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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경향(총 14 건 검색)

방송작가협회 “국회 마저 무시한 <나솔> 남규홍 PD…진심어린 사과 요구”
2024. 10. 24 17:33 화제
남규홍 피디가 결국 국감 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국방송작가협회는 성명서를 통해 “남 피디는 부당하게 내쫓긴 <나는 솔로> 작가들에게 진심을 다해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유튜브 캡처 SBS플러스·ENA 예능 프로그램 <나는 솔로>의 남규홍 PD가 24일 결국 국감 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남 PD는 이날 국회 국정감사 문화체육부 종합검사에서 방송 작가들의 저작권 침해 관련 증인으로 출석해야 했다. 남 PD는 그간 증인 출석 요구 연락을 받지 않는가 하면, 현재 해외 출장이라는 이유로 국정감사에 불출석했다. 이날 강유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그를 두고 “지난 18일 감사 발언 이후 언론 보도가 크게 나자 해외 출장이란 불출석 사유서를 보냈다”라며 “해외 출장이 도피성이 아니냐”는 의견을 제시했다. 한국방송작가협회(이하 작가협회)는 같은 날 그의 국감 불출석에 대해 “작가들에게 저지른 갑질에 대한 진상규명과 피해작가들에게 사과할 마지막 기회마저 저버린 것”이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남규홍 PD가 운영하는 촌장엔터테인먼트는 문체부가 권고하고 있는 프리랜서 작가들과 문화예술용역 서면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아 결과적으로 저작권자인 작가가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게 하여 저작권료 수급을 지연시키는 불공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에 문체부는 ‘예술인 복지법’ 제4조의 4(문화예술용역 관련 계약)를 위반했다고 보고 150만원의 과태료 처분을 내렸다. 작가협회는 성명서를 통해 “남 피디는 의문을 제기한 작가에게는 인신공격에 가까운 폄훼 발언을 일삼으며 프로그램 하차를 요구했다”며 “결국 견디다 못한 작가들이 모두 일터에서 쫓겨났고, 작가들이 떠난 자리에 남규홍 피디 자신과 6명 피디의 이름을 ‘작가’로, 남규홍 PD의 딸은 ‘자막 작가’로 이름을 올렸다”고 주장했다. 또한 작가협회는 남규홍 PD에게 “지금까지 방송작가에 대해 불공정행위를 저지른 점을 인정하고, 부당하게 내쫓긴 <나는 솔로> 작가들에게 진심을 다해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삼척발전소건설대책위 “시민은 발전소 건립 원한다” 국회·정부에 호소
2020. 12. 24 13:35 화제
삼척블루파워발전소의 준공을 바라는 플래카드가 삼척시내 곳곳에 걸려 있다.강원도 삼척시에 지어지는 삼척화력발전소와 관련해 주민 대 환경단체 간 또는 주민 대 주민 간 갈등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삼척화력발전소건설대책위원회는 최근 기자회견을 열고 ‘항만공사 중지명령 해지 및 삼척블루파워 발전소 조기준공’을 촉구했다. 대책위 측은 이번 기자회견을 통해 “2017년에 삼척블루파워발전소를 유치하려고 20여 차례 서울로 원정집회를 다니며 삼척시민의 염원과 지역경제활성화의 대의명분을 이끌어 낸 삼척블루파워발전소를 지금 일부 주민과 국회의원, 외부환경단체, 언론사들이 삼척 시민의 의지와 상관없이 삼척시민의 염원을 짓밟고 있다”며 “항만공사 중지를 통해 발전소 건설을 취소시키려고 흔들고 있다”고 주장했다. 대책위는 이어 “유치 당시 삼척블루파워발전소 자리는 동양시멘트(현 삼표)가 석회석을 캔 곳으로, 30만평이나 되는 폐광 부지를 어떻게 활용할지 다각도로 검토한 끝에 발전소를 건설키로 하고 사업을 추진했다”며 “폐광 부지를 존속시킬 경우 석회먼지와 석회침전물, 비산먼지 등 환경피해가 지속적으로 발생할 것이 우려되는 데다 일자리 없는 도시로 전락할 것이 뻔해 이를 막기 위한 마지막 자구책이었습니다”고 화력발전소가 지어지게 된 배경도 들려줬다. 삼척블루파워발전소의 완공을 바라는 플래카드가 삼척시내 곳곳에 걸려 있다.특히 환경단체가 문제로 삼고 있는 맹방해변 침식과 관련해 “2015년 8월 해양수산부가 전국 해변 250곳의 침식을 모니터링했을 때 이미 맹방해변은 C·D등급(연안침식관리구역)으로 지정됐다”며 “과거 언론 보도(2011년 KBS 환경스페셜)만 보아도 이미 오래전부터 맹방해변 침식이 심각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를 삼척블루파워발전소의 항만공사 탓으로 돌리는 것은 뭔가 다른 목적이 있는 행위”라고 전했다. “항만공사 착공 전부터 맹방해변 침·퇴적 모니터링을 전문기관에 용역을 맡겨 지속적으로 측정해 오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대책위 측은 오는 28일 김남극 회장을 비롯해 회원들이 항만공사 중지 해지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또다시 열고, 산자부와 국회·청와대 등에 대대적으로 탄원서를 올리겠다는 결의도 전했다. 하지만 환경단체들은 삼척블루파워발전소가 완공돼 가동되면 발전소의 온실가스 배출량이 막대할 것이라며 공사 중지를 요구하고 있고, 국내 주요 자산운용사 10곳도 ‘삼척블루파워발전소에 투자하지 않겠다’고 밝히는 등 삼척블루파워발전소의 건설은 상당히 진통을 겪을 전망이다.
화력발전소삼척
우리는 닮은꼴 가족 국회의원 원희룡·강윤형 부부
2008. 05. 23 화제
남산에는 봄이 가득이었다. 아이들 손을 잡고 나들이 온 가족들과 산책 나온 노부부,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 하나하나 미소 짓지 않는 얼굴이 없었다. 간간히 불어오던 바람마저 향기로운 어느 봄날, 국회의원 원희룡·강윤형 부부를 만났다. 총선이 끝난 지 일주일 만이었다. 3선 국회의원과 ‘선거꾼’ 아내 “선거가 끝나고 할 일이 더 많아요. 인사할 곳도 많고 당장 시작해야 하는 일도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벌써 세 번째 선거인데 갈수록 더 어렵네요.” ‘선거를 마친 소감’을 묻는 질문에 원희룡 의원(45)은 ‘선거를 시작하는 소감’ 같은 대답을 한다. 원의원은 서울 양천구에서 선거를 치렀다. 벌써 세 번째다. 처음 정치에 입문했을 때는 무언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선거를 치렀는데 그래도 그때가 편했다고 한다. 이제 마음을 좀 놓을 법도 한데 생각 많은 3선 국회의원은 여전히 고민이 많다. 정치를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붙잡고 어려운 얘기를 하는 유권자들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살기 어려운 얘기, 가슴 아픈 얘기, 가면 갈수록 더 많이 해주세요. 붙잡고 쏟아 붓기도 하고 무작정 욕을 하기도 하고. 힘들다기보다는 가슴 아플 때가 많죠.” 선거하며 많은 사람을 만나다 보면 이런저런 일을 많이 겪는다. 배려를 하는 사람도 있고 노골적으로 자기감정이나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도 있다. 스스로 머쓱해질 정도로 가열 찬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국회의원이 직업인 사람으로서 원 의원은 그게 더 좋다고 생각한다. “어느 유권자가 그러더라고요. 이미지가 강성인 것 같아 맘에는 안 드는데 찍을 사람이 없어 찍는다고. 찍긴 찍는데 아직 합격된 게 아니니까 정신 차리고 잘하라고. 굉장히 솔직한 말이잖아요.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올바른 정치를 요구하면서 민심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말 듣고 미안하고 머쓱하긴 했지만 표가 오긴 온다니까(웃음) 다행스럽고 감사했죠.” 이미 그 정도는 웃어넘길 만큼 내공을 쌓은 원 의원이지만 부인 강윤형씨(45)는 아내로서 안타깝고 가슴 아플 때가 많다. “현장에 나가면 민심을 바로 느낄 수 있어요.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분들도 계시고 비난하는 분도 계시고. 가족 입장에서 볼 때는 참 열심히 잘해보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 같은데 막상 평가가 따가울 때는 가슴 아프죠.” 신경정신과 전문의인 강윤형씨는 선거 때가 되면 선거 현장으로 진료실을 옮긴다. 사람에 대한 이해를 많이 해야 하는 정신과 의사로서 어떤 의미에서는 사람들을 만나며 공부를 한다. “선거기간 동안 진료실이 아닌 밖에서 사람들이 치열하게 살아가는 삶의 현장을 만나는 게 제 직업에도 많은 도움이 돼요. 사람들이 실제 이렇게 살고 있구나 느끼는 부분도 많고 공부도 많이 하죠.” 이제 유권자들 얼굴만 봐도 우리를 지지하는지, 반대하는지 감이 온다는 강윤형씨를 보며 원 의원은 “선거꾼 다 됐다`”고 하며 웃는다. 그러고 보니 벌써 정치인 아내 8년 차다. ‘정치인 아내’도 만만치 않은 직업이라는데 언제나 균형을 맞추는 게 제일 어렵다. 예전에는 선거를 앞두고 한 달 정도 병원에 휴직을 내고 남편 선거를 도왔다. 직업인으로서, 아내로서, 엄마로서의 역할을 1:1:1로 정확하게 균형을 맞출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어느 하나도 소홀하지 않으려고 하다 보니 몸도 마음도 고단할 때가 많다. 다행히 올해는 병원에서 안식년을 얻어 의사로서의 역할은 덜게 됐다. “너무 잘난 남편 만나서 고생한다며 어깨 두드리는 분들도 많아요. 어떤 의미에서는 고생이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명함 드리고 해야 할 것도 많고요. 그래도 전 이 사람이 왜 이 일을 시작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 정치꾼이 아니라 정말 할 일 하는 정치인이 된다면 가족에게도 그것만큼 큰 보상이 없다고 생각해요.” 정치는 잘 모르지만 원희룡만은 잘 압니다 서울대학교 82학번인 두 사람은 열아홉 살에 처음 만났다. 학교에서 열린 제주 향우회에서 인연을 맺어 스물한 살 때부터 연애를 시작했으니 소위 말하는 ‘CC(캠퍼스 커플)’였다. “처음 본 순간 ‘필’이 왔냐”고 물으니 원 의원이 대뜸 “여동생 같더라”고 대답한다. 그러니 강윤형씨로부터 돌아오는 말이 “당신이 더 어려 보였어”다. 덧붙여 지금은 많이 ‘삭았단다’. 티격태격하는 모습은 26년 전 연애 시절로 되돌려놓아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친구 같은 두 사람은 그렇게 26년을 함께해왔다. 이제 누구보다 남편을 잘 아는 강윤형씨다. 작년 대통령 경선 때도 남편의 지원 유세에 나서 그렇게 얘기했다. 정치인은 잘 모르지만 원희룡만큼은 누구보다 잘 안다고. 이제는 남편을 따라 선거운동도 하고 적극적인 지원 유세도 펼칠 정도가 됐지만 연애할 때만 해도 원 의원과 결혼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단다. “요즘 말로 치면 나름 ‘알파걸’이었어요. 지금은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된 것을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20대 중반까지 단 한 번도 결혼해서 누군가의 아내와 엄마로 살아간다는 걸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강박적일 정도로 오직 제 삶에만 집중했거든요. 연애할 때도 결혼 생각을 안 하다가 스물여섯인가 일곱 살이 됐을 때 마음을 먹었죠.” 원희룡 의원은 똑똑하기로 소문난 수재였다. 제주도에서 태어나 어려운 환경에서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서울법대도 수석으로 입학했다. 제34회 사법시험 역시 수석으로 패스했지만 수석과 수석 사이 방황도 많았다. “남편이 서울 법대를 수석으로 입학하고 8년 만에 졸업을 했거든요. 그것도 겨우. 맨 처음 문 열고 들어갔다 문 닫고 나온 거죠(웃음). 학생운동 하느라 중간에 노동운동 하러 인천 공장에 취직한 적도 있고요. 학교 다닐 때 유기정학 받고 경찰에 쫓기고, 맘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고향인 제주도에서는 목사가 됐다느니 머리 깎고 절로 들어갔다느니 죽었다느니 별별 소문이 다 돌았다. 제주도에서 서울법대를 수석 입학했으니 얼마나 말이 많았겠는가. 그렇게 목숨 바쳐 학생운동을 하던 원 의원의 신념을 강윤형씨는 높이 샀다. “생각해보면 당시 남편은 굉장히 안정적이고 승승장구하는 삶이 보장된 상태에서 기득권을 포기한 거예요. 목숨 걸고 학생운동을 한 거죠. 그때는 정말 고문받다 죽은 후배도 있었고 살벌했어요. 앞으로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모든 혜택을 접을 수 있고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죠. 이 사람의 그런 순수함에 반하게 되더라고요. 어느 순간, 내 앞에 있는 이 남자가 불구가 되든 어떤 모습이든, 원희룡이라는 이름에 붙어 있는 모든 배경과 조건에 상관없이 늘 이 사람과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어요.” 어떻게 생각해보면 반대로도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강윤형씨는 서울대 의대에 재학 중이었고, 마음만 먹으면 더 좋은 조건의 남자를 만날 수도 있었지만 그런 생각은 어디까지나 이들 부부를 모르는 사람들의 생각이다. 열아홉 살에 만나 스물한 살에 연애를 시작한 두 사람은 서 른살이 되던 해 1월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서로의 옆자리를 지키고 있다. 주특기는 요리, 목표는 비보잉 강윤형씨에게 남편이 집에서 가사 일은 많이 돕는 편인지 묻자 원 의원이 슬슬 아내의 눈치를 본다. 슬쩍 눈이 마주친 강윤형씨가 표정보다는 후한 점수를 준다. “도와줄 의도는 상당히 높으나(웃음) 바쁠 때는 집에 있는 시간이 상당히 제한적이어서, 정말 가정적인 아빠들에 비할 바는 못 돼요. 그래도 마음이 크니까 집에 있을 때는 어떻게 애들한테 점수를 딸 것인가 고민을 많이 하죠.” 부부에게는 두 딸, 서정(15)과 소영(13)이 있다. 원 의원이 두 딸에게 가장 점수를 많이 받는 종목은 바로 요리. 따로 배우거나 거창한 요리를 하는 건 아니지만 원의원의 ‘창조적 라면’은 딸들에게 인기가 좋다. “제가 냉장고에 재고가 오래 쌓여 있는 걸 못 봐요(웃음). 냉장고에서 놀고 있는 재료들 가지고 다양하게 개발을 해보는 거죠. 된장라면, 김치라면은 기본이고 가끔은 우유랑 크림치즈도 넣고, 꽃게라면도 만들어요. 재료는 별 볼일 없지만 음식 맛은 장담해요.” 아이들에게 점수 따는 리스트를 쭉 뽑아보니 ‘주말에 아빠가 요리한다고 부산스러울 때’ ‘같이 게임할 때’’ ‘엄마가 TV 못 보게 하는데 같이 봐줄 때’ 등등이다. 특히 ‘개그콘서트’는 가족 모두 좋아하는 프로그램이다. 강윤형씨 말로는 모두 입을 ‘하~’ 벌리고 본단다. 컴퓨터 게임은 원 의원이 예전부터 워낙 좋아했다. 종종 ‘스타크래프트’ 같은 e스포츠 중계현장에서 모습을 볼 수 있어 젊은 사람들 사이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갤러그’나 ‘제비우스’ 같은 기성세대 게임이 아닌 요즘 젊은 세대들의 게임을 즐기게 된 건 계기가 있었다. “제가 국회의원 하기 전 변호사 시절에 PC방연합회 고문 변호사를 했어요. 그때가 1998년도였으니까 스타크래프트가 막 들어와서 인기를 끌 무렵이었죠. 호기심이 생겨 하다 보니 재밌더라고요. 함께 일하는 스태프들도 젊은 친구들이 많고 젊은 유권자들도 많이 만나다 보니 대화거리도 많아졌고요.” 워낙 새로운 것에 호기심이 많은 원 의원이다. 1995년도였나, 검사로 처음 임관됐을 때 집에 비디오테이프 하나를 가져왔다. 당시 인기를 끌던 ‘`서태지와 아이들’의 공연 비디오였다. “우리가 서태지 세대는 아니잖아요. 그런데 그걸 가져와서 ‘하여가’ 춤을 연습하더라고요. 전 보수적이라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게 조심스러운데 남편은 빨리 받아들이고 쉽게 익혀요. 그런 부분에서 애들과 통하는 부분도 많고요. 특히 둘째는 게임을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강윤형씨가 “소정이가 좋아하던 게임이 뭐였지?”라고 하자 원의원이 금세 “요새는 서든 어택”이라고 대답한다. 아빠와 함께 게임하며 서로 경쟁하고 레벨도 따지고 그런단다. 딸과 함께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는 원 의원의 모습을 상상하는데 별로 어색하지 않다. 개구쟁이 같은 미소가 무척 잘 어울리는 원 의원이다. “올해는 비보잉 배우는 게 목표예요. 아직 교습소는 못 갔는데 계속해서 문화적인 도전을 하려고요. 저는 스포츠와 음악과 문화가 함께 가는 게 좋더라고요. 멋있잖아요. 지금 목표는 기본 동작이에요.” 의욕에 가득 찬 아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작 두 딸은 비보잉보다는 ‘동방신기’ 같은 아이돌 가수들을 좋아한다며 아쉬운 표정이다. 비보잉과 함께 요리도 본격적으로 배워보고 싶다는 원 의원의 말에 강윤형씨가 ‘창조적 라면’ 자랑을 한 번 더 한다. 그러자 뒤이은 원 의원의 한마디. “그러니까 만날 라면만 끓이는 줄 알겠네. 제 주특기는 탕수육과 전복탕입니다(웃음).”가정은 인생의 베이스캠프 언제나 ‘바쁜 아빠’보다 ‘젊은 아빠’가 되고 싶은 원 의원이지만 가족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크다. 한창 사춘기를 겪고 있는 두 딸에게는 특히 그렇다. “아무래도 아빠가 공인이니까 ‘원희룡 딸’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자신의 자존심이라든가 정체성에 상처를 받아요. 상처보다는 위협을 받는 거죠. 아직 어리고 민감한 시기니까. 저는 이제 얼굴에 ‘철판’을 깔았으니까 길 을 걸을 때도 사람들 손도 잡고 악수도 하고, 또 그렇게 해야 하잖아요. 같이 다닐 때는 아빠 때문에 익명성, 조용히 지나칠 수 있는 권리를 침해받는다고 솔직하게 불만을 표현하는 편이에요.” 특히나 선거 때는 원 의원뿐 아니라 강윤형씨도 아이들한테 관심을 쏟지 못한다. 잘 이해해주던 둘째도 이번에는 불만을 터뜨렸다. “선거기간 한 달 반 동안 혹시 엄마 아빠가 자기를 버린 게 아닌가 생각했대요. 아무도 자기한테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그렇게 얘기하는 걸 조용히 들어주고 인정해줬어요. 엄마 아빠는 네가 눈에 보일 때나 안 보일 때나 너무나 사랑한다고, 너는 둘도 없는 엄마 아빠의 보배라고 말해주고 달래줬죠.”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지만 어린 딸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아프다. 2006년도에는 ‘아버지 학교’도 졸업했다. 지방 선거로 바쁜 시기였는데 5주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교육을 마쳤다. 아내의 권유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와의 화해, 너무 오랜 기간 함께하며 잊고 있던 아내와의 사랑, 아이들과의 소통까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정말로 알고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아버지 학교에서 많은 것을 배웠어요. 국회의원으로서 세상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보다 아버지 학교에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오게 하는 것이 세상을 더 빨리 변화시키는 방법이겠구나 하고 생각했을 정도로 무척 좋았어요.” 아버지 학교에 다녀 온 후로는 매일 아침 집을 나설 때 그리고 저녁에 돌아왔을 때 아내와 딸들을 꼭 안아준다. 시간이 없을 때는 아이들이 잠든 머리맡에서 아이들을 위한 기도를 하고 아이들도 아빠를 위한 기도를 빼놓지 않는다. 지금 많이 부서지고 뒤틀린 가정의 모습은 원래 자리를 뺏겨버린, 혹은 잊어버린 아버지들의 모습에서 시작되는 게 아닌가 싶다. “모든 가정이 저마다의 문제를 갖고 있겠지만 서로 상처받은 관계들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행복과 에너지가 나와요. 가정은 베이스캠프예요. 삶을 살아갈 용기와 힘의 원천이거든요. 가정이 해체되고 불안정하면 사회도 불안정해져요. 저는 많은 특혜를 받은 사람이에요. 시골에서 사과상자 놓고 공부하다 출세한 사람이 더 가지려고 하면 안 되죠. 대신 제가 가진 재능, 제가 받은 자원들을 이 세상을 위해서 온전히 다 쓰고 가야 되잖아요. 이 세상을 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정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가정이 행복할 수 있는 정치를 하는 것이 제가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주 보고 웃는 두 부부의 모습이 많이 닮았다. 저절로 그려지는 한 가족의 모습에는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이들의 모습이 있다. 함께 살며 언제나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을 거다. 하지만 오랜 시간을 지나와 이렇게 마주 보고 미소 지을 수 있는 행복 하나로 충분하다.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우리 모두 이룰 수 있는 기적이다. ■ 글 / 노정연 기자 ■ 사진&사진 제공 / 이주석, 원희룡
정치인의 아내 된 심은하 국회의원 선거운동까지 직접 나설까?
2008. 02. 15 연예
심은하가 드디어 정치인의 아내가 됐다. 남편 지상욱씨가 자유신당의 공동 대변인을 맡게 된 것이다. 이는 이미 지상욱씨가 지난해 이회창 전 총재의 대선 출마를 측근에서 보좌할 때부터 예상 가능했던 일이다. 이로 인해 지상욱씨의 4월 총선에 점점 무게가 실리면서 심은하가 선거운동에 직접 나설지에 대해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지상욱씨, 자유신당의 새로운 ‘입’으로 활동 은퇴를 선언한 지 7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심은하. 그간 결혼, 임신과 출산을 겪으면서 간간히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긴 했지만 그녀의 얼굴을 보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심은하의 모습을 좀 더 자주 보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심은하의 남편인 지상욱씨가 정계에 입문하면서 심은하가 공식적으로 정치인의 아내가 됐기 때문이다. 지상욱씨는 이미 심은하와 결혼할 당시부터 이회창 한나라당 전 총재의 최측근으로 통했으며, 지난 대선을 통해 그 사실이 입증됐다. 지상욱씨는 대선 1년 전부터 이회창 전 총재의 사무실에서 비상근으로 근무하면서 인터넷을 통해서 ‘창사랑’을 관리하고, UCC 관련 업무를 책임지는 사이버 총괄 팀장을 맡아왔다. 또 이회창 전 총재가 선거운동을 할 때도 항상 최측근에서 그의 곁을 보좌하는 등 이 전 총재와의 남다른 친분을 과시하기도 했다. 지상욱씨와 이 전 총재의 인연은 2002년 대선이 끝난 뒤부터 시작됐다. 이 전 총재는 대선 참패 후, 미국 스탠퍼드대 연수 길에 올랐는데, 이때 지상욱씨가 함께 미국에 건너가 1년간 이 전 총재 옆에서 정성을 다해 모셨다는 것. 또 지상욱씨는 이 전 총재의 아들 이정연씨,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 노재헌씨와도 절친한 친구 사이로 알려졌다. 그가 정치와 인연을 맺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대선 당시 지상욱씨는 “이회창 전 총재가 아버님 같은 분이기 때문에 도와드리는 것뿐”이라는 말로 정치적 행보에 대한 언급을 피해왔다. 하지만 지난 1월 13일, 지상욱씨는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주도하고 있는 자유신당(가칭) 창단준비위원회 신임 공동 대변인에 임명되면서 본격적인 정치인으로서 첫발을 내딛었다. 심은하와 지상욱, 4월 총선 출마설은 ‘노코멘트’ 지상욱씨는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어깨가 무겁습니다. 잘해야겠습니다”라는 말로 대변인이 된 소감을 밝혔다. 하지만 여전히 4월 총선 출마설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있는 상태다. 지난해 11월 말, 둘째 아이를 출산한 심은하는 현재 육아에만 전념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외부 외출이 잦아지고, 몸매 관리를 위해 다이어트를 한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대중에 얼굴을 드러낼 준비를 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돌고 있다. 김한길 국회의원의 부인인 최명길씨가 그랬던 것처럼 지상욱씨의 부인인 심은하가 유세 현장을 돌면서 사람들과 직접 대면한다면 이 모든 것이 ‘표’로 연결될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오고 있는 상태. 주변 소문은 무성하지만, 정작 지상욱씨와 심은하 본인은 주변의 추측에 지극히 말을 아끼고 있다. 하지만 오는 4월 총선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남지 않았기 때문에 지상욱씨의 총선 출마 여부는 머지않아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심은하가 조만간, 스타가 아니라 정치인의 아내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 글 / 김민주 기자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
단단한 동지애로 쌓아온 37년! 국회의원 이재오·추영례 부부
2008. 02. 13 화제
한나라당 이재오 의원은 국회의원 한 사람을 두고 얼마나 많은 평가가 내려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 평가에는 호불호가 엇갈리겠지만, 어쨌든 사표(師表)로 삼을 만한 주인공임에는 이견이 없을 듯 하다. 바야흐로 정치 인생 제2막을 여는 이재오 의원과 그의 든든한 동지이자 인생의 동반자 추영례 여사와 함께한 과거 그리고 미래. 밖에서는 대쪽 같은 남편, 집에서는 시트콤 주인공 재야운동가에서 15대, 16대, 17대 국회의원(서울 은평구 을)으로 연속 당선되고 한나라당 원내총무, 사무총장, 최고의원을 두루 거친 한나라당 이재오 의원(63)은 국정감사의 모범생이자, 서민 정치인으로 손꼽혀왔다. 그리고 이제는 ‘제17대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을 이끈 공신으로 통한다. 이재오 의원의 집을 찾은 날은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특사 자격으로 러시아 방문을 하루 앞둔 지난 1월 19일.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와의 갈등으로 연일 뉴스에 오르내리는 이 의원에게 묻고 싶은 질문도 많았지만, 이날의 주빈(主賓)은 좀처럼 매스컴에서 만나기 힘든 부인 추영례 여사(59)였다. 할 말은 하고야 마는 성격 탓에 ‘저격수’라는 별명을 얻고, ‘검소한 국회의원’으로 불리는 남편과 40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한 동반자에게 “남편은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을 먼저 건넸다. “정치인 이재오는 언제나 악역을 담당하기에 강한 이미지로 비춰지지만, 제게는 강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에요. 집에서는 마치 시트콤의 주인공처럼 재미있어요. 그렇다고 아주 자상한 남편이랄 순 없지만, 아내 입장에서 남편에게 서운한 감정은 이미 오래전에 접었으니까요. 우리는 동지적인 관계라고나 할까요.” 양복 차림으로 집으로 돌아온 이 의원이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겠다며 안방에 들어간 사이 추 여사가 들려준 얘기다. 알려진 대로 이재오 의원과 추영례 여사는 부모가 연을 맺어준 사이다. 1940년대 일본에 부역을 나갔다가 만난 양가 부친은 1969년 결혼할 때가 된 서로의 자녀들을 소개해줬고, 2년 뒤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다. 추 여사가 들려준 ‘동지적인 관계’라는 단어에 불쑥 두 사람이 결혼에 이르게 된 일화가 떠올랐다. 아직 본격적인 교제가 시작되기 전이었다. 하루는 추 여사가 이 의원을 만나러 민주화수호청년협의회 사무실에 갔더니 ‘모처럼’ 데모가 없는 날이라 동대문운동장에 야구를 보러 갔다고 했다. 내친 발걸음에 야구장으로 향한 추 여사는 수백 명의 인파 속에서 단숨에 이 의원을 찾아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출현보다 수많은 사람 중에서 자신을 단번에 발견한 데에 놀란 이 의원은 이어지는 이야기를 듣고 무릎을 쳤다. “보나마나 돈이 없을 테니까 외야석 구석 자리에 앉아 있을 줄 알았다”는 것.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미 평탄치 않을 사람이라는 걸 알았어요. 때문에 집에서는 반대를 많이 했지만 결혼을 결심했고요. 그때는 그런 모습이 참 멋있어 보였어요. 자기 가치관이 또렷해 보였거든요. 제게도 영웅 심리가 좀 있었던 모양이에요(웃음).” 잘 풀릴 인연이었는지, 야구장에서 보여준 추 여사의 기지에 이 의원도 단단히 반했다. 그 역시 험난한 인생을 함께할 만한 사람임을 그때 직감했다는 후문이다. 정치인 아버지와 힙합 가수 아들의 하모니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는 부부의 결혼식은 1971년 10월 9일에 치러졌다. 결혼식 당일 수배령이 내려진 신랑의 처지가 어이없었는지 자리를 지키던 안기부 직원이 “오늘은 봐주고 내일부터 잡을 테니 알아서 도망가라”고 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단식농성 중에 달려와 허겁지겁 식을 올리는 신랑도 신랑이지만, 마음껏 행복을 뽐내지 못하는 신부의 처지가 그의 감정을 자극했으리라. 부부는 딸 둘을 낳았다. 과거 10년간 교단에 섰던 국어교사 출신 아버지는 ‘곱게’ 자라라고 큰딸은 ‘고은’으로, 작은딸은 큰딸과 이름을 맞추고자 ‘은별’이라고 이름 지었다. 딸들을 찾을 때면 자랑스럽게 ‘고은별’이라고 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자랑스러움이 배어 있다.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장녀 이고은씨(36)는 현재 동생 이은별씨(35)와 함께 패션 관련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오는 3월에 출산을 앞둔 차녀 은별씨는 10년 이상 여성지에서 생활 파트를 담당하던 기자 출신이다. 마감과 야근의 고초를 누구보다 잘 안다며 추 여사가 눈을 찡긋한다. 큰누나와 열두 살 터울이 지는 막내아들 이민호씨(24)는 ‘상황상 어쩔 수 없는’ 늦둥이라고 했다. 정작 당사자인 이 의원은 아무렇지 않게 얘기했지만, 듣고 보니 그 이유가 어째 좀 슬프다. “제가 감옥 갔다 와서 낳은 아이예요. 그 사이에는 낳을 수가 없었잖아요(웃음). 재야운동부터 시작해서 치열한 터널을 지나고 돌아보니 어느덧 아이들이 장성해 있더군요. 아이들이 한창 자랄 때 감옥에 있거나 집을 비우고 못 본 것이 많이 아쉽습니다. 어쩌다 친정에 들르는 딸들한테 애정 표현은 잘 못합니다만, 정말 각별하게 사랑합니다.” 이 의원은 딸들은 정치에 관심이 없을 거라고 잘라 말하지만, 아닌 듯하다. “아버지가 너무 잘 알고 있으니 말을 안 할 뿐”이라는 추 여사의 말이 정답인 것 같다. 1992년 14대 총선 때 은별씨는 직접 그린 편지지에 아버지를 지지해달라는 글을 써서 군인들에게 보냈다. 무려 1천 통이라니 억지로 시켰으면 금방 질려서 도망갈 법한 양이다. 참고로 당시에는 불법선거운동이 아니었다. 한 가지 추가한다면 이후 은별씨는 군인아저씨들의 답장을 엄청 받았다. 이후 15대 때는 고은씨가, 17대에는 아들 민호씨가 선거운동원을 자청해 아버지를 도왔다. “자식 농사요? 아직은 AS 기간이죠(웃음). 애들이 표현은 잘 안 하는 편인데, 툭툭 던지는 말 속에 아버지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어요. 어쩌다 ‘인터넷에 아빠 관련 글이 많이 올라오니까, 잘 살피세요’라는 얘기도 해요.” 제대 후 복학해 이제 대학 3학년인 영문학도 민호씨가 마침 집에 있었다. 군대 가기 전에 한 번, 다녀와서 한 번. 아버지와 지리산 종주를 한 뒤 그 기록을 미니홈피에 고스란히 남겨놓았던 주인공이다. 그의 장래희망을 물었더니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민호씨는 무명 힙합 가수라는 것. 랩경연대회에서 1등을 하고, 타 대학 행사에 초청되어 공연을 할 정도라니 그 세계에서는 실력을 인정받은 모양이다. 정치인 아버지와 힙합 가수 아들은 아닌 듯 닮은 구석이 있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국회의원 안사람 소리 듣는 것만으로 행복해 서울 은평구 구산동 000-00번지 실평수 23평의 단층 주택. 지난 1990년 그동안 모은 돈 8백50만원에 대출금 2천만원으로 장만한 이 집에서 이재오·추영례 부부는 3남매를 키웠고, 두 딸을 출가시켰다. 딸들이 시집간 덕분(?)에 비로소 ‘내 방’이 생긴 이 의원은 딸들이 물려준 화장대를 요긴하게 쓰고 있었다. 번지수를 검색해 지도를 뽑아갔음에도 이재오 의원의 집을 찾는 데 꽤나 힘들었다. 고만고만한 집들이 모여 있는 주택가라 그럴 수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3선 국회의원의 집이라는 선입견에 그 동네에서도 제일 좋은 집으로 자꾸만 시선이 갔기 때문인 듯하다. 결국 수행비서관과 통화 끝에 “○○빌라 옆 전봇대 두 개 샛길 막다른 집”을 찾았을 때는 반가움보다는 주차를 어디에 하면 좋을지, 난감함이 먼저 몰려왔다. 이런 남편을 매스컴에서는 ‘검소한 국회의원’으로 선정해 보도하지만, 솔직히 아내 입장에서는 그저 달가울 것 같지는 않았다. “예전에 남편이 갇혀 있을 때는 ‘남편이 나오면 좋아지겠지’라고 생각했고 나오고 나서 한 차례 낙선한 뒤에는 ‘국회의원이 되면 좀 나아지겠지’ 했어요. 그런데 15대 당선 이후에 보니 똑같은 거예요. 국회의원이 된 뒤 비리와 연관되지 않도록 조심하려면 잘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지금은… 이게 편해요. 정치인 돈 얘기 나올 때 떨릴 일도 없고요. 경제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런 불편함이 없어요. 국회의원 안사람 소리 듣는 것만 해도 감사하고 행복한 거죠.” “사람들이 들으면 국회의원 안사람이 엄청 좋은 줄 알겠다”고 이 의원이 한마디 하자 대번에 “그렇지 않으면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는 거예요”라고 받아치는 추 여사는 그야말로 ‘프로급 국회의원 안사람’이다. 추 여사는 3선 의원이 되면서 지역구보다는 중앙당 관리에 신경을 써야 하는 남편을 대신해 민심을 챙기고 그들의 소리를 전하는 역할을 지금껏 기꺼이 해왔다. “오늘 당신 무슨 얘기 들었어?”는 하루를 마감하는 부부의 일상 인사가 된 지 오래다. 아이를 둔 여성을 위한 보육비 지원, 신혼부부를 위한 주택 마련 대책, 통신요금 인하 등 민생 경제와 관련된 향후 정책을 그려나가는 데 추 여사의 도움이 컸다. “주거 목적으로 마련한 집 한 채로 인해 ‘집 팔아 세금 내게 생겼다’는 분들을 위한 대책도 마련 중이고, 정체 예방을 위해 이미 건설비를 뽑아낸 고속도로의 경우 명절 때 통행료를 무료로 하는 방안도 추진할 방침입니다. 주부들이 피부로 느끼는 민생경제 손질을 하려고 합니다. 변함없이 내조하고 아이들도 잘 키워낸 아내의 노고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그쪽으로 관심이 더 갑니다. 표현은 잘 못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아내에게 고마워하고 있어요.” 4월 총선을 앞두고 여기저기서 출마 의사를 밝히는 소식이 연일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국회의원을 꿈꾸는 당사자는 일단 제쳐두고, 그들의 아내에게 전하는 추 여사의 조언을 듣고 싶었다. “솔직히 부인의 입장만 따지자면, 남편이 출마하지 않는 게 행복할 거예요. 남편이 국회의원이 되는 순간부터 편안하게 살겠다는 의지는 버리고 새로운 삶을 받아들여야 해요. ‘내가 국회의원 아내니까 인사를 해야지’가 아니라, 지역민들에게 봉사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해야겠죠. 4년 임기 동안 자신의 사생활을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지 않다면, 남편이 출마하지 못하도록 꼭 붙잡으라고 말하고 싶어요.” 전면에 나서지 않는 조용한 내조자로 알려진 추 여사의 활약상은 은평구 내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다. 농협에서 운영하는 노래교실에 갔다가 아이디어를 얻어 시작한 은맥여성문화센터가 올해로 설립 16년째를 맞았다. 지역 여성들의 여가 선용과 취미 활동을 도모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평생교육원으로 지금은 은평구 어머니들의 사랑방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40대에 처음 센터를 찾은 분들이 이제 60대가 됐어요. 서로의 생활과 애환을 다 아는 사이가 된 거죠. 그분들에게는 우리가 정치인이 아닌 그저 매일 보는 이웃이죠. 최근엔 센터 덕분에 우울증을 치료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가 가장 뿌듯했어요.” 정치 인생 20여 년, 더 낮은 자세로 이명박 캠프의 대선 승리에는 추영례 여사의 노고도 녹아 있다. 당내 경선을 앞두고 상대 후보에 비해 상대적으로 지지기반이 약했던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는 의원 그룹을 형성하기 위해 이재오 의원은 동료 의원들을 집으로 초대해 식사 대접을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이명박 후보가 왜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지를 설파했다. 손님상이라고 해봐야 그가 평소 먹는 대로 된장찌개, 생선구이가 오르는 소박한 찬이었지만, 특급 호텔의 고급 정찬보다 값진 위력을 발휘했다. 단순히 선거운동을 하고자 함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내면의 의지가 있음을 피력하는 데 그만한 것이 없었다. 80명에 가까운 이들의 식사를 손수 차려낸 아내에게 그는 이제야 “우리 집사람 고생했지”라고 툭 한마디 던진다. 단식농성 중에 뛰어나와 우여곡절 끝에 올린 이재오·추영례 부부의 결혼식 사진(오른쪽). 그리고 노래자랑 무대에 오른 최근의 사진(왼쪽).이명박 후보의 당선이 확정된 뒤 그가 가장 먼저 떠올린 말은 “그럼 이제는 뭘 해야 하나”였다.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도 실감이 안 날 정도였다는 그는 이내 다음 목표를 위해 또다시 시동을 걸었다. 제17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한반도 대운하 태스크포스(T/F) 상임고문 역할로 ‘한반도 대운하’ 추진의 선봉에 섰다. 앞서 그는 지난 추석 때 부산 을숙도에서 강화도까지 강길 따라 563km를 자전거로 달리며 한반도 대운하 추진의 밑그림을 다졌다. 현재 한반도 대운하 프로젝트는 공중파 TV에서 심야 토론을 벌일 만큼 찬반 논쟁을 불러오고 있는 이슈다. “이름을 붙이다 보니 ‘한반도 대운하’가 됐는데, 사실은 강길 따라 옛날 뱃길을 복원한다는 개념으로 보시면 됩니다. 예전에는 마포에서 충주까지 새우젓배가 다녔는데, 지금은 못 다니지 않습니까. 농축산업 폐수로 오염된 하천의 퇴적물을 거둬내고 옛날의 뱃길을 복원해 막힌 곳의 물길을 다시 잇는 겁니다.” 이 의원은 한반도 대운하의 난코스로 지목된 문경새재의 한 산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터널을 뚫어서 물을 위로 끌어올려 잇는 공사를 해야 하는 그 산의 이름은 배 주(舟), 달릴 월(越)을 써서 ‘주월산(舟越山)’인데, 이는 조선시대 고승 무학대사가 “이 산을 배가 넘어다닐 것이다”라고 예언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지선 열두 대를 강에 띄우면 트럭 4천5백 대 분의 물량을 실을 수가 있습니다. 물류뿐 아니라 강을 끼고 발달한 역사와 옛 문화를 복원해 우리나라 문화관광벨트로 만들 계획도 있습니다. 단순 토목공사가 아니라 나라 구석구석을 다시 일으키는 일종의 국토 재창조 개념으로 보셨으면 합니다. 한반도 대운하라기보다는 ‘한반도 물길 잇기’, ‘물길 따라 뱃길 잇기’가 더 적확한 이름이 아닐까 싶습니다.” ‘국회의원으로 이재오 뽑길 잘했다’, ‘국회의원이 되려면 이재오처럼 하라’는 소리를 듣겠다는 심산으로 뛰어든 정치 인생이 20년이 가까워오고 있다. 그동안 그의 꿈은 ‘좋은 대통령을 만들자’로 바뀌었고, 지난 대선을 치르며 그 꿈이 실현됐다고 믿고 있다. ‘세상은 거저 얻는 것이 없다. 내가 싸워서 쟁취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던 청년 시절의 다짐은 근래 서서히 궤도를 수정하고 있다.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정권 교체가 이루어짐으로써 지금까지 해온 제 투쟁의 역사는 끝났습니다. 투쟁의 철학으로 세상을 바꿨으니 이제 섬김의 역사로 세상을 바꾸려고 합니다. 보다 살기 어려운 사람, 소외된 사람들을 섬기는 자세로 더 낮게 임할 것입니다.” 이명박 후보의 대통령 당선 이후 이 의원은 과거는 청산의 대상이 아니라 화해의 대상이라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지금까지를 정치 인생 1단계라고 말하는 그에게 바로 오늘은 정치 인생 제2막의 시작이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든든한 ‘동지’이자 부인 추영례 여사가 있다. “남편이 유배 생활을 하면서 고생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전 비굴한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남편이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요. 언제나 남편이 자랑스러운 건 ‘저 사람이 왜 그랬을까’ 싶다가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역시 냉철한 판단을 했구나’ 하는 순간이 오기 때문이에요. 그럴 때마다 참 대단하다 싶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그때(스무 살 시절)는 철없을 때라 남편이 참 멋있어 보였다”고 말하던 추 여사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리고 “또렷한 가치관을 가진 남자여서 좋아 보이더라”는 얘기도. 이재오 의원의 그 한결같음은 지척에서 그의 무게 중심이 되어주는 아내 추영례 여사의 ‘단단한 동지애’가 있기에 더욱 빛을 발하는 듯하다. ■ 글 / 장회정 기자 ■사진 / 이주석, 이재오 의원실 제공
20평 남짓한 아파트에서 20년넘게 사는 소박한 국회의원 김문수 가족
2006. 05. 01 화제
“사치할 줄 모르는 아내와 세계의 오지에서 사회봉사 희망하는 딸이 있어 행복합니다” 국회의원 김문수가 경기도지사 출마를 선언했다. 그의 출마 선언을 두고 “행정 경험이 없다”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지만 아내 설난영씨는 “10년 넘게 정부기관과 국정감사에서 씨름을 했기 때문에 결코 경험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며 독려했다. 노동운동을 하면서 만난 아내 설난영씨와 사랑스러운 외동딸 동주씨, 세 사람이 20년 넘게 살아온 부천 자택에서 김문수 의원 가족을 만났다. “경기도는 베이징과 도쿄와 맞설 수 있는 우리나라 경쟁력이죠” 봄꽃이 흐드러지게 핀 4월 말, 경기도지사 출마를 선언한 김문수 의원(54, 한나라당)을 부천시 소사구 자택에서 만났다. 아파트 입구에 핀 개나리처럼 소박한 김 의원 집에 들어서자 김 의원과 부인 설난영씨 그리고 외동딸 동주씨가 반갑게 맞았다. 소박해 보이지만 깔끔하게 정돈된 집안에는 대형 벽결이 TV도 고풍스러운 가구도 없었다. 대신 소파와 테이블 밑에는 국내에서 간행되는 온갖 신문과 잡지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책들이 정리되어 있어 무척 인상적이었다. 차 한잔을 앞에 두고 김 의원과 마주 앉은 뒤 경기도지사 출마 이유를 들어봤다. “경기도지사는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직접적인 계기는 수도이전 문제지요. 정부는 수도이전 위헌 판결 이후에도 수도를 분할해서 지방으로 옮기려 하고 있어요. 경기 지역은 중국의 상하이와 베이징, 일본의 도쿄와 맞설 수 있는 대한민국의 경쟁력인데, 정부가 관공서와 공장은 지방으로 옮기려고 하면서 정작 규제를 풀지 않아 성장이 더뎌지고 있어요. 대한민국 중심부인 경기도에서 이 나라 경제를 발전시키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게 앞으로 제가 할 일이죠.” 지금은 많이 바뀌었지만 90년대만 해도 많은 정치인이 자신의 집에서 식객을 맞았다. 지금 김문수 의원이 살고 있는 20평 남짓한 아파트에도 한때 스무 명이 넘는 식객들로 북적였다. 그때마다 집에 있는 솥으로 밥을 하는 게 모자라 옆집 솥까지 빌려 정신없이 밥을 하고 손님을 받던 부인 설난영씨는 남편의 경기도지사 출마 선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남편은 지방자치제도가 시행되면서 국회의원으로서 어떤 한계를 느낀 것 같아요. 물론 행정 경험이 없기는 하지만 도정은 단순히 사기업과 달리 공적인 역할이잖아요. 공직자로서 기본적인 국가관과 봉사관 그리고 청렴한 정신을 갖고 있어 잘해낼 수 있으리라 믿어요. 또 국회의원으로서 10년 넘게 정부기관과 국정감사에서 씨름을 했기 때문에 결코 경험이 적다고 말할 수도 없구요.” “아내는 사치스러운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에요” 김문수 의원과 설난영씨는 노동운동을 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당시 설난영씨는 구로공단 세진전자 노조분회장과 금속노조 남서울 지역지부 여성부장을 맡고 있었다. 노동운동 동지로 처음 만났을 때, 두 사람은 의식적으로 연애감정을 피했다. 그러다 제5공화국 초기에 김문수 의원이 계엄당국에 쫓기고 있을 때 그녀의 자취방에 피신을 하게 되면서 가까워졌다. “부인의 어떤 모습에 반해 청혼을 하게 됐냐?”고 물었다. “아내는 지금도 그렇지만 화려하거나 사치스러운 것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에요. 체구가 작지만 꿋꿋한 모습이 앞으로 험한 길을 함께 갈 수 있겠구나 생각했죠. 당시 저는 아내가 무척 마음에 들었는데, 정식으로 청혼하기 전까지는 일부러 무관심한 척했었어요. 계엄당국을 피해 어쩔 수 없이 아내의 자취방으로 피신한 게 사실 딴 뜻도 조금은 있었어요.(웃음) ” 막상 김문수 의원이 프러포즈를 했을 때 설난영씨는 청혼을 거절했다. 당시 설난영씨는 노동운동을 하면서 결혼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설난영씨가 청혼을 거절한 진짜 이유는 그때까지도 김문수 의원을 남자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남편이 정식으로 청혼을 하더라구요. 그전까지 ‘친절하고 성품이 참 좋은 사람이구나’ 정도로만 생각했지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던 터라 거절했죠. 그리고 당시 전 ‘김문수’이기 때문에 결혼을 하지 않으려고 한 게 아니고 노동운동에 대한 신념이 워낙 강해서 결혼에 대한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어요.” 설난영씨가 청혼을 거절했을 때, 김문수 의원은 잠깐 동안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이후 김 의원은 자신의 노동운동에 대한 신념과 설난영씨에 대한 사랑을 끈질기게 전했다. 결국 지난 1981년 ‘친절하고 성품이 좋은’ 남자와 ‘화려하거나 사치스러운 것과 거리가 먼’ 여자는 결혼에 골인했다. 결혼식은 두 사람의 이력만큼이나 독특했다. 하객들에게 전해지는 청첩장도 없었으며 화려한 신부의 드레스도 볼 수 없었다. 더욱이 결혼식장 앞에는 관광버스가 아닌 전경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당시를 회상하는 김문수 의원은 “전경들은 우리가 결혼식을 가장하고 시위를 벌이려는 줄 안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내에게 웨딩드레스를 입히지 못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날 결혼식에 온 하객들 대부분이 힘든 노동자들이었어요. 현실적으로 화려하게 결혼식을 치를 여유도 없었지만 여러 사람에게 귀감이 될 수 있는 검소하고 조용한 결혼식을 올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아내에게 ‘화려한 웨딩드레스 대신 한복을 입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더니 저도 한복을 입으면 입겠다고 하더라구요. 결국 저는 양복을 입고 아내는 웨딩드레스 대신 원피스를 입고 결혼식을 올렸죠.” 여러 사람에게 귀감이 될 수 있는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야 누가 뭐라고 하겠냐만은 여자에게 웨딩드레스는 각별한 의미를 갖는 것도 사실이다. 설난영씨에게 “드레스를 입지 못한 게 아쉽지 않냐?”고 묻자 그녀는 “전혀”라고 잘라 말했다. “저는 드러나는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가장 중요한 것은 두 사람 마음이잖아요. 웨딩드레스를 못 입어서 남는 아쉬움은 없어요. 노동운동을 할 때 몸에 배서 그런지 반지나 목걸이 같은 것도 거추장스럽게 느껴져서 안 좋아해요. 그렇다고 자신의 외모를 가꾸는 여성을 폄하하려는 생각은 없어요. 물론 과거 노동운동을 할 때는 화장을 하고 외모를 가꾸는 여자를 부정적으로 생각했지만 지금은 사회가 많이 변했잖아요. 오히려 지금은 여성으로서 여성의 외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 장점이고 특권이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가족들이 서로의 인격을 존중해주고 너무나 합리적인 김문수 의원이지만 결혼 초기에는 다분히 유교적인 사고로 ‘집에서 아내는 남편보다 지위가 낮다’는 생각을 했다. 덕분에 두 사람은 신혼시절에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싸웠다. “결혼 초기에 누구나 그렇듯 서로의 주장을 많이 내세운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대부분의 부부싸움은 제 잘못 때문에 비롯된 게 많았어요. 하지만 시간은 지나면서 기다릴 줄도 알게 되고 상대방에게 내 의견을 관철시키는 기술도 생기더라구요.” 김문수 의원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자신의 주장만 내세운 것에 후회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참아준 아내에게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하지만 설난영씨는 신혼 초 다툼은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었을 뿐이라고 한다. “부부싸움에도 기술이 필요하다는 말이 맞더라구요. 어쩌면 신혼 초기에 남편도 여성 문제라든가 여타 다른 문제들에서 자기주장을 내세운 게 정말 몰라서 그랬을 수도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부부간의 대화가 필요한 것 같아요. 남편은 자신이 모르던 부분에 대해 솔직히 인정하고 개선하려는 편이었어요.” “동주 덕에 험한 일 한번 안 당하고 노동신문 배포 했어요” 김문수 의원의 집, 식탁이나 냉장고 응접실 곳곳에는 외동딸 동주씨의 어린 시절 사진이 꽂혀 있다.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동주씨는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는 스물다섯 살 대학생이다. 지금은 성인이 됐지만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있는 아버지 때문에 어린 딸이 불편하지는 않았을까? “아버지나 어머니 모두 ‘정치인의 딸로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한다’와 같은 주문이 없어서 특별히 불편한 점은 없었어요. 다만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선배나 교수님들이 아버지가 이런 일(정책) 하시는 것 등을 물어보는 게 조금 부담스럽기는 해요.” 무남독녀 동주씨가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것은 노동운동가 부모를 둔 것과 무관하지 않다. 특이하게도 동주씨는 이미 다섯 살 때부터 노동운동에 참여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설난영씨는 어린 동주를 데리고 한때 노동자 신문을 배포하기도 했다고. “동주가 한 다섯 살 때쯤 구로동 일대는 사복경찰의 감시가 삼엄했어요. 갑자기 거리에서 소지품 검사를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죠. 그 당시 제가 맡은 일 중에 하나가 노동자 신문을 배포하는 건데, 너무 감시가 심해서 한 손에는 신문을 담은 어린이용 운동화 주머니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어린 동주 손을 잡고 노동신문을 배포했어요. 동주 덕분에 험한 일 한번 안 당하고 무사히 신문을 배포할 수 있었어요.(웃음)” 동주씨는 열혈 노동운동가 부모님을 둔 덕에 노동신문 배포 외에도 많은 노동운동에 참여(?)했다. 어린 시절 동주씨는 엄마와 함께 시위 현장에 자주 따라다녔는데, 그때 엄마가 부르던 민중가요를 곧잘 따라 불렀다고 한다. “얼마 전 전태일 열사 어머니를 동주와 함께 만났는데, 그분이 동주를 알아보시고 ‘너 참 노래 잘했는데’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더라구요. 당시 마땅히 아이를 봐줄 사람도 없었고, 동주도 곧잘 민가를 잘 따라 부르며 주위 사람들에게 귀여움을 많이 받아서 시위할 때 자주 데리고 다녔어요.” 시위 현장 곳곳에서 마스코트처럼 앙증맞게 민가를 부르던 동주씨는 어느 순간부터 노래만 하라고 하면 울어버렸다. 설난영씨는 농담처럼 “어렸을 때 어떤 충격을 받아서 노래를 안 부르는 것 같다”며 걱정했다. 하지만 동주씨는 “특별히 무슨 일이 있어서 안 부르는 게 아니고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게 부끄러워서 안 부르는 것”이라며 머리를 긁적였다. 설난영씨는 그런 딸의 머리를 연신 쓰다듬으며 “다른 아이들처럼 많이 보살펴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얘기를 넌지시 했다. “동주는 어렸을 때 탁아소에 맡겨 길렀어요. 그 시절 탁아소는 지금 같은 놀이방 시설도 아니고 돌봐주는 사람 역시 유아교육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었어요. 동주가 성격이 원만하고 사회성도 좋아서 다행이지만 어린 아이를 어미 품에서 키우지 못한 게 늘 마음에 걸리네요.” 너무나 예쁘고 한편으로 미안한 딸이지만 그런 딸 때문에 남편과 다툴 때는 그 미안한 마음마저도 사라진다고. “아직 대학생이지만 성인이다 보니 집에 늦게 들어올 때가 있잖아요. 그럼 저는 걱정이 되서 남편에게 ‘들어오면 야단 좀 치라’고 하는데, 돌아오는 말은 ‘자기 알아서 하겠지’가 전부예요. 악역은 항상 제 담당이고 남편은 항상 좋은 역할만 맡고 있어서 그때만큼은 그렇게 얄미울 때가 없어요.” 동주씨에 대한 기대에 있어서도 김문수 의원은 특별한 말이 없었다. 반면 설난영씨는 동주씨가 선진국의 사회복지를 잘 배워서 학자가 됐으면 좋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하지만 정작 동주씨는 아프리카와 같은 오지에서 사회봉사를 하고 싶다고 한다. 그렇게 모녀가 의견을 나누는 동안 김문수 의원에게 “왜 동주씨 동생을 갖지 않았냐?”고 물었다. “70, 80년대 노동운동은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었어요. 대부분 결혼도 안 하고 결혼을 하더라도 정관수술을 하는 노동운동가 가정이 많았어요. 그에 비해 우리는 서점도 운영하고 아이까지 있다보니까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괜히 미안한 마음이 생기더라구요. 그래서 동주 동생은 포기했어요.” 누가 ‘대접’해주지 않아도 묵묵히 책임을 다하는 일꾼 김문수 의원의 아버지는 가족과 개인적인 영위보다는 문중 제사나 비석 세우기를 더 가치 있게 여기던 분이셨다. 문중의 대부이던 그의 아버지는 월급의 대부분을 집안 살림보다 손님 접대로 사용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친척의 빚 보증을 서는 바람에 그의 가족들은 판잣집과 초가집을 전전해야 했다. 어지간해서 기가 죽거나 주눅이 들지 않던 어린 김문수도 선생님이 가정방문을 하는 날이면 무슨 구실을 만들어서라도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고. “제가 살던 판잣집과 초가집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싫었어요. 어린 시절 판잣집에 대한 열등감은 성인이 되서도 한동안 계속 됐죠. 하지만 가난 때문에 스스로 가치가 떨어진다거나 부끄럽게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가난했던 김문수 의원은 대학에 입학하고 서울에 올라와 역시 판잣집에서 자취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막연히 동경하던 서울에서 본 판자촌과 거지들의 모습에 그는 적잖이 놀랐다. 그러면서 대학생 김문수가 갖고 있던 가난에서 오는 열등감은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변해갔다. “제가 느끼는 사회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당시 할 수 있는 일은 데모와 위장취업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스무해 넘게 먹물만 먹고 살아와서 단순 육체노동은 어린 꼬마 여자아이보다 경쟁력이 없었어요. 그래서 돌파구를 찾은 게 자격증이었죠.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자격증 대부분 그때 공장에서 일하기 위해 취득한 거예요.” 2년 동안 무려 7개의 자격증을 취득한 김문수 의원은 이후 한일공업주식회사에서 보일러 조수로 취직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노조에 가입하고 첫 감옥 생활을 경험했다. 시위를 하다가 경찰에 쫓기고 구속과 출감을 반복하던 김문수 의원은 일기 쓰기는 물론이고 사진 찍는 것조차 싫어했다. 그에게 “여전히 사진 찍는 것이 어색하고 싫냐?”고 묻자 그는 “즐겁지는 않다”고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부인은 “밝게 웃는 사진이 별로 없다”며 핀잔을 주고 딸은 웃는 모습을 직접 해 보이기도 했다. 3시간 남짓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국회의원 김문수 가족은 말 그대로 ‘옆집’ 아저씨, 아줌마, 동생으로 변해 있었다. 그와 함께 30년 가까이 목숨을 걸고 노동운동을 하다가 이제는 열혈 우파 정치인의 한사람이 된. 그래서 기억 한편으로 밀어 둔 한 정치인도 다시 시대에 맞는 제자리를 찾은 느낌이었다. 몸담던 ‘과거’나 지금 몸담고 있는 ‘현재’ 어느 곳에서도 ‘대접’해주지 않지만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김문수 의원. 그가 구상하고 있는 경기도의 모습이 벌써부터 궁금하다. 글 / 김성욱 기자 사진 / 이주석·경향신문 포토뱅크
‘떡값 X파일’로 또다시 세간의 주목받는 국회의원 노회찬
2005. 10. 01 화제
“정치는 제가 책임질 테니, 여러분은 페어플레이가 이뤄지나 감시해주세요” 촌철살인의 대가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이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그만의 독특한 비유와 신랄한 화법으로 이른바 ‘떡값 X파일’을 공개한 것. “‘X파일’은 우리 세금으로 만든 문화재로 버릴 수 없다”며 새로운 어록 탄생을 예고한 노회찬 의원에게 지난 1년간의 의정 활동과 앞으로의 계획을 들어봤다. 식당에서 밥을 먹고도 돈을 낼 수 없는 사연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49)이 ‘떡값 X파일’로 다시금 언론과 국민의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해 총선에서 신랄한 풍자와 비판이 담긴 ‘노회찬 어록’을 통해 깊은 인상을 남겼던 그가 이번에는 검찰과 굴지의 국내 대기업을 상대로 칼을 빼든 것. 이번 ‘떡값 X파일’과 관련, 실명이 공개된 지검장 등이 명예훼손 혐의로 노 의원을 고소했지만, 그는 “본격적인 수사의 신호탄이 될 것이라는 의미에서 피소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라고 태연하게 말했다. 자칫 재산상의 손실은 물론 구속까지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인데도 그는 “오히려 잘된 일”이라며 특유의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동안 썩은 무조차 손대지 못하던 정치인들을 봐오던 국민이 노 의원에게 거는 기대와 관심은 두드러진다. 요즘 노 의원은 식당에서 밥을 먹고도 돈을 낼 수가 없다고. 식당 주인들은 밥값을 내려는 그에게 손사래를 치며 “더 열심히 일하라”고 격려한다. 또 노 의원이 대학 강단에 서는 날이면 예외 없이 강의실은 만원을 이룬다. 뿐만 아니라 그가 쏟아내는 재치 있는 풍자와 거침없는 말솜씨는 새로운 ‘어록’ 탄생 조짐까지 엿보인다. 국회에서 노 의원을 만난 날, 2005년 국정감사’준비와 계속된 대학 강연으로 피로할 법도 한데, 마치 자판기처럼 질문에 ‘척척’ 답하는 ‘말솜씨’는 여전했다. ‘떡값 X파일’ 발표 후 주위의 반응은 어떤가? 많은 분들이 격려해줘서 감사하다. 어제도 종로의 한 식당에서 이름 모를 시민이 말씀도 안 하시고 내 자리에 있는 밥값을 계산하고 가셨다. 그럴수록 어깨가 무겁다. 주목을 받는 만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더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떡값 X파일’로 인해 사회·경제적 파장이 만만치 않은데? 특정 기업이 너무 크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변칙적이고 불법적으로 각종 비리를 저지르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페어플레이가 아닌 반칙을 일삼는 기업의 영향력이 커지면 전 사회가 위협받는다. 특정 기업의 경제적 영향력에 대해 우려하는데, 그럴수록 그 기업이 바로 서야 한다. 이렇게 계속 불법적인 행동들을 봐주면 그 기업 역시 망할지도 모른다. 그런 기업은 우리에게 좋은 영향을 미쳐야 하며, 그건 그 기업을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다. 지난 1년간의 의정 활동을 평가한다면? 지난해 “1시간 50분짜리 영화인데 10분만 보고 이 영화 재밌다 재미없다 그러기엔 너무 이르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 지금쯤이면 계획했던 목표의 25%는 이뤘어야 하는데, 10%밖에 못 한 것 같다. 그간의 성과에 대해 기대에 못 미친다는 평가도 있고, 다른 정당과 비교하면 더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깨끗하다고 해서 괜찮다는 것은 아니다. 지난 1년보다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더 노력할 것이다. 바쁜 일정 중에도 대학 강단에 자주 서는 이유는? 나는 아직도 스무살의 감수성을 갖고 있어 그들과 잘 통한다고 생각한다.(웃음) 젊은 사람들과 만나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젊은이들의 가장 큰 고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진로, 특히 취직에 대해 많은 고민들을 한다. 전체 실업률은 10%도 안 되지만 생애 첫 직장을 갖는 20대의 실업률은 50%에 달한다. 똑같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 과거에는 12년을 교육받았다면, 이제는 16년 이상을 교육받고도 과거에 얻을 수 있는 일거리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졸자가 늘어나는 것은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에 맞는 직장이 제공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다. 민간기업에게만 청년 실업 문제를 떠 넘겨서는 안 된다. 이제는 정부가 나서야 한다. 청년 실업 해소를 위해 어떤 복안이 있나? 일자리가 없는 게 아니다. 고학력자들의 눈높이를 맞춰줄 일자리가 없는 것이 문제다. 구직자의 수준은 높아졌는데 그들의 희망을 채워줄 일자리가 부족하다. 구직자들의 눈높이를 낮춰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과거 공공근로와 같은 일자리는 의미가 없다. IT 업무와 관련돼 정부가 가지고 있는 각종 자료를 데이터베이스로 만드는 등, 젊은이들의 취향에 맞는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또 청년들을 채용하는 기업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해 취업을 활성화시키는 것도 한 방법이다. 국내 여성 인권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나? 과거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도 우리나라의 경제력과 문화 수준에 비해 여성들의 인권은 야만국가 수준이다. OECD 가입 국가 중 경제력은 열한번째지만 여성의 권위는 거꾸로 세야 더 빠르다. 특히나 육아와 출산에 대해 너무 여성에게 일임하고 있는 게 한국의 잘못된 풍토다. 남자에게도 육아휴가제도가 적용되지만 허용하는 직장이 많지 않다. 남자들도 아내가 출산을 했으니 당연히 아내가 휴가를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 전반적으로 뿌리내린 가부장적 사고와 사회복지제도가 엉망이다 보니 여성들이 아이를 낳기도 전에 겁부터 낸다. 제도적 개선보다도 사회 전체저인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KBS-2TV ‘해피선데이 - 지금 만나러 갑니다’를 즐겨 본다고 들었는데? 굉장히 가슴 아프고 감동적인 프로다.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한국에서 입양됐건 해외로 입양됐건 똑같은 시각으로 봐야 한다고 느꼈다. 일단은 우리가 너무 입양을 안 하는 게 문제다. 외국에서는 아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입양을 해서 키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문화가 만들어져야 한다.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기쁨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 아직 아이가 없다. 입양할 계획은 없나? 지금은 나이가 너무 많아 입양을 포기했지만 과거에 시도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국회의원 신분도 아니었고, 재야 생활을 오래 한 탓에 수입도 일정치 않아 거절당했다. 입양을 하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한다. 해외 입양을 줄이기 위해서는 입양 문화 못지않게 까다로운 절차를 완화하는 것도 필요하다. 아이가 없어 부모님께서 서운해하지 않나? 물론 속으로는 서운해하시겠지만 내색은 안 하신다. 우리 부부의 마음이 상할까 봐 역으로 이해해주신다. 모두 마찬가지겠지만 대한민국 어머니들의 자식 사랑은 무한대다. 내 어머니라고 해서 다른 분들보다 낫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동안 자식이 험한 길을 걸을 때마다 더 많이 걱정하고, 아파하셨을 텐데도 내색하지 않고 격려해주셔서 감사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여성 유권자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하늘의 절반, 세상의 절반이 여성이다. 여성이 정신을 차릴 필요가 있다. 여성이 두 눈을 부릅뜨고 엄격하게 정치적인 권리를 행사하면 세상의 절반의 힘을 직접 보여줄 수 있다. 예컨대 소비자운동을 열심히 해야 물건이 좋아지는 것처럼 정치의 수요자인 우리 주부들이 엄격하고 철저하게 간섭하고 참여하면 그만큼 더 좋은 정치를 누릴 수 있다. 많은 여성 유권자들이 정치가 어렵다고 말할 때마다 ‘이제 노회찬이 정치를 쉽게 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글 / 김성욱 기자 사진 / 전영기
시각장애인 첫 국회의원으로서 장애인을 대변하는 한나라당 정화원 의원
2005. 06. 01 화제
“국내 92.4%가 후천적 장애인으로서 모든 국민은 비장애인이 아니라 ‘예비 장애인’입니다” 지난 4월 헌정 사상 처음 점자로 된 질의서로 대정부 질문을 펼친 정화원 의원. 50분간 완벽한 내용으로 여야 의원을 막론하고 기립박수를 받으며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후천적 실명이라는 고난을 딛고 장애인의 대변자로 살아온 30년의 세월 뒤엔 아내 이희숙씨의 묵묵한 내조가 있었다.      “이 총리 나오셨습니까? 인기척 좀 해주십시오. 그것이 장애인에 대한 국제 관례입니다.” 지난 4월 대정부 질문을 위해 단상에 오른 정화원 의원의 첫 말문은 장애인에 대한 비장애인의 배려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었다. 시각장애인으로서 첫 국회의원이자, 헌정사상 처음 점자로 된 질의서로 대정부 질문을 펼친 정화원(57) 의원. 50분간 완벽하게 내용을 마친 그는 동료 의원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으며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전한 바 있다. 그의 점자 질의서는 헌정기념관에 영구히 보존키로 한 상태. “대정부 질문을 한 14일 오후부터 15일 오후까지 1천여  통의 전화가 왔어요. 제 전화기부터 의원실, 비서관, 보좌관, 심지어 친구들 전화기까지 불이 났습니다. 한 장애인은, 의원님의 안건이 통과되지 않아도 좋다, 국회의원 앞에서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그렇게 해주는 것 자체가 속이 시원하다, 자존심이 살아나는 것 같다고 얘기하더라고요. 심지어 울먹이며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그러고 나니까 제가 시각장애인의 대변자로서 더 열심히 해야겠다,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세살 때 6.25 피난길에 올랐던 그는 포탄 화염이 눈에 들어가 시력을 잃기 시작, 열아홉 에 완전 실명했다. 혈기왕성한 나이에 실명을 하자 그 역시 죽을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고. 자살도 여러 번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몇 년을 술로만 살았다. 하루는 대낮에 술에 취해 걸어가고 있는데, 한 할머니가 ‘아이구, 앞도 안 보이면서 술까지 먹어서 우짜노’라며 혀를 차며 지나가시더라고. 집에 와서 곰곰 생각해보니 자신이 어떻게 보였길래 그런 소리를 듣는 것일까 자문하게 된 것. 그것이 계기가 되어 삶에 대한 자세를 바꾸게 된 그는 이왕 살 거라면 더 열심히, 더 멋지게 살아보자 다짐했다. 술을 마시되 술에 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그때부터다. 지금도 한 자리에서 소주 12병을 거뜬히 헤치울 정도로 대단한 애주가인 정 의원. 아무리 많이 마셔도 술주정 한번 하지 않고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 그이기에 그가 얼마만큼 술을 마셨는지, 취했는지 주변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아이들조차 눈치 채지 못할 정도고. 대정부 질문을 통해 그는 장애인의 인식 개선을 위해 교육부 장관에게 두 가지를 제안했다. 국내 92.4%가 후천적 장애인으로서 모든 국민은 비장애인이 아니라 예비 장애인이라고 피력, 초·중·고 교과 과정에 장애의 예방, 원인, 극복 내용을 싣도록 하자는 것과 통합 교육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장애인에 대한 인식 개선은 한순간에 되는 게 아니고 어릴 때부터 교육을 통해 궁극적으로 가능하다는 것. 특히 통합 교육을 통해 장애인은 더불어 사는 모습을 알게 되고, 비장애인 속에서 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동시에 비장애인은 장애인을 항상 옆에서 보고 느끼면서 이해하는 마음을 키울 수가 있다는 것이다. 길을 걷다 장애인을 만났을 때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 진정한 인식 개선이 된 사회라는 것이 정 의원의 생각. 작년 국정 감사에서 시민단체가 뽑은 베스트 국회의원에 선정될 정도로 정화원 의원은 튼실한 의정 활동을 자랑한다. 그가 발의한 장애인특위구성결의안이 국회를 통과해 금년 4월에 구성되었고, 지난 연말 여야 의원 구분 없이 힘을 합쳐 발의한 ‘교통 약자를 위한 편의 증진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올 4월 한나라당 당론으로 국회에 제출한 장애인 차량에 대한 LPG 지원을 면세화하는 조세특례제한법 개정도 의정 활동 성과 중 하나. 인터뷰를 위해 의원회관을 찾았을 당시엔 1층 로비에서 정 의원이 추진하고 있는 점자 명함 갖기 운동이 한창이었다. 최선을 다한다는 건 흔한 말이겠지만, 그처럼 ‘최선’이라는 단어에 충실히 임하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31년 동안 옆에서 지켜본 그의 아내 이희숙(54)씨 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 “선배가 이끌던 부산 맹인복지회관을 이어받을 당시 아무것도 없었어요. 돈은 물론 사무실도 없었고, 옛날 전화기 한 대 받은 게 전부였는데 그걸 안정적으로 해놓기까지… 그때 가졌던 열정이면 대한민국도 살릴 거예요. 정말 굉장했어요. 그만큼의 열정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싶어요.” 한국맹인복지연합회 부산지부, 부산맹인점자도서관, 부산장애인신용협동조합, 부산광역시 맹인복지회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설립 등등의 행보 역시 정 의원이 오로지 열정과 끈기만으로 이뤄낸 결과들이다. 그 외에도 시간을 쪼개 각종 협회와 위원회의 회장과 공동대표를 맡았다. 대외 활동 기간을 시간으로만 따지면 108년이 된다고 하니, 그가 장애인을 위해 얼마나 분주히 움직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국회의원이 되기 전까지 30년 넘게 침쟁이로 살아온 정화원 의원. 그가 장애인 운동을 시작하게 된 것도 침술과 무관하지 않다. 해방 후 미 군정이 들어서자 무당과 함께 침을 미신으로 간주하여 없애기 시작하면서 침술을 거의 유일한 직업으로 가지고 있던 시각장애인은 거리로 내몰릴 상황이었다. 촉각이 발달한 시각장애인은 손으로 몸 안 혈액의 흐름과 문제점을 짚는 데 탁월한데도 불구하고 미신으로 내몰리는 상황이 되자 정의원은 협회를 만들어 맹인침사합법화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고, 그를 계기로 30년째 장애인 운동을 해오게 된 것이다. 외부 활동이 많았던 정 의원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가족에겐 무심한 가장이었던 모양. “아빠로선 빵점이에요. 경상도 남자라서 자상하지 못한 성격이기도 하고. 요즘엔 손주가 한창 재롱 피우니까 같이 놀아 줄까란 생각도 드는데, 우리 아이들에겐 못 그랬어요. 침 놓아야 하지, 밖에서 사람들 만나 바삐 움직여야 하지, 우리 아이들은 귀여운 줄도 모르고 키웠어요. 미안한 마음이 많아요. 그래도 반듯하게 잘 자라준 아이들이 고맙고, 그게 또 다 제 아내 덕분이고요.” 장애 자체와 사람들의 편견이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는 장애인과 마찬가지로 장애인의 아내 역시 이중고, 삼중고를 겪는다고 그는 말한다. 아내가 아이들 외에 남편까지 일일이 돌봐야 했고, 자신이 침을 놓기는 했으나 그 이외의 일은 모두 아내가 수발을 들어야 했다. 그렇게 30년 동안 고생하면서 살아온 것이 자신의 아내라고. 이희숙씨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손님이 많을 때는 하루에 80명, 100명씩 됐어요. 일에 파묻혀 살았는데, 그때는 해가 떨어지면 다시 안 떴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였어요. 소문을 듣고 오전 8시도 채 안 돼 사람들이 침을 맞으러 왔으니까요. 너무너무 힘들고 몸이 피곤했던 시절이었는데 그때 참고 산 보람이 있지 않나….(웃음) 그때 좋은 분들도 참 많이 만났어요. 고마운 분들이 많은데, 앞으로 그 빚 다 갚아야 됩니다.” 한평생 눈과 손발이 되어주고,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싫은 소리 한번 없이 묵묵히 내조해준 아내에 대한 정 의원의 고마움은 각별하다. 아내가 있었기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고, 지금의 자리에 설 수 있었다는 말로 담담하게 마음을 전했다. 글 / 신현화 기자  사진 / 전영기
‘토론회 스타’로 유명세 떨치며 국회입성 석달째 노회찬의원
2004. 09. 01 화제
“모든 국민이 인간으로서 품위를 잃지 않고 살 수 있는 사회, 그것이 정치인으로서 제가 갖는 ‘야망’입니다” 지난 총선 기간, 무수한 어록을 남기며 ‘토론회 스타’로 떠오른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 특유의 비유 화법을 통한 촌철살인의 발언을 지켜보며 국민들은 통쾌함 이상의 ‘재미’를 느꼈던 것이 사실이다. 덕분에 노회찬 의원은 또 하나의 ‘노사모’, 또다른 ‘노빠’ 열풍을 일으키며 웬만한 연예인 부럽지 않은 인기와 지지를 누리고 있다. 옆집 아저씨 같은 외모에 위트 넘치는 ‘말짱’ “열린우리당은 길 가다 지갑 주웠으면 경찰에 신고해야 돼요” “50년 동안 한 판에서 계속 삼겹살을 구워 먹어서 판이 이젠 새까맣게 됐어요. 이제 판을 갈 때가 됐습니다” “한국의 야당은 다 죽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죽인 것이 아니라 다 자살했습니다” “한나라당, 민주당 의원님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퇴장하십시오” “촛불집회의 배후 세력은 열린우리당이 아니고 한나라당, 민주당입니다. 당신들이 그 사람들을 광화문으로 부른 거죠.” 노회찬 의원(48)이 말하는 비유와 유머에는 신랄함 속에 때로 냉소도 엿보이지만, 비열함이나 영악함과는 거리가 멀다. 푸근하고 친근한 외모만 보면 영락없는 옆집 아저씨다. 그러나 그런 그의 순박한 일면만 보고 그의 해박한 지식 수준과 날카로운 통찰력을 간과한다면 대략 낭패일 것이다. 결코 순탄치 않았던 그의 삶을 돌아보면, 평범함 속에 감춰진 그의 비범함이 좀더 분명하게 수면 위로 떠오른다. 경기고에 재학중이던 70년대 초반, 그는 이미 ‘운동권’이었다. 유신 타도를 외치며 유인물을 만들어 뿌리던 고등학교 1학년 시절부터 이미 그는 ‘사회 변혁’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대학에 들어가면 학생운동이 아닌 노동운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고대 정외과에 재학중이던 대학생 신분으로 노동 현장에 뛰어들었다. 실질적인 생계 수단이 필요하다는 판단하에 용접기능사 2급 자격증을 딴 것도 그 무렵의 일이다. 1982년부터 ‘불온 문건 집필’` 등의 이유로 7년이 넘는 장기 수배 생활을 했고, 1989년에는 인민노련 사건으로 구속돼 92년 만기 출소할 때까지 감옥살이도 했다. 인천에서 노동운동 하던 당시 만난 아내와의 결혼을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로 꼽는 그는 타고난 낙천가이기도 하다. 노 의원은 최근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책을 냈다. 지난 97년 발표했던 책을 수정·보완해 재출간한 것으로, 「조선왕조실록」을 읽으면서 ‘어, 그래!’ 하는 감탄사를 자아냈던 99가지 이야기를 골라 담았다. 97년에 출판한 책 「어 그래? 조선왕조실록」을 최근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으로 재출간하셨습니다. ‘2탄’을 기다리던 독자들도 적지않은 걸로 아는데요. 재출간하신 계기는 무엇입니까? 책이 절판됐는데 아직도 찾는 사람들이 적지않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출판사 쪽에서 재출간을 제의해왔구요. 독자들에 대한 예의나 서비스 차원에서 좀더 다듬고 고쳐서, 첫 출판 당시와 달라진 현실까지 반영해 다시 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목도 바꾼 것인데, 처음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제목 선정은 일체 출판사에 일임했습니다.  초판 당시에도 적잖은 호응을 얻었던 것으로 압니다. 당시와 확연히 달라지신 위상만큼 ‘대박’ 예감도 있으실 것 같은데요. 듣기로는 서점에서 꽤 잘나가고 있다던데… 뭐, 대박까지야….(웃음) 옥중에서 「조선왕조실록」을 탐독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독서량도 방대하시다고 알려졌는데, 특별히 ‘역사서’를 읽는 즐거움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거기(감옥)선 시간이 많으니까 아무래도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렇다고 거기서 다 본 건 아니고 처음 보기 시작한 것이 그때부터였어요. 다행히 10년쯤 전에 「조선왕조실록」이 CD로 나와서 더 간편하게 읽을 수 있었죠. 역사서를 굉장히 좋아합니다. 케케묵은 옛날 이야기를 왜 읽냐고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데,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면 지금이나 그때나 사람 사는 모습이라는 게 크게 다르지 않거든요. 우리 정부의 외교력 부재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높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비쳐봤을 때, 역사 속에서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한 외교적 성과가 있다면 어떤 예가 있을까요? 많죠. 명암이 엇갈렸다고 해야 정확할 거예요. 지금처럼 억울하게 당하고만 마는 경우도 많았고 적극적으로 극복하려는 시도들도 많았고… 실제로, 중국의 정권이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바뀌는 과정에서 쓰러져가는 명나라에 줄을 대려는 세력과 새롭게 흥하는 청나라에 줄을 대려는 세력의 다툼이 조선 초기 상황에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습니다. 그러한 종속적 상황과는 달리 당당하게 국익을 관철시킨 예도 있죠. 일본이 우산국(울릉도)을 자기들 땅이라고 우길 때 조선 조정이 강하게 대응한 기록도 있거든요.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큰 나라들 사이에 있는 나라로서 때로는 지혜롭게, 때로는 당당하게 ‘No’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한 인터뷰에서 노 대통령이 본받아야 할 조선시대 임금으로 효종을 꼽으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이유에서입니까? 그때 받은 질문이 노 대통령과 가장 비슷한 왕이 누구냐는 거였습니다. 사실 비슷한 왕은 없어요. 다만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 많은 사람들이 걸었던 기대는 크게 두 가지라고 봅니다. 그 하나는 민생 경제 안정, 나머지 하나는 자주 외교죠. 그런 점에서 볼 때 민생 경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자주 외교를 추구했던 대표적인 왕으로 효종을 들 수 있습니다. 효종은 경제적으로 심히 어려움을 겪고 있던 백성들을 위해 대동법을 실시하고, 만주를 평정하기 위한 북벌 외교를 펼치지 않았습니까. 당시 만주는 중국의 국력도 미치지 않고 조선도 별반 관심을 두지 않는 땅이었어요. 우리 민족이 많이 살고 있는 그곳에 도적 떼가 출몰해 약탈을 일삼자 효종이 군대를 보냈는데, 현재의 소련과 중국의 국경 부근까지 올라갔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효종의 재임 기간이 짧아서 이런 정책이 강력한 외교 노선으로 더 빛을 발하지 못했다는 한계는 있지만, 어쨌든 조선 임금으로는 드물게 그런 정책을 추진했던 거죠. 요즘 우리 국민들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바라는 점도 그러한 자주적인 모습이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친일진상규명법, 군사독재청산 관련 등 현안이 되고 있는 ‘역사 바로 세우기’ 문제들이 당리당략적 양상으로 흐르는 것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적지 않습니다. 의원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역사 바로 세우기 문제는 중요합니다. 해방된 지 50년이 넘었는데 친일 문제를 왜 지금에 와서 제기하느냐는 사람도 있는데, 사실은 해방 직후에 제대로 처리 못해서 지금까지 왔잖아요. 지금 처리 못하면 우리 후손들에게까지 갈 거고, 그들이 또 싸우게 될 거예요.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독일에 빌붙은 세력을 처벌했거든요. 한번 그렇게 해놓으니까 더이상 말이 없잖아요. 다만 이런 것이 너무 정치적 공방으로 흐르면 안 된다고 봅니다. 진정한 역사 바로 세우기로 가야지, 바로 세우기와 반대되는 일을 하다가 (당리당략적인) 필요에 의해 내세우면 안 된다는 거죠. 대통령 자신도 유신이 만든 헌법을 가지고 고시 공부했던 것이 부끄럽다고 얘기했지만, 바로 그 당에서 지난 16대 때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건립하는 데 돈을 댔습니다. 이건 일관된 모습이 아니죠. 첫 원내 진출 정당으로서 겪었던 시행착오도 있었고, 비교섭단체로서 당했던 설움도 많았을 줄로 압니다. 국민의 관심과 기대에 비쳐봤을 때 민노당의 석 달 여 의정 활동을 간단히 자평해주신다면? 아직까지 많은 분들이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봐주시고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계신 데 대해 고맙게 생각하구요, 좀더 지켜봐주셨으면 하는 바람을 갖습니다. 1시간 50분짜리 영환데 10분만 보고 이 영화 재밌다 재미없다 그러기엔 너무 이르지 않습니까. 민주노동당의 활동을 1년만 지켜보시면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필요한 당인지, 얼마나 관심과 지원을 해주어야 하는지를 우리 국민들이 정확하게 알 수 있지 않겠는가, 또 그것을 위해서 저희들이 열심히 노력하겠다 하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동안 노 의원께서는 워낙 많은 ‘말’의 한가운데 계셨던 만큼 인간적으로 상처받고 힘드셨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저의 본뜻을 이해하고 신뢰해주셨으면 좋겠는데 겉으로 드러난 단편적인 몇 가지만을 가지고 평가할 때는 억울하기도 했죠. 예를 들면 제가 어떤 신문사(조선일보) 노동조합에 가서 강연을 했는데, 실제로는 거기서 쓴소리를 많이 했어요. 그게 제 생각이기도 했구요. 세상이 많이 변했고 신문 논조도 변해야 한다는 얘기를 강조했는데, 그 얘기하기에 앞서 어차피 남의 집에 방문한 거니까 칭찬으로 들릴 수 있는 얘기를 조금 했어요. 나도 그 신문을 한 30년 봤다, 그렇기 때문에 더 힘있게 바꾸라는 말도 할 수 있다는 거다 이런 말이었는데, 그런 신문을 30년이나 애독했다는 식으로 앞뒤 잘라서 알려질 때는 상당히 당황스럽더군요. 나 자신이 왜곡 보도의 당사자가 되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고… 사실 저는 조용히 살고 싶었던 사람인데 말입니다.(웃음) 명실상부한 ‘스타’ 의원이신데요. ‘인기’를 실감하실 때는 언제입니까? 상당히 많은 팬을 거느리고(!) 계신데, 따로 ‘팬 관리’라고 할 만한 것이 있으신지요? 사실은, 제가 하는 일에는 힘이 필요하거든요. 그런데 저는 연예인이 아니잖아요. 인기를 잘 관리해서 그 결과가 저에게 동력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제가 국회에 들어설 때 약속한 것들이 있습니다. 또 그것에 대한 신뢰 때문에 많은 분들이 박수를 보내주셨구요. 그렇다면 제가 할 일은 당장의 인기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제가 (국회에) 들어올 때 약속한 것을 변치 않고 지켜내는 것, 그리고 제가 살아온 방식에 대해 지지를 보내준 사람들 앞에서 앞으로 4년 동안 변치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겠지요. ‘스타는 괴롭다’는 명제를 실감하실 때는 언제입니까? 전과 많이 달라진 것은 사실이에요. 어딜 가더라도 알아보고 다가와서 사인해달라고 하시는 분들도 많고 한데, 그러다 보니까 심지어는 제 아내와 장 보러 가도 뭘 샀는지 막 들여다보시는 분들도 있더라구요. 그래서 처음엔 모자 쓰고 갔는데 소용없더군요. 언젠가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사람들이 알아볼까 봐 선글라스도 써봤는데 그래도 알아보고 악수를 청하시는 분들이 있어서 그땐 아주 포기했어요. 모자 써도 안 되고 선글라스 써도 안 되는데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성형수술을 할 수도 없고.(웃음) 평소에 사모님과 장 보러도 자주 가시는 편이십니까? 네. 장 보는 게 제 취미 중의 하나입니다. 아내가 집에 있으면 전화해서 뭐 사갈까 묻기도 하고. 제가 봐서 뭐가 떨어졌는지 감안해 가지고 장도 보고, 장 봐온 걸로 뭘 좀 만들기도 하고… 뭐 그렇습니다. 직접 요리도 하신다구요? 네. 그게 낙이죠. 뭐 여러 가지 해요. 그림같이 멋있는 요리를 만들지는 않지만, 이것저것 다 합니다. 김치찌개야 라면 끓이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죠. 사실 김치 담그는 게 제 전공이에요. 제가 자취를 18년 했거든요. 젓갈 넣고 하는 포기김치, 총각김치, 파김치, 이 세 가지는 기본으로 담가 먹었죠. 결혼 초에는 제가 알아서 담그기도 했어요. 요즘엔 그런 기회가 별로 없지만…. 인생에서 가장 큰 성공이 부인과 결혼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요. 사모님께서 상당히 감동하셨으리라 생각되는데, 그 기사를 보고 뭐라고 하시던가요?  별말 없었어요. 제가 있는 그대로 얘기한 거니까.(웃음) 만약 실제 상황과 다른 얘기를 한 거라면 항의라도 했을 텐데 항의도 없었고, 그렇다고 깜짝 놀라서 감동하지도 않고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던데요. 근데 나중에 들으니까 몇몇 친한 사람들이 제 아내더러 한턱 내라고 한 모양이더라구요.(웃음)  평소에도 특유의 언변으로 사모님께 다정한 말을 자주 건네시는 편인가요? 전혀 그렇지 않죠. 우린 눈빛으로 얘기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니까. 말로 막 오버해서 얘기하는 건 오히려 닭살이죠.(웃음) 대신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은 잊지 않고 기억해뒀다가 함께 저녁을 먹으며 데이트합니다. 꼭 기념일이 아니더라도 꽃은 자주 선물해요. 쉽고도 거침없는 특유의 비유와 유머가 깃든 화법으로 정평이 나 있으신데요. 그 많은 비유들이 모두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것입니까? 미리 준비하는 건 전혀 없어요. 실제로 준비해서 될 문제가 아니거든요. 오늘 강의가 있으니까 재미난 얘기를 좀 해야겠다, 이렇게 맘먹고 가면 얘기가 안 나와요. 안 나오기도 하려니와 그러다 보면 준비한 말을 언제 써먹을까 생각하다가 정작 강의가 잘못될 가능성이 커지죠. 제가 다루는 부분이라는 게 정치다 사회다 해서 주로 딱딱하고 어려워요. 어떻게 보면 굉장히 맛없는 재료를 가지고 아주 맛있게 요리해야 하는 거죠. 지은 지 오래된 밥도 그걸 가지고 죽을 만들든, 묵은 김치를 썰어서 김치볶음밥을 만들든 요리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잖아요. 그런 것처럼 딱딱한 얘기를 어떻게 하면 쉽게 핵심만 추려서 할 수 있을지 염두에 두는 거죠. 소위 좋은 학벌 출신이신데 노동운동에 투신하고 용접공 생활도 하셨습니다. 고교 시절부터 ‘운동권 학생’이셨다는데, 수재들만 모인다는 경기고 재학 시절 사회적으로 출세해서 제도권에 진입해 뜻을 펼쳐보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까? 어려서부터 학교에서 배우는 걸 굉장히 좋아했어요. 그걸 진리라 믿었고. 사실 지금도 그때 배운 것들을 진리라 믿어요. 가령, 우리가 학교에서 유관순 열사를 존경하라고 배웠지, 이화여전 학생이 공부는 안 하고 쓸데없이 태극기 들고 길거리 나갔다, 이렇게 배우지 않았잖아요. 개인도 잘되고 사회적으로도 정의의 편에 서는 일에 있으면 제일 좋겠지만, 정의의 편에 서는 관계로 어떤 고통을 당해야 한다면 그런 고통은 감수해야 한다고 배웠지, 그런 일이 있을 때 모른 척하라고 배우지는 않았잖아요. 전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했어요. 배운 걸 다 실천 못해서 좀 그렇지. 저는 사회에 이름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봤고, 하나의 인간으로서 그때 그때 중요한 순간에 정의와 양심의 편에 서겠다, 잘못되면 죽기밖에 더하냐, 항상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굳이 비교할 계제는 아닙니다만, 노 대통령은 청문회 스타 출신이고 노 의원님은 토론회 스타이십니다. 장기적으로 진보당으로서 민노당의 정권 창출을 목표로 두고 계시리라 봅니다. 평소 ‘노동운동가’를 가장 영예로운 직업으로 여긴다고 하셨지만, 현실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정치인 노회찬’으로서 야망도 가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언제가 됐든 대권에 도전할 의욕이 있으신지 솔직한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웃음)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제가 고등학교 때 일기장에 이런 걸 썼어요. ‘통일이 되면 까막 두루마기 입고 백두산에 가고 싶다’라고.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운동권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지금처럼 한복 입는 것이 유행한 것도 아니었어요. 근데 당시에 제가 그런 생각을 했어요. 자연스러운 민족주의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저는 인생의 목표를 국회의원 되는 걸로 정하고 살아오지 않았어요. 마찬가지로 이후에도 어떤 직책, 어떤 자리에 앉겠다 하는 목표로 살지 않을 겁니다. 살다 보면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고,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지마는, 그것에 연연하면 그 다음부터는 인생이 굉장히 황폐해지고 불쌍해진다고 보거든요. 저에게 야망이 있느냐 한다면 물론 있습니다. 어떤 야망이 있느냐, 바로 그런 거죠. 돈 없어서 못 배우고, 돈 없어서 아픈데 병원 못 가는 사람은 없었으면 좋겠다, 우리 국민들이 인간으로서 품위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사회를 만드는 것, 그게 사실은 대통령 되는 것보다 힘든 일 아니에요? 더 큰 야망이라고 볼 수 있죠. 또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문화 국력이에요. 우리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악기 하나쯤은 할 수 있는 그런 사회, 이런 걸 만들겠다, 이건 굉장히 욕심이 큰 거죠. 쩨쩨하게 국회의원 몇 번 더 하겠다거나 대통령 한 번 하겠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죠. 저는 그렇게 훨씬 더 큰 목표와 야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대통령 하다가 감옥 간 사람들도 많잖아요.(웃음) 글 / 박연정 기자  사진 / 정수원
국회 입성 두달째 맞는 농민출신 여성의원 민노당 현애자 의원
2004. 08. 01 화제
“하루 12시간씩 밭에 나가 일해도 희망이 보이지 않으니, 농촌을 살리려면 농민이 직접 정치에 나설 수밖에 없겠더군요” 탄핵 정국을 헤치고 17대 국회가 개원한 지 두 달여. 상생의 정치를 표방하며 ‘새 정치’를 약속한 국회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빛나고 있다. 농민 출신 첫 여성 국회의원 현애자 의원. 논밭을 떠나 국회로 일터를 옮긴 그녀의 의정 활동 두 달을 함께 돌아봤다. 서민 눈높이 맞추려 1백80만원 월급으로 의정 활동 노동자와 농민을 대변하며 원외에서 활동해온 민노당의 첫 원내 진출은 17대 국회가 갖는 역사적 의미로 평가받는다. 10명의 민노당 의원 중에서도 특히 현애자 의원(42)이 눈길을 끄는 것은 그녀가 비주류 중의 비주류, 즉 농민이자 여성이라는 점 때문이다. 현 의원은 제주지역문화운동협의회 사무국장, 제주도 여성농민회 준비위원회 준비위원장 등을 지내며 15년 동안 농사와 농민운동을 병행해왔다. 민노당 비례대표 의원으로서 의정 활동을 시작한 그녀는 이번에 서울로 올라오기 전에도 제주도에서 직접 농사를 짓고 있었다. 현애자 의원이 머물고 있는 국회의원회관 802호. 25평씩 배정되는 사무실에는 입구부터 책상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다. 사무실의 절반 가까이를 의원 혼자 넉넉하게 사용하는 것이 관행이지만, 802호에는 의원 전용 공간이랄 만한 곳이 없다. 커다란 접대용 소파는 구석에 몰아넣었고 대신 둥그런 회의용 원탁이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의원용 책상 중에 컴퓨터 책상은 보좌관에게 할애되어 의원용 책상과 마주보고 있다. 위엄 있는 국회의원의 방이라기보다는 의원과 보좌진이 함께 ‘일하는’ 공간으로서 활용되고 있음을 한눈에 느낄 수 있다. 집과 일터를 떠나 현실 정치에 뛰어든 현 의원은 요즘 ‘제도권’이라는 낯선 환경에 적응하며 의욕적으로 의정 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보건복지위와 예결산특위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녀는 원외와 원내를 오가며 균형 감각을 잃지 않으려 애쓴다. 이라크 파병 반대 집회에 참석함은 물론이고, 성적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퀴어 문화축제에도 참가했다. 지난 7월 1일에는 ‘장애인이동권연대’ 집회에 참석한 뒤 회원들과 함께 국회 정문을 통과하려다 ‘시위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3시간 동안 국회 출입을 제지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본회의에 결석 한 번 하지 않고 누구 못지않게 왕성한 의정 활동을 하는 현 의원의 급여는 월 1백80만원. 서민의 눈높이에 맞는 정치를 하자는 당의 방침에 따라 8백40여만원의 세비 중 1백80만원을 제외한 나머지는 당에 반납하고 있다. 집을 떠나 서울 용산 해방촌에 7천5백만원짜리 전세를 얻어 생활하고 있는 현 의원은 지난달 구입한 중고 아반떼로 출퇴근하며 2천5백원짜리 의원회관 직원식당을 이용하면서 박봉을 쪼개 쓰고 있다. 소수당 소속 여성 국회의원으로서 국회에서 두 달여를 보낸 소감이 궁금합니다. 농사지으면서 농민운동한 지 15년이 됐는데 작년 한 해가 가장 힘들었어요. 이제는 한계 상황에 다다랐구나 싶을 정도였죠. 정치하는 사람들은 선거 때마다 농민 문제 해결을 공약으로 내걸지만, 막상 국회에 진출하고 나면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 급급할 뿐이었습니다. 그럴 바에야 우리가 직접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게 낫겠다고 결론을 내렸죠. 처음에는 하루 하루가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저를 포함해 민노당 의원들의 경우 원내 활동 외에 원외 활동도 활발히 하기 때문에 노동자, 농민 등 서민의 생활 속에서 배우는 것이 많아요. 각계 각층의 목소리를 현장에서 직접 들으려 애쓰고 있습니다. 노동자 평균임금에 준하는 수준의 세비를 받겠다는 것이 민노당의 공약이었는데요, 객지 생활하시다 보면 아무래도 돈이 많이 들 텐데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기본적으로 1백80만원의 월급을 받습니다. 촌사람이다 보니 도시 생활을 해보지 않아서 1백80만원으로도 충분할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서울 생활을 해보니 1백80만원은 간단히 없어지는 돈이더군요. 아무래도 많이 부족한 게 사실이구요. 말씀하셨듯이 두 집(?) 살림을 꾸리자니 더욱 만만치 않습니다. 우선 전세 대출을 받은 이자가 60만원, 차량 할부가 35만원 정도 나가고 거기에 공과금, 생활비 등을 제하고 나면 거의 적자 수준입니다. 지금까지  농가 부채도 많은데 부담스러운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많은 서민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아닌가 합니다. 어렵지만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잘 살아가야지요. 보도를 통해 국회 정문 앞에서 출입을 제지당했던 사건을 접했습니다. 기득권이 없는 소수당 의원에 대한 경찰의 과잉 대응이라는 지적도 있는데, 이에 대해 당사자로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실제로 어떻게 매듭 지어졌는지요. 당과 의원단 차원의 항의가 있었고, 행정자치위원회에서  경찰청, 행정자치부 업무 보고에 대해 질의가 있었습니다. 이후 서울시 경찰청에 방문해 공식 사과와 재발 방지를 약속받았습니다. 이라크 파병 반대 입장이신 것으로 압니다. 명분 없는 전쟁의 위험성을 걱정하면서도 우리나라 안보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걱정하는 국민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에 대한 의원님의 소신을 말씀해주십시오. 부당한 폭력에 대해서는 한 개인이라도 대항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나라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계속 밝혀지고 있듯이 부시의 이라크 전쟁은 명백히 ‘침공’이었습니다. 이는 최근 미국의 정보위원회 보고서에서도 밝혀졌구요. 부시 대통령이 내걸었던 온갖 미사여구가 허구로 드러나고 있는 거죠. 실제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가 이라크 국민들이라는 것도 눈앞에 보이지 않습니까. 부시 정권의 명분 없는 전쟁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던 영국 블레어 총리의 지지도 하락이나, 고이즈미 총리의 선거 참패 등은 이미 전세계 여론이 미국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미국 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 김선일씨 피랍·살해 사건, 부산항의 테러 경고 등에서 알 수 있듯이 파병 강행은 우리 국민의 생명과 국가 안보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시 정권이 안보나 경제를 빌미로 파병 강행을 요구하는 것은 협박에 다름없고, 오히려 일방적인 관계인 한미동맹을 재검토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새내기 국회의원의 눈으로 봤을 때, 국회의 관행이나 시스템 중에 반드시 고쳐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초선의원이 많아져서인지 국회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민노당이 초기에 국회의원의 특권 폐지에 대해 많이 이야기를 하면서 새로운 개혁의 분위기는 형성 됐습니다. 의원 전용 엘리베이터 폐지안이 대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의사진행 등에 있어서는 답답함이 많습니다. 많은 분들이 언론을 통해서도 접했듯이 교섭단체 중심의 국정 운영이 가장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거대 정당인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양당이 합의가 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진행되지 않습니다. 국민의 기대 속에 출발한 17대 국회가 한 달이 지나서야 원구성이 된 것도 이때문입니다. 어제(7월 15일) 추경예산안에 대해서도 두 당이 합의되지 않아 예결위 회의가 5시간이나 지나 열렸습니다. 비교섭단체 의원들은 의결 과정에 참여하지도 못하고 언제 시작될지 모르는 회의를 기다리고, 결국 회의장에서도 이미 합의된 내용을 통과시키는 것을 보고 무력감을 느꼈습니다. 국민의 20%에 가까운 지지를 받고 있는 민노당이 국회에서는 원천적으로 20%의 목소리도 낼 수 없는 상황입니다. 출퇴근은 어떻게 하십니까? 서울시 버스체계 개편 이후 버스를 타보신 적이 있는지요? 두 달 여 전 중고차를 한 대 구입했습니다. 평소 이동은 주로 이 차량으로 하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대중교통을 이용합니다. 며칠 전 개편 후 버스로 이동을 하려다가 결국 시간에 쫓겨 택시를 타고 말았습니다.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것이 힘들지는 않으신지요. 가족의 지원 없이는 더더욱 쉽지 않은 일일 텐데요. 남편이나 자녀들이 어떻게 응원해주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가장 마음이 아프면서도 가장 큰 지지자가 가족입니다. 처음 서울에 올 때 일주일에 한 번은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쉽지 않더군요. 현재 3주째 집에 못 내려가고 있습니다. 특히 다섯 살 난 막내딸이 눈에 밟혀요. 위로 아들 둘을 낳고 늦둥이를 봤는데, 여자들끼리 연대하기 위해서 전략적으로(?) 딸을 낳았죠.(웃음) 집안일이며 농사일에서 제가 갑자기 빠져버린 상황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특히 남편이 힘들어했습니다. 하지만 남편 또한 농민운동을 했던 활동가로서 격려와 지지를 보내줍니다. 초기에는 아이들이 엄마가 없는 상황에 적응을 못하고 ‘우유를 사오라’거나 ‘통닭을 시켜달라’는 전화를 하기도 했습니다. 막내딸 자연이가 통화할 때마다 울고 보채서 마음이 무너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웬만하면 통화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자연이도 많이 익숙해져서 매일매일 밝게 통화를 합니다. 물론 가끔 칭얼대기는 하지만요. 얼마 전 동네 사람들이 ‘엄마 뭐 하니?’라고 물었더니 자연이가 ‘우리 엄마는 국회의원이고, 밭에 나가 일한다’고 하더래요. 아이들 생각하며 더욱 열심히 의정 활동에 임하려고 합니다. 농활 갔다가 지금의 남편을 만나셨다고 들었는데요, 어쩐지 농촌 계몽소설에나 나올 법한 인연인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농민운동 파트너로서 남편을 점찍으셨던 건가요?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웃음) 학교 다니다가 몸이 아파 제주에 내려가 치료하다가 제주 지역에서 활동을 했습니다. 그때는 현장문예운동을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평생 어떻게 운동을 할 것인지 고민을 했습니다. 지금도 비슷하지만 당시 제주는 농업이 주요 산업이었죠. 생활적 기반을 가지고 좀더 대중과 함께 하는 운동을 계속하기 위해 농민운동을 결심했습니다. 농민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동네에서 농민으로 자리를 잡아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 특히 여성에게 결혼은 필수입니다. 그렇게 결심하고 누구와  결혼할 것인가 열심히(?) 찾았지요. 하지만 결혼한다는 게 ‘해야 한다’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더군요. 결국 마음이 끌리는 게 제일 중요했습니다. 한번은 농활을 나가서 한 열흘 보리 베기를 했어요.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지난 열흘을 되돌아보니 자꾸만 마을 청년회장이 생각나더군요. 마침 그 농활을 주도했던 선배가 전화를 하더니, 그 청년이 저를 좋아한다지 뭐예요. 어찌나 반가운지 ‘나도 좋아한다, 연락하라고 전해달라’고 했죠.(웃음) 그 청년회장이 지금의 남편입니다. 가정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정치(?)를 하십니까? 농촌 여성이 사회활동을 하려면 남편을 설득하는 일이 가장 중요했을 것 같은데요. 결혼 초부터 숱하게 싸웠죠. 농촌에서 나고 자란 남자는 기본적으로 여자가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고 보수적일 수밖에 없어요. 농민운동을 하는 방식도 다소 투박하구요. 그걸 고쳐주고 조율하는 과정에는 어마어마한 인내가 필요했죠. 농촌 여성이 사회생활을 온전히 하려면 남편과의 관계나 가정을 제대로 꾸리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해요. 그런 확신과 원칙이 있었기 때문에 더 힘들고 오래 걸린 거죠. 농촌 출신의 어떤 남자가 자기 마누라가 국회의원 되는 걸 밀어주겠어요. 쉽지 않은 일이에요. 제가 국회의원 됐을 때 제주도 사람들이 다 놀라 자빠질 정도였으니까요. 게다가 촌살림에서 각시의 빈자리는 엄청난 거거든요. 아이들 돌봐야지, 가정 경제도 꾸려야지, 농사도 지어야지, 게다가 남편은 전농 제주연맹 의장을 맡고 있기 때문에 여간 바쁜 게 아닙니다. 수십 년에 걸친 개조(?) 끝에 지금은 남편만한 원군이 없습니다.(웃음) 그동안 주로 어떤 농사를 지으셨는지요. 제주 본가에서는 올해도 농사를 짓고 있습니까? 많은 이들이 제주 하면 감귤을 생각하는데 감귤 농사는 한 번도 짓지 않았습니다. 우리 마을은 전통적인 밭작물 지대이고 보리, 콩을 많이 했는데 최근에는 고소득 작물, 고부가가치 작물 농사를 꿈꾸며 시설 하우스 채소 농사를 하고 있습니다. 작물은 토마토, 브로콜리, 참나물, 곰취, 적상추 등 여러 가지를 했습니다. 시기를 보면서 돈이 될 만한(?) 작물을 찾아서 농사를 지었지요. 제주 집에서는 지금도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하우스에서 하는 밭작물은 여자의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법인데, 제가 없어서 노동력은 반 이상으로 줄었죠. 남편 또한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올해는 손이 조금 덜 가는 작물로 짓고 있는데 이웃 사람들도 도와주고 있습니다. 저도 할 수 있는 만큼은 최대한 농사일을 하려고 해요. 이번 주에는 고추 모종을 심으러 내려갑니다. 소속이신 보건복지위와 관련한 활동 등 앞으로의 활동 계획을 소개해주십시오. 또 농민문제 전문가이신데, 그밖에도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입법을 추진하고 싶으신 분야가 있는지요. 보건복지위는 우리 생활에서 ‘삶의 질’과 관련한 모든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만큼 다양하고 복잡하죠. 지난번 불량 만두소 파동과 여름이면 되풀이되는 식중독 문제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 식품 안전 시스템에 대해 총괄적인 점검과 새로운 계획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민노당의 주요 정책인 의료 공공성 강화에 관심이 많습니다. 무상 의료 시스템을 필두로 하는 의료 공공성의 확대가 하루빨리 이루어져야 합니다. 의료 시스템의 개혁을 위해서는 조세 체제를 비롯한 사회 전반의 시스템이 모두 바뀌어야 한다는 점에서 쉽지 않은 일이지요. 우리나라의 의료 체계는 OECD 국가 가운데 가장 열악합니다. 자료를 조사해보니, 우리나라와 일본, 대만 정도만 개인병원 체제를 유지하고 있더군요. 국민의 건강을 책임지는 의료 시스템이 비즈니스 논리로 유지된다는 건 큰 문제입니다. 우선 우리나라 의료 시스템에 대한 전반적인 조사, 분석부터 시작해서 4년 동안 의정 활동을 통해 무상 의료를 향한 첫 디딤돌을 놓는 작업을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돈이 없어 치료를 못 받는 사람이나 의료 서비스에서 소외되는 지역이 없도록 하려 합니다. 또 중요한 부분은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이웃들이 최소한의 삶의 질을 보장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장애인이나 저소득층의 성원들이 단순히 복지 시혜의 대상이 아니라 그들이 복지에 대해 ‘당연한 권리’가 있으며, 그들 스스로가 복지의 주체가 되는 관점의 전환이 중요합니다. 이런 일련의 보건복지위 활동을 통해 상대적으로 복지에서 소외된 농촌 지역의 현실을 많이 개선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실제 51% 이상의 노동을 하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여성농민들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일에 힘을 쏟을 겁니다. 또한 농민들에게 무엇보다 절실한 문제인 농산물 수입 개방, 쌀 수입 개방에 대해서는 강기갑 의원과 힘을 합쳐 활동할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국민 대다수가 뿌리 깊은 정치 불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민노당 10명의 의원도 물들고 썩기 전에 초선만 하고 나오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습니다. 현 의원께서 갖고 계신 비전을 제시해주시기 바랍니다. 4년 후에 또 하느냐 마느냐에 대해서는 의원들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다만 민노당 의원들이 썩은 정치인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실제로 민노당의 경우 당 규약에 당원 소환제가 있어요. 당원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거나 반하는 활동을 하는 의원에 대해서는 당원의 소환이 가능하죠. 그리고 우리나라 정치에도 이제 희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노당 의원 10명의 국회 진출 자체가 희망의 전조예요. 다른 당의 의원들도 함께 대화하고 일하다 보면 개혁적인 성향을 가진 분들이 많구요. 희망을 가지고 지켜봐주시기 바랍니다. 글 / 박연정 기자  사진 / 황정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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