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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경향(총 2 건 검색)

어바웃펫,  목 편한 강아지 구명조끼  판매
어바웃펫, 목 편한 강아지 구명조끼 판매
2023. 06. 07 17:34 화제
반려동물 쇼핑 플랫폼 어바웃펫이 펫캉스를 앞두고 강아지용 구명조끼를 내놨다. 어바웃펫 PB브랜드 ‘펫띵’에서 내놓은 ‘펫띵 수영왕 구명조끼’로, 두껍고 넓은 넥카라가 강아지들의 고개를 받쳐줘 물 위에서도 안정감과 편안함을 제공한다. 이 제품은 행동학 수의사로 잘 알려진 곽지윤 씨와 협업해 개발한 것으로, 반려견이 물놀이를 할 때 불편함을 없애는 데 초점을 뒀다. 수영이 처음인 반려견이 물 위에서도 안정적인 자세를 잡을 수 있고 외이염 등 세균 감염도 예방할 수 있다. 값은 2만7900원~3만1900원이다. 이와 함께 쿨조끼, 쿨스카프 등 여름나기에 도움을 주는 제품들이 마련되어 있다. 또 ‘바른패드’ 누적 150만 장 판매를 기념해 패드 기획전을 이달 12일까지 열고 다양한 할인 혜택을 제공한다. 강아지용 구명조끼
탈북자 취재하다 구금된 석재현의 구명운동 나선 그의 아내 강혜원
2004. 03. 01 화제
“깎인 머리, 부어오른 손가락, 동상으로 찢긴 살갗은 인간을 사랑한 사람에게 내려진 형벌” 성공과 실패의 확률은 반반. 50%라는 불확실성에 몸을 던져 탈북자를 취재하던 사진가가 중국의 얼어붙은 감옥에서 고독과 싸우고 있다. 석재현씨가 바로 그다. 갇혀 있는 그에게 원군은 대한민국이 아니었다. 유일한 아군인 아내 강혜원씨가 밝히는 석재현씨 구명기는 조국을 생각케 하고 사람을 추억케 하며 사랑을 느끼게 한다. 네번째 면회를 떠나면서 풀어낸 그녀의 사부곡. 탈북자 구출 작전명 ‘리본’ 결국 리본에 발목 잡히다 꼭 1년 만에 태양을 봤다. 여명이 빛의 향연을 준비할 즈음, 땅거미가 안간힘을 쓰며 막바지 버티기를 할 때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한 태양을 봤다. 그곳에서도 새로운 태양은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그가 그리도 찬미하는 예수님의 귀빠진 날인 성탄절 새벽에… 탈북자를 돕다가 중국에서 구금된 석재현씨(35)는 2003년 12월 25일 그렇게 옌타이(煙臺) 제2간수소(구치소)에서 웨이팡 교도소로 옮겨졌다. 죄가 있어 구금된 자가 무슨 할 말이 있을까마는 동토에서 영어(囹圄)의 신세가 된 나약한 한 인간에게 우리는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다. 한국인 석재현은 그렇게 한국 정부의 도움으로부터 철저히 유리되어 박제가 되어가고 있는지 모른다. 지난 2003년 1월 18일, 석재현씨는 ‘리본’이라는 암호명 아래, 중국 산둥성 옌타이항에서 탈출하려던 탈북자들을 취재하고 있었다. 그는 저널리스트다. 한국의 탈북자구호단체 두리하나선교회와 유럽의 ‘국경 없는 의사회’, 독일인 의사 노베르트 풀러첸과 일본의 북조선난민구호기금 등 다국적 NGO들이 탈북자들을 선박 두 척에 태워 한국과 일본에 망명시킬 계획을 듣고 취재 활동을 벌이고 있었던 것. 그러나 대단위 탈출 계획이었던 만큼 꼬리를 밟히고 말았다. 그렇게 중국 공안에 잡혀 구금된 것이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개별적인 사람의 역할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사건이 사건인 만큼 전체적인 틀에서 문제의 해법을 찾으려 했다. 7개의 NGO들이 조직적으로 연대를 한데다 공해상으로 탈출을 시도했다는 점, 탈북자 수가 80명으로 최대 규모라는 점 등이 중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음은 두말이 필요 없다. 그 탓에 그에게 ‘타인 불법 월경(越境) 조직죄’로 밀입국 조직 혐의가 덧씌워졌다. 그리고 얼마 전 2년형의 실형을 언도받았다. “올 1월 18일에 면회를 했어요.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잡혀간 지 꼭 1년 만이었어요. 고슴도치처럼 박박 깎인 머리를 보니 처음엔 누군가 싶더라고요. 지난번 항소심이 기각되면서 미결수에서 기결수로 변했기 때문에 머리를 깎인 것이죠. 귀는 동상으로 얼어 찢어졌고 손은 어묵같이 부어 있었어요. 181cm로 큰 키지만 몸 상태가 말이 아닌지 60kg도 안 되어 보이더라고요. 전날 내가 면회를 온다고 추한 꼴 보이기 싫다며 찬물로 목욕을 한 탓에 감기도 걸려 있었어요. 만났더니 교회 나가라고 하더군요. 남편은 독실한 크리스천이지만 나는 교회를 안나가거든요. ‘너 때문에 기도발이 안 받는다’며 농담도 했고요. 사실, 하나님은 안 믿지만 그분과 약속을 했어요. 내 남편 빨리 내보내주면 나도 당신 자식이라고….” 석재현씨의 아내 강혜원씨(39)는 이제 흘릴 눈물도 없다고 한다. 눈물을 흘리며 허송할 시간이 없는 것이다. 이때가 세번째 면회였고 인터뷰 다음날인 2월 11일, 남편을 면회하기 위해 다시 중국에 간다고 했다. 이번에는 뿔테 안경을 준비해 간다고 했다. 그간 안경이 없어서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거라며, 마치 남편에게 안경을 씌워준 상상에 빠지는 듯 입가엔 엷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지난해 9월 23일 처음 면회를 했을 때는 머리가 헝클어져 있었고, 얼굴엔 진물이 났으며 피부는 약간 벗겨져 있었다고. 수감자 2백여 명이 공동으로 쓰하는 면도기를 사용하다 보니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 그때 두꺼운 겨울옷을 넣어주겠다는 말에 석재현씨는 버럭 화를 냈다고 한다. “하루하루가 10년 같은데, 나보고 겨울을 여기서 나란 말이야?” 일본인은 1개월, 한국인은 몇 년 기간도 나라 따라 간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방에 20명이 넘는 수감자와 생활을 해야 하는 통에 제대로 잠을 잘 수도 없는 것이 당시 남편의 처지였다고. 다행히 조선족 수감자가 있어 말벗이라도 할 수 있었는데, 그 사람마저도 오래지 않아 처형되어 그 상실감에 한동안 몸을 지탱해내기도 힘들었단다. 결국 몸이 망가져 7~8월에 링거를 10병 정도 맞아야 했다고. 간수소는 교도소와는 달리 운동 시간도 없이 꼼짝없이 방 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더없이 큰 고통이다. 더 안타까웠던 것은 지난해 10월 23일 두번째 면회 때 “겨울옷 좀 넣어줘!”라는 말을 할 정도로 빠른 시간 안에 출감하는 것을 포기한 인상이었다고. 감옥 생활의 어려움이 가중되었던지 영양실조로 쓰러져 철문에 부딪힌 탓에 목 왼쪽에 상처도 있었다. 갇힌 남편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벌써 그 이전에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중국에 다녀온 것이 16번이나 되고, 일본에도 7번 다녀왔다. 같은 죄명으로 구금되었다가 풀려난 사람들과 중국 판사를 만나는 일을 반복했다. 발품을 팔면 팔수록 속을 끓이는 부아는 잦아들지 않았다. 외교상부 담당자와 통화를 하면 “열심히 하고 있다”란 답변이 다고 “무엇을 하냐?”고 물어보면 “대외비라서 말해줄 수 없다”는 통해 갑갑함만 더해졌다. “중국 공안에서도 ‘너희 나라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는 말까지 했다더군요. 그도 그럴 것이 2003년 8월 7일 같은 죄목으로 잡힌 ‘북한 귀국자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모임’ 대표 야마다 후미아키(山田文明·54) 오사카 경제대 조교수는 잡히자마자 일본 영사 3명이 와서 구금 당시의 상황과 건강상태를 1시간 동안 확인했대요. 우리요? 담당 영사는 휴가중이었고, 영사 2명이 10분간 대충 질문을 하더니 돌아갔대요. 그런 탓인지 야마다씨 일행은 3주 만인 8월 27일에 풀려났죠. 물론 영사님 한 분이 가끔 남편을 찾아 같이 기도를 하며 위안을 얻게 해줘 고맙지만 우리 정부가 보인 노력은 일본 정부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듯해요.” 이때, 야마다씨와 같이 구금되었던 한국인 김기주씨가 전하는 말은 다소 충격적이다. 자국 영사에게서 들은 ‘위로의 말’도 수준이 달랐다고 한다. 야마다씨는 일본 영사로부터 ‘일본 정부에서 최선을 다할 테니 안에서 건강히 지내라’는 말을 들었는데, 우리 영사는 ‘아마 오래 갈 거다. 이 사건이 중국법을 위반한 것인지 알고 있었냐. 벌을 달게 받을 용의가 돼 있느냐’고 했다고 전했다. 약을 올리는 것도 아니고. 결국 석재현씨는 한국인으로 잡힌 것이라 이렇게 오래도록 갇혀 있는 것이고, 김기주씨는 일본인과 같이 잡혀 3주 만에 풀려난 셈이다. “사진을 하고 싶고 인간을 구하고 싶다” 뉴욕타임스, 「GEO」와 일한 베테랑 이런 상황을 모를 리 없는 가족의 상실감 역시 클 수밖에 없다. 올 설날을 앞두고 시댁에 모인 식구들이 강혜원씨에게 “왜 말리지 않았냐?”며 속에 없는 소리를 할 때도 아무런 대답을 못했다고. 2003년 1월 11일, 석재현씨가 탈북자를 돕고 싶다는 말을 내비쳤을 때, 그동안 탈북자 문제를 취재하면서 남모르는 고민이 많았던 만큼 남편의 말에 동의한 것이 죄라면 죄이기 때문이다. “그런 일은 일본인들이 아주 많이 하잖아. 탈북자들이 우리 민족인데, 우리가 손을 놓고 있으면 안 될 것도 같고… 꼭 내 손으로 그 일을 하고 싶어. 확률은 반반이야. 잡힐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50%의 실패 확률이었지만 설마 했다. 오히려 “젊었을 때 고생하는 거지”라며 맞받아쳤다. 같은 민족끼리 아직도 이런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고통받는 것을 마음 아파했고, 저널리스트로서 그런 문제를 기록하는 것에 대해 의무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위험한 줄 알면서도 남편을 만류하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대화가 무서운 현실을 가져온 단초가 된 것. 더없이 서러웠다. 그런 후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전라도 나주의 선배를 만나러 가는 길에 함박눈을 만났다. 길이 막혀 8시간이나 거북이 운행으로 갔지만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을 보고 있노라니 자유롭게 살게 될 탈북자가 떠올라 “난다, 난다! 탈북자”를 외치며 웃었던 기억이며, 그것도 농담이라고 “잡혀서 신문에 나는 것 아니야?”라고 아무 생각없이 내뱉었던 말들이 떠올랐다. 그렇게 3일 동안 이곳저곳을 돌다가 대구 집에 도착한 것이 1월 13일 새벽 1시쯤. 바로 그날 남편이 중국으로 떠날 비행기표가 예약되어 있었다. 다른 때 같으면 공항까지 바래다줄 텐데, 그간 피로가 누적된 탓인지 콜택시 불러서 석재현씨를 보냈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 일어났는데, 기분이 묘했다고. “책상 위를 깨끗하게 치워놓고 갔더라고요. 그 위에 탈북자 일지와 비상연락망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거예요. 갑자기 ‘데려다줄 걸…’ 후회가 됐어요. 그리고 볼 일이 있어 일본에 갔는데, 18일 아침에 연락이 왔어요. 중국 공안의 대대적인 검거 작전이 펼쳐진 18일 새벽 6시 30분께, 한국의 아는 목사님께 전화를 했나 봐요. ‘아무래도 이번 취재는 실패한 것 같다. 수많은 무장 공안이 주위를 포위해 들어오고 있다’고 말한 뒤 연락이 끊겼다고 하더라고요. 앞이 캄캄했죠. 모든 일들이 눈앞에 스치고….” 당시만 해도 ‘그 일을 하지 않았으면’이란 후회가 가슴을 짓눌렀다. 그런데 그런 생각은 오래 가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남편이 탈출시키려 했던 탈북자 중에 용케도 그곳을 빠져나와 한국까지 살아 들어온 이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당시 임신한 몸이었던 탈북 여성은 그 탈출 행로가 험로였던 만큼 태아를 유산하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이들은 강혜원씨를 보자마자 무릎을 꿇고 고맙다는 말을 연신해 댔다. 그리고 또다시 임신을 해서 오는 7월 아이를 낳는데, 한국에서 아이를 키울 수 있게 되어 너무 좋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순간 남편이 하는 일이 사람을 살리는 일이었음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남편이 하려는 일의 가시적인 결과가 바로 그들인 셈이다. 그러나 “열심히 하고 있다”는 정부 관계자의 석재현씨 구명 성과는 아직 아무것도 드러난 것이 없다. 오히려 국제 언론단체의 성명과 구명 요구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그가 프리랜서 기자로 일했던 뉴욕타임스는 투옥을 규탄하며 석방을 촉구한 데 이어, 최근 하루빨리 다시 석재현씨와 함께 일하기를 희망한다는 내용의 ‘신원보증서’를 중국 당국에 전달하기도 했다. ‘국경 없는 기자회’와 뉴욕에 본부를 둔 언론인보호위원회(CPJ) 등도 중국 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하고, 그의 구명운동에 나섰다. 이렇게 그에 대한 관심이 큰 이유는 그가 명망 있는 사진가란 이유도 빼놓을 수 없다. 사진가 석재현씨는 뉴욕타임스즈, 「GEO」 등 명망 있는 매체들과 작업을 함께 해온 포토저널리스트. 지난해까지 대구 경일대 사진학과에서 강의를 하는 등 검증된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석재현씨는 2년 전부터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들을 꾸준히 취재하며 그 내용을 뉴욕타임스 등에 기고해왔다. 이번 취재 내용 역시 뉴욕타임즈에 게재할 예정이었다. 이렇게 언론단체에서 구명운동을 하고 있는 사이, 아내인 강혜원씨는 아주 현실적인 구명 방안을 제시했다. “남편의 신병이 억류된 지 1년이 지났어요. 2년 형기의 절반을 채운 만큼 가석방을 신청해서, 강제 추방 형식으로라도 우리나라에 돌아올 수 있도록 할 거예요. 물론 이것은 제가 주장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에요. 적어도 정부 차원의 지속적인 요구가 선행되어야죠. 중국 실정법에서도 허용하고 있는 가석방 제도를 이끌어내지 못하면 저도 구명운동을 잘못한 거죠. 정부도 대내외적으로 자국민의 보호에 얼마나 성의를 다했는지, 그리고 그에 대한 비판에 할 말이 없어지는 것이고요.” 빠른 시일 안에 무사귀환 바랄 뿐 형기 반을 채워 가석방 자격 갖춰 과연 그의 죄는 무엇인가? 그와 같이 구금된 사업가 최영훈씨(41)가 감옥에서 성경책을 오려 붙여 쓴 편지에서 밝힌 것처럼 ‘공의와 공평과 정직, 인간을 사랑한 죄’가 유죄의 이유일지 모른다. 석재현씨의 사진 인생도 인간을 사랑한 작품 세계를 보여왔다. 그의 작업은 대부분 인간이 소재다. 미국 생활에서 작업한 ‘축제일’은 축제를 즐기는 젊은이들의 다양한 모습을 그리고 있으며, 월간 「GEO」에 발표한 ‘울릉도 주민들의 이야기’는 섬에서 살고 있는 울릉도 주민들의 진솔한 삶의 모습을 담았다. 또 그의 개인전에서 보여준 ‘승방일기’는 불교에 귀의한 젊은 스님들의 일상을 꿰뚫어본 산사의 일상이다. 이렇듯 그의 생활과 작업의 대상은 인간을 그리는 구도자의 모습인 셈. 경일대학교 사진영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오하이오주립대학 시각디자인학부에서 보도 사진을 전공한 후, 1999년부터 2001년까지 대구 미래대학 사진과에서 계약교수로 근무한 바 있다. 그후 뉴욕타임스 프리랜서 사진기자로 현장 사진을 찍어온 그는, 사진이란 도구로 인간의 본질을 탐구해 보려는 철학자였는지 모른다. “2002년 초에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5년만 내 일을 하게 해달라고요. 학교 강의란 것이 제자를 키우는 것은 30~40%고 나머지 60%가 학교 업무잖아요. 그러다 보니 자연히 사진 할 시간도 없어지죠. ‘사진을 너무 하고 싶다’면서 마흔 살이 되기 전에는 학교로 돌아갈 테니까 5년간은 자유롭게 사진 작업을 하고 싶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죠.” 아직 신혼의 깨소금 맛이 묻어나야 할 만 2년 차 새댁 강혜원씨와 연하 남편 석재현씨는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비 온 뒤 단단하게 굳어지는 땅처럼 이들의 사랑도 이 어려움을 하나하나 이겨내면서 더욱 강고해질 것. 한국 감옥에 있어도 쉽지 않을 텐데, 이국 땅에 면회를 가는 것이 쉬울 리 없다. 대구의 한 대학에서 디자인학부 조교수로 근무하던 중 이 학교 사진영상과 전임강사였던 석씨와 만나 2001년 10월 결혼에 골인한 강혜원씨는 아무리 현실이 힘들어도 자기 일에 대해선 결코 양보가 없는 남편을 원망하지 않는다고 했다. 한번은 면회를 갔을 때 추방 형식으로라도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화를 버럭 냈다고. 자동차로 중국을 횡단하며 사진을 찍을 계획인 석재현씨에게는 추방 형식으로 중국을 떠나면 다시는 중국에서 사진을 찍지 못하게 될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여전히 사진을 사랑하고 일에 강한 애착을 보이는 것이 안타까왔다. “중국 국내법을 어긴 만큼 현재 수감되어 있는 것에 대해서는 수긍을 할 수밖에 없죠. 딱히 뭐라 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우리 정부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아요. 물론 구금된 자의 가족으로서 정부의 노력을 모르는 바 아니니 감사함은 이루 말할 수 없죠. 하지만 곤경에 처한 사람의 가족이기 때문에 그들이 빨리 그곳을 벗어나길 바라는 것도 인지상정이라고 봐요. 어쨌거나 빨리 나오는 것이 급선무겠죠. 그것을 위해 계속 노력할 거예요.”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서는 그녀의 뒷모습에서 2003년 1월부터 멈춰진 그녀만의 세상을 보는 듯했다. 글 / 강석봉 기자  사진 / 박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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