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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프리뷰]1980-그날의 광주, 이런 사람들은 없었을까
[시네프리뷰]1980-그날의 광주, 이런 사람들은 없었을까(2024. 03. 27 06:00)
2024. 03. 27 06:00 문화/과학
영화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가 확정해 놓은 공식 서사를 살짝 비껴간다. 당시 전남도청 인근, 하필이면 항쟁이 시작되기 전날인 5월 17일 신장개업을 한 중국집 ‘화평반점’이 이야기의 중심 무대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제이앤씨미디어그룹 제목: 1980(1980: The Unforgettable Day) 제작연도: 2024 제작국: 한국 상영시간: 99분 장르: 드라마 감독: 강승용 출연: 강신일, 김규리, 백성현, 한수연 개봉: 2024년 3월 27일 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제작: ㈜히스토리디앤피, ㈜디에이치미디어, 굿픽쳐스 배급: ㈜제이앤씨미디어그룹 공동배급: 와이드릴리즈㈜ 제공 ㈜제이앤씨미디어그룹 허구다. 그날 밤 진압 영상은 바로 TV에서 방영되지 않았다. 영상이 공개된 것은 수십 년 후다. 5월 28일 새벽 전남도청을 사수하던 시민군은 짜장면을 먹다가 계엄군의 기습공격으로 최후를 맞이하지 않았다. 그날 새벽, 시민군으로 있다가 빠져나온 누군가가 카빈총으로 자살한 사례는 없다. 1980년 광주 5·18을 다룬 영화 리스트는 꽤 길다. 이 코너에서 다룬 영화만 해도 <26년>(조근현 감독·2012), <택시운전사>(장훈 감독·2017), <김군>(강상우 감독·2019), <아들의 이름으로>(이정국 감독·2021) 등이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1980년 5월 광주에 대해 해야 할 이야기가 남아 있을까. ‘80년 광주’를 되돌아보는 이유 많다. 그때를 경험한 장삼이사 보통 사람들 이야기는 아직 다 조명받진 않았다. 영화는 1985년 ‘전남사회운동협의회編(편)’의 이름을 달고 나온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가 확정해 놓은 공식 서사를 살짝 비껴간다. 당시 광주에 있던 전남도청 인근에, 하필이면 항쟁이 시작되기 전날인 5월 17일 신장개업을 한 중국음식점 ‘화평반점’이 이야기의 중심 무대다. 영화의 주인공은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철수다. 화평반점의 주인은 화교가 아니라 쓰는 말투로 보아 이북 태생인, 어쩌다 보니 광주에 내려와 정착한 철수의 할아버지다. 철수가 신경 쓰는 동급생 여자아이가 있다. 영희다. 철수네 집에 셋방을 얻어 살고 있다. 철수와 영희가 있으니 ‘바둑이’도 나와야 한다. 철수가 기르던 개다. 바둑이는 야학 운동을 하던 아버지를 쫓아온 군인들에게 밟혀 죽는다. 철수나 영희는 때 묻지 않은, 아무런 죄없이 그때 그곳에 있었다는 이유로 평생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을 상징한다. 철수 어머니(철수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작중 이름이 없다)는 임신 중이다. 실제 희생자 중 임신부가 있었다. 당시 23세였던 최미애씨다. 극 중에서 상원이라고 불리는 철수 아버지의 모티브가 실제로 전남도청 최후 항쟁을 주도한 윤상원씨라면, 철수 어머니는 최미애씨를 염두에 두고 등장시킨 건가, 그런 생각을 했는데 그건 아니었다. 5·18을 다룬 기존 영화와 이 영화의 가장 큰 차별점은 아마도 창작적 허구일 듯싶은데 영희네 가족 이야기다. 그동안 공식 서사였던 ‘10일간의 해방공동체 광주’ 이야기에서는 조명받지 못한 사람들 이야기다. 군인인 영희 아버지는 항쟁 참여자를 고문했다. 영희 아버지는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것으로 보아 동향 출신이고, 영희 엄마와 영희는 서울에 살다가 내려왔다. 항쟁 기간 군인들의 야만적인 진압을 경험한 동네 사람들은 영희네 미장원 앞에 몰려와 같은 군인이라고 항의하고 가게를 때려 부순다. ‘아무런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철수가 앞에 나와 촛불을 들고 발언을 하자 동네 주민들의 분노는 잦아든다. 동네 주민들은 야간에 뭉친 신문지를 받쳐 촛불을 들고 집회를 여는 것처럼 묘사돼 있는데, 사실 대한민국에서 촛불시위는 세기를 넘겨 2002년에 처음 시작됐다(박스 참조). ‘화평반점 1980’, 원래 이야기는 영희 어머니 역을 맡은 배우 한수연씨는 시사회 이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원래 시나리오에는 영희네 가족의 그 후 이야기도 담겨 있었다고 밝혔다. 광주를 떠나 서울로 올라간 영희 아빠는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다 양심선언을 하고 부부는 함께 목숨을 끊는다. 영화의 원제는 ‘화평반점 1980’이었다. 아마도 운명처럼 쇠락해가는 광주 구도심의 중식당 경영자로 장년을 맞은 철수와 부모 죽음의 단서를 찾고자 어린 시절 잠시 머물렀던 광주를 찾은 영희가 40여 년 만에 재회한다는 게 원래 시나리오의 도입부 일 듯싶다. 강승용 감독을 만나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다. 촛불시위는 언제 처음 시작됐나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앞서 ‘촛불시위는 2002년 처음 시작됐다’고 밝혔는데 공교롭게도 <1980>과 같은 날 개봉하는 영화 <댓글부대>에도 영화 시작 부분에서 이 촛불시위 이야기를 소재로 사용한다. <댓글부대> 영화의 주인공 임상진(손석구 분) 기자는 2016년 촛불시위 참여자 수 등을 거론하며 촛불시위 기원을 추적한다. 일종의 탐사 취재인 셈인데 그가 추적해 알아낸 최초의 촛불 시위자는 ‘앙마’라는 사람이다. 1992년 중학생이었던 앙마는 PC통신 사용자들을 모아 ‘대한민국 정부보다 위에 있다’라고 주장하는 만전이라는 회사를 규탄했다. 잘 모르는 사람은 혹할 수도 있는 ‘썰’이긴 하다. 촛불시위의 첫 제안자가 ‘앙마’라는 닉네임을 쓰고 있었던 것은 맞다. 2002년 당시 30세의 학원강사 김기보씨였다. 개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었다. 당시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활동하며 자신의 글을 인용해 촛불시위를 제안했다. 이는 ‘기만’이라는 비난도 보수매체를 통해 나왔지만, 그는 꿋꿋이 활동했다. 나중엔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반대하는 ‘반전평화연대’ 활동(2003~2004년)까지 이어졌다. 당시 기자는 김기보씨를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김씨가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에 이미 촛불을 든 적 있다고? 그런 이야기는 들은 적 없다. 의문이 꼬리를 물다 보니 영화 감상을 방해했다. 영화 <댓글부대>는 소설가 장강명씨가 쓴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임상진 기자와 주요 등장인물의 닉네임, 팀알렙이라는 팀명까지 원작에서 가져왔다. 큰 이야기 구조는 원작 소설의 대강과 맞는데 ‘만전’과 같은 대기업의 횡포라든가, 세부 내용은 완전히 새로 썼다. 장강명씨는 소설 <댓글부대>에 덧붙인 후기에서 책의 모티브는 인터넷 커뮤니티를 다룬 기자의 주간경향 기사에서 가져왔다고 밝혔다. 해당 기사는 이명박 정부 시절 작성한 것이다. 당연, 지금 시대에 맞춰 극화하려면 새로운 내용으로 채울 수밖에. 감독은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허구라고 했지만 대부분은 취재를 통해 밝혀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 기자의 기억과 다른 ‘앙마’ 이야기도? 영화사를 통해 감독은 “김씨는 만나지 않았고 이야기는 창작한 것”이라고 전해왔다.
시네프리뷰
남도학숙만 쏙 뺀 광주시의 규칙 개정(2023. 06. 09 11:23)
2023. 06. 09 11:23 사회
ㆍ공익소송 비용 포기 가능하다면서도 적용 안 해 논란 지난 2월 16일 서울 동작구 대방동에 있는 남도학숙 동작관 입구 / 정희완 기자 남도학숙의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 A씨는 아직 일상을 제대로 회복하지 못했다. 복직도 불가능해 병가 중이다. 우울증과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등 관련 질병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2014년 사건 발생 이후 2022년 8월 법원의 확정판결이 나왔지만, 소송비용 문제가 좀처럼 정리되지 않고 있다. 남도학숙은 광주 및 전라남도 출신 학생들이 이용하는 재경 기숙시설로 광주시와 전남도가 공동 운영한다. 광주시가 지난 4월 소송사무처리 규칙을 개정·시행하면서 소송비용을 둘러싼 논란이 마무리될 것이란 기대가 일었다. 개정 규칙에는 “공익소송 등 상대방에게 소송비용을 부담시키는 게 적정하지 않다고 인정되면 소송비용의 회수를 포기할 수 있다”는 조항이 새로 추가됐다. 이 규정은 그러나 정작 남도학숙 성희롱 사건에는 적용할 수 없다. 규칙이 개정되기 이전에 확정판결이 난 사건은 적용에서 배제한다는 취지의 단서를 부칙에 넣었기 때문이다. 이에 피해자와 시민사회단체 등은 반발하고 있다. 공익소송 등의 소송비용 회수 포기 조항을 내부규정에 마련한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이 같은 단서를 둔 곳은 광주시가 유일하다. 또 광주시는 지난해 다른 소송비용 예외 조항을 신설할 때는 이런 내용의 부칙을 넣지 않았다. 광주시와 전남도 등은 법원에서 소송비용 액수가 확정되면 별도의 협의체(소송위원회)를 꾸려 이번 피해 사건이 소송비용 회수의 예외에 해당하는지를 검토 후 최종 결정하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 협의체가 외려 내부규정 등 법적 근거가 없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남도학숙 성희롱 사건은 제외 A씨는 2014년 남도학숙에 입사한 이후 얼마 되지 않은 시점부터 상사로부터 여러 차례 성희롱을 당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성희롱 피해를 인정했고, 남도학숙도 가해자에게 감봉 1개월의 징계를 내렸다. 이후 A씨는 가해자와 남도학숙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2심 재판부는 가해자와 남도학숙의 책임 일부를 인정해 300만원을 A씨에게 배상하라고 선고했다. 대법원은 2022년 8월 판결을 확정했다. 얼마 뒤 남도학숙 측은 법원에 A씨로부터 소송비용 380만원을 받을 수 있도록 이 액수를 확정해 달라고 신청서를 제출했다. 이에 A씨와 시민사회단체 240여 곳은 이번 사건은 공익소송이기 때문에 소송비용 확정 신청을 철회할 것을 광주시·전남도·남도학숙 측에 지속해서 촉구했다. 남도학숙을 운영하는 광주시와 전남도는 그러나 소송비용 확정 신청은 법에 따른 것으로 내부규정에는 이를 철회할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대신 “소송비용이 확정된다고 무조건 비용을 받겠다는 게 아니라 향후 별도의 위원회를 구성해 감면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라고 밝혀왔다. 강기정 광주시장은 2022년 10월 국정감사에서 남도학숙 소송비용 문제와 관련한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의 질의에 “공익소송의 경우 억울함이 없도록, 그리고 조례를 충분히 활용해 가능한지 분명히 따져보겠다”고 밝혔다. 용 의원은 당시 “광주시가 소송사무처리 규칙을 개정하는 등의 방식으로 소송비용을 청구하지 않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광주시는 올해 4월 소송사무처리 규칙을 개정했다. 소송비용의 추심을 포기할 수 있는 요건에 ‘공익소송 등 상대방에게 소송비용을 부담시키는 것이 적정하지 않다고 인정돼 소송심의회의 심의·의결을 받아 시정의 승인을 얻은 경우’를 신설했다. 이에 따라 A씨는 지난 5월 18일 광주시와 전남도, 남도학숙 등에 진정을 제기했다. 규칙이 개정돼 법적 근거가 마련된 만큼 소송심의회의를 개최해 A씨의 소송비용 추심을 포기할 수 있도록 심의·의결해 달라는 것이다. 광주여성민우회와 강은미 정의당 의원도 비슷한 취지의 의견서 및 요청서를 광주시 등에 제출했다. A씨 측은 최근 서울시교육청이 학교폭력 사건 소송에서 패소한 유족으로부터 소송비용 1300만원을 회수하지 않기로 결정한 사례도 고려해 달라고 했다. 유족을 대리한 권경애 변호사가 항소심 재판에 잇따라 불출석해 패소하면서 논란이 된 바로 그 사건이다. 서울시교육청은 소송심의회의를 개최해 미회수를 의결했고, 법원에 제출한 소송비용 신청 자체를 취하했다. 하지만 광주시와 전남도는 지난 5월 말쯤 “개정된 소송사무처리 규칙에 근거한 소송비용 확정 신청 철회는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남도학숙 성희롱 사건은 개정 규칙의 적용 대상이 아니라고 했다. 규칙을 개정하면서 함께 포함한 부칙 조항 때문이다. 공익소송 등의 조항은 “이 규칙 시행 이후 판결이 확정되는 소송사건부터 적용한다”는 게 부칙 내용이다. “광주시 부칙은 꼼수” 이 부칙 때문에 소송비용을 둘러싼 논란이 다시 커지고 있다. 자치법규정보시스템을 통해 확인한 결과, 현재 광주시처럼 공익소송 등의 조항을 규칙·훈령·예규 등 내부규정에 담은 지자체는 41곳이다. 지자체들의 이런 조항 신설은 국민권익위원회의 권고에 따른 것이다. 권익위는 2021년 10월 ‘공공기관 소송비용 업무처리 개선’ 방안을 발표하면서 공익소송 등은 소송비용 회수의 예외로 하는 규정을 마련하라고 권고한 바 있다. 권익위는 예외 사유 조항의 예시로 ‘공익소송 등 상대방에게 소송비용을 부담시키는 것이 적정하지 않다고 인정해 기관장(결재권자)의 승인을 얻은 경우’ 등을 제시했다. 이에 따라 서울시 등 지자체를 비롯한 여러 공공기관이 이런 예시와 같은 조항을 신설하는 등 내부규정을 정비 중이다. 지난해 9월 8일 남도학숙이 홈페이지에 게재한 직장 내 성희롱 사건 관련 사과문 / 남도학숙 홈페이지 갈무리 그런데 41개의 지자체 중 광주시를 제외한 39곳은 광주시처럼 이미 확정판결을 받은 사건은 적용에서 제외하기 위해 관련 내용을 명시적으로 부칙에 넣은 곳은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나머지 1곳도 ‘지침은 시행일 이후에 판결이 확정된 소송사건부터 적용한다’는 부칙을 뒀지만, 해당 지자체 관계자는 “소송비용 확정 절차가 법원에서 진행 중인 사건은 판결이 확정되지 않은 것으로 봐서 적용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또 광주시가 2022년 4월 ‘경제적 자력이 없는 경우’ 등 소송비용 추심 포기 요건을 규칙에 처음 마련했을 때는 현재와 같은 부칙이 없었다. 이 때문에 이번 부칙 조항이 석연찮다는 비판이 나온다.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은 “지난해 국정감사 이후 9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광주시가 소송비용 회수 철회를 어떻게든 이행하지 않으려는 꼼수를 지속한 결과”라며 “앞에서는 사과하고 뒤에서는 끝까지 소송비용을 받아내려는 광주시의 태도는 명백한 2차 가해”라고 밝혔다. 용 의원은 광주시에 이 문제와 관련한 질의서도 보냈다. 광주시는 지난 6월 5일 답변에서 “부칙에서 소송비용 추심 포기에 관한 적용례를 규정한 이유는 법의 일반 원칙상 소급효를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통상적으로 규정한 것일 뿐”이라며 “남도학숙 성희롱 피해 사건의 적용을 배제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광주시와 상반되는 부칙을 포함한 지자체도 있다. 청주시는 2022년 4월 제정·시행한 ‘소송비용회수업무 처리 규칙’에 “이 규칙 시행일 당시 소송비용 회수 절차가 진행 중인 사건에도 적용한다”는 부칙을 실었다. 남도학숙 성희롱 사건처럼 개정 규칙 시행 이전에 판결이 확정됐더라도 소송비용을 면제할 수 있도록 규정을 명확히 한 것이다. 시·도 교육청의 규칙에도 같은 사례가 존재한다. 제주도의 ‘교육·학예에 관한 소송사무처리 규칙’은 부칙에 “개정 규정은 이 규칙 시행 전의 진행 중인 소송비용 회수에 대한 경우에도 적용한다”고 규정했다. 광주시는 또 법원에서 소송비용 액수가 확정되면 “소송비용 회수 예외 사유의 적용 여부를 검토할, 광주·전남도·남도학숙·여성민우회 등이 참여하는 협의체(소송위원회) 회의를 개최해 남도장학회 공동이사장이 최종결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공동이사장은 강기정 광주시장과 김영록 전남도지사다. 광주시가 언급한 협의체를 두고도 법적 근거가 불명확해 논란이 일고 있다. 이미 광주시의 소송사무처리 규칙이 존재하고 이 규칙에 따라 남도학숙 성희롱 사건은 소송비용 미회수에서 제외됐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법령에 근거해 별도 협의체를 구성할 수 있는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광주시와 전남도는 앞서 언급한 권익위의 권고를 근거로 든다. 권익위 권고 중에 “별도 위원회를 구성해 의결”하라는 내용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는 소송비용의 미회수 여부를 심의할 위원회를 구성·운영할 경우 이 근거를 “기관별 내부규정(소송관련지침·사규 등)에 반영”하라는 게 정확한 취지라는 지적이 있다. 광주시의 주장처럼 규정에 없는 위원회를 운영하라는 취지는 아니라는 것이다. 광주시와 전남도는 그간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소송비용 신청을 철회하면 감사에서 지적을 받고 징계처분까지 받을 수 있다”는 입장도 밝혀왔다. A씨의 대리인인 최정규 변호사(법무법인 원곡)는 “외려 별도의 협의체 구성이 명확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감사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반론이 가능하다”라며 “권익위의 권고 취지에 맞게 규칙을 재정비해 A씨에 대한 소송비용 회수를 철회할 명백한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피해자는 다시 항고 법원은 지난 5월 31일 A씨가 부담할 소송비용 액수를 확정했다. 남도학숙 등은 총 380만원을 신청했지만, 법원은 138만원만 인정했다. A씨 측은 피해를 입증하기 위한 녹취록 작성 등 각종 비용이 반영되지 않았다며 지난 6월 5일 항고했다. A씨는 “광주시가 말하는 협의체에서 제 사건이 소송비용 회수의 예외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결정 나면 저는 피해를 구제받을 방법이 전혀 없다”라며 “광주시 등 남도학숙이 앞서 소송비용 추심 철회를 위한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 신뢰감과 확신을 줬다면 항고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A씨는 남도학숙이 대법원 확정판결 직후인 2022년 9월 홈페이지에 사과문을 게재하면서도 법원에 소송비용 확정을 신청한 사례를 언급했다. 남도학숙은 당시 “그간 피해를 입은 여직원의 고통과 아픔에 공감하며 피해자에 대한 진심 어린 위로와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또 “전 직원 인권교육 및 성희롱 예방교육 등 직장 내 성희롱 사건의 재발 방지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고도 했다. 하지만 남도학숙은 A씨의 성희롱 피해 사건 발생 이후인 2019~2021년에 성희롱 피해 예방 등 직장 내 법정교육을 이수하지 않은 인원이 119명(중복 포함)인 것으로 전남도의 감사 결과 드러났다.
아직 광주는 윤석열을 믿지 않는다(2021. 11. 12 12:03)
2021. 11. 12 12:03 정치
ㆍ호남 지지세 감소, 전두환 옹호 논란 이후 광주 찾아 ‘진정성’ 의구심 커 대통령선거 후보는 ‘광주’의 강을 건너야 한다. 진보진영 후보라면 광주의 지지를 얻어야 하고, 보수 후보라면 결사적인 비토를 피해야 한다. 광주는 특정 도시를 뜻하지 않는다.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사회적 약자를 포용하는 상식적이고 인간적인 가치의 상징체이다. 정치 공학으로 보면 수도권 표심과 중도로 확장해가는 첫 관문이기도 하다. 유력 대선후보는 그래서 ‘광주’를 피할 수도, 피하기도 어렵다. 적당히 우회할 수도 없다. 반드시 통과해야만 한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지난 11월 10일 광주 국립5·18민주묘지에 도착해 방명록을 작성하고 있다. / 김기남 기자 광주가 보는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는 정치적 지점에 따라 달라진다. 대체로 국정농단 사건을 수사할 때는 호감 그 자체였지만 검찰총장·정치인 윤석열에 대한 평가는 인색하고 엇갈린다. 지난 4월 윤 전 총장의 호남 지지세는 이재명 경기도지사,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압도했다. 리얼미터가 YTN의 의뢰로 16일 발표한 대선주자 선호도 조사를 보면, 호남에서 윤 전 총장은 26.7%, 이 전 지사 24.5%, 이 전 대표 11.5%를 보였다(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 그가 국민의힘과 거리를 두면서 외곽에 머물던 때였다. 일부 호남 유권자의 비(非)민주당 정서를 가져갔다. 광주 방문 후 국민의힘 입당 윤 후보의 호남 지지세는 여름 들어 다른 양상을 보인다. 정책 능력에 대한 의문에 갖가지 실언, 가족 리스크까지 표출되면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했다. 오마이뉴스 의뢰로 리얼미터가 7월 15일 발표한 차기 대선주자 선호도 조사에서 윤 전 총장의 호남지지율은 11.8%에 불과했다. 20여일 전인 6월 21일 여론조사에서 22.5%를 보였는데 반 토막 난 셈이다. 지난여름 윤 후보의 호남지지율은 10%대 초반으로, 봄철보다 크게 줄어들었다. 기대에서 서서히 실망으로 이동했다. 호남 지지세가 급반전하자 윤 전 총장은 7월 17일 전격 광주를 방문했다. 특히 지난 3월 검찰총장 퇴임 이후 지속돼온 고공 지지세가 하향 추세로 돌아서는 위기 국면이었다. 그는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저 스스로도 아직 한을 극복하자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며 울먹였다. 박관현 열사, 홍남순 변호사, 김태홍 전 의원 비석을 어루만지며 “5·18정신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하는 숭고한 정신”이라고 평했다. 대학생들의 반대 시위에도 불구하고, 광주시민은 윤 전 총장에 대해 크게 불편해하지 않았다. 윤 전 총장은 광주 방문 직후 느닷없이 국민의힘에 입당(7월 30일)했다. ‘광주’와 개혁, 중도라는 옷이 스스로 어색했을까. 광주 자영업자 최금한씨(58)는 “광주에서 5·18 비석을 보듬고 울먹이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전두환이 전신인 국민의힘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윤 전 총장에 대한 호남 지지는 입당 후에도 한동안 지속됐다. 더불어민주당 경선 후유증이 반영된데다, 국민의힘에서 팽 당할 것이란 세평도 더해졌다. 한국갤럽이 10월 22일 발표한 호남지역 정당지지도를 보면 더불어민주당 53%, 국민의힘 17%였다(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3.1%포인트). 국민의힘 정당 지지율이 이전보다 더 상승했다. 이 조사는 국민의힘에게 본선에서도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과 함께 역선택이 아니냐는 논란을 일으켰다. 보수정당에게 호남 지지도 10%는 마의 벽이었다. 이 벽을 뚫은 유일한 후보가 지난 18대 대선 박근혜 후보였다. 그는 광주 7.76%, 전남 10%, 전북 13.22% 등 호남에서 두 자릿수 지지율을 기록해 당선됐다(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통계시스템 자료). 호남의 지지세는 홍준표 후보를 염두에 둔 것이란 해석도 나왔다. 홍 후보는 처가가 전북인데다 광주지검에서 모래시계 검사로 활약해 우호적인 연고를 갖고 있었다. 홍 후보에 대한 이런 분위기는 경선 맞상대인 윤 전 총장에게 위기감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지난 11월 10일 광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의 방문을 항의하는 시민들이 충혼탑 앞에서 손팻말을 들고 있다. / 김기남 기자 전두환 발언이 불러온 분노 당원, 보수 표심을 향한 확실한 구애 메시지가 필요했던 걸까. 그는 10월 19일 부산 해운대구갑 당원협의회를 방문한 자리에서 “전두환 대통령이 군사쿠데타와 5·18만 빼면 정치는 잘했다”면서 “호남 분들도 그런 얘기 하시는 분들이 꽤 있어요”라고 말했다. 전두환 옹호 발언은 전국을 발칵 뒤집었다. 보수정당이지만, 대통령 후보에게 기대했던 국민적 커트라인이 무너져 내린 발언이었다. 상식적인 역사의식과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확인할 수 없는, 왜곡과 망언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더욱이 피해자인 호남인을 통해 가해자인 전두환을 칭송한 어법은 광주를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최영태 전 전남대 교수는 SNS에 올린 글에서 “히틀러가 바캉스 제도를 도입하고, 아우토반을 만들고, 산림녹화에 올림픽도 열었지만 그 누구도 히틀러가 정치를 잘했다고 말하지 않는다”고 직격했다. 전두환씨는 광주시민을 학살하고, 민주주의와 헌법 가치를 도륙한 5·18 가해자이자 국가내란의 수괴라는 역사적 평가가 끝난 인물이다. 그에게 어떠한 공이 있더라도 국민을 학살한 죄를 덮을 수는 없다. 광주는 지금도 ‘전두환 단죄’를 위한 재판을 진행 중이다. 문행주 전남도의원은 “전두환에 대한 옹호는 정권찬탈을 위해서는 선량한 국민을 학살해도 된다는 것이며, 죽음으로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했던 5·18의 소중한 가치를 묵살한 것”이라고 분노했다. 그날 이후 광주의 시선은 싸늘하다. 윤 전 총장을 지지했던 의사 등 전문가그룹과 일부 사회단체의 공개적인 지지는 사실상 사라졌다. 윤 후보 측에서 국민통합과 정권교체를 명분으로 옛 정치권 인사 영입에 나섰지만, 광주의 마음을 달래고 돌리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박주선 전 국회부의장과 김동철 전 바른미래당 의원 등이 ‘미래 호남의 이익’을 거론하지만, 반향이 부실하다. 윤 후보가 두 번째로 광주를 찾은 지난 11월 9일, 반발과 분노는 전혀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의 사과와 참배 자체를 영장이나 압수수색 같은 ‘참배 집행’으로 받아들였다. 수도권 호남 표심을 노린, 면피용 선거 술책이라는 격한 반응이 봇물을 이뤘다. 윤 후보가 보는 ‘광주’는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다급하게 광주를 찾을 때는 정치적 위기이거나, 지지도가 빠지거나 설화(舌禍)로 자질을 의심받는 상황이었다. 그래서일까. 그가 광주에 오면 호남, 수도권 표심, 중도 외연 확장과 같은 온통 정치 공학적 단어들만 따라붙는다. 광주가 보는 윤석열은 미덥지 않다. 그는 진실로 전두환을 밟고 ‘광주’의 강을 건널 수 있을까.
표지 이야기
[표지 이야기]2021년 미얀마는 1980년 광주(2021. 04. 05 15:37)
2021. 04. 05 15:37 국제
ㆍ가슴 아픈 ‘민주화의 기억’ 간직한 한국사회 지지와 연대 확산 한밍툰(24), 민칸소(19), 아응맛링(27)…. 광주 시민들이 군부 쿠데타에 저항하다 사망한 미얀마인들의 영정을 품에 안았다. 팔목에는 붉은 끈을 둘렀다. 군부 규탄 시위에 나갔다가 숨진 치알신(19)에게 아버지가 주었다는 그 ‘붉은 끈’이다. 종이 울리고 위령제가 시작됐다.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는 갈수록 거세졌다. 옛 전남도청 앞 광장에 모인 70여명의 시민은 흠뻑 젖고 말았다. 급히 우비를 입었지만 신발에는 계속 빗물이 차올랐다. 미얀마인들이 ‘저항의 날’, ‘반 군부독재의 날’이라 부른 3월 27일, ‘오월의 아픔’을 지닌 광주시민은 그렇게 3400㎞ 거리에 있는 미얀마 시민과 함께했다. 광주 시민들이 옛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열린 ‘3·27 미얀마의 봄 혁명 희생자 추모제’에 참석해 헌화하고 있다. / 송윤경 기자 ‘5월 광주’ 아픔을 알기에 군부의 유혈진압에 목숨을 잃는 미얀마인들을 지켜보면서 한국사회의 많은 시민이 41년 전 ‘5월 광주’를 떠올렸다. 광주시민은 더욱 그랬다. 5·18기념재단을 비롯해 광주의 시민단체들은 지역 내 미얀마인들과 ‘미얀마 광주연대’를 결성했다. 이날 오전의 추모제 ‘주최자’ 역시 미얀마 광주연대다. 2009년 광주인권상의 수상자인 민 꼬 나잉(Min Ko Naing)은 이날 추모제에 앞서 광주에 서신을 보냈다. 그는 1988년 군부 쿠데타에 저항한 ‘8888항쟁’을 이끈 인물이다. “미얀마 국민은 민주화를 위해 기꺼이 목숨 바칠 준비가 돼 있다. (중략) 힘들 때 손 내밀어 주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인 것처럼 한국 국민의 지지가 커다란 힘이 되고 있다.” 미얀마 광주연대의 묘네자 대표가 편지를 읽어내려가는 동안 광장엔 ‘Kabar Makyay Bu(우리는 세상이 끝날 때까지 만족하지 않을 것)’ 노래가 울려퍼졌다. 이 노래는 ‘8888항쟁’ 당시 미얀마 작곡가가 팝송 ‘바람 속의 티끌’을 개사한 것이다. 5·18 광주민주항쟁에 ‘임을 위한 행진곡’이 있다면 미얀마 시민의 저항엔 늘 이 노래가 함께해 왔다. 빗속 추모제가 끝나자, 옛 전남도청 앞 광장 한켠에선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광주 신광중·각화중 학생들이 미얀마를 돕기 위한 바자회를 하고 있었다. 미얀마 민주화를 위한 모금활동을 위해 광주 신광중학교 학생들이 바자회를 열고 있다. / 송윤경 기자 “100원만 내도 돼. 마음이 중요하니까.” 한 소년이 바자회장 앞을 서성이자, 신광중의 한 학생이 웃으며 말했다. 이들은 미얀마 시민 지지 피켓을 걸어두고, 간식과 직접 만든 수제 비누를 팔았다. 각화중 학생들은 학교에서 모은 가방, 텀블러, 책 등의 기부품을 내놓았다. 비 탓에 오가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모금함엔 금세 현금이 찼다. 정은선양(15)은 “비누를 만드는 데 5시간이 꼬박 걸렸다”면서 “부모님으로부터 5·18에 대해 많이 들었다. 오늘 행사를 한다고 하니 부모님도 의미가 있다고 하셨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직접 피켓을 들고 시장을 돌기도 했다. 이날 바자회엔 ‘오월어머니집’의 회원들이 함께했다. 5·18 광주민주항쟁에서 남편과 형제, 자매를 잃은 이들이다. “어린것이 우리나라 살려주세요, 라고 할 때 얼마나 마음이 아프던지….” 5·18로 오빠를 잃은 김형미씨(57)는 지난달 광주의 미얀마인들과 만났을 때 “남의 일 같지 않았다”고 했다. “5·18 같은 일이 또 일어나면 난 그냥 죽어버리겠다고 했지. 너무 힘들었으니까….” 남편이 보안사령부에 끌려가 매일 가택수색을 당하던 시절을 얘기하던 오월어머니집의 이명자 관장(70)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고 말해왔는데 미얀마 사태가 터지니까, 그곳에 가서 돕고 싶다는 생각부터 들었다”고 했다. 이들은 5년 전 미얀마로 건너가 ‘88어머니회’ 여성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나보다 어려 보여 안쓰러웠던” 기억이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오후 3시, 빗줄기는 더 굵어졌지만 옛 전남도청 앞에선 또 다른 집회가 열렸다. “팔뚝에 혈액형과 연락처를 적고 시위에 나간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저희도 과거에 버스 안에서 속옷에 사인펜으로 이름, 주소를 썼던 기억이 있습니다. 실과 바늘로 꿰매 표시해 놓기도 했고요. 우리가 죽으면 그것으로 확인이 될 테니까요.” 옛 전남도청 앞 광장에 미얀마 민주화를 지지하는 미술인들이 만든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지지와 연대의 물결 41년 전 차명숙씨(60)는 5월 19일부터 사흘간 차를 타고 돌며 거리방송을 했다. 군인들의 만행을 알리고, 도청에 모여달라고 호소했다. 당시 그는 열아홉 살이었다. “그때 저를 저격하려 했던 군인 얘기를 지인이 전해주었어요. 총을 쏘려다가 제가 너무 어려 그러지 못했다고 하더래요.” 40여년간 지독한 트라우마에 시달렸던 그는 지금 미얀마인들의 항쟁이 ‘역사’로 기록되지 못할까봐 애가 탄다. 최근까지도 ‘간첩이었느냐’는 질문 따위에 시달렸던 그는 “시민들이 겪은 이야기 하나하나를 무조건 다 기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없었던 일로 치부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한국사회 시민들에게 새겨진 ‘민주화의 기억’은 미얀마인의 아픔을 받아들이는 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 1960년의 4·19, 1979년 10월의 부마항쟁, 1980년의 5·18, 1987년의 6월항쟁을 기억하는 시민들은 서울·대전·전북·경북 각지에서 미얀마 민주화를 지지하는 모임을 만들고 있다. 옛 전남도청에서 집회가 계속됐던 27일 저녁 서울에선 ‘미얀마 민주화를 지지하는 한국 시민사회단체 모임’이 분향소를 설치했다. 주한 미얀마대사관 인근에서도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군부 쿠데타 직후인 2월 5일 청년단체 ‘세계시민선언’이 침묵행진을 하는가 하면 최근엔 민교협(민주평등사회를 위한 전국 교수연구자 협의회)이 대사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미얀마의 민주화를 지지합니다’라는 컵홀더를 제작해 나눠준 카페(부산 홍지컴퍼니)도 있고, 미얀마 군부를 규탄하기 위해 그림을 그려 연대한 미술인들(생명평화 미술행동)도 있다. 인증샷 참여와 모금 열기도 뜨겁다. 사회적협동조합 ‘빠띠’의 미얀마 민주화 캠페인엔 1000여명의 시민이 참여해 인증샷을 남겼다. 해외주민운동연대엔 약 한달간 1500명의 시민으로부터 1억2000만원의 기부금이 모였다. 미얀마 광주연대 역시 2주간 1000명의 시민이 모금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의구현사제단도 최근 모금을 시작했다. 기부금은 부상자 치료, 시위물품 구입 등에 쓰인다.
표지 이야기
[편집실에서]양곤이 광주고 부마고 대구다
[편집실에서]양곤이 광주고 부마고 대구다(2021. 04. 05 15:36)
2021. 04. 05 15:36 오피니언
중학교 1학년 때, 학교 오가는 길이면 종종 매캐한 최루가스를 마셔야 했습니다. 도심에서 구름처럼 밀려온 가스는 때로 학교 창문을 넘어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눈물과 콧물이 쏟아졌지만, 선생님은 “창문 닫으면 괜찮다”며 무심한 척했습니다. 부모님은 절대 큰 도로에는 나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춘기 시절 멀리서 ‘펑펑’ 터지던 최루탄 소리는 궁금하기도, 두렵기도 했습니다. 대학생 형들이 잡혀가고 두들겨 맞고 심지어 죽고 있다는 것을 우리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TV에는 대통령이 굳은 표정으로 특별담화를 발표했습니다. 6·29선언이었습니다. 이제 우리 손으로 대통령을 뽑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시민이 승리했다고 했습니다. 최루가스가 거짓말처럼 사라졌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6월항쟁’입니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한번에 얻은 것이 아닙니다. 엄청난 희생이 뒤따랐습니다. 대구 2·28 민주운동을 시작으로 부마항쟁,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거쳐 30여년간 피 흘려 쟁취한 역사입니다. 민주화의 결과로 수립된 문민정부가 하나회를 청산하면서 이 땅은 길었던 군사정권의 악령에서 벗어났습니다. 주간경향 이번 호 표지를 보셨습니까? 아마도 미얀마로 수출된 우리 중고 시내버스인 모양입니다. ‘천연가스버스가 만들어갑니다’라는 한글이 선명합니다. 이 버스에 탄 미얀마인들이 세 손가락을 내밀며 군부 쿠데타에 저항하고 있습니다. 버스 속 인물들이 미얀마인이 아닌 한국인이었다면 6월항쟁 때의 사진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것입니다. 5·18 속 광주라고 해도, 부마항쟁 속 부산·마산이라고 해도, 2·28 민주운동 속 대구라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 호를 준비하면서 미얀마 기자들로부터 많은 사진을 받았습니다. 너무 잔인해 언론윤리상 차마 공개할 수 없는 사진도 많았습니다. 한 기자는 그 사진을 찍느라 손에 총을 맞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카메라를 떨어뜨리지 않아 다행”이라는 문자를 남겼습니다. 우리가 민주화를 쟁취하지 못했다면 그는 ‘나’였을 수도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엉망진창인 것 같아도 지난 40년간 이만큼 꾸준히 성장한 나라는 찾기 힘듭니다. 민주화와 군부 청산은 어지간한 정치·경제적 위기에도 국가경제가 흔들리지 않는 탄탄한 토대가 되고 있습니다. 시민은 촛불을 들어 의사를 표시하고 선거를 통해 정권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군은 어떠한 혼란에도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며 외부로부터 국토를 지키고 있습니다. 4월 7일은 재보궐 선거일입니다. 정치가 하도 난장이라 투표를 포기하겠다고 하는 유권자도 많습니다. 하지만 미얀마인들은 그 한표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누구를 찍어도 좋습니다. 소중한 한표를 행사하시기 바랍니다. #WhathappeninMyanmar
편집실에서
[포커스]40주년 ‘5월 광주’를 기억하는 방법(2020. 05. 15 16:55)
2020. 05. 15 16:55 사회
ㆍ교육·문화예술 현장에서 역사를 잊지 않으려는 노력 다양하게 열려 전직 대통령 전두환씨가 광주지방법원에 출석한 지난 4월 27일은 광주광역시교육청이 새로운 5·18 민주화운동 교과서를 발행한 날이기도 하다. 2017년 4월 자서전을 겸한 회고록을 펴낸 전씨는 책에서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밝힌 고 조비오 신부의 증언이 거짓이라며 비난해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이날 1년여 만에 광주지법에 출석한 전씨는 자신의 책임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같은 날 나온 새 5·18 교과서는 23개의 질문에 대한 충실한 대답을 내놓는다. 40년이 흐른 뒤 5·18을 교과서를 통해 배우는 세대의 눈높이에 맞춰 역사의 한 장면을 기억하는 방법을 제시한 셈이다.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광주 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린 기념 연극 공연 의 한 장면 / 극공작소 마방진 제공 5·18 교과서 시대 변화에 맞춰 새롭게 광주시교육청이 이번에 5·18기념재단과 함께 펴낸 교과용 인정도서는 11년 전인 2009년 처음 나온 교과용 도서를 계승한 책이다. 이전 첫 번째 교과서가 관련 지침이 달라짐에 따라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면서 시대 변화에 맞춰 새롭게 내용을 구성한 것이다. 관내 각급 학교에 배포한 인정도서 초간본을 바탕으로 학생교육에 활용하면서 승인 절차를 밟으면 올 하반기에는 공식 교과서의 지위를 얻게 된다. 장휘국 광주시교육감이 “5·18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는 데 교과서가 긍정적으로 기여할 것으로 믿고 전국 보급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힌 대로 현대사 교육현장에서 쓰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0대 청소년들도 시위에 참여했나요?”, “‘광주사태’는 어떻게 ‘민주화운동’이 되었나요?”, “5·18단체들은 왜 세월호유가족을 격려했을까요?”처럼 중·고생의 시각을 염두에 두고 구성한 질문들에 따라 각각의 주제를 담았다.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배경과 전개과정 같은 역사적 사실을 비롯해 ‘주먹밥’으로 상징되는 당시 시민들의 공동체 의식이나 영화 <택시운전사>와 관련된 흥미로운 내용도 포함됐다. 5·18 40주년을 맞아 교육현장 및 문화예술현장에서 역사를 새롭게 기억하려는 노력은 점차 다채로워지고 있다. 전남도교육청도 5·18 교육 활성화를 위해 초등학생용 학습 보조자료를 새롭게 보급하고 나섰다. 3·4학년용과 5·6학년용 두 단계로 구분해 발간되는 이번 학습자료는 사적지 탐방 프로그램이나 도서 읽기 대회 등의 프로그램과 결합해 창의적 체험활동 시간에 활용될 계획이다. 전남도교육청 관계자는 “올해는 코로나19로 온라인수업이 진행되고 단계적 등교 개학이 이뤄지고 있어 자율운영을 통해 교육적 효과를 얻을 수 있도록 권장하고 있다”고 밝혔다. 광주광역시교육청이 중·고교생 학습용으로 펴낸 5·18 민주화운동 인정도서 초간본 / 광주시교육청 제공 각종 기록자료 서울에서 처음 선보여 코로나19 확산을 예방하기 위해 상당수의 기념전시·공연이 온라인으로 대체되기도 했지만 ‘생활 속 거리 두기’ 방침에 따라 오프라인에서 진행되는 행사들도 점차 관심을 모으고 있다. 특히 국가기관 차원에서는 최초로 주최돼 전국 곳곳에서 함께 진행되는 ‘오월 그 날이 다시 오면’ 특별전은 어린이·학생·주부 등 당시 광주시민이 쓴 일기 16점을 포함해 현장을 기록한 자료들을 선보인다는 점이 눈에 띈다. 서울 종로구에 있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이 전시는 국가기관인 국가기록원과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광주의 지역 기념·연구기관과 공동 주최했다. 5월 12일 열린 개막식에서 주진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장은 “광주를 한 번도 떠난 적 없는 자료들이 이번 전시를 통해 광주의 역사가 올바르게 자리매김할 수 있게 만들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서울 특별전시를 시작으로 5월 19일에는 제주 4·3평화기념관에서, 27일에는 광주 5·18기록관에서 연이어 전시가 개막하는 점도 40주년을 맞아 이전까지와는 달라진 모습이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시민들의 일기와 취재수첩, 성명서와 각종 실물자료 등을 서울에서 선보이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여기에 국가기록원이 소장한 정부기록물과 당시 국방부·광주 동구청이 생산한 상황일지·통행증, 국군기무사령부가 보관 중인 사진집 같은 공적 기록물이 40년 전 현장의 분위기를 짐작하게 한다. 단단한 물푸레나무로 만들어진 당시 계엄군의 진압봉을 비롯해 군복과 군화도 함께 전시되고, 이들이 전남대병원 쪽으로 총알을 난사한 흔적이 남은 캐비닛도 출품됐다. 1980년 광주의 상황을 보고 일본 판화가 도미야마 다에코가 제작한 <광주의 피에타> 작품 또한 이 전시에서 볼 수 있다. 서울시 산하 서울기록원에서 5·18 민주화운동에 관한 대표적 기록물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에 초점을 맞춰 개최하는 특별전 <넘어 넘어: 진실을 말하는 용기>도 광주지역 밖에서 만나는 대표적인 전시다. ‘넘어 넘어’로 줄여 당시 대학가를 중심으로 널리 알려진 이 책의 판본 10개 모두가 공개되고, 한때 이름이 숨겨졌던 저자 이재의의 취재노트 원본 등 관련 자료들도 함께 선보인다. 전시에는 ‘전남사회운동협의회 편, 황석영 기록’으로 저자가 표기된 출판사 풀빛의 1985년 최초 판본부터 조금씩 다른 초판본 3종과 1985년 독일지역 제본판, 1985년 일본어판, 1987년에 비매품으로 유통된 사진자료집 <넘어 넘어 2>, 1999년·2017년 영어판, 2019년 나온 개정판 양장본까지 10개 판본이 모두 나온다. 광주의 지역 문화예술계는 물론 전국의 문화예술인들이 함께 참여하는 공연과 행사도 눈길을 끈다. 광주에 있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과 아시아문화원이 전당 재개관 후 선보이는 첫 공연이자 5·18 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 공연인 <나는 광주에 없었다>는 열흘간의 5·18 민주화운동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재현했다. 이 작품은 관객이 공연에 직접 참여해 스스로 역사를 느끼고 경험할 수 있게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문 몰입형 연극이다. 작품을 연출한 고선웅 감독은 “연극이 때로 사실보다 더 진실하다. 허구를 통해 손바닥으로 가려진 진실의 빛을 보여 줄 수 있다고 믿는다”고 기획의도를 밝혔다. 이곳에서 함께 열리는 특별 영상전 ‘5·18 영화주간’에서는 평소 만나기 어려웠던 5·18 민주화운동 관련 영상자료를 공개하고 퍼포먼스 전시 등의 행사도 진행한다.
특집
광주 대광여고 스쿨미투, 무엇을 남겼나(2020. 02. 21 16:01)
2020. 02. 21 16:01 사회
ㆍ직위해제 후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교사들 “어떻게 학생들을 대해야 할지…” 2018년 4월 창문에 포스트잇으로 ‘#With You’. ‘#Me Too’, ‘#We Can Do Anything’을 붙여 스쿨미투 촉발의 계기를 만든 서울 용화여고 사건이 벌어진 지 2년이 지났다. 그 사이 인천 인성여고·부원여중, 대전 서대전여고, 광주 정광고·명진고·경신여고·대광여고, 강원 애니고, 부산 성모여고·사직여고 등 수 많은 학교에서 스쿨미투가 터져나왔다. 학생들은 그동안 신고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던 교사들의 성비위 문제를 공론화했다. 학생이 신고를 할 수 없었던 사유는 다양하다. 학교생활기록부에 불이익이 갈까봐, 다른 교사들로부터 미움을 받을까봐, 함께 동참해주는 친구를 찾기 어려울까봐, 신고를 해도 가해교사가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을까봐 학생들은 피해 사실을 알리지 못했다. 그러나 용화여고 스쿨미투 이후 학생들은 적어도 피해사실을 감추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스쿨미투 2년이 남긴 작은 성과다. 대전 스쿨미투공동대책위원회 등 교육·시민단체 관계자들이 2월 6일 대전시교육청 앞에서 교사에 의한 학생 성추행과 위장전입 의혹이 제기된 모 여중·여고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은 기사내용과 관련 없음. / 연합뉴스 설문조사로 남교사 절반 이상이 지목 그러나 의도치 않은 생채기도 남았다. 성폭력과 불쾌함 사이에 어중간하게 끼어 있던 교사들에 대한 문제다. 언어 성폭력으로 보기에는 애매한, 그렇다고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하기도 어려운 발언을 한 교사들에 대한 이야기다. 2018년 7월 26~27일 광주 대광여고는 학생들을 상대로 스쿨미투 전수조사를 벌였다. 2017학년도 2학년 12개 반 중 여교사가 포함된 교실 등 3개 교실을 제외한 9개 반 담임교사(남자)가 성비위 교사로 지목됐다. 학교는 3차례에 걸쳐 전체 40명의 남교사 중 절반이 넘는 22명(55%)을 성비위 교사로 분류했다. 그리고 이중 3명을 제외한 19명의 교사에게 직위해제 통보를 내렸다. #학년부장이자 영어교사였던 ㄱ씨(49)는 2016년 8월 여름방학 방과 후 수업시간에 졸고 있던 피해자(당시 15세)의 여름 교복 가슴 부위 단추가 풀려 있는 것을 보고 “이렇게 하고 다니면 남자친구가 좋아하니”라고 말한 혐의와 2017년 7월 영어수업 중 피해자(당시 17세)가 교복 안에 민소매 셔츠를 입어 비친다는 이유로 “요즘 유행이 시스루인가보다. OO야, 안이 다 보인다. 다음부터는 안 보이는 옷을 입어라”라고 말한 혐의로 법정에 섰다. 법원은 첫 번째 혐의는 출석부를 확인한 결과, 피해자가 당시 여름방학 방과 후 수업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범죄성립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두 번째 혐의 역시 “설령 그런 말을 했더라도 피해자의 교복 상태에 대해 지적하는 상황에서 나온 발언으로 악의적이거나 가학적 성격의 발언이 아닌 점, 피해자에게 불쾌감이나 모욕감을 주는 수준을 넘어 정서적 학대행위로 단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180명의 학생이 ㄱ교사를 위해 탄원서를 작성해 제출했다. ㄱ씨는 2018년 8월 10일자로 직위해제 통보를 받은 지 1년 1개월 만인 2019년 9월 무죄판결을 받았다. 대광여고 학교법인 흥복학원은 지난 2월 11일 ㄱ씨를 같은 학교 재단 서진여고로 인사 복귀발령을 냈다. #같은 학교 국어교사인 ㄴ씨(58)는 2016년 3월 숙제검사 도중 피해자(당시 16세)가 질문에 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자 “어디 모자란 것 같다, 어디 아픈 애 같다”고 말한 혐의로 직위해제됐다. 검찰은 그러나 ㄴ씨에 대해 혐의없음 불기소처분을 내렸다. 2016년 3월 2일은 개학일로 숙제검사가 있을 수 없었다. 학교는 그러나 ㄴ씨 역시 설문조사에 이름과 해당 내용이 나왔다는 이유로 직위해제하고 사건을 경찰에 넘겼다. #수학교사 ㄷ씨(60) 역시 2018년 4월 피해자(당시 16세)가 수업 시작종이 울렸는데도 교실로 들어가지 않고 천천히 걷자 “종 쳤으니 빨리 들어가”라며 막대기로 피해자의 엉덩이를 2번 툭툭 쳐 추행한 혐의로 직위해제됐다. 또 다른 피해자가 학교 건물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면서 실내에서 신는 것으로 보이는 슬리퍼를 신고 있자 “다음부터는 운동화 신고 다녀라” 하며 막대기로 엉덩이를 3번 툭툭 쳐 추행한 혐의도 포함됐다. 위계 등 추행혐의로 넘겨진 ㄷ씨에 대해 검찰은 혐의없음 불기소처분을 내렸다. 학교 복직 허가하면서 별도 징계처분 학교는 이들의 복직을 허가하면서 별도의 징계처분을 내렸다. 1·2차 징계처분에 따라 ㄱ씨는 정직 1월, ㄴ씨는 정직 3월, ㄷ씨는 감봉 1월의 처분을 받았다. 무죄나 무혐의처분을 받았어도 교육청은 파면 또는 해임, 경징계로는 정직~견책 등을 학교에 요구했다. 학교는 무죄판결을 받은 교사는 정직 1~3월, 무혐의처분을 받은 교사는 감봉 1월~정직 3월 처분을 내렸다. 일부 교사들은 불기소처분을 받았음에도 해임된 경우도 있었다. 성비위로 직위해제된 이후 불기소처분을 받은 한 교사는 “나에게 ‘소청심사위원회를 가든 어디를 가든 대들지 말라’는 조언을 해준 분 말이 ‘(무혐의처분을 받고도 해임된 교사들은) 너무 학교에 대들었다. 잘못이 없다고 항변하는 것까진 좋은데 너무 억울하다고 대들었다’고 말했다”면서 “해임된 분들은 괘씸죄에 걸린 것 같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지난 2월 17일 광주 모처에서 대광여고 ‘성비위 혐의’ 교사 6명을 만났다. 6명 중 2명은 기소돼 1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고, 4명은 불기소처분을 받았다. 사안은 앞서 ㄱ~ㄷ씨의 사례와 유사했다. 복장지도·수업지도 과정에서 부적절한 언행을 한 혐의 등이었다. 이들 중 일부는 이제 학교로 돌아가고, 일부는 광주지방교육청 산하 공공기관 파견업무를 나갈 예정이다. 정년퇴임을 1년 앞둔 교사도 있었다. 이들은 “학교로 돌아가도 앞으로 어떻게 학생들을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또 다른 교사는 “녹음기를 켜놓고 수업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광여고는 광주지역에서도 유명한 ‘명문고’로 분류된다. 여기서 ‘명문’이란 상위권 대학 진학률이 높다는 의미다. 특히 수시위주의 대입시스템 속에서 정시진학률이 수시진학률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학교다. 이 학교는 스쿨미투가 터지기 이전부터 혁신학교 지정 문제로 홍역을 치르기도 했다. 2013년 무렵 이홍하 서남대 설립자의 사학비리를 도운 혐의로 당시 대광여고 교장이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광주시교육청(장휘국 교육감)은 유영식 광주교육정책연구소장을 대광여고 교장으로 파견했다. 유영식 교장은 취임 이후 대광여고가 혁신학교로 지정될 수 있도록 절차를 밟던 중 졸업생과 학부형들의 반대에 부딪혀 뜻을 접은 바 있다. 복귀 교사들 30시간 교육 받아야 광주시교육청은 “대광여고는 문제가 많은 학교였다”고 했다. 교육청 관계자는 2월 18일 전화통화에서 “대광여고는 전교생 900명 중 700여 명이 전수조사에서 비위교사를 써냈다”면서 “대광여고는 사학비리를 저지른 재단 소속 학교로 학교 문화에 특수성이 있다. 오래전부터 교사들이 문제가 되는 언행을 하고도 죄라고 인식하지 못했던 학교”라고 말했다. ‘단순히 설문조사만으로 악의적으로 없는 사실을 만들어 적은 학생과 실제 피해를 입은 학생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었나’라는 질문에는 “700명 넘는 학생들이 설문조사 답변을 했으니 얼마나 겹치는 것들이 많았겠나. 30~40건씩 겹쳐서 진술이 나오니 크로스체크가 될 정도였다”고 답했다. 그는 이어 “학교로 복귀하는 교사들은 학생들이 두려움 때문에 경찰조사를 받지 않거나 법정에 서지 않아 무혐의, 무죄가 됐을 뿐이다. 학생들은 당시 교육청에서 파견한 조사원들에게 교사들의 비위사실을 진술했기 때문에 형사벌로 무죄 또는 무혐의가 나왔어도, 행정벌로서는 징계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또 “평소 괜찮은 교사로 알려진 교사 중에도 성비위 교사로 몰린 경우가 있는데 ‘저 사람은 그럴 사람이 아닌데’라는 생각 자체가 피해자에게는 2차 가해를 하는 것일 수 있다”고도 했다. 대광여교 학교법인 흥복학원은 또 지난 1월 복귀하는 교사들에게 ‘성비위 징계 교직원 재발방지 의무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총 30시간의 성인지 감수성 훈련 및 성평등한 조직문화, 피해자 공감하기 등의 교육을 이수할 것을 통보했다. 2018년 11월 3일 오후 서울 중구 세종대로에서 청소년 페미니즘 모임, 전국청소년행동연대 ‘날다’ 등이 주최한 ‘스쿨미투’ 집회에 참가한 학생과 시민들이 교육 당국의 책임있는 자세와 대책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연합뉴스 광주지역 스쿨미투는 2019년 중반 이후 잠잠해진 상태다. 스쿨미투 변론을 맡았던 광주지역 변호사들은 “8~10개월째 스쿨미투 관련 새로운 사건의뢰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스쿨미투는 끝나지 않았다. 학교로 돌아가는 교사들과 남아 있던 교사들에게는 여전히 많은 숙제가 있다. 법은 무죄라고 해도 도덕적으로 무죄가 맞는지는 돌아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가해교사로 분류돼 형사입건됐던 교사들은 자신의 언행에 죄가 없음을 밝히는 데에만 노력했을 뿐 자신의 언행을 돌아볼 기회는 제공받지 못한 것이 현재의 법제도가 가지는 맹점”이라고 말했다. 이 소장은 “학생들의 인권의식·인권감수성은 매우 높은 수준인 반면 교사들의 인식은 학생들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라며 “교육 문화 안에서 교사와 학생 사이의 간극을 좁히려는 교육을 정책적으로 이끌어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스툴미투 형사처벌이 능사일까 스쿨미투로 신고된 모든 사안을 형사처벌로만 가져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법조계 내에서도 나오고 있다. 학교 구성원들이 함께 고민하고 바로잡으려는 노력은 생략된 채 지목된 가해교사를 무조건 격리하고, 사법기관으로 넘기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처벌위주의 분위기 속에서는 교사 스스로의 반성과 변화를 이끌어내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광주지법 형사12부(정재희 부장판사)는 지난 2월 아동복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영어교사 ㄹ씨(62)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판결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아동에 대한 훈육이나 지도 과정에서 불쾌감이나 모욕감을 줄 수 있는 언사는 학교에서 쉽게 발생할 수 있을 것인데 이를 무턱대고 정서적 학대행위로 의율할 경우, 교사의 부적절하거나 비윤리적인 언사가 문제될 때마다 도의적인 비난이나 교내에서의 징계책임을 넘어 형사책임과 더불어 취업제한을 통해 교사의 신분까지 박탈할 수 있게 되므로 그 적용에 있어서 매우 엄격하고 신중할 필요가 있다.” 성비위 의혹 교사들 변론 강성두 변호사 “수사기관에 곧바로 넘기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광주지역에서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변호사들 몸값이 많이 올라갔다”는 말이 퍼졌다. 스쿨미투는 서울 용화여고에서부터 시작했지만 가장 많은 성비위 교사가 적발된 지역은 인천과 광주였다. 2월 20일 기준으로 2018년 당시 전수조사로 적발된 광주지역 중·고교 스쿨미투 성비위 교사는 54명을 넘어선다(일부 학교 교육청 비공개). 이중 광주 명진고와 광주 대광여고는 각각 16명, 19명이 당시 가해교사로 분류, 직위해제됐다. 명진고는 16명 중 1명이 기소되고, 15명은 불기소 결정이 내려졌다. 반면 대광여고는 가해교사로 분류된 19명의 교사 가운데 9명이 기소됐다. 경찰조사 단계에서부터 변호사 조력을 받은 교사들까지 포함하면 광주지역 변호사 업계가 한때 ‘성업’했다는 말이 아예 빈말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렇다고 우스갯소리로 치부할 일도 아니다. 강성두 변호사(51·이우스)는 광주지역에서 스쿨미투 성비위 의혹 교사들의 변론을 많이 맡은 변호사 중 한 명이다. 2018년에는 대한변호사협회가 선정한 우수 변호사 11인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강 변호사는 <주간경향>과의 전화통화에서 “대광여고 소속 일부 성비위 의혹 교사의 사건을 맡기 전까지만 해도 나 역시 언론보도를 보며 ‘저런 미친X들이 다 있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안을 들여다보면 성비위 사실이 명확한 교사와 그렇지 않은 교사가 섞여 있었다고도 했다. -광주지역 스쿨미투 사건의 특징이 있었나. “무죄판결을 받았거나 불기소처분을 받은 의뢰인들은 젊은 교사가 아니라 대부분 나이가 많이 드신 분들이었다. 내 나이대이거나 나보다 나이가 많은 분들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꼰대’들이다. 교단에 20~30년씩 섰던 교사들이 이번 스쿨미투에서 많이 성비위 교사로 분류됐다. 한마디로 학교에서 체벌하는 게 당연하던 시절을 살던 나이든 사람들인 셈이다. 우리 때만 해도 공부 못 하는 학생은 교사가 주먹으로도 때리던 시절 아니었나. 상담을 해보면 그런 의식이 내재된 분들이 많았다. ‘교육자로서 학생이 어긋나는 것 같으면 엄하게도 좀 할 수 있지’ 하는 생각 말이다.” -정서학대·아동학대도 이번 스쿨미투에 다 포함됐던 건가. “이런 의뢰인도 있었다. 체육교사인데 운동장에서 수업을 하는 도중 빗방울이 조금 떨어지니까 학생들이 ‘체육수업하기 싫어요’라고 한 거다. 그러면 그냥 교실로 들어가 수업을 해도 되는데, 이 의뢰인은 ‘이놈들아, 이 정도 가지고 수업을 안 하긴 뭘 안 하냐’라며 그냥 수업을 한 거다. 그 외 몇 건이 설문조사 과정에서 나왔고, 직위해제됐다가 최종 무혐의처분을 받았다. 학생들에게 강압적으로 수업을 했다면 학교 차원에서 문제삼을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게 형사처벌로 나아갈 사항인지에는 의문이 있다.” -그럼에도 실제 성비위 교사들도 걸러진 계기가 되지 않았나. “분명 일부 교사들은 문제가 있었던 것은 맞다. 다만 모든 교사를 동일선상에 집어넣고, 해명할 기회도 주지 않은 채 일괄적으로 직위해제를 하는 게 옳은지는 의문이다. 내부 징계는 건너뛴 채 설문지에 이름이 나온 모든 교사를 곧바로 수사기관에 넘기는 것이 과연 교육적으로도 옳은 일일까. 이에 대해서는 교육당국 스스로 차분히 고민할 기회를 가져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우정이야기]광주 세계수영대회 마스코트 ‘수리와 달이’(2019. 07. 12 14:30)
2019. 07. 12 14:30 경제
‘제18회 2019 광주 FINA 세계수영선수권대회’가 7월 12일 막을 올렸다. 7월 28일까지 17일간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 여수 일대에서 열린다. 이 대회는 국제수영연맹(FINA) 주최로 2년마다 개최된다. 우정사업본부는 7월 12일부터 광주광역시와 전남 여수 일대에서 열리는 ‘제18회 2019 광주 FINA 세계수영선수권대회’ 기념우표 65만6000장을 발행했다. 세계수영선수권대회는 동·하계 올림픽, 월드컵, 세계육상선수권대회와 함께 세계 5대 스포츠 대축제로 꼽힌다. 지금까지 이들 행사를 모두 유치한 나라는 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 3개국뿐이다. 그동안 아시아에서 일본 후쿠오카(2001년), 중국 상하이(2011년)에서만 열렸다. 광주가 아시아의 세 번째 개최도시가 되는 셈이다. 또 세계수영대회는 올해 국내에서 유일하게 열리는 세계대회다. 광주는 4년 전 ‘2015 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렀다. 이번 수영대회를 개최함으로써 광주는 명실상부한 국제 스포츠 도시로 도약하게 됐다. 이번 대회는 역대 가장 큰 규모인 194개국 1만5000여명(FINA 마스터즈대회 포함)의 선수와 임원이 참가한다. 경영, 다이빙, 수구, 아티스틱 수영, 오픈워터 수영, 하이다이빙 등 6개 종목에서 7758명(참가선수 2639명)의 선수와 임원이 치열한 감동과 박진감 넘치는 명장면을 연출한다. 특히 2017년 헝가리 부다페스트 대회에서 7관왕에 올라 단일 세계수영선수권대회 최다관왕 타이틀 보유자인 케일럽 드레슬을 비롯, ‘수영여제’로 통하는 케이티 러데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릴리 킹(이상 미국), 중국의 강자 쑨양 등 쟁쟁한 선수들이 출전한다. 한국의 수영스타 ‘마린보이’ 박태환, 수영 황제 마이클 펠프스(미국) 등이 불참하는 게 아쉽다. 뿐만 아니다. 전세계 수영동호인의 축제인 FINA 마스터즈대회가 동시에 열린다. 8월 5일부터 18일까지 세계의 수영마니아 8000여명이 광주를 찾을 전망이다. 올해는 마스터즈 대회의 모든 경기가 인터넷 방송으로 생중계될 예정이다. 역대 세계수영선수권대회는 물론 다른 국제스포츠 행사에 비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대규모다. 광주시는 “남은 것은 내실”이라고 주장한다. 규모에 어울리는 내실을 추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특히 예향의 도시인 광주는 경기에 못지않은 문화행사에 집중하고 있다. 문화 이벤트는 스포츠 축제의 들러리로 취급받지 않는다. 오히려 문화행사는 국제 이벤트의 핵심요소가 되고 있다. 특히 다양한 문화행사는 개최국 고유의 역사, 자연, 전통, 풍습, 예술 등의 상징적인 의미를 전세계적으로 알릴 수 있는 기회로 활용되고 있다. 광주는 수영대회 기간 경기장, 선수촌, 5·18민주광장, 광주폴리, 공연마루, 전통문화관 등 발길 닿는 곳이 공연장으로, 무대로, 전시장으로 탈바꿈할 채비를 마쳤다. 문화행사의 꽃은 개막식이다. 2019 광주 FINA 세계수영선수권대회는 ‘평화의 물결 속으로(DIVE INTO PEACE)’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의 가치를 지켜온 광주에서 인류 평화의 가치를 드높이고자 하는 염원을 담았다”는 게 이용섭 광주시장의 설명이다. 민주·평화·인권의 상징은 ‘빛의 분수’다. 개막식에 전세계 어린이가 빛의 분수에 각국에서 가져온 물을 부음으로써 ‘광주의 정신’을 ‘세계의 정신’으로 승화시키겠다는 의지를 표현했다. 이번 대회의 마스코트는 ‘수리와 달이’다. 무등산과 영산강에 서식하는 천연기념물 수달 암수 한 쌍을 의인화한 것이다. 수달은 ‘수영의 달인’이라는 별칭이 있다. 이번 대회 성공을 바라는 광주시민과 우리 국민의 염원을 담아 우정사업본부는 7월 12일 수리와 달이를 모델로 2019 광주 FINA 세계수영선수권대회 기념우표를 발행했다. 무등산(포근한 품)과 영산강(생명의 숨결)을 형상화한 평화의 물결 속에서 미래의 꿈을 향해 힘차게 도전하는 모습을 표현했다.
우정이야기
[이곳&이야기]광주 세계수영대회 보러 오세요(2019. 06. 28 15:29)
2019. 06. 28 15:29 스포츠
ㆍ역대 최대 193개국 7266명 참가… 국내 최초 하이다이빙 시설 ‘아찔’ 건물 10층 높이에 설치된 다이빙 플랫폼은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아득했다. 남자선수들이 뛰어내리는 27m 높이 플랫폼으로 가는 방법은 딱 하나, 사다리 형태로 된 계단을 오르는 것뿐이다. 밑이 뚫려 아래가 그대로 보이는 계단 130개를 오르는 것은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면 어림도 없다. 이용섭 2019 광주 세계수영선수권대회 조직위원장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조선대에 설치된 하이다이빙 경기장을 살펴보고 있다. / 광주시 제공 도쿄올림픽 수영 출전권 43% 배정 지난 6월 24일 광주 동구 조선대학교 축구장에 들어선 국내 최초 하이다이빙 경기장 계단에 발을 올렸다. 공사 관계자는 “독일의 ‘시스템 비계’를 이용해 만들어져 대형 스크린과 방송 중계장비 등을 추가 설치해도 끄떡없다”고 했지만 밀려오는 공포는 어쩔 수 없었다. 밑을 보자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20계단쯤 오르다 주저앉았다. 이곳에서는 오는 7월 12일 개막하는 ‘2019 광주 세계수영선수권대회’ 하이다이빙 경기가 열린다. 하이다이빙은 남자 27m, 여자는 20m 높이에 설치된 다이빙 플랫폼에서 지름 17m, 깊이 6m 수조로 뛰어내리는 경기다. 플랫폼에서는 수조가 큰 대야 크기 정도로 보인다고 한다. 선수들은 입수하기까지 단 3초 동안 각종 기술을 선보인다. 수면에 닿는 순간 낙하속도는 시속 90㎞에 이른다. 충격을 피하기 위해 반드시 발부터 입수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수조 안에는 다이버 3명이 배치돼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며 선수들을 돕는다. 절벽 다이빙에서 시작된 하이다이빙은 고난도의 기술과 담력이 필요해 국제수영연맹(FINA)에 등록된 전세계 선수가 채 100명이 안 된다. 일반 다이빙 경기 중 가장 높은 10m 종목 선수가 27m에서 다이빙을 하려면 1m씩 높이를 올려가며 1년 이상 훈련해야 한다. 국내에는 선수가 한 명도 없다. 이종휘 대회조직위원회 하이다이빙 담당관은 “하이다이빙은 인간이 꿈꿔왔던 하늘을 나는 것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경기다”라면서 “광주에서 짜릿한 다이빙의 매력을 즐길 수 있는 기회”라고 했다. 세계적인 수영선수들의 경기를 직접 볼 수 있는 제18회 세계수영선수권대회가 7월 12일부터 28일까지 광주에서 열린다. FINA가 주최하는 이번 대회에는 역대 가장 많은 193개국 7266명의 선수단이 참가신청을 했다. 경영과 다이빙·수구·아티스틱수영·하이다이빙·오픈워터수영 등 6개 종목에서 기량을 겨룬다. 수영대회는 동·하계 올림픽, 월드컵, 세계육상선수권대회와 더불어 세계 5대 스포츠 이벤트로 평가받고 있다. 1973년 시작된 세계수영대회가 아시아에서 개최된 것은 일본 후쿠오카(2001년)와 중국 상하이(2011년)에 이어 광주가 세 번째다. 이번 대회에는 2020년 도쿄올림픽 수영 출전권의 43%가 배정돼 있다. 광주 대회를 통해 올림픽에 나설 수 있는 팀 출전권 95개와 개인 출전권 68개의 주인공이 결정된다. 2017년 헝가리 부다페스트 대회에서 7관왕에 오른 미국의 카엘렙 드레셀과 중국의 ‘수영 영웅’ 쑨양 등 세계적인 선수들이 출전한다. 한국은 경영과 다이빙·수구·아티스틱수영·오픈워터수영 등 5개 종목에 82명의 선수가 출전한다. 한국선수 중에서도 메달이 기대되는 선수가 있다. 가장 주목받고 있는 선수는 개인 혼영 200m에 출전하는 김서영(25·경북도청). 김서영은 지난해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아게임 이 종목에서 대회신기록(2분08초34)을 작성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지난 5월 열린 FINA 챔피언스 경영시리즈 2차 대회에서도 한국선수 중 유일하게 초청받아 은메달을 따 기대를 모으고 있다. 배영의 임다솔(21·아산시청)도 국가대표 선발전과 동아수영대회 배영 100m에서 연이어 한국신기록을 경신해 메달이 기대된다. 2017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수영대회 하이다이빙 경기에서 한 선수가 경기를 펼치고 있다. 하이다이빙은 남자 27m, 여자는 20m 높이 다이빙 플랫폼에서 열린다. / 2019광주세계수영선수권대회 조직위원회 제공 시합 후 경기장 철거하는 알뜰 대회 광주 수영대회는 알뜰 대회로 치러진다. 경영과 다이빙, 전남 여수 앞바다에서 열리는 오픈워터 경기장을 제외한 모든 경기장은 땅이나 체육관에 수조를 설치한 ‘임시시설’로 만들었다. 경영과 다이빙이 열리는 주경기장은 2015년 광주에서 열린 유니버시아드대회 경기장으로 사용됐던 남부대 시립국제수영장을 활용한다. 광주시와 대회조직위는 3393석이었던 수영장 관람석을 임시로 1만648석으로 늘렸다. 수구 경기는 남부대 축구장에 수조 2개와 4340석의 관람석을 설치했다. 하이다이빙도 조선대 축구장에 임시시설로 완공됐다. 아티스틱수영 경기장은 실내체육관인 염주종합체육관 바닥에 수조 2개를 들여와 만들었다. 모든 경기장은 FINA의 공인인증을 받아 경기를 치르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 임시로 지은 시설들은 경기가 끝나면 모두 철거된다. 경기장을 만드는 데 606억원의 비용이 들어갔지만 국내에서 수영이 비인기 스포츠라는 점을 감안하면 영구시설로 지었을 때보다 경제적이다. 광주 수영대회 슬로건은 ‘평화의 물결 속으로(DIVE IN TO PEACE)’다. FINA와 대회조직위는 북한이 참가할 경우 대회의 의미를 더욱 살릴 수 있을 것으로 보고 공을 들이고 있다. 북한은 다이빙과 아티스틱수영 등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다. 2017년 수영대회에서는 경영과 다이빙·아티스틱수영에 참가해 은메달 1개, 동메달 1개로 종합 2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북한은 대회 참가신청 마감일이었던 6월 12일까지 신청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FINA와 조직위는 개막일 전까지만 참가의사를 밝히면 북한이 경기에 출전할 수 있도록 할 방침이다. 여자 수구의 경우 북한에 ‘단일팀’ 구성을 제안하기도 했다. 북한이 선수단과 함께 응원단을 보낼 경우를 대비해 숙소 등도 준비해 뒀다. 대회 개막이 다가오면서 입장권 판매도 늘고 있다. 36만9000장의 경기 입장권 중 지난 25일까지 26만1000장이 판매돼 70.7%의 판매율을 기록하고 있다. 국내에서 보기 힘든 하이다이빙 입장권 6500장이 가장 먼저 매진됐고, 오픈워터 입장권도 모두 팔렸다. 눈과 입으로도 대회를 즐길 수 있다. 7월 19일부터 21일까지 각종 문화행사가 이어진다. 5·18 민주화운동의 주요 사적지를 거치는 ‘5월 버스’를 통해 역사의 현장을 둘러볼 수 있다. 맛깔난 남도 음식을 소개하는 ‘맛 지도’도 제작해 배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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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김준태 시인 “80년 5월 쓰러진 임산부 그의 넋이 빙의돼 시가 되어 나왔다”(2019. 05. 24 16:51)
2019. 05. 24 16:51 사회
“80년 6월 2일이었어요. 당시 신문은 전부 석간이었지. 문순태 당시 편집부국장으로부터 ‘빨리 가져오라’는 전갈을 받고 가보니 기자들은 펜을 놓고 떠난 거예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는 기자 일동 사직서 아시죠? 어차피 사실은 못 쓰니 대신 실으려 했던 것인데….” 5월 22일, 서울 용산역의 한 찻집에서 만난 김준태 시인(71)의 얘기다.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라는 시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39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기억은 엊그제 일처럼 또렷했다. 45분 만에 시는 완성됐다. 토씨 하나도 고치지 않았다. 일필휘지다. 그는 모든 시인은 샤먼(무당) 기질이 있다고 했다. “나는 손만 빌려줬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누가 썼느냐, 내 몸 속에 5월에 죽은 사람들이 들어와 썼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해원(解寃)을 해줘야지. 39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같은 생각입니다.” 45분 만에 완성된 ‘아아 광주여…’ 당시 광주 전남도청에는 계엄군 검열관 5명이 파견 나와 있었다. 광주광역시 금남로 구 가톨릭센터 건물에 들어선 ‘5·18 민주화운동 기록관’에는 이때 빨간펜으로 싹둑싹둑 검열 삭제 표시가 된 검열 전·후의 신문이 나란히 전시돼 있다. 검열 후 제목도 뒷부분은 잘려 나갔다. ‘아아, 光州여!’ 뒤에는 검은 공백만 남겨졌다. 105행, 두 단에 걸쳐 게재된 시는 33행짜리 한 단으로 축약됐다. “활판인쇄 시절 제일 처음 찍는 걸 ‘게라지’라고 해요. 당시 조판실 사람들이 영리했어요. 검열받은 것이 나오기 전에 그걸 올려놓고 철커덕철커덕 10만부를 찍어 전국에 암암리에 다 뿌려버린 거야. 어떤 루트로 서울까지 올라갔는지는 모르겠는데 그게 AP, UPI, 로이터에 영문으로 번역돼 전세계에 타전된 겁니다. 그 중 하나가 하버드대 데이비드 맥캔 교수라고, 마침 한국에 체류 중인데 그 분이 번역한 거였어요. 한국말을 아주 잘하시는 분인데, 나중에 보니 시카고대 교수도 번역했더군요.” -그 뒤 어떻게 되셨습니까. “원래는 진실을 쓸 수 없으니 시로 메우려 했는데, 제 시가 그날 참상을 너무 리얼하게 그려버린 거지. 당시 전남매일신문사가 광주 미 문화원이 있던 동구 광산동에 있었는데 그날 신문사 근처에 숨어 있었어요. 오후 5시30분쯤 신문사 쪽에서 전하길 ‘시가 다 퍼졌다. 큰일났으니 피신하라’는 겁니다. 게오르규의 <25시>를 읽다보면 피신의 법칙이 나와요. 절대로 연고지는 가지 마라. 그래서 무연고지를 찾아다녀요. 한 달 가까이 집에 가지도 못해요. 모르는 사람들은 시 속에 나와 있는 집사람이 죽은 줄 알았대요. 그래서 김준태 부인이 사태 때 죽은 줄 알았다고….” ‘아아, 광주여!…’ 시 전문을 보면 화자에 빙의된 망자(亡者)의 회한이 괄호 안에 들어 있다. “(여보 당신을 기다리다가/ 문 밖에 나가 당신을 기다리다가/ 나는 죽었어요… 그들은/ 왜 나의 목숨을 빼앗아갔을까요/ 아니 당신의 전부를 빼앗아갔을까요/ 셋방살이 신세였지만/ 얼마나 우린 행복했어요/ 난 당신에게 잘해주고 싶었어요/ 아아, 여보!/ 그런데 나는 아이를 밴 몸으로/ 이렇게 죽은 거예요 여보!/ 미안해요, 여보!/ (…)” 이 사연은 그가 당시 재직했던 전남고 동료교사 김충희씨 부인 최미애씨 이야기다. 그는 최씨 이야기가 시에 들어간 까닭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동료교사 김씨가 살던 1층 단독셋방이 중흥동 과거 사레지오고등학교 뒤쪽, 지금 모아아파트 쪽에 있었거든. 옆집에는 장인·장모가 살고 있었고. 김 교사는 1학년 2반 담임이었고 나는 2학년 3반 담임이었어요. 그렇게 상을 당했는데 당시 학교 선생들은 나 빼고 한 명도 못왔어요. 총알이 날아다니니 겁을 먹은 거라. 김 교사가 나를 보더니 털썩 주저앉으며 통곡하는 거예요. 우리 처 모가지가 잘려 버렸다고.” -최미애씨의 사인을 두고 학살을 은폐하려는 쪽에서는 ‘공수부대로 위장한 시민군의 짓이다’, ‘최씨와 장모 등이 시민군에게 밥을 차려준 폭동 부역자’라는 식으로 깎아내리려 합니다. “나는 월남전에도 다녀온 사람입니다. 당시 북한 특수군이 어쩌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북한군이 사용하는 총기는 AK47이에요. 당시 계엄사 부검일지에도 저 총에서 발사된 총알이나 흔적에 대한 이야기는 없어요. 총 맞은 자리를 보면 어떤 총인지 알 수 있어요. 시민군이 예비군 무기고 등을 통해 확보했던 M1 소총은 4조 우선 강선이고, M16은 6조 우선입니다. 머리가 맞아 없어졌다는 건 M16이기 때문입니다.” 김 교사의 장모, 최씨의 친정어머니는 당시 임신 8개월이었던 뱃속 둘째아이의 안타까운 죽음도 목격해야 했다. “어머니가 그러시는 거야. 엄마가 그렇게 되니 뱃속의 아이가 천방지축으로 몸부림을 치더라는 거야. 어떻게든 아이라도 살려보려고 했는데 결국 살릴 수가 없었고.” 끔찍한 기억이다. 계엄군이 시 외곽을 봉쇄하고 있어서 장례를 치르러 나가기도 힘들었다. 집 화단에 가매장을 했다 한 달이 지난 후 5·18묘역으로 이장했다. ‘여보 당신은 천사였소,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라는 묘비명으로 유명한 최씨 묘지의 비석은 1년 뒤 김 시인과 남편 김 교사가 가서 세운 것이다. 문구는 김 시인의 시에서 따서 쓴 것이다. 일본의 전문지도 그의 시 조명 김준태 시인을 만난 것은 일본 잡지 <시와 사상> 5월호에 실린 그의 시에 대한 서평이 계기였다. 지난해 김정훈 전남과학대 교수의 번역으로 일본에서 출간된 그의 시집 <광주로 가는 길>에 대한 서평은 일본의 대표적인 사회파 여류시인인 사가와 아키(佐川亞紀)가 ‘고난에서 창조로-독립운동 기념의 해에 광주로 가는 길을 읽는다’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아키 시인도 시에서 최미애씨 원혼이 독백하는 부분을 주목하면서 ‘계엄군에 의해 죽었음에도 자신의 무력감을 원망하는 것이 투쟁의 주체가 자신이라는 자각 때문일 것’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모성은 대단합니다. 남자들은 총 맞으면 뒤로 발라당 넘어지는데 여자들은 앞으로 쓰러져요. 묘합니다. ‘내 새끼 젖 먹여야지’ 하는 마음이 마지막 순간까지 힘을 내게 하는 거예요. 엉겅퀴처럼 질긴 겁니다. 이 땅의 어머니들이 다 그랬어요. 4·3이 그랬죠. 81년 5월, 망월동에서 나는 이런 걸 봤어요. 엄마를 잃은 최씨의 아이가 우니까 할머니가 애를 달래려고 빈젖을 물리는데 그 쭈글쭈글한 젖을 빨고 있어요. 그걸 보니 눈물이 얼마나 나오던지.” 80년 6월, 김 시인은 아이들이 눈에 아른거려 신안동 셋방을 찾아갔다. 25일간의 도피는 5분도 안돼 잡히면서 끝났다. 505보안대에 끌려가 취조를 받으면서 강제로 사직서를 낸 그는 학원가 선생으로, 신문사 기자로, 구속자와 수배자, 유가족 등이 모인 ‘5항동(5월항쟁동지회)’ 활동을 하다 조선대 교수, 5·18기념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는 사단법인 광주평화포럼 이사장을 하며 강연과 저술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나이가 70이 넘었지만 지금까지 별 탈 없이 건강합니다. SNS 활동도 활발히 해요. 지난해는 <밭詩, 강낭콩>, <쌍둥이 할아버지의 노래>라는 제목의 시집 2권을 냈는데 세월호나 남북정상회담의 단상도 시에 담았습니다. 생명과 평화·통일은 앞으로도 계속될 제 시의 화두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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