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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통합당 김두관 대선 예비 후보 부인 채정자 여사
- 2012. 09. 13 16:19 화제
- 김두관 후보의 부인, 채정자 여사는 연애와 결혼 이야기를 솔직 담백하게 전해주었는데 뜻밖에도 이혼을 생각했던 힘들었던 가정사까지 거침없이 들려주었다. 하지만 알고 보면 ‘내조의 정석’을 실천하고 있는 채정자 여사. 김 후보가 큰 뜻을 품고 추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렇듯 마음 든든한 내조가 있었다. 여고생 때 만난 더벅머리 총각과 10년 연애결혼 최근 경남도지사를 중도 사퇴하고, 민주통합당의 경선에 도전장을 내민 김두관(55) 후보는 후발주자로 대선 예비 후보 대열에 이름을 올리면서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이런 김 후보 옆에서 더욱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부인 채정자(53) 여사다. 채 여사 역시 최근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국민과 소통과 교감을 시도하느라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그 와중에 잠시 시간을 낸 채 여사를 서울 정동의 한 카페에서 만날 수 있었다. 요즘 오렌지 컬러가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이라는 걸 알았을까. 은은하고 고급스러운 오렌지 컬러 재킷을 입은 채정자 여사가 환하게 웃으며 기자를 맞았다. 스타일리스트나 헤어, 메이크업 전문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 화장과 머리는 물론 의상 선택까지 손수 챙겼다고 하는데, 센스가 대단했다. 이장 출신으로 군수, 행정자치부 장관, 경남도지사, 그리고 대권에 도전하는 김두관 후보의 부인으로서 쉽지 않은 길을 걸어왔을 텐데, 김 후보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는지 궁금했다. “저희는 연애결혼을 했어요. 남편을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였죠. 당시 제가 부산에서 살고 있었는데, 남편이 고3때 공무원 시험 공부를 위해 부산으로 왔었거든요. 친척집에서 우연히 남편을 만났는데, 제 스타일이 아니었어요(웃음). 보통 여고생의 남자 보는 기준은 멋있고 잘생긴 사람이잖아요. 그때 더벅머리를 한 남편을 보면서 ‘뭐 저런 사람이 다 있나’싶어 굉장히 쌀쌀맞게 대했던 기억이 나요.” 하지만 더벅머리 총각은 자신을 쌀쌀맞게 대했던 여고생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 이후로 그 친척집에 자주 놀러 왔고 자연스럽게 친분이 쌓이면서 ‘오빠’, ‘동생’ 사이로 편안하게 지내기 시작했다. “제게 오빠가 없어서 그랬는지, 편안한 오빠 같은 느낌이 좋았아요. 무슨 이야기를 해도 ‘허허허’ 웃으면서 받아주고, 순박했어요. 자기가 가진 게 없었는데도 늘 당당하고 거리낌 없는 모습도 보기 좋았고요.” 그렇게 1년에 두세 번씩 만나면서 지내다가 채 여사가 스물한 살이 되던 어느 날, 그 더벅머리 오빠로부터 한 장의 편지를 받았다. 프러포즈였다. “사실 남편은 부산에 내려와도 친구들을 먼저 만나고, 본인 볼 일 다 끝나고 나서야 저를 만나러 와요. 연애를 잘 못하는 스타일이었는데, 제 마음이 왜 움직였는지 몰라요(웃음). 어느 날 편지 다섯 장을 주더라고요. 제가 자신을 편안하게 해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면서요. 문제는 남편이 그 당시부터 정치를 할 생각을 품고 있었기에 자신과 결혼하면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고 말했죠. 경제적인 부분까지 다 책임져야 하니 자신과 인생을 함께해달라고 말 못하겠다며, 보통 사람처럼 살고 싶으면 다른 사람을 만나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저는 속으로 결혼하면 별수 없이 가정을 책임질 수밖에 없겠지, 라고 생각했어요.” 프러포즈를 받고도 몇 년이 더 지난 후 만난 지 10년째 되던 해 두 사람은 결혼을 하기에 이르렀다. 채 여사는 결혼을 하면서 지혜롭게 머리를 굴려서 ‘이 남자가 사회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만들어야지’라는 야심 찬 포부도 세웠다. 하지만 이런 속셈은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채 여사는 기자를 향해 “제가 결혼 후 얼마 만에 남편을 내려놓았을 것 같으세요?”라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고, 기자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3개월이에요”라고 답했다. 첫 번째 사건은 신혼여행을 다녀온 직후 남편의 무단 외박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당당한 모습으로 들어오는 남편의 모습에 채 여사는 오히려 할 말을 잃었다. “결혼 초반에 못된 버릇을 단단히 고쳐놓겠다고 얼마나 벼르고 있었겠어요. 결혼 3일 만에 무단 외박이라니, 큰 충격을 받았죠. 그런데 남편은 오히려 저에게 일이 있어서 못 들어온 건데 화를 내다니 섭섭하다고 하는 거예요.”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그 뒤로도 남편은 12시 이전에 집에 들어오는 날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결혼 3개월 만에 채 여사는 ‘안방 문을 열고 들어오면 내 남자, 안방 문을 열고 나가면 남의 남자’라고 생각하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남편에 대한 기대를 모두 접었더니, 마음이 굉장히 편안해졌다고 한다. 결혼 7년 동안 한 번도 생활비 받아본 적 없어 일찌감치 정치에 뜻을 두었던 김 후보는 결혼한 이듬해인 1988년 총선에 출마했다. 아무런 지지 세력이 없는 상태에서 말이다. 누가 봐도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승산은 없었다. 그러나 남편이 그 선거에서 노린 의도는 상대 후보자에게 견제 세력이 있으니 긴장을 늦추지 말라는 것이었다. “너무나 무모했지만 말릴 수가 없었어요. 힘들었다기보다 서럽고 가슴 아픈 선거를 치렀지요. 당시 야당은 ‘빨갱이’라는 질타를 받았거든요. 그때 마음고생했던 것에 비하면 지금 힘든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사이 아이들도 태어났다. 하지만 남편은 여전히 경제활동은 뒷전이었고, 야권에서 농민운동을 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있었다. 채 여사의 부모님들도 상처를 받으며 힘들어했다. 결국 결혼 3년 만에 채 여사는 ‘이혼’이라는 단어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결혼 3년째가 되니까 이제 더 이상 함께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었어요. 그런데 아이들이 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중에 저 아이들의 인생이 어떻게 될까 싶은 마음에 ‘내 한 몸 희생해서 세 사람 한번 살려보자’라는 결론에 이르게 됐어요.” 채 여사는 남편이 남해군수가 될 때까지 결혼 7년 동안 한 번도 생활비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시어머니까지 모시면서 아이들을 키우고, 가계를 이끌면서 살아야 했던 채 여사는 안 해본 일이 없다. 남대문과 동대문에서 옷을 떼어다가 옷가게도 직접 운영했고 꽃가게, 북카페, 뼈다귀 해장국집은 물론 해수욕장에서 국수도 팔고 주점도 운영했다. “지금 생각하면 다시는 그렇게 못할 것 같아요. 당시 남편에게 ‘이럴 거면 왜 결혼을 했느냐? 자유롭게 혼자서 하고 싶은 일이나 하면서 살지!’라고 따졌더니, 그냥 웃으면서 한마디만 하더라고요. ‘우린 운명이야’라고요.” 채 여사는 슬하에 직장생활을 하는 딸(25)과 대학생인 아들(24)을 두었다. 자녀들의 교육에 대해서는 욕심부리지 않고 아이들이 하고 싶은 걸 배우게 해줬다. 채 여사도 원래 간호대학을 가거나 미술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여자는 안된다’는 아버지의 반대 때문에 대학진학은 생각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너희 인생은 너희들 거니까 인생이 아름답고 즐거울 수 있도록 스스로 노력하라고 말하곤 했죠. 학원은 가고 싶지 않으면 가지 말라고 했고, 대신 학교수업을 철저하게 하라고 했어요. 대신 책이나 신문 읽는 습관을 들이고 뉴스를 꼭 챙겨 보게 했어요.” 채 여사의 교육 방침 중 특이한 건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는 방식이다. 집안일을 ‘봉사활동’이라고 규정짓고, 재활용쓰레기 버리기, 청소기 돌리기, 설거지하기 등 한 건에 5백원씩 용돈을 준 것. 독서나 예습, 복습 등 공부를 하면 좀 더 많은 용돈을 줬다. 때문에 아이들은 용돈이 많이 필요하면 집안일을 열심히 도와주거나 스스로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한다. “자식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는 말이 있잖아요. 남편에게도 우리 아이들이 당신의 뒷모습을 보고 자라고 있다는 말을 많이 했어요.”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늘 부재중이던 아버지의 빈자리는 항상 채 여사가 대신했다. 아이들은 너무 바쁜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이럴 때 채 여사는 “아빠가 일이 많아서 쉬지 못하시는데, 너희들에게 좋은 나라를 만들어주려고 바쁘신 거란다. 우리가 더 많이 이해해드리자, 라고 말해주곤 했어요. 다행히 아이들이 저와 대화를 많이 하면서 컸기 때문에 큰 불만 없이 잘 자랐어요. 지금은 아빠를 자랑스러워하고 많이 응원해주죠.” 오늘보다는 더 나은 내일이 올 것이다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가 많았기 때문에 채 여사는 늘 ‘오늘보다는 더 나은 내일이 올 것이고, 나도 즐기면서 살 수 있게 될 것이다’라고 주문을 외우고 다녔다. 그럼에도 채 여사를 가장 힘들게 했던 일은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남편의 선거 패배였다. 지금까지 총 열네 차례 크고 작은 선거들을 치러왔고, 부부는 선거에서 떨어질 때도 훌훌 잘 털어버리곤 했다. 하지만 2008년 총선 때는 달랐다. 당시 김 후보는 상대 후보에 비해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지역 출신의 다른 후보가 다시 공천을 받으면서 그 후보에게 몰표가 쏟아진 것. 50년 만에 고향 땅을 밟은 1백억원대 자산가에게 김 후보는 패배했다. “저희가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게 농어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데 우리 만 한 사람이 없다는 자긍심이었어요. 그런데 농어민들은 지역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 자산가를 선택한 거죠. 당시 남편은 많이 절망했고, 정치를 그만두고 싶다는 이야기도 했어요. 대한민국 땅을 떠나고 싶다고까지 말했죠. 그런데 며칠 뒤 여기서 그만두고 도망가면 ‘패배자 김두관’으로 남지 않겠느냐고,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말을 하더군요. 그렇다면 우리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제안했고, 남해에서 다시 새 출발을 했죠.” 채 여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기뻤던 순간 역시 남편이 선거에 당선됐을 때다. 사실 결혼 7년 만에 처음 남해군수에 당선됐을 때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주위에서는 그동안 고생을 많이 했기에 울면서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단다. 하지만 채 여사는 당선이 확정되는 순간, ‘앞으로 잘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앞서 소름이 끼치도록 착잡했다고. “축하는 많이 받았는데 환하게 웃을 수는 없었어요. 그 뒤에 행정자치부 장관이 됐을 때도 마찬가지였죠. 중앙정부에 들어가서 잘할 수 있을까 걱정했죠. 하지만 2010년 경남도지사에 당선되던 날에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을 느낄 수 있었죠. 경남에서 야권 도지사가 당선된 게 처음이었거든요. 그만큼 굉장히 뿌듯했고, ‘우리가 해냈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최근 김 후보는 아내의 내조에 90점을 주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대해 채 여사는 “제 역할이 크지 않다”라며 그 점수도 과하다고 손사래를 쳤다. 밖에 나가서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고, 집안일은 전혀 신경 쓰지 않도록 해주는 것 이외에 한 게 뭐가 있겠느냐는 것. 다만, 아침 밥상은 신경 쓰는데, 그 이유는 “밖에서 인간적으로 존중받고, 대접받을 수 있도록 잘하라는 뜻”이라고 한다. 숱한 경험들로 살림의 달인이 된 채 여사는 집안일을 도와주는 분을 한 번도 부른 적이 없다. 개인적으로 요리하는 걸 좋아하는데, 특히 시어머니가 함께 살고 계시기 때문에 밖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어보고 난 후 집에 오면 시어머니께 꼭 그 음식을 해드렸다. 또 남편 일의 특성상 손님 접대가 많다 보니 집에는 항상 밑반찬과 채소들이 준비돼 있어 손님이 오면 언제든지 푸짐한 한정식을 차려냈다. “제가 음식 장사를 할 때부터 ‘먹는 음식은 보약’이라고 생각해와서 요리하는 데 신경을 많이 써요. 그래서인지 아이들과 시어머니, 남편 모두 건강한 편이에요. 남편은 가리는 것 없이 다 잘 먹고, 운동도 좋아하죠. 특히 무척 긍정적이라 스트레스를 잘 받지 않는 성격이에요. 만약 그 스트레스를 담고 살아왔다면 아마 폭발했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무엇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습관이 있어서 이해를 잘하는 것 같아요.” 정치 일정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가고파 사실 채 여사는 남편이 대선에 출마하겠다고 했을 때 ‘절대 반대’를 외쳤다. 경남도지사 임무를 열심히 잘하겠다고 호언장담하며 인사하고 다녔는데, 도정 일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나오는 것이 영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결혼 25년 만에 처음으로 언성이 높아질 정도로 크게 부부싸움을 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도민들에게 배신감을 주면서 중도 사퇴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계속 반대를 했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이 자리에 그대로 머물면 역사에 죄인이 될 수밖에 없고, 그런 마음으로 도민들에게 어떻게 행복을 줄 수 있겠느냐고 저를 설득하더라고요. 그때 깨달았죠. 이 자리에 안주하고 싶은 이 마음조차 사심일 수 있겠구나, 라고요. 그래서 동의했어요.” 채 여사가 대선 출마를 반대한 이유는 자신의 몸 상태와도 관련이 있었다. 채 여사는 도지사 선거가 끝난 직후 유방암 1기 판정을 받고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아직 몸의 컨디션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기에 외부활동을 하는 게 여의치 않았던 것. 하지만 시대가 ‘서민 대통령’을 부르고 있다고 믿고 있는 남편의 마음을 돌려놓기란 쉽지 않았다. 채 여사는 남편의 가장 큰 장점을 ‘다수의 이익을 위해서는 욕을 먹더라도 과감히 실천하는 정신’이라고 꼽았다. 김 후보가 이장 시절부터 마을 사람들에게 욕을 먹으면서 공정한 이익 분배를 실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 후보가 국정 운영을 맡아도 그런 부분을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는 것. “제가 많이 준비되어 있지 못해서 아직은 부족합니다. 그래도 남편과 뜻을 같이하는 운명인지라 헌신하는 자세로, 모르는 건 배워서라도 해야겠지요. 약자의 편에 서서 일하겠다는 남편의 그 뜻을 펼칠 수 있도록 내조하는 게 제가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김 후보와 채 여사는 정치 일정을 마치고 난 후 고향으로 돌아갈 계획이다. 고향으로 돌아가서 여유를 갖고 많은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면서 살 수 있기를 바란다. 때문에 고향 후배들이 건네는 막걸리 잔을 마음 편하게 받아 마실 수 있도록 후회 없이 노력할 것이라고 한다. “남편은 늘 공평한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가슴에 품고 살아왔어요. 뜨거운 가슴에 가족이 있는 게 아니라 대한민국과 국민이 있는 사람이죠. 남편의 그 꿈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주고 싶어요. 이제 그것이 제 꿈이랍니다.” <■글 / 김민주 기자 ■사진 원상희 ■사진 제공 / 김두관 대선 예비 후보 사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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