입덧의 괴로움, 10kg이 넘는 무게를 매일 밤 온몸으로 이겨내야 하는 나날들, 출산하는 그 순간, 젖이 터져 나오기까지의 아픔, 출산 후 저려오는 손가락 마디마디, 젖을 물리느라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하는 날들….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더구나. 물론 그 아픔보다 더 큰 기쁨이 있지만 이 엄마는 그저 네가 아프고 고생할 것이 벌써부터 걱정이구나. 엄마가 대신 낳아줄 수도 없고 말이야. 대신 네 아이는 내가 키워줘야겠지? 그래, 그러면 되겠구나.’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딸아이의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다 보니 진도가 여기까지 나갔다. 나가도 너무 나갔지 하며 혼자 피식 웃는다. 내가 태어난 지 며칠 되지 않은 아이를 보며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보고 자란 게 있어서다. 3남매를 키우시던 친정 엄마는 아버지를 도와 장사를 하시느라 항상 바쁘셨다. 거기에다 개구쟁이 두 아들과 손이 많이 가는 막내딸을 키워야 했으니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그때마다 우리를 돌봐주셨던 건 외할머니셨다. 아주 가끔 엄마, 아빠께서 부부 동반으로 여행이라도 가게 되면 꼭 외할머니께서 우리 집에 와 계셨고, 그때 들기름을 넣고 달달 볶아주셨던 김치볶음의 맛은 지금도 잊히지가 않는다. 이런 외할머니의 모습은 은산, 은설이의 외할머니이신 나의 친정 엄마에게 그대로 투영된다. 우리 부부는 보통의 맞벌이 부부에 비하면 상황이 나쁜 건 아니다. 내가 회사에 가야 하는 직장 맘이긴 하지만 남편이 집에서 작업하는 시인이다 보니 아이를 집에 혼자 둬야 하는 일은 별로 없다. 그래도 간혹 남편과 함께 꼭 참석해야 할 일정이 있을 때는 난감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 때문에 사회생활을 안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이만 집에 혼자 둘 수도 없으니 말이다. 그럴 때마다 도움을 주시는 건 친정 엄마다. 이 세상은 자기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세 살짜리 천방지축을 돌본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텐데도 매번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흔쾌히 외손자를 돌봐주신다. 당신께서도 젊은 시절 친정 엄마의 도움을 받았듯 딸인 내게도 그렇게 든든한 우군이 돼주고 계신다. 아마 친정 엄마가 안 계셨더라면 난 아이를 키우면서 더 많은 걸 포기해야 했을 것이다. 이렇게 외할머니는 엄마에게, 엄마는 나에게 대를 이어 딸만이 받을 수 있는 사랑을 쏟아주셨고, 나도 역시 내 딸 은설이가 아이를 낳아 도움을 청하면 모든 일을 제치고 달려갈 것이다. 그렇게 친정 엄마의 뒤를 밟아 나도 또 한 명의 ‘친정 엄마’가 돼가고 있다. 그리고 내 딸도 똑같겠지. 또 한 명의 고민정 얼마 전 「그 사람 더 사랑해서 미안해」라는 책을 내면서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엄마보다 더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게 됐다며 고백 아닌 고백을 한 적이 있다.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딸인데 나보다 한 남자가 더 좋다고 떠나는 딸자식의 뒷모습을 보며 엄마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해봤다. 아마 다행이다 싶다가도 서운한 마음이 드셨을 것이다. 하지만 남의 일이 아닌 것이 나도 20, 30년쯤 후엔 딸아이에게서 똑같은 말을 들을 게 뻔하다. 어디 그뿐인가. 남자친구 갖다 준다고 김장 김치며 곰탕이며 몸에 좋은 음식을 싸다 나를 것이고, 밸런타인데이라도 되면 아빠한테는 달랑 초콜릿 하나 주면서 남자친구에겐 직접 손으로 만든 초콜릿을 선물할 것이다. 내 눈엔 내 딸보다 한참이나 부족해 보이는 사내 녀석이어서 차라리 헤어졌으면 했는데, 그 녀석과 헤어진 게 뭐가 그리도 슬픈지 사흘 밤낮을 울면서 청승도 떨 테고 말이다. 그러곤 결국 제 짝을 만나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결혼식장에 들어서겠지. 그렇게 모든 게 돌고 도나 보다. 어린 시절 고생하시는 엄마를 보면서 난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난 엄마만큼이라도 엄마 역할을 잘하고 싶어 ‘이럴 땐 엄마가 어떻게 했었지?’ 하며 친정 엄마를 따라 한다. 아마 더 나이가 들어서도 엄마 따라 하기는 끝나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내 딸도 아이 엄마가 되면 지금의 나처럼 친정 엄마인 나를 따라 하겠지? 또 하나의 고민정이 생겨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내 딸이 더 아름다운 여인이 되게 하려면 내가 아름다워지면 된다. 그게 제일 편한 방법이다. PROFILE 고민정은 KBS 30기 공채 아나운서로 입사했다. 대학 선배이자 열한 살 연상인 시인 조기영과 결혼해 6년 만에 아들 은산이를 만났고 지난 3월, 둘째 딸 은설이가 태어났다. 저서로는 「샹그릴라는 거기 없었다」, 「그 사람 더 사랑해서 미안해」가 있다. <■기획 / 김지윤 기자 ■글&사진 / 고민정 ■사진 / 원상희(Aye Studio) ■의상 협찬 / 게스 키즈(02-516-5611), 에뜨와(02-527-1430, www.agabangncompany.com) ■장소 협찬 / 베이비훈 스튜디오(02-573-3777)>
-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
-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남편 조기영 시인이 보내온 편지 “은산이 동생 은설이가 태어났어요!”
- 2014. 04. 10 18:47 육아/교육
- 출근을 하려고 채비를 하는데 고민정 아나운서에게 문자 한 통이 왔다. 은설이의 탄생 소식이었다. 입가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두 사람을 꼭 닮은 아이는 또 얼마나 고울까. 이달,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는 산후조리 중인 아내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남편 조기영 시인이 대신했다. 3월 6일, 눈송이와 함께 꽃 한 송이가 피었다. 둘째 은설이가 태어난 것이다. 첫째 은산이가 태어난 날에도 눈이 왔었다. 두 아이가 눈과 참 인연이 깊다. 두 돌이 지난 은산이는 이제 제 작은 세상들, 집과 어린이집과 외할머니 댁을 휘젓고 다닌다. 양가 어르신들을 모두 할아버지, 할머니로 부르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를 구별해주니 “외엄마”, “외아빠”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웃음꽃을 퍼 나른다. 녀석은 요즘 뭐든 자기가 하겠다는 강한 의지로 아무도 손대지 말라며 “지가!”, “지가!”를 연발하고 있다. 신발을 신을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옷을 입을 때도, 이를 닦을 때도 엄마, 아빠가 도와주려 하면 “지가!”를 외쳐댄다. 답답하면서도 도와주려다 싸우게 되니 그냥 지켜보게 된다. 자기가 하다하다 안 되면 엄마나 아빠를 빤히 쳐다본다. 그 표정이 꽃봉오리처럼 사랑스럽다. 마흔넷에 얻은 아들, 은산이. 녀석을 얻기까지는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꽃은 바람만으로 피는 것이 아니다 아내가 내게 다섯 번 청혼해 결혼했다고 이야기한 걸 들은 적이 있다. 그녀도 오랜 기다림 끝에 나와 결혼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당사자인 나는 그걸 몰랐다. 누가 그 횟수를 세고 있었겠는가. 나는 그녀가 결혼 의사를 내비칠 때마다 이런저런 이유를 대가며 결혼을 미뤄 그녀가 이 사회에서 잘 자리 잡기를 바랐다. 그녀가 내 곁을 떠나도 여한이 없다는 생각까지 하면서 말이다. 그녀가 아나운서에 합격하고 신내동에서 회사를 다니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이젠 네가 사회적으로 보면 강자야. 난 오랫동안 네 사랑을 충분히 받았어. 그걸로 나는 충분해. 네가 내 곁을 떠나도 난 여한이 없어.” 그녀가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는지, 그녀는 절대 내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떠보는 말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날은 왠지 그 말을 해줘야 할 것 같았다. 정 때문에 곁에 남아 있는 건 나 역시 원하는 바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오히려 그때부터 그녀는 결혼을 서둘렀다.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선 얘기가 흘러나오니 스스로 불안했는지도 모른다. 부모님께 나를 인사시켰고, 상견례를 했다. 그리고 1년 뒤 결혼을 했다. 장인, 장모로부터는 어떤 잡음도 들려오지 않았다. 두 분은 아들, 딸을 디딤돌 삼아 신분 상승을 꿈꾸지 않았다. 아니 경계했다는 말이 더 타당할 것이다. 그녀를 만난 것도 내 삶에 큰 행운이지만 그런 장인, 장모를 만난 것도 큰 행운이다. 두 개의 행운이 내 결혼을 가능케 한 것이리라. 결혼 후 그녀는 일에 집중했다. 일과 신혼을 즐기며 아이 갖는 것은 미뤄두었다. 아이를 기다리기는 했지만 아이 갖기를 강요하지는 않았다. 마흔이 넘어도 표 나지 않게 그녀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기만을, 아이를 향한 그녀의 마음이 활짝 열리기만을 바랐다. 그러고 보니 아내도, 나도 서로 다른 이유로 기다린 날들이 많았구나 싶다. 아내가 아이를 갖고 싶다는 바람을 드러낸 것은 결혼 후 2년이 지나서였다. 그녀의 결심이 서자 이번에는 내 쪽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내가 먹었던 약 중에 스테로이드제라는 게 있다. 강직성 척추염 발병 초기에 통증이 심할 때 여러 약과 함께 한 번에 네 알씩 먹기도 했는데, 아이를 가지려면 그 약을 먹은 날로부터 3개월에서 6개월 정도는 지나야 했다. 2008년경에는 스테로이드제를 먹지 않고 있었는데 작업을 하다 보면 드물게 눈에 포도막염이 발생했다. 그 무렵 나는 소설을 쓰고 있었다. 포도막염은 쉽게 말해 강직성 척추염의 염증이 눈으로 흘러든 것이다. 심하면 스테로이드제를 먹어야 했다. 그 약을 먹을 때면 당분간 아이를 갖지 못한다는 사실에 몸의 가시를 한껏 세운 고슴도치처럼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그 무렵 아내가 결혼한 지 3년이 돼가는데 아이가 없으니 둘 사이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소문이 돈다 했다. 아이는 갖고 싶고, 몸은 안 되고, 이상한 소문은 돌고, 마음이 무거웠다. 꽃은 바람만으로 피는 것이 아니었다. 혹성 탈출 2009년 1월 29일. 그 날짜를 분명히 기억한다. 그날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아내의 이름이 어이없는 이유로 포털 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 1위를 내달린 날이니. 이름 하여 고민정 누드 사건. 그날 나는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도서관에서 나와 회사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하지만 6시가 한참 지나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전화도 받지 않았다. 무슨 사건이 터졌음을 직감했다. 꽃에, 꽃밭에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었다. 우리가 뉴욕에서 활동하는 사진작가 고상우씨로부터 메일을 받은 것은 2008년 늦봄이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좀 이상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아내와 만날까 말까를 고민했다. 그러던 중 그의 제의로 그가 참가하고 있던 전시장을 찾았다. 그는 작품을 보여주며 우리와 작업을 하고자 하는 바람을 피력했다. 그는 잡지와 인터넷을 통해 우리 부부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고, 사랑이라는 주제로 그 내용을 작품으로 만들기를 희망했다. 그 자리에서 작업을 약속할 만큼 그도, 그의 작품도 매력적이었다. 15세에 한국의 미술 교육이 답답해 미국으로 건너가 사진작가가 된 사나이. 사진을 그림처럼 그리는 사람. 그는 척박한 한국 땅에서 미국으로 날아가 핀 꽃이었다. 그는 현대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렌즈 너머에서 밝은 것은 어둡게, 어두운 것은 밝게, 흰 피부는 검게 전복되며, 검은 피부는 하늘색으로, 동양인의 피부는 파란색으로 변한다는 것에 착안해 창작을 시작했다. 남성과 여성, 동양과 서양, 현실과 환상이 전도되는 그의 작품은 보는 이들을 환상의 세계로 안내한다. 뚱뚱한 여자, 백인 사회의 동양인 같은 소수자, 비주류, 소외된 사람들이 그의 관심 대상이었다. 사랑이라는 테마도 주요하게 다뤘는데, 우리가 그 주제에 어울린다고 생각한 듯했다. 작업은 진지했고, 새로운 경험은 흥미로웠다. 작품 속 모델은 반전되기 때문에 누구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그 사실을 분명히 했고, 우리가 모델이라는 사실은 비밀에 부쳐달라고 말했다. 그것이 그가 원한 것의 전부였다. 모델료는 없었다. 모델료가 없다는 것이 오히려 우리를 그와 그의 작업에 대한 확신으로 이끌었다. 무언가 받았을 거라는 추측과 근거 없는 확신은 믿지 못하는 사람의 것일 뿐 우리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작품이 완성되면 모델이 원하는 작품을 하나 선물하는 관행이 있다고 했다. 그것도 실시간 검색어 1위 사건이 터진 뒤 그가 말해줘 알게 됐다. 그것도 모델료라면 모델료 되시겠다. 작품 전시는 2월 13일로 예정돼 있었다. 문제의 누드 기사가 터진 것은 1월 29일. 왜곡된 신문 기사로 그녀는 예정되지 않은 고행의 시간으로 빠져들었다. 아침이면 울면서 출근을 했고, 저녁이면 울면서 퇴근을 했다. 부당한 기사에 고립된 개인이 넘어야 할 파고는 높았다. 기사는 누드가 아닌데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누드라는 말을 만들어내는 비범함을 보여주었다. 전시를 못하게 하라는 압력과 소송을 걸라는 겁박이 먹구름 속에서 날아들었다. 비바람은 고상우씨에게도 향하고 있었다. 그는 저질 쓰레기 작가로 격하됐다. 안쓰러웠지만 나는 아내에게 부당한 일이니 이겨내라고, 이겨내야 한다고 말했다. 부당한 요구에 굴복하는 것은 정신적 상처로 남아 이후 그녀를 괴롭힐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때론 부당한 일을 견뎌낸 자긍심으로 살기도 한다는 사실을 나는 믿었다 고상우씨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느낌이 이상해 누드 아니라고, 누드의 ‘누’ 자도 꺼내지 말라고 경고까지 했다고 말했다.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이런 일이 있으면 회사를 빛냈다며 사장이 축하의 꽃다발까지 준다며 안타까워했다. 그가 작품이 의심되면 작품을 다 보여주고 전시하겠다고 했지만 압력은 잦아들지 않았다. 작가와 모델은 함께 압력을 견뎌야 했다. 일회성으로 지나갔을지도 모를 인연은 우리를 동지에 가까운 친구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것이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그녀는 지쳐갔다. 그녀가 알아온 세계는 사막으로 변해 있었다.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사막에 꽃이 필 리 없었다. 우리는 밖으로 눈을 돌렸다. 사막이 꽃밭이 되고, 마음에 꽃이 피어날 때까지 한국을 떠나 있기로 한 것이다. 목적지로 떠오른 곳은 중국 칭다오였다. 표면적인 이유는 유학이었지만 사실 혹가혹할酷 성별星 탈출에 가까운 것이었다. 조화는 새 생명을 피워내지 못한다 기다리던 아이가 들어선 것을 알게 된 건 2011년 3월이었다. 중국에서 돌아온 다음 해, 아내가 아이를 포기하고 대학원에 다니기 시작할 때였다. 그날 우리는 만세를 불렀던가, 아니던가. 그렇게 긴 기다림 끝에 태어난 은산이는 이제 엄마, 아빠의 눈빛을 햇빛으로 받아먹으며 뛰어다닌다. 문득문득 궁금하다. 누드 기사를 쓴 그 기자는 무언가 간절히 기다린다는 걸 알기는 하는지, 벌써 5년이 다 돼가는 일인데 아직도 그렇게 살아가는지, 여전히 그런 방식으로 인정을 받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자녀들에게는 무엇을 가르치는지, 세상이 변해도 부모가 살아가는 방식이 자식들에게 가장 큰 교육이라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을 텐데, 하면서…. 귀한 삶이란 본능에서, 욕망에서 멀어지려 노력하는 삶이 아닐까. 내 어머니, 아버지는 농부셨다. 평생 땅을 파 자식들을 가르친 농부. 두 분은 너희가 배우겠다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하는 데까지 해보겠다며 4남매를 대학까지 가르치셨다. 자식들에게는 어디로 가라, 무엇을 해라 한마디 말씀이 없으셨다. 모든 꽃들에게 사랑할 대상과 일할 지역을 정해주고 모두 그에 따랐다면 아마 지구라는 별에 지금처럼 꽃들이 많아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똑같은 모습으로 똑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조화에 불과하다. 조화는 새 생명을, 새 꽃을 피워내지 못한다. 아이가 태어나고,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노닐던 꽃밭은 어머니, 아버지의 마음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고상우씨의 꽃밭은 어린 그의 미국행을 묵묵히 지지해준 어머니, 아버지가 아니었을까. 고상우씨는 머나먼 나라로 날아가 한 송이 꽃을 피워냈다. 그 꽃씨로 우리에게도 꽃을 만들어줬다. 나도, 고상우씨도 이제 아이들에게 꽃밭을 만들어줄 차례다. 언제든 비바람이 불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인생의 일부라는 것, 비바람이 없으면 기쁨도 커지지 않는다는 것도 함께 일러주련다. 그 이외에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 자본주의 시대에 시는 어느덧 별 쓸모없는 꽃이 돼버렸다. 이 첨단의 이윤 추구 시대에 효율성이 낮아 저 뒤쪽으로 밀려나간 것일 게다. 맨 뒷자리는 철학 하는 자리라 했던가. 그 자리에서 은산이와 이제 막 태어난 은설이가 북극으로 향하기 위해 파르르 떨고 있는 나침반처럼 서 있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으리라. 먼 훗날의 얘기겠지만 아이들에게 바라는 것이 하나 있다면 동반자는 시 1백 편쯤은 외울 줄 알아야 한다는 편견을 갖고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는 아들, 며느리와 혹은 딸, 사위와 시 1백 편을 안주 삼아 술잔을 들고 삶이라는 희망에 대해 함께 얘기해볼 수 있으리라. 그런 날엔 창밖에 휘영청 밝은 달이 떠 있었으면 좋겠다. PROFILE 조기영 시인은… 한 여자의 남편, 어느덧 두 아이의 아빠. 시인은 세상과 ‘맞짱’ 뜰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몽상가. 저서로는 시집 「사람은 가고 사랑은 남는다」, 장편 소설 「달의 뒤편」이 있다. <■기획 / 김지윤 기자 ■글 / 조기영 ■사진 / 원상희 ■의상 협찬 / 에뜨와(02-527-1430, www.agabangncompany.com), 게스 키즈(02-516-5611) ■장소 협찬 / 베이비훈 스튜디오(02-573-3777)>
-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
-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봄봄봄봄, 봄이 왔어요!
- 2014. 03. 05 17:06 육아/교육
- 1년 전, 걸음마도 떼지 못하고 아빠의 손을 의지한 채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로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돌쟁이 은산이가 이제는 촬영장을 뛰어다닌다. 가까워진 거리만큼 아이는 훌쩍 컸고, 질문도 많아졌다. 새싹이 올라오는 봄. 은산이네 가족은 새 식구를 맞이한다. 아마도 다음달엔 둘째의 탄생 소식을 전해줄 수 있겠지. 나의 철천지원수, 감기! 어릴 적부터 기관지가 튼튼하지 못해 감기를 달고 살았다. 조금만 한기가 돌아도 금세 목감기에 걸렸고, 반드시 코감기로 끝이 났기에 코밑이 늘 헐어 있었다. 그래도 그때는 감기라는 녀석에 대해 큰 존재감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저 몸을 따뜻하게 하며 집에서 민간 치료를 했을 뿐 약도 별로 먹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항상 내 목소리는 비음이 섞여 있었고, 꽉 막힌 노래방처럼 공기가 좋지 않은 곳에 가서 목을 조금만 쓰기라도 하면 금세 쉬어버리곤 했다. 아마 아나운서라는 직업을 택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계속 감기를 마치 생활의 일부처럼 여기며 큰 불평 없이 지냈을 것이다. 하지만 목소리가 생명인 아나운서에게 감기를 비롯한 기관지 관련 질병은 최대의 적이었다. 아나운서가 된 이후부터 내 안테나는 온통 목과 코에 쏠렸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만 있다 치면 생강차, 유자차를 마셨고, 한여름에도 목도리를 칭칭 감고 자는 건 물론이며 노래방에 가더라도 될 수 있는 한 목을 많이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아, 진짜 피곤하다. 그 흔한 감기 나도 맘 놓고 걸리면 안 되나? 누구 눈치 볼 것 없이 감기몸살로 몸져누워봤으면 좋겠다!” 불가항력적으로 감기에 걸리기라도 하면 주위 사람들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했기에, 심지어 어떤 제작진에게서는 몸 관리도 제대로 못한다며 질책을 들어야 했기에 감기에 걸려도 별반 상관없는 사람들이 한없이 부러웠다. 별게 다 부럽지. 둘째를 임신하고 정규적으로 하던 방송도 다 내려놓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회사를 다니던 어느 날이었다. 감기에 걸린 듯했다. 첫째를 임신했을 때는 감기 기운이 있다가도 복중 태아의 열 때문인지 심해지지 않았는데, 이번엔 벌써 세 번째다. 목이 따끔거려 수분 보충을 위한 따뜻한 물과 비타민 C가 풍부한 과일을 듬뿍 먹었지만 소용없었다. 건조한 사무실 공기는 감기를 더욱 악화시켰고, 출퇴근할 때마다 맞는 겨울의 매서운 바람은 감기의 위력만 더 세게 만들었다. 이내 기침을 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목이 쉬어 목소리가 안 나오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도 전처럼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방송은 쉬고 있었고, 나는 이대로 그저 방에서 뒹굴거리기만 하면 됐으니까. 남편한테 귤 까달라, 유자차 타달라, 밥 차려달라, 설거지 부탁한다, 식의 명령을 가장한 부탁만 하면 되니 이런 호사가 또 어디 있으랴. 나에게도 이런 날이 오는구나 싶어 은근 감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렇게 1주일쯤 지났을까. 점점 배가 당겨오기 시작했다. “콜록콜록. 갈수록 기침이 심해지네. 다른 것보다 기침 한 번 할 때마다 배가 무척 아파.” 임신 8개월쯤 마주한 기침감기는 목이 문제가 아니라 볼록 튀어나온 배가 문제였다. 거의 만삭인 상태라 똑바로 누워 자지도 못하고 갑작스레 10kg이나 불어난 몸을 지탱하느라 다리는 물론이고 몸 이곳저곳이 아팠다. 임신해본 사람들은 다 알 테지만 배가 수축되며 단단해지는 게, 일명 뭉치는 것인데 태아에게는 좋지 않은 환경이다. 스트레스도 받지 말아야 하고 잠도 푹 자고 잘 먹어야 한다는 등 임신부가 지켜야 할 수칙은 상당수 이 배 뭉침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런데 기침을 하는 횟수가 잦아질수록 배 뭉침이 심해지더니 나중엔 갈비뼈를 둘러싼 근육통이 왔고, 심지어 누워서 기침을 할 때면 온몸이 뒤틀리는 듯한 극심한 통증이 동반됐다. 가습기를 켜고 수시로 물을 마셨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누워 있을수록 밤이 될수록 증세는 더 심해졌고, 그렇지 않아도 임신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새벽에 두 번씩은 꼭 깨서 숙면을 못 취했는데 이젠 밤이 되는 게 두려울 지경이었다. 잠을 못 자니 낮에도 비몽사몽이었고, 그 피로감은 그대로 잦은 배 뭉침으로 이어졌다. 밤에 기침하다 괴로워 엉엉 소리 내 울기도 했으니 말 다했다. 그래도 약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고통을 참아가며 힘겨운 날들을 보내고 있는데, 나랑 비슷한 시기에 둘째를 임신한 친구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감기야? 심하면 산부인과에 가봐. 나도 감기가 하도 심해서 병원에 갔는데 차라리 약 먹고 산모가 편안해지는 게 태아에게도 좋다고 하더라고. 나도 첫째 때 그랬었잖아. 그때 약 몇 번 먹고 금세 나았거든.” 이게 무슨 소리인가? 임신부는 무조건 약의 도움 없이 버텨야만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니? 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병원으로 향했다. 초췌해질 대로 초췌해져 고통을 호소하는 내 모습을 본 의사 선생님은 임신부가 먹어도 안심할 수 있는 약으로 처방을 내려주셨다. 물론 의사마다 산모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그리고 미량의 약이라도 아이에게 조금은 영향을 끼칠 수 있겠지만 일단 임신 후반기라 신체 조직은 다 갖추어진 상태이고 약으로 인한 부작용보다 이 상태로 산모의 컨디션이 계속 악화일로를 걷는 게 태아에게 더 안 좋을 수 있다고 판단하셨던 것 같다. (내 글을 보고 섣불리 약을 먹는 건 당연히 절대 금물이다! 그러지 마시라. 꼭 의사와 상담 후 결정하시길!) 그리고 수많은 약 가운데 등급이 가장 높아 임신부가 먹었을 때 가장 덜 해로운 약의 목록이 정해져 있다고 한다. 그래서 기침감기약을 처방받았고 증세는 눈에 띄게 좋아졌다. 하도 배가 자주 뭉쳐 갈비뼈까지 아파 숨쉬기조차 힘들었는데 기침이 잦아들면서 잠자는 시간이 늘었고 배 뭉침 현상도 점점 줄어들었다. 그야말로 광명을 맞은 기분이었다. 아나운서 생활 10년을 하면서 감기에 벌벌 떨어야 했고, 방송이 없는 임신부 시절만이라도 마음껏 감기에 걸려보리라 생각했는데 된통 당했다. 감기라는 녀석이 ‘네가 내 손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라면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후로 난 집에서 쉬고 있으면서도 마치 방송할 때처럼 조금만 감기 기운이 있어도 긴장하며 벌벌 떤다. 심지어 첫째 은산이가 감기에 걸려 콧물이라도 나면 최대한 멀리하며 감기가 옮지 않도록 조심한다. 은산이가 감기에 걸리면 남편에게 모든 육아를 일임하는 등 내 유난스러움 때문에 남편이 자주 감기에 걸려야 했지만 근 한 달 동안 치러야 했던 내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기에 모든 걸 감수해줬다. 남편은 알까? 감기라는 흔한 병이지만 내 대신 아프겠다는 모습을 보며 진짜 가족임을 느낀다는 사실을 말이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이지만 사랑으로 맺어진 부부라는 관계가 물보다 진하다는 피 그 이상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걸 깨닫는, 여전히 많은 걸 배우고 있다는 걸 말이다. 가끔은 필요한 나만의 시간 두 아이의 엄마이자 대학 친구인 J와 오랜만에 전화 통화를 했다. 워낙 사람들 챙기는 일에 서툰 나인지라 J에게도 전화 한 통 못하고 지냈다. 그래서인지 생일과 기념일을 챙기거나 전화나 문자로 안부를 묻지 않아도 별로 개의치 않는 친구들만 내 곁에 남곤 한다. 이런 내게 거의 1년 만에 J에게서 전화가 온 것이다. “전화 좀 하고 지내지.” 친구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자 미안한 마음과 함께 거의 1년 만에 통화하는 것인데도 엊그제 전화한 것 같은 익숙함이 묻은 반가움이 몰려들었다. “알잖아. 잘 지내지?” 은산이가 태어난 이후로는 사람들과 연락하기가 더 어려워진 게 사실이다. 은산이가 어린이집에 가 있는 동안에는 회사에 있어야 하고 퇴근해서는 저녁밥 하랴, 은산이랑 놀아주랴, 남편이랑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 얘기하랴, 아이 목욕시키랴 휴대폰 들여다볼 틈이 없다. 설령 간혹 짬이 생겨도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은산이가 득달같이 달려와 자기도 보겠다고 성화여서 열어보지도 못한다. 그리곤 온 집 안이 컴컴해져야 잠을 자는 아이여서 잠이 안 와도 같이 잠자리에 누워야 하고, 그러다 보면 같이 꿈나라로 들어간다. 그래서 문자나 SNS를 다음날 확인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둘째가 몇 개월 됐지?” 둘째 임신했다는 소식을 전화로만 듣고 그동안 만나지도 못했던 기억이 났다. 이제 돌 정도 됐을까 하는 마음으로 물었는데. “22개월이야.” ‘아, 내가 정말 오랫동안 연락을 안 했구나.’ 스스로 생각해도 참 무심했던 나를 속으로 질책하고 있는데 J가 말했다. “그동안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어. 계절이 어떻게 바뀌는지도 몰랐다니까. 그나마 첫째랑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다행이었지, 첫째가 한 살이라도 더 어렸으면 난 못 키웠을 거야.” “그러면 나는 어쩌라고. 넌 첫째 둘째가 일곱 살 터울이지만 난 겨우 27개월 차이인데…. 네가 부럽다. 두 돌이면 이제 힘든 거는 거의 지나갔잖아. 나한테도 그런 날이 오긴 하겠지?” 육아를 하는 데에 남편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긴 하지만 아이 둘 키울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다. 아이 응가 기저귀도 척척 갈아주고, 국 하나 끓여 달걀프라이랑 차려서 아이 밥도 먹이고, 목욕시키는 건 물론이요, ‘뽀로로’를 보여주면서 은산이 머리도 예쁘게 잘 잘라주는 남편이다. 임신 초기에는 입덧한다고, 후기가 됐을 땐 운전할 때 위험하다고 매일 출퇴근도 시켜줬고, 어느 정도 정리만 해놓으면 청소는 당연하게 자신의 몫인 듯 대걸레를 드는 사람이다. 이런 남편이 24시간 곁에 있음에도 육아의 고됨이 떨쳐지지 않는다. 시장에서 우리 세 식구 먹을 찬거리도 사야 하고, 매일 한두 시간씩은 주방에서 요리를 해야 하고,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빨래를 구분해서 세탁기에 돌리고, 은산이 책 읽어주고, 돌아서면 지저분해지는 집 안 곳곳을 정리해야 하는 등 하루가 금방 지나가버리곤 한다. 그렇게 정신없이 지내다 문득 나를 돌아보니 끝까지 읽은 책은 거의 없고 대부분 처음 몇 장만 읽었을 뿐이다. 펑펑 내리는 눈을 보며 추억을 곱씹고, 쏟아지는 빗줄기에 내 마음을 비워내기도 하고, 알록달록 물든 낙엽을 보며 아름다움을 노래했었는데 지금의 내게선 감수성이라는 샘물이 말라버린 것만 같다. 담벼락에 붙은 담쟁이를 봐도 알아채지 못한 채 지나치기 일쑤고, 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는 할아버지와 손자의 뒷모습도 눈에 담지 못하고 그저 내가 가야 할 곳을 찾아 부지런히 걸어간다. 남편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데도 이렇게 소녀에서 여자로, 이제는 여자에서 아줌마로 변해가는데 하물며 야근과 출장이 잦은 남편을 둔 아내들은 오죽할까 싶다. 오늘은 은산이를 남편에게 안긴 채 서재 방문을 걸어 잠그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동요가 아닌 커피 향기처럼 그윽한 어쿠스틱 음악을 튼다.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살은 눈이 부시지 않을 정도로만 블라인드를 친다. 우유를 뜨겁게 끓인 뒤 아쌈 티백이 폭 잠기도록 해서 내가 좋아하는 머그에 담아온다. 누군가의 일상이 담긴 에세이집이나 하얀 눈밭에 발자국을 꾹꾹 찍어내는 듯한 소설을 손에 든다. 엄마를 부르는 은산이의 목소리를 몇 번만 참아내면 그때부터는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나만의 세상이 된다. 그러곤 기다린다. 단단하게 얼어붙은 땅 밑에서 새싹이 올라오기를, 엄마 품에서 잠들다 이제 막 깨어난 아기 사슴이 눈을 살포시 뜨기를, 비 갠 하늘에 파스텔톤의 무지개가 다리를 만들기를. 그렇게 내 안의 샘물이 쪼르르 소리를 내며 강으로, 강으로 흘러가기를 말이다. “기다린다. 단단하게 얼어붙은 땅 밑에서 새싹이 올라오기를, 엄마 품에서 잠들다 이제 막 깨어난 아기 사슴이 눈을 살포시 뜨기를, 비 갠 하늘에 파스텔톤의 무지개가 다리를 만들기를. 그렇게 내 안의 샘물이 쪼르르 소리를 내며 강으로, 강으로 흘러가기를 말이다.” profile 고민정 아나운서는… KBS 30기 공채 아나운서로 입사했다. 열한 살 연상인 대학 선배 시인 조기영과 결혼해 6년 만에 아들 은산이를 만났다. 현재 둘째 나무(태명)의 탄생을 기다리는 중이다. 저서로는 「샹그릴라는 거기 없었다」, 「그 사람 더 사랑해서 미안해」가 있다. (@kbsminjung) <■기획 / 김지윤 기자 ■글 / 고민정 ■사진 / 원상희 ■의상 협찬 / 에뜨와(02-527-1430, www.agabangncompany.com) ■장소 협찬 / 베이비훈 스튜디오(02-573-3777)>
- 고민정의 감성 육아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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