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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경향(총 2 건 검색)

특별한 김웅용의 평범한 행복 찾기
특별한 김웅용의 평범한 행복 찾기
2014. 02. 27 16:47 화제
한국의 천재, 김웅용. 4세에 4개 국어를 하고 5세 때 일본 후지TV에 출연해 도쿄대 교수가 낸 미적분을 풀어 세간에 화제가 됐다. 8세 때는 미국항공우주국(NASA)에서 연구원 활동을 했었다. 그러나 그에게 평범한 삶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현지 적응 실패 후 귀국한 그는 검정고시로 정규교육을 대신하며 평범한 삶을 택했다. 그런 그에게 들려온 소식, 대학교수로 임용이 됐다는 것. 그를 만났다. 실패한 천재? 실패하지 않았고 천재도 아니다 “제가 꿈을 이뤘다고요? 아닙니다.” 충북개발공사 사업처 처장으로 재직해왔던 김웅용씨(52)는 최근 의정부에 위치한 신한대학교에 교수로 임용됐다. 그런데 그는 근황을 전하는 뉴스 중 ‘그가 교수의 꿈을 이뤘다’라는 제목에 대해서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대학교수가 꿈이었다면 이미 이뤘으니 더 이상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다는 건가요? 제 꿈은 교수가 아니에요. 일단 제자들을 번듯하게 가르쳐 사회에 내보내는 것이 하나의 꿈이고, 또 연구 실적을 좀 더 쌓고 싶어요. 나아가 노벨상에도 도전해보고 싶고요.”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그에게 ‘천재’라는 꼬리표는 여전히 따라다니고 있다. 많은 오해도 있었고, 때로는 상처가 되기도 했다. 김웅용씨는 대학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하고 충북개발공사에서 일해왔다. 아파트, 공장, 도로 부지에 대한 인허가를 받고 직접 토지를 설계하는 일이다. “종종 단체에서 강의 의뢰가 들어왔어요. 그래서 내용을 들어보면 제게 영재교육에 대한 강의를 해달라는 거예요. 제 전공은 토목인데 말이죠. 전 영재교육 전문가가 아니라고 이야기하면 실패담을 토대로 강의하라고 하더군요. 그건 들추기 싫은 과거의 상처일 수 있는데 참 당연하게 부탁하더라고요.” “자녀들이 공부를 잘하느냐”는 것도 사람들의 단골 질문이다. 그는 한 사람에 대한 평가 기준을 ‘공부’로 삼는 것은 무척 편협한 시각이라 지적한다. 또 “천재가 그것도 못하느냐”라는 농담도 불편할 따름이다. 모든 것을 다 잘해야 천재라면 자신은 천재가 아니라고 말한다. “제가 길치예요. 길을 헷갈려 하면 옆 사람이 ‘천재가 길도 몰라요?’라고 농담하듯 이야기해요. 모든 것에 완벽한 사람이 있을까요? 피겨스케이팅의 김연아 선수를 보세요. 자신의 재능을 알고 부단히 노력해 피겨 천재가 됐잖아요.” 그는 ‘모든 것을 다 잘해야 천재, 영재’라는 우리의 인식은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오히려 숨겨진 영재들을 발굴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 “정부가 기존 상위 5%에 대한 영재교육의 폭을 넓혀 10%의 아이들에게 영재교육을 시키겠다고 발표했죠. 영재교육을 하면 그 애가 저절로 영재가 될까요? 그럼 하는 김에 20%로 늘리지요? 영재는 발굴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이가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고 거기에 맞게 개발하는 것이 진짜 영재교육이죠.” 우리의 영재교육은 과도하게 과학과 수학에 편중돼 있다. 다양한 분야의 영재교육 전문가 양성이 필요하다. 모든 과목에서 높은 등급을 받아야 일류 대학에 갈 수 있는 지금의 교육제도도 개선돼야 한다. “저는 15년 동안 대학에서 연구교수로 강의를 해왔어요. 그때 학생들의 학점 관리라는 걸 알았어요. 90점만 맞으면 A플러스예요. 깊이 공부해서 100점 맞을 필요가 없어요. 차라리 그 시간에 다른 과목을 90점이 되도록 공부하는 게 낫죠. 100점과 85점을 맞은 학생보다 두 과목 모두 90점을 맞은 학생이 높이 평가받고 장학금도 타죠. 내신 등급도 마찬가지죠. 이런 제도가 더 파고들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원천적으로 막아버린다고 생각합니다. 골고루 잘해야 잘하는 거지, 한쪽만 특별히 잘하는 건 의미가 없는 거죠.” 그는 특화된 적성을 살려 교육시키는 것이 영재교육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아이를 영재로 만들고 싶다면 ‘특화된 재능’에 먼저 주목해야 한다. 누구나 한 가지 재주는 타고났으니 말이다. 누구나 가질 수 있는 행복도 소중하다 어릴 때부터 실력을 인정받고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김웅용씨. 그에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가장 평범했던 ‘대학 시절’이라고 고백한다. 누구나 우러러보는 높은 위치보다 특별하지 않은 일상에서 느끼는 소소한 즐거움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사람들은 늘 특별한 걸 찾으려 하고 남들과 다르지 않은 평범함을 버리려 하죠. 아이를 1천만원짜리 유치원에 보내기도 하고요. 남들보다 특별하고 싶어서요. 그렇지만 당연하게 주어지는 평범함의 소중함도 아셔야 해요. 저는 누구나 저절로 얻을 수 있는 초·중·고 학창 시절 동창생이 없어요.” 그는 미국 대학에서 석사와 박사과정을 이수했고, NASA 연구소의 경력증명서가 있었지만 한국에서 취직을 할 수가 없었다. 대학교 졸업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뒤늦게 검정고시를 보고 대학에 입학했다. “국내 대학에 입학하면서 내심 나에게도 동문 친구가 생긴다는 생각에 기뻤어요. 그런데 입학하고 보니 대학교 친구보다 친한 것이 고등학교 친구더군요. 학내에 고등학교 동문회가 따로 있었죠. 저는 어디에도 속할 수가 없잖아요. 그런 소소한 행복… 그게 얼마나 좋은 건지 모르실 거예요.” 그는 비교적 인원이 적었던 원주고등학교 동문회에 문을 두드려보았다. 모교에 대한 지식 없이는 받아줄 수 없다는 말에 그는 원주고까지 찾아갔다. “교가 부르기와 수학선생님 별명을 맞추는 테스트를 거친 뒤에 ‘성의가 괘씸하다’라는 이유로 원주고 동문 모임에 들어갈 수 있었어요. 지금도 후배들이 제가 원주고 출신인 줄 알고 각종 학교 우편물을 보내줘요(웃음). 남들이 저절로 얻는 것들을 저는 노력해서 얻어야 했죠.” 또 제일 가보고 싶었던 것이 학교 소풍과 수학여행이었다. 교복도 입어보고 싶었다. “친구들이 ‘소풍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한참 걸어갔다가 밥 먹고 오는 거야’라고 하지만 저는 경험해보지 못한 거잖아요. 그런 게 행복이죠. 아이가 학원을 전전하며 1등을 하는 것이 행복이 아니지요.” 친구들과 함께 운동장에서 뛰어놀아보지 못한 아이가 과연 나라의 인재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협동심을 모르는 아이들은 커서 동료들과 공동연구를 할 수 없다. 요즘 이공계 분야 노벨상은 공동연구가 아니면 수상이 불가능하다. “요즘 대학생들은 동아리 가입도 잘 안 한다고 해요. 그룹 과제도 잘 못하고요. 조를 짜놓으면 뭉치지 못해서 하는 사람만 한다더군요. 앞으로 학생들의 이런 취약한 부분을 메울 수 있는 교수법이나 규칙을 만들려고 해요.” 처음이란 단어는 설렘과 함께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운을 북돋아준다. 대학교에서 첫 제자를 맞는 그의 첫걸음도 마찬가지다. 공부시키는 것, 부모의 역할이 아니다 김웅용씨에게는 두 아들이 있다. 큰아들이 고등학교 1학년, 작은아들이 중학교 1학년이다. 큰아들은 운동을 좋아하고 작은아들은 춤과 노래에 관심이 많다. 둘 다 특출하게 공부를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학교 임원이 될 정도로 리더십과 사회성이 좋다. 아이들의 재능을 눈여겨보고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 그것이 교육이다. “아내와 맞벌이하는 동안에 키운 큰아이는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어요. 예방접종도 못 맞춰 병이란 병은 다 걸렸죠. 그래서 어린이집 대신 스포츠 클럽에 보냈어요. 애가 운동을 하고 건강해지니 성격까지 변하더라고요.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아요. ‘사회성을 더 키워주면 좋겠구나’ 생각했죠.” 12세 무렵 큰아이는 이탈리아에 사는 고모 댁에 놀러 가자고 떼를 썼다. 축구를 좋아해 유럽 프로리그를 직접 보고 싶다는 이유였다. “‘엄마, 아빠는 돈이 없으니까 가고 싶으면 혼자 가라’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아이가 혼자 가겠다고 하더군요. 이탈리아까지 직항이 없던 시절이라 프랑크푸르트 경유를 해야 했어요. 결국 이름표 하나 달고 무사히 공항에 도착해 고모 품에 안겼어요. 그 과정에서 느끼는 성취감으로 아이는 한 단계씩 성장하는 거죠.” 그는 휴대전화에서 한 장의 사진을 보여줬다. 당시 아들이 분데스리가에서 뛰던 축구선수 차두리를 만나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아이는 친화력이 좋고 리더십이 있어요. 그쪽으로 키워야지요. 공부만 시키면 뭐 하겠어요. 부모는 아이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도와줘야 해요. 시키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 아니에요.” 부모들이 아이를 사설 학원에 보내는 이유는 한 가지다. ‘우리 애가 뒤처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 때문. 우리 아이가 평균은 돼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있는 건 아닐까? “부모는 안절부절못할 시간에 ‘우리 아이가 원하는 것’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해요. 잘 모르겠다 싶으면 아이에게 경험이라는 자극을 주면서 소질을 찾아보기도 하고요. 특별한 사회 권력층이 되길 바라기보다 아이가 삶의 보람을 찾는 것, 그것에 주목하면 됩니다.” 따뜻한 봄날이 찾아오면 김웅용 교수의 첫 강의가 시작된다. 제자들을 만날 생각에 설렌다. 그는 먼 길을 돌아서 이제야 자기에게 꼭 맞는 자리를 찾은 듯 보였다. 범사의 소중함을 아는 그는 바로 ‘행복 천재’였다. <■글 / 이유진 기자 ■사진 / 김영길>
웃음 넘치는 세상을 꿈꾸는‘웃음학’ 박사 김웅래 교수
2005. 10. 01 화제
“어디서든지 코미디의 ‘코’, 웃음의 ‘웃’, 유머의 ‘유’자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죠” 인덕대 방송연예과 김웅래 교수가 대학로에 코미디 전문 소극장을 열었다. KBS 간판 코미디 프로그램 ‘유머1번지’의 연출자로서 30여 년을 오직 코미디 연출에만 힘써온 그는 자타 공인의 코미디계 ‘대부’다. 웃음의 소재를 찾기 위해 항상 예민한 촉수를 드리우고 사는 김 교수는 재기 발랄한 젊은이들을 능가하는 아이디어맨이기도 하다. 소(小)극장 아닌 소(笑)극장 개관 물기 한 점 없이 따스한 햇살이 쏟아지는 가을 오후. 대학로는 여전히 활기가 넘친다. 청바지 차림의 김웅래 교수(59)도 경쾌한 걸음으로 그 거리를 걸어온다. 활짝 웃는 표정이 얼핏 하회탈을 닮았다. 하기야 코미디라는 한 우물만 서른 해를 팠으니 본시 굳은 표정이었대도 그리 되지 않고는 못배겼으리라. “삼순이, 금순이가 그간 난리였지요? 그런데 삼순, 금순에 이어 ‘곧 다가올’ 또 하나의 ‘순’이 있다던데 뭔 줄 아십니까?” 뭘까, 뭘까 잠깐의 고민이 이어지는 순간 그가 툭 하고 던진 ‘정답’ 한마디에 곧바로 웃음이 터진다. “‘커밍순’이요.” 뭔가 대단히 재밌는 얘기를 들려줄 것 같지는 않은 범상한 말투와 표정. 그래서인지 뒤이어 터져나온 웃음은 더 크고 유쾌했다. 모르긴 몰라도 그것 역시 그의 ‘웃음 전략’이 아닐는지. 올해 3월 KBS에서 정년퇴임하고 곧바로 인덕대 방송연예과 교수로 초빙된 김웅래 교수는 최근 코미디 전문 소극장을 오픈했다. 대학로 한복판 몫 좋은 곳에 개관한 ‘신연아트홀’이 바로 그곳이다. 그에 따르면 신연아트홀은 “소(小)극장이 아니라 소(笑)극장”이다. 김교수다운 유쾌한 발상이다. 극장을 둘러보니 그의 새심한 정성이 엿보인다. 노량진 재수 학원의 빽빽한 의자처럼 좁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일반 소극장 좌석과는 확연히 달라 보인다. 의자간 간격도 널찍하고 계단식으로 설치된 좌석의 높낮이도 적절하다. “평생 월급만 받고 살다 처음으로 투자한 것”이니 처음부터 끝까지 얼마나 꼼꼼한 손길이 닿았을지 능히 짐작이 된다. 아닌게 아니라 수개월 동안 공사 현장에서 들이마신 먼지만도 엄청나다고 한다. “KBS ‘개그사냥’ 오디션을 하다 보니 우리 학생들을 비롯해서 개그맨 지망생들 훈련할 장소가 만만치 않더군요. 대학로 소극장을 몇 개월간 빌려봤지만 그것 역시 여의치 않았구요. 마음놓고 아이들 훈련시킬 장소를 찾다가 아예 소극장을 차리게 됐어요. 하지만 개그콘서트나 웃찾사류의 공연은 하지 않겠다는 게 저의 신조입니다. 앞으로 좋은 코미디 연극을 무대에 올릴 생각입니다.” 평생 모아온 ‘웃음’ 자료로 코미디 박물관 건립 지난 30여 년간 사람들을 웃기는 일에 매진해온 김 교수는 자타가 공인하는 ‘웃음 박사’다. 그가 만들어내는 웃음은 그러나 저절로 쉽게 나오는 것은 아니다. 남을 웃기는 일처럼 어려운 일이 없는 만큼 그의 부단한 연구는 쉴 새 없이 이어진다. 그는 그것을 한마디로 ‘관심’이라 표현한다. 관심이 없으면 주위에 널린 웃음의 소재를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다. 반대로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면 마치 낚시꾼이 고기를 끌어 올리듯 웃음의 포인트를 낚아 올릴 수 있다는 것. 그는 평소 길을 걷다가도 각종 공연이나 영화 포스터, 재미난 간판 등을 세심하게 눈여겨본다. 그리고는 사진으로 찍어 기록으로 남긴다. 디지털 카메라가 처음 나왔을 때도 가장 먼저 구입해서 가지고 다녔을 정도. 웃음에 관한 한 말 그대로 ‘얼리 어댑터’인 셈이다. “언제 어디서든 코미디의 코, 웃음의 웃, 유머의 유 자 앞에선 일단 걸음을 멈춥니다. 그동안 수집해온 각종 조크북과 유머 사진첩만도 그 양이 엄청나요. 외국에 출장을 나가도 남들은 쇼핑하느라 바쁘지만 전 조크북, 유머 일러스트집, 카툰 모음집, 재미난 사진 엽서 등을 사느라 항상 남들보다 짐이 배 이상 많아요. 집사람은 그깟 쓰레기들 갖다 버리라고 핀잔을 주지만 지금은 훌륭한 자료로 남았습니다.”(웃음) 그가 찾은 자료는 그 양으로 보나 출처로 보나 실로 방대한 수준이다. 고구려 시대 벽화인 ‘임금행렬도’에서는 임금을 웃기던 재담가가 등장한다고 한다. 또 고종황제 시절엔 박춘재라는 만담가가 ‘가무별감’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고종 황제를 웃기는 역할을 했다. 김교수는 박춘재의 만담이 녹음된 3분 짜리 테이프도 갖고 있다. 이밖에도 청계천 상가 일대를 발품 팔며 구한 장소팔·고춘자, 서영춘, 백금녀, 이기동, 남보원, 백남봉 등 원로 코미디언의 만담집도 소장하고 있다. 세계 각지에서 구한 찰리 채플린의 다양한 사진, 각국의 삐에로 형상 등도 다수 가지고 있다. “그동안 거의 습관적으로 모아 왔어요. 그렇게 모은 것이 이제는 꽤 방대해졌습니다. 한번쯤 전시해보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우연히 부지를 내주신다는 분이 있어서 현재 ‘코미디 박물관’을 건립중입니다.” 내년 5월 개관을 목표로 강원도 평창에 건립중인 코미디 박물관은 200평 대지에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다. 코미디 역사관과 코미디 체험관, 채플린관, 탈 전시관, 피에로관 등으로 구성되는 박물관에는 고구려 시대부터 최근까지 웃음과 관련된 자료와 유물, 유품 등을 전시한다. 개관 기념전으로는 고인이 된 코미디언 서영춘의 유품전도 준비중이다. 재밌게 말하려면 듣는 법부터 배워야 1973년 TBC에 PD로 입사한 직후부터 코미디 프로그램을 연출해온 그는 언론통폐합으로 1980년 KBS로 자리를 옮긴 후 정년퇴임까지 코미디 프로그램만을 고집했다. 그의 그런 유난한 ‘코미디 사랑’은 사실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고등학생 때부터 「한국해학전집」 5권을 줄줄이 암송할 정도였고, ‘웃으면 복이 와요’ 등 TV에서 코미디 프로그램이 방송될 때면 밖에도 안 나가고 밥도 먹지 않았다. 그런 관심은 고려대 영문과에 입학한 뒤로도 계속됐고 방송국 입사 면접에서도 코미디 프로그램 연출에 대한 의욕을 밝혔을 정도다. 그렇게 연마(?)한 남다른 감각으로 최초의 ‘개그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는 ‘살짜기 웃어예’를 기획, 연출하는 등 시대를 앞서갔다. 그때는 ‘맹진사댁 경사’나 ‘배비장전’ ‘이춘풍전’ 같은 각색극이 인기를 끌던 시절이었으니 앞서가도 한참을 앞서간 것. 숙명여대 재학시절 ‘살짜기 웃어예’의 작가로 잠시 일한 아내와 부부의 연까지 맺었으니 그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프로그램임에 틀림없다. 당시 김 교수는 이미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지금의 아내를 보는 순간 첫눈에 반해 남몰래 여자친구에게 이별을 고하고 아내에게 대시를 했다고 한다. “그 내막을 아내는 아직도 모르지만 지금 와서 알아봤자 자기가 어쩌겠냐”며 익살스럽게 웃는다. “재밌게 말하는 데도 기술이 필요합니다. 같은 이야기라도 단어를 살짝 바꾼다든지 등장인물의 직업을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바꾸거나 하는 식의 변주가 필요하죠. 남을 웃긴다는 건 좌중을 리드하는 고도의 화술을 요하는 일이거든요.” 재밌게 말하기 위해서는 남의 말을 온전하게 들을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평소 소신이다. 김 교수는 평소 연기자들과 이야기할 때 온몸을 ‘듣기 모드’로 전환해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때가 많다. 마치 피뢰침이 번개를 흡수하듯이 그들의 말을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절대 중간에 끼어 들지 않는다. 맞장구만 칠 뿐 내 의견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연기자들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온전히 이야기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아이디어는 더욱 면밀해진다. 웃음문화학회로 학계와 연기자 가교 역할 ‘코미디’와 ‘웃음’에 대한 그의 열정은 무궁무진한 아이디어가 되어 쏟아졌다. 코미디 박물관 건립 이외에도 지난 7월에는 ‘웃음문화학회’를 만들었다. 회원으로는 조동일 계명대 석좌 교수, 서울대 서대석 교수 등 저명한 학자를 비롯해서 전유성, 김미화 등 현역 코미디언, 국악인 김성녀 등의 문화예술인 1백여 명 이상 가입돼 있다. “자료를 찾다 보니 각 대학 교수들의 연구 자료가 상당히 많더군요. 이분들이 또 현역 코미디언이나 개그맨에 대해서도 해주실 말씀이 참 많겠다는 생각이더라구요. 그 분들을 한자리에 모을 수는 없을까 해서 생각해낸 것이 바로 웃음문화학회입니다. 처음에 각 대학 교수들과 현역 연기자들에게 이 건을 제안했더니 다들 너무 좋아했습니다. 말하자면 제가 연결고리가 된 셈이지요.” 학회는 금년이 가기 전에 세미나를 열기로 한 상태. 앞으로 격월간 잡지 발간을 비롯해서 각종 서적 발간에도 뜻을 모을 생각이다. 특히 조선조의 ‘조크북’이라 할 수 있는 ‘앙천대소(昻天大少)’나 ‘소천소지(笑天笑地)’ 등의 복간에도 나설 계획에 있다. 또 연말에는 올해의 웃음상도 제정할 계획이라고 한다. 각 방면에서 국민에게 웃음을 준 사람들에게 각 부문별로 시상하는 상으로 시상식 자체가 하나의 즐거운 이벤트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 모든 다양한 아이디어는 항상 새로운 것, 뭔가 특별한 것을 찾고 추구하는 그의 오랜 습관에서 비롯됐다. 시청자가 싫증 내지 않도록 늘 새로운 웃음의 소재를 개발하는 것이 평생의 업이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그동안 개그맨들에게 뒤쳐지지 않는 ‘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내로라하는 프로그램들을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감이 전부는 아니다. 흔히 개그맨은 타고난 재치와 감각이 있어야 한다고들 생각하지만 김 교수의 생각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그의 경험에 의하면 이 방면에서 한 3~4년간 꿈을 버리지 않고 있으면 어느 날 스타가 되어 있는 사례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과연 저 애가 ‘물건’이 될까 싶던 경우라도 꿈만 버리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면 기회가 오더라는 말이다. 하지만 일단 ‘떴다’ 하더라도 조금만 화면에서 멀어지면 금세 잊어버리는 것이 시청자의 속성이다. 중요한 것은 계속적인 소재 개발. 그래서 그는 항상 연기자들에게 충고한다.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 앉아서 걱정만 하지 말고 한 달에 두어 번이라도 대형서점에 가서 책을 보라고. 일일이 읽지 않아도 목차만이라도 훑어보면 상당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연기자들과 수십 년 함께 하다 보니 각 연기자들의 장단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죠. 전유성, 최양락, 김국진, 김형곤은 아이디어가 뛰어난 케이스입니다. 연기력으로 따지면 심형래, 임하룡, 김미화, 김용만, 박준형 등이 뛰어나지요. 심형래를 처음 봤을 때 뛰어난 연기력을 간파해 영구라는 캐릭터를 만들었습니다. 연극판에 있던 이창훈을 발굴해 맹구를 만든 것도 같은 이유였지요. 하지만 최고의 연기자가 되려면 연기력과 재능에 앞서 인간성이 좋아야 합니다. 그래야 결국 스타덤에 오르더군요. 그런 사람이 생명력도 길구요.” 지난 30년간 휴가 한 번 제대로 가본 적이 없는 방송 프로듀서 생활 속에서도 프로그램에 대한 열정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던 김웅래 교수. 그를 기꺼이 ‘코미디계의 대부’로 받드는 많은 연기자의 신망은 아마도 그런 성실함과 열정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요즘도 그는 현역 PD 시절 못지않게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퇴임 이후 단 한 번도 제대로 쉬지 못한 탓에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그는 ‘휴식’ 대신 ‘열정’을 택했다. 코미디에 대한 열정이 오늘의 그를 만들었듯 그의 꺼지지 않는 열정이야말로 유쾌한 웃음의 신호탄이 되어 언제나 커밍순, 커밍순이다. 글 / 박연정 기자 사진 / 유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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