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경향(총 2 건 검색)
- 마지막까지 새 생명 주고 떠난 코미디의 대가 김형곤
- 2006. 04. 01 연예
- “뇌출혈 수술로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께는 차마 하늘나라로 떠난다는 말을 못했어요” 시사·풍자 코미디의 대가 김형곤이 지난 3월 11일 세상을 떠났다. 평생 사람들에게 웃음을 전하는 데 헌신했지만 정작 본인은 지독한 외로움과 스트레스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끝까지 빈소를 지켰던 전 부인 정유진씨와 하나밖에 없는 아들 도헌이, 그리고 돌연사로 알려진 그의 죽음에 관한 진실들을 하나씩 풀어본다. 너무 일찍 떠나버린 코미디계의 큰 별 시사·풍자 코미디의 대가 김형곤(50)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바로 전날까지도 “40~50대가 즐길 수 있는 코미디를 펼쳐 보이겠다”고 호기 있게 외쳤던 그이기에 많은 사람들은 느닷없이 날아든 비보에 슬픔을 표현하기에 앞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평소 진담 같은 농담으로 웃음을 줬던 그이기에 비보 역시 새로운 웃음을 만들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어리석은 기대도 있었다. 어쩌면 남아 있는 이들은 그의 비보가 사실이 아니기를 간절히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죽음은 사실이었다. 김형곤은 지난 3월 11일, 서울 광진구 자양동의 한 스포츠센터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당시 운동 중이었던 김형곤은 화장실에 갔다가 갑자기 쓰러져 영영 일어나지 못했다. 헬스클럽 강사가 그를 발견하고 인근 혜민병원으로 옮겼지만 병원에 도착하기 전, 그는 이미 사망했다. 서슬 퍼런 군사정권 시절에 왕을 가지고 놀았던 위대한 광대의 갑작스런 죽음 소식에 곳곳에서 추모의 물결이 일었다. 인터넷상에서는 애석해하는 댓글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으며, 그가 잠들어 있는 빈소 역시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많은 선후배 코미디언들은 물론, 방송사 스태프들과 정·재계 인사들도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빈소를 찾은 선배 방송인 송해는 “코미디계의 큰 별이 졌다”며 슬퍼했다. “자기 관리를 잘하고 앞으로도 많은 일을 할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죽었다고 하니 실감이 나지 않네요. (김형곤이)한창 활동할 당시에는 상당히 혼란스러운 시국이었습니다. 그 또래가 있어 참 든든했어요. 코미디계에 큰 별이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 안타깝고 아쉽습니다.” 13일 오전 ‘개그맨 故 김형곤 영결식’에서 추모사를 낭독한 후배 박준형은 “어려서부터 선배님의 코너를 보면서 유행어를 따라 했다”며 자신을 코미디계로 이끈 고인을 회고했다. “얼마 전 제 공연에 직접 오셨는데 ‘관객에게 불편을 끼치기 싫다’며 줄을 서서 입장하셨어요. 그날 공연을 보시면서 누구보다 가장 크게 웃어주셨고, 공연이 끝나자 후배들에게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주고 빈 지갑으로 돌아가셨어요. 어려서는 팬이었고, 개그맨이 된 지금은 가장 존경하는 선배님인데, 이렇게 갑자기 떠나보내게 돼서 너무나 마음이 아픕니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평소 건강했던 김형곤의 어머니 전소영씨는 거동조차 불편할 정도로 기력이 약해졌다. 그녀는 빈소에 마련된 휴게실에서 조문객들을 맞았으며 가끔 정신을 놓고 실신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 김근신씨는 장례가 끝나는 날까지도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몇 년 전 뇌출혈로 쓰러져 두 번이나 수술을 받은 부친 김근신씨는 현재 거동이 불편해 아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가 장례에 참석하지 못한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지인에 따르면 장례가 끝날 때까지도 김근신씨는 김형곤의 사망 소식을 몰랐다고 한다. “4형제 중 둘째인 형곤이가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어요. 몇 년 전에 뇌출혈로 쓰러지시고 두 번이나 수술을 받으셔서 지금은 거동이 불편하세요. 아버지는 아직 사실(김형곤의 죽음)을 모르세요. 건강하셨던 어머니도 지금 저렇게 힘들어하시는데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아시면 어떻겠어요. 만약 쓰러지시기라도 하는 날에는 정말 큰일이라 다들 쉬쉬하고 있는 상황이에요.” 아들의 죽음을 알지 못하는 아버지는 그가 땅에 묻힐 때까지도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고사리 손으로 빈소를 지킨 아들 1995년 11월 23일,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진행된 국화빵 아들 도헌이의 돌잔치에서 김형곤은 “생에 이렇게 기쁜 날은 없다”며 희희낙락했다. 결혼 후 8년간의 시험관 아기 시술 끝에 어렵게 얻은 아들의 첫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 속에서 그는 연신 즐거운 표정이었다. 그때 색동저고리를 곱게 차려입고 김형곤의 품에 안겨 웃음 짓던 아들 도헌이는 장례 둘째 날 빈소에 도착했다. 현재 영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는 도헌이는 아직 말이 서툴던 5세 때 부모 곁을 떠나야 했다. 어려서부터 도헌이는 너무나 유명한 아버지 때문에 대문 밖으로 나서는 순간부터 사람들에게 시달려야만 했다. 당시 선거와 사업에 실패하고 급기야 이혼까지 하게 된 김형곤은 더 이상 아들을 돌봐줄 사람이 없게 되자 아들의 영국 유학을 결정했다. 도헌이가 장례식장 입구에 들어서자 많은 취재진들이 플래시를 터트렸다. 하지만 도헌이는 눈물을 흘리기보다는 담담하고 의젓하게 아버지의 빈소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나 나이보다 의젓해 보이던 이 13세 소년은 정작 병원에 도착하고도 한 시간이 넘게 아버지의 영정을 마주하지 못했다. 사실 도헌이는 장례식장에 올 때까지도 사실을 몰랐다. 영국에 유학 중인 도헌이를 한국으로 불러들인 어머니 정유진씨가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곧 있으면 방학이라 서울로 오려던 참이었어요. 차마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할 수 없어 ‘아버지가 많이 편찮으시니까 빨리 와야겠다’는 말만 했어요. 한국으로 들어오라고 할 마땅한 핑계가 생각나지 않더라구요. 장례식장에 도착해서야 사실을 말해줬는데, 충격이 컸을 거예요.” 도헌이가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본 것은 작년 12월이었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볏짐을 지고 불 속이라도 뛰어들 아버지가 몇 달 만에 싸늘한 시신으로 누워 있다는 사실에 도헌이는 잠깐 동안 실신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린 도헌이는 이제까지 큰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맡고 있던 빈소 맨 앞자리에서 상주로서 조문객을 맞았다. 어머니 정유진씨는 어린 아들 도헌이가 ‘답답하다’고 할 때마다 잠깐 동안 함께 밖으로 나가 바람을 쐬고 돌아왔으며, 행여 감기에 걸릴까봐 자신이 입고 있던 겉옷을 걸쳐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녀는 조문객과 이야기를 하다가도 “충격 때문에 도헌이가 밥을 못 먹는 것 같다”는 말을 듣고는 곧 음식을 챙겨 장례식장 한편에 마련된 휴게실로 도헌이를 불러 식사를 챙겼다. 감동을 선물하고 떠난 코미디의 대가 김형곤의 사망 원인은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동료들의 입을 통해 무리한 다이어트 때문이라는 추측이 나돌 뿐이다. 의료진 역시 그의 사망 원인을 ‘급성 심근경색’으로 판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죽음의 원인이 되는 질병이 발생하고 한 시간 이내에 사망하는 돌연사란 얘기다. 하지만 그의 가족들이나 지인들은 한결같이 다이어트는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라고 입을 모았다. 김형곤은 사망하기 몇 달 전 현대아산병원에서 종합검진을 받았고, 전체적으로 건강하다는 결과가 나왔던 것으로 전해진다. 친구들을 만나서도 “이제는 술도 먹을 수 있겠어”라고 자신의 건강을 자랑삼아 얘기했다고 한다. 그래서였는지 사망 전날에도 김형곤은 후배와 함께 사업 얘기를 하며 과음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업상 받은 스트레스를 술로 달래는 사람이 어디 김형곤뿐이겠는가만 그에게는 남다른 고민이 또 있었다. 바로 마음을 열고 대화할 상대가 없었다는 것이다. 한 지인은 “재주가 뛰어나다 보니 그를 시기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며 “시기와 질투를 많이 받다 보니 주위에 마음을 터놓고 의논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하고 추진하면서 많이 힘들어했다”고 말했다. 김형곤과 대학 동문인 한 친구는 그가 한때 자살까지 결심했었다고 말했다. “선거에 떨어지고 나서 경제적으로나 심적으로 많이 힘들어했어요. 더군다나 한국말도 잘 못하는 아이를 낯선 외국 땅에 혼자 떠나보냈는데 어느 부모가 마음이 편할 수 있겠어요. 당시 술자리에서 죽고 싶다는 말까지 했어요. 그래도 작년부터는 일이 잘되는가 싶었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갈 줄은 몰랐어요.” 그는 김형곤이 작년부터는 빚도 거의 갚고 상황이 좋아지는 줄 알았다며 안타깝다는 말을 덧붙였다. 지난해 김형곤은 전성기 못지않은 왕성한 방송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동시에 그는 다이어트 섬 ‘감비도’도 계획하고 있었다. 감비도는 고통스러운 다이어트가 아닌 웃으면서 살을 뺄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김형곤은 이 다이어트 섬 감비도를 완성하기 위해 약 3만 평 부지를 매입하고 다양한 다이어트 프로그램 개발에 열을 올렸다. 그러면서도 본업인 무대공연도 기획했다. 그가 준비했던 대학로 뮤지컬 전용 공연장은 오는 5월 개관을 앞두고 있다. 현재 그가 직접 뽑은 연기자 20명은 극장 개관에 맞춰 무대에 올릴 작품 연습에 한창이다. 김형곤의 후배 코미디언 백재현이 뮤지컬 ‘루나틱’을 무대에 올리면서 스트레스와 과로로 풍이 와 입이 돌아갔던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극장을 개관하고 작품 한 편을 무대에 올리는 일은 대단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다. 자신은 그렇게 외로움과 스트레스로 힘들었을망정 세상 사람들에게는 웃음을 전파하려 애썼던 시사·풍자 코미디의 대가 김형곤. 그는 마지막 가는 길에 웃음이 아닌 감동을 선물하고 떠났다. 시신은 온전히 보존해야 한다는 우리의 전통 유교사상과는 달리 생전에 자신의 시신을 의료계에 기증했다. 지난 13일 영결식이 끝나고 운구가 카톨릭 대학으로 향할 때 사람들은 그의 아름답고 용기 있는 결정에 저절로 고개를 숙였다. 이제 김형곤의 건강한 웃음을 다시 볼 수는 없다. 대신 한평생 사람들에게 웃음을 전해주던 그의 넉넉한 모습은 한 줌의 흙이 되는 대신 땅 위에 남아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 그를 떠나보내며 팬의 한 사람으로서 그가 전했던 웃음 철학을 다시금 떠올려본다. “웃을 일이 있어야 웃는 게 아니라 웃어야 웃을 일이 생겨요. 웃으세요! 이유 없이 길을 가다가도 웃고 거울을 보다가도 웃으세요. 그러면 세상이 달라져요.” 글 / 김성욱 기자 사진 / 이상민·원상희
- 낙선·이혼 아픔 딛고 라디오 DJ로 돌아온 김형곤
- 2005. 12. 01 연예
- “선거 패배 후 인생에서 가장 쓴맛 봤지만, 다시 일어서는 40대의 모습 보여주겠습니다!” ‘공포의 삼겹살’ 김형곤이 라디오 DJ로 다시 섰다. 그는 선거 패배와 이혼, 그리고 이어지는 방송 프로그램 폐지 등으로 20~30대 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중년을 보냈다. 오랜만에 활동을 재개한 김형곤이 말하는 낙선·이혼의 아픔, 그리고 결혼이야기. “코미디에 ‘사장님’ 대신 ‘봉순이’ 쓰면 재미 없잖아요” “카드 때문에 남북 어린이들이 죽어나요. 남한에서는 부모가 카드 빚을 지면 꼭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죽잖아요. 그런데 북한에서는 고사리손을 한 아이들이 카드 섹션에 동원돼서 죽어나더라구요. 가뜩이나 인구감소 때문에 나라 안팎이 시끄러운데, 카드 사용이 많은 크리스마스가 다가와 걱정이에요.” 김형곤(47)은 만나자마자 평양에서 열린 아리랑 축전을 보고 온 후 생각한 코미디 아이디어를 늘어놨다. 시사 코미디의 대가 김형곤이 라디오 DJ로 돌아왔다. 그가 맡은 프로그램은 SBS 러브FM에서 신설되는 ‘김형곤의 세상만나기’(매주 토·일 오후 4시 5분~6시)다. 김형곤은 이번 프로그램을 통해 지난 25년간 쌓은 시사 코미디 노하우를 본격적으로 선보이겠다고 했다. “TV에서는 10분 녹화해도 방송으로 5분도 채 못 나가요. 그러다보면 녹화를 끝낸 후에도 항상 뒤가 개운치 않았어요. 그런데 라디오는 생방송으로 진행되니까 하고 싶은 얘기를 마음껏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25년 동안 방송생활을 하다 보니 첫술에 배부를 것이란 기대는 하지 않아요. 당장은 아니더라도 ‘라디오에서 이런 방법으로 시사를 다룰 수도 있구나’란 말을 듣고 싶은 게 바람이죠.” 김형곤은 80년대를 대표하는 코미디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시사 코미디를 선보였다. 서슬퍼런 군사정권하에서 선보인 시사 코미디로 그는 많은 부와 명예를 얻었다. 한편으로는 특정인을 풍자했다는 이유로 안기부에 끌려간 적도 있었다. 방송을 폐지하라는 외압은 늘 그를 따라다녔다. 한창 잘나가던 프로그램도 여러 번 폐지당했다. 한번은 난데없는 세무조사를 받아 빌딩 한 채를 통째로 날린 적도 있었다. “연예계에서 저처럼 부침이 많았던 사람도 없을 거예요. 돈도 무진장 벌었다가 몽땅 잃어버렸죠. 젊었을 때는 그런 시간들이 고통으로 느껴졌는데, 다이어트를 시작하면서부터 슬픔을 즐길 수 있게 됐어요. 사람들은 ‘살과의 전쟁’이란 표현을 쓰는데, 그러면 절대로 살을 뺄 수 없어요. 전쟁은 누군가 항복해야 끝나는데, 살은 항복을 안 해요. 살을 삶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놀아주고 만져주고 대화하다 보면 어느새 살이 빠지죠. 무시하고 격리하면 더 커져서 큰일나요.(웃음)” 김형곤이 한창 활동했던 때와 달리 이제는 세상이 변했다. 인터넷에서는 과거 그가 보여줬던 풍자는 명함도 내밀지 못할 강도의 패러디가 난무한다. 일반인들이 국회의원은 물론 대통령의 얼굴까지도 마음대로 패러디하지만 안기부는 나서지 않는다. 하지만 김형곤은 오히려 요즘 시사 코미디 하기가 더 어렵다고 토로했다. 각종 협회와 ‘…사모’라는 이름으로 뭉친 일부 팬들은 조금이라도 자신과 의견이 맞지 않는 내용의 코미디가 나오면 과거 국가기관보다 더욱 가혹하게 코미디언들을 공격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리듬을 잃을 것 같아서 전 아예 인터넷을 보지 않아요. 시사 코미디는 열 명 중에 한두 명은 속이 쓰리게 마련이에요. 코미디는 코미디로 봐야하는데, 아직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하죠. 요즘도 조금만 현 정권을 비판하면, ‘넌 원래 노무현 대통령을 싫어한 사람이야’라며 바로 게시판에 항의가 빗발쳐요. 최근에 후배 코미디언 블랑카(정철규)가 ‘사장님 나빠요’로 인기를 얻으니까 외국인을 근로자로 채용하고 있는 사장들과 가족들이 KBS에 와서 ‘왜 사장이 나쁘냐’며 항의를 했어요. 결국 ‘봉순이 나빠요’로 바뀌었는데, 풍자가 없는 코미디가 어디 재미있나요.” “세간의 부러움을 사는 결혼식도 다시 한번 올려야죠” 김형곤은 1980년 TBC 개그콘테스트 은상을 받으며 연예계에 데뷔했다. 동국대학교 국어교육과 출신인 그는 상금 50만원이 탐나 콘테스트에 참가했다. 이후 그는 방송 데뷔 7년 만에 KBS 코미디 대상을 받고 승승장구했다. “망하려면 일찍 망해야 돼요. 저는 스물셋에 데뷔해서 7년 만에 코미디 대상을 받았어요. 한창 잘나갔던 20~30대에는 안 되는 게 없었죠. 그런데 사람이 살다 보면 어디 마음대로 되나요. 어릴 때 승승장구하던 사람도 언젠가는 망해요. 그런데 30대 초반에 망하면 금방 일어설 수 있는데 60대에 망하면 그대로 무너지고 말죠. 저는 40에 망했는데, 딱 적당할 때 망했다는 생각이 들어요.(웃음)” 김형곤은 지난 2002년 제16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난생처음 패배를 맛보았다. 당시 경상도당 전라도당 사이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한 김형곤의 낙선은 어쩌면 예정된 일이었다. 비록 선거에는 졌지만 깨끗한 선거를 치렀다고 자부했다. 그래도 선거를 치르며 만만치 않은 돈이 들어갔다. 처음부터 출마를 반대했던 아내와는 선거 패배 후 갈등의 골이 깊어져 결국 이혼에 이르렀다. “선거를 치르면서 많은 돈이 들어간 건 사실이지만 그게 이혼 사유는 아니에요. 당시 아내는 내가 정치하는 걸 무척 싫어했어요. 아내의 의견을 무시하고 출마를 결정했죠. 결국 선거에 지고 부부간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서 이혼에 이르게 됐어요.” 이혼 이후 그는 가정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한동안 방황했다. 특히나 한국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들을 영국으로 떠나보낼 때, 그는 한동안 울먹이며 공항을 빠져나오지 못했다고. “이혼하고 아이들 돌봐줄 사람이 없었어요. 사람들의 지나친 관심 때문에 국내에 둘 수가 없었죠. 결국 한국말도 잘 못하는 아이를 여섯 살 때 영국으로 유학보냈어요. 살면서 그때가 가장 힘들었던 것 같아요. 아들이 보고 싶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아비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 같아 너무 미안했죠. 선거에서 깨지고, 이혼하고, 말도 잘 못하는 어린자식 남의 나라로 떠나보낸 그 2~3년이 제 삶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었어요.” 어떻게 그런 시간들을 견디고 다시 방송에 복귀하게 됐냐고 묻자, 돌아오는 대답은 간단했다. 그는 울고 싶고 화가 날 때마다 웃었다고 했다. 말이 쉽지 그게 가능하냐고 다시 물었다. “이유 없이 길을 가다가, 거울을 보다가 웃어 보세요. 그러면 걱정이 사라지고 한숨 대신 기가 올라오는 것을 느낄 거예요. 사람들은 웃을 일이 있어야 웃는데, 웃어야 웃을 일이 생겨요. 모두들 힘들겠다고 생각할 때 웃고 있으면, 대단한 사람인 줄 알고 도와주겠다는 사람도 생기구요.” 김형곤은 선거 패배가 값진 교훈이었다고 말했다. “예전에 이주일 선배가 국회의원이 된 후, ‘내가 어떻게 국회의원이 됐을까?’란 생각을 하다가 일 년이 지난 뒤부터는 ‘저 사람이 어떻게 국회의원이 됐을까?’란 생각이 들더래요. 마찬가지로 저는 국회의원 출마를 하고 국회의원들이 왜 잘못될 수밖에 없는가를 알게 됐어요. 선거를 통해 잃은 것도 많지만 얻은 것도 많아요. 그때의 경험이 지금은 너무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느새 40대 중반을 훌쩍 넘은 김형곤은 요즘 전보다 더욱 열심히 운동을 하고 있다. 그는 앞으로 30kg 가량을 더 감량해 누드사진을 찍을 계획이다. 공포의 삼겹살이라고 불렸던 자신이 누드사진을 찍음으로써 또래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는 이유에서다. 다이어트를 하려는 이유는 또 있다. 그는 새롭게 시작하는 다이어트식품 사업에 성공한 뒤 모두 부러워하는 결혼식을 다시 한번 올리고 싶다고 했다. 시사 코미디의 대가 김형곤은 말한다. “사람은 제조일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유통기한이 중요하다”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그의 결혼 소식이 빨리 전해지길 바란다. 글 / 김성욱 기자 사진 / 원상희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