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경향(총 6 건 검색)
- [내 인생의 노래]김민기 ‘두리번거리다’(2020. 07. 24 16:02)
- 2020. 07. 24 16:02 문화/과학
- ㆍ우리는 앞만 보고 살아갈 수 있을까? 헐벗은 내 몸이 뒤안에서 떠는 것은 사랑과 미움과 배움의 참을 너로부터 가르쳐 받지 못한 탓이나 하여 나는 바람 부는 처음을 알고파서 두리번거린다 말없이 찾아온 친구 곁에서 교정 뒤안의 황무지에서 무너진 내 몸이 눌리어 우는 것은 눈물과 땀과 싸움의 참이 너로부터 가리어 알지 못한 탓이나 하여 나는 바람 부는 처음을 알고파서 두리번거린다 말없이 찾아온 친구 곁에서 교정 뒤안의 황무지에서 경주마는 옆을 못 보게 한다. 앞만 보고 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말이 아닌 우리도 그렇게 사육당해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기억이 다양하게 있다. 나의 경우 그리 편안함을 향하지 않았다. “왜, 무엇 때문에”를 달고 살았다. 타인들은 나의 성격에 대해 직선적이고 독하다고 한다. 때로는 맞고 때로는 아니다. 앞만 보고 가라는 강요와 주입이 불안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혼자 있는 상상의 자유 시간을 늘렸다. 그리고 되돌아보고 다시 보기를 즐겨 했다. 지금 또 되돌아보면 나의 세대는 폐허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초등학생의 작은 가슴에 ‘10월 유신’ 쪼가리를 달고 다니라고 강요할 때 세상은 황무지였고 폐허였다. 주입을 강요받았고, 운동장에서 사람 죽이는 연습을 했다. 반전 영화 <디어 헌터>도 못 보게 했다. 최인훈의 <광장>을 보고 반공주의 글을 쓰라고 강요받았다. <사랑 손님과 어머니>를 읽고는 어머니가 새로운 사랑을 하면 안 되냐고 했더니 선생님이 미친놈이라고 했다. 절망이었다. 대통령이 사망하자 친구들은 우리 대학 못 가는 거 아니냐고 하길래, “야 인마, 분단과 냉전으로 북이나 남 모두 정권 유지하잖아”라고 했더니 그 뒤로 나는 빨갱이로 변해 있었다. 나에겐 상상의 자유와 꿈을 만들어야 할 10대 시절은 대부분 강요와 주입의 황무지로 던져졌고, 나는 폐허였다. 그리고 80년대, 도망가다 숨어서 숨죽였다. 부당함에 저항하기보다 비겁하게 무서웠다. 그곳은 또다시 폐허였다. 뒷산 바위와 소나무 사이로 친구들이 보였다. 추적추적 어둠에 의해 폐허가 안개 속에 숨어있을 즈음이면, 막걸릿집에서 꺽꺽거리며 부르던 노래가 김민기의 ‘두리번거리다’, ‘금관의 예수’, ‘상록수’, ‘아침이슬’ 등이다. 어쭙잖게 역사와 문화가 나의 관심사가 되었고, 몇 푼이나마 벌어서 먹고사는 처지가 되었다. 역사란 되돌아보기와 다시 보기다. 30, 40, 50이 되고 60을 바라보는 지금 내가 서 있는 곳도 그리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 폐허다. 사람들은 나에게 강한 것, 직선적인 것을 많이 묻고, 대답 듣기를 원한다. 나도 그렇게 변해간다. 그렇지만 물어보지 않는 말 중 하나가 있다. “유적 답사 중 당신이 가장 애착이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거돈사지나 고달사지와 같은 폐사지를 추천한다. 그곳에 가서 황무지와 폐허에서 너 자신을 갈기갈기 찢어지게 느껴라! 알제리 폐허의 원형경기장에 서 있을 때 카뮈는 나에게 말했다. 새로 복원한다고 하지 마라. 이 또한 사라지고 재생되는 자연의 순리에 맡겨라. 어느 폐사지에서 들은 노스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앞만 보고 갈 수 있을까? 그래서 좌고우면하지 않겠다는 어느 정치가를 나는 믿을 수 없다. 사람은 자기 주위를 두리번거려야 한다. 기억에 대해서도 두리번거려야 한다. 그것이 이 세상에 대한 최소한의 겸허함이다. 그리고 폐허에서 상상해본다. 내 폐허의 본질은 어디인가? 다시 사막에 서고 싶다. 비 오는 날 거돈사지 뒤 숲에서 목 놓아 부르고 싶다. “헐벗은 내 몸이 뒤안에서 떠는 것은/ 사랑과 미움과 배움의 참을/ 너로부터 가르쳐 받지 못한 탓이나// 하여 나는 바람 부는 처음을 알고파서 두리번거린다.”
- 내 인생의 노래
- [내 인생의 노래]김민기 (2020. 04. 06 15:12)
- 2020. 04. 06 15:12 문화/과학
- ㆍ깨치고 나아가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을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 온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다 서럽고 쓰리던 지난날들도 다시는 다시는 오지 말라고 땀 흘리리라 깨우치리라 거칠은 들판에 솔잎 되리라 우리들 가진 것 비록 적어도 손에 손 맞잡고 눈물 흘리니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어려서부터 수학을 좋아했다. 그러다가 수학교사가 되어 평생을 살았다. 그러나 교사로서 철이 든 것은 교직 20년차였다. 수학을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지, 왜 수학을 가르쳐야 하는지 등 수학교사로서의 정체성을 비로소 인식하기 시작했으니 나에게 20년 동안 배운 제자들에게 미안했다. 그래서 제대로 된 방황을 시작했다. 가르칠 용기가 없어 무급 휴직을 감행했고, 그 기간은 3년이나 지속됐다. 다행히 정체성을 찾아 다시 현장에 복귀한 후로는 나 자신과는 물론 학교 사회의 그 어떤 것과도 일체의 타협을 하지 않았다. 진짜 수학을 가르쳐야 했기에 20년 동안 가르친 내 인생을‘지금 가르치는 게 수학 맞습니까?’라는 물음으로 정리했다. 모든 것을 부정한 후로 비로소 긍정의 힘이 돋아났다. 복직 후 현실과 타협하지 못하는 대쪽 같은 성격은 결국 퇴직으로 이어졌다. 학교 현장은 가르칠 수 있는 용기만 가지고 해결할 수 없었다. 이번에는 휴직이 아니라 명예퇴직을 택했다. 학교를 떠나는 것만이 제대로 가르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고, 그 판단은 지금 생각하면 정말 후회가 없다. 이보다 행복할 수 없다. 퇴직 후 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의 10년 활동은 힘들었지만, 용기는 필요하지 않았다. 내가 가고 싶은 길이 아니면 가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가졌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업무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할 수 있었다. 학생들의 삶보다 수학을 가르치는 것이 더 중요한 수학계를 떠나 학생과 시민의 입장에서 수학교육을 바라보는 안목을 가질 수 있었다. 퇴직하지 않았으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을 만나지 않았으면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지 못하고 우물 안 개구리로 인생을 마무리할 뻔한 아찔함이 느껴진다. 수학계에서 시민단체로 옮기니 수학계와 멀어지게 되었다. 수학을 무조건 많이 집어넣으려는 수학계의 이익보다 시민과 학생의 입장을 고려하는 정책은 정말 인간적인 뿌듯함으로 다가왔다. 수학이 인간보다 앞설 수 없다. 삶을 떠나서는 수학교육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수천의 수학계 속에 있었는데, 이제는 수천 대 일의 대립구도 속에 살고 있다. 수십 년의 동지나 후배 교사가 수학계의 눈치 때문에 다가오기를 망설이는 것을 느낄 때 외로움보다는 씁쓸함을 느낀다. 결코 후회하지도, 겁나지도 않는다. 이럴 때마다 김민기의 노래 <상록수>는 내게 힘이 되어주었다.‘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 온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다….’ 지식 중심의 주입식 교육, 공식의 무조건적인 암기와 문제 풀이 연습으로 얼룩진 한국의 수학교육은 정말 세계적인 조소 거리일 뿐더러 온 국민에게‘수포자’라는 정서적인 열패감을 불러일으켜 왔다. 지난 5년 동안 대안교과서 <수학의 발견>을 제작한 것이 인생의 마지막 작품이 된 것은 정말 행운이다. 이제 아이들은 수포자가 될 필요가 없다. <수학의 발견>은 수포자 발생을 예방하고 치료할 백신이며, 이런 귀중한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던 행운도 사교육걱정없는세상과 함께하는 시민 덕이다. 마지막‘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라는 구절에 절망하지 않고 끝까지 갈 수 있을 거라 확신한다.
- 내 인생의 노래
- [내 인생의 노래]김민기의 살면서 놓친 ‘반음’들 복원 어려워(2019. 06. 21 15:15)
- 2019. 06. 21 15:15 문화/과학
- 서산마루에 시들어지는 지쳐버린 황혼이 창에 드리운 낡은 커튼 위에 희미하게 넘실거리네 어두움에 취해버린 작은 방안에 무슨 불을 밝혀둘까 오늘밤에는 무슨 꿈을 꿀까 아무 것도 뵈질 않네 1986년 수배자가 됐을 때, 강원도 춘천을 간 적이 있었다. 기차역 근처에 숙소를 정하고 산책을 하다 공지천을 건넜는데, 때마침 mbc 근처에서 야외 공연을 하고 있었다. 가을이 깊어가던 무렵의 밤, 호숫가에서의 문화 공연, ‘도바리’ 처지로는 난데없는 호사였다. 그 때 한 가수(한영애로 기억된다)가 기타 반주로 이 노래를 불렀다. 읊조리는 김민기와는 다른 매력을 지닌 그의 노래와 함께 밤은 깊어갔고, 돌아오는 길에 동행한 이와의 팔짱은 쌀쌀한 날씨가 아니어도 자연스러웠다. 이 노래는 너무 서정적이다. 국가의 관리 아래 외국 군대를 위안하던 곳, 한·미동맹의 중력장에 의해 뒤틀려버린 공간을 배경으로 한 노래치고는. 그럼에도 70년대 검열의 칼을 피하지 못했다. 기지촌에 세상의 관심이 모이는 걸 두려워한 것이리라. 심의를 통과하느라 제목과 가사가 바뀌었으나, 대학가에서는 원곡 그대로 불렸다. 군가풍의 투쟁가들이 학생운동의 문화가 되어 가던 때, 그 시대의 젊은이들이 가진 비감과 불안한 정서를 위로하는 노래였다. 하지만 이 노래는 부르기가 쉽지 않다. 선배들 입을 따라 배운 탓도 있으나 소절마다 나오는 반음을 살리기가 어렵다. 반음을 제대로 쳐야 노래의 맛이 사는데, 흥얼거리다보면 넘치거나 모자라기 십상이다. 우리의 세상살이도 그런 면이 있다. 누군가와의 관계, 어떤 일에서 ‘반음’을 쳐야 하는 순간에, 그걸 놓쳐 관계나 일이 틀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노래는 다시 부르면 되지만, 살면서 놓친 ‘반음’은 복원이 잘 안 된다. 난 황혼이 넘실거리는 창을 가져본 적이 없다. 내 살던 곳의 창밖은 늘 다른 집의 벽이었다. 어쩌다 앞이 트인 창을 가져도 바깥 풍경이 아름답지는 않았다. 낡은 창문은 들어오는 햇빛도 낡게 만든다. 그 안의 모든 것을 낡게 한다. 낡은 비키니장, 낡은 이불과 냄비 그리고 낡은 몸. 가사 1절의 시각적 이미지가 내 살던 공간의 분위기 그대로인 듯해 젊은 시절부터 자주 이 노래를 흥얼거리지 않았나 싶다. 80년대 말, 비밀조직의 일원으로 울산에 가게 됐다. 노동자들이 많이 살던 병영이란 곳에 방을 얻었다. 커다란 화물차부터 경운기까지 오르내리던 길가에 붙은 창고를 개조한 방이었는데, 길가로 난 창을 따라 먼지가 뿌옇게 들어왔다. 장님의 노래도, 짙은 화장으로 서성대는 젊은 여인도 없었지만, 방 분위기만은 노래 그대로였다. 버스 정류장에서 10여분 걸어 올라야 하는 길을 5분씩은 더 걸려 집에 돌아오곤 했다. 혹시 미행이 있을까, 이 골목으로 돌고 저 골목으로 빠져 뒤를 확인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던 때였기에. 그 어둑한 골목길을 걸을 때면 이 노래가 두서없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그때 나를 울산으로 보낸 이가 노회찬 선배였다는 얘기를 얼마 전에 들었다. 서산에 해가 아직 높은데 그리 서둘러 가시니, 그와의 만남에서 내가 놓친 반음들이 떠올라 미안하고 그립다. 영면하는 이에게도 꿈이 찾아오면, 오늘밤 그는 무슨 꿈을 꿀까.
- 내 인생의 노래
- [내 인생의 노래]김민기의 (2018. 12. 24 14:10)
- 2018. 12. 24 14:10 문화/과학
- ㆍ저 녹슨 철조망은 언제쯤 없어질까 빗방울이 떨어지려나 들어봐 저 소리 아이들이 울고 서 있어 먹구름도 몰려와 자 총을 내리고 두 손 마주잡고 힘없이 서 있는 녹슨 철조망을 걷어 버려요 자 총을 내리고 두 손 마주잡고 힘없이 서 있는 녹슨 철조망을 걷어 버려요 “내 마음에 흐르는 시냇물 미움의 골짜기로 ~ 새들은 날으게 냇물도 흐르게 풀벌레 오가고 바람은 흐르고 마음도 흐르게 자 총을 내려 ~ 힘없이 서 있는 녹슨 철조망을 걷어버려요~” 김민기가 만들고 한동준 장필순이 같이 부른 노래다. 나는 25년째 서울 명륜동에서 인문사회과학 책방을 꾸리고 있다. 책을 사러 오는 사람들은 점점 적어지고 빚은 늘어만 간다. 책방이 지하에 있어 음악을 크게 틀어도 밖에서 들리지 않는다. 마음이 울적할 때 자주 듣는 노래다. 한반도 남녘과 북녘이 이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큰 맘 한 번 먹으면 통일이 될 듯도 한데. 왜 안 되는 것일까. 김민기가 들려주는 노래를 듣다보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책방에는 김민기가 15년 전쯤 한정판 1000개를 만들어 판 디스크음반이 있다. 김민기 전곡이 들어간 6장 음반이다. 그 때 돈으로 10만원을 주고 샀다. 지금이면 30만원쯤 될까. 그때는 책방 살림이 괜찮아서 큰돈을 주고 샀다. ‘아침이슬’, ‘봉우리’, ‘친구’, ‘작은 연못’, ‘늙은 군인의 노래’, ‘상록수’도 들어 있다. 모두 나름대로 가슴을 따뜻하게 하다가 아프게 하는 곡이다. 또 이 노래는 아내와 노래방에 갔을 때 둘이 같이 부른다. 나는 음정·박자를 못 맞춘다. 남들은 노래방기기가 없으면 노래를 못 부른다고 하는데 나는 반대다. 노래방에서 나오는 반주를 따라가지 못하고 내 멋대로 부른다. 이 노래를 혼자서 자주 불렀더니 그나마 노래방에서도 가락을 맞추는 편이다. 지금 문재인 정부에서 통일의 물꼬를 다시 트려고 애쓴다. 군사분계선에 있는 군대를 비무장시키고 끊어진 남북 철도를 이으려 한다. 손뼉 쳐주고 싶다. 통일을 바라는 남과 북 사람들은 이미 새가 되어 철조망을 걷고 마음껏 날아가고 있지 않을까. 물론 이런 통일이 한반도 남쪽에 있는 자본가들과 북쪽에 있는 권력자들 배를 불리고 민중들 삶을 옥죈다면 어쩌나. 지난 12월 11일 한반도 남녘에 있는 태안화력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님이 24살 나이로 일을 하다 기계에 끼여 몸이 갈라지는 고통을 당하며 목숨을 달리했다. 오로지 생산성 향상을 바라며 적은 돈을 주고 무리한 노동을 강요한 결과다. 1970년 청계천에서 전태일은 ‘노동자도 인간이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고 외치며 몸을 불살랐다. 그 뒤로 5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지만 노동자 정책은 달라진 것이 없다. 한반도 북녘은 어떤가. 핵무기를 만들어 군사대국을 꿈꾼다. 핵무기가 잠시는 한반도 평화를 가져 올 수 있다. 하지만 무력을 통한 평화가 얼마나 오래갈까. 녹슨 분단 철조망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내가 좋아하는 어린이 책을 썼던 권정생 말처럼 한반도 남녘 사람들이 죽을 쑤어 먹으며 쌀을 아껴서 굶주리는 한반도 북녘 아이들에게 주는 것이 통일을 앞당기는 밑돌이다. 참 꿈 같은 이야기다. 김민기 노래를 들으며 마음만 달래는 나도 바보다. 그러니 적자 나는 책방을 이토록 하고 있겠지.
- 내 인생의 노래
- [내 인생의 노래]김민기의 ‘백구’-어릴 적 아련한 기억을 보듬다(2017. 05. 02 11:00)
- 2017. 05. 02 11:00 문화/과학
- 내가 아주 어릴 때 먼 나라로 해외출장을 가신 아빠는 막내인 내가 중학교를 다 마칠 때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으셨다. 엄마는 바쁘셨고, 언니와 오빠는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느라 바빴다. 집에서 늘 외톨이였던 나의 외로움을 채워줬던 건 개들과 음악이었다. 우리 집엔 늘 개가 있었는데, 그 중 띵구라는 개는 내가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이라는 프랑스 샹송을 연주하면 늑대처럼 목을 쳐들고 구슬프게 노래하곤 했다. 다른 곡을 연주할 때는 노래하지 않고, 오직 그 곡을 연주하면 노래했다. 띵구는 전생에 프랑스 사람이었나? 띵구의 마음을 알 턱은 없었지만 나는 그를 유심히 관찰하며 동물들 역시 인간처럼 각자의 취향이 있고 감정이 풍부한 존재라는 걸 알게 됐다. 대학을 졸업하고 20대 중반에 때늦은 방황을 시작한 나는, 버젓한 직장에 느닷없이 사표를 내고 스스로를 망망대해에 던졌다. 공식대로 정해진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아 내 인생의 길을 찾아 헤매며 폭풍 같은 날들을 보내던 스물 몇 살 어느 날. 김민기의 4집 앨범을 듣게 됐다. ‘봉우리’, ‘작은 연못’ 같은 명곡이 줄줄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백구’. “내가 아주 어릴 때였나. 우리 집에 살던 백구. 해마다 봄가을이면 귀여운 강아지 낳았지. 어느 해 가을엔가 강아지를 낳다가 가엾은 우리 백구는 쓰러져 버렸지.” 여자아이의 목소리로 이렇게 시작되는 곡은 노래인 듯, 이야기인 듯, 백구의 사연을 조용조용 들려줬다. 백구는 동물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무서워 도망을 치고, 여자아이는 온동네를 돌아다니며 백구를 찾아 헤맨다. 결국, 차에 치여 사고를 당한 백구를 발견하게 되고, 아이는 백구를 뒷동산에 묻어준다. 이 노래를 들으며 나는 유년기에 누구보다 소중한 친구였던 개들의 최후를 한 번도 지켜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들은 늘 우리 엄마에 의해 어딘가로 보내졌다. 띵구는 어디서 어떤 노년을 보냈을까. 벤은 어떻게 됐을까. 내 잘못이 아니었지만, 친구들의 노년과 최후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미안함은 내게 한편으론 상처가 되고 한편으론 평생의 화두가 되었다. 지금까지 줄곧 인간과 비인간 동물의 관계를 주제로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고 있다. (2006년)를 만들면서 나는 너무 많은 야생동물들이 억울하고 갑작스런 교통사고(로드 킬)로 비명횡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 영화에 나오는 야생 삵 ‘팔팔이’는 88고속도로에서 사고를 당해 의식불명이 된 상태로 전남 순천까지 가서 치료를 받는다. 그 후 구례에 있는 임시보호소에 머물다가, 한 달 후 야생으로 방사된다. 팔팔이는 10개도 넘는 도로를 건너, 무려 30km 떨어진, 자신이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가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같은 자리에서 또다시 사고를 당한다. 대대손손 이 땅에서 살아온 원주민 야생동물들의 서식지를 마구잡이로 파헤치며 이 순간에도 불필요한 도로들이 신설되거나 확장되고 있다. 그 위에서 얼마나 많은 팔팔이와 백구들이 먼지처럼 사라져갈까. 그리고 또 얼마나 많은 어린이와 청소년과 노인과 장애인과 여성과 노동자와 농민과 이주민들이 현기증 나는 한국 사회의 ‘속도’를 따르지 못하고 희생을 강요받을까. 기타로 시작하지만 마지막 부분에는 성당의 쳄발로 소리가 작게 울려 퍼지는 ‘백구’는 유년기와, 가족과, 소중한 것들과 갑작스레 슬픈 이별을 해야 했던 이들의 먹먹한 가슴을 어루만지는 아름다운 영가(靈歌)이다.
- 내 인생의 노래
- [내 인생의 노래]김민기의 ‘아름다운 사람’-가난해도 괜찮은 사회를 위해(2017. 04. 17 16:40)
- 2017. 04. 17 16:40 문화/과학
- 국회의원이 되기 직전까지 내 젊은 나날은 음악과 술로 그저 충만해 있었다. 그 시절 기쁨은 별로 없었지만, 밑도 끝도 없는 슬픔과 우울함, 뜬금없이 애처럼 깔깔거리던 즐거움과 광기를 모두 술과 음악 사이에서 녹여냈다. 그리고 20대에는 내 자신이 언제까지나 록 스피릿으로 살 거라고 믿었다. 20대 중반이었던가? 팻 매시니와 이병우의 음악을 들으면서 록 스피릿이 내 안의 전부는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30대에는 그냥 모든 음악이 좋았다. 갖가지 음악에 대한 포용력이 생길수록 내 안의 여러 가지 모습들, 모순들, 부끄러울 정도로 나태한 나의 본모습까지 점차 사랑하게 되었다. 어렵사리 발견한 내 인생의 노래는 김민기님의 이다. 나는 이 곡을 재즈 보컬리스트 나윤선님의 음성으로 처음 들었고, 두 분의 연주가 각각 아름다우니 감상해보시기를 권한다. 나는 가난한 홀어머니 밑에서 외동딸로 자랐다. 초등학교 1~2학년 때까지는 혼자 잘 수가 없어서 엄마 일이 끝날 때까지는 고기 굽고 술 마시는 손님들 등 뒤에 방석 3개를 깔고 잠을 잤다. 아무리 씻고 옷을 빨아도 나한테서는 식당 냄새가 났다. 게다가 늘 뚱뚱했고 점점 뚱뚱해졌다. 5~6학년 때부터는 여드름까지 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부도 곧잘 하고, 반장도 도맡아 하고, 글짓기대회나 미술대회에 나가면 입선은 하고, 비만이지만 운동도 잘하고, 무엇보다 부끄러운 내색을 하지 않아서인지 아무도 나의 식당냄새를 대놓고 놀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늘 부끄러웠다. 나의 외모와 나의 냄새와 나의 가난이.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는 늘 밝고, 씩씩하고, 꿋꿋하고, 당차고, 웃긴 모습만 보여주려고 했던 거다. 앳된 나이에 걸맞지 않은 뒤엉킨 감정. 그런 나에게 주고 싶은 노래가 바로 이다. 그 옛날 초등학교 도서실에 꽂힌 위인전기를 하나도 빼지 않고 다 읽었는데, 주인공들은 십중팔구 가난하고 고아이거나 결손가정 출신에 장애인이거나 괴짜였기에 ‘나는 위인이 되는 필수요소를 가졌구나’ 하고 내심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까지도 가난은 나의 힘이다. 가난이 두렵지 않다는 것은 정말 큰 무기다. 내 삶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도, 가난과 친한 내 자신이 참 다행이다. 무엇보다 내가 지금 시민사회운동이나 정치를 하는 이유 역시 가난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어린이도 원하는 만큼 교육받을 수 있는 사회,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과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나의 꿈이다. 이것은 나의 과거이면서 내 딸의 미래이기에 나는 싸울 수밖에 없다. 나는 내 딸에게 별수 없이 가난을 물려줄 것이기에 그래서 가난해도 괜찮은 사회를 만들어야만 한다. 그리고 내 딸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어린이의 꿈은 한 사회가 지켜내야 할 최고의 가치이기에 나는 오늘도 가난을 무기로 싸운다. 모든 어린이는 이다. 이 원고를 쓰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식당냄새 나는, 남색 체육복을 입은 뚱뚱한 여자아이를 기억해냈다. 그 때 그 아이에게는 '너 참 기특하다. 힘들지는 않니?' 물어봐주는 사람이 없었다. 겉보기에는 늘 주의산만한 말괄량이였기에 아무도 그 아이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었으리라. 30년이 지난 지금 내가 그 아이를 꼬옥 안아본다. 제법 잘 버텨주었어. 고마워. 너는 있는 그대로 아름다워.
- 내 인생의 노래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