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총 580 건 검색)
- [단독]북한 “평양서 남한 무인기 발견” 발표 다음날, 연천서 추락 무인기 발견
- 2025. 01. 08 15:46정치
- ... 대북 무인기 침투 의혹 뒷받침 본지, 김병주 의원실 등서 확인 북한이 지난해 10월 ‘평양 상공에 남한 무인기가 침투했다’고 발표한 다음날 새벽 경기 연천군 임진강변 일대에서 ‘추락한 드론작전사령부...
- 북, 개성공단 전력 공급 송전선 잘랐다…‘남한과의 단절’ 계속
- 2024. 11. 26 20:31정치
- 남한서 제공한 설비…통일부 “불법적 재산권 침해” 규탄 북, 김정은 생일 공휴일 지정 검토 등 ‘독자 우상화’ 가속 북한이 남한에서 개성공단에 전력을 공급했던 북측 송전선을 제거했다. 지난달...
- [조현철의 나락 한 알]용산이 입을 열면 남한은 몸을 떤다
- 2024. 11. 03 21:32오피니언
- ... 윤 대통령이 경축사에서 한 말이다. 대북전단 살포와 대북확성기 방송을 계속하겠다는 말로 들린다. 남한에 관심도 공격 의사도 없다는 북한에 시비 거는 꼴이다. ‘두 국가론’은 최소한 통일을 내세워...
- 조현철의 나락 한 알
- 굽이굽이 단아한 쪽빛의 화양연화…‘여섯 명소, 여섯 시선’ 단양 남한강
- 2024. 10. 05 09:00여행
- ... 줄기를 만날 준비를 마쳤다. 소백산 자연휴양림 전망대에 오르자. 영춘면 소재지를 감싸고 흐르는 남한강이 다른 풍경에 가려 사라졌다 나타났다 한다. 고구려 온달장군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온달산성은...
스포츠경향(총 113 건 검색)
- [종합] “남한테 강요 안해” ‘나는솔로’ 순자의 고백, 터졌다…분당 최고 4.8%
- 2025. 01. 09 10:33 연예
- ‘나는솔로’ 순자. ‘나는 SOLO(나는 솔로)’ 24기가 본격 핑크빛 로맨스의 포문을 열며 시청률과 화제성도 폭발시켰다. 8일(수) 방송한 SBS Plus와 ENA의 리얼 데이팅 프로그램 ‘나는 SOLO’에서는 24기 솔로녀들이 ‘자기소개 타임’으로 반전 정체를 공개하는 현장이 펼쳐졌다. 이어 첫 데이트 선택에서는 영철-광수가 각각 2표씩을 얻어 ‘다대일 데이트’의 주인공이 된 반면, 영호와 영식은 0표로 ‘고독 정식’을 먹게 돼 ‘극과 극’ 분위기를 풍겼다. 이날 방송은 닐슨코리아 집계 결과, 평균 4.4%(수도권 유료방송 가구 기준 SBS Plus·ENA 합산 수치)의 시청률을 기록했으며, 분당 최고 시청률은 4.8%까지 치솟았다. 또한 ‘나는 SOLO’의 타깃 시청률인 ‘남녀2049’에서도 2.84%로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수성했다. ‘최고의 1분’은 현숙이 자기소개 중 인생 목표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 차지했다. 아울러, 굿데이터 코퍼레이션이 집계하는 펀덱스 차트 ‘TV 비드라마 화제성’(1월 7일 발표)에서도 2위에 올라 대체불가 인기와 화제성을 과시했다. 앞서 솔로남들이 ‘자기소개’로 베일을 벗은 데 이어, 이날 솔로녀들은 저마다 당찬 ‘자기소개’ 타임으로 새로운 매력을 어필했다. 영숙은 1994년생으로, 공공기관에서 교육행정직으로 근무하고 있는 7급 공무원이었다. 테니스, 필라테스, 플라잉 요가, 도자기 공예 등 ‘취미 부자’인 영숙은 “2년 안에 결혼하고 싶다”고 밝혔으며, “인품이 좋은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인생 목표도 전했다. 1993년생인 정숙은 S금고를 퇴사한 후 아버지 밑에서 일을 배우며 사업가로 제2의 인생을 개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헬스, 골프 등 각종 운동을 섭렵한 정숙은 “부지런하고 덩치 큰 남자가 이상형”이라고 한 뒤, “여기서 제일 빛나고 싶다”고 밝혀 모두의 열띤 박수를 받았다. 1992년생으로, 서울 중앙부처에서 행정직 공무원으로 근무 중인 순자는 인테리어, 마라톤, 클라이밍 등 다양한 경험을 좋아하는 삶의 방식을 즐긴다고 소개했다. 이어 순자는 ‘채식주의자’임을 고백했고 “편견 없이, 거부감 없이 (채식주의자를) 받아들여 줄 수 있는 분이면 좋겠다. 그렇다고 해서 절대 채식을 남에게 강요하지는 않는다”라고 덧붙였다. 영자는 1990년생으로, 영유아 강좌를 진행하는 오감놀이 업체 대표라는 반전 직업을 공개했다. 이어 “프리랜서라 남자친구 스케줄에 맞출 수 있다. 한식, 중식 조리사 자격증이 있다. 옛날에 태어났으면 1등 신붓감!”이라고 당당하게 셀프 어필했다. 옥순은 1988년생으로, K사 브랜드 전략실 직원이라는 반전 스펙으로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다.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다는 옥순은 “제 방 침대처럼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을 가진 분을 만나고 싶다. 부모님이 검소하셔서 절약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옥순은 “성형수술하고 좀 더 예뻐졌다”, “난자를 얼려 놨다”, “해외에서도 살 수 있다”는 등 ‘핵폭탄급’ 입담으로 ‘솔로나라 24번지’를 초토화시켰다. 마지막으로 현숙은 자전거 탄 풍경의 ‘그렇게 너를 사랑해’로 ‘선 장기자랑 후 자기소개’로 매력을 발산했다. ‘나는 솔로’. 1990년생으로, 전남 장성군에 위치한 병원 약사로 근무 중이라는 현숙은 “부업이 취미가 됐다”고 그림 그리기, 베이킹을 취미로 소개했고, “자식을 많이 낳고 싶어서 열심히 벌어야 한다. 중학생 때부터 행복한 가정을 꾸려서 자식을 사랑 많은 아이로 키우고 싶었다”고 털어놨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자기소개 타임’ 후 24기 솔로남녀는 완전히 뒤바뀐 마음을 공유했다. 영자와 옥순은 “첫인상 선택과 (지금 호감 가는 남자가) 완전히 바뀌웠다”고 입을 모았으며, 솔로남들은 ‘채식주의자’임을 밝힌 순자를 두고 고민에 빠진 속내를 공유했다. 앞서 첫인상 선택에서 순자를 택했던 상철은 “감당 못할 것 같다”고 솔직히 말했고, 영철은 “저는 고민 중”이라고 망설이는 마음을 보였다. 잠시 후, 솔로녀들의 ‘첫번째 데이트 선택’이 진행됐다. 솔로남들이 “나 외로워!”라고 외치면, 솔로녀들이 ‘원픽남’을 선택하는 방식이었다. 가장 먼저 영수가 “나 외로워~”라고 외치자, 옥순이 ‘짠’ 하고 나타났다. 이어 등장한 영철은 ‘첫인상 선택’ 결과와 동일하게 이번에도 영숙과 순자의 ‘픽’을 받았다. 광수는 영자-정숙, 상철은 현숙의 선택을 받았지만, 영호와 영식은 ‘0표로’ 고독 정식을 확정지었다. ‘2:1 데이트’에 나선 영철은 채식주의자인 순자를 위해 횟집을 가기로 했다. 하지만 식당이 모두 만석이라 계속 발품을 판 끝에 매운탕 식당에 들어섰다. 여기서 영철은 “숨만 쉬어”라는 자신의 유행어를 소환한 뒤, 극진히 두 여자를 챙겨줬다. 그럼에도 모든 음식을 순자부터 주는가 하면, 대화할 때에도 순자 쪽을 많이 바라봐 의도치 않게 영숙을 소외감 느끼게 했다. 데이트 후 영철은 제작진과의 인터뷰에서 순자에 좀더 호감이 있음을 고백했고, 순자 역시 “분위기가 지금 괜찮다”면서도 “광수님도 궁금하다”고 해 여지를 뒀다. 영수와 ‘1:1 데이트’에 나선 옥순은 ‘로맨스 교수’ 면모로 영수를 확 사로잡았다. 옥순은 곧장 영수를 ‘오빠’라고 불렀으며, “(장차 아내가) 일이 힘들면 쉬어도 된다. 내가 다 먹여 살리겠다”는 영수의 말에 “오빠가 쉬는 건 어때?”라고 받아쳐 영수를 ‘심쿵’하게 만들었다. 또한 옥순은 고기를 먹던 중, “이거 마늘이야? 뽀뽀하려면 마늘 먹으면 안 되지 않아?”라고 플러팅을 하는가 하면, 영수를 지그시 바라보는 ‘눈빛 공격’을 퍼부어 영수를 어질어질하게 만들었다. 데이트 후 영수는 제작진 앞에서 “호감이 올라갔다. (옥순도) 제로보단 플러스이지 않을까?”라고, 옥순 역시 자신에 대한 호감도가 커졌을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옥순은 “사실 재미는 없었다”는 반전 속내를 드러냈다. 같은 시각, ‘고독즈’ 영호-영식은 숙소에서 짜장면을 먹으면서 각성의 시간을 가졌다. 영호는 “영자님 돌아오면 대화 요청을 해야겠다”고 다짐했고, 영식은 “옥순님과 제일 먼저 얘기할 것”이라고 선언한 뒤, 제작진 앞에서 “여기엔 의사도 있고 머리 좋으신 분들도 있으니 나와는 비교가 안 되겠더라. 난 안 될 것 같다”고 오열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그러나 이어진 예고편에서 영식은 옥순을 시작으로, 영숙, 정숙, 영자에게 “슈퍼 데이트권 따게 되면 ‘데이트 신청’ 하겠다”라고 ‘표 뿌리기’에 나서는 아찔한 모습을 보여줬다. 이에 MC 송해나는 “저러다 소문 나면 큰일 나는데”라고 걱정했고, ‘마성녀’ 옥순은 갑자기 영철에게 “연상 누나의 매력을 알게 해줄게”라고 도발해 “호기심이 생겼다”는 영철의 관심을 끌어내는 데 성공해 다음 방송에 대한 궁금증을 치솟게 했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24기의 로맨스는 15일(수) 밤 10시 30분 SBS Plus와 ENA에서 방송하는 ‘나는 SOLO’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사당귀’ 탈북 보스 이순실 “북한 칼질은 남한과 달라”
- 2024. 11. 16 20:02 연예
- KBS2 예능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 17일 방송 주요장면. 사진 KBS KBS2 예능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이하 사당귀)에 출연하는 이순실이 고기가 없는 이북식 감자탕을 선보인다. 오는 17일 방송되는 ‘사당귀’에서 탈북민 보스인 이순실은 한국식과는 전혀 다른 이북식 감자탕을 선보인다. 특히 “감잣국 같다”는 전현무의 말에 이순실은 “북한의 감자탕에는 돼지고기가 안 들어간다. 대신 감자와 매운 고추의 궁합이 잘 맞는다”고 말했다. 특히 감자탕 조리 과정 중 이순실의 남다른 칼질에 모두의 눈길이 쏠린다. 이순실은 “북한은 칼질할 때 소리가 나면 안 된다. 이른 아침 칼질 소리에 잠 깰 수 있다고 어릴 적부터 조용히 칼질하는 법을 배운다”고 전했다. 그는 “감자가 흔했으면 목숨을 걸고 탈북까지 안 했다. 북한에는 감자도 없다”고 말한 뒤 “감자 한 번 배불리 먹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고 북한의 실상을 전했다. 이순실은 “하얀 쌀밥에 고깃국이 그렇게 먹고 싶었는데 한국에 와서 10년 동안 고기를 먹으니 이제야 좀 질린다”고 사연을 소개했다. 뿐만 아니라 이순실은 “북한 유부초밥 대신 두부밥”이라며 가운데 칼질을 넣은 두부 안에 비빔밥을 넣은 두부밥을 선보여 보는 이의 군침을 자극한다. 또한 깻잎을 주 조미료로 사용한다고 덧붙여 궁금증을 유발한다. KBS2 ‘사당귀’는 매주 일요일 오후 4시40분 방송된다.
- 굳건했던 ‘에펠탑’의 위용···전날 득남한 고베어, 통산 4번째 DPOY 수상 ‘겹경사’
- 2024. 05. 08 10:43 스포츠종합
- 루디 고베어. AP연합뉴스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의 골밑을 든든하게 지키는 ‘에펠탑’의 위용은 든든했다. 미네소타의 센터 루디 고베어가 통산 4번째 올해의 수비수상(DPOY)을 수상했다. NBA 사무국은 8일 “올해의 수비수에 고베어가 선정됐다”며 “개인 통산 4번째 수상이다. 이는 역대 최다 수상 타이기록”이라고 발표했다. 프랑스 출신인 고베어는 이번 시즌 정규리그에서 76경기에 출전해 평균 14점·12.9리바운드·2.1블록슛의 성적을 냈다. 고베어가 골밑에서 중심을 잡은 미네소타는 정규리그 평균 실점 106.5점으로 30개 구단 중 최소를 기록했다. 고베어는 유타 재즈 시절 2017~2018, 2018~2019, 2020~2021시즌에 이 상을 받았다. 이번 수상으로 고베어는 디켐베 무톰보, 벤 월리스에 이어 올해의 수비수상을 수상한 역대 3번째 선수가 됐다. 고베어는 전날 득남한데 이어 이날 올해의 수비수상까지 받아 겹경사를 누렸다. 고베어는 아내의 출산을 지켜보기 위해 전날 열린 덴버 너기츠와의 2023~2024 NBA 서부콘퍼런스 준결승 2차전에 결장했지만, 미네소타는 덴버를 106-80으로 완파했다. 스테픈 커리를 상대로 포스트업을 하는 루디 고베어. AP연합뉴스
- 광주·하남에 핀 배구의 꽃…체육교사들이 만든 중고 배구 ‘남한산성리그’ 9회째
- 2023. 07. 04 08:48 스포츠종합
- 2018년 남한산성리그 장면 배구 불모지인 경기 광주·하남에 체육교사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배구 대회가 올해로 9번째 대회를 맞는다. 오는 8일, 15일 광주하남교육지원청이 주최하는 광주하남 학교스포츠클럽(남한산성) 배구대회가 신장초·중·고등학교, 덕풍중학교에서 열린다. 남중부 9개팀, 여중부 8개팀, 남고부 9개팀, 여고부 8개팀 등 34개팀이 참가한다 . 8일에는 중등부 경기가, 15일에는 고등부 경기가 각각 펼쳐친다. 수업에 상관없이 한곳에서 모이려면 토요일에 대회를 할 수밖에 없다. 지역 학교들이 하루 동안 한곳에 모여 대회를 치르면 다른 학교와 대결할 수도 있고 타교 친구들과 사귈 수 있다. 2018년 남한산성리그 장면 남한산성리그를 처음으로 만든 것은 광주·하남지역 중고등학교 교사들이다. 당초 스포츠클럽 배구대회가 전혀 없는 불모지에 교사와 학생들이 함께 배구의 씨앗을 뿌렸다. 대회 개최 비용은 광주하남교육지원청, 각 학교 스포츠클럽 지원금 등으로 충당된다. 주심은 교사들이 맡고 학생들이 선임을 맡는다. 학생들이 기록원 역할도 한다. 광주 신현중학교 조형준 체육교사는 “코로나 때에는 2년 동안 대회를 치르지 못했다”며 “예상 밖으로 팀들이 많이 나와서 놀랍다”고 말했다. 조 교사는 “중학교 때 배구를 배운 학생들이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 배구를 계속 하고 있다”며 “참가하는 여학생들이 많아지는 게 고무적”이라고 덧붙였다. 광주에는 몇몇 성인 동호인팀들이 있고 하남에서도 팀 창단이 조금씩 논의되고 있다. 조 교사는 “학생들이 교내 학교를 졸업한 뒤 성인이 돼서도 지역에서 배구를 계속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주간경향(총 29 건 검색)
- [정태겸의 풍경](17)남한산성 소나무숲-한그루마다 애틋하게, 마을이 함께 지켜낸 숲(2021. 08. 20 14:41)
- 2021. 08. 20 14:41 문화/과학
- 산의 능선이 둘러싸고 있는 분지 같은 지형, 그곳에 번화가가 있다. 숲에 오르는 길은 이 번화가의 로터리에서 출발한다. 남한산성의 둘레길은 완연한 늦여름에 잠겼다. 남한산성은 냉혹하고 처절한 기록이 남아 있는 곳이지만, 반대로 숲을 지키고자 했던 이들의 뜨거운 열정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산성 아래의 마을은 자체적으로 ‘금림조합’을 만들어 숲을 지키고자 했다. 20세기 초, 곳곳이 민둥산이었던 다른 지역과 달리 이 일대는 푸른 숲을 유지했다. 덕분에 남한산성의 소나무숲은 90년 넘도록 울창한 수림을 자랑한다. 산성의 숲길을 걸으며 저마다 개성 있는 모습으로 자라난 소나무를 유심히 살펴본다. 저 나무 하나하나가 함께 살고자 했던 이곳 마을 주민들의 노력이요, 결과물이다. 이 길을 걸을 땐 풍경을 흘려보낼 것이 아니라 저 숲을 이룬 소나무 한그루 한그루의 생김새를 마음에 새길 일이다. 우리 곁에 훌륭한 숲이 있다는 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 정태겸의 풍경
- [이곳&이야기]발밑으로 펼쳐지는 단양군의 남한강 비경(2019. 07. 05 15:18)
- 2019. 07. 05 15:18 사회
- ㆍ단양강 잔도, 만천하스카이워크 등 명물로… 올해 관광객 1000만명 전망 충북 단양군 단양읍 상진리에는 아찔한 산책로가 있다. 남한강이 굽이쳐 흐르는 가파른 절벽에 매달려 있는 ‘단양강 잔도(棧道)’다. 적성면 애곡리 만학천봉까지 1.2㎞ 길이의 산책로 바닥에는 구멍이 송송 뚫려 남한강 수면이 보인다. 자칫하면 강으로 퐁당 빠질 것 같다. 산책로에는 강바람이 불어와 시원하지만 등에서는 식은땀이 흐른다. 아찔하기로 소문난 중국 장자제(張家界)의 잔도를 걷는 기분이다. 산책로 끝에 다다르면 만학천봉(해발 340m) 정상에 우뚝 서 있는 120m 높이의 거대한 철구조물이 나타난다. 충북 단양군이 2017년 적성면 애곡리 만학천봉 정상에 조성한 만천하스카이워크 전경. / 단양군 제공 단양의 새로운 명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전망대인 만천하스카이워크다. 이곳에서도 아찔함은 계속된다. 전망대 꼭대기에는 허공을 향해 뻗어 있는 3개의 스카이워크가 있다. 바닥은 통유리로 돼 있어 절벽이 그대로 내려다보인다. 떨어질까 조심조심 난간을 잡고 끝까지 걸어가면 단양 전경과 남한강의 비경이 펼쳐진다. 조선시대 문인과 화가들은 유달리 단양을 사랑했다. 석회암 지대에 기암괴석이 웅장하고, 남한강이 굽이쳐 흐르는 등 자연풍광이 빼어나서다. 470여년 전인 1548년(명종 3년) 단양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1501~1570)도 단양의 경치에 반했다. 그는 단양에서 경치가 빼어난 곳 중 이름이 없었던 곳에 채운봉(彩雲峯), 현학봉(玄鶴峯), 오로봉(五老峯)이라는 이름을 지어 단양팔경을 완성했다고 전해진다. 단양팔경 중 사인암(舍人岩)의 경치에 반한 단원 김홍도(1745~?)는 이곳을 그리기 위해 1년여를 고민하다 그림을 완성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단양에서 태어난 조선 개국공신인 정도전(1342~1398)도 도담삼봉의 풍경에 매료돼 자신의 호를 삼봉이라 지었다. 선인들은 자연풍경을 보기 위해 단양을 찾았지만 50여년 전 사람들은 성공의 꿈을 안고 단양으로 모여들었다. 석회암이 풍부한 단양은 1960년대 시멘트를 생산하는 공업도시로 변신했다. 정부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워 한창 경제 부흥에 열을 올리던 시기였다. 내로라하는 시멘트 회사 공장들이 잇따라 들어섰다. 일자리가 생겼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당시 단양의 인구유입은 전국 평균치보다 높은 수준이었다. 1960년대 말에는 인구가 9만3000여명에 달할 정도로 사람들이 북적였다. 전국 시멘트의 30%가 이곳에서 생산됐다. 선인들이 사랑했던 단양, 관광도시로 하지만 10만명을 넘을 것 같았던 인구는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1970년대 이촌향도(離村向都) 현상이 시작되면서부터다. 50년 동안 지역경제를 책임졌던 시멘트산업이 힘을 잃자 인구유출은 더욱 빨라졌다. 단양군은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해 기업을 유치해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단양군은 전체면적 780.1㎢ 중 80%가 임야인 산골도시다. 타 도시처럼 기업을 들여와 인구를 늘리고 싶어도 공장을 지을 땅이 없다. 지난 6월 말 현재 단양군의 인구는 3만44명. 1960년대 말보다 무려 60% 넘게 줄어들었다. 1990년 이후 단양군에서 폐교된 학교만 24곳이 넘는다.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인구의 28.39%(8529명)를 차지해 초고령화 사회로 접어든 지도 오래다. 인구유입이 없으니 자연스런 결과다. 단양군은 지역을 살리기 위해 관광지를 개발하기로 했다. 자연풍경을 둘러보고 끝나는 것이 아닌 직접 체험하고 느끼는 체류형 관광지를 만드는 것이었다. 2007년 온달 드라마 세트장을 활용, 고구려 명장 온달 장군과 평강공주의 전설을 테마로 한 온달관광지를 만들었다. 2012년 5월에는 민물고기 전시관인 다누리아쿠아리움이 들어섰다. 2850㎡ 규모의 전시관에 전세계 민물고기 220여종 2만2000여마리가 전시돼 있는 이곳은 민물 수족관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다. 6월 말 현재 누적방문객은 214만4950명이다. 개관 이후 7년 동안 무려 군 인구의 70배가 넘는 사람이 이곳을 찾은 셈이다. 충북 단양군 적성면 애곡리의 ‘수양개 빛터널’ 외부에 5만 송이의 LED 장미를 심어 조성한 ‘빛의 정원’ 전경. / 충북도 제공 두 곳을 시작으로 단양군은 본격적으로 체류형 관광지 조성에 나섰다. 이렇게 만들어진 만천하스카이워크, 단양강 잔도, 수양개 터널은 관광객을 끌어모으고 있다. 적성면 애곡리 만학천봉 위에 세워진 만천하스카이워크는 120m 높이의 전망대다. 이곳의 바닥은 구멍이 뚫린 스틸그레이팅으로 만들어졌다. 120m 아래를 그대로 볼 수 있어 짜릿함이 느껴진다. 특히 고강도 투명 강화유리 바닥에 삼지창 모양으로 허공을 향해 뻗어 있는 3개의 스카이워크는 이 전망대의 백미다. 하늘 위를 걷는 아찔한 기분을 느끼며 걷다보면 남한강의 절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에는 짚와이어와 알파인코스터도 있다. 짚와이어는 남한강 수면 120m 위에서 시속 50㎞로 980m를 로프를 타고 내려오며 주변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또 만학천봉에서 매표소까지 640m의 레일을 시속 40㎞의 속도로 내려오는 알파인코스터는 짜릿함이 느껴진다. 2017년 7월 만들어진 만천하스카이워크는 지난 한 해만 82만2185명의 관광객을 유치하며 단양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자리잡았다. 빼어난 풍광 활용한 체류형 관광상품 단양에서 만천하스카이워크로 이어지는 1.2㎞ 길이의 ‘단양강 잔도’는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의 필수코스다. 이 중 800m 구간은 남한강 200m 위 암벽에 매달려 있다. 남한강 풍경을 감상하며 걷다가 구멍이 송송 뚫린 아래를 내려다보면 등골이 서늘하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폐터널은 조명이 화려한 관광지로 변신했다. 적성면 애곡리에 있는 길이 200m, 폭 5m의 수양개 터널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져 철도로 사용되다 1942년 폐쇄된 터널이다. 단양군은 70여년 동안 방치된 이 터널에 영상·음향시설을 설치해 ‘수양개 빛터널’을 만들었다. 이곳에 들어가면 영상과 음향이 조명과 어우러진 몽환적인 빛축제가 열린다. 밤이 되면 터널 밖에 심어 놓은 5만 송이 LED 장미가 빛을 발하며 빛의 정원으로 변신한다. 젊은이들의 인증샷 명소로도 유명하다. 잇따라 들어선 관광시설은 지역경제를 살리는 효자가 됐다. 단양군의 연간 관광객은 2015년 792만명에 불과했지만, 2017년 1001만8000명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지난해에는 996만명을 기록했다. 올해 6월 말 현재 509만명이 단양을 다녀갔다. 단양군은 올해 1000만여명의 관광객이 지역을 찾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재길 단양군 만천하스카이워크 팀장은 “옛날에는 단양을 둘러보는 데 5시간 정도에 그쳤지만 관광시설이 들어선 이후 체류기간이 늘어나면서 숙박객이 늘어 지역경제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며 “이들 시설을 아우르는 관광상품도 개발되고 있어 앞으로도 많은 관광객이 찾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이곳&이야기
- [특집]‘김정은 환영’을 보는 남한의 시각(2018. 12. 17 14:55)
- 2018. 12. 17 14:55 정치
- ㆍ자본주의 논리에 입각한 ’북한 오리엔탈리즘’이란 편견 아닐까 “평화통일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언제까지 빨갱이로 매도되어야 하나. 감옥살이를 해야 했고, 고문도 당했고 심지어 죽임도 당했다. 이제는 잡혀가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열변을 토했다. 김수근 위인맞이환영단 단장(35)의 말이다. 12월 9일 오후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백두청산위원회 소속 회원들이 집회를 열고 ‘북한 김정은 위원장 서울 방문을 환영한다’는 취지로 결성된 백두칭송위원회 청산을 요구하고 있다./연합 12월 11일 <경향신문사> 인터뷰실에서 김 단장을 만났다. 궁금했다. 그들이 맞고자 하는 위인은 김정은 조선노동당 위원장이다. ‘위인’이라니. “위인이냐 아니냐 생각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북의 인민들이 문재인 대통령을 맞이했듯이 북의 지도자를 어떻게 하면 더 환대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김정은 위원장의 방남은 역사적 사건이다. 예전에는 없었던 일이다. DMZ의 지뢰를 철거하고 대치하던 남북 군인이 악수하는 모습에 감동받았다. 그런데 우리, 정확히 말해 보수언론이나 집단의 반응은 어땠나. 귤 박스에 돈 들었다고 찬물을 끼얹는다. 방남을 환영한다고 하면 보수언론이 빨갱이로 매도한다. 지난 73년 동안 민족 대결을 부추긴 집단에 언제까지 휘둘릴 것인가.” 김정은을 ‘위인’이라고 생각하는 까닭 그가 ‘위인’이라고 주장한 논리는 이랬다.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 5·1경기장 연설에서 언급했듯, 지금의 국면이 만들어진 것은 김 위원장의 결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평화 분위기를 이끌어냈기 때문에 위인으로 봤다. 단순히 문재인 대통령을 만났을 때 연장자로 우대하고 겸손한 모습을 보여서, 지도력이 있어서 이런 부분이 아니라 한반도 평화에 획기적인 전환을 이끌어 냈기 때문이다. 남북이 통일되는 과정에서 그의 결단이 시작이었다고 역사는 평가할 것이다.” 문화적 퍼포먼스나 키치(kitch)는 아니다. 김 단장은 “누군가의 지시나 제안 같은 것은 없었다”고 말한다. ‘방남은 엄청난 사건인데 언론에서도 환영한다는 말은 안 나오고 남북 정상이 만난 지도 두 달밖에 안 되었는데 청와대 벽에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만나는 것을 벽화로 그려놓았다고 욕먹는 사회 분위기가 된 것에 대해 강하게 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그런 이름을 지었다고 했다. “누군가는 촌스럽다고 이야기하는데 영어를 써야 세련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좋은 우리말을 두고.” 환영단은 알고 지내던 지인들 네 명과 함께 만들었다. ‘주사파냐’는 질문에 그는 “주체사상을 배운 적 없다”고 답했다. 김 단장은 1983년생이다. 재수를 한 03학번이다. 지방에 있는 한 대학에 다닐 때 학생운동을 하지는 않았다. 노무사 공부를 하러 서울에 올라왔다가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에 참여한 것이 ‘운동’과의 첫 인연이었다. 1000일 넘는 기륭전자 파업 출근 선전전에 동참했다. 지금의 아내를 만난 것도 세월호 천막 단식농성장이었다. 그가 남북문제에 눈을 뜬 것은 두 계기였다. 하나는 김진향 전 카이스트대 교수의 강연이었고, 다른 하나는 재일동포 학생들의 이야기를 담은 <우리학교>라는 다큐멘터리다. “고향이 강원도 인제 원통, 휴전선 근처다. 집 근처에서 사격훈련도 하고 논앞에 헬기가 내려앉기도 했다. 이런 나라에서 왜 살아야 하나 어렸을 때부터 싫었다. 서울에 오니 오히려 도시사람들은 그런 것에 무덤덤한 것 같았다. 미사일을 쏜다고 놀라지도 않았다. 그러다 김진향 교수 강의를 들었다. 인생의 사고를 송두리째 바꾼 경험이었다. 우리가 북한을 모른다는 것이 위험하다. 한마디로 북맹(北盲)의 삶을 살아왔다는 것이고, 그것은 재앙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학교>라는 다큐를 추천받아 봤는데 재일동포들이 일본 극우세력들과 싸워온 역사였다. 보면서 두 시간 내내 울었다. 나는 왜 이렇게 살아왔나. 충격과 혼돈이었다.” 환영단 결성사실이 보도되자 그의 휴대전화에는 수천 통의 문자메시지가 들어왔다. 대부분 욕설과 ‘북에 가서 살아라’와 같은 내용의 반복이다. 그리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관심병 환자가 아니냐는 비아냥도 있다. “굳이 관종이라고 한다면 통일관종이라고 하면 좋겠다. 나는 오히려 우리 국민이 너무 관심이 없다고 생각한다. 문재인 대통령의 방북도 전세계가 관심을 갖는 뉴스인데, 북한 지도자의 방남은 남북분단 후 처음 있을 일이다. 그렇게 위대한 일이 지금 시작되려하고 있는데 정작 당사자이고 주인공인 사람들은 말하면 이상한 사람이 되는 분위기다. 이제 진짜로 통일이 시작되는 것인데 조용하다. 과거 말하면 잡혀가는 시대가 있었으니 그래서인지 한국은 원래 질문도 안 하는 나라로 유명했다. 억압과 탄압의 시기는 지났는데도, 마치 목줄을 풀어놔도 그대로 있는 개처럼 과거의 관성에 묶여 있는 것은 아닌가. 나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들 모두가 통일관종으로 바뀌었으면 좋겠다.” 12월 11일 경향신문사에서 과 인터뷰하고 있는 김수근 위인맞이환영단 단장/우철훈 선임기자 “보수세력에게 빌미, 역공작 배후 의심” 왕년의 운동권은 이들의 활동을 어떻게 볼까. 소위 ‘NL운동권 출신 386’으로 정치권을 거쳐 현재는 변호사를 하고 있는 한 인사에게 물었다. “김수영 시인이 김일성 만세를 허용해야 한다는 시도 썼는데 이제 광화문광장에서 그 정도 주장을 했다고 호들갑 떨 시대는 지나지 않았나.” 이 인사가 내놓은 모범답안이다. “과민반응할 일은 아니다”라면서도 이어지는 이 인사의 ‘속내’는 사뭇 달랐다. “사실 그 사람들이 진정으로 조국통일을 바라는지는 의문이다. 지난 2년 문재인 정부가 최악이었던 한반도 상황을 간신히 뚫고 나온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쉽게 보수세력에 빌미를 주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사람들의 활동을 침소봉대해 당장 대한민국이 좌경화되었다고 주장하는 자유한국당이나, 그런 활동으로 존립 근거를 확인하는 사람들이나 모두 ‘적대적 공생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든다.” 이 인사의 주장은 SNS를 통해서도 쉽게 발견된다. 저런 노골적인 친북행태의 배후에는 국정원이나 ‘반통일세력’의 역공작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식의 주장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남북경협에 관여해왔던 인사는 “당장 체제선전에는 이용할지 모르겠지만 북쪽 사람들도 아주 잘했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북쪽 사람들도 바보가 아니다. 남쪽 사회 분위기가 어떤지 뻔히 아는데 저 사람들 뭐하는 짓이냐고 반응하지 않을까. 내가 알고 지내는 북한 사람들도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아주 잘하고 있다고 마냥 박수치지는 않을 것 같다. 엊그제 단장이라고 하는 사람(김수근씨) 인터뷰를 하는 것을 보니 아이돌 좋아하는 느낌이었다. 나도 그 사람 논리가 설득되지 않는데 그런 논리로 누구를 설득하겠나. ‘잘하잖아요, 멋지잖아요’ 이런 것이 아니라 정중하게 정상회담 상대자로 김정은 위원장을 거론한다면 또 모를까.”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개념이 있다. 팔레스타인 출신의 영문학자 에드워드 사이드가 만들어낸 개념이다. 간단히 말해 서양사람들이 바라보는 동양이라는 ‘편견’을 말한다. 서양문화 속에서 동양은 열등한 존재로 재현된다. 19세기와 20세기 서양의 식민지배는 그렇게 정당화된다. 열등하고 무능하고 게으른 존재이며, 두뇌나 신체에서 열등하기 때문에 그들은 지배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이드의 저작을 읽다보면 그리 단순한 개념이 아니다. 서구문화에서 동양은 때로는 찬양 대상이다. 서양은 갖지 못한 신비한 초월적 지식을 가지고 있는 대상이다. 간단히 말해 그들과 우리 서양은 다르다. 사이드의 주장에서 핵심은 재현(representation)이다. 동양은 스스로를 드러낼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해줘야 한다. 사이드에 따르면 동양이란 서양에 의해 체계적으로 구성된 담론적 구성물일 뿐이다. 오리엔탈리즘적 사고는 동양에 대한 서양의 편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타자로 분류될 수 있는 모든 집단과 개인에 대해 나타날 수 있는 편향이다. 2003년 타계한 에드워드 사이드가 만약 살아서 북한, 그리고 김정은 방남을 둘러싸고 한국에서 벌어진 ‘소동’을 봤다면 어떻게 설명할까. ‘북한’이라는 오리엔탈리즘 “일단 책 제목만 보고 시비를 건다. <주체의 나라, 북한>이라는 책 제목이 북 체제에 대한 옹호로 생각하는 것이다.” 지난 3월 동명의 책을 펴낸 강진웅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의 말이다. 북한이라는 나라의 국가와 사회에서 모순적 실체를 구조적으로 다룬 연구서다. 외부의 시선에서는 비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는 권력의 내적 합리성을 고찰하는 연구이지만 재단하는 논리는 간단하다. 북한 체제에 대한 옹호인지 아니면 비판인지. 찬반의 어느 한 입장을 떠난 ‘중립지대’의 여지는 한국 사회에서 쉽게 허용되지 않는다. ‘앨리스 죽이기’라는 영화가 있다. 2014년 재미교포 신은미씨에 대한 ‘종북몰이’와 국가보안법을 적용해 추방당하는 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이 영화를 찍은 김상규 감독은 한국과 외국의 관객 반응에서 나타난 차이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영화의 내용에 대해) 한국인 관객들은 관람 중 분노와 탄식을 하는 반면, 미국과 캐나다에서 열렸던 영화제를 찾아 관람한 외국인 관객들은 ‘낄낄 웃음’을 하며 마치 이 다큐를 블랙코미디 취급을 해서 몹시 당황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감독의 말을 인용한 영화의 주인공 신은미씨는 이렇게 덧붙였다. “한마디로 이들(외국 관객들)은 국가보안법의 ‘고무찬양’ 조항을 코미디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사실 지난 70여년의 분단을 돌이켜보면 전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체제다. 분단선은 한반도의 허리, 휴전선에만 그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정보통제는 ‘남조선’의 자본주의 문화 유입을 막기 위해 북한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북의 당 기관지 <로동신문>이나 ‘조선중앙방송’를 비롯한 북한 관련 정보에 대한 남한 일반 국민의 접근은 차단되어 있을 뿐 아니라 여전히 처벌대상이다. 지난 두 보수정권 시기에는 한때 남북 간 비상 핫라인마저 끊겨 완벽히 단절된 적도 있었다. “박근혜 정권 때 새누리당이 내걸었던 플래카드를 기억하는가. 국정교과서를 추진하면서 반대하는 학자·교사들을 두고 ‘김일성 주체사상을 우리 아이들이 배우고 있다’고 비난했다. 북한에 대한 혐오로 MB가 집권했고, 박근혜 정부가 등장했다. 남북관계가 비틀어진 사건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2008년 7월 박왕자씨 사건을 거론하는데, 실은 그해 2월 26일, 보수정권 시작 시기로 돌아가야 한다. 이상희 전 합참의장이 신임 국방부 장관으로 내정되었는데 인사청문회를 하면서 북한이 주적이라고 선언했다. 7월 사건은 결국 금강산 관광 중단의 빌미에 불과했다.” 김진향 교수의 말이다. 참여정부 인사수석실 비서관을 역임한 뒤 개성공단에 오랫동안 머무르며 수많은 북한사람들을 만나 토론한 경험이 있는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북한은 없다”고 말하곤 한다. “북한에 대해 모르는데 문제는 본인이 모르고 있다는 것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남과 북은 체제와 제도뿐 아니라 그것에 기반한 가치나 생활양식도 다르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것을 우리식 기준에서 재단하려고 한다. 우리가 보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저쪽에서는 특수한 것일 수 있다. 우리의 기준은 개인주의, 자본주의 경제논리에 기반한 인식이다. 통일부나 국정원, 북한 연구자는 다를까. 나는 그분들을 만난 자리에서도 당신들은 ‘북맹’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한다.” 지난 2015년 10월 ,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발표 이후 새누리당이 국회 앞에 내걸었던 현수막. 기존 역사교과서를 친북이라고 비난하고 있다./김정근 기자 우리가 아는 북한은 없다 김 교수는 탈북자로 북한 사회를 판단하려는 것의 한계를 예로 들었다. “정부기관이나 교수들이 무엇으로 북한 사회를 연구하는가. 대부분 문헌자료다. 기껏 만나는 사람들이 탈북자다. 북한 전체 인구가 2500만명이다. 3만명의 탈북자가 한국에 들어와 있다고 하니까 말하자면 그들은 전체의 0.001%도 안 된다. 굉장히 특수한 신분의 사람들이다. 나도 세종연구소에 있을 때 매일 한 명씩 만나 인터뷰했지만 그들의 경험을 일반화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답하는 내용도 분단체제가 원하는 답으로 최적화할 수밖에 없다. 분단체제의 가장 큰 문제는 합리적 토론이 안 된다는 것이다. 젠더나 민족, 심지어 동성애 문제도 토론이 되는데 북한을 주제로는 합리적 토론이 안 된다. 북을 비판한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만 토론에 낄 자격요건이 생긴다.” 김 교수에게 한국에 사는 우리가 북맹 또는 북한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물어봤다. “제일 좋은 방법은 실제 북한사람들을 만나 대화해보는 것이다.” 박한식 미국 조지아대 명예교수는 ‘남북을 갈라놓은 12가지 편견’을 다룬 책 <선을 넘어 생각한다>에서 “중요한 것은 동질성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이질성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질성을 인정하지 않는 극단의 태도가 우리의 주적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 강요와 당신은 누구 편인가라는 편가르기로 흘러간다는 것이다. “남한에 와서 보니 숙청하면 아오지 탄광에 보낸다는 표현을 사람들이 많이 하는 것을 보고 헛웃음이 났다.” 탈북자 홍강철씨의 말이다. 함북 출신으로 지난 2013년 탈북한 홍씨는 이렇게 말했다. “물론 간부들도 탄광이나 농장 등 어렵고 힘든 데를 보내는 이른바 혁명화 조치를 하는 것은 사실이다. 아오지 탄광은 고열탄을 생산하는 곳이다. 심지어 아오지에서 탈북한 사람도 있다. 일반 탄광일 뿐인데, 남에서는 한 번 추방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지옥쯤으로 아오지 탄광이라는 비유를 사용한다.”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제일 많이 느끼는 남북의 정서상 차이는 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우선 북한사람도 똑같이 말하고 풍습이 같은 한민족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탈북자라고 생각이 다 똑같은 것은 아니다. 내 주변에는 나같이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사상이 다르다고 해서 자기와 뜻이 다르면 간첩으로 매도하고 종북 딱지를 붙여 의심하고 인간적으로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 북한사람들은 안 그렇다. 누구나 잘못은 범할 수 있다. 과오가 있으면 조직이 달라붙어 그 사람을 비판하고 새사람을 만들어주려고 노력한다. 생활총화라는 것도 흔히 남한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인민재판식으로 몰아붙이는 것이 아니다. 서로 도와 잘못을 고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는 다르다. 사상이 다르다고 하면 적으로 돌린다. 이런 말을 하면 ‘저 사람 이상하다, 위장귀순한 간첩 아닌가’ 하는 반응이 돌아온다.” 곱씹어봐야 할 쓴소리다.
- 특집
- [법률 프리즘]남한·북한 저작물, 양쪽서 똑같이 보호받나(2018. 08. 27 14:49)
- 2018. 08. 27 14:49 사회
- 북한 저작권사무국은 남한의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에 북한 저작물의 이용을 원하는 남측 희망자에 대하여 북한 저작권사무국을 대리하여 포괄적 사전협상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영화 <강철비>의 한 장면. 영화 <미션 임파서블>의 무대로 등장하였을 만큼 상하이는 국제도시이다. 청나라가 마지막 호흡을 내뿜던 100여년 전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듯하다. 황푸강변 와이탄에 늘어선 100여년 전의 서양식 건물들에 그 당시 열강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황푸강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화려한 거리의 한 구석에는 허름한 집들이 모여 있는 골목이 있다. 이 골목 중 한 집에는 한글로 된 표지판이 붙어 있다. 상하이를 찾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 임시정부가 있었던 곳이다. 사무실로 사용하였던 방에서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임시정부에 젊음을 바쳤던 분들이 숙소로 사용했던 방이 나온다. 해마다 광복절이 되면 임시정부 등에 참여하며 젊음을 바쳤던 분들에 대한 기사들이 여럿 나온다. 이들 중에는 해방 공간의 정치 상황 탓에 남에서도 북에서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분들도 있고, 어느 한 체제를 선택하면서 다른 체제에서는 오랜 시간 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분들도 있다. 월북작가 해금 이후 몇 차례 분쟁 문화예술인들도 마찬가지다. 해방 공간에서, 또 이후 전쟁을 거치며 많은 작가들이 월북하기도 했고 납북되기도 했다. 우리 정부는 1954년 월북 작가들의 작품에 대하여 출판 및 판매 금지조치를 내렸고, 이 조치는 1988년에서야 해금되었다. 우리말의 보고라고 불리는 <임꺽정>도, 나타샤를 사랑했던 백석의 시도 이 기간 동안 금서였다. 금지조치가 풀리면서 월북 작가들의 책들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그러나 이들 책을 저자의 허락없이 출판하는 것이 법률상 문제가 없을까? 몇 차례의 분쟁을 거치면서 북한 저작물의 이용과 관련된 기준이 마련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월북작가 이기영이 쓴 소설 <두만강>에 대한 것이다. 이 작품은 19세기 말부터 1930년대까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여 두만강 일대에서 살던 주민들의 계급투쟁을 묘사한 것이다. 분쟁이 발생했던 당시 이기영은 이미 사망한 뒤였고, 남한에 유족이 있었다. 쟁점은 간단했다. 이기영의 작품에 대하여 우리 저작권법을 적용할 수 있는지가 문제였다. 이기영의 책을 출판한 쪽에서는 북한의 경우 저작권의 사적 소유를 인정하지 않고 설령 저작권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상속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이 당시엔 북한에 저작권법이 없었지만 북한도 2001년 저작권법을 제정하면서 저작권의 사적 소유를 인정하였고, 저작재산권에 대한 상속도 인정하였으므로 현재 이와 같은 분쟁이 일어난다면 아마도 주장이 달라질 것이다). 법원은 먼저 헌법 제3조 영토 조항을 들었다. 헌법 제3조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부속 도서이고, 북한도 한반도의 일부이므로 우리 저작권법의 효력이 북한에도 미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저작권법에 따라 그 유족에게 저작재산권이 상속된다고 하였다. 또 다른 사건에서 법원은 6·25전쟁 전후에 납북되거나 월북한 문인들의 작품을 발행하려면 그 저작재산권의 존속기간이 만료되지 않은 이상 해당 문인 또는 그 상속인들로부터 저작재산권을 양도받거나 이용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분쟁이 이어지자 통일부는 북한 저작물의 이용에 대한 원칙을 세워 나갔다. 중국 등 제3국의 중개업자를 통한 북한 저작물 이용계약은 인정하지 않고, 북한의 책임 있는 기관과 직접 체결한 계약이 아니면 국내 출판을 승인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북한 저작물 사용에 대한 신뢰성과 투명성을 높이기 위하여 북한 당국의 조치를 촉구했다. 남북한 문화교류 대비 제도 정비 필요 북한의 저작권사무국은 통일부의 요구에 따라 2005년께 남한의 민간단체인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을 통하여 북한에 있는 저작권자의 승인과 저작권사무국의 공증확인서가 없이 남측에서 이용하는 것은 저작권 침해라는 통지를 해왔다. 저작권사무국은 북한이 2004년 6월 저작권 사업을 총괄할 기구로 설립한 기관이다. 북한 저작권법에 따르면, 저작권사무국은 저작권자가 외국인이나 외국 법인에게 저작재산권을 양도하려 할 때 승인권, 저작권 사업에 대한 감독통제권을 가지고 있다. 이후 북한 저작권사무국은 남한의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에 북한 저작물의 이용을 원하는 남측 희망자에 대하여 북한 저작권사무국을 대리하여 포괄적 사전협상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은 현재 통일부로부터 승인받은 유일한 남북교류사업자이자 북한 저작권사무국으로부터 협상권을 부여받은 단체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현재는 국내 이용자가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과 북한 저작물의 이용에 대한 계약을 체결하고, 북한 저작권자의 동의서와 저작권사무국의 확인서를 받는 방식으로 절차가 마련되었다. 저작권료도 통일부의 승인을 받아 지급하는 구조이다. 북한 거주자의 저작물을 남한에서 이용하기 위한 절차는 어느 정도 정비가 된 셈이다. 실제로 2006년부터 2017년까지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을 통해 북한의 저작물 이용과 관련하여 체결된 계약이 860건이라고 한다. 그러나 북한에서 남한의 저작물을 이용하는 것에 대하여는 남북한 간 특별히 합의된 바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북한 저작권법은 국가 관리에 필요한 저작물을 복제·방송하거나 편집물 작성에 이용하는 것은 저작권자의 허가를 필요로 하지 않도록 규정하고 있다. 북한 당국이 국가 관리에 필요하다고 인정만 하면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므로 저작권자의 권리 보호에는 큰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영화 <강철비>의 도입부에는 북한 특수요원의 딸이 밥상에서 아빠에게 ‘지디(지드래곤)’라고 남조선 가수 이름 들어봤냐고 물었다가 남한 노래 절대 듣지 말라고 혼나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는 어떻건 남한 콘텐츠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위험해질 수 있는 것이 북한의 현 상황이라면, 남한 저작자의 권리 보호를 논하는 것이 시기상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북 간 문화 교류가 안정적인 토대 위에 이루어지려면 이러한 제도도 정비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 법률 프리즘
레이디경향(총 3 건 검색)
- 남한산성, 시공간을 초월한 역사를 걷다
- 2014. 07. 31 17:35 레저/여행
- 우리나라에서 11번째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오른 남한산성을 걸었다. 4백여 년 전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남한산성은 서울 근교의 사랑받는 휴식처로 여전히 시민들의 삶과 함께하고 있다. 잠들어 있던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시간 여행이 시작됐다. 경기도 광주시와 성남시, 하남시에 걸친 산악 지대, 해발 500m에 달하는 험준한 산세를 따라 지어진 남한산성은 누구에게도 함락되지 않는 천혜의 요새였다. 하지만 난공불락의 성도 패배의 역사를 피해 가진 못했다. 많은 이들에게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스스로 걸어 나가 청나라에 무릎을 꿇은 치욕의 장소로 기억되고 있다. 최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며 그 역사와 가치가 재조명되고 있는 남한산성을 찾았다. 인천 하늘고등학교의 이다지 역사 교사가 시간 여행의 길잡이가 돼주었다. 남한산성을 오르는 탐방로는 크게 5개 코스로 나뉜다. 짧게는 2.9km부터 길게는 7.7km까지, 가볍게 걸을 수 있는 산책로와 흠뻑 땀을 흘릴 수 있는 등산로를 찾아 매년 3백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남한산성에 오른다. 묵은 성돌 하나하나에도 민초들의 피와 땀을 품고 있는 산성은 오늘날에도 시민들의 삶과 함께하는 운명을 지켜내고 있는 셈이다. 5개 코스 중 1코스를 걸어보기로 했다. 시작점인 산성종로 로터리에서 북문으로 올라가 서문과 수어장대를 거쳐 남문으로 내려오는 코스로 가벼운 등산로와 산책로로 이어져 있어 아이들과 함께 걷기에도 좋은 길이다. 녹음이 우거진 여름에는 울창한 솔숲을 걸으며 삼림욕을 즐길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난공불락의 성 1636년 겨울, 청나라 10만 군대가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자 인조는 황급히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한다. 한양 근처에 안전한 피신처를 마련하려고 했던 인조가 옛 성의 흔적을 따라 다시 쌓아올린 요새다. 가까스로 성안의 행궁으로 몸을 피한 다음날 산성은 청나라 군대에 완전히 포위되고 성안의 왕과 군사, 백성들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리고 펼쳐진 47일간의 항전. 종국에는 적의 장수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땅에 머리를 짓이기며 항복한 ‘삼전도 굴욕’의 아픈 역사가 새겨지게 된다. “1626년 인조 4년에 완공된 남한산성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요충지로 여겨졌던 곳이에요. 안쪽은 평평하고 얕은 반면에 바깥쪽은 높고 험해서 외부에서 공격하기 쉽지 않고, 지형상 해가 길어 야습도 어려운 곳이죠. 사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은 치열하게 싸움을 벌인 곳이 아니라 버틴 곳이었어요. 성 밖에서 청나라 군대가 대포를 쏘아대긴 했지만 섣불리 성안으로 침입하거나 공격을 감행하지는 않았어요. 성안의 물자와 식량이 한정돼 있으니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항복하리라는 계산이었죠.” 1·3 남한산성은 남녀노소에게 사랑받는 곳이다. 주말에는 등산객들과 나들이객들로 활기가 가득하다. 2 이번 여행에 길잡이가 돼준 이다지 교사. EBS 수능강의와 KBS ‘역사저널 그날’ 등을 통해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4 소나무 가지가 드리워진 등산로. 결국 버티는 자와 기다리는 자의 싸움이었던 것이다. 시작점인 로터리에서 400m 정도를 오르면 나오는 북문은 이러한 가운데 병자호란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가 기록된 문이다. 당시 3백여 명의 군사가 성문을 열고 나가 기습 공격을 감행하다 적의 계략에 빠져 전멸하고야 만다. 가슴 아프게도 북문의 또 다른 이름은 ‘모두 승리한다’라는 뜻의 ‘전승문’이다. 47일간의 항전 치열했던 전투의 상흔을 뒤로하고 북문에서 1km 정도 쉬엄쉬엄 산을 오르면 서문 전망대의 탁 트인 전경이 펼쳐진다. 맑은 날이면 잠실벌과 하남시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으로 아름다운 야경 포인트로도 유명한 장소다. 잠시 한숨을 돌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가슴까지 뻥 뚫리는 느낌이다. 등산객들이 땀을 식히며 한 걸음 쉬어가는 서문은 인조가 항복을 하러 갈 때 지나간 문이다. 말을 타고 지날 수도 없는 작고 초라한 문. 난공불락의 성을 스스로 걸어 나가야 했던 왕의 심정을 상상하니 방금 전과는 또 다른 감정이 밀려온다. “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는 정통성을 갖고 정권을 잡은 왕이 아니었어요. 광해군이 명과 후금 사이에서 잡아놓은 국제 질서를 무너뜨리며 왕이 됐기 때문에 여러모로 위협을 느끼고 있었죠. 위기 상황을 고려해 남한산성을 증축하기는 했지만 전쟁에 대비하지는 못했어요. 임진왜란을 겪고 난 뒤에도 붕당 간의 정쟁은 끊이지 않았고 그러한 혼란 속에 다시 전쟁을 치르게 된 거죠.” 남한산성 안에서 피 말리는 항전을 치르는 동안에도 신료들은 청과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주전파와 화친을 도모해야 한다는 주화파가 대립각을 세웠다. 주화파의 대표 인물인 최명길이 쓴 항복 문서를 주전파인 김상헌이 울면서 찢고, 다시 최명길이 찢긴 문서를 모아 붙이는 비통한 장면이 연출됐다. 청과 화해하자는 쪽도, 싸우자는 쪽도, 모두 나라를 위해서라는 명분과 비전이 있었다. 하지만 식량이 바닥난 상태에서 강화가 함락됐다는 소식을 듣고 인조는 결국 항복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종묘와 사직을 둔 행궁까지 있었던 남한산성은 완벽한 도시의 기능을 했던 성이에요. 전쟁을 대비해 평상시에도 만반의 준비를 했다면 정말 난공불락의 성이 됐을지도 몰라요. 아무리 시스템을 잘 만들어놓았어도 위기 대응이 제대로 돼 있지 않으면 비극을 막을 수 없다는 뼈아픈 교훈을 말해주는 곳이라고 할 수 있어요.” 5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는 남문.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올 때 들어온 문이다. 6 산세를 따라 이어지는 성곽. 물 흐르듯 곡선이 유연하다. 7 인조가 직접 전투를 지휘했던 수어장대. 서쪽 제일 높은 장대라는 뜻으로, 원래 이름은 서장대였으나 영조 때 2층으로 증축되며 이름이 바뀌었다. 8 무망루. 병조호란의 치욕과 효종의 원통함을 잊지 말자는 의지가 담겨 있다. 9 행궁 옆길. 노을 지는 풍경이 평화롭다. 아픔의 역사, 지켜야 할 문화유산으로 서문을 지나 수어장대로 향하는 길은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해 최적의 요새를 만들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길이다. 우거진 소나무 사이로 굽이치는 성곽은 산의 등고선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서 남한산성이 가지는 가치는 기술적·문화적 측면이 강해요. 우선 일본과 중국, 우리나라의 축성술이 교류한 장소였고 유사시에 임시 수도의 역할을 해낸 산성 도시로서의 가치도 인정받았죠. 지형을 잘 이용했을 뿐 아니라 서양의 신무기에 대응할 수 있도록 지어졌고요. 임진왜란을 겪은 후 성을 지으며 한층 발달된 이론과 기술이 도입됐어요. 이전의 산성들과 비교해 훨씬 정교하고 튼튼하게 지어졌죠.” 남한산성에 도입된 기술은 지금도 산성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성벽 하단부에 무게중심을 두고 그 사이사이에도 특수 처리된 돌들을 끼워 넣어 화포를 방어할 수 있도록 했고, 자그마한 비밀 통로인 ‘암문‘과 몸을 숨겨 총이나 활을 쏠 수 있는 ‘여장’, 총과 포를 쏠 수 있도록 뚫어놓은 구멍인 ‘총안’과 ‘포루’를 만들어 단순한 방어 이상의 기능을 갖췄다. 어찌할 수 없는 역사의 한탄과 안타까움이 서린 곳이지만 민족의 생존을 지켜온 최후의 보루로서 소중하게 아껴야 할 유산임은 틀림없다. 인조가 직접 전투를 지휘했다는 수어장대 옆에는 ‘무망루’라는 편액이 보존돼 있다. 병자호란 때 겪은 시련과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돌아와 끝내 북벌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한 효종의 뜻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지은 것이다. 본래 수어장대 2층 누각에 있었으나 일반인들이 볼 수 있도록 1989년 수어장대 옆 보호각으로 옮겨왔다. “없을 무(無)자에 잊을 망(忘)자를 써서 ‘무망루’예요. ‘잊는 일이 아예 있을 수 없다’라는 뜻이죠. 당시 느꼈던 치욕과 슬픔이 얼마나 컸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부분이에요. 병자호란은 짧았지만 깊은 상처를 남긴 전쟁이에요. 조선이라는 나라에 끼친 정신적 트라우마도 매우 컸고요. 그러한 상흔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남한산성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줘요.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을 겪고도 또 전쟁이 났고, 이렇게 훌륭한 산성이 있었지만 막아내지 못하고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는 점에서 최근에 우리에게 일어난 크고 작은 사건들을 반추해볼 수 있어요. 역사는 반복돼요. 어제와 오늘을 제대로 보고 사회에 대한 비전과 철학을 가지셨으면 좋겠어요.” 수어장대를 나와 최종 목적지인 남문까지 이어지는 길을 내려오며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다. 시원한 솔향기를 맡으며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걷는 연인들, 아이와 함께 나들이 나온 가족들, 강아지들까지 폴짝폴짝 뛰어노는 평화로운 풍경 위로 생과 사가 뒤엉켰던 47일간이 오버랩됐다. 상처를 잊은 자들에게 아픔의 역사는 되풀이된다. 우리가 지금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고 사는 건 아닌지 ‘무망루’의 교훈을 되새겨 봐야 할 때다. Tip 남한산성 성곽길 탐방로 1코스(3.8km, 소요 시간 80분) 산성종로(로터리)-북문(0.4km)-서문(1.1km)-수어장대(0.6km)-영춘정(0.3km)-남문(0.7km)-산성종로(로터리 0.7km) ●자세한 탐방로 코스는 남한산성 문화사업단 홈페이지(www.nhss.ggcf.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임시정부 역할을 했던 남한산성 행궁도 잊지 말고 들러보자. 하절기(4~10월)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문을 연다.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안지영, 김천기>
- 고 황장엽의 숨겨진 남한 부인과 아들… 수년간 추적했다!
- 2010. 11. 01 17:16 화제
- ㆍ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진 가족 비화 공개 지난 10월 10일, 북한에서 망명한 최고위급 인사인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현재 그의 주검은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그의 사망 소식 후 새롭게 떠오른 이슈가 있다. 그동안 숨겨져 있던 남한의 부인과 아들이다. 50대 초반의 부인 엄씨는 현재 서울 강남에 6층짜리 빌딩을 소유하고 있는 등 상당한 재력가로, 아들은 캐나다를 거쳐 미국에서 유학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생전의 황씨와 엄씨는 세 사람이 가족 관계인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세 사람의 관계를 수년 동안 추적하면서 깨알같이 적은 취재수첩을 공개한다.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인 1997년, 망명 당시 황장엽씨는 베이징 주재 한국총영사관에서 북한에 남겨둔 아내 박승옥씨에게 유서를 작성했다. 이 유서에는 가족에게 씻지 못한 죄를 지은 심정과 함께 망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심경이 담겨 있었다. 당시 작성한 유서는 국내에서 발간된 회고록에 소개되기도 했다. 다음은 유서 내용의 일부다. “내가 당신까지 속인 채 이곳에 와보니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였고, 나와 당신의 생명이 얼마나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는가를 새삼스럽게 느꼈소. 나를 믿고 따르며 나에게 희망과 기대를 걸어온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모두 배반하였소. 나는 이것으로 살 자격이 없고 내 생애는 끝났다고 생각하오. 저 세상에서라도 다시 한번 만나보고 싶소. 당신이 이 편지를 받아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으나, 내가 언제 목숨을 끊을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유서 삼아 적어두는 것이오.” 황장엽씨와 엄씨, 지인의 소개로 처음 만나 비서로 인연 맺어 그로부터 4년이 흐른 2001년 가을, 평소 알고 지내던 취재원으로부터 놀라운 얘기를 들었다. 황씨에게 국내에 숨겨진 부인과 아들이 있다는 소식을 믿을 만한 사람으로부터 들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황당한 소리로 치부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 황씨는 일흔을 훨씬 넘긴 고령인데다 망명한 지 오래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취재원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확인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황당한 소리로만 들리던 일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때 취재원이 말한 내용의 핵심은 이렇다. “두 사람이 언제 어떻게 만났는지 정확하지 않다. 다만 황씨가 망명한 지 얼마 안 돼 누군가의 소개를 통해 알게 된 것은 분명하다. 당시 황씨는 국가정보원 보호 아래 있었기 때문에 정보기관이 개입하지 않고는 두 사람의 만남 자체가 성사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후 두 사람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고, 자연스럽게 사실혼 관계를 맺게 되었다. 물론 황씨의 여인도 국가정보원이 따로 관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두 사람의 관계는 국가정보원에서도 매우 민감한 문제였을 것이다. 북한의 암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데다 언론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기사화할 수 있기 때문에 외부에 노출되는 것을 꺼릴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 여인의 주변을 통해 두 사람의 관계가 조금씩 드러났을 확률이 높다고 들었다.” 서울 논현동에 자리한 엄씨 소유의 6층 빌딩.두 사람 사이는 정보기관 관계자의 증언으로도 확인이 가능했다. 처음 언론 노출을 극도로 꺼렸던 관계자는 거듭된 확인 요청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관계자는 신분을 노출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밖으로 흘러나가지 않았을 뿐이지 국가정보원 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외부 활동에 강한 의욕을 보였던 황씨와 다소 불협화음을 일으켰던 담당자들은 황씨의 사생활 문제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더욱이 담당자들 입장에서는 황씨의 신변 안전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그 여인과 아들로 인해 황씨의 동선이 외부에 알려지면 큰일 날 일이었다. 국가정보원에서는 모자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황씨가 그 여인을 만나게 된 과정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단편적인 소문을 종합해본 결과, 그 여인이 국가정보원에 파견 나온 검사의 소개로 황씨의 비서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 여인을 소개받은 황씨가 직접 비서로 채용했다는 것이다. 사실 정보기관의 전례로 봐서 황씨 같은 거물급 망명 인사의 비서로 외부 사람을 들인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업무적인 비서라기보다는 생활적인 일을 도와주는 여자라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유산 상속 문제는 ‘교통정리’가 된 것으로 예상 다시 9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2010년 10월 10일 언론은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사망 소식을 일제히 보도했다. 황씨가 오전 9시 30분경 서울 강남구 논현동 안가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경찰은 10월 19일 공식 브리핑을 통해 “고인은 발견 하루 전 반신욕 중 심장 질환에 의해 자구력을 상실하며 사망에 이른 것으로 판단된다”고 전했다. 언론은 이후 그의 유산 상속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황씨가 망명할 때 적지 않은 돈을 갖고 들어온 것은 물론 정부와 각계의 후원금, 각종 강연료, 출판물 인세 등 상당한 재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인들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황씨의 수양딸과 함께 사망 직후 언론 보도로 그 존재가 분명해진 사실혼 관계의 부인과 아들에게로 모아졌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고인의 유가족으로는 ‘황장엽민주주의건설위원회’ 대표를 맡고 있는 김숙향씨가 유일하지만, 사실혼 관계의 부인이 있어 유산 상속 분쟁의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어 부인을 잘 아는 지인의 말을 빌려 “황씨는 사후 자신의 재산을 일단 수양딸에게 넘긴 뒤 부인과 분배토록 약정서 같은 것을 작성한 것으로 알고 있다”는 내용도 덧붙여졌다. 그러나 취재 결과, 언론의 보도와는 다른 사실이 발견됐다. 황씨의 부인 엄씨는 이미 상당한 재력가인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엄씨가 황씨를 만나기 전까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는 주변의 전언을 감안하면, 황씨의 적지 않은 재산이 이미 부인에게 ‘양도’되었을 가능성도 높았다. 또 87세의 고령인 황씨가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상속 문제를 이미 ‘교통정리’ 해놓았을 것이라는 추론도 배제할 수 없었다. 실제 최근에 다시 연락이 닿은 앞서 언급한 정보기관 관계자는 이 같은 가능성과 추론에 힘을 실어주었다. 고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는 지난 10월 14일 대전 현충원 사회공헌자 묘역에 안장됐다. “황씨는 망명 당시 북한에 두고 온 부인과 자식들을 생각하며 심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런 황씨가 아무리 자신의 호적에 올라 있지 않은 부인과 아들이라고 하더라도 아무런 대책을 세워놓지 않았을까? 내가 알기론 수십억원의 재산이 부인 몫으로 남겨졌다. 단적인 증거로 언론에 보도된 것처럼 황씨 안가 근처에 있는 6층짜리 빌딩이 부인 명의로 되어 있다. 특히 유산을 놓고 분쟁의 소지가 있다고 했는데,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판단된다. 만약 법적인 분쟁이 일어나면, 어떤 식으로든 부인의 신분이 드러나게 된다. 국가정보원이든 부인이든 이런 상황을 원치 않을 것이다. 유산 정리는 마무리되었고, 나머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최대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게 끝낼 것으로 예상된다.” 친구들 앞에서 ‘황장엽 아들 낳았다’고 말해 최근 황씨와 그의 부인 엄씨에 관한 보도가 이어진 직후 필자는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취재수첩을 들춰보았다. 취재수첩에는 황씨 부인과 3년여 동안 ‘숨바꼭질’ 취재를 벌였던 과정이 깨알처럼 기록돼 있었다. 거기에도 자신의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부인의 강한 의지가 그대로 묻어나 있었다. 다음은 3년여 동안 부인의 서울 양재동 소재 아파트와 그녀의 소유로 돼 있는 논현동 빌딩 등에서 수차례에 걸쳐 대화를 나누거나 전화 통화를 한 내용을 일문일답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 황장엽씨에 대해 알고 있나? “그 사람이 누구인지 난 모른다. 왜 나한테 그 사람에 대해 묻나?” - 북한의 전 노동당 비서로 우리나라에 망명한 최고위급 인사다. 언론을 통해 많이 알려지지 않았나. “글쎄, 난 모른다. 신문이나 방송을 잘 안 봐서 그 사람에 관해 알지 못한다.” - 황씨와 관련해 취재를 하고 있다. “그 사람 일을 왜 나한테 물어보나? 궁금한 게 있으면 그 사람에게 직접 물어보면 될 거 아닌가. 왜 자꾸 연락하고 사람을 괴롭히나?” - 그 사람을 모른다고 하면서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계속 전화하고 찾아오니까 이러는 거 아닌가. 이건 사생활 침해다. 더 이상 날 찾지 마라.” - 황씨 취재를 하다가 당신이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확인은 무슨 확인을 하나. 난 그 사람을 알지도 못하고 만난 적도 없다. 그러니까 더 이상 묻지 마라.” - 당신이 황씨의 아들을 낳았다는 소문을 들었다. “누군지 모르고, 만난 적도 없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마라. 계속 이러면 나도 생각이 있다.” 부인은 황씨와 관련된 말만 나오면 극도의 거부 반응을 보였다.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예민하게 행동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정황상 소문이 진실일 수도 있다는 방향으로 흘렀다. 무엇보다 엄씨가 황씨의 비서가 된 과정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엄씨의 주변과 정보기관 관계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광범위한 취재에 돌입했다. 취재 과정에서 엄씨와 몇 년 동안 수차례 만났다는 지인과 연락이 닿았다. 그 지인의 증언은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처음에는 친구 소개로 만나 여러 사람들과 함께 어울렸다. 그 친구는 조용한 편이었지만 당찬 구석도 있었다. 과거 무슨 미인 대회에 출전했다고 들었다.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 꾸미고 다니지는 못했지만 눈에 띄는 미인형이었다. 그런데 취직을 했다며 사라지더니 3년쯤 지나 친구들 앞에 나타나 ‘아이를 낳았다’고 했다. 처녀가 아이를 낳은 것도 놀라웠지만, 그 아이 아빠가 ‘황장엽’이라는 게 충격적이었다. 친구들이 믿으려 하지 않자, 그녀가 자세히 설명했다. 황장엽의 비서로 일하다가 임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권력기관의 아는 사람을 통해 비서로 들어갔다는 말을 얼핏 들었다. 예전과는 달리 여유가 있고, 귀티까지 흘러 모두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이후 그녀는 다시 소식이 끊겼고, 강남에 살고 있다는 소문만 들을 수 있었다.” 한 빌딩에서 부인은 음식점을, 황씨는 연구소를 운영 엄씨의 존재를 처음 확인한 것은 2001년 가을. 지인의 증언대로 서울 양재동의 한 아파트에서 친정어머니,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녀는 1998년 가을에 이 아파트를 매입해 이사를 온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녀가 이곳으로 이사 온 시기는 매우 중요하다. 아들 출산과 산후조리를 위해 비교적 한적한 곳으로 거처를 옮긴 것으로 보인다. 그녀에게 수차례에 걸쳐 정식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항상 똑같았다. 자신이 ‘엄OO’인 것은 인정했지만 황씨와의 관련설은 극구 부인했다. 그러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갑자기 종적을 감췄다. 어디에서도 그녀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엄씨가 다시 취재수첩에 들어온 것은 지난 2003년, 황씨가 강남에 개인 연구소를 차렸다는 언론보도를 통해서였다. 황씨가 운영하는 연구소라면, 분명 그녀의 동선과도 겹칠 것이라고 판단했다. 수소문 끝에 찾은 곳은 논현동의 한 빌딩. 황씨가 사망 이후 언론에서 언급된 엄씨 소유라는 논현동 그 빌딩이었다. 단지 다른 점은 언론에서 보도한 것과 달리 5층이 아닌 6층이라는 점. 대지 90여 평에 연건평 270여 평의 이 빌딩은 지하 1층 지상 6층의 규모였다. 2003년 7월에 세워진 이 빌딩의 소유주는 엄씨로 돼 있었다. 그녀는 2001년에 대지를 매입했는데, 같은 시기 황씨가 대지에 대해 가등기를 한 것으로 되어 있었고 그러다 빌딩이 세워진 이후 소유권이 넘어갔다. 엄씨는 빌딩을 소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업가로도 활동하고 있었다. 이 빌딩의 1층에서 프랜차이즈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2004년 10월에는 자본금 5억원의 회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특히 관심을 끈 것은 빌딩 6층에 북한 관련 연구소가 들어와 있다는 빌딩 관계자의 설명이었다. 즉 1층에선 엄씨가 음식점을, 6층에선 황씨가 개인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러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엄씨는 아들을 낳기 전까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그런데 불과 몇 년 사이에 수억원대의 아파트와 수십억원대의 빌딩을 어떻게 갖게 되었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황장엽이란 힌트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풀기 쉽지 않는 난제로 남아 있다. 이후 그녀와 몇 번 전화 통화를 하고 빌딩 앞에서 부딪혔지만 해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북한과 남한 모두에서 ‘비극적인 가족사’ 북한에서 ‘주체사상’을 정립하며 권력을 손에 쥐었던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 하지만 남한에서는 활동에 제약을 받으며 망명객 신세를 면치 못했다. 더욱이 황씨는 북한에 두고 온 가족으로 인해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런데 남한에 있는 부인과 아들 역시 자신의 가족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숨겨진 가족’으로 언론에 의해 알려졌을 뿐이다. 한동안 황씨와 엄씨의 동선이 겹쳤던 논현동 빌딩을 다시 찾았다. 음식점은 예전과 다름없이 손님을 맞이하느라 분주했고, 빌딩은 외관상 변한 것이 거의 없었다. 빌딩 소유주는 여전히 엄씨 앞으로 되어 있지만, 그곳에서 그녀와 아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대신 엄씨의 가족이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평소 황씨는 친모의 성을 딴 ‘늦둥이’ 아들 엄군을 무척 귀여워했다고 한다. 엄군은 어렸을 때 연고가 있는 캐나다로 유학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현지 초등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이라고 한다. 미국과 우리나라를 오가며 가족을 돌봤던 엄씨, 황장엽씨의 사망 이후 그녀의 이민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황장엽은 누구?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는 학자 출신의 북한 정치인으로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한 것은 1972년 제5기 최고인민회의 의장 겸 상설회의 의장이 되면서부터다. 그때부터 그는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해 이른바 ‘김일성주의’로 발전시켰다. 또 김일성 우상화를 제3세계에 전파하기 위해 여러 나라에 주체사상 연구소를 설립하고 연구활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최고인민회의 의장 재직 기간 중 20여 차례에 걸쳐 30여 개국을 순방해 외국에도 잘 알려졌다. 그는 북한에서 부인 박승옥씨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다. 황씨는 1997년 베이징 주재 한국총영사관을 찾아 망명을 신청했다. 그는 남북간의 극한 대립을 해소하는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망명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1997년 4월 필리핀 특별기편으로 국내에 입국했다. 북한에서 망명한 최고위급 인사였다. 황씨는 망명 후 1997년 12월부터 국정원이 운영하는 통일정책연구소의 이사장을 맡았고, 북한문제연구소를 운영하기도 했다. 또 북한의 인권 상황을 폭로한 책과 회고록을 출간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탈북자단체 관계자들과 ‘북한민주화동맹’ 활성화 방안을 연구하는 등 적극적으로 대외활동을 펼쳤다. ‘황장엽씨 안가 근처에 있는 6층짜리 빌딩이 부인 명의로 되어 있다. 유산 분쟁 소지는 없을 듯. 유산 상속 문제는 마무리되었고, 나머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최대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게 끝낼 것으로 보인다’ <■기획 / 장회정 기자 ■글 / 정문홍(자유기고가) ■사진 / 이성원, 경향신문 포토뱅크>
- 신작 장편소설 「남한산성」 발표한 작가 김훈
- 2007. 06. 22 화제
- 27년간 문학담당 기자로 일한 김훈은 두 번째 소설 「칼의 노래」로 한국 문단 최고의 동인문학상을 수상, 그제서야 비로소 ‘문학 담당 기자’라는 꼬리표를 뗄 수 있었다. 신춘문예를 거치지 않고 소설적 역량만으로 높이 평가받는 작가 김훈. 새로운 장편소설 「남한산성」이 벌써 베스트셀러에 오른 그는 문학의 예술성을 강조하기보다 밥벌이의 고단함을 강조했다. 글쓰기는 노동이고, 예술이기 이전에 생계고 생활이며, 자신은 돈을 버는 사람이라는 것. “현세적인 가치 속에서 건강한 시민으로 살아가려 하며 예술은 물적 토대 위에서 가능하다”는 그는 “배를 주리면서까지 문학을 할 생각은 없다”고 했다. 아직도 몽당연필을 꾹꾹 눌러 원고지에 글을 쓰는 김훈의 ‘소설을 쓰는 고통과 희열’을 들었다. 김훈은 종로에 나올 일이 있다고 했다. 취재를 핑계 삼아 그의 집필실을 둘러보려던 욕심은 잠시 접어두어야 했다. 일산에 살고 있는 그가 종로까지 걸음하는 건 종로 영풍문고에서 열릴 「남한산성」(학고재) 팬 사인회 때문. 5월 둘째 주 토요일, 팬 사인회를 마치고 난 김훈과 카페 한구석에 마주 앉았다. 차를 많이 마셨다는 그는 “그냥 물이나 한 잔 달라”고 했다. 목이 말랐던 모양이다.‘뭐라고 써야 하나’ 진땀 뺐던 7개월 김훈(59)은 불친절한 작가다. 쌍방향 소통의 시대인 요즘 그는 독자와 대화하길 꺼린다. 그가 컴퓨터를 전혀 안 하기 때문에 독자들은 그에게 말을 걸기가 어렵다. 편지를 써서 부치거나 직접 집으로 찾아가야 하는데, 그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 않은가. 독자들이 작가 김훈에게 가는 통로는 막혀 있는 셈이다. 김훈이 독자들을 만나는 자리라곤 팬 사인회가 유일하다. 그렇다고 팬 사인회를 하면서 독자들에게 살갑게 말을 붙이는 것도 아니다. 책에 사인 해주는 게 고작이다. 그는 “독자들과 이야기 나눠야 할 특별한 이유를 못 느낀다”면서 “나는 소설로 모든 말을 한다”고 강조했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이 연일 화제다. 출간한 지 2주일 만에 5만 부가 나갔을 정도. 기분을 묻자 그는 “무척 어렵고 고통스러운 글인데, 독자들이 그걸 따라오고 있다는 게 다행스럽다”고 답했다. 김훈이 「남한산성」을 쓰리라 계획한 건 3년 전부터다. 집필은 지난해 10월부터 7개월 동안 이어졌다. 소설을 쓰는 동안에는 철저히 혼자가 된다. 인기척이 있으면 글을 못 쓰기 때문이다. 집 근처에 작업실을 얻어 ‘중’처럼 혼자서 지냈다. 불현듯 ‘소설 쓰기는 밥 벌어 먹는 노동치곤 무자비한 노동’이라던 그의 말이 생각났다. 여전히 그런 생각을 하는지 묻자 이번 글쓰기 역시 매우 힘들었음을 고백했다. “매일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면 눈앞이 캄캄했어요. ‘오늘은 뭐라고 써야 하나’라는 생각에 진땀이 날 정도였죠. 글 쓰는 게 무척 어려웠고, 더디게 진행됐어요.” 글쓰기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 소설 쓰기를 중단하려 했던 적도 있다. 열흘 혹은 한 달 넘게 글쓰기를 내팽개친 적도 많다. 하지만 그때마다 마음을 다잡아 고비를 넘겼다. “장편소설을 쓴다는 것은 무거운 짐을 지고 혼자서 먼 길을 가는 거라고 할 수 있어요. 소설을 쓰는 동안은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 없으니까요. 사람들은 나를 매인 데가 없기 때문에 무척 자유로울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 반대예요. 강철 같은 규율로 스스로를 옭아매지 않으면 나는 망하거든요. 나를 규율할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스스로 학대하면서 글을 쓸 수밖에 없죠. 무조건 나 자신을 채찍질해서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거예요. 그렇게 겨우겨우 만들어냈죠.”‘지독한 기계치’의 이유 있는 항변 김훈은 기계치다. 그는 기계를 못 만진다. 기계 다룰 줄을 아예 모르는 건 아닌데, 그가 만지면 신기하게도 고장이 잘 난다. 그런 일이 자주 반복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기계를 피했을 게 분명해 보인다. 그는 “만지면 고장나고 고장나면 아내한테 야단맞기 때문에 기계는 안 만지는 게 좋다”고 말했다. 제법 그럴싸한(?) 논리다. 사진기자의 카메라를 흘끔 쳐다본 그는 “카메라는 딱 질색”이라고 말했다. 기능이 많은 라디오도 꺼린다. 라디오의 버튼은 껐다 켰다 하는 것만 있어야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텔레비전이 보고 싶으면 아들을 부른다. 물론 텔레비전을 끄는 것도 아들의 몫이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뭔가 눌러야 하는 게 많은’ 비디오는 당연히 못 본다. 그래도 딸이 선물해준 휴대폰은 사용할 줄 안다. 전화 받고 거는 정도에 국한되지만. “정말 다행”이라고 했더니 “그것도 못하면 못 살잖아”라며 웃었다. “나는 기계가 싫어요. 내 본질에 안 맞는 것 같기 때문이죠. 영화 보는 것도 싫어해서 영화 안 본 지도 20년이 넘었어요. 컴컴하고 갑갑하고 시끄럽고 냄새나는 영화관에 들어가는 게 싫거든요.” 김훈이 컴퓨터를 못한다는 사실과 아직도 원고지에 몽당연필과 지우개를 사용해 글을 쓴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 “기자 생활을 할 때 컴퓨터를 한번 사용하려고 했는데 실패했어요. 키보드를 치는 느낌이 싫더라고요. ‘키보드로는 글을 쓸 수 없겠구나’라고 생각했죠. 그 뒤로 다시는 컴퓨터를 만지지 않아요. 원고지에 써서 갖고 가니까 출판사에서 나를 싫어해요. 특이한 늙은이 때문에 자기들이 고생하니까요. 원고를 팩스로 보내도 되는데, 그것도 믿을 수가 없어요. 팩스로 보내면 이게 간 건지, 안 간 건지…. 꼭 딴 데로 간 거 같은 생각이 들어요(웃음).” 소설의 자료 역시 직접 돌아다니며 구한다. 도서관이나 전문가들, 자료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서 자료를 수집해온다. “인터넷으로 하면 참 좋을 텐데…”라는 말에 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에게는 컴퓨터가 아니 모든 기계가 낯설기만 한 것을. 김훈은 연필로 원고지를 꾹꾹 눌러 쓸 때의 느낌을 좋아한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그 힘 말이다. 자전거 타기를 좋아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자전거는 엔진이 없어서 좋아요. 자전거를 탈 때는 내 몸이, 내 심장이 엔진이에요. 내 몸을 써서 앞으로 나아간다는 게 좋아요. 그게 바로 ‘삶의 육체성’이죠.” 스스로를 ‘자전거 레이서’라고 표현하는 김훈. 그는 오래전 일산으로 이사를 가면서 자전거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재미 삼아 타던 자전거에 이제는 집착하는 정도가 됐다. 10만~20만원이 아닌 몇 백 만원짜리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고 알려진 그.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으나 그는 ‘노코멘트’로 일관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오프 더 레코드’였다. 입이 근질근질하지만 정확한 가격을 공개하면 ‘큰일(?)’이 날 것 같아 꾹 참기로 한다. 47일 동안 남한산성 안에서 일어난 이야기 「남한산성」은 30대 중반 이후의 남성들에게 유독 인기가 높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김훈은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여성들보다 남성들이 이 땅의 슬픔과 약육강식의 고통을 더 잘 알기 때문에 책의 내용에 공감하는 게 빨랐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남한산성」은 역사소설이다. 인조(仁祖)가 남한산성으로 파천한 47일 간의 역사를 담았다. 아직 「남한산성」을 읽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책 소개를 부탁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성에 들어가니까 조선 사대부들이 임금을 따라 성 안으로 들어가요. 고립무원의 상태가 된 거죠. 그 안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어요. 싸우자는 사람이 있고, 투항하자는 사람이 있고, 어제는 싸우자 그랬다가 오늘은 투항하자는 사람이 있고, 아무 말도 없는 사람이 있고, 성 밖으로 도망가야 산다고 도망가는 사람이 있고, 성 안으로 들어와야 산다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고…. 그게 인간의 정확한 모습이에요. 그들의 고통과 절망과 희망과 그 대책 없음. 그걸 쓴 거예요.” 소설 속의 주된 갈등은 성 밖이 아니라 의외로 성 안에 있다. 주전파(主戰派) 김상헌과 주화파(主和派) 최명길 사이에서 엇갈린 말은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하다. 김훈은 이 둘의 말을 비롯한 수많은 말을 옛 문헌에서 끌어다 썼다. 거침없는 칸의 글이나 청병 통역 정명수가 인조에게 뱉은 모진 말까지, 모두 출처가 있는 것들이었다. 정사(正史)가 아니면 야사에서라도 찾아 썼다고 전해진다. 역사 속의 기록만 옮겨다놓은 건 아니다. 「남한산성」에는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부분도 꽤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송파나루의 늙은 사공이다. 청병이 곧 들이닥친다는데도 사공은 강을 떠나지 않는다. 김상헌이 같이 성 안으로 들어가자고 권유해도 사공은 고개를 젓는다. 연유는 간단했다. ‘청병이 오면 얼음 위로 길을 잡아 강을 건네주고 곡식이라도 얻어볼까 해서…’이다. 김상헌이 사공의 목을 베는 장면을 김훈은 이렇게 적었다. ‘쓰러질 때 사공의 몸은 가볍고 온순했다. 사공은 풀이 시들듯 천천히 쓰러졌다.’죽기 전에 소설 서너 편 더 쓰고 싶어 작가 김훈에게 글쓰기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는 “글쓰기는 밥을 벌어먹고 사는 노동”이라고 답했다. “우선, 글쓰기는 노동이에요. 예술이기 이전에 나의 노동이고, 생계고, 생활이에요. 나는 돈을 버는 사람이에요. 나는 현세적인 가치를 부정, 경멸하는 사람들을 경멸해요. 나는 현세적인 가치 속에서 건강한 시민으로 살아가려고 하죠. 예술은 물적 토대 위에서 가능해요. 배를 주리면서까지 문학을 할 생각은 없어요. 또 하나, 글쓰기는 나를 표현하는 수단이에요. 누구나 자신을 표현하고픈 욕구가 있잖아요. 나는 글을 통해 나를 표현하죠.” 작가 김훈의 어린 시절 꿈은 ‘작가’가 아니었다. 그의 꿈은 밥을 먹는 것이었다. 요즘 젊은이들이 들으면 믿지 못하겠지만 ‘밥을 먹고, 밥을 먹는 나라를 만드는 게’ 그의 유일한 꿈이었다. 돈이 없어서 대학을 중퇴한 그이기에 ‘글쓰기가 생계’라는 말은 쉬 잊혀지지 않는다. 글을 쓰지 않을 때 그의 생활이 궁금했다. 김훈은 “글을 쓰지 않을 땐 논다”며 웃었다. 주로 강가나 들에 나가서 혼자 논다. 바람을 쐬며 자전거를 타고, 뜀박질을 하고, 등산을 한다. 몸을 써서 놀지 않으면 재미가 없다. 부인이 심심해하지 않느냐 묻자 “아내도 자기 나름 돌아다니느라 바쁘다”고 말했다. 그는 애주가다. 많이는 아니지만 자주 마신다. 젊었을 때는 위스키에 심취했고, 요즘은 사케를 좋아한다. “술 많이 먹는 사람치고 악인 없다”는 말을 했더니 그는 “많이 마시는 거 자체가 악”이라며 웃었다. 올해로 이순(耳順)인 작가 김훈. 그는 앞으로 딱 서너 편의 소설만 더 쓰고 죽고 싶다고 했다. 이제는 과거 이야기가 아닌 당대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물론 그 이야기를 쓸 수 있을지 없을지는 좀 더 지나봐야 알 수 있겠지만. “내가 올해 예순이거든요. 일흔이 넘으면 글을 쓸 수 없을 거 아녜요. 사람이 물리적 한계가 있으니까 말이에요. 앞으로 서너 편 정도 쓰게 되겠죠. 이야기하다 보니 갑자기 여생을 아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나와 돌아다니지 말고, 술 먹지 말고…(웃음).” ‘인생의 대선배’인 김훈에게 요즘 사람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말을 부탁했다. 그는 “어려움과 혼란을 수용하는 능력을 기르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올바른 사람이 되라”고 당부했다. 돈을 벌었으면 세금을 내고, 사소한 것이라도 법은 꼭 지켜야 한다는 것. 그는 “쓰레기를 주워 휴지통에 버릴 줄 알고 구세군 자선냄비에 만원짜리 한 장 넣을 수 있다면, 그 정도면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글 / 김민정 기자 ■사진 / 박형주 ■장소 협찬 / BIRDS N BUGS(02-777-8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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